소설리스트

3권 14. 파랑새를 찾아서 (14/17)

목차

3권

14. 파랑새를 찾아서

* * *

희수와 칼릭스의 결혼은 어느덧 5년 차에 접어들었다.

희수는 시모와 시누이들의 도움으로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입지를 만들었고, 그들의 친분이 있는 많은 화가들과 교류했다. 사진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때쯤 클로비스 대저택에는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아가.”

“네, 어머니.”

계모는 심각한 얼굴로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평소와 달리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네가 돌보는 개 말이다.”

“저희 개요?”

“그래, 그 개.”

좀처럼 훈계를 하지 않는 그녀가 뭔가 크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희수는 내심 긴장했다. 이제 고부 사이는 빈번이 둘이서만 티타임을 가질 만큼 긴밀해졌다.

“개가 살이 너무 찐 거 아니니?”

아…… 이런. 희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도 한숨이 나왔다.

그도 그럴게, 그 개는 공식적으로는 아직 미혼이었다.

“우스운 얘기들이 들리던데, 설마.”

“네, 맞아요.”

희수는 담담히 사실을 인정했다. 자꾸만 대저택에 수캐들이 찾아왔다. 정원에서 개들이 교미하는 장면이 공공연히 목격되어 이 사실이 계모의 귀에까지 들어간 게 분명했다.

“저희 개가 임신한 것 같아요.”

“이런.”

계모는 이마를 싸맸다. 남들에게 알려지면 이게 웬 개망신이람. 왜 그런 들개를 이 대저택에 데리고 들어왔느냐고 다그치고 싶었지만 계모는 그러지 않았다.

“부견은 모르니?”

“네, 저도 잡으면 혼을 내 주고 싶은데 대체 어떤 개인지 모르겠어요. 한두 마리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어머니. 창피하시죠?”

“……아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발정난 수캐들이 문제겠지.”

계모는 한 번도 희수에게 잔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눈에 띄지 않게 안으로 잘 옮겨 두렴. 오늘은 손님들이 오실 테니까.”

“네.”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며 주제를 환기시켰다. 우아하면서도 가벼운 손짓이었다.

“카일리에게 청혼서가 왔단다.”

“정말요? 어느 집안인가요? 카일리 아가씨가 원하던 리옹의 추밀원 가운데 한 곳인가요?”

“아니, 파리의 명문가란다. 시장의 둘째 아들이지. 곧 혼사가 이루어질 거다.”

시장의 아들이라면 부족한 혼처는 아니었다. 하지만 클로비스 가문 또한 몇 번이나 리옹의 시장을 지낸 명문가라서, 시누이들이 원하는 건 혼처의 재력이나 권력이 아니었다.

희수는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카일리 아가씨는 리옹을 떠나기 싫다고 했는데.”

시누이들은 이 도시를 떠나길 원치 않았다. 리옹에서 태어나고 평생 자란 데다 리옹의 사교계에서 데뷔하고 이름을 알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하면 당연히 고향을 떠나게 되는 법이란다. 그 애의 운명인 걸 어쩌겠니.”

“다시 생각해 보실 마음은 없으신 거죠?”

“전혀.”

계모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희수에게 줄곧 해 왔던 당부도 잊지 않았다.

“카일리, 크리스틴, 캐서린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말거라. 이번에 결혼이 성사되지 않아도 혼처는 계속 알아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아가씨들은 아직 결혼 생각이 없다고……. 특히 캐서린 아가씨는 진심인 것 같은걸요.”

“결혼은 그 애들의 권한이 아니야.”

무척 냉정한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시누이들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 간의 결합이었다.

희수는 칼릭스가 오래도록 이 대저택에서 자라 왔다면 과연 저와의 결혼을 꿈꿀 수 있었을지 가끔 의문이 들었다. 그 정도로 리옹의 사교계는 폐쇄적이었다.

“새아가 넌 상관할 것 없다. 그냥 모르는 척하고 빠져 있으렴.”

계모는 시누이들의 결혼을 굉장히 서둘렀다. 쉴 새 없이 연회를 열고 손님을 초대하는 것도 전부 결혼 때문이었다.

‘아가씨들은 지금이 결혼 적령기라 그렇겠지.’

희수는 계모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리옹 사교계의 대모이자, 이 대저택을 이끌어 왔던 안주인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려 30년간, 클로비스 부인이라고 불려 왔던 사람이니 말이다.

* * *

희수도 저택에서 지낸 1년간 육아만 하고 지낸 건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연회에서도 제법 발언권을 쥐었고, 제 편을 만들며 톡톡히 제 몫을 해내었다.

이는 전적으로 시누이들과 계모의 덕분이었다.

“살롱(Salon)이요? 그건 뭘 하는 건가요?”

“여자들끼리의 건전한 모임을 부르는 말이에요. 오늘처럼 악기를 연주하고, 시를 읽고, 함께 그림을 보는 모임이죠.”

칼릭스는 여느 남편들처럼 아내의 외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희수는 친한 귀부인들과 화가들을 대저택으로 자주 초대했다.

레이놀드, 크리스, 그리고 셋째 필립의 그림이 완성되면 으레 친한 지인들을 불러 모아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었다.

계모는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인사였다. 누군가 사교계에 데뷔를 하려면 클로비스 부인을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해야 한다던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림이며 악기를 다루는 재주며 역사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 능통했다. 희수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갈리아 켈티카의 많은 것을 계모가 알고 있었다. 단순히 클로비스 부인이라 불리기는 너무나 아까운 여자였다.

계모가 참석하면 그 자리의 격식이 높아진다. 그래서 희수와 친한 귀부인들도 대저택을 찾기 전에 항상 계모를 만날 수 있는지를 먼저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준 높은 토론과 대화를 나눈다 한들 이 모임에는 딱히 이름이 없었다. 참석자들은 가벼운 티 파티라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클로비스 대저택의 모임은 리옹의 문화를 향유하고 나아가선 갈리아 켈티카의 유행을 움직이는 거대한 물결이었다.

희수는 눈으로는 계모를 바라보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 자리를 ‘클로비스 부인의 살롱’이라고 하면 다들 이해가 될까요?”

희수는 대저택 안에서는 작은 마님이라 불렸고 밖에서는 점점 클로비스 부인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희수는 계모를 눈짓하며, 비공식적으로 그 호칭은 계모의 것이라 돌려주었다.

계모는 언제나 그렇듯이 감정의 동요를 티 내지 않았다. 하지만 침묵으로써 희수에게 고마워했고, 뿌듯해하는 듯했다.

희수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어머.”

“클로비스 부인의 살롱이라니, 너무나 멋져요!”

“좋아요!”

기껏해야 여자들이 수다를 떠는 모임밖엔 되지 않았던 이 자리에 이름이 생겼다. 그것도 그 유명한 클로비스 부인의 살롱이니 남들에게 자랑하기도 수월했다. 귀한 자리에 참석하여 주류가 되고픈 욕심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클로비스 대저택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갈수록 늘어 갔다.

* * *

“점점 사람이 늘어 가니 응접실도 좁게 느껴지네요.”

“정원에 살롱을 위한 장소를 다시 마련해야겠어요.”

“우선 중앙 응접실부터 보수가 시급해요. 요즘 누가 벨벳을 쓰나요?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창피해요.”

“클로비스 경이 허락해 주시겠죠?”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시누이가 대저택 인테리어를 바꾸자며 바람을 넣었다. 희수와 제법 친해진 시녀들도 옆에서 부채질했다.

“허락해 주실 겁니다.”

“클로비스 경은 작은 마님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시잖아요.”

“작은 마님이 말씀하시면 해 주실 거예요.”

칼릭스는 아내의 요구라면 육하원칙도 필요 없었다. 뭘 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면 그는 뭐든 다 들어주니까.

그때 손님들을 마중하고 돌아온 계모가 시누이들을 지목했다.

“카일리, 크리스틴, 캐서린. 다들 자리를 비켜 주렴.”

“어머니, 요즘 저희를 빼놓고 새언니와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살짝 섭섭해요.”

“어서.”

엄한 계모의 말은 시누이들에겐 절대적이었다. 시누이들은 입술을 삐죽이곤 응접실을 나갔다.

계모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 안았다.

희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기에, 또한 오늘 있었던 모임에선 실수가 없었기에 자신 있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어머니?”

“새아가.”

“네, 어머니.”

“날 신경 쓰고 마음 써 주는 건 고맙지만 더는 그러지 말거라.”

“네?”

“앞으로 클로비스 부인이라고 불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다.”

희수는 계모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제 딴에는 칭찬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계모가 탐탁잖게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째서일까?

‘왜지?’

클로비스 부인이라는 호칭은 그녀가 평생을 이뤘던 업적이었다. 이 가문의 여자로 길이길이 남을 이름.

“난 이 저택을 떠날 생각이란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희수는 화들짝 놀랐지만 오히려 계모의 직속시녀는 담담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인 것처럼.

“새아가, 내가 너와 네 남편을 이 대저택에 들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불편한 이야기였다. 계모가 칼릭스를 마음에 들어 해서 가주로 삼았을 리는 없었다.

“그건, 산드라가 고집해서…….”

“아니. 네 남편을 가주로 삼는 건 물론 처음부터 내 의견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너희 부부를 대저택에 불러들인 건 내가 그 호칭을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야.”

클로비스 부인이라는 그 명예로운 호칭을 버릴 이유가 무엇인가. 희수는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네가 영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난 더 이상, 클로비스 부인으로 살고 싶지 않아.”

갑작스러운 선언에 희수는 놀란 숨을 들이켰다. 그대로 굳어 버린 그녀가 멍하니 계모를 응시했다.

“이 무거운 면류관을 빨리 벗어 버리고 싶구나.”

희수가 눈만 끔벅이고 있자 계모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너를 위한 연회에도 기꺼이 찾아오게 되면 난 이곳을 떠날 거다. 최대한 빨리 리옹의 사교계에 익숙해지렴.”

“어머니.”

진심인가 보다. 희수는 갑자기 들은 말이지만, 계모는 언제나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것을 꺼내 놓은 사람처럼 보였다.

희수는 도무지 계모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생을 리옹의 사교계에 몸담고, 누구보다 열심히 가문을 위해서 살았던 계모가 왜 이 대저택을 떠나려는 걸까.

그녀의 의문 어린 눈빛을 읽은 계모가 말을 덧붙였다.

“살아 보니 그렇더구나. 나의 행복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행복? 언제나 무표정으로 속내를 감추고 사는 사람에게 행복이란 말을 들으니 어색했다.

개인보다 가문을 더 소중히 여겼던 게 아니었나. 계모가 진정 행복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단 말인가.

“가문의 이름도, 죽은 남편의 휘광도, 내가 쌓아 온 명예도…… 나의 행복을 채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기적이라 해도 좋다.”

길을 잃은 희수의 표정을 읽은 계모는 다시 푹 한숨을 내쉬었다.

“휴…… 몇 번을 말해야겠니. 누군가 말을 하면, 그냥 듣지만 말고 대체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좀 의심을 갖고 생각해 보거라.”

“하지만 제가 어머니를 의심할 이유가 없잖아요.”

희수는 계모의 눈빛을 읽고 얼른 말을 덧붙였다.

“죄송해요, 어머니…….”

대저택에 들어와서 정확히 알게 되었다. 헤어 디자이너로 일할 때는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왜 여기선 이렇게 둔한 사람처럼 여겨지는지.

희수는 타인의 감정변화에만 예민할 뿐, 타인이 속으로 무슨 작당을 꾸미는지 잘 읽지 못했다.

특히 귀족들은 말과 행동, 속내가 각각 달라서 파악이 어려웠다. 연회에서 다정히 웃고 떠드는 두 사람이 알고 보니 철천지원수라든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울다 실신한 아들이 알고 보니 아버지를 독살했다든지. 그런 황당한 일이 빈번한 사회였다.

게다가 그녀가 아무리 원어민처럼 말을 한다 해도 그들과 똑같지는 않았다. 그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난 이제 클로비스 부인이 아니라 스칼렛으로 돌아가고 싶구나.”

희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래, 내 이름이란다.”

스칼렛.

클로비스 부인으로 살던 지난 30년간 잃어버린 이름이었다.

“여태껏 내가 했던 모든 말들은 네 남편에게 전부 똑같이 전해도 된다, 아가. 네 남편에게 한번 말해 보렴.”

그렇게 계모는 희수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독대를 끝냈다.

‘대체 뭐지? 왜 내가 자신의 자리를 가져가 주길 바라는 걸까? 대저택에서 나가려는 이유는 또 뭐야. 행복? 행복이라니…… 여태 행복하지 않았던 걸까?’

희수는 고민하다가 이 모든 이야기를 그날 밤 칼릭스에게 털어놓았다. 그동안 계모를 독대하면서 들었던 이야기까지 전부 다.

하지만 희수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모든 얘기를 들은 칼릭스는 단번에 해답을 내놓았다.

“밖에 남자가 있는 것 같은데.”

“……!”

희수의 머릿속에 한 줄기 섬광이 스쳤다. 그제야 조각난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너한테 남자가 있다고 직접 말을 할 수는 없었겠지.”

“아……!”

이미 수차례 언질을 주었지만 희수는 알아듣지 못했다. 이는 눈치가 없어서, 라기보다는 그녀 나름대로 살기 바빠서 계모의 입장과 상황까지 헤아려 줄 여유가 없었다.

희수는 아이가 셋에, 같이 사는 시누이도 셋, 매주마다 티 파티를 포함하여 네 번씩 연회를 치러야 했다. 틈틈이 글공부도 쉬지 않았고 남편 뒷바라지까지 해야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녹초처럼 쓰러져 잠들었다.

“시녀장이 붙인 정부인가.”

문득 시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녀장이 꾸민 흉계에 경악하자 시누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했던 그 말.

‘뭐, 처음도 아닌걸요. 이번에도 통할 줄 알았나 보죠.’

그랬구나. 그래서 여태 시녀장을 참고 살다가, 그녀가 수도원으로 내쫓기자 계모가 이제 자유를 되찾고 싶은 모양이었다. 정부를 정말 사랑하는가 보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그러셨어. 사랑은 소중한 만큼, 지키고 싶은 이에겐 큰 약점이 된다고.”

“…….”

칼릭스는 읽던 책을 덮었다. 계모의 그 말이 무척 공감되었다. 계모가 사랑을 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점도 놀라웠다.

그래. 사랑은 너무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은 이에겐 크나큰 약점이 된다.

그는 마주 보는 아내의 볼을 소중히 감쌌다. 말랑말랑해서 저도 모르게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장난을 쳤지만 그의 속마음만큼은 진지했다.

“정말 그랬나 봐. 근데 왜 지금 이런 말을 내게 하셨을까? 심경의 변화가 오셨나.”

사람이 이제 와서 변했을 리는 없다. 함께 지낸 1년 동안 계모는 아주 면밀히 희수와 칼릭스를 관찰해 왔다.

“너한텐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나 보지.”

“그런가?”

희수는 계모의 약점을 잡아 이용한다거나 그녀를 내쫓을 생각이 없었다. 칼릭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 가문의 명예와 평판은 모두 할머니가 일구었으니 할머니를 존경하라 말했다. 일찍이 계모의 귀에도 들어갔으리라.

“또 그런 말도 하셨어. 나 자신의 행복을 대신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칼릭스는 그 말에도 깊이 공감했다. 한때 그가 쫓던 세상을 향한 정의와 신전의 안위는 결국 아내와의 사랑에 뒷전이 되어 버렸다. 그러고서도 칼릭스는 양심에 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삶은 한 번뿐이고, 어느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으며, 자신이 바라는 건 어느 누구나 갖는 평범한 개인의 행복이었다. 이를 욕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가족을 뒤로하고 이 세상의 평화를 쫓는다면 역사책 한 페이지를 장식할 영웅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칼릭스의 소원은 거창한 위인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평범하게, 그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계모는 아마 저와 같은 바람을 가졌나 보다.

삶이 무척 고되었던 만큼 그 안에서 맛보았던 소소한 행복들이 달콤했겠지.

이를테면 사랑 같은.

“어머니한테 뭐라고 해야 하지?”

“……뜻대로 하시라고 해. 그보다 요즘 너무 피곤하게 지내는 거 같은데.”

“요즘 많이 바쁘셔. 나 때문에 연회 횟수를 늘리셨거든. 의회에도 날 데려가시느라 매번 고생이시지.”

“아니, 너 말이야.”

피식 웃은 칼릭스는 아내의 볼을 잡고 흔들었다.

“네가 피곤한 것 같다고.”

“나? 난 괜찮아.”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차마 피곤하단 말을 할 수 없었던 희수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피곤해.”

“……그래?”

그러자 포근한 침구에 안겨 얌전히 누워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새파란 눈동자에 도사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잠깐만,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그녀가 저지하기도 전에 칼릭스의 상체가 불쑥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말려 올라간 네글리제 옷감 안으로 그의 손이 침입했다.

“아……!”

차가운 감촉이 예민한 부분을 비벼 왔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체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좀 의심을 갖고 생각해 보라던 계모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한데 둘이서 한참 몸을 달구는 순간,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작은 마님! 작은 마님!”

칼릭스는 그녀의 살결에 입술을 묻은 채 모든 행동을 멈췄다.

감히 둘뿐인 그들의 침실에 찾아올 간 큰 시종들은 없었다. 그것도 이 밤중에.

“작은 마님!”

급하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간절했다. 칼릭스는 눈을 꾹 감으며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토해 냈다. 자신은 두려우니 한참 무르고 순한 제 아내를 부르는 불손한 이의 언행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한 일인가 봐!”

그런 그를 밀친 희수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주섬주섬 옷을 갖춰 입었다. 그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싸매고 있던 칼릭스는 시종의 얼굴을 기억해 둘 요량으로 직접 가서 문을 열었다.

만약 쓸데없는 일이라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 아, 아이고, 주인어른.”

“무슨 일이냐?”

당황한 시종은 바싹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그게…… 개가 출산을 시작했답니다. 마님께서 꼭 알려 달라고 제게 신신당부를 하셔서……. 도련님도 꼭 불러 달라고 하셨는데 말씀드려야겠죠? 지금 주무실 시간인데…….”

놀란 희수는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개의 출산을 보러 달려갔다.

* * *

대저택의 작은 마님과 도련님들이 무척 아끼는 개의 출산이었다. 이제는 아가씨들을 비롯하여 시녀들도 개와 제법 정이 들어 가끔 간식을 던져 주곤 했다.

몇 겹의 담요가 놓인 아늑한 공간.

개는 그 위에서 혀를 쭉 내밀고 괴롭게 헐떡이며 늘어져 있었다. 가축을 돌본 경험이 있는 하녀들이 조심스레 어미 개의 출산을 도왔다. 이제는 어미가 된 개였다.

새끼 강아지를 보려고 온 사람은 희수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오셨어요?”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말이다.”

계모는 냉정한 표정으로 겉옷을 여몄다. 그 말대로 어미 개는 쉴 새 없이 낑낑거리는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었다.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제대로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늘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대형견이라도 5살의 나이에 출산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벌써 네 마리나 낳았네요.”

하녀들이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를 따뜻한 불가에서 돌보고 있었다.

희수는 새끼 강아지를 구경하다가 어미 개가 낑낑거리면 다시 어미 개를 보고, 다시 새끼 강아지를 구경하다가 어미 개를 살폈다.

‘너무 귀엽다.’

아직 온몸이 젖어 있는 데다 눈도 뜨지 못했지만 꼬물거리는 새끼 강아지는 너무나 귀여웠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출산은 금남의 구역이라.

희수는 지금 이 귀여운 생명체를 보지 못하는 남편과 아들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두 마리나 더 낳았어요.”

“…….”

“어떻게 여섯 마리나 낳았을까요? 세상에, 기특해라.”

희수의 호들갑에도 계모는 언제나 그렇듯 조용했다. 그저 고운 미간을 조금 찌푸린 채, 한순간도 어미 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움직이는 하녀들 때문에 출산 상황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계모가 보고 있는 건 어미 개가 새끼를 낳는 광경이 아니었다.

그때 하녀가 조심스레 탯줄을 자르고, 마지막 한 마리를 들어 올렸다.

“이게 마지막 새끼입니다, 작은 마님. 총 일곱 마리예요. 수컷이 다섯 마리, 암컷이 두 마리랍니다.”

희수는 건강한 새끼 강아지를 확인하고 어미 개에게 다가갔다. 힘없이 축 늘어져 기진맥진하면서도 돌려받은 제 새끼를 핥는 데 열심이었다. 그 모습이 희수의 가슴을 울렸다.

“맛있는 걸 많이 챙겨 줘라. 따뜻하게 불을 피워 주고…… 잘 돌봐 줘야 한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작은 마님.”

희수는 기특한 어미 개의 머리와 턱을 한참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얘가 저도 엄마라고 새끼들을 열심히 돌보네요. 어머니, 새끼 강아지들이 참…….”

귀엽죠? 하고 물어보려는 순간 희수는 말을 멈췄다.

“누가 저 마음을 알겠니.”

몰래 눈물을 찍어 내던 계모는 서글픈 그 한마디만 던지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희수가 어떤 말을 건넬 틈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어머니는 새끼 강아지를 보러 온 게 아니었구나.’

계모는 이 경사의 순간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위로받기 위해서 온 것이다.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는 아픈 가슴을 달래려고.

자신을 연민하지 못하는 동정심은 완전하지 않다고 했던가.

희수는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냉랭한 가면 뒤의 계모 또한 여린 마음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걸.

* * *

칼릭스의 쉬는 날이었다. 항상 밖에서 일정이 있었던 평소와는 달리 희수와 칼릭스는 모처럼 한가했다.

공부에 푹 빠진 레이놀드는 수업 중이었고, 크리스토퍼는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필립은 때마침 시누이들이 돌보고 있었다.

‘정말 휴식이구나.’

대저택의 뒤뜰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함부로 베어 냈다간 노여움을 산다는 미신이 대대로 전해져 올 만큼 오래된 나무였다. 제대로 된 나이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아마 클로비스 가문의 시작과 함께였으리라 다들 짐작할 뿐.

희수는 그 나무그늘 아래 앉아서 지나가는 바람을 느꼈다.

칼릭스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편히 누워 있었다.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고 있으니 낙원 같았다.

아내와 밖에서 단둘이 있어 본 게 대체 얼마 만인가.

‘이 집구석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레이놀드와 크리스토퍼, 필립을 생각해서 가문에 들어왔건만, 요즘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세 아이들은 제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뛰어났다. 평범하게 자랐어도 큰 인물이 되었을 텐데 굳이 클로비스의 이름을 물려주기 위해 고운 도련님으로 키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냈다간 아내가 싫어할 소리라서 칼릭스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난 이제 어머니를 좀 알 것 같아.”

희수는 이 대저택에서의 생활이 체질에 잘 맞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게, 아내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는 게 편해 보였다. 칼릭스는 그녀의 권유에 이복누이들이 주최한 연회도 종종 참석하긴 했지만 그리 잘 맞진 않았다.

“그분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는 사실 와 닿지 않았거든. 겉보기엔 무서운 분이라서…….”

그는 여전히 계모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를 통해 계모를 이해했고, 계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희수를 통해서 칼릭스의 외로움을 전해 들었고 가족을 향한 그의 헌신적인 사랑을 이해했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다 이겨 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하지만 아니었던 거지.”

칼릭스는 아내에게 저 말고도 소중한 존재들이 생기는 게 싫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다.

하지만 한 번도 그녀의 생활을 막지 않은 것은, 소중한 것을 가진 이의 힘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의 세 아이들을 키우고, 그의 아내로서, 클로비스 가문의 마님으로서 버티는 건 힘든 일이었다. 그는 소중한 인연을 많이 가진 그녀가 더 단단해지고 더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더는 제 옆의 가녀리고 연약한 여자가 아니라, 갈리아 켈티카에서 소중하게 맺은 열매를 잔뜩 가진 한 사람으로서 튼튼하게 뿌리내리길 바랐다. 그래서 저와 함께 이 인생을 즐겁게 살아 주길 바랐다. 그게 희수가 하는 모든 일을 지지했던 이유였다.

“어머니는 그저 견디고 계셨던 거야.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사랑하니까 그랬겠지.”

사랑 말고는 인생의 행복을 논할 가치가 없었다. 가족을 사랑하든지, 신을 사랑하든지, 이성을 사랑하든지. 혹은 저 자신을 사랑하든지.

대상만 다를 뿐, 그 고귀한 감정이 삶을 이끌어 간다는 건 똑같았다.

“정부를 사랑하니까.”

그가 무심하게 중얼거리자 희수는 남편을 나무라듯 어깨를 두드렸다.

“누가 들어!”

그 말에 칼릭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가 알기로 이곳엔 지금 아내와 단둘뿐이었다.

“여기 누가 있는데.”

질문이 아니었건만, 희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앞의 건물 2층에서 캐서린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저기 새언니랑 클로비스 경이네?’

나무그늘 아래서 부부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편이 아내의 무릎에 누워 있는 그 모습이 퍽 다정하고 가까워 보였다.

캐서린은 반가운 마음에 희수를 불렀다.

“새언……!”

그 순간이었다. 나른하게 누워 있던 그가 동물처럼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아내의 어깨를 안고, 덮치듯 그녀를 눕히고 위로 올라탔다.

캐서린은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이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입술을 부딪히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머나 세상에.’

커다란 등짝과 어깨가 심히 꿈틀거리는 것으로 봐선 굉장히 농밀한 입맞춤이었다. 아래에 깔린 그녀가 남편의 팔뚝을 두드렸지만 입맞춤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가 끈적하게 고개를 비틀며 손으로는 아내의 턱과 볼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녀의 다리 사이 은밀한 곳에 그가 은근히 허벅지를 문질렀다.

분명 드레스 자락 위였지만, 벌거벗은 것만큼 야한 몸짓이었다.

캐서린은 더는 차마 볼 수가 없어 창문 아래로 몸을 숨겼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녀는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입맞춤이 저렇게 야릇하고, 관능적일 줄이야.

개가 교미를 하는 모습은 그저 우스웠건만 남녀의 스킨십은 보는 사람의 오감을 자극했다. 그저 입술을 맞대는 것뿐인데도.

‘입맞춤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괜히 제 입술을 한 번 문질러 본 캐서린은 슬그머니 부부의 모습을 다시 훔쳐보았다.

다행히 이 부부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둘은 어느새 입맞춤을 끝내고, 또 태연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무릎을 베고 그녀가 누워 있었다. 그늘에서 조금 벗어난 바람에 햇살이 가득 그녀의 얼굴에 들이쳤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자 남편은 웃으며 아내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 주고, 손으로는 차양막을 만들어 주었다. 얼굴이 완전히 덮이자 장난치듯 이마에 가벼운 뽀뽀도 남겼다.

그 아찔한 키스도, 가벼운 애정표현도 저 부부에겐 일상의 한 부분인 것처럼 그저 자연스러웠다.

‘부부가 저럴 수도 있단 말이야……?’

캐서린은 생전 처음으로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다섯째 시누이 카일리는 파리 시장의 둘째 아들과의 혼사를 물렀다. 그리고 희수의 도움으로 처음 그녀가 원했던 리옹의 추밀원 중의 한 가문과 축복 속에 화촉을 밝혔다.

카일리는 대저택을 떠나면서 희수의 개가 낳은 강아지도 한 마리 데려갔다. 리옹의 사교계에 애완견을 키우는 유행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지만 강아지가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바람에 이는 영 불가능해 보였다.

카일리는 앞서 결혼한 시누이들과 달리 자주 친정에 들렀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크리스틴과 캐서린의 핑계를 댔지만 희수와도 친밀하게 지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일리 아가씨가 벌써 와 있겠네요.”

“이젠 카프리 부인이죠.”

“아이, 참. 그렇죠, 카프리 부인.”

희수는 아침 일찍부터 단장을 마치고 초대된 파티에 다녀왔다.

파티의 개최자는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귀부인 제니퍼였다. 그녀의 남편이, 레이놀드가 입학할 아카데미의 학장이라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옹의 아카데미는 단 하나였다.

다행히 크리스틴과 캐서린이 동행해 주어 희수는 음악가의 연주를 들으며 파티 내내 흥겨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한데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시누이들의 표정이 영 어두웠다. 파티에서완 달리 완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나만 즐거웠나?’

억지로 다녀온 걸음이지만 제니퍼는 굉장히 쾌활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처음 만난 희수에게도 선물을 안겨 줄 정도였다.

‘혹시 시누이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

시누이들도 제니퍼와 웃으며 잘 지내는 걸 보았기에 희수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빨간 머리가 주최한 파티에 다녀왔다며?”

그녀의 예상대로 카일리가 이미 대저택에 와 있었다. 이번에는 희수의 생일파티를 계획한다는 핑계로 친정을 찾아왔다고 했다.

“어땠니, 그 빨간 머리?”

카일리의 물음에 막내 시누이, 캐서린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틀린 미소로 답했다.

“천박했어.”

크리스틴이 덧붙여 말했다.

“이래서 출신은 숨길 수가 없는 거지.”

“아니, 아가씨.”

희수는 놀란 얼굴로 캐서린과 크리스틴을 응시했다. 즐겁게 잘 놀다 왔으면서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다시 되새겨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재밌었잖아요. 제니퍼와 선물도 주고받았으면서 왜 그래요?”

캐서린과 크리스틴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 봐.”

“새언니는 당해도 모른다니까.”

“캐서린, 크리스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잖니.”

카일리는 점잖게 두 사람을 타이르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자 캐서린이 놀랄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앙큼한 빨간 머리가 글쎄, 새언니가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비꼬았어.”

“제니퍼가요?”

희수의 입술이 떡하니 벌어졌다. 제 면전에선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제니퍼가 언제 그랬나요?”

캐서린은 짜증 난다는 듯이 식탁을 쾅 두드렸다.

“어휴, 그 얄미운 계집의 머리채를 다 뽑아 버렸어야 했어!”

“새언니를 정말 어쩌면 좋지?”

느지막이 여자들끼리의 만찬자리에 도착한 계모도 대화에 참여했다.

“항상 언행을 조심하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니, 캐서린.”

“하지만 어머니, 우리끼리인걸요.”

“아무리 우리끼리 있다고 해도 말이다.”

“죄송해요. 그 못된 계집이 새언니를 놀리는 게 너무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그만…….”

“뭐라고 했길래 그러니.”

“글쎄, 클로비스 경이 젊어서 부럽대요.”

“…….”

희수는 그 상황을 똑똑히 기억했다. 제니퍼와 희수는 나이 대가 비슷한데, 제니퍼의 남편은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었다.

보통 귀족사회는 여자가 저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게 일반적이라 희수와 비슷한 또래 여자들의 남편은 대부분 50대에 가까운 남자들이었다.

“그러면서 새언니한테 향유고래기름을 주지 뭐예요?”

향유고래기름은 주름이 생기지 않게 바르는 값비싼 향유였다.

“저런.”

계모는 드물게 희수의 눈치를 살피며 쯧쯧 혀를 찼다.

“자기 얼굴은 생각 안 하고 웬 참견이람.”

“부러워하는 게 너무 티 나서 내가 창피하더라.”

시누이들은 식사마저 멈춘 채 제니퍼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희수의 앞에서 가식을 벗어던지고 언행이 자유로워진 지 오래였다.

“사실 새언니는 클로비스 경하고 나이 차이도 안 나 보이잖아?”

“애초에 새언니 나이를 몰랐으면 그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거야.”

“두고 봐. 내가 그 빨간 머리한테 개망신을 줄 테니까.”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던 캐서린은 휙 고개를 들어 희수를 응시했다.

“그러게 왜 진짜 나이를 밝혔어요?”

“맞아요. 10살만 어리게 말하지 그랬어요. 어차피 다들 몰랐을 텐데.”

희수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이렇게 화낼 만한 일인지, 지금 뭐라고 시누이들을 달래 주어야 할지 몰랐다.

“일단 남편이 젊어 보인다는 건 칭찬이고…… 향유고래기름은 비싸잖아요. 비싼 선물도 받았는데 이렇게 열 낼 필요 없어요, 아가씨.”

“그거 내다 버려요. 클로비스 경이 백 개는 사다 줄 텐데 뭐하러 그 계집이 준 걸 쓰려고요?”

“하지만…… 아까 아가씨도 분명 고맙다고 답했잖아요!”

캐서린은 희수에게 향유고래기름을 선물한 제니퍼에게 정말 고맙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부르고뉴 남부에서 온 고급 차를 답례로 선물해 주겠다고…….”

계모는 눈을 내리감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부르고뉴 남부의 차는 아무도 안 마신단다, 아가. 햇빛에 붉게 익은 차밭은 관상용이지 식용이 아니야. 그 찻잎을 따다 먹는 건 가난한 평민들뿐이지.”

이제야 깨달음을 얻은 희수니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아…….”

어쩐지 당시의 분위기가 미묘했다. 캐서린이 싱긋 웃으며 답례로 그 차를 준비하겠다고 하자, 제니퍼가 급하게 말을 돌렸던 것이다.

“그래도 네가 한 방 먹였으니 다행이다.”

“잘했어, 캐서린.”

카일리와 크리스틴이 캐서린을 칭찬하자 그녀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제일 답답한 건 그 빨강 머리였을걸. 새언니는 내내 괴롭힘을 당했지만 그게 괴롭힘인 줄도 몰랐거든. 나중에는 불쌍해 보였다니까.”

“제니퍼가 나한테 왜 그랬을까요?”

“부러워서 미쳐 버린 거겠죠. 자기는 나이 많은 노인네 수발이나 들면서, 그마저도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둘째 부인 신세잖아요.”

희수는 복잡한 심정이 담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걱정 어린 모습에 크리스틴이 그녀의 손을 흔들었다.

“또 왜 그래요?”

“레이가 곧 아카데미에 입학할 텐데…… 불이익을 받으면 어떡하나요. 제니퍼의 남편이 학장이잖아요. 괜한 소리를 해서 레이의 아카데미 생활이 불편해질까 봐 걱정돼요.”

희수의 말이 끝나자 식당은 짧은 침묵에 잠겼다. 시누이들과 계모는 서로를 응시하며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내 카일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풋.”

“새언니, 설마 그래서 그 빨강 머리가 초대한 파티에 간다는 거였어요?”

제니퍼는 클로비스의 여자들과 어울리기엔 한참 격이 떨어졌다. 한데 희수가 제니퍼의 초대에 응하겠다고 하자 시누이들이 그녀를 따라간 것이다.

“네. 남편이 학장이라고 해서…….”

잘 보이려고 했다. 초대를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말하자 그나마 친절한 카일리가 희수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죠. 새언니는 대저택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어요.”

계모는 이마를 감싸 안았다. 캐서린과 크리스틴은 대놓고 혀를 찼다.

“어떻게 그렇게 비굴한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신기할 정도야.”

카일리가 저보다 어린 자매들을 혼내며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말하지 마.”

그녀가 걱정 말라는 듯이 희수의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단호한 얼굴로 계모에게 제안했다.

“어머니, 새언니가 걱정하는 걸 보니 아카데미의 학장을 바꿔야겠어요.”

“그래야겠다.”

“제가 남편에게 말할까요?”

추밀원의 한 명인 카일리의 남편은 마땅한 권력이 있었다.

리옹을 움직이는 지주 가문들 중 한 곳에 시집갔으니 아카데미의 학장을 바꾸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의 행동이 우스워 보였으리라.

“아니, 내가 처리하마.”

계모는 다시 평소의 우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희수는 새된 신음을 흘렸다. 귀족으로 태어난 이들과 자신의 차이가 새삼 느껴졌다. 이들의 권력은 뼛속에 새겨진 것이라 권력을 사용하는 일 또한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반면 희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뭘 그렇게 놀라요? 클로비스 경은 아카데미를 해체할 수도 있을걸요.”

칼릭스 역시 추밀원의 한 명이었다. 그는 클로비스 가문의 대표로서 추밀원 회의에 참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클로비스 경이 새언니를 얼마나 자유롭게 여기는지는 알지만 이제 자각을 좀 해요.”

“맞아요. 칼릭스 클로비스의 아내잖아요. 권력을 좀 누리라고요!”

희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누이들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그녀들의 말을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중앙 홀 샹들리에 좀 바꿔요. 친정이 으리으리해야 날 무시 못 한다고요.”

“샹들리에를 바꿀 거면 정원에 분수도 더 설치해야겠어요. 새언니가 살림을 시작한 뒤부터 사는 게 영 궁핍해졌다고요. 왜 그렇게 돈을 아끼는 거예요?”

“새언니는 푼돈에도 바들바들 떤다니까.”

희수는 대저택의 살림을 꾸려 가는 길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다.

우선 클로비스 가문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게다가 앞으로 들어올 수입은 얼마나 될지, 도시 리옹과 갈리아 켈티카 전체의 물가는 얼마나 다른지.

가장 어려운건 품위유지비였다. 사치품에 대체 얼마나 돈을 써야 귀족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게 정말 어려웠다.

한평생 다른 세계에서 살던 희수가 귀족의 생활에 이만큼 적응하고 사는 것도 기적이었다.

다행히 시누이들의 불만은 계모에 의해 저지되었다.

“살림은 전부 안주인의 몫이다. 이 대저택의 살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희가 결혼해서 새 살림을 꾸리렴.”

어머니의 일침에 카일리와 크리스틴은 입을 다물었다.

“새언니, 클로비스 경을 구슬려서 청혼서를 보내 줘요.”

“너 미쳤니? 그 남자 평민이잖아!”

“평민이긴 하지만 굉장히 근사한 남자야. 새언니를 보고 느꼈는데 여자는 역시 남편의 사랑이 최고라고. 돈은 내가 많으니까 됐어.”

“그게 네 돈이니?”

“내 돈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참금이 있잖아!”

“정신 좀 차려라, 캐서린.”

“제발 철 좀 들어!”

카일리와 크리스틴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희수는 그런 시누이들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말은 저렇게 해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게다가 시누이들은 희수를 곧잘 챙겼다. 대저택의 안주인이라 눈치를 보는지도 모르지만, 희수는 그녀들이 보이는 호의는 호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모와 시누이들 사이의 생활도 그리 버겁지 않아졌다.

‘난 안주인으로서는 아직 멀었구나.’

그래도 이렇게 두 팔 걷고 저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희수는 차차 이 생활도 적응되고, 그러다 보면 나아지리라 믿었다.

* * *

희수가 클로비스 가문에 들어온 지 벌써 3년이 흘렀다.

그간 카일리, 크리스틴, 캐서린은 각자 원하던 혼처를 찾아 결혼했다.

항간에선 칼릭스가 가주가 된 덕분에 막혔던 시누이들의 혼삿길이 뚫렸다고들 했다.

‘서두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다들 바라던 혼처를 찾았으니 잘됐지, 뭐.’

아이들을 키우면서 희수는 세 명의 시누이를 시집보내고, 그리고 한 번의 장례식을 치렀다. 산드라의 장례식이었다.

“정말 고생이 많아요, 새언니.”

오랜만에 카일리가 대저택을 찾았다. 온갖 핑계를 대며 드나들었지만 근래엔 오랜만이었다. 친정 출입을 자제하라는 남편의 당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었다.

“어머니 때문에 속이 말이 아니겠어요. 많이 놀랐죠?”

카일리는 안쓰러운 얼굴로 희수의 손등을 쓸어 주었다.

“하아, 산드라의 장례식까지도 무던하셨는데…….”

산드라는 수도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아무도 산드라의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는 의문이 많았다.

원칙적으로는 수도원에서 장례를 치르고 그곳에 유택을 마련했어야 했지만 가문에 봉사한 그녀의 노고가 있어 장례는 클로비스 가문에서 치러 주었다.

이는 사실 계모의 제안이었다.

‘덕망 높은 귀부인이 될 수 있는 기회.’

굳이 그런 목적을 갖고 산드라의 장례식을 치러 준 건 아니었다. 희수는 그냥 계모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

‘어머니 말씀은 대부분 옳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50년간 클로비스 가문에 봉사한, 은퇴한 시녀장의 장례식. 희수는 산드라의 장례식을 주도하면서 리옹의 사교계에 제대로 이름을 알렸다.

이제는 클로비스 부인이라는 호칭이 희수에게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굵직한 집안 행사를 여러 번 함께 치르면서 희수는 많은 것을 배웠고, 자연스럽게 계모를 따르게 되었다. 그녀를 믿고, 시모와 며느리 이상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심지어 캐서린의 결혼식을 치르고 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계모가, 집을 나갔다.

“어머니께서 갑자기 왜 그러셨을까요.”

남은 것은 편지 한 장뿐이었다.

“Scarlett est allee chercher l'oiseau bleu.”

스칼렛은 파랑새를 찾아 떠났다.

“편지에 그 한 줄만 남기고 사라지셨어요.”

이 갑작스러운 작별을 어떻게 그 한 줄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꽤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저와의 인연을 이렇게 무 자르듯 끊어 내고 사라질 수 있는 건가.

희수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계모가 클로비스 부인이라는 무거운 관을 벗어 버리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렇다고 이 행동을 이해할 순 없었다.

‘은퇴식을 하고 조용히 집에서 정원이나 가꾸며 살겠다는 뜻인 줄 알았지.’

계모가 책임감을 빼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어머니가 어떻게 야반도주를 하셨을까.’

희수는 계모에게서 클로비스 가문에 대한 책임을 배웠다.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책임을 배우고 익혔는데, 어떻게 그런 그녀가 이렇게 허무하게 도망쳐 버릴 수가…….

“어머니도 참.”

카일리는 신경질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가 아니에요. 그 정도면 오래 버티셨죠.”

그래도 그렇지 막내의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나흘 만에 떠나 버리다니, 카일리는 진저리가 났다. 어머니의 그 속내를 알 만했다.

“우리한테서 하루 빨리 도망치고 싶었던 거예요.”

“아가씨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았을까요?”

얼마 전부터 계모의 오래된 시녀들이 하나둘씩 대저택을 떠났다. 희수는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당시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철저히 준비를 하셨구나.’

그것도 다 야반도주를 위해서였다. 희수는 허무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캐서린 아가씨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우리를 지긋지긋해하셨으니까요. 이 가문도 싫증 내셨지만 그보다 어머니를 괴롭혔던 건 바로 우리였어요. 우리 일곱 자매를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셨죠.”

카일리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녀가 그간 겪었던 고뇌가 희수에겐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향한 증오와 분노, 허무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었던 애정.

“나도 이해는 해요. 언니들이 그 남자를 팔 병신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얼마나 밉겠어요?”

“……그 남자요?”

머리를 싸매고 있던 희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의 정부 말이에요. 새언니도 알고 있죠? 그 천박한 연극배우.”

희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일리는 한 번도 대놓고 말한 적 없는 계모의 정부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들은 그 남자를 굉장히 싫어했거든요. 아마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었나 봐요.”

카일리는 일곱 자매 중 다섯째였다. 그녀의 위에 4명이 더 있었다.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죠. 8년쯤 됐나.”

이는 희수가 대저택에 들어오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 조신한 아가씨들이 그런 짓을 했다고……?’

희수는 카일리 위의 시누이들과 그리 친하진 않아도 몇 번 안면이 있었다.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 같은 여자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살인에 실패하고 남자의 손을 다치게 만들었다니, 그것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건 카일리의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때 얌전히 죽었어야 했는데 벌레같이 살아남았어요.”

“아가씨.”

희수가 입을 다물지 못하자 카일리는 얼른 분노를 삭이고 말을 돌렸다.

“어쨌든, 어머니도 참 너무하시죠. 적어도 새언니한테 미안하다는 사과 정도는 했어야지.”

“저보다는 캐서린 아가씨가 충격이 클 거예요. 결혼한 지 아직 나흘밖에 안 됐는데…….”

“글쎄요?”

후후, 하고 쓰게 웃은 카일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제 안의 원망보다는, 이제 현실을 걱정할 때였다.

“아무 소식도 없죠?”

“네.”

일단 조용히 사람을 풀어 계모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전부 가짜였다.

“아마 리옹엔 없을 거예요. 아마 부르고뉴로 가셨겠죠. 그 좋아하는 연극을 마음껏 볼 수 있을 테니.”

“그럼…… 찾기가 수월하지 않겠네요.”

“그냥 더 이상 어머니를 찾지 마세요, 새언니. 헛수고예요.”

“하아…….”

“얼마나 치밀한 분인데요. 절대 못 찾을 거예요.”

희수도 그렇게 예상했다. 모든 일에서 철저했던 그녀가 마음먹고 떠났으니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

‘찾아도 소용없겠지.’

이곳이 싫어 죽겠다는 사람을 데려와 어쩌겠는가? 이는 일곱 자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어머니를 놓아드려야겠어요.”

카일리는 먼 곳을 보며 쓰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희수의 눈에는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가 보였다.

* * *

계모는 공식적으로 실족사 처리되었다. 그렇게 희수는 클로비스 가문의 두 번째 장례식을 치렀다.

‘스칼렛 클로비스의 장례식.’

고용인들을 입단속시키는 건 그녀와 오래도록 일했던 집사장의 몫이었다.

대저택의 안보다는 밖이 더 문제였다. 사교계의 대모였던 그녀의 장례식이라 리옹 전체가 떠들썩했다.

다행히 시누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신속히 진행되었지만 희수는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장장 보름간의 긴 장례식이었다. 희수는 이를 핑계로 대저택을 방문한 시누이들과 담소를 나눴다.

“왜 시신 공개를 안 하냐고 난리예요.”

시신을 공개하는 건 갈리아 켈티카의 장례 문화였다. 한데 산드라에 이어 이번에도 시신을 공개하지 않아서 다들 의문이 드는 모양이었다. 희수 역시 그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수도원에선 왜 산드라의 주검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자살했으니 분명히 보관을 하고 있었을 텐데.”

한데 수도원에서는 주검을 대저택에 인계하지 않았다. 이 일은 계모가 전부 처리했기에 희수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자꾸 이상한 오해를 받잖아요.”

희수가 투덜거리자 카일리가 캐서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 새언니한테 말 안 했니?”

캐서린은 산드라의 장례식 이후에 결혼했다. 당시에 일곱 자매 중 유일하게 대저택에 남아 있었기에 카일리는 당연히 캐서린이 진실을 말했을 줄 알았다.

“으응, 말을 못 했어.”

“언질이라도 해 줬어야지!”

“새언니한테는…… 그런 말을 하기 어렵다고.”

“누가 그걸 몰라?”

냉정한 카일리와 불안한 얼굴로 제 눈치를 살피는 캐서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희수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경악했다.

“설마.”

그들과 눈이 마주치고, 마치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난처하게 변한 표정 때문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맞아요.”

담담히 사실을 인정한 카일리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꼭 떠난 계모를 연상시켰다.

“우리가 죽였어요.”

“……!”

희수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주검을 빼돌렸다고만 예상했지 설마 죽이기까지 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산드라의 장례식에서 세상이 떠나갈 듯 눈물을 흘리던 시누이들이 떠올라 더 소름 끼쳤다. 희수가 경악한 기색을 보이자 캐서린이 자신을 변호하듯 소리쳤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잖아요! 새언니가 본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요.”

“맞아요, 산드라는 지독하게 어머니와 우리를 괴롭혔죠. 밖에서도 충분히 욕을 먹는데 그 여자는 안에서도 우리를 못 괴롭혀서 안달이었으니까요. 결국은 그 미친년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우리도요.”

그때 내내 조용하던 크리스틴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산드라는 죽어서도 좋은 곳엔 못 갈 거예요. 난 이제 아무 감정도 없어요. 그냥 통쾌하지.”

고운 그녀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맞아 죽었으니…….”

희수는 시선을 돌리며 말을 아꼈다.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이렇게 오래 묵은 증오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난 아가씨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확히 몰라.’

당사자가 아니니 저들의 복수를 잔인하다고 비난할 권리는 없었다. 하지만 뒷목이 싸늘한 것이, 영 무시무시했다.

“그래서…… 주검을 보여 줄 수 없었던 거군요.”

맞아 죽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한데 진실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체는 어머니가 처리하셨죠. 갈가리 찢어서 황무지에 던져 버린다고 했던가?”

희수는 눈앞이 아찔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모의 조언에 따라 진심으로 시녀장의 장례식을 준비했던 자신의 모습들이 떠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나만 모르고 있었어.’

계모와 시누이들의 꾸며진 각본 아래서 움직인 멍청한 인형이 된 기분이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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