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가문의 주인
* * *
“자수가 틀렸습니다, 작은 마님.”
시녀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희수의 손등에는 얇은 회초리가 내려쳤다.
찰싹! 수틀에 집중하고 있던 희수는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아얏.”
그와 동시에 다시 회초리가 날아왔다. 찰싹!
“……!”
희수는 억울한 눈으로 시녀장을 올려다보았다.
“정숙하세요. 입 밖으로 그런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바늘을 쥔 손을 회초리로 때리는 건 너무한 처사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희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클로비스 대저택에서 50년을 있었다는 시녀장은 그야말로 냉혈한이었다. 이 집안의 여자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감 선생처럼 조목조목 따져 가며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
계모와 일곱 자매 모두 저 시녀장의 감독 아래 엄하게 자랐다고 했다.
모름지기 클로비스 집안의 여자가 되었다면 가문의 인장 정도는 마땅히 자수를 놓을 줄 알아야 한다며, 시녀장은 만삭의 임부를 데려와 수틀 앞에 앉혀 놓았다.
오늘이 이틀째였다. 솔직히 말하면 희수는 첫날까지는 자수가 재밌었다.
다른 수틀에 완성된 작품들이 그럴싸했다. 꽃과 이파리, 나비와 새까지. 아기자기한 게 시누이와 클로비스 부인의 솜씨인 듯했다.
‘나도 열심히 해서 완성해 봐야지. 생각보다 재밌어.’
저 시녀장이 옆에 매를 들고 서 있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산드라, 이만하게.”
그동안 이 대저택에서 시녀장의 행실이 얼마나 악덕이었는지, 희수에게 잘 말도 걸지 않던 계모가 놀라서 침방으로 달려올 정도였다.
“그리 급한 일도 아니지 않나.”
“안 됩니다, 마님.”
“천천히 배워 가면 될 일이지, 막달의 임부에게 이럴 필요는 없어.”
클로비스 부인은 희수의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심지어 냉랭하던 시누이들마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래요. 산드라,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그래요.”
“새아가는 해산달도 머지않았는데 이러다가…….”
“마님.”
시녀장은 클로비스 부인의 말을 뚝 끊었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렇지 감히 시녀장이 저택의 안주인의 말을 끊을 수는 없는 법.
그런데도 클로비스 부인이 뭐라 대꾸를 못 하는 걸 보니 그동안의 관계가 훤히 보였다.
“그동안 대저택의 여자들은 무리 없이 해 왔던 일입니다. 만삭의 임부라고 앉아서 자수 놓는 게 그리 힘들겠습니까?”
클로비스 부인을 향한 대꾸지만 시녀장의 시선은 희수를 향해 있었다. 잠시 고개를 들었던 희수는 그녀의 얼음장 같은 시선에 흠칫 놀랐다.
“이까짓 일도 못 하겠다면 아들 낳은 유세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이 나오자 클로비스 부인은 입을 다물고 침방을 나섰다. 시누이들도 시녀장에게 더는 말을 못 하고 자수로 눈을 돌렸다.
시녀장은 칼릭스와 희수의 아들들에겐 무척 깍듯하고 살가웠다.
하지만 희수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못된 노인네 같으니.’
계모의 말조차 들은 척도 안 하는데 자신을 어렵게 생각할 리 없었다.
‘두고 봐.’
희수는 억울한 마음을 뒤로하고 자수에 집중했다. 자수는 꽤 재밌었다. 색색의 실을 이용해서 바늘땀을 뜰 때마다 조금씩 도안을 맞춰 가는 게 나름 보람 있었다. 셋째를 임신하고 딱히 할 게 없어 지루하던 차에 좋은 소일거리를 찾았다.
‘몸조리만 끝나면 복수해 줘야지.’
자수 도중에는 종종 복수심이 치솟았다. 하지만 희수는 당장 소란을 만들 수 없었다. 출산이 임박했는데, 긁어 부스럼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 대저택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려니 하는데 말이다. 특히 구박받는 시누이들을 보면 만감이 교차했다.
시녀장은 정말 자비 없이 시누이들을 혼냈다. 특히 가장 많이 혼나는 건 막내 시누이였다. 칼릭스보다 8살 어린 막내 시누이는 완전히 순둥이라 할 수 있었다.
여섯째 시누이 크리스틴은 그럭저럭 희수에게 친절했다. 시녀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직접 시녀를 시켜 물을 갖다 줄 정도였다.
“이거 마셔요.”
“고마워요, 아가씨.”
희수가 목을 축이는 동안 크리스틴은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산드라는 아버지의 유모였어요.”
“아…….”
“모든 친척들이 그녀를 신뢰하죠.”
귀한 집 여자들이 왜 한낱 시녀장에게 이렇게 쩔쩔매는가 했는데,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귀족사회는 모두 핏줄로 맺어져 있었다. 죽은 시숙들의 두터운 신뢰에 더불어 일가친척들의 눈과 귀가 되는 게 바로 산드라였다.
“그래서 어머니도 그렇고, 돌아가신 할머니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죠.”
가만히 듣고 있던 막내 시누이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혼처를 정하는 것도 바로 산드라예요.”
“시녀장이 아가씨들 결혼상대를 고른다고요?”
희수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묻자 시누이들은 자수틀을 밀치고 기다렸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불만을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부르고뉴 출신이세요. 리옹의 사교계에 입문하기 위해서 산드라의 조언을 귀 기울여 들으셨죠. 지금까지도 그렇고요.”
“산드라의 눈 밖에 나면 말도 안 되는 혼처를 골라 줘요. 첫째 언니처럼 재취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다니까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그야…… 우린 일곱 명이나 되잖아요.”
“우리를 시집보내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도, 산드라도요.”
클로비스 부인은 줄줄이 딸만 낳았다는 이유로 평생 동안 많은 타박을 들어왔다. 이제는 그 타박이 너무 익숙해져서 이 고귀한 가문의 일곱 자매조차 그리 귀하지 않게 여겨졌다.
‘이 귀한 집 여자들이 왜 저런 취급을 당했을까.’
안쓰러운 일이었다. 희수는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 얘기만 들으면 속이 울컥했다.
“사실 그렇긴 하죠. 우린 아들도 아니니까요.”
“지참금 때문에 우리는 가문의 돈만 잡아먹는 벌레라고 생각해요.”
희수는 이제야 시녀장이 가진 절대 권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희수 부부를 대저택으로 데려와 아이들에게 성을 물려주자는 계략도 아마 시녀장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시어머니라고 칼릭스가 좋아서 우리와 합가하자고 했을까.’
남편이 밖에서 낳아 온 아들을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을까?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클로비스 부인은 죄책감에 동조했겠지. 그렇게 따지면 시어머니인 계모의 처지도 불쌍했다.
‘시녀장이 바로 이 대저택의 실세였어.’
푹 한숨이 나왔다. 한참이나 시녀장의 뒷담화를 나누던 시누이들은 나중엔 슬그머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산드라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많이 엄할 뿐이죠. 이것 보세요.”
그러면서 크리스틴이 제 손등을 보여 주었다. 자세히 보니 얇은 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저도 회초리질을 많이 당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지금은 다들 깜짝 놀랄 만큼 자수를 놓을 수 있어요.”
“맞아요. 산드라는 많이 까다롭긴 하지만 실력을 인정하면 더는 같은 일로 매를 들지 않을 거예요.”
가만 듣고 있으니 희수는 내심 화가 치밀었다.
‘이렇게 구박을 받아 놓고 그래도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부르고뉴 가장 부유한 귀족의 여식이었다던 클로비스 부인은 그리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여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누이들은 정말 순하고 착해서, 자신들이 어떤 짓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집안일을 떠들고 다닐 수도 없었을 테니까.’
클로비스 부인도 마찬가지였겠지. 아마 그래서, 집안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 더욱 사교계의 입지를 신경 썼을 테고.
‘하지만 끝내 시녀장에게 휘둘리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시누이가 희수의 손등을 눈짓했다. 붉은 실 자국이 조금 남았지만 상처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크리스틴은 직접 준비해 온 차가운 물수건을 정성스럽게 희수의 손등 위로 얹어 주었다.
“약을 발라야 자국이 남지 않아요. 붓기가 가시면 약을 발라 줄게요.”
처음 겪는 친절이지만 놀랍진 않았다. 희수는 시누이와 클로비스 부인의 염려가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일은…… 클로비스 경에게 알리지 않았으면 해요.”
시누이를 비롯하여 이 대저택의 어느 누구도 칼릭스를 이름으로 부르지 못했다. 이복누이들은 배다른 오라버니의 존재를 멀게 생각했다. 그만큼 복잡한 사이였다.
칼릭스 역시 이 저택의 식구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이는 양쪽 모두의 문제였다.
일이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주위에 여자라곤 평생 아내뿐인 그가 하루아침에 계모와 이복누이들과 친해질 리 없었다.
“네, 알겠어요.”
희수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이 고풍스러운 대저택에 들개까지 데리고 들어와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 대저택에서 그 들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그는 일 때문에 며칠간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시누이들과 시모, 시녀장은 레이놀드와 크리스토퍼를 극진히 대했다. 시녀장이 괘씸하지만 희수는 제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까 봐 당장은 풍파를 피하고 싶었다.
‘아직 시간은 많아.’
대저택의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든 뒤에 복수해도 늦지 않는다. 출산일이 가까운데 시녀장 따위를 신경 쓰고 있을 순 없었다.
‘사는 건 항상 쉽지만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고 견뎌 낼 수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시누이들의 말처럼, 희수는 시녀장을 이 저택에서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 * *
클로비스 대저택은 무려 4개의 건물이 이어진 거대한 성이었다. 건물마다 각각 첨탑이 있을 만큼 웅장한 이 대저택의 하루는 아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다.
가장 먼저 움직이는 건 고용인들이었다.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 클로비스 경께서 벌써 기상하셨다!”
시종장은 평소의 체통마저 잊은 채 부리나케 시종들을 깨웠다.
“아니, 어떻게 지금 일어나셨답니까.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셨네.”
“아이고…… 우리는 어쩌라고요!”
“어허, 불경한 소리!”
시종장은 눈을 부라리며 시종들의 언행을 타일렀다.
“클로비스 경께서는 시민들의 안전과 갈리아의 미래를 위해 밤낮으로 힘쓰고 계신다. 그런 분을 모시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지! 어서 일어나!”
“예에,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어휴, 죽어나네.”
귀족들 근처에서 주인들을 수발하는 가장 높은 계급의 고용인들, 집사와 시녀, 시종.
이 대저택에는 집사장 아래 3명의 집사가 따로 있었다. 그래서 집사로서 꽤 경력이 있는 알버트조차 이곳에선 집사장 아래로 전락했다.
대저택에는 시녀장과 시종장 아래의 계급도 따로 존재했다.
칼릭스와 희수가 둘이 살 때와는 달리, 하녀와 하인들은 주로 건물 밖의 일을 도맡아 하기 때문에 대저택의 가족을 직접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대저택은 그 크기만큼 내부 조직이 거대한 사회였다.
“어서 가서 마부부터 깨워! 말을 준비시켜 놓으라 이르고, 또…….”
“그분은 말 타고 출근하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종장님도 잠이 덜 깨셨나 봐.”
시종은 키득거리며 기사의 갑주를 챙겼고, 몇 명은 그의 소세를 위한 수건과 더운 물을 준비했다. 그들이 제 할 일을 찾아가자 시종장은 다른 볼일을 보기 위해 부리나케 창고로 뛰어갔다.
밖의 하인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간밤에 죽은 가축은 없는지 축사를 살폈다. 닭과 염소, 오리와 양, 거위와 돼지까지. 이 대저택은 거대한 축사까지 자체적으로 관리했다.
대저택의 식당에선 가주의 조찬을 준비하는 요리사들이 일찍부터 기상해 있었다.
가주를 위한 첫 번째 조찬이 준비되었을 때쯤, 마침 수탉이 아침을 알렸다.
고용인들은 각자 모시는 이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 그리고 대저택의 여자들은 각자의 바쁜 하루를 위해서. 대저택의 사람들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 * *
클로비스 대저택에는 식당도 한 군데가 아니었다. 외부인용, 고용인용, 주인 부부의 식당, 일곱 자매를 위한 식당 등 자그마치 7개의 식당이 있었다.
여섯째 크리스틴은 요즘 자매들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일어나 별조식을 들었다.
이유는 바로, 새로운 가주가 된 이복 오라버니 때문이었다.
“클로비스 경은?”
“곧 식사를 하러 오실 겁니다, 크리스틴 아가씨.”
크리스틴은 칼릭스가 집을 떠난 뒤에 태어났기에 둘은 안면조차 없었다. 언니들은 어릴 적 홀대받던 그를 보았기에 친해지길 어색해했지만 크리스틴은 달랐다.
‘잘 보여야 해.’
칼릭스는 클로비스 가문의 가주가 되었다. 그의 아들, 레이놀드가 성을 물려받았으니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뭐, 어머니도 인정했으니까.’
클로비스 가문의 가주 자리는 거의 10년간 비어 있었다. 때문에 클로비스 부인은 방계 혈족과 사위들의 다툼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그 와중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생 독신을 맹세했던 서자가 결혼하여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았다.
레이놀드, 크리스토퍼. 그리고 배 속의 셋째 아이까지.
가주 자리를 놓고 다투던 이들은 칼릭스의 등장에 허무하게 싸움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신전의 수석 사제이자 성기사인 칼릭스는 서자이긴 해도 분명한 클로비스의 혈통이었고, 그의 아들인 레이놀드는…….
‘그렇게 똑똑한 아이는 정말 처음 봐.’
일곱 자매와 클로비스 부인마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레이놀드는 겨우 3살 나이에도 글자를 읽고 썼다. 뿐만 아니라 숫자에 대한 관념도 뛰어나 10살은 되어야 배우는 수학까지 술술 풀어냈다.
레이놀드의 어미가 이방인이라 어딘가 모자라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만나 보니 그렇게 똑똑할 수 없었다.
또래보다 한참 성장이 빠른 레이놀드는 총명한 눈빛과 다정하고 귀여운 언변으로 단번에 대저택의 여자들을 사로잡았다.
후계자가 너무나 뛰어나기도 하지만 사위와 혈족들이 가주 자리를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셋째 아이도 아들 같다던데…… 참 신기하단 말이지, 새언니는.’
레이놀드에게는 1살 터울의 남동생 크리스토퍼가 있었다. 그 아이도 무척 건강하여 곧 인지를 얻고 족보에 이름을 올리게 될 터였다.
게다가 곧 셋째 아이가 태어난다. 임부의 배부른 모양을 보고 이번에도 아들이라고 다들 입을 모았다.
그러니 칼릭스는 가주 자리에 가장 알맞은 사람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셋이나 가졌으니, 그보다 더한 명분은 없으리라. 그의 부인을 흠잡으려 해도 총명한 아들들을 줄줄이 낳은 터라 아무도 그녀를 괄시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일곱 자매는 자존심 때문에 티를 내진 않았지만 이는 사실 클로비스 가문에도 엄청난 경사였다.
‘정말 다행이야.’
크리스틴은 딸만 줄줄이 7명을 낳은 집의 여섯째로서 무척 기뻤다.
귀족 사회에서 재산과 성을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건 가문에 불운이 들었다고 여겨진다. 아무리 고귀한 클로비스 가문이라 해도 일곱 자매의 수준에 맞는 혼사가 어려웠던 것이다.
크리스틴은 이미 혼기가 꽉 찬 나이지만 아직도 알맞은 남편감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위에는 아직 미혼인 카일리가 있으니, 자칫 때를 놓치면 영원히 결혼하지 못한 채 수도원에서 비참한 생을 보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칼릭스가 가주가 되었다. 이는 가문에 드리운 신의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크리스틴은 최대한 그의 눈에 잘 보여서 제대로 된 혼사를 치르고 싶었다.
“클로비스 경께서 오셨습니다.”
시종들이 일어나 인사했고, 먼저 식탁에 앉아 있던 크리스틴은 가벼운 목례만 전했다. 그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냉랭한 얼굴로 크리스틴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말 한마디 안 하지?’
크리스틴은 저와 똑같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이복 오라버니를 흘끔거렸다.
벌써 며칠째 한 공간에서 한 식탁에 앉아 단둘이 식사를 하면서도 그는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칼릭스는 처음에는 이복누이들과 함께 조식을 먹었다. 한데 그 자리에서 자매들 중 한 명이 입방정을 떨었고, 그때 화가 난 그가 식탁을 엎어 버렸다.
이후로 그는 두 번 다시는 대저택의 여자들과 식사를 함께하지 않았다. 아침식사도 일곱 자매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홀로 했다.
크리스틴은 일부러 그와 안면을 익히기 위해서 이 시간에 식당을 찾았지만 두 사람의 아침식사 시간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 시종들이 접시를 움직이는 소리, 물을 따르는 소리, 그뿐이었다.
상식적으로 매번 혼자였던 식사자리를 이복누이가 함께해 줬으면, 한마디라도 말을 걸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부인조차도 쿨쿨 자고 있는데 말이다!
‘같이 자리를 지켜 주는데 고맙지도 않나.’
집사장은 아랫사람들 보기 좋지 않다며 끈질기게 권유했지만 칼릭스는 만삭의 아내를 식당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클로비스 경, 내일부터는 작은 마님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신경 쓸 것 없다.”
“하지만…….”
집사장은 그의 매서운 눈빛에 곧장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틴은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대화였다.
이후로 칼릭스는 끝까지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식사에만 열중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담.’
결국 크리스틴은 오늘도 가시방석에 앉아서 스프가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는 아침식사를 끝내야 했다.
‘새언니는 저렇지 않던데, 클로비스 경은 왜 저렇게 무뚝뚝한 거야.’
속으로 꿍얼거렸지만 먼저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건 크리스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클로비스 경은 너무…… 무서워.’
이름은커녕 오라버니라고 부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 호칭은 감히 갖다 붙일 수도 없는 관계였다.
이는 크리스틴뿐만 아니라 일곱 자매와 클로비스 부인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들 그를 어려워했고 아무도 그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친밀하게 지낼 수 없었다.
칼릭스는 먼저 식사를 마치고 묵묵히 식당을 나갔다. 크리스틴은 아쉬운 눈으로 이복 오라버니의 커다란 뒷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하아, 새언니나 꼬셔 봐야겠다.’
칼릭스의 아내는 그와 달랐다. 그녀는 굉장히 무른 구석이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 두 사람이 부부가 됐는지도 의아할 정도였다.
가문의 서자인 이복 오라버니와 그의 아내가 마음에 드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외부인인 그 부부가 이 대저택에 발을 들이는 것을 반대했을 만큼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크리스틴도 살 궁리를 해야 했다.
‘빨리 카일리 언니를 시집보내고 나도 청혼서를 써 달라고 해야지.’
심심풀이로 새언니를 괴롭히고 있긴 하지만 곧 그만둘 생각이었다. 상대에겐 아무런 타격도 없는 짓 같아서, 오히려 제가 골탕먹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자수를 며칠 하다 보니 가문의 인장도 금방 완성되었다. 희수는 그동안 거의 왕래가 없었던 시누이들과 조금이나마 편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렇게 빨리 완성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언니들도 처음엔 잘 못했는데…….”
“혹시 배운 적 있어요?”
“아니요, 처음 해 봐요.”
“그럼 새언니가 재능이 있나 봐요. 자수 놓는 재능이요.”
희수는 대저택에서 처음 받는 호의에 괜히 부끄러웠다. 막내 시누이 캐서린이 싱긋 웃으며 칭찬을 보탰다.
“대저택의 안주인이 시침질에 소질이 있어서 참 좋겠네요, 새언니.”
캐서린은 굉장히 새침한 아가씨였다. 희수는 처음 듣는 그녀의 칭찬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아가씨. 부러워할 것 없어요. 아가씨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걸요.”
“…….”
시누이들과 시녀들은 희수를 빼고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정말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캐서린을 골탕 먹이려는 거야?’
처음에 혹시 눈치가 좀 없나? 하는 의심은 들었지만 계속 겪어 보니 사실이었다.
클로비스 가문의 여자들은 사교계 정점에 있는 우아한 숙녀들이었다. 귀족의 화법은 결코 천박하지 않았다. 이는 상대를 괴롭힐 때도 마찬가지였다.
‘괴롭혀도 괴롭히는 줄도 모르고 있어.’
‘비꼬아서 얘기해도 비꼬는 줄 전혀 모르잖아?’
희수는 이들의 칭찬이 정말 칭찬인 줄 알았다. 시누이들이 입술에 꿀이라도 바른 양 듣기 좋은 말만 해 줘서 갈수록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아가, 출산 예정일이 지났다고 들었다.”
침방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계모가 많이 걱정되었는지 종종 얼굴을 비쳤다.
시녀장이 자리를 비웠을 때만 찾아오는 걸로 봐선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아무리 눈치가 없는 희수도 알 수 있었다.
“몸은 괜찮은 거니? 이렇게 자수를 놓아도 정말 괜찮겠어?”
“네, 하루에 한 시간 정도인 걸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계모는 한숨을 내쉬며 희수의 수틀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아가, 요즘은 침방 아낙들에게 일거리를 전부 맡긴단다. 그건 흠도 아니니 네가 이렇게 자수에 열을 올릴 필요 없어.”
“괜찮아요, 어머니.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 무리가 될 정도로는 하지 않아요.”
“산드라는 너무 옛날 사람이라 지독하게 전통을 고집하지. 산드라가 널 힘들게 하진 않니?”
“시녀장은 예민하긴 하지만 아가씨들이 잘해 줘서 괜찮아요, 어머니. 걱정 마세요.”
계모는 싸늘한 눈으로 시누이들을 훑었다. 여식을 보는 시선이라기엔 참으로 야박한 눈빛이었다.
“그래. 카일리, 크리스틴, 캐서린은 교양 있는 숙녀들이니 말이다.”
이름이 불린 시누이들은 뭔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들처럼 계모의 눈을 피했다.
“산모에게 잘해 주렴.”
시누이들은 입을 모아서 ‘네, 어머니’ 하고 대답했다.
“이 저택에서 힘든 점이 있다면 반드시 네 남편과 상의하렴, 아가.”
계모는 침방을 나갈 때는 항상 희수에게 같은 당부를 전했다.
“부부는 고난과 행복을 같이하는 사이니 말이다.”
“네, 어머니.”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계모는 결코 못된 시어머니는 아니었다. 희수는 항상 조언을 해 주는 시어머니와 칭찬만 해 주는 시누이들 사이에 있어서 시녀장을 견딜 수 있었다.
‘여자들끼리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니까 편하고 참 좋네.’
여느 도련님들이 그렇듯 레이놀드와 크리스토퍼한테도 유모가 있었다. 아이들과 그리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지만 희수는 굳이 그녀가 할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일까지 도맡았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희수의 전부였다. 레이놀드의 말이 빠른 건 그런 이유가 컸다.
그러니 오히려 하루 종일 육아에 시달리는 희수에겐 그나마 자수 시간이 숨통이 트였다.
“새언니는 참 좋겠다.”
“왜요, 아가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누이들은 자수 시간이 끝나면 항상 허탈해했지만 희수는 거기까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자수가 잘 안 풀려서 그런가 봐.’
시누이들은 손재주가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계모의 말처럼, 이런 손재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시누이들은 고귀한 아가씨로 태어났으니까.’
이 같은 소일거리를 즐겁게 여기는 건 희수가 갈리아 켈티카의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귀부인들은 일을 하는 걸 그리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구나.’
이처럼 희수는 귀족들의 성향과 다른 기질이 있었다. 때문에 귀족사회에 물처럼 스며들기 위해서는 많은 관찰과 본보기가 필요했다.
‘그러니 이 대저택은 내게 좋은 배움터가 될 거야.’
참고, 견디는 건 희수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까다롭긴 해도 좋은 귀감이 될 선생들이 곁에 포진해 있지 않은가?
‘시녀장쯤이야.’
그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돌풍이 멎은 동안, 잠시 휴게한다.”
칼릭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내 긴장하고 있던 성기사들의 어깨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성기사단이 와 있는 곳은 갈리아 켈티카에서 가장 고지가 높은 지대였다. 이곳은 바람이 거세어 성력, 파란 불꽃을 유지하는 훈련에 안성맞춤이었다.
아직도 도시 철벽 밖에는 매녹과 도둑들이 돌아다녔다.
‘매녹의 인육을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니, 그런 괴담이 있나.’
시체를 탐하고 얻는 건 끔찍한 죽음뿐이었다. 눈알이 벌겋게 변하다가 끝내 터져 버리면 육신은 살아 있는 시체가 된다.
이 소문 때문에 아직도 갈리아 켈티카의 도시 밖에는 매녹이 존재했다. 그리고 매녹과 관련된 어마어마한 소문들을 낳았다. 실제로 매녹의 수가 많았던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 흉흉한 소문은 의외로 몇몇 집단에겐 꽤 이득이 된다.
도둑들, 상인들, 시의회, 무역상, 그리고…… 신전까지.
매녹의 시신을 취하기 역겨운 부자들은 아쉬운 대로 이방인의 물건을 부적처럼 지녔다. 시의회는 매녹에게서 시민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철벽을 고집하고, 공간을 한정시킨다. 그리고 농산물을 보관하면서 돈을 번다.
신전은 사실상 철벽 밖의 모든 지역을 소유하게 되었다. 블랙캐슬이라는 도시와 더불어. 그래서 신전에선 매녹과 관련된 소문들을 딱히 제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썩었다.’
칼릭스는 전 교황을 죽임으로써 양심을 지켰다. 그자가 사라지면 이 세상이 더는 악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자가 사라지고, 이 세상이 새하얗고 순결한 곳으로 변하리란 믿음은 조각났다. 그의 빈자리를 메울 인간들은 꾸역꾸역 나타났다.
세상을 더럽히는 인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전 교황을 시해했듯, 그 모든 이들을 벌하고자 한다면 칼릭스는 모반을 일으켜 새 나라를 건설해야 했다.
물론 그럴 마음은 없었다. 칼릭스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 남기로 했다. 신전에 속해 있는 그가 선과 악을 가리는 것부터가 모순이었다.
만약 이 세상에 절대적인 선이 있다면, 그건 제 아내와 아이들뿐이었다.
그래, 칼릭스에겐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제 목숨보다 소중한 아내의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칼릭스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만 살 생각이었다.
제 목숨은, 온전히 아내의 것이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카를로.”
카를로스가 그가 앉아 있던 절벽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새삼스럽게 칼릭스의 위아래를 훑었다.
“이야.”
카를로스가 왜 저러는지 빤히 알고 있는 칼릭스는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만해.”
“때깔이 아주 죽여주는데.”
“…….”
“이야.”
카를로스는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그의 머플러를 가리켰다.
“이건 대체 어디서 산 건데?”
“산 거 아니다.”
이 훈련만 다녀오면 그의 몸이 얼음장 같다고 희수가 그 무거운 몸을 혼자 꼼작거리며 만들어 주었다. 칼릭스에게 잘 어울리는 색을 부러 골라서, 이름까지 새겨 주었으니 닳도록 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는 닳기 전에 다른 것을 내밀지만.
“아내가 만들어 줬어.”
“와우, 부인께서 무려 직! 접! 만들어 주셨군?”
칼릭스는 아내 이야기만 나오면 꼭 제 입으로 제 자랑을 떠드는 교만한 이가 된 것처럼 부끄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하고 다니는 것 중에 눈에 띄게 좋은 건 전부 아내가 골라 주거나, 아내가 만들어 주거나, 아내가 해 준 거니까. 자랑할 만한 건 전부 희수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칼릭스의 얼굴이 벌게졌지만 카를로스의 감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굴이 아주 폈다. 활짝 폈어.”
“…….”
칼릭스는 집에만 다녀오면 티가 나는데, 가장 첫 번째가 바로 머리였다. 오늘은 그의 금발이 가지런히 모아져 잘생긴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유부남 같지가 않단 말이지.”
“헛소리 좀 하지 마.”
“결혼하기 전보다 훨씬 잘생겨졌다고. 정말 멋있어졌어!”
“…….”
민망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었다. 아내의 손길을 받으면 누구든 전보다 훨씬 외양이 나아진다. 그런 그녀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를 받으니 그의 외모는 그야말로 빛이 났다.
희수에게 말은 못 하지만 칼릭스는 이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도 처했었다.
“이러니까 포교단에서 널 탐내는 거겠지. 네가 광장에만 떴다 하면 그날은 입교하는 여신자들이 정원까지 줄을 선다던데…….”
“아내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
“어허이, 장난이야.”
“장난이라도.”
“알았다, 알았어.”
카를로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이 훈련만 왔다 하면 예민해지는 칼릭스를 모르지 않았다.
그림 같은 친구의 옆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제발 빨리 좀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
흠칫 놀란 칼릭스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들켰나.”
“쯧쯧, 그러게 이딴 거 누가 만들었냐.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 박 삼 일 동안 이게 웬 개고생이야?”
“…….”
칼릭스는 긴 한숨으로 자신의 죄를 고했다. 뒤에서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는 단원들이 들었다간 섭섭해하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칼릭스는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여우 같은 아이들과 토끼 같은 아내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 단란한 제 가족을 생각하면 칼릭스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못 할 짓이 없었다.
어린 날, 그가 키웠던 아기 새는 손이 많이 갔다.
동료들은 귀찮은 것을 왜 돌보느냐 물었지만 칼릭스에겐 그런 존재가 필요했다. 손이 많이 가고, 그래서 제 애정을 나눠 줄 수밖에 없는 그런 귀찮은 존재가 필요했다.
칼릭스는 제가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소중한 것을 만들어 그렇게라도 살아가고 싶었다. 그 소중한 것을 위해서.
하지만 아기 새는 그가 며칠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만 죽고 말았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자립하지 못하는 존재는 결국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희수를 제 품 안의 아기 새로 만들려던 그 방식은 틀렸었다.
홀로서기에 성공한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버려질까 전전긍긍 두려워하지 않았고, 칼릭스는 신뢰로 쌓은 지금 그녀와의 관계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소중한 존재가 이제는 둘이나 더 생겼다. 희수의 배 속에는 셋째도 있었다.
칼릭스는 책임감 하나로 살아온 남자였다. 그래서 이제는 사는 게 제법 즐거워졌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소중한 것들이 늘어나서.
죽는 날까지 반드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너도 이발할 때가 됐네.”
카를로스가 관심을 보이자 칼릭스는 길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언제 자를 거야? 나도 같이 좀…….”
“안 자르려고.”
“네 부인이 내 이발을 해 주는 게 싫어서 그러지?”
카를로스가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봤지만 칼릭스는 그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를 거야.”
“뭐? 왜?”
“아내가 긴 머리를 좋아해.”
희수는 지금도 종종 취미 삼아 머리를 만졌다. 가끔은 시녀와 하녀, 아이들한테까지도 해 주는데, 그중 희수가 제일 좋아하는 건 긴 머리였다.
식량이 부족한 갈리아 켈티카에서는 시의회에 고가의 부담금을 지불해야 셋째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희수는 간절히 셋째 아이를 바랐다.
‘당신 닮은 딸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 내 소원이야.’
정확히 말하면 희수는 여식을 바랐다. 긴 머리를 기르고 그녀가 예쁘게 꾸며 줄 수 있는 친구 같은 딸아이를.
칼릭스는 만약 셋째 아이가 여식이 아니라면, 내가 대신 머리카락을 길러 줄 테니 이제 그만 낳자고 희수를 설득할 작정이었다.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이제 결혼한 지 5년째 아닌가? 지겨울 때도 됐을 텐데…….”
카를로스는 질린 얼굴로 그를 비꼬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애처가 클로비스 경.”
칼릭스는 그의 등짝을 두드리며 이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몸은 고되고, 가족이 보고 싶어 죽겠지만 일이 끝나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칼릭스는 제발 시간이 빨리 가길 바라며 훈련에 집중했다.
“휴식은 끝났다!”
* * *
희수는 오늘도 어김없이 침방에서 자수를 놓았다.
며칠 만에 가문의 인장을 완성하자 시녀장은 내심 놀란 눈치였다. 오늘은 희수를 혼낼 이유가 없어서인지 시누이들과 시녀 몇 명만 남겨 둔 채 이른 시간에 자리를 떴다.
시누이들은 이때다 싶어 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꺼냈다.
“클로비스 경은 너무 냉랭해서 말을 붙이기가 어려워요.”
“맞아요. 옆에 있어도 없는 사람 취급한다니까요.”
“역시 우리를 싫어하나 봐요.”
과장이 섞인 푸념이었다. 시누이들은 칼릭스와 조금도 친하지 않았지만 희수는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칼릭스와 같은 핏줄이란 걸 실감했다.
‘성격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면이 있다니까.’
제 앞에서 이렇게 애교스럽게 굴 때면 특히 그랬다.
“아직 아가씨들이 낯설어서 그럴 거예요. 얼굴을 자주 보다 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요?”
희수의 긍정적인 대답에 시누이들은 내심 기대했다.
“언제…… 그렇게 될까요?”
“우리가 클로비스 경을 자주 볼 기회가 있을까요, 새언니?”
“언제요?”
시누이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의 가까이로 모여들었다.
그가 쉬는 날 함께하는 오찬 자리를 마련해 주거나, 더 나아가서는 자신들이 여는 연회에 그를 참석시켜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전해 듣기로는 그가 아내의 의견을 꽤 수렴한다고 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들은 곧 결혼을 하시는구나. 그럼 정말 영영 친해질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활짝 웃은 희수가 엉킨 색실을 정리하며 말했다.
“전에 둘만 살던 곳에서는 글쎄, 남편이 한 번도 대화를 나눠 보지 않은 시종이 있었다니까요. 이름도 잘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 그렇게 자주 봤는데, 참…… 남편은 무심한 면이 있어요.”
푸시시식. 단번에 기대가 식은 시누이들은 각자의 수틀로 눈을 돌렸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했담. 발 벗고 나서서 그의 등을 좀 떠밀면 티타임이라도 함께할 수 있을 텐데, 오찬이나 만찬은 무리라도 말이다.
한데 그녀는 남편에게 이복누이들과 친해지라고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클로비스 경은 우리 집안에 다시 들어오는 걸 탐탁잖아 했다고 했지.’
그래도 그렇지, 권속이 딸린 가주가 되었으면 두루두루 말을 섞고 지내야 할 것 아닌가?
한데 그녀는 작은 마님이라고 불리면서도 불편한 역할을 맡지 않았다. 남편이 싫어하는 것을 일체 강요하지 않으니 좋은 아내일지는 모르나, 가문의 안주인으로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아무리 억지로 대저택에 들어왔어도 그렇지,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왜 안 하려 한담.’
입술을 삐죽인 캐서린은 삐뚤빼뚤한 자수에 신경질적으로 바늘을 꽂아 넣었다.
“클로비스 경은 아주 좋겠어요. 새언니처럼 이해심 많은 아내가 있어서요.”
“항상 그렇게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캐서린 아가씨.”
희수는 매번 듣는 칭찬에 민망하면서도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시누이들은 칼릭스와 같은 머리색에, 같은 눈동자 색을 가졌다. 그런 그들에게 ‘오라비의 좋은 아내’라고 수없이 칭찬을 들으니 정말 결혼 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댁 식구에게 인정받는 게 이런 건가.’
힘든 육아와 아내 역할까지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고 응원받는 기분이었다. 수줍게 웃은 희수는 캐서린의 비틀어진 수틀을 바로 잡아 주며 속삭였다.
“아가씨도 결혼하면 분명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을 거예요.”
“…….”
기가 막힌 캐서린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느라 불퉁하게 대꾸했다.
“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희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는 아직 미혼인 아가씨들이 숨 쉬듯 내뱉는 말이었다.
‘예의상 하는 말이랬지.’
입으로는 결혼하기 싫다고 말하는 게 예의라고 했다. 정숙한 숙녀로 보이기 위해서. 결혼하고 싶다는 건 출가하고 싶다는 뜻이기에 부모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도 했다.
허나 막상 이들은 결혼에 열을 올렸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하자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이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곁을 떠나기가 싫은 거죠, 아가씨.”
결혼 얘기가 나오면 이런 말로 미혼 아가씨를 위로하는 게 예의였다. 희수는 애써 안쓰러운 듯이 시누이를 위로했다.
‘귀족들은 예의 차릴 일이 너무 많아.’
희수는 대화가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가끔 헷갈렸다. 물론 대부분 틀렸지만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이 또한 예의였다.
“아니, 난 정말 결혼하기 싫어요. 진심으로요!”
“물론 그렇겠죠. 이해해요, 아가씨.”
“아뇨, 새언니는 아무것도 이해 못 해요!”
안 그래도 계속 예민했던 캐서린은 쥐고 있던 바늘을 내던지며 벌떡 일어섰다.
“시집가서 즐겁게 사는 여자들을 본 적이 없다고요! 아무도 행복하지 않아요! 그런 걸 대체 왜 해야 하죠?”
“캐서린!”
놀란 카일리가 동생을 다그치며 끌어 앉혔다. 하지만 울컥한 캐서린은 눈물마저 글썽였다.
“모자란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을까 봐 결혼해야 하나요? 아니면 늙어서 수도원에 가게 될까 봐요?!”
너무 흥분한 탓일까. 캐서린은 침방에 들어온 시녀장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세상은 불공평해요! 여자들은 결혼해도 불행하고, 안 해도 불행하니까!”
시녀장은 소리 없이 캐서린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따귀를 때렸다.
짜악! 짜악! 짜악!
연달아 3대를 맞은 캐서린은 볼을 감싸 안고 옆으로 쓰러졌다. 희수는 경악한 눈으로 시녀장을 올려다보았다.
‘시녀 주제에 어떻게 주인 아가씨한테 저럴 수가 있지?’
한데 시녀장의 무감한 얼굴엔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카일리와 크리스틴은 뭐라고 한마디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시선을 피하고만 있었다.
정말 괴이한 광경이었다. 맞은 캐서린도 울면서 뛰쳐나가거나 씩씩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털고는 담담히 사과했다.
“제가 예의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을 보여 우리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어요. 우리 가문의 식구가 된 새언니 앞에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모두에게 미안해요. 카일리, 크리스틴, 미안해. 새언니, 미안해요.”
카일리와 크리스틴은 입을 모아 다신 그러지 말라고 훈계했고, 희수는 말 못할 충격을 받아 입술만 뻐끔거렸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자수를 확인하러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녀장은 다시 침방을 나갔다.
‘악마 같은 노인네!’
희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시녀장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남은 사람들은 침묵에 휩싸였다.
캐서린은 가끔 훌쩍거렸고, 카일리와 크리스틴은 자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집중했다. 시녀장이 저런 말을 던지고 나갔으니 제대로 하지 못하면 분명 회초리를 들 터였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시녀장이 캐서린의 따귀를 때린 일을 계모에게 알려야 할지……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어머니는 이 일을 안다고 해도 개의치 않을 거야.’
방금 몇 명이 시녀장을 따라 나갔으니 어쩌면 계모는 이미 이 일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겠지.’
저보다 훨씬 어린 아가씨들이 안쓰러웠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일곱 자매를 귀하게 여기지 못한 계모 또한 불쌍하긴 마찬가지였다.
‘왜 세상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들이 있는 걸까.’
어린 날의 제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에게 구박받던 그때의 서러운 심정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 순간 제멋대로 손이 뻗어졌다.
“아가씨, 그거 이리 줘요.”
희수는 캐서린의 자수를 갖고 오고, 제 걸 캐서린에게 건넸다.
“그 노인네가 또 우리 몸에 손대면, 이번엔 정말 가만있지 않겠어요.”
“네?”
“지금 뭐 하려고…….”
세 자매는 짐짓 당황한 눈치였다. 그때, 밖에서 시종이 재빠르게 문을 두드렸다. 시녀장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희수는 삐뚤빼뚤한 캐서린의 자수를 제 수틀에 올려 둔 채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또 때리기만 해 봐.’
분노가 치밀었다. 일을 크게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은 이미 잊혀진 후였다.
시녀장은 얼음처럼 냉혹한 얼굴로 침방에 들어섰다.
“저녁식사를 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설마 하루 종일 자수를 놓고 계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다들 조용하자 시녀장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뭐라고 묻진 않고, 그저 작은 흠이라도 있을까 꼼꼼한 눈으로 모두의 자수를 확인했다.
마침내 시녀장의 눈이 희수의 수틀을 살폈다.
“작은 마님.”
시녀장은 묘한 얼굴로 희수의 수틀을 툭 건드렸다.
“이게 전부 완성된 건가요?”
희수는 도전적인 눈으로 산드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요, 시녀장.”
항상 이름으로만 불리던 산드라였다. 그런 그녀를 호칭으로 하대하니 모두가 움찔 놀랐다.
“시녀장이 보기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산드라는 눈싸움을 하듯 한참이나 희수를 응시했다. 주위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조용했다. 먼저 시선을 거둔 건 바로 산드라였다.
“……아닙니다.”
그 순간 희수는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까마득히 나이 많은 노인을 상대로 몹쓸 짓을 한다는 죄책감도 뒤로한 채,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다들 목이 마른데, 물이나 갖다줘요.”
희수는 일부러 건방진 말투로 명령했다. 당신은 시녀일 뿐이고 이들은 가문의 주인인 아가씨들이라고요. 그런 의미였다.
산드라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자존심 때문인지 희수에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작은 마님께서 목이 마르다고 하시는구나.”
산드라는 어린 시녀에게 물쟁반을 가져오라 시켰다. 괜한 희생양이 된 어린 시녀가 사색이 된 얼굴로 물쟁반을 가져왔다.
희수는 컵을 받아 들고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미지근한 물 말고요, 시녀장. 시원한 물을 가져와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산드라는 어린 시녀에게 다시 같은 명령을 내리면서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희수는 물을 받아 들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시원한 물이라니까. 다시 말해야 하나요?”
산드라는 매서운 눈으로 어린 시녀를 할퀴어 보았다.
“넌 심부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대체……!”
“시녀장, 당신에게 시킨 일이잖아요. 내게 차가운 물을 가져오라고요.”
당신이 직접.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산드라의 입에서 포기하듯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작은 마님.”
산드라는 결국 제 손으로 물병과 컵이 담긴 은쟁반을 들고 왔다. 이제 되었냐는 눈으로 희수를 빤히 쳐다보던 산드라가 먼저 몸을 돌렸다.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녀가 문을 닫고 나가는 동시에 주위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작은 마님, 제발 이러지 마셔요. 네?”
어린 시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희수는 걱정 말라고 가볍게 웃어 주었다.
‘정말 통쾌해.’
그녀가 쟁반의 물을 마시려 하자 내내 조용하던 세 자매가 기겁을 하며 희수를 말렸다.
“물에 독이라도 탔으면 어쩌려고요?”
“이상한 데서 겁이 없네요, 새언니는.”
희수는 찝찝한 눈으로 투명한 물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독을 탔을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는데 괜히 찝찝해졌다.
‘나름대로 복수를 해 주었으니 좋아할 줄 알았는데.’
한데 세 자매는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의외라는 듯 말없이 희수를 힐끔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오히려 미묘한 얼굴로 알 수 없는 소리를 해 댔다.
“괜한 짓 말아요. 시간 낭비라구요.”
“맞아요. 차라리 클로비스 경이 돌아오면 그때…….”
그 순간 창문 가까이 서 있던 시녀들이 밖을 보며 깜짝 놀랐다.
“어머.”
“어머나, 망측해라.”
저들끼리 키득거리는 걸 보고 크리스틴이 제일 먼저 일어섰다.
“거기 무슨 일이니? 왜 그렇게 소란스럽게 구는 거야?”
그러자 시녀들이 헛기침을 하며 밖을 가리켰다.
“저어, 작은 마님께서 돌보시는 개가…….”
“그 개가 글쎄…….”
크리스틴은 창밖을 휘휘 둘러보다가 개를 발견하고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세상에, 망측하기도 하지!”
“크리스틴, 무슨 일이니?”
그녀의 경악한 표정을 보고 카일리와 크리스틴도 창문으로 다가섰다.
희수는 또 개가 탈출하여 정원에 똥을 싸고 다니는지 걱정되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리옹의 귀족사회는 애완견을 키운다는 인식이 아직 없었다. 그러니 들개가 집 안을 휘젓고 다니는 데 익숙하지 않은 시누이들을 이해해야 했다.
이 대저택에서 항상 구박받는 그 개가 안쓰럽긴 하지만…….
‘내쫓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지.’
하지만 이번엔 희수의 예상을 넘어섰다. 진상을 파악한 미혼 아가씨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세상에.”
희수 역시 정원에서 펼쳐진 광경에 경악하고 말았다.
“어…… 어머나! 저, 저 개는 뭐지?”
웬 낯선 수캐 한 마리가, 희수의 개 위에 올라타 있었다. 두 마리는 열심히 교미를 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꽃이 만발한 정원 한가운데서 신나게 그러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우리 개를! 우리, 우리 개를!”
희수는 심히 당황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며 시종을 찾았다. 다행히 식겁한 정원사가 먼저 달려가 빗자루로 두 개를 떼어 놓았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도망가던 수캐는 허공에 대고 민망한 모습을 연출했다.
“세상에나…….”
시녀들은 이미 그 망측한 광경에서 눈을 돌렸고, 시누이들만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붉어진 얼굴로 떡 벌어진 입을 가린 모습이,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 수캐가 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건지.”
희수가 놀란 가슴을 진정하는 사이 키득거리던 시녀가 대답했다.
“냄새를 맡고 암컷과 놀러 왔나 봅니다, 작은 마님. 저 들개가 개구멍으로 들어와서 마님의 개와 어울려 노는 것을 몇 번 보았거든요.”
“그랬구나. 얼른 우리 개를 안으로 들여놓아야겠다.”
“네, 지금 데려올까요?”
다른 시녀가 창문 밖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정원사가 벌써 안으로 들여놓으려나 봅니다, 작은 마님.”
그 말대로 정원사가 희수의 들개를 안고서 부부가 머무는 건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클로비스 경이 아셨다간 정원사들은 다 쫓겨날 겁니다. 천박한 들개가 어딜 감히 숨어 들어와선 그런 몹쓸 짓을 벌이는지!”
시녀가 칼릭스에게 혼날까 두려워 지레 씩씩거렸다. 희수는 그에게 이런 일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그녀가 애완견 걱정에 뒤늦게 아가씨들을 살폈다. 카일리와 크리스틴은 뜨겁게 달아오른 볼을 쥐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상에, 그 개가 수캐하고…… 그, 그,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나, 나도 몰라. 넌 그런 걸 나한테 왜 묻니?!”
“세상에나…… 맙소사…….”
그들은 저택 밖으로 나갈 일도 없는 아가씨들이라 저런 광경은 생전 처음 보았던 것이다.
희수는 시누이들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고민했다. 그때 캐서린이 참지 못하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교양 없는 그 웃음소리에 시녀들도 고개를 돌리며 크게 키득거렸다.
“얘, 웃지 마!”
“캐서린, 그게 뭐가 웃기니! 당장 정숙하지 못하겠어!”
카일리와 크리스틴은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렸다.
침방의 여자들은 한동안 개 이야기를 하느라 시끌벅적했다. 분위기는 전에 없이 화기애애했다. 여자들의 커다란 웃음소리는 문밖을 넘은 지 오래였다. 세 자매는 경쟁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질러 대도, 득달같이 그들을 제지하러 달려왔어야 할 사람은 끝내 오지 않았다.
* * *
희수의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시간은 저녁이었다.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아이들을 안고 있으면 만삭의 불편한 몸에도 행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엄마, 동생 언제 와요?”
레이놀드는 제 아버지가 하는 걸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 희수의 배에 귀를 갖다 대기도 하고, 조심조심 손으로 쓰다듬기도 했다.
“열 밤만 자면 만날 수 있어, 레이.”
“흐음, 알버트는 보름이라던데.”
레이놀드는 언어발달이 빠른 편이었다. 둘째 아이와 비교해도 확실히 달랐다. 눈치도 만만찮았다.
“엄마, 또 다쳤어요?”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희수의 손등을 가리켰다. 소매가 긴 옷을 입어 남편도 아직 모르는 상처였다. 이상하게 꾸준히 약을 바르는데도 잘 낫지 않았다.
“레이가 호오 해 줬는데 아직도 안 나았어요?”
아이의 안쓰러운 얼굴이 손등의 상처와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왜요? 왜 자꾸 다치는 거예요?”
“다친 게 아니야, 레이.”
“아닌데, 이건 다친 건데.”
아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소매를 들춰 아직 벌건 회초리 자국을 보았다. 희수는 얼른 소매를 내려 다시 손등을 감췄다.
이걸 왜 자꾸 기억하는 걸까? 처음 발견한 뒤론 잊지 않고 매번 이렇게 손등을 확인했다. 아이의 집요한 기억력에 가끔 흠칫 놀랄 정도였다.
“엄마, 산드라가 그랬는데 글자를 틀리거나 실수하면 매를 맞아야 한대요.”
“레이. 산드라가 널 때렸어? 어디를?”
“아니요. 글자는 틀렸는데 전 안 때렸어요. 후계자는 매 맞지 않는대요.”
잠시 말을 멈춘 레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