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너랑 사는 거
* * *
우리는 왕을 믿었다. 그가 클로틸다의 간악한 꾐에 넘어가 이교도가 되어 개종하기 전까지는 오직 그만이 우리의 진실된 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떠나자. 그가 세운 왕국, 프랑크를 떠나자. 나무로 배를 만들어 망망대해를 건너 새로운 땅을 찾아 그곳에서 갈리아를 다시 일으키자.’
왕은 유일신을 섬기기 시작했고, 북쪽에는 로마가 있었다. 갈 곳이 없었던 우리는 죽음을 각오한 채 배 한 척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피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풍랑은 용기를 앗아 갔고 공복은 양심을 좀먹었다. 바다 위에선 법도, 도덕도 없었다.
식량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죽은 동료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죽어 버린 몸을 물고기의 먹이로 주는 것보다 차라리 노 젓는 선원들의 배를 불리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출항 전의 나는 계급의 가장 아래 있었지만 바다 위, 약육강식의 세계에선 무리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나는 언젠가 그들이 벌을 받을 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인간고기를 먹는 걸 묵인했다. 신은 반드시 죄지은 자에게 벌을 내리시므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검은 바다가 벌을 내리듯 배를 집어삼켰다. 대부분은 죽었고 살아남은 건 몇 되지 않았다. 그 몇 명이 이 대륙에서 눈을 떴다.
갈리아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일까.
이곳 사람들은 글자를 모르는 미개인들이었다. 전해진 지혜가 아닌 힘과 무력만이 있던 미개한 세상. 개중 마술을 부릴 줄 아는 몇 명이 그들을 다스리고 있었다.
미개인들은 글을 알길 원했다. 우리는 이곳을 찾은 이방인이지만 원주민들에게 글자를 남겨 줌으로써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는 사물에 이름을 붙여 주었고, 도시에도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글자를 나누어 주는 대신, 오직 우리들만 성을 갖기로 했다.
나는 내가 섬기던 왕의 이름을 성으로 가졌다.
클로비스.
왕은 변질되었지만 그의 이름을 가진 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곳에서 영원히 나의 신을 섬기리라. 클로비스 왕의 추종자가 알았다간 나의 목을 치겠지만 이제 이곳에는 왕을 아는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검은 바다를 건너 새로운 땅을 찾았고, 갈리아 켈티카를 다시 세우는 기적을 이뤄 냈지만 이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이제 나뿐이었다.
삶이란 검은 바다보다도 예상할 수 없는 것. 권력의 힘은 검은 바다의 풍랑보다도 거세었다. 나와 함께 왔던 이들은 전부 서로 싸우다 죽었다.
후손이여, 죽음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걸 아는가.
나는 동료들의 끔찍한 최후로 이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시체가 된 몸으로 다시 일어났다. 살아서 인간고기를 먹던 그 추악하고 끔찍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죽어서도 산 사람의 몸을 뜯어 먹으려 들었다.
원주민들은 내게 그들의 정체를 물었다.
나는 그들을 악령이 쓰인 존재라고 말했다. 악령의 이름은, 고민하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붙여 주었다.
희수는 거기까지 읽고 꼬질꼬질한 책을 덮었다. 아직 제대로 글자를 읽기도 어려운데 1500년 전의 기록을 떠듬떠듬 읽고 있자니 머리가 다 아팠다.
갈리아 켈티카의 수도 도시 리옹.
1500년 전, 이 나라를 세우고 신전을 만들고 도시를 지배했던 이 땅의 실질적 주인이 바로 클로비스의 선조였다.
‘설마 그 선조가 이방인일 줄은 몰랐지만.’
방금 확인한 내용이었다. 희수가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다가 이세계로 떨어졌듯이, 선조들 역시 대서양을 헤매다가 이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이 신대륙인 줄 알았고 언어와 문화를 남겨 미개지를 개척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어를 쓰는 것도 바로 그래서였어.’
하지만 희수가 내린 결론은 다크 홀을 통한 차원이동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멀쩡히 살아남은 건 바로 ‘은’ 덕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은’이 다크 홀 안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는지도 모른다.
‘선조들과 함께 떨어진 배에도 은화가 실려 있었다고 했지.’
리옹 신전에는 어둠의 절벽이라 불리는 낭떠러지가 존재한다. 옛날 칼릭스의 손에 이끌려서 갔던 그곳, 그곳엔 빛바랜 은색 동전들이 가득했었다.
‘내가 3년 전에 본 게 바로 그거였구나.’
갈리아 켈티카의 설립을 알게 되자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엔 이방인들이 이곳의 주류 세력이었다니.’
그런데 어쩌다가 지금은 이런 신세로 전락한 걸까. 희수는 죽은 민주 이후로 자신과 같은 이방인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얘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여기서 이방인들은 그런 존재였다. 평범한 시민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은 채 왔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작은 먼지.
‘지난 1500년간 이방인들은 계속 갈리아에 당도했겠지.’
그리고 그들이 남긴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옛 기록을 읽은 희수가 확신한 건 우선 딱 하나.
“이건 절대 갈리아의 시민들이 알아서는 안 되겠네요.”
그녀가 본 건 선조들이 남긴 옛 문헌의 해석본이었다. 1500년 전 쓰인 원본은 고어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부인.”
고개를 끄덕인 교황은 그녀의 손에서 해석본을 받아 다시 서가의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끙차, 만삭인 희수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걸 보고 교황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한쪽 팔을 부축했다. 그가 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도저히 돕지 않을 수 없었다. 희수의 배가 그만큼 정말 크게 불러 있었다.
“부인은 어째, 3년째 배가 불러 있는 것 같군요.”
“그런가요?”
겸연쩍은 웃음을 지은 희수는 그의 부축을 받은 채 은밀한 서재의 계단을 내려갔다.
“자주 뵙지 않았으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셋째였다.
첫째 레이놀드를 낳고 몇 개월 되지 않아서 둘째 크리스토퍼를 가졌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출산 후, 6개월 만에 또 셋째 아이를 가졌다.
희수는 연말에 한 번씩 신전을 찾아갔고, 그때마다 항상 임신 중이었다. 그러니 교황이 보기엔 3년 내내 배가 부른 모습이었다.
“조심하십시오, 부인.”
“걱정 마세요.”
두 사람이 함께 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교황은 불안에 떨었다. 임산부를 이렇게 가까이 한 적이 없어서 두려웠다.
그의 긴장이 희수의 팔을 꽉 붙든 손길에서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희수는 ‘임신이 체질’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을 만큼 건강한 임부였다.
일례로 지금 임신 8개월째지만 희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두 번의 출산을 거치며 칼릭스는 희수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인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제 아이들의 엄마가 된 희수를 점점 더 신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택 감금도 없어졌다.
희수는 남편의 허락 없이도 원하는 곳을 마음껏 다녔고, 언제든 원하는 이를 만날 수 있었다.
모든 게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랐고, 남편은 자신을 신뢰한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모든 걸 아무 의심 없이 믿어 주었다.
언젠가 이렇게 되리라 믿고 있었다.
그를 믿었고, 자기 자신을 믿었다. 그랬더니 부부 사이는 점차 좋아졌다. 하루하루 갈수록 가족의 행복은 더해 갔다. 꿈꾸었던 것보다 훨씬 더.
하지만 세상은 이들 부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정말 조용하네요.”
“이 서재에 출입할 수 있는 이는 나와 대주교뿐입니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드려요.”
“후우…….”
교황은 대답 대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막역한 친우의 부인이라도 갈리아 켈티카의 고대 기록을 이렇게 함부로 보여 줄 순 없었다.
한데 그녀가 정말 기막힌 타이밍에 이런 요청을 했다. 지금은 그녀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교황은 이 부부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
“클로비스 경은 아직도 많이 화가 났습니까?”
“음, 잘 모르겠어요. 얘기는 안 해 봤는데 그런 눈치예요.”
“하아.”
교황, 프란시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희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차라리 집사를 소개할 때 솔직하게 말을 하지 그러셨어요.”
“……솔직하게 어떻게 말을 했어야 합니까? 뭐라고 말했어도 클로비스 부인과 내가 작당했다고 생각할 게 뻔합니다.”
“클로비스 가문에서 걱정이 많으니 왕래를 하고 지내라고 하셨어도 됐잖아요.”
“경이 그럴 사람입니까? 부인도 잘 알겠지만 클로비스 경은 가문에 애정이 밀알 한 톨만큼도 없습니다.”
“제 말은, 교황님께서 언급이라도 하셨어야 한다는 거예요. 결국 보세요. 신전에서 소개한 집사가 나중에 보니 클로비스 부인의 세작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으니까 그이가 화를 내는 거죠.”
“부인, 알버트가 클로비스 부인의 첩자라는 건 순전히 오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건 인정하시죠?”
“…….”
집사가 클로비스 부인에게 저택의 일을 전한 건 사실이었다. 교황은 억울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신 눈치를 살피듯 친우의 아내를 힐끔댔다.
‘부인이 이렇게 말을 잘했었나.’
다행히 희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칼릭스보다는 대화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편의 마음을 달랠 줄도 알았다.
칼릭스는 아내의 말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수긍한다.
교황은 망가진 교우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다. 갈리아 켈티카의 고대 기록을 보여 달라는, 사실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교황님께서 어떤 압박을 받았을지 저도 알겠어요.”
고대 기록을 읽은 희수는 각 도시의 지주 가문과 시의회, 그리고 신전의 관계가 전보다 더 긴밀히 와 닿았다. 교황의 입장도 알 만했다.
지금은 리옹의 시장이 도시를 다스리지만 지주 가문의 영향력은 아직도 엄청나다. 클로비스는 리옹을 움직이는 세력 중 하나였다.
“신전의 주교회는 어떻게든 클로비스 가문을 한편으로 만들려는 거겠죠.”
“맞습니다, 부인. 시의회를 견제하기 위해선 지주 가문들과의 연대가 필요하지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던 그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갈리아 켈티카의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희수도 칼릭스와 살며 3년간 보고 들은 게 있었다.
지금은 신전과 주교회, 시장과 시의회, 그리고 지주 가문들과 귀족들의 관계를 충분히 파악했다.
“클로비스 경이 얌전히 가문으로 돌아갔다면 이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교황의 착잡한 목소리에 희수는 그가 안쓰러워졌다.
“그이는 가문의 후계 자리엔 아무 관심도 없어요.”
“부인,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가 황당하단 듯이 대꾸했다. 희수는 민망한 나머지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칼릭스와 교황은 무려 20년 지기였다. 서로를 오래 봐 온 데다 긴밀한 위치에서 함께 일하고 있으니 둘은 그야말로 막역했다.
“경이 가정을 꾸리고 살면 그래도 마음이 바뀔 줄 알았습니다. 제 실책이지요.”
“그러셨군요.”
“부인 또한 경이 가문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전 그 일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없어요.”
“클로비스 부인이 계모라서 싫은 겁니까? 아니면 그 일곱 자매 때문에?”
그랬다. 칼릭스의 계모에겐 7명의 여식이 있었다. 만약 그가 클로비스 가문에 돌아간다면 희수에겐 시모와 더불어 7명의 시누이가 생기는 셈이었다.
“상관없어요. 다만 이 일은 그이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부인.”
교황은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부인은 이미 그의 아들을 둘이나 낳았습니다. 클로비스의 아들이지요. 장담하지만 어느 누구도 부인을 괄시하지 못할 겁니다.”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감히 누가 저를 괄시하겠는가?
그는 어떤 일이 생기면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의 편을 들었다. 하늘에서 홀로 뚝 떨어진 이 세상에 남편은 언제나 제 편이었다. 다만 남편의 비호는 고맙긴 하지만 과한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든든하긴 해도, 심한 과보호는 꼴불견이다.
희수의 당부로 그나마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예전엔 저 몰래 글 선생도 갈아 치울 만큼 극성이었다.
희수는 오히려 저 때문에 계모와 척을 지게 될까 봐 걱정했다. 안 그래도 칼릭스는 계모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경은 부인의 말은 듣지 않습니까?”
희수는 난감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교황이 심술궂게 툴툴거렸다.
“이 서재에 부인이 왔었다는 게 들키면 전 파면입니다.”
대의를 위한 선한 거짓말이었다. 교황은 파면당하지 않는다. 주교회에서 욕을 먹을 뿐.
“그리고 상식적으로 말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부인의 탓도 있습니다!”
“…….”
신전이 등을 떠밀고 클로비스 부인이 급하게 행동을 개시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희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심지어 교황마저 알고 있는 ‘그 일’은 희수조차 낯부끄러웠다.
곧 둘의 첫째 아들인 레이놀드의 세 번째 생일이 다가온다.
영아 사망률이 높은 이곳에선 3살이 지나야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데, 칼릭스가 본인은 성이 없다며 아이들에게 희수의 성을 붙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의 독단이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족보가 아니라 역사서에 이름이 올라갈 겁니다, 부인.”
교황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희수는 그의 한심하단 눈빛에 얼굴이 다 뜨거웠다. 아이에게 엄마의 성을 물려주는 건 갈리아 켈티카에선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과한 욕심입니다.”
“알고 있어요. 근데 저도 좀 억울해요. 제가 그이한테 부탁한 것도 아니라고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해 본 적 없어요!”
예전에 희수가 ‘베키’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했었다. 그때 칼릭스는 그녀에게도 따를 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3년간 아무 말 없더니 돌연 공표한 것이다. 레이놀드와 크리스토퍼에게 엄마의 성을 물려주겠다고. 그게 얼마 전이었다.
가장 먼저 이 일을 알게 된 저택의 고용인들은 혹시 우리 주인어른이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억만금을 줘도 갖지 못할 ‘클로비스’를 왜 아이들에게 주지 않겠다는 건지, 진심으로 칼릭스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있었다.
“정말…… 알 만합니다.”
교황은 너무 착잡한 나머지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그녀의 말이 고스란히 믿겨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믿지 않았겠지만 클로비스 경이라면 정말 그런 해괴한 생각을 했을 것 같단 말입니다!”
“저도 놀랐지 뭐예요.”
남편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희수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 주는 남편에게 기쁘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걱정스러웠다.
엄마의 성을 아이들에게 주겠다니, 그게 어디 말만큼 쉬운 일인가? 부친이 없었던 희수는 모친의 성을 따르긴 했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였다.
그녀가 살았던 현대 사회에서도 아직 낯선 일을 어떻게 이곳에서 해낸단 말인가. 선구자가 되어 보겠다는 욕심도 잠깐 들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리옹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도시였다. 사람들의 눈 밖에 났다간 큰일이었다.
더군다나 소문이 빠른 귀족사회에서 아이들이 어떤 말을 들을지 생각하면 희수는 절대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를 알게 된 클로비스 가문에서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희수의 저택에 사람을 보내왔다.
클로비스 가문에서 어떤 연락을 받은 건 두 사람이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클로비스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자손의 이름을 정할 나이가 되었으니 귀경과 그의 아내는 클로비스 대저택으로 주거를 옮기라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본가에 합가하라는 소리였다.
갑작스러운 계모의 개입에 놀랄 겨를도 없이, 믿고 있던 집사 알버트가 자신이 클로비스 가문과 신전의 중간다리 역할을 해 왔다는 걸 먼저 고백했다.
안 그래도 칼릭스는 내내 집사를 의심해 왔다. 희수는 몇 번이나 집사를 두둔했지만 결국 칼릭스의 말이 맞았다.
분노한 그가 집사의 목을 치겠다는 걸, 희수가 말렸다. 칼릭스는 스스로 사제직을 사임하고 영원히 신전을 떠나겠다 했지만 이 또한 희수가 말렸다. 열심히 달래서 겨우겨우 출근시켰다.
칼릭스는 만삭의 아내가 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경이 결혼하고 많이 점잖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섣부른 오판이었지요.”
“반박하기 어렵네요.”
칼릭스는 그녀의 앞에서는 출근하겠다고 얌전히 저택을 나갔지만 가서는 신전을 뒤집어 놓았다.
그래서 희수가 신전에 들른 것이다. 겸사겸사, 전부터 읽고 싶었던 갈리아 켈티카의 고대 기록을 보여 달라는 핑계로 교황의 생각을 좀 알고 싶었다.
‘주교회의 등쌀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었겠지.’
교황은 온전히 고의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주교회의 구박받는 허수아비 입장을 가장 잘 헤아리는 것도 바로 칼릭스였다.
“아마 그이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교황님의 입장을요.”
그렇다고 설마하니 교황이 제게 첩자를 소개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막역한 친구이자 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인데.
“하지만 배신감이 엄청났겠지요.”
“부인,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미안해요.”
프란시스는 칼릭스에겐 이미 여러 차례 사과했지만 희수에겐 처음이었다. 하마터면 남편의 계모에게 아이들을 빼앗길 뻔했으니 그녀에게 사과를 하는 게 사실 먼저였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당시에는 클로비스 경에게 그 길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나중에는 나 역시 내키지 않았어요. 설마 부인의 성을 물려주겠다는 소리를 할 만큼 단호할 줄은 몰랐단 말입니다.”
“이해해요. 얼마나 그이를 염려했는지 잘 알고 있고, 제 성을 주는 건 저 역시도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조심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니까요.”
희수는 이미 오래전에 클로비스 가문과의 갈등을 각오한 상태였다. 클로비스 부인에 대해 여기저기서 들은 바가 많으니까.
“그이하고…… 신전에서 설전을 벌였단 소리를 듣고 저도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부인의 남편이 제 응접실 창문을 다 깨 놓았습니다. 저의 잘못과는 별개로 수리비는 청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농담입니다. 부인은 정말 의연하시군요. 집사 또한 해고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집사는 배울 게 많은 사람이니까요.”
알버트는 클로비스 가문에 대해서도 잘 알고, 귀족사회에도 능통했다.
희수는 3년간 지켜보았던 그의 충성을 믿기로 했다. 새로운 집사를 구한다 해도 그자가 알버트보다 믿을 만하다는 보장도 없었다.
“지금 부인께서 이렇게 침착하시니 신께 감사할 일입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어요.”
희수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교황은 다시 그녀를 부축했다. 담담한 그 옆모습을 응시하던 교황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긴 계단이었다. 한 길뿐인 통로에는 한동안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윽고 비밀 서재의 입구에 다다랐다. 교황은 출입문이 처음 잠겨 있던 때처럼 7개의 자물쇠를 걸었다.
이 서재에 있는 고서들은 전부 갈리아 켈티카의 비밀이었다. 희수가 본 건 극히 일부지만 클로비스 가문의 선조가 이방인이었다는 것부터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될 일이었다.
교황과 단둘이 대화할 수 있는 건 지금이 기회였다.
희수는 복도를 돌아 나가기 전, 그를 멈춰 세웠다.
“그이가 싫다고 하면…… 강요할 순 없어요.”
칼릭스는 지금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서 클로비스 가문과 얽히는 걸 극히 꺼려했다. 하지만 희수는 이대로 지낼 수가 없었다. 피한다 해도 가시밭길을 가는 건 똑같으니까.
아이들은 리옹의 아카데미에 다녀야 하고, 희수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귀부인들의 사회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동안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건 3년 내내 임신 중이었기에 그나마 변명할 수 있지만,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레이놀드의 이름이 리옹에 알려지게 되므로.
칼릭스가 내내 ‘클로비스 경’이라 불리는 것처럼, 이는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와 결혼했으니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겠지.’
제 아이들에게 ‘가문 밖의 사생아’ 소리를 듣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남편의 계모에게 구박을 받는 게 더 나았다.
남편의 계모, 그리고 7명의 시누이.
듣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조합이었다. 칼릭스는 제게 미안해서 그 복잡다단한 집안일에 끼고 싶지 않아 하지만 희수는 견뎌 낼 자신이 있었다.
희수는 용감하게도 그들이 사는 클로비스 대저택에 들어가 살기로 마음먹었다.
‘난 여기서도 살아남았어.’
연고자 한 명 없는 이세계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남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었다.
희수는 교황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당부했다.
“우리 가족을 돌봐 주셔야 해요. 그이를 아끼듯이 저도, 아이들도…….”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교황의 눈썹이 꿈틀했다. 애써 기밀을 보여 준 보람이 있었다.
“부인, 난 부인의 결혼에 증인을 섰습니다. 맹세하지만 절대로 악의를 품었던 게 아닙니다.”
절대로 가정의 평화를 깨려고 했던 짓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이 가정의 수호자나 다름없었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교황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부인의 아이들을 책임질 의무도 있습니다.”
“그런 소리 마세요. 남들이 오해한다고요.”
“셋째 아이 이름을 요즘 얼마나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필립은 어떻습니까?”
“여자아이예요.”
“제 직감이지만.”
“아무 말 마세요. 이미 실비아라고 지었어요.”
“글쎄요. 제 꿈에 호랑이가 나왔던데 역시 이번에도…….”
“셋째는 여자아이라고요!”
* * *
“그들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칼릭스는 계모와 7명의 이복누이들과 한 저택에서 사는 걸 원치 않았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얽혔으나 남이나 다름없는 불편한 사이였다.
“분명히 널 괴롭히고 못 견디게 할 거야.”
“그럴 리 없어요.”
“그 마귀 같은 여자들 사이에 어떻게 너를……!”
칼릭스는 생각만 해도 통탄스러운지 이마를 감싸 안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난 그렇게 약하지도 않아.”
“그 살쾡이들한테 넌 완전히 피라미야. 뜯어 먹힐 거라고.”
“피라미라니, 전혀 아니야.”
기막힌 비유에 희수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심각했다.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라곤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옆에 없는 사이에 무슨 말을 들을지 어떻게 알아? 널 괴롭히고, 못살게 굴면서 힘들게 하면 어쩔 건데.”
“난 당하면서 살지 않을 거야.”
그 당찬 말에도 칼릭스는 코웃음을 쳤다.
“넌 그 여자들한테 상대도 안 돼.”
“…….”
남편은 여전히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가녀린 여자로 여겼다. 8살이나 나이가 많은 제가 어떻게 그의 눈에 그렇게 보이는지 매번 놀라웠다.
‘내가 눈치가 없어서 그런가.’
희수는 언어를 익히면서 이를 인정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결코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거짓말을 하는지 등 속내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걱정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희수는 자신 있었다.
“지금처럼 지낸다면 우리 애들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내 출신에 대해서도…….”
“그깟 소문 좀 듣는다고 그게 뭐?”
“그런 소리 안 들었으면 좋겠어. 레이, 크리스, 그리고 셋째까지 평범하게 자랐으면 좋겠어. 애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어떡해?”
“내 자식이야. 나약할 리 없어.”
칼릭스는 3년간 함께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녀의 말에 반대한 적이 없었다. 희수가 원하는 모든 걸 다 해 주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완강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 응?”
희수는 고집스러운 남편의 옆얼굴을 쓸었다.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동안 자신은 살도 찌고 많은 게 변했건만, 그는 예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모든 걸 다 바쳐서 너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던 그 다짐조차도.
“하, 네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결국 희수는 그날 그의 마음을 돌렸다.
설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이번에도 끝내 아내의 말을 들어주었다.
“여보, 우리 나가서 해 지는 거 구경해요.”
“추운데 어딜 나가.”
“네가 안아 주면 되지. 응?”
“…….”
기분이 좋아진 희수는 그를 달래서 발코니로 나갔다. 오랜만에 그와 함께 앉아 노을을 구경했다. 벤치가 아니라, 푹신한 쿠션을 깔고 바닥에 앉았다.
갈리아 켈티카의 스타일은 아니지만 칼릭스는 그녀가 이끄는 낯선 문화에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 없었다.
남편에게 기대 반쯤 누운 희수는 정원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미소 지었다.
“내가 왜 클로비스 대저택에 들어가자고 했는지 알아?”
“무서운 게 없어서.”
“왜 무서운 게 없을까요?”
“하룻강아지라서.”
“여보,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은 건 기억하죠?”
무심히 그녀의 볼을 쥐었다 놓았다 하던 칼릭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내가 작정하고 애교를 부리면 도저히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난 네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칼리.”
진심이었다. 시어머니와 7명의 시누이들이 있는 그 저택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은 바로 남편 때문이었다. 희수는 그와, 제 아이들과 함께인 이 삶이 기꺼웠다.
“그러니까 대저택에 합가하면 여자들의 일에는 끼어들지 마.”
칼릭스는 처음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내 편을 들려고 하지도 말고.”
하지만 내 편을 들지 말라는 말에는 반사적으로 불퉁한 대꾸가 나왔다.
“싫다면?”
“유난스럽다고 할 거야. 이제 그런 말 듣는 거 싫어. 나 때문에 네가 그런 말 듣는 거, 정말 싫어.”
희수는 칼릭스의 주위에서 장난처럼 의처증 얘기를 꺼낼 때마다 남편을 욕 먹이는 아내가 되는 것 같았다.
“만약 네 부인이 다른 여자였다면 그런 말을 듣지도 않았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사실이잖아.”
“다른 여자였다면 결혼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덤덤한 말에 희수는 가슴이 찡했다. 고개를 바짝 들고 그를 응시했지만 칼릭스는 그저 하늘에만 시선을 두었다.
어느새 주황색으로 물든 해 질 녘이 아름다웠다. 그는 이제 지는 해를 보면서 감상에 빠질 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건 전부 아내 덕분이었다.
절제된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욕심이라곤 사랑하는 여자의 옆에 있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한 번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여자와 사는 건 심한 불안증을 동반했다. 그리고 희수는 무척 답답했을 결혼 생활을 군말 없이 따라 주었다. 인내를 다져야 했을 텐데도 불평하거나 싫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칼릭스의 성실하고 사려 깊은 본성을 알기에 차차 둘의 관계가 안정될 거라 믿었고, 이는 적중했다.
두 사람은 여느 평범한 부부처럼 서로를 신뢰하고 안정된 생활을 갖게 되었다. 둘은 자발적으로 부모 역할에 충실했기에 아이들도 부부간의 신뢰를 쌓는 데 한몫했다.
“난 어릴 때, 이런 그림 같은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걸 꿈꿨었어.”
나긋한 아내의 목소리는 지금 그 꿈을 이뤘다고 말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여자들한테 원래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아내의 냄새는 특히 향긋했다.
첫 만남을 돌이켜보면 그때 그녀의 몸에서는 분명 구린내가 났지만 그걸 알면서도 향기롭다고 느꼈었다.
그건 끌림이었다. 본능적인 이끌림.
하늘을 응시하던 그녀가 빙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당신은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
“딱히…… 없었는데.”
“갖고 싶었던 건?”
“별로.”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친모는 한쪽 팔이 없는 구두장이의 여식이었고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어미가 몸을 팔았는지, 아니면 정말 우연한 기회로 친부와 하룻밤을 보냈는지는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4살, 어린 나이에 친모를 떠났던 칼릭스는 클로비스 대저택으로 들어가던 그때까지도 이름이 없었다. 친부를 빼닮은 그는 성력을 가졌기에 빈촌에서 태어난 서자라 해도 결국은 본가로 돌아갈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친모를 떠나서일까? 칼릭스는 친모에게도 애틋하고 깊은 애정은 없었다. 게다가 빈촌에서의 생활은 추억으로 삼기엔 너무나 거지 같았다.
그렇다고 으리으리한 클로비스 대저택이 빈촌 출신의 서자가 쉽게 마음 붙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쫓겨나듯 신전으로 보내졌지만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수련이 전부인 신전에서의 생활은 쉽진 않았지만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굳이 돌아갈 고향을 따지자면 친모가 있는 빈촌뿐.
하지만 그마저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칼릭스는 신전에서 적응하기도 전에 친모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기사 서임을 받으면 친모에게 제대로 된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해 주려 했건만…… 빈촌에 전염병이 돌아서 식량 원조가 뚝 끊기고 결국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마저 전부 거리에서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별은 그렇게 허무했다. 아비는 친모가 남겼다던 유언을 전해 줬지만 어미는 이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죽은 뒤였다.
친모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말고, 클로비스 가문의 사람으로 살라’고 말했다지만 죽은 자의 말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되새길 수 없는 기억은 추억이 되지 못하는 법.
무덤조차 없는 친모의 기억은 그의 아픈 과거로 가슴에 묻혀졌다.
“꼭 이루고 싶은 것도 없었어? 단장이 되겠다든지, 수석 사제가 되겠다든지 그런 꿈이 있었을 거 아니야.”
“…….”
꿈 같은 건 없었다.
돌아갈 곳이 사라진 그는 망망대해 위의 조각배처럼 목적을 잃고 떠돌았다.
의지할 것, 지켜야 할 것, 소중한 것…… 그에겐 삶의 부표가 되는 모든 게 존재하지 않았다. 큰 욕심도 없었고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만약 성력이 없었다면, 이 특별한 재주마저 타고나지 못했다면 친모와 함께 거리에서 굶어 죽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종종 들었다.
“당신은 참 욕심이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 걸까?”
그의 삶이 조금씩 달라진 건 소중한 게 생기고부터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들, 그리고 신전. 자신이 속한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전 교황을 시해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로 칼릭스는 혼자 황무지를 떠돌아야 했지만 단 한 번도 그 일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간신히 소중한 게 생긴 칼릭스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그 길 위에서, 칼릭스는 운명과 마주했다.
“인생은 참 신기하단 말이지. 그렇죠?”
칼릭스의 삶은 정확히 이 여자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었다.
그녀를 만나고부터 칼릭스는 하나씩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었고, 그다음엔 대화를 하고 싶었다. 궁금한 게 많지만 대화가 되질 않자 그녀의 몸에라도 자신을 새겨 놓고 싶었다.
자신이 희수를 신경 쓰는 만큼 그녀가 자신을 신경 쓰길 바랐고, 점점 희수를 독점하고 싶어졌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가 자신이 옆에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제 품속의 여자가 되길 바랐다.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언제나 이 여자의 옆에 함께 있기 위해서.
이만큼 소중한 게 없었기에 어떻게 소중히 여겨 주어야 하는지를 전혀 몰랐었다.
“역시 잘될 사람은 어떻게든 잘되나 봐. 이렇게 욕심이 없는데도 잘되는 걸 보면…… 노력도 부질없다니까.”
그의 욕심은 전부 이 여자에게 국한되어 있었다.
“정말 소원이 하나도 없었어? 카를로스가 그랬는데, 네가 주교…….”
“하나 있었어.”
“뭔데?”
딱 한 가지, 정말 간절하게 바랐던 게 있었다. 가진 모든 게 사라져도 좋으니 제발 그것 하나만은 이뤄지길 열망했던 것.
“너랑 사는 거.”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그 간절한 바람이 한때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게 내 소원이었어.”
그리고 그 소원은 이뤄졌다. 칼릭스는 그녀가 낳은 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내 인생은 처음부터 이 순간을 위해 모든 게 짜여져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그래서 여태 의미 없는 삶을 그렇게 열심히도 살아왔던 거라고…….
“들어가자. 춥다.”
칼릭스는 어렵지 않게 만산의 임부를 안아 들었다.
희수는 익숙하게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녀가 결혼 기간 내내 임신 중이었던지라 둘은 이 자세가 가장 익숙했다.
‘공주님 안기.’
희수는 그의 품에 있으면 정말 스스로가 공주님처럼 느껴졌다.
그는 세상에 저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말하듯 그녀를 만졌고, 가장 소중한 것을 보듯 그녀를 보았다. 그런 너를 위해서라면 난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고 말하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 게 삶의 더없을 행운이었다.
날은 추워도 가슴은 따뜻한 어느 저녁이었다.
* * *
희수와 칼릭스의 첫째 아이, 레이놀드의 3살 생일날.
가족은 클로비스 대저택에 합류했다. 레이놀드는 클로비스 부인의 인지를 얻고 족보에 ‘레이놀드 클로비스’라고 이름 올렸다.
클로비스 대저택은 리옹에서 가장 큰 사택이었다.
희수는 단단히 각오하고 이 저택에 들어왔건만 계모와 일곱 자매는 그녀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배가 많이 불렀구나.”
계모는 점잖고 우아한 중년 여인이었다. 대저택에서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었고, 무표정하지만 가문의 가장 웃어른으로서 도리를 다했다.
“산달은 언제니?”
“다음 달이에요, 어머니.”
“멀지 않았구나. 출산이 끝나면 사교계 인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자꾸나.”
“네, 어머니.”
희수는 시어머니인 클로비스 부인을 보며 일부 재벌가의 사모님들을 떠올렸다.
‘남편과 집안 뒷바라지에 일생을 바친 순진한 사모님.’
일곱 자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가씨들은 그야말로 온실 속의 화초였다. 이미 결혼한 네 명의 시누이들은 대저택에 자주 들르지도 못했다.
괴롭힘이나 따돌림을 전혀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집안의 순진한 여자들이 희수를 괴롭히겠다고 하는 짓은 고작 해 봐야 이런 거였다.
티 파티에 안 껴 주기, 철 지난 유행 알려 주기, 식사는 따로 하고, 함께 식탁에 앉더라도 말 안 걸기, 단답으로 대답하기, 그런 것들.
황무지에서 매녹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고 배고픔에 말라 죽을 뻔했던 희수에게 이런 따돌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작 희수는 괴롭힘인 줄도 몰랐다.
그녀는 제 자식들만 사람취급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다행히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누이들은 레이놀드와 크리스토퍼를 철저히 클로비스 가문의 사람으로 대했다.
그런데 집사 알버트가 시누이들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귀신같이 칼릭스에게 일러바쳤다.
안 그래도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예민하게 굴던 그에게, 여자들에겐 아주 민감한 문제라고 말하며 불을 질러 놓았다.
결국 칼릭스는 클로비스 부인을 비롯하여 대저택의 모두가 모인 아침식사 자리에서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희수는 그날 일이 벌어진 아침식사 자리에 없었지만, 조식당의 패인 바닥을 볼 때마다 속이 참담했다.
칼릭스가 대리석 식탁을 엎어 버린 자국이라고 했다.
‘이 대저택에 귀가 몇 개인데…….’
조식당의 오래된 식탁은 클로비스 대저택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그 식탁을 깨 버린 바람에 그가 패륜 소리를 들을까 봐 항상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그날 그 사건 이후로 희수를 향한 따돌림은 마법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누이들은 불편해도 온갖 사소한 일마다 희수를 불렀고, 대저택의 여자들이 함께해야 하는 자리엔 언제나 그녀도 함께했다. 불편한 사이라도 자주 얼굴을 보니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굳이 시누이들에게 잘 보일 이유는 없지만, 계모와 시누이들과의 친분은 희수의 사교계 입성에 중요한 열쇠였다.
예상대로 그 덕분에 희수는 어렵지 않게 리옹의 사교계에 섞여 들 수 있었다. 아직 임신 중이라 연회를 가진 못하지만 대저택의 티 파티에서 만난 귀부인들과 안면을 트고 연락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출산하고 몸을 추스르면 제 저택에 초대하겠다고 살갑게 편지를 보내오는 이들이 벌써 여럿이었다.
게다가 칼릭스는 계모와 누이들과 독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계모와 누이들을 만나는 건 항상 희수와 함께였다.
시누이들은 그런 그를 어렵게 생각했다. 무려 식탁을 엎었으니 폭군처럼 여겨질 터.
남편과 계모, 시누이들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다 보니 희수는 점점 시누이들이 어렵지 않아졌다. 무엇보다 첫째 시누이도 희수보다 나이가 어리고, 막내 시누이는 희수와 무려 16살 차이였다.
‘이 집안에는 왜 아들이 없을까.’
어떤 저주라도 받은 건지 결혼한 시누이들 역시 아직 아무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희수는 저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얄미워 보이겠지.’
그래서 대저택에서는 절대, 셋째는 딸이었으면 좋겠다든가 시누는 딸이 여럿이라 좋겠어요 같은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희수는 그저 시누이의 여식들이 귀여워서 부러울 뿐이었다. 요즘 그녀의 바람이라면 꼭 딸아이를 낳아서 머리를 땋아 주며 모녀끼리 알콩달콩 지내는 것 하나였다.
그렇게 클로비스 대저택의 계모와 일곱 자매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시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