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11. 마님과 주인님의 사정 (11/17)

11. 마님과 주인님의 사정

* * *

리옹에 적당한 집이 마련되기 전까지 희수와 칼릭스는 함께 신전에서 지내야 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신전에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았다. 덕분에 칼릭스에겐 신전에서의 그 하루하루가 고문 같았다.

둘 사이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 관심이 있는 척했지만 그는 사실 희수의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달콤한 꿀이 고인 샘을 잔뜩 핥고, 좁은 길을 왕복하다 그녀의 자궁까지 닿는 깊은 곳에 자신의 씨를 뿌리고 싶었다.

밤이고 낮이고 피가 마르는 듯했다.

‘빨리 임신했으면.’

매일 비는 소원이라곤 하루 빨리 희수가 임신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었다. 사랑을 나누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모순이지만 손꼽아 기다려서 그런지 더 애가 탔다.

하지만 저택의 청소와 더불어 집 안이 정리되고 나서야 둘은 신전을 나올 수 있었다. 한 달쯤 뒤였다.

둘만의 집으로 옮겨 가는 날, 칼릭스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남들 앞에선 전혀 티를 내지 않았지만 희수와 단둘이 있을 때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드디어 자유네.”

“그래도 다들 친절했고…….”

“한 달이 왜 이렇게 더디게 간 건지.”

단둘뿐인 마차에선 좀처럼 하지 않던 불평까지 중얼거렸다.

“우와…….”

리옹의 중앙에 위치한 으리으리한 저택.

마차에서 내린 희수는 입을 떡 벌린 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구경했다.

정원을 3군데나 품고 있는 거대한 3층 건물. 앞, 옆으로 강을 끼고 있는 7구 시가지의 가장 끝 저택이 이들의 ‘집’이었다.

“혹시 네 가문의 저택이야?”

거의 넋을 잃은 희수가 신음하듯 물었다. 클로비스 가문을 의식하고 한 말이었다.

“내 가문은 없어.”

그 냉담한 대답에 희수는 이제야 고개를 돌려 칼릭스를 응시했다. 할 말은 많은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지만, 신전에서 보니 그는 명백히 클로비스의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를 부르는 호칭부터 ‘클로비스 경’ 아닌가?

‘집에 오가는 발길을 끊었다고 없는 자식이 되는 게 아닐 텐데.’

한데 칼릭스는 고집스럽게 가문의 일을 부정했다. 일단 희수는 그가 하는 대로 따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클로비스 가문의 일보단 이 아름다운 저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 정원에 나무도 몇 그루 없었지만 장차 잘 가꿔져 녹음이 드리울 모습이 벌써 눈에 보이는 듯했다.

겨우 둘만의 보금자리라기엔 정말 거대한 저택이었다.

“이만 들어가자.”

칼릭스는 그녀의 놀란 얼굴에 내심 뿌듯했다.

이렇게까지 큰 저택을 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희수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바로 나이 얘기를 듣고부터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희수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해도 그녀는 순순했다.

대답도 항상 긍정적이었다. 신관들과 대화하는 게 내키지 않는다고 하자 그럼 앞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더 고집을 부려서, 세상 모든 남자들과 네가 같이 있는 걸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희수는 그럼 네 말대로 하겠다고 했다. 외출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참 이상하게도 칼릭스는 그녀의 순순한 반응이 영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과시하듯 커다란 저택을 덜컥 사 버렸다. 프란시스가 골라서 추천한 매물 중에서 가장 큰 저택이었다.

이 정도 능력은 있다고 괜히 으스대고 싶었다. 너 하나쯤 책임지는 건 내겐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하지만 진짜로 그랬다간 그녀가 정말 자신을 어린 취급할 것 같아서 칼릭스는 구입한 저택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응접실이 5개가 넘는다고요?”

“예. 응접실은 7개, 손님용 침실은 정확히 22개입니다, 마님.”

“스물두 개요……?”

“자, 마님께서 사용하실 응접실은 이쪽입니다.”

집사를 따라가며 저택의 설명을 듣던 희수가 놀라서 칼릭스를 돌아보았다. 왜 굳이 이런 대저택을 샀느냐고 묻는 그 경악한 얼굴을 보니 칼릭스는 속이 다 후련해졌다.

그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모른 척을 했다.

그녀가 신나게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희수는 1층의 모든 응접실을 다 살펴보고도 모자란 건지 2층의 서재와 침실까지 오늘 다 살펴볼 모양이었다.

“마님, 지금 2층도 올라가 보시겠습니까?”

“네. 한번 둘러볼게요.”

“2층도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지요.”

알버트는 프란시스의 권유로 고용한 집사였다. 희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칼릭스는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프란시스는 왜 이렇게 젊은 집사를 소개한 거지.’

하지만 이유 없이 해고하기엔 일처리가 빈틈없고, 무엇보다 눈치가 빨랐다. ‘클로비스 경’이라는 호칭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자, 집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재빨리 호칭을 바꿔 불렀다.

“주인어른, 마님.”

계단을 오르던 도중 알버트가 멈춰 둘에게 당부했다.

“2층은 아직 완벽하게 정리가 끝난 건 아닙니다.”

그러면서 알버트는 시종과 하녀들을 노려보았다. 제대로 청소를 끝내지 못한 걸 탓하듯이.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선 시종과 하녀들은 집사의 그 매서운 눈빛에 흠칫 놀랐다.

“네,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했으니까요.”

이해한다는 듯 무던한 마님의 대꾸에도 알버트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서 숙련된 시종들을 구해야겠습니다. 주인어른의 평판을 생각해서 저택에 어울리는 인재들로 엄선해야 할 텐데…… 제가 걱정이 많습니다. 마님께서도 물론 그러시겠지요. 저택의 살림이 곧 마님의 얼굴이 될 테니 말입니다.”

집사는 급한 성격처럼 말이 빨랐다. 게다가 부르고뉴 출신이란 걸 티 내듯이 말투에는 진한 방언이 섞여 있었다.

“일단 급한 대로 경력이 있는 하녀들을 고용했습니다만 하녀장만큼은 특별히 추천을 받을까 합니다. 하지만 저 혼자선 결정할 수 없는 일이지요.”

“…….”

희수는 당황한 듯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가만 보니 말을 완벽하게 알아듣기 힘든 눈치였다.

“마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주위에 추천을 받을 만한 분이 계시는지요?”

“집사.”

마님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주인어른에게서 돌아왔다.

“예, 주인어른.”

이 저택의 주인이자 명망 있는 클로비스 가문의 후계자, 그리고 잘 알려진 교황의 오른팔인 클로비스 경이 제게 건넨 첫마디였다.

“표준어로 말해.”

싸늘한 말투에 알버트는 헷갈렸다. 주인어른은 원래 말수가 적은 건지, 아니면 자신이 탐탁지 않은 건지…….

“리옹에서 계속 지낼 거라면.”

“예?”

이 말투를 고치지 않으면 심지어 자신을 해고하겠다는 듯이 들렸다. 집사는 원래 입주 고용인이니까.

‘내 말투가 어디가 어때서?’

이 말투는 알버트의 장점이었다. 역사의 도시, 부르고뉴는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들이 많아서 다들 고향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말투를 들은 누구나 선망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귀족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가 부르고뉴 출신이라는 건 일종의 자랑거리였다.

한데 주인어른은 당황한 그를 무시했다.

“부인은 바빠질 테니 시종을 고용하는 건 알아서 하게.”

“알겠습니다. 마님께선 사교모임에 신경 쓰셔야지요.”

“곧 아이를 가질 테니까.”

“아, 물론…… 그렇겠군요. 우선순위란 게 있으니까요.”

주인어른의 쌀쌀맞은 분위기에 알버트는 물론 시종들과 하녀들마저 당황했다. 냉기마저 흘렀다.

집 안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는데 대체 얼마나 안목이 높으신 건지. 주인어른에게 맞추려면 고생 깨나 해야겠다고 고용인들은 몰래 서로를 돌아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집사 알버트를 비롯하여 저택의 고용인들은 저택에서 처음 만난 주인어른과 마님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칼릭스 클로비스의 결혼식이라면 초대받진 못했어도 당연히 한 번쯤 얘기가 들렸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 부부는 대체 언제 결혼식을 치렀는지, 어떻게 된 인연인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클로비스 경은 신전에서만 지내셨고, 마님은…….’

가장 큰 의문은 마님이었다. 6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갈리아 켈티카에선 낯선 이를 만났을 때 어느 도시 출신인지를 묻는 게 바로 첫인사였다.

한데 집사가 인사를 나누고 마님에 관해 묻자 주인어른이 자연스레 말을 돌렸다. 더 묻지 말라는 것처럼 방어적인 말투였다.

‘마님은 대체 어느 가문의 여식이지? 리옹 출신은 아니라던데, 마님은 어디서 오셨을까?’

저택의 고용인과 주인 부부는 서로에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침실은 어디인가?”

“주인어른의 침실은 3층입니다. 마님이 쓰실 침실은 2층 좌향입니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라 경관이 수려하지요.”

“수고했으니 이만 내려가서 다른 일을 보게.”

“다시 신전으로 가십니까? 밖에 말을 준비해 놓을까요? 혹시 오늘 일정이 끝나셨다면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서…….”

“아니.”

주인어른은 그의 말을 싹둑 잘라먹었다. 그리고 마님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부했다.

“우리 침실엔 아무도 올려 보내지 말게. 절대로.”

주인어른이 ‘우리’ 침실이라 칭한 곳은 바로 마님의 침실이었다.

‘마님을 꽤 좋아하시는군.’

귀족들 중에는 서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주인 부부는 다행히 그렇지 않은 듯했다.

“꺄악!”

마님을 번쩍 안아 들고, 계단을 몇 개씩 단번에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무척 즐거워 보였다.

그날 밤부터 주인어른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침실에서만 머물렀다. 고용인들이 가장 신경 쓴 3층엔 아예 올라가지도 않았다.

‘오호라, 두 분은 꽤…….’

알버트는 조금씩 이 저택의 주인 부부에 대해 알아갔다.

* * *

알버트가 저택에 근무하면서 주인어른에게 가장 먼저 들은 당부가 있었다.

“집사, 잠시 나 좀 보지.”

집사는 당연히 저택의 살림이나 앞으로의 일정, 그리고 저택의 예산 같은 걸 의논하려나 보다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주인어른은 식당으로 집사를 불렀다.

‘왜 제일 먼저 식당으로 부르셨지?’

‘밖에 계시느라 저택에선 식사도 자주 하지 않으실 텐데.’

어리둥절한 요리사와 집사는 나란히 서서 그의 당부를 들었다.

“수프는 맑은 수프보다는 걸쭉한 수프로, 빵은 딱딱한 것보다 촉촉한 것으로 준비해.”

주인어른이 가장 신경 쓰는 건 살림 예산이나 인테리어가 아니라 바로 ‘식사’였다.

“블루치즈나 에멘탈 치즈처럼 향이 강한 치즈 말고 체더처럼 간단한 걸로. 레몬그라스, 스타 아니스 같은 향신료는 절대 음식에 넣지 말게.”

처음에는 주인어른의 식사 성향이 참 서민적이구나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는 전부 마님의 입맛이었다.

마님은 두 끼를 혼자 집에서 먹고, 저녁은 주인어른과 외식하니 그의 당부는 온전히 마님의 식사를 위해서였다.

“소, 돼지, 닭고기는 꼭 식사에 포함하게. 양고기는 무조건 빼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주인어른.”

“스테이크나 로스트를 메인으로 적어도 7개의 디쉬는 준비해. 아침에도.”

물론 마님이 먹성이 좋긴 하지만 매 끼니를 저렇게 차리라는 건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정작 주인어른 본인은 아침에 과일주스 한 잔만 마시고 출근할 때도 있으면서 말이다.

“주인어른, 주제넘은 소리지만 아침, 점심은 마님 혼자서만 드시는데 매번 정찬을 차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

“그렇게 하려면 매주 드는 돈이 만만찮습니다. 차라리 마님께 여쭤 보고…….”

“집사, 내 주급을 모르나?”

식비는 큰돈이지만 신전의 수석 사제이자 성기사인 그의 주급에 비하면 적은 액수였다. 주인어른은 더는 이 일로 실랑이를 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단호했다.

“낭비라도 상관없어. 음식이 남아서 다 버려도 좋으니 내 아내의 식사는 그렇게 해. 먹고 싶다는 건 반드시 준비하고, 식비는 아끼지 말게.”

“아, 알겠습니다.”

“절대 부실하게 먹이지 마.”

주인어른은 마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맛있는 걸 잔뜩 먹이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것 같았다. 요리사조차 저런 주인은 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클로비스 경은 마님의 끼니를 정말 유별하게 챙기시는군.”

“어디 가서 말하지 말게.”

“당연한 소리를.”

요리사에겐 반가운 소리였다. 갈리아 켈티카는 음식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저택의 요리사는 집사와 동등한 권력을 지녔다.

‘마님이 굶어 죽을 뻔한 적이라도 있었나.’

집사는 처음엔 마님이 과거에 거리에서 굶고 다니던 사람인가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유별나게 음식을 챙길 리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집사는 그냥 주인어른이 마님을 지극히 예뻐해서 그렇겠거니 하고 예상했다.

그는 좀처럼 아내를 침실에서 내보내질 않았다. 이 부부가 저택에 들어온 지 벌써 며칠이 됐는데도 마님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누가 보면 닳을까 봐 그러시나.’

어쨌든 주인 부부의 금실이 좋다는 건 일하는 사람들에겐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 * *

“아……!”

칼릭스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신음했다. 마지막 힘찬 움직임을 멈춘 뒤에, 그가 무너지듯 희수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하아, 하아, 하아…….”

칼릭스는 그녀의 머리 양옆을 짚은 채로 한참 동안 가쁜 숨을 내쉬었다.

희수 역시 멍하니 천장에 눈을 두고 가쁘게 숨을 헐떡였다. 거인 같은 남자의 밑에서, 거대한 뱀의 몸통 같은 그의 양 팔뚝 사이에 가둬져 갑갑하고 피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고 싶은 걸 신전에선 대체 어떻게 참았을까.’

칼릭스는 초저녁부터 밤이 새도록 사람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괴롭히다가 몇 시간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희수가 뒤척이느라 잠깐 정신을 차리면 그때부터 다시 잡아먹을 듯 달려들었다.

“너무 좋다. 응? 정말…… 너무 좋아.”

칼릭스는 배시시 웃으며 희수의 볼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너도 좋았던 거지? 나만 좋았던 건 아니지?”

“으응.”

“다행이다. 같이 즐거웠으면 좋겠어. 그래야 할 텐데.”

그의 안심한 미소에 희수 역시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 또한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이 쉬는 날도 좀 있어야지, 벌써 며칠째 같은 일상이 반복되면서 희수는 기력이 떨어져 죽을 맛이었다.

이러고도 그가 출근할 체력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두고 가기 싫다.”

칼릭스는 그녀의 맨몸을 꽉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희수는 거의 짓눌리듯 안기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정말이지 고마우면서도 벅찬 애정이었다.

“사실은 널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어…… 알아?”

그는 단둘일 때, 특히 기분이 좋을 때마다 굉장히 다정하고 부드럽게 귀여운 소리를 했다.

“오늘은 쉰다고 할까.”

제 딴에는 장난처럼 하는 소리였지만 희수는 속이 철렁했다. 칼릭스가 눈을 마주친 채 씩 웃으며 슬금슬금 허리짓을 재개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너랑 이렇게.”

“무…… 무슨 소리야. 얼른 출근해야지.”

식겁한 희수는 간신히 그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농담이었는지, 칼릭스는 웃으며 그녀의 이마와 볼, 콧등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번쩍 일어섰다.

‘오늘은 사람들하고 인사를 좀 해야지.’

희수는 삐걱대는 목과 어깨를 이리저리 돌렸다.

“왜 벌써 일어나려고? 더 자.”

“아니야. 나도 내 일을 해야지. 넌 그렇게 부지런한데…….”

“게으르게 지내.”

뒷정리를 끝내고 옷가지를 살피던 그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누가 뭐라고 하면 나한테 일러. 혼내 달라고 해.”

희수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는 손길이 몹시 다정했다.

“푹 쉬고 있어. 더 자.”

“…….”

“잠깐만, 침대 시트를 바꾸라고 할게.”

그는 가운을 걸치고 급히 침실을 나갔다. 희수 또한 다시 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제 정신 차리고 이 넓은 저택을 둘러보며 할 일이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었다.

‘계속 이렇게 지내면 안 돼.’

그녀는 이 저택에 들어온 이후로 침실과 욕실만 오가느라 고용인들의 안면조차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칼릭스가 출근하면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퇴근할 때쯤이면 그녀도 겨우 정신을 차리는데, 그는 함께 저녁을 먹을 때조차 무조건 ‘단둘이’ 있기를 고집했기에 희수는 고용인들과 만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또 의도적으로 저를 고립시키려고 그러는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신분이 높은 이들이 으레 그렇듯, 칼릭스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었다. 낯선 이들과 있을 땐 말도 없고, 표정도 항상 굳어 있어서 아무도 살갑게 굴지 못했다.

남편이 그러니 고용인들은 아내인 희수 역시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구…….”

하녀가 일을 마치고 침실을 나가자 희수는 노곤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삭신이 쑤시고 자꾸만 눈이 감겨 온다.

칼릭스는 하녀가 나간 걸 확인하고부터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그 역시 하녀의 존재에 익숙지 않았다. 한데 저 때문에 굳이 신전을 나와 밖의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걸 보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무력하게 누워만 있을 순 없어.’

아랫사람들 보기에도 좋지 않을 것이다. 희수는 애써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사한테 물어봐야지.’

그녀는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안주인으로서 할 일을 찾아다녔다. 하녀장도 만나고, 고용인들과 인사도 마쳤다. 저택의 예산까지 확인하고 나서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집사, 우리도 연회 같은 걸 해야겠지요?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택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으니 내실을 꾸리는 게 먼저일까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귀족들을 초대해 만찬을 대접하는 건 안주인의 의무였다. 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희수가 옷만 바꿔 입었다고 하루아침에 귀족 노릇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귀부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칼릭스를 욕보이지 않게 노력은 해야 했다.

“앞으로 도움받을 일이 많을 거예요. 잘 부탁해요, 집사.”

그녀가 겸손하게 말하자 집사는 조금 놀란 듯했다. 잠시 굳어 있던 그가 이내 평정을 되찾고 유려한 걸음으로 저택의 길을 앞장섰다.

“마님, 조급하실 것 없습니다. 우선 정원이나 산책하시지요. 햇빛도 받고 좋은 걸 보면서 체력관리를 하시는 게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다.”

그는 지금 당장 마님과 과중한 일을 나눠서 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주인어른의 당부이기도 하고, 또 마님의 임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 마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녀가 정원에 다다르자 정원사가 반갑게 웃으며 달려왔다.

“마침 정원의 고목(古木)을 베어 내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가리킨 곳에는 오래된 과실수가 몇 그루 있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과일이 탐스러웠다.

“과일 몇 개만 따서 일하는 아이들에게 나눠 주시면 다들 마님의 너그러움에 감사할 겁니다.”

정원사는 넉살좋게 웃으며 젊은 마님을 향해 작은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지.’

희수는 저택의 고용인들과 안면을 트기에 마침 적당한 일이라 여겨 얼른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 * *

어느덧 신전에서 돌아온 칼릭스는 갑주를 벗으며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뒤뜰에는 야생 앵두나무와 몇 개의 과실수가 있었다. 정원을 꾸미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어 내야 했다.

그 전에 과실을 거두어 고용인들에게 나눠 주는 건, 윗사람들이 얼마나 너그러운지를 형식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희수는 깜찍한 바구니를 들고 앵두를 따고 있었다. 저택의 아가씨들이 집안의 행사로 하는 귀여운 소일거리인 만큼, 그 역시 당연히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봐야 했을 텐데…….

저자는 뭐지.

희수의 옆에서 딸랑거리는 정원사가 눈에 거슬렸다. 그녀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설레서 집으로 돌아왔건만 막상 저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희수의 웃는 얼굴, 앵두를 골라내는 사랑스러운 손짓, 그런 그녀를 훔쳐보며 웃고 있는 정원사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의처증이라고 했나.’

카를로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들을 때마다 반박을 할 수가 없어서 속이 씁쓸했다.

희수가 저를 버리고 떠났던 그 3년이 칼릭스에겐 너무나 큰 상처였다. 재회했다고 이별이 하루아침에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암흑이었던 그 시간은 단번에 잊혀질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은 아마 의처증 같은 병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결혼생활 내내 부인을 힘들게 할 거라고 했다.

여자는 만나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조언이랍시고 제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새겨들을 만한 얘기였다.

‘그래선 안 되겠지.’

사랑하는 여자를 힘들게 할 순 없었다. 그러려고 결혼한 게 아니니까. 희수에게 오직 안락한 생활과 안전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결혼을 택했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아.’

칼릭스는 저절로 머릿속에서 상상되는 그림들을 지워 버리려 애썼다. 집착적이고 폭력적인 이 속내는 그녀에겐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희수는 지난 끔찍한 경험 때문에 평범한 삶이 소원이라 말하는 가엾고 연약한 여자였다.

그녀는 어떤 위험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건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남편이다.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남편. 언제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칼릭스는 몇 번이나 이를 되새겼다.

“마님께선 오늘 바쁜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눈치 빠른 집사는 이제 그가 묻지 않아도 알아서 희수의 일과를 읊어 주었다.

“하녀장을 만나서 고용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물으셨고, 인사도 나누셨습니다. 실내 장식을 어떻게 꾸밀지 고민하시는 모양입니다. 제게 저택의 예산을 물으셨습니다.”

기특하기도 하지. 칼릭스는 슬슬 고개를 끄덕이며 희수의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마님께 예산의 얼마나 허락하실 생각이십니까?”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둬.”

그가 뒤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질문에 약간 어긋난 대답이지만 알버트는 쉽게 뜻을 이해했다.

“예, 그럼 제한을 두지 않겠습니다.”

그가 하염없이 뒤뜰만 내려다보자 알버트가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섰다. 마님은 과실을 따는 데 재미가 들렸는지, 정원사와 하녀 몇 명과 함께 이번엔 앵두를 따고 있었다.

“마님께서 뒤뜰에도 꽃을 많이 심고 싶으시다던데…….”

“그렇게 해.”

이번에도 무심히 대답한 주인어른의 눈빛이 차가웠다.

“주인님께서 집에 오셨다고 마님께 전해 드리라고 했는데, 시종들이 발이 느린가 봅니다. 하하.”

알버트는 어색하고 긴장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주인어른은 말수가 적은 데다 사람을 꿰뚫듯이 쳐다봐서 가끔 무서웠다.

이윽고 시종이 마님에게 달려갔다. 뭐라고 급히 말을 전하자 마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녀는 주섬주섬 바구니를 챙기곤 금세 뒤뜰을 떠났다.

주인어른은 그러고서도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자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

“예?”

알버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주인어른이 눈짓하는 뒤뜰에는 정원사와 하녀들뿐이었다.

“저자 말이다.”

“정원사…… 말씀이십니까?”

그는 대체 몇 번을 묻느냐는 듯 신경질이 섞인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 바람에 알버트는 머리를 굴려야 했다.

‘머리카락이 희끗하지 않은 걸로 봐선 40대는 아니야. 몸도 꽤 좋으니 아마…….’

그는 정원사를 흘끔 내려다보고 짐작했다.

“아마…… 30대 중반쯤 되었을 겁니다.”

주인어른은 대답을 듣고서 ‘알았다’고 짧게 대답한 뒤 더는 정원사에 대해 묻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군.’

알버트는 마님과 주인어른의 편한 시간을 위해 자리를 비켰다.

주인어른은 원체 고용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귀족들이야 워낙 낯가림이 심하고 콧대가 높으니 이해는 하지만, 주인어른은 신전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지냈던 사람이라 그런지 정도가 심했다. 많은 귀족들을 겪었던 알버트조차 그를 대하기 어려웠다.

그의 높다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여.’

모시는 분들의 행복과 평안이 곧 집사인 그의 행복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결국 고민하던 알버트는 정원사를 불렀다. 젊고 열정적인, 그래서 마님께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던 바로 그 정원사였다.

“집사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미안하지만 자네는 오늘부로 저택을 떠나야겠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아무렴, 큰 잘못을 저질렀지.”

알버트는 담담히 그가 해고된 이유를 말해 주었다.

“다른 저택에 고용되면 그때는 젊은 마님과 친하게 지내지 말게.”

“이럴 수가.”

정원사는 황당하고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전 할 일을 했습니다! 마님께서 정원수와 과실수에 대해 잘 모르셔서 설명을 해 드리고, 일을 도왔을 뿐이라고요! 마님은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이제 보니……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군.”

알버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정원사를 응시했다. 성실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원사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모시는 사람은 마님이 아니라 주인어른이야.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는 일이지.”

그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보내게 되어 차라리 다행이군.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귀족의 사택에서 일할 수 없을 걸세. 다른 일을 찾아보게. 실력이 있어 보이니 시의회나 가 보든가. 급료는 적어도 명성은 쌓을 수 있겠지.”

정원사는 억울해했지만 퇴직금을 넉넉히 챙겨 주겠다고 하자 하는 수 없이 짐을 싸서 저택을 나갔다.

‘주인어른은 말씀이 적으시고 저택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지 않아. 고용인들에게 관심도 두지 않으시지.’

주인 부부가 저택에 머무른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알버트는 그들을 파악하느라 열심이었다.

‘마님께선…… 마님은 아직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군. 하지만 그리 엄격한 사람 같진 않아.’

결국 고용인들에게 잔소리를 할 사람은 저뿐이었다.

알버트는 그길로 저택의 고용인들을 불러 모았다. 혹시 오늘 떠난 정원사처럼 착각을 하는 이가 있을까 싶어 경고를 해 둘 생각이었다.

근엄하게 뒷짐을 진 그는 일렬로 모여든 고용인들을 앞에 두고 말했다.

“우리가 모시는 클로비스 경은 갈리아 전역의 안전을 위해서 봉사하고 계신다.”

신전의 성기사들은 갈리아 켈티카의 시민들을 악에서 구원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위대한 신의 사자들이었다.

“제가 그런 분을 모시고 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맞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고용인들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사제와 성기사는 그만큼 추앙받는 존재지만 주인어른은 이곳에서 영웅대접을 받을 게 아니라 안락한 사생활을 누려야 했다.

더군다나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나.

“그래서 다른 사택과 달리, 이곳은 주인어른께서 저택에서 보내시는 시간이 적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버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명씩 돌아보며 엄격하게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모시는 건 주인어른이지, 마님이 아니다. 다들 명심해라. 마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주인어른의 심기를 거스르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눈여겨보았던 몇몇 젊은 시종들과 마부, 정원사들을 빤히 응시하며 강조했다.

“절대 마님과 친하게 지내지 마라. 특히 두 분이 함께 계실 때는 주인어른만 보면서 말을 해라. 다들 알겠느냐?”

“하지만 그분을 쳐다보기에는 너무 무서우신데요…….”

“내 말을 새겨듣는 게 좋을 거다. 이 저택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마님과 친하게 지내선 안 되는 법이야. 쯧,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당연한 걸 꼭 말로 해 줘야 아는 건지.”

알버트는 부르고뉴 시의회의 시종부터 시작해서 유명한 귀족 저택의 집사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지금 모시는 이가 신전의 수석 사제인 만큼, 시종들을 까다롭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 * *

주인어른은 출근을 앞두고 홀로 식당에서 조식을 먹고 있었다.

“마님을 깨워야 하지 않을까요?”

“됐다.”

“주인어른, 계속 이러시면 시종들이 오해합니다.”

알버트는 주인 부부가 한 번도 조식을 같이 먹은 적이 없어서 시종들이 오해한다고 말했지만, 주인어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굳이 마님을 깨워서 함께 식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대단히 세심한 배려이긴 하지만 집사의 입장에선 염려스러웠다.

‘하녀들의 입단속을 더 신경 써야겠어.’

함께 식사하지 않는 부부라고 소문이라도 났다간 마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었다.

주인어른이 식사를 마칠 때쯤, 내내 눈치를 살피고 있던 그가 말했다.

“그자는 저택에서 내보냈습니다.”

요리사는 식사 중에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이 집사를 응시했지만, 칼릭스는 대번에 그 말을 알아들었다.

“정원사?”

그의 놀라운 직감에 집사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예.”

주인어른은 해고하길 잘했다든가, 속이 시원하다든가 하는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저 눈썹을 한 번 꿈틀하고, 의외라는 듯이 집사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고는 그대로 출근했다.

‘뭐지, 저 반응은.’

주인어른은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사람이었다. 집사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잘한 일이 맞는지 순간 의아해졌다.

하지만 그날부터 주인어른이 말을 거는 횟수가 확연히 늘었다. 집사는 자신의 신속한 판단으로 그의 신뢰를 얻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인어른의 높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 * *

이후로 알버트는 마님이 잠든 시간마다 주인어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이었다.

주인어른은 저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예산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선 꽤 관심 있게 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출신에 관한 의혹과 지적들은 거의 무시로 일관했다.

“마님께선 이상하게도 사치품의 물가를 잘 모르십니다.”

“다행 아닌가, 집사.”

“게다가 리옹과 파리의 문화에는 익숙하신데, 그 외의 도시들은 잘 모르시나 봅니다.”

“굳이 알 필요 없지.”

“갈리아의 오랜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모르시는 것 같고요.”

“어떻게 다 꿰고 있겠나. 역사가도 아니고.”

“주인어른, 계속 이렇게 구렁이처럼 넘어가실 일이 아닙니다.”

“구렁이?”

“제게는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집사는 답답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사람들은 이상한 일이라고 여긴단 말입니다!”

모시는 분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지만 그는 마님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다들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집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혹시 마님께서 가문의 영애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이었던 건 아닌가 하고요. 귀족이 아니셨을지 모른다고 수군거립니다.”

“헛소리를 떠들게 내버려 두나?”

“주인어른, 제가 아무리 닦달해도 사람의 의심까지 거둬 낼 순 없습니다.”

알버트는 마님이 귀족이 아니었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이미 신전의 성기사와 결혼한 몸이니까.

하지만 앞으로 그녀가 전쟁터 같은 사교계에 적응하려면 공부가 필요했다.

‘저택에 사람을 들이면 좋을 텐데.’

기왕이면 좀 엄격하고 단호한 사람을 들여서 마님에게 역사와 문화를 자세히 가르치고 싶었다.

알버트 자신은 이미 마님과 정이 들어서 도저히 문제를 지적하고 나무랄 수가 없었다. 이는 주인어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주인어른은 아예 아내의 틀린 점을 지적할 마음이 없었다.

“혹시 마님이 곧 임신하실까 봐 교육을 미루시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수도원에서 수사를 불러서 마님을 교육시키는 건 어떠실지…….”

주인어른은 끝까지 말을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쓸데없는 일로 시간 빼앗지 마.”

“주인어른! 클로비스 경! 클로비스 경!”

애타게 불렀지만 그는 그대로 서재를 나가 버렸다. 주인어른은 아내가 잔소리나 충고, 싫은 소리를 듣는 걸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보통 귀족의 사택에는 가주에게도 윗사람이 있기 마련이건만 이 저택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에선 마님이 틀린 말을 해도 맞는 소리가 된다.

‘마님께 본보기가 되는 선생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마님은 너그럽고 점잖은 사람이라 사교계 데뷔가 늦었어도 꽤 이름을 떨쳤을 것 같은데, 그녀가 배움의 모자람 때문에 주눅이 들까 봐 걱정스러웠다.

사교계 문화는 책으로 익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알버트는 그 점이 아쉬웠다.

‘알고 지내는 부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저택에서 작은 파티라도 열었으면 좋을 텐데, 주인어른은 임신을 핑계로 그녀의 사교 생활을 허락하지 않았다.

‘쯧, 임신이 그렇게 빨리 가능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곧 그 예상이 깨졌다.

* * *

“주인어른, 잘 다녀오셨…….”

저택에 돌아온 칼릭스는 죽 늘어선 시종들을 뒤로하고 곧장 침실로 향했다. 종일 그리던 아내가 그곳에 있었다.

얌전히 앉아 그림책을 뒤적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저절로 세상이 밝게 보였다.

그는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희수에게 달려들었다. 뒤에서 몸을 끌어안자 움찔 놀라는 게,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으응.”

칼릭스는 그녀의 입안에 혀를 넣고 굴렸다. 점막과 점막이 부딪치는 음란한 행위. 이는 오직 아내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는 희수의 타액이 성수라도 되는 듯이 강하게 흡입했다. 동시에 제 겉옷을 벗으며 희수를 침대로 옮겼다. 그러곤 그녀의 무릎 사이를 벌려 몸을 가까이 붙였다.

빨리 그녀의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가벼운 드레스 자락을 올린 그가 손으로 그녀의 꽃술을 가늠했다. 자신의 빳빳한 장대를 받아들이기엔 아직은 성마른 그곳을, 빨리 적셔 주고 싶었다.

그는 희수의 양 허벅지 뒤로 손을 넣고 단숨에 그녀를 침대 끄트머리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고 자신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허벅지를 위로 젖혔다. 드레스를 모두 걷어 올리자 그의 눈앞에 불그스름한 여성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곧장 그곳에 얼굴을 파묻자 희수가 그를 저지하듯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허벅지를 꽉 눌린 탓에 부질없는 몸짓이 돼 버리고 말았다. 그의 강한 악력에 금방 포기한 그녀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하아.”

대신 희수는 그의 부드러운 금발에 손을 넣었다. 아래를 입으로 애무받는 건 벌써 여러 번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애무 중 하나였다. 희수에겐 아직도 민망하고 낯설었다. 하지만 그가 저렇게 좋아하니…….

“흐으…….”

칼릭스는 지난 3년간 다른 어떤 여자와도 밤을 보낸 적이 없다고 했다. 물론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의 혀와 입술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음탕하고 능숙했다.

“아!”

클리토리스를 강하게 흡입하는 바람에 희수는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충분히 아팠을 텐데,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듯 행위에만 집중했다.

“흐으…….”

제 아래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그가, 예민한 살점을 유린하다 이번엔 그를 받아들일 입구를 혀로 더듬었다. 뭉텅한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그 안에 집어넣을 듯이 꾹꾹 짓눌렀다.

은밀한 곳에서 느껴지는 그의 거친 숨결이 희수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고 침대 시트를 긁었다.

칼릭스는 그 손을 끌어와 그녀의 허벅지 위로 얹어 깍지를 꼈다. 단단한 손가락이 얽히자 짜릿함이 더했다.

오래도록 공들인 질펀한 애무였다. 촛농이 줄줄 흘러내려 바닥까지 흥건해질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이제 넣어 줘…… 이제…….”

안팎으로 흠뻑 젖은 희수는 그저 넣어 달라는 애원의 말만 반복했다. 그가 내려 준 감각의 홍수에 빠져 꼭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정신이 혼미하기는 칼릭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아래에 얼굴을 파묻고 있을 때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은 꼭 푸딩 같았고, 어디서도 맡을 수 없는 이 향기는 온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묽은 꿀을 빨아 대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문득 거리에서 천한 종자들끼리 떠들던 욕설이 떠올랐다. ‘여자 밑구멍이나 빨아 대는 멍청한 새끼’라던가.

이 맛이 이렇게 좋은 줄 진작 알았다면 절대 비웃지 않았을 텐데…….

그는 종국에는 희수의 여성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제 높은 코로 살점을 비비듯이 하자 그녀가 자지러지듯 허리를 뒤틀었다.

서로에게만 허락한 음탕한 행위.

한참이나 그곳을 농락하다 칼릭스는 상태를 살피듯이 그녀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얼굴이 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최고의 쾌락을 안겨 주고 싶다.

오로지 그 일념으로 칼릭스는 제가 들어갈 입구를 헤아렸다. 천천히 중지를 밀어 넣자 그녀가 흘린 끈끈한 애액 덕분에 무리 없이 두 마디를 삼켰다. 안까지 부드럽고 녹녹했지만 평소보다 애무가 짧아서 이대로 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직 가슴도 만져 주지 않았고, 목덜미에 입맞춤도 해 주지 않았는데 그녀가 조급하게 굴었다.

제 경험이 많지 않고, 더군다나 아는 여자라곤 희수뿐인 게 이럴 때는 안타까웠다.

“빨리.”

부추기는 목소리에 칼릭스는 그녀의 허벅지를 쭉 당겨 제 팔뚝에 걸쳤다. 허리에 힘을 주고 쿵 밀어붙이자 단번에 제 것이 밀려 들어갔다.

칼릭스는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녀의 안쪽은 따듯하고, 좁고, 또 촉촉해서 아주 황홀했다.

“너무 좋아…….”

중얼거린 그가 상체를 숙여 희수의 입술에 쪽쪽 짧은 키스를 남겼다. 더 깊게 안을 찔린 그녀가 몸을 움츠렸다. 그럴수록 그는 딱딱한 제 성기로 안을 음미하듯 휘저었다. 기둥을 죄는 속살에 금방이라도 쌀 것 같았다. 칼릭스는 회유하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조금만 세게 해도 되나.”

그는 여전히 침대 밖에 서 있고, 희수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치듯 누워 있었다. 이 자세 때문인지 정상위치고 너무 깊게 들어와서 안 그래도 버거운 참이었다. 하지만 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더 해 달라 조르듯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허락을 얻어 낸 칼릭스는 이내 상체를 세웠다. 그녀의 두 다리를 모아 잡고 제 한쪽 어깨에 걸친 뒤 급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읏! 아! 아흐!”

자세 덕분에 움직임이 수월했다. 그녀의 엉덩이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허리를 콱콱 밀어붙였다. 살과 살이 맞붙는 소리가 난잡하게 울렸다.

모아 쥔 다리 때문인지 사정감이 급하게 몰아쳤다. 칼릭스는 그녀의 다리를 한쪽씩 잡고 벌린 뒤에 다시 왕복 운동을 이어 갔다. 여전히 제 것을 바짝 조였지만 전보다는 훨씬 참을 만했다.

그녀가 먼저 갈 때까지는 절대 멈출 수 없었다. 엉덩이에서 퍽퍽 소리가 날 때까지 깊은 삽입을 반복하자 자꾸만 희수의 몸이 위로 올라갔다. 칼릭스는 다시 그녀를 끌어당길 때마다 달래듯이 키스하며 미처 만지지 못했던 가슴과 허리, 갈비뼈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희수는 고통스런 쾌락에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흐읏.”

자신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칼릭스가 무척 섹시해 보였다. 제 허리를 붙잡은 두툼한 근육질의 팔뚝과 땀 맺힌 이마, 맹렬한 눈빛에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칼릭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입술을 꽉 깨문 그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니까 미치겠는데…….”

쌀 것 같아.

하지만 몇 번이나 그렇게 말하고도 칼릭스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과격한 삽입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희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세상이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했다.

뚝뚝 녹아내리던 양초는 흥건한 흔적만 남기고 거의 사라졌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나른하게 늘어질 때쯤이면 그는 귀신같이 물건을 빼내고 다시 입으로 애무했다. 아래에 닿는 진득한 입맞춤이 끝나면 다시 삽입하고, 한참이나 같은 짓을 반복했다.

희수는 그가 일부러 이 행위를 끝내길 늦추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계속 흔들리는 몸이 힘들었지만 그보다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달뜬 모습이 무척 황홀했다.

나를 저렇게나 원하는 사람이 있다. 나를 저렇게나 필요로 하고, 소중하게 여겨 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희수는 그의 모든 걸 받아 줄 수 있었다.

“아윽!”

비명 같은 신음을 마지막으로 칼릭스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머리 양옆을 짚은 팔에 핏줄이 바짝 섰다.

“아아……!”

안에 사정하는 동안에도 허리짓은 멈추지 않았다. 딱딱한 장대가 깊은 곳을 뭉근하게 찔러 댈 때마다 희수의 눈앞에는 별이 보였다.

이렇게 좋을 수가.

매번 기절할 것처럼 피곤한 정사지만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건 이 만족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이 정도껏 해야지.’

잠든 척할 타이밍을 놓친 희수의 몸이 벌떡 일으켜졌다.

“좋아. 너무 좋아. 아주, 미치겠어.”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거대한 짐승은 좋아 죽겠다는 듯 이마와 얼굴을 부비며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없으면 보고 싶고, 있으면 만지고 싶어. 네가 매 순간 생각나. 온종일 이러고 싶어…….”

거친 음성에 간절함이 서렸다. 희수의 머리 위, 이마, 그리고 양 볼과 입술에 허겁지겁 입을 맞춘 칼릭스는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괜찮았어?”

미처 의복도 다 벗지 않고 삽입한 건 처음이었다. 서로를 원하는 마음에 상황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그러면서도 못내 신경 쓰였나 보다. 걱정 어린 남편의 얼굴을 보곤 희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좋았는걸.”

“다행이다.”

그의 인상이 부드럽게 풀렸다. 안심한 그녀의 귓속으로 청천벽력 같은 주문이 밀려왔다.

“그럼 뭐가 좋았는지 말해 줘. 내가 네 어디를, 어떻게 만져야 좋은지. 자세하게.”

“다…… 좋아, 그냥.”

희수가 민망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미 몇 번이나 들어온 질문이었다.

“나만 좋으면 안 되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는 진지했다. 희수는 멋쩍어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칼릭스는 이번만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얼굴을 붙여 왔다.

“다 벗고 하는 게 더 좋아? 아니면 이번처럼? 네가 평소보다 더 빨리 젖어서 이대로 했는데, 불편할까 봐…… 아프진 않아?”

간신히 정리한 옷자락 밑으로 불쑥 그의 손이 들어왔다. 다리 사이 통통한 외음부를, 마치 가늠하듯 꾹꾹 누르는 손길에 질겁한 희수가 그를 말렸다. 아래로 흐르는 게 느껴져 민망한 상황을 또 겪고 싶지 않았다. 옷을 정리하고 희수는 애써 다리를 모으고 앉았다.

우선 씻고 싶었지만 아직 제대로 대답을 듣지 못한 칼릭스가 여전히 귀를 세우고 있었다.

“아팠어? 아픈 건 아니지?”

“아냐. 난 좋았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제 뒷말을 기다리는 칼릭스를 위해, 희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한 답변을 내놓았다.

“너랑 하면 항상 좋아, 나도. 너처럼 똑같이…… 느껴.”

“그래?”

“응.”

순순한 대답에 그의 표정이 꼭 빛을 본 사람처럼 환해졌다. 희수는 그동안 제가 너무 표현을 안 했나 싶어 미안했다.

그가 잠자리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빤히 알면서. 애무는 또…… 얼마나 정성스러운가! 희수는 스며드는 죄책감에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피곤할 때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좋아. 네가 부드럽게 만지는 것도 좋고…… 가끔은 이렇게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이 급하게 달려드는 것도 좋아.”

집중한 그의 입가가 살며시 벌어졌다. 저렇게 좋아하다니. 희수의 입술이 멈춰지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살이 닿는 게 싫지 않았어. 호감이 있어서 그랬나 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희수는 모은 무릎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밑으로 내렸다.

“너한테는 항상 향기가 나. 예전부터 그랬어. 그 황무지를 헤맬 때도 너한테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나서, 그게 신기하고 또 너무 좋아서 설렌 적이 있어.”

잔뜩 상기된 채 듣고 있던 그의 얼굴이 순간 충격으로 굳어졌다.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건가?”

“응?”

“지금은, 설레지 않나?”

“지금도 두근거려.”

그러자 시무룩하던 칼릭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구렁텅이에서 구원당한 사람처럼, 눈이 반짝이도록 심히 기뻐하고 있었다.

겨우 제 말 한마디로 저렇게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니 안쓰럽고, 또 한편으론 그가 사랑스러웠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토록 중요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던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안에서 요동쳤다.

“널 보면 항상 설레고…… 그래.”

희수는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 남자의 옆에선 더는 외롭지 않으리라.

나를 이렇게나 사랑하는, 그래서 내겐 자존심도 모르는 이 바보 같은 남자의 옆에서는…….

“그냥, 나도 좋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칼리. 네가 항상 조심하면서 날 만진다는 거 알아.”

칼릭스는 희수의 속을 가늠하듯 한참이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보란 듯이 그녀의 가슴을 손에 쥐고 도드라진 돌기를 살짝 깨물었다.

“으…….”

“이렇게 하는 것도?”

그가 보여 주는 광경이 느껴지는 감촉보다 더 야했다.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로 비비듯 만지던 칼릭스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빨아 주는 게 더 좋아? 손보다는 입이 더 좋지?”

그러곤 그가 시범을 보이듯 희수의 젖을 빨았다가, 입술로 뭉개며 말을 이었다.

“다 말해 줘. 내 어디가 좋은지, 내가 어떻게 만지면 좋은지, 전부 다!”

뭔가에 꽂힌 듯, 맹목적인 그의 눈빛에서 희수는 다시 시작될 정사를 예감하곤 기겁했다.

“너…… 정말 힘들지도 않아?”

“뭐가 힘들지?”

그가 진심으로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해 질 무렵이었던 창밖은 이미 시커멓다.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

혀를 내두른 희수의 눈이 저절로 그의 중심으로 향했다. 이미 한 번 사정한 후인데도 반쯤 서 있는 몽둥이가 위협적으로 번들거렸다.

“이번엔 더 기분 좋게 해 줄게.”

급한 손짓에 희수의 몸이 휘청거렸다. 앞선 정사로 척척하게 젖은 제 드레스를 그가 벗겨 낼 때는 수치심도 들었다.

침대 밖에 선 칼릭스는 한쪽 다리를 침대 위로 척 하니 얹고는 젖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난 두 번째 하는 게 더 좋더라.”

그가 기립한 제 물건을 쥐고, 스스로 발기시키며 씩 웃었다.

“젖어서 잘 들어가.”

“칼리!”

“둘뿐인데 뭐 어때. 우린 부부인데, 응?”

경악한 희수가 놀라거나 말거나, 칼릭스는 히죽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섰다. 그녀의 양 발목을 쭉 잡아당긴 그가 장난치듯 발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러지 마.”

희수가 정색하며 발을 움츠렸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칼릭스는 발목을 놓아주지 않은 채로 그녀의 발가락이며 발등을 깨물었다.

“너랑 있으면…… 난 내가 아닌 것 같아.”

이런 짓을 하는 게 정숙한 신전의 사제라고 누가 믿을까.

더는 상관없었다. 이런 제 모습을 아는 건 이 여자뿐이니까. 앞으로도 영원히, 저와 희수만 아는 열락의 시간일 테니.

그는 이를 세운 채 발목과 종아리까지 물어 댔다. 허벅지 안쪽까지 자국이 남게 그녀의 몸을 깨물어 갔다.

이번에도 그 입술이 향하는 목적지는 빤했다. 대체 어디까지 이를 세워 물어 댈 건지, 순간 두려워진 희수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렇게 하면 아파.”

“여긴 안 물어. 혀만 쓸 거야.”

그녀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은 그가 어이없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당연한 거 아닌가. 여긴 항상 부드럽게 할 거야. 부드럽게 빨고, 핥을게.”

그러니까 계속하게 해 줘.

칼릭스는 그녀의 엉덩이를 받치고 하체를 제게 쑥 끌어당겼다. 그러자 다리 사이가 고스란히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적나라한 자세에 희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지금, 엉망일 텐데…….

그 우려를 대변하듯 칼릭스가 조용해졌다. 하얀 크림이 잔뜩 뭉개진 붉은 살결은 말을 잊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잔뜩 긴장한 그녀의 작은 구멍이 움찔 조여들었다가 풀리길 반복했다. 그 안에서 나온 정액이 느릿하게 밑으로 흘렀다. 꼭 달팽이가 기어가듯 간지러웠다.

“다 보여. 진짜 야하다…….”

감탄이 섞인 그 목소리에 희수의 허벅지가 자꾸만 오므라들었다.

칼릭스는 부드러운 손길로, 하지만 단호하게 그녀를 저지했다. 커다란 손가락으로 희수의 둔덕을 벌리고 다시 익숙하게 그 속에 숨은 살점을 찾았다.

노출된 속살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희수가 움츠릴 틈도 없이, 곧장 그곳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덮쳤다.

“아……!”

그녀의 아래에 얼굴을 묻은 칼릭스는 체면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모든 걸 먹어 치우듯이 쭉쭉 빨아올릴 때는 희수의 귀가 다 붉어졌다.

칼릭스는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이다 중간중간 그녀와 눈을 맞추며 깊은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뜨거운 신혼이었다.

* * *

“오늘은 언제 와?”

낮은 탁자에 발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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