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10. 결혼의 의미 (10/17)

10. 결혼의 의미

* * *

그들을 처음 발견한 건 주교였다.

기껏해야 평소처럼 무작위하게 한시적으로 나타나는 다크 홀이 생겨났겠구나, 하고 뛰어왔는데 그 자리에 칼릭스와 어떤 여자가 깊은 입맞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세상에! 신이시여!’

다행히 다크 홀은 닫히고 있었다. 솔직히 다크 홀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주교는 눈앞의 두 남녀가 벌이는 키스신에 큰 충격을 받아 뒤로 자빠질 뻔했다.

‘크, 클로비스 경! 클로비스 경!’

기겁하며 그를 멈추려 했으나 이미 두 남녀가 얼마나 열정적이던지……. 뒤에서 아무리 크게 불러도 둘은 남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기사인 그가, 제 기척조차 의식하지 못했으니 오죽할까.

게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 발을 동동 구르던 주교는 결국 교황을 부르러 달려갔다.

정작 교황, 프란시스는 아주 담담하게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 푹 한숨을 내쉬곤 ‘어쩐지 밤새 꿈자리가 사나웠다’고 일축한 것이다. 교황은 그저 쯧쯧, 혀를 차더니 일단 그 둘을 감옥으로 보내라고 명했다.

결국 칼릭스와 희수는 나란히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왔다.

주교는 혹시나 신전의 감옥에서 불상사가 생길까 겁이 나서 간신히 둘을 떼어 내 각각 마주 보는 독방에 가뒀다.

허나 둘에겐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동안 입술만 맞추고 있느라 미처 대화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칼릭스와 희수는 이 상황을 기회로 삼아 창살 앞에 찰싹 달라붙어 주거니 받거니 못다 한 얘기를 나눴다.

“정말 나를 생각했다고?”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칼릭스는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던 건가? 너도? 많이?”

그러면 그녀는 몇 번이나 성의 있는 대답을 남겨 주었다. 계속해서 듣는 같은 질문도 지겹지 않았다.

“응, 응. 비가 오면 같이 빗길을 걷던 게 떠올랐고, 내 신발을 닦아 주던 게 생각났고, 얼마나 애틋하게 날 쳐다봤는지…… 그런 게 생각났어. 금발머리를 가진 사람이 보이면 혹시 네가 아닐까 하고 혼자 기대하기도 하고……. 우리가 같이 있던 순간들을 되새길 때마다 매번 새로웠어.”

희수는 설레는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남자의 얼굴에 가슴이 뭉클했다.

“네가 많이 그리웠어. 정말 많이.”

그 말에 칼릭스는 커다랗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곧장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창살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더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가 아쉬워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런데 왜 안 찾아왔어. 왜…….”

칼릭스의 음성에는 이제 희수를 원망하기보다 안타까움이 더 크게 서려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대답을 들어서 그녀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미안해서. 나보다 더 좋은 여자랑 행복하게 살라고 기도했어. 너무 미안하고…… 염치가 없어서……. 나 같은 게 난데없이 나타나서 네 인생 망친 거 같아서…….”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었다니까. 네가 날 살려 뒀다고.”

자상한 목소리에 희수는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는 손끝 하나 닿지 못할 거리에 있었지만.

그녀 역시 몇 번이나 했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물었다.

“나를 정말…… 그렇게 많이 사랑해?”

그의 파란 눈동자가 요동쳤다.

죽을 때까지 옆에 붙어 있고 싶은 게 사랑인가.

네 옆에서만 이 심장이 뛰는 것 같은데, 사는 동안은 네 곁에서만 붙어 머물고 싶은데. 너 때문에 죽고 싶고, 너 때문에 살고 싶은데. 이 집념 어린 감정이 정말 사랑인가.

남들이 하는 사랑은 이런 게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때로는 스쳐 가고, 때로는 무뎌지고, 때로는 상대가 바뀌기도 하는 것 같은데, 자신의 것은 그렇지가 못했다.

심장 한가운데에 말뚝처럼 깊이 박혀 있었다. 이제는 이 신체와 영혼의 주인이 저 자신인지, 굳게 박힌 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난…… 나는 평생 네 노예로도 살 수 있어.”

칼릭스는 자신의 가슴을 찢어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도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제발 좀 알아주길 바랐다. 그래서 정확히 이게 무엇인지 명명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녀가 이것이 사랑이기를 바라면 그렇다고 하리라.

“네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난 그렇게도 살 수 있다고.”

진심이었다. 칼릭스는 눈을 맞춘 채 믿어 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 때문에 사는 거야. 너 때문에…….”

그의 희망찬 고백에 희수의 입술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이미 몇 번이나 들었지만 매번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둘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만큼 큰 의미를 지녔다는 게, 그것도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떨어진 자신이 그에게 이만큼 커다란 존재라는 게 놀라웠다.

어쩌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매녹에게 먹히지 않고 살아남아 그를 만났고, 그는 말도 못 하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헤어져 있었는데 아직도 서로를 이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게, 이 모든 게 기적 같았다.

“넌? 너는 나를 사랑하나? 진심으로? 네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만큼?”

칼릭스는 그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가 다크 홀을 넘어가지 않고 자신을 택한 것.

“네 가족과 친구들보다 훨씬 더, 날 사랑하고 있었던 건가? 그렇게 많이?”

“…….”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희수는 사랑만으로 그를 택한 게 아니었다.

저 다크 홀로 뛰어든다 해도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리란 보장이 없다는 게 사실은 가장 큰 이유였다.

칼릭스는 옛 문헌에서 처음 이곳에 왔던 이방인들이 다크 홀을 넘어 돌아갔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중세 프랑스의 역사에는 이들의 존재가 없었다.

일단 이곳 세계, 갈리아 켈티카에서 카이사르는 악마로 취급되었다. 유럽사를 모르는 사람도 그 이름은 알고 있지 않은가.

로마의 황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를 사악한 악마로 칭하는 게 바로 이곳의 신전이었다. 희수는 이 사실을 처음 알고, 어쩌면 옛날 이곳에 카이사르와 대치하던 옛 프랑스의 무리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허나 그들은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원 세계의 주류 세력이 아니어서 역사에 남지 못했을지도.

어느 쪽이건 간에 희수는 속을 알 수 없는 저 어두운 곳으로 몸을 던질 수 없었다. 그것도 자신을 저렇게나 사랑한다는 남자를 두고는, 못 간다. 절대로.

“응.”

그래서였다. 그를 실망시킬 진실은 뒤로하고, 희수는 칼릭스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전하기로 했다. 그의 행복한 미소에 기꺼이 거름을 보탰다.

“내 가족보다, 내 친구들보다 더…… 너를 사랑해.”

사실이기는 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까지 엄마의 옆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 그 대신에 희수는 자신이 떠나면 죽겠다는 남자의 옆을 지키기로 하지 않았던가.

차가운 돌바닥에 쇠창살이 꽂힌 좁은 감옥.

이런 데 끌려와서도 저 남자의 웃는 얼굴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보면, 그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았다.

희수의 사랑은 상대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기도했었다. 그가 행복하기를.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해도 어디서든 저 남자가 행복하기를.

그리고 저 남자는 자신의 옆에서 비로소 행복해 보였다. 이제야 비틀어졌던 조각이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저렇게 크게 미소 짓는 건 처음 보았는데…… 그렇게 기쁜 걸까. 나 같은 여자가, 저 남자를 그렇게 괴롭히고 도망쳤던 나 같은 사람이 저 미소를 볼 자격이 있는 걸까.

희수의 기억 속 칼릭스는 항상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그의 시선은 언제나 제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릴 때까지도 그는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하고 쓰라렸다.

신전의 성기사인 그가 다크 홀을 만들어 냈다. 분명 벌을 받을 것이다.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을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희수는 그를 향한 죄책감만큼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다. 고맙게도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의 사랑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결의에 찬 그녀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네가 어떻게 된다고 해도 항상 옆에 있을게.”

철커덕! 흥분에 찬 그의 거친 손길에 쇠창살이 흔들렸다.

“영원히? 지금 영원히 내 옆에 있겠다는 얘기인가?”

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서로를 마주 보는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가슴이 시키는 말을 입으로 내뱉었다.

“영원히. 네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젠가 네가 날 원하지 않을 때까지.”

“그럼 영원히 내 옆에 있겠다는 소리인데.”

크게 웃은 칼릭스가 막힌 위를 한 번 올려다보고 눈을 감았다. 자신의 왼쪽 가슴 위로 손을 올리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힘들 때 신을 찾지만 그는 기쁠 때 신을 찾았다. 먼저 신께 감사를 전한 그가 떨리는 눈빛으로 희수를 돌아보았다. 긴장한 입매가 잠시 말을 주저했다.

“지금 한 말, 맹세할 수 있나? 영원히 내 옆에 있겠다고.”

그에게 맹세는 목숨을 건 약속이었다. 순진한 생각일지 몰라도 그녀가 맹세한다면 정말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희수가 신을 믿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귀로 듣고 싶었다.

다행히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게다가 네가 원하면 앞으로 신도 믿고, 신전도 다니겠다고까지 덧붙였다.

허나 칼릭스는 거기까지 원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희수가 신전을 다니길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럴 것 없다. 정말 그럴 필요 없어.”

신전의 모두가 남자였다. 게다가 신도 남자 아닌가.

희수가 허구한 날 예배드린다고 신전을 드나드는 건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기도한답시고 저랑 놀아 주지도 않고, 말도 않고 있는 것보단 그냥 신을 믿지 않는 게 나았다.

다행히 신전은 그리 배타적이지 않았다. 도시의 시민들이 신을 믿거나 말거나 자유로웠다.

“신을 믿는다고 딱히 인생이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아. 그냥…….”

“클로비스 경.”

엄숙한 목소리가 감옥을 울렸다.

돌아본 자리에는 아주 기막힌 표정을 한 교황, 프란시스가 서 있었다.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언행입니까, 경. 이게 지금 신전을 대표하는 수석 사제의 입에서 나올 소립니까!”

칼릭스는 성기사이면서 동시에 사제였다. 프란시스는 가슴을 퍽퍽 때렸다.

“내가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할 말이 없어요.”

프란시스는 칼릭스만 생각하면 일단 머릿속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지난 3년간 둘은 남들에게 말 못 할 일들을 함께 마주쳐야 했다. 블랙캐슬의 재판, 그리고 신전 성기사들의 출신으로 나눠진 계파 싸움. 이를 헤쳐 나가며 둘은 아주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했다.

교황에게 칼릭스는 든든한 한 축이면서 동시에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성실하고 성력도 강력했지만 딱 하나, 약점이 있었다.

그게 바로 저 여자와 관련된 일이었다.

칼릭스는 멀쩡하게 보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일주일씩 결근을 했다. 무슨 일인가 찾아가 보면 집에 처박혀 진탕 술을 마시고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뒷골목 매음굴을 헤매기도 했다.

혹시 너무 외로운 나머지 여자와의 하룻밤을 원해서 저러는가 하고 보면 그게 아니었다.

거기서 그 여자를 찾고 있는 거였다.

심지어 그 여자는 창녀였다. 그 사실에 프란시스는 경악했다.

처음에는 칼릭스가 경멸스러웠다. 창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저 지경이 되어 버린 그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여자는 간악한 마녀였습니다. 사악한 악령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깃들어 당신을 더럽힌 겁니다, 클로비스 경.’

칼릭스는 그 말을 듣고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악마가 되도 좋으니까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대답에 프란시스는 그를 설득시키길 포기해 버렸다.

비슷하게 닮은 여자를 찾아 대용품처럼 안겨 주면 좀 나을까 했지만 칼릭스는 그녀와 닮은 여자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그 여자뿐이었다.

나중에는 그 끔찍한 순애보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3년. 프란시스는 시간이 흘러간 것에 감사해야 했다.

칼릭스는 점점 실망하는 일에 지쳐 갔고, 현실에 치여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건 꼭, 그 여자를 잊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칼릭스는 모두가 즐거울 때도 예전처럼 웃지 못했다. 사람들이 마음 편히 쉬는 시간에도 그의 눈빛은 그저 공허했다.

사람들이 기쁘고, 때론 슬프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그는 그저 회색빛 세상을 견뎌 내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빈껍데기만 남은 그 시선에서 프란시스는 알아챘다.

칼릭스의 어느 한구석이 크게 망가져 버렸다는 것을.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해도 결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차라리 그 여자를 다시 만나기를 빌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 여자는 없었다.

그러다 파리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그녀를 마주쳤을 때, 프란시스는 칼릭스의 반응으로 그녀가 그 여자를 닮았다는 걸 알아챘다.

칼릭스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녀가 하는 얘기를 들으려 했고, 말을 걸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를 닮은 여자는 많았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상황. 프란시스는 그가 또다시 실망하고 괴롭게 술을 찾고, 혼자 헤매는 밤을 보내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칼릭스를 만류했다. 저 여자는 그 여자가 아닐 거라고, 아마 닮은 여자일 거라고 끊임없이 설득했다.

우선 그 여자는 이방인이니 이곳의 말을 저렇게 유창하게 할 수 없고, 이름도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방인이라면 진즉 신전에 잡혀 왔지, 저렇게 공개된 곳에서 일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프란시스는 사실 희수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아닐 거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그런가?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가?’

답지 않게 꽤 순순하기에 이대로 칼릭스가 포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지.

“하아.”

칼릭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전도유망한 기사였다.

그랬던 그가 저 여자의 등장으로 인해 인생을 거의 말아먹을 뻔했다. 이제는 술까지 입에 대고, 덕분에 용병 출신의 성기사들 사이에선 꽤 인기가 좋았지만 프란시스의 입장에선 칼릭스의 타락이 그리 반갑지 않았다.

간신히 저 여자의 악령에서 벗어나 이제야 제대로 된 궤도를 타는가 했는데…….

“부인, 저는 교황 프란시스 네베르코입니다. 도저히 예의로나마 만나서 반갑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군요. 양해 바랍니다.”

“아, 안녕하세요.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희수는 프란시스의 묵례에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레스토랑에서 이미 본 바가 있었기에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프란시스가 흘긋 뒤를 돌아보며 칼릭스에게 말했다.

“클로비스 경, 우선 제가 부인과 독대하겠습니다.”

“프란시스!”

칼릭스가 소리쳤지만 프란시스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가시지요. 부인께는 제가 간곡히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교황과 칼릭스는 꽤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으니 그간의 일을 다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그의 말투가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혹시 돈을 줄 테니 먹고 떨어지란 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희수의 가슴은 불안하게 뛰었다.

교황의 손짓으로 간수가 뛰어와 감옥의 문을 여는 사이에 칼릭스가 날카롭게 외쳤다.

“프란시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데!”

“제가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하겠지요.”

“희수가 원하지 않잖아!”

“그래도 해야 합니다. 저 여자는 그동안 경께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그 순간이었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칼릭스가 맨손으로 쇠창살을 옆으로 젖혔다. 쇠가 굽었다. 그가 멀쩡하게 그 사이로 걸어 나오는 걸 보고 희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럴 거면 왜 여태 감옥에 갇혀 있던 거지?’

아무래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나 보다.

무서운 눈을 한 칼릭스가 프란시스와 마주 보고 섰다. 프란시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간수들과 신관들이 일제히 칼을 빼어 들었다.

순식간에 긴장된 상황에 희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긴장한 건 이들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뿐인 듯했다. 막상 교황은 무기를 빼어 든 신관들 사이에서도 덤덤했다.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이들은 모두 물러가세요.”

신관들은 칼릭스의 눈치를 살피느라 주저했다. 하지만 교황은 단호했다.

“명령입니다.”

결국 간수를 제외한 모두가 사라지고 감옥은 적막에 휩싸였다. 먼저 말문을 연 건 교황을 노려보던 칼릭스였다.

“여자만은 못 데려가. 나와 이야기해.”

“클로비스 경, 경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자존심을 지키세요. 부탁입니다.”

프란시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경을 배신하고 떠났던 여자를, 저 여자를 대체 뭘 믿고 여길 데려오신 겁니까. 적선하듯 주는 말 한마디에 어떻게 또 믿는 건가요. 그렇게 순진하게!”

“그럼 어떻게 믿어야 하는 건가.”

진지한 대꾸에 프란시스는 미간을 구겼다.

“믿지 마세요. 경께서 믿을 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제 말은.”

“믿고 싶은데…… 어떡하라는 거야.”

“왜 꼭 저 여자를 다시 만나야 합니까? 다른 여자를 만나세요. 세상에 반이 여자인데 왜 저 여자한테 당신이 이렇게 밑바닥까지 내보여야 합니까, 클로비스 경!”

이들의 대화에서 희수는 교황이 칼릭스를 무척이나 아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면전에 대고 칼릭스가 웃음을 터뜨려도 교황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교황은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었다.

“넌 왜 아직도 신을 믿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클로비스 경.”

“블랙캐슬에서 다크 홀을 열고 매녹을 쏟아 낸 게 너잖아.”

“여긴 신전입니다. 말을 가려서 하세요.”

“그 병신 짓까지 하게 만든 게 바로 이 신전인데, 아직도 여기서 신을 섬기고 있지 않나.”

“클로비스 경.”

“너야말로 아직도 신전에 남아 있는 주제에 날 멍청하다고 욕할 자격이 있느냔 말이야.”

“알았어요. 알았습니다. 내가 졌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교황은 크게 기분이 상한 듯 휙 몸을 돌렸다.

그저 감옥을 나서는 계단을 오르기 전, 칼릭스를 한 번 노려보며 말했다.

“클로비스 경, 이것만 알아 두세요.”

“듣지 않겠다.”

“난 부인께 결혼서약의 증인이 되어 주겠다 하려 했습니다.”

그 순간 칼릭스의 눈동자에 번쩍 빛이 들었다.

“이미 서약서를 가져왔는데 아무 쓸모도 없어졌군요.”

깜짝 놀란 그가 프란시스를 돌아봤다. 하지만 교황은 보란 듯이 마지막 말을 던지고 감옥을 나갔다.

“그냥 불태워 버려야겠습니다.”

칼릭스가 급하게 희수의 손을 잡고 그 뒤를 쫓았다. 그를 부르는 애타는 음성이 감옥을 울렸다.

“프란시스!”

* * *

프란시스가 결혼식의 증인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옛날 대주교 시절이라면 모를까, 교황이 된 지금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이는 무척 이례적인 일로, 명예로운 예식이 될 터였다. 칼릭스는 그에게 고마웠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왜 지금 당장 하라는 거야. 반지도 드레스도 없는 결혼식을 하기에는…….”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다.

칼릭스가 희수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자 프란시스가 또다시 땅이 꺼져라 푸욱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반지를 준비해 오세요. 드레스도 맞추고.”

순순한 허락에 칼릭스의 얼굴에 밝은 빛이 드리웠다.

“다음 주는 시간이 되나? 그때쯤이면 반지도, 드레스도…….”

프란시스는 처음으로 활짝 웃으며 희수를 돌아보았다.

“그사이에 다시 도주할 궁리를 하면 되겠군요. 제가 시간을 벌어 드렸습니다, 부인.”

명백한 비꼼.

교황은 희수와 칼릭스의 결혼식을 내켜 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서서 결혼서약의 증인이 되겠다는 건 딱 한 가지 이유였다.

“그냥 지금 대충 하세요.”

교황은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경의 옆에는 저 여자가 있는 게, 더 낫습니다.”

프란시스는 감옥에서 둘이 하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얼굴이 다 뜨거울 정도로 칼릭스는 그녀가 좋아 죽겠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간이고 쓸개고 뭐든 다 저 여자에게 빼줄 기세였다.

게다가 3년간 옆에서 지켜본 모습을 떠올리자면 칼릭스는 정말로 저 여자 때문에 생을 연명한 게 맞았다.

죽지도 못하고 제대로 살지도 못했지만 저 여자를 다시 만나겠다는 믿음 하나로 이날까지 견뎌 온 것은 확실했다.

그녀의 존재를 알았으니 반드시 옆에 두려고 할 텐데, 그로서는 그냥 이 둘이 결혼하고 평안한 모습을 지켜보는 게 차라리 나았다. 프란시스 역시 칼릭스가 어떤 짓을 벌일지 두려웠던 것이다.

둘이 합법적인 부부가 되어 사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그래. 그냥 하자. 반지 같은 거,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희수는 붙잡은 칼릭스의 손을 흔들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제게 뭐라도 하나 해 주려는 그가 고맙고, 또 미안했다.

“역시 부인께서는 눈치가 빠르시군요. 본인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게 낫습니다.”

“그만해.”

칼릭스의 핀잔에 교황은 두 남녀의 맞잡은 손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경건한 얼굴로 눈을 감고, 신께 기도를 올리려는 것처럼 보여 칼릭스 역시 눈을 감았다.

허나 교황은 다시 슬그머니 눈을 뜨고 희수를 향해 속삭였다.

“제가 이 결혼을 용납하는 건 클로비스 경이 더는 비참해지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부인이 마음에 들어서가 절대로 아니에요.”

“프란시스!”

칼릭스가 짜증스럽게 그를 말렸다. 흠흠, 헛기침을 한 교황이 다시 경건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정말 기도를 시작하는 것인가 칼릭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신께 이름을 받은 갈리아 켈티카의 교황 프란시스 네베르코, 이들 서약의 증인이 되길 청합니다.”

이제야 제대로 하려나 보다. 칼릭스가 크게 한 번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허나 프란시스는 쉽게 서약을 읊어 주지 않았다.

“부인은 저 순진한 성기사의 동정을 빼앗은 죄로 평생 그를 마음으로 섬기고 살겠다고 맹세합니까? 뒤통수치고 도망가거나 싸우지 않겠다고도 약속하세요.”

“그만해! 그만!”

화가 난 칼릭스가 교황의 가슴을 밀쳤다.

그때 희수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감히 그가 교황의 몸에 손을 대서가 아니었다. 못 믿을 말을 듣고 그녀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동정……?”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처음 성교를 할 당시 그가 약간 어색하기는 했지만, 저렇게 건장한 남자가 동정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순간 어떤 불안한 예감이 그녀를 스쳤다.

“칼릭스, 그런데 혹시.”

다시 설전을 벌이던 교황과 칼릭스가 동시에 희수를 돌아보았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돼……?”

좁아진 미간. 떨리는 목소리. 흔들리는 눈빛. 모르고 있던 진실에 맞닥친 그녀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대답을 꺼리고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뭔가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의 본능이 먼저 이를 알아챘다.

하지만 진실은 자신의 입만 다문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클로비스 경은 올해 22세이십니다, 부인. 나이도 모르고 계셨군요.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만.”

프란시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희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심하게 놀란 그 반응에 칼릭스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걸 깨달았다. 프란시스를 한 번 노려본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다음 주가 생일이야. 다음 주가 지나면 23살이 돼.”

“…….”

허나 그 사실도 희수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22살이나 23살이나 그녀에겐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헤어스타일을 부탁했던 세라가 22살이었다. 그녀가 까마득히 어리게 느껴져 무척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칼릭스가 세라의 동년배였다니.

그가 동정이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나이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이었다.

희수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향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빠지고, 어깨가 축 늘어졌다.

고민이 짙어진 희수의 눈가가 아래를 향했다. 이곳에선 만으로 나이를 따지는데, 그녀의 만 나이가 30살이었다. 자그마치 8살 차이. 그가 곧 23살이 된다 해도 그녀 역시 곧 31살이 되는 셈이라 결국 똑같았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나보다 8살이나 어린 남자하고 결혼을……?’

순식간에 이 결혼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희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남자는 동시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프란시스는 급히 둘의 손을 잡고 서약을 읊기 시작했다.

“칼릭스 클로비스 경은 아내가 될…….”

“희수.”

“희수 양을 평생 사랑하며 아껴 줄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잠시만요. 교황 성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희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허나 프란시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희수 양은 남편이 될 칼릭스 클로비스 경을 마음으로 섬기고, 사랑하며, 죽는 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맹세합니까?”

희수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머릿속으로는 자꾸만 ‘8’이라는 숫자가 아른거렸다.

저 건장한 남자가 겨우 22살이라고 누가 예상했단 말인가. 그 당시의 나이가 20살인 줄 누가 알았단 말인가!

‘10년 뒤면 내가 40살이고…… 칼릭스가 32살인데.’

그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프란시스가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럼 두 사람의 맹세로 이 서약이 신의 앞에서 이루어졌음을, 본 사제의 이름으로 증명합니다.”

“잠시만요!”

희수는 다시 정신을 바로 잡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결혼을 무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런 식의 결혼서약은 칼릭스에게 큰 상처가 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이 무척 좋지 않았다.

희수는 떨리는 심정을 애써 내리누르고 물었다.

“내가 너보다 8살이 많은데…… 정말 나랑 결혼할 수 있어?”

8살이라는 나이 차에 칼릭스도 흠칫 놀랐다.

그는 머릿속으로 얼핏 5-6살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희수가 제 나이 대로 보이지 않았다. 30살보다는 어려 보였다.

하지만 나이는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선 어차피 서로의 나이를 묻지도 않았다. ‘당연히 결혼해야 한다’고 대답하려 했는데, 프란시스가 더 빨랐다.

“8살? 8살이 많다고요?”

그가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희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인, 사람이 정말…… 대체 양심이 있는 겁니까?”

칼릭스는 그만 좀 닥치라는 뜻으로 프란시스의 발을 꾹 밟았다. 허나 그는 꿋꿋했다.

“어느 돈 많은 과부도 이런 결혼은 못 합니다. 시장의 딸이라도 이런 결혼은 할 수가 없을 거라고요.”

리옹의 여자들은 보통 열여섯에, 저보다 다섯 살은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

“부인은 정말 행운인 줄 아십시오. 그만큼 클로비스 경을 귀하게 여겨 주고 떠받들며 사세요. 아셨습니까?”

염치가 없어 얼굴이 붉어진 희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칼릭스는 올라오는 열기를 꾹 눌러 참고 프란시스를 노려보았다. 괜한 소리를 지껄이는 그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희수가 회의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자. 결혼을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어. 네 인생이 저당 잡히는 거니까…….”

그러나 더 듣기 싫다는 듯 칼릭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고말고 할 문제도 아니라고.”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정말 괜찮겠어?”

칼릭스는 희수의 손에 깍지를 끼고 마주 잡았다.

“널 사랑해. 네가 내 옆에서 평생 안전하길 원해. 이 결혼은 내게 그런 의미야. 반지가 없어서 미안하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주저되지 않아. 널 책임지게 해 줘.”

프란시스는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둘은 이 신전에서 벌어진 일로 함께 마음을 앓는 동안 쌓인 정이 가족 못지않았다.

소중한 동료인 그가 좋은 여자와 평생 행복하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저 여자와 하는 이 결혼이, 칼릭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못마땅하긴 하지만…… 프란시스는 그가 제발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칼릭스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 저 여자 때문에 벌어진 일로 3년간 그의 속이 문드러져 있을 것이다.

“저는 남편이 될 칼릭스 클로비스 경을 마음으로 섬기고, 사랑하며, 죽는 날까지 함께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나마 그녀의 자신 있는 음성이 위로가 되어 프란시스는 찝찝한 마음을 한결 털어 냈다.

“그럼 두 사람의 맹세로 이 서약이 신의 앞에서 이루어졌음을, 본인 갈리아 켈티카의 교황 프란시스 네베르코의 이름으로 증명합니다. 두 사람은 오늘부터 부부가 되었습니다.”

둘의 결혼서약의 증인이 되어 주었으니, 자신이 법정에 출두하지 않는 이상 이 둘의 이혼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리고 교황은 증인이든 피의자든 재판에 설 수 없었다.

프란시스는 희수를 내려다보며 당부했다.

“부인은 아이를 셋 이상 낳아야 합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야.”

“클로비스 경의 가문엔 대를 이을 장남이 없어요. 그러니 부인께서 꼭 아들을 낳아야만 경께서 가문의 이름을 돌려받습니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마.”

“많이 늦었지만 한번 힘을 내보세요.”

“그만 좀 닥치지 못해?!”

* * *

희수는 오랜만에 할머니와 엄마의 말소리를 들었다.

‘저런 건 낳지 말라고 했잖아. 애물단지 같은 계집애를.’

‘엄마, 희수 들어.’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들으라고! 으이구.’

‘…….’

‘저 계집애 키우느라 결혼도 못 하고 너만 고생이야. 그러게 말렸을 때 진작 지워 버렸어야지 저런 걸 왜 낳아 가지고…….’

‘엄마! 그만해.’

‘아무튼 저거 고등학교 들어가면 좀 나가라고 해라. 지 아빠 찾아가라고 해. 이제 중학생인데 저도 눈치가 있으면 한창 젊은 제 엄마 등골 빨아먹는 귀신인 거 알지, 모르겠니?’

‘희수한테 아빠가 어딨어.’

‘쯧쯧쯧.’

할머니의 혀를 차는 소리가 희수의 등을 뚫고 나와 가슴을 푹푹 찔렀다. 15년 평생을 들어왔지만 회초리 같은 날 선 말들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서럽고, 화가 나고,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희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분명 제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만 이럴 때는 더 열심히 잠든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희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애써 낮췄다.

내가 언제 낳아 달랬어? 엄마가 멋대로 날 낳았는데,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소리치고 싶었지만 희수는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엄마의 말대로 가족이라곤 엄마와 할머니가 전부인데, 정말 이 집을 나가 버리라고 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줄기차게 엄마를 설득해 온 대로 어디 보호시설 같은 곳에 저를 보내 버릴까 봐. 지금보다 더 귀찮고 성가신 존재로 엄마한테 낙인찍힐까 봐 두려웠다. 맡아 줄 사람 하나 없는 저를, 엄마가 버리고 싶어질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희수는 ‘순하고 착한 아이’가 되길 택했다. 제 머릿속에서 확성기처럼 떠드는 말들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철이 들기 전에 눈치를 먼저 익힌 희수는 목소리를 낮추고, 억울해도 참는 법을 먼저 배웠다. ‘엄마의 입장에선 내가 귀찮겠지, 엄마의 입장에선…….’ 하고 생각하면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할머니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젊은 엄마가 결혼도 못 하고 혼자 살게 된 건 전부 제 탓이었다. 제 잘못은 아니지만 제 탓이 맞긴 했다.

어린 희수는 일찍이 세상을 깨달았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해서, 때로는 잘못한 게 없어도 죄인이 된다는 걸.

희수의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족들의 눈초리는 점차 따가워졌다. 특히 저를 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칼날 같았다. 가장 편안한 장소여야 할 집에서도 희수는 어깨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했다.

‘빨리 성인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을 갖고 있던 희수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대한 손을 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성인이 되기 전에 먼저 집을 나올 수 있으니까.

쫓겨나는 것과 제 발로 나오는 건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저 계집애 갈수록 눈치만 늘어서 아주 꼴 보기 싫어.’

‘식당 가야지, 엄마.’

‘안 그래도 간다, 가!’

쾅! 할머니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에 귀가 다 따가웠다. 그리고 예정된 순서처럼 이어지는 엄마의 깊은 한숨소리.

‘휴우…….’

어릴 적 일인 걸 보니 꿈속이었다. 꿈인 걸 알면서도 속이 뜨뜻했다. 한 맺힌 뜨거운 응어리는 항상 희수의 안에 존재했다. 툭툭 속이 건드려질 때마다 울컥하고 지난 일들이 올라왔다.

희수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려서 엄마 배 속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콱 죽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엄마는 행복했을까. 만약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러면 정말 행복했을까…….

적어도 지금보단 나았겠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엄마의 인생은 지금보단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일도 훨씬 많지 않은가.

비참하지만 집을 떠난 뒤에도 희수의 삶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애초에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엄마를 위한 독립이었기에 희수는 있는 힘껏 견뎌 냈다.

죽는 게 어려운 만큼,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희수야, 나 생각해 봤거든. 근데 정말 미안한데, 너랑 결혼은 못 하겠다.’

성인이 되고, 3년을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다. 결혼 얘기는 꺼낸 적도 없건만 어느 날 갑자기 굳은 얼굴로 그가 말했다.

‘아버지도 안 계셔, 어머니도 안 계셔. 그렇다고 막말로 네가 진짜 고아도 아니고…… 뭐라고 해. 솔직히 좀 그렇잖아. 너도 우리 집 알지? 우리 엄마한테 너네 집 사정이 어떻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내가.’

우리 집, 우리 엄마……. 희수는 담담히 그의 말을 들었다.

내가 벌써 결혼을 고민할 나이가 됐나? 아니지, 그의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까 벌써 결혼을 생각하고 여자를 만나야 하는가 보다, 그 정도의 감상을 했던 것 같다.

‘너 어차피 나랑 결혼 생각하고 만난 거 아니지? 너 평범한 집에 시집 못 가, 희수야. 알지?’

큰 애정이 남았다면 화가 나거나 억울하거나 했을 텐데. 이 남자를 3년이나 만났건만 희수 역시 결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리고 너도 실속 좀 차리고 살아라. 애가 겉으로 보기엔 똑똑한데 속은 영 맹해 가지고……. 너 그렇게 살다가 사기당할까 봐 걱정이다. 사람 너무 믿지 말고, 너무 잘해 주지도 마. 알았어?’

이런 소리는 왜 하는 걸까. 빌려줬던 돈 삼백만 원은 이미 잊은 지 오래인데.

그냥 헤어지자고 말하지. 쉽고, 깔끔하게.

이별은 허무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울었지만.

‘그럼 잘 살아라, 희수야. 고마웠다.’

3년을 만났어도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면 정리될 수 있는 게 남녀 사이구나. 그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연애를 하지 못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연애뿐만 아니라 깊은 인간관계가 어려워졌다.

내게 소중해서 그만큼 잘해 줬던 게 잘못인가. 그게 잘못이라면 내가 죄인인가. 그렇다면 이별의 원인은 나였구나…….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은 약간의 트라우마가 남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그의 말대로 평범한 누군가의 옆에 있기에는 내가 심히 모자란가 보다 하고 쉽게 받아들이려 했지만, 그렇게 되자 삶이 너무 외로워졌다.

그래서 더욱 일에 매달렸다.

돈을 벌고, 명성을 쌓고, 좋은 것을 누리고 보란 듯이 잘 사는 척을 했지만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적적했다.

사람에겐 타인의 온기가 필요한 공간이 따로 있다. 특히 저에게는 그렇다는 걸, 서른이 다 되어 갈 무렵 깨달았다. 정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였다. 든든한 이 남자의 품에 꼭 안겨 있기로 한 것은.

“……칼릭스.”

희수는 자신의 눈가를 닦아 내는 손길 덕분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래, 전부 꿈이었다.

가슴이 옥죄여 속으로 삭였던 눈물이 터졌지만 그건 이미 한참 지난 과거의 일들이었다. 지금은 세상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남자의 품속이었다.

지난 저녁.

교황의 주도 아래 급하게 신전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맞은 이른 새벽이었다. 칼릭스와 둘이 함께 살 집이 준비되는 며칠간 신전에서 머물기로 했다.

만약 이 신전에서 새 생명이 잉태된다면 끔찍한 저주를 내리겠다고 단언한 교황은 희수에게 한 침실을 내주었다. 무려 교황이 잠든 침실 바로 위층이었다.

그곳에서 분명히 혼자 잠들었는데, 칼릭스가 지금 함께였다. 놀란 희수가 고개를 들었다.

“왜 여기 있어?”

“쉬이.”

조용히 하라고 손가락을 가져다 댄 칼릭스는 아무 말 없이 희수의 몸을 끌어안았다.

사람의 온기가 필요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녀와 평생을 약속했는데 이곳이 신전이라는 이유로 부부가 각방을 쓰고 아내를 홀로 잠들게 해야 한다는 게 그는 이해되질 않았다. 칼릭스는 인상을 구겼다.

‘천지분간 못하는 짐승인 줄 아나.’

머릿속은 분명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놈의 신체는 또 의견이 달랐다. 마음을 따라 주질 않고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었다.

다행히 그는 사람이라 아래쪽의 변화는 손쉽게 무시하고, 그녀의 좁은 등을 슬슬 쓸어 주었다.

“흑…….”

그의 가슴팍이 갈수록 축축해졌다. 잠결에 하품을 하다 우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희수는 얼굴을 감추더니 본격적으로 가슴에 파고들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왜 우는 거지?

칼릭스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딱히 그녀가 울 이유가 없었다. 어제 저녁에 치렀던 결혼식 말고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해서일까? 희수는 자의로 갈리아 켈티카에 남기로 했지만 고향을 포기하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니까…….

긴 한숨을 내쉰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이리, 얼굴 좀 내봐. 응?”

하지만 희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힘을 주어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있었지만 칼릭스는 그러지 않았다.

“왜 우는 거야.”

얼굴을 본다고 딱히 달래 줄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랬다. 그렇다고 그녀를 돌려보내 줄 것도 아니니까. 나를 사랑한다는 여자를 더는 양보할 수가 없으니까.

먼 곳에서라도 희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건 그때는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기도 하지. 그녀가 스스로 제 품에 들어온 지금은 절대로 놓아줄 마음이 없었다.

그래도 희수가 울고 있으니 마음이 영 좋질 않았다. 목구멍에 돌덩이가 콱 얹힌 것처럼 무거웠다. 칼릭스는 끊임없이 그녀의 귀에 대고 읊조렸다.

“내가 잘해 줄게. 후회되지 않도록 진짜 잘해 줄게. 내 모든 걸 다 바쳐서 널 행복하게 해 줄게…….”

속이 아릿하다 못해 답답해질 때쯤이었다.

이러다 희수를 다시 보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고민이 스멀스멀 드리울 때쯤.

“나…… 널 만나려고 여기 온 것 같아.”

콧물이 가득 찬 음성이 그의 귀에 내리꽂혔다. 눈을 번쩍 뜬 칼릭스는 잽싸게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가는 벌겋지만 잠기운이라곤 없었다. 놀랍게도 희수는 진심이었다.

“여기서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은 괜찮아. 네가 여기 있어서. 그 사실만으로도 난 여기 남을 이유가 충분해. 칼릭스, 너 때문에…….”

“…….”

칼릭스는 눈을 깜빡였다. 너무 다정한 말이라 솔직히 잘 믿기지 않았다.

자다 깨서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건가?

그의 불신 어린 눈초리에 희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마주 보느라 모로 누웠던 몸을 천장을 향해 바로 눕고, 대신 고개를 그의 쪽으로 더 기울였다. 침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잦아들고 침묵만 남았다.

희수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여행을 하던 중이었어. 가족은 엄마뿐이었는데, 엄마가 결혼을 한다고 했거든.”

칼릭스는 처음 듣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세우고 집중했다.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어.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한번 가 보기로 했지. 어떤 기분인가 하고.”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세상에 홀로 남아, 잘 해낼 수 있을까. 그 확신을 얻고 싶었다. 자립하고도 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고 싶었다.

“여행은 그래서 한 거야, 사실은.”

동료들과 워크숍으로 갔던 해안가에서 우연히 등대를 보았다. 엄마의 결혼 소식을 듣고 난 직후였다.

다들 아름다운 경치에 시선을 빼앗긴 동안 희수는 혼자 눈물을 닦았다.

홀로 우뚝 선 등대가 어찌나 외로워 보이던지. 그러자 괜찮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사실은 괜찮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은 가끔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 어떤 마음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헤어 디자이너였던 희수는 타인의 감정에는 예민하면서도 제 감정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결국 희수는 모든 걸 정리하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한번 떠나 보기로 했다. 세상에 혼자 남아도 잘 살 수 있다고, 보란 듯이 해내고 싶었다. 저 등대처럼.

그리고 예기치 못한 비행기 사고를 당했다. 다크 홀에서 끌려 들어와 이곳, 갈리아 켈티카에 떨어졌다. 그건 분명 사고였다. 그녀가 원해서 오게 된 게 아니었으니까.

“여긴 상상하지도 못한 곳이었어. 여기서 일어났던 일 모두, 살면서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끔찍한 일투성이였어.”

희수는 도둑들에게 윤간을 당할 뻔하고, 죽은 자 매녹을 처음 마주치고, 도망치다가 광산에 잡혀가 감자만 먹으며 일했던 일, 거기서 만난 유일한 친구였던 민주가 죽고 매녹이 되었던 일, 그리고 목소리를 잃었던 일을 차례로 설명했다.

“나한테 남은 건 죽음밖엔 없었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지. 그런데 그 순간…… 네가 나타났어.”

우연처럼, 너를 만났다.

그 장소에, 그 시간에, 다른 사람도 아닌 너를.

“지금 생각하니까 운명이었던 것 같아.”

이 남자의 곁이라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정말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렸다. 살아남기 위해서. 구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온몸으로 처절하게 매달렸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게 네가 아니라 다른 남자였다면 절대로…… 바지를 벗길 엄두를 내진 못했을 거야.”

그녀 역시 자의로 해 보기는 처음인 행위였다.

희수는 자신이 했던 일을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어쩌면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희수는 그런 선택을 했다. 그를 이용해서 살아남기를 택했다.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여태껏 그에게 창녀라고 불려도 차마 이를 반박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속에 담아만 두고 꺼내 놓지 못한 말들이 많았다. 억울하지만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고 꾹꾹 눌러 왔다. 엄마에게, 할머니에게, 사귀던 남자에게.

하지만 희수는 이 남자와 결혼했다. 남은 평생을 이곳에서 그의 아이를 낳고, 그의 아내로 살기로 결정했다.

“너라서 그랬어. 너라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희수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용기를 냈다.

“그러니까.”

조금 커진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비난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희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앞으로는 나를 창녀(Putain), 걸레(Salope)라고 부르지 마.”

순간 묵묵히 얘기를 듣던 칼릭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날 그렇게 말하지 마. 날 욕하는 건 결국 네 얼굴에 침 뱉기나 다름없으니까.”

벌떡 몸을 일으킨 그가 당황스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널 욕하려고 그렇게 부른 게 아니었어. 그게, 네가 전에 ‘그런’ 일을 했으니까 혹시 매음굴에 있을까 봐 널 찾으려고…….”

그래서 매춘부라고 했던 거다. 칼릭스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작아졌다.

인상을 구긴 희수가 대꾸했다.

“그런 일 한 적 없어!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다고!”

“…….”

아래층에서 자고 있을 프란시스가 걱정됐지만 칼릭스는 차마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말했잖아. 네가 아니었으면 어떤 남자한테도 그러지 못했을 거라고!”

희수는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그녀가 스킨십을 했던 남자는 칼릭스를 포함해서 단 세 명이었다.

“난 10년 동안 미용만 하면서 살았어! 내가 살던 곳에선 미용사였고, 여기선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근근이 말을 익혔어. 정말 어렵게! 사람들 틈에 섞여서 정말 어렵게 말을 배웠다고!”

참았던 울분이 터졌다. 희수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네가 말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그래서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희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릭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게 자립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가 일부러 그러지 않으려 했다.

칼릭스는 모든 걸 자신에게 기대게 만들었고, 그렇게 되길 원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빼앗아 가서 손도 대지 못하게 하고, 뭐라고 말을 해도 신기해하기만 할 뿐 도통 다른 말을 가르쳐 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타인과 소통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그때 이 남자가 원했던 건 그의 품 안의 작은 애완견처럼 안겨 있는 불쌍하고 연약한 여자였다.

“그런데 내가 매음굴에 있는 줄 알았다고? ‘그런 일’을 했으니까?!”

“쉿.”

그의 손이 흥분한 희수의 입가를 덮었다.

“으읍.”

“여기서 큰 소리 내면 안 돼.”

희수는 제 입을 덮은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의 얼굴 반이 가려질 만큼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었다. 반항하듯 몸부림치던 희수는 금방 포기해 버렸다.

그를 힘으로 이길 자신은 없고, 대신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놀란 그가 다급히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해.”

희수의 직업을 오해했던 것도 미안하고, 어쩔 수 없이 입을 틀어막은 것도 미안했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귀가 굉장히 밝은 편이라서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신분증명석에 ‘블랙캐슬의 아리아나’라는 이름이 있었지. 그게 희수 네 것인 줄 알았다. 그걸로 도시에 출입한 줄 알았는데…….”

그를 째려보던 희수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입을 막은 손의 악력은 그리 강제적이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뿌리칠 수가 없을 뿐.

“그리고 네 손길이.”

칼릭스는 굳은 얼굴로 말을 멈췄다. 갑자기 목 뒤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희수가 자신의 설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스러웠다.

더 화를 내진 않을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수밖엔 없을 듯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긴장한 칼릭스는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했다.

“네 손길이…… 너무 황홀해서.”

이렇게 말하면 더 기분 나빠 할까 봐 걱정스러워 혀가 굳었다. 천천히 그녀의 눈썹 사이가 좁아지자 그의 말이 빨라졌다.

“난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그게 원래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네가 날 만져 주는 게 정말, 정말 기분이 좋았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만지는 게 그렇게 기분 좋은 건지 미처 몰랐다. 그건 아마 이 여자여서 그랬겠지만…….

“육욕은 죄악이라는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칼릭스는 한때 정말 심각하게 교리에 대해 고민했었다. 궁극의 쾌락을 만들어 놓고 거기 절대 빠지지 말라고 하는 건 대체 뭔가. 신께서 사람을 일부러 엿 먹이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미안해. 욕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었어. 진심이야.”

살아남기 위해 제 몸을 이용한 그녀를 죄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구해 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던 여자가 그렇게라도 목숨을 구걸한 게 손가락질 받을 일이라면 이 세상 모든 이가 심판받아야 마땅하리라.

만약 희수가 한 게 더러운 짓이라면, 그녀가 안겨 준 쾌락을 대가로 베풀었던 제 동정심은 자비가 아니라 죄가 되어야 마땅했다.

그는 희수와 시선을 맞춘 채 고개를 까닥였다.

“우리가 다를 게 있나. 너랑 뒹굴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진심을 고백하니 그녀의 눈빛에 서린 노기도 점점 가라앉았다. 이 남자는 평생을 폐쇄적인 신전에서 자란 사제인데, 그런 오해를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스르르 마음이 풀어진 그녀를 보고 칼릭스는 이제야 한시름 놓인 듯이 피식 웃었다. 그녀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던 상관없다고 했으면서, 속이 시원한 이 기분은 뭔지…….

제게 드리운 위선적인 감정에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밑을 향했다.

칼릭스가 홀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이 희수는 저도 모르게 딴생각에 빠졌다.

‘속눈썹이 참 예쁘네.’

아래로 내리깔린 그의 속눈썹이 참 길었다. 어릴 적 갖고 놀았던 예쁜 인형이 떠올라서 저절로 손이 갔다. 손가락 끝에 닿는 느낌은 꼭 요정의 날개 같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길이 천천히 허물어졌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칼릭스의 입술이 붙었다가, 떼었다가를 몇 번 반복했다. 불안감이 그녀에게까지 전해질 정도로 주저하던 그가 어렵게 물었다.

“그래도 네 처음은 내가 아니겠지……?”

희수가 멈칫한 찰나, 그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예리하게 그 순간을 포착한 칼릭스는 희수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아니야. 대답하지 마, 제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괜한 걸 물어봤다고 후회하듯 눈을 꽉 감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저 서로의 처음이 같기를 바랐을 뿐 그녀의 처녀성을 따지려던 건 절대 아니었다. 한데 괜한 질문을 꺼낸 바람에 칼릭스는 잊고 있던 일을 떠올렸다.

저를 만나기 전에, 희수는 원래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

‘핸드폰 속의 그 남자.’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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