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9. 외사랑은 끝났다 (9/17)

9. 외사랑은 끝났다

* * *

둘은 말없이 숨만 내쉬었다. 침실을 메운 침묵 말고는 둘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피곤한 와중에도 답이 없는 잡념이 꾸역꾸역 들이쳐 희수는 잠이 오질 않았다.

그때 손목에 느닷없이 시원한 감각이 느껴졌다. 차가운 물수건을 조심스레 올려 주는 그 손길에, 희수는 칼릭스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온통 제 손목에 꽂혀 있었다. 잠깐 묶여 있었던 사이 생긴 불그스름한 자국. 내일 아침이면 사라질 그 자국이 꽤나 신경 쓰인 듯했다. 정작 자신은 몇 번이나 절정에 달해선 제 몸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는데…….

이 남자는 여전히 변하질 않았구나. 누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욱신거렸다.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려 희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밑에서 정액이 줄줄 흐르는 감각이 한층 선명하게 느껴졌다.

피임을 했어야 하는데, 그가 절대로 하지 않을 기세라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약을 사 먹으면 되겠지.’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식량난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는 걸 반기지 않았다. 덕분에 이 세계에는 피임약이 무척 발달되어 있었다.

그녀가 졸려 잠이 올 때까지 칼릭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인형처럼 그저 희수의 손목만 응시했다.

아직도 제 옆에 누워 있는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 이 꿈이 끝나지 않는 게 놀라웠다. 재회는 사실인가? 이 모든 게 정말 실제일까…….

자꾸만 눈가를 찡그리는 그녀가 의식된다. 붉은 자국이 남은 저 얇은 손목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불편하게 엉덩이를 뒤척이는 것도.

그녀가 괜찮은지, 신경이 쓰인다.

함께 있었던 일들이 모두 현실이라는 걸 인정함과 동시에 그의 가슴엔 쓰린 죄책감이 드리웠다. 상처를 주려고 했는데, 정말 그녀가 상처를 입었을까 봐 내내 걱정이었다.

이런 재회를 원한 게 아니었는데…….

저 여자를 만나기 전의 자신은 이렇지 않았다. 여자를 묶어 두고 성교를 하거나, 이대로 아무도 그녀를 볼 수 없게 감금해 둘 생각을 하는,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만약 제 곁의 누군가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상종도 하지 않고 감옥에 처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칼릭스는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희수를 마주친 후, 밤새도록 혼자 이곳에서 그녀와의 재회를 되새겼다.

정말로 자신이 미쳐서 여자의 허상을 그 도시에서 본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시골이긴 하지만 파리는 사랑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정취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랑이 곳곳에 숨죽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파리에서 본 것은 첫사랑의 신기루였는지도 모른다. 환상조차 허덕였을 만큼 끔찍하게 그리워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게다가 술에 취하지도 않은 대낮이었다. 안 그래도 프란시스가 제게 미쳤다는 말을 너무 자주해서 의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내가…… 환상을 봤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자와 있었던 일들이 눈앞에서 흐릿할 때면 칼릭스는 술을 마셨다. 하다못해 이제는 음주까지 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도 낯설었다.

하지만 술에는 놀라운 효능이 있었다. 취하면 여자의 얼굴이 한층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비록 그녀의 우는 얼굴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참을 수 없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물론 술에서 깨어나면 남은 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와 여자의 울음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혼자라는 자각. 그렇게 시작하는 하루는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래서 술을 자주 마시진 않았다.

허나 이번엔 달랐다.

술에 취해서 본 것인지, 꿈에서 본 것인지, 아니면 환상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심지어 말까지 하는 게 아닌가?

칼릭스는 그길로 다시 파리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훔쳐 듣기로 희수의 이름은 ‘베키’라고 했다. 관리인에게 물으니 순순히 그녀의 침실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어째서 거기까지 찾아갔는지,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여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머릿속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그냥 가슴이 날뛰었고, 의식할 사이도 없이 발이 움직였고,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니 대꾸가 나왔다.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한 것처럼 완전히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머릿속엔 그저 이 여자가 더 이상 어디로도 떠날 수 없게 묶어 두고, 아무도 볼 수 없게 감춰 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자신이 여자를…… 나쁘게 대했다. 저질스럽게. 이런 짓을 해선 안 된다는 죄책감은 있었다. 당연히.

만약 저 여자가 자신을 미워하는 티를 냈거나, 화를 냈다면 멈췄을 텐데 그녀는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러도 전부 감수하겠다는 듯이 굴었다. 지난날의 과오를 잘 알고 있다고도 했다. 과거엔 그의 실수도 있었는데 그런 것은 다 잊은 듯했다.

그녀는 감정보다 이성을 앞세웠다. 그런 여자에게 자신이 저지른 짓이 과연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니 속이 다 참담했다.

재판이 있기 전.

그녀가 떠나기 전.

교황을 죽이고 황무지를 헤매기 전의 칼릭스 클로비스.

조금씩 제정신이 들었다. 옛날, 옳고 그름을 분별하던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가 제 옆에 있으니 이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선과 악을 가리게 되었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그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하지 않을 거야.”

멍하니 천장에 시선을 둔 희수는 의미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 않아도 돼.”

어떠한 감정도 실리지 않은 담담한 음성.

“그래서 화가 풀린다면 얼마든지 네 마음대로 해.”

미워하지도, 왜 그랬느냐 추궁하지도 않는다. 그 철저한 무심함에 칼릭스는 괴롭게 눈을 감고 속삭였다.

“미안해.”

그래. 자신을 힘들게 했던 만큼 여자를 벌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본심은 그녀가 아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칼릭스는 그녀의 앞에서 무력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이렇게 멍청하게 느껴진 건 생전 처음이었다.

결국 멋대로 일을 저질렀지만 후회스러웠다. 대체 날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을까. 아마 범법자나 다를 바 없겠지.

대체 왜.

대체 왜 이 여자에 관해선 이렇게 후회할 짓들을 저지르게 되는 건지……! 속상한 마음에 울컥했다.

정작 희수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그러곤 반항할 의사는 전혀 없다는 듯이 옆에 와서 누웠다.

그 일련의 행동을 눈 한 번 떼지 않고 지켜보던 칼릭스는 속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다.

잘해 주고 싶다.

하지만 그녀가 밉다.

이대로 용서하고 싶은데 그러면 이 관계가 끝이 날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이제 둘 사이에 미움이 남지 않았다면, 과거에서 온 질척이는 감정의 찌꺼기가 더는 없다고 말하면, 그럼 이제 다시는 널 만날 일 없을 거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그녀에게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저 여자의 죄책감을 담보로라도 옆에 붙잡고 있어야 했다.

긴 침묵을 깨고 희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난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칼릭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진심이야. 네가 정말 좋은 사람이고, 좋은 남자라고 생각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칼릭스는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지, 그리고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렇잖아. 날 살려 주고 챙겨 주고…… 너도 살기 바빴을 텐데. 아무렇게나 대했어도 됐는데, 그러지 않았어. 정말 잘해 줬고, 소중하게 여겨 줬어.”

속삭이는 조용한 음성에 칼릭스는 확 열이 올랐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그럼 왜 떠났느냐는 물음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칼릭스가 그녀를 다그치려 할 때쯤 희수는 알아서 답을 내놓았다.

“다만 우리가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야.”

전과 달리 목소리에선 힘이 느껴졌다. 그녀는 분명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해진 운명. 인연.

“그런 건 없어.”

칼릭스의 귀엔 이상하게 들렸다. 이 세계의 누구나 그렇듯이 그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정해진 운명이나 사람 사이의 연결된 고리 같은 것은 없다고 여겼다.

“누구든 인연이 될 수 있어. 서로 애정을 갖고 노력했다면 누구든지!”

“그래. 인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거창한 것 말고…… 누구든지 아는 뻔한 얘기를 할게. 아무리 좋은 여자와 좋은 남자가 만난대도 서로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연인이 될 수 없어.”

그래서 우린 맞지 않았던 거야.

“만약 준비됐을 때 우리가 서로를 만났다면 달랐을지도 몰라.”

희수는 미미하게 웃었다. 진심이었다.

처음엔 그를 보고 끌렸고, 나중에는 설렜다. 그가 자신을 만지는 게 좋아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살려 주려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정말 고마웠다.

나보다 더, 나를 더 아껴 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으니까…….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돌아보니 그때쯤 이 남자를 좋아했던 것 같다. 누군들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모든 걸 의지했던 사람인데. 그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더욱 이렇게 어긋나 버린 관계가 안타까웠다.

“넌 정말 좋은 남자니까. 어쩌면 내가 널 붙잡았을 수도 있지.”

그를 향해 두근거렸던 가슴은 집요하게 좇아오는 시선을 피해서 도망 다니기 전까지는 그랬다. 비록 자신이 잘못 꿰어 버린 인연이었으나, 그때는 그리할 수밖엔 없었다.

희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에게 사랑받는 것 같지 않았다.

스스로가 외로운 이 남자의 작은 애완견처럼 느껴졌다. 그가 품속에 고이 넣고 다니고 싶은 미약한 애완견.

그때 칼릭스는 그녀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 주는 대신 그에게 의지하게 만들려 했다. 말을 알려 주지 않은 것만 봐도 그랬다.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여겼다면 분명 말부터 가르쳐 줬어야 했다. 물론 그의 의무는 아니지만.

이 남자에게 사랑만 받고 살 수도 있었다. 그래도 되었지만 그녀를 움직인 건 창밖의 세상이었다.

희수는 황무지가 끔찍하게 두려웠다. 개처럼 도와 달란 말 한 마디 못 하는 자신을 정말 그곳에 유기하고 떠나 버릴까 봐. 그가 또다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먼저 떠나 버린 것이다.

“누군가를 간절히 필요로 할 때…… 그때 서로를 만나게 되는 게, 인연이라고 생각해.”

난 너한테 굳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거야. 그래서 우리는 연인이 되지 못했나 봐.

희수는 말을 마무리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하루가 무척 길었다. 다행히 옆얼굴로 느껴지는 베개의 촉감이 보들보들했다.

우습게도 이 부드러운 촉감이 꼭 제 옆에 있는 남자 같았다. 그의 물건이니 그를 닮았나 보다.

제 옆자리에 누운 남자.

그를 생각한다.

자신이 곁에 없었던 이 남자의 지난 3년은 어땠을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블랙캐슬의 재판이었다. 전해 듣는 이야기만으로도 끔찍한 그 재판의 주인공이 바로 칼릭스였다.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그런 큰일을 겪고도 이 남자에게 중요한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오만일까 싶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도 들었다.

칼릭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서로의 존재마저 어둠 속에 잠겨 버린 늦은 밤이었다. 눈을 감으면 곧 잠들 것 같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데.”

“네가 원하는 대로 되겠지.”

희수는 잠들기 직전의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에겐 이 관계의 주도권이 조금도 없었다.

“네가 시키는 대로, 바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했잖아.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쉽게 ‘응’ 하고 대답한 희수는 눈을 꼭 감았다.

이 고단한 하루가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이대로 깨어나면 부디 다른 날이기를 바라며 스르르 잠들려는 그 순간이었다.

“네가 바라는 건 뭔데?”

칼릭스의 목소리엔 잠기운이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 잠이 확 달아난 듯했다.

그가 단숨에 일어나 희수의 몸을 거칠게 일으켜 앉혔다.

“네가 나랑 하고 싶은 건 뭐냐고.”

희수는 그에게 붙들린 어깨와 팔뚝이 아파 눈살을 구겼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내가 묻잖아!”

갑자기 터진 노성에 깜짝 놀란 희수가 몸을 움츠렸다. 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보통 열이 받은 게 아니었다. 희수는 그가 원하는 대답이 대체 무엇인가 고민했다.

“네가 바라는 거.”

“말고, ‘네가’ 원하는 건 뭐냐고.”

예리한 칼날처럼 잔뜩 벼르고 있는 눈치였다. 희수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랑 하고 싶은 게 없어? 아무것도?”

같이 하고 싶은 게 없다기보다는…… 그의 앞에서 떳떳하지 못하기에 아무것도 바라지 못할 뿐이다.

과거가 발목을 잡아서.

나보다 좋은 여자는 훨씬 더 많으니까.

그는 좋은 남자니까.

희수는 이와 똑같은 이유로 성인이 되자마자 엄마의 곁을 떠나 독립했다. 내 존재는 걸림돌일 뿐이니까. 엄마에겐 내가 옆에 있지 않는 게 더 나으니까.

바로 그 덕분에 엄마는 새로이 본인의 미래를 개척할 용기를 냈다. 희수는 그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었다. 나 말고, 더 좋은 여자를 만날 기회. 더러운 악몽처럼 아픈 과거가 아니라, 추억이라 불릴 만한 일들을 쌓아 가는 운명 같은 인연을 만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우리는 인연이 아니다. 어떻게 우연히 만났다 한들, 사람 사이에는 서로가 인연이 아닌 관계가 있었다.

희수는 저와 칼릭스 역시 그런 관계라 생각했다.

“그럼 왜 그렇게 열심히 날 붙잡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 왜 나한테 그렇게 매달렸는데!”

그녀의 고개가 저절로 수그러졌다. 스스로 너무 뻔뻔하게 느껴져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때는…… 살고 싶었어. 살아서 내가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어. 네 옆에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이용했다.

순진해 보여서. 날 망칠 것 같지 않아서.

좋은 남자 같아서…….

그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건 뜻밖의 일이었지만 어쨌든 빌미를 제공한 건 그녀였다. 게다가 빚을 갚기는커녕 그의 물건을 들고 그의 마음을 등지고 도망쳤다.

바로 그 과거 때문에, 희수는 자신의 뛰는 가슴을 차마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자신 같은 거머리가 그의 옆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네가 나를…… 그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어.”

“살아서 원래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그래서 날 이용했다고.”

“그래. 그러니까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뭐든지.”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이후로 칼릭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한 채로 희수는 뾰족한 침묵을 마냥 견뎌 냈다.

이윽고 무겁게 가라앉은 물음이 그에게서 떠밀리듯 튀어나왔다.

“……만약 내가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 레스토랑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 뒤에 만약 그가 다시 찾아가지 않았다면. 어젯밤 그가 4층 그녀의 침실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그 재회는 파리에서 있었던 꿈이고 환상이었다 치부하고 여기서 홀로 잠들었다면.

“그럼 어떻게 하려고 했지?”

희수는 입술이 바짝 말라 왔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게 솔직한 대답일까. 아니면…….

“말해!”

재촉하느라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몸이 휘청했다. 희수는 마주 보는 시선을 피하려 눈을 꽉 감아 버렸다. 그리고 언제나 머릿속으로 그리던 평범한 미래를 떠올렸다.

“그럼 다신 만날 일 없이 각자의 삶을 살았겠지.”

찾아갈 용기는 없으니까. 적어도 내가 훔쳐 간 그 진주목걸이 값을 벌기 전까지는. 평생 벌어도 못 갚았을 테지만 그래도 네 앞에서 떳떳해지기 전까지는 나타날 생각도 못 했을 거다.

미안하니까. 너무너무 미안하니까.

“네가 좋은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라고 기도했을 거야.”

“하.”

허탈한 한숨. 희수의 어깨를 그러쥐던 악력에 힘이 풀렸다. 그의 커다란 손이 미끄러지듯 희수를 놓아주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로군. 나랑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였어.”

같이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 칼릭스는 허무하게 되뇌었다. 같이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

그는 여자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우선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려 주고 싶었다. 사실 그녀를 상처 주기보다는 그녀의 가슴에 안겨 울고 싶었다.

네가 없던 지난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하고 힘들었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너를 잊고 싶었는데, 어느새 정말 네가 조금씩 잊혀지고 있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고. 그래서 이 유령 같은 건물에서 매일 너를 되새기며 간신히 살았다고.

그리고 어긋난 관계를 다시 맞춰 가고 싶었다. 진짜 연인이 되고 싶었다. 어느 날 보았던 행복한 결혼식의 두 주인공처럼.

영원히 모른 척, 안 보고 살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여자가 떠오르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관계란 말인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도 여자가 잊혀지지 않는데. 제 옆의 여자가 꿈이 아닌가 싶을 만큼, 눈앞에 있는데도 그리운데! 그런데!

‘같이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다…….’

그건 이 여자가 우리 둘의 사이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향한 감정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리에서 스쳐 가는 사람들 중 한 명과 자신이 다를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게 바로 그가 그토록 외면하던 진실이었다.

인연이 아니다.

희수는 자신을 그렇게 여긴다.

그래서 그토록 어긋나던 거였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감정이 같지 않기 때문에.

칼릭스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과거의 일들을 되새기고 되새겨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허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 겪는 사랑이란 거대한 불꽃같은 감정이었다. 적당히 달궈졌다면 즐거웠을지 모르지만 칼릭스는 그 화마 안에서 형체 없는 재가 될 때까지 제 전부를 다 태웠다.

그에게는 이제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환상처럼 아른거리는 저 여자 말고는.

“…….”

그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멈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세상이 이렇게 텅 비었을 리가 없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래서 그의 몸 어느 한구석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너무 늦게 인정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그래서 미워하던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 관계를 지속한다면 둘은 더 엉망이 되어 버릴 것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여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여 칼릭스는 가까스로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야 저 못된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가 했는데 금세 다시 흐릿해졌다.

칼릭스는 그녀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는 날까지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이날까지 살려 둔 여자이니 당연히 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좋아하는 여자에게, 나라는 남자는…….

나는.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

“……돌아가고 싶다고.”

사람은 누구나 비밀을 갖고 살아간다.

칼릭스의 심연 깊은 곳에는 여자에게 절대로 알려 주고 싶지 않은 비밀이 하나 있었다. 통나무처럼 굳어 버린 몸에서 그의 입술만 간신히 움직였다.

“아직도, 돌아가고 싶어?”

평소의 낮은 음성이 끝에서 갈라졌다.

그는 말을 내뱉어 버린 자신을 원망하듯 입안의 살을 짓씹었다. 하지만 이미 튀어나온 말을 되돌릴 순 없었다.

“어디를……?”

희수는 게리스 키친이 있는 파리를 떠올렸다. 자신을 그곳으로 돌려보내 줄까 하는 기대감이 서렸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희수가 전혀 마음에 품지도 못하던 곳이었다.

“네가 태어난 곳.”

고저 없는 목소리가 마치 마른 낙엽이 부서지는 듯했다.

“뭐?”

“네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초점 없이 생기를 잃은 그와는 달리 희수의 눈엔 번쩍 불이 들어왔다.

“다시…… 돌아가는 방법이 있어? 내가 원하면 갈 수 있는 거야?”

희수는 상체를 붙여 그의 가까이에 앉았다. 갑작스런 제안에 가슴이 널뛰기 시작했다. 그가 마치 어둠 속 한 줄기 빛처럼 보였다.

다신 돌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두 번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다. 죄책감은 그래서 더했다.

아무리 미웠어도 미워한단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당신을 사랑해서 너무 미웠다고, 그게 사실은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미웠던 거라고 사실대로 고백해야 했었는데.

엄마는 정말…… 재혼을 했을까.

아니. 그러지 못했을 거다. 엄마는 자신을 미워하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사람이다. 희수는 그래서 엄마의 곁을 떠났다. 자신을 그만큼 사랑해 주었기에, 사랑하기 때문에.

“칼릭스, 제발.”

희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방법을 아는 거야? 제발 말을 좀 해 줘, 제발!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 건데! 말을 해 줘!”

희수는 처음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는 원래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에 익숙한 여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적응했다 한들 희수는 이곳에서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녀가 놓고 온 모든 것들이 그 세계에 있었다. 희수는 이곳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며 살 수 없었다. 30년 가까이 공들여 살아온 모든 게, 이곳에서 송두리째 무너졌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모든 걸 되돌리고 다시 평범한 그녀의 일상으로 돌아갈 기회. 엄마에게, 난 괜찮으니 당신도 이제 행복하란 한마디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제발 알려 줘, 칼릭스. 제발……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 거냐고!”

칼릭스의 시선은 내내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희수는 그의 손을 붙들고 흔들었다. 애타는 마음에 눈물이 울컥 솟았다.

“나 돌아가고 싶어. 제발 돌려보내 줘!”

인형처럼 굳어 있던 그가 비로소 눈을 마주쳤다. 희수는 자신의 눈앞에 닥친 다급한 상황에 남자의 슬픔까지 보진 못했다.

“그래. 네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칼릭스, 그럼 지금 당장……!”

“날 좋아한다고 말해.”

갑작스런 요구에 희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주저하자 칼릭스는 한 자 한 자 똑똑히 다시 일러 주었다.

“돌아가고 싶으면, 날 좋아한다고 말해.”

“…….”

“마음 바뀌기 전에, 해.”

“널…… 좋아해.”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평소와는 달리 미미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다고 해.”

“네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어.”

희수는 그가 불러 주는 대로 말을 따라했다.

“매일 네 생각을 했어.”

“매일 네 생각을 했어.”

“단 하루도 잊어 본 적 없어.”

“단 하루도…… 잊어 본 적 없어.”

“널 사랑해.”

“…….”

차마 그 말까지는 따라할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히고 가슴 한구석이 아프게 콕콕 쑤셔 왔다.

그렇게 소원하던 말을 들었으니, 칼릭스의 입술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희수는 웃을 수 없었다.

“아직도 널 사랑해.”

고요한 그의 파란 눈동자가 넘실거렸다.

“그래서 날 사랑하지 않는 네가 정말 원망스러워.”

기어코 흘러넘치는 그 순정이 희수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날 사랑하지 않는 네가 원망스러워.

희수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 감정은 사진처럼 선명했다.

자신이 평생을 가졌던 그 쓰린 감정을 그가 제게 품고 있다. 목구멍이 아프게 따끔거렸다. 이 멍청한 남자가 대체 왜 나를…….

희수는 목에 걸린 따가운 감정을 애써 삼켰다.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이 불편한 걸림은 언제나 희수의 안에 존재했다.

이제는 그리움이라는 빛바랜 기억이 되어, 더는 이 남자에게 설레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이곳을 떠나야 한다. 이 남자를 떠나야만 한다. 이제 그럴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만날 인연이 아니었어.’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칼릭스는 어렵게 웃었다. 즐거움이라곤 전혀 없는 미소에 희수는 얼굴을 굳혔다.

“뭐…… 뭐하는 거야?”

그는 고민도 없이 침실 바닥에 이동마법진을 그리고 파란 불꽃을 틔웠다.

“잠깐, 여기서 불을 내면 어떡해?!”

둘이 처음으로 사랑을 나눴던 곳.

3년간 그가 혼자 헛된 기대 속에 살았던 유령 건물.

희수를 기다리는 동안은 지옥 같았다. 그리움은 배가 되었고 결국은 그녀를 향한 노여움만 쌓여 갔다.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던 지난날의 악몽 같은 기억들이 전부 이 건물에 있었다.

칼릭스는 이곳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역시 더는 이 끔찍한 곳에서 숨 쉬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면 도저히 희수를 포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도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처음엔 얼굴만 확인하려고 그녀를 찾아간 거였는데…….

칼릭스는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더는 망가지고 싶지 않다.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지도 않다.

그녀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은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그 모습을 보니 자신만 더욱 괴로웠다.

칼릭스가 진짜로 보고 싶었던 것은 그녀의 미소였다. 그녀가 더는 자신의 기억 속의 우는 얼굴을 한 여자가 아니길 바랐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라도 제발 그녀가 웃고 있기를 바랐다.

그래, 제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본 것처럼, 내가 없이도 어디선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기를…… 그것을 바랐다.

함께 있는 건 서로가 불행해지는 길이다. 그러니 여기서 모든 걸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녀가 제 몫만큼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녀를 끝까지 도와주었고, 많이 아껴 주었던, 고마운 사람으로. 적어도 마지막 기억만은 좋은 사람으로 남아 주길…….

“부, 불이 붙었어. 이걸 어쩌면 좋아!”

칼릭스는 만류하는 희수의 손을 낚아채고 순식간에 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

둘이 신전으로 사라진 뒤, 당연한 수순처럼 건물은 파란 불꽃에 휩싸였다. 연기가 하늘을 뚫을 듯이 올라가고 건물은 활활 타올랐다.

화재는 다행히 급히 나타난 보안대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당연하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한참 타오르던 건물은 폭삭 무너지고, 흉물스런 검은 재만 남았다. 그마저도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바닥을 적시는 검은 물만 가득했다.

그렇게 칼릭스의 외사랑은 끝났다.

* * *

리옹의 신전.

갈리아 켈티카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다는 신전의 예배당이었다.

아주 오래된 고서로 가득한 예배당은 종교지가 아니라 도서관처럼 보였다.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희수는 칼릭스가 서가의 뒤쪽을 향해 가는 걸 보고 재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모르는 곳에서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같이 가!”

그가 벽을 밀었다. 문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벽이 밀리고 비밀스런 길이 나타났다.

위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었다.

칼릭스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좁은 동굴 같은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희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발소리만 울리고, 사방은 어두웠지만 그가 함께 있어 무섭진 않았다.

‘어디서 바람이 부는 것 같아.’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한참을 걷던 둘의 눈앞에는 놀랍게도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희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는 설렘도 잊고 기이한 이 공간을 둘러보게 되었다.

‘세상에, 이건 다 뭐야?’

아주 오래된 골동품처럼 보이는 빛바랜 은색 동전들이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었다. 마치…… 깊은 바닷속 난파선에 남겨진 재물의 흔적 같기도 했다.

그 순간 머리카락을 뒤집을 만큼 거대한 바람이 불어왔다. 희수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응시하곤 입을 떡 벌렸다.

앞은 절벽이었다. 어떻게 리옹의 신전 예배당과 이어진 곳에 절벽이 나타났을까. 저 절벽으로 떨어졌다간 뼈도 못 추리게 생겼다. 게다가 절벽 아래가 바로 황무지였다.

저 황무지엔 강간범과 좀비가 가득하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도시 신전의 예배당에서 이어진 이 비밀통로는 대체 무엇이며,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준다던 그는 왜 자신을 이리로 끌고 왔는가.

덜컥 두려운 마음에 희수는 벽에 바짝 달라붙어 불안한 눈으로 칼릭스를 지켜보았다.

그는 절벽 아래가 무섭지도 않은지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지만 그는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네가 끌려 들어온 곳을 알고 있지?”

덤덤한 목소리. 그가 묻는 건 다크 홀이었다. 칼릭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희수를 돌아보았다.

“이방인들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다시 돌아갔다고?”

희수는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정확히 어디로 돌아갔다는 걸까?

그녀가 처음 다크 홀을 목격한 건 대서양의 한가운데였다. 왔던 데로 돌아간다는 거라면, 설마 그 망망대해로 다시 돌아간다는 걸까?

그 순간 거대한 희망이 빗속의 불씨처럼 사라졌다.

아니, 그럼 다크 홀은 대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 거지?

“옛 문헌에서도 갈리아 켈티카에 왔던 이방인들은 다크 홀을 통해서 전부 돌아갔다고 했었지.”

칼릭스는 자신의 앞섶으로 손을 넣어 목에 걸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희수는 칼릭스가 걸고 다니던 검은색 원석을 기억했다. 장식용이라 보기엔 투박했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기엔 영롱함이 남달랐다.

그는 목에 걸린 줄을 쉽게 끊어 냈다.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검은색 원석을 응시하다, 이번엔 똑같은 시선으로 희수와 눈을 맞췄다.

“이게……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날아오는 바람에 섞여 흩어졌다. 희수는 멍한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다.

분명 아프지 않은 말인데, 희수에겐 아프게 박혀 들어왔다. ‘마지막’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뭐든 해 주고 싶었다’는 그의 진심이 들렸기 때문이다.

저 남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해 주고 싶은 게 참 많았다. 어떻게 저렇게 뭐든 기꺼이 해 주려고 할까. 아깝지도 않은 걸까. 내가 저 남자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그는 저렇게 기꺼이 뭐든 내어 주려 하는가. 정말 사랑이 그런 걸까.

희수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게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투명한 상자에 그와 자신만 갇힌 것 같았다. 얼굴을 할퀴는 강한 바람도 눈앞의 남자만큼은 따갑지 않았다. 여전한 그의 향기가 짜릿하다. 아찔한 저 낭떠러지보다도.

마주 보고 서 있는 저 남자와 자신만이 현실이었다.

말을 배우고, 돈을 벌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실한 현실 그 아래에는 그녀가 외면해야 했던 어떤 뜨거운 감정이 있었다.

때로는 그가 밉고, 때로는 그에게 미안해서. 그를 향한, 그리고 자신을 향한 동정과 연민 때문에 차마 인정할 수가 없었던 이 뜨거운 감정은 희수의 무딘 심장조차 달궜다.

이를 자각한 순간 쿵쿵거리는 북소리가 귀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박동이었다.

그곳에는 애써 잊으려 해도 불쑥불쑥 생각나는 작은 가시가 하나 박혀 있었다.

“……진작 보냈어야 했는데.”

칼릭스는 먼저 시선을 거뒀다. 희수는 저도 모르게 아쉬운 기분으로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주시했다.

그가 절벽으로 손을 내밀자 손에 있던 메추리알 크기의 검은색 돌이 이내 파란색 불꽃에 휩싸였다. 곧 두둥실 하늘로 떠오르더니, 돌은 본래 형상을 버리고 점차 비정상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것은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 나가며 기억 속 검은색 소용돌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희수는 새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크 홀.”

분명 다크 홀이었다. 이곳 세계에 와서는 실제로 본 적 없었다. 하지만 들은 바가 있지 않은가. 블랙캐슬을 유령도시로 만들었다는 그 다크 홀이 분명했다.

칼릭스 역시 자신이 만들어 낸 다크 홀에만 시선을 두었다.

두 눈으로 저 지옥문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한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프란시스의 말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사악한 악령이, 마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깃들어 자신을 더럽히고 있다는 소리가 정말 사실인 것 같았다.

원래 사랑은 좀 미친 거지만 칼릭스, 당신의 것은 좀 유별나다고 혀를 내두르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정말 미친 게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기어코 이 미친 짓을 저질렀다. 여자를 돌려보내기 위해서. 설마 이런 짓까지 하게 될 줄은 그도 정말 몰랐다.

자신이 저 여자 때문에 어떤 일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칼릭스는 두려웠다.

만약 그녀가 사랑을 줄 테니 이 세상을 한번 더럽혀 보라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노예가 되어 진창이 된 바닥을 굴러 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었다.

허나 칼릭스는 이런 삶을 더는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지킬 양심도, 체면도, 부끄러운 것 없이 범죄를 자행하는 이런 최악의 인생을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애정과 관심에 목말라 거지처럼 바닥을 기는 껍질만 남은 불쌍한 영혼은 이제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가 초점을 둔 건 황무지 저 먼 곳이었다. 여긴 장벽을 만들 수도 없을 만큼 고지가 높은 곳이라 여기서 떨어지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사망이었다.

아마 시신도 찾기 어렵겠지…….

어차피 남길 것은 이름뿐이었다. 지금은 그조차도 남기고 싶지 않을 만큼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가.”

진작 떠났어야 했다.

진작 놓아 버렸어야 했다.

“돌아가는 게 네 소원이라며.”

칼릭스는 한숨과 함께 가슴속에 남은 미련을 털어 내려 애썼다. 이제는 그의 일부라 생살이 함께 떨어져 나간 듯 아팠다.

참 쉽게도 떨칠 수 있는 거였다.

3년을 앓았는데…….

“가, 그럼.”

어느새 개구멍만 한 크기로 늘어난 그것은 주위의 바람과 먼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희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의 뒷모습과 다크 홀을 번갈아 보았다. 저길 뛰어들면 돌아갈 수 있는 건지는 두 번째 문제였다.

그가 정말 다크 홀을 만들어 냈다. 저것을 만들어 내는 물건을 그가 갖고 있었다니.

설마 이렇게 자신을 불러낸 게 그인가. 정말 저 다크 홀에 다시 뛰어들면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걸까.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이상하게 고요했다.

이상하게도 이 광경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건 이 남자였다.

칼릭스는 매녹을 죽이러 다니던 기사였다. 다크 홀을 고의로 만들어 냈다는 오명을 썼고, 그 때문에 목숨을 건 재판을 받았다. 결국 그 때문에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성기사가 아닌가.

갈리아 켈티카가 떠들썩했던 그 사건이 어떻게 벌어졌는데! 그리고 어떻게 그가 그곳에서 살아남았는데, 이 다크 홀을 다시 만들어 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희수는 다크 홀에서 눈을 떼고 칼릭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가, 저 남자가, 자신을 위해서 다크 홀을 만들어 냈다.

어떻게 제게 이렇게까지 해 줄 수 있는 걸까. 정말 사랑하면 이렇게까지 해 줄 수가 있는 건가. 희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차올랐다.

나를…… 나 자신보다 더 아껴 주고, 잘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

“지금 떠나. 당장.”

“…….”

희수의 직감은 잘 맞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알 것 같았다.

텅 비어 보이는 그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저 남자는 어떻게 될까.

내가 가 버리면, 저 남자는…….

희수가 보는 건 그의 뒷모습뿐이건만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건 자신을 노려보며 눈물을 떨어뜨리던 얼굴이었다.

그 고통스런 얼굴이,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그녀의 가슴에 화살처럼 푹푹 아프게 박혔다.

모른 척 무시하려 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빼내려 하면 할수록 깊이 속을 찔렀다.

지난 3년간.

그래, 한 번도…… 저 남자를 잊지 못했다. 잊혀지지 않았다.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 이야기 속의 멍청한 여자가 될지언정, 그를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언젠가는 나를 찾아오리라는 오만하고 근거 없는 희망을 갖고 3년간 말을 익혔다.

고된 삶의 원동력은 바로 이 남자였다.

“지체하면 다크 홀은 반대편에 있는 걸 가져올 거야. 그 전에 사제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칼릭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가 버리는 게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난 너 없이도 잘 살 거다. 너도 그렇게 살아. 네가 원래 있던 곳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칼릭스는 그녀가 사라진 뒤의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무런 미래도 그려지질 않았다. 지금 여기, 이곳에 서 있는 자신조차도 믿겨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안에 담기는 건 저 여자 하나뿐이었다.

“꺼져. 꺼져 버려.”

“내가 가면, 넌…….”

“난 다른 여자를 만날 거야.”

거짓말. 거짓말이다.

칼릭스는 자신이 그녀와 하고 싶었던 것을 말했다.

“결혼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잘 살 거다.”

그 역시 이루지 못할 것들이었다. 저 여자가 없이는 그도 불가능한 것들. 한 번도 이루지 못한 것들.

“평범하게. 하지만 행복하겠지.”

그때 뒤에서 사람들의 급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가 말한 대로 신전의 사제들인 게 분명했다.

희수는 칼릭스가 서 있는 절벽의 끝까지 다가섰다. 다크 홀은 다행히 뛰어들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손을 뻗자 진공청소기 정도의 가벼운 압력이 느껴졌다.

정말 그가 만들어 낸 다크 홀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벌 받는 거 아니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희수는 자신의 옆에 선 남자의 옆얼굴을 주시했다. 칼릭스는 그 시선을 의식하고도 옆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런 미련도, 기대도, 속에 남은 것도 없어 보인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아서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에게 항상 궁금했던 게 하나 있었다. 만약 자신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꼭 묻고 싶었던 것.

“나한테 잘해 주는 거…….”

“…….”

“아깝지 않아?”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희수를 돌아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눈빛이 마치 첫 만남 때처럼 간절했다. 제발 살려 달라 애원하던 그때처럼.

완전히 다른 상황이건만 그녀는 그때처럼 간절하게, 자신을 살려 주길 바라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네가 바라는 만큼 되돌려 받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잘해 줄 수 있어?”

칼릭스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그만큼 황당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질문을 들은 것 같았다.

정확한 해답을 펼쳐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세상이 굴러가는 당연한 이치를 묻는 것처럼 아주 뻔하고 멍청한 질문으로 들렸다.

심장이 뛰는 데는 이유가 없었다. 본능이 그렇게 시키는데 이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은 신께서 만드신 것 중에 가장 황홀하고 지독한 축복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이 필연적인 감정에는 어떤 논리도 없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지만 그녀에겐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반드시 듣고 싶은 진심일 터였다.

“내가 없이도, 정말…… 잘 살 수 있어?”

적어도 그녀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래 살던 세계와 그녀의 가족, 친구들을 두고, 자신을 고민하고 있다. 걱정하고 있다.

칼릭스는 제 가슴이 뛰는 걸 느끼고 허무하게 웃었다.

정말 자존심도 없는 건지…….

그녀의 떨리는 눈망울을 응시하고 있으니 차갑게 올려 세운 모든 게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그를 단단하게 감쌌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 폭삭 무너져 버린다.

이 순간 자신에게 향하는 그녀의 고민들.

자신이 그녀를 만나고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해 오던 것들. 그것을 그녀가 시작했다.

나를 생각한다.

나를 염려한다.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내게 닿기 위해서 노력한다.

칼릭스는 여자에게 마음이 가던 그 처음 순간을 분명하게 기억했다.

뭔가를 해 주고 싶었을 때부터였다. 저 여자에게 뭐라도 하나 더 해 주고 싶었을 때부터. 재고 따지고, 머릿속으로 계산할 수 없는 영역에 그녀가 있을 때부터.

속을 콕콕 찔러 대던 작은 가시.

처음엔 그런 존재였다. 자꾸만 거슬려서 그게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알려 주던 존재. 빼내려 해도 빠지지 않아 더욱 거슬리고 불편한 여자.

“아니.”

자신이 지금 어떤 대답을 했는가. 이 상황에서 그녀를 위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을 멈춰야 하는데.

“영원히 잊을 수 없겠지. 아마 평생 널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잊고 싶지도 않아.”

지난 3년간 여자를 잊길 바랐는가.

아니, 사실은 그녀가 잊혀질까 두려웠다.

칼릭스는 만약 누군가 자신이 가진 모든 기억을 가져간대도 저 여자의 것만 남겨 준다면 줄 수 있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잊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되새기고, 깊이 새겨진 것들을 매일 들춰 꺼내 보았다. 흐릿해지면 더 간절하게 떠올렸다. 지워질 것 같으면 더 간절하게 다시 그녀를 그렸다.

“다른 어떤 여자를 만난대도 너만 생각날 거다. 아니, 사실은 다른 여자를 만날 자신도 없어.”

그래. 자존심도 없다. 그런 것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는 책을 펼쳐 보여 주듯이 제 가슴속에 들어찬 모든 것을 낱낱이 꺼내 읽었다.

“네가 가면 나도 여기서 마지막이야.”

칼릭스는 그녀의 놀란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춰야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비겁하다는 건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한번 진심을 고백하니 모든 게 멈춰지지 않았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죽은 듯이 살겠지.”

가슴속에 담긴 것들이 강둑에 세는 물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그러다 진짜 죽는 날이 다가오면 그때는…… 그때 너를 붙잡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면서 눈을 감겠지.”

누군가를 간절히 필요로 할 때 서로를 만나는 게 인연이라고 했던가.

“난 네가 필요했어.”

사랑이 아깝지 않냐니, 세상에 이렇게 멍청한 질문이 또 있을까. 내 모든 것을 끄집어내 전부 다 줄 수도 있는데. 뭘 줘도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것을.

“날 살려 줄 사람이, 정말 필요했어. 난 네가 정말 간절했어. 지금 이 순간까지 날 살려 둔 것도 바로 너인데.”

사랑은 갖고 싶은 게 아니다. 주고 싶은 거다.

전부 다, 내 모든 걸 다 저 여자한테 줘 버리고 싶은 거였다. 그래서 괴로웠던 거다. 내 모든 걸 가져가길 바라는 저 여자가 욕심 부리지 않아서. 날 가져가지 않아서.

“난 네가 필요해. 정말 간절하게, 널 원해. 그러니까 나를 살려 줘. 제발.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 줘.”

희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남자의 푸른 눈동자, 고요한 한가운데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보인 순간부터였다. 그의 말은 머리를 스치지 않고 곧장 가슴으로 안겨 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찬 많은 것들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고동만 남은 심장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저 다크 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자신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통제를 벗어난 그녀의 두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희수는 뛰어들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곳을 향해서.

이토록 간절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향해서.

언제나 마음속 같은 자리에 박혀 있던 남자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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