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8.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보여 (8/17)

목차

2권

8.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보여

* * *

“어머 세상에!”

젊은 아가씨는 이야기에 한껏 열중한 나머지 성난 마음을 쏟아 내며 휙 뒤를 돌았다.

“그럼 의식주며 온갖 수발을 다 들어준 남자를 등쳐 먹고 패물만 갖고 튄 거 아니야?!”

그 덕에 머리에 만 동그란 롤이 툭 빠져 버렸다.

“세라, 머리가 망가져요.”

“아, 참! 나 머리하고 있었지. 미안해, 베키.”

“괜찮아요.”

베키는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떨어진 롤을 주워 올렸다.

“근데 그 여자 정말 너무 못됐다. 그렇지 않아?”

“맞아요. 나쁜 여자죠.”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세라는 거울에 침까지 튀기며 씩씩거렸다. 베키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시 말아 올리는 데 집중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누가 봐도 뻔하잖아. 그 남자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렇게 잘해 줬겠냐고!”

곧 있을 생일파티에서 예쁘게 보이려고 일부러 돈까지 냈건만, 세라는 머리카락엔 관심도 없었다. 그보단 머리를 만져 주는 베키가 해 주는 이야기에 푹 빠졌다.

“그 여자는 대체 왜 그 남자를 안 사랑했지? 얼굴도 잘생긴 데다 그렇게 잘해 줬는데!”

“아마 좋아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사랑할 수는 없었겠죠.”

“왜?”

“음, 사랑이란 건…… 사실 타이밍이 제일 중요한데, 서로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거예요, 그 둘은.”

“타이밍?”

“각자 준비된 상태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거요. 그 둘은 대화가 안 되니까 서로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여자는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잖아요.”

“뭔데? 패물? 돈?”

“아니, 살아남는 거요. 게다가 남자가 자길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불쑥 결혼을 하겠어요.”

“그 정도면 엄청 사랑하는 거 아니야? 그걸 왜 몰라? 아니, 그렇게 잘해 주는데 그걸 왜 모르냐고! 백치야?!”

“그러게요. 어쩌면 모르고 싶었을 수도 있겠네요.”

“어이고, 베키 말이 맞았네.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여자 얘기를 해 준다더니.”

“맞아요. 여자가 멍청했어요. 못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답한 베키는 뜨겁게 달군 쇠막대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타지 않도록 물약을 바른 나무를 겉에 둘러서, 두피를 보호하게 만든 그것은 베키가 고안해 낸 일종의 고데기였다.

“거의 다 됐어요. 이제 움직이지 마세요.”

“응.”

롤을 풀어내자 동그랗게 말린 머리카락이 바짝 올라가 붙었다. 베키는 위쪽 부분만 일자로 펴 주며 아랫부분은 곱슬거리도록 유지했다.

머리 전체가 곱슬거리는 게 파리의 유행이었다. 하지만 베키가 보기엔 촌스러웠다. 그래서 위쪽은 차분하게, 아래쪽은 발랄하게 말아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시도했다.

“다 됐어요.”

잘 어울린다. 자신이 보기에도 세련되고 그럴듯했다. 베키는 거울로 비치는 세라의 얼굴을 마주 보며 물었다.

“어때요?”

“예뻐. 마음에 들어.”

하지만 세라는 머리카락보다 베키가 해 준 이야기에 더 흥미가 있었다. 다시 휙 몸을 돌린 세라가 베키를 보며 눈을 빛냈다.

“자기야, 그래서? 그래서 그 남자는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요. 어차피 그 둘은 다신 만나지 못하는걸요.”

베키는 새삼 세라가 귀여워 보였다. 부잣집 막내딸. 겨우 22살이 된 이 어린 아가씨는 이성 관계에 한참 관심이 많았다.

“아마 그 남자는 다른 좋은 여자를 만나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예요.”

“뭐어?”

그녀의 얼굴엔 배신감이 가득했다. 희수는 그런 세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심했다. 머리숱이 많은 편이었다.

“음…… 반 묶음을 해 볼까요? 약간 답답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다른 여자를 만났어?”

세라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의자의 손잡이를 거칠게 내려친 그녀가 소리쳤다.

“뭐야! 그렇게 잘해 줘 놓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게 어딨어?! 일편단심일 것 같더니!”

베키는 잔뜩 성난 세라의 몸을 바로 앉혔다. 부드러운 손길로 다시 슥슥 머리를 만져 주자 다행히 화난 기운이 가라앉은 듯 보였다. 마치 어린 강아지를 다루는 것 같다고 베키는 생각했다.

“당연히 다른 여자를 만나야지요.”

“……좋은 남자인 줄 알았는데.”

“좋은 남자 맞아요. 그러니까 다른 좋은 여자를 만나야죠.”

“흥, 그래도 실망이야. 그 남자.”

손끝에 닿는 금발이 꼭 얇은 실 같다. 어릴 때 만지던 바비 인형의 머리카락처럼.

“남자가 너무 아깝잖아요, 그런 여자하고 결혼하기에는.”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거예요.”

베키는 세라의 정수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직한 음성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와, 예쁘다.”

세라는 정면의 거울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카락의 반은 업스타일로 올려 묶고, 반은 내려뜨렸다. 전혀 답답해 보이지 않고 고상했다. 처음 보는 헤어스타일이지만 굉장히 예뻤다.

“듣던 대로야. 역시 잘하는구나, 베키!”

베키는 전문적으로 머리를 만져 주는 시녀는 아니지만 근방에서는 꽤 유명했다.

“고마워! 완전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잔뜩 흥분한 세라는 처음 말했던 금액에 웃돈까지 얹어 주었다. 덕분에 베키는 레스토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녀는 파리의 시가지 내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종업원이었다. 처음엔 같이 일하는 종업원들의 머리를 해 주다가, 그들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마음에 든 귀부인들이 종종 이렇게 베키를 불러 머리를 만져 달라고 요청했다.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받는 주급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받으니 돈을 모으고 있는 베키에겐 좋은 기회였다.

‘이번 달 방세는 이걸로 내면 되겠다.’

베키는 희수였다.

‘백희수’라는 이름을 듣고, 레스토랑의 주인인 게리 부인이 제멋대로 그녀를 베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희수는 자신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었다. 게리 부인은 생명의 은인이자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영웅이었다.

당시 희수는 그가 줬던 진주목걸이가 그렇게 비싼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것만 달랑 들고 나왔다. 무작정 ‘파리’만 외치며 티켓을 사려던 희수는 소매치기에게 진주목걸이를 도둑맞았다. 설상가상 많은 인파 속에서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희수를 도와준 게 바로 게리 부인이었다.

파리의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의 여주인인 그녀는 희수가 가려던 파리까지의 티켓값과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다. 눈치껏 레스토랑의 설거지며 청소를 도맡아 하자 게리 부인은 그녀가 갈 곳이 없는 걸 알고 작은 방 한 칸을 내주었다.

‘벌써 3년 전이구나.’

어떻게든 시간은 흐른다. 그건 누구에게나 축복이었다.

특히 희수에겐 그랬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말을 익혔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희수는 말을 익히는 데만 온 정신을 다했다.

이곳의 언어는 정말 어려웠다. 발음은 물론이거니와 명사마다 남성형과 여성형이 나눠져 있어서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들릴 때가 있었다.

아직 글을 읽기는 힘들지만 대화는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이 죽을 각오로 노력하니 그게 가능했다.

“베키, 일찍 왔네? 점심때쯤 온다더니.”

“다행히 일찍 끝났어요.”

“그 아가씨 완전 말괄량이지?”

“귀엽던데요.”

웃으며 유니폼을 입은 희수는 익숙하게 테이블을 세팅했다. 세 개의 포크와 세 개의 나이프. 물 잔 하나와 와인 잔 두 개.

‘게리스 키친’은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처음 파리행을 외치는 마법사의 목소리에 희수는 고민도 없이 이곳을 택했다.

하지만 이곳은 프랑스의 파리가 아니었다.

희수가 떠밀려 온 이(異) 세계, 갈리아 켈티카의 도시 중 하나인 파리였다. 이곳의 파리는 그녀가 아는 곳과 완전히 달랐다. 프랑스 파리와 그저 이름만 같았다.

우선 이 도시는 항구도시였다.

“베키, 오늘 메인은 흑대구 구이와 차우더 스프야. 아침에 해산물이 많이 들어왔대. 꽤 싱싱하다더라고.”

“아, 잘됐네요!”

게다가 갈리아 켈티카에서 파리는 가장 소도시였다. 항구로 유명한 건 ‘산토니’라는 이름의 거대도시였고, 이곳의 수도는 리옹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행정도시 블랙캐슬이나 종교도시 부르고뉴에 비하면 파리는 도시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유일하게 비슷한 점이 있다면 이곳의 파리 역시 ‘사랑의 도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소도시라 그런지 사람들에겐 여유가 있었고, 바다와 어우러진 푸릇한 전경은 낭만으로 가득했다. 파리는 어디서든 아름다웠다.

희수는 왜 이곳 세계의 각 도시들은 프랑스 각 도시들의 이름을 땄는지, 이들이 쓰는 언어가 왜 프랑스어와 비슷한지 한동안 꽤나 심각하게 의문을 가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느덧 희수는 자신을 파리의 시민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도시 안에 있으니 이방인을 볼 일도 없고, 매녹은 그저 이야기 속 괴물이었다. 그녀의 과거를 불러일으킬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덕분에 이제 희수에게 남은 건 평범한 일상뿐이었다.

“오늘 시장님 오찬이 있는 거, 다들 알지? 주교님과 함께 오신다니까 신경 써. 실수하지 말고.”

“네!”

게리스 키친은 파리의 가장 높은 건물 1, 2, 3층에 위치해 있었다. 5층부터 7층까지는 숙박시설이었고, 4층엔 당구장과 마사지 숍, 그리고 종업원들의 숙소가 있었다. 이곳에서도 4층엔 손님의 숙박을 받지 않는 건 비슷했다.

“그럼 3층 멤버들만 남기고 해산.”

레스토랑 3층은 귀빈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얼마 전부터 희수도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오늘 오는 인원이 꽤 많아. 특히 신전 쪽 인사들이 많다니까 실책 잡히지 않게 주의하자고.”

“네.”

신전은 갈리아 켈티카의 가장 큰 축이었다. 6개의 도시를 잇는 가교역할과 동시에 시민들의 정신적 보금자리가 바로 신전이었다. 시장과 시의회는 항상 신전을 견제해 왔지만 신전은 지금 예전보다 더 큰 역할을 맡고 있었다.

3년 전, 블랙캐슬 시장의 주도하에 큰 재판이 있었다.

신전이 매녹을 만들어 내서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도시에서 기부금을 강탈해 간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이는 신전을 향한 반역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신께서는 블랙캐슬에 벌을 내렸다.

5번의 재판은 모두 신전에 불리하게 이어졌다. 마지막 재판은 블랙캐슬의 광장에서의 공개 사형집행이었다.

시장은 어느 성기사에게 전 교황을 시해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게 했다. 그리고 그를 사형하려다가 매녹에게 먹혀 죽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둡게 물듦과 동시에 그 위에서 어마어마한 숫자의 매녹들이 쏟아진 것이다.

사람들은 블랙캐슬의 시장이 신을 노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게, 그가 사형시키려던 기사는 바로 클로비스 가문의 후계자였다. 갈리아 켈티카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가문의 후계자를 사형시키려 했으니 신께서 노하신 게 분명했다.

당시 대주교(현재의 교황)는 블랙캐슬의 무고한 시민들을 위해서 관용을 베풀었다. 찢어진 하늘의 문을 닫고 매녹으로 엉망이 된 도시를 다시 살린 것이다.

‘블랙캐슬의 재판’이라 부르는 그 일로 블랙캐슬은 유령도시가 되었다. 시민들은 다른 도시로 이주했고 시장과 그 가족들은 3대가 멸하는 벌을 받았다. 신전은 아무도 도전하지 못할 만한 권위를 얻었다.

하지만 다른 도시에서 벌어진 일이라 파리의 시민들은 들리는 소문으로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중심 도시였던 블랙캐슬의 살아남은 시민들은 파리처럼 작은 항구 도시에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희수는 블랙캐슬의 활기찬 분위기를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 남자와 처음으로 들렀던 바로 그 도시가 블랙캐슬이었고, 그곳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희수는 블랙캐슬을 떠나며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에 희망을 얻었다. 그곳의 시민들처럼 살고 싶었다. 그런데 유령도시로 변했다니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블랙캐슬의 재판’은 벌써 2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전의 주요 인물들이 온댔으니 각별히 신경 써.”

“주요 인물이라면 설마 교황님께서 오시는 건 아니겠죠?”

“쉿! 그분의 스케줄은 보안상 비밀이라고 했단 말이야!”

지배인은 정색하며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 반응에 종업원들은 눈이 커다래져서 서로를 돌아보았다.

“죄, 죄송해요. 오, 세상에. 신이시여. 우리 레스토랑에 그분이 오신다니!”

“설마 자고 가시는 건 아니겠죠? 숙박도 하시나요?”

“아쉽지만 식사만 하고 가신다.”

“맙소사! 살아생전 그분을 뵙다니!”

시민 대부분이 신전의 신자인 만큼 종업원들은 연예인이라도 보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진짜 신자가 아닌 희수에겐 남의 일이라 영 와 닿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3년 전, 희수는 그 남자와 함께 리옹의 신전에서 살았었다.

‘칼릭스.’

그녀가 칼릭스에 대해 아는 건 이름뿐이었다. 파란 불꽃을 만들어 내던 그 남자는 용병이었다. 그녀와 결혼을 하려 했으니 성기사는 아니고, 용병일 것이다. 어쩌면 용병출신인 신전의 기사일 수도 있다. 신전을 집처럼 무척 편안히 여겼으니까.

하지만 정확히 아는 건 없었다. 당시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제는 그때의 기억이 희미했다.

‘어차피 다신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

그 남자와 관계된 모든 건, 잊고 싶은 과거일 뿐이다.

* * *

3층은 많은 인원으로 꽉 찼다. 대부분은 신전의 손님이었다. 파리가 아니라 리옹과 블랙캐슬 신전에서 온 귀빈들. 교황은 늦는다고 했고 귀빈들의 대부분은 용병들이었다. 덕분에 시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와인이 맛이 좋군. 부르고뉴산인가?”

“그렇습니다.”

‘진짜’ 신전의 성기사라면 술을 마실 리가 없었다. 기사들 중에는 좋은 출신의 ‘진짜’ 기사들과 용병출신의 기사들이 있었다.

“내가 좋은 대접을 받는군.”

“물론이지요, 기사님.”

그녀는 용병출신 기사들을 맡게 되었다. 대부분의 종업원들은 ‘진짜’ 기사들과 주교회의 인사들을 모시고 싶어 했기에 일부러 그녀에게 와인을 담당하라 시킨 것이다.

희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방인인 그녀가 누군가를 출신으로 차별할 리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성력이라는 파란 불꽃을 만들어 내는 능력자들이었다. 그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으로 전부 신전에서 일하는 성기사거나 용병단에 소속된 용병이었다.

펜던트가 없는 희수는 행여 누군가 자신의 신분을 캐묻거나 신고할까 봐 항상 불안했다. 하지만 능력자들은 신분 증명조차 하지 않는다.

평범한 시민들 모두 그들을 이 도시의 영웅으로 생각했고 항상 좋은 대접을 했다.

희수는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그 능력이 무척 부러웠다.

“고기가 입에서 살살 녹는 것 같아. 이곳에서 일하면 이런 음식을 자주 먹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참 아쉽겠군.”

“이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걸요.”

“기사가 된 뒤부턴 어디서나 뻔한 소리만 듣게 됐어. 그놈의 영광 타령은.”

“하하.”

용병출신의 기사들은 소탈했다. 희수는 이들이 불편하지 않아서 와인만 신경 쓰지 않고 일부러 테이블 정리를 도왔다. 그들 역시 옆에 붙어서 물을 따라 주고 접시를 빼 주는 희수에게 연신 말을 걸었다.

“근데 양이 너무 적어. 이걸 누구 코에 붙이나?”

“곧 메인 메뉴가 나올 겁니다, 기사님.”

오찬이 한참 무르익어 가는 중이었다. 그때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성기사 중 한 명이 다급히 냅킨으로 입을 닦고 일어섰다.

“교황 성하께서 오셨군.”

그 말을 필두로 식사 중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희수 역시 들고 있던 물주전자를 내려놓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성하께서 오셨다.”

“정말 오셨어.”

“세상에, 교황님을 뵙게 된다니.”

웅성대는 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계단에서 이어진 입구에선 사람들이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시장이 헐레벌떡 입구까지 마중을 나갔다.

“흠흠.”

희수 역시 몸을 돌려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에겐 교황과 신전이 큰 의미는 없지만 궁금하긴 했다. 몇 명의 무장한 기사들이 교황의 뒤를 따랐고, 교황은 시장의 인사를 받았다.

“오오, 교황 성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와 주신다니 소인이 영광입니다. 신의 영광을.”

“신의 영광을.”

교황은 생각보다 젊었다. 많아도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데다 평범하게 생겼다. 다만 눈빛이 날카로웠다. 게다가…….

‘어디서 본 것 같아.’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무려 교황이나 되는 사람을 마주쳤을 리가 없지 않은가. 희수는 교황에게 눈을 고정하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뒤늦게 알아챘다.

‘누구지?’

교황의 바로 옆에 있던 기사였다. 붉은색의 고급스런 망토를 두르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알아챈 건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왜 저렇게 날 쳐다보는 거야……?’

피폐하고 메마른 눈빛 때문에 가볍게 소름이 일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표정. 겉모습이나 생긴 건 수려한데 눈빛 때문에 사람이 텅 비어 보였다.

희수는 한 번에 그 남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설마.’

전보다 조금 마른 몸, 훨씬 짧아진 머리. 외양뿐만 아니라 이 남자의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그는 칼릭스였다.

희수의 기억 속 그는 싱그럽고 항상 혈기왕성한 사내였다. 겉모습은 몰라도 성격만 봤을 때 20대 초반이 아니었을까 짐작했을 만큼.

하지만 지금은…… 3년 전 그 남자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언제 깨질까 아슬아슬한 호수 위의 얼음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피곤하고, 무표정이지만 약간은 신경질이 난 듯한.

“……!”

눈이 마주치자 밧줄에 몸이 꽁꽁 묶인 것 같았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듯, 눈가가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그의 표정은 달리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희수는 남자와 단둘이 갇힌 기분에 온몸이 따가웠다. 결국 그녀는 주춤 뒷걸음질을 치다가 테이블 위의 와인 잔을 깨뜨렸다.

쨍그랑!

“어허, 거기 웬 소란이냐!”

커다란 소리에 이목이 집중되었고, 칼릭스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이봐, 괜찮아?”

희수는 자신을 툭툭 치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네, 네. 죄송합니다.”

허둥지둥 깨진 와인 잔을 주워 담기 시작하자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희수에게 눈을 돌리고 오찬을 이어 갔다.

“상석을 비워 뒀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교황 성하.”

쭈그려 앉은 그녀를 스쳐 간 일행은 가운데 테이블의 빈 곳에 착석했다. 고개를 들면 바로 보일 거리, 말소리도 뻔히 들릴 거리에 그가 있다.

희수는 그와 다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푹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보았다. 의식되어 미칠 것 같았다. 정작 칼릭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날 알아봤을까?’

전혀 그렇지 않은 눈치였다. 3년 전의 희수는 거의 말라 죽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보기 좋게 살이 붙었다.

원래 직업이 헤어 디자이너였던 그녀는 자신을 꾸미는 데도 탁월했다. 잘 정리된 손톱부터,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흘렀고 옷은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다려서 입었다.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니 외양을 신경 써야 했다.

이러니 그가 못 알아본다 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었다. 아니면 알아보고서도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 모르는 척을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칼릭스에게 충분히 그럴 만한 여자니까.

3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보내며, 아이러니하게도 희수는 그의 옆에 있을 때보다 더 깊이 그 남자를 알아갔다.

지난 일들을 혼자 떠올려 보면 그 남자의 대가 없는 관심과 보살핌이 어떤 감정으로 인해 가능했는지 바보천치라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제게, 정말 온 정성을 다해서 순정을 바쳤다. 그 남자는.

덕분에 자신을 황무지에 버리려 했던 그의 이유 모를 행동조차 뭔가 오해가 있었으려니 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그를 향해 남은 감정은 죄책감뿐이었다. 그가 정성으로 준비해 준 물건을 훔쳐서 도망쳤던 일에 대한 죄책감.

“……파리의 시의회는 그리 고리타분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종종 이렇게 외식을 하기도 하지요. 다른 도시의 의회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성하께서 자주 이렇게…….”

의회가 어쩌고 하는 단어들이 의미 없이 주위에 떠다녔다. 잔뜩 긴장한 희수에게는 시장과 교황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이, 예쁜 아가씨. 갑자기 왜 그래?”

“기, 긴장했나 봐요.”

“하긴 나도 교황 성하를 처음 마주했을 땐 그랬어.”

용병출신의 기사는 고개를 주억이며 마주앉은 동료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희수에게 내밀었다.

“이마에 땀이나 좀 닦으라고.”

“……감사합니다.”

툭툭 이마를 두드려 식은땀을 닦아 내자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숙박은 하지 않는댔어.’

오찬이 끝나면, 끝이다. 다신 그를 마주칠 일 없이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나마 조금 안도했다. 칼릭스는 그녀를 알아보았건 몰라보았건 알은체를 할 의도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저렇게…… 높은 신분의 기사였나?’

희수는 흘금 칼릭스를 곁눈질했다. 그는 교황과 무척 친밀한 사이인 듯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심지어 교황은 그의 팔뚝을 붙잡고 몸을 가까이해서 귓속말도 서슴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둘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어, 기사님.”

“엉?”

후식으로 나온 타르트를 한입에 욱여넣은 기사는 자신이 멍청하게 대꾸한 걸 알고 민망한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날 불렀어?”

“예. 실례지만……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혹시 이들이 만찬까지 여기서 하는 건가 알고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아프다는 핑계로 쉴 생각이었다.

“흠흠, 지금 내 개인 일정이 궁금하다는 거지? 난 점심 먹고 이 도시를 잠깐 돌아볼까 했는데.”

“아…….”

그의 오해에 희수는 당황스럽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왜? 아가씨가 구경시켜 주려고?”

“아, 아니, 그게…….”

“어이, 장난 그만 쳐. 이 아가씨는 교황님의 일정이 궁금한 거잖아. 우린 점심만 먹고 곧 리옹으로 돌아갈 거요.”

“그렇군요.”

같은 테이블에 있던 다른 기사의 만류로 희수는 한시름 놓았다. 가끔 이렇게 레스토랑에서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이 있었다. 심지어 대부분은 연인과 함께 오는데 여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 몰래 자신에게 집적거릴 때면 희수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미안하지만 파리는 그리 매력적인 도시가 아니지. 촌스럽다고 할까. 항구 도시라면 산토니가 있고, 푸릇푸릇한 풀떼기가 보고 싶으면 부르고뉴로 가지. 파리는 잘 오지 않게 돼.”

교황을 모시는 기사들은 순례하듯 갈리아 켈티카의 다섯 도시를 돌았다. 리옹, 킹스리버, 부르고뉴, 산토니, 파리. 파리는 가장 등한시되는 도시였다.

“파리의 시민을 눈앞에 두고 무슨 소리야? 이 아가씨는 어딜 봐도 촌스럽지 않은데. 드물게 세련됐어. 안 그런가?”

“하하, 고맙습니다.”

자신을 품평하듯 하는 말에도 희수는 웃어넘겼다. 서비스 마인드라면 어디 가서도 뒤지지 않는다.

“리옹 출신이시지요?”

“어떻게 알았지?”

“옷감부터 색깔까지 맞춰 입으신 것 같아서요. 여자들이 좋아할 스타일이시거든요.”

이젠 말이 통하니 비위 맞추기도 수준급이었다. 귀부인들이 그녀를 불러 머리를 맡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오, 그래? 칭찬 고맙군. 아가씨는 이름이 뭔가?”

“베키예요.”

“베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씩 웃으며 동전 몇 개를 건넸다.

“음식도 맛있지만 이 레스토랑은 보고 듣는 재미가 더하는군. 아가씨 덕분에 말이지.”

희수는 피식 웃으며 팁을 건네받았다. 어차피 종업원 모두가 나눠 가지는 돈이라 부담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소탈한 기사들과의 대화는 심심하지 않았다. 그 덕에 희수는 칼릭스에 대한 생각을 접고 편안히 서빙을 마쳤다. 다만 교황을 비롯하여 모두가 아래로 내려갈 때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혹시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까 봐 뒤늦게 흘금거렸지만 칼릭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레스토랑을 나갔다. 무려 교황의 손이 그의 어깨에 얹어져 있어서 저 같은 일개 시민과는 닿을 수 없는 위치라는 게 실감났다.

시원하면서도 뭔가 섭섭한 기분이었다. 그녀 자신도 알쏭달쏭했다.

영 마음이 좋지 않아서 결국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저녁식사까지 거르고 일찍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그냥 자자.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내일일 거야.’

칼릭스와 우연한 만남은 그렇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 * *

똑똑.

늦은 밤. 얼핏 잠이 들었을 때쯤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군더더기 없이 짧은 노크소리에 희수는 일터의 동료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4층엔 손님들의 공간도 있긴 하나 그들이 이 쪽방의 문을 두드릴 이유는 없었다.

잠옷 바람이지만 동료들과는 거리낄 게 없었다.

“네, 베키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빼꼼 문을 열었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반쯤 더 열어젖히자 옆으로 비켜서 있던 남자가 문을 붙잡으며 한 걸음 다가섰다.

“……!”

칼릭스였다. 곧장 나타난 얼굴에 희수는 가슴이 철렁했다.

깜짝 놀란 자신을 보고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어떤 감정도 찾을 수 없었다.

희수는 뭐라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가 왜 자신을 찾아온 건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이 남자를 다시 만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질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깨고 말을 튼 건 칼릭스였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오든 이렇게 문을 열어 주나?”

그가 성큼 문턱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희수는 정확히 그가 다가온 만큼 뒷걸음질을 쳤다. 남들보다 배로 건장한 남자가 들어서자 방 안이 꽉 찬 것 같았다. 실제로 두 팔을 펼치면 전부인 좁은 공간이었다. 그는 전보다 말랐지만 여전히 평범한 남자보단 거대한 체격이었다.

“도둑이었어, 너.”

그는 매서운 말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게 더 무섭게 느껴져 희수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매춘부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가 픽 웃으며 떨고 있는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희수는 가까이서 느껴지는 남자의 노기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도저히 저 눈빛을 받아 낼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나면 살려두지 않으려고 했거든.”

낮은 음성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잠잠해 보이지만 속은 불꽃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방인 주제에 이 도시에서 쥐새끼처럼 살아남았다는 게 놀랍군. 아마 저들은 모를 테지. 한번 대답해 봐.”

다그치는 목소리도 아닌데 조용한 음성이 그렇게 무섭게 들릴 수가 없었다. 진짜로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여기 사람들은 네가 이곳의 시민이 아닌 걸 알고 있나?”

희수는 덜컥 겁이 나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눈 떠.”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고개를 감싸 쥐었다. 악력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똑똑히 봐. 지금 네 숨통을 잡고 있는 게 누군지.”

다행히 그는 희수의 턱을 움켜쥐고만 있었다. 하지만 손에 힘을 주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 것 같았다.

“넌 내가 살려 줬는데, 그것도 몇 번이나. 따지고 보면 네 목숨은 내 거 아닌가?”

희수는 남자의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치고 곧장 시선을 아래로 했다. 자신을 진짜 죽일 것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희수는 그의 앞에서 범죄자였다.

“왜 또 벙어리가 됐지? 말을 아주 잘하시던데.”

그녀를 재촉하듯 조금씩 죄어 오는 악력에 희수는 두서없이 말문을 열었다.

“자, 잘못했어. 내가 다 미안해.”

선명한 발음과 악센트.

칼릭스의 한쪽 눈썹이 기묘한 것을 보듯 비쭉 올라갔다.

그가 기억하던 그때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말을 더듬거나 단어 하나만 불쑥 던지던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실 기억 속 그녀의 음성보다 지금이 훨씬 더 여성스럽게 느껴졌다. 말이 침착해서인가.

레스토랑에서 귀 기울여 듣긴 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말을 하는 걸 보니 놀라웠다. 이곳의 언어를 저만큼 익혔다는 것도,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을 한다는 것도.

이 여자와 대화가 된다는 게, 정말…… 정말 신기하다.

“…….”

칼릭스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얼굴만 확인하고 가려 했는데…….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봐.”

칼릭스는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자신이 하는 말에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되었고, 더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다. 말을 섞는 게 흥미로웠다.

그래. 원래 물어보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말도 많은 사이가 아닌가.

“내 물건을 훔쳐 간 거? 아니면 결혼식을 앞두고 도망친 거?”

꿀꺽 침이 넘어가는 감각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칼릭스는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거나 시선이 아래로 향할 때마다 지긋이 힘을 주어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날 이용하고 버린 게 미안하다는 거야, 아니면 내 물건을 훔친 게 미안하다는 거야.”

“전부 다. 전부 다 미안…….”

칼릭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거짓인 것을 안다. 정말로 미안했다면 자신을 찾아왔을 것이다.

“네가 바라는 대로 할게. 뭐든 다 할 테니까, 여기선 조용히 해 줘.”

거짓 변명으로 점철된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던 그가 항상 마음속 한구석에 있던 질문을 떠올렸다.

“임신했었지?”

희수는 별안간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칼릭스는 그조차도 믿지 못했다. 버석하게 비웃은 그가 빈정거렸다.

“거짓말만 늘어놓는 여자한테 물어본 내가 멍청했군.”

“정말 아니야. 임신이라니, 그런 건……!”

희수를 침대로 눕힌 그가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희수의 어깨를 누르고 양 허벅지 옆으로 무릎을 대고 앉아 몸을 일으킬 수 없게 만들었다. 칼릭스는 아주 익숙하게, 제 것처럼 그녀의 상의를 벗겨 냈다.

출산을 한 여자들은 배에 자국이 남는다고 했다.

갑자기 찬 공기가 닿아 몸을 움츠린 그녀의 양팔을 붙잡아 떼었다. 그의 시선이 증거를 찾듯이 희수의 납작한 배를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출산의 증거는 보이지 않았다.

칼릭스가 냉담한 어조로 물었다.

“약을 먹었나?”

“아, 아니야. 정말,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 그때는 내가 임신 같은 걸 할 수 있는 몸 상태도 아니었고.”

그때는 생리가 아예 없었다. 이곳에 와서야, 몇 개월이 지난 후에야 생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거의 아사 직전인 적도 있었어. 이곳에서 견디는 동안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그때는 월경도 없었어.”

칼릭스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그녀의 두서없는 변명을 들었다.

월경이 없으면 임신이 안 되는 건가? 그런데 월경이 뭐지?

여자의 몸이 얼마나 예민한지 칼릭스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희수가 그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못해 준 게 뭐야.”

칼릭스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무리 돌아봐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만 했던 여자였다. 그중에 가장 납득이 되지 않는 건 그녀가 혼자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말도 못 알아듣는 여자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다.

물론 원래 사랑하던 남자를 찾아간 거였겠지만, 그때 자신과 밤을 보내고 돌아서서 다른 남자의 얼굴을 보며 그리워하던 그녀의 뻔뻔함으로는 제 옆에서 몰래 그 남자와 정을 통했어도 됐을 터였다.

“내가 너한테 못해 준 게 뭐냐고. 왜 떠났어.”

“…….”

“도시 밖에 널 놓고 오려고 해서? 사과했잖아. 모자랐어?”

“…….”

“넌 분명히 알고 있었어. 네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내가 받아 줄 수 있었다는 거. 근데 왜 떠났느냐고.”

당시의 희수는 그가 너무 미웠다. 넘치는 애정이 버거웠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관계에서 점차 지쳐 갔다. 그에게 기대기만 하는 자신의 모습도 싫었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말해.”

하지만 저렇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못해 주지 않았다. 못해 줘서 도망친 게 아니었다.

“……없어.”

“없어?”

사나운 되물음에 희수는 눈을 내리깔고 이리저리 굴렸다.

“없는데 사람을 이용하고, 배신하고, 물건을 훔쳐서 도망쳤다고? 결혼식에 쓰려고 준 예물을?”

결혼식. 예물. 그 두 단어에 희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네 옆에만 있으면 내가 평생 쓰, 쓸모없는 사람처럼 살게 될 것 같았어. 자꾸 너무 많은 걸 주려고만 해서…… 나는 네 애완견이 아니야.”

“하!”

어이없다는 듯 커다란 숨을 내쉰 그가 그녀를 세차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나를 개 취급했잖아. 잘해 주는 게 뭐? 그게 사람을 배신하고 물건을 훔쳐서 도망칠 이유가 돼? 그럼 덜해 줬어야 했어? 거짓말 그만하고 솔직하게 말해.”

“…….”

“남자 때문이잖아?”

비틀린 웃음에 섞인 날카로운 기운에 희수는 뒷목이 싸늘했다.

만약 남자 때문이라고 믿는다면 그가 자신을 정말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야! 남자 같은 건 없었어.”

“그놈 때문에 도망쳤잖아, 너. 이제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그놈?”

희수의 눈빛이 어지럽게 변했다. 지금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네가 애지중지하면서 품에 끼고 다니던 거 말이야. 그놈 얼굴이 들어 있던.”

희수는 말이 통하는데도 그의 말뜻을 영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핸드폰 화면에 핸드폰 주인의 얼굴이 있었다는 것을 희수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나랑 몸을 섞고 내 옆에 누워서도 그걸 들여다봤지. 그때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

“…….”

“몸은 내게 주고 마음은 그놈에게 가 있었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3년을 되뇌어도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원래 창녀들은 다 그런가. 너처럼. 필요할 땐 옷을 벗고, 곤란하면 모르는 척.”

그의 거친 언변에도 희수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칼릭스가 자신을 종종 그렇게 불렀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살룹(Salope)은 속칭 걸레라는 뜻의 은어였고, 퓌탕(Putain)은 창녀라는 뜻이었다. 희수가 기억하는 건 그가 자신을 부르던 저 두 단어뿐이었다.

남자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를 그렇게 부른다는 걸 안다. 게다가 당시에는 그게 욕이라는 것도 몰랐으니 그가 제 면전에서도 그렇게 당당하게 불렀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창녀라고 부르는 남자를 어떻게 제 발로 다시 찾아간단 말인가.

그런 면에서, 저 남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칼릭스는 더 이상 변명을 듣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상체를 일으켜 앉아 그녀의 옷을 전부 벗겨 내기 시작했다. 과일의 껍질을 벗기듯 거침없는 손길에 몸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러지 마!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가만있어.”

그는 희수가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여자를 이렇게 다뤄 본 적이 없었다. 칼릭스는 신전의 명망 높은 성기사였다.

사람을 이렇게 나락까지 내모는 건 이 여자가 유일하다. 칼릭스는 이를 갈듯 중얼거렸다.

“네가 날 망쳤어. 완전히 망가뜨려 놨다고.”

희수가 완전히 나신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술품을 살피듯 정밀한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아니, 고깃덩이의 신선도를 살피는 걸지도 몰랐다.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을 때는 수치심에 숨을 멈췄다. 갈라진 둔덕 사이로 손이 움직이자 몸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희수는 감히 그를 말리지 못했다.

깊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자신을 창녀처럼 여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미안했다.

가끔씩 그를 떠올릴 때마다 희수는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결혼식의 예물을 들고 도망쳤다. 그 후로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당시엔 몰랐지만 진주 목걸이는 매우 고가의 물건이었다. 아무리 소처럼 일해도 벌어서는 갚을 수 없는 금액. 이를 생각하면 속이 갑갑했다.

갚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이 남자에게, 자신을 무척 좋아했고 그만큼 잘해 주었던 남자에게.

그래서 나를 상처 입히고 싶어 하는 이 남자에게…….

“지금은 남자가 없나?”

“한 번도 없었어.”

칼릭스는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 어떤 기분인지 잊지 못했다. 여자의 피부를 만지고 있으면 마시멜로를 손에 쥐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입으로 빨든 손으로 뭉개든 한참을 주물럭거리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함께 자고 일어난 아침에 보면 그녀의 온몸이 피부병에 걸린 환자처럼 울긋불긋했다.

하지만 지금 희수의 몸은 멍울 하나 없이 깨끗했다. 칼릭스가 몸을 일으키자 희수는 두 손을 앞으로 하고 가슴을 가렸다. 젖혀진 이불을 끌어와 아래를 가렸다.

그는 이제야 희수에게서 눈을 떼고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녀 외의 흔적이 어디 있는지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도 만난 적 없어.”

그의 옆얼굴이 피식 웃었다.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은 여전히 그녀의 방을 살피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희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입술이 소심하게 움직였다.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 돈도 갚을게. 네 화가 풀어질 때까지 뭐든 다 할게. 내가 전부 잘못했으니까…….”

“뭐든 다 하겠다. 뭐든지.”

“뭐든지 다 할게.”

창문 하나 없는 방은 좁고 습했다. 그의 시선이 곰팡이가 핀 벽에서 오래도록 멈추었다가 몸통이 반쯤 잘린 지네가 있는 바닥으로 향했다. 그녀가 오래 지낸 방이었다. 그 흔적이 여실했다.

이번엔 그가 성큼 걸음을 옮겨 옷장 문고리를 잡았다. 잘 열리지 않는 문을 몇 번 세게 잡아당겼다. 오래된 문짝은 금방 덜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뭐하는 거야. 괜히…… 괜히 엄한 데 화풀이하지 마. 여긴 내 집이 아니란 말이야.”

조심스레 그를 말렸으나 칼릭스는 그 말에 더욱 자극이 된 듯했다.

우지직. 거친 손길이 옷장의 문짝을 뜯어냈다. 저 안에 그녀가 제게 숨길 만한 게 있는 듯싶어서였다. 그는 보란 듯이 문짝을 바닥에 내던졌다.

안을 샅샅이 살폈지만 당연히 옷장엔 여자 옷뿐이었다. 칼릭스는 그 사실이 의아하면서도 크게 안심되었다. 어쩌면 희수는 그 남자와 헤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애초에 그 남자와 만나지 못했을지도……. 칼릭스는 후자를 믿고 있었다.

그는 희수가 떠난 뒤 도둑의 손에 들린 진주목걸이를 되찾았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진주목걸이의 주인은 제대로 말을 못 하는 여자였고 그녀가 어떤 귀부인을 따라갔다고 했다. 어느 곳으로 갔는지, 리옹을 떠났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죽는 순간까지 같은 말을 했으니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처음 계획대로 그 남자를 찾아가진 못했다. 칼릭스는 여기서 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절로 안심되었다.

“그래서.”

“…….”

발밑을 나뒹구는 낡은 나무 문짝이 처참했다. 희수는 그게 꼭 자신의 모습처럼 보였다. 뒤이어 생각난 건 수리비용이었다.

“지금은 내가 없으니 쓸모 있는 사람처럼 사는 것 같아? 만족해?”

희수는 잠깐 머릿속으로 돈을 계산했다. 돈을 생각하니 속이 울컥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정말 힘들게 돈을 벌었고, 모았다.

“어때.”

“…….”

“왜 말을 못 해. 어?”

물론 잘못한 건 그녀였지만 저도 모르게 원망이 섞인 눈으로 그를 응시하자 칼릭스는 기막힌 듯 인상을 구겼다.

“……넌 아무것도 안 남기고 사라졌어. 아무것도.”

그녀가 입어 본 적 없는 웨딩드레스. 거부한 결혼반지. 그런 것들만 남겼다.

칼릭스는 그 드레스를 태워 없애려다가 실패했다. 드레스에 불길이 치솟는 걸 보고 완전히 사라져 재만 남을까 봐 무서워 그만두기를, 그 미련한 짓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침실 문 옆에 있는 신분증명 마석을 발견하고 그는 희수가 했던 고민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제 것을 가져갈 수 있었지만, 그녀는 가져가지 않았다. 분명 생존에 필요했을 텐데 뭔가가 거슬려 가져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바로 그의 존재였다.

반드시 필요한데도 갖고 싶지 않은 것.

이를 깨닫고 칼릭스는 무척 괴로웠다.

자신이 옆에서 꼭 돌봐 줘야 할 여자가 없으니 이제 굳이 살아남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여자가 자신을 버리고 갔으니 이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쓸모가 다한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살 필요가 없어지니 속이 텅 비어 버렸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게 검은색으로 보였다. 신전의 재판도, 신도, 매녹도, 아무것도 더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되새길 어떤 흔적이 있었다면 덜했을까 싶지만 희수는 아무것도 남기고 가지 않았다. 그녀가 택한 방식은 아주 잔인했다.

처음엔 자신의 실수가 후회스러웠고, 나중에는 자신을 떠난 그녀가 야속했고, 더는 살기 싫을 만큼 괴로웠다. 지난 시간을 되새길수록 그녀를 향한 분노만 남았다. 그렇게 칼릭스의 첫사랑은 그의 안에 박혀 버렸다.

칼릭스는 이를 악물었다.

“넌 정말 못된 계집이야.”

미안해. 금방 기죽은 희수가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입술만 움직였다.

“미안해?”

“…….”

“그럼 왜 안 찾아왔는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 뻔히 알면서, 우리가 같이 지냈던 곳이 어딘지 뻔히 알면서!”

내내 참아 왔던 그가 마침내 폭발했다. 두 주먹이 분노로 바르르 떨렸다. 목에 핏대가 서도록 버럭 소리쳤다.

“내가 찾아다닐 걸 알았으면서!”

그의 말이 맞다. 그곳에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희수에게 지난 시간은 잊고 싶은 기억일 뿐이었다. 그녀가 푹 고개를 수그리자 칼릭스는 다시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네가 정말 미웠어.”

한 손에 감기는 여자의 목덜미는 그에게 사슴이나 여우보다도 가녀리게 느껴졌다.

짐승은 반항이라도 하건만 그녀는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다시 만나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고. 네가, 네가 정말…… 네가……!”

“…….”

희수는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남자의 울음소리에 정신이 까마득했다. 어깨에 젖어 드는 물기가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의 분노는 가끔 몰아치는 천둥번개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들렸다. 어깨를 쥐고 흔드는 거센 손길에도 희수는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너 같은 여자를! 너 같은 여자를 내가 왜!”

울분이 섞인 원망의 목소리가 그녀를 채찍질했다. 그가 내뿜는 열기에 타 버릴 것 같았다. 피부에 젖어 드는 눈물은 뜨거웠고, 남자의 분노는 시리도록 처참했다.

희수는 뺨 한 대쯤 맞으리라 각오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건 눈물뿐이었다. 칼릭스의 눈가가 잔뜩 젖은 걸 보고 희수의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이 남자를 울렸다. 내가.

문밖에서 웅성대는 소리조차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희수는 자신을 쏘아보는 벌건 눈망울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원망 어린 그 눈빛이 그녀를 사슬처럼 붙잡았다.

“어디서 그놈하고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았는데.”

희수는 종종 이 남자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덕분에 지난날 그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이제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나 좋아하던 남자를 배신하고 물건을 훔쳐 도망쳤던 일이 그에게 얼마나 상처였을지도 가늠했다.

“만나면 정말 죽이려고 했어. 너도, 그놈도 죽이고 나도 죽으려고 했다고.”

희수는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들을 끊임없이 닦아 냈다. 많이 서러웠는지 눈물이 끊임없이 뚝뚝 떨어진다.

“네가 꿈에 나오는 날에는 완전히 악몽이었어.”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안다. 가슴속 한 맺힌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 탓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보다 더 지옥이었고……. 네가 정말 미워서…… 널…… 네가,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이제는 그가 말하지 못하는 진심이 들린다. 희수는 이 남자의 순정에 대해서 그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황무지에 버리려고 했던 일도, 자신을 상처 주려는 저 모든 행동까지도 다 포용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할 수 있었다.

멍청한 오만일지 몰라도 희수에겐 그랬다.

“알아.”

희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만큼 미워해 본 적 있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만큼 미움받았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미워한다는 건, 그래서 상처 주고 싶다는 건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희수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엄마를 떠올렸다.

“남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어. 정말이야. 리옹을 떠난 이후로 일만 하면서 살았어. 남자를 만날 여유도 없었고 그럴 생각도 전혀 없었어.”

칼릭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조용히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변명을 들었다.

그가 그렇게나 원하던, 듣고 싶었던 변명.

“평생 혼자 살려고 했어. 배은망덕하게 널 배신했으니까, 그래서 나 같은 여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 했어…….”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녀의 대답이 듣기에 나쁘진 않았다. 여전히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이 여자를 향해서.

“그때는 네가 날……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어. 알아차릴 여유도 없었고……. 만약 우리가 말이 통했다면 그렇게 도망치진 않았을 거야.”

“…….”

“미안해.”

칼릭스는 희수가 어떤 말을 한대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을 떠난 여자를 향한 그리움이 깊은 원망으로 변해 있었다. 창녀에, 고작 도둑일 뿐인 부정한 여자를 그렇게나 사랑했던 자신 또한 원망스러웠다. 겨우 입발림 몇 마디를 들었다고 용서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3년이라는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녀에게 고스란히 알려 주고 싶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할게. 돈을 원하면 벌어서 갚을 거고, 무릎 꿇고 빌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몸을 원하면 그것도 줄게. 네 마음대로 해.”

그는 눈을 꾹 감고 마지막 회한을 흘려보냈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가슴을 들썩이다 간신히 숨을 진정했다. 한 손으로 젖은 눈가를 대충 닦아 내고, 자신이 벗겨 낸 옷을 그녀에게 툭 던졌다.

“입어.”

그러곤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문밖을 고갯짓했다.

“지금 갈 거야.”

여자의 얼굴, 웃는 얼굴만 확인하고 가겠다던 다짐은 이미 오간 데 없었다. 칼릭스는 여자와 처음 만났던 3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녀에 관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재회한 그 순간부터 이렇게 되리란 것을 예감했는지도. 그래서 교황, 프란시스는 그녀를 보러 갈 생각도, 알은척도 하지 말라며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칼릭스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 다시는 그 나쁜 여자를 우연히도 만나지 않으리라 밤새도록 이를 갈며 다짐했건만 이미 여자의 방문 앞이었다.

“지금? 어딜?”

희수는 몇 번 눈을 끔뻑였다. 곧 그가 말하는 게 다른 도시로의 이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 밤에 어떻게 다른 도시로 간단 말인가. 이동마법진을 그리는 술사들은 낮에만 활동하는데…….

“아.”

희수는 뒤늦게 그가 성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사람이란 것을 떠올렸다. 그에겐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능력이 있었다.

남자의 눈물까지 보았는데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어떤 협박보다도 강력했다. 희수는 그가 보인 분노보다 슬픔에 공감했다.

하지만 이대로 말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다. 그녀가 굼뜨게 움직이자 칼릭스가 문을 열듯 하며 말했다.

“구경거리가 될 생각이라면 상관없어.”

희수는 사람들의 눈총이 두려웠다. 밖에서 들리던 웅성거리는 소리는 한참 전에 조용해졌고, 그건 누군가를 불러왔다는 뜻이었다.

“입을게. 옷 입을게. 얌전히 따라갈 테니까…….”

똑똑. 때마침 들리는 노크소리에도 칼릭스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희수는 문을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사람들한테 마지막 인사만 하게 해 줘.”

그가 기막힌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넌 나한테 인사하고 사라졌어?”

“그래도 같이 지낸 사람들인데…….”

“아는지 모르겠는데, 난 불을 질러도 벌 받지 않아. 도시의 협조와 보호 덕분이지.”

성력, 파란 불꽃은 매녹의 처단을 위해서 사제의 판단 아래 언제 어디서든 이용될 수 있다. 법령에는 그런 조항이 있었다. 애초에 신전의 사제들이 제한 없이 아무 데서나 불을 지르고 다닐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무고한 살상을 할 리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이 여자와 관련된 일에서는 두려운 게 없었다. 신이나 신전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난 이 건물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아.”

이동마법진을 꼭 흙바닥에서 일으키는 건 화재의 위험 때문이었다. 삐딱하게 기대선 칼릭스는 나무 기둥을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위험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갈랐다.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오싹해진 희수는 빠르게 옷을 꿰어 입었다.

신전에 있는 그가 행여 실수로라도 그 명성을 잃을까 봐 겁이 났다. 게다가 밖엔 사람들이 있는데, 벌거벗은 여자와 단둘이 방 안에 있었다는 소문이라도 생기면…….

“베키, 잠깐 문을 열어 줄 수 있겠니?”

이 목소리는 건물의 주인인 게리 부인이었다. 희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씀씀이만큼 성격이 화끈해서, 무슨 말을 들을지 덜컥 겁부터 났다.

“클로비스 경께서 방문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아주 무례한 방식으로 말이지.”

희수는 화들짝 놀라 발을 동동 굴렀다. 게리스 키친이 파리에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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