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도망친 신부
* * *
칼릭스가 그녀를 두고 골머리를 썩이는 만큼 희수 역시 그를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이 무색하게도 희수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관계에 대체 어떤 미래가 있을까.’
그녀가 결심하고 먼저 바뀌지 않는 한, 이 남자와의 관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터였다.
반듯하게 누워 있던 희수는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남자의 손을 의식했다. 잠들기 전에는 한 침대의 양 끝에 있었는데, 항상 아침에 일어나 보면 그의 팔베개를 하고 있거나 손을 잡는다든가 하는 옅은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잠자리는 그가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아무리 희수가 옷을 벗기려 들어도 그가 완강하게 거부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하니까.
희수는 슬쩍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그러자 그의 손길이 떨어져 나갔다. 머뭇거리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일찍 일어났네.”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일어나 프란시스와 조찬을 끝낸 상태였다. 다행히 침실로 돌아왔는데도 희수가 자고 있었다.
“오늘은 다른 도시에 갔다 올 거야. 늦을지도 몰라서 저녁식사는 넉넉히 갖다 달라고 말해 놨어. 네가 좋아하는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닭고기로.”
그는 희수의 식사를 챙겨 주고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어떤 일을 당해도 배는 고팠고, 그가 가져다준 식사를 먹어야 했다. 밉든 싫든 시큰둥하게 지내 봐야 그녀만 손해였다.
만약 그가 자신을 불편하게 여겨 매춘부로 팔아 버린다면? 귀찮고 짜증 나는 존재라고 다시 황무지에 갖다 버리려 한다면?
희수는 이 남자와 함께하는 긍정적인 미래의 모습이 전혀 그려지질 않았다. 그가 저를 황무지에 홀로 버려둔 시간은 아마 1분도 되지 않겠지만 희수는 그 순간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는.
그래서 그녀는 남자에게 먼저 손을 뻗었다.
“칼릭스.”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칼릭스는 휘둥그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희수는 덤덤하게 말했다.
“물.”
“물? 마실 거, 아니면 씻을 거?”
“물…….”
“아, 마실 거.”
일주일만의 첫 대화치고는 참 별게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충분했다. 칼릭스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물을 떠다 주면서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아침이라 목이 말랐나. 미안. 전혀 몰랐네.”
그녀가 꿀꺽꿀꺽 물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한 컵을 다 마시자 금방 다시 일어나 또 한 컵을 떠왔다.
“뭐 더 필요한 건 없어? 배고프지? 닭고기를 갖다 달라고 할까? 닭고기.”
“닭고기.”
“알았어. 잠시만 침대에서 기다려. 일어나지 말고.”
부리나케 침실을 나가는 뒷모습이 조금 들뜬 것 같기도 했다.
희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를 대하려 노력했다. 핸드폰을 부숴 버린 것도 미웠고, 자신을 내다 버리려던 것도 미웠지만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어차피 그에게 싫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 그녀에게 드디어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내가 이 남자를 떠날 수 있는 날이 오면.’
희수는 이 절대적인 갑을 관계를 더 이상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기생해서 사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언제 팔려 갈까, 언제 또 버려질까 전전긍긍해하는 이런 제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모든 걸 바꿀 만한 결심을 했다.
남자가 자신을 팔기 전에.
먼저 떠나야 한다.
‘이 사람은 또다시 좀비가 있는 황무지로 갈 거야. 어쩌면 그 전에 또, 날 그곳에 버려두려고 하겠지.’
그러니 이 도시에 있을 때 그에게서 벗어나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날부터 희수는 남자가 없는 사이 침실 밖을 살피며 자신이 있는 곳이 대체 어디인가를 파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아낸 건 이곳이 종교시설이라는 것이다. 일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찾아와 등신상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이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았다. 마치 기도를 하듯이. 그런 공간이 꽤 많았다. 이곳을 신전으로 보니 건물 전체를 감도는 경건한 분위기도 이해되었다.
“듣기로는 네가 침실 안에만 있는 게 답답해 보인다던데.”
우습게도 그녀가 당당하니 칼릭스는 배로 죄책감을 느꼈다.
“우리 산책 가기로 했잖아. 내가 일이 많아서 시간을 내지 못했어. 젠장, 이 신전은 지금 상황이 완전히 엉망이라서…… 아, 욕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이런 말은 하면 안 돼. 알지?”
그는 주절주절 말은 하면서도 희수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생각은 하는 모양이었다. 어째서일까. 냉정하게 자신을 버려두려고 했으면서.
‘어차피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난 몰라.’
갑자기 핸드폰을 부러뜨린 이유도, 자신을 갑자기 황무지로 떠밀었던 이유도 알지 못했다. 희수는 자신이 보던 핸드폰이 왜 그의 화를 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내일 밖을 구경시켜 줄까……?”
남자가 침실의 창문을 가리켰다. 커다란 창문 앞에서 밖을 내다보는 데 오랜 시간을 할애하는 그녀에게 하는 말이었다.
희수는 무심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블랙캐슬에서 희수가 외부생활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좋아할 것이다. 분명히.
엊그제 산책 가자고 말만 해 놓고 밖으로 한 발자국도 떼질 못했으니 이번엔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겠다.
“그럼 시장에 먼저 가 보자. 내일.”
칼릭스는 결국 자문자답하고 얼른 침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요즘 프란시스와 독대하는 것보다 희수와 마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프란시스는 그가 재판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워 매일같이 예배당에 오는 줄 알지만 사실은 여자 때문이었다. 그녀와 마주 보고 있으면 온몸이 바늘에 찔리는 것 같았다.
속 시원하게 사과라도 하고 싶은데 여자에겐 그날의 일을 사과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녀가 있는 침실 문에 등을 기댄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이제 희수는 그 일이 있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을 했고, 경멸하듯 떨쳐 내거나 괴물 보듯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미세한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가끔씩 웃으며 자신을 마주 보거나 설레는 것처럼 볼을 붉히던 여자는 이제 돌이나 나무를 보듯이 그를 봤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체념한 것 같았다. 그를 미워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그냥 그렇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밖을 구경시켜 주고, 맛있는 걸 많이 사 주자. 그리고…… 그리고.’
또 여자에게 뭘 해 줄 수 있을까.
물어볼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잘해 주다 보면 그녀 또한 제 진심을 알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늘어 가는 건 오해뿐이었다.
* * *
칼릭스를 향한 수배령은 거둬졌다. 프란시스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재판을 시의회가 부당하게 이끌어 가고 있다는 성명서를 내밀었다. 성기사들은 신전의 동의 없이 시의회에 잡혀갈 수 없다는 법령도 들먹였다.
덕분에 칼릭스는 한결 수월하게 여자와 밖을 구경 다닐 수 있었다. 희수가 외부에 관심이 지대하다는 걸 알고 칼릭스는 매일매일 그녀와 밖을 산책했다.
“맛있나? 이 식당이 리옹에서 가장 맛있는 곳이래. 리옹의 귀부인들이 이곳에서만 모임을 갖는다던가.”
“…….”
“이렇게 비싼 곳은 나도 처음 와 봤는데, 사실 내가 받는 주급으로 오기 힘든 곳은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매 끼니를 여기서 먹여 줄 수도 있어.”
희수는 거의 접시에 코를 박다시피 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 본다. 매일 도시를 구경 나올 때마다 그가 저를 데려가는 곳은 고급식당이었다. 물론 음식은 다 맛있었지만 이곳이 그중 최고였다.
“잘 먹는 것 같네. 다행이다.”
남자는 요즘따라 말이 무척 많아졌다.
“예약하지 않으면 올 수 없다고 하는 걸 간신히…….”
희수는 흘끔 시선을 올려 그를 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하던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희수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수는 다시 접시에 집중했다.
소고기 같았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부드러운 육고기였다. 말린 허브를 곁들여 구워 낸 고기는 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위에 뿌려진 검붉은 소스는 상큼하고 달달했다. 없던 입맛도 되돌릴 멋진 요리였다.
원래 이렇게 식탐이 있는 편은 아니었는데…… 굶은 기억이 지독해서 변해 버렸다. 허겁지겁 맛난 걸 먹다 말고 희수는 자신의 처지에 속이 울컥했다.
“내일도 데려올게. 네가 여길 제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힐끔힐끔 희수의 눈치를 살피던 칼릭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는 요즘 통 입맛이 없었다. 매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남기기 일쑤였다. 주위 사람들이 왜 점점 말라 가느냐고 한 번씩 물었지만 칼릭스는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묘하게 차가워진 여자의 태도가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희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칼릭스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일 때문에 화가 나 있었다.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여자의 마음을 풀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그녀와 사이도 그리 좋지 않은 이 상황에서 아주 커다란 문제가 생겨 버렸다.
‘저렇게 데면데면한데 어떻게…….’
어떻게 결혼식을 하지.
그녀를 도시에 계속 머물게 하려면 우선 결혼이 시급했다. 프란시스가 잡은 예식날짜가 당장 사흘 뒤였다. 신부가 예식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어떡하나. 완전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녀가 결혼이라는 말을 모른다는 것이다. 희수는 사흘 뒤가 자신의 예식이라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다 먹었으면 이만 가자. 보여 줄게 있으니까.”
칼릭스는 식당에서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가장 먼저 들른 건 꽃집이었다.
“흠. 신부가…… 부케로 드는 꽃을 보여 주시오.”
“아이고, 설마 오늘 결혼하시는 겁니까? 아니겠지요?”
“미리 보러 왔을 뿐이니 비슷하게 한 다발 만들어 주시오.”
꽃장수는 제 일도 아니지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일 날 와서 부케를 만들어 달라는 신랑신부가 있다면 그건 결코 행복한 결혼식이 아닐 터였다.
“어떤 꽃을 원하시나요? 보통은 로즈를 쓰고, 튤립, 특별한 것을 원하시는 분들은 미리 주문을 하고 가십니다.”
“장미는 너무 흔해. 저 작은 방울 같은 것들은 뭐지?”
“아, 저건 부바르디아라는 꽃입니다. 나는 당신의 포로라는 꽃말을 지녔지요. 저렴하긴 한데 꽃대가 물러서…….”
“저 복슬복슬하고 커다란 건?”
“수국입니다. 저 색깔의 수국은 바람둥이라는 꽃말을 지녔지만 예뻐서 신부님들께도 인기가 많습니다.”
“저 통통한 백합 같은 건?”
“아마릴리스입니다. 저건 백합의 한 종류가 맞습니다.”
칼릭스는 한참이나 꽃을 골랐다. 몹시 신중한 그의 얼굴을 보고 꽃장수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신랑께서 신부님만큼 까다로우시군요. 같이 오신 분은 신부님이 아니지요?”
꽃장수가 의심할 만했다. 희수는 꽃집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그녀의 시선은 사방을 살피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어차피 골라 보라고 해도 멀뚱하니 답이 없을 듯했다. 칼릭스는 복잡한 기분을 털어 내고 꽃에 집중했다.
“됐고, 저 솜뭉치 같은 건 뭐요?”
“저건 작약입니다. 신부님 드레스의 아랫자락을 닮아 부케에 많이 쓰이지요.”
음흉한 미소를 지은 꽃장수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래서 많이 벌어진 건 쓰지 않는답니다.”
칼릭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꽃장수는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더불어 작약의 꽃말은 ‘수줍음’입니다. 예비 신랑께는 이 꽃이 어울리겠군요.”
기분이 나쁘지만 그의 눈엔 작약이 제일 예뻤다. 어차피 희수는 물어봐도 의사를 표하지 않을 테니 칼릭스는 작약으로 부케를 정했다.
예식 날짜를 알려 주고 돌아선 그는 기왕 나온 김에 부티크에도 들렀다.
프란시스는 모든 걸 생략하고, 아주 간략히 주례사를 읊고 혼인증명서를 쓰고 끝내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한 결혼식이라도 일상복을 입히기는 찝찝했던 것이다.
적어도 웨딩드레스와 부케, 반지와 목걸이는 그럴듯한 것으로 해 주고 싶었다.
“요즘은 다양한 색의 드레스도 많이 입는데, 분홍색은 어떠세요?”
“하얀색으로.”
이번에도 모든 걸 결정한 사람은 칼릭스였다.
칼릭스가 평소에 그녀에게 사 주던 옷은 주로 작업용 바지였다. 도시 밖을 다니기엔 그게 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수는 왜 자신에게 풍성한 드레스를 권하는지 알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낯선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던 그녀는 물음표 가득한 눈으로 칼릭스와 부티크의 귀부인을 번갈아 보았다.
“신부에게 어울릴 만한 것을 권해 주면 고맙겠소.”
꽃장수에게 ‘신랑, 신부’라는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인지 그녀를 신부라고 칭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흐음…….”
부티크의 귀부인은 심각한 척 한 손으로 턱을 받쳤다.
남자는 한눈에 보아도 돈이 많아 보였다. 게다가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끊임없이 기분을 살피는 것으로 보아 얼마가 되든지 기꺼이 지불할 눈치였다.
그녀는 희수의 체형을 살피며 들으란 듯 말했다.
“웨딩드레스에 자수를 넣는 건 한물갔답니다. 요즘 그렇게 했다간 촌스럽다고 한창 뒷말이 나올 거여요.”
“뒷말이 나온다고?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글쎄, 졸부에게 시집가는 아가씨들은 크리스털을 붙이지요. 재취라면 가짜 보석도 많이들 이용하십니다.”
“지금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인상을 구긴 칼릭스를 보고도 귀부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저 남자는 신부를 앞에 두고 험한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신부님들이 가장 바라는 보석이 있기는 한데…….”
곤란한 척 눈을 내리깐 귀부인을 보고 칼릭스가 재촉했다.
“신부가 가장 바라는 게 뭐지?”
“글쎄, 값이 저렴하지 않아서…….”
“뭐냐니까?”
주저하던 귀부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진주라는 보석입니다. 아주 소량만 구할 수 있는 것이라 절대로 흔하지 않지요. 그걸 드레스에 붙이면 모두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겁니다.”
“그럼 그걸로 하지.”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칼릭스는 이미 어느 정도 각오를 한 터였다. 여자들의 것은 원래 비싸다. 그는 낭비를 좋아하진 않지만 웨딩드레스는 평생 그녀가 예물로 간직할 것이었다. 한 번 쓰고 말 소비품이 아니라 별로 아깝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꽤 많은 돈이 있었다. 각 도시의 은행마다 맡겨 둔 돈만 해도 고급주택을 몇 채는 샀을 것이다.
부티크의 귀부인은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대답이 잘생긴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전액 선불로 지급하겠소.”
* * *
웨딩드레스까지 샀으니 이만 돌아갈까 했다. 하지만 희수가 이대로 신전에 돌아가기 아쉬운 듯이 자꾸만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럼 산책을 조금 더 할까?”
칼릭스는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어차피 대답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희수는 이제 소리를 낼 수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침실 문밖에서 그녀가 단어를 외우듯이 혼잣말을 하는 걸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혼잣말을 할지언정 자신과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는 불편한 마음을 다스리려 한쪽 주머니에 있는 작은 상자를 매만졌다. 전에 내가 못되게 굴었으니 그녀를 닦달하지 말자. 어차피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할 여자다. 결혼을 하면 좋든 싫든 나와 평생을 살게 될 여자니까.
“저기서 결혼식을 하네. 가 보자.”
마침 광장의 아름드리나무 아래에서 야외 예식이 있었다. 칼릭스는 반갑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신부는 케드릭 군을 남편으로 삼아 생이 다하는 날까지 변치 않을 사랑을 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서로를 바라보며 수줍은 듯이 웃는 신부와 신랑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저 자리에 있을 자신을 상상했다. 보타이를 하고 있는 신랑의 얼굴에 자신을 떠올리고, 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신부의 얼굴에 희수를 대입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지 않았다.
“이로써 케드릭 군과 세이라 로건 양이 신의 축복 아래 성혼하였음을 알립니다.”
아, 그랬군.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귀족이 아니었나 보다. 귀족들 간에 결혼이라면 신전에서 했을 것이다. 이렇게 야외에서, 그것도 광장에서 결혼식을 할 리가 없었다. 귀족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그도 아는 상식이었다.
‘저 여자가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기에.’
집안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그런데 여자가 무척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어 저 결혼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강압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칼릭스는 속이 쓰렸다. 저 자리에 있는 신부의 사랑을 받는 신랑이 부러웠다. 많이, 아주 많이 부러웠다. 자신의 결혼식은 저렇지 않을 것이다. 상상하니 입안이 썼다.
“……이만 갈까.”
결혼식에 완전히 정신이 팔렸던 그가 뒤늦게 희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예식에 눈을 두고 있지 않았다. 넋을 놓고 주시하는 건 광장의 한편이었다. 그곳엔 지나가는 모두의 눈길을 끌 만큼 어마어마한 인파로 가득했다. 가만 보니 신전의 술사들이 운영하는 도시 간 이동마법진이었다.
“블랙캐슬로 갑니다! 블랙캐슬로 가시는 분은 얼른 티켓을 사세요! 3길리입니다!”
“부르고뉴로 갑니다! 5길리입니다! 요즘 가시는 분들이 줄어 하루에 두 번밖에 운행하지 않습니다! 어서 티켓을 사세요!”
“어서 티켓을 사세요! 곧 출발합니다!”
칼릭스는 희수의 옆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미동도 않고 인형처럼 우뚝 서서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이동마법진이 그녀에겐 대단히 인상적인 게 분명했다.
“산토니! 항구 도시 산토니로 갑니다!”
그리고 이어진 누군가의 외침에 희수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파리!”
그 순간 칼릭스는 충격의 빛이 번진 그녀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파리로 갑니다, 파리!”
그는 연신 큰 목소리로 ‘파리’를 외쳤다. 그 술사를 향해 돌아선 희수의 얼굴이 경악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파리로 갑니다! 항구 도시 파리!”
* * *
오늘 그는 이상했다. 물론 잘해 주기야 평소와 똑같았다.
아주 맛있는 것을 먹여 주고, 밖을 다니는 내내 어린아이를 다루듯이 살며시 손을 잡아 주었다. 그녀의 눈길이 닿는 건물마다 뭐라고 긴 설명도 해 주었다. 이해하지 못할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
미안하기 때문인가. 제게 정성을 들이는 걸 보면 아무래도 몹시 미안한 듯했다. 그 역시 그 일에 죄책감을 갖고 후회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건 왜 사 줬을까.’
희수는 탁자 위에 놓인 하얀색 꽃다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꽃집에서는 평소와 달리 하얀 꽃만 가득한 묵직한 꽃다발을 샀다. 그리고 그것을 하루 종일 제게 들고 다니게 했다.
그러고는 웬 드레스 가게에 가서 그녀의 치수를 재게 했다. 한참이나 드레스 가게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더니 대뜸 그녀를 끌고 나와 광장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선 결혼식이 있었지만 희수의 눈길을 끈 건 그런 연회가 아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광장 한구석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5개나 있었다. 그건 칼릭스가 공간을 이동할 때 만들었던 마법진이었다. 사람들이 행선지를 정하듯 각기 다른 마법진 위로 가서 서자, 빨간 옷을 입은 술사가 파란 불꽃을 피워 냈다. 파란 불꽃은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전부 태워 버릴 듯이 화르륵 타올랐다. 이윽고,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도시로 간 것이다.
‘다 같이 마법으로 이동하는 거야. 도시 밖은 위험하니까!’
그 광장에서 표를 사면 누구든 다른 도시로 이동이 가능한 것이다. 그것도 신기했지만 희수의 기억에 남은 건 또 있었다.
‘파리!’
어느 마법진의 술사가 그렇게 소리쳤었다. 그건 분명히 도시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도시의 이름이 파리라니.’
희수가 지금 와 있는 곳의 이름은 리옹이었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우연치고는 프랑스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비슷했다. 들리는 말투라든지, 영어의 알파벳을 쓴다든지, 욕의 발음이 같다든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칼릭스가 언제 이 도시를 떠나 또 황무지로 갈지 모른다. 마법진으로 도시 간 이동이 가능하다는 걸 보고 희수는 계획을 앞당기기로 했다.
요즘 그가 신전 밖을 자주 보여 주는 통에 그녀는 신전을 나가서 광장까지 가는 길을 외웠다.
문제는 돈이 없다는 것.
하지만…… 그마저도 해결된 듯싶었다.
“넌 보석을 좋아하나 보네.”
칼릭스는 그녀의 눈앞에 루비가 알알이 박힌 목걸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백금 루비 목걸이에.
“예물은 클로비스 부인께서 준비해 주는 게 맞지만 초대해도 오지 않을 분이라서.”
클로비스 부인은 칼릭스의 계모였다. 그는 계모를 예식에 부르지 않기로 했다. 만약 희수가 원했다면 불렀겠지만…… 지금 그녀는 사흘 뒤가 본인의 결혼식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조용히 치러질 형식상의 예식이었다. 프란시스는 그가 목걸이와 반지, 웨딩드레스에 거금을 쓴 것을 알고 혀를 찼지만 정작 칼릭스는 시간이 부족해 맞춤 예물을 해 주지 못해 미안했다.
“그래서 목걸이는 두 개를 준비했어. 하나는 귀부인이 추천한 진주목걸이야.”
귀부인은 드레스에 이어 그에게 목걸이까지 팔았다. 굉장한 거물급 손님이라 그가 대체 어느 부잣집 가문의 영식인지 수소문을 하고 있었다. 계모나 누이들을 마주칠까 주로 신전 안에서만 생활했던 칼릭스는 클로비스 가문의 외아들로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 앉아 봐. 채워 줄 테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희수는 순순히 그가 손짓하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뒤로 다가간 그가 의자를 들어 거울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방향을 바꿨다.
희수는 거울 너머의 칼릭스를 주시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수줍은 듯 그의 볼이 불그스름했다.
“네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라고 했더니 붉은색 루비가 잘 어울릴 거라고 했어. 하지만 결혼식에 붉은색 보석은 별로겠지.”
그래서 부티크의 여자가 추천한 대로 진주목걸이도 샀다. 리옹에 단 하나뿐인 목걸이라고 했다.
“많이 비싸더라.”
잘 훈련받은 말의 열 필 값이었다. 칼릭스는 검소한 편이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거금은 그의 생전 써 본 일도 없었다.
“팔찌도 있다는데 그건 지금은 구할 수가 없대.”
희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한쪽으로 넘긴 칼릭스는 먼저 루비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 주었다. 보석이 주렁주렁 박힌 목걸이는 ‘둘렀다’는 표현이 사실 더 어울렸다.
“그것도 사 줄게. 다음 달에 온다고 했어.”
다시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 그는 그녀의 양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거울 속의 희수와 눈을 맞췄다. 그 일 이후로 이렇게 똑바로 서로를 마주 본 건 처음이었다.
“잘해 줄 거야.”
“…….”
“이전에 실수한 건…… 미안해.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 절대로, 두 번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아.”
약간은 긴장한 그의 굳은 얼굴엔 이유 모를 엄숙함이 깔려 있었다. 희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반지는 단순한 걸로 했어. 훈련할 때 빼지 않으려고……. 대신 앞으로 패물을 더 많이 사 줄 테니까 아쉽진 않을 거야. 난 돈을 쓸 데가 없으니까 네 보석이나 사 주면 되겠지.”
칼릭스가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의 투박한 손은 낮의 꽃송이를 만졌던 것처럼 부드러웠다.
“신에게 결혼을 맹세하면 절대로 서로를 배신할 수 없어. 너는 신자가 아니니 모르겠지만…… 나는 안 돼. 그러니까 절대로 너를 외롭게 하거나 마음 아프게 하지 않을 거야. 두 번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아, 절대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커다란 그의 손이 느릿하고 조심스레 움직이며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소중한 것을 만지는 손이었다.
“어차피 넌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행동으로 보여 줄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더 잘해 줄게. 네가 싫다는 건 절대로 하지 않아.”
그가 무척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가.
희수는 이상하게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가슴 한구석을 두드렸다.
추운 날 밤, 자신의 옷을 벗어 제게 덮어 주던 이 남자에게 설레었던 그날이 떠올라서…….
그와 키스했던 그날 밤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하며 다시 설레었다.
“재판에서 이기면 네게 더 많은 걸 해 줄 수 있어.”
그가 상체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한동안 그 때문에 바쁘겠지만 지금은 우리 사이가 좋지 않으니 차라리 잘된 게 아닌가 싶네. 만약 재판에서 진다고 해도 내 재산은 전부 네 것이 될 테니까. 뭐…… 내가 잘못돼도 넌 이 신전의 보호를 받을 거야. 가문의 성을 진작 버리길 잘했지.”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조근조근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콤했다.
“물론 너 혼자 남을 리는 없어. 널 위해서라도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난 재판을 이길 테니까.”
풍성한 깃털로 귓바퀴를 살살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네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게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희수는 남자가 주는 편안한 분위기에 저절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새가 부리로 쪼듯이 자잘한 입맞춤이 그녀의 옆얼굴과 목덜미로 쏟아졌다.
“결혼당해서 억울하단 생각 들지 않도록 잘해 줄게.”
피부 위로 느껴지는 남자의 입술에 조금씩 압력이 세졌다. 꾹꾹 도장을 찍어 누르듯 그녀의 살갗을 점점 오래도록 물고 빨기 시작했다. 조용한 침실에 살과 살이 맞닿는 쪽쪽 소리만 울려 퍼졌다.
“하아, 내 이름을 불러 봐. 칼릭스라고, 칼릭스…….”
“카, 칼릭스…….”
“후우…….”
그의 거친 숨소리에 섞인 흥분과 열기가 희수에게 고스란히 와 닿았다. 아무래도 그에게 전염된 것 같았다. 무릎 위에 놓여 있던 그녀의 손이 옷자락을 쥐었다.
다리가 배배 꼬이고 배 속이 아찔하게 조여 온다.
똑똑똑!
그때 하필 누군가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희수는 잠에서 깨어나듯 번쩍 눈을 떴다.
“제기랄.”
칼릭스는 푹 한숨을 내쉬곤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감히 이 신전에서 또 욕을 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저절로 욕이 막 튀어나왔다.
하필이면 희수가 이렇게 잘 따라 주려는 좋은 분위기에……. 게다가 반지도 전해 줘야 하는데.
“대주교께서 잠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지금은 안 된다고 전해! 차와 다과를 즐기고 있으니 금방 가겠다.”
“알겠습니다.”
칼릭스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숨을 고르게 쉬려 노력했다. 지금은 곤란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자의 부드러운 살결과 향기에 그의 물건이 기립해 있었다. 좀 시원한 바람을 맞아야겠다.
“드레스는 내일 올 거야.”
그는 희수의 손에 진주목걸이를 넘기곤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리고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갑자기 이 목걸이는 왜 준 걸까.’
희수는 자신의 손에 들린 진주목걸이와 목에 두른 루비 목걸이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리고 꽃다발까지. 그러고 보니 저건 흡사 웨딩 부케처럼 보인다. 광장에서 자신을 끌고 가 보여 준 그 결혼식의 부케처럼 생겼다.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희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머리를 털어 버렸다. 설마하니 말도 통하지 않는 자신과 정식으로 결혼을 할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그럴듯해 보이는 증거들이 몇 개 있었다. 아까 그 드레스 숍에 들렀던 것도 그렇고, 갑자기 이런 목걸이를 주질 않나,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건 남자의 눈빛이었다.
‘저 남자는 날…… 좋아해.’
적어도 호감은 확실하다. 적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긴 했지만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자신을 만지는 손길은 결코 오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제게 잘해 주고 싶어 하고, 실수하면 미안해한다. 일단 남자는 자신과 같이 있으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그게 결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저 남자의 직업은 좀비 헌터가 아닌가. 그것도 도시 밖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좀비 헌터.
지금이야 자신이 아픈 척을 하고 있으니 도시에 머물고 있지만 칼릭스는 곧 이 도시를 떠날 터였다. 매번 아픈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그걸 생각하니 차가운 현실이 그녀를 뒤덮었다.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 같은 열기는 파스스 사라졌다. 희수는 자신의 결심을 되새기려 남자를 향해 차오르는 감정들을 삭였다.
‘저 남자는…… 안 돼.’
거울 속에서 그가 채워 준 목걸이를 하고 있는 희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황무지에서 저 남자를 뒤따라 다니면서 언제 버림받을까 전전긍긍하는 애완견처럼 평생 살 순 없어.’
희수는 28살의 여자였다. 이곳의 말은 못 할지언정 자신의 처지와 상황만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녀관계가 어떤 것인지도 잘 안다.
‘저 남자와 나는 평범한 연인사이가 아닌걸.’
지금은 자신을 좋아하지만 그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 황무지를 다니는 저 남자가 자신을 거기서 챙겨 주지 않으면 죽음뿐이다. 그 전에 충분히 도시 밖에 갖다 버릴 수도 있었다. 며칠 전에 그랬듯이.
게다가 그는 자신에게 말을 가르쳐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남자가 일방적으로 하는 말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뭔가 말을 하면 굉장히 신기해하지만 그뿐이었다. 카를로스처럼 사물을 가리키며 이름을 알려 주지도 않고, 칼릭스가 제게 듣기를 원하는 말은 그의 이름뿐이었다. 그렇다고 사람들 속에 섞여 살며 자연히 말을 익힐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한 사람한테 기대서 살면 안 돼.’
민주에게 모든 걸 기대었던 희수는 덩달아 광산까지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지자 가슴이 통째로 뜯기는 기분이었다.
많은 걸 바라진 않는다. 희수가 바라는 건 단순했다. 그저 평범한 사람처럼만, 이곳의 평범한 사람처럼만 살고 싶다. 적어도 좀비에게 위협당할 일 없는 이 도시에서, 사람처럼만 살고 싶다. 평범하게.
죽은 민주의 꿈은 그녀의 것이 되었다. 이곳에선 평범한 삶이 멀게만 느껴져 더욱 간절해졌다.
‘이 남자의 옆에 있으면 평범한 삶은 없어.’
거울 속 붉은 루비가 반짝였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에도 빛이 번쩍였다. 가슴은 서늘하게 식었다.
자신보다 훨씬 뜨거운 남자의 옆에 있으니 덩달아 달아올랐을 뿐이다.
그래. 그저 잠시…… 저 남자를 따라서 데워졌을 뿐이다.
* * *
희수는 결심한 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전을 나섰다.
아침엔 칼릭스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빈 옆자리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갈등하게 된 것이다. 차라리 얼굴을 봤다면 모를까, 그가 자리에 없어서 오히려 주저하게 되었다.
그런 그녀를 부추긴 건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였다.
희수는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백금반지를 보고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케같이 생긴 꽃다발, 드레스 숍, 단조로운 모양의 백금 반지, 주렁주렁한 목걸이. 보석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이 반지는 누가 봐도 결혼반지였다.
‘그 남자가 주려던 것들은 전부 결혼식을 위한 거였어.’
가슴 한가운데로 차갑고 시린 기운이 그녀를 뚫고 지나갔다. 의심하던 사실을 확인받자 오싹했다.
희수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뺐다. 책상 위에 내려놓는 순간 대리석에 부딪친 묵직한 쇳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내 것이 아니야.
희수는 그길로 결심을 다지고 루비 목걸이도 빼놓았다.
‘진주는…… 값이 훨씬 쌀 거야.’
원래 진주는 그리 비싼 보석이 아니지 않은가. 희수는 진주목걸이만 챙겨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신분증명 펜던트에 시선이 닿았다.
이 세계의 평범한 시민으로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
그 남자에겐 필요 없는 것.
‘하지만 내겐 필요해.’
희수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간절히 원하는 만큼 세게 손에 붙들고 척척 침실을 나가려 움직였다.
하지만 문을 열어젖힌 그 순간 마음을 바꿨다. 진주목걸이는 어쩔 수 없는 티켓값이지만 이건…… 이건 안 된다. 희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평생을 갖고 있어야 할 물건이다.
그리고 그 남자를 나타내는 것.
희수는 가끔씩 이것을 들여다보며 그 남자를 생각하게 될 자신의 모습이 두려웠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 치부하고 기억 속으로 밀어 두게 될지, 어쩌면 저도 모르는 사이 그 남자를 좋아했었다고 인정하게 될지, 그가 보고 싶다고 그리워하게 될지.
……그래서는 안 되었다고,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약지에 끼워져 있던 그 반지를 제 손으로 빼 버린 순간 저 남자와는 끝이다. 끝난 거다.
‘이 문을 나가면 다시는 그 남자를 떠올리지 않고 사는 거야.’
희수는 문 옆의 탁자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이 남자가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희수는 다른 도시로 가는 표를 사서 완전히 도망칠 생각이었다.
‘식당 같은 데서 일을 시켜 달라고 하고, 재워 달라 하자.’
아예 말을 못 하는 척하고, 새로운 도시에서 모든 걸 잊고 새롭게 시작할 생각이었다. 좀비 같은 건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처럼, 평범하게. 무척 고생스럽긴 하겠지만 기생충처럼 남자의 옆에 붙어서 눈치나 살피며 평생 사는 것보단 나았다.
“안녕하십니까, 부인. 바쁘게 어딜 가시는지……. 어, 어? 부인? 부인!”
바쁘게 뛰어가는 희수를 보고 당황하기는 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멈춰 세우거나 저지하지 않았다. 애초에 신전은 그녀를 감금하던 곳이 아니었다. 이 신전에서 희수는 그 남자에게 자발적으로 갇혀 지냈을 뿐.
그래서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에도 겁내지 않았다.
“그렇게 뛰다가는 넘어지십니다, 부인!”
문지기는 희수를 붙잡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누군가에게 끌려가거나 억지로 붙들려 가는 게 아니라, 순전히 그녀의 의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설마 그녀가 클로비스 경에게서 도망치는 중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 * *
웨딩드레스가 왔다. 가격이 가격인 만큼 부티크의 귀부인은 하인을 데리고 직접 드레스를 가져왔다.
“신부님께서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그렇고말고요.”
귀부인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칼릭스에게 연신 말을 걸었다. 알음알음 소문으로 알아본 바, 그는 꽤나 유명 인사였다. 돈이 많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소문의 클로비스 경을 이렇게 직접 만나 뵙게 될 줄이야…….”
클로비스 부인은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데뷔를 앞둔 아가씨들은 그녀에게 찾아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가르침을 받아야 무사히 사교계에 입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클로비스 부인이 이 도시에 끼치는 영향력은 막대했다.
허나 그녀에게도 딱 한 가지, 입에 올릴 수 없는 흠이 있었으니…….
“클로비스 부인께서는 종종 경의 이야기를 해 주시곤 했답니다. 서자이긴 하나 친아들만큼 귀히 여기며 키워 정이 많이 들었다고 하셨지요.”
칼릭스는 버석한 웃음을 터뜨렸다. 계모는 자신을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신전으로 보냈다. 가문의 아들을 낳을 때까지만 신전에 두고 성인이 되면 거두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차마 계모의 간악한 속삭임을 거절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클로비스의 이름을 버릴 줄은 몰랐겠지. 가문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난 클로비스 부인을 잘 찾아뵙지 않으니 그쯤 하시오.”
싸늘한 일갈에 귀부인은 웃는 낯을 하고 얼른 그의 비위를 맞췄다.
“호호, 알겠습니다. 그런데 경의 부인되실 분께서는 어느 가문의 영애이신가요? 무척 과묵하시던데.”
부티크의 귀부인은 능구렁이였다. 사퇴한 성기사가 신전에서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걸 지켜보면서도 이에 대해선 일절 말이 없었다.
“역시 교양과 지성이 넘치는 아가씨답다고 생각하였지요. 클로비스 가문과 무척 잘 어울립니다.”
칼릭스는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이 여자에게 걸렸으니 자신이 곧 결혼을 한다는 사실과 신부가 언어 장애가 있다는 낭설이 널리 퍼질 게 분명했다. 그런 데다 신부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까지 들킬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 부티크의 여주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원래 예식 전에 신부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봤다가는 평생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다고 하지요.”
“……굳이 내가 가서 확인할 필요가 없겠군.”
“그렇지요. 탁월하십니다, 클로비스 경.”
“그럼 응접실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부르시오.”
“예, 알겠습니다. 참! 예상치 못한 추가금이 있는데 오늘 지불이 가능하실까요?”
“알겠소.”
그는 희수가 있는 침실만 알려 주고 몸을 돌렸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궁금해서 조금 아쉽긴 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따분했다. 그는 제 손에 낀 결혼반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몸에 장신구를 한 건 처음이지만 끼는 순간부터 기막히게 제 것처럼 느껴졌다.
결혼반지. 서로를 향한 족쇄가 그 기원이라던가. 한 여자의 인생을 떠안은 이 무거운 책임감이 결코 싫지 않았다.
‘……좋아하려나.’
원래대로라면 예식에서 서로에게 반지를 껴 주어야 했으나 칼릭스는 그냥 지금부터 끼고 있기로 했다. 여자가 할 몫의 맹세의 말과 서명도 전부 그가 대신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신부가 모르는 결혼식.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다. 이런 예식을 올려도 되는가 고뇌하게 되었다. 당황할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서 칼릭스는 희수와 함께 침실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침에 희수의 얼굴을 보지 않고 프란시스와 있기를 택했다.
‘반지를 봤을까.’
자신이 주머니에서 손으로 수없이 매만진 것을 꺼내 잠든 그녀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자 만감이 교차했다.
그의 손가락이 초조하게 무릎을 두드렸다. 아마 드레스까지 입혀 주면 희수는 분명히 알 것이다. 둘이 결혼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래도 부티크의 귀부인이 자신보다는 능숙하게 그녀를 다룰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점은 다행이었다. 그래서 귀부인이 요구한 추가금에도 불만이 없었다.
지나가던 경비원 한 명이 내심 긴장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클로비스 경.”
“귀경도 좋은 아침이오.”
눈치를 살피던 복도 경비원이 그에게 뜨거운 차를 내밀며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말을 붙여 보고 싶어 열심히 주제를 찾았다.
“날씨가 아직도 제법 쌀쌀합니다.”
“그런가.”
“예에. 바람이 아주 차갑고 매서워서 와이프가 매일 뼈가 시리다고…….”
“유부남인가?”
칼릭스의 시선이 이제야 제대로 그를 향했다. 이 신전의 경비원이 결혼한 성기사라니. 의문 어린 시선에 경비원은 머리를 긁적였다.
“예. 저는 외곽지역을 순찰하던 용병출신입니다. 이번에 발령을 받아 왔지요. 클로비스 경께서는 이곳에서 15년을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전 아직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신참입니다.”
호오. 흥미로운 시선이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시스는 말로만 개혁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행실이 바른 용병출신의 성기사들을 먼저 신전으로 부른 것이다.
“저 말고도 열 명 정도가 새로 왔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클로비스 경.”
이전의 칼릭스라면 말을 섞기도 불쾌하다 여겼을지 모르나 지금은 딱히 그와 자신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곧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 아닌가.
“나도…… 잘 부탁하네.”
경비원은 치아가 다 보이도록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신전에서 알게 모르게 따돌림을 당하던 그에겐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곧 예식을 올리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제 와이프도 신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요. 하지만 워낙 돈이 비싸서…….”
신전의 모든 게 돈이다. 손에 쥔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던 칼릭스는 그의 소탈한 언행에 피식 웃었다. 대화를 나누기에 결코 나쁜 상대가 아니었다. 긴장한 마음을 풀기엔 꽤 도움이 되었다.
그가 말한 대로 여자에겐 이 날씨가 쌀쌀하게 느껴질까 생각하며 밖을 주시했다.
“그러고 보니 부인께서 아침에 급히 어딜 가시는 듯 보였는데, 일은 잘 해결되셨는지 궁금합니다.”
멀리 창밖을 주시하던 그가 스르르 고개를 돌렸다. 경비원은 조금 굳은 표정의 칼릭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이상하게도.
“아, 아침에 신전을 나가시던걸요.”
그럴 리가.
“……누구하고?”
당황한 건 오히려 경비원이었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보고 말을 더듬었다.
“호, 혼자 가셨습니다. 어디 급한 곳을 가시는가 했습니다만…….”
그럴 리 없다. 이 경비원이 본 여자는 그녀가 아닐 것이다.
“워낙 다급히 뛰어가셔서요.”
“…….”
그럴 리가 없다.
동시에 응접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부티크의 귀부인이 의아한 얼굴로 나타났다.
순간 불행한 예감이 그를 찾아왔다. 그건 본능이었다.
“클로비스 경, 침실엔 부인께서 계시지 않던데요. 혹시 어딜 가셨나요?”
아직 사실을 확인하기 전이다. 여자는 얌전히 침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정말 어딜 나갔다 한들 다시 돌아왔을 수도 있다.
“저도 오후에는 스케줄이 있습니다만 원하신다면 기다려 드릴 수…… 클로비스 경?”
칼릭스는 귀부인을 밀치고 응접실을 뛰쳐나갔다.
“아이고머니나! 클로비스 경!”
“클로비스 경!”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마치 다른 세계의 것처럼 멀리서 들렸다. 사방이 쾅쾅거렸다. 그의 심장이 울리는 소리였다. 이 세상을 울리는 북소리처럼 커다랗게 들렸다.
쾅!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자 익숙한 침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다. 얌전히 침실에 앉아 있어야 할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덜컥 떨어져 내렸다. 시린 감각이 그의 목 뒤를 따라 척추까지 내려왔다. 칼릭스는 급하게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닫힌 욕실 문까지 덜컥 열어젖히며 넓은 침실의 곳곳을 살폈다.
뒤따라온 부티크의 귀부인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잽싸게 드레스를 소파 위에 올려 두었다.
“크, 클로비스 경, 전 일정이 있어서 이만…… 드레스는 이곳에 놓고 가겠습니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귀부인은 침실을 빠져나가기 전 힐긋 눈치를 살피고 중얼거렸다.
“죄송하지만 결혼식용 드레스는 맞춤복이라서 환불은 안 됩니다. 그럼…….”
칼릭스는 귀부인이 하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여자의 흔적이 없었다. 몇 개 안 되는 그녀의 옷가지며 머리끈 같은 것들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남은 흔적이 없었다.
침실을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있는 소파 옆의 탁자를 스쳤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건 반짝이는…….
“……반지.”
오늘 아침 잠든 여자의 손가락에 그가 끼워 놓고 간 결혼반지였다. 자신이 어젯밤 목에 걸어 주었던 루비 목걸이도 함께 얌전히 놓여 있었다.
칼릭스는 서랍을 벌컥 열었다. 거짓말처럼 그의 신분증명 펜던트가 없었다. 바로 옆에 놓인 다크 스톤은 멀쩡히 제자리에 있는데, 그것만 없어졌다.
신분을 증명하는 마석.
여자는 그게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럴 리가.”
칼릭스는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그 여자는 혼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자신이 옆에 없으면 불안해하고, 무서워하고, 겁을 낸다.
내가 없인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여자. 내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여자인데…… 그래서 날 그렇게 붙잡았었는데.
“저어, 클로비스 경.”
조심스런 경비원의 부름에 그는 휙 몸을 돌렸다.
“정말 혼자였나?”
한걸음에 코앞까지 다가섰다. 당장 뭐라도 때려 부술 기세에 경비원은 저도 모르게 주춤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양어깨가 붙들렸다.
“혼자서? 정말 혼자서 이 신전을 나갔다고?”
커다란 그의 물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고스란히 비쳤다.
경비원은 대답을 주저했다. 일말의 기대와 희망이 섞인 그의 얼굴은 다른 답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신전의 기사가 되며 맹세를 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경비원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예, 분명히…… 혼자 계셨습니다.”
허탈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는 귀로 들은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미친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말 혼자였다고.”
“…….”
“혼자서, 혼자서…… 가 버렸다고.”
두툼한 그의 앞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칼릭스는 몸을 돌려 그녀가 종종 밖을 내다보던 창가를 주시했다. 거짓말처럼 여자의 환영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보던 건 뒷모습뿐이었다.
급히 침대로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그녀가 울고 있었다. 자신이 울렸던 그날 밤이다. 가슴이 칼날에 베인듯 아프게 욱신거렸다.
왜 하필이면 강렬히 기억에 남은 게 우는 얼굴뿐인가. 왜…….
눈물을 뚝뚝 떨구던 여자의 숨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자신을 보는 무감하고 날카로운 여자의 눈빛이 떠오른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그러나 신전의 밖을 유심히 살피던 생기 어린 시선.
“하…….”
명치가 욱신욱신 죄어들었다. 가시덤불 같은 것이 그의 심장을 옥죄는 듯했다. 이대로 속이 찢겨 몸이 터져 버려도 이상할 게 하나 없었다.
“응접실이 떠들썩하다던데 이게 무슨 일인가? 루만 경.”
“아, 대주교님. 신의 영광을.”
“자네가 설명해 보게.”
“대주교님, 그게…….”
칼릭스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당장 프란시스와 경비원을 뒤로하고 신전을 박차고 나와 무작정 달렸다. 여자가 어디로 갔을지 그의 두 발이 목적지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집요하게 머물던 마지막 그 장소.
“블랙캐슬! 블랙캐슬로 출발합니다! 얼른 티켓을 사세요!”
“파리로 갑니다! 파리!”
옆을 스치는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칼릭스는 많은 인파 속에서 열심히 여자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가 찾는 여자는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절벽에서 떠미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정말 혼자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나.
혼자서 살아남을 수가 있는 사람이었던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버텨 낼 수 있는 존재였나.
아니…… 그렇지 않다. 답은 누구보다 칼릭스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결국 옛사랑을 찾아간 것이다.
‘다른 남자에게 갔다. 내가 아니라.’
내내 그리워하던 그 남자에게로.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있던 그 남자에게 돌아간 것이다.
칼릭스의 양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두 눈을 꾹 내리감고 입안의 살을 짓씹었다.
‘왜지.’
왜 떠났을까. 그 진주목걸이 하나면 평생 먹고살 돈이 충분했기 때문인가. 그래서 그녀는 더는 자신을 이용해 먹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나. 내가 더는 돌봐 주지 않을 것 같았나. 예식만 치렀으면 그보다 더한 재물을 손에 쥐었을 텐데…… 멍청하게.
자신을 잘 구슬렸다면 그 남자를 몰래 만난대도 모르는 척을 해 주었을 텐데. 결혼서약만 했으면 그녀가 어떤 짓을 저질렀어도 다 용서했을 텐데.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바라는 대로 전부 다 해 주었을 텐데…….
사방은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하지만 칼릭스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 가운데 우뚝 선 그는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갇혀 버렸다.
이날부터 칼릭스의 세상은 모든 게 새카만 암흑으로 변해 버렸다.
<1권 끝. 다음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