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6. 서툰 사랑은 상처를 남기고 (6/17)

6. 서툰 사랑은 상처를 남기고

* * *

좋은 곳에서 좋은 걸 먹여 주고, 걱정 없이 살게 해 주겠다.

그건 꽤나 거창한 고백이었다. 칼릭스가 결심했던 앞날이 완전히 바뀐 다짐이었다. 순전히 여자를 위해서였다. 그녀 하나만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희수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후아!”

깊은 물속에 잠겨 있던 칼릭스가 수면으로 올라왔다. 물기 가득한 얼굴을 쓸어내리고 곧장 희수가 있는 곳을 눈으로 좇았다.

“아직도 저걸 보고 있군.”

물가로 그를 이끈 건 희수였다. 하지만 희수는 내내 카를로스가 주고 간 마도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핸드폰이란 이름의 저 마법 상자는 환상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마귀의 물건이었다. 이방인이 원하는 모든 것을 실제처럼 생생한 그림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하고, 빛을 번쩍이기도 했다. 저 마도구에 대한 의견은 신전에서도 분분했다.

금방 죽어버리기 일쑤라, 대수롭지 않은 이방인들의 장난감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칼릭스는 마귀에게 영혼을 빼앗길까 봐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그런데 희수가 대체 뭘 하는지는 몰라도 그걸 만지작거리느라 엄청나게 집중을 하고 있었다.

“희수!”

불러도 대꾸는커녕 쳐다보지도 않는다. 칼릭스는 크게 인상을 구겼다.

“대체 뭘 하는 거야.”

물속에서 그가 희수가 있는 바위 근처로 다가갔다. 돌에 팔을 걸치고 턱을 받친 채 그녀가 뭘 하는지 주시했다.

귀에다 댔다가 손으로 두드리다가, 하다하다 이제는 핸드폰을 높이 들고 여기저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러다 넘어질까 염려스러워 그가 얼른 바위를 짚고 물속에서 뛰어 올라왔다.

“희수!”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맨발에 나신이었지만 이제 그는 희수 앞에서 부끄러울 게 없었다.

“그게 뭔데 그래?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칼릭스가 가까이 다가섰지만 희수의 관심은 여전히 핸드폰에 꽂혀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보니 색깔 그림 같은 것이 안에서 움직였다. 그래, 퍽 신기할 만했다. 카를로스가 저딴 것을 기를 쓰고 모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다른 세계의 물건엔 관심 없었다. 그의 관심은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내 이름을 말해 봐.”

“…….”

“어서 해 봐. 칼릭스. 할 줄 알잖아.”

하지만 아무리 말을 걸어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너…… 완전히 정신이 팔려서 지금 뭘 하는 거야.”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녀의 손에 쥐인 핸드폰을 휙 빼앗아 들었다. 이제야 희수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칼릭스.”

저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듣기 좋았다. 희수는 애타는 얼굴로 핸드폰을 제게 달라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그의 손에 들린 것을 희수가 빼앗을 수는 없었다. 신체적 차이가 월등했다.

“칼릭스, 핸드폰. 핸드폰…….”

“안 돼. 왜 이것만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건데?”

칼릭스는 심술이 돋아 그것을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요즘엔 아쉬울 게 없어서 내내 시큰둥하던 그녀였다. 그런 희수가 물건을 가져가려고 까치발을 하며 제게 달라붙어 오는 게 꽤나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칼릭스가 속삭였다.

“같이 씻자. 수영도 하고. 물이 시원해서 기분 좋을 거야.”

폭포수가 떨어지는 샘을 눈짓하자 말뜻을 알아들은 듯했다.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핸드폰…… 핸드폰!”

칼릭스의 한쪽 입매가 비틀렸다. 안절부절못하고 오로지 핸드폰만 찾는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저것으로 대체 뭘 하길래 저렇게 목을 매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저딴 장난감을 그녀에게 쥐여 주고 간 카를로스가 원망스러웠다.

까치발로 서 있던 희수는 저보다 한참 큰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을 가져가려 콩콩 뛰어올랐다. 아무 부질없는 노력이었으나 칼릭스의 눈에는 귀여워 보였다. 자신이 악당이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일단 그녀의 적극적인 감정표현이 보기 좋았다.

이런 짓궂은 장난은 어릴 때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희수에게만은 예외였다.

“귀여워. 자주 괴롭혀야겠는데.”

그가 씩 웃으며 희수의 볼을 꼬집었다. 요즘 살이 꽤 붙어서 볼이 통통했다.

“핸드폰. 칼릭스, 핸드폰!”

“네가 가져가.”

그가 줄 것처럼 손을 내리자 희수가 손을 뻗으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불가능한 거리였다. 체격의 차이가 그만큼 컸다. 희수는 짜증스럽게 몇 번을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의 가슴을 밀어내자 칼릭스는 그녀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서로 옥신각신하던 그 순간이었다.

“어어……!”

바위 끝에 서 있던 희수가 중심을 잃고 두 팔을 휘적거렸다. 놀란 칼릭스가 그녀를 잡아 줄 틈도 없이 희수는 그대로 폭포에 빠져 버렸다.

첨벙!

그에게 수영은 기본 소양이었다. 희수가 적어도 물에 뜰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칼릭스에겐 목 아래까지 오는 높이였다.

“이런.”

희수는 머리끝까지 물에 잠겼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수영은커녕 물에 뜨는 법도 몰랐다. 망설임 없이 폭포수에 뛰어든 칼릭스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섰다.

희수는 자신을 붙잡는 강한 손길에 해초처럼 그에게 엉겨 붙었다.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목에 두 팔을 감았다.

“하아…… 하아.”

남자의 팔이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의지할 곳이 있으니 이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괜찮아?”

하나도 괜찮지 않다. 희수는 정신없이 콜록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발이 닿지 않았다. 정말 죽을 뻔했다.

“별로 깊지 않아.”

간신히 숨을 진정하자 그가 웃으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물을 그녀의 어깨 부근에 끼얹었다.

“어때, 시원하지.”

희수는 달달 떨며 그의 몸을 있는 힘껏 붙들었다. 물속은 춥고 남자의 몸은 뜨거웠다. 그가 물을 끼얹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러자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희수는 그가 자신을 매달고 밖으로 나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폭포의 정중앙, 더 깊어 보이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칼릭스, 저리 가. 저리 가!”

기겁한 희수가 물 밖을 가리켰다.

“안 돼! 물, 안 돼!”

아는 말 몇 개를 조합해 간신히 의사를 전했으나 그는 여전히 장난스러웠다. 엉덩이를 받쳐 주던 손이 잠시 떨어지자 희수는 극도의 두려움에 그의 몸에 바짝 붙었다.

“이제 말도 잘하고 제법이네. 내 이름 계속 불러 줘. 칼릭스.”

“칼릭스…….”

칼릭스는 그녀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자신에게 찰싹 붙은 희수가 깜찍했다. 그녀가 연신 물 밖을 고갯짓했다.

“저리 가.”

울상을 하고 웅얼거리는 것도 예뻤다. 오랜만에 보는 희수의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붙이고 중얼거렸다.

“물을 싫어하나 봐. 그럼 아예 나가지 말까.”

하지만 불안해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칼릭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희수와 물놀이를 포기하는 대신 그동안 맛보지 못한 그녀의 입술을 조금만 탐하기로 했다.

“으응…….”

희수는 그 의도를 읽었는지 얌전히 입술을 벌리고 그의 키스에 응했다. 칼릭스의 자유로운 한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더 깊은 입맞춤을 유도했다. 나중에는 거의 삼킬 듯이 희수에게 달려들어 입술과 혀를 쪽쪽 빨았다.

“하아.”

그녀는 상체를 뒤로 해서 간신히 남자를 떼어 놓았다. 열기에 잠겨 흐릿하게 풀어진 눈매가 희수를 응시했다.

“……하고 싶어.”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물에 젖어 촉촉하게 보였다. 그곳에 얼굴을 파묻고 물고 씹었다. 그녀는 몸을 뒤틀었다. 자꾸만 물 밖을 눈짓했다.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밖으로 나가기를 종용했다.

네가 원한 걸 해 줬으니 이제 내보내 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매번 이런 식으로 네가 필요한 게 있을 때만.”

내게 잘해 주려고 하지. 칼릭스는 뒷말을 삼켰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순순히 그녀를 물 밖으로 인도했다. 조금 떨리는 몸이, 그녀가 추운가 싶어서였다.

그는 행낭에서 희수에게 덮어 줄 것을 찾아왔다.

“희수.”

“…….”

“희수!”

그녀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이리저리 핸드폰을 찾느라 바빴다. 칼릭스는 자신을 가라앉히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를 짓씹듯 나온 음성에는 화가 가득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유난이야.”

그녀에게 옷을 덮어 주었으나 희수는 충격이 가득한 얼굴로 핸드폰을 닦아 내기 바빴다. 물가에 가까이 내버려 두어서인지 푹 젖어 있었다. 옆에서 물이 튄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물건은 종이도 아니고, 젖어도 모양이 변할 만한 물건이 아니지 않은가.

“정말 알 수가 없다.”

칼릭스는 경악한 희수를 보며 낮게 혀를 찼다. 그러자 그를 탓하듯 원망스런 시선이 내리꽂혔다.

“뭐야. 왜…… 왜 울지?”

그녀가 가슴을 들썩이며 울먹이는 걸 보고 당황한 그가 얼굴로 손을 뻗었다. 희수는 단칼에 칼릭스의 손을 내쳤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그에게 수없이 들은 말을 빽 소리쳤다.

“꺼져!”

그 말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깜짝 놀란 칼릭스는 그녀에게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눈물도 닦아 주지 못하고 젖은 옷도 벗겨 주지 못했다.

희수는 그에게서 완전히 뒤돌아 앉아서 침울하게 훌쩍였다.

* * *

그녀는 한참을 훌쩍이다 픽 쓰러졌다. 밤새도록 열이 펄펄 끓었고, 칼릭스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장소를 옮겼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수도 도시, 리옹의 신전이었다.

“짐작하신 대로 그저 평범한 감기입니다. 푹 쉬고 일어나면 나아 있을 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고맙소.”

의사는 여자가 곤히 잠든 침실을 나서다 문득 멈춰 섰다. 가슴에 성호를 그리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클로비스 경.”

“…….”

의사는 칼릭스가 어릴 때부터 봐 온 이였다. 그를 따라서 함께 성호를 긋고 답인사를 해야 했으나 칼릭스는 짧은 묵례로 이를 대신했다. 다행히 의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유망한 젊은 성기사가 어떠한 연유로 신전을 떠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격스런 눈으로 지긋이 칼릭스를 응시하던 의사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럼 저는 이만.”

달칵.

칼릭스는 자신이 자랐던 신전의 문양이 새긴 닫힌 문을 보자 만감이 교차했다.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의사에게 받은 소량의 약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 침대에 잠든 희수를 내려다보았다.

한시라도 눈을 떼었다간 정말 큰일 날 여자다.

내가 없이는, 이곳에서 절대로 살아남을 수가 없는 여자.

“걸핏하면 이렇게 픽픽 쓰러지냐.”

이렇게 빨리 대주교가 있는 신전에 올 계획은 없었다. 우선 동료들과 의논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희수의 몸이 불덩이 같았다. 그녀를 데리고 도시에서 신분을 감춘 채로 의사를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이 신전에는 뛰어난 의사와 약사들이 있고, 무엇보다 그는 신전의 영웅이었다. 어떤 걸 요청해도 신전은 받아 주었다.

그가 데려온 여자가 이방인인 것 또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들은 자신이 여자를 데려왔으니 당연히 깊은 사이라고 생각했다.

칼릭스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침실을 간곡하게 권유받았지만 거절하고 여자와 함께 있기를 택했다.

벌써 두 번째.

혼자일 땐 절대로 다시 신전에 돌아오지 않으려 했고, 또 그 각오를 지켜 왔다. 그런데 여자 때문에 아무 계획도 없이 신전으로 돌아오게 된 게 벌써 두 번째다.

여자가 도시 밖에서 버텨 내지 못할 때면 그는 속수무책으로 돌아가길 택하게 된다. 그녀와 관련된 일엔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아니, 사실은 고민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지난 결심이, 이 여자로 인해 얼마나 달라졌는가.

문득 놀라웠다.

충동적인 동정심에 살려 주었던 여자.

그 여자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것만 같아서.

* * *

그는 의자를 침대 가깝게 끌어당겨 앉아 그녀가 덮은 이불을 목 끝까지 당겨 주었다.

“약아빠졌으면서 왜 이렇게 비실대는 거야.”

마음대로 미워하지도 못하게.

희수의 옷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전부 벗기고 보송한 옷으로 손수 갈아입혀 주었다.

그의 생각으로, 옷까지 갈아입혀 주는 사이라면 매일 밤 같은 이불을 덮고 자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였다. 칼릭스는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여자의 보드란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각을 즐기던 그는 이내 헛기침을 했다.

“흠.”

아픈 여자를 상대로 엄한 기분이 드는 건 별로다. 그것도 신전에서. 칼릭스는 잠든 그녀를 두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침실을 나서자 복도를 지키던 기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묵례했다.

“신의 영광을.”

“신의 영광을.”

성기사들은 나이와 연륜에 관계없이 신전에서 수련한 기간으로 상하관계를 따졌다. 칼릭스는 겨우 20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연차로는 15년이 되어 교황 친위대에 발탁된 최연소 기사였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신전에 들어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름난 가문의 자제들은 드물었다. 칼릭스는 그래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복도를 걷던 그가 우뚝 멈춰 기사들 중 한 명에게 말을 걸었다.

“프란시스를 만나고 싶소.”

“……대주교님 말입니까?”

기사는 감히 대주교의 존함을 부르는 그에게 짐짓 놀란 듯했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클로비스 경이 신전을 떠났다는 건 도시의 성문을 지키는 개도 아는 일이었다.

“그분께서는 지금 예배당에 계실 겁니다.”

전 교황이 죽음을 맞았던 곳. 칼릭스가 전 교황을 시해한 바로 그곳이었다.

칼릭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끊일 날이 없었다.

‘내가 왔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프란시스 대주교는 일부러 자신을 예배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짓궂은 성미는 여전하군.’

칼릭스는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곧 눈에 퍽 익숙한 예배당의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융으로 만들어진 신전의 붉은 기가 걸려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앞에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차마 그 문을 열고, 그 장소에 다시 발을 디딜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가 왜 이곳에 다시 와 있는가.’

칼릭스는 눈을 꾹 내리감았다. 전 교황의 광기 어린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요세프.’

전 교황은 음흉한 사람이었다. 신전의 예배당은 항상 많은 촛불이 켜져 있어 밝았는데, 그는 항상 모든 초의 불을 끄고 어둡게 꾸며 놓기를 좋아했다.

신전의 주교들은 신전에 한평생 헌신하던 그를 귀히 여겨 교황으로 선출했다. 충성스런 신의 종으로 희생하며 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찬양하던 건 신이 아니었다. 요세프의 믿음은 신을 향한 게 아니었다.

‘그가 믿었던 건 이 신전이었지.’

요세프는 신전의 부흥을 원했다. 신전에 바칠 기부금을 더 많이 얻어 내려고 하지 말아야 할 짓까지 해 버렸다.

어느 날부터 세상에는 매녹이 나타나는 수가 현저하게 늘었다. 도시 밖에서는 이방인들이 늘어갔다. 이방인들에게 이곳은 삶의 터전이 아니었다. 그들에겐 지켜야 할 법도, 도리도, 도덕도 없었다.

다크 홀이 열리면 양동이에서 물이 쏟아지듯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죽은 이들은 매녹이 되었고 산 사람들은 범죄자가 되었다.

그렇게 매녹을 불러내고,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그 매녹을 처리하는 일을 신전이 도맡았다. 덕분에 각 도시의 시장들은 전보다 5배는 많은 기부금을 내야 했다.

신전은 유례없이 부유해졌다. 신전은 역사의 황금기에 다다랐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신전을 찾았고 돈을 냈다. 신자가 아닌 이들은 앞다투어 신자가 되기를 청했다.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전을 향해 박수와 경외를 보냈다.

요세프는 자기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았다. 그가 소원하는 건 단 하나, ‘신전의 부흥’이었다.

가장 먼저 교황의 비밀을 알아챈 건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친위대였다.

허나 성기사들은 도덕적, 교리적 딜레마에 빠져 요세프를 멈춰 세울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이 틀렸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그가 이뤄 놓은 업적은 일례 없이 훌륭했다.

성기사들이 우물쭈물 방관하자 요세프는 그들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다. 갈수록 대담해져서 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다크 홀을 열었다면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씩 다크 홀을 열어 매녹을 일부러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기까지 했다.

교황 친위대 단장이었던 이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종국에는 자살했다. 지도자를 잃자 친위대는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들은 죽는 날까지 교황을 보호하기로 신께 맹세한 맹약을 깨뜨릴 수 없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기사의 명예가 달린 일이었다.

결국 움직인 건 칼릭스였다. 다크 홀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을 무감한 눈으로 주시하던 교황의 심장을 찔렀다.

머리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 뛰는 심장이 칼릭스를 움직였다. 그의 양심이었다. 친위대는 죽은 요세프를 보고 경악하면서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아무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아.”

칼릭스는 예배당의 문고리를 잡은 채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날의 일을 후회하진 않는다.

자랑스럽지도 않다. 하지만…… 이제는.

‘이미 지나간 일.’

그에게는 그려 나가야 할 앞날이 있었다. 여자를 책임지기 위해서 그녀와의 앞날을 먼저 고민해야 했다.

칼릭스는 예배당 문을 열어젖혔다. 자신의 심장이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를 움직이는 건 교황 친위대로서의 명예나 신을 향한 충성심이 아니었다.

예전과 달리 안에서는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대주교는 조용히 앉아 명상하듯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프란시스!”

갈색머리의 평범하게 생긴 청년. 그러나 그가 곧 교황이 될 대주교였다.

프란시스는 급히 기도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심한 얼굴이 한숨을 토해 내듯 칼릭스를 맞이했다.

“클로비스 경.”

“경칭을 하다니 민망한데. 더 이상 기사도 아닌 주제에 감히 네 이름을 불렀는데 말이지.”

프란시스는 성호를 긋고 그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어린 사제일 때부터 지금 대주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는 한결같았다.

“클로비스 경은 언제나 이 신전의 기사입니다. 제게는 늘 그렇습니다.”

“…….”

칼릭스는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그래, 이 신전.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떠났지만…… 지금 이렇게 돌아왔다. 프란시스를 마주하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말을 잘하는 건 여전해.”

프란시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칼릭스는 한결 부담을 덜었다. 프란시스는 오래전부터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가 손짓하는 곳에 앉아, 그가 따라 주는 향긋한 차를 마시고 있으니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프란시스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신전으로 돌아와 자신의 세력이 되어 달라는 말도, 친위대의 마음을 돌려 신전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당장 다음 달에 리옹의 시의회에서 재판이 있을 겁니다. 시장은 전 교황의 의문사를 밝히겠다고 했지만 누구나 알듯이 그저 명목일 뿐이지요. 주교회에 찾아와서는 기부금과 교황 선출권에 대해서만 한참을 말하고 갔답니다.”

결국은 세력 싸움이었다. 지긋지긋한 지배자들의 권력 분쟁을 생생하게 지켜봐 왔던 칼릭스는 쓴웃음을 내보였다.

전 교황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대륙, 갈리아 켈티카에는 여러 세력들이 있었다. 왕이나 황제는 없지만 각 도시의 시장들이 그 역할을 도맡았다. 신전은 시의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쟁관계였다. 그 아래 이름난 귀족가문과 용병단이 있었다.

전 교황은 시의회와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하는 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신을 모시는 저희들은 속세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는 우월주의를 갖고 있었다.

결국 그는 마땅히 자신의 것이어야 할 권력의 정점을 되찾고자 매녹을 불러내고, 처단했다. 파란 불꽃은 속히 성력이라 일컬어지는데, 신전에서는 파란 불꽃을 터뜨리는 용병들을 사 와서 기사로 신분을 세탁해 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용병출신의 성기사들은 유부남도 흔하고 방탕하게 지내기도 했다. 다만 그들은 도시 밖을 다니기 때문에 시민들에겐 알려질 일이 없었다. 성기사들은 그들을 경멸했다. 그들과 섞이길 원하지 않아서 대부분은 신전을 지키고, 도시 밖을 다니는 건 전부 용병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칼릭스는 밖을 떠돌기를 택했다. 자신만의 속죄 방법이었다. 더 이상 신전의 영광스런 성기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는 재판을 받아들일 겁니다.”

“우리?”

어느새 프란시스는 웃음기를 지웠다. 엄숙한 운명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드리웠다.

“클로비스 경. 이건 당신의 재판이 아닙니다. 이 신전을 향해서…… 신께서 우리 모두에게 내리시는 재판입니다.”

칼릭스는 그의 의도를 의심할 수 없었다. 또렷한 갈색 눈동자에는 어떠한 욕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본 것을 못 본 척하고,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이 신전의 모두가 전 교황이 벌인 사특한 짓거리를 묵인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신전을 위한 길이라 위안하면서요.”

프란시스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 역시 공범자였다. 이 신전의 모두가 죄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젊은 기사는 아니다.

“클로비스 경은 제가 아는 가장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난 그를 5년이나 지켜보기만 했으니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그리고 가장 책임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경을 욕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저는 모든 진실을 전부 다 밝힐 겁니다. 갈리아 켈티카의 시민 모두의 앞에서요. 시민의 한 명도 빠짐없이 이 신전의 부패한 실상을 알게 할 겁니다. 그리고 사죄할 겁니다.”

“미쳤군.”

“이 신전의 위대한 기사 한 명이 있었기에 지금이라도 죄를 고백하고 갈리아 켈티카의 평화를 지켜 냈노라 그렇게 말할 겁니다.”

“주교회는 이 계획을 알고 있나?”

“물론이지요.”

“그런데도 널 교황으로 선출하려 한다고? 정말 그랬다간 신전은 망할 거야.”

“그래서 당신이 이 신전에 꼭 필요합니다, 클로비스 경.”

“미안하지만 다시 신전의 기사가 될 생각은 없어.”

“어허, 신전을 쫄딱 망하게 한다면 신께서도 노여워하실 텐데요.”

칼릭스의 어이없는 얼굴을 보고 프란시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본심을 드러내니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했다. 칼릭스 클로비스는 그의 가문을 빼놔도 놓칠 수 없는 패였다. 프란시스는 말을 돌렸다.

“그보다 경의 모친께서는 그분과의 일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칼릭스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분’이 누굴 말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평생 수절하고 살겠다는 성기사의 맹세 덕분에 가문의 후계자 자리는 마음 놓고 계셨을 텐데. 깜짝 놀라시겠군요.”

프란시스의 말투는 가벼웠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들은 무엇 하나 가벼운 게 없었다.

“죽은 남편의 외아들이 결혼을 하겠다니.”

“……결혼한다는 말은 아직 한 적 없는데.”

“그럼 안 하실 겁니까?”

“…….”

“아마 모친께서는 경이 언제 가문으로 돌아와 후계 자리를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칠까 걱정하며 떨고 계실 겁니다.”

“프란시스.”

“하하, 제가 짓궂었나요? 경께서 모친과 그리 반가운 사이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4년 전, 부친의 작고 이후 그는 가문을 찾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클로비스 경으로 불리었다. 아마 죽는 날까지도 그럴 것이다.

“신전의 맹세 또한 없앨 겁니다. 그러면 클로비스 경은 유부남이 되어도 다시 신전으로 돌아오실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미쳤군, 프란시스. 반발이 엄청날 거야.”

“기사와 사제들 또한 시민입니다. 그들이 평생 미혼으로 남을 이유가 있을까요? 더 이상 매녹은 존재하지 않을 텐데요.”

칼릭스는 미묘하게 표정을 굳혔다. 프란시스가 설마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무거운 심정으로 고백했다.

“매녹은 완전히 없어질 수 없어. 다크 홀은 고의가 아니라도 생겨나지. 그것까지 막진 못해.”

“예. 하지만 무척 적은 수가 아닙니까? 야생에서 맹수를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가 되면 시민들은 매녹보다 도시 안의 범죄자를 조심해야 할 겁니다.”

칼릭스는 혀를 내둘렀다.

“주교회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널 교황으로 선출하려는 건지…….”

프란시스는 피식 웃었다. 지금 주교회에선 아무도 교황으로 선출되길 원하지 않았다. 성난 시민들의 화살받이가 되고 싶은 이가 누가 있을까. 까딱 잘못하면 재판에선 교황 대리를 사형시킬 수도 있었다.

“클로비스 경, 부인이 되실 분의 입장도 생각해 보세요. 그분을 지키려면 결혼식을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신전에서 하세요. 제가 증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첫날밤은 아직 치르지 않았다고 믿겠습니다.”

도시마다 법이 다르지만 리옹은 결혼한 여자는 남자의 가족이 되므로 그녀는 더 이상 신분 미상의 이방인이 아니게 된다. 재판은 5번이 치러지니 적어도 1년. 그동안 여자의 신원을 확실히 해 주려면 결혼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프란시스는 쐐기를 박았다.

“그분은 이방인이시지요. 신전의 비호 없이 이 도시에서 살 수 없습니다.”

칼릭스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프란시스의 말이 묘하게 협박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건 온전히 칼릭스와 그의 부인을 위해서였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미혼의 남녀가 한 침실을 쓰는 게 알려졌다간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게 됩니다. 더군다나 경께서 그리하시면 안 되지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는 여전히 클로비스 가문의 일원이다.

“결코 한순간의 쉬운 감정이 아닐 겁니다. 무척 소중한 사람이겠지요. 그분을 위해서라도…….”

“소중한지 소중하지 않은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그저 지나가는 여자일 수도 있는데.”

“푸훗.”

프란시스는 실례인 걸 알면서도 면전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클로비스 경. 본인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하긴, 연배가 아직 어리시지요.”

“너…….”

“경께서는 한번 마음을 준 것은 절대로 배신하지 못하십니다. 절대로요.”

칼릭스는 휙 고개를 돌렸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 짜증 났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다 비슷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지켜 나가는 건 결국 책임감입니다.”

“신전에서 나고 자란 주제에 남녀관계에 통달한 척하지 마.”

프란시스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사랑은 남녀관계에서만 알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단지 대상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릴 뿐.

“어쨌든 네 말대로 결혼식을 해야겠다. 하지만 그 전에…… 내 직책을 회복시켜 줘.”

프란시스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다시 신전의 기사가 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안 하신다면서 왜 갑자기 마음을…….”

“신전에서 힘을 써도 재수 없으면 재판에서 사형을 당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럼 내 부인은 연금을 받을 수 있겠지. 유산은 물론이고.”

“…….”

신전은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칼릭스는 그 재판에서 자신이 사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여자에게 남겨 줄 유산 때문에 다시 기사가 되겠다니.’

굉장히 현실적이고 슬픈 선택이었다. 그건 웃지 못할 희소식이라 프란시스는 차마 뭐라고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숨은 끔찍한 순애보가 엿보였다.

“뭐, 날 그렇게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지만…….”

칼릭스는 복잡한 얼굴로 먼 곳을 응시했다. 이내 상념을 떨쳐 낸 그는 상황을 완전히 정리했다.

“내가 좋아하니까 상관없어.”

프란시스는 새삼스레 빤히 그를 응시했다.

그리 깊은 사랑이었나. 그래, 사랑은 인간을 뒤흔든다. 그건 사람을 이롭게 만드는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나.

보상받지 못하는 깊은 사랑은 독이 될 수 있음을.

칼릭스는 뛰어난 기사이자 양심적이고 책임감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아직 어린 청년이었다.

프란시스는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조심하십시오, 클로비스 경.”

곧 만찬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는 칼릭스와의 ‘면담’을 끝내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툰 사랑은 상처를 남기고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뼈아픈 충고였다.

하지만 칼릭스는 귀담아 듣지 못했다. 그는 이미 거센 불길 한가운데 있었다. 그에겐 여자밖에 보이지 않아서 미처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예식을 잡아 줘, 프란시스.”

* * *

붉은 계열의 긴 옷을 입은 남자는 희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열을 쟀다. 의식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입안을 살피고, 칼릭스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글쎄요. 열은 없는데……. 환자가 피곤함을 느끼는 건 손발이 차가운 걸로 보아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그런지도 모릅니다. 매일 누워만 있으니 더 움직이기 힘들어지고, 몸이 피곤하게 느껴질 겁니다.”

“악순환이군.”

“몸을 덥혀 주고 팔, 다리를 주물러 주면 좀 나아질 겁니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운동이지요.”

“오늘도 고맙소.”

그는 약 같은 것을 놔두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 희수는 침실을 나서는 낯선 이의 뒷모습을 힐끔 훔쳐보곤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도 의사가 다녀갔다.

희수는 가벼운 감기몸살이었다. 그 추위에 옷을 입은 채로 찬물에 푹 빠졌다가 떨었으니 당연했다.

칼릭스는 맨몸으로 얼음장 같은 물속에서 수영을 하고도 밤새도록 쌩쌩했지만 애초에 그 남자는 아무도 비교할 수가 없는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긴 또 어딜까.’

식사와 물을 챙겨 주러 이 침실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빨간색 십(十)자 모양이 새겨진 모자에 흰색 정갈한 긴 옷을 입고 있었다.

혹시 병원이 아닐까 했지만 병자로 보이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문밖을 힐끔 내다보면 무장한 남자들이 복도 곳곳에 보였고, 마주칠 때마다 서로를 향해 경건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내 인테리어가 무척이나 성스러웠다.

‘칼릭스는 왜 날 여기로 데려왔지?’

그가 입는 옷은 이곳 사람들이 입는 붉은색 계열의 옷이 아니었다. 행동도 자유로워 보였고, 무엇보다 그에겐 좋은 대접을 받는 사람 특유의 당당함이 느껴졌다.

‘돈을 많이 냈나 봐.’

이곳의 손님인가 보다.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라 희수는 금세 그와 이곳의 관계에 신경을 꺼 버렸다.

“열은 없다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비실거리는 건지.”

칼릭스는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리곤 희수의 발치에 앉았다. 다리 부근의 매트리스가 푹 가라앉는 걸 느끼고 희수는 다시 잠에 빠진 시늉을 했다.

따뜻한 곳에서, 안락한 침대에 누워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으니 다행히 몸은 금방 나았다. 이틀 앓아누웠다가 다음 날 아침부터 멀쩡해진 것이다.

하지만 희수는 여전히 시름시름 아픈 척을 했다. 쌩쌩한 걸 보면 그가 또다시 자신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좀비 소탕을 하러 갈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핸드폰 사건 때문에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간신히 불꽃을 틔운 희망을 꺼트린 것만 같았다. 두 대의 핸드폰 중 하나는 침수돼서 아예 켜지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 일이겠지만 고의가 아니라도 원망스러웠다.

“하루 종일 누워 있으려고만 하고.”

그가 희수의 양옆을 짚고 상체를 가까이 했다. 특유의 향기가 콧속으로 훅 끼쳐 왔다. 자꾸만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살피는 게, 혹시 잠든 척을 하는 걸 들켰나 싶어 지레 놀란 희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슬쩍 몸을 돌려 누웠다.

“으음…….”

피식 웃은 그가 두 번째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슬슬 쓰다듬었다.

“병든 참새 같아. 축 늘어져서 눈도 뜨지 못하는 게 꼭…… 아픈 참새 같다고, 너. 알아?”

속삭이는 나긋한 저음이 듣기 좋았다. 뭐라는지 몰라도 그저 의사에게 하던 무뚝뚝한 말투와 자신에게 하는 말투가 많이 다르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내 창가에 참새가 둥지를 틀었어. 쫓아 버린다는 게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어느새 새끼가 알을 깨고 나왔더라고. 엄청 징그러웠어. 그래서 못 쫓아냈지.”

귀가 간질간질하다.

그가 비벼대는 건 귀가 아니라 콧등이건만…….

“근데 보다 보니까 점점 귀여워지는 거야. 내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게.”

칼릭스는 내려앉은 속눈썹을 조심스레 몇 번 쓸었다. 손이 가는 대로. 여자를 깨우기 위한 손짓은 아니었다.

“어미가 주는 먹이보다 내가 주는 밀알을 더 잘 먹었어. 정말 귀여웠지. 그 새끼 참새들 때문에 매일 저녁 훈련을 빼먹고 싶을 정도로…… 빨리 내 침실로 돌아가고 싶었어.”

그녀의 눈가가 움찔대는 걸 보고 칼릭스는 더 작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하루는 내 동료 녀석한테 큰맘 먹고 참새를 보여 줬는데, 흉하게 생겼다고 욕을 하기에 다음 날 대련을 신청해서 흠씬 때려 줬어.”

동그란 이마 위. 잔머리가 이리저리 구겨진 것을 바르게 넘겨 주고, 구불구불한 귓바퀴 위를 문지른다. 그에게도 똑같이 있는 것인데 그녀의 몸에 있는 건 이상하게 신기해 보인다.

“좀 일어나 봐. 언제까지 혼자 떠들게 할 거야.”

희수가 입을 꾹 다물고 절대로 눈을 뜨지 않을 기세로 있자 그는 마침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해.”

이대로 일을 보러 가나 했는데, 그의 맨손이 불쑥 이불을 들췄다. 갑작스레 자신의 종아리를 붙든 뜨거운 체온에 희수는 흡, 숨을 집어삼켰다.

“혈액순환이 안 된다니. 매일 주물러 주는데 네 몸은 대체 왜 그러냐.”

그의 손이 무릎 뒤의 연한 살을 스칠 땐 오금이 저릿했다. 희수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바짝 긴장된 그녀의 두 다리를 그는 힘도 들이지 않고 제 무릎 위로 끌어왔다.

칼릭스는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부드럽게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꼭 폭신한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느낌이라 무척 즐거웠다.

“계속 자는 척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해.”

허나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얄궂은 감촉과는 달리 그의 속내는 내심 씁쓸했다.

“……노려보는 것보단 낫긴 하지.”

가끔 깨어 있을 땐 그녀는 날 선 시선을 던졌다. 아니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거나.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 때문에 그녀가 감기에 걸린 것이라 칼릭스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뺨이라도 한 대 때리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맞아 줄 용의도 있다. 저 손으로 맞는다고 뭐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는 제 한 뼘에도 채 미치지 않는 희수의 맨발을 부지런히 주물렀다. 그러다 발바닥에 먼지가 묻은 걸 알고 젖은 수건으로 섬세하게 닦아 주기 시작했다.

“으응.”

희수가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척 뒤척거리며 발을 빼냈다.

저 남자는 더럽다는 자각도 없는지 틈만 나면 남의 발을 주물러 대는 건 물론, 발가락 사이까지 닦으려 든다. 원래 자신을 손도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지만 이건 아무리 겪어도 불편했다.

이상한 기분이다.

정말 이런 것까지 해 주고 싶은 걸까.

왜 더럽거나 불편하거나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느 늦은 밤 그가 자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저 몰래, 불편하지 않도록 행동했지만 희수는 똑똑히 기억했다.

매일 밤 자신의 옆에서 잠드는 유린하기 쉬운 여자를, 그는 제멋대로 대하지 않는다.

자신을 이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어린 희수는 엄마와 할머니에겐 화풀이의 대상이었고, 어른 희수는 사회에서 갑의 분풀이 대상이었다. 이곳에선 말할 것도 없었다.

복잡한 생각에 어색하게 몸을 웅크리자 그가 욕실을 눈짓하며 물었다.

“씻을래?”

말을 알아들은 희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에게 받아 든 옷가지를 챙겨 들고 욕실로 향하던 중 칼릭스를 흘긋 돌아보았다.

“왜?”

미운 건 미운 거지만…… 그가 자신에게 해 주는 것들이 평범한 수준보다도 훨씬 더 많지 않은가.

“어…… 지금. 지금 뭘 하는 건지…….”

희수는 조금 충동적으로 남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순순히 욕실까지 따라 들어왔다.

“너 아직…… 아픈 거 아닌가? 이래도 되는 건지…….”

뭐라고 떠들긴 했지만 옷을 벗기는 손길에도 그는 순순했다. 희수는 마치 신처럼 보이는 그의 육체에 이번엔 제가 먼저 손을 뻗었다.

“아…….”

칼릭스는 이후로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 * *

평소와 달리 아침에 눈을 뜨니 혼자였다. 한껏 자신을 지분거리고 있을 그가 옆자리에 없었다.

희수는 기회다 싶어 며칠간 물기를 말려 놓았던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그나마 비밀번호를 아는 핸드폰이 멀쩡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한껏 집중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오.”

전원이 들어왔다! 게다가……!

항상 마지막 한 칸이었던 통화가능 표시가 3칸이나 된다. 황무지와 숲에선 안 되더니, 어째서 여기선 이렇게 신호가 빵빵 터지는 걸까?

희수는 놀랄 겨를도 없이 통화 목록에서 자신의 소식을 전해 줄 만한 번호를 찾았다. 그런데…….

‘영어가 아니잖아?’

아무래도 핸드폰의 주인인 남자가 유럽인이었나 보다. 알파벳은 같지만 단어가 완전히 달랐다. 배경화면 속 남자 얼굴을 떠올리곤 얼핏 프랑스어나 독일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냥 아무 데나 다 걸어 볼까?’

안타깝게도 희수는 외우고 있는 번호가 하나도 없었다. 엄마는 최근에 번호를 바꾸었고, 친구들은 핸드폰에 저장이 되어 있으니 번호를 외울 필요가 없었다.

희수는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 중에 가장 긴 것을 골라 통화 버튼을 눌렀다.

Rrrrrrrrrrrr.

신호음이 간다. 희수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게 정말 가능이나 한 일인가? 희수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음성을 믿을 수가 없었다.

[Bonjour, Cafe Les Deux Magots. C'est angela parler. (안녕하세요, 카페 레뒤마고의 안젤라입니다.)]

된다. 통화가 된다! 게다가 봉주르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프랑스인인 듯했다.

[Allo? (여보세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희수는 얼른 대꾸했다.

“Hello, Excuse me. Could you please help me……. (저기요, 죄송하지만 저 좀 도와주실 수…….)”

[Je ne parle pas anglais. (난 영어 안 해요.)]

뚝. 전화가 끊겼다. 일방적으로.

뚜뚜뚜……. 희수는 통화종료 소리를 듣고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사람 말을 듣지도 않고 그렇게 뚝 끊어 버릴 수 있는 건지. 화가 났지만 핸드폰의 배터리가 거의 다 되었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래, 모르는 데다 통화를 하지 말고 차라리 메시지를 보내자. 낯선 곳에 왔는데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해 달라고 하는 거야. 그럼 대사관에서 집에 연락을 주지 않을까?’

희수는 핸드폰을 붙잡고 열심히 키보드를 눌렀다. 배터리가 꺼질락 말락 간당간당했다. 제발 이 메시지를 받는 사람들 중에 한 명만이라도 대사관에 연락을 해 준다면…….

희수는 완전히 집중한 나머지 누군가 침실에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칼릭스였다.

[갑자기 하늘에 나타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서 이름 모를 곳에 떨어졌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돌아갈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죽지 않았고, 이곳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자신의 여권번호와 인적정보까지 쓰고 메시지를 마무리했다.

[……please give this message to embassy of south korea.]

그리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데 동시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Tu t'es reveille. (깨어 있었네.)”

희수는 뚝 행동을 멈췄다. 단 한 번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칼릭스가 쓰는 언어의 발음이 방금 프랑스어와 얼핏 비슷하게 들렸다.

‘설마 같은 말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다. 프랑스 여자도 감시자와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욕만 비슷하다고 했다.

“이제 열도 없다는데 왜 아직도 맥을 못 추는 거지? 너 또 그걸 들여다보고 있었군.”

그녀가 주춤한 사이 칼릭스가 다가와 손에 있던 핸드폰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아직 메시지를 전송하지 못했는데! 희수는 놀라 손을 뻗었지만 그는 휙 몸을 돌렸다.

“칼릭스!”

“카를로스는 왜 너한테 이딴 장난감을 쥐여 주고 갔는지.”

희수가 있는 힘껏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돌려주지 않았다. 배터리가 꺼지기 전에 전송을 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을 담아 희수가 애타게 손을 뻗었다.

“핸드폰! 핸드폰!”

“…….”

칼릭스는 그녀의 절박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희수는 처음 보는 그의 무표정에 목뒤가 싸늘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이걸로 대체 뭘 하는데.”

그녀가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다 다시 손을 뻗어 그것을 가져가려 했다. 칼릭스는 싸늘한 얼굴로 그녀와 핸드폰을 번갈아 주시했다.

오직 이방인만 다룰 수 있는 것.

매사에 무심하던 그녀가 저렇게 애타게 만지작거리는 것.

자신이 가져가려고만 하면 기를 쓰고 빼앗아 드는 것.

희수가 했듯이 전면을 만지작거리자 어느 순간 화면을 빽빽하게 채웠던 의미 모를 글자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건 어떤 젊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하지만 희수와 같이 이방인인 게 분명한 젊은 남자였다. 그의 웃는 얼굴이 핸드폰의 전면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남자를 떠올리며, 마도구로 그의 환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의 웃는 얼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열기가 차올랐다. 그것을 고이고이 품에 갖고 다니던 희수의 간절한 얼굴이 겹쳐졌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심지어 자신과 잠자리를 하고 난 직후에도.

“하!”

칼릭스는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한순간 사납게 변한 매서운 눈빛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있었군.”

우드득. 그가 핸드폰의 양쪽을 붙잡고 구부러뜨렸다. 휘어지듯 하더니 유리가 산산조각 나고 화면이 완전히 반으로 접혔다.

핸드폰이 부러졌다.

“네가 감히…….”

희수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칼릭스의 분노한 눈빛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다. 그녀를 채찍질했던 감시자와 눈을 희번덕거리던 강도들이 빠르게 그녀의 눈앞을 스쳤다.

“나를…… 바람피운 상대로 만들어?”

그동안 저 남자가 얼마나 잘해 주었던가. 황무지에서 만났던 수많은 더러운 인간들과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희수는 그가 갑자기 왜 화가 난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가 났다’는 표현도 모자라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을 태워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희수는 본능적으로 남은 핸드폰 하나를 뒤로 감췄다. 지금은 쓸모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어지는 것보단 나았다.

“흐읍!”

그 행동을 눈치챈 그가 거친 몸짓으로 희수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아 갔다.

우드득. 곧장 다른 핸드폰 하나도 똑같이 구부러뜨렸다. 배터리와 부속품 같은 것이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희수는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강제로 턱을 붙들려 칼릭스와 눈을 맞추었다.

“Salope.”

그 말이 결코 좋게 들리지 않았다. 희수는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을 곱씹었다. 살룹……? 몇 번 들어 본 단어지만 의미는 모른다.

사실은 정확한 사고가 힘들었다. 그의 손에 핸드폰이 부서지면서 그녀의 희망 역시 박살 났다. 칼릭스는 그녀의 소원을 전부 부질없는 일로 만들었다. 지금 희수의 눈앞에 그는 분노로 가득한 거대한 남자일 뿐이었다.

“네가 날……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만들었어.”

그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네가 날! 나를!”

목에 핏줄이 바짝 선 걸 보고 희수는 겁에 질린 개처럼 벌벌 떨었다. 그의 화를 도저히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카, 칼릭스.”

“닥쳐.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주춤주춤 뒤로 도망치던 그녀는 칼릭스에게 목이 붙들렸다.

“흡.”

다행히 그는 목을 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목을 졸라 죽일 것처럼 멀고 아득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너 같은 걸 살려 주는 게 아니었는데.”

희수는 핏줄이 선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수많은 좀비를 죽이고, 어떤 남자를 때렸던, 커다란 손을.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너 같은 걸, 너같이 부도덕하고 난잡한 계집을! 너 같은 창녀를!”

진심으로 그녀를 죽이고 싶으면서도 차마 이를 행하지 못하는 두 가지 대립된 감정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 갈등이 희수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져 덜컥 겁이 났다.

“난 하루도 이렇게 살지 않았어.”

칼릭스는 버석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불타는 장작 위에 맨몸으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창녀와 자고, 시민을 구타하고! 내 의지에서 벗어난 일을 숨 쉬듯이 하지 않았다고!”

“흐읍…….”

“그런데 이제는 간음까지 했어! 내가!”

어깨를 쥐고 흔드는 통에 희수의 온몸이 종이처럼 펄럭였다. 그의 손에 부서졌던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이러다 정말로 죽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졌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너무 비참한 죽음이 될 터였다.

불과 어젯밤까지도 그는 다정했다. 희수가 욕실에서 옷을 벗겨 줄 때 부끄러워 볼을 붉히던 그였다. 그 남자와 지금의 그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너를 만나기 전의 난 이렇지 않았어.”

“하아…… 하아…… 악!”

“지금은 쓰레기보다 더 진창이야.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그가 밀치듯이 놓아주자 그녀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무력한 모습이 칼릭스의 가슴속 어느 한 부분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곳이 쓰리고 아릿했다. 목이 시큰거리고 눈가가 죄어드는 것처럼 아팠다. 칼릭스는 이를 악물었다.

아니, 안 된다.

더 이상은 저 여자에게 놀아날 수 없다. 봐줄 수가 없다.

저 부정한 여자를…… 더는 곁에 둬선 안 된다.

칼릭스는 후처의 소생이었다. 그가 태어났으니 ‘후처’라고 칭할 뿐, 기실 그의 친모는 아비의 하룻밤 상대나 다름없었다.

낳아 준 친모를 미워하는 자식은 없다. 칼릭스는 단 한 번도 어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쌍하고 안된 운명이라 가엾게 여겼다.

하지만 아비는 아니었다.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하지만 칼릭스는 내심 그를 경멸했다.

정을 통한 여자를 두고, 멀쩡한 가정을 두고도 육욕에 눈이 멀어 도의를 버리고 계모의 믿음을 배신한 아비가 원망스러웠다.

칼릭스는 아비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아들이자, 성력을 다룰 줄 아는 유일한 후손이었다.

계모에게는 끔찍한 실망과 분노를 안겨 주는 존재였다. 계모는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사실과 자신의 아이들이 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만큼 칼릭스의 재능을 미워했다.

계모는 남편을 두 번 잃었다. 한 번은 칼릭스가 처음 저택을 방문했을 때, 한 번은 아비가 생을 달리했을 때. 어린 칼릭스는 자신을 바라보던 계모의 경악스런 눈빛에 수차례 영혼을 찢겼었다.

그는 아비가 미웠다. 친모의 유언에 따라서 미워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혼자 쓸쓸한 죽음을 맞은 친모와 친모만큼이나 불쌍한 처지인 계모를 생각하면 제 아비와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했다. 몸과 마음을 각각 다른 여자에게 두었던 아비가 끔찍하게 싫었다. 그렇게 태어난 자신 역시.

그래서 칼릭스는 신전에서 살게 된 자신의 운명이 차라리 낫다고 여겼다. 자신이 부정한 외도로 태어난 자식이기에.

성기사로서 깨끗하고 올곧은 삶을 사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 어떻게 태어났든, 적어도 자신의 삶이 떳떳하다는 자존심 하나만은 갖고 살았다.

가족도, 미련도 없는 삶에 오직 그것 하나만은 버릴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칼릭스는 클로비스 가문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그 가문은 제 것이 아니라 마땅히 계모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어린 나이의 자신을 신전에 맡기고 들여다보지 않은 계모 또한 미웠지만 남편을 빼앗겼으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여겨졌다.

지금 그를 강타한 배신감과 분노를 계모도 느꼈던 거라면 자신을 여태껏 살려 뒀다는 사실에 차라리 고마워해야 했다.

“널 책임질 수 없어. 더는.”

자신을 두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 해도 치가 떨렸겠지만 심지어 그보다 지독했다.

저 창녀는, 가슴에 사랑하는 이를 고이 모셔 둔 채 자신을 간음하는 상대로 만들었다.

* * *

희수는 그의 손에 붙들린 채 컴컴한 지하를 걸었다. 이곳에 동굴 같은 길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작금의 상황이 더 두려웠다.

칼릭스는 오는 내내 마주친 사람을 몽땅 무시하고 앞만 보며 걸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지금 당장 어떤 일을 반드시 행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였다. 자신에게 이만큼 화가 난 그가 대체 어떤 일을 벌이려는 건지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팔뚝이 꽉 잡힌 채 빠른 속도로 걷다 보니 넘어지길 부지기수. 하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마치 도살장에 끌고 가는 소처럼 무작정 그녀를 끌고 갔다. 다치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다.

자신을 그렇게나 소중히 여겨 주던 그 남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어떤 오해가 있는 듯했으나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풀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미치도록 답답했다.

자신과 이 남자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리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그녀가 직감한 대로 그것이 둘이 함께하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이유였다.

한참을 걷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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