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애지중지하는 여자
* * *
희수는 악몽에 시달렸다. 의자에 묶여 있던 그때를 꿈으로 꾼 것이다. 온몸이 묶인 채, 겨우 숨만 쉴 수 있어 쌕쌕거리다 간신히 눈을 번쩍 떴다.
“히익.”
다행히 이곳은 그 오두막이 아니었다. 고급 침실. 칼릭스의 손에 붙들려 들어온 곳이었다.
그런데 왜 그따위 꿈을 꾸었는가 하니 그가 자신을 결박하듯 끌어안고 있었다. 모로 누운 희수의 목 뒤로 손을 넣어 반대쪽 어깨를 끌어안고, 다른 손으론 뱀처럼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그의 다리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뭐야.’
이 남자는 이렇게 짙은 스킨십은 하지 않는데…… 게다가 엉덩이에는 발기한 그의 물건이 느껴졌다.
희수는 어젯밤을 떠올리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구, 아이구…….’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마치 첫 경험을 했던 그때처럼 아랫배도 저릿저릿하고 특히 그를 받아들였던 그곳이 말도 못하게 욱신거렸다. 크기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저 남자의 위로 올라탔던 건 그저 순간의 객기였다.
‘정말 싫은 것도 아니었으면서.’
자꾸만 꺼져라, 저리 가라고 하니 반발 심리로 그를 올라타게 된 것이다.
그 물건은 사람의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었는데. 두껍기도 어지간한 데다 딱딱하기도 얼마나 딱딱한지 꼭 철봉 같았다. 내가 미쳤지. 그걸 그렇게 무식하게.
“아래층에서 식사를 가져왔는데.”
희수는 남자가 깨어 있다는 걸 알고 화들짝 놀랐다. 귀 뒤에서 울리는 저음엔 잠기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배고프지?”
배고파. 그 말을 하고 나면 꼭 음식을 주었기에 희수는 ‘배고파’를 알아들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자신을 감싼 남자의 단단한 결박이 풀렸다.
그녀를 일으켜 세운 그가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침대로 가져왔다. 새큼한 향이 나는 붉은색 수프, 양파 냄새가 나는 빵, 얇게 저며진 돼지고기, 몇 개의 간단한 과일, 신선한 푸른색 이파리가 들어간 샐러드. 입에 침이 확 고였다.
“천천히 먹어, 천천히.”
비린내 나는 고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향신료가 적절히 섞인 이름 모를 소스가 부어진 고기요리는 환상에 가까웠다.
칼릭스는 희수가 모든 접시를 싹싹 비울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쿨럭! 쿨럭!”
“매번 왜 그렇게 급하게 먹냐…….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가 물 잔을 들고 옆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 온 지 3개월 남짓. 그 시간 동안 온갖 개고생을 하며 먹은 음식은 거의 쓰레기에 가까웠다.
“곧 의사가 올 거야. 네 성대가 이상이 없는지 봐주고 몸의 상처도 치료해 주기로 했어.”
식사 트레이를 치운 그가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침대의 한쪽이 푹 눌리는 느낌과 동시에 희수는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나신인데, 이 남자 앞에서 어색하지가 않다는 게 신기했다.
“어디 한구석 성한 데가 없던데.”
칼릭스는 희수 발치의 이불을 들췄다. 그러더니 맨발을 거리낌 없이 제 무릎 위로 가져가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희수는 그의 친밀한 태도가 어리둥절했다. 원래 스킨십이 많기는 했지만 발 마사지까지 해 줄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누구한테 그렇게 얻어맞고 다닌 거야.”
목소리가 평소보다 배로 자상하다 싶었다. 자신을 보는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다. 눈이 반쯤 풀어져서는 입꼬리가 수줍게 위로 올라간 걸 보니 평소의 까칠한 표정과 천지차이였다.
“여기, 무릎도 까지고…… 칠칠맞게 넘어져서는.”
그의 손길이 발목과 종아리를 지나 무릎 안쪽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몸을 거침없이 끈덕지게 주무르는 그 의도에서 희수는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간밤의 섹스가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많이 좋아하긴 했지…….’
남자는 어느 순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어선 희수가 정신을 잃고 잠들 때까지도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뭘 하다가 채찍질까지 당했지? 등에 자국이 남았어.”
무릎 안쪽을 문지르던 손길은 슬금슬금 허벅지까지 올라갔다. 간지러워 슬쩍 몸을 피하자 강한 힘으로 그녀의 다리를 끌어당겼다.
“어딜.”
희수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침대에 누운 그녀의 위로 칼릭스가 올라탔다. 가깝게 다가와 이마와 볼, 콧잔등에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무척 다정했다.
“누가 때린 건진 몰라도 꽤 아팠을 것 같던데.”
희수는 짐짓 당황하고 말았다. 얼굴에 뽀뽀까지 할 만큼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는데 남자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아무래도 지난밤의 일들이 보통 즐거운 게 아니었나 보다.
“다른 남자들에겐 나한테 하듯이 하지 않았나? 내게 하듯이 했다면…… 아무도 널 때리지는 않았을 텐데.”
희수는 힐긋 창밖을 응시했다. 늦은 오후쯤 되어 보였다.
‘이 남자는 밖에 나갈 생각이 없나?’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 밖을 구경해 보고 싶은데 분위기로 봐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영원히 모르고 싶기도 하고.”
칼릭스는 그녀의 목덜미를 진득하게 빨아들였다. 분명히 자국이 남을 것이다. 그만큼 강한 압력이 느껴져 희수는 고개를 비틀어 그의 입술을 피했다.
“하아, 네가 잤던 다른 남자의 이름을 말하면 그놈을 찾아서 죽여 버릴지도 몰라.”
“으응.”
싫어. 이제 그만해. 그를 밀어내자 두 손이 잡혀 머리 위로 들렸다. 방금 전까지 다른 곳에 꽂혀 있던 그녀의 시선이 이제야 온전히 그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희수는 그의 표정이 기묘하게 비틀렸다는 걸 알아챘다. 미처 숨기지 못한 뾰족한 감정이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로 나한테 들키지 마. 나중에 내가 물어봐도 대답하지 말라고. 알았어?”
칼릭스는 그녀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너…… 어쩌면 지금처럼 말을 못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을 밀어내는 여자에게서 순순히 몸을 비켜섰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대를 내려갔다. 탁자에 놓인 그의 신분증명 펜던트와 다크 스톤에 관심을 두는 듯 그것을 손에 쥐고 살폈지만 이내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섰다. 그녀는 지금 바깥세상에 온 관심이 쏠려 있었다.
칼릭스는 가만히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날갯죽지가 선명한 여자의 등에는 검붉은 채찍 자국이 완연했다. 열심히 약을 발라 주고 있지만 자국이 사라질지는 알 수 없었다.
날카로운 흉터자국. 제 것도 아닌 상처에 도리어 그의 가슴이 뭐에 찔린 듯 욱신거렸다.
칼릭스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는 둘이 했던 행위를 떠올리며 동시에 여자를 생각했다. 그녀를 고민했다.
자신을 이런 짓까지 하게 만든 여자와, 그녀의 앞날에 대해서.
물론 여자와 교합한 건 절대로 후회되지 않았다. 평생 이 쾌감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원래 삶의 목적은 종족보전이 아닌가. 신께서 이 행위에 궁극의 쾌락을 하사하신 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저 여자를 향해서 널뛰는 제 가슴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붙어 앉아 헤실헤실 웃고 있으면 그는 눈앞에 무지개가 뜬 것처럼 세상이 환해 보였는데,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 때면 땅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여자를 보고 있으면 좋아죽겠다가도, 제가 아닌 누군가 그녀를 만졌었다 생각하면 세상이 뒤집어지듯 메스꺼웠다.
저 몸을 누군가 만졌다는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녀를 때리기까지 했을까. 한순간에 기분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녀의 등에 새겨진 붉은 실선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렸다.
그가 정신이 없거나 말거나 여자는 미동도 않고 밖을 내다보기 바빴다.
똑똑.
각자의 세계에 빠진 둘을 일깨운 건 노크소리였다. 칼릭스는 의사의 방문을 짐작하고 부랴부랴 여자에게 제 옷을 입혔다. 상의가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와 원피스처럼 보였다. 여자에게 입힐 만한 하의가 없어 얼른 침대에 앉히고 대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곳에 말을 못 하는 환자가 급히 저를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오시오.”
칼릭스는 문을 열어 주며 의사를 맞았다.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는 멀뚱하게 앉아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저 아가씨가 말을 못 한다는 겁니까?”
“그렇소.”
“젊은 아가씨인 듯한데 어쩌다가…….”
“그러니 어서 좀 봐주시오. 나도 답답해 미치겠으니까.”
의사는 여자의 곁에 다가가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허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녀가 반응할 리 없었다. 잔뜩 경계심 어린 눈으로 의사를 위아래로 훑기만 했다.
“귀도 안 들리는 겁니까?”
“아니, 들을 순 있는데…….”
여자가 소리를 내지 못해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다른 세계의 말을 지껄였다간 그녀가 이방인이란 사실을 단번에 들켰을 것이다.
‘그럼 화형을 당하거나 도시 밖으로 내쫓기겠지.’
의사는 왼쪽과 오른쪽 귀 옆을 번갈아 가며 박수를 치면서 여자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영문을 모르고 움찔거리며 칼릭스와 의사를 힐긋거렸다. 그러다 뭔가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란 얼굴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칼릭스의 허리를 붙들고 뒤로 숨었다.
“왜, 왜 그래?”
칼릭스는 간신히 그녀를 어르고 달래서 다시 의사의 앞으로 데려갔다. 싫다고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을 종국엔 힘으로 붙잡아 앉혀 놓았다. 그러면서 하는 수 없이 의사에게 변명을 했다.
“정신이 조금 온전치 못한 상태라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뿐이오.”
다행히 그 말을 믿는지,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입안을 살폈다.
“소리를 들을 수는 있는 듯하군요.”
혀와 목젖까지 살피고, 의사는 불시에 성대가 있는 부분을 꾹 눌렀다.
“악!”
그녀가 빽 소리를 지르자 의사는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결론을 내렸다.
“성대가 멀쩡합니다.”
그녀가 부리나케 일어나 칼릭스의 등을 퍽퍽 때렸다. 의사를 데려와 상태를 보인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녀가 말을 하게 되길 바랐다. 자신과 소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그는 여자를 저지하려고 몸을 바싹 끌어안았다. 그녀의 양팔을 잡고 제 허리 뒤로 두른 채 의사를 향해 눈짓했다.
“아, 저의 소견으로는…… 이분께서 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아니, 어쩌면 본인 의지가 아닐 수도 있지요.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이들은 종종 말을 잊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가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심각한 경우 아예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이분은 지금 소리를 내실 수 있는 걸로 보입니다.”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여자가 미약한 소리를 내는 경우가 있었다. 어젯밤에도 여자는 몇 번이나 신음을 내질렀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럼 말은 언제 할 수 있는 거지? 치료는?”
“흐음…….”
“여자를 낫게 할 방법이 없겠소?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신전에서 받던 만큼은 아니지만 그는 용병단에서 번 돈이 꽤 있었다. 용병단은 도시와 협력해서 용병들에게 돈을 지급했다. 도시 밖에서 매녹을 만나면 자신이 죽거나, 매녹을 죽여야만 했다. 그래서 용병들은 도시 밖에서 머무는 기간만큼 돈을 받는 것이다. 도시에선 기꺼이 이에 협력했다.
“여자가 말을 할 수 있게만 해 준다면 얼마를 요구하든지 기꺼이 지불하겠소. 얼마든지.”
“허허, 꽤나 혹하는 제안이긴 합니다만.”
다급한 칼릭스의 말에 의사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서며 안타깝게 고개를 내저었다.
“글쎄, 저 병엔 딱히 약이랄 게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심각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의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야 나을 병입니다. 그럼 차차 소리를 내는 데 익숙해지고, 언젠간 말을 하게 될 겁니다. 언젠가는요.”
칼릭스는 난감하게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심통이 잔뜩 나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보이는 건 정수리뿐이었지만 그에겐 여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편안하게 잘 지내다 보면 금방 나을 겁니다.”
* * *
결국 의사가 다녀갔는데도 별 소득이 없었다.
까진 피부에 바르는 연고를 사긴 했지만 칼릭스가 원하는 건 여자가 말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심 기대했는데 결론은 ‘언제 나을지 모른다’는 말뿐.
“마음의 안정?”
칼릭스는 연고를 그녀의 무릎에 발라 주다 번뜩 고개를 들어 여자를 응시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불퉁한 눈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입술만 우물거릴 뿐 도통 의사표현이 없었다. 전처럼 어떤 행동으로든 통할 의지를 보여 주면 좋으련만.
아니, 생각해 보니 전보다 훨씬 조용해졌다. 며칠간 인형처럼 창밖만 내다보는 게 전부이지 않은가. 표정변화도 거의 없었다. 예전엔 혼자 두고 어딜 가려고만 하면 울면서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더니. 지금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다.
칼릭스는 보름치 돈을 미리 지불했기에 도시 밖을 나가기 전까지 도시에서 할 일을 전부 하고 갈 생각이었다. 그가 반나절 이상 침실을 비워도 그녀는 얌전했다.
여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무심하게 변했는가. 밖에 다녀와 허물을 벗듯 급하게 겉옷을 내던지고 여자에게 다가서도 그녀의 표정은 시큰둥하거나 미운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이젠 내가 사라지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냐.”
그래, 그날부터다.
책임진다고 했더니 다 잡은 물고기 취급이다. 너무 간절하게 매달리는 것도 꼴 보기 싫지만 제가 밖에서 볼일을 보고 오든 침실을 비우든 여자가 마냥 덤덤한 꼴도 보기 싫었다.
이게 대체 무슨 심정인지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넌 왜 살이 안 찔까.”
벌써 이 침실에서 머무른 지 열흘이 넘었다. 여자는 침실에서 먹고 자고만 반복했는데도 도통 살이 붙지 않았다.
“잘 먹는 것 같은데 참 이상하네.”
희수가 알아들었다면 통곡할 일이었다.
칼릭스의 손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쭉 끌어당겼다.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여자는 손쉽게 하체가 당겨 가며 눕혀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흐트러지고, 양다리가 한쪽씩 그의 팔뚝에 걸쳤다.
둘은 이 침실에서 머문 열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관계를 가졌다.
“지금은 또 조용하고.”
씩 웃은 칼릭스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발목 부근을 깨물었다. 처음엔 부드러웠던 행위가 지금은 제법 과격해져 있었다.
“아침엔 그렇게 소리를 지르더니.”
칼릭스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을 들으려면 그녀를 괴롭혀야 했다. 온몸을 아플 만큼 주무르고 깨물면서 멍울을 만들고 자국을 냈다. 그러면 여자는 죽을 것처럼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덕분에 여자의 가슴이며 허벅지며 배와 목덜미, 팔뚝 안쪽까지 그의 잇자국이 없는 곳이 없었다.
칼릭스는 성교를 하는 동안에는 그녀와 말이 통하는 것 같았다. 덩그러니 눈만 깜빡이는 여자도 그의 손길엔 착실히 반응했다.
처음엔 어떻게 삽입하는지도 몰랐던 칼릭스는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늘어갔다. 어떻게 하면 여자가 좋아하는지만 살피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모든 애무는 철저하게 그녀의 반응을 따라갔다.
다만 아직 피임하는 방법을 몰라서 매번 질내 사정을 하고 있었다.
“아…… 네 안이 완전히…… 젖어 있어. 후우.”
여린 목선을 따라서 촉촉 입맞춤을 하며 그녀의 질구를 더듬었다. 아침의 정사로 내부가 녹진하게 풀려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몸 또한 이제는 긴 애무 없이도 쉽게 젖었다.
“으응.”
희수는 남자의 손이 닿을 때마다 아래에서 물이 줄줄 흐르는 것만 같았다. 민망할 정도라서 도저히 그를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날 보고 갔던 사람은 의사였어.’
아무래도 이 남자가 자신을 팔아넘기기 전에 몸 상태를 확인하려던 게 분명했다. 자신은 일단 말을 못 하니까.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알아보고 재미를 보다가 팔아 치우려 했겠지. 희수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 한구석이 차갑게 식었다.
천만다행으로 그는 자신과 보내는 밤이 꽤 마음에 든 듯했다. 여기저기 팔려 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남자가 낫다. 게다가 이 남자와의 정사가 영 싫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어디를 어떻게 만져야 제가 좋아하는지 기가막히게 잘 아는데다, 인내심이 엄청나서 애무가 무척 길고 집요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애무를 받다 보면 희수는 그보다 더 빨리, 더 자주 절정에 달했다.
“자주하면 좀 익숙해지나. 네 여기, 너무 좁아서 넣기만 해도 쌀 것 같아.”
거대하게 일어난 그의 분신이 질척하게 젖은 곳에 비벼졌다. 그러자 아랫배가 간질간질하고 다리가 배배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얼른 넣어 달라는 것처럼 하체를 흔들자 그가 윗머리를 꾹 밀어 넣었다.
“아응…….”
허리짓을 하며 커다란 귀두를 살살 박아 넣는다. 안을 꽉 메운 채로 칼릭스는 행동을 멈추고 입술이며 귓불 같은 곳에 키스했다.
“하아, 계속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어. 정말 좋아. 네 안이 정말…… 정말 좋아.”
그의 것을 제 안에 품고 있을 때 눈이 마주치면 칼릭스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러면 희수는 이 남자가 혹시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소리를 좀 내 봐.”
“악!”
천천히 앞머리까지 뒤로 물린 딱딱한 기둥이 한순간 그녀를 꿰뚫었다. 단번에 끝까지 들어찬 오싹한 감각에 희수는 몸서리를 쳤다.
“그래, 그렇게…… 소리를 질러.”
그는 희수의 반항하는 몸짓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다리를 어깨에 올리고 양손을 내리누른 채 방아질하기 시작했다. 희수는 꼼짝 못한 채 그의 허리놀림을 당해 내야 했다.
“아! 악! 아으……! 아!”
내부의 끝까지 닿은 물건을 쿵쿵 짓찧어 올 때면 희수는 비명을 지르듯 신음했다. 처음엔 넣기도 힘들었던 물건을 그가 이렇게 움직이니 희수는 죽을 것처럼 아프다가 종국에는 좋아서 울게 되었다.
“네가 우는 게 좋아. 웃는 건 더 좋고…….”
그가 대견하다는 듯이 볼에 입술을 쪽 맞췄다.
둘의 행위는 어느덧 매번 이렇게 되었다. 칼릭스는 처음엔 수줍어하더니 갈수록 대담해졌다. 이제는 낮이고 밤이고 시간도 가리지 않고 희수의 몸을 이리저리 굴려 대며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체위에 도전했다.
침대, 의자, 탁자, 창틀, 욕조, 문 앞. 누워서, 서서, 앉아서, 앉혀져서. 이 침실의 모든 장소가 그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는 체력도 만만치 않았다. 눈이 감길 때까지 섹스하다가 눈을 뜨면 또 한다. 한 번 사정하고도 오뚝이처럼 다시 발기해서, 또 눈이 마주치면 진득한 애무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눈만 마주치면 그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다.
예전에 사귀던 남자친구도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남자는 아마 없을 듯했다. 도통 피곤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대체 이 남자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그가 이끄는 장단에 맞추다 보면 밤이 아침이 되고, 낮이 밤이 되고. 앞서 지나간 열흘이 그런 식이었다.
“아응! 아! 아앗!”
아프기도 하고, 이 고통이 좋기도 했다. 싫지 않다. 너무 좋아서 문제다. 그가 한 번 사정할 때까지 희수는 몇 번이고 절정에 달했다. 계속된 자극에 쾌락은 느껴진다.
하지만 사람이 정도가 있어야지, 이 남자는 양심도 없이 희수가 거의 죽은 척을 해야 손에서 놓아주었다. 가뜩이나 그는 한 번 사정하기까지의 시간이 꽤 길었다.
그래서 희수는 남자가 사정하면 버릇처럼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렇게 되니 그는 매번 놓아주기 아쉬운 것처럼 사정을 늦추고 늦추다가 그녀가 지쳐 늘어질 때쯤이면 마지못해 사정했다.
말이 통하질 않으니 둘이 느는 건 눈치뿐이었다.
“후…… 젠장, 벌써 쌀 것 같아. 넌 왜 그렇게 빨리 가는 거야.”
게다가 그는 멀티플레이에 굉장히 능숙해졌다. 아래는 퍽퍽 쳐올리면서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젖꼭지를 잡아당기고 비벼대며 괴롭혔다. 가슴이 쓰라려 몸을 비틀면 자세를 바꿔 혀로 문질렀다.
희수가 지쳐 반응하지 못하면 기어코 엉덩이를 벌렸다가 좁혔다가 제 것처럼 주무르며 삽입을 깊게 해서 사람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벌써 세 번째 절정이었다. 희수는 그의 어깨에 올라간 다리를 웅크렸다. 몸이 오그라들듯 수축하며 그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으으응…….”
“그만? 그만해?”
말을 알아들은 희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싫은데.”
귓바퀴를 따라서 혀를 미끄러트리며 질내 깊은 곳을 향해 꾹 내리눌렀다. 그리고 원을 그리듯 크게 허리를 움직였다. 경부를 뭉근하게 비비는 예리한 감각에 희수는 눈물이 찔끔 났다.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빼자 곧장 골반을 잡아 내렸다.
“어딜.”
“으으…….”
“하아, 죽겠다. 정말…….”
그는 응징하듯 안을 푹푹 내리꽂았다. 도망가다 잡히면 그는 더 잔인하게 방아질을 했다. 그녀가 소리 지르고 경련하듯 몸을 떠는 걸 좋아했다.
사람을 이렇게 못살게 하니, 아무리 잘해 줘도 저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헤벌레 웃는 얼굴을 보면 그런 착각에 빠질까 말까 하다가도, 기어코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이고 몸부림치게 만드는 걸 보면 아무래도 착각이구나 싶었다.
“이대로 끝내기 싫어. 넌 또 누워서 잠만 잘 거 아냐.”
아직도 슬슬 허리짓을 해 대는 걸 보면 남자는 한참 먼 듯했다.
결국 희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칼릭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잽싸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희수는 이를 받아 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를 결박하던 손길이 거둬지고 희수는 그의 가슴이며 복근, 목덜미 같은 곳을 어루만졌다. 먼저 나서서 만져 주면 이 남자의 사정이 빨라진다.
“으윽…….”
짐승이 그르렁거리듯 목을 울리는 신음과 함께 남자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아래에서 철퍽이는 소리가 요란해서 귀를 막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아, 젠장……!”
둘은 동시에 끝에 다다랐다. 희수는 눈을 꼭 감고 있는 대로 허리를 뒤틀었다. 끝없는 낙하감이 찾아왔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이 순간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오직 이 남자와 저뿐이었다.
“하아! 으윽…….”
가슴과 가슴이 맞붙고,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귀 옆으로 들리며 그는 사정했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둘은 한참이나 숨만 내쉬었다.
“아, 진짜 좋았어……. 죽는 줄 알았다고.”
“으읍.”
희수는 그에게 안길 때마다 ‘뼈가 으스러진다’는 말을 실감했다. 사람을 얼마나 꽉 끌어안는지 정말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몸이 짓눌렸다.
“너도 느꼈어?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너도 좋아야 할 텐데.”
칼릭스는 연신 말을 걸었다. 하지만 희수는 한 번 하고 나면 기가 쭉 빨려서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수가 없었다. 기진맥진하여 숨만 쉬기도 바빴다.
“하루 종일 하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랑 그냥 이렇게, 이러고 있고 싶어. 빼기 싫다.”
이러니 누워서 먹고 자고 섹스만 하는데도 희수는 살이 찔 틈이 없었다. 눈을 뜨면 허기가 지고 남자랑 섹스가 끝나면 다시 배가 고팠다.
물론 그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힘들어? 아니면, 배고파?”
배고파. 그녀가 시름시름 앓는 척을 하면 칼릭스는 뒤늦게 몸을 빼냈다. 그것도 한 번에 빼지 않고 미적거리며 이리저리 안을 쿡쿡 찔러 대다 희수가 힘을 주고 그를 밀어내면 그제야 몸을 뺀다.
“조금만 더 안고 있고 싶은데……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내키지 않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는 그러고도 삼각지를 느리게 비비다가 손을 내려 클리토리스를 누르고 문질러 대며 희수가 쉽게 잠든 척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 흐르지 않게 막아 두고 싶어. 아니면 흘러내릴 때마다 다시 채워 주거나. 어때.”
그의 물건을 받아들인 곳을 한참 지분거리며 후희를 즐기다 그녀가 미약한 절정에 다시 다다라 몸을 떨면 그제야 드디어 끝이었다.
“사흘 뒤엔 도시를 나갈 건데 이렇게 골골대서야 쓰겠어? 눕기만 하면 자는 것 같네.”
희수는 죽은 척 눈을 감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흉내를 냈다. 그가 젖꼭지를 짓이기듯 눌렀다가 살살 구슬리길 반복할 때마다 흠칫 떨렸지만 최대한 숨을 고르고 잠든 척했다.
“아직 야밤도 아닌데…… 벌써 자?”
귀를 끈덕지게 물고 빨며 끊임없이 유도하는 게, 사람을 골수까지 쪽쪽 빼먹으려고 작정한 듯했다. 희수는 도저히 그의 페이스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처음엔 제가 만지기만 하면 ‘꺼져라, 저리 가라’ 하며 밀어내더니 한번 몸을 섞고 나서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변화는 물 흐르듯 했지만 희수는 당혹스러웠다.
딱 한 번으로 끝나리라 예상했던 섹스를 의도치 않게 매일매일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날 팔아넘기진 않을 것 같아. 지금은.’
아니, 자신을 팔아 버리고 가기는커녕, 희수는 이제 이 남자가 자신을 한 몸처럼 여기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
아침에는 남자에게 온몸을 결박당한 채 숨통을 헉헉거리며 눈을 떴고, 잠들 때는 질펀한 섹스를 나누다가 으스러질 듯 안겨서 눈을 감았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임신의 우려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부터 한 번도 생리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 상태로 임신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자로서 완전히 걱정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참 고약한 게, 이 남자는 피임을 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매번 질내 사정을 고집하는 것이다. 아무리 밀어내도 소용이 없었다.
불안감은 그를 향해 새싹같이 자라나던 감정을 짓눌렀다. 남자의 쏟아지는 애정이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잘 자.”
뻔히 알아듣지 못한단 걸 알면서도 연신 귀에 속삭이는 그의 말소리가 다정했다.
“……뭐라고 부를 이름이 없어서 짜증 난다. 네가 빨리 말문이 트였으면 좋겠는데.”
일단 섹스가 끝나면 그의 손길도 다시 자상하게 변했다. 칼릭스는 흥분에 달해 그녀를 몰아붙이는 순간만 잔인하게 굴었다.
“소리는 잘 내는데 왜 아직도 말을 못 하나. 응?”
남자의 음성이 귓속으로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희수의 가슴속엔 이름 모를 그림자가 드리웠다.
“빨리 네 이름을 알고 싶다. 이름을 부르면서 가고 싶어. 그러면 기분이 끝내줄 것 같은데.”
이 남자와의 앞날이 조금도 그려지지 않는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 * *
희수는 처음으로 침실을 나와 아래층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배가 고픈 줄 알고 그가 식당으로 이끈 것이다.
“아침을 그렇게 싹싹 비우고 또 배가 고파? 근데 왜 살은 안 찌는 건지, 참. 황당하다니까.”
실상은 눈을 뜨자마자 달려드는 남자를 피해서 그의 손을 붙들고 문밖을 나선 것이었다.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을 것 같은 남자가 자신이 이끄는 대로 얌전하게 따라오는 게 놀라웠다.
“한 번을 안 깨고 잘 자던데. 한나절을 누워 잠만 자는 걸 보면 신기하단 말이야.”
밑은 쓰리고 그에게 밤새도록 만져진 젖꼭지는 따가웠다. 또 했다가는 아래가 헐어 버릴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삐걱거렸다. 몸이 축나는 느낌이 확연했다.
“이제 침대가 없어서 어떡하나. 넌 거길 제일 좋아하는데 말이지…… 응?”
음식이 나올 때까지 칼릭스는 그녀의 콧등을 툭툭 두드리고 볼을 손가락으로 쓰는 등 다정하게 굴었다. 그러면서 뭐라고 계속 말을 걸었지만 희수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 건물의 입구와 식당 안의 부엌,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웃고 떠들며 만들어 내는 평범한 일상이 그녀에겐 전부 신기했다.
“뭘 그렇게 정신없는 사람처럼 봐.”
칼릭스는 그녀의 손을 꾹 붙들었다.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이. 희수는 뒤늦게 마주 앉은 그와 시선을 맞췄다.
“하긴 보름간 방에만 갇혀 지냈으니, 신기한가.”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붉혔다. 뚜렷한 남자의 육체를 가진 풋풋한 소년처럼 보여 새삼 낯설었다.
그때 식당의 여주인이 둘에게 다가왔다.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자였다.
“아침식사는 방으로 올려 줬는데, 추가로 먹는 거라면 돈을 지금 내야 해요.”
“현금은 침실에 있는데, 나중에 계산하면 안 되겠나?”
“미안하지만 선불이에요.”
여주인의 태도가 단호했다. 칼릭스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올라갔다 올 테니 여자를 좀 지켜봐 주시오.”
이 건물에서만 보름을 지낸 데다, 애꾸눈의 주인과 안면이 트고 여주인도 믿을 만하기에 칼릭스는 여자를 혼자 두고 다녀오는 게 그리 걱정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가 혼자 어디론가 사라질 일도 없지 않은가.
지금은 그런 기색이 없지만 그녀는 한때 칼릭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절실하게 애원했다. 저를 버리고 가지 말라고. 혼자가 되는 걸 몹시 두려워하는 여자였다. 그러니 그녀 혼자 떠날 리는 없었다. 절대로.
“금방 다녀올게. 기다려. 앉아 있어.”
그녀가 알아듣는 몇 마디를 건네자 역시나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랐다. 시선에서 멀어지기 전 다시 돌아보니 여자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저를 기다렸다.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여자가 있다.
“…….”
그건 정확히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집에 가족이 있는 가장의 마음이 이런가. 아니, 여자는 그보다 훨씬 연약하고 훨씬…… 떼어 놓기 불안하다.
먹을 것도 챙겨 줘야 하고, 어디 아프진 않은가 전전긍긍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예뻐하게 되고. 이건 마치…… 도저히 혼자 둘 수 없는 어린 강아지 같다.
그래, 이 경우에는 아주 어린 새끼 강아지를 둔 주인의 마음에 가깝다.
물론 여자는 성인이지만 칼릭스에게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온전히 제 몫인 커다란 책임으로 다가왔다.
가만 주시하고 있자니 몽글몽글 솜뭉치 같은 새끼강아지를 가슴에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이리저리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걸 지켜보는 기분.
여자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 때마다 그런 심정으로 눈을 뗄 수 없이 지켜보게 되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그를 찔러 대던 가시가, 어느새 그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 * *
“아가씨, 지금 갓 구워 나온 빵이니 식기 전에 먹어요. 응?”
희수는 맛있는 냄새가 나는 음식을 갖다 주며 웃는 푸근한 인상의 여주인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평범한 사람들 틈에서 사람대우를 받는 게 얼마 만인지 괜히 속이 시큰거렸다. 겨우 이런 것으로 감동받는 자신이 불쌍했다.
칼릭스는 제게 잘해 주긴 하지만 그건…… 그건 그와 자신의 사이에 육체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관계를 빼면 애초에 그는 자신이 뒤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희수 자신이 의도한 일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다만 이 세계에서 가장 친밀한 사람인 그에게 제 몸 말고는 내어 줄 대가가 아무것도 없다는 게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희수는 다크 홀을 넘어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쓸모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포크를 떨어뜨렸군. 아가씨.”
옆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기다리던 남자가 희수가 떨어뜨린 포크를 주워 주었다. 냅킨에 슥슥 닦더니, 이상하게 표정을 구기고는 자신의 새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숙녀에게 땅에 떨어진 걸 줄 수는 없지. 내가 기사는 아니지만 그 정도의 예의는 있소이다.”
뭐라는진 정확히 몰라도 희수는 대강 그의 의도를 짐작했다. 마주 웃어 주고는 그가 내미는 포크를 받아 들었다.
‘친절하네.’
아주 별것 아닌 일상의 일들이 그녀의 기분을 바꿔 놓았다. 마치 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 자신도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희수는 어렴풋이 민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길 소원했던 그녀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속이 시큰거렸다.
“어이, 빵이 참 맛있게 생겼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갈라 잼을 바르던 그 순간이었다. 어떤 남자가 그녀의 앞자리에 털썩 앉아서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혼자 먹는 거면 같이 좀 앉읍시다. 빵 하나만 주쇼. 내 거 나오면 갚을 테니.”
남자는 그녀의 접시 위에 있던 빵을 하나 가져갔다. 행동이나 말투에 악의는 없어 보였다.
“여긴 다 좋은데 식사가 늦게 나오는 게 흠이란 말이야. 맛이 있긴 해! 저 아줌마가 솜씨는 좋은데 손이 느려 터졌어. 안 그런가, 아가씨?”
남자가 큰 소리로 떠들자 여주인이 깔깔 웃으며 대꾸했다.
“잘못 골랐어, 데니스! 그 아가씬 내 편이야.”
그러자 주위에선 너 나 할 것 없이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아가씨, 들었지? 난 데니스야. 말수가 참 없는 것 같군?”
여주인은 식사를 다른 테이블에 놓아 주며 말을 이었다.
“데니스, 그 아가씬 말을 못 해. 헛수고하지 말고 이리 와서 식사나 하셔.”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희수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랬구나. 뭐 어쨌든 반가워.”
희수는 악수를 하자는 듯 제게 내민 손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이러면 내가 민망한데 말이지…….”
잽싸게 손을 거둬 가며 머리를 긁적이는 남자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 웃었다.”
그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얼른 몸을 옮겨 희수의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빵을 우물거리던 희수는 얼른 조금 옆으로 엉덩이를 옮겼다.
“우리 초면인가? 난 아가씨를 어디서 본 것 같거든.”
그의 눈빛이 부담스레 반짝였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눈, 코, 입을 잊을 리가 없는데…….”
희수는 찜찜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눈치를 살피며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어처구니없지만 바람피우는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우린 꿈속의 연인이었나 봐, 아가씨.”
갑작스레 남자가 포크를 쥔 희수의 손을 붙들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리 이 깊은 인연을 현실에서도 한번 이어 가 보는 건…… 으악!”
그 순간 남자가 누군가에게 멱살이 잡혀 몸이 위로 들렸다. 그가 켁켁거리며 무력한 몸짓으로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그를 포클레인에 딸려 올라가는 부산물처럼 보이게 했다. 남자의 발끝이 땅에서 떨어졌다.
“……!”
칼릭스였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엔 노기가 가득했다. 희수는 생전 처음 보는 그의 살벌한 표정에 등에 한기가 돌았다. 자신을 떼어 놓고 가려 했던 첫 만남에서도 저렇진 않았는데,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를 말릴 넉살과 재간이 없는 희수 대신 다행히 여주인이 급히 뛰어왔다.
“아니, 총각. 이것 좀 놓고 말해요, 응? 숨넘어가겠어요!”
하지만 그의 멱살을 움켜쥔 칼릭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태워 죽일 듯이 남자를 노려보기만 했다.
“저 총각이 뭘 몰라서 그래요. 한 번만 봐줘요. 이러다 큰일 나!”
남자가 숨을 헐떡이는데도 칼릭스가 반응이 없자 여주인은 희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가씨도 얼른 말려 봐요!”
엉겁결에 끌려나온 희수는 심각하게 대치한 칼릭스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몇 번을 그러자 크게 숨을 내쉰 그가 결국 남자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어윽!”
쓰러진 남자는 여주인의 도움을 받고 간신히 일어섰다.
“쿨럭, 쿨럭. 이, 이거 완전 깡패새끼 아니야? 아가씨, 저런 놈을…….”
몸을 일으킨 남자가 희수에게 손을 뻗는 그 순간이었다. 칼릭스의 눈이 휙 돌았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주먹이 먼저였다.
퍼억-!
“으어억!”
와장창! 얼굴을 얻어맞은 남자는 옆 테이블에 쓰러지며 그릇을 박살 내고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식당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유리잔과 그릇, 다리를 잃은 나무의자가 처참했다.
남자는 코피가 터졌는지 이가 부러졌는지 붉은 피가 범벅인 얼굴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
일상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숨을 헉 들이켜곤 이 모든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만히 남자를 내려다보는 칼릭스의 싸늘한 시선에 희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자신을 채찍질하던 감시자가 그와 겹쳐 보였다.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아. 데니스! 정신 차려 봐!”
여주인은 피로 범벅이 된 남자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주다 칼릭스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아니 사람을 이렇게 때리면 어쩌자는 거예요!”
“주인장, 내가 뭐라고 했나. 여자를 지켜봐 달라고 했더니 저딴 놈이 희롱을 하는 걸 가만 놔둬?”
“희롱은 무슨, 장난 좀 걸었다고 사람을 이렇게 죽일 듯이 때리면 안 되지! 여기 피 좀 봐요!”
“죽이려다 살려 준 거요.”
칼릭스는 쥐고 온 돈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를 꺼내 성의 없이 내려놓았다.
“남의 여자를 만졌으면 저놈도 각오를 했겠지.”
기분 같아서는 여자를 만졌던 저 손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참았다. 만약 이곳이 도시의 밖이었다면 흔적도 없이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가 제 여자에게 껄떡거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칼릭스는 화염에 집어삼켜졌다. 아직도 속이 펄펄 끓었다.
게다가 그녀의 표정.
그 표정이 꼭 저를 보는 것이나 생판 남인 그를 보는 것이나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창자가 마구 꼬이고 가슴 한구석이 비틀리는 기분. 그 남자의 손이 그녀의 것을 움켜쥐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칼릭스를 움직인 건 언제나 견고하던 이성이 아니라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었다.
그는 저 여자에 관해서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부터, 그녀가 추워한다는 이유로 어이없이 성력을 써 도시로 온 것도 그랬다. 여자 때문에 그렇게 마주치기 싫어하던 신전의 누군가를 만날 각오도 했다.
시민을 때린 것도 생전 처음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후회가 되기는커녕 그를 죽여 놓지 못해 아쉬웠다. 이런 자신이 어떻게 신전에서 성기사의 삶을 살았던 건지…….
“……가자.”
칼릭스는 뒤늦게 그녀를 돌아보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흠칫 놀란 그녀가 몸을 움츠리며 제 손길을 피했다. 여자의 경악한 얼굴에는 한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감정들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칼릭스의 눈엔 또렷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그녀의 감정과 기분이 그에겐 자신의 것보다 확연히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향한 약간의 공포와 두려운 기색이 선명하게 읽혔다.
그는 한순간 얼음물에 뛰어든 기분이었다. 이제야 후회되기 시작했다. 입술이 바짝 말라 왔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서로 말도 안 통하는데, 여자가 자신을 두렵게 보거나 무서워하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뒤덮은 뜨거운 감정에 무력하게 타올랐다.
아…… 이제야 신께서 전하신 말씀을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여자는 악이며 남녀 간의 쾌락을 죄라고 말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는 죄악은 여자도, 여자가 주는 쾌락도 아니었다.
여자를 향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열기. 가슴이 터질 듯한 이 감정이 악의 근원이 되리라.
칼릭스는 도망치듯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 * *
“수고가 많으시군요. 블랙캐슬로 돌아오십니까?”
“확실하진 않소.”
“그렇군요. 저희야 떠날 일이 없으니 밖을 자유롭게 다니시는 용병분들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아, 그럼 귀경의 무사귀환을 빌겠습니다. 이만.”
끼이익. 쿵.
거대한 철문이 닫혔다. 희수는 철문이 지나간 모래바닥에 남은 자국에 시선을 빼앗겼다. 마치 제 몸에 남은 상처처럼 보였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히자 거대한 검은색 성벽이 옆과 위로 끝없이 이어졌다.
전에 자신이 먼 곳에서 보았던 검은 장벽의 요새. 바로 그 도시가 이곳이었다.
‘내가 있던 곳이 블랙캐슬이었구나.’
희수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완전히 닫힌 철문을 응시했다.
저 검은색 장벽으로 완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저 안에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삶이 있다. 그녀가 원해 마지않는 것. 민주의 소원. 어쩌면 이곳에선 절대로 이뤄지지 않을…….
“뭐해, 가지 않고.”
희수는 칼릭스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얼굴을 덮은 후드를 젖히고 찬란한 금발을 털어 내듯 매만졌다.
“후,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그는 저 안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희수는 새삼 이 남자의 정확한 직업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왜 도시 안에서 살지 않는 건지, 저 안에선 왜 얼굴을 가리고 지내야 하는 건지.
대체 왜 저 안전한 성벽을 제 발로 걸어 나와 이 황무지로 온 건지!
함께 보낸 밤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결국엔 자신을 누군가에게 팔아넘기거나 버리고 가지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또 저 야생의 세계를 헤매고 다닐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직업이 좀비 헌터 같은 건가?’
근데 얼굴은 왜 가린단 말인가.
‘너무 잘생겨서?’
여자들이 쫓아와서 그런가? 아니, 잘생긴 얼굴은 자랑스럽게 보여 주고 다녀야지 가릴 이유는 없다. 게다가 남자는 사람들과 마주하는 걸 그리 달갑게 여기는 눈치도 아니었다.
“하아.”
희수는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이 나왔다. 블랙캐슬의 철문을 나오니 다시 황무지다. 사람의 흔적은 없다. 이 황무지에서 눈을 뜬 희수는 이곳에 뭐가 있는지 빤히 알고 있었다.
노예처럼 부려지는 광산, 좀비, 강도, 강간범…… 나쁜 건 전부 이 황무지에 있었다.
‘어쩌면 도시의 범죄자들을 전부 밖으로 추방하는지도 몰라.’
그래서 도시 밖엔 전부 나쁜 놈들만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혹시…… 혹시 이 남자도 범법자인 건가?
희수는 자신의 지나친 상상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범죄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군인이나 보안요원, 신부님이라면 모를까. 그만큼 남자의 인상이 선하고 깨끗했다.
게다가 경비원은 그의 신분증명 펜던트를 확인하지 않았다. 도시의 안전한 울타리를 제 발로 걸어 나올 사람은 없을 테고, 경비원들은 그가 파란 불꽃을 가진 능력자란 걸 알았을 것이다. 그는 좀비가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니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겠지.
그래서인지 저 남자는 신분증명 펜던트를 목에 걸고 다니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목에 걸린 건 웬 검은색 돌이었다. 투박한 가죽 끈에 단단히 묶인 그 물건은 패션을 위한 장신구는 아닌 듯했다.
그는 어디서든 신분을 증명할 필요가 없을 테니 부럽기도 하고, 자신은 절대로 저 도시 안에서 섞여 살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허탈하기도 했다.
그 순간 희수는 자신의 손에 와 닿는 감촉에 소스라쳤다.
“……뭐야.”
칼릭스의 한쪽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희수는 자신이 너무 과한 반응을 했다는 걸 알고 민망해졌다.
“이젠 손잡기도 싫다는 건가? 뭐, 알았다고.”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그가 크게 기분이 상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식당에서 있었던 그 일 이후로 둘은 내내 어색한 시간을 보내다가 블랙캐슬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식당에서부터 화가 나 있었다. 항상 날 선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네가 싫다면 하지 않아.”
그 사건 이후로 희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남자에게 몸을 열지 못했다. 자신을 만지는 그의 손이, 광산에서 그녀를 채찍질하던 감시자의 손처럼 보이는 것이다.
평소엔 애액이 흘러 침대보를 푹 적실 정도로 흥분하던 몸은 기막히게도 남자가 어렵게 느껴지고부터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물건은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크기였다. 칼릭스가 아무리 오래도록 물고 빨고 애무를 해도 불편하기만 해서 몇 차례나 삽입에 실패했다. 다행히 그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여자를 억지로 범하는 무뢰한은 아니었다.
대신 희수는 그가 자신을 두고 자위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도시를 떠나던 마지막 날이었다. 남자는 참고 참다가 결국은 그것을 스스로 흥분시켜 사정했다.
커다란 손으로 기둥을 훑으며 가쁘게 숨을 내쉬던 모습이 어이없게도 그녀를 뒤늦게 달아오르게 했다. 자다 깨서 우연히 봤지만 남자의 그런 얼굴에 흥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어젯밤엔 잠이 홀딱 깨서 밤새도록 뒤척거려야 했다.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고 이대로 자신을 버리고 가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는 성벽을 나올 때까지도 깍지 낀 손을 놓지 않았다.
어쩌면 말을 못 하는 여자라 상품가치가 없어 팔지 못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 한가운데가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마냥 이 남자를 미워하기엔 너무 잘해 준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그는 모든 걸 나서서 해 주려고 한다. 지나치리만치.
옷도 사 주고, 해진 신발도 사 주고. 그것도 꽤나 고급으로. 매끼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도 사 줬다. 이 정도로 그에게 받은 게 많으니 희수는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언젠간 자신을 버릴지 몰라도.
그런데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그를 화나게 하다니.
‘아직도 화가 났나.’
희수는 칼릭스에게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어떻게 그의 화를 풀어 준단 말인가.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도 모르는데. 식당에서의 일을 돌아봐도 딱히 자신이 잘못한 건 없었다.
‘저 남자가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기만 해도 좋을 텐데.’
그럼 남자가 왜 화가 났는지, 자신이 뭐라고 화를 풀어 줘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텐데.
사람들 사이에서 희수는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져 내내 기분이 우울했다. 간단한 말은 이해할 수 있지만 아직도 그가 하는 말의 90%는 알아듣지 못했다.
말뜻을 알려면 누군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이를 알아들은 상대가 그 결과로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를 눈여겨봐야 했다. 서로 대화가 가능한 두 명이 있었다면 차라리 그들을 보면서 더 빨리 말을 배웠을 텐데, 그는 혼자라서 말을 배우기가 더 어려웠다. 심지어 자신이 소리를 내지 못하니 그는 저에게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말이 빨리 늘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남자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는 있다. 반복되는 단어를 유추하면서 수수께끼 하듯이 뜻을 짐작하는 게 전부지만 나날이 나아지고 있기는 하다.
그래도 부족했다. 희수는 남자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사람을 완전히 갖고 노는군.”
남자가 신경 쓰인다. 희수는 초조하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왜 밉지가 않은 거야, 젠장.”
칼릭스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희수는 그에게 죄라도 지은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생명의 은인인데,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뭐 때문에 저렇게 짜증이 난 걸까…….’
둘은 각기 다른 이유로 침울했다. 그들을 괴롭히는 건 우습게도 매녹이나 강도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동행이었다.
* * *
여정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매일 길을 걷는 걸 보면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듯했다.
칼릭스는 매녹이 나타나면 파란 불꽃을 만들어 내 태웠고, 시비를 거는 강도를 만나면 그들을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희수는 더 이상 이 황무지가 두렵지 않았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뻑뻑한 숲을 걸으면서도 그가 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다.
그래도 밤마다 떠오르는 건 블랙캐슬에서 사람들이 만들어 내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희수는 그 안에서 그들과 어울려 살고 싶었다. 이렇게 남자와 단둘이 숲 속을 헤매는 일은 제발 그만하고 싶었다.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매일 밤 흐르는 어색한 기류도 한몫했다. 타오르는 불꽃이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 있는 것인지, 코앞의 모닥불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젠 내 옆에 와서 앉기도 싫은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듯 앉은 둘은 각각 다른 곳을 보았다.
희수는 버릇처럼 땅에 의미 없는 글자를 그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그에게 보여 주었지만 칼릭스는 그것이 그림인지 글자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YES와 NO조차 통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그림이나 그리고 있군.”
칼릭스는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불만스럽게 턱을 괴고 빤히 그녀를 주시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렇게 태도가 바뀔 수 있는 거지?”
몸을 섞고부터 자신이 버리고 갈 것 같지 않으니 여자는 무심해졌다. 깊은 스킨십도 하지 않으려 하고 예전처럼 눈을 맞추고 애살스럽게 굴지도 않는다. 기막히게 눈치가 빠르고 영악한 여자였다.
칼릭스는 아직 그녀에 대해서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아는 것 같았다. 그 자신도 모르는 그의 마음을.
그는 모닥불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주시했다. 그 너머에 여자가 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연기는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여자의 모습은 선명했다.
저 여자는 내가 없으면 죽을 거다.
매녹에게 먹혀 죽든지, 굶어 죽든지, 병에 걸려 죽든지. 도시로 끌려가 태워질 수도 있다.
그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옆에 없으면 살아남지 못할 여자를, 생각한다.
칼릭스는 거의 매일, 매시간을 저 여자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건 결국 그의 앞날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여자를 살려 주고 보호해 주기 위해서는 그 역시 앞날을 그려야 했다. 살아야만 했다.
‘저 여자 때문에.’
칼릭스는 푹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제 와서 아무 의미도 없는 고민이었다.
여자가 본능대로 직감한 것처럼 그는 여자를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옷을 벗길 때부터, 어쩌면 입술에 키스를 했을 때부터. 아니, 사실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다만 그녀도 과연 같은 마음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아.”
칼릭스는 이제야 자신을 응시하는 여자를 향해 제 옆자리를 눈짓했다.
“이리 와.”
그녀는 한 박자 늦게 일어서서 엉덩이를 털고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리다 쭈뼛쭈뼛 다가왔다. 순순하긴 했지만 일련의 행동이 굼떴다.
“네 이름을 모르니까 자꾸만 개 부르듯이…… 부르게 되잖아.”
칼릭스는 그녀를 재촉하려다 이상한 죄책감에 콧등을 긁적였다.
다행히 희수는 그가 저를 오라 가라 하는 것에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어차피 칼릭스가 부르는 건 전부 그녀를 챙겨 주려는 행동이었다.
“약을 꼬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