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 남자의 사정
* * *
남자는 흙바닥에 요상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로세로 약 1미터쯤 될 만큼 커다랬다. 별과 동그라미가 들어찬 복잡한 문양이었다.
그리고 예의 그 파란 불꽃을 만들어 냈고, 불꽃은 그가 만들어 낸 문양을 따라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떠한 연료도 없이 불이 땅에 옮겨붙은 것이다. 희수는 ‘마법’을 눈앞에서 보고 경악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불은 그래 봐야 땅에서 10센티도 되지 않을 만큼 얕았지만…… 그래도 ‘불’ 아닌가! 그것도 엄청나게 뜨거운 파란 불꽃이었다.
“이리 와.”
그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희수는 본능적으로 주저하게 되었다.
“C'est pas grave.”
그녀는 남자의 말의 의미를 알았다. ‘괜찮다’는 뜻으로, 뭐든 겁내는 그녀에게 남자가 저 말을 하면 정말 괜찮았다. 한 번도 괜찮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얼른.”
그의 재촉에 희수는 용기가 생겼다. 타오르는 불꽃 위로 천천히 한 발을 옮겼다. 그러자 남자가 씩 웃으며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
히익! 볼썽사나운 숨소리가 흩어졌다. 크게 놀랐지만 진짜 놀라운 건 이제부터였다.
순식간에 파란 불꽃이 머리까지 솟아올랐다. 희수는 남자를 꽉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그에게 안겨 있자 소리가 들렸다. 쿵쿵쿵. 심장소리. 크게 뛰는 심장소리에 희수는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다.
우선 사방이 밝았다. 하얀색 대리석 바닥에, 복도에는 촛불이 양옆으로 끝없이 타고 있었다. 초에는 파란색 불꽃이 있었다.
희수의 눈알이 빠질 듯이 커다래졌다. 한쪽에는 고개를 끝까지 젖혀야만 볼 수 있는 등신상(等身像) 하나가 눈앞에 있었다.
이곳은 마치 수도원처럼 보였다.
순간이동. 이건 순간이동이 분명했다. 이 신기한 경험에 희수는 신나서 남자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남자는 손가락을 입술 앞에 가져갔다.
“쉿.”
“…….”
어차피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지만 희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여긴 신전이야.”
장난스럽게 웃은 그가 희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건만, 남자는 빤히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희수는 간지러운 느낌에 키득거렸다.
“누군가 마주치기 전에 얼른 나가야 돼.”
지정된 곳의 좌표를 알면 성력을 이용해 마법진을 만들어 이동할 수 있었다. 그가 아는 좌표는 각 도시의 신전뿐이었다.
그동안 칼릭스가 이 방법을 써서 이동하지 않은 건, 흔적이 남기 때문이었다. 그가 흙바닥에 그려 놓은 문양이 고스란히 남았을 것이다. 성력의 잔재까지도.
예민하고 섬세한 이라면 그 흔적의 주인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교황을 모시던 성기사들은 1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수련했던 동료들이라 서로의 흔적을 모를 리 없었다.
“거기, 누구지? 누가 감히 신전으로 숨어 들어왔느냐?”
“……빠르기도 하군.”
칼릭스는 재빨리 여자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러곤 파란색 불꽃을 손에 틔웠다. 어두운 곳에서 서로를 알리는 인사였다.
“칼리!”
이 목소리는 잘 아는 이였다. 그 역시 칼릭스를 잘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눈앞으로 달려온 어린 소년의 붉은색 사제복이 펄럭였다.
“헤일로.”
“오, 신이시여. 칼리, 칼리! 칼릭스! 설마 너일 줄은!”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의 한쪽 어깨를 짚은 헤일로가 성호를 그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카를로스 말로는 네가 혼자 가겠다고 하면서 훌쩍 떠났다던데!”
“조용히 해. 사제들을 다 깨울 셈인가?”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신전에 오면 누구에게든 들킬 거라고 사실 예상했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 해도 성력에 민감한 사제들이 모를 리 없었다.
“뭐? 네가 온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 거야?”
그런데도 칼릭스가 이를 각오하고 신전으로 이동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여자가 추워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흔적을 누군가 찾든 말든, 신전의 누군가를 마주하든 말든, 여자가 추워하는 것 말고는 이제 아무것도 상관이 없어졌다.
그녀와의 입맞춤이 그의 뭔가를 한순간에 바꿔 놓았다. 가슴에 턱 박힌 가시가 깊숙이 속을 쑤셨다. 아니, 어쩌면 간신히 숨겨 두었던 것을 끄집어냈다고 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그를 움직이는 건 이성이 아니라 뜨거운 감정이었다.
“설마 몰래 온 건…… 저 여자는 누구야?”
헤일로의 목소리가 급격히 낮아졌다. 둘이 가깝게 붙은 걸 보고 그의 시선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헤일로, 미안하지만 기회가 있으면 다시 볼 수 있겠지. 난 이만 가야 해.”
젊은 주교, 헤일로는 얼른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저 여자의 존재 때문에 칼릭스가 곤란해서 자리를 떠나려는 게 분명했다.
“칼리,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약속해. 그보다는 잠깐 얘기 좀 해. 지금 신전의 상황이 이상해졌어. 네가 수배당한 건 알고 있지?”
물론 칼릭스가 여자와 함께 있는 건 신전의 계명을 위배하는 큰 죄이긴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계명을 지키든지 어기든지 하는 건 아무 상관도 없어졌다.
“사람들이 의심하고 추궁하기 시작했어. 도성에선 재판을 열자고 했고, 시장은 리옹의 주교회를 압박했어. 널 지목하면서.”
“그래서 내 초상화가 리옹에 걸려 있었군.”
리옹, 수도 곳곳에는 칼릭스가 현상수배되어 있었다.
“네가 그 미친놈을 죽인 건 몰라. 신전과 네 가문을 견제하려는 거지. 시의회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헤일로가 말하는 미친놈은 교황이었다. 칼릭스는 허탈하게 웃었다.
“어쩐지 교황 시해범이라고 써 있지는 않더군.”
“그랬다간 클로비스 가문이 가만있겠어? 눈치를 보고 있는 거겠지.”
헤일로의 표정의 심각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한참이나 칼릭스를 찾았다.
칼릭스 클로비스. 교황 친위 기사단의 차기 단장 후보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친위대의 가장 뛰어난 기사였다. 신전은 클로비스 가문을 빼놓고 그 역사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긴 세월을 함께했다.
“신전에선 너를 최우선으로 보호할 거야. 칼리, 진작 너와 대화를 나눴어야 했어. 대주교님은 네 복귀를 원하셔.”
“하!”
칼릭스는 황당한 조소를 터뜨렸다. 누군가를 원망해서는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가, 신전에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헤일로는 생각이 달랐다.
“너만 돌아오겠다면 모든 진실을 세상에 밝히겠다고 하셨어. 친위대는 한 명도 빠짐없이 뛰어난 인재들이고, 너는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해. 난 네가 차기 교황이 되실 대주교님을 보좌했으면 좋겠어. 그분은 개혁을 꿈꾸고 계셔. 반드시 네가 필요해. 그리고 이 신전에도…….”
“헤일로.”
그의 말을 막아선 칼릭스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그는 신이 전한 교리를 실천했지만, 자신의 행동을 온전히 용서하고 합리화하지 않았다.
“난 교황을 죽였어.”
“칼리, 교황은 미친놈이었어. 그놈은 다크 홀을 열어서 매녹을 불러내고,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렸다고!”
“교황이 어떤 짓을 저지른 괴한이든 상관없어. 그렇다고 내가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는 어쨌든 이 신전의 교황이었고, 나는 그를 지킬 의무가 있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칼리, 넌 이 도시를 구한 영웅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교황 시해범이 다시 친위대를 맡아? 의미 없는 대화는 그만하고 싶군.”
냉정하게 몸을 돌린 그가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칼리…….”
헤일로는 황망한 눈으로 그의 행동을 응시했다. 평생의 순결을 맹세한 그가 보란 듯이 여자의 손을 잡고, 이 신전에 몰래 숨어 들어왔다는 건 정말로 다신 성기사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날 궁금해하지 마. 찾아오지도 말아. 난 더 이상 신을 모시는 사람이 아니니까.”
“칼릭스! 도시에는 전부 네 수배가 걸려 있어! 대체 어디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
살지 않으려고 한다.
살아갈 이유가 더는 없으니까.
이 세상의 매녹을 전부 죽이고, 죄 많은 이 목숨도 신께 바치려 한다. 교황을 죽인 그 순간 그 역시 죽었다.
칼릭스가 도시 밖을 떠도는 용병이 되길 자처한 건 이런 결과를 충분히 예상했기 때문이다. 친위대와 노선을 달리해 혼자 떠난 것도 그래서였다. 그래서 처음 자신의 수배지를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도시에서 살지 않을 테니 수배령 같은 건 상관없어.”
“뭐? 그게…… 무슨 뜻이야?”
“이 세상의 마지막 매녹을 죽이는 날, 그날이 내 마지막 날이 될 테니까…….”
오래도록 생각해 온 일이라 칼릭스는 덤덤했다. 다만 그의 목소리가 주저하듯 작아진 건…… 누군가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기 때문이다.
내가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여자의 얼굴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고민이다. 전 교황을 죽이는 데도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건 그가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생에 미련을 남길 만한 애정이 담긴 누군가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계모가 있는 클로비스 가문은 한 번도 그의 가족인 적 없었다.
그의 20년은 오로지 저 자신만 책임지면 되는 쉬운 삶이었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이 여자는 어떡하지.’
칼릭스는 자신이 붙잡은 얇은 손목의 주인을 흘긋 돌아보았다.
경악한 헤일로는 뒷목을 잡았다.
“지금, 지금, 매녹을 전부 죽이고 너도 죽겠다는 거야?”
“…….”
칼릭스의 굳게 다문 입술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의 마음이 꽤나 굳어졌다는 뜻이다. 헤일로는 마음을 진정하려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는 이 목숨을 이어 갈 이유가 없다. 헤일로.”
“오…… 오, 신이시여…….”
그래, 그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결같았다. 우직하고, 바보처럼 순수한 데다 답답할 만큼 고지식한 영혼. 그는 남의 뒤통수를 치거나 거짓말을 하는 법을 몰랐다. 자신의 연이 닿은 모든 걸 혼자 책임지려 했다.
그래서 저런 소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
“칼릭스, 피를 나눈 네 가족은? 네 친구들은? 네 동료들은? 이 신전은 네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칼릭스는 살며시 미간을 구겼다. 이 심정은 어차피 자신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모를 거다. 대화를 끝내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쉰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헤일로가 중얼거렸다.
“아니. 그들이 모두 의미 있기 때문에 네가 그런 결정을 내린 거겠지.”
칼릭스에겐 가문의 명예가 중요하고, 성기사들의 명예가 중요하다. 이 신전의 찬란한 앞날을 훼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네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신전에 돌아오지 않으려는 거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사람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그러니 신전에서도 널 보호하고 해명할 기회를 줘.”
헤일로의 음성이 한층 낮아졌다.
“신전은 바뀔 거야. 대주교님께서는 새로운 세상에서의 교황이 되겠다고 하셨어.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해. 이 신전이 바뀌려면, 힘이 필요하다고.”
헤일로는 칼릭스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신과 신전, 교황을 향해 순정적인 충성만 바쳤던 기사였다.
신을 저버린 교황에게 반기를 든 친위대를 대신해, 교황을 죽이고 혼자서 모든 죄를 뒤집어쓴 남자. 전도유망했던 성기사.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건국공신 가문의 외아들.
“칼리, 신전으로 돌아와. 예전의 네가 가졌던 명예와 영광을 돌려줄 기회를 줘. 칼릭스, 제발.”
신전은 사임한 친위대하고 연락이 닿았다. 여럿이서 움직이기에 추적이 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신전으로 돌아오길 거절했다. 모든 결정은 칼릭스의 몫이라고 했다.
모두를 대신해 홀로 죄인이 되길 자처한 그가 신전에 돌아가지 않는 이상, 친위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난 예전과 같지 않아, 헤일로.”
블랙캐슬의 주교 헤일로가 기억하는 칼릭스는 순정적이고 올곧은 남자였다.
한번 마음을 주고 따르기로 결정한 일은 절대로 바꾸지 않는 책임감 강한 사람.
“교황 시해범에게 돌아갈 명예와 영광 같은 건 없어.”
헤일로는 묵직한 그의 발걸음을 들으며 그가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 여자의 손을 잡고 신전에 숨어 들어올지언정 칼릭스는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 * *
희수는 남자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거대한 건물을 나와서 보니 사람들이 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게, 신전이 맞는 듯했다. 눈치 없이 가슴이 빨리 뛰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칼릭스’야!’
별명은 ‘칼리’인 듯했다. 서로를 잘 아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알게 된 것이다.
희수도 내심 궁금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무엇일까, 하고.
‘근데 다른 사람한텐 왜 저렇게 말을 무섭게 하지?’
희수는 그의 말투를 듣고 내심 놀랐다. 평소 제게 말을 걸던 나긋하고 조용한, 약간은 재잘대는 듯 다정한 음성이 아니었다. 말투가 굉장히 딱딱하고 묵직한 데다 사무적이었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만큼 눈빛도 날카로워서 처음엔 꼴 보기 싫은 앙숙을 만난 건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희수는 이 세계에서 처음 보는 도시의 모습에 설렜다.
‘민주의 말이 맞았어. 여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분명해. 이런 곳이 있었다니…….’
밤이지만 두 개의 달 때문에 거리가 밝았다. 신전을 나와서부터 보이는 건 중세유럽을 연상시키는 건물과 상점이었다. 가족, 친구, 연인. 민주의 말대로 평범한 사람들이 길거리에 즐비했다.
희수는 주위를 둘러보느라 제 손을 잡은 칼릭스의 기분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아까 ‘헤일로’라고 불린 어떤 소년과 대화를 나눈 이후로 그는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내내 조용했다. 그저 희수의 손을 낚아채고 어디론가 빠른 걸음을 옮길 뿐, 평소처럼 말을 걸거나 하지 않았다.
“우으.”
조금만 천천히 가지. 아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지금은 검은 후드를 코까지 눌러쓰고 있어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칼릭스는 어떤 커다란 건물로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희수는 미련이 가득 남은 눈으로 들어온 문을 응시했다. 하지만 칼릭스에겐 이를 챙겨 줄 여유가 없었다.
“보름쯤 묵을 거다.”
이곳은 여행자들이 묵는 숙박업소였다. 주인장은 은퇴한 용병으로, 키가 크고 사납게 생긴 데다 그리 친절하진 않지만 묵는 이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게다가 아래층에 식당이 있어 밖으로 나갈 필요 없이 식사도 건물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보름이라. 그렇게 오래 묵을 수 있는 방은 지금 딱 하나뿐입니다. 안에 욕조가 딸려 있는 데다 고급이긴 한데…….”
“가격은 상관없어.”
“다행이군요.”
“청소는 필요 없고, 매끼 식사도 같이.”
“알겠습니다. 방값은 후불이지만, 식사값은 선불입니다.”
칼릭스는 재깍 금화 한 개를 꺼내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그를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있었다.
“식사는 두 명 몫이지요?”
주인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고, 칼릭스의 옆에 있는 희수를 눈짓했다.
‘헉.’
애꾸눈의 산적같이 생긴 남자가 자신을 응시하자 희수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얼른 칼릭스의 뒤로 몸을 뺀 그녀는 그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저 남자는 누구지? 왜 나를 가리킨 거야?’
희수는 작금의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칼릭스는 대체 왜 갑자기 이 도시로 들어온 것이며, 아까 신전에서 만났던 이와 무슨 대화를 했기에 지금 이리 냉정해진 것일까.
“돈을 넉넉히 줄 테니 여자가 내려오면 언제든 식사를 준비해 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얼굴을 익혀 놔야겠군요.”
“이리 나와 봐.”
칼릭스가 희수의 팔을 당겼다. 희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검은 머리의 아가씨로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애꾸눈 사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희수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날 팔아넘기려는 거야……!’
그렇게 밖에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칼릭스를 원망하듯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희수의 시선을 의식하고도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단단히 굳은 입가만 어렴풋이 보였다.
‘틀림없어.’
희수는 눈물이 울컥했다.
어느새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자신을 살뜰하게 돌봐 주는 이 남자에게 의지하게 된 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스킨십도 잦았기에 호감이 생긴 것도 물론이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자신을 이용해 먹을 생각이 없는 남자에게 고마웠고, 가끔은 처지도 잊은 채 그에게 설레었다.
그런데 날 팔아넘기려 하다니.
민주가 겪었던 그 일을 제가 겪으리라 생각하자 눈앞이 깜깜했다. 칼릭스를 믿고 있었기에 그가 이런 일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이 남자만큼은 이런 짓을 제게 저지르지 않을 줄 알았다. 이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단 한 명만 꼽으라면 바로 이 남자였는데. 희수는 충격에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의사를 불러 드릴까요?”
칼릭스와 희수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 주인장이 물었다.
“됐다.”
칼릭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여자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아마 낯선 곳에 와서 그런가 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이곳엔 보는 시선도 많고, 무척 시끄러운 데다…….
다시 계단을 오르던 칼릭스가 번뜩 스친 생각에 휙 몸을 돌렸다.
“아, 당신 말대로 의사가 필요하군. 돈은 얼마가 되도 좋으니 자명한 의사를 불러 줬으면 한다.”
“알겠습니다. 혹시 어떤 병에 걸리신 겁니까?”
그래, 어떤 병이라고 미리 말을 해 줘야 의사도 당황하지 않을 듯했다. 칼릭스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을 못 하는 병.”
주인장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칼릭스는 안내받은 침실에 들어섰다.
그는 여자와 단둘이 된 후에야 뒤집어쓴 후드를 벗었다. 답답함에서 벗어난 건 둘째 치고, 저도 모르게 신경이 다른 데 집중되어 있었다.
제법 깔끔하고 그럭저럭 볼만한 장식들이 놓인 방 안을 힐끔 둘러보았다. 크고 푹신해 보이는 침대에서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침대는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가끔씩 도시에 들를 때마다 묵는 곳은 이런 고가의 침실이 아니었다. 돈은 차고 넘치도록 있지만 그는 죄인이었다. 좋은 것을 누리고 살기엔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예전에 살았던 곳은 물론 이보다 훨씬 고급이지만…….
“뭐야. 왜 그래?”
그런 제가 보기에도 침실은 썩 괜찮은데, 여자는 몹시 불안해 보였다. 아까 신전에 막 도착했을 때만해도 신이 난 것처럼 들떠 보였는데, 이제 그녀는 제 옷자락을 있는 힘껏 움켜쥐고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헤일로와 나눴던 대화를 알아들었을 리도 없는데. 자신이 교황 시해범이라는 걸 알았을 리도 없는데…… 대체 왜 이러지?
“좀 쉬고 있어. 난 씻, 씻고 올 테니까.”
‘씻고 온다’는 말이 왜 이리 어색한지.
“먼저 자도 돼. 날 기다리라는 건 아니야. 아니, 그냥 그런 건…….”
칼릭스는 주저주저 어렵게 여자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꺼냈다. 괜히 난감하여 마른세수를 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기대하고 이리로 데려온 게 아니다. 아까 그곳에서 그녀는 추워서 몸을 떨었고, 가뜩이나 허약한 여자가 쓰러지진 않을까 갑자기 크게 염려스러워서 데려왔을 뿐이다.
“젠장. 변명 같잖아.”
어차피 이해하지도 못할 텐데 혼자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칼릭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여자를 침대로 이끌었다. 어깨를 눌러 앉히곤 그녀의 손에 쥐인 제 옷자락을 빼내었다.
“앉아. ‘앉아’ 알지? 앉아 있어. 누워도 되고 자도 돼.”
하지만 여자의 떨리는 동공은 자신을 빤히 응시하며 도로 옷을 잡아 왔다.
“피곤하게 또 왜 이래.”
헤일로와 썩 반갑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칼릭스 역시 심적으로 지쳐 있었다. 신경질적인 음성이 명령하듯 고압적으로 흘러나왔다.
“앉아서 쉬라고. 자라고.”
“…….”
희수는 처음 보는 칼릭스의 그 기세에 눌려 스르르 옷자락을 놓았다. 자신을 버리고 애꾸눈에게 팔아 치우려 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꾸만 속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 애처롭게 그를 올려다보며 소심하게 손가락 끝을 붙잡았다.
그러자 몸을 돌리려던 그가 멈칫하며 다시 희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자신을 달래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냄새가 날까 봐 그래. 너한텐 더러운 냄새가 나지 않는데, 혹시 나한텐 그런 냄새가 날까 봐……. 그럼 싫을 거 아냐.”
그녀의 옷에선 당연하게도 항상 구린내와 땀 냄새가 났다. 그런데 스스로도 정말 이상하지만 칼릭스는 단 한 번도 이를 불쾌하다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매 순간 그녀의 옆에 더 가까이 있고 싶은 강한 끌림을 억누르기 바빴다. 후각을 비롯한 제 속의 어딘가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그는 자상하게 엄지로 그녀의 볼을 쓸어 주었다.
“네가 내 옆에 있을 때 불쾌할까 봐 그래. 금방 깨끗이 씻고 올 테니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얼른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의사를 수소문하는데, 저분이 미혼인지 기혼인지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아까 깜빡하고 묻질 못했습니다.”
애꾸눈의 주인장이었다. 답은 분명하건만 칼릭스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여자를 돌아보곤 그녀의 처지를 생각했다.
자신이 목숨을 구해 준 여자.
오갈 데가 없는 여자.
반드시 내가 돌봐 줘야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
나를 따라올 여자.
그러니…… 약간의 책임이 내게 있는 여자.
칼릭스는 저도 모르게 카펫을 내려다보았다. 머릿속엔 많은 생각이 오갔다. 주로 여자에 관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박힌 가시가 그를 쿡쿡 찔렀다. 여자를 보고, 만지고, 하루하루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점점 커지는 것만 같은……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아주 뾰족한 가시.
그녀에게 엉켜 있는 제 감정들이 복잡해서 뭐라 정의하기가 아직은 어려웠다.
그런데 더 고민할 것 없이 저절로 말문이 열렸다.
“유부녀. 결혼한 여자다.”
“그럼 돈이 이 정도가 더 될 것 같은데…….”
주인장은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칼릭스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의사를 찾아보겠습니다.”
칼릭스는 주인장이 침실을 나가고 나서도 한참이나 닫힌 문을 응시했다.
유부녀라니,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마치 몰아치는 태풍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 안에는 저처럼 태풍에 휩쓸린 많은 것들이 있었다. 신전, 동료, 제가 죽인 교황, 매녹…… 하지만 여자는 그 안에 없다. 여자는 태풍의 눈 안에서 고요하게 서 있을 뿐.
기실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을 보이는 건 저 여자인데, 속마음은 그가 더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저 의연한 척, 티를 내지 않을 뿐이다.
칼릭스는 마른세수를 하고는 겉옷을 벗었다.
“씻기나 하자.”
여자는 어느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잠을 자려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엎드려서 고개를 푹 박고 자다가 질식이라도 하면 어떡하지.
여자를 바로 눕혀 주려 향하던 칼릭스는 문득 자신이 지나친 걱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픽 웃었다.
저 여자는 분명한 성인이다.
그런 것까지 챙겨 줄 필요는 없지. 좀 의식적으로라도 여자를 멀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마실 물과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 준 칼릭스는 겉옷을 전부 벗고,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탁자 위에 벗어 놓았다.
그가 목에 걸고 다니는 건 신분을 증명하는 오색찬란한 펜던트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에선 파란 불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신분증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목에 걸린 건 검은색 돌이었다. 새까만 돌은 안이 들여다보이지도 않는다.
다크 스톤.
저 안에 든 게 대체 무엇일까 가끔 상상해 보곤 했지만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 도시와 산과 바다의 모든 것들이 이름을 얻었을 때 생긴 것이니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크 스톤은 어차피 이 도시의 평범한 이에겐 쓸모가 없는 돌멩이였다. 허나 그에겐 목숨보다 중요한 물건이라 목에 걸고 다녔다.
언젠가 죽게 된다면, 저것을 세상에 남기지 않기 위해서.
* * *
희수는 베개가 젖을 때까지 울었다. 애꾸눈 남자가 침실 문을 두드리고 또 저를 눈짓하며 손가락 3개를 펴 보였다. 아까는 두 개였는데, 이번엔 3개였다. 뭘까. 무슨 대가로 자신을 더 높은 값에 판다는 걸까.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데려가더라고요. 처음엔 침대에서 이불 덮고 잘 수 있어서 좋았어요. 속없이 그런 생각을 했죠.’
민주의 스산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사실은 창녀로 팔려 간 거였는데.’
자꾸만 나쁜 상상이 그려졌다.
‘안 돼. 안 돼!’
희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팔려 갈 수는 없다!
덜컥덜컥! 희수는 거칠게 칼릭스가 들어간 욕실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잠겨 있었다. 쾅쾅쾅!
자신의 노크소리를 들었는지 안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뚝 멈췄다. 하지만 칼릭스는 뭘 하는지 문을 열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밖에 누가 왔어?”
그가 뭐라고 말했지만 희수는 그를 기다릴 수 없었다. 뜨거운 감정이 뱃속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주먹으로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쾅쾅쾅쾅! 그래도 문을 열어 주질 않아 급기야는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쾅쾅!
“잠깐, 잠깐만.”
결국 살며시 문이 열렸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겨우 그의 눈이 보일 정도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금발과 얼굴에 묻은 물기를 보니 그는 태평하게 목욕이나 하고 있었다.
“지금 다 벗고 있단 말이야. 씻는 중이라고. 대체 무슨 일이길래……! 잠깐! 무슨 짓이야?”
희수는 막무가내로 문을 밀었다. 칼릭스는 방어하듯 문을 막아섰다.
“옷을 입고 나갈게. 잠깐 기다려. 기다리라고!”
결국 큰 소리를 치자 여자의 몸이 움찔 튀었다. 그런데 눈을 마주치고 보니…….
“울었어? 왜? 왜 또?”
칼릭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누군가 침실에 들어왔던 걸까 급히 문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타인의 흔적은 없고 침실은 고요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이런 제기랄! 넌 왜……!”
말을 못 하는 거야!
그 순간 여자가 훌쩍 달려들어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옴팡지게 말아 쥔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때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자는 울분에 차 있었다. 당황한 칼릭스는 간신히 욕실을 빠져나와 잡히는 대로 옷을 손에 쥐었다.
그걸로 자신의 아래, 물건부터 급히 가렸다.
“갑자기 왜 이래?”
가만 맞아 주고 있자니 이 여자가 보통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여태 이런 적이 없었는데, 대체 또 무슨 일인가?
칼릭스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힘을 주었다간 부서질 것 같아서 멋대로 붙잡지도 못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모르는데 어느새 침대 발치까지 다다랐다. 몸을 피하려 옥신각신하다 보니 허벅지 근처에 침대 끝이 닿는 게 느껴졌다.
당황한 그 순간 여자가 그를 침대로 밀어 넘어뜨리곤 위로 올라타 앉았다.
“……!”
칼릭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맨몸에 고스란히 닿는 여자의 체온은 충격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 자세!
여자가 자신의 허리를 깔고 앉은 이 음탕한 자세는 감히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여자를 떼어 내려 움직였다간 발기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이, 이러지 말고…… 이것 놔 봐. 저리 가. 저리 좀 가라고…….”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졌다. 주춤주춤 몸을 빼려 하자 하체가 비벼졌다. 칼릭스는 자신을 꿰뚫는 벼락같은 감각에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예상대로 몸을 움직이니 더 자극적이었다.
“하……!”
여자가 옷을 입고 있어 꿈틀거릴 때마다 거칠게 성기가 비벼지고 압박이 가해졌다. 눈앞이 하얗다. 극도로 민감해진 오감이 그를 벼랑으로 몰아갔다.
이대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마른침만 꿀꺽 넘어갔다.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칼릭스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래, 그녀가 알아듣는 몇 개의 짧은 말들이 있다.
“꺼져! 안 돼! 저리 가!”
그때 여자가 허탈하게 웃더니 그를 찌릿 노려보았다.
깊은 원망이 담긴 눈빛.
“……!”
처음 보는 그녀의 그 얼음 같은 시선에 칼릭스는 가슴 한가운데가 꿰뚫린 것만 같았다.
이 여자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그녀는 어느새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칼릭스는 그녀가 제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감히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목덜미와 가슴, 복근을 꾹 누르듯 스쳐 내려오는 여자의 손바닥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를 향한 정염이라기보다 악을 쓰듯 억세고 거친 손길이었다.
황무지에서, 그 춥고 거친 흙바닥에서 나누던 입맞춤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 애틋한 감정은 없었다. 이제야 서로를 이해하겠구나 싶어 기뻤는데…… 지금은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허무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은 여자와 소통할 길이 없다는 사실에 참담했다.
“이러지 마. 이러지 좀 말라고……!”
하지만 이보다 더 미치겠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가 자신을 만지는 게 좋다는 것이다.
“아, 젠장…….”
그녀가 슬금슬금 몸을 아래로 내리며 하체를 움직이자 칼릭스는 본능적으로 제 다리 사이에 여자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움직였다.
분명 그녀를 밀어낼 수 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녀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사실 애무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자가 자신의 위에 올라앉은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성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복근에 닿았고, 따뜻한 손이 그의 기둥을 감쌌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쌕쌕 숨만 내쉬던 칼릭스가 상체를 조금 일으켜 앉아 흘러내린 그녀의 버석한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이런 걸 해 주기 때문에 널 돌봐 주는 게 아니야. 알아……?”
“…….”
하지만 여자는 그를 돌이나 나무를 보듯이 무감하게 응시했다. 칼릭스는 몸이 땅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으면서 어떻게 저런 눈으로 나를…… 나를.
깊은 실망과 배신감에 칼릭스의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갔다. 제 아래에서 느껴지던 열기가 꼭 타인의 것처럼 낯설었다.
그녀에게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날카로운 것이 그의 심장을 콕콕 찔러 욱신거리고 아팠다.
칼릭스가 망연자실한 사이,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여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곤 크게 발기한 남성을 입에 머금었다.
“아…….”
새로운 곳에 와서 자신을 버리고 갈까 겁이 나서 이러는 걸까.
여자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반드시 이런 행위를 해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옆에 붙어 있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다 증명하듯이…….
굳이 내가 아니라도 상관없는 거겠지. 그래, 다른 어떤 남자라도 괜찮았을 거다.
그녀는 칼릭스의 반응을 살피며 혀와 입술을 움직였다. 그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이 그를 찌르고 지나갔다. 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여자와 자신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이런 식인 건가, 너는…….”
칼릭스는 빈 천장을 응시했다.
입맞춤을 했다고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여자의 손을 잡고 신전으로 숨어 들어오면서, 신전의 누군가를 마주칠 각오를 해 가며 도시로 들어온 건 무엇 때문일까. 이 오갈 데 없는 여자 때문에 제 미래를 고민했던 것은…….
“내가 왜 널…….”
아니, 아니다. 이 여자에게 그런 건 상관없다. 그가 여자를 걱정하는 것 따위는 무의미하다. 자신이 왜 여자를 돌봐 줬는지, 그런 건 이 여자는 아무 관심도 없다. 항상 이런 식으로, 여체를 이용해서 자신을 붙잡으려 하는 게 바로 이 여자니까.
가슴이 비틀리듯 죄어들어 쓰리다. 이런 여자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던 묘한 설렘이 산산이 부서져 그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칼릭스는 주먹을 꾹 쥐었다.
어차피 다신 신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데.
항상 자신을 이용하려는 여자를 한 번쯤 제가 탐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란 말인가.
“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신전으로 돌아갈 구심점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
여자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 그래서다. 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본능적인 행위일 뿐이다. 이 여자는 어차피 매춘부였고, 그녀에게도 아마 자신과의 성행위는 별 게 아닐 테니까.
여자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니 제게도 이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수십 번을 되뇌었다.
모른 척하기엔 자꾸만 속을 찌르는 손톱만 한 가시, 겨우 그 정도의 여자일 뿐이다.
칼릭스는 그렇게 뛰는 가슴을 애써 설명했다. 여자를 보고 있으면 솟구치는 이 불꽃같은 감정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기 위하여 애써 묻어 두기로 했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 따위는 없는 죄인. 언제든 재판의 칼날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교황 시해범. 이 세상이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언제든 미련 없이 사라질 먼지 같은 존재.
칼릭스는 자신을 그렇게 정의했다.
그렇게 보니 이 정도의 여자가 딱 제게 어울리는 것 같았다. 여자의 일방적인 애무에도 쉽게 몸이 달아오르니 자신도 다를 게 하나 없지 않은가.
결심한 그가 여자를 일으킨 채로 완전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아랫도리를 가리던 수건뭉치를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너도 벗어.”
혼자 여자에게 만져지기만 하는 건 싫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처 손의 떨림이 감춰지지 않았다. 여자의 옷을 벗기는 것도 당연히 생전 처음이었다.
“네 소원대로 내가 책임져 줄 테니까…….”
내가 죽기 전까지는.
서로를 마주 본 둘 사이에 오가는 건 열기가 아니라 오기였다. 여자는 옷을 전부 벗기는 그 순간까지도 조용했다.
전엔 제 바짓단을 들춘다고 사람을 치한 취급을 하더니.
“이렇게 싸구려인데 그땐 왜 비싼 척을 했지?”
비열하게도 여자를 상처 주고 싶었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테지만. 제 속이 쓰린 만큼, 자신이 실망한 만큼, 똑같이 여자를 아프게 하고 싶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을 똑같이 흉내 내 본다.
자신을 만지던 우악스런 손길을 따라해 본다.
이건 그저 여자를 이용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이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뇌까린다.
그런데 자꾸만 가슴이 뛴다. 짜증 나게…….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얇은 팔뚝을 지나, 조그만 어깨에서 그는 머뭇거렸다. 세게 쥐면 부서질 것 같아서 저절로 조심하게 된다. 주의하지 않으면 여자를 또 다치게 할지도 모르니까.
가뜩이나 부실한 이런 여자를 상처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를 만지고 있으니 속에서 치솟던 불길이 어느덧 물세례를 맞은 것처럼 식어 버렸다.
그의 커다란 손은 어느새 한껏 느릿하고 세심하게 움직였다.
“난 처음이라 여자를 즐겁게 하는 법은 몰라. 네가 잘 알 테니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칼릭스는 여자의 어깨 위에 걸린 속옷 끈을 차마 내리지 못했다. 그가 머뭇거리며 주저하자 그녀가 단숨에 제 속옷을 끌러 내렸다.
나신의 여체가 불시에 눈앞에 담겼다. 칼릭스는 놀란 숨을 집어삼켰다.
우유 빛깔의 뽀얀 피부 위로 솟은 둔덕이 탐스럽다. 그 가운데의 정점. 진한 분홍색…… 여자의 입술 색과 비슷하다.
저건 어떤 맛일까. 여자의 입술 맛과 비슷한가. 그만큼 달고 부드러운가.
“잠깐, 잠깐만…….”
얼음처럼 굳은 그를 다시 넘어뜨린 여자가 팬티마저 벗기 시작했다. 늘씬한 다리를 한 짝씩 빼고, 손가락 끝에 걸린 속옷을 탁자 위에 올려 두는 일련의 동작에 칼릭스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르기만 한 줄 알았던 이 여자의 몸이 저렇게 아름다웠다니…….
칼릭스는 그녀의 모든 행동을 숨죽이고 주시했다. 홀린 듯이. 귀가 뜨겁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데, 도저히 시선이 거둬지지 않았다.
평소 제 앞에서 어리바리하던 모습과는 달리 무척 능숙해 보였다.
업으로 삼았던 일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가…….
다시 제 허리 위에 걸터앉은 여자는 저와 같이 완전한 나신이었다. 그녀가 한 손으로 그의 남성을 붙잡고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
이런 모습을 대체 몇 명의 남자들이 보았을까. 그 생각을 하자 다시 속에서 천불이 솟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는 감각이 그의 예민한 성기 끝에 닿았다.
“아아…….”
아주 부드럽고 촉촉한 살결. 매끈한 게 꼭, 젖은 꽃잎 같기도 하고……. 그의 윗부분이 안으로 꾹 눌러지자 입안보다 훨씬 뜨겁고, 훨씬 미끄러운 촉감이 전해졌다. 그리고…….
“으윽.”
좁다.
굉장히 빠듯하다. 강한 압력에 칼릭스는 인상을 구겼다.
그녀도 뭐가 잘 안되는지 미간을 크게 찌푸렸다. 자신만만하게 움직이던 조금 전과는 달랐다.
윗머리가 채 들어가지 못했다. 귀두만 입구에 살짝 걸쳐졌다가 자꾸만 빠졌다. 안타깝게 여성의 입구 옆을 스치고 빠질 때마다 칼릭스는 숨이 가빠지고 하체가 들썩였다. 그녀가 기둥을 아래에 끼워 맞추려고 거친 손길로 쥐었다 놓았다가 반복할 때마다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허벅지에 힘을 단단히 주고 몸을 들어 올렸다가 빼며 몇 번이나 시도했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젖지도 않은 곳에 흉기같이 거대한 물건이 들어갈 리 없었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푸욱 나왔다. 그녀가 포기하고 입으로 애무를 해 주려는 것처럼 보이자 칼릭스가 얼른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아!”
뒤로 넘어가려는 여자의 허리를 얼른 받쳐 안았다. 그리고 한참 전부터 맛보고 싶었던 여자의 입술을 깨물었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혀로 쓸고 빨았다.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황홀한 촉감에 정신이 다 혼미했다. 칼릭스는 그 입술 사이로 조심스레 혀를 밀어 넣었다. 전에 그녀가 했듯이.
칼릭스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여자의 감각에 완전히 집중하고 싶어서 눈도 감아 버렸다. 지금 알고 싶은 건 이 여자 하나뿐이니까. 다른 건 더 이상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의 다른 손은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신성한 잔을 만지듯이 그녀의 마르고 뾰족한 어깨를 어루만졌다. 거기서 이어진 움푹 파인 쇄골을 따라갔다. 여자의 피부를 손바닥 모든 부분으로 음미하고 싶어서 저절로 모든 행동이 느릿해졌다.
그녀의 몸이 뒤로 밀리는 듯하자 그가 얼른 엉덩이를 자신에게 바짝 끌어왔다. 한껏 딱딱한 성기에 그녀의 삼각지가 닿았다. 이제는 묵직한 고환까지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닿을 만큼 남성이 크게 위로 발기해 있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보다는 여자의 몸에 집중했다. 말랐다고만 생각했는데 이 마른 몸마저도 그에겐 아름다웠다.
자신에겐 없는 것들이, 그녀에겐 있다.
칼릭스는 허락을 구하듯이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여자의 가슴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크랜베리 알갱이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던 그 정점을 혀로 툭 건들였다.
“흣.”
제 어깨를 짚은 여자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반응 때문인지 정말 상큼한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가 이번엔 입술 사이로 유두를 물고 혀를 꼿꼿이 세워 슬슬 어루만졌다. 신기하게도 작은 돌기는 단단하게 변하며 형체가 확연해졌다. 물고 빨기에 훨씬 수월하도록 모양이 변한 것이다.
“으응…….”
목을 울리는 여린 신음이 터졌다. 얼굴을 확인하니 조금 붉어진 채 흐트러진 모습이 꽤나 보기 좋았다.
칼릭스는 다시 눈을 감고 혀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여자의 가슴은 폭신하고 따뜻하다. 금방 나온 빵을 만지는 것 같았다. 아주 부드럽고, 물론 여자의 몸에서 부드럽지 않은 부분은 없지만 그중에 가슴이 가장 연하고 몰랑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두 개이지 않은가. 오른쪽을 입에 넣고 한참을 빨다가 왼쪽으로 옮겨 가자 여자의 몸에서 힘이 빠진 것처럼 축 늘어졌다.
자세가 불편하다. 그의 커다란 몸이 한참을 수그려야 했다. 칼릭스는 여자를 추켜올리다가 아예 침대에 눕히기를 택했다.
몸이 순식간에 휙 돌아가자 여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히익’ 놀란 숨소리를 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귀에 속삭였다.
“쉬이……. 어디를 만져야 네가 좋아할까.”
여자의 이름을 알면 좋을 텐데. 여자가 제발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의 몸 어느 곳을, 어떻게 해야 좋은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어.”
그가 중얼거리는 숨소리에 간지러운지 여자가 키득거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젖혔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가 무척 가녀렸다.
“넌 자주 웃질 않아. 웃을 일이 없어서 그런가.”
칼릭스는 그녀의 귓바퀴를 따라 나비가 내려앉듯 잔잔한 입맞춤을 남겼다. 여자의 젖꼭지를 빨듯 귓불을 빨자 그녀가 한껏 몸을 움츠렸다. 두 다리가 모아지며 그의 허리를 조였다.
손으로는 그녀의 가슴을 덮었다. 그의 손이 커다래서 가슴은 그 안에 다 차지 못했다. 하지만 감촉이 황홀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커다란 마시멜로 같다.
손가락으로 돌기를 스칠 때마다 열이 났다. 유두를 두 번째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기도 하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비비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이 부분은 자신이 이렇게 만져 주라고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작고 탄력적인 느낌의 도톰한 살점은 그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 그건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쩔 줄 모르고 몸을 배배 꼬았다. 어느덧 얼굴엔 열기가 서려 있었다.
“네가……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어.”
이 행위가 그저 네 목숨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길. 널 스쳐 간 수많은 남자들과 했던 그저 그런 행위가 아니길…… 제발.
그녀의 목덜미가 좋았다. 핥으니 약간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의 체취와 맛이 온 감각으로 느껴져 좋았다. 그래서 목덜미에 대고 일부러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후…….”
칼릭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자와 단둘이 벌거벗고 누워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가슴이 너무 떨려서 지금 졸도해도 이상할 게 하나 없었다.
이 여자가 아니고서는 이럴 수가 없을 듯했다. 어떻게 자신을 벗겨 여기까지 끌고 왔는지 새삼 놀라웠다.
제 처음을 불쾌한 상황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이젠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녀의 가슴에서 손을 떼기 무척 아쉬웠다. 하지만 아직도 만져 보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칼릭스는 얇은 발목을 잡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허리를 스쳐, 머리까지 높게 올렸다. 여자의 하체가 완전히 들리자 그가 성배에 입 맞추듯 여자의 복숭아뼈와 발등에 키스했다. 점을 찍듯 발목에서부터 종아리, 허벅지까지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깊이 숨겨진 안쪽.
“우으.”
여자가 싫다는 듯이 몸을 비틀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입술을 묻고 시선을 올렸다.
“왜…… 너도 나한테 하는 애무인데. 내가 하면 안 되는 건가?”
“으으.”
“나도 해 주고 싶어.”
“으으으…….”
“하고 싶어. 하게 해 줘.”
“우으.”
칼릭스는 황당하게 웃었다. 이럴 땐 또 기막히게 소통이 된다. 싫다는 의사는 아주 확실했다. 입으로 하는 애무는 싫다고 하니 할 수 없다. 대안을 쓰는 수밖에…….
“난 네 몸을 모른다고. 실수할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며 한 손을 여자의 다리 사이로 움직였다. 제법 살집이 있는 엉덩이를 손에 꽉 쥐었다가 놓고 그 안쪽으로 천천히 손을 밀어 넣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의 가슴은 펄떡펄떡 뛰었다. 심장이 곧 터질 것 같았다.
여자의 비밀스런 그곳.
지금 그곳에 손을 가져가고 있다…….
저절로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칼릭스는 떨리는 심경을 숨기고 최대한 의연하게 속삭였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아무리 무지한 그라도 여자의 몸에 자신의 것이 들어가는 게 성행위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하물며 여자도 제 것을 넣다가 실패했는데.
“아, 여기…… 여기 정말 부드러워.”
손에 닿는 감각이 사람의 피부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그곳은 점막에 가까웠다. 한껏 젖은 데다 무척이나 뜨거운, 촉촉하고 미끌미끌한 감각이, 꼭 입안을 만지는 것 같다.
“이건 뭐지?”
그가 여성지 둔덕의 가장 위에 있는 작은 돌기를 건드리자 여자의 몸이 펄쩍 뛰었다. 다시 한 번 툭 건드리자 그녀의 다리가 확 조여들어 그의 팔뚝을 잡았다.
예민한 반응을 이끌어 내는 부분인 듯했다. 마치 가슴 위의 돌기처럼.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칼릭스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주시하며 엄지로 둥글렸다.
그러자 젖꼭지가 단단해지듯 이 부분 역시 조금씩 부풀어 오르며 통통해졌다. 작은 콩알 같은 크기지만 모양이 확실해지자 만지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이 부분 또한 제가 만져야 하는 부분이 확실했다.
이를 증명하듯 여자는 숨을 쌕쌕 내쉬며 이리저리 몸부림을 쳐 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축축한 액체가 그의 손등을 적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자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보니 여성지에서부터 애액이 회음부까지 흘러 있었다. 어두워서 음부가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물기가 반사되어 맨들맨들한 게 보였다. 그녀의 엉덩이 아래 침대보가 젖어 있었다.
“혹시.”
소변을 본 건가 싶었다. 하지만 역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돌기를 쓱 훑어 내리자 끈적이는 촉감이 기묘했다. 묽은 꿀 같은 것이…… 확실히 이건 소변이 아니다. 묘한 냄새가 나서 한번 맛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네가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칼릭스는 아쉬운 마음으로 그녀의 여성을 만지작거렸다. 만지면 만질수록 그곳은 더욱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칼릭스는 액의 정체가 궁금했다. 어디서 이 꿀 같은 액이 나오는지, 그곳을 찾아 손가락을 놀렸다.
이윽고 돌기의 아래, 항문의 위쪽에 위치한 움푹 파인 부분에 작은 샘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곳이 바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될 입구였다. 정확히 알기 위해 그는 입구를 천천히 문질렀다.
“여기? 여기가 맞나?”
한데…… 아무래도 여기가 아닌 것 같다. 입구는 무척 작고 압박이 세서 손가락 하나를 넣기도 주저되었다.
칼릭스는 슬쩍 눈을 내려 제 것의 크기를 가늠했다. 여자의 팔뚝만한 이 물건을…… 이곳에……?
“여기가 아닌 것 같은데.”
그녀의 이 작은 입구에는 도저히 제 것을 넣지 못할 것 같았다. 아까 그녀가 제 것을 대체 어디에 넣으려고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다시 그곳을 슬슬 어루만지자 여자의 다리가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봐.”
칼릭스는 그녀가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도록 올려 잡은 발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녀가 힘을 주자 신기하게도 제 손가락이 안으로 조금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여린 살을 함부로 파고들 수 없었다.
손가락을 꽉 조이는 강한 압박이 느껴질수록 가슴이 뛰었다. 마른침을 삼킨 칼릭스는 이성을 찾으려 애썼다. 잘못했다간 그녀를 상처입힐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이곳이 아닌데. 하지만 그 아래는 구멍이 없었다. 항문을 슬쩍 건드리자 여자는 진심으로 싫은 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근데 여긴…… 좁아. 안 들어갈 것 같다고.”
다시 그 구멍 주변을 둥글리며 여자의 반응을 살피니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진 채 저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달뜬 숨과 갈망하는 눈빛이 칼릭스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럼 이곳이 맞는 건가?”
미끈한 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곳에 조금 힘을 주어 입구를 깔짝이던 중지를 밀어 넣었다. 예상외로 어렵지 않게 끝까지 빨려 들어갔다.
“으응!”
선명한 신음소리. 칼릭스의 눈썹을 미묘하게 움직였다. 꼭 강아지가 낑낑대는 것 같기도 하고……. 여자의 본래 목소리를 짐작할 수 있는 신음이다. 성숙한 여자의 색이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다시 소리 내 봐.”
그의 손가락은 길고 두꺼웠다. 덕분에 여자의 안쪽 깊은 곳까지 닿았다. 칼릭스는 최대한 그녀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도록 전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빼냈다가, 깊이 넣기를 반복했다.
“하앙……!”
어느 순간부터는 중지를 깊이 박은 채로 질벽의 오돌토돌한 위쪽 부분을 누르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아! 아! 아읏!”
여자에게선 연신 신음이 터졌다. 그녀가 내지르는 소리가 그를 부추겼다.
“이렇게 하는 게 좋아?”
하지만 아무리 잔뜩 젖은 곳이라 해도 넣기만 수월했을 뿐 구멍 자체가 좁고 바짝 죄었다. 손가락 하나로 안이 꽉 찼다. 이런 곳에 제 것을 넣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칼릭스는 체격만큼 성기가 커다랬다. 남의 것과 비교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제 것이 크다는 자각은 없었다. 다만 여자의 이 좁은 곳에 넣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발기를 하니 전보다 훨씬 거대했고, 방망이처럼 딱딱했다.
이런 걸 여자의 부드러운 이곳에 넣었다간, 다치게 할지 모른다.
“음…… 그냥 이렇게만 해도 될 것 같은데.”
지금도 좋았다. 제 물건을 여자의 안에 굳이 넣지 않아도 칼릭스는 충분했다.
여자의 몸을 만지고, 저렇게 흥분한 얼굴로 젖은 소리를 내는 걸 보고 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성교에 버금가는 음란하고 비밀스런 행위를 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녀의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여자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발기한 성기는 아무 문제도 아니다. 경전을 외우거나, 신께 기도를 올리거나,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금방 수그러든다. 흥분한 성기를 가라앉히는 법은 그에게 익숙했다.
다만 이대로 여자와 이 행위를 끝내기가 아쉬웠다. 그녀의 몸을 좀 더 만져 보고, 더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 내 보고 싶었다.
“여길 만지면 좋은 거지?”
칼릭스는 여자의 반응이 말하는 대로, 그녀가 좋아하는 식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음부에서 나오는 꿀은 그가 좁은 구멍을 오가기 쉽게 했다.
“아으으응!”
그의 손장난이 얼마 가지 않아서 여자의 두 눈이 꾹 감겼다. 허리가 굽고 두 다리가 그의 팔뚝을 붙잡듯 죄어들었다. 그에게 잡힌 한쪽 다리의 발가락이 바짝 굽혀졌다.
“아!”
여자의 고개가 뒤로 바짝 젖혀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