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꾸만 만지게 되는
* * *
칼릭스는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누군가의 단단한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저절로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는 곧장 여자의 존재를 상기해 내고 급히 안도했다. 동시에 반쯤 포기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우……. 깼으면 좀 비켜.”
여자를 줍고, 벌써 며칠째 맞이하는 똑같은 아침이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체온, 그것도 부드러운 여자의 몸이다. 마치 마시멜로 같은…….
이것만은 도저히, 익숙해지려도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저리 가라고!”
그가 소리치자 여자의 몸이 움찔했다. 그러더니 그의 옆구리를 붙잡은 손이 조금씩 움직였다.
가운데로,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간다.
칼릭스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뭘 하려는지 알았다. 첫날 자신에게 해 주었듯이 애무를 해 주려는 것이다. 거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신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슬금슬금 움직여 부드러운 손이 성기에 닿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그가 여전히, 유일하게 마음에 품고 있는 존재의 형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신이었다.
“아…… 안 돼!”
아침인 데다 사방이 밝았다. 빛은 신께서 자신에게 보내는 찬란한 시선이었다. 그분께서 지금 뻔히 내려다보시는데 감히 이런 짓을 할 수는 없다.
“안 되지, 안 돼.”
간신히 여자의 손을 떨쳐 내고 자리에 앉은 칼릭스는 정신을 차리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잠기운은 홀딱 달아났다.
눈가를 비비적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그는 놀라서 숨을 들이켠 채 굳어 버렸다.
조금 엉클어진 머리카락.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게 분명한 얼굴. 망토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
저런 얼굴로 내 것을 만지려 했단 말인가.
겨우 잠에서 깬 저 모습이 왜 저렇게 미약하고 여리게 보이는 건가. 여자들은 원래 아침에 저렇게 유혹적인 건가. 달려들어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물려 죽을 어린 사슴처럼 보인다.
무방비한 여자의 모습에 칼릭스는 아침부터 얼굴이 뜨거웠다. 그녀가 주었던 신체적 자극보다 아침에 마주한 여자의 무방비한 얼굴이 훨씬 더 충격이었다.
“젠장…….”
게다가 밤사이 꿨던 야릇한 꿈도 한몫했다. 칼릭스는 여자를 만난 뒤부터 자꾸만 이상한 꿈을 꿨다. 아침에 보면 속옷이 축축했다. 밤중에 몽정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침까지 바짝 선 성기가 느껴질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게 뭔가.
물론 사춘기를 벗어난 지 얼마 안 되기는 했다. 하지만 엄연히 20살. 성인인 그가 매일 밤 몽정을 하는 건 전적으로 이 여자의 탓이 컸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진심으로 염려스러웠다. 단둘밖에 없지 않는가. 그것도 하루 종일!
칼릭스가 신전을 나오게 된 건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함께 움직이자는 동료들의 제안을 뒤로하고,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지기 위해서 그는 차라리 외톨이가 되기를 선택했다.
각오한 일이지만 무척 외로웠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둘러싸여 지내서인가. 혼자가 되어 보니 꽤나 쓸쓸하고 적적했다.
이 고독 또한 형벌이라 생각하고 익숙해져 갈 때쯤이었다.
자신을 용병으로 칭하고, 매녹을 죽이러 다닌 지 한 달쯤 되어서, 이 여자를 만났다.
여자를 도시까지 데려다줘야겠다, 결정한 건 스스로 자처한 일이지만 아주 골치가 아팠다.
“대체 어쩌자고 널 주웠는지.”
멀뚱멀뚱 눈을 끔뻑이는 여자를 보고 그는 혀를 끌끌 찼다. 해가 뜨고 보니 여자의 상태가 보통 꾀죄죄한 게 아니었다.
“어제 분명히 잘 씻긴 것 같은데.”
그랬다. 이제 그는 여자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손수 씻겨 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여자였다.
변명을 하자면, 여자는 도통 그의 행낭을 품에서 내려놓질 않았다. 손이 없으니 씻겨 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여자는 칼릭스의 행낭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해서, 아침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하는 행동도 바로 짐을 찾는 일이었다.
“저기 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여자를 향해 그가 발치의 나무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간 그녀가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 듯 잽싸게 짐을 품에 안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미련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러니 그가 물가에서 몸을 씻고 있어도 여자는 망부석처럼 뒤에서 짐만 꼭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 그가 물가를 떠나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피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침부터 지저분하기는…….”
칼릭스는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얼굴을 씻겨 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씻겨 주는 면적이 넓어졌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 손이나 목덜미 같은 곳까지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보였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여자는 마치 주인의 손에 모든 걸 맡긴 순한 강아지처럼 시종일관 얌전했다. 물이 묻은 그의 손이 쇄골이나 팔뚝 안쪽의 예민한 곳에 닿아도 아무런 반항이 없었다.
하긴.
저 여자는 어떤 남자가 어디를 만지든 아마 상관없을 것이다. 그런 일을 했었으니 남자의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차라리 우습겠지.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릿속이 급속도로 서늘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쯤 발기했던 성기도 덕분에 가라앉았다.
착잡한 심정이 담긴 그의 시선이 여자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녀는 짐을 든 채로 밤새 타고 있던 모닥불을 끄고 있었다. 마른 가지 같은 몸이 휘청거리는 걸 보니 속이 답답했다.
불을 끄고 자리를 옮기는 그의 행동을 보고 이제는 그녀가 나서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이리 와.”
그 소리를 듣고 여자가 몸을 돌렸다.
“이리 오라고.”
칼릭스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그러자 여자가 기다렸단 듯이 잽싸게 다가와 앉았다. 자신이 뭘 하려는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 가까운 데서 칼릭스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조용해졌다.
“매번 이렇게 다 챙겨 줘야 되냐…….”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턱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눈가에 묻은 눈물 자국과 입가에 묻은 침 자국을 닦아 주었다.
“애도 아니고.”
탓하듯 말했지만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그가 검지로 여자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요즘 기름기 많은 고기를 먹였더니 얼굴에 살이 좀 붙어서 보기 좋았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이 마음에 들어 한참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한 것 같다. 지문을 묻히듯 문지르고, 볼을 쥐었다가 놓았다가.
“너 몇 살이야?”
어차피 대답이 돌아오지 못할 질문이었다. 여자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칼릭스는 매번 말을 걸었다.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답 없는 대화였다.
단둘이 가까운 데 있을 때, 여자는 눈빛으로 자신의 모든 걸 전하려는 듯했다. 당신이 내 세상 전부라고. 난 당신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다고. 그러니 제발 날 버리거나 귀찮아하지 말아 달라고.
당신을 위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그 애처롭고 간절한 눈망울을 보고 있을 때면 침묵은 자연스레 야릇한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너 몇 살이냐고…… 응?”
얼굴에 묻은 낙엽 부스러기와 먼지를 다 닦아 주고도 그의 손길은 떨어지길 주저했다. 자꾸만 만지고 싶었다.
“이름은 뭔데.”
그는 여자의 양쪽 볼을 누르고 붕어처럼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가 놓았다. 분홍색 통통한 입술이 툭 튀어나온 게 무척 귀여웠다.
“말 좀 해 봐. 말. 아무 말이나 좀 해 봐.”
“…….”
한참이나 여자와 눈을 맞추고 그녀의 얼굴을 지분거리던 칼릭스는 뒤늦게 손길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내가 또 뭘 하는 건지.”
도시, 블랙캐슬은 아직 일주일이나 더 가야 했다.
도시에 둘러진 성벽은 사람 키의 15배쯤 된다. 평범한 사람은, 아니, 아무리 단련된 사람이라도 그 성벽은 몰래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칼릭스는 가능했다. 그는 성벽을 맨손으로 오르고 내려올 수 있었다. 그가 가진 성력 때문이 아니다. 물론 더 쉽게 넘나들기 위해서 성력을 쓰기도 하지만, 성력이 없이 근력만으로도 벽을 타고 오를 수 있었다. 이 꼬챙이 같은 여자 하나쯤 업어도 무리는 없을 듯했다.
혼자라면 신분을 증명할 목걸이로 성문을 통과하면 되지만, 문제는 여자가 신분미상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어둠의 경로로 여자의 목걸이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맡기면 되겠지.
“피곤하다, 피곤해.”
둘은 며칠 전 숲을 벗어났다. 사방이 뻥 뚫린 황무지를 걸으며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게 웬 개고생이냐…….”
혼자 하는 말은 주로 신세한탄이었다. 여자를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한 자신의 신세. 본능과 욕구에 아침저녁으로 반응하는 무지한 몸. 그동안 신전에선 어떻게 그렇게 순진하게 살았을까. 아, 거긴 여자가 없지……. 더군다나 이렇게 시선을 끄는 여자는 없다.
게다가 교황 친위대 기사단 내에선 여자와 손끝만 스쳐도 악마, 카이사르와 내통한 죄인이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혼자이지 않은가. 이미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는데, 여자를 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게다가 저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흔쾌히 내줄 기세다.
어떤 짓을 저질러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를 내려다보시는 신께서는 알고 계신다.’
칼릭스는 걷다 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죄 많은 몸뚱이를 가진 주인의 한탄은 끝이 없었다.
“제기랄. 왜 하필 저런 걸 만나서…….”
더욱 짜증 나는 건 바로 자신의 모순이었다. 머리에서 하는 생각과, 신체의 부조화는 기막힐 정도였다.
그는 사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법진을 그리고, 성력으로 파란 불꽃을 틔워 내면 바로 도시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매녹을 소탕한다는 명목이지만 사실은…… 사실은.
“하아.”
그는 자신의 이성을 벗어난 모든 게 낯설었다. 특히 저 여자의 모든 게 그랬다. 그녀의 작은 행동과 숨소리, 모르는 곳에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겁먹은 눈빛까지.
저 낯선 여자가 너무나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자신을 조절하는 머릿속 어딘가가 망가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바로 옆에 있는 여자에 대해서 하루 종일 생각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 *
철퍽! 희수는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진흙 옆으로 넘어졌다. 다행히 온몸에 진흙이 묻거나 하진 않았다. 양손으로 커다란 짐을 들고 있으니 비탈길을 걷기가 용이하지 않았을 뿐.
‘진흙이 있는 걸 보면 여긴 비가 왔던 모양이네.’
다시 그랜드 캐니언처럼 생긴 황무지 협곡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몰라도 이곳은 숲과 황무지가 반복되었다.
희수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옷에도 구정물이 튀었지만, 그녀는 안고 있던 행낭의 진흙을 가장 먼저 털어 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제 몸에 뭐가 묻거나 말거나, 저 남자의 기분을 거스를 짓을 하지 않는 게 희수에겐 훨씬 중요했다.
넘어진 무릎이 조금 아픈 것 빼곤 아무렇지도 않았다. 돌바닥에 넘어진 것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몇 발자국 앞서가던 남자가 부리나케 옆으로 달려왔다.
“Tu es blesse? (너 다쳤어?)”
호들갑스럽게 이리저리 살피는 걸 보니 몸이 상했는지 걱정스런 눈치였다.
하지만 희수는 아직도 이 남자의 정확한 의도를 알기가 어려웠다.
그가 하는 걸 보고 있자면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귀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을 버리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Tu es une veritable casse-pieds. (하여간 정말 귀찮게 군다.)”
남자는 매 순간 희수를 의식했다.
몹시 귀찮은 티를 굳이 내면서도 챙겨 주는 게 끝이 없었다. 내버려 두면 충분히 그녀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먼저 해 주려고 들었다. 굳이.
식사 때는 뜨거운 고깃덩이를 후후 불어서 식혀 주고, 눈에 보이는 지방 같은 걸 섬세한 손길로 전부 제거해 주었다. 저를 가까운 옆에 앉히고 입만 벌리게 했다. 아기 새에게 먹이 주듯이, 살만 쏙쏙 발라 먹여 주는 것이다. 손도 없는 사람처럼.
‘왜 이렇게까지 해 주지?’
희수는 더는 그를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 일을 찾아서 하려고 했다. 자신도 할 수 있는 간단한 것들, 예를 들어 마른 장작을 구하거나 낙엽을 모아 오는 등의 일을 하려고 하면 그는 항상 그녀의 손을 잡고 데려와 가만 앉혀 놓았다.
그러곤 그 혼자 모든 것을 했다.
혼자 불을 피우고, 작은 동물을 잡아 손질해서 고기를 구워 먹여 주었다. 그리고 물가로 데려가 씻기고, 잘 때는 옷을 벗어 몸에 둘러 주는 것이다. 아침에는 눈곱을 떼어 주고, 옷에 묻은 흙이며 먼지 같은 것을 털어 준다. 걷다가 쉴 때는 제 다리맡에 앉아서 더러운 운동화를 닦아 주기도 했다.
그러면 희수는 이 남자가 자신을 꽤나 아껴 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 사람도 외로웠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자신을 챙겨 주는 걸 보면 체력이 어마어마한 남자였다. 허리의 힘만으로 맨땅에서 공중 제비돌기를 하는 걸 보고 처음엔 그가 곡예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남자는 이 무서운 숲과 황무지를 혼자 쏘다니며 좀비를 죽이는 게 직업인 듯했다.
이곳에도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다고 했는데, 강도들처럼 무리도 이루지 않고 혼자 좀비나 찾으러 다니는 일상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러니 저같이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누군가 옆에 있으니 내심 반가웠구나 싶은 것이다.
개나 고양이를 예뻐하듯이, 자신을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일례로 그는 스킨십을 굉장히 좋아했다. 손이나 발을 만지고 씻겨 주는 건 예사였다. 괜히 같은 자리를 몇 번씩 닦아 주면서 한참이나 만지려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만지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제 볼을 닦아 줄 때 이 남자의 눈빛을 보면 희수는 제 처지도 잊고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하지만 그가 만지는 부위는 한정적이었다. 가슴이나 허벅지를 주물럭거리거나 하는 더러운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희수는 남자와 하는 스킨십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남자가 항상 조심스럽게 자신을 만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외양도 상당히 매력적이라 손길이 거북하지 않았다.
어디서 보아도 호감이 갈 만한 남자였다. 처음에 눈만 마주쳤을 땐 정신이 없어 남자가 이렇게 잘생겼는지 미처 몰랐다.
금발머리에 파란색 영롱한 눈동자, 깨끗한 피부에 곧은 콧날, 핑크빛 입술. 항상 좋은 향기가 나는 커다란 손.
청순하면서도 묘하게 섹시했다.
게다가 그는 몸이 무척 단단하고 체격이 좋았다. 거대한 나무를 다리 힘만으로 뛰어 올라갔다가 그 위에 앉은 새를 맨손으로 잡아 오는 남자였다.
혹시 자는 사이에 자신을 버리고 갈까 봐 밤마다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잠들 때도 싫지 않았다. 그의 향기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희수에게 그는 ‘절대적인 무력을 가진 마법사’였다. 옆에만 붙어 있으면 죽을 일이 없었다.
며칠간 두 번이나 좀비를 마주쳤는데, 남자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손에서 파란 불꽃을 만들어 내 좀비를 태웠다. 그가 하도 담담해서 희수는 미처 놀라지도 못했다. 그에겐 개미를 밟는 것과 좀비를 없애는 게 비슷했다.
‘날 도와주려는 걸까?’
그가 아침저녁으로 물가에 데려가 얼굴을 씻겨 주고, 심지어는 제 콧물까지 성심성의껏 닦아 주는 걸 볼 때면 희수는 진심으로 헷갈렸다. 저를 인형쯤으로 생각하는가 보다, 안심을 할 법도 하지만 그러기엔 뭔가 이상했다.
그를 만난 첫날. 자신이 입으로 애무를 해 주었을 때도 남자는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며 좋아했다. 밀어내는 손길은 그저 예의 차리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가 원하면 또 해 주려고 했다. 이렇게나 스킨십을 좋아하는 남자이니 싫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보호해 주는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희수는 그렇게라도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애무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참 이상하게도, 본인이 만지는 건 거리낌이 없으면서 희수가 먼저 손을 내밀면 소스라치며 그녀를 떨쳐 냈다. 마치 희롱당하는 작은 동물처럼.
그래서 희수는 이 남자가 자신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헷갈렸다.
원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닌가.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두고 훌쩍 사라질지도 모른다.
“Ca saigne. Laissez moi voir votre genou. (피 나잖아. 무릎 봐봐.)”
그가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다. 옷감 위로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남자는 곧장 한쪽 무릎을 꿇고 희수의 바지의 밑단을 들췄다.
하지만 희수는 그에게 자신의 무릎이 까졌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성가신 존재란 걸 남자가 뒤늦게 깨달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희수는 멀어지듯 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그녀의 바짓단을 걷어 올리던 그가 멈칫했다. 희수는 재빨리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 얼른 바짓단을 내렸다.
자신의 까진 무릎보다는 그의 행낭에 묻은 진흙이 더 걱정이었다. 혹시 남자가 이걸 보고 화를 내진 않을까 희수는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Tu me traites comme un pervers! (……치한 취급을 하는군!)”
남자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차라리 자수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희수는 그의 눈앞에 진흙이 튄 행낭을 보여 주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더럽혀서 미안하다고 싹싹 빌고 싶었다.
“Qu'est-ce que tu fais maintenant? (지금 뭐 하는 거지?)”
남자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빤히 응시했다. 지금 화가 난 건가?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때 그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팍 구겼다.
“Donne moi ca, Stupide! (그러니까 짐을 달라고, 이 멍청아!)”
“……!”
희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저렇게 종종 큰 소리를 치는 걸 보면, 자신을 향한 감정이 영 호감은 아니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시무룩해진 희수는 애써 행낭에 묻은 진흙을 닦아 냈다. 그 사이 제 옷이 더러워졌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걸 왜 네가 들겠다고 고집인데! 그러니까 넘어지는 거 아냐!”
그가 짜증스럽게 희수의 손에 들린 행낭을 낚아챘다. 얼마나 거칠게 가져갔으면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했다. 역시 중요한 게 많이 들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진흙을 묻혀 놓았으니…… 몹시 미안했다.
그나마 저 행낭을 갖고 있는 동안은 남자가 혼자 가 버리지 않을까 초조하던 마음이 안심되었는데.
“또 이거 손대면 진짜 버리고 간다.”
남자의 표정이 많이 살벌했다. 화가 난 듯해서 희수는 차마 다시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자 남자가 휙 몸을 돌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희수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그와 거의 한 발자국 정도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마음속 담보였던 남자의 행낭이 없으니 혼자 가 버릴까 두려워 걸음이 초조해졌다.
다행히 첫 만남처럼 그의 걸음이 빠르진 않았다. 따라 걷기엔 벅찰 정도가 아니었다.
‘이런 걸 보면 분명 내가 쫓아와도 된다는 뜻이야.’
희수는 남자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행동과 분위기, 눈치로 익혀 간단한 말은 이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앉아, 이리 와, 저리 가, 먹어, 안 돼, 뜨거워, 고기, 물 등등.
하지만 자신이 귀찮은지, 호감을 가졌는지, 그의 감정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잘해 주는가 하면 소리를 치고, 역시 내가 귀찮은가 보다 하면 가까이에서 살뜰히 챙겨 주었다.
‘대체 날 언제, 어디다 버려 놓고 가려는 걸까?’
자신을 책임질 리는 없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희수는 그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지금 많이 화가 났는지, 기분이 나쁜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희수가 그럴수록 남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갔다.
얼마 가지 않아 그가 자리에서 뚝 멈춰 섰다. 뭔가를 꾹꾹 눌러 참듯이 크게 숨을 들이쉬는 그의 앞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이 남자는 하루에도 10번씩 긴 한숨을 내쉰다. 희수는 대수롭지도 않았다.
다만 방금 있었던 일도 그렇고…… 혹시 자신을 여기다 놓고 가려고 결심을 했나 싶어 심장이 철렁했다. 희수는 제 손에 담보도 빼앗겨 마음이 다급해진 상태였다. 얼른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희수를 돌아보는 남자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올곧게 그녀를 응시했다.
“……도시에 도착하면 두 번 다신 널 만나지 않아. 알았어?”
희수는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제발 알고 싶었다. 뭔가 대단히 심각한 내용이 분명했다.
남자는 제 팔뚝을 붙잡은 손을 억지로 풀어냈다. 역시 이대로 자신을 버리고 간다는 뜻인가 싶어 가슴이 쿵쿵 뛰었다. 희수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뭐라 말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간절하게 다시 남자의 옷자락을 붙잡으려는데, 그가 손을 맞잡았다. 심지어 깍지를 끼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만이야.”
희수는 당황스런 눈으로 남자와, 자신의 붙잡힌 손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그의 의도를 알 길이 없었다.
‘이 남자는 대체 뭐 하는 거지?’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자, 손을 붙잡은 약간의 악력이 그녀를 재촉했다.
“가자. 아무래도…… 서둘러야겠다.”
* * *
희수는 행낭 대신 남자의 손을 담보로 삼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살이 맞붙을 만큼 세게 손을 잡고 걷다가, 땀이 찰 때쯤이면 약간 느슨하게 힘을 풀어 주었다.
바로 옆에서 걷다 보니 바람이 불어오면 남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그는 체향이 무척 좋았다.
어울리지 않게 부끄럼이 많은 편인지, 그는 항상 머리 꼭대기만 보이게 물속에 몸을 푹 담그고 몸을 씻었다. 그리고 나면 어떤 향기가 폴폴 났다. 제게서 나는 물비린내와 차원이 다른 저 남자만의 체향이었다. 희수는 그의 가까이에서 혼자 킁킁거리길 반복했다. 조금 두근거렸다.
고지대에 오르자 저녁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둘은 한 번도 손을 놓지 않았다. 꽤나 다정한 듯 보였지만 막상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녀가 아무런 대꾸가 없어도 혼자 이런저런 말을 걸더니 오늘은 그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심지어 한 번도 쳐다보질 않는 것이다.
남자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
표정이 바짝 굳어 있는 게,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게 분명했다. 내내 앞만 보며 걷던 그가 사나운 얼굴로 이를 갈듯 중얼거렸다.
“상처를 봐 주려고 했더니 사람을 치한 취급을 해?”
“……?”
대체 남자는 왜 화가 났을까. 아무래도 그의 행낭에 진흙을 묻혀서인 것 같다. 아, 그러면 안 됐는데……. 신세를 지고 있는 마당에 그의 물건을 감히 더럽히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내가 귀찮을 텐데.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을지언정 희수는 평소보다 훨씬 더 불안했다. 일단 그가 행낭도 빼앗아 갔고, 앞으로 다시는 만지지도 못하게 할 것 같았다.
많이 불쾌한가. 희수는 배꼼 그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는 알은척도 않는다.
“하산은 내일 할 거야.”
드디어 손을 놓았다. 그는 바람을 막을 커다란 바위로 둘러싸인 곳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희수는 높은 곳에서 보이는 풍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저 먼 곳에 무언가 있다. 검은색 장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요새처럼 보였다.
‘저건 뭐지?’
처음 보는 것이다. 호기심에 이리저리 그것을 둘러보는데, 뒤에서 남자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
자신을 부르는 거다. 희수는 얼른 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희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불러 놓고 저렇게 모른 척을 하는 걸 보면 정말 단단히 화가 난 듯싶었다.
게다가 오늘은 모닥불을 피우지 않는 것이다. 여태 하룻밤도 빠짐없이 불을 피웠는데! 희수는 추위에 오들오들 몸을 떨다가 눈물이 울컥했다. 잔뜩 굳은 남자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그 순간 확신이 들었다.
‘여기다 날 버리고 가려는 거구나.’
순간적으로 불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잘해 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그것도 이런 허허벌판 산꼭대기에 자신을 버리고 간단 말인가.
밉다. 이 남자가 밉다. 그럼 그동안 잘해 주지나 말지. 잘 돌봐 줄 것처럼,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고는…….
“하아.”
희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껏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도 모르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동안 얼마나 귀찮았을까. 아마 이 남자는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감정이나 호감을 갖고서 잘해 준 게 아닌 듯했다. 그냥 원래 불쌍한 걸 못 보고 지나치는 자상하고, 다정한 그런 성격인가 보다.
그러나 그 인내심과 동정심은 여기까지였나 보다. 그런 셈 치려고 해도 속상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었다.
그때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추워?”
칼릭스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여자를 보고 뒤늦게 깜짝 놀랐다.
“추우면 말을 할 것이지.”
아, 이 여자는 말을 못 하지, 참.
그는 순식간에 미안해졌다. 자신을 변태 취급해서 부루퉁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제대로 의사 전달도 할 수 없는 여자를 괴롭힌 셈이 아닌가.
불을 피우지 않은 건 이곳의 지대가 높아 누군가의 눈에 띄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마주쳐 봐야 하등 좋을 것 없는 옛 동료일 확률이 높았다.
칼릭스는 부랴부랴 제 망토를 벗었다. 그런데 겨우 망토 하나로는 여자가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자신은 건강한 몸이니 하룻밤쯤 춥게 잔다고 해도 괜찮지만 여자는 비리비리하지 않은가.
결국 겉옷도 하나 더 벗어 주기로 했다. 칼릭스는 자신의 목 끝까지 채운 단추를 하나씩 끌렀다. 툭, 툭, 툭…….
상의가 옆으로 젖혀지고 구릿빛 매끈한 상체가 천천히 드러났다.
밝은 달빛 때문에 희수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섹시해.’
남자의 나신이 이만큼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
그의 벗은 몸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것처럼 압도적이었다. 특히 길고 두터운 목에서부터 떡 벌어진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마치 거대한 나무 두 개를 십자로 겹쳐 놓은 것 같다. 아주 단단해 보이는 몸이었다.
희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문득 가슴 위 진한 색의 돌기를 한 번 만져 보고 싶었다. 제 것보단 훨씬 작고 존재감도 미미했지만 신기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칼릭스는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 때문에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여간 부끄러움이란 걸 전혀 모르는 여자였다.
그녀에게 제 옷을 입혀 주고, 그 위에 망토를 덮어 주는 그 순간까지도 여자의 눈은 제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 걸까.
“내일부터는 다시 불을 피워 줄 테니까 오늘만 참아.”
그 자신은 맨몸으로 밤을 보내야 하건만 저보다는 여자가 훨씬 더 걱정이었다. 옷을 여며 주는 손길이 그만큼 진지했다.
“새벽엔 더 추울지도 몰라. 저 바위 아래서 꼭 붙어…….”
그런데 여자가 다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설마 지금 웃은 건가? 그런데 볼은 불그스름하다. 혹시 열이 있는가 하고 이마를 짚자 여자는 배시시 웃으며 망토의 양 끝을 잡고 넓게 벌렸다.
“……지금 뭘 하는 거야?”
그러더니 칼릭스의 한쪽 어깨에 자신이 덮은 망토를 덮어 주었다.
“같이 덮자고?”
말똥말똥하게 눈빛이 어쩐지 그런 의미인 것 같다. 칼릭스는 짐짓 당황스러웠다.
굳이 여자와 온기를 나눌 필요는 없지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수 없었다.
꿀꺽. 망토를 같이 덮고 있으니 옆에 딱 달라붙은 여자의 몸이 불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팔뚝에 닿는 부드러운 감각에 칼릭스는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귀까지 열이 확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몸이 달궈졌다.
그런데 여자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뭐, 뭐야.”
여자는 그의 팔 한쪽을 들어 자신의 어깨 위로 가져갔다. 칼릭스는 졸지에 어색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싼 형상이 되었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20년 평생 여자와 이런 스킨십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몸과 마음이 백합처럼 순결한 남자였다.
솔직히 손을 잡고 올 때도 내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자가 행낭을 빼앗겨 너무 불안하고 초조하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길래 안심을 시켜 주려고 손을 잡은 것뿐인데, 마치 연인이 데이트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실상 그런 게 아닌데. 정작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였는데. 이런 스킨십은 이 여자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텐데.
그런데 이 눈치 없는 심장이 너무 세게 뛴다. 칼릭스는 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너무 그렇게 다가오지 마.”
신전에서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여자의 행동뿐이었다. 꼬물거리며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든지, 허리를 끌어안는다든지, 쌕쌕거리는 그녀의 숨소리까지 귀에 선명했다.
잔뜩 긴장한 채 숨죽이고 있는 사이, 맙소사. 여자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가슴을 타고 내려오며 살살 누르기도 하고, 손가락을 둥글리기도 했다. 달팽이처럼 느릿하고, 닿을 듯 말 듯 간지럽히는 것 같아서 더욱 생생했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미친 것 같았다.
“그만…….”
마지막 양심으로 멈추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의 신체는 그녀의 보드라운 손길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주인에게 몸을 맡긴 애완견처럼 얌전했다. 오히려 여자가 행동을 멈출까 봐 불안했다.
이렇게 느리게 말고…… 조금만 더 세게 만져 주길.
그 아래…… 조금만 더 아래로.
애타는 마음에 숨이 가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여자의 손을 잡아 자신의 성기에 갖다 대 주고 싶었다.
칼릭스는 그녀가 어떻게 자신을 절정에 오르게 했는지, 그 짧은 순간의 감각이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든 걸 기억했다.
매일 밤 그때 그 절정의 순간을 떠올렸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여자의 뜨거운 입술이 자신의 것을 머금었던 그 미칠 듯한 감각…….
“아!”
마침 여자의 손이 기둥 위를 스쳤다. 칼릭스의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여자의 손이 그의 하의 속으로 스멀스멀 뱀처럼 움직이며 들어왔다.
“하아…….”
눈이 마주쳤다. 동그랗고 반짝이는 여자의 눈동자는 순진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길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미 그의 성기는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여자가 그것을 잡는 순간 눈앞이 휙 돌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세게…… 더 세게 쥐어 봐. 이렇게…….”
칼릭스의 손이 여자의 손을 덮었다. 작고, 보드랍고, 뜨겁고…… 그 감각이 이젠 그의 주도하에 있었다. 그의 성기를 꽉 조이듯이 쥐어 잡고 아래위로 움직이자 미칠 것 같았다.
타인의 손으로 하는 자위. 하지만 칼릭스에겐 이마저도 눈앞이 빙글 돌 만큼 황홀했다.
“아…… 죽을 것 같아…….”
“…….”
그가 뭐라고 속삭이자 희수의 가슴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희수에겐 그가 ‘모든 걸 다 해내는 절대자’였다. 그런 남자가 겨우 자신의 서툰 손길에 이렇게 못 견뎌 하는 모습이 섹시했다. 거대한 남자가 얼음 녹듯 무너지는 모습에 묘한 쾌감이 솟았다.
희수는 자신의 손을 덮은 그의 손을 떼어 냈다. 남자는 반항이 없었다. 그저 무척이나 아쉬운 시선으로 희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애원하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희수는 아예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남자가 버려진 어린 양처럼 애타는 눈으로 희수를 응시했다.
“야, 너…….”
말을 다 끝내지 못한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신경질적으로 옆의 땅을 내려쳤다.
“이런 젠장!”
갑작스런 거센 감정표현에 희수는 화들짝 놀랐다. 그의 다리 사이로 몸을 옮기려던 것뿐인데 그사이에 저렇게 화가 난 건가?
하지만 그가 짜증이 난 건 완전히 다른 이유였다.
“내가 왜 네 이름도 몰라야 하는데!”
여자를 부를 마땅한 호칭이 없는 것이다.
이런 친밀한 행위를, 단둘이서만 교감을 나누는 이런 행위를 함께하는 여자의 이름도 모른다니! 그게 여자의 잘못은 아니지만 칼릭스는 열이 받았다. 여자를 저렇게, 소리도 내지 못하게 만든 누군가를 찾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불같은 감정이 뒤죽박죽 솟았다.
“너도 이름이 있을 거 아니야…… 응?”
희수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다만 그의 표정이 꽤나 애처롭게 보였다.
‘저 남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희수는 처음으로 광산에서 애써 말을 배우지 않은 걸 후회했다. 단어 몇 개 배웠다고 대화가 되진 않았겠지만, 남자와 소통을 하고 싶어서 그마저도 간절했다.
일단 지금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희수는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아 돌덩이 같은 허벅지 위로 손을 짚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 이런 거, 이런 거 말고…… 이러지 말고…….”
그녀가 발딱 솟아 있는 성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미 선액으로 흥건한 귀두 부분을 입술로 머금자 남자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아……!”
한 손으론 기둥을 꽉 붙잡고, 입으로는 막대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귀두를 넣었다 뺐다 하며 반응을 살폈다. 그의 입이 벌어지고 끊어지듯 연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참 신기하게도, 입에 있는 게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건 그녀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그의 애달아하는 모습이 더 보고 싶어서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그녀가 입술을 떼어 내자 안타까운 시선이 곧장 쏟아졌다. 무척 바라면서도 선뜻 요구하지 못하는 그가 순진하게 느껴졌다.
희수는 보란 듯이 남자의 선액으로 번들번들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의 맛을 보았다.
“하…….”
남자는 홀린 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넋 나간 그 표정에 희수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런 행동을 해 본 건, 남자에게 이런 애무를 먼저 해 준 건 그녀 역시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현실에서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천박한 짓을 이 남자에겐 하게 된다. 자꾸만 손이 간다. 이 남자를 만지는 게, 남자가 자신을 애달프게 바라보는 모습이…… 좋다.
희수는 이번엔 혀를 내밀어 남자의 버섯머리 부분을 할짝할짝 핥았다. 눈을 마주친 채로 그러고 있으니 그가 거의 미칠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하아…… 미쳤어……. 넌 미친 여자가 틀림없어. 악마야. 악마…….”
그건 아무래도 자신을 칭찬하는 말인 게 분명했다. 희수는 씩 웃으며 그의 것을 완전히 입에 물었다.
“아!”
볼이 홀쭉해질 때까지 빨아들인 채 최대한 깊숙이 넣었다가 뺐다. 그의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와 볼을 쓰다듬다가 멈칫했다.
여자의 토실한 볼.
칼릭스가 자주 만지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왼쪽 볼이 불룩했다.
맙소사.
여자의 볼 안에 있는 게 바로 자신의 성기였다.
“아…… 아, 젠장……!”
충격이었다. 여자의 입안에 있는 거대한 자신의 성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것을 몇 번 손으로 만지고 있으니 칼릭스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음탕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여자의 작은 입술에 물린 제 것이 무척 폭력적으로 보였다. 크게 솟은 왼쪽 볼은 말할 것도 없었다. 버거워 보인다. 제 밑에서 바짝 수그린 작은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만…….”
더는 이런 짓을 하게 두면 안 될 것 같다.
“그만해.”
여자를 밀어내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다. 그냥 모른 척 더 애무를 받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칼릭스는 애써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런 거…… 이런 거 말고…….”
그는 자신의 허벅지에 여자를 앉혔다. 그녀는 뭔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는 침과 타액이 잔뜩 묻은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깨끗이 닦아 주었다. 단정치 못한 머리카락도 정리해 주고, 먼지 같은 것도 떼어 내 주고…… 거슬리는 모든 걸 닦아 주고도 손길은 거둬지지 않았다. 못내 아쉬운 듯 끊임없이 여자의 얼굴과 목덜미를 만졌다.
“블랙캐슬은 꽤 크거든. 그 도시에서 헤어지면…… 우린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텐데.”
도시? 남자의 말이 간절하게 들릴 만큼 느릿했다. 그래서 희수는 ‘도시’라는 단어를 용케 알아들었다. 그녀의 또렷한 눈빛이 그를 향했다. 남자는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처연하고 슬픈 얼굴이었다.
“그런데 다시 널 만나고 싶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널 어떻게…… 너를 어떻게 찾아내야 할까.”
답이 없는 그의 혼잣말이었다. 여자의 허리에 손을 감고 제 허벅지 위에 앉혀 놓으니, 이 여자가 마치 내 여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 여자가 아니다. 그렇게 될 수 없다.
그의 삶은 매녹을 모두 처단하고 나면 거기서 끝이었다. 미래는 없었다. 처음으로 그 사실에 울적하고 씁쓸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칼릭스는 여자에게 붙잡혀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저 아쉬웠다.
그녀의 손이, 그가 하듯 똑같이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 순간이었다. 칼릭스는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흡.”
희수는 숨을 삼켰다. 그가 갑작스레, 돌진하듯 입을 맞춘 것이다. 하지만 처음 행동과는 달리 남자는 조심스러웠다.
천천히 희수의 아랫입술을 맛보고, 윗입술을 물었다. 혀로 톡톡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감히 혀를 입안에 넣지는 못했다. 그저 입술을 물고, 빨고, 혀로 핥기만 했다.
아주 신중하고 차분한 움직임. 슬쩍 눈을 떠보니 그의 긴 속눈썹이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 떨림이 전해져 연신 희수의 가슴을 두드렸다.
이런 키스를 해 본 적이 있던가.
희수에겐 생전 처음이었다. 옛날 남자친구들은 무작정 혀를 밀어 넣고 제 욕심껏 탐하기 바빴는데, 그는 전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였다.
희수가 그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자 두터운 목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희수는 남자의 입안에서 마음껏 유영했다. 그의 물컹하고 부드러운 덩어리를 찾아 제 혀를 문질렀다.
칼릭스는 그녀의 그 충격적인 행동에 움찔 떨었다. 여자와 닿는 매 순간, 매번 다른 행위들이 그에겐 세상에 더없을 큰 충격이었다.
오, 이럴 수가…….
여태껏 그가 신전에서 살아온 20년의 시간이 완전히 쓸모없게 되었다.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그가 배웠던 견고한 사상이 와장창 부서졌다.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그녀가 주는 이 모든 행동과 감각들. 알록달록한 것들이 그의 세상을 새롭게 채워 가기 시작했다. 회색빛이던 눈앞이 무지개 빛깔로 들어차고 있었다.
여자와 이미 입을 맞추고 있건만, 더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었다. 여자의 이 부드러운 입술을 더 가깝게, 더…….
칼릭스는 본능적으로 궁금해졌다. 이 모든 게 이만큼, 죽을 만큼 황홀할진데…….
‘이 여자를 안으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여자의 촉촉한 안에 들어가면……. 그때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칼릭스는 아쉬운 마음에 목을 빼고 끝까지 그녀를 따라가다 결국 놓아주었다.
“하아, 하아, 하아…….”
저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손이 여자의 뒷머리를 꾹 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숨이 막혔나 보다.
칼릭스의 이성은 결코 내린 적이 없는 명령이었다.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그렇게 했다. 그런데 그의 손이 이번에도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의 상의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바짝 마른 배를 지나자 갈비뼈가 느껴졌다. 멈칫한 그가 저절로 변명하듯 말했다.
“도시에 가면 맛있는 걸 사 줄게. 많이.”
며칠 잘 먹이긴 했지만 워낙 걷는 양이 많은 데다 여자는 자신을 만나기 전에 꽤 오래 굶었었다.
다시 천천히 손을 올렸다. 목적지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여자의 더 많은 걸 알고 싶었을 뿐. 그녀가 자신에게 알려 줄 앞으로의 모든 게 궁금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랐지?”
칼릭스는 몸이 달아오르는 감각이 더 이상 느껴지질 않았다.
그의 손바닥에 닿아 머리로 전해지는 건, 여자가 무척이나 말랐다는 사실 딱 하나였다. 갈비뼈의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칼릭스는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 손이 멈춰졌다.
게다가 여자의 몸이 추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따닥따닥 그녀의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귀까지 들렸다.
그 소리가 칼릭스의 정신을 일깨웠다. 얼굴에 찬물세례를 당한 기분이었다.
“아…… 젠장. 제기랄. 이 염병할!”
푹 한숨을 내쉰 그가 얼른 여자의 옷을 내려 주고 망토로 덮어 주었다.
이 추위에 저 여자를 벗기고 만지려 들었으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것도 저렇게 바짝 마른 여자를. 그런데도 그녀는 싫은 기색 한 번 없이 자신을 받아 주려고 했다. 그래서 더 죄책감이 들었다.
“미안, 미안해. 아무래도 내가 미쳤다.”
“우으…….”
여전히 얌전한 여자는 미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살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
처음으로 여자와 소통에 성공한 칼릭스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
“지금, 너 지금 내 말을 알아들었어?”
이번에는 어떤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여자는 전보다 더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면서 이리로 들어오라는 듯이 망토를 펼쳐 보였다. ‘같이 덮고 있자’는 뜻이 분명했다.
칼릭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형처럼 굳어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또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해졌다.
“우으.”
여자는 춥다고 어깨를 떨었다. 그러면서 눈썹을 찡긋하는 게, 추우니 얼른 이리 오라는 것 같았다.
“……!”
저 여자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그녀의 행동을 이렇게 또렷하게 이해하기도 처음이었다.
된다.
그녀와 소통이 된다!
눈앞에서 기적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추위에 달달 떨리는 여자의 입술을 내려다보던 칼릭스는 단숨에 움직였다.
“안 되겠다.”
이내 몸을 돌려 자신의 행낭을 챙겼다.
“지금 가자. 블랙캐슬로.”
정확히 여자와 무엇을 하기 위한 결정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