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2. 파리로 가는 비행기 (2/17)

2. 파리로 가는 비행기

* * *

“Ladies and gentlemen, This is Franch Airlines flight 5072 from Miami bound for Paris. The flight time will be…….”

희수는 설레는 마음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남들이 다 하는 비행기 날개 사진도 찍고, SNS에 올릴 비행기 티켓과 여권 사진도 찍었다. 헤어숍에선 디자이너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저 설레는 여행자에 불과했다.

희수는 꿈을 이뤘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쉬웠던 건 절대로 아니다.

그녀는 미혼모 가정에서 자랐다. 어릴 땐 남들 다 있는 아버지가 왜 나만 없을까 궁금해서 몇 번 물어보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희수의 모친은 매를 들었다.

애초에 희수의 모친은 희수를 좋아하지 않았다. 잔뜩 술에 취해 들어와 잠자는 그녀의 등짝을 후려칠 때면 어린 희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물론 엄마가 희수를 싫어하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평소엔 덤덤했다. 희수의 존재에 익숙해졌고, 그녀를 딸로 여겼다. 하지만 때때로 나타나는 광기 어린 얼굴이 희수에겐 섬뜩했다.

‘너 같은 건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하는데.’

‘너 때문에 내 신세 망쳤다’는 여느 불행한 가정의 뻔한 레퍼토리였지만 노란 장판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있자면 희수는 자신의 존재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울며 자신을 때리다가 잠든 엄마를 볼 때면 희수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존재는 결코 축복이 아니었다.

‘왜 엄마는 날 싫어할까?’

중학교에 들어선 어느 날 이모가 찾아와 자신을 원수 보듯 하고 떠난 그 이후로 희수는 친부의 존재에 대해선 입도 벙긋한 적 없었다.

그건 어떤 직감에 가까웠다. 자신에겐 엄마를 대단히 힘들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잉태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엄마를 위해서라면 조용히 죽었어야 할 존재.

정확한 사실관계는 몰라도 어렴풋이, 아마 모친과 친부는 절대로 만나지 말았어야 할 악연인 듯했다. 그건 희수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엄마가 미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쌍했다.

사춘기에 들어서 희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얼른 집을 나가자.’

엄마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낫겠다. 나 때문에 자꾸만 술을 드시니, 내가 없어져야겠다.

희수는 필요한 자식이 아니었다. 본인이 원해 태어난 아이가 아니니 얼른 사라지는 게 엄마를 위한 길이었다. 밉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다. 게다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여자 대 여자로서, 모든 애증의 감정을 뛰어넘어 엄마가 불쌍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다.

희수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였다.

엄마의 미움받는 딸로서가 아니라, 엄마를 미워하는 딸이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백희수로서, 열심히 이 세상을 사는 것.

그렇게 희수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곧장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공부를 꽤 잘했지만 대학이 아쉽지 않을 만큼 희수에겐 독립이 간절했다.

그나마 한 가지, 정말 다행인 것은 희수가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희수는 남을 꾸며 주는 게 즐거웠다. 엄마한테는 얘기할 기회가 없었지만 희수는 항상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다. 아마 지금까지도 모르고 계실 것이다. 희수의 어린 시절 기억은 바비 인형의 머리를 땋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처음엔 미용실의 스탭으로 시작해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힘들었지만 희수는 남들보다 배로 큰 인내심이 있었다. 참고, 견디는 일은 그녀가 가장 익숙하게 해내는 일이었다.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대우를 받아도 희수는 참을 수 있었다. 무디고 덤덤한 성격은 이 업계에서 큰 장점이었다.

8년간 혼자였다. 쉬지 않고 달려 어느덧 28살이 되었다. 희수의 삶에 한순간 회의감이 드리웠다.

‘……희수야,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의 늦은 결혼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겨우 18살 차이라 희수는 엄마를 이해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를 향한 원망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이 싱숭생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자주 찾아가 얼굴을 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엄마가 새로운 가정을 이룬다면 정말 타인처럼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희수는 이 세상에 혼자가 되는 것이다. 그 점이 그녀를 속상하게 했다.

아무리 미운 엄마라도 엄마는 엄마니까.

결국 28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청담동 유명 헤어숍의 디자이너가 된 그녀는 사표를 던졌다.

꿈을 이뤘다고 모든 걸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항상 속이 아팠다. 남들이 사는 걸 보면 제 삶이 황폐하게 느껴졌다. 돈은 제법 모았으나, 무척 외로웠다.

그녀가 우울함에 빠져 있자 사람들은 여행을 가 보라고 했다. 그러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삶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래, 떠나자. 미국으로 한번 가 볼까?’

돈도 꽤 모았으니 기왕이면 여러 도시를 한번 가 보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미국을 돌아다녔다. 미국은 재밌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보스턴까지, 서부부터 동부까지 돌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희수는 계획을 바꿨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것들을 직접 경험하니 여행이 꽤나 즐겁게 느껴진 것이다.

‘이 기회에 유럽까지 가 보는 거야.’

어차피 여행이 끝나면 다시 일을 해야 한다. 시간과 돈이 있을 때 한번 끝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한 희수는 마이애미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바로 그게 모든 일의 화근이었다.

* * *

기내식을 먹고 얼마 되지 않아서, 여행 일기를 쓰던 중이었다.

“이봐, 펜 좀 빌릴 수 있을까?”

옆자리에 앉아 있던 껄렁하게 생긴 외국인이 펜을 빌려 갔다. 희수는 만약 대학을 갔다면 영문학과를 지망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영어를 좋아했고 회화도 빠르게 익혔기에 소통엔 무리가 없었다.

“난 알렉스야. 넌?”

“‘희수’라고 불러.”

“중국인이지?”

“아니, 난 한국인이야.”

둘은 적당히 통성명을 하고, 밥도 먹었겠다 슬슬 자려고 눈을 붙이는데 그가 조심스레 희수를 깨웠다.

“저기, 이거 내가 바보 같은 건 아는데.”

“뭐? 뭐가 바보 같아?”

“좀 걱정되는 게 있어.”

“뭔데?”

먼저 대화를 이끌어 놓고, 외국인은 답지 않게 주저했다.

“그…… 버뮤다 삼각지대 말이야.”

목 베개에 온몸을 의지하고 누워 있던 희수는 상체를 번쩍 일으켰다.

버뮤다 삼각지대라니,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먼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들의 비행기가 지금 버뮤다 삼각지대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어. 만약 버뮤다에서 사라진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다른 세상으로 간 거라면? 거긴 어떤 곳일까?”

희수가 스르르 고개를 돌려 창밖의 망망대해를 응시했다. 구름 위에 있어야 할 비행기가 어째서인지 바다와 가까이에 있었다.

그녀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외국인이 덧붙였다.

“아냐, 걱정 마. 그건 그냥, 그냥 사람들을 홀리려고 하는 얘기겠지.”

허무하게 웃어 버린 그가 좌석을 조금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Nothing bad will happen.”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희수는 그 말에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짙은 남색의 바닷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깊은 동굴의 입구처럼 보였다. 저 밑으로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괜한 걱정이다. 희수는 황당한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었다. 우선 비행기 사고는 자동차 사고보다도 일어날 확률이 낮았다.

게다가 버뮤다에 대한 미스터리는 엉터리 소문일 뿐이었다.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사고가 많았던 건, 그곳이 사실상 가장 많이 이용되는 항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버뮤다의 비밀이고 어쩌고 하는 건 전부 허무맹랑한 헛소리였다.

‘잠이나 자자.’

그럼 곧 파리의 샤를 드 공항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희수는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마음이 불안한 탓인지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앞에 놓인 항공사 잡지를 뒤적이던 희수는 면세품에 시선을 고정했다.

“크리스마스 럭키 실버 세트.”

목걸이, 반지, 팔찌까지 3종 세트였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라 그런지 익숙하게 이름이 알려진 브랜드의 제품이 제법 저렴했다.

For Your Happy Lucky Christmas!

가격이 저렴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끌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럭키’라는 단어에 괜히 시선이 가는 것이다.

행운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아니었다. 닥쳐올 악운을 막아 줄 것 같다고 할까. 기분이 저조해서 그런지 좋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번 사 볼까?’

희수는 충동적으로 럭키 실버 세트를 구매했다. 결제를 하면서 승무원이 ‘럭키 실버 세트’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말해서 조금 창피했다.

결국 완전히 잠이 깨 버렸다. 희수는 시간을 보낼 겸 물건을 받자마자 개봉해서 착용까지 해 보았다. 한참을 부스럭거리자 옆에서 외국인이 피식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럭키 실버라…… 행운을 빌어.”

“고마워.”

미안해진 희수는 억지로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나마 ‘럭키’한 목걸이와 반지, 팔찌를 하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 편안했다.

나쁜 일이 생긴다 해도 자신은 피해 갈 것 같았다. 그 막연한 믿음 덕분에 충동구매에 대한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유럽은 미국보다 더 재밌을 거야.’

그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더 이상 버뮤다를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기분 좋게 잠이 들었던 희수는 얼마 가지 않아 얼굴에 둔탁한 타격감을 느끼며 깨어났다.

“악!”

위에서 끈이 이어진 뭔가가 덜렁거리는 게 보였다. 뭐가 부딪혔는가 하고 살피는 그 순간이었다. 귀청이 떨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악!”

비명소리는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동시에 비상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Emergency! Emergency!”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빨간불이 깜빡이는 걸 보자,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고 있었다.

“Emergency! Emergency!”

모두가 정신이 없는 사이, 희수는 뒤늦게 자신의 얼굴에 부딪힌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걸 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산소 호흡기.

승무원들이 위급상황에 사용하라며 시범을 보이던 산소 호흡기가 눈앞에 떨어진 것이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고, 느리게 보였다. 게다가 자꾸만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훅 끼쳐 왔다. 창문에 납작하게 붙을 만큼 몸이 가까워진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좌석 밑으로 떨어졌다. 다시 주워 들 여유는 없었다.

뜨거운 용암 같은 것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울컥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옆을 응시했다. 외국인은 두 손을 모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의 손목에 걸린 은색시계가 번쩍였다. 희수는 그 손을 붙잡았다. 두려움에 의한 본능이었다.

콰광!

거대한 소리가 들렸다. 안전벨트를 한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희수는 막연히 비행기가 바다로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창밖으로는 새 떼가 보였다. 검은색 새 떼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일렬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파리로 가던 비행기가 구멍 난 하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온몸이 욱신거리고, 얼굴이 따가웠다. 게다가 불쾌한 기분.

희수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자 얼굴에 옅은 물살이 느껴졌다.

온몸이 축축하고 불쾌한 기분은 물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어딘가, 왜 몸이 젖었을까는 두 번째 문제였다.

머리가 무척 아팠다. 방망이로 뒤통수를 크게 한 대 맞은 것 같은 둔탁한 고통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거대한 호수가 앞에 보였다.

아무래도 저 호수에 빠졌다가 밀려온 듯싶었다. 그녀가 반대 방향을 응시하자 저 멀리는 초록색 숲이 보였다. 그곳까지는 황무지가 이어졌다.

그녀가 있는 곳은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랜드 캐니언?”

희수는 경비행기를 타고 그랜드 캐니언을 보았다. 그 장엄한 경관이 똑같이 연상되는 지형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모든 기억이 희미했다. 여기서 눈을 뜨기 전,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건지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탔고, 그리고…… 끔찍한 기억이 차례차례 그녀를 강타했다.

‘Emergency! Emergency!’

다급하게 외치던 승무원의 목소리, 삑삑거리던 비상벨, 붉은빛으로 둘러싸인 비행기 내부, 사방에서 울며 기도하던 목소리.

“꿈이었나?”

희수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온몸을 살피고, 마지막 기억이 정말 그것이었는가 고민에 빠졌다.

‘여긴 지금 그랜드 캐니언인데.’

내가 관광을 하다가 조난을 당한 게 아닐까?

상식적으로 비행기 사고였다면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희수는 사지가 멀쩡했다. 조금 긁히거나 욱신거리는 알싸한 통증은 있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잘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바다에 빠졌는데 황무지의 호수에서 깨어날 리도 없었다.

“Anybody here-?!”

아무도 없어요-?!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오직 희수 혼자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다.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파리행 비행기를 아예 타지 않았던 건 아닐까?

“더워.”

온몸이 젖었는데도 덥게 느껴졌다. 그만큼 햇빛이 강렬했다. 젖은 옷을 펄럭이던 그 순간, 희수는 태양에 반사된 날카로운 섬광에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렸다. 손을 들어 올려 눈을 가리자 빛은 더 강렬해졌다.

원인은 희수의 손에 껴 있는 팔찌였다.

자신이 비행기 안에서 구매했던 면세품.

‘럭키 실버…….’

꿈이 아니었다.

싸늘한 현실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 비행기를 탔던 건 결코 꿈이 아니다.

파리행 비행기를 탄 건 확실하고, 긴급 상황이 발생했던 것도 실제였다. 그건 그녀의 감각이 증명했다. 그 순간 보았던 것, 들었던 것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럼 뭐지? 대체 내가 왜 그랜드 캐니언에 있는 걸까.

주위를 돌아보던 희수는 멈칫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저 멀리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다른 먼 곳에서도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불이 났거나, 사람이 있거나. 일단 뭔가 긍정적인 신호였다. 저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를 짓던 그 순간 희수는 괴상한 것을 발견했다. 천천히 제자리에서 몸을 돌린 희수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내 그림자가…… 두 개야.’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비상식적인 상황에 넋을 잃은 희수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그림자를 확인했다. 큰 것 하나, 작은 것 하나. 그건 분명히 자신의 그림자였다.

희수는 답을 확인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활활 타오르는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노을에 눈살을 구긴 희수는 조금 더 왼쪽을 응시했다. 동시에 희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왼쪽엔 또 하나의 작은 태양이 있었다.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하는 곳. 여긴 그랜드 캐니언이 아니다.

내가 평생 살아왔던 곳이 아니다.

‘여긴 대체…… 어디지?’

이건 그녀가 배워 왔던 만물의 법칙과 만유인력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배워 온 이론들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태양과 하나의 달을 전제로 했다.

어떻게 이런 세상이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희수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하늘만 바라보았다. 두 개의 태양은 함께 움직였다. 옷이 빳빳이 다 마를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큰 태양이 지고 작은 태양이 뒤를 따라가듯 함께 저물었다.

그리고 두 개의 달이 떠올랐다.

희수는 이 황당한 상황에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미치겠네.”

태양과 달이 각각 두 개씩 있는 세상을 받아들이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내가 죽었구나.’

처음에는 자신이 비행기 사고를 당해서 죽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피부에 닿는 뙤약볕과 덥고 습한 공기,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감각은 선명했다. 하지만 희수는 두 개의 태양과 달이 있는 세상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여긴 천국일지도 몰라.’

그녀가 배워 오기로 죽음 뒤의 세상은 천국과 지옥뿐이었다. 그리 나쁜 일을 하면서 살아오진 않았기에 이곳이 천국일 거라고 생각했다.

희수는 막연히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자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희수는 아직 죽은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 * *

희수는 점점 목이 말랐다. 고민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다 숲처럼 보이는 곳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나무가 있으면 물이 있는 법이니까.

한참을 걸었다. 다행히 이곳은 밤이 되어도 그리 어둡지 않았다. 달이 두 개인 덕분이었다. 많이 춥기는 했다.

숲은 평범했다. 야생동물이 보였고, 동물들은 외양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달과 태양이 두 개인 것 말고는 딱히 다른 점을 찾기 어려웠다.

혼자 숲을 헤매던 희수는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오, 세상에! 너! 네가 여기 있었구나!”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외국인이었다. 드디어 이 낯선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희수는 반가움에 그와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네가 살아 있었다니!”

“너도 살아 있었어!”

그리고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그 역시 아는 게 없었다. 희수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다만 희수는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고, 외국인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네가 죽었다면 어떻게 이 모든 걸 느낄 수 있겠어?”

“하긴…… 그래. 그건 그렇지.”

희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순순한 태도를 보고 외국인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봐봐. 느껴지지?”

처음에는 손이었다. 희수의 손을 붙잡고 쥐었다 놓았다 하며 힘을 주었다. 감각은 물론 선명했다. 심지어 악력이 조금 억세게 느껴졌다.

“넌 모든 걸 다 느낄 수 있어. 그렇지?”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해.”

희수는 첫 만남과 그동안 나눴던 대화를 생각해 점잖게 손을 뒤로 물렸다.

여행길에 만난 우연한 인연, 예상치 못한 불행에서 서로를 의지하게 된 동료. 희수는 그를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여긴 우리 둘뿐이야. 지구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고. 알고 있어?”

이곳에선 그가 어떤 짓을 저질러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심판할 제도에서 멀어진, 완전히 낯선 세상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여자와 단둘뿐인 어두운 숲속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희수가 그의 이상한 눈빛을 느끼고 몸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꺅!”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간 그가 희수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사람 살려! 살려 주세요! 이거 놔, 이 미친…… 읍!”

희수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그가 입을 틀어막았다.

“읍! 으읍!”

아무리 몸을 뒤틀어도 그녀의 위를 점령한 남자의 힘을 이겨 낼 수 없었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보다 훨씬 더 현실처럼 느껴졌다.

그가 희수의 스키니 진을 벗기려던 그 순간이었다. 둘의 귓가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Ou as-tu obtenu la fille? (너 어디서 그 여자를 얻은 거냐?)”

엎치락뒤치락하던 둘은 돌처럼 굳었다. 일단 이 낯선 언어가 영어가 아니었다. 둘 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극한의 상황에 처해 있던 희수는 낯선 이들의 등장이 싫지 않았다. 처음엔 저들이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리석은 기대였다.

“살려 주세요! 이 남자가 지금 저를 강간하려고 해요!”

외국인이 당황해서 몸에 힘을 뺐다. 희수는 얼른 그를 밀치고 옷을 여미면서 낯선 이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Mette les mains en l'air et donnez nous cette fille.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여자를 넘겨.)”

낯선 이들은 한 명이 아니었다. 네 명 정도 되는 무리였다.

동양인은 아니었고 백인에 가까웠다. 중동이나 터키 쪽의 코카시안 같았다. 어쩌면 피부가 햇볕에 그을려서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 남자였다.

“Si tu suis ma commande, Je ne vais pas te tuer. (내 말을 따른다면, 널 죽이지는 않겠다.)”

“Oui, Nous ne vais pas te tuer. (그래, 우린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들을 서로를 돌아보며 킥킥거렸다. 허리춤에 걸린 칼이 번뜩였다. 그들이 입은 옷은 현대의 것이 아니었다. 중세시대쯤 되어 보였다.

기다란 칼을 가진 남자들이 네 명.

게다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셔츠의 단추를 잠그던 손길이 떨리기 시작했다. 희수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좋지 않은 예감이 그녀를 강타했다.

“너희들은 뭐야? 영어 몰라? 영어로 말해, 이 멍청한 미개인 새끼들아.”

외국인은 겁을 상실한 모양이었다. 넷이나 되는 상대가 겁나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갔다.

희수는 앞으로의 상황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Elle s'enfuit! Allez attrapez la! (여자가 도망치잖아! 가서 붙잡아!)”

그녀의 뒤로 즐거운 외침이 들려왔다.

“Si l'attraper d'abord, Baiser sa premiere! (먼저 잡는 놈이 먼저 박는 거다!)”

그리고 숲을 울릴 만큼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악!”

외국인이 죽었다.

바로 그 순간 희수는 정확히 깨달았다.

‘난 죽은 게 아니었어.’

이곳은 천국이 아니다. 때로는 현실이 지옥보다 더 끔찍한 법이었다.

* * *

희수는 쉽게 붙들렸다. 숲에서 달려 본 적도 없거니와, 네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따라오는데 이들을 따돌릴 만한 체력도 없는 상태였다.

남자들은 희수를 농락하기 전에 먼저 자루에서 꺼낸 무언가를 보여 줬다.

“헉.”

희수는 뒤로 졸도할 뻔했다. 그건 외국인의 잘린 손이었다. 그걸 알아챈 건 바로 시계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잘 보라는 것처럼 손목에서 시계를 빼냈다. 그리고 쓸모없는 쓰레기를 버리듯이 손을 던져 버렸다.

아무래도 저들은 금속 시계를 어떻게 여는지 몰라서 외국인의 손목을 잘라 낸 것 같았다.

남자가 무언가 눈짓하며 시계를 그녀의 코앞에 들고 흔들었다.

희수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목에 걸린 팔찌를 풀어 건네주었다.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도 주었다. 머리를 가리키기에 머리에 있는 핀도 빼 주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맞는 듯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들이 희수에게 원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게 얌전히 있으랬잖아, 얌전히. 응?”

남자는 연신 말을 걸며 희수의 온몸을 더듬었다. 그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예쁘게 생긴 계집애가 왜 말을 안 들어.”

희수는 우악스런 손길에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처음엔 반항을 했다. 하지만 몇 번 맞아 보니 더 이상 반항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아무리 빌어도 자신을 놔주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은 희수는 그 순간부터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근데 이 옷은 대체 뭔데 이렇게 안 벗겨지지?”

남자는 희수의 스키니 진을 벗기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쇠로 된 버클과 지퍼를 어떻게 여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역시 너도 다른 곳에서 온 계집인가 보구나.”

축 늘어진 희수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남자의 손길을 견뎌 냈다.

“피부가 정말 부드러워. 얼굴도 반반하고 말이야. 난 참 운이 좋단 말이지. 너 같은 계집애를 내가 처음으로 따먹게 되었으니…….”

그때 순번을 기다리듯 두 발자국 옆에 앉아 있던 일행이 소리쳤다.

“대충 빨리 끝내, 이 병신아! 다음 차례가 세 명이나 기다리잖아!”

“그래, 빨리 그냥 끝내라고! 성기사가 오면 저년도 당장 광산으로 보낸단 말이야!”

“지금 그 새끼들이 얼마나 예민한지 알아?! 교황이 죽는 바람에, 제기랄.”

“참, 그 일 말이야.”

남자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낮아졌다.

“교황님을 죽인 게 성기사들 중 한 명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소문이라 확실하진 않아. 근데 이상하잖아? 교황께서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고. 신전에선 시신을 공개하길 거부하고, 친위대는 짜 맞춘 듯이 전부 사임했어.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교황님의 곁을 지켜야 할 텐데 말이지.”

남자들은 저들끼리 심각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뭘 하든 희수를 만지는 남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실실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같이 예쁜 계집애를 어떻게 광산에 보내지, 응?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따먹으려고 들 텐데.”

귓가로 징그러운 벌레가 기어가는 듯했다. 정수리부터 등까지 소름이 쭉 돋았다.

“뭐야?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희수의 스키니 진을 붙들고 씨름하던 남자의 뒤에 있던 세 명이 자기들끼리 쑥덕이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

“뭔가 움직이는 소리 말이야.”

“못 들었는데? 너 혼자만 들은 거 아냐?”

“그런가? 뭔가 찝찝한데.”

“뭐가 찝찝해?”

“……성기사가 그랬잖아. 이방인의 시체는 태워 버리라고.”

“아까 그놈 말이야? 숲에 불이 번지면 어쩌려고 시체를 태워. 말 같지 않은 소리지.”

“그래도, 혹시 말이야. 성기사가 했던 말이 혹시 ‘매녹’ 때문에 그런 건…….”

“염병, 재수 없는 소리 집어치워!”

저들이 뭐라고 떠들건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희수는 밤하늘만 응시했다. 밤이라 해도 완전히 어둡지 않아서 빛나지는 않지만, 저 하늘에도 별이 있었다. 이곳은 지구와 다른 행성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다른 차원의 세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희수는 이곳이 어쩌면 지옥인가 생각했다. 사후의 세계인 지옥은 아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죽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은 사후의 세계인 지옥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지옥인 곳이었다.

“이 망할 바지를 그냥 찢어 버려야겠다. 그러니까 움직이지 마라, 알았지? 칼이 날카로우니까 말이야.”

남자는 기다란 칼을 낑낑거리며 희수의 발목에서부터 바지를 가르기 시작했다.

“너같이 예쁘게 생긴 계집애는 정말 처음 봤거든. 네년은 꼭 전부 다 벗겨 봐야겠어.”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희수는 막연히 생각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자신을 더듬는 지렁이 같은 손길을 느끼자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 이상의 불행한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그건 희수의 오판이었다.

“피부가 아주 손에 쫙쫙 붙네. 냄새도 좋고.”

죽은 듯이 있던 그녀가 우연히 시선을 돌린 곳에서 수풀이 들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등 뒤쪽이었다.

“그러니까 이방인 계집애들은 다 그냥 매음굴로 보내 버려야 하는데, 대체 왜 광산에 처넣으라는 건지. 통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초점이 없던 희수의 눈동자에 번쩍 빛이 돌았다.

그곳엔 어떤 여자가 소리도 없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비행기 승무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봐야 했던 이유는 옷이 전부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기괴하게 꺾인 목, 난자당한 것처럼 꿰뚫려 있는 몸. 도저히 살아 있을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저 여자는 분명히 죽었다. 죽은 사람이다.

“지들이 떡치면 욕을 먹으니까 여자들을 다 광산으로 보내라는 거 아냐, 이거?”

희수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승무원과 눈을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녀는 눈동자가 뒤집어진 상태였다. 눈꺼풀 아래는 흰자만 가득했다.

승무원은 흡사 좀비처럼 보였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희수의 전신을 스쳤다. 치아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입을 열었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뭐야, 이 계집애 왜 이래?”

희수의 상태를 눈치챈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구경하던 세 남자가 이를 발견하고 일제히 소리쳤다.

“매, 매녹이다!”

“염병!”

“좆 됐다.”

세 남자는 반항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 희수를 범하려던 남자 역시 고민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도망치자 가만히 서 있던 승무원의 행동이 달라졌다. 먹이를 낚아채는 표범처럼 순식간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죽었지만 의지는 있는 듯, 재빠른 몸짓으로 남자의 몸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를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귀부터였다.

“으아아아악!”

남자는 있는 힘껏 힘을 썼지만 여자를 떨쳐 내지 못했다.

“아아아악! 아악!”

희수는 자신을 농락하던 그의 힘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성 간에 확연히 다른 힘의 차이는 이겨 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여자를 떨쳐 내지 못했다. 그의 아래에서 무력했던 자신이 우스울 만큼.

승무원은 악착같이 그에게 달라붙어 귀를 뜯어 내고, 이번엔 코를 씹어 먹었다.

희수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도망을 가야 하는데,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압도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히고 다리가 뻣뻣이 굳었다. 지독한 긴장에 담이 왔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

사람을 먹어 치우는 좀비가 된 승무원.

두 개의 태양과 두 개의 달이 존재하는 곳.

희수가 살아왔던, 그녀가 알던 평범한 세상은 그날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 * *

좀비는 남자의 살점을 허겁지겁 뜯어 먹었다. 머리가 날아가자 남자는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죽었다.

희수는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정신은 완전히 날아가고 본능적으로 숨만 간신히 쉬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다리가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녀가 도망치지 못한 건, 살 희망이 없다는 걸 몸과 마음이 똑똑히 알기 때문이었다.

저 좀비가 남자를 다 먹고 나면 내 차례겠구나.

희수가 아무리 반항해도 이겨 낼 수 없었던 남자가, 좀비에게 붙잡히자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보였다.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나을지도.’

정말 이렇게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희수는 이곳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우욱.”

토악질이 올라왔다. 비릿한 피 냄새는 이미 익숙해졌는데, 죽음을 각오하자 속이 뒤집어졌다.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정말 간절하게.

엄마한테 사랑한단 말 한마디 못 하고 밉다는 말만 내뱉은 것도, 친구들에게 잘 지내란 마지막 한마디를 건네지 못한 것도 떠올랐다.

속이 울컥하다 못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도망치고 싶은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눈물만 쏟아졌다.

“Maenok. (매녹.)”

“Je pense que c'est la derniere. (저게 마지막인 것 같아.)”

그런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희수의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또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자들이겠지 했는데, 그들의 관심은 희수가 아니었다.

“Depechez vous. Je veux aller a la maison. (서두르자.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한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에서 파란색 불꽃이 쏘아졌다. 그대로 좀비의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

파란 불이 붙은 좀비는 빠르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시체는 장작처럼 탔고 좀비는 종이처럼 탔다. 금방 형체가 사라지고, 남은 건 남자의 시체뿐이었다.

좀비가 사라지자 희수는 긴장의 끈이 탁 놓였다. 저 남자들 또한 자신을 강간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저들은 사람이었다. 좀비보다 더한 공포는 없었다.

희수는 스르르 정신을 잃었다. 심한 탈수와 배고픔, 몇 번이나 극한의 상황에 처했던 평범한 여자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두 남자는 시체가 타고 남은 자리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장신구를 주워 들었다.

목걸이와 반지, 팔찌, 그리고 시계.

다크 홀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이에게는 공통적으로 은색 광물이 있다. 매녹 사냥과 그 증거품 수집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들이 바로 신전의 성기사였다.

두 남자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방인이네. 그것도 꽤 예쁘게 생긴 여자.”

“흠…… 좀 동하긴 하는군. 하지만 들켰다간 파면이야.”

“어떻게 들켜? 우리밖에 모르는 일이 될 텐데.”

“이봐, 정신 차려. 저 여자도 매녹이 될지 모르는데 몸을 섞고 싶다니…… 생각만 해도 역겨운데.”

“정말 신전의 기사가 다 됐군! 알았어. 그냥 얼른 광산으로 보내 버리고 좀 쉬자고.”

다만 신전의 ‘진짜’ 성스러운 기사님들과는 달리, 황무지를 다니는 이들은 용병출신의 대체인력이었다.

* * *

희수가 눈을 뜬 건 여자들이 있는 좁은 방이었다.

어쩌면 이곳은 사창가일지도 몰랐다. 여기가 어딘지 몰라 불안해야 정상이건만, 희수는 깊은 안도감을 먼저 느꼈다.

“당신 한국 사람이죠?”

한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수는 처음 한국말을 듣고 눈물을 펑펑 터뜨렸다. 반가움은 충격에 가까웠다. 그녀 역시 하루아침에 다른 세상으로 오게 된 사람이었다.

여기서 눈을 뜨고 겪었던 모든 일들, 자신의 처지와 좀비가 떠올라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 울어요! 여기선 조금만 이상해 보여도 사람을 태워 죽이려고 한단 말이에요.”

“태, 태워 죽인다고요……?”

“그래요. 산 채로 화형당하고 싶지 않으면 정신 차려요.”

희수는 울음을 뚝 그치고 마음을 진정했다. 한국 여자는 이곳에 온 지 꽤 되어 보였다. 그녀는 희수가 처한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여긴 여자들 숙소예요. 광산에서 일하는 모든 여자들이 여기서 잠을 자고, 생활을 하죠.”

이 광산의 노역자들이 잠을 자는 곳은 다행히 남녀가 분리되어 있었다.

“우선 일을 하러 가요. 아침노동 시간에 늦으면 감시자들이 채찍으로 때릴 테니까. 맞아 봤는데 그거 엄청 아파요.”

광산에는 여자들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된 노동을 하는 건 남자들이었다. 여자들은 광산 밖에서 돌의 흙을 씻어 내거나 끼니를 위한 감자를 삶는 등의 일을 했다.

희수는 여자를 뒤따라 다니며 잡일을 했다.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덕분에 희수는 이 세계에 대한 사실들을 듣게 되었다. 둘은 일을 하는 동안 몰래 속삭거렸다.

“다크 홀에서 떨어진 지 얼마나 됐어요?”

희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크 홀이요?”

“아, 이곳 사람들이 그걸 다크 홀이라고 불러요. 말하자면 이 세계로 오는 문 같은 거죠. 아마 소용돌이처럼 생긴 곳으로 빨려 들어왔을 거예요.”

소용돌이처럼 생긴 곳.

그 말을 듣고 기억을 더듬던 희수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지막 기억으로 새 떼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보았다. 비행기가 빨려 들어간 곳이 바로 거기였다!

다크 홀.

“뭔지 알아요! 그걸 봤어요! 내가 탔던 비행기가……!”

“쉿! 조용히 해요!”

희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멀리서 지켜보던 감시자가 성큼 다가왔다.

“Ta gueule! Arrete de raler et mets-toi au travail! (그만 떠들고 일이나 해!)”

짜악! 등짝을 채찍으로 후려 맞은 희수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살이 찢어지는 아픔이 느껴졌다. 옆에 있던 여자는 얼른 자신이 하던 일로 시선을 돌렸다. 희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간신히 고통을 참았다. 겨우겨우 일어나 여자를 따라서 땔감을 나르기 시작했다. 안 그러면 한 대를 더 맞을 것 같았다.

여자가 힐끔 안쓰러운 시선을 던졌다.

많이 아프죠.

그녀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으니 희수는 뒤늦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동시에 기이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 낯선 곳에서, 고통을 공감해 주고 옆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선 나 혼자가 아니야.’

게다가 언제 또 좀비가 나타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희수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 일을 하면서 적응하게 되었다. 잡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희수는 광산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웠다.

광산에서는 남자들이 강간을 한다거나 하는 불미스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채찍을 들고 감시하는 감시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에게 그들의 감시는 ‘보호’가 되기도 했다.

일은 힘들었다. 하지만 광산 밖에서 사람을 씹어 먹는 좀비를 만나거나, 자신을 윤간하려는 남자들에게 농락당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게다가 이곳엔 같은 처지인 사람이 있지 않은가.

“언니는 28살이라고 했죠? 전 민주예요. 희수 언니라고 부를게요.”

민주는 이곳에 온 지 4개월쯤 된 것 같다고 했다. 달력이 없으니 정확히 날짜를 셀 수 없었다.

둘은 저녁노동 시간이 끝나고 잠들기 직전마다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같은 언어를 쓰고 서로를 이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둘은 깊은 유대감을 가졌다.

“감시자들이 갑자기 검은색 옷을 입기 시작했거든요. 뭔가 큰일이 생긴 게 분명해요. 그 이후부터 사람들이 굉장히 예민해졌거든요.”

“검은색 옷? 누가 죽었나?”

“모르죠, 뭐. 여긴…… 많은 게 우리가 살던 곳과 다르니까. 근데 신기하게 글자는 영어 알파벳을 쓰더라고요.”

희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들이 쓰는 글자가 영어 알파벳이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발음은 영어가 아니던데.”

“영어가 아니에요. 단어를 써도 못 알아보더라고요.”

“유럽어 중에 하난가?”

“어떤 프랑스 여자가 감시자한테 말을 거는 걸 봤어요. 근데 대화가 통하는 거 같진 않더라고요. 욕만 비슷하대요. 아무래도 유럽어는 아닌 거 같아요. 여긴 유럽인들이 대부분인데 아무도 감시자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요.”

다른 세계에서 영어 알파벳을 쓰는 건 정말 우연일까? 게다가 욕이 비슷하다니. 희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광산에서 지내면서 지켜본 결과, 이곳의 사람들은 주로 백인이라 할 수 있는 인종이었다. 하지만 전부 백인이라 단정 짓기에는 지나치게 특이한 눈동자 색을 가진 이들도 종종 있었다.

“이 광산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처럼 다크 홀을 넘어온 사람들이거나, 이곳의 죄인들이에요. 저기 목걸이를 하고 있는 여자 보이죠?”

민주가 손짓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금발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한 여자가 감시자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저 여자는 이곳 사람이에요. 감시자들은 이곳 사람들에겐 우리에게 하듯이 박하게 굴지 않아요. 때리지도 않고요.”

“누가 이곳 사람이고, 누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저 목걸이가 바로 ‘신분증’이거든요. 저 목걸이가 있는 사람들은 전부 이곳 사람이에요.”

어쩐지 영롱한 펜던트가 예사롭지 않았다. 희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다. 민주는 이곳에서 더 오랜 경험을 한 만큼 희수가 모르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정해진 기간만큼만 일을 하고 광산을 나가요. 여기서는 벌을 받는 거죠.”

“그럼 여길 나가서…… 어디로 가는데?”

희수에겐 안전한 광산과 광산 밖의 위험한 세상만이 전부였다. 다른 곳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민주는 금발머리 여자를 부러운 듯이 응시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요.”

평범한 사람. 금발머리 여자는 벌을 받는 죄인이었다. 하지만 ‘노력하면 평범한 일상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민주는 그녀가 되고 싶었다.

“언니, 난 이 광산을 나가고 싶어요. 꼭이요.”

그렇게 말하는 민주의 눈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희망을 깨부술 마음은 없었다. 희수는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넌 이 광산 밖에 뭐가 있는지 알아? 그걸 겪어 봤어?’

남자들도 끔찍하지만 좀비…… 좀비는 그 이상이었다. 희수가 모든 희망을 잃고 광산에서 일이나 하는 삶에 안도하게 된 것은 좀비가 사람을 뜯어 먹는 게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희수는 이 광산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나가 봐야 어떤 꼴을 당할지 뻔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

그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자신 또한 평범하게 살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 없었다.

일단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단 말인가? 소원이 있다면 다크 홀을 넘어오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만약 그게 안 된다면, 희수는 차라리 평생 이 광산에서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민주와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그만큼 희수는 의지하고 기댈 상대가 필요했다. 의사소통이 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고 공감해 주는 상대가 있다면 굳이 민주가 아니라도 되지만, 지금 이 세상에는 민주 한 명뿐이었다.

희수는 노역이 힘들었다. 하지만 민주가 행여 자신을 귀찮게 여길까 봐 일도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광산에서의 생활에 적응했다. 단순노동이다 보니 일은 금방 익숙해졌고, 더 이상 채찍을 맞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텃세를 당해도 그러려니 하며 넘기게 되었다.

미래는 조금도 꿈꿀 수가 없는 생활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만 지낸다면 괜찮았다. 좀비도, 강간의 위협에서도 안전하니까.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 * *

둘이 주로 하는 일은 광산의 입구 근처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부싯돌을 문질러 불을 피우고 감자를 삶았다.

인부들을 위한 건 매끼 삶은 감자가 전부였다. 희수는 가끔 불평했다. 하지만 민주는 곧 익숙해질 거라고 그녀를 다독였다. 나이는 어려도 민주에겐 배울 게 참 많았다.

심지어 더 오랜 시간을 감자만 먹고 살았는데도 아무런 불만이 없는 민주를 보고 희수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오늘은 아궁이에 미리 불이 붙어 있었다. 심지어 불꽃의 색깔이 붉은색이 아니라 파란색이었다.

희수는 조금 신기하게 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민주는 대수롭지 않았다.

“가끔씩 이런 파란색 불을 피우더라고요.”

“그렇구나.”

해와 달도 두 개씩 있는 세상인데 뭘. 그렇게 생각하니 파란색 불꽃도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브하(Arbre).”

민주는 땔감을 살피며 열심히 배운 단어를 발음했다. 아브하. 아브하. 아브하.

“나무라는 뜻이래요. 아브하(Arbre).”

“으응.”

희수는 멀뚱히 그런 민주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곳의 언어를 익히는 중이었다.

금발머리 여자를 따라다니더니 조금 친해진 모양이었다. 그들이 먹는 어떤 고기도 나눠 먹고, 민주는 이것저것 손짓하며 단어를 물어보았다. 틈틈이 그것을 발음하고 기억하려 애쓰면서 느리지만 말을 배워 가고 있었다.

“언니도 여기 말을 배우는 게 어때요?”

“난 됐어.”

하지만 희수는 전혀 관심 없었다. 그녀가 광산에서 눈을 맞추고 소통을 하는 건 오직 민주뿐이었다. 굳이 이곳의 언어를 익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광산을 나가게 되면 필요할 거예요.”

“우린 못 나가잖아.”

“누가 알아요? 그런 기회가 생길지도.”

그런 기회가 생겨도 난 이곳을 나가지 않을 거야. 희수는 말을 삼켰다. 괜히 민주에게 나쁜 인상을 심고 싶지 않았다.

“언니는 꿈이 없는 사람 같아. 욕심도 없고. 왜 그렇게 소극적이에요? 가서 사람들한테 말도 좀 걸어 보고 그래요.”

“…….”

물론 희수도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 미국을 여행하면서는 낯선 타인과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기도 하고, 먼저 말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여행을 하는 게 아니었다. 희수가 이곳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은 그녀의 세상을 완전히 닫아 놓았다.

“어느 날 갑자기 광산 밖에서 살게 될 수도 있잖아요. 말을 배워 두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충분히…….”

커다란 냄비에서 끓는 감자를 응시하던 희수는 조금 울컥했다.

“민주야, 너 혹시 말이야.”

“네?”

“혹시…… ‘그것들’ 본 적 있어?”

“그것들이라니요?”

“이 광산 밖에 있는 것들. 그것들.”

좀비, 매녹.

한 번도 좀비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본 적 없었다. 희수는 보통 민주가 말하는 걸 듣기만 했다. 하지만 민주는 좀비에 대한 얘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좀비의 존재를 모르는 게 아닐까.

“그것들이 뭔데요? 광산 밖에 뭐가 있는데요?”

“…….”

희수는 답하기 전에 민주의 맑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안에는 희망도 있고, 그녀가 꿈꾸는 미래도 있다.

만약 좀비에 대해서 말하면 민주는 어떤 반응을 할까. 믿지 못할 것 같다. 아니, 설령 믿는다고 해도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 그것들은 실제로 마주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설명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것들은 죽음이라는 개념을 상실한 존재였다. 희수는 좀비들을 마주했을 때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좀비가 될까 무서워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좀비는 사람에게 삶의 모든 열망을 앗아 갔다. 죽기를 바라지도, 살기를 바라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공포, 극한의 두려움. 그것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희수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왜요? 뭔데 그래요. 궁금하게 왜 말을 하다가 말아요, 언니.”

“아니야. 그냥 모르는 게 나아. 근데 넌 이 광산 밖에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그건…… 그건.”

민주는 답지 않게 말을 머뭇거렸다.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을 보고 희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

그러자 끓는 냄비를 응시하던 불안한 시선이 희수에게로 움직였다.

“언니, 사실은요.”

“응.”

어차피 둘 말고는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민주는 한껏 음성을 낮췄다. 마치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저, 이 광산에 잡혀 들어오기 전에…….”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광! 귀를 찢을 듯한 거대한 폭발음이 광산 안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희뿌연 연기가 광산의 입구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꺄악!”

희수는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다행히 한 번의 폭발음 뒤에는 조용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직도 타고 있는 불을 껐다. 감자가 아직 익지 않았지만, 혹시나 찾아올 불상사를 위해서였다. 이곳엔 불에 탈 수 있는 게 많았다.

파란색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아서 한참이나 모래를 뿌려야 했다.

“어휴, 깜짝이야.”

민주는 가슴에 손을 대고 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일하는 곳이 광산이다 보니 가끔 한 번씩 이렇게 안에서 폭발을 할 때가 있었다.

“어쩐지 아까 사람들이 광산에서 줄지어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광산 안에는 아직도 일하는 인부들이 있었다. 광산을 빠져나온 이들은 죄인들이었고, 이방인들은 아직도 광산 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사할까.

희수도, 민주도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 광산에서도 차별은 눈에 띄었다. 죄인들은 죄를 지었을지언정 이곳의 원주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방인은 아니다.

희수는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대체 어쩌다 다크 홀에 빨려 들어와 여기서 이런 취급을 받게 된 걸까. 이방인들은 노예처럼 부려지고, 목숨은 먼지만도 못했다.

“어서 다시 불을 피워야겠어요.”

“으응.”

둘은 다시 불을 피우기 위해서 부싯돌을 문질렀다.

그런데 감시자가 희수가 불을 끈 걸 알고 채찍을 들고 다가와 다짜고짜 휘둘렀다.

“Putain de pute stupide! (이 멍청한 년아!)”

“아악! 악!”

“Ce n'est pas un feu normal! (이건 평범한 불이 아니란 말이야!)”

“아파! 아파요!”

감시자는 평소와 달리 몇 번이나 채찍을 휘둘렀다. 뭔가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Pour fleurir le feu bleu, Nous avons besoin de l'aide du chevalier saint! (이 푸른 불꽃을 피우려면 성기사가 필요하다고!)”

불이야 다시 피우면 그만인 것을,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희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 아악!”

“Ta geule, Salope! (입 닥쳐, 이년아!)”

등짝이 벌게지고 핏물이 배어 나올 때쯤 희수는 털썩 바닥을 굴렀다. 더 맞다간 죽을 것 같았다.

비명은 한순간 튀어나왔다.

“꺄아아아악!”

희수가 아니었다. 감시자는 채찍질을 멈추고 비명소리가 난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에 희수는 간신히 몸을 꿈틀거리며 감시자의 채찍 아래서 벗어났다.

누군가 광산의 입구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는 이방인이었다. 그가 입은 너덜너덜한 옷가지가 희수의 눈에 익숙했다. 이곳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그의 신체가 망가져 있었다. 팔 한쪽이 없고, 머리가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희수는 단번에 그 존재를 알아보았다.

“Maenok! Maenok est la! (매녹! 매녹이야!)”

“Maenok est la! (매녹이다!)”

감시자들이 소리쳤다. 그들 역시 저 좀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희수는 채찍에 맞은 고통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광산에선 저 좀비를 만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민주…… 민주는 어디에 있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감시자며 이방인이며 죄인들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그 낯선 존재를 보고 놀랐다. 좀비에게서 주춤주춤 멀어지고 있었다.

“미, 민주야. 민주야!”

희수는 손쉽게 그녀를 찾았다. 정말 좀비를 처음 보는 건지, 좀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바싹 얼어 있었다.

“어, 언니. 저게 대체 뭐예요?”

다행히 광산에서 걸어 나온 좀비는 손쉽게 첫 번째 먹잇감을 붙잡았다. 근처에 있던 남자였다.

사람들은 눈앞의 광경에 시선을 집중했다. 감시자 또한 얼이 빠진 채로 좀비를 구경했다. 도망쳐야 할 텐데 사람들은 굳이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여럿이고, 좀비는 딱 한 명이었다. 함께 옆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으니 위험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민주는 정신을 차리고 희수에게 속삭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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