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1. 이 남자는 다르다 (1/17)

목차

1권

1. 이 남자는 다르다

* * *

“Qu'est ce qu'un putain de putain de pute a mis cette jolie fille dans une mine? (대체 어떤 멍청한 놈이 이 계집애를 광산으로 보내지?)”

“Tom, Je ne savais pas que. Nous avons eu cette fille. C'est la chose. (나도 모르지, 톰. 우리가 이 계집애를 가졌으니 됐잖아. 지금은 그게 중요하다고.)”

남자들은 사지가 의자에 묶인 희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희수는 그저 축 늘어져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정신은 멀쩡했다. 저들의 대화는 그녀를 향한 게 분명하지만 그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기묘한 억양은 영어가 아니었다.

“Tu veux baiser cette salope? (저년 따먹고 싶어?)”

아니, 알아듣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멀쩡히 팔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겨우 두 달 남짓. 하지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 여자가 삶을 포기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Si tu veux, Tu allez en premier. Elle tu attend, Tom. (그러면 너부터 해. 저년이 기다리잖아, 톰.)”

밧줄에 꽉 눌린 가슴으로 남자들의 손이 뻗어졌다. 희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를, 느껴지지 않기를 바랐다.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Pourquoi est elle si tranquille? Ce n'est pas drole. (근데 이년이 왜 반항을 안 하지? 이러면 재미가 없는데.)”

“……Parce qu'elle a vu ‘quelque chose’. (저년이 ‘그것’을 봤거든.)”

“Maenok. (매녹.)”

꽤나 익숙한 단어였다.

매녹.

광산을 탈출하면서 사람들이 소리치던 그 단어. 끔찍한 마지막 기억에 희수는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떠올리기도 싫은 것들이 아른거렸다. 이곳에서 눈 뜨고부터 시작된 원망이 되새겨졌다.

왜 하필이면 내가 살아남았을까.

대체 왜, 여태껏 살아남았단 말인가.

희수는 이들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윤간을 당하고, 재수가 좋으면 저들에게 곧장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내 시체는 태워지겠지.’

재수가 좋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나도 그 애처럼 변하는 건가. 눈이 뒤집어진 채로, 사람을 뜯어 먹는 좀비가 되는 걸까.

“Pourquoi pleures tu, Cherie? (왜 우는 거야, 예쁜이?)”

남자의 손이 헐렁한 바지 안으로 들어왔다. 희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의자에 묶인 여자 하나를 상대로 세 명의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한 사람은 그녀의 상의를 찢어 가슴을 주물럭거렸고, 한 명은 바지를 벗기려 안간힘이었다. 다른 한 명은 자신의 바지를 내렸다.

“Sucez le, Soigneusement. (열심히 한번 빨아 봐.)”

역겨운 냄새가 나는 남자의 성기가 희수의 얼굴에 비벼졌다. 고개를 피하려 하자 남자는 희수의 얼굴을 잡아 고정했다.

“우읍.”

강제로 입안에 넣어진 성기 때문에 숨이 턱 막혔다. 뒤통수를 세게 내리누르는 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남자의 사타구니에 얼굴이 처박혀 토할 것 같았다.

“Regarder les seins. (이 가슴 좀 봐.)”

남자가 한 손으로 그녀의 유두를 툭 튕겼다. 뽀얗고 탱글한 가슴이 출렁였다. 밧줄에 묶인 채 중요부위만 드러낸 여자는 보기만 해도 흥분될 만큼 자극적이었다.

“Je ne l'ai jamais vu que les beaux seins. (이렇게 예쁜 가슴은 처음 보는데.)”

그녀의 가슴을 한참 주물럭거리던 다른 남자가 아예 고개를 파묻고 쭉쭉 빨기 시작했다.

거머리 같은 것이 붙어 있는 기분이었다. 희수는 할 수만 있다면 혀를 깨물어 죽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의 성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희수가 간신히 숨을 쉬려 남자의 물건에 익숙해지자, 남자도 이를 느꼈는지 동료들에게 말을 걸었다.

“Pourquoi ne vient il pas? Je pense qu'il fuit. (그놈은 왜 안 오는 거야? 도망간 건 아니겠지.)”

여자의 입에 자신의 성기를 물려 두고서 나누는 대화치고 그 내용은 일상적이었다.

“Oui, Il devrait se depecher. Alors il peut gouter cette chienne. (그래, 그놈이 서둘러 와야 할 텐데 말이야. 그래야 이년을 맛볼 텐데.)”

“Sucer plus difficile. (더 세게 좀 빨아 봐.)”

남자는 희수의 뒤통수를 누른 채로 슬슬 허리를 움직였다. 목젖을 자극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끼이익.

그때 그들이 있던 오두막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희수는 미처 신경도 쓰지 못했다.

“Pourquoi es tu si en retard? Venir et……. (왜 이렇게 늦었어? 너도 와서…….)”

희수의 앞에 앉아서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움직이던 남자였다. 그가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Merde! Maenock est la! (제기랄! 매녹이야!)”

남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기를 챙겨 들었다.

“Putain. (젠장.)”

희수의 입에 성기를 물렸던 남자는 바지를 추스를 새도 없었다. 그가 도망치려 크게 몸을 돌리면서 희수를 밀쳤다.

“아악!”

의자에 묶인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 희수가 신음했다.

“Personne ne m'a dit que maenock sort dans cette region! (이 지역에 매녹이 있단 말은 없었잖아!)”

두 남자는 오두막의 금화와 보물들을 챙겼다. 한 명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

“Je ne savais pas non plus! Si je savais, je ne viendrais jamais ici, Fuckung bites stupides! (나도 몰랐어! 알았으면 절대로 안 오지, 망할 병신들아!)”

간간이 ‘매녹’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저들이 말하는 ‘매녹’이 무엇인지 희수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매녹은 죽은 자를 일컬었다.

사람의 살을 양분으로 움직이는, 좀비. 이 세계에선 그것을 매녹이라 불렀다.

‘도망쳐야 해.’

옆으로 쓰러져 있던 희수는 의자에서 벗어나려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남자들이 그녀의 옷을 벗기느라 밧줄이 느슨해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밧줄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희수는 심한 기아 상태였다. 벌써 일주일째 음식물을 먹지 못했다. 미약한 몸짓이나마 열심히 밧줄을 풀어내려 애썼지만 쉽게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으아아악!”

그녀의 뒤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상황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희수가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눈앞에 뿌연 유리창을 발견했다. 그 유리창에 좀비와 좀비에게 붙들린 남자의 모습이 비쳐졌다.

자신의 입에 성기를 쑤셔 넣던 그 남자였다.

“아아아아악!”

우두둑, 츱, 쩌억, 쩌걱, 쩌걱. 유리창으로 보이지 않았어도 저 끔찍한 소리가 뭔지 희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좀비는 남자의 팔을 뒤로 꺾어 반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고 어깨부터 씹어 먹기 시작했다.

바닥에 귀를 붙이고 쓰러져 있던 희수는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심장소리인 듯싶었다. 공포심이 극에 달해 지금 심장마비로 죽는대도 이상할 게 하나 없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좀비, 매녹을 마주친 게 벌써 몇 번째인가.

아무리 봐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저들의 흰자위만 가득한 눈동자가 그랬고, 익숙하게 생긴 생김새가 그랬다. 저 좀비 또한 자신과 같은 비행기에 있던 사람이라 생각하니 끔찍한 상상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간신히 발을 굴러 의자의 방향을 돌렸다. 오두막을 나가려면 괴로워도 좀비가 있는 쪽으로 가야만 했다. 좀비는 일단 먹잇감을 하나 잡고 나면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으니까.

“아아아아아악!”

남자의 비명소리가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희수는 젖 먹던 기력까지 다했다. 얼굴과 어깨가 바닥에 쓸렸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탁.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던 희수의 코앞에 누군가의 발이 나타났다. 간신히 눈을 들어 올리자 검은색 복장의 남자와 시선이 얽혔다.

바닥에 있는 희수가 올려다보니 그는 거인처럼 보였다. 기척도 없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 모를 일이었다.

“Tu es un voleur aussi? Comme des gars la bas. (너도 도둑인가? 밖에 있던 이들처럼.)”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는 희수를 향한 게 아니었다.

“Aidez moi! S'il te plait aide moi!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그는 투명인간을 대하듯 희수를 지나쳤다.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 좀비에게 붙잡힌 이가 놓친 금화와 보물을 챙겨 들었다.

희수가 남자들에게 빼앗겼던 마석 목걸이도 집어 들었다.

“Faux. (가짜로군.)”

이리저리 보더니 관심 없는 듯 바닥에 버렸다.

옆에서 좀비가 사람을 뜯어 먹는데, 두려움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도 쓰이지 않는 눈치였다.

“S'il te plait Aidez moi! (제발 살려 달라고!)”

뭐라고 소리치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오두막을 한 번 둘러보았다. 뭔가 더 챙길 게 있나 살피는 듯 보였다.

희수는 그 짧은 순간 남자의 관심이 제게 닿았다고 생각했다.

‘살려 줘! 살려 주세요!’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는 곧장 오두막을 나서려 문으로 향했다. 희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쳤다.

“으으으! 으으으으읍!”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이 순간 미치도록 답답했다.

문을 나서기 전, 다행히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희수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제발 자신을 좀 구해 달라 하는 간절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관심을 보인 건 완전히 다른 이유였다.

남자의 손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었다. 덩달아 희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파란색 불꽃은 오두막의 문에 옮겨붙었다. 저 불은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희수는 본 적이 있었다.

‘좀비를 태우는 불꽃.’

남자가 좀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파란색 불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좀비는 불에도 타 죽지 않았다. 하지만 파란색 불꽃에는 종잇장처럼 화르륵 타올랐다.

문제는 저 불에 타 죽는 게 좀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화염은 빠르게 오두막의 곳곳으로 옮겨졌다. 희수는 다리 근처에서 느껴지는 더운 기운에 몸을 움츠렸다.

“으으으…….”

이 세계에 떨어지고 이미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죽음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남자는 희수의 기척을 보고도 알은척하지 않았다. 화염보다 뜨거운 것이 희수의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희수 언니, 꼭 살아남아요. 돌아가지 못할 거라면, 여기서 반드시 살아남는 거예요. 꼭.’

그뿐인가.

‘……희수야, 엄마가 미안하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서자 타인처럼 살았던 엄마도 떠올랐다. 그렇게나 미워하던 얼굴이 눈앞을 둥둥 떠다녔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세상. 여기서 사람취급도 못 받고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희수야, 엄마가 미안하다.’

정작 엄마한테는 미안하단 말 한마디 하지 못했는데.

‘희수 언니, 언니라도 살아남아요. 꼭. 꼭이요.’

저 대신 죽은 민주에게도 면목이 없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꼭,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결심한 희수가 바닥에 머리를 쾅쾅 부딪쳤다.

“으으으으!”

어떻게 해서든 남자의 관심을 끌려고 있는 힘껏 머리를 부딪쳤다. 몸을 앞뒤로 움직이자 의자가 끼익끼익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좀비에게 시선을 고정했던 남자가 흘긋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희수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발가벗은 것보다 더 외설적인 자신의 차림새 때문이었다.

여기서 강간을 당할 뻔한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부터 시작해, 마주치는 남자들마다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다. 이 사회의 제도 밖에 있는 여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의 눈빛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 희수의 머릿속에 번뜩 섬광이 스쳤다.

‘이 남자는 여태껏 보았던 남자들과 달라.’

그는 구원자로 보였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난 구원자였다. 자신을 해치지 않고, 어떤 것도 앗아 가지 않을 사람.

간절히 요청한다면……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사람.

“Etranger? (이방인?)”

희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칭할 때 몇 번이나 들었던 단어였다.

남자는 그제야 관심이 생겼는지 몸을 굽혀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그녀의 눈을 벌려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에메랄드빛 영롱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녀의 상태를 샅샅이 살피는 것이다.

희수는 남자가 자신의 무엇을 검사하는 건지 알아챘다.

좀비들은 하나같이 눈동자가 뒤집어졌다. 그리고 좀비가 되기 전, 전조현상으로 동공이 붉게 변한다. 남자는 지금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좀비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게 분명했다.

희수의 왼쪽과 오른쪽 눈을 확인한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이대로 그녀를 화염 속에 버리고 갈 것인지, 살려 줄 것인지. 그것을 고민하는 듯 보였다.

희수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저 남자의 선택에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아아…… 아…… 으으으.”

살려 달라고 빌고 싶은데 희수는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가 없는 상태였다. 물론 이곳의 말을 할 수 없으니 소리를 낸다고 해도 아마 의사소통은 되지 않았겠지만.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희수는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다리 쪽이 타는 듯 뜨거웠다. 아무래도 의자 다리에 불이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남자는 결국 다시 몸을 숙였다.

우드득. 희수의 몸을 옭아매던 밧줄을 고무줄 끊듯 맨손으로 끊어 냈다. 다리에 묶인 것도 풀어 주었다.

“으윽.”

의자에서 해방된 몸이 쓰러지듯 바닥을 굴렀다. 묶여 있느라 피가 통하지 않던 몸이었다.

남자는 아무 미련 없이 불타는 오두막을 등졌다. 희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간신히 몸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저 남자를 따라가야 해.’

이곳에서 혼자 남아 봐야 벌어질 일은 뻔했다. 이미 쓰라린 경험으로 겪어 온 터였다.

희수는 정신없이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는 무척 장신인 데다 걸음이 빨랐다. 희수와 적어도 30센티미터는 키 차이가 날 것 같았다. 남자는 희수가 자신을 따라오는 걸 알고 있을 게 분명한데도 속도를 전혀 늦추지 않았다.

점점 그를 따라가는 게 벅차졌다. 숲이라 뛰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자칫 그를 놓쳤다가는 영영 혼자 남을 것만 같았다.

“학!”

결국 무리해서 뛰어가던 희수가 철퍽 넘어졌다. 무릎이며 넘어진 곳이 아팠지만 이를 살펴볼 새도 없었다.

희수는 벌떡 일어나 다시 남자의 뒤를 쫓았다. 한참을 뛰자 그와 몇 발자국 차이 나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러자 남자가 자리에서 뚝 멈춰 섰다. 하마터면 등에 부딪칠 뻔했다. 희수가 걸음을 멈추자 그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Toi. (너.)”

자신을 부르는 걸 알고 희수가 머뭇거렸다.

“Arretez de me suivre. (그만 따라와.)”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몰라도 그만 꺼지라는 말인 것 같았다. 그의 날 선 목소리가 경고했다.

“Si tu me suis, je vais te bruler aussi. Comme je l'ai fait a Maenock. (계속 날 따라오면, 불태워 버리겠어. 매녹을 태웠던 것처럼.)”

남자는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다시 휙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희수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에 주눅이 조금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다시 혼자 남겨질 순 없어.’

결국 희수는 다시 남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은 전보다 더 빨라졌고 희수는 숨을 헉헉거릴 만큼 뛰어야 간신히 옆에 따라설 수 있었다. 남자는 희수를 쳐다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다.

“Casse-toi. (꺼져.)”

희수는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내용을 짐작하려 애썼다. 조용한 음성인데도 사납게 들렸다. 한껏 기죽은 채 따라 걷자 그가 조금 인상을 구겼다.

“M'as-tu entendu? Casse les couilles. (못 들었나? 꺼지라고.)”

작은 개울이 나타났다. 희수는 바닥도 살피지 못하고 남자의 눈치만 보며 따라가느라 발이 다 젖는 줄도 몰랐다.

결국 우뚝 자리에서 멈춰 선 그가 희수를 향해 똑바로 몸을 돌렸다.

“너,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

희수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남자가 자신을 그리 탐탁잖게 생각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저리 꺼져.”

그가 희수의 뒤편을 손가락질했다.

“따라오지 말고, 가라고.”

“…….”

희수가 영문을 모르고 멀뚱히 서 있기만 하자 그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해서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던졌다. 어차피 여자는 이방인이니 자신을 알 턱이 없었다.

성큼 다가선 그가 희수의 어깨를 붙잡아 몸을 돌려 세웠다. 그러고는 등을 떠밀었다.

“가.”

“…….”

“골 아프게 하네. 가라고!”

“…….”

자꾸만 등을 떠미는 통에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희수는 다리에 힘을 꾹 주고 버텼다. 그럴수록 등을 떠미는 그의 힘이 강해졌다.

“좀 꺼져!”

자신에게 소리치는 남자보다 두려운 건, 이곳에서 혼자 남겨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 남자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남자였다. 이 남자는 이곳에서 만났던 다른 남자들과 다르다. 아무것도 없는 여자에게 뭐든지 가져가려고만 하는 이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저리 가라고!”

희수는 자신을 밀치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거머리를 떨궈 내듯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아……!”

희수는 맥없이 바닥에 픽 쓰러졌다. 일주일을 굶은 그녀가 밧줄을 맨손으로 끊어 내는 남자를 당해 낼 리 없었다.

“따라오지 마.”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길을 가려 했다. 정말이지 무심한 태도였다.

하지만 희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따라갔다.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남자는 그녀에게 내려진 마지막 동아줄이 되었다.

희수는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빌라고 하면 빌 수도 있었다. 해 달라는 건 다 해 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보호해 주기만 한다면.

“넌 말을 전혀 못 알아듣나?”

간절하게 그를 쫓아간 희수는 단번에 그에게 멱살을 잡혔다. 이미 반쯤 찢겨진 상의가 그의 손에 잡혀 올라갔다.

“저리 꺼지라고 했잖아.”

“으으…….”

“말을 못 해?”

하필이면 실어증에 걸려 어떤 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상태였다. 희수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치 박제된 나비가 된 기분으로, 덜덜 떨며 그를 버텨 내었다.

“쫓아오면 정말 죽여 버릴 거다.”

남자가 그녀를 바닥으로 밀었다. 희수는 나무에 등을 부딪히며 풀썩 넘어져 돌부리에 손을 찍히고 말았다.

“아!”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그녀의 사정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고꾸라진 그녀의 무릎을 발로 툭 찼다. 희수는 움찔하며 얻어맞은 개처럼 눈치를 살폈다.

“꺼져.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가 다시 몸을 돌렸다. 아니, 바로 그 찰나에 희수가 먼저 그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으으으!”

“……이게 미쳤나.”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알겠다.

“이거 안 놔?”

희수를 위협하듯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한 대 맞는 게 아닐까 싶어서 이를 꽉 깨물고 눈을 감았다.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이 세계에서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좀 가라고!”

하지만 그는 희수를 때리는 대신 그녀의 몸을 다리에서 떼어 냈다. 희수는 그에게 반항하듯 재빨리 다시 다리를 붙잡았다. 코알라가 나무에 붙듯이 간절하게 그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하, 이딴 걸 괜히 살려 줘서…….”

그가 희수의 팔을 붙잡아 떼어 내고, 희수는 다시 그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의미 없는 몸싸움이 계속되었다. 희수는 말을 전하지 못하는 대신 그에게 눈빛으로 마음을 전하고자 했다.

제발 버리고 가지 마세요. 그런 시선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는 어느 순간이었다.

“……!”

무심하리만치 단정하던 남자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멈칫했다. 흔들리는 그의 시선이 향한 건 희수의 얼굴이 아니라 그 아래였다.

몸싸움을 하느라 그녀의 상의가 반쯤 풀려 있었다.

본능처럼 여자의 가슴에 닿았다가 급히 멀어지는 남자의 시선에는 수치심이 얽혀 있었다.

“……저리 꺼져!”

남자가 뭔가에 찔린 것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이성의 몸 때문에 느끼는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마치 타인의 것을 도둑질한 사람들이나 보일 법한 눈빛이었다.

그는 얼른 희수를 떼어 놓고는 전보다 급하게 몸을 돌렸다.

‘정말이야. 이 남자는 완전히 달라.’

여태껏 자신을 탐하고 훔쳐 가려던 남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남자였다. 오히려 자신이 여자를 탐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처럼 보였다.

희수는 있는 힘껏 그의 허벅지를 붙잡고 매달렸다.

“이거 놔! 좀 놓으라고! 이 미친……!”

그가 몹시 당황하며 그녀를 떨쳐 내려 했다. 전보다 훨씬 과격하게 밀쳐 냈다. 종국에는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희수는 그가 감추려는 걸 기어코 보았다.

확인하듯 그곳으로 손을 뻗자, 신음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이……!”

그녀의 손은 정확히 그 부분을 짚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부분이 굉장히 불룩했다. 이렇게 클 수가 있나? 느껴지는 감각이 상당해서 희수는 내심 놀랐다.

“이, 이거, 이거 안 치워?”

그녀가 남자의 성기를 어루만지듯 손을 움직였다.

“이 미친…… 미친 계집.”

곧 고환이 있는 곳이 느껴질 만큼 성기가 위로 크게 들렸다. 발기한 남성이 철봉을 만지는 것처럼 딱딱했다.

“하지 말라고……!”

섬세하진 않아도 분명한 의도를 가진 여자의 손길이 남자의 성기를 주물렀다. 손을 움직이는 동안 희수는 그의 눈동자에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힘이 점점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희수가 그곳을 더듬을 때마다 그가 눈가를 움찔움찔 떨었다. 그리고 하의의 옷감 사이, 단추로 여며진 곳이 느껴졌다. 여기를 열면 그의 것이 생으로 만져지겠구나. 그런 확신이 들었다.

희수는 그의 의사를 묻듯이 빤히 주시했다. 초록색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숨만 크게 내쉬고 들이쉬길 반복하며, 그는 더 이상 희수를 떼어 낼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억세게 머리채를 잡았던 손길은 이제는 그냥 희수의 머리카락을 쥐고만 있었다.

“…….”

눈이 마주치고, 둘 사이는 고요했다.

침묵.

그것은 소극적인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희수는 본격적으로 남자의 다리 사이로 움직였다. 대충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그의 하의 단추를 풀어냈다. 남자는 인형처럼 숨만 쌕쌕 내쉬며 눈 한 번 깜빡하지 못하고 희수가 하는 것을 응시했다.

단추 몇 개를 끄르고 옷감을 젖히자 크게 발기한 성기가 튕겨지듯 나타났다.

꺼덕이는 것은 한 손으로도 다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태어나서 본 것 중에 가장 두껍고 길었다. 평범한 살덩이가 아닌 것처럼 딱딱하지만, 만져지는 촉감은 벨벳처럼 부드러웠다.

“아윽.”

그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주춤 걸음을 물리며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희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말을 한다 해도 남자와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어 그와는 눈으로 소통했다. 남자와 시선을 맞춘 채로, 그의 것을 위에서 아래로 잡고 쓸어내렸다.

정말 싫다면 거부하겠지.

맨손으로 밧줄을 끊어 내는 남자가 자신을 떨치지 못할 리 없으니까.

“아…….”

희수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금씩 세게 손을 움직였다. 표피가 밀렸다가 올라오면 손에 쥔 것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별것 없는 동작에도 그는 크게 미간을 구기고 신음했다.

“아, 제기랄, 후우…….”

귀두의 홈이 파인 곳을 손가락으로 구슬리자, 희수의 뒷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두피가 자극될 만큼 머리카락이 세게 당겨져 무척 아팠다. 그가 힘을 잔뜩 주고 있어서 희수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으으.”

하지만 그녀만큼이나 그 역시 고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괴로워 보였다.

싫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희수의 손길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만…… 그만해.”

그의 가슴이 마구 들썩였다. 자유로운 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미약한 손길. 본심은 그녀를 거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지 마. 그만 멈추라고…….”

희수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말투나 목소리를 듣고 눈치껏 짐작할 뿐이었다.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려 하는 걸 보면, 어쩌면 이 행위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의 몸은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희수는 투명한 액이 끈적이는 요도 구멍을 검지로 꾹 눌렀다가 떼었다. 쿠퍼액이 날씬한 손가락에서 실같이 이어졌다.

크게 충격받은 얼굴이 그녀의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하아…….”

희수는 손으로 하는 걸 그만두는 대신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남자에게 허락을 구하듯 눈을 맞추고 천천히 입술을 성기에 가져갔다.

그의 몸에 얼굴을 가까이 붙이자 좋은 향기가 훅 끼쳐 왔다. 그래서 더 과감해졌는지 모른다. 희수 역시 자발적으로 해 보기는 생전 처음인 행위였다.

“아…….”

그는 무척 심각한 얼굴로 희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이 재앙이라도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도저히 말릴 수 없는, 끔찍하게 기분 좋은 재앙인 게 분명했다.

“아! 젠장, 제기랄, 아……!”

희수의 작은 입술이 귀두에 닿자마자 그는 비명을 지르듯 신음했다. 혀가 귀두를 할짝일 때는 그녀의 어깨가 부서지도록 움켜쥐었다.

“우으으!”

맨손으로 밧줄을 끊어 내는 남자였다. 희수가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뒤틀자 그가 얼른 손에서 힘을 풀었다. 미안하다 사과하듯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서 손을 떼어 버렸다.

자기 자신이 전혀 제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제…… 이제 그만해.”

일련의 상황을 보고 있던 여자에게 당황한 그가 다시금 그녀를 밀어냈다. 거칠지 않았지만 전보다 더 단호했다.

“그만. 난 이런 걸 원하지 않…….”

그 순간 희수가 입을 벌리고 그의 성기를 입안 가득 넣었다. 치아를 감추고, 혀를 내려 최대한 깊숙이 머금었다.

“아아, 아…… 흐윽.”

그래 봐야 겨우 귀두 부분만 삼켜졌다. 미처 머금지 못한 아래 기둥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은 그의 허벅지에 두었다. 단단한 허벅지가 그녀의 손을 의식하고 크게 떨렸다.

희수는 고개를 올렸다가 내리며 왕복운동을 시작했다. 쇠막대 같은 기둥을 꽉 붙들고 남자의 반응을 살피며 행동을 빨리했다.

“아아, 젠장, 젠장, 아! 이, 미친…….”

그녀가 빨아들이듯 입안에 힘을 주면 그는 죽어 가는 사람처럼 신음했다. 눈이 반쯤 풀려 있다.

그는 희수의 어깨와 목덜미를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전처럼 세게 쥐진 못하고 빈손을 꽉 쥐었다가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음미하듯 매만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가 금세 놓고, 제 주먹을 꽉 쥐기를 반복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무시무시한 괴력을 뽐내던 남자가 희수의 손길 아래에서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인 양 바들바들 떨며 신음했다.

“하아, 이…… 후우…….”

이런 자극이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여자에게 애무당하는 걸 굉장히 낯설어하면서도 눈앞에 드밀어진 욕구를 피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본능적으로 허리를 튕기고 있었다.

“읍.”

반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목젖을 마구 찔렀다. 점점 버거워지는데, 다행히 사정이 멀지 않았다. 그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절정을 맞았다.

“으윽……!”

그 황홀한 절정의 순간에 흠뻑 취한 그는 성기를 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희수는 그의 정액을 고스란히 머금었다. 비릿하고 역겨운 액체가 입안에 가득했다. 목으로 넘어갈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구토가 일었다. 하지만 희수는 꾹 참은 채 그가 사정을 마칠 때까지 그것을 물고 있었다.

이윽고 모든 게 끝나자 결국 희수가 급히 고개를 돌려 바닥에 대고 정액을 뱉어 냈다.

“쿨럭.”

그녀가 헛구역질을 하는 동안 그는 여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숨이 차서 미칠 것 같다.

등 뒤에 기댈 곳이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 볼썽사납게 넘어질 뻔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절벽으로 뛰어올라서, 만세를 외치며 힘차게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는 멍하니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 신이시여…….’

칼릭스는 20년 평생을 사는 동안 스스로 성기를 만져 자위조차 해 본 적도 없는 남자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싶겠지만 그의 주위에는 저 같은 남자들만 있었다.

죽을 때까지 순결하겠다고 교황에게 맹세를 했기 때문이다.

교황에게선 등을 돌렸을지언정, 감히 신의 앞에서 한 맹세를 깨지는 못했다. 자신의 욕구를 마주하는 건 더럽고 불결한 행위라고 배워 왔다.

하지만 이 감각은 절대로 더럽고 불결한 행위가 아니다.

칼릭스는 마치 천국의 세상에 영혼이 빨려 들었다가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천국. 여자의 입안은 천국이었고, 그녀가 주었던 낯선 감각은 생을 통틀어 두 번 다신 없을 것처럼 벼락같이 내리꽂혔다.

그렇게 동정남의 첫 번째 황홀경이 끝났다.

* * *

“후우- 후우-”

희수는 모닥불에 열심히 바람을 불어 넣었다. 행여 남자가 만들어 놓은 불이 꺼지기라도 할까 봐 한시도 쉬지 않았다.

그는 부싯돌 없이도 파란색 불꽃을 손에서 만들어 냈다. 실로 놀라운 능력을 가진 남자였다.

“…….”

칼릭스는 잡은 새끼 돼지를 손질하는 내내, 눈으로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파란 불꽃은 평범한 불이 아니라서 웬만해선 잘 꺼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곳에서 상식이라 할 것들을 잘 모르고 있었다.

괜히 체력을 낭비할 것 없다고 말려 줄 수도 있지만 칼릭스는 여자에게 굳이 필요치 않은 말을 걸기가 주저되었다. 그래서인가. 작게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가뜩이나 더 불쌍해 보였다.

말랐군.

여자는 툭 치면 바스러질 것처럼 보였다. 아까 그녀를 밀쳐 내면서 느낀 거지만 굉장히 가벼웠다.

방금 전에는 충분히 그녀를 거부할 수 있었다. 체격이나 힘이나 무엇 하나 칼릭스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여자가 그런 행동을 하게 내버려 둔 것은 그 자신의 의지였다.

본능이 지배하는 욕구에 몸을 던진 것이다.

마치 짐승처럼.

“하아.”

칼릭스는 새끼 돼지의 다리를 잘라 내다 말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즐겼다.

아니, 즐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 감각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칼릭스는 절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도, 그 어떤 고결한 사제라 해도 저 여자가 주는 쾌감을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자는 그의 아래에 있었다. 밑에서부터 간절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눈빛…… 동정심을 바랐는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그의 지배욕을 자극했다. 당장 여자를 정복하고, 그녀를 거칠게 탐하며 갖고 싶은 음욕을 이끌어 냈다.

그 와중에 그녀의 가슴이 보였다. 하얀 피부 위에 선홍색 돌기 역시 또렷했다.

칼릭스는 단 한 번도 여자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없었다.

눈을 돌렸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하필 옷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반쯤 가려져 있어서 더욱 시선을 끌었다.

완만한 곡선을 가진 탱글탱글한 여자의 몸을 한 번 만져 보고 싶었다. 특히 얼핏 본 그 젖꼭지는 충격이었다. 분명 자신에게도 있는 신체의 일부인데, 그녀의 것은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진한 분홍빛의 잘 익은 크랜베리 같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심장이 쿵쾅쿵쾅 난리였다.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특히 배 속에 무거운 것이 차오르듯 뭉치는 느낌. 남성이 발기하는 그 느낌이 무척 선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비밀스런 ‘그곳’에 여자의 손이 닿았던 것도 생전 처음이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이 옷 위를 어루만졌을 때 칼릭스는 스스로 바지를 벗어 버리고 싶었다. 인내하기 정말 어려웠다.

뜨거운 혀가 그곳에 닿는 순간은 정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짜릿했다.

여자의 입안은 아주 좁았고, 촉촉하고, 뜨거웠다. 젖은 점막이 그의 것을 삼킬 듯이 빨아들였을 때 칼릭스는 거의 실신할 뻔했다.

그 순간을 상기하자 다시 단전으로 피가 몰렸다. 성기가 죄어드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자신의 다리 사이를 힐끔 응시했다. 벌써 하의가 불룩 솟아 있었다.

툭.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그는 이마를 감쌌다.

이 얼마나 무지한 몸인가.

신체가 왜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질 않는 건지. 아니, 왜 자꾸만 아까의 순간들이 떠오르는 건지! 그의 이성은 괴롭고 고민스러운데 이를 배반한 몸이 야속했다.

칼릭스 클로비스.

‘빛을 섬기라’는 자신의 이름이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그의 가문, 클로비스는 대대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교황을 지켜 왔다. 덕분에 칼릭스는 신전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미 교황의 성기사가 되기로 결정된 사람이었다. 성력 역시 강력했으니까.

아무리 신전을 나왔다 한들, 그의 숭고한 정신은 한 번도 더럽혀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까 그 순간을 떠올리고 멋대로 발기한 성기가 그렇게 불쾌할 수 없었다. 몽정을 하거나, 아침에 성기가 서는 건 무의식중에 벌어지는 일이라 딱히 죄책감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는 뚜렷한 자신의 의지로 여자가 주는 행위를 즐겼다. 그리고 그 쾌감을 떠올리고 되새기며 다시 발기했다.

신전에 있을 때, 음욕을 탐하다 파면당한 사제와 기사를 욕했던 자신이 창피해졌다. 자신이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저 여자를 내가 왜 데려왔지.’

차라리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나을 텐데. 자꾸만 제 눈치를 살피며 얼쩡거리는 통에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으으으!”

그 순간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에 손을 털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에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뜨겁게 달아오른 땔감이 뒹굴었다. 여자가 놀라 급하게 일어서며 발로 잘못 건들인 듯했다.

“하아.”

여자를 볼 때마다 한숨만 나왔다. 칼릭스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저 여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골치가 아팠다. 그는 지금 누군가를 도와줄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을 보고 여자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튀어나온 땔감을 나뭇가지로 툭툭 치며 다시 불 속으로 집어넣으려 용을 썼다.

“비켜.”

칼릭스가 손질한 새끼 돼지를 들고 모닥불 앞으로 다가섰다. 땔감을 손으로 집어 다시 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그의 맨손을 번갈아 보았다.

칼릭스는 여자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나무 아래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리 가서 앉아 있어.”

그는 숲에서 딴 커다란 이파리 몇 장에 새끼 돼지를 감쌌다. 보통은 마른 식량으로 끼니를 때웠다. 하지만 오늘은…….

칼릭스는 여자에게 미안한 게 하나 있었다.

행위가 끝난 뒤,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는 자신이 여자의 몸에 남긴 멍 자국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바짝 마른 어깨 부분이 퍼렇고 벌겋게 변한 것이다.

‘제기랄!’

하얀 피부에 남은 울긋불긋한 자국은 굉장히 폭력적으로 보였다. 자신이 흥분에 취해 세게 쥐었던 그 부분이, 그렇게 심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칼릭스는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 하는 여자인데……. 잘못했다간 어깨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미안하단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표현은 하지 못했지만 죄책감에 뭐든 해 주고 싶었다.

‘누구든 이 정도의 선의는 베풀었겠지.’

기왕 불을 피웠으니, 고기가 잘 익도록 빈 곳 없이 제대로 이파리를 둘렀다. 땔감을 들어 올려 그 아래에 잎에 감싼 고기를 넣었다.

일을 하는 동안 여자는 그의 곁에서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서성거렸다.

“가서 앉아.”

칼릭스가 뒤쪽을 고갯짓했다. 하지만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뭔가를 도와주려는 듯이 손을 뻗었지만, 그가 다소 매정하게 그 손을 쳐 내었다.

“앉으라고.”

“…….”

답답해진 그가 이제야 여자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내리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넌 말을 전혀 이해하질 못하는 건가? 조금도?”

“…….”

“말을 해 봐.”

“…….”

“뭐라도 좋으니까 말을 해 보라고.”

순간 이상한 예감이 든 칼릭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여자는 순순히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볼을 잡아 누를 때까지도 그녀는 아무런 반항이 없었다. 칼릭스는 여자의 벌어진 입안을 살폈다.

“혀는 있는데.”

혀가 잘린 게 아닐까 했는데 치아까지 전부 멀쩡했다. 물론 아까 그의 것을 애무해 줄 때 전부 느꼈던 것들이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확인을 했다.

여자는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라 이곳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녀는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으읍.”

칼릭스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입속에 손가락을 넣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여자가 고개를 조금 뒤로 뺐다.

하지만 이조차도 거부하지 않았다. 다른 것도 넣었는데 손가락쯤이야 대수일까. 그가 검지로 그녀의 입안을 휘젓자 미세하게 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여자는 혀를 움직이는 데도 이상이 없었다.

‘내가 미쳤나.’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혀를 움직이는지, 입술을 오므리고 어떻게 물건을 삼키는지. 칼릭스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보고 싶었다. 저 부드러운 속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 그래, 사실은 그랬다…….

‘젠장.’

여자의 존재가 자꾸만 그에게 충동적인 행동을 유발했다. 칼릭스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근데 왜 말을 안 해.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

“…….”

“너 혹시.”

장애가 있는 거냐는 물음이 목까지 올라왔다. 어차피 알아듣진 못할 테지만 그래도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럼 정말 아무 말도 못 해?”

“…….”

“나 참.”

멀뚱하니 눈만 깜빡이는 걸 보고 있으니 답답해졌다. 말도 못 하고,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대체 이 여자를 어떡하면 좋지?’

이곳에는 6개의 도시가 있었다.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면 성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마석 목걸이로 완벽하게 신분이 증명되어야만 했다.

이유는 바로 매녹 때문이었다.

악의 근원인 카이사르에게 혼을 빼앗긴 죽은 사람들이 도시 밖을 돌아다녔다. 그들이 매녹이었다. 매녹은 사람을 사냥해서 먹잇감으로 삼았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로 도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칼릭스처럼 도시 밖을 다니는 사람들은 딱 다섯 종류였다.

매녹을 사냥하는 용병, 혹은 신성력을 가진 신전의 성기사, 아니면 도시 밖의 광산 같은 곳에서 고된 노역을 형으로 부과받은 죄인, 이 여자와 같은 이방인.

그리고…… 도둑.

사람들은 악마, 카이사르에게 혼을 바친 미개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매녹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녹은 그런 괴물이 아니었다.

매녹은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일급비밀이라 신전의 고위급 사제와 기사 몇 명만 알고 있었다.

도둑들은 이 비밀의 일부를 알고, 이방인의 물건을 훔치려 도시를 나온 간 큰 인간들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여자는 도둑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이방인은 죄인들과 함께 노역을 하게 돼 있었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여자 역시 광산으로 보내졌어야 하는데, 도둑들에게 잡혀 있었다는 건…….

문득 오두막에서 봤던 가짜 마석 목걸이가 떠올랐다. 그녀의 것이었던 게 분명했다.

“Ariana de Black Castle.”

블랙캐슬 출신의 아리아나라는 뜻이었다. 칼릭스는 보자마자 그것이 가짜라는 걸 알았지만 성문을 통과하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여자는 광산에 보내지기 전에 도둑들에게 먼저 잡힌 게 분명했다. 칼릭스는 갑갑한 마음을 달래듯 마른세수를 했다.

“아리아나.”

가짜 마석이 불러온 이름을 여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 반응이 없었다.

“네 이름이 아리아나인가?”

“…….”

“블랙캐슬 출신?”

여자의 멀뚱한 얼굴을 보고 확신했다. 예상대로 그녀의 이름은 아리아나가 아니다. 블랙캐슬이 어디인지조차 모른다. 애초에 이방인이 마석 목걸이를 가졌을 리가.

마석 목걸이는 이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마법이 씌워져 있어 위조가 쉽지 않았다. 아마 돈이 될 만한 일을 여자에게 시켰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매춘을 했었나.”

고저 없는 그의 음성은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었다. 확신에 가까웠다. 잔뜩 가라앉은 그의 짙은 시선이 여자에게 닿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그녀는 꽤나 예쁜 얼굴이었다. 하얀 피부, 검은 머리, 검은 눈. 상아빛 피부는 꼭 실크를 만지는 것 같다. 털이 많지 않고 부드럽다. 무척 말랐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가슴과 엉덩이가 몸에 비해서 작지 않았다.

보기 좋은 몸매를 가진 여자. 거기다 말이 통하지 않고 신분이 증명되지 않아 멋대로 취할 수 있는 여자.

아마 도둑들에게 그녀는 유린하기 쉬운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훔치는 광물이나 이방인의 물건보다 이 여자가 더 값어치 있었을 게 분명했다.

‘정말 매춘을 하던 여자인가?’

여자가 마냥 예뻐서가 아니었다. 평범한 여자가 남자에게 어떤 애무를 해 주는지 칼릭스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저 그가 느끼기에, 여자가 해 주었던 애무가 미칠 듯이 황홀했다. 자신을 만지던 손길은 극상의 쾌감을 유도했고, 그만큼 전문적이었다. 그보다 더한 감각은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았다.

정말, 정말 좋았다.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어떤 남자라도 거부할 수 없으리라. 만약 그 행위를 또 해 준다면 뭐든지…….

“내가 무슨 정신 나간 생각을.”

칼릭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싸늘한 무언가가 등골을 스쳤다. 대가를 지불하고 여자에게 애무를 받는 것, 그게 바로 매춘이었다. 처음 경험한 여자의 손길에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 자신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심했다.

짐승이나 다를 바가 무엇인가. 욕구에 휘둘리는 자신이 역겨웠다. 신전의 가르침이 맞았다. 여자는 악을 이끌어 내는 음탕한 존재였다. 자꾸만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가.

힐긋 여자를 노려본 칼릭스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무래도 저 여자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야 이따위 추잡한 생각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를 만지는 데도 거부감이 없고, 남자가 만지는 데도 전혀 반항하지 않는 여자. 한마디로 남자의 손길이 무척 익숙한 여자였다. 칼릭스는 그래서 그녀가 매춘부였다고 확신했다.

“하아.”

아무래도 저 여자를 빨리 어디든 보내 버려야겠다. 계속 옆에 뒀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미 통제를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았던가. 가령 여자의 입에 손가락을 넣는다든가, 가만히 여자의 애무를 받는다든가…….

칼릭스는 마법사가 아니기에 마석 목걸이를 만들 수 없었다. 그 역시 위조를 해야 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범법을 저지를 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자의 가짜 마석 목걸이는 오두막에 있었으니 파란 불꽃에 타 버렸을 것이다. 저 여자를 거둘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그것을 챙기지 않았다. 귀찮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의 매녹을 처리하고 도시로 들여보내 줄게.”

‘매녹’을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칼릭스는 그 얼굴을 보며 노루나 사슴 같은 동물을 떠올렸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매춘부였다 한들 조금도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혀. 아니, 더러워 피하고 싶기는커녕 칼릭스는 여자에게 불필요한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옆에 있지 않은가. 그녀에겐 분명히 구린내가 났지만 이조차 거슬리지 않았다. 아마 코가 어떻게 되었거나, 정신머리가 어떻게 되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칼릭스는 얌전하게 저만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네가…… 매춘부였다고.”

그녀를 겨냥한 물음이 아니었다. 어차피 여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

기분이 저조하다. 착잡하고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솟았다.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가만 생각에 잠겼다. 그의 옆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여자가 와서 앉았다. 칼릭스에겐 이조차도 몹시 가깝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그런…… 그런 짓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 같지만 칼릭스의 혼잣말이었다.

“다른 남자들한테도 수없이 많이 그 짓을 해 줬겠지. 내가 아니라 다른 남자였어도 상관없었을 테고. 넌 누구든…….”

말을 미처 끝내지 못한 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 어두운 밤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심정이었다.

타닥타닥.

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 외엔 주위가 고요하다.

여자는 어쩌면 제 의지로 매춘을 했던 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자신에게 해 주던 애무가 꽤 주도적이었고, 자의적이었다. 그녀의 태도 또한 결코 남자를 꺼리거나 무서워하거나 하지 않았다.

이런 여자에게 첫 경험을 빼앗긴 게 억울하다.

자신이 20년간 가져왔던 동정을 가져간 게 매춘부라니. 심지어 그녀가 준 쾌락에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그 사실이 칼릭스를 가장 암담하게 만들었다.

저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 일이 없었다면 자신은 평생 여자를 모른 채 살았을 것이다. 둘이 성교를 한 건 아니지만 그녀가 해 준 애무는 그보다 훨씬 더 음탕하게 느껴졌다.

“하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 이미 선을 넘었고, 그는 여자가 주는 쾌락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 버렸다. 여자를 모르기 전으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그는 앞으로 자신의 삶이 이전과 많이 달라지리라 직감했다.

“너…… 정말 몸을 팔았나?”

매서운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꽉 닫아 두었던 쾌락의 문을, 멋대로 열어젖힌 못된 여자.

허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던 거지?”

그가 자신을 따라하라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가만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

칼릭스가 인형에게 하듯 그녀의 고개를 잡아 좌우로 흔들었다. 여자는 전처럼 반항 한 번 없이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혹시 광산(La mine)에서 일하지 않았나? 철광산 말이야, Une mine de fer!”

그럴 확률은 희박했다.

광산에서 일하는 노역부들은 신전과 도시의 엄격한 관리를 받아 절대로 도망치거나 빼돌려질 수 없었다. 게다가 여자는 가짜 마석 목걸이가 있었다. 그건 도시에 출입했었다는 걸 의미한다.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차마 놓을 수 없었다.

심각한 표정을 한 그가 손에 쥐었던 여자의 턱을 놓았다.

둘의 시선이 사슬처럼 얽혔다. 칼릭스는 눈을 마주친 채로 여자의 몸으로 손을 뻗었다. 전에 그녀가 자신에게 했듯이.

“……여자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보통 평범한 여자들은.”

그의 손끝이 얇은 목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움푹 파인 쇄골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것과 똑같은 신체 부위가 이토록 다르게 느껴질 줄이야. 여자의 것은 완만한 곡선을 가졌다. 그리고 부드럽다. 새끼 사슴이나 강아지를 만지는 것보다 그에겐 훨씬 더, 연약하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몸이다.

아니, 지금은 여자의 몸이 얼마나 자신과 다른가 확인을 하자는 게 아닌데. 칼릭스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쇄골을 스치고 내려갔다.

그의 두 번째 손가락이 여자의 너덜너덜한 상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말랑한 가슴의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녀보다 더 긴장한 칼릭스는 숨을 들이켰다.

“평범한 여자들은……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하면 뺨을 때리겠지.”

여자는 몸을 움찔했다. 약간 긴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부끄러워하거나 피하는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마치 그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칼릭스는 거기서 손길을 거뒀다.

잔뜩 신경질이 난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젠장!”

사랑하는 여자도 아니고!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 사귀는 여자도 아니고!

그저 외양만 조금 마음에 들 뿐인 창부!

창부에게 자신의 동정을 줬다니!

“아, 이런 제기랄!”

흙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홧김에 뻥 차 버렸다.

* * *

그래, 저 여자가 무슨 죄인가.

결국 여자의 행위를 말리지 않은 건 나인데. 나도 즐겼는데. 그것도 무척 좋아했으면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녀를 저지하지 않을 거면서. 그건 확실하다.

“…….”

칼릭스는 잘 익은 새끼 돼지의 다리 부분을 잘라 여자에게 내밀었다.

“먹어.”

여자는 눈앞에 다가온 고기를 거절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꽤 굶은 것처럼 보였는데 정말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양손으로 뼈를 붙잡고 허겁지겁 고기를 입에 넣는다.

한 번은 거절할 만도 한데, 여자에겐 그럴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볼이 빵빵해지도록 고기를 씹으며 그제야 뒤늦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검댕이 묻은 볼에 기름까지 묻어 반질반질했다. 여자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마구잡이로 고기를 씹었다.

칼릭스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뜨겁다. 조심해.”

그러고도 힐끔거리며 중간중간 여자를 확인했다. 저러다 목이 막힐까 겁날 정도로 급하게 먹는 탓에 도무지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하아, 내가 대체 뭘 하는 건지.”

입안이 쓰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칼릭스가 제 몫을 먹으려고 고기를 집었다.

툭. 그 순간 인상을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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