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황제와 황후
<보러 갈게.>
그것은 약속이었다. 카를로이가 자신에게 한 약속. 리리안은 이 사실을 라 소르티오에서 깨달았다. 들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들었던 그 짧은 한마디가, 시간이 흐를수록 길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그 짧은 한마디를 생각하고 있을까 고민하다가 리리안은 그것이 기다림이란 걸 알게 되었다. 기분이 묘하게 싱숭생숭했다.
“누가 오시기로 했나 보죠?”
올리비아 도나타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멕서스 호숫가에 앉아 있던 리리안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무슨 소리가 들릴 때마다 고개를 돌리시기에요. 아니시면 말고요.”
오랜만에 다시 본 올리비아는 변함이 없었다. 리리안이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는 것을 듣고 그녀는 말했다. 황제가 ‘뭘 좀 아시는 분’이라고. 올리비아 도나타가 할 법한 평가였다.
<폐하를 잘 모셨다고 얼마나 뭘 많이 내리시던지. 받기가 죄송했다니까요. 저도 즐거웠었는데 그걸로 상찬까지 받다니 말이에요.>
뭔가를 받은 건 올리비아 도나타뿐만은 아니었는지 라 소르티오도 꽤 달라져 있었다. 더 화려해진 것이 분명한데 푸르투와는 다른 걸 보니 올리비아가 도맡아 장식을 한 듯했다.
“기다리는 건 아니고…….”
대답과는 다르게 멀리서 메리앤이 나타나 하는 말 한마디에 리리안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푸르투에서 사람이 왔어요.”
메리앤의 뒤로 고르텐을 비롯한 시종들이 오고 있었다. 정작 카를로이는 없었지만.
“황후 폐하, 얼굴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고르텐도 기분이 꽤 즐거워 보였다. 그를 통해서 리리안은 카를로이가 괜찮아진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황제께서 폐하께 보내는 물건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고르텐 자네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고르텐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종들이 가져온 것들을 주섬주섬 풀기 시작했다. 책 몇 권과 꽃 몇 다발,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이건 전해 달라고 하신 편지입니다.”
“어머, 낭만적이셔라.”
편지지를 보며 올리비아 도나타가 소리를 내 웃었다. 그 바람에 리리안의 얼굴이 설핏 붉어졌다.
“좀 머물렀다 가지, 고르텐.”
“아닙니다, 폐하. 바로 가 봐야 합니다. 푸르투가 요새 바쁘게 돌아가는 통에 다들 정신이 없어요.”
카를로이가 밀레닌과 나눴던 대화를 얼핏 떠올리며 리리안은 쉽게 수긍했다. 아마 새로운 일들을 벌이느라 무척 바쁠 것이었다.
책들은 언젠가 리리안이 관심이 있다고 한 것들 몇 권과 처음 보는 것들 몇 권이었다. 생화 꽃다발은 싱그러웠고 편지지에서도 꽃 향이 났다.
“책과 꽃이라. 숙녀에게 할 법한 우아한 선물이지요.”
올리비아가 흡족한 듯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리리안은 조심스레 편지를 펼쳤다.
<보고 싶다. 곧 갈게.>
짧은 편지였지만 많은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리리안도 알 수 있었다. 편지지에서 풍기는 향이 짙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향은 코가 아니라 마음을 간지럽혔으니까.
리리안은 편지지를 쓸어 보다 조용히 무릎에 내려놓았다.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의 약속을 또 기다리게 되었다.
* * *
새벽에 카를로이는 지독한 악몽에 식은땀을 흘리다 깨어났다. 언제나처럼 리리안을 말로 할퀴고, 리리안은 그런 자신을 떠나는 꿈.
<내가 네 옆에 남을 리가 없잖아. 차라리 죽으면 모를까.>
차갑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리리안의 말들은 오히려 괜찮은 편에 속했다. 카를로이가 견디기 힘든 것은 꿈에 나온 자신이었다. 실제로 저런 말을 하지 않은 리리안에 비해 자신은……. 그 말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텅 빈 침실을 바라보며 꿈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리리안은 떠나지 않았고, 내 옆에 남기로 했다고. 그 거짓말 같은 현실을 실제로 믿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리리안이 그를 떠날 이유 정도야 수십, 수백 가지를 말할 수 있었지만, 남을 이유 따위는 단 하나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
멀리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푸른 새벽빛이 감도는 하늘을 바라보다 카를로이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을 어느 땅을 생각했다.
리리안이 그 햇빛 아래 있겠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렸다.
그 아래서 미소를 많이 지었으면, 감히 더 바라도 된다면 크게 웃었으면 하고 바랐다. 자신이 당장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그녀가 따뜻하길 바랐다.
복잡한 후회와 소망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허덕이던 카를로이는 문득 침대 옆에 올려놓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리리안이 솔타의 항구에서 준 책이었다.
<심심할 때나 힘들 때 읽어 봐.>
심심하진 않았지만 마음이 버겁기는 했다. 카를로이는 저도 모르게 책을 집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다른 누구도 아닌 리리안에게 받은 것인데 너무 소홀했다. 그전까지는 무슨 생각에 힘들든 자신의 업보라 생각해 구태여 떨쳐 버리려 하지 않았지만…….
도대체 리리안이 자신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하는 묘한 기대감과 궁금증에 그는 침대에 기대어 책을 펼쳐 보았다. 속지에 제목이 적혀 있었다.
<죽음을 상대하는 법>
제목만 봐서는 무슨 내용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마물이라도 물리치는 내용인가? 아무 생각 없이 다음 장을 펼쳤던 카를로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분명히 아버지를 깔끔히 죽였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시체가 사라지기 전까진.>
이게 무슨 내용인지.
어쩌면 리리안은 델루아 공작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넘기면 넘길수록 그의 표정은 더 심란해졌다.
“아니…….”
각종 의문사가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도대체 리리안이 이 책을 통해 그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책을 계속 읽었다.
살면서 이런 책을 읽어 본 적도 없었다. 이런 저급한……. 반사회적인……. 사회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카를로이의 인상은 갈수록 찌푸려졌지만 책장을 넘기는 손길은 빨라졌다.
외설적이기는 또 왜 이렇게 외설적인지. 이 사람 저 사람 어찌나 많이 서로 붙어먹는지 리리안이 이걸 그에게 읽어 보라고 했다는 것이 의심스러워질 정도였다. 책이 바뀐 것 아닐가.
외도 때문에 패륜을 저지른 아들의 응징을 기다리며 카를로이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한편으론 리리안의 의도를 가늠하는 것도 계속하면서.
“이게 무슨.”
아버지의 시체가 사라졌다! 새어머니란 여자도. 카를로이는 어이가 없어서 욕을 중얼거렸다. 이런 걸 책이라고 지금……. 다음 권은 또 어디 있는 거지?
카를로이가 책을 덮고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을 때, 고르텐이 들어오더니 카를로이에게 말했다.
“폐하, 뒤냐 공이 찾아왔습니다. 왜 집무실에 오지 않으시냐고……. 오랜만에 푹 주무시는 것 같아 방해하지 않으려 했는데.”
“시간이 아직…….”
말을 잇던 카를로이는 창밖을 바라보다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분명 푸른빛 도는 새벽이었는데,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폐하! 또 무슨 일이 생기신 겁니까. 그럴 줄 알았습니다. 요 며칠 폐하의 상태가 괜찮다 싶었더니 역시…….”
초조한 말투로 말을 내뱉으며 들어오던 알렉시스 뒤냐는 멀쩡히 침대에 앉아 있는 카를로이를 보고 말을 멈췄다.
“폐하.”
“뒤냐.”
카를로이를 훑는 알렉시스의 시선이 카를로이가 들고 있는 책으로 향했다.
“독서……를 하시느라 바쁘셨던 겁니까? 대체 무슨 책이기에 해가 뜬 줄도 모르시고.”
알렉시스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책의 제목을 살피려는 듯 눈길을 돌리자 카를로이는 화들짝 놀라 책을 밀어 넣었다.
“별것 아니네.”
“나중에 저도 한번…….”
“왜 왔지? 바쁜 일인 것 같은데.”
황급히 말을 막는 카를로이를 알렉시스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봤지만 카를로이는 애써 무시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렉시스 뒤냐에게 이런 책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죽고 말지. 심지어 이런 걸 카를로이의 취향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했다. 지성을 중요시하는 뒤냐의 얼굴에 떠오를 경멸이 눈에 선했다.
“집무실에 가셔서 들으시지요. 그리고 라 소르티오에 보낼 것들을 정리해 둔 상태인데 마지막으로 한번 보시겠습니까?”
푸르투로 돌아온 카를로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라 소르티오로 선물 공세를 했다. 식사를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걷다가도 그는 리리안에게 보낼 것들을 생각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좋아하길 바라면서. 그리고 그녀의 일상에 그가 조금이라도 깃들길 바라는 불순한 마음도 있었다.
알렉시스의 질문에 카를로이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뭐 더 하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음.”
카를로이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리리안이 그에게 왜 이 책을 선물, 했을까……. 선물은 맞겠지? 갈팡질팡하는 머릿속에서 그가 추측해 낼 수 있는 것은 하나 정도밖에 없었다.
“무엇이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십니까? 여자에게 필요한 물건이라면 편하게 이야기하십시오. 저도 잘 아는 것들이니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잘 아는 것들은 무슨. 다른 사람은 몰라도 뒤냐만큼은 죽어도 모를 것들이라고 카를로이는 생각했다. 속으로만.
“그게 아니라……. 음. 유행하는 요즘 소설들이 있지 않나.”
“그래서 저번에 폐하께서 직접 골라서 보내 드렸잖습니까.”
“아니, 그런 소설 말고……. 통속 소설이라 해야 할지.”
“예?”
노공작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묻자 황제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 * *
“이제 폐하께서 뭘 보내오실지 제가 다 매일 궁금하다니까요.”
메리앤이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멕서스 호수에서 매일을 보내는 것이 라 소르티오의 여자들에겐 익숙한 일이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멕서스의 물은 솔타의 아름다운 햇빛을 나누어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그림 도구들이 아무렇게나, 하지만 평화롭게 자리했고 테이블 위에는 화병과 책 몇 권, 그리고 벡스가 만든 디저트들이 있었다. 리리안은 카를로이가 준 것들로 가득한 테이블을 바라보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제는 카를로이가 보낸 악단이 호숫가에서 기막힌 연주를 들려주고 갔다. 올리비아는 안목이 훌륭하다며 연신 박수를 쳤지만, 리리안이 좋았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카를로이가 리리안에게 선물하고 있는 건 선물 그 자체가 아니었다. 기대감이었다. 매일매일이 무언가 조금씩이라도 다를 거라는 기대……. 생전 처음 가져 보는 설렘의 종류에 리리안은 가끔 가슴이 벅차오를 때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카를로이는 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이 기대감처럼 리리안에게 스며들었다. 매일을 그가 함께했다.
언제나 바싹 말라 가고 있다고, 말라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생은 촉촉이 젖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만 지나면 꽃이 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토록 비옥하게.
이 변화를 드니스에게 자랑할 수 없음이, 말해 줄 수 없음이 아쉬워서 리리안은 습관처럼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언제나 리리안을 따라다닐 상실이었다. 그리고 리리안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이제 그 씁쓸한 상실의 맛만큼이나 크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리리안은 벡스가 만든 다디단 케이크를 한 조각 집어 먹으며 카를로이의 마음을 기다렸다.
“어머. 왔다, 왔어요.”
메리앤의 말에 리리안의 작은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푸르투의 시종들이 가까이 와 물건들을 내려놓았다. 매일 종류가 다르게 오는 생화, 솔타에서는 찾기 힘든 스타일의 유화 그림들, 노란빛 드레스 한 벌……. 끝도 없이 물건들이 이어졌다.
카를로이가 직접 고른 것을 알기에 무슨 생각을 하며 보냈을지 추측해 보는 재미도 있었다.
“오늘 책이 좀 많네요?”
제인의 말에 다시 보니 새삼 책이 많았다. 리리안은 슬쩍 책 제목들을 살펴보았다. 레이디 미리암의 비극……. 그들의 사정……. 절정……. 제목만 보고서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책들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하나를 골라 책장을 넘긴 리리안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책을 떨어트리다시피 테이블에 던졌다.
“왜 그러세요? 어머, 세상에. 절정이잖아! 이 구하기 힘든걸!”
메리앤이 리리안이 집어 던진 책을 주워 들고 소리쳤다. 올리비아 도나타가 그 반응에 궁금해진 듯 책을 들춰 보았다. 하지만 이내 곱게 다시 덮고 올리비아는 고상하게 부채를 흔들었다.
“푸르투란…….”
웃으며 중얼거리는 한마디에 많은 감정이, 아니, 평가가 느껴졌다.
메리앤은 책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얼굴이 아직도 붉은 황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왜 폐하가 이런 걸 좋아할 거라 생각하신 거죠?”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 멍청이…….”
리리안이 한숨처럼 속삭이며 편지를 펼쳤다.
<못 참겠다. 더 못 기다리겠어.>
글씨체에서조차 성급함이 느껴졌다. 이제 보려면 언제든 볼 수 있으니 하던 걸 꼭 다 마치고 오라는 메시지를 푸르투의 시종들을 통해 매번 전했는데 그마저도 소용이 없어진 듯했다. 그럼 설마 오늘 오는 걸까.
리리안은 괜히 올리비아의 부채를 뺏어 제 얼굴을 가리고 싶어졌다. 민망한 건 사라졌는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뛰고 얼굴은 뜨거웠다.
다른 여자들이 궁으로 다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리리안은 그림을 그리는 척 호수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카를로이가 오늘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아무리 일찍 출발했어도 밤늦게나 도착할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호숫가에서 서성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나 봐, 엄마.”
발걸음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이 이리저리 살랑거렸다.
해가 호수 너머로 넘어갈 때 즈음 말 우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말이 속도를 점점 늦추며 호숫가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리리안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고 경사진 아래로 걸어 나갔다. 왜 이렇게 초조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초점을 잡으려 헤매던 두 눈이 말 위에 앉아 있는 남자의 눈과 마주했다. 심장이 내려앉은 그 순간, 카를로이는 눈 깜빡할 사이에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카를로이가 리리안을 품에 가두는 것이 더 빨랐다. 그 탓에 그를 부르려던 숨은 널따란 가슴팍에 가로막혔다.
“하루만 더 참으면 되는 건데. 그게 안 되더라.”
약간 빠른 카를로이의 숨이 와 닿았다.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에 리리안은 대답 없이 조심스레 그의 등 뒤를 팔로 감싸 안았다. 따뜻했다.
아주 자그마한 동작이었지만 카를로이를 천국에 올려놓기는 충분했다. 이 순간만큼은 만성적인 불안도 그를 괴롭힐 순 없었다.
리리안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 어쩌면 조금쯤은 좋아해 주고 있는 듯도 했다.
“좋은 걸 좋다고 말할 수 있어서, 느끼는 대로 그대로 말할 수 있어서 좋다…….”
카를로이가 중얼거렸다. 리리안은 그의 말을 마음으로 이해했다. 사무치도록. 숨길 것도 없고, 마음에 아무런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이 이토록 자유로운 기분일 줄은 몰랐다.
“그런데 왜 혼자 밖에 나와 있어. 내가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곤 생각 못 했을 텐데.”
리리안이 시선을 피하며 어물쩍 대답했다.
“그림을 좀 그리느라.”
“캔버스엔 별다른 게 없어 보이는데.”
“……원래 오래 걸리는 거야.”
“설마 날 기다린 거야?”
리리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나를 기다렸다고?”
카를로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리리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묻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었는지 카를로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리리안은 멍하니 그 소리를 들었다. 그가 그렇게 소리 내서 웃는 것은 처음 들었다. 듣기 좋은 소리가 바람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칭칭 묶듯 안아 들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걸어갔다.
“뭐 하는 거야. 내려 줘.”
“오늘은 두 발로 걸을 생각 마시지요, 폐하.”
“뭐, 뭐라고?”
“두 발로 걸을 생각 하지도 말라고.”
카를로이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충 대꾸하곤 테이블의 의자를 하나 뺐다. 그러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이상한 뜻으로 한 말은 절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리리안이 두 발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게 공주 대하듯 모시겠다는 말이었는데…….
오늘 읽었던 통속 소설에서 그 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떠오르자마자 그는 그만 할 말을 잃고 우뚝 섰다. 안겨 있는 리리안의 얼굴이 새빨개진 것을 보니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리리안. 너 그 책 왜 나한테 준 거야?”
이성을 되찾기도 전에 본능적인 물음이 그의 입을 빠져나갔다. 리리안이 억울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야말로 오늘 보낸 책들은 다 뭐야?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네가 그런 게 취향인 줄 알고……. 일부러 힘들게 구한 건데. 재밌게 봐서 준 게 아니라고?”
“아니야!”
모처럼 리리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카를로이가 의자에 앉자 그에게 안겨 있던 리리안은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아니라고? 하나도 재밌지 않았어?”
“정말 생각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니까 준 거였어. 키아나가 나한테 준 건데. 내가 무슨 그런 게 취향이라고.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억울함에 빠르게 말을 뱉어 내던 리리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바로 앞에서 카를로이의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자신이 어디에,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지 깨달은 탓이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정신 차려. 리리안이 스스로에게 욕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쉽게 당황하고 쉽게 얼굴을 붉혔다고?
그러나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 봐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카를로이에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매 순간 이어지는 그의 행동이 예측 불가였다. 겪어 본 적이 없어 대하는 것도 서툴렀다.
리리안이 몸을 빼듯 움찔거리자 카를로이의 억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다시 감아 그에게로 당겼다. 리리안이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
“그래? 난 꽤 취향이던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사이로 장난기 어린, 약하디 약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 소리는 리리안의 귀가 아니라 마음을 간지럽혔다. 그의 금색 두 눈엔 장난기가 어른거렸다.
“절정…… 이던가. 특히 그 책이 괜찮던데.”
“……변태인 게 자랑이야?”
“맞아. 그걸 새롭게 깨달았어. 내가 그런 게 취향인 놈이란걸.”
리리안의 얼굴에 기막히다는 표정이 떠오르자 카를로이가 또 한 번 웃었다.
“농담이야.”
헤퍼진 그의 웃음이 어색해서, 또 한편으론 그게 어색한 만큼 가슴이 아파서 리리안은 그 웃음의 자취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리리안의 시선을 느꼈는지 카를로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장난기가 어렸던 금색 눈엔 미묘한 열기가 올라왔다.
“농담은 아닐지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카를로이가 리리안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자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을 것만 같아서 리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잠시간 긴장감이 맴돌았다. 내리깔린 시선들이 배회하다 마주치고 다시 흩어졌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리리안의 목덜미에 안착했다. 그는 리리안을 안으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입술이 스치듯 살결을 쓸었다. 마치 그곳이 리리안의 가장 내밀한 곳이라도 된다는 듯 그렇게.
“리리안.”
“응.”
어쩐지 목이 탔다.
“고마워.”
그를 밀어내지 않아 줘서. 그의 가장 하잘것없는 농담까지도 받아 줘서. 끝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는 이유들을 그는 모조리 삼켜 버렸다.
그의 어깨에 놓인 손을 감싸듯 쥐자 소매 너머로 나온 하얀 팔이 보였다. 리리안의 몸에 델루아 공작이 남긴 흉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서 주기적으로 상처를 보이지 않게 하는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리리안은 어차피 아프지도 않은 흉터라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했지만 카를로이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속죄하듯 리리안의 손목에서부터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다시 그녀의 목에 닿을 때까지.
그가 어떤 마음인지 알 것만 같아서 리리안은 가만히 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살을 덮듯 기억은 기억으로 계속 덮어질 것이다. 단단해질 때까지.
리리안은 등을 돌려 그에 가슴에 기대듯 앉았다. 편안했다. 카를로이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안아 단단히 고정시켰다. 나른하게 들릴 정도로 긴 숨을 내쉬며 리리안이 몸의 긴장을 풀었다.
아름다운 멕서스가 보였다. 노을도 다 지고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등 몇 개의 빛을 받은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일렁였다. 선선한 바람에 머리칼이 나부꼈다.
“여기 전설을 알아?”
리리안의 조용한 질문에 카를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매일매일 호수에 말을 걸었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카를로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져서 리리안은 가만히 손을 얹었다.
“이젠 아니까. 여기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내 말을 듣고 있을 거라는 것도, 내가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도…….”
<내 사랑, 내 생명, 루.>
리리안은 알았다. 자신이 숨을 쉬는 한 드니스도 영원히 숨을 쉴 거라는걸.
드니스가 살아 있다면 칼, 이 멍청이를 보고 뭐라고 할까. 리리안은 문득 궁금해졌다. 멍청이랑 붙어 있더니 너도 멍청해졌다, 얘. 이럴 것만 같다.
“칼, 너도 우리 엄마한테 인사해.”
“무슨 염치로…….”
“왜 네 덕분에 약도 샀었는데. 엄마가 어디서 난 거냐고 그렇게 물어봤었는데 이제야 말하게 되네.”
리리안은 조용한 목소리로 천천히, 드니스에 대한 기억을 풀기 시작했다. 카를로이는 그의 사랑이자 생명을 소중하게 안은 채로 그 모든 말들을 귀담아들었다.
리리안이 해 주는 드니스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것이 오로지 사랑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는 드니스에게 감사했다. 어쩐지 이 모든 일을 겪고도 리리안이 그를 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는 생소한 충만한 사랑 이야기가 그와 리리안의 차이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리리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들리지 않았다.
“리리안.”
대답은 들려오지 않고 작은 몸이 웅크리며 그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카를로이는 테이블에 놓인 담요를 집어 들고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 리리안 위에 덮어 주었다. 틈 하나 없이 꼼꼼히.
그녀를 안은 채로 카를로이는 말 없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죽은 어머니가 사랑한 곳.
<너 때문…….>
카를로이의 손을 잡고 내뱉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언제부턴가 그 말은, 그 기억은 그를 전혀 상처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라 소르티오를, 이곳을 싫어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랬던 곳이 오늘은 꽤 아름다워 보였다. 리리안이 이곳의 어떤 점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리리안이 그의 기억을, 그의 감각을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리리안이 그의 모든 것이 아닐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은……. 그 작은 어린애가 아무것도 없었던 그를 구해 준 이후부터 그는 그녀의 것이었다.
“내 생명…….”
그가 혼잣말처럼 읊조리며 잠이 든 여자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카를로이에게도 이제 온전한 기억이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다시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 *
리리안이 눈을 떴을 땐 침대 위였다. 엄밀히 말하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카를로이의 가슴밖에 없어서 침대 위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조금 오래 걸렸지만.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상쾌하고 몸이 가벼웠다. 근래 잠을 잘 자지 못한 것도 아닌데, 어제의 잠은 마치 특별했다는 듯 몸 여기저기에서 반응을 보였다.
리리안은 일어나기 위해서 슬그머니 카를로이의 팔을 들어 올렸다. 자면서도 그의 인상은 곱지 못했다.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옆으로 옮기고 몸을 빼낸 순간이었다.
“안 돼!”
갑자기 카를로이가 소리를 치며 일어났다.
“칼……?”
카를로이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리리안을 한참 쳐다봤다. 반쯤은 꿈에 빠진 것 같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리리안의 손목을 문지르듯 만져 보던 카를로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안도처럼 느껴지는.
“왜 그래?”
“아무것도.”
대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그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옷매무시를 정리하기도 전에 문가에서 들어가겠다는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뒤냐가 이럴 줄 알았댔어요.”
아셀이 태평한 얼굴로 거침없이 침실로 들어왔다.
“아셀! 허락이 있기도 전에 들어가면 어떡하니.”
뒤에선 애꿎은 메리앤과 제인이 소리를 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쯤 출발하려고 했어. 그걸 못 참고 너를 보내다니.”
“내가 제일 빠르니까요.”
마하에서 돌아온 이후로 아셀의 자만심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알았어. 부탁이니까 잠시만 나가 있어.”
매몰찬 대접에 뾰로통한 얼굴이 된 아셀을 제인이 끌다시피 데리고 나갔다.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무릎 옆에 누운 채로 장난을 치듯 손가락으로 리리안의 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하…….”
끊기지도 않고 계속 나오는 한숨이 그가 얼마나 푸르투로 되돌아가기 싫어하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며. 그리고 다시 오면 되지.”
“그러고 나면. 또 푸르투로 가야 하잖아.”
“영원히 가는 건 아니잖아.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너는 이해 못 해.”
카를로이가 불만 어린 얼굴로 잠시 리리안을 노려보았다. 아까의 아셀과 퍽이나 비슷한 얼굴이었다.
“난…….”
뭐라고 말을 이으려던 카를로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알았어. 끝내고 난 뒤에 금방 다시 올게.”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에 리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그래.”
짧은 답에 카를로이는 툴툴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리리안을 제 옆에 눕혀서 안아 버렸다.
“있잖아.”
“응.”
카를로이는 조용히 말을 골랐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너는 왜 날 밀어내지 않아. 잡는 대로 잡혀 주고 안는 대로 안기고. 너는 날 조금이라도 기다려 줄까. 내가 빨리 오기를 조금이라도 바랄까. 내가 느끼는 갈증을 너도 느낄까.
아니다. 묻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네 감정 중에 나와 비슷한 것이 조금이라도, 흔적이라도 남아 있느냐고. 나를 좋아하냐고. 결국은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하냐는, 사랑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질문만큼은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해서 그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만난 날 말이야. 어릴 때.”
“응.”
“그때 너도…… 날 조금이라도 좋아했을까.”
리리안은 그 질문을 듣고 몸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응. 알잖아.”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카를로이는 변덕스러운 아이처럼 다시 기분이 나아졌다.
“네가 맘대로 이름을 부르고, 맘대로 이마에 입도 맞추고, 맘대로 시골 여자애 꾀어 놓고 그걸 왜 물어.”
“꼬시긴 했는데 넘어온 건 줄은 몰랐지.”
“그때 안 넘어갔으면 이러고 있지 않지, 지금…….”
그럼 지금은?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카를로이는 그녀에게 매달리듯 달라붙었다.
“내가 왜 좋았는지 하나만 말해 줘. 하나만…….”
카를로이가 얼굴을 리리안의 목에 은근히 비볐다. 리리안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쉬운 질문이었다. 이유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까.
“네가 도망치라고 했잖아.”
“뭐?”
“네가 도망치라고 해 줘서. 처음 보는 여자애도 걱정해 주는 사람이라서.”
“그건 별게 아니었어. 당연한 거잖아.”
“모두에게 당연한 건 아니니까.”
리리안은 잠자코 카를로이의 머리칼을 쓸었다. 행복한 곳에서 자랐다면 카를로이는 그 마음 그대로 자랄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예뻤잖아, 네가.”
내가 본 것 중 가장.
리리안은 뒷말을 삼켰다. 아직도 그녀가 살면서 본 것 중에 카를로이가 가장 아름다웠다. 그녀를 매몰차게 상처 줄 때조차도 그는 변함없이 아름다워서 그녀를 슬프게 했었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쉽게 말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카를로이는 그녀의 목덜미에 대고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됐다.”
“뭐가 됐어.”
“이거면 며칠은 버틸 수 있어.”
리리안이 곁에 없는 동안 그는 이 말들이 해질 때까지 곱씹으며 지낼 수 있을 것이었다.
“……빨리 끝내고 와.”
머뭇거리는 듯 망설이던 리리안이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음에 네가 올 때는 델피난에 가서…….”
리리안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카를로이가 하도 세게 다시 끌어안는 통에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다음을 약속하는 리리안의 말은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카를로이는 버거워서 무서울 정도의 행복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다음번에는, 어쩌면 다음번에는 리리안에게 그 질문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 * *
카를로이는 장례식에 가는 사람 같은 얼굴로 라 소르티오를 떠났다. 고작 며칠로 뭘 또 저렇게까지 슬퍼하나 생각하기가 무섭게 리리안은 스스로의 변화를 느꼈다.
카를로이가 옆에 있던 밤이 얼마나 된다고 벌써 밤이 허전하고 길었다. 침대는 넓고 차가웠다. 자다 깰 때면 리리안은 멍하니 침대 시트를 어루만졌다. 악몽은 이제 그다지 무섭지 않았지만, 몸에 스며드는 한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들어 본 그의 웃음소리는 시종일관 리리안의 귀를 맴돌았다. 맴돌기만 하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서 다시 듣고 싶다는 욕심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요즘 들어 딴생각이 많으시네요.”
올리비아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상념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 미안하네.”
“그럴 수도 있죠.”
올리비아는 가볍게 대꾸하며 책장을 넘겼다. 요새 올리비아는 리리안에게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각종 교양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델루아 공작저에서 배운 것들이 얼마나 겉핥기식이었는지 리리안은 깨닫게 되었다.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욱여넣었던 지식들이었다. 이해의 폭이 터무니없이 좁았다. 그렇지 않아도 좁았던 세상을 그 망할 새끼가 이런 식으로 더 좁게 만들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폐하께서 배우시는 속도가 빠르셔서 제가 주먹구구식으로 알려 드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자네가 주먹구구식이라고?”
“폐하도 참, 과찬을.”
올리비아가 즐거운 듯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언제나 멕서스 호수를 생각나게 했다.
“전 넓고 얇게 아는 사람인걸요. 이제 폐하껜 좁지만 깊게 아는 사람이 필요해요. 게다가 전 푸르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요. 물론 폐하께서 원하신다는 전제하에.”
올리비아는 배움은 스스로 즐겨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더 제대로 배워 보고 싶기는 해.”
진심이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그녀의 인생이 색으로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살아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 아니라, 괜찮은 인생이 되어 가는 기분.
“역시. 저의 황후께서는 정신까지도 솔타인이시라니까요. 아무래도 실수로 태어날 곳을 잘못 고르셨나 봐.”
올리비아가 흡족한 듯 웃으며 옆에 앉아 있던 메리앤에게 말을 건넸다. 올리비아식의 최상급 칭찬이었다.
리리안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저었지만 입꼬리에 퍼져 나가는 은근한 기쁨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성취와 칭찬. 그것은 리리안의 생각보다 훨씬 값지고 즐거우며, 신나는 것이었다.
요사이 리리안의 하루는 색다른 설렘으로 가득해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이런 날들이 언제까지고 계속된다면 이젠 밤조차도 그녀를 이길 수 없는 날이 올 것 같았다.
“제가 적당한 사람을 알고 있지요. 아마 흔쾌히 받아들일 거예요.”
모르는 것이 없고 준비해 놓지 않은 것이 없는 백작 부인이 여유롭게 말했다.
“그리고 오늘 고생하셨으니까……. 별건 없지만 선물이에요. 나가 보세요.”
발코니를 향해 고갯짓하는 올리비아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메리앤과 제인까지 의미심장하게 웃기 시작했다.
“무슨 선물?”
“한번 나가 보세요. 너무 커서 안에 들여놓을 수가 없더라니까요.”
제법 능청스럽게 올리비아가 대꾸했다.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리리안은 발코니로 나갔다. 발코니에 두 손을 얹고 아래를 내려다본 리리안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안녕, 리리안.”
카를로이가 서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미소를 띤 채로.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갈랐다. 리리안은 말없이 계속 카를로이를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계속되자 카를로이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슬슬 사라지기 시작했다.
“빨리 오려고 노력했는데……. 딱히 반갑진 않은가 봐.”
그가 약간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솔직히 내가 선물은 아니지. 나도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어. 그런데 백작 부인이…….”
변명하듯 말을 잇는 카를로이를 멍하니 보다 말고 리리안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발코니를 지나 서재를 가로질러 복도로 나갔다. 왜 그렇게 급하게 걷는지도 모른 채 리리안은 뛰듯이 걸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점점 더 걸음이 빨라졌다. 심장이 그 발걸음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마지막 층에 다다랐을 때 계단 맨 아래에 와 있는 카를로이가 보였다.
“조심해.”
걱정스러운 얼굴의 카를로이를 보자 리리안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너무 빨리 뛴 게 분명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리리안은 스스로가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서서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넋을 놓고 리리안을 바라보던 카를로이는 그녀가 가까워지자 두 팔을 벌렸다.
리리안은 결국 온몸 가득 들어차는 기이하고 벅찬 충동에 자신을 그대로 내어 주고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조심하라니까.”
그대로 안긴 그의 품에서는 기분 좋은 향이 났고, 귓가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카를로이는 그의 목을 껴안은 채로 가득 안겨 든 리리안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리리안의 손은 그의 목에서 어깨로 옮겨 갔다.
“말해 줘. 날 조금은 기다렸어?”
리리안을 올려다보는 카를로이의 눈 색이 오늘따라 뜨겁게 느껴졌다. 리리안이 한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쓸었다.
“조금보다는 많이.”
무엇에 홀린 듯 솔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에 리리안은 깨달았다. 사실은 카를로이가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고. 훨씬 오래전부터. 어둠의 숲에 살던 어린애일 적부터, 푸르투에서 그의 바로 옆에 있을 때조차도.
그 대답에 카를로이가 미소 지었다. 아름답고 슬픈 미소였다.
“난 평생을……. 언제나 널 기다렸어. 지금도 꼭 널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바로 앞에 보이는데도, 미친놈처럼…….”
카를로이의 말에 리리안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카를로이가 온 신경을 그녀에게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길 하나에도 온몸으로 반응하는 카를로이는 온전히 리리안의 것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육신부터 영혼까지. 그 어느 것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녀의 것이었다.
누군가와 조금도 나눌 필요가 없는 내 것…….
무언가를 완전히 가졌다는 소유의 기쁨이 리리안을 덮쳐 왔다. 그녀가 구한 아름다운 남자아이는 그의 생을 그녀에게 주었다. 앞으로 펼쳐질 긴 인생이란 시간에 끝이 없는 가능성을 함께 담아서. 불행조차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희망이라는 여지를 담아서.
시간이 지나면 불행했던 날들보다 행복한 날들이 더 많은 순간이 올 것이다. 분명히.
“……선물이 맞아.”
비로소 그녀는 그와 있었던 모든 일들을, 과거를 긍정할 수 있었다.
카를로이가 잠깐 멍한 표정으로 리리안을 올려다보다가 한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뒷머리를 감싸 안았다. 숨결이 내려앉고 입술이 조심스럽게 맞닿았다. 수줍게 닿은 입술 사이로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듯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 아주 짧게 이어진 입술은 금방 떨어져 나갔다.
“여기서는 안 돼.”
카를로이가 반쯤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리리안만을 향하고 있었다.
“뭐, 뭐가 안 돼. 뭐가.”
리리안은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밀어내듯 카를로이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알잖아.”
카를로이는 그대로 리리안을 안아 들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리리안은 어쩔 줄 모르다가 그대로 얼굴을 카를로이의 어깨에 묻어 버렸다. 차마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수 없었다.
스스로가 그렇게 감정적인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공기 같은 불행에 익숙해져서 행복에는 더없이 약했다.
“알기는 뭘 알아, 내가…….”
“왜 몰라. 지금쯤이면 내가 보내 준 책들을 다 읽었을 거 아니야.”
밤이고 낮이고 그렇고 그런 짓들만 하는 책을 보내 줘 놓고 하는 말이라고는. 리리안은 책의 내용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미쳤어…….”
고개를 슬쩍 들자 실실 웃고 있는 카를로이가 보였다. 놀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괜히 얄미운 마음에 리리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카를로이가 갑자기 계단 중간에서 우뚝 섰다.
“왜 자꾸 농담을 농담이 아니게 만들어.”
입가에 미소가 사라진 카를로이는 조급해 보였다. 정말 미친놈이 아닌가. 리리안은 그만 아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다정하게 본 것도 아니고 노려본 건데, 이 미친놈…….
“난 아무것도 안 했어……. 네가 이상해.”
리리안의 생각은 개의치 않는 듯 카를로이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계단을 올라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침실이었다. 카를로이는 누가 열어 주는 것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발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리리안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생각했다. 다들 봤겠지. 올리비아 도나타도 봤을 것이다. 뭐라 생각했을까. 어쩌면 또 ‘푸르투란…….’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기하네. 이 와중에 딴생각이 드나 봐, 넌.”
카를로이가 그녀의 목에 키스하며 중얼거리는 바람에 리리안이 무의식적으로 옅은 신음소리를 냈다.
“나만 미친 새끼같이…….”
카를로이가 리리안을 침대에 눕히더니 성큼 위로 올라왔다. 보이는 것은 카를로이 하나뿐이라 이제는 정말로 딴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별다른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야릇하게 보여서 리리안은 멍하니 생각했다. 나도 미친 게 분명하다고.
“그게 싫다는 건 아니고.”
그의 입술이 다시 내려앉았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닿아 왔지만 리리안이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반응을 하자 카를로이는 성급하게 리리안의 안을 헤집었다.
뜨겁고 숨이 차는 기분에 리리안이 손을 더듬거렸다. 시트가 잡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닿은 것은 옆을 집고 있던 카를로이의 단단한 팔과 손이었다. 리리안의 손길이 닿자마자 그는 그 손을 그대로 낚아채 위에 고정했다. 깍지 낀 손이 뜨거웠다.
정신없이 혀가 얽혀들고, 리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 순간 카를로이가 잠시 입술을 뗐다. 채 이어지지 못한 숨결이 맴돌고 카를로이가 리리안을 뚫어지듯 바라보았다. 리리안의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나…….”
리리안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이 덮쳐 왔다. 끝나지 못한 말이 신음이 되어 끊기듯 흘러나왔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서 리리안은 헐떡이며 그의 목을 매달리듯 감싸 안았다. 그는 기꺼이 제 목과 어깨를 내어 주고 리리안을 위에 앉혔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녀의 숨결을 취했다. 다 가져갈 것처럼 달려들던 카를로이가 리리안의 목에서부터 쇄골까지 진한 키스를 남겼다.
“칼…….”
그의 이름조차도 신음처럼 나왔다. 카를로이는 그 부름에 잠시 멈추고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숨을 고르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카를로이는 흐트러진 리리안의 옷을 정리해 주었다. 느린 손길이었다. 약간 멍하니 내려다보는 리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산뜻하고 담백한 입맞춤이었지만 잔열이 남아 있었다.
“처음엔 정말 농담이었는데.”
그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중얼거렸다. 그 표정에서 뭔가가 읽힐 것 같아 리리안이 그를 관찰하듯 보았지만 카를로이는 그녀를 돌려 뒤에서 안아 버렸다. 그의 표정을 보지도 못하게. 그는 마치 그의 몸이 리리안의 침대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를 올려놓고 중얼거렸다.
“……델피난은 언제 갈까. 오늘은 늦은 것 같고. 내일 갈까.”
어색하게 돌린 화제에도 리리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카를로이는 그녀를 더 끌어안았다.
차마 끝까지 갈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푸르투에서 그녀를 처음 안던 날이 떠올랐기에. 그의 아래에서 끝없는 눈물을 흘리던 리리안도.
그날 그렇게 그녀를 안지 말았어야 했다. 나 하나 안심하자고 그렇게 아픈 사람을 안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는 늦은 만큼 비렸다.
카를로이의 등에 기대듯 안겨 꼼지락거리던 리리안이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아 왔다.
“칼.”
리리안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카를로이에겐 언제나 용서와 구원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이본느 델루아일 때조차도.
“응.”
“오늘 네가 와서 기뻐.”
리리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하게도 카를로이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애새끼도 아닌데…….
그는 말없이 리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작은데도 왜 기댈 수 있는 것처럼 크게 느껴질까.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안은 채 계속 그녀의 말을 생각했다.
<선물이 맞아.>
벅찬 기쁨과 버거운 후회가 한데 섞였다. 그래도…… 그는 무언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될 수 있는 사람.
리리안의 평생을 선물과도 같은 하루로 채워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 * *
델피난에서 기껏해야 카누를 탈 생각이었던 리리안은 생각보다 큰 배의 크기에 깜짝 놀랐다.
“가져오느라 힘들었는데.”
배 옆에서 아셀이 툴툴거리는 것을 보자 리리안의 충격은 더 커졌다.
“너도 왔었어?”
리리안의 질문에 아셀의 표정이 변했다. 왠지 리리안을 한심하게 보는 듯한…….
“계단에 나도 같이 있었거든요.”
아셀의 대답에 리리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도대체 그 계단 어디에 서 있었단 말인가.
“나만 놔두고 둘이.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 그렇게 무시를 하고. 매정해요.”
알렉시스에게 국어를 배운다더니 비난의 어휘만 늘어 왔다.
“미안해. 있는지 몰랐어.”
리리안은 대꾸를 하며 카를로이를 노려보았다. 카를로이는 시선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몰랐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러니까 아셀, 누누이 말했잖아. 기척을 내라니까.”
심지어 수완 좋게도 아셀의 탓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얄미워야 하는데 그 웃음이 보기가 좋아서 리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카를로이가 손을 내밀었다.
“타시지요, 폐하.”
리리안이 배에 오르고 나서 카를로이가 따라 탔다.
리리안이 홀린 듯 풍광을 바라보는 것을 보며 카를로이는 새삼 또 후회에 잠겼다. 델피난이 그의 감상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 풍경은 수도에도 널렸다. 진즉 리리안에게 다 보여 줄 것을…….
리리안은 기분이 좋아진 듯 바구니에서 과자를 꺼내서 카를로이에게 건넸다.
“먹어 봐. 내가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어.”
“그래?”
“응. 벡스는 최고의 요리사야.”
리리안답지 않게 강한 표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보다 살이 좀 오른 것 같기도 했다. 카를로이는 과자를 베어 물며 벡스라는 요리사에게 부귀영화를 안겨 주겠다고 다짐했다.
“어때?”
마치 제가 만든 것처럼 뭔가를 기대하는 얼굴로 리리안이 물어 왔다. 아, 귀엽다. 귀여워 죽겠다. 카를로이의 머릿속을 그 생각이 지배했다. 마치 어릴 때 호르뒤 빵을 넣어 주던 것 같은 표정.
“맛있어.”
사실 그의 취향은 아니었고 푸르투의 요리사가 더 맛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맛이 훌륭하긴 했다.
“칼, 넌 여기 처음 와 봐?”
“아니, 한 번 정도는…… 와 봤었지.”
그다지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리리안이 함께하니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리리안과 카를로이를 바라보던 올리비아 도나타가 흐뭇하게 웃었다.
“두 분 폐하께서는 서로 붙어 있을 때마다 꼭 무슨 아이들 같네요. 이런 말 하기는 무엄하지만, 귀여워라.”
“그래도 어제 계단에서는 별로 애들 같지 않으시던걸요.”
제인이 농담조로 덧붙이자 다들 수긍하듯 웃음을 지었다. 메리앤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두 분 다 어릴 때 이후로 자라지 못한 거니까요.”
대꾸를 하던 메리앤이 붉어진 눈가를 손수건으로 훔쳤다. 왜 제 가슴이 벅차는지 모를 일이다. 눈물짓는 메리앤을 보고 올리비아가 가볍게 메리앤의 손을 토닥였다.
“저런, 시녀장. 이런 일엔 울지 말아요. 앞으로는 기뻐할 일만 있을 텐데 그럴 때마다 눈물지으면 눈가가 짓무르고 말 거예요.”
올리비아의 다정한 말에 메리앤은 눈물을 그치긴커녕 더 흘리고 말았다. 카를로이를 따라 라 소르티오로 온 아들 지미가 다정하게 어머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평화로운 낮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물은 거칠 것 없이 흘렀고, 배는 앞으로 끝없이 나아갔다.
* * *
나들이는 해가 기우뚱하게 기울고 나서야 끝이 났다. 카를로이는 델피난에서 바로 푸르투로 갈 준비를 했다. 내키지 않는 작별 인사를 하며 카를로이가 가볍게 리리안을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금방 다시 올게."
리리안은 머뭇거리다 슬그머니 그의 옷깃을 쥐었다. 한참을 그의 옷만 쥐고 만지작거리던 리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조심히 가.”
이것이 리리안이 원래 하려던 말이 아니라는 건 아직도 그의 옷깃을 잡고 있는 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카를로이는 리리안 또한 그가 옆에 있는 것을 원한다는 사실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두고 가야 한다는 것에 슬픔을 느꼈다. 발길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카를로이가 갈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미동 없이 서 있자 리리안이 천천히 손을 놓았다. 아니, 놓으려고 했다.
“금방, 금방 올게.”
카를로이가 낚아채듯 손을 잡고 약간 다급하게 말했다. 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카를로이는 아셀이 짜증을 내고 나서야 말에 올라탔다.
아셀은 조금 예민한 상태였다.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카를로이와 리리안은 그의 말을 거스르지 않았다.
카를로이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리리안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들어가셔야죠.”
“응, 그래야지.”
말은 그러겠다고 하지만 리리안의 눈은 여전히 이젠 빈자리인 곳에 머물러 있었다.
카를로이가 사라진 곳 너머로 델피난 강과 그것을 둘러싼 마을 풍광이 보였다. 노을 져 더욱 아름다워진 풍경이었다. 아름답고, 아쉬웠다. 그전엔 이 풍경을 홀로 독차지해도 하나도 아쉽지 않고 충만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괜히 강이 끝도 없이 넘치도록 넓어 보였다.
리리안은 오래도록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카를로이는 그 후로 세 번을 더 왔다 갔고, 리리안은 그동안 매들린 벨버티 부인을 새로 만나게 되었다.
매들린 벨버티는 올리비아 도나타만큼이나 나이가 있는 여자였고, 선대, 선선대 황후의 시녀이기도 했다. 까칠하고 틈 없는 인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친절하고 우아한 사람이었다. 다만 웃음이 좀 없었다.
“별로 제가 알려 드릴 것도 없는걸요.”
몇 날 며칠 동안 리리안에게 푸르투의 황후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쉴 새 없이 가르치고도 매들린은 칭찬하듯 말했다.
“그런 것치고 너무 많이 알려 주었는걸. 아직도 한참은 남은 것 같고.”
“그렇다고 해도, 말은 이렇게 하는 거지요.”
매들린이 대꾸하자 웃음은 올리비아 쪽에서 나왔다.
“저런, 매들린. 그렇게 말하면 폐하께서 자네의 말이 거짓말이라 오해하실 게 아닌가.”
그 말에 매들린은 처음으로 웃어 보였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도 힘들 정도의 미소였다.
“가끔은 거짓도 필요하지요. 하지만 방금 드린 말씀은 사실이에요. 제가 하나를 알려 드리면 황후께선 여럿을 이해하시니까요.”
알면 알수록 푸르투는 리리안의 생각과는 다른 곳이었다. 그곳에 대해서 좋은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데, 매들린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왜 그렇게 많은 대륙인들이 푸르투에 와 보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되고는 했다.
물론 솔타와 라 소르티오가 최고인 올리비아 도나타는 쉬이 동의하지 않아서 두 노부인은 종종 그런 주제로 입씨름을 벌이곤 했다. 그것을 들으며 리리안은 처음으로 푸르투가, 크로이센이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올리비아. 못 본 사이에 벡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음식이 더 맛있어졌네. 이제는 좀 무서울 정도야.”
매들린이 벡스의 케이크를 한 조각 먹으며 말했다.
“저번에 황제께 치하의 말을 듣더니 사람이 밤새 요리만 하지 뭐야.”
카를로이가 황후를 기쁘게 해 주어 고맙단 말과 함께 두둑한 상을 내린 날, 벡스는 종일 콧노래를 불렀다. 그 콧노래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
“악마를 입에 담으면 꼭 나타난다더니……. 황제께서 등장하시는 시간이 기가 막히는군요.”
카를로이가 도착하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자 올리비아가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악마라니, 올리비아. 황후께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랑일 텐데.”
노부인들이 농담을 주고받자 애꿎은 리리안의 얼굴만 붉어졌다.
“놀리는 건 그쯤 하도록 해.”
자리에서 일어선 리리안이 자못 엄한 말투로 한마디 해 보았지만 별 효과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괜히 고개를 저어 가며 리리안은 서재를 나왔다. 오늘은 카를로이와 함께 솔리스 언덕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 언덕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려고.
약속을 하면, 지켜진다. 다음이 계속 생겼다. 그것이 신기하면서도 기뻤다. 리리안은 콧노래를 부르는 벡스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리리안을 보자마자 말 옆에 선 카를로이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퍼져 나갔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어딘가 시려 왔다.
카를로이는 리리안이 말에 올라타는 것을 도우려고 손을 내밀었다. 리리안이 제 것을 얹자 카를로이가 대뜸 그녀의 손등에 키스부터 했다.
“내 사랑.”
사랑.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가 시린 가슴에 스며들었다. 벡스의 디저트가 아무리 달아도 그 말만큼은 달지 못하리라.
그는 마치 귀부인에게 키스하는 기사처럼 굴더니 리리안이 말을 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차가 아니어도 괜찮겠어?”
그녀의 뒤에서 손을 뻗어 고삐를 잡은 카를로이가 물었다.
“응, 마차는 조금 답답해. 말 타고 갈래.”
“그래, 뭐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리리안의 결 좋은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솜씨 좋게 말을 몰아 그의 사랑을 편안하게 목적지로 데려갔다.
솔리스 언덕에서는 이제 막 해가 지고 있었다. 적당한 나무에 말을 묶어 두고 둘은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갔다. 적당히 높은 곳에 도착해 자리를 깔고 벡스가 챙겨 준 바구니를 옆에 놓고 앉았다.
“예쁘다.”
노을 진 풍경을 내려다보던 리리안이 속삭였다. 리리안의 그 평화로운 얼굴을 보게 해 준 것만으로도 카를로이는 솔타의 맨땅에 입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벨버티 부인이 그러는데 수도에도 이런 곳이 있대.”
리리안이 음식을 꺼내 들며 말했다. 카를로이는 쉬이 수긍했다. 보이는 풍경의 느낌은 좀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곳이라면 수도에도 족히 세 곳은 있었다.
“수도뿐만 아니라 남부로 내려가도 좀 있는 편이지.”
“그렇구나. 푸르투는 좀 어때?”
카를로이가 라 소르티오로 오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리리안은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그의 체력에도 좋을 리 없고, 다른 이들에게서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 같았다.
“똑같지. 요새는 로덴 후작이 다시 얼굴을 비치기 시작했는데 작정하고 나한테 화풀이하겠단 기세야.”
“그 로덴 후작이?”
“아주 사사건건 반대……. 뭐라고 하면 자기 딸을 버려서 인생을 망쳤다고 징징……. 자기도 무엄한 건 아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아무튼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는 것 같더라고.”
참, 로덴 후작도 불쌍한 인간이었다. 리리안은 한심함과 동정심이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아니라고 말해 주지 그랬어. 키아나가 선택한 거라고.”
카를로이는 잠깐 멈칫하더니 천천히 대꾸했다.
“뭐, 꼭 그렇게는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이야기하긴 했지.”
시선을 피하는 꼴이 영 수상해서 리리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말해 봐. 뭐라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 나도 몇 번 참다가 한 말이야. 내가 성격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뭐라고 했는데.”
“나도 후작이 회의를 망쳐 대는 걸 한 세 번은 참았어.”
“알았어. 뭐라고 했냐니까.”
카를로이가 리리안의 눈치를 살피다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건 아니고……. 안타깝지만 내가 버린 게 아니라 후작의 딸이 후작을 버린 거라고 말했지.”
“와, 너……. 별로 안타까워하지도 않았을 거면서.”
비난인지 감탄이지 분간이 안 가는, 어쩌면 둘 다 섞인 것일지도 모르는 리리안의 표정을 보고 카를로이가 억울한 듯 인상을 약하게 찌푸렸다.
“너도 나보다 심하게 말했으면 했지, 곱게는 못 넘겼을걸. 직접 봐야 내 마음을 아는데.”
“그 말을 듣고 로덴 후작이 괜찮았어?”
“퍽이나. 울었지. 아니, 통곡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는데.”
“정무 회의에서?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데?”
카를로이가 비웃듯 웃음을 흘렸다.
“울기만 했다면야 로덴이 아니지. 울다가 실신해서 시종들에게 안겨서 실려 나갔어. 하다 하다 남자까지 울리게 될 줄이야.”
질렸다는 듯한 카를로이의 말투에 리리안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답 없는 광경이 눈에 선할 정도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통곡하는 로덴 후작을 보고 지었을 카를로이의 표정까지 상상하자 더 우스워지는 바람에 웃음이 길어졌다.
크지 않은 웃음소리가 햇빛 가득한 공기를 타고 맴돌았다. 카를로이는 웃음을 터트리는 리리안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 웃음을 사랑해 왔다. 그녀가 웃음을 띠고 그를 바라볼 때면 무력감을 느낄 정도로.
철없는 어린 마음에 리리안이 자신을 보고 그만 웃었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었다. 자신을 이상하게 만드니까. 그 철없음의 대가가 너무 커서 너무 오랫동안 그녀의 웃음을 볼 수가 없었다.
한참을 웃던 리리안은 기묘한 정적에 카를로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숨이 멎었다. 금빛 햇살이 비추는 그의 얼굴에서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렇게 리리안을 바라보면서 눈물만 흘렸다.
“칼, 왜 울어.”
그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카를로이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네가 웃지 못할 줄 알았어…….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어.”
그의 고백을 리리안은 멍하니 들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옆에선 영원히 웃지 못할 거라고. 네가 웃지 못한다 해도…… 그래도 힘들지는 않게 만들 거라고 비겁하게…….”
리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카를로이의 눈물을 닦아 냈다. 햇빛이 감싸는 그의 얼굴도, 그의 눈도 이토록이나 아름다운데 눈물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왜 내가 못 웃어. 난 이제 괜찮은데.”
카를로이의 어깨가 떨리는 것을 보고 리리안은 결국 제 눈시울도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울지 마, 바보야. 아프지 않기로 약속해 놓고 왜 그래. 울지도 않기로 했잖아.”
“내 욕심으로 널 붙잡아 둔 것 같아서, 나는. 내가 네 동정심을 이용해 눌러앉힌 것 같아서. 그런데도, 도저히…….”
옆에 계속 있다 보면 리리안은 자신의 존재에 익숙해질 테니까.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그를 조금쯤은 좋아하게 될 테니까. 그따위 생각으로…….
그는 결국 목에 걸린 말을 토해 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끊기지 않는 그의 고백이 리리안의 마음을 흔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바보를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자신이 동정심으로 옆에 남은 거라고 생각하다니.
“이 멍청아, 동정심으로 이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동정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진짜 바보 다 됐어, 너.”
마지막 말은 울먹거리다시피 나와서 발음도 부정확했다. 그런 말에도 카를로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라고?”
리리안은 그의 눈가에 남은 마지막 눈물 자국을 닦아 주며 답했다.
“난 널 동정할 처지도 안 되는데 무슨 동정이야. 너 같은 멍청이를 사랑하니까 마음이 아픈 거지. 네가 이런 헛소리를 할 때마다 내가, 내가…….”
말하다가도 어이가 없어서 리리안은 카를로이의 가슴을 때렸다. 이 멍청이, 이 바보 같은 새끼. 종종 그의 얼굴에서 엿보이던 불안감이나 슬픔이 이것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카를로이는 그 손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물었다.
“사랑이라고? 네가, 날.”
“그래, 이 멍청아. 넌 키스도 동정으로 해?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리리안은 이제 울고 있었지만, 카를로이는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천천히 웃기 시작했다.
“아니, 설마 미쳤다고. 전혀 아니지.”
“뭐 좋다고 웃어. 웃지 마. 넌 로덴 후작 욕하지도 마. 지가 제일 울보면서.”
“……로덴이랑은 다르지. 그 말은 좀 심하다.”
“한 번만 내 앞에서 또 울면 가만 안 둬.”
“알았어.”
그가 우는 애를 달래듯 리리안을 품에 안았다.
“내가 다 잘못했어. 울지 마. 내가 근데 어떻게 알았겠어. 네가 나 같은 새끼를 사랑까지 할 거란 걸…….”
“널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뭐가 돼. 미친 애밖에 더 되냐고. 그렇게 말 좀 하지 마, 멍청아.”
“리리안, 너 모르지. 네가 날 아무리 멍청이라 불러도 난 웃음만 나와.”
그의 목을 감싸 안은 채 얼굴을 묻고 있던 리리안은 그가 부른 자신의 이름을 곱씹었다. 이제야 그가 왜 계속 그녀를 리리안으로 부르는지 알 것만 같았다. 푸르투에서의 아팠던 날 중 언젠가 그녀가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해서…….
카를로이는 아직 그 말을 지키고 있었다. 리리안은 이젠 아무도 부르지 않는 제 이름이 그리웠다.
“칼. 불러 줘, 내 이름.”
“불렀잖아.”
“그거 말고. 알잖아.”
리리안이 고개를 들고 카를로이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허물어졌지만 다행히 이번엔 이 바보가 울지 않았다.
“……루.”
“응.”
“루.”
“응, 칼…….”
그는 쉴 새 없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닿자 리리안은 카를로이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해가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는 저녁은 따스했고, 마음은 맞닿은 몸만큼이나 충만해졌다. 아주 오랫동안 이날의 솔리스를 잊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 * *
다시 라 소르티오에 돌아왔을 때는 해가 다 지고 난 후였다. 환희로 빛나는 카를로이의 얼굴을 본 올리비아 도나타가 소리쳤다.
“세상에. 솔타의 해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황제 폐하의 얼굴에 있었군요.”
백작 부인의 농담에도 카를로이는 미소만 지었다. 카를로이는 그가 행복에 겨워하고 있단 사실을 구태여 숨기려 들지 않았다. 리리안은 부끄러움이라고는 없는 남자의 손을 잡고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칼, 너한테 줄 게 있어.”
리리안이 제 침실로 데리고 가자 카를로이는 잠자코 끌려왔다. 그가 침대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리리안은 책을 뒤적거리더니 꽃 한 송이를 꺼냈다.
“자.”
바싹 마른 튜랑 꽃이었다. 색은 바랬지만 바랜 대로 아름다운 꽃이었다. 카를로이는 의아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꽃을 받아 들었다. 꽃이 예뻐서 주는 것인가?
카를로이의 마음을 읽었는지 리리안이 말을 이었다.
“마하에서 내가 들고 있던 꽃이야. 기억나?”
카를로이가 그제야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못 할 수가 없었다. 마하에서 비가 내리던 날, 그 꽃을 보면서 했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한데.
하지만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만했다. 그때의 꽃은 볼품없이 시들고 망가져 있었는데, 지금 자신의 손에 있는 꽃은 말랐을지언정 여전히 아름다웠다.
“올리비아가 도와줬어. 말려서 간직하는걸. 마법으로 생생하게 살릴 수도 있지만 그건 싫었어. 여러 번 계속해 줘야 하고, 하지 않으면 또 시드니까. 그리고 이대로도 예뻐서…….”
카를로이는 그 꽃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넌 내가, 어쩌면 우리가 망가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우리는 조금 아팠을 뿐이고, 이대로도 괜찮아질 수 있어.”
상처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평생 드니스를 그리워하며 마음이 약간은 아플 테고, 카를로이는 그녀를 보며 어쩔 땐 회한에 잠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도 잘 살 수 있었다. 고스란히 가지고도, 부정하지 않고도 상처에 행복을 덧입혀 나가며 괜찮을 수 있었다. 리리안은 그걸 배웠다.
카를로이가 말없이 리리안을 끌어안자 그녀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카를로이는 무어라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가도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리리안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아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바보 같은 말만 내뱉는 그의 입술에도.
카를로이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으며 리리안을 무릎 위에 앉혔다. 길고 진한 입맞춤이 계속되었다.
카를로이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리리안을 들었다가 침대 위에 눕혔다. 열기 가득한 카를로이의 두 눈을 보고 리리안은 알 수 있었다. 오늘은 그가 멈추지 않으리란 사실을.
* * *
리리안은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카를로이의 팔 안에서 눈을 몇 번 깜빡인 리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지난밤을 떠올렸다.
그녀의 온몸에 다정하게 키스하던 카를로이……. 미안하다는 말도, 의심의 말도, 눈물도 없는 밤이었다. 오로지 사랑한다는 말과 웃음만 존재하는.
리리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다가, 그런 자신에게 흠칫 놀라서 표정을 굳혔다. 왠지 모르게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카를로이를 욕할 때가 아니었다.
“칼.”
그녀가 몸을 돌리고 이름을 부르자 카를로이가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루……. 왜 일찍 일어났어. 좀 더 자.”
완전히 잠긴 목소리였다.
“나 산책 좀 하고 올게.”
“이 시간에?”
카를로이가 해가 뜨고 있는 창밖을 얼핏 쳐다봤다.
“기다려. 나도 같이 가.”
“아냐. 나 혼자 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 말하지 않고 가면 네가 또 벌거벗고 뛰쳐나올까 봐 말하는 거야.”
마하에서의 민망한 기억을 떠올리며 리리안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꼭 이 꼭두새벽부터 날 버리고 가야겠어? 매정하긴.”
“응. 엄마랑 단둘이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카를로이는 군말 없이 리리안을 풀어 주었다.
“내 욕하러 가는 거야? 그렇다 해도 달갑게 받아들이겠지만…….”
“너 하는 거 봐서.”
리리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깃든 것을 보고 카를로이는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웃는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제 몫을 다했다.
실실거리는 카를로이를 두고 나온 리리안은 멕서스 호수를 향해 걸었다. 며칠간 계속 생각해 오던 것이 있었다. 그러나 멕서스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뒤냐.”
리리안의 부름에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공작이 뒤를 돌아보았다.
“폐하.”
“언제 왔지? 왜 기별도 하지 않고.”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두 분이 곤히 주무신다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예전보다 인상이 부드러워진 알렉시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 시간에 달려온 걸 보면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마하에 베르니로 갈 길을 열어 주려다 보니 신경 쓸 것이 생각보다 많아서 말입니다. 그래도 한두 시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라 소르티오에 왔다 갔다 하는 것, 칼에게 좋지 않겠지?”
조심스러운 황후의 질문에 공작은 대답을 신중하게 골랐다.
“이제 왔다 갔다 하실 것 같진 않습니다. 요새 아예 라 소르티오에 머무르실 방도를 찾고 계시니까요.”
“카를로이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별궁으로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까요. 방도를 찾으려면야…….”
흐려지는 말끝에서 리리안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바람직하지는 못한 일이란 것을 알았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푸르투로 돌아갈 거니까. 지금 바로는 아니지만 정리가 되는 대로.”
리리안의 말에 알렉시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철벽의 요새 같던 공작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른 것은 처음이라 리리안은 덩달아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괜찮으시겠습니까?”
“난 괜찮아.”
리리안은 진심을 담아서 대답했다. 이제는 정말로, 괜찮았다. 알렉시스도 그것을 느낀 듯했다.
“폐하께선 강하시군요.”
알렉시스는 고개를 돌려 다시 호수를 바라보았다. 누구를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칼은 이곳이 좋지 않다고 하던데.”
“놀랄 일은 아니지요. 이곳에만 오면 제 모친이 자식인 자신보다 한낱 장소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느꼈을 테니까요.”
“정말로 그렇게 느끼셨나?”
“그랬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중요하진 않지요. 어쨌든 폐하께서는 그리 느끼셨을 테니.”
리리안은 카를로이가 델피난 강에서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델라이드가 그에게 남겼다는 마지막 말을.
“카를로이가 말하길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카를로이 때문이라 하셨다고 했어.”
그 말에 알렉시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델라이드가요?”
“‘너 때문…….’ 이렇게 말하곤 돌아가셨다던걸.”
한참 골몰하던 알렉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델라이드가 폐하 때문이라고 말하려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카를로이가 잘못 들었다고?”
“그렇다기보다는……. 너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 했을 텐데요. 끝내지 못해서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지? 그래도 어머니라서?”
그 질문에 알렉시스는 소리를 내서 웃었다. 즐거워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그런 감성이 있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냉정한 평가였다.
“그 순간에도 아델라이드라면 판단을 했을 테니까요. 폐하께서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면 크로이센에 좋지 않았을 거란 판단 정도는 했을 겁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마지막으로 확실히 해 두려 했겠지요.”
알렉시스는 호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덧붙였다.
“아델라이드만큼은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정말 폐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면 제게 폐하를 돌보아 달라 부탁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단단하고 무한한 확신에서 동생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렇게 썩 인간적으로 들리는 일화는 아닌데도 저렇게 단호히 말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폐하께서 왜 그 말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해합니다. 죽은 아델라이드보다는 살아 있는 제가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으니까요.”
알렉시스의 얼굴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평생 저 스스로 강한 사람이라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실상은 어린 조카에게 화풀이를 할 정도로 약해 빠지고 한심한 인간이었던 거지요.”
알렉시스는 자리를 비켜 주려는 듯 호숫가 위쪽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그에 비하면 황후께서는…….”
공작이 말을 끝내지는 않았지만 리리안은 알아들었다.
“카를로이에게 말해 주지 않을 건가?”
“제가 말해 봤자 못난 이모가 하는 이야기라 와 닿지 않을 텐데요. 황후께서 말해 주신다면 모를까.”
알렉시스가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리리안은 그 모습이 카를로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라 소르티오에서 아예 살겠다는 카를로이의 무모한 계획을 왜 알렉시스가 말리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름의 미안함 때문이었을지도.
“제가 너무 오래 방해했군요, 폐하. 대화 나누고 싶은 분은 따로 있으셨을 텐데.”
알렉시스는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하게 인사를 하더니 유유히 사라졌다. 리리안이 드니스에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을 눈치챈 듯했다. 알렉시스가 호수를 바라보며 떠올린 대상을 리리안이 알아챈 것처럼.
혼자 남은 리리안은 호수를 바라보다가 목에서 천천히 목걸이를 풀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닳도록 만지던 목걸이였다.
“엄마.”
잔잔한 물결이 대답하듯 일렁거렸다.
“보고 싶어. 이미 알겠지만.”
리리안은 매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드니스가 그립고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굳이 내뱉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드니스를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엄마를 너무 괴롭혔잖아. 내 목에서 매일 달랑거리라고. 그런데 이제 괜찮은 것 같아.”
눈물 대신 미소가 나왔다.
“이제는 억지로 내 목에 잡아 두지 않아도, 힘을 주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엄마를 떠올릴 수 있어.”
아니, 거짓말이다. 눈물은 나왔다.
리리안은 대충 눈물을 훔쳐 내고는 목걸이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니까 엄마도 이제는 내 걱정 말고…….”
목걸이를 기울이자 약하게 부는 바람이 드니스를 호수로 데려가 주었다.
“자유롭게 지내. 나도 엄마의 감옥이 되기는 싫어. 멕서스를 통하면 루푸스도 가고 여기저기 다 갈 수 있다잖아. 엄마는 그렇게 여행을 하면 되는 거야.”
그러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기를. 만나서 아프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저 웃으며 안게 되기를.
“내 이름을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불러도 이제 아프지 않아.”
리리안은 목걸이까지 호수에 놓아주었다.
메리앤도, 올리비아도, 알렉시스도, 모두 리리안에게 강하다고 했다. 리리안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알았다. 자신이 결국 또 살아 낸 것은 드니스 덕이었다는 사실을. 드니스가 리리안에게 준 절대적인 사랑이 너무나 강하고, 또 많아서 리리안은 사랑을 줄 수도 있고, 또 살 수도 있었다. 카를로이가 어린 리리안에게 도망치라고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리리안은 푸르투에서조차 카를로이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오로지 드니스의 덕으로.
“사랑해, 엄마. 언제나.”
이번엔 안녕이라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 * *
“난 걱정이 돼.”
푸르투의 집무실에서 황제가 노공작에게 말했다.
“여기서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솔타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내가 가는 게 낫지.”
카를로이는 푸르투로 돌아오겠다는 리리안의 계획에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글쎄요. 황후께서는 돌아오고 싶어 하시고, 또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녀와 대화도 했나?”
알렉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황후가 호수에서의 대화를 카를로이에게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델라이드에 대해 지금이라도 말해 줄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알렉시스는 가볍게 그 생각을 접었다. 지금의 카를로이는 좋아 보였다. 굳이 원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낯선 모습이 늙은 공작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걱정이 되시면 푸르투에서 좋은 시간만 보내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십시오. 황후께서는 괴롭다고 피하거나 도망가는 분이 아니시니, 새 푸르투에도 금방 적응하실 겁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를로이는 씩 웃어 보였다.
“그렇지. 루는 그런 사람이지.”
자부심과 사랑이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언젠가 비슷한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의 카를로이와 아주 닮은 얼굴. 원하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 오랫동안 다른 곳에서 헛것을 찾아 헤맨 기분이었다.
알렉시스는 스스로의 한심함은 적당히 알아서 넘기며 카를로이가 원하는 것을 성실히 도왔다. 그 얼굴을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한 표정.”
집무실에서 나오자 아셀이 괜히 얼쩡거리며 놀리듯 말을 건넸다.
“말이 그렇게 짧으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설마 우는 거 아니죠?”
“쓸데없는 소리.”
알렉시스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됐다. 괜히 폐하 귀찮게 하지 말고 따라와.”
“엑, 싫어요. 어제도 수업 했잖아!”
“너는 좀 더 배울 필요가 있어.”
아셀은 투덜거리면서도 잠자코 알렉시스를 따라갔다.
“황후는 언제 돌아와요?”
“2주 뒤쯤.”
수업하기 싫다고 징징거릴 땐 언제고 아셀은 활짝 웃었다.
“폐하가 직접 데리러 가겠죠?”
“당연한 소리를.”
직접 업고나 오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 나도 가야지.”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는구나. 네가 언제는 가지 않았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알렉시스도 신나죠? 이제 나쁜 일은 없는 거잖아요.”
아이 같은 면이 있는 기사가 투명한 눈으로 물었다. ‘신난다’라는 어딘지 경박하게 들리는 단어가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알렉시스는 왠지 오늘만큼은 딴죽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래.”
무뚝뚝한 공작까지 동의를 하자 아셀은 콧노래를 불렀다.
“빨리 2주 뒤가 됐으면 좋겠다.”
아셀의 소망대로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듯했다. 푸르투는 짧은 시간 동안 여기저기 조금씩 바뀌었다.
카를로이는 2주 뒤쯤 리리안을 데리러 라 소르티오로 향했다. 웬만한 것들은 이미 푸르투로 옮긴 상태였고 조촐한 짐과 푸르투로 갈 사람들만이 나와 있었다.
카를로이의 마차에 타려던 리리안은 올리비아가 메리앤과 제인이 탈 마차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배웅을 하는 사람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올리비아?”
백작 부인이 즐거운 듯 웃었다.
“저와 벡스도 함께 가기로 했는데. 설마 싫으신 건 아니겠지요?”
놀라서 말도 잇지 못하는 리리안을 보고 올리비아가 다정하게 말을 덧붙였다.
“기쁘게 해 드리려고 비밀로 한 것인데 너무 놀라시니 괜히 죄송하네요.”
리리안은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했다. 2주 동안 올리비아든 벡스든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마치 마지막 시간인 것처럼 굴더니 이런 걸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황제께서 어찌나 부탁을 하시던지! 황후께서 라 소르티오를 좋아한 이유 중엔 저와 벡스도 있다며 과분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옆에서 메리앤이 톡 끼어들었다.
“그리고 벨버티 부인의 도발에 넘어간 것도 좀 있잖아요. 백작 부인께서 푸르투를 알지 못하니 제대로 된 토론을 할 수 없다고 해서…….”
“늙은이에게도 도전은 필요하고 견식은 넓을수록 좋은 법이지요.”
올리비아는 민망해하지도 않고 우아하게 대꾸했다.
리리안은 너무 기쁜 나머지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도 잊고 카를로이의 목에 팔을 두르며 껴안았다.
“고마워, 칼.”
리리안은 진심으로 올리비아와 벡스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이 솔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너무 잘 알기에 푸르투에 함께 가겠냔 물음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카를로이는 잠깐 놀란 듯 얼어 있다가 이내 웃으며 리리안을 안았다.
“푸르투의 주방장도 바뀔 때가 됐지.”
리리안은 설레는 마음으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이 함께하는 푸르투는 이제 낯설지 않을 거였다. 이런 기분이 아마 올리비아가 말했던 인생에 뿌리를 내리는 기분이지 않을까.
리리안이 미소를 짓자 카를로이가 가볍게 그 입술에 입 맞추었다.
“돌아가자, 루.”
리리안이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로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온전하게 생긴 자신의 자리로.
설레는 마음에 여정은 힘들지 않았다. 푸르투에서 해 보고 싶은 것들을 리리안이 이야기하면 카를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수많은 약속을 했을 즈음에 마차는 푸르투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리리안은 저무는 햇빛을 받는 푸르투 궁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황금의 궁전이라는 별칭답게 화려한 장식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와 카를로이가 함께할 곳.
“어떤 것 같아?”
카를로이가 뒤에서 그녀의 손에 키스하며 물어 왔다.
리리안은 벨버티 부인이 자랑했던 수없이 많은 푸르투의 장점을 떠올렸다. 분명 떠날 때와 다르지 않은 곳인데, 이제는 달라 보였다.
“아름다운 것 같아.”
카를로이는 그의 세상이 하는 말에 감히 반박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가 아름답다고 하면, 평생을 싫어해 왔던 푸르투조차도 아름다워졌다.
“루.”
카를로이가 부르자 리리안이 돌아보았다. 얼굴엔 한 조각의 슬픔도 없이 미소만 가득했다. 카를로이는 그 미소를 보고서야 마음 깊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괜찮을 것이다. 오래도록.
Epilogue. 황제와 황후는 사랑한다
리리안 루 크로이탄은 크로이센의 거칠 것이 없는 젊은 황제, 카를로이 크로이탄이 사랑해 마지않는 황후였다.
다사다난했던 과거를 겪은 아내가 혹시라도 아플까 봐 발이 땅에 닿지도 못하게 안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인 아내의 작품을 온 궁전에 걸어 두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소문이 아니고 사실이었다. 푸르투의 모든 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실.
소문대로 리리안 루 크로이탄은 카를로이 크로이탄이 너무나 사랑해 바람에 날아갈까 두려워 애지중지하는 황후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크로이센의 귀족들이 리리안 루 크로이탄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기도 했다.
입에 칼을 물은 황제는 황후 옆에서는 이 세상 행복을 다 가진 양 웃음을 잃지 않았다.
“황후께서 돌아온 이후로 폐하 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졌어요. 푸르투도 이제야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고. 기강도 잡혔고 사람 사는 궁전 같아졌죠.”
“솔타 출신 인간들이 너무 기세등등한 건 좀 꼴 보기가 싫지만, 어쨌든 다행인 일이지요.”
국혼 기념일 파티에서 서로 떨어질 생각도 없이 붙어 있는 황제와 황후를 보고 귀족들이 주거니 받거니 감상을 표했다.
“싫다고 죽일 듯이 구실 때는 언제고…….”
“쉿. 그때 이야기하면 난리 나는 거 몰라서 이래요? 그때도 사실 심심하면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말이 돌았잖아요.”
솔타의 색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음악이 연회장 내에 울려 퍼졌다. 올리비아 도나타가 황후의 총애를 받은 이후로 푸르투에선 심심치 않게 솔타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심지어 주방장까지 바뀌었으니.
“이날을 맞아서 무슨 세금도 감면해 준다고 그러더군요.”
“지난 국혼 기념일에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인데…….”
황제가 잔을 높이 들어 올리자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도 덩달아 잔을 올렸다. 건배를 한 황제는 옆에 있는 황후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그 애정 행각을 보고도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어쨌든 보기 좋지 않습니까. 냉랭한 푸르투보다는 평화롭고 사랑이 가득한 푸르투가 낫지요.”
누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두가 동의하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파티의 흥겨움에 동화되어 이리저리 흩어졌다. 파티는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