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20화 (21/22)

20. 칼, 그리고 루 (2)

마리나 궁은 마하 수도 궁전의 열네 개 궁 중 하나였다.

“치료만 몇 주 받으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무리하시진 마시고요. 벨루아마르가 독하긴 해도, 치료법이 있으니까요.”

리리안은 마하의 치료사가 카를로이에게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아직은 어려웠다.

“……약만 몇 번 바르면 괜찮을 거래. 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

리리안의 마음을 읽은 듯 카를로이가 설명을 해 주었지만 영 미심쩍었다. 리리안의 표정을 보고 카를로이가 덧붙였다.

“정말이야. 이런 걸로 사람이 크게 다치진 않아.”

“너는 그게 문제야. 정상적인 사람에겐 이 정도 상처도 큰 거라는 걸 몰라.”

리리안은 말을 하면서 점점 감정이 격해졌다. 언제나 똑같은 카를로이의 모습에 화가 났다.

“뭐가 문제야. 네 몸을 좀 우선으로 두면 안 돼? 이렇게 함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굴지 말고!”

점점 격해지는 리리안의 모습에 카를로이가 할 말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봤다.

“네가 이럴 때마다 내가. 내가 다 미치겠어.”

리리안의 말을 대체 뭐라 해석한 건지 카를로이는 얼굴을 굳혔다.

“네가 뭘 오해하는지 모르겠는데 난 멀쩡해. 잘 살고 있었고. 네가 날 신경 쓸 이유는 하나도 없어.”

“……그래?”

“그러니까 나 때문에 여기 발 묶이지 말고 떠나. 괜히 더 엮여 봤자 너만 피곤하니까…….”

점점 단호해지는 카를로이의 말투에 리리안은 김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모를 답답함 때문에 속이 끓었다. 리리안이 뭐라고 대답할 찰나 갑자기 침실 문이 열렸다. 엮이면 피곤할 바로 그 밀레닌 노카였다.

“치료사에게 들었어. 상처가 깊지 않아 다행이라던데.”

밀레닌은 궁으로 오는 동안 이성을 찾은 건지 다시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크로이센어를 사용했다. 카를로이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마하 치료사가 믿을 만한지 잘 모르겠는데. 난 생각 이상으로 좀 아파서 말이야.”

리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카를로이를 바라봤다. 아까까지 별것도 아니라더니 갑자기 무슨.

“그 치료사는 내 전속 치료사야. 그러니 돌팔이일까 봐 걱정할 필욘 없어, 카를로이. 금방 치료될 테니까.”

“글쎄, 그런 건 상해의 원인인 사람 쪽에서 할 말이 못 되지. 의도적으로 축소시키고 싶어 할 수도 있잖아.”

“원인이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널 칼로 찌른 줄 알겠어.”

“프렐룸은 위험하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근데 구태여, 정말이지 기어이, 나를 초대하겠다고…….”

느릿느릿하게 이어지는 카를로이의 말을 더는 못 듣겠다는 듯 밀레닌이 미소를 지우고 신경질 내듯 대꾸했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내 책임이야, 인정해.”

“그래 준다니 고맙고.”

“그럼 이제 네가 좀 말해 주겠어? 대체 크로이센의 황후께서 왜 신분까지 숨겨 가면서 마하로 들어왔는지?”

“그 전에.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내가 황녀일 때 델루아 공작이 한 번 마하에 온 적이 있었거든.”

얼굴만 보고도 공작의 딸인 걸 알 정도라니, 리리안은 새삼 자신의 얼굴이 지겨워졌다.

“그때 딱 한 번 본 걸 기억했다고? 그 어릴 때?”

밀레닌은 무엇이 대수냐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미남의 얼굴은 절대로 잊지 않아.”

“……어련하시겠어.”

“아무튼. 이제 부인이 아니라 황후라 불러 드려야겠지요?”

밀레닌 특유의 고압적인 눈빛과 미소가 리리안을 향했다. 하지만 델루아 공작에게 지독할 정도로 시달린 리리안은 이제 세상에 무서울 게 별로 없었다.

“속인 건 미안하게 됐지만 황후가 아닌 건 사실이에요. 황후 자리에서 물러났고, 푸르투를 떠난 지는 석 달이 다 되어 가요.”

리리안의 대답에도 밀레닌 노카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마하에도 소식이 들려왔을 텐데? 솔타로 요양 갔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이제 황후가 아니라는 말은 처음 들어요.”

카를로이가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적당한 때에 공표하려고 했었어. 크로이센으로 돌아가면 공식적으로 처리할 생각이었고.”

요양 간 사람을 다 죽은 사람 취급하면서 아내를 잃었니 마니, 새 부인이 어쩌니 저쩌니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처음 듣는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그러니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아직 황후란 소리 아닌가?”

카를로이와 리리안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마하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 명색에 크로이센의 황후인데 신분을 숨긴 채로 아무 데나 쏘다니게 할 순 없잖아.”

“어차피 전 조금 있다 마하를 떠나려고…….”

밀레닌은 리리안의 말을 끊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무슨 일이 생길지, 무슨 일을 벌일지 알고? 크로이센의 황제가 여기서 다쳤다는 것만으로도 난 이미 부담이 커요. 그런데 황후까지 마음대로 내 영토를 돌아다닌다고? 그건 안 되지.”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잖아. 괴롭히지 말고 그냥 보내 줘.”

“카를로이,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난 지금 사적으로 괴롭히려는 게 아니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 언제 떠날 건데? 지금 당장 떠날 거예요? 내가 주는 배를 타고 지금 바로 떠나겠다면 그래, 괜찮아요.”

리리안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직 다음 행선지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서 지금 당장 출발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앞으로의 거처를 정하는 데만 사흘은 넘게 걸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떠날 게 아니라면 내 눈이 닿는 데 있어 줘야겠어요. 둘이 같은 침실을 쓰기 싫어서 이러는 거라면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마리나를 통째로 내줄 테니까.”

밀레닌이 약간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그런데 뭐, 사이는 괜찮아 보이는데? 갈라설 거라는 말도 나로선 영 믿을 수가 없네. 그러니 더더욱 당신들 말만 믿고 맘대로 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고.”

리리안은 결국 마하의 황제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반면 카를로이는 아직도 무언가 마뜩잖은 듯했다.

“보자마자 황후란 걸 알아 놓고 가만히 놔둔 것도 모자라서 입맛대로 가지고 놀기까지 했으면서. 이제 와서 부담이 크다고? 사고라도 하나 치게 하고, 신분 숨기고 돌아다닌 걸로 나한테 부담 지울 생각이었겠지?”

“섭섭하게,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속이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모른 척해 준 거지. 나도 적당한 시기에 안다고 말할 생각이었어. 네가 다치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밀레닌은 그림 같은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키아나의 거처에 있는 황후의 짐은 내 시종들이 알아서 가져다줄 거예요. 여기 거처 정리와 안내도 해 줄 거고. 일단 정리가 되고 나면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혼자 말을 다 끝내고는 밀레닌은 휑하니 나가 버렸다. 카를로이와 리리안 둘만 내버려 두고. 잠시간의 어색한 정적 끝에 카를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일부러 늦게 처리하려고 한 건 아니야.”

“알아. 뒤냐 공도 그렇게 말했었어. 조금은 시일이 걸린다고.”

“널 이렇게 붙잡아 둘 생각도 아니었는데…….”

“나 때문에 다친 거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한 손으로 얼굴을 짚고 있던 카를로이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단호한 얼굴이 리리안을 바라봤다.

“너 때문에 다친 게 아니야. 빌어먹, 아니, 마하 때문이지.”

리리안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어쨌든 자신 대신 다친 것 아닌가. 같은 자리만 벌써 두 번째였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카를로이의 반응이 뻔하게 예상이 됐다. 아마 밀레닌이 중간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정말로 카를로이에게 화를 냈을 것 같았다.

문득 푸르투에서 자신이 살짝 베이기만 해도 화를 내던 카를로이가 떠올랐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또다시 정적이 감도는 침실에 시종이 들어와 리리안의 침실이 정리되었다고 전했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 쉬어. 밀레닌이 되도록 널 귀찮게 하지 못하게 할게.”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리리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 침실을 나갔다.

리리안이 나가자마자 카를로이가 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셀이 멀뚱한 표정으로 카를로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처음부터요. 옷장 옆에 있었는데.”

“기척이라도 좀 내.”

아셀은 못 들은 척 허공을 쳐다봤다. 대충 예상이 가는 바였다. 아마 밀레닌이 무서워 숨은 것일 터였다.

“그런데 우연이 엄청나요. 여기도 황후가 있네.”

“혹시 너도 알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따라오겠다고 우겼던 게 수상한데.”

카를로이는 이 모든 게 뒤냐의 계획이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어쩐지 나이 핑계를 대며 가지 않겠다더니, 쓸데없는 짓을.

카를로이의 추궁에 아셀은 모처럼 결백하단 얼굴을 하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난 진짜 폐하가 죽을까 봐 따라온 거예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

아셀이 말없이 카를로이의 등을 가리키자 카를로이는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건 정말 별거 아니야.”

“그런데 황후한테 왜 그렇게 차갑게 굴어요? 좋아 죽으면서.”

“……등이 아파서 좀 쉬어야겠어.”

대답을 피하는 카를로이를 보고 아셀이 시무룩한 얼굴로 칭얼거리듯 중얼거렸다.

“난 심심하단 말이에요. 여기서는 나갈 곳도 없는데.”

놀아 달라는 말인 듯했다. 갑자기 애 딸린 홀아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랑 있어 봤자 재미없다는 거 알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아셀이 수긍한 듯 금세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드디어 혼자가 된 카를로이는 침대에 기대 아셀의 말을 곱씹었다. 리리안에게 차갑게 대하려던 건 아니었다. 다만 더 가까워질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마하의 정원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프렐룸 경기장에서 그녀를 안았을 때 느꼈다. 이대로 놓아주고 싶지 않다는 충동을. 그대로 자신 옆에 두고 싶었다. 그 충동이 너무 강렬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지금도 남은 이성이 마비되는 기분인데, 여기서 더 닿게 된다면 그대로 놓아줄 자신이 없었다.

* * *

아직 메리앤과 제인도 도착하지 않아서 텅 빈 침실에 혼자 앉아 있던 리리안은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셀이 창틀에 매달려 발로 창문을 툭툭 치고 있는 것을 본 리리안이 경악한 표정으로 창문을 열었다.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오랜만에 본다는 사실도 잊고 리리안이 소리쳤다.

“안녕, 폐하.”

태평하게 인사를 한 아셀이 유연한 몸놀림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침실에 이렇게 아셀을 들여도 될지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리리안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는 아셀이었다. 어차피 세상의 상식이나 지식 따위는 통하지 않는.

“너도 왔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얼굴을 한 번도 못 봤지. 프렐룸 보러 왔었어?”

프렐룸이란 단어를 듣자 아셀의 얼굴이 잠깐 하얗게 질렸다. 리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를 슬쩍 빼 주었다.

“안 갔어요. 마하에서는 돌아다니기가 싫어서.”

아셀이 마하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리리안은 자신이 무신경했던 것 같아 미안해졌다.

시녀 하나가 두고 갔던 과자들을 슬쩍 아셀 앞으로 밀어 놓자 아셀이 하나를 집어 들고 오도독 씹어 먹기 시작했다. 맛도 더럽게 없는 과자였는데 아셀은 잘만 먹었다. 마하를 아무리 싫어해도 마하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맞는 모양이었다.

“오기 싫은데 카를로이 때문에 온 거야?”

“혼자 가서 또 자살할까 봐요. 바다에 일부러 빠질 수도 있잖아요.”

아셀 특유의 심드렁한 말투에도 리리안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이제 그러지 않을 거야. 카를로이는 나랑 약속했어.”

아셀이 과자 하나를 또 입에 집어넣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도 정신 멀쩡할 때나 지킬 수 있는 거죠.”

그 한마디에 푸르투에서의 카를로이의 생활이 훤히 그려졌다. 자신과의 약속이 카를로이에겐 고통이 되어 버린 걸까. 잠시 할 말을 잃은 리리안은 화제를 돌리는 것을 선택했다.

“근데 너, 크로이센어가 많이 늘었다.”

그 말에 아셀의 얼굴이 뿌듯함으로 환하게 빛났다.

“뒤냐가 가르쳐 주고 있어요.”

알렉시스 뒤냐가 제대로 가르쳤다면 뒤냐가 아니라 뒤냐 공이라고 부르는 것도 알려 주었을 텐데. 하지만 리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는 요새 날 상대를 안 해 줘요. 그래서 맨날 뒤냐랑만 있어야 하고. 지루해.”

“그래?”

“여기 마하에서도 밖에 나가 보고 싶기는 한데 혼자는 싫어요. 근데 폐하는 또 혼자 있겠다고 그러고.”

“카를로이가 같이 있으면 마하도 쉬워져?”

아셀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안에만 있어도 되잖아. 싫은 걸 굳이 뭐 하러 봐.”

“그냥요. 그게 싫은 게 싫어요. 언제까지 싫어하긴 싫어요. 그리고 안은 심심해 죽겠어.”

싫다는 말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리리안은 말의 뜻을 한참 생각해 봐야 했다. 생각을 해도 속뜻까지 완전히 이해가 된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날 찾아왔구나. 카를로이가 상대를 안 해 줘서.”

아셀이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에서 묘하게 만족이 덜 됐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리리안이 생각만큼 아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과자나 더 먹어.”

아셀은 인심 쓴다는 듯 나머지 과자를 열심히 먹어 치웠다. 리리안은 그런 아셀을 바라보다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는 카를로이가 머릿속을 침범해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이젠 바로 옆에 있으니 더더욱이나 막을 수 없었다.

한숨을 쉬며 리리안은 아셀에게 물었다.

“맛있니?”

대답 대신 아셀은 빈 접시를 흔들어 보였다. 정말이지 애라도 키우는 기분이었다.

* * *

이틀 뒤 마하 황제는 카를로이와 리리안 모두를 오찬에 초대했다. 등 때문에 오래 걷지 못하는 카를로이를 나름 배려하겠다고 마리나 궁의 식당에 식사가 차려졌다. 시종과 시녀도 모두 물러 최소한의 고용인만 식당에 있었다.

“야,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네 부인인 걸 알았으면 난 진짜 말도 안 걸었을 거다.”

블레이즈가 카를로이 귀에 대고 속삭였지만, 카를로이는 항상 그렇듯 그저 경멸 어린 시선만 잠깐 보냈다.

카를로이 옆에 앉은 리리안은 약간은 비장한 얼굴로 음식들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마하의 황제 앞에서 마하 음식을 먹고 쓰레기를 먹은 듯한 표정을 지어선 안 될 것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복숭아를 못 드신다고?”

밀레닌이 식기를 집어 들며 물었다. 리리안이 놀라서 밀레닌을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카를로이가 밀레닌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밀레닌은 두 개의 시선을 가뿐하게 무시했다.

“카를로이가 아침부터 주방장을 얼마나 들볶던지. 오찬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음식에서 복숭아를 다 빼라지 뭐야. 자기가 먹기 싫어서라는데 뻔하지, 뭐.”

“……내가 먹기 싫어서가 맞아. 마하는 복숭아조차 더럽게 맛도 없으니까.”

마하를 싫어하는 리리안조차 조금 심하다고 생각이 들 법한 잔인한 평가였다. 밀레닌은 들리지 않는 듯 무시했지만 블레이즈는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까다로운 크로이센인 아니랄까 봐. 주는 대로 처먹어.”

리리안은 앞에 놓인 음식을 한 입 먹었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음식이 맛이 없대도 황궁의 요리는 다르긴 한 모양이었다.

반쯤 멍하니 식사를 하며 리리안은 복숭아에 대해서 생각했다. 푸르투에선 그조차도 몰랐던 카를로이에 대해. 복숭아를 보면 그때의 카를로이가 떠오르거나, 델루아 공작이 떠올랐다. 어느 쪽이든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마하에서의 오늘을 기억하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기억으로 기억을 덮는 것.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정복지의 물건은.”

“카를로이, 무슨 식사 중에 일 이야기를 해.”

“지금 이야기 끝내지. 대단한 이야기도 아닌데 격식 맞춰 하자고 질질 끌며 파티나 프렐룸에 불러 대니까 내가 다친 거잖아.”

“맞는 말이라 참 뭐라 할 말이 없긴 한데, 굳이 식사 중에 해야겠니.”

“하루빨리 마하를 뜨고 싶으니까. 어쨌든 크로이센은 마하와 새로운 물건을 거래할 생각은 없어.”

무미건조한 말투로 강한 불호를 이야기하는 카를로이를 보며 리리안은 그게 자신 때문은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카를로이는 저 때문에 리리안이 마하에 붙잡혀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밀레닌은 식기를 움직이는 걸 멈추지도 않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글쎄. 물건이라도 좀 보고 생각하지 그래. 괜찮은데.”

“그것보다 더 관심 가질 만한 걸 생각해 왔어. 베르니에 대한 관심, 진지한 거야?”

베르니에 대한 말이 나오자 밀레닌은 식사하는 것을 멈출 정도로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베르니의 마법을 생각해 봐. 우리가 아는 베르니의 마법은 반도 되지 않아. 그 산골짜기에 고립되어 있는 동안 또 뭘 만들어 낼지도 모르고. 그런 나라를 정복하는 거에 관심이 없다? 말도 안 되지.”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베르니 쪽의 북해는 내 마법으로도 힘들고, 내륙 쪽 길은 험하지. 크로이센에서 길을 내주지 않는 이상에야…….”

“땅도 문제겠지.”

“맞아, 척박하기 짝이 없으니까. 쓸모가 없어. 베르니 마법이 발달해 봤자 경작에서의 수확량은 미미하고.”

“최근에 크로이센에서 경작 마법을 개발했어.”

“세상에. 하긴 언제까지 관상용 식물들만 키울 셈이야? 잘 생각했어.”

“해 보니 결과도 나쁘지 않았고. 물론 베르니 땅에도 통하려면 조금 더 보완이 필요한데 마법사들 말로는 가능할 것 같다더군.”

“아하. 무슨 말 할지 알겠는데.”

밀레닌과 카를로이는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한참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카를로이가 심심하면 등의 상처를 언급해서 밀레닌의 미소가 어그러질 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화는 평화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리리안은 아셀의 말이 거짓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모습의 카를로이는 또 멀쩡해 보였다. 정신을 놓고 어디 가서 죽겠다고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리리안은 점심을 먹으러 오기 전에 메리앤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마하를 떠나면 솔타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솔타는 마음 편히 사랑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혼자서 거처를 구하기는 힘이 드니 올리비아 도나타에게 적당한 곳을 구해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올리비아에게 보낼 편지를 메리앤에게 건네주자 메리앤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솔타로 가시기로 한 거예요?>

마치 리리안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딴생각에 빠져 있는 리리안을 보고 블레이즈가 말을 걸었다.

“재미가 영 없죠?”

마하어가 중간중간 섞여 알아듣기 힘들 때 말곤 나름 흥미롭게 대화를 듣고 있었던 리리안은 쉽게 긍정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이신 줄 알았다면 제가 그렇게 대접했겠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가 마하를 좀 제대로 구경시켜 드리고 싶군요.”

“아, 괜찮습니다. 다양한 곳을 이미 구경해서.”

“에이, 마하 땅덩어리가 얼마나 넓은데요. 제가 딱 크로이센들이 좋아할 곳을 알고 있지요. 마하인들은 좀 심심해하지만 마히트 전망대에 가 보시면…….”

말을 하다 말고 블레이즈가 갑자기 질렸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리리안은 천천히 블레이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밀레닌과 대화 중인 줄 알았던 카를로이가 어느새 블레이즈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말도 걸지 않았을 거라며.”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카를로이의 입에서 무뚝뚝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리리안으로선 이해를 못 할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블레이즈는 이해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걸어, 안 건다고. 곧 이혼할 사이라면서 별…….”

블레이즈의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블레이즈가 입을 다물고 식사에만 집중하기 시작하자 카를로이는 다시 밀레닌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운 대공이 떨어져 나가자 리리안도 그 전보다는 편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카를로이는 끝까지 리리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날 밤, 리리안은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마하에 와서 처음 꾸는 악몽이었다. 델루아 공작이 나와 끔찍한 소리를 퍼부었다. 리리안은 델루아 공작에게 말했다.

그래 봤자 너는 죽었다고. 죽어 버려서 이젠 나에게 할 수 있는 짓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리고 나는 살아 있다고. 꿈에서 아무리 죽여도 죽지도 않던 공작은 그 한마디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숨을 헐떡이며 깬 리리안은 몸을 떨며 어두운 침실을 둘러보았다. 어느 곳에도 공작은 없었다. 보이는 것은 드니스의 그림뿐.

악몽이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리리안이 잘 알았다. 잊을 만하면 다시 살아나겠지. 하지만 이제 리리안은 이제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리리안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나는 이렇듯 세차게 숨을 쉬고 있고, 공작은 흔적도 없이 썩어 갈 것이라고.

* * *

다음 날 저녁에는 소나기가 왔다. 마하와 어울리게 짧고 굵은 소나기가. 정말 오랜만에 보는 비였다. 그렇지 않아도 습기 찬 마하 공기가 더욱 끈적하게 느껴졌다.

리리안은 얇은 옷을 입고 정원으로 나갔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물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는데 그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물에 흠뻑 젖은 꽃들 위에서 물방울이 투명하게 빛났다.

이상하게 마하 궁전의 정원은 푸르투와 비슷해 보였다. 라 소르티오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푸르투의 기억을 참 쉽게도 되살렸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렇게 참담한 심정은 아니었다. 씁쓸할 뿐.

춤을 추는 튜랑 꽃들은 물을 먹어서 그런지 흐느적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여워 보여 리리안은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한참 꽃들을 바라봤다. 한 송이는 비에 쓸려 나갔는지 거의 땅에 묻혀 있다시피 했다. 애잔한 마음에 리리안은 저도 모르게 그 한 송이를 주워 들었다.

튜랑 한 송이를 들고 허리를 펴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예배당처럼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그 앞에 물로 만들어진 흉상들과 그것들이 둘러싼 분수가 있었다. 푸르투와 다른 점이라 색달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카를로이였다.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그는 마치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질 사람처럼 보였다. 카를로이가 약으로 버티는 거나 다름없다고 한 아셀의 말이 떠올랐다. 그의 정신이란 게 남아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

습한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가슴이 선득해지는 기분에 리리안은 저도 모르게 카를로이 쪽으로 걸어갔다.

리리안을 발견한 카를로이의 얼굴에 점점 표정이 들어왔다. 마치 색에 물드는 것처럼. 정말 색이었다면 아마도 어둡고, 슬픈 색이었을 것 같은 표정들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비켜 주려는 듯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리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있어. 이렇게 나와도 괜찮아? 등은?”

“심한 상처가 아니라서 이 정도는 괜찮아.”

밀레닌에게 말하는 걸로만 봐서는 심한 상처 같던데,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리리안은 머뭇거리다가 카를로이와 조금 떨어진 옆에 앉았다.

“무슨 생각 하고 있길래 그렇게 앉아 있었어.”

리리안의 목소리는 공기 사이에 스며들 수 있을 정도로 잔잔했다.

“별생각 없었어.”

“그래? 난 푸르투 생각을 했어……. 여긴 꼭 푸르투의 정원 같아서.”

카를로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리리안은 카를로이 또한 이곳에 앉아서 과거를 곱씹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 카를로이가 입을 열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푸르투의 정원을 본뜬 거라서. 아마 이 궁전에서 그나마 볼 만한 유일한 곳일 거야.”

“궁전이 아니라 마하 전체라고 해도 될걸…….”

리리안의 대답에 카를로이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아주 살짝 올라갔다.

“대공이 마히트 전망대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도 왠지 별로일 것 같아.”

“그건 그 새, 아니, 대공 말이 맞아. 그곳은 나쁘지 않아.”

카를로이가 인정할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곳인 모양이었다. 리리안은 떠나기 전에 가 보긴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솔타는 이렇지 않았는데.”

“……솔타가 마음에 들었구나.”

리리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정말 좋았어. 넌 싫었어?”

리리안이 물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카를로이는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

“모르겠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가 볼 생각은 있어?”

“잘 모르겠다. 그것도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그럼 네가 생각하는 건 대체 뭐야?”

카를로이는 대답 대신 리리안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게.”

어쩐지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옆에 앉은 남자가 할 생각이라는 게 다 뻔했기에 리리안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푸르투에 처음 갔을 때 사람들이 그랬어. 네가 비를 싫어한다고…….”

카를로이는 대답 없이 듣기만 했다.

“그래서 네가 날 잊었다고 생각했어. 난 널 만난 뒤에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었거든. 그날엔 네가 생각이 났으니까. 푸르투에서는 지긋지긋해졌지만.”

“싫어한 게 아니야.”

카를로이가 중얼거렸다.

“단지…… 견딜 수가 없었어. 내가 그날 널 두고 왔으니까.”

그의 목소리는 주변 공기만큼이나 습했다.

“내가 남은 거잖아.”

“어쨌든.”

카를로이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췄다. 숨을 고르듯이.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단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내가 네 인생을 망쳤다는 사실도.”

크로이센에는 비가 자주 왔다. 지나치게 자주. 그리고 카를로이는 비가 올 때마다 저런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카를로이는 리리안이 손에 쥐고 있는 튜랑 꽃을 쳐다보았다.

“엔투라룸에서 튜랑을 보고 널 닮았단 생각을 했어. 네가 춤을 추면 왠지 저런 모습일 것 같다고…….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드는 내가 미친 새끼 같았는데.”

그는 어쩐지 멍해 보였다.

“그리고 아르바 루프에서 널 보고 내 생각이 반쯤은 틀렸다는 걸 알았지. 넌 튜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예뻤으니까…….”

리리안도 그와 추었던 춤을 기억했다. 손짓 하나하나를, 그때 닿았던 뜨거움까지 전부.

“그런데 내 옆에 있으면 네가……. 아니, 내가 언제나 널 망가트리는 것 같아.”

그의 시선은 물에 젖어 볼품없게 시든 튜랑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단어 하나하나에 짙게 묻어 나오는 감정에 리리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음 깊은 곳까지 슬픔으로 눅눅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인생은 정말로 망했을까? 자신은 망가트려진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리안은 생각했다. 괜찮아지고 있다고. 더는 아무도 그녀를 망가트릴 수 없도록 노력하고 있으니까.

“칼, 너 등 다친 거 나 때문이야?”

한참 뒤에 리리안이 물었다. 카를로이는 인상을 구겼다.

“무슨 소리야. 아니라니까.”

“그럼 벨루아마르 때문인가. 그 꼬리에 다친 거니까.”

“마하 때문이라니까.”

리리안이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그래. 나도 나 때문에 네가 다쳤다고 생각하지 않아.”

리리안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한 카를로이가 얼굴을 굳혔다.

“그거랑은 달라.”

“등의 상처는 곧 나을 거야.”

그리고 리리안 자신도 언젠가는 완전히 괜찮아지는 날이 올 거였다. 흉터는 남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흉터를 가지고도 살아간다. 살 이유를 딱히 찾지 못했지만 이제는 죽어야 할 이유도 찾지 않았다.

리리안은 이제 완전히 습관처럼 자리 잡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드니스는 제인의 편지가 자신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다. 스스로.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리리안이 어떻게 했어도, 어떻게 해도 그녀를 되살릴 순 없었다.

“등의 상처는 보이는 거니까 치료라도 하지.”

카를로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위에서 굵은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리리안과 카를로이가 동시에 위를 쳐다보자 몇 방울씩 더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 소나기가 오려나 봐.”

리리안이 중얼거리자 카를로이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너 비 맞으면 안 돼.”

등의 상처가 있는 카를로이야말로 맞으면 안 될 텐데. 리리안은 그 생각을 하며 카를로이의 손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떨어지는 비의 양이 점점 많아졌다. 카를로이와 리리안이 앞에 있던 예배당 지붕 밑으로 들어간 것과 동시에 무수히 많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금세 시야가 흐려지고 거침없는 빗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카를로이는 말없이 리리안의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의 머리칼이 물기 때문에 반짝거렸다.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리리안은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비가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비는 비일 뿐이었다.

“들어가자. 금방 추워져.”

리리안의 옷을 여며 준 카를로이가, 아직도 비 내리는 과거에 매인 남자가 속삭였다.

“이렇게 더운데 비 내린다고 안 추워져…….”

“그래도.”

리리안은 들고 있던 튜랑을 곱게 품에 넣었다.

그가 고통스럽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 너무 죽을 것 같아서, 혼자만 이렇게 불행하다는 것이 억울해서, 그에게 마음을 준 만큼, 딱 그만큼 원망스러워서.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진 듯 그는 짧은 생 내내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비 내리는 곳에서만 살았고, 지금도 그러했다. 그게 전혀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이 비는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그칠 것이었다. 모든 비가 그러듯. 카를로이의 마음에 내리는 비도 그칠 수 있을까.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가능한 일일까. 리리안은 확신할 수 없었다.

* * *

카를로이는 꼭 그래야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리리안을 마주치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등이 안 좋다는 핑계로 식사도 침실에서 했으니까.

리리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잘 상대하지 않는 건지 부쩍 아셀이 놀러 오는 일이 늘었다. 메리앤은 처음엔 질색하더니 이젠 침실에 멋대로 들어오는 아셀을 보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먹을 것을 주었다. 꼭 침실에서 기르는 동물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진짜 맛있어? 아니면 그냥 온종일 배가 고픈 거야?”

주는 대로 먹는 아셀을 보고 제인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맛있는데.”

아셀이 빈 접시를 치우며 대답했다.

“이것도 먹어 봐. 설마 이것도 맛있어?”

제인은 실험을 하듯 마하의 음식들을 늘어놓고 아셀에게 하나씩 먹이고 있었다.

“크로이센 음식은 싱거워.”

아셀이 우물대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크로이센에서는 뭘 먹는 모습이 잘 안 보이더니, 취향이 아니었던 듯했다. 마하에 오자마자 아셀은 먹는 양이 급격히 늘어났다. 리리안은 그림을 그리면서 종종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억 속 비 내리는 푸르투의 정원을 그리며.

마하 황제가 리리안의 침실에 들렀다 드니스의 그림을 보곤 도구들을 챙겨 주어서 꽤 편하게 그릴 수 있었다. 유화 대신 수채화이기는 했지만.

<특이한 취미가 있으시네. 직접 그림을 다 그리고.>

밀레닌 노카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이 반짝거렸다.

며칠간 지켜보니 밀레닌은 워낙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좀 피곤한 감이 있긴 했지만 처음보다는 상대하기가 쉬웠다. 어디서 리리안의 사정을 들은 건지 묘하게 리리안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웠다.

그녀는 뜬금없이 찾아와 리리안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손으로 간단한 마법을 보여 주거나 어린 시절의 카를로이 이야기를 해 주곤 했는데, 그게 또 재밌기는 해서 리리안도 나중엔 은근히 반기게 되었다.

연극을 보는 관객인 양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이고 다양한 반응을 보여 주는 키아나에 비해 리리안의 반응은 심심하기 그지없었는데도 밀레닌은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이상한 승부욕이라도 느끼는지, 어울리지도 않게 리리안에게서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더 신기한 마법을 보여 주거나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곤 했다. 참 은근하게 웃기는 사람이었다.

실없는 장난기가 있는 이런 사람이 남편을 직접 셋이나 죽였다니 가끔은 믿기지 않았다. 밀레닌은 그 얘기만큼은 절대로 자세하게 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것에 익숙해져도 마하란 나라에 썩 정이 가지는 않았다. 여전히 이상한 나라였다.

“그러고 보니 마히트 전망대가 굉장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떠나기 전에 한 번쯤 들러 보면 좋을 것 같아. 마하에서 한 번쯤은 좋은 곳을 가 보고 싶어.”

리리안의 말에 고개를 처박고 음식을 먹던 아셀이 빠르게 반응했다.

“나 거기 아는데. 지금 가 보면 안 돼요?”

“응? 넌 어차피 밖에 다니는 거 싫다며.”

“맨날 안에만 있는 거 이제 질렸어요.”

있으면 뭐 얼마나 있었다고…….

리리안의 시큰둥한 반응과는 다르게 제인은 맞장구를 쳤다. 제인은 아셀과 꽤 죽이 잘 맞았다.

“맞아요. 할 것도 없는데. 엄마, 엄마도 같이 가요. 마하까지 왔는데 시간이 아깝잖아요.”

메리앤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무서운 소리 하지도 마라. 난 이제 이 끔찍한 곳을 나다니고 싶지 않아. 마히트인지 마히르인지 그곳에 루푸스로 가는 길이 있대도 가지 않을 거다.”

두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지는 것을 보고 결국 리리안이 붓을 놓았다.

리리안이 가겠다고 결심하자 메리앤은 엄숙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리안이 가는 곳에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메리앤, 여기 남아서 쉬어.”

“아니에요.”

“제인도 있으니까 괜찮아. 자네가 쉬는 게 나도 편해.”

메리앤은 두 번 사양하진 않았다. 진심으로 마하가 싫은 게 분명했다.

“그럼 밀레닌에게 대신 전해 줘. 잠깐 마히트만 보고 오겠다고. 아셀이 같이 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도.”

메리앤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 진짜 괜찮겠어?”

“괜찮아야 해요.”

아셀은 드물게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쟁에 처음 나가는 소년병 같은 얼굴이었다.

비장한 각오를 다진 호위 하나와 야무진 시녀 하나를 데리고, 소박한 옷으로 갈아입고 리리안은 길을 나섰다.

아무 생각 없이 나온 리리안은 얼굴을 제대로 가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마하인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심심치 않게 닿았다.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마하어로 뭐라 소리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덩치도 큰 마하인들의 시선에 움츠러든 제인이 앞서가는 아셀을 톡톡 쳤다.

“얼마나 더 가야 해? 마하인들 너무 무서운 것 같아.”

“거의 다 왔어.”

아셀은 부자연스럽게 앞만 보고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씩씩하게 잘 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는데, 날이 더워서 흐르는 것 같진 않았다. 마하의 길거리를 걸어가는 게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아셀에겐 힘이 드는 일인 듯했다. 참 용감하긴 했다. 새삼 리리안은 그가 부러우면서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망대의 입구에 도착하자 아셀이 뿌듯한 표정으로 숨을 골랐다. 마하인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이 사실인지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아셀을 따라 힘들게 전망대에 오르자 푸른 바다가 제일 처음 보였다. 리리안은 잠시 말을 잃고 풍경을 바라봤다.

전망대 자체는 별 게 없었다. 제대로 꾸며진 것도 아니라 방치된 장소처럼 보였다. 보이는 것도 바다 말곤 크게 없었고. 하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그것이 보여 주는 자연이 더욱 빛났고 오로지 그 풍경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쳤지만 예전처럼 역한 기운이 올라오지 않았다.

“마하에도 볼 게 하나 정도는 있었네요.”

제인이 빙긋 웃으며 건넨 말에 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길 잘한 것 같아.”

살면서 바다는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드니스를 떠올리며 리리안은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이제 내려가자.”

한참이나 질릴 정도로 바다의 파란색을 쳐다보던 리리안은 노을이 지고 나서야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아셀은 풍광에는 별 감흥이 없는지 내내 바닥에 앉아 있다가 리리안의 말에 벌떡 일어섰다. 아직도 긴장한 기색이 조금 남아 있었다.

“궁까지 무사히 가면 아셀 너도 오늘의 목표를 이룬 셈이네.”

리리안의 말에 아셀이 반쯤은 비장하게, 반쯤은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가는 길은 아셀이 속도가 붙어서 그런지 훨씬 쉽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것이라 왠지 모를 보람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전망대를 내려와 그 입구를 벗어날 때까지도 그 기분은 이어졌다. 문제가 생긴 것은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였다.

“음? 이상하게 시끄럽지 않아요? 무슨 일이 있나 봐요.”

제인이 말을 끝내자마자 눈앞에 소란의 원인이 나타났다.

길 한가운데서 노예 하나를 폭행하는 험악한 인상의 중년 남자들이 보였다. 거친 마하어가 남자들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발에 마구잡이로 채며 울고 있는 노예가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마하인들은 웃거나 그걸 부추기고 있었다.

불쾌한 광경에 리리안과 제인이 저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남 일 같지 않아서 리리안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말린 것도 아니고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마하인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크로이센인 여자를 노려보는 눈길이 험악했다. 툭툭 나오는 단어들은 욕인 것이 분명했다.

“아셀.”

무심결에 아셀을 부르며 옆을 돌아본 리리안은 깜짝 놀라 무릎을 굽혔다. 아셀이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싸매고 벌벌 떨고 있었다.

“아셀, 괜찮아?”

제인이 어깨에 손을 얹자 아셀이 발작을 하듯 그 손을 쳐 냈다.

마하인들이 노려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리리안은 조용히 제인을 잡아당겼다.

“제인, 지금 당장 궁으로 달려가. 최대한 빨리. 사람을 불러.”

제인은 두 번 묻지 않았다. 민첩한 시녀는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사라졌다.

리리안은 스스로의 안일함을 탓했다. 아셀의 고통을 너무 얕봤다. 그런 고통은 쉽게 괜찮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으면서도.

“아셀.”

아셀 옆에 앉아 속삭여 봤지만 아셀은 계속 몸만 떨었다. 이제 마하인들은 거의 앞까지 다가와서 위협적으로 주먹을 흔들고 있었다.

종종 ‘노예’라는 단어가 들렸다.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아셀의 몸이 사정없이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이 예전 델루아 공작에게 당하던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아셀, 넌 노예가 아니야. 아무도 널 맘대로 해칠 수는 없어.”

말이 들리긴 하는지 의문이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리리안은 끊임없이 아셀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만 지나면 끝나, 아셀. 그러면 네가 마하를 이기는 거야.”

아셀이 잠시 멈칫하는 듯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는 이제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하인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리리안에게 더 화가 났는지 이제 정말 몸에 손을 댈 기세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리리안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속삭였다.

“아셀, 조금만 참아. 응? 조금만 있으면 카를로이가 올 거야.”

큰 기대 없이 한 말인데 아셀이 갑자기 몸을 떠는 것을 멈추었다.

“아셀?”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아셀은 미동조차 없이 이젠 그냥 굳어 있었다.

마하인 하나가 아셀을 발로 차며 리리안의 이마를 툭 쳤다. 리리안이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 냈지만 마하인들은 낄낄거리며 웃기만 했다. 그렇게 짧고 간단한 동작에도 사람 기분이 이토록 더러워질 수 있었다.

리리안이 한 놈이라도 죽어라 물어뜯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찰나에 마하인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이더니 리리안의 양옆으로 다가왔다. 마치 억지로라도 끌고 갈 태세였다.

손 하나가 리리안의 옷깃에 스치듯 닿았을 때였다. 갑자기 칼 뽑는 소리가 들리더니 리리안을 건드리던 마하인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아셀이 핏발 선 눈으로 칼을 뽑아 들고 리리안 앞에 서 있었다. 리리안은 앉은 채로 멍하니 아셀을 올려다보았다.

“아셀?”

아셀은 들리지도 않는지 죽일 듯이 마하인들만 노려보고 있었다.

칼이 나오자마자 상황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정리되었다. 하긴 누구라도 아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무시할 순 없을 거였다. 그때만큼은 그는 정말로 노예가 아니라 무사처럼 보였으니.

아셀이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 마하인들을 다 베어 버릴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곱게 비켜 주는 길 사이로 빠져나온 후에 리리안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아……?”

아셀이 사람이 없는 곳에 오자마자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칼을 들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을 다 쓴 게 분명했다. 아셀은 대답도 못 하고 쓰러진 채로 힘겹게 숨만 몰아쉬었다. 리리안은 그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잘했어. 이제 다 끝났어.”

매일 어린애 같은 모습만 보다가 이런 모습을 보니 괜히 짠했다.

시간이 지나서 아셀이 좀 진정된 것처럼 보이자 리리안은 그를 일으켜 그녀에게 기대게 했다.

“그래도 스스로 일어나고, 대단하다.”

“다치면…….”

리리안의 말에 아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잔뜩 쉰 목소리였다.

“폐하가 힘들어 할 거예요.”

아셀의 대답에 리리안은 할 말을 잃고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무슨 어미 따르는 오리인 양 저렇게 카를로이에게 반응하나. 마하인들이 노예를 다루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그를 구해 준 카를로이에게 어떤 마음일지 예상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삼 놀라웠다.

“……카를로이는 정말 널 책임져야겠다.”

무심결에 중얼거린 리리안은 문득 카를로이도 이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마리나 궁에 도착할 때 즈음엔 그래도 아셀이 상태가 나아져서 팔짱만 낀 채로도 잘 걸을 수 있었다.

성문으로 들어가자마자 군인들과 시종들이 호들갑을 떨며 리리안과 아셀을 안으로 데려갔다. 마리나 궁 앞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던 밀레닌은 리리안을 발견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러니까 내가 이곳에 머무르라고 한 거야. 멋대로 쏘다니다간 일이 생길 테니까.”

화라도 낼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예상외로 밀레닌의 말투만은 차분했다.

“전부 다 내 책임이 되는 거지. 카를로이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 마당에…….”

뒤에서 메리앤이 눈물 바람으로 달려왔다. 제인은 손수건을 들고 메리앤을 뒤따라왔다.

“아셀이 있어서 괜찮을 줄 알고…….”

리리안의 변명과도 같은 중얼거림에 밀레닌의 시선이 잠시 아셀에게 닿았다.

“내 눈은 쳐다보지도 못하는 호위? 퍽이나.”

“너무 그러지 말아요. 오늘 무척이나 힘들었을 테니까.”

밀레닌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별일 없이 돌아온 건 다행이지만 당신 찾겠다고 카를로이가 말을 타고 뛰쳐나갔어.”

이번엔 리리안이 소리쳤다.

“뭐라고요? 몸도 성치 않은데 말까지 타요? 말렸어야죠!”

“부부가 쌍으로 똑같은 소리를 하네. 그렇게 잘 알면 애초에 아무렇게나 돌아다니질 말란 말이야. 제멋대로 나가는 걸 나더러 어떻게 막으라는 건지. 내가 시체 하나를 치우고 크로이센에 사죄의 뜻이라도 보내야 만족하겠냔 말이야.”

억지로라도 차분함을 유지하려고 하던 밀레닌은 이제 정말로 화가 나 보였다.

“내가 당신네 부부를 또 마하에 초대하면 정말…….”

하지만 말을 끝맺진 않았다. 와중에도 또 초대는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사람을 보냈으니까 금방 되돌아올 거야.”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숨을 크게 쉰 밀레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를로이를 기다린답시고 밖에 서 있는 건 안 돼. 정원까진 허락할게. 난 정말이지 위험 부담을 더 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밀레닌의 말과는 달리 해가 질 때까지도 카를로이는 마리나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리리안은 내내 입구 정원에서 서성이며 카를로이를 기다렸다. 정말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면…….

불안함이 극에 달할 때쯤 말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 안쪽까지는 말이 달릴 수 있는 길이 아닌데도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리리안이 뒤를 돌았다. 말을 내팽개치다시피 세우고 내리는 카를로이가 보였다.

리리안이 그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카를로이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리리안을 보자마자 그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지는 것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얼굴로 다가와서 카를로이는 말없이 리리안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렇게 리리안을 피하더니 그것이 무색하게도 단번에 틈을 좁혔다.

“너 진짜…….”

그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그 숨결이 귀를 자극했다. 그 목소리에 그가 얼마나 빨리 달려온 건지 짐작이 갔다.

“난 네가, 그 자리에 없어서. 너한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거친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내가 개새끼인 건 아는데, 이런 식으로 괴롭힐 필욘 없잖아.”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리리안을 안고 숨을 몰아쉬던 카를로이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하는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그녀를 품에서 떼어 냈다.

리리안은 다시금 멀어지는 카를로이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야말로 그렇게 돌아다니면 어떡해. 생각이 있기는 한 거야?”

말하다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소리가 높아졌다. 스스로도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었다.

“네가 아니어도 됐잖아. 다른 사람이 와도 되는 거였는데 그 몸으로 굳이, 네가.”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였으면!”

리리안의 말을 끊듯이 카를로이가 폭발하듯 소리쳤다.

“그딴 게 내 맘대로 되는 거였으면 애초에 널 사랑하지도 않았어.”

죽을힘을 다해 막아 두었던 것이 마침내 터지듯, 자신을 이기지 못해, 참다못해 터져 나온 고백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은 카를로이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어트리며 카를로이가 리리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잊어버려. 못 할 말이었어.”

리리안은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은 것 같은 사이에서, 남은 건 회한과 미련 그리고 버거운 책임감이나 죄책감뿐이라 생각했던 둘 사이에서 카를로이는 그 단어를 말했다. 그를 송장과도 다름없게 만드는 것이 미움도, 후회도, 죄책감도, 그 무엇도 아닌 사랑이라고 말했다.

“뭐가 마음대로 안 돼.”

리리안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게 뭐라고 안 돼. 예전엔 잘만 부정했으면서, 몇 번이고 부정했으면서 지금은 왜 안 돼!”

이제 와 그것을 입에 담는 그가 미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든가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안타까워 손도 댈 수 없었고, 또 안아 주고도 싶었다. 미친 거다.

“왜 넌 나아지지를 못해. 네 탓이 아니라고까지 말했잖아! 내가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 말을 했는데. 근데도 넌 계속, 계속.”

목이 막혔다. 그가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면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되면 물먹은 듯 무겁기만 한 마음도, 마음에 켜켜이 쌓인 거친 모래 같은 미련도 다 쓸려 나가리라 생각했다. 더는 카를로이 때문에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되리라고.

하지만 카를로이가 내내 막아 오던 것을 터트린 순간, 리리안도 사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한 번도 내 맘대로 된 적이 없었어. 너에 대해서는.”

카를로이가 무언가를 참아 내듯 이를 악물었다. 리리안을 보지도 않고 카를로이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빨리 떠나. 내가 널 볼 수도 없게.”

하얗게 질려 가는 카를로이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리리안은 그의 등을 살폈다. 상처가 벌어졌는지 옷에 피가 흥건했다.

“너…….”

분노로 몸이 떨렸다.

“떠나면 뭘 어떡할 건데? 이따위로 굴다가 죽어 버릴 거야?”

“약속 지키겠다고 했잖아.”

“그것 말곤 살 이유가 없어? 그래서 이렇게 시체처럼, 이렇게!”

리리안이 비명을 지르듯 화를 내며 그의 가슴을 쳤다. 카를로이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화를 내고, 울고, 소리를 지르는 이 모든 과정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되면서도 또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나쁜 새끼의 상처를 어서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냥 차라리 그 상처가 터지고 터져서 여기서 둘 다 죽어 버리든가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들었다.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염치도 없게 널 붙잡기라도 해? 이왕 미친 새끼인 거 뻔뻔하게 네 발목 붙들어 놓을까? 도망도 못 가게, 그렇게 내 옆에서, 나처럼 이따위 꼴로 살라고?”

카를로이가 리리안의 손목을 붙잡고 미친 사람처럼 격하게 말을 내뱉었다.

“널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드는지는 알아?”

위험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쏟아 내는 카를로이는 지나치게 격렬하고, 그와 닿은 손목은 불순하게 느껴질 정도로 뜨겁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네 발밑에 개처럼 기면서 매달리고 싶어. 제발 옆에 있어 달라고. 아니면 제발 죽게라도 해 달라고. 널 다시 만난 이후로는 수백 번씩!”

카를로이가 토해 내는 소리를 리리안은 넋을 놓고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미안해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다 미치면 널 붙잡아서 옆에 묶어 둘 것 같아서 소름이 끼칠 정도야.”

카를로이는 자신과 함께이고 싶어 했다. 미안해서가 아니라, 죄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러고 싶어서.

“그런데, 내가 그러면 안 되잖아. 내가 너한테 한 개짓거리들도 매일 고스란히 생각나는데. 내가, 빌어먹을.”

그가 쉴 새 없이 내뱉는 욕도 마치 감정을 뭉쳐 만든 듯 질척했다. 그 모든 말들이 리리안의 마음에 뗄 수도 없게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나조차도 이렇게 기억이 생생한데, 그럼 너는. 내 옆에서 죽으라는 소리밖에 안 되잖아, 그게.”

아. 리리안이 막힌 신음을 내뱉었다. 카를로이는 그녀가 마음에 그를 품도록 했고, 이리저리 흔들리게 한다. 그러므로, 너무 당연하게도 딱 그만큼 카를로이가 미워졌다.

그 순간 그녀는 비로소 이해했다. 나는 왜 그를 용서하려고, 그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가. 왜 이토록 온 힘을 다 쓰면서.

<널 가장 미워한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조차도, 널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어.>

<널 싫어한다고 믿던 순간에도…… 네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미워하는 순간조차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카를로이의 말을 그 순간에서야 완전하게 이해했다. 그보다 더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정도로.

카를로이가 잡고 있던 리리안의 손을 놓았다.

“그러니까 제발, 지금 당장 떠나. 내 눈에 닿지도 않는 곳으로.”

그 마음이 얼마나 지옥이었을지도, 끔찍한지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를 미워하는 것은 지독하게 힘든 일이므로. 그건 리리안을,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봐. 난 널 울리기만 하잖아. 넌 내 옆에 있으면 항상, 그렇게.”

카를로이는 다 무너져 가는 얼굴로 리리안의 눈물을 닦았다. 리리안은 제 얼굴에 떨리듯 닿는 손을 그대로 잡아채 끌었다.

“일단 들어가. 치료부터 하게.”

카를로이는 금세 바보 같은 얼굴이 되어 리리안의 손에 질질 끌려왔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치료사 부르면 돼. 네가 신경 쓸 게…….”

“내가 우는 게 그렇게 싫으면 조용히 해.”

카를로이는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침실에 도착해 침대에 걸터앉을 때까지도 그는 복잡한 얼굴이었지만 입만큼은 열지 않았다.

“등 걷어 봐.”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어차피 다친 거 아는데.”

카를로이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상의를 천천히 벗었다. 훤히 드러나는 맨몸에 설핏 열이 올랐지만 등 뒤의 흉터를 보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곤 대신 마음이 차가워졌다. 벌어져서 피가 고이다 못해 굳은 상처 위엔 흉터 하나가 있었다. 리리안도 아는 흉터가.

“……약은 어디 있어.”

시종들이 몇 시간마다 발라 주었을 테니 근처 어딘가에 있을 거였다.

“그냥 치료사를 부르는 게 낫겠어.”

“부를 거야. 약이 어딨는지나 말해.”

카를로이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리리안은 한숨을 쉬며 침실에 있는 서랍을 맘대로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침대 옆 장식장의 맨 밑 서랍을 열려고 하자 갑자기 카를로이의 손이 닿았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어느새 일어선 카를로이가 뒤에 와 있었다. 등에 그의 맨가슴이 닿는 게 느껴져 리리안은 서랍을 열려던 손을 잠시 멈췄다. 제 손을 감싸는 카를로이의 손에 힘이 실리자 리리안은 그대로 그냥 서랍을 열어 버렸다.

“……이래서 막은 거야? 내가 이거 못 보게 하려고?”

서랍 안에 약병이 가득했다. 카를로이가 내쉬는 한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알아서 좋을 것도 없잖아. 네가 신경 쓰는 거 싫어.”

카를로이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쓸었다.

“넌 쓸데없이 착해서 나 같은 새끼가 이러고 사는 것도 걱정하잖아. 별것도 아닌데도.”

카를로이는 리리안이 착해서 그를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살면서 한 번도 누구에게 착하단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멍청이. 리리안이 욕은 속으로 삼키고 서랍에서 연고로 보이는 약을 꺼내 들었다.

“등 대봐.”

카를로이는 다 포기했다는 얼굴로 등을 내주었다. 리리안이 천천히 약을 바르는 것이 느껴졌다. 등의 고통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살을 쓰는 리리안의 손길, 바르다가 종종 멈추고 가까스로 다시 움직이는 그녀의 손, 떨리는 손가락…….

순간 리리안의 그 온기를, 머뭇거림을, 떨림을, 그러니까 그녀의 그 복잡한 동정심을 이용하고 싶다는 비열한 생각이 카를로이를 괴롭혔다. 그러곤 이내 익숙한 자기혐오가.

다 바른 건지 리리안이 연고를 옆에 놔두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툭. 그의 등에 닿는 그녀의 머리가 느껴져서 카를로이가 숨을 잠시 멈췄다.

“칼…….”

옅은 숨이 살에 닿았다. 카를로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 목소리 하나가 그의 심장을 만 갈래로 가를 수 있는 건지.

“델루아 공작이 그랬어. 내가 널 미치게 만들 거라고……. 나 때문에 결국 네가 미쳐 버릴 거라고.”

개새끼가 개 같은 소리도 참 종류별로 했다 싶었다. 카를로이는 죄 없는 이만 악물었다. 떨리는 손이 그의 허리에 닿아서 숨쉬기도 버거웠다.

“너 때문이 아니야.”

“그 말대로 되게 놔두지 마. 그 인간의 어떤 말도,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아야…… 완전히 사라질 테니까.”

기어코 등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카를로이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참 뒤에야 그의 허리에만 머무르는 두 손을 잡아 와 감싸 안았다. 이렇게 쉽게 닿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제, 떠날 거야.”

리리안은 대답이 없었다. 카를로이는 점점 무서워졌다.

떠난다고 하면, 이제 자신이 과연, 과연 이 두 손을 놓을 수가 있을까. 이미 이렇게 닿았는데, 그걸 그대로 놓아줄 수가 있나.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그녀를 놓아주려고 했다니, 계속 떠나라고 했다니 미친 소리였다.

“리리안…….”

“응.”

“내가 너한테 개새끼인 거 아는데.”

“그런 거 아니야.”

“아니라고……?”

“모르겠어……. 맞는 것 같기도 해.”

“뭘 해도 어차피 나쁜 새끼라면, 나 좀…… 책임져 주라.”

그는 마치 빌듯이 그녀의 손에 입술을 쓸었다.

“안 되겠어. 더는. 안 되겠어. 못 놓겠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삶까지 다 네가 가져가 주면 안 될까. 전부 다.”

리리안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 어느 것도, 그 무엇도. 의미도 없이 꾸역꾸역 살아 내느니, 나쁜놈으로 사는 게 나았다.

한동안 리리안은 답이 없었다. 정적이 흐르는 모든 순간 동안 카를로이의 가슴은 끝도 없이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내가 가져.”

한참 뒤에 나온 리리안의 대답은 틀린 말이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줄 거라곤 이렇게 낡고 다 찢어진 제 삶, 목숨뿐…….

“많이도 바라지 않을게……. 옆에만 있게 해 줘.”

이젠 그녀의 동정심에 매달리는 게 부끄럽지도 않았다.

“아프지 않게 할게. 울리지 않도록…… 내가 뭘 어떻게든.”

“알았어.”

그렇게 바랐던 대답이면서도 막상 듣게 되자 믿기가 힘들었다. 카를로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느라 리리안의 손에 매달리는 것도 그만두고 몸을 굳혔다.

“알았어.”

리리안은 믿을 수 없는 그 대답을 한 번 더 해 주기까지 했다. 자비롭게도.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숨결이 그의 맨살을 간지럽혔다. 리리안의 손을 붙잡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카를로이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리리안이 가만히 카를로이를 올려다보다 이내 시선을 내렸다.

“네 생각을 하는 것도 지쳤어. 차라리 네가 계속 눈에 보이면 생각이라도 덜하겠지.”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혼잣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하나는 알았다. 그가 남아 달라고 매달린 이유와, 그녀가 남기로 결정한 이유가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이유뿐만 아니라 감정도 같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에 무서움과 불안함을 느끼는 동시에 뻔뻔한 안도감도 느껴졌다.

그는 굶주린 짐승처럼 그보다 훨씬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문지르며 매달렸다.

“어쩔 수가 없어. 난 너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겠으니까. 알고 싶은 것도 없어.”

“너는 진짜…….”

리리안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은 넓어. 나도 몰랐는데……. 너도 그런 걸 보면, 그걸 알게 되면.”

카를로이가 고개를 들었다.

“난 그걸 모르지 않아. 뭘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야.”

리리안을 응시하는 눈빛이 짙었다.

“가장 화려한 곳도, 아름다운 곳도, 무엇을 봐도, 어디를 가도 의미가 없어.”

리리안이 델루아에서 거의 모든 생애를 보낸 것과 달리 카를로이는 황족이었기 때문에 경험의 폭이 넓었다.

“의미가 없어. 정말로.”

“내가 널 구한 거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 아니야……. 누구나 그렇게 했을 거야.”

카를로이의 입에서 맥 빠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 리리안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말없이 다시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얹었다. 어쩐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함부로 닿는데도, 리리안이 그걸 거부하지 않는다는 게.

“……너 얼굴이 뜨거워. 열이 나는 것 같아.”

그의 이마에 닿는 리리안의 손길이 좋아서 그는 눈을 감았다.

“아프지도 않은데 무슨 열이 나. 너무 좋아서 그런 거겠지.”

리리안이 말을 잃은 듯 잠시 조용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자. 몸을 그렇게 굴리니까 열이 나지.”

“싫어.”

카를로이가 큰 몸을 이용해 그녀를 칭칭 감아 왔다. 틈 하나 없이. 리리안의 말은 그의 맨살에 묻혀 뭉그러졌다.

“잠 같은 거 안 자도 돼.”

“나 숨 막혀…….”

그제야 조그마한 틈이 생겼다. 그의 온몸이 뜨거워서 리리안의 얼굴에도 열이 오를 정도였다.

“너 자고 있는 동안 도망 안 가. 그러니까 좀 자.”

그 말에 카를로이가 잠시 몸을 풀고 품 안에 있는 리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몸에 긴장이 잔뜩 들어갔다. 맞닿은 몸으로 그것을 느낀 듯 리리안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난 너랑 한 약속 지키지 않은 적 없어.”

비난의 의도는 전혀 없다는 듯 평이한 말투였지만, 그 말을 듣고도 카를로이가 리리안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누워서도 가만히 리리안만 쳐다봤다.

“다친 곳 진짜 없어?”

“제발 너부터 걱정을 해. 난 아무 일 없었으니까.”

그 말을 듣고서야 카를로이의 몸의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얼마간 리리안을 쳐다보고 있었을까. 그의 의식이 흐려질 때 즈음에 리리안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흘러 들어왔다.

“있잖아. 내가 널 배신한 줄 알았을 때……. 그때 무슨 생각을 했어?”

감기는 눈에 리리안의 표정은 흐리게 보였다. 카를로이가 잠결에 중얼거렸다.

“속아 주고 싶다고…….”

눈이 감겼다.

“속을 수 있게 조그만 핑계라도 하나만……. 딱 하나만이라도 생기길 바랐어.”

아주 오랜만에 잠이 그에게 찾아왔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 * *

마하의 치료사는 잠이 든 카를로이의 등을 보고 치료를 해 주더니 혀를 찼다. 마하어로 중얼거리는 말을 리리안이 이해하지 못하자 밀레닌이 통역해 주었다.

“몸이 쓰레기래.”

치료사가 뭐라고 덧붙였다. 감탄사가 섞여 있었다. 리리안은 쓰레기 같은 몸을 보며 감탄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밀레닌이 그 의문을 풀어 주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걸어 다녔냐고 크로이센의 치료 기술이 뛰어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발전했는지 몰랐다고…… 놀랍다네.”

마하의 치료사는 친절하게도 카를로이가 가지고 있던 약병들이 무엇에 쓰이는 건지 알려 주더니 몇 개는 챙기기까지 했다. 연구를 하고 싶다나.

“안 나갈 건가?”

밀레닌이 카를로이의 침실을 나가다 말고 리리안에게 물었다.

“조금만 있다가…….”

“흐응.”

이상한 감탄사며 리리안을 바라보는 표정이며 얄밉기 짝이 없었다. 고맙게도 밀레닌은 그 이상 말을 얹진 않고 곱게 나가 주었다. 나가기 전에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또 충고를 하긴 했지만.

리리안은 침대의 가에 앉아서 잠든 카를로이를 바라보았다. 자면서 내내 식은땀을 흘리더니 치료사가 손봐 준 덕분에 지금은 숨소리가 꽤 괜찮아졌다.

카를로이에게 미친놈이라고 욕할 자격도 없었다. 기껏 그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다시 옆에 있기로 마음먹은 자신을 생각하면.

딱히 충동적인 결심은 아니었다. 그의 등에 약을 발라 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넓은 등이, 어떻게 이토록이나 외로워 보이고, 작아 보일 수 있는 걸까. 자신도 모르게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떨리는 손은 그의 허리께만 맴돌았다.

그 순간 리리안은 깨달았다. 그의 이 뒷모습이 평생 그녀를 따라다닐 것임을. 심지어 그 이유가 책임감 따위가 아니라는 것도 이젠 어렴풋이 알았다.

“……너도, 나도 이제는 괜찮아질 시간이야.”

리리안은 카를로이의 얼굴을 쓸며 속삭였다.

“인생의 고통은 이 정도면 됐어. 기억은 기억으로 덮으면 돼.”

리리안은 오늘 마하에서 기를 쓰고 두 발로 걷던 아셀을 떠올렸다.

살아야 할 이유는 리리안의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았다. 과거가 붙잡지 않는 미래를 가져 보고 싶었으니까. 델루아 공작, 그 개자식이 없었더라면 쉽게 이뤄질 수 있었던 미래를 한 번쯤은 가져 볼 자격이 있었다.

이미 그 미친 새끼 때문에 엄마를 잃었다. 왜 또 자신이 무엇을 잃어야 하나. 그만 돌고, 그만 엇갈리고, 그만 마음을 속이고, 그만 아프고…….

“루…….”

카를로이가 잠결에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를로이는 꽤 오랫동안 그녀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잠결에는 언제나 이렇게 불렀을까.

“힘들어지면 도망가 버리지, 뭐.”

초췌해진 카를로이의 얼굴을 보다 리리안은 가볍게 그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잠이 깊게 든 건지 그는 반응이 없었다. 눈시울이 조금 시큰해졌지만, 울지는 않았다. 죽을 날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이 울었으니까.

* * *

눈을 뜨고 나서 잠시 기억을 더듬던 카를로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리리안.”

아침의 햇빛이 가득한 침실 어느 곳에서도 그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젯밤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카를로이는 창백해진 얼굴로 침실을 나왔다. 옷을 주워 입을 정신도 없었다. 미친놈처럼 리리안의 이름을 부르며 복도를 걷는데 모서리를 돌자 거짓말처럼 리리안이 나타났다.

“세상에, 카를로이. 옷을 좀 입고 다닐 순 없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리리안 혼자는 아니었지만. 밀레닌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카를로이는 밀레닌을 무시하고 리리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리리안은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네가 생각을 바꾸고 가 버린 줄 알았어…….”

카를로이가 리리안을 안고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데 너는.”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그게 맞으니까.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내 옆에 남는다고 할 리가 없잖아.”

“네 맘대로 미친 사람 만들지 마…….”

리리안이 그를 힘겹게 떼어 냈다. 카를로이를 부끄러워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누가 봐도 미친 건 네 쪽이야, 카를로이.”

밀레닌이 얄밉게 끼어들었다. 리리안이 말리듯 가볍게 밀레닌의 팔을 잡고 카를로이에게 말했다.

“밀레닌이랑 산책 다녀온 거야.”

“마하엔 볼 게 없는데 무슨 산책을 갔어.”

“재밌었는걸. 밀레닌은 정말 신기한 마법을 많이 아는 것 같아.”

리리안의 입에서 나온 재미있다는 말에 카를로이는 대꾸할 말을 잊었다. 그가 줘 본 적 없는 것을 하필이면 마하가, 하필이면 밀레닌 노카가……. 자괴감이 느껴졌다.

밀레닌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카를로이. 너의 황후께선 즐거워하셨다고. 그나저나 낯이 뜨거워서 자리를 비켜 줘야겠네.”

“그런 거 아니에요, 밀레닌……. 있어도 괜찮은데.”

밀레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대쪽 복도로 사라졌다.

“들어가서 옷부터 좀 입어야겠다.”

리리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앞장서는 것을 카를로이가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뒤따라갔다.

“리리안.”

“응.”

“그런데 나 너 안아도 돼?”

“……지금 묻기엔 좀 늦지 않았어?”

“생각해 보니까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그런데 자제가 안 돼. 정신 차려 보면 미친놈처럼 널 안고 있는데. 뺨이라도 때려.”

“조용히 좀 하고 들어가…….”

리리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곤 먼저 카를로이의 침실로 들어갔다. 카를로이는 어제 이후로 마치 고삐 풀린 말이 된 것 같았다. 스스로 고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달리는 그런 말 같은……. 여하간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미친놈 같았다.

막상 침실에 들어오자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눈치만 살살 살폈다. 리리안은 그 모습을 못 본 척 물었다.

“언제 돌아갈 거야?”

“어?”

“크로이센으로 언제 돌아갈 건가 궁금해서.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어.”

그제야 카를로이는 리리안이 자신 옆에 있기로 결정했단 사실을 실감했다.

“내일 당장 떠날 수 있게 할게.”

“당장 배를 타기엔 네 상태가…….”

“내일이면 다 나을 수 있어.”

카를로이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그렇게 할 것 같았다. 리리안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할 수 있다면 나는 라 소르티오로 가고 싶어. 그곳이 좋아.”

리리안의 입에서 나오는 ‘좋다’라는 말에 카를로이는 괜히 가슴이 아팠다. 나쁜 말도 아닌데 그 어떤 말보다 이상하게 그를 아프게 했다.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리리안은 카를로이를 바라보다 덧붙였다.

“너도 오고 싶을 땐 와도 돼.”

카를로이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리리안을 쳐다봤다. 약간 넋이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너도 한 번쯤은 그곳을 제대로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아름다운 곳이라서.”

“내 생각을 했었어?”

되묻는 꼴이 정말이지 얼빠진 사람 같았다. 뒤 문장은 제대로 들었는지 의문이었다.

“아무튼 빨리 돌아가고 싶다.”

리리안은 어물쩍 답을 피해 버렸다. 리리안만 보고 있던 카를로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

“밀레닌과 이야기 마저 끝내러. 내일 당장 출발해야 하니까.”

카를로이는 순식간에 옷을 챙겨 입더니 침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리리안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 바보.

침실 가득 들어오는 마하의 쨍한 햇살을 느끼며 리리안은 생각했다. 싫어하는 것도 싫다는 아셀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리리안도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으니.

* * *

아침에 나간 카를로이는 저녁 시간이 다 될 때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리리안은 그동안 마하 거처를 정리하고 메리앤과 제인에게 라 소르티오로 가게 되었음을 알렸다. 뭐라도 한마디 할 것 같았던 메리앤은 생각보다 태평했다.

“뭐든지 폐하 맘대로 하세요. 폐하가 원하시는 거면 된 거죠.”

그 말에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메리앤 옆에서 무언가를 또 먹고 있는 아셀은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었다. 괴물 같은 회복력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다 죽을 것처럼 굴더니 반나절 누워 있었다고 다시 원상태로, 아니, 훨씬 더 좋은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넌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는 거야?”

아셀이 저렇게 바보처럼 웃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순한 인상이 더욱 아이 같아졌다.

“폐하가 같이 돌아가잖아요.”

정작 아셀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한 말인데, 리리안은 가슴 아래 어딘가에서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돌아’간다는 말이 간지러웠다. 마치 리리안에게 꼭 돌아갈 집이, 위치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를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불현듯 드니스가 보고 싶어졌다. 언제나, 항상 보고 싶지만, 오늘따라 더욱더. 사무치는 그리움에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을 때 침실 문이 열리더니 카를로이가 들어왔다.

그는 침실 안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시선 하나 안 주고 리리안만 쳐다보면서 걸어왔다. 그 모습에 괜히 헛웃음이 날 것 같았다. 허전한 그리움마저 옅어질 정도로 인상적이고, 조금은 웃긴 모습이었다.

“내일 아침 배로 떠날 거야.”

“이야기는 잘 끝났어?”

“나쁘지 않았어.”

카를로이는 테이블에 앉아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아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흘끔 아셀을 바라보았다.

“몸은 좀 어때?”

“폐하보다는 멀쩡해요.”

카를로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잘했어.”

아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감동이라기보다는 건방진 표정에 가까웠다.

“난 이제 무서울 게 없어요.”

“그래, 너 대단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인이 메리앤에게 속삭였다.

“엄마. 우리 왜 궁을 한번 좀 둘러보기로 했잖아요, 혹시 빠진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딸을 쳐다보던 메리앤이 이내 느린 감탄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 맞아. 그랬지.”

“뭐가 그래? 마리나 궁에서 사용한 곳이 몇 개 없는데 볼 게 있어?”

“혹시 모르니까요. 저희가 보고 올 테니까 폐하께서는 그냥 오늘 밤에 푹 쉬세요.”

슬쩍 미소 짓는 모습에서 속내가 읽혔지만 리리안은 애써 모른 척했다. 저 정도로 비켜 주고 싶어 하면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메리앤과 제인이 침실을 나가려다 말고 아셀을 바라보았다.

“안 나와?”

제인이 작게 속삭였지만 아셀은 미동도 없었다. 도대체 자기가 왜 이곳을 나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뚱한 얼굴이었다. 그 당당함에 제인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속삭였다.

“너 이제 돌아가면 마하 음식은 못 먹을 텐데. 좀 챙겨 가야지 않겠어?”

그 말에 아셀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기르는 동물을 부르는 듯한 제인의 손짓을 아셀이 졸래졸래 따라가더니 이내 침실엔 리리안과 카를로이 둘만 남게 되었다.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어.”

리리안이 침대를 가리키며 고갯짓을 했지만 카를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 나아서 괜찮아.”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랬잖아.”

리리안의 표정을 슬쩍 살핀 카를로이가 잠자코 침대에 기대듯 누웠다. 리리안의 침대에 누우면 침대 가에 놓인 그림이 보였다.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카를로이도 알 수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카를로이의 시선과 표정을 본 리리안은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라 소르티오에서 배웠어. 솔리스 백작 부인이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줬었거든.”

“……잘 그렸다. 그림을 잘 그리는지는 몰랐어.”

“나도 몰랐으니까. 악기도 좀 배우고, 마하어도 배우고 했는데 그림만큼 되지는 않더라.”

마하에서 그린 그림들을 챙겨 놓고 숨을 좀 돌리고 있는 리리안의 손목에 무언가가 닿았다. 카를로이가 아주 약하게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었다.

말없이 보내오는 눈빛에 졌다는 듯 리리안은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람을 눈으로 칭칭 붙잡을 땐 언제고 카를로이는 말없이 그녀의 손목만 문지르고 있었다.

“넌 마하어도 잘하더라.”

“나야 어릴 때 배웠으니까 그렇지. 마하에 자주 가기도 했고.”

“응, 밀레닌이 얘기해 줬어.”

리리안의 대답에 카를로이의 인상이 아주 약하게 찌푸려졌다.

“무슨 이야기?”

“그냥…… 마하에서 너 어땠는지. 재수 없었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 남매가 할 말은 아니야.”

“그런데 너 좀 그래. 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푸르투에서도 그랬어. 말을 못되게 하잖아.”

사실은 밀레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아팠다. 그 이야기 속에서 카를로이도 너무 외롭게 들렸기 때문에.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리리안의 말이 이어질수록 카를로이는 점점 말을 잃었다. 억울함 반 곤란함 반의 표정을 짓던 카를로이는 약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너한테 그런 건 내가 개새끼긴 해. 그런데 다른 사람한테는 뭐……. 개소리만 하는데 착하게 대답해 줄 순 없잖아.”

“……그래애. 그리고 너 치료사 다시 데리고 가.”

마하에 같이 왔던 치료사 에이모스 라이트는 리리안의 마하 잔류 기간이 길어지자 먼저 크로이센으로 떠나 있었다.

“난 이제 솔타의 치료사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이젠 너도 치료 잘 받아.”

카를로이는 말 잘 듣는 애처럼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솔타에서 필요한 게 생기면,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생각보다 별로 없었는데……. 라 소르티오에 있을 건 다 있더라고.”

“내가 너한테 뭘 해 줄 수 있으면 좋겠어.”

“칼 네가 괜찮아지면 돼.”

다정한 대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충분하지 않았다.

“……편지 보내도 돼?”

“응.”

“가끔 찾아가는 건?”

“그래.”

“자주 찾아가는 건?”

“너 원하는 대로 해.”

리리안은 카를로이에게 곧잘 대답해 주었다. 그것도 카를로이가 원하는 답으로만. 말도 잘 걸어 주었다. 이제 리리안은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가 했던 말처럼, 이젠 아픈 것도 거의 괜찮아진 듯했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여전히 불안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이 내려앉고 피가 식는 느낌이 들 정도로. 리리안은 울지도 않았지만, 웃지도 않았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아서 카를로이는 불안했다.

푸르투에서 리리안이 웃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카를로이는 똑똑히 기억했다. 무자비할 정도로 적은 횟수에 자신이 갈증 난 미친놈처럼 얼마나 헥헥댔는지도.

“라 소르티오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말해 줘.”

카를로이의 부탁에 리리안은 친절하게도 말을 시작했고, 그가 서툴게 그녀의 손에 키스하는 것도 피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리리안이 영원히 웃지 않을까 봐 카를로이는 무서웠다.

* * *

동이 트자마자 떠날 준비를 했다. 눈을 떠 보니 리리안은 카를로이의 가슴에 기대듯 누워 있었다. 대화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카를로이는 불편한 자세로 침대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덩치도 큰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정말이지 바보처럼 보였다.

리리안은 한참이나 그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그를 깨웠다. 잠에서 깬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리리안을 쳐다봤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아 보여서 리리안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그래?”

리리안의 질문에 카를로이가 긴 숨을 내쉬었다.

“……꿈이 아니구나.”

안도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눈을 뜰 때마다 혹시나 꿈을 꾼 걸까 봐……. 네가 보이는 게, 옆에 있는 게.”

리리안은 말문이 막혀서 그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

그 말에 카를로이가 실없는 웃음을 슬쩍 흘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 미소를 보던 리리안은 생각했다. 정말 잘생긴 얼굴이긴 했다. 지나치게.

선착장에는 키아나뿐만 아니라 밀레닌과 블레이즈까지 마중을 나왔다. 키아나가 리리안을 가볍게 안고 속삭였다.

“감사해요, 폐하.”

카를로이가 밀레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키아나와 클라이드는 1년의 반은 크로이센에서, 반은 마하에서 지내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내가 한 게 아닌걸.”

“그럼 대신 전해 주세요. 이제 두 분이서 대화 많이 하실 거 아니에요.”

키아나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 책은 선물이에요. 가지세요.”

“아니, 난 괜찮은데…….”

“괜찮아요! 사양하지 마세요.”

몹시 사양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주지 않고 키아나가 뒤로 물러났다.

밀레닌과 블레이즈가 가까이 다가왔다. 카를로이는 그렇게 싫어하는 마하 남매의 출현에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너그러운 상태였다. 밀레닌은 작별 선물이라며 리리안에게 웬 그림을 선물했다. 마히트 전망대에서 본 그 바다가 그려져 있는.

“어?”

블레이즈가 그 그림을 보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밀레닌을 쳐다봤다. 그것을 본 리리안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받아도 되는 그림인가요?”

“별거 아냐. 우리 아버지가 그린 것들 중 하나야. 괴팍한 인간이라 취미도 이상했는데, 그림은 나쁘지 않았어.”

괴팍이란 단어에 리리안은 왠지 모르게 밀레닌을 쳐다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밀레닌이 그 시선을 느꼈는지 소리를 내서 웃었다.

“무슨 생각 하는진 알겠는데, 난 그 정도론 괴팍하지 않아. 크로이센의 황후님. 특히 당신에겐 꽤 친절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좀 귀찮게 군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또 신경을 써 주기는 했으니까.

“고마워요, 밀레닌.”

진심이 담긴 인사에 밀레닌이 방긋 웃어 보였다. 하기야, 그 우아한 웃음만 보면 그녀와 괴팍이란 단어를 전혀 연결시킬 수 없을 것이다.

“고마우면 또 오든가. 보니까 둘이 다시 합친 것 같던데.”

리리안은 민망한 듯 슬쩍 허공을 바라봤지만 카를로이는 당당하게 받아 냈다. 심지어 입가에 연한 미소까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블레이즈가 턱을 떨어트렸다.

“미친놈. 와, 나 저놈 웃는 걸 처음 봐요. 내가 알던 그놈 맞냐……? 그냥 웃지 마라, 너. 진짜 무섭다.”

블레이즈의 격한 반응에도 카를로이는 모처럼 그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 너그러움이 낯선 블레이즈가 진저리를 쳤다.

“다음에 크로이센에 오면 엔투라룸을 구경시켜 주지.”

밀레닌이 그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게 네 나름의 고마움의 표시인 것 같긴 한데. 그럴 거면 차라리 거래 조건을 좀 바꿔. 세율을 낮춘다든가…….”

“그렇게까지 고마울 건 또 없었으니까.”

언제 너그러웠냐는 듯 다시 칼같이 단호해진 대답에 밀레닌이 혀를 찼다.

카를로이와 리리안이 배 안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게 되자 블레이즈가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저런 게 사랑이라면 난 정말로 하고 싶지가 않아요. 인생 즐겁게 살 수 있는데 저게 무슨 짓이람. 정말 무서운 거네, 사람 하나를 저렇게 만들고.”

블레이즈의 진심 어린 말에 밀레닌은 그저 나직하게 웃기만 했다.

“블레이즈, 네가 뭘 알겠니.”

익숙한 무시에 블레이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영원히 모르고 싶답니다, 폐하.”

“그러니? 난 정말 하고 싶은데, 간만에. 음, 사랑. 좋지.”

밀레닌이 콧노래를 부르며 돌아섰다. 블레이즈가 그 뒤에서 키아나에게 ‘미친 것 같지 않냐’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키아나는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사연 많은 이방인들이 떠난 선착장에 이른 아침의 바닷바람이 맴돌았다.

* * *

리리안이 마하로 올 때 탔던 배보다 훨씬 좋은 배였다. 넓고 화려한 선실에 들어서자 카를로이가 물약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멀미가 심하다며. 마하 약이니까 크로이센에서 쓰던 것보다 훨씬 잘 들 거야.”

메리앤이나 제인에게 들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추측하며 리리안은 약병을 받아 들었다.

“어디서 났어?”

“밀레닌한테 받았어.”

어쩐지 재밌는 연극이라도 보는 것 같은 밀레닌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 얄밉다 했다.

“마시고 좀 누워 있어. 잠이라도 자면 훨씬 괜찮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느라 피곤했던 리리안은 군말 없이 침대로 들어갔다. 솔타에서부터 일찍 자는 습관이 생겨서 그런지 어제 좀 늦게 잤다고 몸이 금방 피로해졌다.

“너도 멀미가 있어?”

카를로이가 덮어 주는 이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리리안이 물어 왔다. 카를로이는 잠시 허공을 쳐다보며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눌렀다. 푸르투에서 그녀에 대한 상반된 감정으로 괴로울 때조차 참기가 힘들었는데, 감정에 거리낄 것이 없는 지금에 와서는 고통스러운 수준이었다.

“……난 없어. 차라리 내가 있으면 좋을 텐데.”

말로는 한참 부족하다고 느껴서 카를로이는 어쩔 수 없이 익숙한 초조감을 또 한 번 견뎠다. 자신이 이런 말을 해야 했고, 이런 행동을 해야 했던 시기가 너무 많이 지나 버려서, 지금은 무엇을 해도 초조했다.

“바다는 보기는 좋은데……. 딱 보는 것까지만 좋다.”

솔직히 카를로이는 바다가 뭐가 좋은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고개는 또 왜 끄덕인담.”

리리안의 말에 카를로이는 자신이 그렇게 속내가 잘 드러나는 사람이었나 하고 잠시 동안 고민했다.

“네가 그렇다고 하니까.”

당당한 대답이었다. 리리안은 이불 안에서 몸을 말고 옆으로 누우며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나는 햇빛이 좋은 것 같아. 마하같이 뜨겁기만 한 건 싫지만. 바다보다는 호수가 좋아. 그림 그리는 것도 신기하고. 악기는 연주는 못하지만 듣는 건 괜찮아.”

카를로이는 마치 공부를 하는 학생처럼 진지한 얼굴로 리리안의 말을 들었다.

“너는 뭘 좋아하고 싫어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리리안의 질문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맞닥트린 사람처럼 변했다.

그는 좋은 것은 잘 몰랐지만,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혈통, 지위, 미모, 재산……. 그는 아름답고 화려하다는 푸르투 궁전에서 살고 가장 좋은 것들로 짜인 옷을 입었으며 귀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허무하도록 아무 감흥이 없었다. 이것들이 간신히 의미가 생겼던 것은 나누고 싶은 사람이 생기고 나서였다. 그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가진 것들에 감사할 수 있었다. 줄 것이 많다는 의미였으니까. 카를로이는 그날부터 리리안을 데려와 이 모든 것을 안길 날을 기다려 왔다.

어린 날의 다짐이 떠오른 순간 그는 신음을 삼켰다. 며칠간 잔잔했던 가슴 통증이 다시 나타났다. 분명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무자비하게 괴롭혔다.

왜 하필 자신이 리리안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나. 왜 이렇게…….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와야 했고, 아니. 돌아온 것은 맞을까? 그냥 막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창백해진 카를로이의 얼굴을 보고 리리안이 깜짝 놀라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야. 괜찮아.”

이를 악물고 있는 꼴이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리리안은 카를로이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를 안았다. 너무 커서 다 들어오지도 않는.

그가 숨을 들이쉬듯 멈추는 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뭐라고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쉽게 나오지 않아서 리리안은 그저 그러고만 있었다. 카를로이의 떨리는 손이 등을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괜찮아.”

리리안이 조용히 속삭였다. 카를로이는 작은 품 안에서 생각했다. 리리안이 괜찮다는 것일까, 자신이 괜찮다는 것일까. 전자든 후자든 그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리리안 단 한 명으로도 지옥에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스러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 리리안 하나로도 너무나도 쉽게 행복해지고, 완전해지고, 염치없게도 웃을 수까지 있었다.

하지만 리리안에게는 자신으로도 충분치 않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온전한 자신으로도 부족할 것만 같은데, 이미 그의 과거가 그를 반쪽도 못 되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려서 무서웠다.

“아프지 않아도 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초조함과 자괴감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이는 자신의 인생에 리리안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을 겪고도 저렇게 말하는 사람…….

모질지를 못해서 결국 그를 넘치도록 품에 안은 리리안을 느끼면서 카를로이는 다시금 다짐했다. 이젠 남은 생을 다 걸고 리리안이 그를 마주치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리리안이 그를 만난 것을 불행이나 불운한 사고로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목 끝까지 차오른 사랑이라는 말이 카를로이의 목에 아프도록 걸려 차마 나오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애써 집어삼켰다.

* * *

마하의 약은 과연 훌륭해서 멀미의 정도와 빈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카를로이는 내내 리리안의 옆에 있었다. 리리안이 누워 있는 침대에 올라오려고 하지도 않고 그녀가 잠들면 다른 선실에서 자겠다는 거짓말이나 해 댔다. 자겠다고 한 사람이 눈을 떠 보면 제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니까.

또 거짓말이냐고 타박을 주면 그는 억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잊어버린 것이라고. 잠이 든지도 몰랐다나. 그럼 자신이 잠들기 전에 가라고 했더니 그건 또 안 된다고 우겼다.

그저께 자다가 악몽을 꾸는 리리안을 보아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비명을 지르며 깨는 리리안을 보던 그 얼굴이란. 그 표정 때문에 리리안은 악몽의 내용조차 모조리 까먹어 버렸더랬다.

그는 리리안의 땀과 눈물을 닦아 주며 하염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미안하다고. 그래서 리리안은 그 말을 금지시켰다.

“그럴 거면 오늘은 그냥 여기 올라와서 자. 어차피 침대도 넓은데.”

카를로이는 못 들을 말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순간적으로 울컥한 리리안이 약간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뭐든지 하겠다더니 내 말은 듣는 것도 하나도 없고……. 뭐든 두 번, 세 번 말해야 듣고. 거짓말만 하고.”

그 말에 카를로이는 금세 벌 받는 사람 같은 얼굴이 되더니 한참 머뭇거리다 침대로 올라왔다.

“너 불편할까 봐 그랬지.”

“네가 그러고 있는 게 더 불편해.”

리리안이 꿈틀거리다 그에게 닿자 카를로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표정이 왜 그래?”

“……착하게 사는 건 힘든 일 같아서. 리리안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도대체 카를로이는 자신의 무엇을 보고 착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개념을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고삐 풀린 멍청이를 리리안은 가만히 쳐다봤다. 그의 표정은 점점 읽기가 힘들어졌다.

“왜 그렇게 쳐다봐. 보지 마.”

그의 말투가 평소보다 조금 퉁명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쩐지 익숙한 말투였다. 동굴에서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릴 때도 이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리리안이 괜히 그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하나도 안 변했어.”

“왜 그래……. 지금 개짓거리 안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그렇게 만지면 어떡해.”

이마를 때린 게 무슨 만지는 거란 말인지. 마치 리리안이 부드러운 손길이라도 건넨 것처럼 말하는 카를로이를 미친놈 보듯 쳐다보던 리리안이 물었다.

“할 게 더 남았어……?”

카를로이가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안는 것까진 괜찮지 않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통에 리리안은 처음엔 그것이 자기에게 구하는 허락이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역시 아니겠지.”

“도대체 혼자서 계속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카를로이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슬쩍 손을 잡아끌었다. 리리안이 눈을 깜빡거리며 그가 이끄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이 잡혀도 별 반응이 없는 리리안을 보며 카를로이가 천천히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그의 눈은 한순간도 리리안의 얼굴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리리안은 영문도 모른 채로 그의 손 키스를 받았다. 그 모습을 보고 카를로이는 그녀가 이제 그를 기르는 개새끼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입술이 닿아도 저렇다니.

그녀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에게 손을 맡기는 것을 보고 카를로이는 긴 숨을 내쉬었다. 얼핏 힘겹게도 들리는 숨결이 키스처럼 가볍게 손에 닿았다.

“안고 자도 돼?”

“응? 그래, 뭐…….”

리리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묻는 사람은 별별 생각을 다하며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물은 것인데, 답하는 사람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그 차이에 긍정의 답에도 약간 머뭇거리게 되었다.

팔 한번 뻗으니 리리안은 손쉽게 품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쉬워서 허탈할 정도로.

이렇게 닿는 것만으로도 눈시울이 시큰해지는데, 리리안은 어떻게 이토록이나 덤덤할 수 있나 생각할 즈음에 밑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하다.”

그 목소리에 카를로이는 그만 그녀를 더 꽉 안아 버렸다. 리리안이 가슴을 몇 번 치는 통에 금방 다시 힘을 풀기는 했지만.

리리안은 무의식적으로 품을 파고들었다. 단단한 몸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안아도 되냐고 카를로이가 물었을 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할 것도 다 했고, 볼 것도 다 본 사이……. 안는 게 뭐 큰일일까 하는 생각이기도 했고.

하지만 달랐다. 전혀 달랐다. 푸르투에서는 그와 아무리 거리가 좁아져도, 거짓이 주는 틈이 있었다. 모든 것을 드러낼 수가 없는 상황은 그와 살을 섞어도 불안감에 피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게 했다. 불안해서 더 서로에게 붙고, 서로를 얽매어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답답하지 않았다. 따뜻함만이 있었다. 몸의 긴장이 풀릴 정도로.

“난 네 것이니까, 내 모든 게…….”

카를로이의 목소리는 낮아서 마치 자장가처럼 들렸다.

“많이 담으려고 노력할게. 좋은 것만. 네가 전부, 그대로 가질 수 있도록…….”

쏟아지는 잠에도 리리안은 중얼거렸다.

“너나 잘 챙겨……. 널 위해서 해야지.”

갑자기 닥치는 졸음에 말끝이 늘어졌다. 그의 입술이 이마에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동굴에서의 그날처럼.

“날 위해서 그러는 거야.”

카를로이의 목소리는 얄밉도록 듣기가 좋았다. 이상하게도 이제는 배가 흔들리는 것도 무섭지 않았다.

* * *

곧 솔타에 도착하는지 배가 소란스러웠다. 그 어수선함이 평화로웠던 선실 안까지 흘러들어 와 리리안은 눈을 떴다. 아주 약하게 몸을 꿈틀거렸을 뿐인데 카를로이는 그녀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일어나지 마.”

“아니…….”

카를로이는 미묘하게 막무가내처럼 변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나 상식적인 말투로,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늘어놓는다.

“죽을 때까지 안고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아.”

어딘가 고삐가 풀린 듯한 지금의 카를로이라면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리리안은 반박할 생각조차 들지도 않았다.

“절대 너보다 빨리 죽진 않아야겠다. 네가 죽고 나서 하루 뒤…… 아니, 한 시간 뒤에…….”

“멋대로 벌써 죽이지 마…….”

“내가 먼저 죽으면 널 안고 갈 수가 없잖아.”

늦게 죽으면 그럼 자신의 시체라도 안고 죽겠단 뜻일까. 소름이 돋거나 미친놈이라고 욕이라도 해 줘야 하는데 딱히 그럴 기분이 들지도 않아서 리리안은 자신도 카를로이에게 옮은 게 아닐까 고민했다. 어쩐지 몸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리리안.”

“응.”

“내가 싫으면 화를 내도 돼. 욕을 해도 되고. 때려도 돼. 언제든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루 늦게 죽니 마니 하다가 뜬금없이 또 무슨 소리인지.

“갑자기?”

“그냥, 갑자기 내가 미워지거나 싫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 네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한 거니까.”

리리안은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별로 그렇진 않아.”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이미 다 내려놓았다. 가끔, 아주 가끔 옛 기억이 가슴 언저리를 쿡쿡 찔러대긴 했지만. 하지만 근래 보이는 카를로이의 모습이 워낙 충격적이라 그 따끔함마저도 잊히게 했다.

“……그래.”

카를로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렇게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리리안은 그가 아직도 종종 아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이젠 정말로 내릴 준비를 할 때가 되었는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놓아주긴 했지만, 그게 무색하게도 다른 방식으로 달라붙었다.

리리안이 옷 입는 걸 도와주면서 카를로이는 은근슬쩍 그녀의 팔에 매달리거나 허리를 감거나 뒤에서 감싸 안았다. 이제 막 알에서 깬 짐승이라도 기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눈치를 보거나 머뭇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닿아 왔다. 놀라운 기술이었다.

“사람들 보는 데서는 좀……. 좀 자제해야 하지 않아?”

선실 밖에 나가서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카를로이에게 붉어진 얼굴의 리리안이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뻔뻔하게 두 글자만 딱 말하는 모습에 리리안은 그만 할 말을 잃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내가 네 이마에서부터 발끝까지 키스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널 안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널…….”

리리안이 황급히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마치 사람들만 없으면, 아니, 있어도 그런 것들을 하고 싶다는 소리로 들려서 귀까지 뜨거워졌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 그만 말해도 돼.”

발끝으로 힘겹게 서서 그의 미친 소리를 막은 리리안의 허리를 카를로이가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입을 막고 있는 리리안의 손을 제 손으로 덮듯 감싸곤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왜 이래 정말…….”

“좀 있으면 떨어져야 하는데…….”

카를로이의 눈빛이 하고 있는 불순한 짓과는 다르게 너무나 슬퍼 보여서 리리안은 또 지고 말았다.

“또 볼 수 있잖아. 많이 멀지도 않고.”

솔타의 항구에 내려선 카를로이는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보였다. 웃고는 있었는데 눈빛이 그랬다.

실제로 그의 기분도 그랬다. 리리안과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도 컸지만, 그녀를 솔타로 어서 보내 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모처럼 리리안이 사랑하게 된 곳이니까. 그녀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곳이니까.

리리안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솔타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아주 조금만이라도 그를 좋아해 주기를 바랐다.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동정으로도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여전히 허기졌다.

라 소르티오에서 짓는 웃음의 아주 작은 한 조각만 그에게 내어 줘도, 그는 평생 그 조각을 핥아 먹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푸르투에서 리리안이 보인 작은 웃음 하나를 목을 매 꿈에서까지 그녀의 웃음을 되뇌고 또 되뇐 것처럼.

“몸조심하고. 하고 싶은 건 마음대로 다 하고.”

“몸은 네가 조심해야지, 칼. 보면 확인할 거야. 정말 괜찮아졌는지.”

카를로이는 마지막으로 리리안을 한 번 안고 놓아주었다. 리리안은 한참을 머뭇거리며 카를로이를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 것을 반복하더니, 자신의 짐에서 책 한 권을 빼내 들었다.

“이거…….”

카를로이가 어리둥절해하며 그녀가 건네는 책을 받아 들었다. 무슨 책이 표지에 제목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이게 뭐야?”

“그냥……. 심심할 때나 힘들 때 읽어 봐.”

이유는 모르겠지만, 리리안은 민망해하는 듯했다.

“생각 없애는 데 도움이 돼.”

카를로이가 하는 생각이라고는 어차피 리리안 생각뿐이었고, 그는 추호도 그 생각을 없앨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리리안이 그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곧 보러 갈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리안을 보던 카를로이는 결국 또 한 번 그녀를 안고 말았다. 그리고 이번엔 마냥 쉽게 놓아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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