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19화 (20/22)

19. 칼, 그리고 루 (1)

그날 라 소르티오에서 잠시라도 리리안을 보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후회해야 하는지 카를로이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리리안이 괜찮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어 좋았다. 리리안이 그를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잠깐 보고 온 그 얼굴이 가시처럼 박혀 그를 괴롭혀 댔다. 더 제대로, 더 가까이 보고 싶다는 욕심이 그를 사정없이 흔들어 댔다. 이 간극 사이에서 카를로이는 마치 조화처럼, 향기 없이 화려한 리투나의 조화처럼 그렇게 점점 말라 갔다.

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점점 흠잡을 것 없는 사람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의 알맹이는 이미 죽어 없었다.

살아 내야 한다는 강박과 차라리 죽어서 끝내고 싶다는 본능, 그리고 리리안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이성과 보고 싶다는 갈망. 이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 정말 미칠 것 같을 때는 리리안의 미소를 생각했다. 리리안은 이제 괜찮으니까, 자신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왜 리리안을 웃게 하는 게 자신이 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회한은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았지만……. 이런 삶이 끝도 없이 계속되리란 생각을 하면 그저 아득했다.

카를로이는 애써 생각을 지웠다. 그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리리안을 억지로 밀어내고 앞에 있는 알렉시스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새로 땅도 얻었겠다, 정복지 물건을 우리에게 팔아넘기고 싶은 모양인데 굳이 그런 걸 팔아 줄 필욘 없지. 질이 의심되는 건 둘째치고 마하가 너무 조급해 보이잖아.”

“정복 전쟁에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서 마하 심정도 말이 아닐 겁니다. 그럼 아예 받지 않겠단 말씀이십니까?”

“크로이센에는 필요 없는 것들이야. 어차피 이국적인 사치품 아닌가. 마하가 심심한 것 같은데 베르니로 관심을 좀 돌려 주는 게 낫겠어. 자네가 알아서 잘 담판 짓고 오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었는데……. 아무래도 저는 마하에 가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에 카를로이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마하가 피곤하게 계속 자신의 방문을 요청하기에 알렉시스를 대신 보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지.

“가지 못할 이유라도?”

“나이가 많아서 힘듭니다.”

왠지 모르게 자신이 했던 말을 되돌려 받는 기분이었다. 카를로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정말입니다. 먼 마하까지 가기엔 무리입니다. 배까지 타야 하지 않습니까.”

“자네가 아니면 그럼…….”

“폐하가 가셔야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회담 주제가 변동이 좀 있으니 폐하께서 직접 가 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초췌한 카를로이의 얼굴이 더 피곤해 보였다. 카를로이는 마하를 좋아하지 않았다. 잠시 미안함을 느끼던 알렉시스는 이내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카를로이는 세상에 좋아하는 게 딱히 없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차라리 마하에 리리안이 가 있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도 해 보았지만 역시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갈 자격이 없니 뭐니 운운하면 피곤해지기만 했다.

카를로이는 리리안이 지금 솔타 시골에 있는 어느 자작 부인의 사저에 머물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정확히 어딘지는 묻지도 않았다. 적당히 도움만 주다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만 알리라고 했을 뿐이다.

알렉시스는 카를로이가 차라리 모르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면 자신도 모르게 황후를 찾아갈 것 같아 그러는 걸까.

“한 번은 갔다 오십시오.”

왜 자신이 이런 노릇까지 하고 있는지에 대한 약간의 회의감을 느끼며 알렉시스는 고집을 부렸다.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면 이 미친놈이 좀 더 나아지겠지 싶어서였다. 대단한 재결합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치료사가 온갖 약을 카를로이에게 들이붓고 있다고는 하지만, 알렉시스가 봤을 때 약은 그저 카를로이의 몸, 딱 몸 하나만을 움직이게 하는 재료였지,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했다. 약쟁이가 되기나 하지. 약에 취해서 밤에 황후 이름을 부른단 소리를 치료사에게 전해 들어야 한다니.

새 치료사는 나날이 카를로이의 상태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얼마나 사람이 정신적으로 나빠질 수 있는지에 대해, 또 미친 인간이란 그 상태를 얼마나 필사적으로 숨길 수 있는지에 대해 언제나 새롭게 배우고 있었다.

그런 것도 성장이라 할 수 있다면 그래, 나름의 성장일 것이었다. 카를로이를 거치고 나면 그 어떤 환자도 쉬워질 테니까. 알렉시스가 카를로이 모르게 조용히 혀를 찼다.

“……그래. 한 번은 가는 게 낫긴 하겠어. 이번에 가면 한 5년간은 조용히 있겠지.”

마뜩잖단 표정으로 카를로이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을 데리고 가십시오.”

“아셀은 베르니는 가도 마하엔 가지 못해. 공이 데리고 있지.”

온 세상을 천방지축으로 쏘다니는 아셀은 마하만큼은 죽어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끔찍했던 노예 생활을 기억하는 탓이었다.

“어차피 공 말을 잘 따르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아도 아셀을 보면 언제나 국어를 제대로 가르쳐야겠단 생각을 했었는데 요사이 카를로이 덕에 한가해져서 알렉시스는 아셀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글쎄요. 저랑 있느니 마하에 가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알겠습니다.”

알렉시스는 집무실을 나가며 흘끗 뒤를 돌아봤다. 홀로 책상에 앉아 있는 카를로이는 외로워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 아주 어릴 때부터 항상 그는 그런 모습이었다.

문득 멕서스 호숫가에 서서 카를로이의 안부를 묻던 황후가 떠올랐다. 옅은 바람에 그대로 날아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던. 그 모습이 지금 카를로이와 똑 닮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마하에 도착해서 키아나 로덴을 만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바람도 이기지 못할 것 같은 여자가 마하를 견딜 수 있을지 알렉시스는 궁금해졌다.

* * *

리리안은 살면서 배를 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바다를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몰랐다. 자신이 이토록 뱃멀미가 심한지.

바다는 정확히 딱 10분만 아름다웠다. 향도, 세기도 다른 바닷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색에 감탄하고 있던 리리안이 멀미로 고꾸라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숨이 탁 트이는 기분에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드니스를 생각했는데,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이제 목걸이가 없어질까 봐 꽉 붙잡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메리앤의 질문에 리리안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만 참으세요. 이제 정말 거의 다 도착했대요.”

“보통은 멀미 진정 치료를 받으면 괜찮아지는데 폐하께선 유독 심하신 체질인가 봅니다.”

마하까지 같이 따라온 치료사 에이모스 라이트가 민망한 듯 말했다. 리리안은 멀쩡한 가장을 마하까지 데리고 갈 순 없다고 했지만, 그게 알렉시스를 통해 보내온 카를로이의 유일한 부탁이었다.

치료사는 마하로 온 것이 전혀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하에서 연구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나. 그리고 그는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폐하께서 마하에 그리 오래 계실 것 같지도 않다고.

“이젠 폐하가 아니래도.”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리리안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부를 호칭도 딱히 없어서요……. 게다가 아직 정식으로 받아들여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까진 폐하시지요.”

잡음 없이 처리하기 위해서는 시일이 좀 걸릴 것이라고 알렉시스가 말하기는 했다. 라 소르티오로 요양까지 갔지만 몸이 좋아지지 않아 스스로 물러나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앞으로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리리안은 아주 잠시 막막해졌다. 그러나 세찬 파도가 불러일으키는 뱃멀미가 머릿속 고민을 깨끗하게 없애 주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구역질을 하는 리리안의 등을 메리앤이 조용히 두드렸다.

“거의 다 도착했어요! 나와 보세요. 너무 신기해요.”

갑판에 나가 있던 제인이 들어와 약간 흥분한 얼굴로 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나가니? 폐하께선 앉아만 계셔도 이렇게 힘들어하시는데…….”

“괜찮아. 잠깐 정도는 나갈 수 있어. 그리고 정말로 호칭을 어떻게 해야겠어. 마하에 가서도 그렇게 부르면 시선을 끌 수밖에 없어.”

“그런데 폐하께선 외모부터가 시선을……. 너무 전형적인 크로이센이시라. 그러면 아가씨라 부를게요.”

“미혼보다는 기혼인 척하는 게 낫겠지. 그냥 부인이라고 불러 줘.”

리리안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갑판 쪽으로 나갔다. 난간을 붙잡고 선 순간 제인이 무엇 때문에 불러냈는지 알 수 있었다.

마하의 입구라 불리는 항구 도시 키로크가 보였다. 그리고 키로크를 감싸는 바다 위 공중에서 물방울로 만들어진 늑대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늑대와 물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딱 그만큼 신기한 광경이었다.

“대단하죠? 마하의 해상 마법은 들어만 봤지,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에요.”

메리앤이 감탄하듯 속삭였다.

배가 키로크로 가까이 갈수록 물로 만들어진 잔장식들이 보였다. 바닷물 한가운데서 마치 분수처럼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라든가, 솟아오르는 물기둥 같은 것들. 바다의 지배자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듯 마하는 입구부터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강렬한 것이 하나 있었다.

“우욱.”

바다 냄새였다.

“어머, 폐. 아니, 부인. 괜찮으세요?”

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하의 첫인상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문득 드니스도 배를 탔다면 자신처럼 뱃멀미가 심했을까 잠시 궁금해졌다.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궁금증에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괜찮았다.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하나둘 궁금해하다 보면 시간은 가기 마련일 테니까. 그러다 드니스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 한꺼번에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

* * *

아셀은 마하로 가기 전날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마하는 시체가 되기 전까진 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데려가 달라고 떼를 썼다.

“뭐 하러 무리하려는 거야? 마하에서 내가 위험할 일은 없으니까 그냥 여기 있어. 마하 도착하면 네 상태 어떻게 될지 뻔한데, 그 상태로는 나한텐 그렇게 도움 되지도 못해.”

카를로이의 만류에도 아셀은 고집스럽게 고개만 내저었다. 그 작은 머리통에서 대체 무슨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 카를로이는 그만 항복하고 말았다.

마하로 가는 배 안에서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생각했다. 솔타의 그 시골도 가까운 편은 아닌데 자신이 마하에 있게 된다면 리리안과는 정말 꼭 다른 하늘을 지고 사는 것 같겠지. 그렇지 않아도 마하는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데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누워 있으니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아서 카를로이는 갑판으로 나왔다. 세찬 바닷바람이 꼭 정신을 차리라는 듯이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카를로이는 멍하니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 딱 그만큼 파란 바다로 시선을 내렸다. 바다는 투명했지만, 아득하니 깊어서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꼭 자신처럼.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이 떨렸다. 강렬한 바다색은 카를로이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푸른색 말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에도 물이 차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새파란 충동이 들었다.

이대로 빠지고 싶다. 어차피 사는 것도 잠긴 것과 다름없다면 차라리 저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없어지고 싶다. 그게 차라리 숨쉬기가 더 편할 듯했다.

<칼, 죽지 마.>

온 머리와 몸을 지배하던 충동 사이로 갑자기 옅은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그 순간 카를로이는 숨을 들이켜며 난간에 기울다시피 기댔던 몸을 뗐다.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짚고 숨을 몇 번 몰아쉬던 카를로이는 힘이 빠진 듯 난간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았다. 끊임없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카를로이는 머리를 감싸 안았다.

미친 새끼……. 수없이 자신에게 욕을 했다. 방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건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았다. 조금 힘들다고 그냥 다 포기하려고 했다는걸.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권리가 그에게 없다.

울 수도 없어서 카를로이는 그저 몸을 떨다가 욕을 내뱉는 걸 반복했다.

“이럴 줄 알고 따라온 거예요.”

위쪽에서 아셀 특유의 맹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죽는다니까.”

“모르죠, 뭐. 사람이 미치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물론 난 그래 본 적 없지만.”

아셀의 악의 없는 혼잣말을 들으며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떠올렸다.

사람이 제 목숨을 버리고 싶어 할 때는 언제일까. 언젠가 푸르투에서 리리안이 키아나에게 가야 할 독을 망설임 없이 들이켜던 때가 생각났다. 무슨 심정으로 그렇게 했을까.

카를로이는 결국 얼굴을 파묻으며 다시 한번 욕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죽을 수도 없었다.

* * *

키아나는 키로크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배에서 내리는 리리안을 보자마자 무슨 가족이라도 본 양 어찌나 밝게 손을 흔드는지 리리안은 키아나가 자신 말고 기다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어머, 멀미를 심하게 하셨나 보네요.”

말할 힘이 없었던 리리안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바로 수도로 갈까 했는데 키로크도 워낙 유명한 도시라 혹시 폐하께서…….”

리리안이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하자 키아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인, 부인.”

메리앤이 속삭이듯 건네주는 말을 듣고 키아나는 눈치를 챈 듯 느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아, 네에. 혹시나 부인……께서 키로크도 구경하시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니까요. 숙소를 마련해 두긴 했거든요. 어떻게 할까요? 내키지 않으시면 바로 수도로 가면 돼요.”

“키로크를 둘러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리리안의 대답을 듣자마자 키아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차에다 리리안 일행을 실어 숙소로 데려갔다. 적당한 곳일 줄 알았던 리리안의 예상과는 달리 마차에서 내리자 대저택이 보였다.

“이런 곳에서 머무른다고?”

“네, 마하 황제께서 마음대로 쓰라고 하나 주셨어요.”

“이런 대저택을?”

“키로크 말고도 다른 곳에도 몇 개 더 있어요. 폐하께서 3층 전체를 쓰시면 돼요.”

키아나는 전혀 기쁘지 않은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베푸는 걸 즐기는 사람인가 보네.”

“그렇지는 않을걸요. 제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저택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메리앤이 중얼거렸다.

“레이디 로덴은 마하가 더 좋겠는데요? 이런 저택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 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으신다니.”

“그런가요? 시녀장, 아니 메리앤도 한번 마하에 머물러 보세요.”

키아나가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

“앙센 경은?”

“그 사람은 조금 바빠서요. 내일쯤에나 올 거예요. 그리고 앙센이 아니고 이젠 밀로나예요. 폐하께서 새 성과 작위를 주셨으니까요.”

“마하 황제가?”

키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리안을 바라봤다.

“아니요? 물론 마하 작위도 하나 받긴 했지만. 아무튼 전 크로이센의 폐하를 말씀드린 건데……. 마하에 도착한 지 좀 지나고 나서 전갈이 왔었어요. 구 앙센 토지 대부분도 클라이드가 받게 되었어요. 모르세요?”

카를로이가 뭘 했고 뭘 하고 있는지 리리안이 알 리가 없었다. 그저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카를로이의 존재에 리리안은 멍하니 고개만 저었다.

“그러고 보니 폐하가 보내 주시던가요? 같이 오실 줄 알았는데.”

키아나에게 설명해 줘야 할 것이 많다는 걸 깨달은 순간 리리안의 몸에 참았던 피로가 몰려왔다.

“천천히 설명할게.”

리리안은 이곳이 카를로이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란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솔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멀리 떨어진, 너무나 다른 곳이다. 어쩌면 아예 다른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괴로워하며 자신에게 매달려 오던 카를로이의 모습이 떠오른 순간 리리안이 숨을 참았다. 그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꼭 이렇게 자신을 침범하곤 했다. 그때 느끼는 감정의 정도 차이만 있었지, 시도 때도 없는 이 습관은 크로이센을 떠나도 여전했다.

“시장하실 텐데 식당으로 바로 가요. 음식이 준비되어 있어요.”

키아나의 말에 리리안은 카를로이의 생각을 밀어내며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 주방장은 마하 사람이에요. 수도에 있는 제 거처라면 제가 데려온 주방장이 만든 음식을 드실 수 있었을 텐데……. 양해 부탁드려요.”

음식을 먹기 전에 키아나는 그렇게 말했다. 리리안은 의아해졌다. 마하에서 마하 사람이 만든 마하 음식을 먹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한번…… 드셔 보세요. 이곳이 마하에서도 향신료가 특히 센 편이에요.”

별생각 없이 앞에 놓인 소고기 요리를 집어 먹은 리리안은 그만 몇 번 씹지도 못하고 다시 뱉어 버렸다. 이상한 맛이었다. 옆을 보니 치료사인 에이모스 라이트는 무표정으로 씹고 있었고 메리앤과 제인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게 유명한 음식이에요. 여기서는.”

키아나가 덧붙였다. 리리안은 그제야 치료사나 키아나가 시종일관 짓고 있던 의미심장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하는 솔타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는 리리안 일행을 지켜보던 키아나가 속삭였다.

“조금만 참으세요. 수도로 돌아가면 이것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키로크 향신료가 유난히 좀 심해요. 그래도 후식은 그나마 먹을 만해요. 아무튼 이럴 줄 알고 로덴에서 주방장을 데리고 와서 다행이지 뭐예요.”

“후작은?”

“아버지요? 주방장이야 크로이센에서 새로 구하면 되는 것을요. 저는 여기서 크로이센 주방장을 구할 수가 없으니까요.”

키아나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밝은 모습도, 후작의 이야기만 나오면 시큰둥해지는 모습도.

마하가 싫다고 불평하는 것치고는 좀 더 아름다워진 것 같기도 했다. 클라이드가 옆에 있어서 그런 건지 리리안은 궁금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아무런 문제 없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도.

“자네는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

“어머, 제가요? 폐하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훨씬 얼굴이 좋아 보이시는데요.”

“폐하가 아니래도.”

“듣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요. 마하 황제만 모르면 되죠. 하긴 어차피 마하 황제는 폐하 얼굴을 알지도 못하고요.”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이제 정말 폐하 같은 게 아니라니까.”

키아나의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렇게 온 거지.”

“아니, 왜……. 아니,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이제 누릴 것만 남으셨는데!”

저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키아나를 보고 리리안은 그저 희미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럼 황제께서는……?”

키아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리리안은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잘 지낼 거라고 믿어야겠지. 잘 지낼 거야.”

카를로이의 안위를 확신하는 게 아니라 꼭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나 바람처럼 들렸다.

황후 없이 잘 지낼 거라고? 그 황제가?

키아나는 푸르투에 있을 카를로이를 떠올리며 표정을 관리했다. 전혀 잘 지내지 못할 것 같았다. 크로이센의 황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인데.

하지만 키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서 입을 함부로 여는 짓은 이미 너무 많이 저질렀다.

* * *

사흘 정도는 키로크에 머물려고 했었지만, 이틀 만에 리리안은 마하의 수도로 가겠다는 결정을 했다. 먹을 걸 제대로 못 먹는 건 둘째치고 날씨도 견디기 힘들었다.

마하의 태양은 강렬했지만 솔타처럼 기분 좋은 강렬함이 아니었다. 사람 하나를 태워 버리겠다는 각오가 느껴지는 햇빛의 세기와 몸을 후끈하게 뒤덮는 습기에 밖에 오래 있는 것도 힘들었다.

이것저것 신기한 게 많은 것 같긴 한데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마하인들이 어떻게 밖을 돌아다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리리안은 벌써 솔타가 그리워졌다. 드니스도 마하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요. 날씨는 수도에 가도 별 차이가 없어요. 내륙이라 저는 오히려 수도가 더 별로였어요.”

키아나의 말에 메리앤이 마차 안에서 죽어 가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좀 있으면 적응이 될 거예요. 정말 저도 크로이센으로 돌아가고 싶어 죽겠어요.”

“가능성은 있는 일인가?”

“황제 비위를 조금만 더 어떻게 잘 맞추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키아나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클라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나로도 모자라서 너까지 황제 마음에 들어 버렸는데 퍽이나 돌아갈 수 있겠다.”

“아니, 나 좋자고 했어? 마하에서라도 황제 축복받고, 합법적으로 결혼해 보려고 그런 거지. 덕분에 결혼했잖아. 흠, 말하고 보니 나 좋자고 했네.”

“듣는 사람도 있는데 너는…….”

키아나의 말에 무뚝뚝했던 클라이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고 제인까지 웃음을 터트렸다.

키로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클라이드는 리리안 일행이 키로크를 일찍 떠나기로 결정한 탓에 타고 온 마차에 그대로 앉아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예전 푸르투에서의 만찬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저런 사람 같지 않았는데. 키아나 옆에 있어서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라고 리리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유독 리리안을 불편해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어쩔 줄을 몰랐다. 리리안은 그저 황후였던 자신을 어려워하는 것이라 여겼다.

“아무튼 마하 황제가 폐하께도 너무 관심 가질까 봐 그냥 친우가 온다고 말해 놓았어요. 미리 알려 둬야 관심을 덜 가지거든요.”

“마하 황제가 그렇게 특이한 사람인가?”

“못 들어 보셨어요? 정말 변덕도 심하고……. 10년간 국서만 열 명 넘게 갈아 치웠다니까요. 그중 셋은 직접 목을 잘랐어요.”

리리안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마하 황제에 대한 잡다한 소문까지 알기에 그녀는 너무 폐쇄적으로 살아왔다.

“그래도 해상 마법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으니까 자기 멋대로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를 못하죠. 저 바다를 누가 잠재워 주겠어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마법 수준이래요.”

리리안도 바다로 둘러싸인 마하에서 해상 마법에 강한 마하 왕족을 이길 사람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조심해. 황제가 아무리 널 마음에 들어 한대도 흉보는 것까지 봐주진 않을걸.”

“그러니까 여기서 하지. 여기 말고 어디서 흉을 봐.”

“나한테 매일 보잖아.”

“그리고 넌 반응이 매일 똑같잖아.”

클라이드와 키아나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잘 어울렸다. 리리안의 가슴 깊은 곳에 밀어 두었던 아주 오래전의, 저 둘과 비슷한 기억들을 되살릴 만큼.

멍하니 둘을 바라보던 리리안은 고개를 돌려 창밖 너머로 보이는 마하의 이국적인 나무들을 쳐다보았다.

마하에 대해서 아는 건 얼마 없었지만 카를로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조금 있었다. 카를로이는 어릴 적 마하에 여러 번 왔었다고 했다. 아셀도 그때 데려온 것이고, 그중 한 번은 마하의 전쟁에 자진해서 참여하기까지 했었다고.

이런 곳을 카를로이는 좋아했던 걸까. 아니면 푸르투보다는 어디든 낫다는 심정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보고 올 걸 그랬나.

리리안은 조금 후회했다. 그가 멀어질 대로 멀어지고 나자 이제야 다시 볼 수 없음을 실감한다. 카를로이는 워낙 약속을 잘 안 지키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쯤 확인해 보고 와도 좋았을 텐데.

<난 그동안 지킬 게, 지키고 싶은 게 없었는데…….>

<이름 예쁘네. 루가 더 잘 어울리긴 하지만. 비가 생각나는 이름이잖아.>

불현듯 떠오르는 목소리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카를로이에게 대체 무엇인지는 둘째치고 이젠 카를로이는 저에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드니스마저도 이제 자신의 마음에 단단히 자리하는데, 카를로이만큼은 어느 곳에도 머물지 못하고 마음 안에서 부유했다.

어릴 때 느꼈던 설렘은 풋사랑이라 생각했다. 푸르투에서 그에게 흔들린 것도 사랑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때는 기댈 곳이 없었으니까. 그 지옥에서 유일하게 희망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카를로이를 밀어낼 기력도, 이성도 없었으니까. 카를로이만이 자신에게 닿는 온기였다.

어쩌다 자신과 카를로이는 서로 말고는 남는 게 없게 되어 버렸을까……. 그렇게 죽을 듯이 미워하고 원망하다가 매달리고 확인하려 들고.

지금도 그를 완전히 지워 낼 수가 없다. 회한이나 증오 같은 감정인지 그리움과 같은 감정인지 명확히 분간할 수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는 리리안의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았다.

<그 이름으로 나 부르지 마.>

<우리 엄마가 나 부르던 이름 담지 마.>

어쩌면 눈이 계속 시려 오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불러 주는 자신의 이름을 계속 좋아할 수도 있었는데, 남들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카를로이의 목소리를 기분 좋게 떠올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기에. 내 입으로 그걸 그만두라고 말해야 했기에.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어 버려서.

그런데 이 모든 결과에 누구 하나만의 잘못이 없어서 슬펐다.

“폐하……. 괜찮으세요?”

갑자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리리안을 보고 키아나가 놀라서 물었다. 리리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저었다.

클라이드와 키아나가 부러웠다. 굴곡 없이도, 증오 없이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들이.

* * *

수도도 비슷하다는 키아나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전체적으로 키로크와 큰 차이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흥미롭기는 흥미로웠다. 내륙인데도 불구하고 도시 곳곳에 물을 이용한 볼거리가 있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라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키로크보다 훨씬 더 불쾌했다. 도심에서 버젓이 열리는 노예 경매와 노예로 벌이는 잔인한 유흥 따위를 보고 나서는 속까지 안 좋아졌다. 저런 곳에서 굴렀을 아셀이 불쌍해졌다.

마하인들의 목소리는 또 어찌나 크고 거친지 길을 지나갈 때마다 리리안은 깜짝 놀라곤 했다. 음식은 수도도 키로크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똑같이 맛이 이상하고 강해서 대개는 키아나의 저택에서 식사를 했다.

이제는 푸르투가 더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심이었다. 크로이센은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사실 난 엄마가 원했던 건 전부 다 그 나름의 보람이 있을 것 같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고급스러운 침대 위에서 드니스의 편지들을 다시 읽으며 리리안이 말했다.

“엄마가 적어 놓은 것들 중에서 앞으로도 이렇게 별로인 것들도 있겠지.”

세상은 넓었고 싫은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경험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스스로가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알게 되는 건 새롭긴 했다.

“솔직히 말하면 드니스도 여기는 싫어했을 것 같아요. 사흘도 못 있었을 거예요.”

며칠 새 초췌해진 메리앤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약을 리리안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매일 약을 먹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하에서는 아직 악몽을 한 번도 꾸지 않았다. 리리안은 약병을 다 털어 내고 한숨을 쉬었다.

볼 것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는 하는데 전혀 끌리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곳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폐하.”

키아나가 침실 문을 두드리더니 책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저 호칭은 끝까지 계속될 모양이었다.

“드릴 것도 있고 드릴 말씀도 있어서……. 어? 이 그림은 뭐예요? 누구예요?”

침대로 가까이 다가온 키아나가 옆에 놓여 있는 드니스의 그림을 보고 물었다.

“우리 엄마.”

“아. 어쩐지 폐하랑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키아나의 말이 위안이 되었다. 리리안은 델루아 공작 같은 새끼를 닮고 싶진 않았다.

“누가 그린 거예요? 어머, 유화네. 신기하다.”

“내가.”

“폐하가요?”

키아나는 진심으로 놀란 듯 목소리가 커졌다.

“응. 이상한가?”

“아니요, 그림에 취미가 있으신지 몰랐어요. 심지어 유화라니. 크로이센에서는 화가들도 잘 그리지 않는 것인데.”

“솔타에서 배웠어. 배운 지 얼마 안 돼서 그렇게 잘 그리진 못해.”

“그렇게까지 잘 그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리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엄청 잘 그린 건 아니라는 소리구나.”

“……직업으로 하실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응.”

“그러면 정말 잘 그리신 거죠.”

키아나의 솔직한 평가에 리리안이 그만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올리비아가 과하게 칭찬을 한 것이 맞았다.

“할 말이 있다는 건 뭐야?”

“아, 그게…….”

솔직하게 잘 말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키아나는 어린애처럼 리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클라이드가 황궁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폐하께서도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키아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황제께서 마하에 오신대요. 크로이센에서…….”

크로이센에서 올 황제라고는 카를로이 하나밖에 없었다. 리리안이 바보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칼, 카를로이가 온다고?”

“네, 정기 회담 때문에 며칠 뒤면 도착하실 것 같던데……. 원래는 다른 사람을 보내시는데 올해는 직접 오시나 봐요.”

리리안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오는 건 아닐 거였다. 알렉시스는 리리안의 여정과 경로에 대해서는 말할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마주치실 일은 없을 거예요. 그분은 마하 황궁에서만 머무르실 테니까.”

키아나는 리리안이 그런 걸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리리안은 자신이 카를로이를 마주치고 싶어 하는지, 그를 피하고 싶은지도 잘 몰랐다. 어쩌면 둘 다기에 그런 걸지도.

“……괜찮으세요?”

“응.”

리리안은 잠시 멍하니 있다 키아나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네랑 클라이드 경은……. 행복해 보여.”

예상치 못한 말에 키아나가 얼굴을 붉혔다.

“아, 혹시 저희가 너무 못 볼 꼴을 보여 드렸나요? 죄송해요.”

“아니야, 전혀. 대단해 보여서. 서로 믿고, 좋아하고 그러는 게.”

키아나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 천천히 대답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저희도 별일이 다 있었어요. 심지어 클라이드는 제가 진심으로 황제 폐하를 사랑한 줄 알고 배신자라고 했다니까요. 아니라고, 기다리라고 해도 어찌나 안 믿던지……. 나쁜 새끼.”

“그래?”

키아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랑한다고…… 그게 모든 걸 다 해결해 주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모든 걸 복잡하게 만들어 버릴 때도 많던걸요.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저 간단한 일, 간단한 문제였을 것들……. 저희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리리안은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런 리리안을 바라보던 키아나는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이게 마지막 권이에요. 그래도 이게 효과가 생각보다 괜찮았죠?”

그 말도 안 되는 책이었다.

“……도대체 이런 책은 어디서 난 거야.”

“엄마 유품에서 발견했어요. 내연남이 쓴 소설 같더라고요. 출판도 하지 못한. 그러니 저만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죠.”

생각지도 못한 출처에 리리안이 깜짝 놀라 키아나를 올려다봤다. 키아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가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돈이 없어서 이걸로 활로를 뚫고 싶어 했던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출판해 보기도 전에 죽었죠. 엄마를 잃어서 너무 슬프고 화가 나는데, 이걸 읽고 있자니 그저 기가 차는 거예요.”

실없는 웃음소리가 키아나에게서 새어 나왔다.

“이런 걸 써야 먹고살 수 있었던 남자를 사랑해서 죽었다니……. 나를 버리고.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어요. 그런데 내용까지 기가 막혀서 정말 나중엔 화만 나고 다른 생각이 다 사라지더라고요.”

메리앤까지 숨을 죽이고 키아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 마지막 권에요, 그런 구절이 나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면, 사랑하고 싶다고. 이런 소설에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사랑 타령인가 싶기도 하고……. 대체 사랑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서 그때는 이해를 못 했는데.”

키아나의 표정이 아주 약간 서글프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남자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쓴 구절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목숨까지 걸고 우리 엄마를 사랑했겠지…….”

키아나가 흘끗 드니스의 그림을 쳐다봤다.

“그리고 저도. 엄마가 너무 미웠지만, 엄마가 살아 있다면 다시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살아만 있다면…… 말이에요. 참, 저도 이런 저를 잘 모르겠어요.”

키아나는 버릇처럼 말끝에 살짝 웃음을 띠었다.

“어머, 제가 너무 시답잖은 말을 많이 떠들었죠? 피곤하실 텐데 주무세요.”

키아나는 인사를 하고선 침실을 나갔다. 메리앤까지 키아나를 따라 나가 버리자 리리안은 침실 안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카를로이에 대한 생각에서 도망갈 수도 없게 그렇게 남겨졌다.

그날 밤 리리안은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카를로이와 분명 끝을 맺고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기분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마치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숙제가 뒤따라다니는 기분이었다.

* * *

마하는 여전했다.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다. 그것이 수도 황궁에 도착한 카를로이의 감상이었다. 미감 없이 쓸데없이 크기만 한 마하의 알현실도 그대로였다. 마하인들은 크기에 대한 집착은 심한데,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좀 없었다.

아셀은 얼굴이 창백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웬일이야. 죽어도 안 올 것처럼 굴더니. 내숭이 늘었네, 새끼.”

언제 들어도 피곤한 블레이즈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카를로이는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대공.”

“아, 무슨 또 대공이야.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뭘 또 그렇게 내숭을 쳐 떨어. 섭섭하다.”

카를로이가 블레이즈에게 뭐라고 한 소리 하기도 전에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가 있건 없건, 그런 식으로는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블레이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블레이즈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폐하.”

마하의 황제, 밀레닌 노카가 블레이즈를 보고 자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블레이즈, 내 동생. 난 널 사랑해서 대공 자리도 주었는데……. 넌 품위 하나 지키는 게 그렇게 어렵단 말이니. 정말 실망이 크구나.”

서글픈 표정으로 가볍게 혀를 찬 밀레닌의 시선이 카를로이에게 닿았다. 밀레닌은 천천히 의자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카를로이. 앉지 그래. 저런, 얼굴이 많이 상했어. 부인들을 잃은 슬픔이 큰가 봐.”

저렇게 사람을 살살 놀려 먹으려 할 때는 남매가 아주 똑 닮았다.

“내가 아무리 슬퍼도 최근에 남편 하나를 직접 죽인 밀레닌에 비할까요.”

카를로이의 시큰둥한 대답에 밀레닌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 그건 벌써 1년 전이야. 난 슬픔을 극복했지. 새 사랑은 또 찾으면 그만인걸. 그게 최근이라는 걸 보니 안 본 지 오래되긴 했어.”

밀레닌 노카는 우아하게 앞에 놓인 찻잔을 들이켰다. 카를로이는 그 찻잔에 든 것이 차가 아니라 술이라는 데 크로이센을 걸 수도 있었다.

“아무튼 기대해. 오랜만에 마하에 온 널 위해 성대한 파티를 준비했으니까. 게다가 크로이센의 마법사들이 만들어 준 황궁 정원이 아주 큰 인기야. 마음에 들어.”

“파티에 참석하자고 이 먼 마하까지 온 건 아니라서.”

“알아, 알아. 공사다망하신 크로이센의 황제께선 어려운 발걸음을 해 주셨지. 하지만 다 순서가 있는 법 아니겠어. 일 얘기는 천천히 해도 되잖아.”

하품을 한 밀레닌이 방긋 웃어 보였다. 마하인의 순서 감각은 아주 엉터리였다.

“파티에는 키아나도 꼭 초대하도록 하지. 너와 그래도 무슨 사이기는 했잖아? 그리고 난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 재밌는데 아름답기까지 하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가지지.”

카를로이는 키아나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크로이센은 정말 아름다운 게 많단 말이야……. 사물도, 자연도, 하다못해 사람까지도. 늑대가 사랑한 땅이라고 할 만해. 우리가 좀 더 그걸 편하게 나누면 정말 좋을 것 같지?”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더니 은근슬쩍 말을 꺼낸다. 카를로이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역시 술이었다.

“지금보다 편해지자는 건 그냥 한 나라가 되자는 소리 같은데…….”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야. 마음만은 이미 하나인데. 우리가 괜히 군사까지 주고받는 게 아니잖아.”

“그럼 그 정복지에서 가져왔다는 물건들도 대가 없이 크로이센에 넘길 수 있겠군요. 하나라니까.”

밀레닌이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은. 마음은 그렇다는 말이었지.”

카를로이의 무표정에 변화가 없자 밀레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지루해진 듯했다.

“내가 일이 좀 많아서 오늘은 일단 먼저 일어날게. 파티는 걱정 말고. 일도. 블레이즈, 네가 불편함 없도록 잘 안내해 줘.”

“네, 폐하.”

밀레닌은 나가면서 가만히 서 있던 아셀을 흘끗 쳐다봤다. 아셀이 눈에 띄게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밀레닌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밀레닌이 나간 뒤에도 여전히 굳어 있는 블레이즈를 카를로이가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툭 쳤다.

“피곤하니까 빨리 머물 곳으로 안내나 해.”

“……이거 진짜 내숭이었네.”

피로가 몰려들어서 카를로이는 습관처럼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피로는 이제 관성처럼 눌어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피곤했다.

어릴 적 의도치 않게 이 미친 남매에게서 얻어 낸 호감이 자신에게 꽤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건 카를로이도 잘 알고 있었다. 적당히 데면데면했던 마하와의 관계는 카를로이가 마하로 갔을 때부터 급속도로 좋아졌으니.

“그러고 보니 너 이제 부인도 없는데, 마하에서 찾아볼래? 사돈이 되는 거지.”

하지만 역시. 역시 마하인들은 사람을 너무 피곤하게 만든다. 괜히 이런 곳에 왔다고 후회하며 카를로이는 블레이즈 뒤를 따라갔다.

* * *

“이렇게까지 관심 가질 줄은 몰랐어. 아픈 사람이라고까지 말했는데.”

“그런데?”

“치료사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을 테니 괜찮을 거래. 정 안 되겠으면 자기만 보고 가라잖아!”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리리안은 키아나와 클라이드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멈췄다.

“무슨 일이 있나?”

둘 다 동시에 굳은 걸로 봐서는 자신과 관련된 일인 게 틀림없었다. 리리안은 키아나와 클라이드를 바라보다 키아나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발견했다. 초대장같이 생긴 종이를.

“폐하…….”

키아나가 풀 죽은 목소리로 리리안을 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황궁에서 사흘간 파티가 열리는데, 마하 황제가 폐하께도 초대장을 보냈어요.”

“마하 황제가 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오며 가며 폐하를 본 사람들이 좀 있는지 소문이 났나 봐요.”

“무슨 소문?”

“저희 집에 머무르는 제 친우가 그…… 아름답다고……. 제가 분명히 아프다고 했거든요. 심지어 귀족도 아니랬어요. 그랬더니 상관이 없다지 뭐예요. 마하 치료사도 크로이센만큼이나 뛰어나다나. 사흘 중 하루는 꼭 오라고.”

리리안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엇비치자 키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더 조심했어야 하는데…….”

“아니야, 키아나의 잘못은 아니지. 마하인들이 여행 온 외국인에게도 그렇게까지 관심이 많을 줄 몰랐어.”

사흘 다 나오라고 하지 않는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지. 리리안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햇빛 때문에 적당히 얼굴을 가리고 나갔는데 대체 무얼 봤다고 그런 소문이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가지 않으면 자네가 곤란해지겠지?”

“아니에요. 상관없어요. 가지 않으셔도 돼요. 안 가면 뭐 어떡할 거야. 그런 거로 벌이라도 주겠어요?”

키아나는 호기롭게 대답했지만 옆에 있는 클라이드의 얼굴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리리안은 클라이드의 반응을 보고 마하 황제의 성격이 어떨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클라이드는 리리안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루 정도라면 괜찮아. 잠깐 얼굴만 비추고 나오지. 마하 귀족들 중에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오래 있는 건 위험하고.”

“저 때문에 괜히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아니야, 정말로 괜찮아. 이렇게 편하게 머무르고 있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키아나의 표정이 금세 다시 풀어졌다. 마치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저……. 마지막 날은 아마 가면무도회일 테니 가실 거라면 그때가 편하실 것 같습니다.”

클라이드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얹었다. 존대가 아니었다면 리리안에게 하는 말인 줄도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맞아요. 중간에 다 벗기는 하지만, 그 전에 나가면 되니까요.”

가면이라니, 생각만 해도 유난스럽고 번잡했지만 리리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관심을 덜 끌긴 할 것이었다.

“저…… 아마 근데 카를로이 폐하께서도 오실 거예요. 그분 때문에 여는 파티일 테니까.”

“……칼, 아니 황제가 마하에 도착했나?”

“네, 이틀 전에.”

푸르투도, 솔타도 아니고 마하에서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게 되다니……. 운명은 장난스럽다지만 이 정도면 장난이 아니라 함정 수준이었다.

리리안은 계단을 내려가 키아나에게서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디안 백작 부인의 아름다운, 하지만 이름 모를 친구에게.>

언제 봤다고 ‘아름다운’일까.

“디안?”

“아, 클라이드가 여기 와서 받은 마하 작위예요.”

리리안은 키아나가 과연 크로이센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졌지만, 아무 말 없이 초대장을 계속 읽었다. 하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마하어였기 때문에.

대충 한 번 봐야겠으니 꼭 참석하라는 뜻 같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 속에서도 강압성만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별일 없을 거예요……. 이왕 내려오신 거 차나 한잔 하고 올라가세요.”

복잡한 얼굴이 되어 가는 리리안의 눈치를 보며 키아나가 말했다.

“주방장이 이번에 무슨 새로운 케이크를 만들었다는데 맛이 괜찮대요.”

리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키아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저택의 정원에는 작은 못이 있었다. 크로이센에서는 보기 힘든 꽃들이 못 위에 피어 있었다. 마하와 어울리는 신기한 수생 식물들이 꽤 아름답긴 했지만 크로이센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세요?”

케이크 한 조각을 먹은 리리안에게 키아나가 물었다.

“……맛있는 것 같아.”

“그렇죠? 주방장이 디저트를 잘 만들더라고요.”

하지만 리리안은 솔타의 벡스가 생각이 났다. 어딜 가도 벡스 만한 요리사가 없다는 올리비아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멍하니 차를 마시던 리리안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클라이드에게 닿았다. 클라이드는 차나 케이크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웬만해서는 모른 척하려고 했던 리리안도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클라이드 경은…… 혹시 내가 불편한가.”

리리안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에 클라이드는 어찌나 놀랐는지 그만 손으로 찻잔을 쳐서 차를 쏟고 말았다.

“아, 너 정말……. 적당히 좀 해.”

키아나가 속삭이듯 타박을 주자 클라이드는 어쩔 줄 모르고 손수건으로 찻물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죄송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자네에게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

“아니, 아닙니다.”

황급히 대답하는 클라이드를 보고 눈알을 굴리던 키아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에요, 폐하. 자기가 찔려서 그러는 거예요.”

“찔리다니?”

“그게…….”

말을 잇던 키아나가 갑자기 멈추곤 클라이드를 노려봤다.

“아니, 왜 발을 밟는 거야. 모르게 하고 싶었으면 티를 내지 말았어야지.”

클라이드의 얼굴은 이제 못에 떠 있는 꽃보다도 붉었다.

“폐하가 공작 부인의 친딸이 아니란 걸 클라이드가 뒤냐 공과 황제께 말한 거거든요. 그것 때문에 폐하만 뵈면 죄책감을 느끼나 봐요.”

이번엔 리리안이 깜짝 놀라서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걸 어떻게, 경이 알고.”

너무 놀라서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리리안이 기분이 나빠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지 키아나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그때는 클라이드도 폐하가 델루아의 편인 줄 알아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그래. 어떻게 안 거지?”

클라이드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쓴 일기에 공작 부인의 딸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적힌 외모 묘사가 폐하와는 너무 달라서……. 저도 직접 읽은 것은 아니고 룩스 앙센이 말한 걸 들었을 뿐이지만.”

“……그럼 칼은 내가 델루아의 사생아라는 걸 추측한 게 아니라, 알았다는 말인가?”

왠지 멍하게 보이는 리리안의 질문에 키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죠. 심증 이상이었죠. 일기장만 찾으면 됐는데, 그것만 못 본 거니까. 사실 일기장이 없었어도 믿을 만한 출처와 이야기였고요. 왜 그러세요?”

리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카를로이가 몇 번 묻긴 했지만, 증거 없이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아셀이 델루아 영지에서 이상하게 굴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멋대로 한 추측 때문에 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니 델루아로 도망가는 길에 아셀이 소리쳤던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나긴 했다. 앙센 백작 어쩌고 한 게 이 내용이었나.

“그 일기장에 대해서 카를로이가 알게 된 게 언제였지?”

“꽤 오래전이에요. 아르바 루프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나…….”

언젠가 밤중에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던 카를로이가 기억났다. 그날인가.

<그대는 내 사람이 맞을까?>

그렇게 괴로워하는 게 키아나와 클라이드 때문이라 생각했었는데 자신 때문이었다니.

“폐하, 괜찮으세요……?”

“그러면 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지? 증거가 없어서?”

“아니죠. 증거야 심문만 했어도 되었을 건데요. 황제께서 덮어 두고 싶어 하시니까 그렇게 했죠.”

혼란스러워 보이는 리리안의 얼굴에 키아나는 본인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저랑 클라이드 가지고 함정 파 놓은 것도 그냥 덮으셨는데, 그런 걸 써먹으려 하겠어요?”

“뭐?”

“네? 모르세요?”

키아나의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다 끝난 일인데도, 지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증거 같은 게…… 있었던 거야?”

“그런 건 없었지만요. 그래도 뻔하잖아요. 눈치챈 사람이 폐하 말곤 없었는데. 하긴, 증거가 있었어도 그때의 황제께서 신경 쓰셨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완강하게 거부하셔서.”

“뭐를?”

“다 지난 일이니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랑 뒤냐 공작이 몇 번을 말씀드렸거든요. 황후 폐하가 한 짓이다, 절대 믿으면 안 된다……. 말도 마세요. 뒤냐 공작은 아마 하루에 열 번씩은 말했을걸요. 그런데 정말 끄떡도 안 하지 뭐야.”

키아나가 말을 하다 말고 제 기억에 빠져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는 그냥 드디어 황제께서 미쳐 버리셨나 보다, 했는데요. 아마 뒤냐는 폐하께서 황제께 무슨 마법이라도 썼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니 이미 두 분이 그렇고 그런 사이셔서 그랬던 건데…….”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계속하는 키아나를 클라이드가 팔로 툭툭 쳤다. 그제야 키아나는 리리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어머, 폐하! 정말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저도 폐하를 이용하려고 했으면서 믿느니 마느니 하고, 어이가 없으실 만도 해요.”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전혀 아니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키아나와 클라이드에 대해서 묻고 별다른 반응 없이 넘겼던 카를로이가 떠올랐다.

“카를로이가…… 날 믿은 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아. 난 또. 물론 그게 상식적으로는 더 말이 되죠. 솔직히 폐하 도움이 그렇게 많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고, 차라리 흠이라도 잡아서 황후에서 끌어내리는 게 더 도움이 됐을 테니까요.”

“그렇지…….”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델루아의 딸을 믿겠다고 하니까 뒤냐까지 난리가 난 거죠.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그렇지?”

키아나가 클라이드를 쳐다보았지만, 클라이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에 키아나가 다시 리리안을 살폈다. 리리안은 누가 뒤통수를 때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폐하, 제가 혹시 뭘 실수했나요……? 다 아시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한 건데…….”

“아니야. 아는 이야기야. 그렇지. 카를로이에게는…… 그런 일이었겠지.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나를 믿는다는 게. 리리안은 간신히 뒷말을 삼켰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렇죠, 그런 거죠. 델루아라니! 클라이드 너 같으면 앙센 백작이 잘해 주면 믿었겠어?”

“미쳤어?”

내내 잠잠하던 클라이드의 말투가 갑자기 격해졌다.

“그럼 그 여동생이 잘해 줬다면?”

“미쳤냐고.”

“아니, 난 안 미쳤지. 아무튼 이런 반응이니까 대체로는……. 이해하시죠? 그렇지 않아도 언제나 카를로이 폐하가 미치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위험했죠. 빌미 던져 주는 것도 아니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키아나는 이윽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러면 폐하께서는 성문을 나가려고 한 것 하나 때문에 황제께서 가뒀다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리리안이 멍하니 키아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했냐고? 정확히 말하면 그땐 어떤 생각이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카를로이에게도 어떤 일들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여러 번의 갈등을 겪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런, 남들이 보기에도 뻔한 상황에서 혼자 그런 것들을 겪었을 거라곤…….

“그 뒤에도 베르니 마법을 쓴 흔적이라든가……. 남자 마법사가 궁에 드나들었다, 사통이다 뭐다 하는 식으로 말이 계속 나왔으니까요.”

카를로이가 왜 자꾸 제게 다른 남자가 있는 것처럼 말하나 했더니……. 리리안은 그저 아득한 기분이었다.

“델루아에선 황후가 델루아 공작에게 쓴 친필 편지가 돌아다닌다고 했고요.”

“내 친필 편지? 그게 무슨…….”

“황제가 광증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나…….”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피오르가 만들어 내던 글씨체를 베끼던 그 이상한 펜.

점점 창백해지는 리리안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보던 키아나는 황급히 수습하려 했다. 자신이 너무 힘든 사람 앞에서 카를로이의 편만 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말씀드렸잖아요. 그때는 그냥 황제께서 미치셨나 보다 했는데. 만약 두 분이 마음을 나눴던 사이라면, 당연히 폐하께서 상처받으셨겠죠. 보통은 사랑하는 사람이 믿어 주기를 바라니까요.”

“……그리고 사랑으로만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말했지. 자네가.”

언젠가 자신이 했던 말을 돌려주는 리리안을 보고 키아나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지만. 두 분 사정은…… 워낙 복잡하니까요. 저랑 단순하게 비교하기엔 좀 무리가 있죠. 꼬일 대로 꼬이셨으니.”

입맛이 사라져 버린 리리안은 더는 차도, 케이크도 손대지 못했다.

“……미안한데 먼저 올라가 봐야겠어. 몸이 조금.”

메인 목에 끝말이 삼켜졌다.

“차 잘 마셨어. 고마워.”

키아나와 클라이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위층으로 올라와 침대에 기대듯 누울 때까지도 리리안은 머리가 멍했다. 억지로 덮어 두었던 푸르투에서의 마지막 날들이 스멀스멀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내가 델루아를 지독히도 증오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성을 받은 모든 이들을 이 제국에서 없애 버리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상하지, 나는 그대의 눈물만은 진짜 같아. 당신의 모든 것이 다 거짓이래도 눈물은 아닐 것만 같아서…….>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차라리. 차라리 솔직히, 제발 한 번만이라도 솔직히 말을 해.>

카를로이가 자신을 어떻게 봤었는지, 무슨 표정을 지었었는지, 어떤 말들을 했는지, 그런 것들이. 그리고 그가 어떻게 점점 미쳐 갔는지.

이 복잡한 감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다가 리리안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자신이 비로소 카를로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하지만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미뤄 두었던 이해를 조금씩 하는 기분이었다.

“칼…….”

복잡한 감정을 토해 내듯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푸르투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어떤 기분으로 부른 것일까 가늠해 보며.

* * *

“도대체 뭘 하면 네가 그 썩은 얼굴을 한 번이라도 필까?”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블레이즈가 빈정거리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카를로이가 하고 있는 생각은 하나였다. 마하는 어떻게 된 게 궁중 음악조차도 이다지도 시끄러운 것인가, 하는. 이걸 정말 좋다고 듣고 있는 걸까. 전쟁에서 적을 자극하는 데나 쓰일 것 같은 음악이었다.

“파티도 열어 줘, 마하의 온 귀족이 반반한 네 관심 받아 보겠다고 지랄을 해, 난 마하 미인들까지 소개해 줘. 그런데도 무슨 장례식 온 사람처럼 그러고 있으니, 원.”

마하인들은 왜 부탁하지도 않은 것들을 하고 생색을 내기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카를로이는 한숨을 쉴 기력조차 없었다.

“블레이즈 네가 옆에서 그렇게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니 그런 거겠지.”

옆에 남자 하나를 끼고 놀고 있었던 밀레닌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남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하 여자를 새 부인으로 삼아 보라는 블레이즈 말엔 나도 동의해. 지금 황후는 오늘내일한다며, 안타깝게도.”

몸이 안 좋아서 요양을 갔다는 말이 언제 저렇게 와전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이 핑계도 끝이 나겠지만. 크로이센으로 돌아가고 나면 리리안이 떠났다는 사실을 귀족들에게도 알릴 생각이었다.

“흐음. 몸도 안 좋아, 델루아의 딸이기까지 해. 지금 보니 반려를 죽여야 했던 건 내가 아니라 카를로이 너 같은데.”

농담 한번 살벌했다.

“……그 여자는 나 같은 놈한테 죽어야 할 만큼 잘못하지 않아서.”

그 반대면 모를까. 카를로이가 물을 들이켰다. 술도 마시지 않는다고 타박을 주는 블레이즈를 무시하며 그는 계속 물만 마시고 있었다.

“하긴 그건 그렇습니다. 폐하의 국서들은 간도 크게 바람을 피웠잖습니까. 아, 하나는 대들다가 죽은 거지만.”

“그래, 그건 그렇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에게 잔인하다고 한다니까!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말이야.”

지랄을 하는 건 마하 귀족들이 아니라 이 남매들이었다. 카를로이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표정을 무어라 받아들인 건지 밀레닌 노카의 두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다. 재수 없게도.

“크로이센의 황후가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긴 한데, 단단히 빠진 모양이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폐하. 델루아의 딸이라는 걸 잊게 할 만한 무언가가 있는 거지요.”

“계속 그따위로 말하는데, 그 개새끼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그 여자라는 이야기는 마하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보지?”

낮은 목소리로 대꾸한 카를로이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자기혐오 이외의 이유로 자살 충동이 드는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마하 남매의 끊이지 않는 헛소리를 듣다 보면 차라리 마르바 대양 한가운데에 빠져서 죽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델루아. 델루아의 딸. 모두가 그 하나로만 설명이 끝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델루아의 이름은 강력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행동을 해도, 하지 않아도. 아무리 의심이 가도, 계속 저를 믿어 줄 수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리리안은 그렇게 말했던 거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카를로이가 흔들릴 것을 예상했을 테니까. 그녀는 그토록 무겁게 걸었는데, 그는 한없이 가볍게 약속했다.

목을 축이며 카를로이는 눈을 문질렀다. 더 생각해 봤자 괴로울 뿐이다.

“충격적이네. 크로이센에선 매번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키아나가 클라이드와 결혼하겠다고 너와 벌인 일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는데. 정말 재밌는 나라야.”

역시나 남의 불행도 미친 마하 황족들에게는 한낱 이야깃거리에 불과했다. 하긴, 완전한 타인이 그런 이야기를 안타깝게 여길 이유는 또 없다.

그 온도 차가 맥이 풀리게 만들어서 카를로이는 습관적인 자기혐오적 후회도 그만 잊어버렸다.

“키아나가 이틀 다 오지 않아서 아쉬워. 하지만 내일은 오겠다니까 카를로이 너도 반가운 얼굴 하나쯤 볼 수 있겠지.”

“그 친구라는 사람도 데려온답니까?”

블레이즈의 질문에 밀레닌은 인자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그러겠지? 내가 한 건 부탁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카를로이 너도 아는 사람이야? 크로이센 사람이라는데 얼핏 봐도 미인이라더라고. 몰락한 귀족이니 뭐니 하던데.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 부부가 그렇게 숨겨 두는지 몰라.”

이제 둘이 뭐라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카를로이는 물이 든 잔을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아니, 벌써 들어가겠다고?”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래……. 네 상, 아니 얼굴만 봐도 그렇게 보인다. 내일은 부디 가면을 써서 그 우울한 낯짝을 가리고 나와 주라.”

카를로이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진짜 저놈은 더 재미가 없어졌어요.”

블레이즈의 혼잣말에 밀레닌이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 블레이즈. 진심이니? 내가 본 카를로이 모습 중에 가장 재밌는데.”

“네?”

“영혼 없는 돌덩이인 줄 알았더니 카를로이도 감정이란 게 있긴 있었잖아. 황후 이야기만 나오면 막 잡은 물고기처럼 아주 팔딱팔딱 뛰는 게 신선하네.”

“뛴다고요? 다 죽어 가는 것 같은데…….”

“몸이 아니라 표정이. 하긴, 널 데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블레이즈가 일순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은 다물었다. 인생에 재미 볼 것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밀레닌의 지나간 남자들 꼴이 나고 싶진 않았다.

“음, 정말 크로이센인들만 오면 너무 재밌지 뭐니. 전쟁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야. 내일이 기대가 되잖아.”

블레이즈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여자가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 * *

오후가 다 돼서 느지막이 일어난 리리안의 얼굴을 보고 메리앤은 깜짝 놀랐다.

“그래도 파티인데……. 얼굴색이 이게 뭐예요. 잠을 못 주무셨어요?”

“조금. 어제 제인과 구경은 잘했어?”

“아니요. 폐하께선 안 나가셔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흥미와 불쾌함이 공존하는 곳은 처음이에요.”

메리앤이 진저리를 치기에 리리안은 더 묻지 않았다. 왠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키아나는 옆에서 초조하게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폐하 머리카락 색이 너무 튀어요. 특히 마하에서는. 이런 백금발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일단 날 폐하라고 부르지 말아야 눈에 덜 띄지 않을까.”

“그래요, 그것도 주의해야겠어요……. 어떡하지. 큼지막한 모자라도 써야 하려나. 하긴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모자가 마하의 유행이니까……. 그래도 너무 큰 건 시선을 끌 테니까 적당한 걸로 하고, 옷도 좀 튀지 않는 무난한 걸로.”

키아나가 쉴 새 없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자네가 들고 있는 그 가면만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키아나가 가져온 가면은 크기가 꽤 커서 얼굴의 반 넘게 가려질 것 같았다. 눈만 가리는 다른 가면들과 다르게 볼까지 다 가릴 수 있었다.

“황제를 볼 땐 벗어야 할지도 몰라요. 워낙 제멋대로라.”

“어차피 난 잠깐 여행 온 사람이야. 본다 한들 황제가 뭘 어쩌겠어. 내가 황후였단 사실만 모르면 되지.”

오히려 리리안이 걱정하는 건 카를로이 쪽이었다. 혹시라도 마주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리리안의 걱정은 오로지 그녀만의 몫인 듯 메리앤과 키아나는 둘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메리앤, 혹시 모르니까 화장도 너무 진하게 하지 말아요. 입술은 칠하지 말고. 마하 황제가 보고 빨리 보내 줘야겠다고 생각하게끔 말이에요.”

“그럼요. 아픈 사람처럼 하고 있어요.”

“……나 아픈 사람 맞아.”

“많이 아픈 사람처럼 하고 있어요.”

메리앤과 키아나가 하는 대로 가만히 놔둔 결과물을 보자 리리안도 나름 만족했다. 전혀 튀지 않았다. 모자 밑으로 언뜻 보이는 머리카락 색 말고는 특별한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가면까지 쓰면 그 머리색조차 빛을 잃을 정도로 사람이 답답해 보였다.

“우린 들어가자마자 황제부터 알현할 거예요. 따로. 그러면 아마 말 좀 걸다가 보내 줄 거예요.”

키아나의 확신 어린 어조에 리리안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키아나, 마하 황제가 자네를 크로이센에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것 같아?”

“네? 당연하죠.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왠지 마하 황제가 쉽게 보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키아나의 확신이란 게 딱히 신빙성이 없었으므로.

출발을 할 때가 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불길함과 설렘이 섞인 떨림이었다.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는 내내 키아나가 마하 황제에 대해 주의할 점을 일러 주자 괜히 더 불안해졌다.

“맞아, 이름. 이름. 올리비아 체르라고 마하 황제에게 말해 두었어요. 폐하가 일러 주신 대로. 작위와 영지를 잃은 지 오래라 평민이나 다름없다고 말해 두었고요.”

생각나는 이름이 없어 올리비아의 이름과 룩스 자작 부인의 성을 합쳐 만든 이름이었다.

리리안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었다. 잠시 여행 온 마하에서 황제가 여는 파티까지 가게 되다니. 그것도 카를로이가 있을 곳에.

그래도 리리안은 바랐다. 혹시라도 카를로이를 보게 된다면, 부디 괜찮아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어머. 벌써 도착했네.”

리리안보다 긴장한 듯한 키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차에서 내린 리리안의 두 눈이 커졌다. 마하 황궁의 크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벌써 놀라지 마세요. 여기는 입구일 뿐이고 들어갈수록 상상 이상으로 크니까요.”

“그런데…….”

리리안은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키아나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죠, 신기하죠. 정말 이렇게 크기만 할 수 있다는 게. 자, 들어가요.”

파티가 열리는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리리안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회장의 천장에선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공중에 뜬 채로 그렇게 물이 반짝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그 위에는 소라노 꽃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마치 바다로 만들어진 하늘 같았다.

“평소에도 이런 건 아닌데, 파티가 열리면 꼭 저렇게 해 두더라고요.”

키아나가 속삭였다. 리리안에게 이것저것 일러 주면서도 키아나의 눈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마하 황제를 찾고 있는 듯했다.

“아, 찾았다.”

키아나의 말에 리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쫓아갔다. 연회장 한가운데의 계단 위에 가면도 쓰지 않은 채 서 있는,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가 보였다.

“가면을 안 썼어?”

“원래 저러세요. 남들만 쓰게 시키고 본인은 쓰기 싫어해요. 무슨 심보인지 잘 모르겠지만. 보통은 반대로 하고 싶어 할 텐데 말이에요.”

키아나가 빠른 속도로 걸어 나가는 바람에 리리안은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마하 황제에게 다가갈수록 리리안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듣기로는 굉장히 무서운 사람일 줄 알았는데 눈앞에 보이는 황제라는 여자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리리안보단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마하 황제는 풍성한 흑갈색 머리가 허리까지 구불거리며 내려와 있었고, 얼굴은 유순해 보였다. 사람은커녕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입가에 걸린 연한 미소는 온화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아, 내 소중한 친구 키아나. 가면으로도 자네 미모가 가려지질 않으니 딱 봐도 알겠어.”

목소리와 말투마저 부드러웠다. 마하어는 억양이 세다고만 생각했는데 마하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마하어는 천장에 흐르는 물처럼 우아했다.

“아름다우신 폐하를 뵙습니다.”

리리안이 키아나를 따라 예를 취했다.

“글쎄, 그대 같은 미인이 그런 말을 하면 놀리는 것 같다니까.”

마하 황제, 밀레닌의 푸른 눈이 리리안에게 닿자 리리안은 잠시 긴장했다.

“자네가 키아나의 그 친구로군.”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오. 마하어를 할 줄 아나?”

“아주 조금요.”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낸 마하 황제는 크로이센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려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알면 알수록 의외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다 가기를. 아, 가기 전엔 내게 꼭 들러 주고.”

키아나가 낭패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가면을 써서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어떻게 폐하의 귀한 시간을 뺏겠어요. 지금도 괜찮은걸요.”

“아니야, 아니야, 키아나. 마하의 파티를 보아야 우리의 새 손님도 대화 주제가 생기지. 지금 당장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밀레닌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자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그러니 부디 즐기고 와.”

부디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령조였다. 한순간 부드러운 말투에서도 숨겨지지 않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리리안은 마하 황제를 향한 세간의 평에 공감할 수 있었다. 충분히 고압적이고, 무서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 듯했다. 키아나와 리리안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네요. 조용히 있다가 가는 수밖에…….”

시무룩해진 키아나가 속삭였다. 벽에 한껏 붙은 리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과연 카를로이가 있을지 궁금했다. 눈이 바쁘게 사람들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오갔지만 카를로이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카를로이가 있다면 가면을 써도 눈에 띌 게 분명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올라와 있을 테니까.

오지 않은 걸까. 기분이 마치 술에 물을 탄 듯 어정쩡해졌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키아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계속 키아나와 리리안이 서 있는 구석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키아나! 요새 왜 이렇게 뜸했어요. 저번에 빌린 책을 돌려 드리려고 했는데 얼굴을 볼 수가 있어야지요.”

“디안 백작 부인, 오늘도 정말 아름답습니다.”

“어머, 백작 부인. 백작은 어디 가셨어요?”

쉴 새 없이 사람들이 키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리리안의 눈엔 마하가 키아나를 지독하게 짝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작 키아나는 이곳을 뜨려는 생각뿐이 없는데.

이윽고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는 리리안에게 닿았다. 사람들의 눈에 호기심이 어리는 것을 보고 키아나는 결국 리리안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클라이드와 정말 웃긴 일이 있었지 뭐예요. 아, 이건 클라이드가 있는 곳에서 직접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이가 어딨담……. 제 남편을 보신 분 어디 없나요.”

키아나가 운을 떼며 앞으로 나아가자 사람들이 뭐에 홀린 것처럼 줄줄이 따라붙었다. 혼자 남겨진 리리안은 아직도 약간 남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마하는 너무 지루하다……. 생각을 없애 주지를 못해.”

리리안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누구에게 말을 걸듯 중얼거렸다.

마하에 온 것 자체를 후회하고 있을 때쯤 연회장의 입구에서부터 미묘한 소란이 일더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 크로이센의 황제죠? 금색 가면을 쓴 사람. 눈에 확 띄네요. 어제 대화해 보지 않았어요? 어때요?”

“말을 받아 주긴 하는데……. 대화가 잘 이어지진 않습니다. 매너는 좋은 것 같은데 너무 무심하더군요.”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리에 리리안이 숨을 삼켰다. 마하어라 완전히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카를로이가 도착한 게 틀림없었다.

사람들 너머로 우뚝 서 있는 키 큰 남자가 보였다. 리리안이 좋아했던 새까만 머리칼을 가진.

카를로이는 옆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연회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진 않는 듯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떠나면 카를로이는 피곤한 듯 자주 눈이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벽에 기대서 리리안은 멍하니 카를로이를 관찰했다. 카를로이가 사람들 뒤에 묻히다시피 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자 심장이 뛰는 게 좀 잔잔해졌다.

카를로이는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열심히 살아 주고 있었다. 그가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잠겨 그를 보고 있는데 불현듯 카를로이가 고개를 들었다. 한 손에 잔을 든 채로 카를로이가 느리게 연회장을 훑었다. 그리고 리리안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이건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눈이 마주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왜 그가 자신을 발견한 것처럼 느껴졌을까.

이유 모를 긴장감에 리리안이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카를로이의 시선이 자신이 있는 쪽에 고정되어 움직이지를 않았다. 자신이라도 눈을 피해야 할 것 같은데 몸이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요란할 정도로 시끄러운 마하의 음악마저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잘 들리지 않았다. 모든 생각이 잊혔다. 입이 바싹 말랐다.

한참 그녀를 바라보던 카를로이가 갑자기 잔을 던지듯 내려놓고 연회장 바깥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굳은 듯 서 있는 것도 잠시, 리리안은 급하게 카를로이가 나간 쪽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이 너무나 익숙했다. 언젠가 푸르투에서 로열 체임버를 뛰쳐나갔던 모습과 똑같았다. 정원에서 처음으로 리리안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그날과.

* * *

숨이 막히는 기분에 카를로이는 크라바트를 마구잡이로 풀어 젖히며 정원 쪽으로 나갔다. 이번엔 정말로, 정말 미쳐 버린 게 분명했다.

리리안이 마하에, 그것도 황궁 한복판에 있을 리가 없는데. 말도 되지 않는데 눈에 너무 생생하게 보여서 무섬증이 들 정도였다. 뒤냐의 말대로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미친 게 틀림없다.

믿기지 않는 마음에 한참이나 가면 쓴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리리안일 리가 없었다. 리리안이라면 자신을 그렇게 오래 바라봐 주지 않을 테니까.

아무도 없는 으슥한 정원 구석에 앉아 카를로이는 가면을 벗어서 바닥에 버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저도 모르게 욕설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렇게 맛이 갈 수는 없었다.

“미친 새끼……. 하다 하다 맨 정신에도 이제 헛것을.”

카를로이는 얼굴을 손에 파묻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죽을 때까지 내내 이렇게 돌아 버린 상태로 살아야 하는 걸까.

“리리안…….”

카를로이는 또 버릇처럼 그 이름을 되뇌었다. 지킬 약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던 와중에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서 카를로이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리리안……?”

헛것이라고 생각했던 여자가 앞에 서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리리안이 틀림없었다.

아니, 어떻게?

카를로이는 혼란스러워졌다. 정말 리리안이 마하에 있는 건지, 자신이 제대로 돌아 버려서 환각이 저를 따라오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그 혼란에 답이라도 해 주듯 앞에 서 있던 여자는 가까이 다가오며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가면 벗은 얼굴을 본 순간 카를로이는 환각이고 뭐고 다 잊고 벌떡 일어나서 여자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너 어디 아파?”

입술에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기만 한 얼굴이 영락없이 심하게 아픈 사람의 낯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괜찮아지고 있다고 했는데, 라 소르티오에서 본 얼굴은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의 질문에 리리안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지자 카를로이는 놀라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너, 아니. 심각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꿈에서도 듣기 힘들었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카를로이가 잠시 멍해졌다. 정말이었다. 리리안이 와 있었다.

“너 어떻게 마하를. 아니, 아직도…… 몸이 많이 아픈 거야?”

카를로이가 힘겹게 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리안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메리앤이 일부러 화장을 그렇게 해서 그래. 마하 황제가 귀찮게 할까 봐…….”

마하 황제. 키아나의 손님. 카를로이의 머릿속에서 대충 어떤 조각들이 맞춰졌다.

“그럼 아픈 게 아니야?”

“응.”

대답을 들은 카를로이는 숨을 내쉬며 분수대에 다시 주저앉았다. 얼굴을 몇 번 쓸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자 상황이 천천히 머리에 들어왔다. 리리안이 여기에 있다.

인사도 제쳐 두고 아프니 마니부터 하자 민망함이 찾아들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할 법한 인사는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알 수 없는 표정의 리리안이 그를 내려다보다 물었다.

“너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카를로이를 보고 리리안이 덧붙였다.

“너는…… 아프지 않은 거야?”

카를로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리리안을 쳐다봤다.

“내가 아플 일이 뭐가 있어.”

“괜찮다고?”

“어, 멀쩡해.”

리리안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낯이 안 좋아진 카를로이를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하다고 말하는 그를.

“약속 잘 지키고 있었어. 아프지도 않고……. 괜찮아.”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리리안을 설득하려는 카를로이의 목소리가 잠깐 떨렸다.

리리안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만나서 대화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리리안이 자신과 대화를 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리리안이 다시 물었다.

“너는, 아픈 적이 없어? 없었어?”

“그게 무슨…….”

“푸르투에서…… 내 옆에 있을 때도 괜찮았어?”

“내가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한 카를로이의 빠른 대답에 리리안은 제 입술만 깨물었다.

뭐가 괜찮았고 아프지 않았다는 걸까. 자신을 공작의 딸로 알았으면서도 믿어 보려고 할 정도로 미쳤으면서, 대체 뭐가. 시간이 지날수록 술에 절어 갔으면서. 미련한 멍청이 새끼.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나쁜 놈.

자신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 머저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리리안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자기 자신을 돌볼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약속을 지키겠답시고 괜찮다는 말을 해 대는 카를로이를 보니 잔잔해졌던 마음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카를로이를 보면 그가 다시 밉고 원망스러울까 봐, 그에게 화를 내게 될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화가 났다. 형용할 수 없는 격한 감정들이 안에서 몰아쳤다. 카를로이는 언제나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

“……괴롭히지 말라니까.”

그의 손가락이 입술을 스치듯 쓸자 리리안은 입술을 괴롭혀 대는 걸 그만두었다. 그는 자신을 이본느로 알 때조차도 다치는 것에 이렇게 예민하게 굴었다.

다칠 때마다 화를 냈던 카를로이가 떠올랐다. 화를 내면서 그 상처를 꼭 치료하려고 들던……. 델루아의 딸에겐 걱정조차 그 마음 그대로 내보일 수가 없어서 그렇게 화를 냈던 걸까 궁금해졌다.

리리안이 말이 없어지자 잠깐의 침묵이 찾아들었다. 어두운 정원을 돌아다니는 작은 바람 소리가 들렸다.

리리안을 계속 보고 있던 카를로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오래도록 감은 눈이 떨리는 듯도 했다. 이윽고 눈을 다시 뜬 후에 그는 제법 태연한 말투로 물었다.

“마하에는 어쩐 일이야.”

“여행……. 엄마가 가 보고 싶어 했던 곳이라.”

드니스의 언급에 카를로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에 스치듯 지나가는 죄책감이 눈에 띄었다. 이번엔 리리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별로 좋지가 않네. 엄마가 왔어도 이곳을 좋아했을 것 같지는 않아.”

드니스를 입에 담는 리리안의 얼굴은 푸르투에서보다 한결 편안해 보여서 카를로이는 생각했다. 역시 리리안은 제 옆에 있지 않은 게 나은 일이었다고.

“넌 마하가 마음에 들어?”

“그럴 리가.”

“그러면 왜 어릴 때 그렇게 자주 마하에 왔었어?”

카를로이가 잠시 시선을 회피했다가 짧게 대답했다.

“별 이유 없어.”

그게 거짓말이라는 게 이제는 너무나 확연하게 보였다. 그리고 리리안은 카를로이가 언제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는지 알았다. 자신과 관련이 되어 있을 때. 그의 온 인생은, 그의 모든 선택은 리리안을 찾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

그래서 더욱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의 고통을 물을 엄두가. 자신과 똑같이 아팠을 것이 분명한 그의 과거를 물을 수가 없었다.

“식사는 거르지 말고…….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대신 리리안은 잘 보이지도 않는 그의 미래를 걱정했다.

“알았어.”

“잠도 설치지 말고.”

“……그래, 그럴게.”

“놀러도 가고……. 솔타 같은 곳에.”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대답하던 카를로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켜야 할 약속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조금만 봐주라.”

농담처럼 답하는 그의 얼굴은 힘들어 보였다. 마치 리리안이 이야기하는 것들이 아주 힘든 요구인 것처럼. 그런 일상적인 게, 정말 지키기 힘든 약속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모습에 간신히 다시 조각을 맞춰 나갔던 마음 어딘가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그러고 있어?”

카를로이의 질문에 리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쨌든 자신은 괜찮아지고 있었으니까.

그 대답에 안심한 듯 카를로이는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게 있다면, 뒤냐에게 말하면 돼. 언제든지.”

끝까지 리리안 이야기만 하는 카를로이에게 더는 할 말이 없어져서 리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마하 황제는 이상한 사람이니까 엮이지 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리리안은 생각했다. 이미 늦은 것 같다고.

더 할 말도 없는데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를 혼자 놔두고 가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모르겠다.

“먼저 들어가.”

마치 리리안의 마음을 읽은 듯 카를로이는 그렇게 말했다. 리리안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서 뒤를 돌았다. 그러고도 한참을 서 있다 발을 떼려고 했을 때 손목에 부드럽게 닿아 오는 카를로이의 손길이 느껴졌다.

“……잠시만.”

그의 고개가 힘없이 자신의 뒤에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로 가까웠다.

“아주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멀리 떨어진 황궁 연회장의 소음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타국의 정원 안에서 카를로이와 리리안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카를로이와 닿은 피부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단 착각이 들 때쯤 그는 다시 리리안을 놓아주었다. 거짓말처럼 다시 멀어졌다.

“들어가.”

어쩐지 잠긴 듯한 목소리로 카를로이가 속삭였다. 리리안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차마 뒤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혼자 앉아 있을 카를로이를 볼 용기 따위는.

그의 목소리가 왜 잠겼는지 알 것만 같았다.

* * *

연회장에 딸린 응접실에서 마하 황제를 마주한 리리안은 괜히 침을 삼켰다. 밀레닌 노카는 무슨 생각인지 몇 분간 말 한마디 없이 가면을 벗은 리리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키아나는 당황한 얼굴로 시선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아까 정원에 나갔다 오는 것 같던데.”

한참 있다 내뱉은 말은 예상 밖이었다.

“아, 네……. 실내가 조금 답답해서.”

또 침묵. 밀레닌 노카는 또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리리안을 관찰하듯 뜯어보았다. 한참 뒤에 밀레닌이 미소를 지었다. 섬뜩하리만큼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해.”

횡재였다. 리리안은 기쁜 티를 내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카를로이와의 만남에 이미 진이 빠져 있던 상태였다. 정신도 모조리 그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러니 한 번 더 들러 주게. 나와 키아나가 주기적으로 갖는 티 파티에 자네도 오도록 하지.”

횡재는 무슨. 재앙이었다. 리리안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 사실은 제가 몸이 좋지 않아서 이른 시일 내에 마하를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일부러 아파 보이게 화장했다는 건 알았는데, 실제로도 많이 아픈가?”

말문이 막힌 리리안을 보고 밀레닌이 빙긋 웃었다.

“내가 자네를 해치는 것도 아닌데…… 서운할 정도야. 그렇게 다 죽을 사람처럼 꾸미고 오기까지 하다니. 좋은 날에 시체라도 치워야 하나 싶었지 뭐야.”

유창한 크로이센어로 내뱉어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난 그렇게 아무나 해치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티 파티에 오도록 해. 오늘의 일은 잊어 줄 테니.”

내내 미소를 띠고 있던 밀레닌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 이건 부탁이 아니야. 난 부탁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키아나도 잘 알겠지만.”

“……부탁이 아니시라면 굳이 제가 대답을 드릴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답이 하나뿐일 테니.”

리리안의 대답에 옆에 있던 키아나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밀레닌이 소리 내서 웃었다.

“오, 정말 그렇네.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럼 그때 보지.”

밀레닌이 가볍게 손을 까딱거렸다.

“뭐 해? 나가 봐, 이제.”

키아나와 리리안은 결국 더 답하지 못하고 응접실을 나왔다. 그들이 발걸음을 좀 떼자 응접실 안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밀레닌 노카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혹시 미친 사람 아니니?”

리리안이 반쯤은 질린 얼굴로 묻자 키아나는 고개만 저었다.

“가끔 저렇게 웃으세요. 뭐가 또 혼자 재밌으셨나 보죠.”

키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서 그녀가 겪었을 일들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어쨌든 폐, 아니, 부인께서는 그냥 돌아가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제가 알아서 잘 말씀드릴게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아니야, 괜찮아.”

키아나에게 화풀이를 할지도 모르는 데다가 한두 번쯤 어울려 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닐 것이었다. 자신이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면 그 흥미도 빠르게 식을 테니.

* * *

“뭔 놈의 티 파티를 또 해.”

“어디 한번 누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해 보시지. 넌 나만 만만하지?”

사지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다 죽은 얼굴로 카를로이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제 입만 열면 아주 쌍욕이네……. 그래 놓고 나한테 말투 가지고 잔소리를.”

“좀 한순간이라도 닥칠 순 없나?”

“너야말로 대체 어제 뭘 했기에 이틀 만에 얼굴이 이 모양이 됐냐? 미친놈이 날이 갈수록 상판이 왜 이래. 파티에서도 말도 없이 또 사라졌더니만.”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블레이즈의 개소리를 들으며 밀레닌이 여는 같지도 않은 티 파티에 가야 한다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어제 리리안에 대한 생각으로 한숨도 자지 못해서 그런지 더욱 피곤했다.

사람의 욕심은 왜 끝이 없는지 모르겠다. 한 번만 보면 소원이 없겠다 생각했는데, 보고 나니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기분이었다. 그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괴로웠다.

“솔직히 예상 못 한 거 아니잖아? 클라이드 디안이 여기 온 이후로 누님은 내내 이 순간만 기다렸을걸. 자기가 좋아하는 크로이센 인간들 한곳에 모아 놓고 즐거워하고 싶겠지.”

“네가 개소리 쳐 할 시간에 밀레닌을 즐겁게 해 줬으면 저딴 악취미가 생기진 않았을 텐데.”

“야……. 말이 갈수록 심하다? 전쟁을 10년을 해도 지루해하는 사람을 내가 뭘 어떻게 재밌게 해 주냐?”

크로이센의 정원사들이 가꿔 놓아 푸르투와 비슷해 보이는 밀레닌의 정원에 들어서며 카를로이는 애꿎은 머리카락만 헝클어트렸다.

“아. 그리고 한 사람 더 있어. 그 백작 부인네 친구 있잖아. 기어코 그 여자를 부른 모양이더라고. 무도회 때 보니까 그렇게 미인도 아니던데……. 무슨 작위도 없는 여자를 이런 자리에 부르나 몰라.”

카를로이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러다 그 여자까지 마하에 눌러앉으라고 할까 봐 걱……. 너 뭐 하냐? 안 와?”

정원 한가운데 있는 호수 옆에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선 궁중 악단이 마하답지 않은 조용한 음악을 연주 중이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리리안이 보였다. 자신을 보자마자 굳는 얼굴을 보니 리리안 또한 밀레닌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전달받지 못한 게 분명했다.

“오, 왜 멈췄는지 알겠다. 야, 내가 뭘 잘못 봤나 보다. 죽여주는 미인이네.”

블레이즈의 혼잣말에 카를로이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블레이즈를 패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차려야 했다.

“천박한 놈.”

“뭐, 뭐?”

충격받은 블레이즈를 뒤로하고 카를로이는 먼저 걸어갔다. 테이블엔 밀레닌과 리리안을 비롯해 클라이드와 키아나도 앉아 있었다.

“아, 드디어 왔군. 다 동향 사람이라 반가워할 듯해서 한자리에 불렀어.”

자리에 앉는 블레이즈와 카를로이를 보고 밀레닌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달갑지 않은 미소였다.

“우리의 새로운 친구는……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올리비아 뭐였지?”

“……체르입니다.”

리리안이 간신히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이름을 말하는 순간 스스로가 조금 우스워져서 얼굴에 괜히 열이 올랐다. 자신이 누군지 뻔히 아는 사람, 그것도 카를로이 앞에서 이런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카를로이와 자신이 이런 곳에서 한자리에 있게 되는 것도 전부 다 우습고 이상했다.

속이 타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이켰다가 다시 조용히 내려놓았다. 더럽게 맛이 없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카를로이는 그 맛없는 차도 아무렇지 않게 마시고 있었다. 얼굴이 왠지 좋지 않아 보여서 계속 눈길이 갔다.

자신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카를로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리리안은 옆에서 갑작스럽게 들리는 밀레닌의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렸다.

“체르? 남편이 솔타 사람인가 보지?”

“네.”

“그래, 우리 체르 부인께선 마하어가 익숙지 않으시다니 주의해, 블레이즈. 그리고 작위 없는 평민이시라는데…….”

마하 황제는 비꼬거나 사람을 놀릴 때 어울리지도 않게 존대를 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난 이상하더라고. 우리 부인께서는 너무 고상해. 모르고 보면 왕족인 줄 알겠어.”

그러면 뭐 빵이라도 손으로 뜯어 먹어야 하나. 리리안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집안이 몰락하기 전에 배운 것들이 있어서요.”

“아하. 그럼 그때 우리 키아나와 알게 된 사이인가 봐, 체르 부인?”

리리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이즈는 부인이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부인? 그렇다면 남편은 지금 어디에……?”

리리안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오래전에 사별했습니다.”

갑자기 카를로이가 사레가 들린 것처럼 작게 기침하더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런 카를로이를 미친놈 보듯 흘끗 쳐다본 블레이즈는 이내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저런, 홀로되었다니 유감이네.”

전혀 유감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하엔 얼마나 머무를 생각인지?”

“조만간 떠나려고 합니다.”

리리안의 답에 블레이즈가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왜. 볼 것도 많은데 더 즐기다 가지.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카를로이는 블레이즈의 입에 빵이라도 처넣어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밀레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렇게 될 거야. 내가 체르 부인을 위해 준비한 것이 많거든. 안 보고 가면 서운하지. 특히 마하에서 프렐룸을 보지 않는 건 용납할 수 없어.”

프렐룸은 마하 최대 규모의 해상 경기였다. 당황한 듯한 리리안 대신 카를로이가 말을 받았다.

“프렐룸을 구경하던 귀족 몇몇도 죽어 나가지 않았나? 마하는 그런 위험한 경기를 계속 하나 봅니다.”

“귀족들은 고층에 있으니 웬만해선 안전해. 하지만 원래 운이 안 좋은 놈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어쩌다 있는 불운 때문에 재미를 포기할 이유는 없고. 경기장도 다시 정비했으니 별문제 없을 거야.”

마하인들의 무모한 사고방식은 역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카를로이가 질린 듯한 얼굴로 대꾸도 포기하자 밀레닌은 다시 리리안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나저나, 사별한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지?”

예고도 없이 들어오는 사적인 질문에 리리안은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멀쩡히 살아 있는 카를로이를 앞에 두고 대답하는 것도 조금 우스운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남편이 아니기는 하지만.

“사별한 지 오래됐으면 재혼을 할 법도 한데……. 아직 못 잊었나?”

질문은 리리안에게 한 것인데 대답은 블레이즈가 했다.

“원래 사랑은 새 사랑으로 잊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국만큼 새로운 사랑을 하기 좋은 곳이 없는데.”

능글맞은 웃음이 부담스러워져서 시선을 피하던 리리안은 카를로이가 죽일 듯이 블레이즈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블레이즈를 죽이지 못해 아쉽다는 눈빛이던 카를로이는 리리안과 눈을 마주치자 시선을 돌려 버렸다. 자신과 한자리에 있는 게 불편한가 싶어 리리안은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눈치를 보던 키아나가 대화를 이어 감으로써 테이블엔 침묵이 찾아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카를로이와 리리안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하는 대화는 어디 머나먼 세계에서 하는 말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아니, 백작 부인. 그 이상한 책들 좀 사교계에 퍼트리지 말지 그래. 출간되지도 않은 책의 필사본 같던데 내용이 참…….”

“네? 대공 전하께서 하시는 일들보단 덜 자극적일 텐데요, 그 책이. 취향이 아니세요? 하긴, 조금 심심하시죠?”

키아나가 눈치가 없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블레이즈는 괜히 리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 듣는 사람들 오해하게 그 무슨……. 심심하기는. 난 그걸 보다 손이 떨려서 몇 장 읽지도 못했어.”

“아아, 네에.”

블레이즈와 키아나의 대화가 재밌는지 깔깔 웃던 밀레닌 노카는 험악해진 카를로이의 얼굴을 보고 또 웃음을 터트렸다.

“카를로이, 대체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어?”

“글쎄요. 이 티 파티?”

생각보다 친근해 보이는 카를로이와 밀레닌을 보고 리리안은 맛없는 차를 다시금 억지로 들이마셨다.

“널 위해서 연 건데! 서운하게.”

“자기 즐겁자고 하는 일에 왜 항상 다른 사람을 팔아먹는 건지. 밀레닌도 참 변하지 않는군요.”

카를로이의 대답에 블레이즈가 옆에서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벌렸지만 밀레닌은 미소만 지었다.

“신랄하네. 이해해, 체르 부인. 당신 나라의 황제께선 아내들을 잃고 나서 예민해지셨거든. 온 나라가 시끄러웠을 테니 들어 봤겠지?”

그 ‘아내들’을 비롯한 모든 크로이센인들의 입이 한꺼번에 다물렸다.

“저는 그저 계약 상대였는걸요…….”

“키아나 자네야 그런 것 같긴 해. 하지만 황후를 잃고 나서는 카를로이가 내내 저 모양인 것 같던데. 꽤 애틋했나 봐? 델루아의 딸인데도 말이야.”

찻잔을 들고 있던 리리안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카를로이의 시선이 잠시 그 손에 머물렀다.

“밀레닌.”

카를로이의 조용한 부름에 밀레닌이 예의 그 미소 띤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몰라도 그 사람은 재밌는 이야깃거리 삼아 올려질 사람이 아니라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꽤 단호하게 들렸다.

“흐음?”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나로선 마하의 이 과분한 환영식……이 불편한데. 계속 그 사람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하면 크로이센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것 같고.”

“세상에, 그러면 회담은 어쩌고?”

천연덕스러운 밀레닌의 질문에 카를로이는 똑같은 태도로 대꾸했다.

“밀레닌 말대로 아내 잃고 반쯤 돌아 버린 것 같은 내가 회담이 눈에 들어올까. 이해해요, 밀레닌. 당신만큼 반려 잃은 슬픔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험악하게 굴 땐 언제고 다시금 태평해진 카를로이의 태도에 밀레닌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밀레닌 이야기나 해 보지 그래요. 그 전남편은 내 맘에 꼭 들었는데 왜 죽였는지 궁금하더라고. 간도 크게 어떤 여자랑 바람을 피운 거지?”

“야, 말도 마. 그놈은 있잖아…….”

블레이즈가 밀레닌 대신 카를로이의 미끼를 물고 신나게 입을 열었다. 아마 밀레닌에게 보복을 당하겠지만 카를로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블레이즈가 온갖 추임새까지 넣어 가며 말하는 것을 듣던 밀레닌이 미소와 함께 손을 들었다.

“죽은 사람 이야기해 봤자 재수만 없으니 그쯤 해 둬.”

밀레닌이 테이블에서 일어나더니 호수 쪽으로 몸을 틀었다.

“명색이 내 티 파티인데, 지루한 소리만 듣고 가게 하긴 좀 그렇지.”

밀레닌이 무엇을 하려는지 리리안 빼고 모두가 이해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아나는 리리안을 일으켜 호수가 잘 보이는 곳에 서게 했다.

블레이즈가 은근슬쩍 리리안 옆에 서려고 했지만 카를로이가 그 틈을 비집고 섰다. 카를로이의 가슴팍에 가로막힌 블레이즈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를로이를 올려다보았지만, 카를로이는 그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블레이즈는 결국 툴툴거리며 밀레닌 옆에 가서 섰다.

밀레닌이 손을 호수 위에 얹자 잔잔했던 물결 위에서 물방울들이 솟아오르더니 분수처럼 물을 뿜어냈다. 마치 물로 만든 꽃처럼 다섯 갈래로 갈라진 물줄기가 아름답게 흐르더니 그 위에서 꽃들이 피어났다.

궁중 악단의 음악 소리에 흐르는 물소리가 기막히게 맞물렸다. 리리안이 마하에 와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답고, 불쾌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리리안이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자 밀레닌은 만족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밀레닌의 말을 굳이 들을 필욘 없어.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해도 돼.”

갑자기 카를로이가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서 리리안은 옆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게 해도 별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밀레닌의 처리를 맡아 준다는 뜻일까. 막상 리리안은 오늘 티 파티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단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카를로이에겐 좋지 않았나 보다. 묘하게 날카롭던 카를로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리리안은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떠나려 했어.”

“……그래.”

대화가 맥없이 끝나 버린 것 같은 기분에 리리안은 호수가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며 물결치는 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는 걸까 하고 생각할 찰나 카를로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리리안.”

“응.”

불러 놓고 카를로이는 한참 말이 없었다. 흘끗 쳐다보자 그가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결국 그가 내놓은 말은 허무하도록 아무 내용이 없었다.

호수로 다시 시선을 돌리려다 리리안은 밀레닌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자신과 카를로이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이 마주친 밀레닌은 리리안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문득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리리안은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본 적도 없는데 알 리가 없으니.

이 이상한 나라는 카를로이를 만난 뒤로 점점 더 알 수 없는 곳이 되고 있었다. 분명 끔찍하도록 매력이 없는 나라인데, 이상하게 한결 괜찮아진 듯한 기분이었다.

* * *

프렐룸은 마하에서 가장 인기가 많으며 규모가 큰 해상 경기였다.

마하 수도 동쪽에는 토사가 쌓여 생긴 쌍둥이 호수가 있었는데, 그곳엔 수생 동물 벨루아마르가 살았다. 고대에 멸종한 마물이 퇴화하여 생긴 동물이라 크기가 크고 포악했다.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었고, 꼬리엔 가시라고밖엔 볼 수 없는 것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예전엔 그 꼬리에 독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프렐룸은 노예 둘이 벨루아마르에 탄 채로 벌이는 경기였다. 황족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마하인이라면 모두 호수 주위를 둘러싸듯 만들어진 경기장에서 프렐룸을 보는 것을 가장 즐거운 취미로 여겼다. 그리고 밀레닌은 또 한 번 리리안을 초대했다. 프렐룸에.

“내키지 않으시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건 어때요? 그렇게 썩 재밌는 구경도 아닐 텐데요. 마하인들은 그런 야만스러운 것에서 무슨 재미를 찾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구경하던 사람까지 죽어 나가도 그렇게 인기가 많다니, 원.”

키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리리안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티 파티가 끝나고 자리를 뜨려는 리리안에게 다가와 밀레닌이 속삭였었다.

<자네를 귀찮게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체르 부인. 약속해. 게다가 마하까지 와서 프렐룸을 보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체르’라는 거짓 성을 발음하는 밀레닌의 어조는 꽤 의미심장했다. 마하 황제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매양 웃고 있는 겉모습만 봐서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프렐룸까지 보고 나면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리리안은 멍하니 생각했다. 프렐룸을 보러 가면 또 카를로이를 마주하게 될까. 리리안은 카를로이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떠내려가지 못한 흙처럼 마음에 고여 있는 미련을 떨쳐 버려야만 진정으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조심히 올라오세요.”

먼저 올라간 키아나가 손을 내밀자 리리안이 받아들였다. 황족과 고위 귀족들의 자리는 경기장 최고층이었다. 높아질수록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리리안이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에 들어서자 블레이즈가 부리나케 달려 나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평민이라고 알려진 여자에게 표하기엔 좀 과한 예의였다. 혹시 몰라 망까지 쓰고 나왔는데 소름 끼치는 눈썰미였다.

“또 보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부인.”

존대까지? 리리안은 쉬지도 않고 눈웃음을 쳐 대는 마하의 대공을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봤다. 마하에 있으면서 들은 소문은 마하 황제에 대한 것만 있지 않았다. 그 남동생인 대공도 만만치 않게 유명했다. 마하에서 가장 잘난 얼굴과 가장 가벼운 아랫도리를 가진 사람이라나.

“아, 네에…….”

“얼굴을 가리셔도 아름다움은 가려지지 않는군요.”

리리안으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재미없는 수작질에 여자들이 넘어간다는 말인가? 얼굴도 잘났다고는 하는데 리리안의 취향은 아니었다. 머리색도 평범, 눈 색도 평범하고……. 눈웃음 하나 정도나 봐줄 법한데 지나치게 헤퍼서 매력이 반감되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리리안의 표정을 보고 당황한 블레이즈가 무어라 말을 더 이으려 하는데 뒤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자리니까 비켜.”

평소보다 더 험악해 보이는 카를로이가 블레이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나라에 네 자리가 어딨냐?”

“손님 대접을 그렇게 형편없이 하고 싶나? 도량을 좀 넓히도록 해, 대공. 그리고 옆으로 비켜.”

밥맛 떨어지는 카를로이의 표정에 블레이즈는 욕을 두어 번 하고 밀레닌의 옆으로 갔다.

“야, 왜 자꾸 방해를 해? 여자한텐 별 관심도 없는 놈이……. 너 그냥 내가 아니꼬운 거지?”

카를로이가 블레이즈를 상대하지 않겠단 기색을 물씬 풍기는 바람에 블레이즈는 결국 밀레닌을 붙잡고 떠들 수밖에 없었다.

“저놈 성격이 갈수록 이상해져요.”

친동생이 외지인에게 푸대접을 받고 투덜거리면 불쌍해해 줘도 될 텐데 밀레닌은 뭐가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폐하께선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 겁니까?”

“크로이센인들의 재롱이 즐겁단다, 사랑하는 동생아.”

“무슨 재롱요? 카를로이 저건 건방진 거지, 재롱이 아니에요.”

“재롱도 못 부리면서 건방지기만 한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블레이즈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만큼 밀레닌 노카에게 기는 사람이 어딨다고 건방지단 소리를…….

“뻔히 보이는 연극을 언제, 어떻게 그만둘 건지 궁금하네. 내가 본 연극 중에 가장 재밌어.”

“저는 누님이 당최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알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어, 블레이즈. 그러니 너는 후계가 못 되는 것이지.”

엄청 원하는 것도 아닌데, 뭐. 블레이즈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려 카를로이와 크로이센의 정체 모를 미인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놈이 관심이 있나 싶은 마음에 슬쩍 관찰도 해 보았지만 카를로이의 표정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블레이즈가 그렇게 헛발질을 하는 동안 카를로이는 애써 앞만 보며 리리안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대공과도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엮일 생각 없는걸.”

리리안이 모처럼 진심을 담아서 대답했다. 저런 정신 나간 남매와 누가 엮이고 싶어 한단 말인가.

“여기는 위험한데 왜 왔어.”

“한 번쯤 구경은 하고 싶어서. 나랑 계속 마주치는 게 싫은가 보네.”

리리안의 말에 앞만 보던 카를로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리리안을 바라봤다. 카를로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리리안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의 표정은 지독하게 슬퍼 보였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카를로이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걸.”

그는 잠시 목이 막힌 듯 숨을 한 번 쉬었다.

“널 싫어하는 게…… 가능했던 적이 없어. 널 싫어해야 한다고 믿어서,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끊임없이 노력했는데…….”

반쯤 억눌린 듯한 그의 목소리가 리리안의 가슴을 조여 왔다.

“온전히 성공한 적이 없어. 그런 건.”

말끝에 체념과도 같은 힘없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애초에 그따위 걸 노력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말을 끝낸 카를로이가 옆에 놓인 술잔을 마치 물을 마시듯 들이켰다.

리리안은 이제 카를로이의 그 말을 머리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했다. 그가 어떻게 그녀를 미워하려고 노력했는지,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 그 실패가 그를 얼마나 미치게 만들었는지도.

그리고 리리안 자신도 카를로이를 온전히 미워하는 것에 실패했다. 지금 자신의 마음이 뻔히 보여 주듯. 푸르투에서의 마지막 날들 동안엔 그가 미웠고, 원망스러웠지만 이제 그 감정들도 퇴색되어 뭐라 이름 붙이기도 힘들어졌다.

리리안과 카를로이가 몰아치는 감정에 말을 잃은 사이 프렐룸은 시작되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프렐룸은 잔인했다. 벨루아마르가 리리안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섭고 포악한 동물이었던 탓이었다.

마하인들의 환호성은 끝없이 커져만 가는데, 리리안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벨루아마르에 탄 노예들이었다. 멀리 있어도 인형처럼 다뤄지는 그들의 표정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불필요하게 이입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기가 힘들었다.

벨루아마르의 비늘이나 꼬리가 스칠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지탱하고 있는 노예들이 괴로운 듯 몸을 비틀었다.

리리안은 눈을 감았다. 키아나의 말이 맞았다. 대체 이런 경기에서 어떤 재미를 느끼는지 리리안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이런 잔인한 건 드니스여도 싫어했을 게 분명했다.

리리안은 한 손으로 목걸이를 틈 하나 없도록 감싸 쥐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나머지 한 손이 떨리기 시작해서 주먹을 꼭 쥐었다. 문득 떨리는 손에 온기가 느껴져서 리리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카를로이의 손이 주먹을 감싸듯 부드럽게 맞닿아 왔다. 그 온기에 몸의 긴장이 풀려서 리리안은 숨을 다시 편히 쉴 수 있었다.

경기는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적색 옷을 입은 노예의 벨루아마르가 쓰러질 뻔하자 그 반동 때문에 생겨난 엄청난 물살이 경기장 아래쪽을 덮쳤다. 아래쪽 상황은 생각지도 않는지 위층에 앉은 마하의 귀족들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건배를 하고 있었다.

“……금방 끝날 거야.”

카를로이의 말에 리리안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는 자신이 보기에도 승패가 대충 가름이 난 것처럼 보였다.

적색 옷의 노예가 내던진 창에 상대편 노예의 벨루아마르의 꼬리가 반 넘게 찢겨 나간 상태였다. 벨루아마르가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가 온 경기장을 뒤흔들어 구경꾼들이 모두 귀를 틀어막았다.

벨루아마르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미친 듯이, 꼭 떼어 버리려는 듯 다친 꼬리를 흔들자 그 반동으로 청색 옷의 노예가 떨어져서 호수에 빠졌다. 이미 부상이 심했던 노예가 시간이 지나도 호수 위로 올라오지 않자 구경꾼들이 함성을 질렀다. 벨루아마르의 비명과 맞먹는 소음이었다.

온 경기장이 소란으로 가득 차고 호수는 다친 벨루아마르가 만들어 내는 물살 때문에 난장판이었다.

경기를 정리하려는 듯 밀레닌 노카가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벨루아마르가 마지막으로 크게 울음을 내뱉더니 꼬리를 세게 휘둘렀다. 물살과 함께 꼬리가 떨어져 나갔다. 벨루아마르의 반동으로 인해 떨어진 꼬리가 그대로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갔다.

구경꾼들의 함성이 비명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각 층의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이 경기장 안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리리안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카를로이가 그녀를 밀듯이 감싸 안았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리리안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카를로이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카를로이가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리안이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이자 카를로이가 다시 그녀를 품에 가두듯 안았다.

“네가, 네가 또 잘못됐으면. 난…….”

그는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카를로이가 몸을 떠는 것이 느껴져서 리리안은 잠자코 그의 가슴에 기댔다. 카를로이의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터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밀레닌과 블레이즈가 뭐라고 소리를 치고 군인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소리가 주변에서 들렸다. 순간 리리안은 의아해졌다. 왜 내 주변이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지.

“당장 치료사를 불러!”

블레이즈가 고함치는 것이 들렸다.

치료사를 왜? 누가 다쳤나? 리리안의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들이 갑자기 맞춰졌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리리안은 카를로이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살폈다.

“난 괜찮아.”

그런 리리안을 안심시키려는 듯 카를로이가 속삭였지만, 오히려 그게 리리안의 의심을 더 부추겼다. 곧 리리안은 불안의 원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칼.”

충격을 받은 리리안이 소리치듯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카를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스친 거야. 걱정할 정도 아니야.”

리리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블레이즈가 득달같이 소리를 쳤다.

“이 미친 새끼 뭐라는 거야. 피가 철철 나는데. 치료사! 여기!”

마하의 치료사가 다가와 급하게 카를로이의 등을 지혈하는 것을 리리안이 멍하니 바라봤다.

시선 너머로 밀레닌 노카가 보였다. 밀레닌은 리리안이 본 적 없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혹감과 낭패감이 어린 표정이었다. 밀레닌은 골치 아프게 됐다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시종들과 군인들 몇몇을 불렀다.

“마리나 궁의 가장 좋은 침실로 크로이센의 황제를 데려가. 응급 처치를 여기서 하고 가면 별 탈 없을 거야.”

지혈을 받은 카를로이는 시종들의 부축을 거절하고 혼자 일어났다.

“그 정도 아니라니까.”

카를로이의 손을 잡고 리리안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이 미친놈이 아까부터 왜 자꾸 이래. 벨루아마르 꼬리가 뭔지 몰라? 뭘 자꾸 괜찮다고 지랄이야.”

블레이즈는 이 상황 때문에 충격이 컸는지 쉴 새 없이 마하어로 말하고 있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키아나와 돌아가.”

“넌, 너는 어쩌고.”

카를로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밀레닌이 다소 짜증스러운 얼굴로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다 헛짓거리 그만하고 같이 가도록 해.”

그 말에 카를로이와 리리안이 동시에 밀레닌을 쳐다보았다. 밀레닌은 그 둘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시종 몇몇을 더 불렀다.

“크로이센의 황후도 같이 마리나 궁으로 데려가. 이왕이면 진정제를 좀 주고. 남편과 같이 있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하게 두든가 하고.”

밀레닌의 말에 카를로이는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잊고 멍하니 밀레닌을 쳐다봤다. 그건 리리안이나 블레이즈, 키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꼈는지 밀레닌 노카는 이제 웃는 척도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인상을 구겼다.

“난 블레이즈 같은 머저리 새끼가 아니야. 누굴 속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만히 있다가 얻어맞은 블레이즈가 잠시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밀레닌은 피곤하다는 듯 손가락만 까딱거렸다.

“그러니 부디 크로이센의 황제 부부께선 그쯤 해 두고 좀 가라는 대로 가도록 해.”

여유가 사라진 밀레닌의 마하 억양은 날카로웠다. 카를로이는 더 말을 얹지 않고 리리안을 데리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키아나와 클라이드까지 빠져나가자 블레이즈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밀레닌을 불렀다.

“나중에. 지금은 네 없는 눈치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야.”

블레이즈는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쯧. 황후가 정체를 숨기고 마하에 들어온 걸로 좀 재미를 보려고 했더니……. 카를로이 저 약은 놈이 프렐룸 때문에 다친 걸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텐데. 분명 이걸로 우위를 점하려고 들 테지.”

그제야 대충 상황을 이해한 블레이즈가 미약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밀레닌이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튕기자 호수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올라와 밀레닌 주변에 떨어진 더러운 것들을 치웠다.

“재미 좀 보려다 내가 불운의 주인공이 될 줄이야. 한동안 프렐룸은 꼴도 보기 싫어지겠어. 블레이즈, 뒷정리는 네가 좀 해.”

밀레닌이 깨끗해진 길 사이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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