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리리안, 그리고 카를로이(2)
사람에게서 느껴져야 할 생기라는 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지금 카를로이의 모습은 알렉시스 뒤냐가 카를로이에게 그토록 바라던 모습이었다.
저 혼자 있을 때는 어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카를로이는 절대 자신의 상태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예전 어느 때처럼 자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일 처리도 매끄러워졌다. 델루아도 없어졌겠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적절히 이용해 원하는 것들은 적당히 이루어 냈다.
귀족들에겐 당근도, 채찍도 주어졌고 그들은 받는 것에 따라 정신없이 끌려가다 반발을 해야 하는지 어쩌는지도 까먹게 되었다. 황후가 몸이 좋지 않아 기약 없이 라 소르티오로 요양 갔다는 말에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 정도로.
버릇처럼 말을 날카롭게 할 때는 여전히 있었지만, 억양 없는 말투에다가 얼굴에 표정이 아예 없다 보니 예민해 보인다기보단 위압감을 줬다.
미쳐서 말도 안 되는 자살을 제 딴엔 계획이랍시고 준비하던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분명히 흡족해야 했다. 저게 바로 뒤냐가 바라던 모습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도 있나? 물론 공은 베르니를 자극하느니 둘이 조용히 해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왜 마음에 들지 않을까.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개적인 압박이 있어야 그나마 입이라도 열 거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폐하의 뜻대로 하는 게 더 적합해 보입니다.”
순순한 대답에 카를로이가 처음으로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엔 살이 붙어 있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다과 접시를 흘끗 보았다. 카를로이가 손도 대지 않으니 장식품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즐겨 찾던 호르뒤나 복숭아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도록 치우라고 했다니 무슨 심정인지 알 만도 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쳐다보는지 모르겠군. 불만이 있을 때 꼭 날 그렇게 쳐다보잖아, 공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에이모스 라이트도 이번 간담회에 참석키로 했습니다.”
라 소르티오에 가 있는 치료사의 이름이 나오자 펜을 쥐고 있던 카를로이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학자들이 베르니 마법과 독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할 텐데 알아 두어야 황후 치료에 도움이 될 듯해서 불렀습니다.”
“……따로 결과를 보내 주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치료사가 이곳으로 오면.”
황제는 입술만 달싹거리다 결국 황후의 이름은 담지 않았다.
“치료는 어떻게 하고.”
“황후께서 상태가 많이 안정되셔서 며칠 정도는 비워도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시녀장과 백작 부인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고요.”
“……그래.”
카를로이는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참담함을 숨기려 노력했다. 역시 리리안을 아프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저 자신이었음이 분명했다. 리리안은 자신과 떨어져 있기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애써 멀쩡한 척 노력하는 황제를 보다 알렉시스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이렇게 사시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내 의미는 그다지 중요치 않아.”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대답에 알렉시스는 탓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니라 자신임을 깨달았다. 이건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은 카를로이가 아니라 자신한테 해야 하는 말이었다.
언젠가 카를로이에게 그랬던가. 응석받이로 자라게 할지언정 차라리 사랑을 퍼 주며 키우게 할 걸 그랬다고. 그때는 힐난의 의미로 비꼬듯 던진 말이었지만 지금은 진심이었다.
카를로이는 저나 아델라이드와는 다른 사람이었고, 그들은 그가 이토록 텅 빈 삶을 살게 할 권리도, 자격도 없었다. 그 삶에 하나 남은 의미에 저렇게 매달려 있다고 이젠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다 자초했다. 늙어서 드는 후회는 젊을 때의 분노보다 조금 더 씁쓸했다.
* * *
요새는 왠지 나가기가 싫었다. 치료사는 나아지고 있다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했지만 악몽은 여전했고, 머리는 아직도 어지러웠고. 또 약은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라 소르티오는 구경할 만큼 했고, 또 변덕처럼 모든 게 시큰둥해졌다.
라 소르티오가 아름다운 만큼, 그 아름다움을 더 많이 알게 되는 만큼 더 슬퍼졌다. 많이도 바라지 않았다. 이 중에 딱 하나라도 드니스가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누구나 다 이런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보려고 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키아나의 어머니라는 사람도, 알렉시스가 잃은 아델라이드도 드니스만큼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사흘 동안이나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리리안 옆을 메리앤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성였다.
“그러고 보니 별실도 좀 정리를 해 두어야 하는데. 정원이야 정원사가 손질하겠지만, 악기나 그림 배치는 내가 관리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시녀장께서 도와주시겠어요?”
“네?”
“내키지 않으셔도 괜찮고요. 늙은이 혼자 쉬엄쉬엄하면 되지요.”
메리앤은 올리비아의 말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나갔다. 올리비아는 리리안이 걱정도 되지 않는지 뭘 독촉하는 법이 없었다.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혼자 남아 멍하니 누워 있는 리리안의 눈에 침대 옆에 올라와 있는 책이 보였다. 올리비아 도나타가 올려 둔 것이 분명한. 권유도 참 그녀답게 한다 싶었다.
리리안은 제목도 적혀 있지 않은 책장을 성의 없이 넘겼다. 첫 장에 ‘죽음을 상대하는 법’이라는 제목이 대충 적혀 있었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위로로 느껴졌다. 그녀를 달래 주기 위한 책인 듯했다. 뻔한 것을 예상하며 한 장을 넘겼다.
<나는 분명히 아버지를 깔끔히 죽였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시체가 사라지기 전까진.>
예상했던 내용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이야기가 펼쳐지자 당황한 리리안이 몇 장을 더 들여다봤다. 어쩌면 이 주인공도 델루아 공작 같은 개새끼를 아버지로 둔 것일지 몰랐다.
읽은 지 몇 줄도 안 돼서 리리안은 그것이 순진한 착각임을 알게 되었다. 전혀 아니었다. 이 소설 속 아버지는 멀쩡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만 멀쩡하지 내용은 완전히…….
몇 장 읽지 않아도 내용이 너무 천박하고 자극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개연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주인공은 아버지가 데려온 새어머니에게 반해 아버지를 죽였다.
리리안으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델루아에 비하면 저렇게 상식적인 아버지를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분수를 모르는 주인공에게 화가 나서 리리안은 책을 계속 읽었다.
“아니…….”
읽을수록 몹시도 통속적이고 저급한 내용이었다. 대낮에 보기 낯부끄러운 장면도 있었다. 키아나 로덴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선물이랍시고 주고 간 걸까.
‘이런’ 책을 처음 읽는 리리안은 예상보다 훨씬 떨어지는 수준에 충격을 받으며 책장을 계속 넘겼다. 분명 욕을 하면서 대충 넘겼는데 어느새 장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맨 끝장에 가서야 아버지의 시체가 사라지는데 거기서 책이 끝이 났다. 심지어 새어머니도 같이 실종되었다. 허탈했다.
“이게 뭐야.”
일개 책 때문에 이런 짜증을 느낀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리리안에게 책은 언제나 지루하고 어렵고 무서웠다. 델루아 공작이 부랴부랴 그녀를 교육할 때 폭력을 행사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푸르투에 들어가고 나서도 책은 꼴 보기도 싫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이렇게 다른 방면으로 짜증을 선사하면서 궁금함까지 유발하는 책은 처음이었다. 문득 이러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해져서 책을 내려놓으려 하는데 메리앤과 제인이 눈을 빛내며 들어왔다.
“어머, 폐하. 그 책 읽으셨어요?”
“너무 흥미진진하지 않아요?”
모녀가 동시에 열성적으로 물어 오는 바람에 리리안은 그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는 다음 권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다음 권이 있어?”
“그게……. 사실은 레이디 로덴이 푸르투에서 자기 전서구를 한 마리 주고 갔거든요. 폐하께서 이 책 다음 권을 읽고 싶어 하시면 꼭 그 전서구를 보내라고…….”
불현듯 키아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생각 없애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키아나 로덴은 틀리지 않았다. 정말로 그 책을 읽는 동안은 생각이 사라지기는 했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누가 생각 같은 걸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전서구를 렉셈 소르타까지 데리고 왔어?”
“혹시 모르니까요……. 그런데 레이디 로덴도 참 약은 게 저나 제인이 아니라 폐하라고 딱 집어 말하지 뭐예요.”
메리앤의 말은 키아나에게 전서구를 보내자는 은근한 요청이나 다름없었다. 리리안은 내키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올리비아 도나타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폐하께서도 독서를 좋아하시는군요. 마침 라 소르티오엔 방대한 책을 소장한 서재가 있는데 언제 한번 구경하세요. 원하신다면요.”
싫으면 말고 식의 말투였지만 리리안은 자신이 빠른 시일 내에 그 서재에 가게 될 것을 알았다. 예상이 가는 일이었다.
포기한 듯 고개를 내젓던 리리안은 자신의 생각에 무언가 어색함을 느꼈다. 어색함의 정체를 알아내려 고민하다 리리안은 깨달았다. 라 소르티오의 삶이 예상 가능해졌다는 것을. 자신은 이 삶에 적응하고 있었다.
* * *
키아나에게 전서구를 보낸 후 조금 우울해질 때면 리리안은 그 책을 다시 읽었다. 언제 읽어도 충격적인 책이었다. 새삼 그 책을 마치 교양서적이라도 되는 듯 우아하게 넘기고 있던 올리비아가 떠올랐다.
“자네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
꽃을 화병에 꽂고 있던 올리비아가 황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황후는 아직도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진 않았다.
“음. 수도의 책답다…… 라는 생각을 했지요.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신선했답니다.”
“렉셈 소르타의 책은 좀 다른가?”
“세상에나, 그럼요. 솔타의 글들은 아름답지요.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요.”
항상 평온한 분위기였던 올리비아에게서 자부심으로 인한 미세한 열기가 느껴졌다.
“직접 보시면 좋을 텐데. 라 소르티오의 서재를 구경시켜 드리고 싶은데……. 오늘은 일이 있어서요.”
“일?”
그러고 보니 올리비아도 사생활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매일 이곳에 붙어 있어도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다. 리리안은 자신이 무심했음을 깨닫고 잠시 민망해했다.
손녀뻘의 황후를 보고 올리비아는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델피난 강에서 손자 부부를 만나기로 했어요. 카누 수리를 부탁했었는데 오늘 들고 오겠다 해서요.”
“카누?”
“오늘은 델피난에서 배를 타고 풍광을 즐기기 좋은 날이니까요. 그 풍광의 아름다움을 제가 말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손자면…….”
“제 아들의 자식이지요. 언제 커서 결혼까지 했는지. 아직 신혼이랍니다.”
“이왕 가는데 아들도 보고 오지 그러나.”
올리비아는 꽃을 다 정리한 후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며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아들이 좀 오래전에 루푸스로 가서 말이에요.”
순간적으로 당황한 리리안이 한참 뒤에 대꾸했다.
“……유감이네.”
“뭘요. 너무 오래전 일이에요.”
올리비아는 그저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베르니와의 마지막 국지전에서 전사했어요. 참 인생이란 게……. 그 전쟁은 사상자가 가장 적었었는데도. 운이 좋지 않았지요.”
리리안이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올리비아는 날씨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제가 델피난 강이 아름답다고 자랑만 하고 혼자 가기엔 너무 양심이 찔리네요. 폐하께서도 같이 가시겠어요? 시녀장이나 레이디 제인과 같이 가도 되고요.”
괜히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고 내심 후회 중이던 리리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위로는 못 하겠으니 대신 수락이라도.
델피난 강으로 나들이를 간다는 말에 주방장 벡스는 바구니에 한껏 간식과 포도주를 담아 주었다. 황후는 아직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백작 부인의 핀잔에 주스로 바꾸기는 했지만.
밖으로 나온 리리안은 마차에 타기 전에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하세요?”
“햇빛이 좋아서.”
렉셈 소르타의 햇빛은 리리안을 스쳐 지나가지 않아서, 오랫동안 머물다 스며들어서 그게 좋았다.
아주 잠깐, 차디찬 푸르투와 그곳에 혼자 있을 누군가가 머리에 떠올랐다.
“……가자.”
리리안은 애써 생각을 떨쳐 버리곤 마차에 올라탔다.
델피난 강은 멀지 않았다. 상류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올리비아의 손자 부부로 보이는 사람 둘이 서 있었다.
“할머니.”
“콘스탄스.”
손자를 가볍게 안는 올리비아의 얼굴에 크고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리리안은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올리비아의 손자와 그 부인은 뒤에 내리는 리리안을 보고 깜짝 놀라서 예를 취했다.
“황후 폐하와 함께 델피난을 즐겨도 괜찮겠지?”
“당연한 말씀을 하세요. 델피난은 언제 누구에게 내보여도 자랑스럽죠.”
올리비아의 질문에 콘스탄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이 올리비아를 똑 닮아 있었다.
카누를 처음 타 보는 리리안은 모든 게 어색했다. 크기가 별로 크지 않은 배도, 왠지 까딱하면 떨어질 것 같은 높이도, 불안한 자세도.
하지만 그 모든 어색함을 상쇄하는 아름다움이 델피난에는 있었다. 하류로 천천히 내려가는 카누 위에서 리리안은 렉셈 소르타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목걸이가 제대로 걸려 있는지 알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강 너머로 보이는 땅에는 소풍을 나온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너무 아름다워요.”
속삭이듯 감탄을 내뱉는 제인을 보고 올리비아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삶도, 이렇게 평화롭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도 있었다.
강물이 아름답게 물결치는 것을 보던 리리안의 시선이 이윽고 신혼부부에게 갔다. 둘은 끊임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도 어느 순간 밀어를 속삭였다. 서로의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불현듯 카를로이와 보냈던 밤이 떠올랐다. 저렇게 달콤함만 있지는 않았었던 밤을. 카를로이와 자신은 아무리 가까워져도 그 틈에 슬픔이 끼어 있었다. 그때는 그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무슨 심정으로 그날 밤 그녀를 안다가도 밀어내고, 또 안았는지.
차라리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길 바라던 손짓. 자신의 사람이 맞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던 목소리…….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그때 리리안에게 매달리고 있던 거였다.
그 손길과 목소리가 생각을 침범한 순간 갑자기 목이 타서 리리안은 다시 평화롭기만 한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제께서도 이곳을 좋아하시겠어.”
리리안의 입에서 나오는 황제 소리에 메리앤은 얼마나 놀랐는지 자세까지 고쳐 앉았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께서요? 그분은 이곳에 전혀 관심이 없으셔서. 찾아오신 적도 없고요.”
“왜요? 이렇게 아름다운데…….”
제인이 의아함을 표했다.
“흠. 오셔 봤자 공연히 아델라이드 님 생각만 나실 텐데 굳이 오고 싶진 않으시겠죠. 또 푸르투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 않겠어요?”
그 매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인 올리비아가 제법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난 수도보다는 렉셈 소르타가 좋은 것 같아. 푸르투보다는 라 소르티오가…….”
리리안이 무의식적으로 대꾸했다. 솔직한 황후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세 명의 솔타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솔타 사람의 사랑을 받기는 아주 쉬웠다. 솔타를 사랑하면 되었다.
“그 전부터도 생각했지만, 황후께서는 정말 고상한 취향을 가지고 계시네요. 이런 분이 계셔야 크로이센의 품격도 올라가지요.”
올리비아의 말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진실한 말이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리리안은 그만 옅게 미소 짓고 말았다. 얼마 만에 지어 본 미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콘스탄스의 새 신부는 눈을 깜빡였다.
“제가 봤던 사람 중에 황후께서 가장 아름다우신 것 같아요.”
그 말에 민망해진 리리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하지만 리리안을 뺀 모든 사람들은 뭐가 재밌는지 웃고 있었다. 옅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리리안은 다시 풍경을 눈에 담았다. 다른 사람의 몫만큼 더 봐 두어야 하니까.
이윽고 살아 있으면서도 이런 것을 모르고 사는 남자에게 다시 생각이 닿았다. 푸르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엔투라룸도, 렉셈 소르타의 자랑인 라 소르티오에도 그에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고 나쁜 기억으로만 존재했다.
옆에 보일 때는 그렇게 괴롭더니 이제 또 심심하면 이렇게 생각을 파고든다. 어쩌면 옆에 없어서 가능한 일이겠지만…….
리리안은 자신이 라 소르티오를 떠나게 되면, 카를로이도 꼭 한 번쯤 이곳을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태양을, 강을, 아름다운 도시를. 세상엔 우리가 보지 못한 게 많았다고, 누군가가 리리안 대신 그에게 전해 줬으면 했다.
카누를 타고 라 소르티오에 돌아와서 리리안은 처음으로 저녁으로 올려진 음식을 전부 비웠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허기였다. 그 모습을 보고 메리앤이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식당이 숙연해져서 리리안은 또다시 민망해졌다.
“벡스의 음식이 정말 맛있죠? 전 정말이지 벡스 만한 요리사는 없다고 생각해요.”
올리비아의 말에 벡스는 짐짓 겸손한 척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물론 황후가 처음으로 음식을 다 비우긴 했지만, 밖에 오랫동안 있다 왔으니 배가 고팠을 테니까.
“아유, 백작 부인. 황후 폐하께선 무려 푸르투에 계셨는걸요.”
“음. 푸르투보다 더 맛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맛있는걸.”
델루아의 음식은 생각도 하기 싫었고, 푸르투의 음식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언제나 체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뿐이다.
칭찬에 으레 들어갈 법한 호들갑이라든가 밝은 말투, 환한 표정 따위는 하나도 없었지만, 리리안의 건조한 말투엔 진심이 있었다.
벡스의 우락부락한 얼굴 만면에 웃음이 퍼졌다. 정육점 주인이 더 잘 어울릴 법한 외모가 웃음 한 번에 부드러워졌다. 그는 리리안에게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고 리리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 소르티오의 삶은 이렇듯 평화로웠다. 별것도 아닌 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웃었고, 즐거워했다. 푸르투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는데.
리리안은 라 소르티오가 푸르투보다 나은 점을 나날이 하나씩 배워 가며, 그만큼 마음 한쪽이 어딘가 무거워졌다. 푸르투에 놔두고 온 것을 떠올리며.
* * *
라르투아에서는 왕이, 마하에서는 마하 황제의 동생인 대공이 대표로 크로이센에 왔다. 첫날은 간단한 환영 연회가 있었고, 둘째 날이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간담회였다. 그리고 베르니에서는 셋째 날에 도착할 것이고 그날 있을 대담은 청문회라 부르는 게 더 적절할 것이었다.
“엔투라룸은 또 왜 못 보여 준다는 거야? 이번엔 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더니.”
듣는 사람이 없자 마하에서 온 마하 황제의 남동생, 블레이즈가 카를로이에게 친근한 말투와 마하어로 물어 왔다. 카를로이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수리 중이라.”
“거짓말하지 마. 여기 도착했을 때 네가 어딨냐고 물었더니 엔투라룸에 있다고 하던데.”
“수리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빈틈없는 차가운 대답에 블레이즈는 한량 같은 미소를 지었다. 황태제가 될 수도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치고는 가벼운 태도였다.
“무슨 일 있는 거지? 너 상판이 개판이야. 그리고 꽃이라고는 질색했잖아.”
카를로이는 대답 대신 술을 마셨다. 마하인들은 하나같이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특히나 이런 상태로는.
엔투라룸에 있었던 것은 맞았지만 수리 중인 건 아니었다. 그곳은 멀쩡했다. 그곳을 드나들었던 유일한 사람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카를로이도 자신이 뭐 하러 항상 그곳에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 가면 리리안이 떠올라 괴로울 뿐인데도, 발걸음은 그곳을 향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그곳에서 밤을 새우곤 했다. 깨어 있으면 엔투라룸에서 웃고 있던 리리안이 떠올라 해소되지 않는 그리움 때문에 괴로웠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잠을 자면 리리안을 상처 주는 자신의 모습만 나오니까.
“뭔가 대충 알 거 같기도. 부인도 둘이나 있던 새끼가, 하나는 아프다고 푸르투에 없다지, 다른 하나는 딴 놈이랑 마하에 와 있지.”
카를로이는 못 들은 척 다시 술을 마셨다. 마하 황제보단 블레이즈가 상대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블레이즈가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지나치게 많다는 놈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네 둘째 부인이 마하 사교계를 먹은 건 아냐? 보통내기가 아냐. 우리 누님까지 홀라당 잡아먹었어.”
“……부인 아니니 말 좀 가려서 하지. 그리고 황태제가 될지도 모른다던데, 말투를 좀 신경 써야 하지 않나?”
“진짜 그 자리 줄 거라고 생각하냐? 누님이? 설마. 말 돌리지 말고. 황후는 진짜 아픈 거 맞아? 네놈한테 질려서 도망간 거지?”
반쯤은 농담이었지만, 카를로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험악해지는 걸 보고 블레이즈는 입을 다물었다.
카를로이와는 그가 황자 시절 마하에 왔을 때 얼굴을 익힌 사이였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척을 할 법도 한데 카를로이는 변한 게 없었다. 카를로이는 황자 시절에도 주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마하를 매일 뒤집어 놓는 남매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무관심뿐이라 선대 마하 황제는 카를로이를 꽤 마음에 들어 하기도 했었다.
“얼굴 좀 풀어라. 한 대 치겠네. 하긴 너한테 맞고 오면 누님은 좋아하시겠지만.”
황후가 그 유명한 한스 델루아의 딸이었다니 엄청난 미인일 텐데 보이지 않아서 블레이즈로서는 아쉽기 그지없었다.
“근데 델루아의 딸을 황후로 계속 둬도 되나? 반란으로 뒈졌다며. 그 새끼도 여간 미친놈이 아냐.”
“……그런 개새끼의 딸 아니야.”
카를로이의 입에서 나오는 욕설에 놀란 것도 잠시, 블레이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린지.
카를로이는 피로감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간담회 때 자세한 건 알게 될 테니 이제 그만 닥쳐.”
“……못 본 사이 말이 험해졌네. 그러고 보니까 술도……. 너 원래 이렇게 많이 마셨나?”
한계치에 다다른 카를로이가 뭐라고 하려는 찰나, 알렉시스가 다가왔다.
“대공 전하.”
“오, 공작. 오랜만이야.”
알렉시스는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를 꺼내며 블레이즈를 카를로이와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카를로이는 한숨을 내쉬며 야외 정원 쪽으로 나갔다.
생각 이상으로 연회가 힘들었다. 모든 것이 리리안을 떠올리게 만드는 와중에 멀쩡한 척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연회에서 자신이 리리안을 어떻게 대했었는지 그딴 것들이 계속 떠오르는 바람에 돌아 버릴 뻔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기억날 게 많은 건지.
오늘은 술도 너무 많이 마셨다. 이제 자제해야 할 것 같았다. 술은 괴로움을 잊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그는 어느 날부터 술에 취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약 복용량이 늘어나고 있는데 술까지 마시니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맛이 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살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도 그는 강박적으로 리리안과의 약속을 지키겠단 생각을 했다. 이거라도, 한 번이라도 지켜 주고 싶어서.
“리리안…….”
그는 분수대 위에 앉아 멍하니 중얼거렸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생각해 봤다. 리리안의 말대로, 알렉시스의 말대로 왜 자신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게 리리안이 되었나 싶어서.
하지만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14년 전 그날, 자신은 오리 새끼처럼 리리안을 따르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리리안이 이본느일 때 그녀를 미워하면서, 너무 미워해서 딱 그만큼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 아무리 미워도, 그에게 남은 건 그녀뿐이었으니. 불가항력이었다.
괴로워서 차라리 누가 그를 죽여 줬으면 했다. 약속을 저버릴 자신은 없어서 이렇게 비겁하게. 이 말을 내뱉을 때의 리리안이 이런 마음이었을까 싶었다.
카를로이는 마지막 술잔을 비워 내며 다시 마음을 잡았다. 버텨야 한다고.
* * *
간담회 시작 전, 치료사 에이모스 라이트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새 치료사는 괜찮으십니까?”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은 수준으론 힘들 텐데요. 지금 폐하 상태를 보니…….”
역시 능력으로는 크로이센 제일인지 카를로이의 괜찮은 척도 잘 통하지 않았다.
“가슴 통증도 아직 심하시지요? 그 부분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약은 못 만들었으니까요.”
“별로.”
습관적인 황제의 거짓말에 치료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지.
“오늘 간담회 이후엔 좀 더 쓸 만한 약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황후는…… 좀 어떻지?”
“생각보단 괜찮으십니다. 확실히 렉셈 소르타가 도움이 되는 것 같더군요. 솔리스 백작 부인도 다정한 분이시고요.”
치료사의 대답에 불안했던 마음이 잔잔해졌다. 그거면 됐다. 카를로이는 그거면 됐다. 리리안이 괜찮은 것.
“두통이나 악몽에 아직 좀 시달리시는 것 같긴 한데……. 베르니 마법에 오래 시달리셔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도 오늘 간담회가 도움이 되면 좋겠지요.”
안심했던 마음이 금세 사그라들었다. 하긴 바로 괜찮아질 리는 없었다.
“……잘 부탁하네.”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부탁이란 말에 치료사는 잠깐 놀랐다가 정신을 차리곤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담회에서는 크로이센의 학회가 주축이 되어 라르투아와 마하의 마법사들과 함께 연구한 것들의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베르니 마법사의 목걸이, 브로치의 기록, 델루아에 남아 있던 흔적 등을 통해 조사한 것이었다.
“우선 이 목걸이는 대략 100년 전쯤 만들어진 마력의 결정석으로 보입니다. 속성은 고대에 잠시 존재했다고 구전으로 내려오던 정신 마법인 것 같은데 어떻게 갑자기 발현되었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던 블레이즈가 몸을 기울이고 카를로이에게 속삭였다.
“고대에 정신 마법이 있었어?”
카를로이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학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무지는 신경 쓰지 않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결정석 자체는 유전적 상속이 불가능한 마법을 보존해 물려주는 방법으로 대륙 초기에나 볼 수 있었던 형태인데, 작동 원리도 같다면 아마 특정 사람에게만 반응을 할 것이고, 결정석 없이는 마법이 불가능할 것이라 추측되고요.”
각 나라의 서기관들이 빠르게 설명을 받아 적었다. 적힌 것들이 모두 내일 베르니와의 자리에서 질문으로 쓰일 것이었다.
“비밀 누설 금지 마법의 경우에는, 엄밀히 말하면 머리의 기억을 통제하는 방식이라 조종 마법에 가깝습니다만, 지속력은 여타 다른 마법과 같이 한시적인 듯합니다. 하지만 다른 마법과는 달리 자주 사용할 경우 사람에게 큰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메리앤을 비롯한 피해자의 예시를 바탕으로 추측한 마법을 행하는 방식, 부작용 등의 설명이 이어지자 카를로이의 가슴이 점점 더 조여 왔다. 리리안의 고통이 앞에서 재현되는 듯했다. 답답한 듯 가슴을 쳐 대던 리리안이 떠올랐다.
개 같은 마법사는 델루아와 함께 허무하게 죽어 버려 화를 풀 길이 없었다. 그러니 그 감정들이 돌아갈 곳도 하나밖에 없었다. 카를로이 저 자신.
하지만 괴로움으로 점철된 자기혐오보다도 강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리움이었다. 정말 한 번만이라도 다시 리리안을 보고 싶었다.
* * *
리리안이 예상했듯 올리비아 도나타는 얼마 되지 않아 아주 자연스럽게 서재를 구경시켜 주었다. 솔타의 책들은 올리비아의 말대로 아름답고 흥미로웠다. 지나치게 화려한 솔타 특유의 수사가 좀 과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올리비아에겐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리리안에겐 이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던 푸르투와는 달리 라 소르티오에서는 무언가를 하고 나면 하루가 지나가 있었다. 드니스의 생각, 아니면 괴로웠던 과거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푸르투와는 달랐다.
서재의 책꽂이로 이루어진 문을 여니 올리비아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별실이 나타났다.
“아름답죠?”
리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꽃들이 정갈하게 핀 실내 정원 한가운데로는 티 테이블이 있었고, 그 옆엔 악기들이 보기 좋게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연주할 것처럼.
그리고 유리문 너머에는 초록빛 식물들 사이에 캔버스들이 자리해 있었다. 벽면에는 올리비아가 손수 골랐을 것 같은 그림들이 조화롭게 걸려 있었다.
“푸르투의 그림과는 좀 다르지 않나요?”
미술에 그다지 조예가 있지 않은 리리안은 벽면에 걸린 풍경화와 인물화를 유심히 보았다. 뭐라 딱 설명할 순 없지만 느낌이 완전히 다르긴 했다. 재료를 다르게 쓴 느낌이었다.
“솔타에선 유화가 유행한 지 좀 되었거든요. 푸르투에서는 관심이 없다지만.”
리리안은 유화라는 단어도 처음 들어 보았다. 공작은 예술과 같은 고상한 영역까지 리리안에게 깊게 가르칠 여유가 없었다. 푸르투의 예술 사조를 대충 익히기도 바빴는데 솔타에서나 유행한다는 그림을 알 리가 없었다. 대신 그는 아무도 리리안에게 그딴 것에 대해 물을 수 없게 해 주겠다고 장담하기는 했다.
“그림 그려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
올리비아가 유리문 너머로 시선을 흘끗 줬다.
“한번 그려 보시겠어요? 혹시나 관심이 있으시다면 말이에요. 시간 한번 빨리 가는 일이긴 하거든요.”
생전 붓을 들어 보기는커녕 작품을 제대로 감상해 본 적도 없었던 리리안은 올리비아의 질문에 그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물론 저도 알고는 있답니다. 푸르투에서는 그림이 귀족이 할 만한 취미가 아니라고 한다는 것 말이에요. 특히 유화처럼 재료가…… 좀 까다로운 것들은 더욱이나. 왜 그러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리리안의 표정을 무어라 해석한 건지 올리비아는 부연 설명을 하며 유리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는 렉셈 소르타니까요.”
마치 그것이면 모든 것이 다 설명된다는,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태도였다.
“예술만큼 인간을 짐승과 구분시키는 것이 없지요.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도…….”
문이 열리자 햇빛이 들어왔다.
“사람에게만 마음을 쓴다면 삶이란 게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올리비아답지 않게 약간은 단호한 말투였다.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들에도 마음을 주어야 인생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 같아요.”
리리안에게 하는 말 같지만 또 올리비아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캔버스를 보는 표정에서 어렴풋이 느껴졌다.
리리안은 딱히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았지만 올리비아는 이미 자연스럽게 헌 옷을 드레스에 두르고 물감을 풀고 있었다. 리리안은 조용히 올리비아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름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물론 누구나 그런 것들에 마음을 줄 수 있는 여건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도 제가 운이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요.”
올리비아가 물감 묻힌 붓 하나를 리리안에게 건네주었다.
“황후께서도…… 이제는 운이 좀 좋으실 때가 되었지요.”
무의식적으로 붓을 받아 들며 리리안은 올리비아의 말을 곱씹었다. 인생에 뿌리를 내린다는 말은 낯설게 들렸다. 언제나 떠돌듯 발을 간신히 딛고 있는 느낌만을 받아 왔기에.
그런 것이 붓을 휘두른다고 되는 일인지 고민하던 리리안은 이윽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은 인생에 대해서도 너무 모른다고. 제대로 알 기회도 없었으니 한 번 알아본다고 해가 될 것도 없었다. 그러다 실패한대도 잃을 것이 없을 테니까.
* * *
베르니 마법에 대한 보고가 끝나자 학자들은 치료사들과 함께 분석한 베르니 독에 대해서 보고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 전만큼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마법이 머리에 가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듣고, 이제는 그 독이 리리안에게 무슨 고통을 주었는지 또 들어야 했다. 그것이 얼마나 치료하기 힘든 일인지도.
멀쩡한 척 미동 없이 간담회에 앉아 있는 것도 지치는데 끝나고 또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마하에 좀 오라니까. 즉위하고 나서 어떻게 한 번을 안 와. 깊게 대화를 해야지. 누님도 바라고.”
연회에 참석한다는 말은 지독한 블레이즈를, 그것도 술이 들어간 블레이즈를 상대해야 한다는 뜻과도 같았다.
“즉위를 했으니까.”
“너 며칠 없다고 여기 망하냐?”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도록 가벼운 말투였다. 분명 저렇게 말할 때마다 마하 황제가 먼지 나듯 블레이즈를 두들겨 팼던 것 같은데, 아직도 저런 말투라니. 폭력이 만사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닌 듯했다.
“반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사정 뻔히 아는데 거짓말할래? 쉽게 진압했다며. 그 덕에 국고도 빵빵하다던데. 베르니도 맛 가고 크로이센의 사정도 변했는데 우리가 또 세금 이야기를 잘 해 봐야지. 군사 이야기는 또 어떻고.”
무슨 개소리일까. 카를로이는 홀로 생각했다. 전혀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은 제게 남은 유일한 것을 잃었는데.
숨이 턱 막혀서 카를로이는 무의식적으로 들고만 있던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올해는 뒤냐를 보내지.”
“아, 또 너무 거리를 두네. 옛정으로 편하게 이야기해 보자고 초대하는 거잖아. 그리고 누님이 그 양반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하긴 그전에 보내던 등신들보단 낫겠다만.”
그 등신 중엔 로덴 후작도 있었다. 지금은 딸을 잃은 슬픔에 두문불출하고 있다던가.
“근데 크로이센의 황후께선 솔타에서 언제 돌아오시는 건지?”
호기심 가득한 눈빛과 말투에 카를로이는 금세 기분이 더러워졌다. 자신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로 저깟 놈의 호기심 대상까지 되어야 한다니. 마땅한 대접은 받지도 못했는데.
대답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 카를로이는 가만히 블레이즈를 쳐다보기만 했다. 입을 열면 고상하지 못한 언사가 나올 것 같았다.
“야……. 너 진짜 사람 죽이겠다.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블레이즈가 한 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델루아의 딸이라 사이도 서로 개 같다더니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얼굴이 좀 날카로워져서 그런지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미친놈 같아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하긴 몸 크기만 봐도 블레이즈가 우습게 볼 크기는 아니긴 했다. 블레이즈는 자신이 마하의 대공이 아니었다면 진즉 카를로이부터 물리적 응징이 가해졌을 거라 짐작했다.
“알았어. 이제 네 부인들 이야기 안 꺼내, 됐지.”
부인‘들’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지쳐서 카를로이는 블레이즈를 무시하고 술을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로이는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되었다. 술은 리리안에 대한 생각을 부추겼다. 아니, 부추겼다기보단, 온 힘을 다해 닫아 두었던 것이 터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미 간담회가 그를 한계 직전까지 몰고 갔다. 카를로이는 소란한 틈을 타 술병을 든 채로 별궁을 빠져나왔다.
황후궁으로 가는 길은 낯설었다. 리리안이 떠나고 나서 카를로이는 단 한 번도 그곳을 찾지 않았다. 리리안의 부재를 두 눈으로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제 손으로 놓쳐 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큰 자리였는지 거대한 궁이 자비 없이 보여 줄 것이 뻔했기에.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발이 멋대로 움직였다.
카를로이가 침실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이곳에서조차 리리안에게 상처를 준 기억이 떠올랐다. 이미 고통이란 고통은 죄다 받고 있었을 사람에게.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게 단 하나 있다면 이것뿐입니다. 당신이 없어지는 것.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것.>
왜 그렇게까지 했었는지 이젠 잘 기억나지도 않는데 그 행위 자체만은 여전히 선명했다.
가장 괴로운 것은 그것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아니었다. 리리안에게도 저런 기억이 선명할까 봐 겁이 났다. 자신한테도 이토록이나 생생한데 리리안에게 그러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문을 열고 들어간 침실은 예상했던 것만큼 휑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실내인데도 카를로이는 가슴이 뻥 뚫려 허한 기분이 들었다.
흔적 하나 찾아볼 수 없도록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 위에는 목걸이 하나가 있었다. 카를로이는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앉아 그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늑대의 눈물이었다.
리리안은 자신과 연결된 것은 모두 이곳에 남겨 두고 떠났다. 좋은 추억 하나 없는 목걸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카를로이는 침대에 누웠다.
“리리안…….”
리리안의 향이라도 나길 바랐지만, 그마저도 그에겐 과분한 일인 듯했다.
팔 하나는 늘어져 술병 하나를 간신히 들고 있었고, 다른 팔 하나는 맥없이 그의 눈을 덮고 있었다.
“……오늘만 봐주라.”
술에 늘어져서 카를로이는 중얼거렸다. 들을 사람은 없는데도.
“약속 지키려고 노력, 하고 있거든. 지금까지, 계속. 등신처럼 우는 것도 그만뒀고……. 술은…… 오늘만 좀.”
문득 가슴에 이젠 익숙해진 통증이 느껴졌다. 고통만 익숙하지 이 통증이 연상시키는 기억은 여전히 괴로웠다. 간담회에서의 말이 뒤섞여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대충 살지는 않으려고 하는데. 아니, 하고 있거든.”
말이 두서없이 나왔다. 이렇게 말을 하다 보니 정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빌어먹을 머저리처럼, 미친 새끼처럼 스스로가 느껴지기는 하는데,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너무 힘들다. 하루만 좀 봐주라…….”
문득 이곳에서 리리안을 안았던 날이 떠올랐다. 이 침대 위에서, 그의 밑에서 끊임없이 눈물만 흘리던 리리안.
카를로이의 입에서 나지막이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 눈물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 볼 걸 그랬다. 그때는,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다는 것에 미쳐서, 그 여자도 자신에게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바람에 취해서 생각지 못했다.
그게 바로 리리안이 그에게 말하는 방식이었을 텐데. 어쩌면 그래서 그가 리리안의 눈물을 미친놈처럼 사랑하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 투명한 방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졌다. 시체를 가르면 아마 흔적도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없는데, 분명히 없는데……. 왜 어디를 가도 너만 있을까. 가장 아픈 너만.”
하긴, 가장 아프다는 말도 어폐가 있다. 카를로이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푸르투에서 리리안은 언제나 아팠을 테니까.
“오늘만 이럴게. 내일부턴 다시. 어떻게든 살게. 제대로……. 약속 지킨다고 했으니까.”
어쨌든 지킬 수 있는 게 남았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니까 한 번만. 꿈에라도 나와 주면 안 되나……. 알아, 미친 새끼가 바라는 것도 많다는 거.”
카를로이는 옆에 놓여 있던 늑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런데 어차피 개새끼니까……. 조금만 더 개새끼여도 되겠지. 꿈 정도에서는 너 봐도 괜찮은 거겠지.”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머물렀던 이곳에서라면 그래도, 어쩌면…….
* * *
<라 소르티오로 가 계신 줄은 몰랐어요. 렉셈 소르타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죠. 저는 크로이센이 가장 좋지만. 그렇지 않나요? 여기저기 가 봐도 크로이센 만한 곳은 없는 것 같아요.
아무튼 로덴에 말을 해 뒀으니 곧 라 소르티오로 책이 갈 거예요.>
리리안은 멕서스 호수에 앉아 키아나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옆에선 메리앤과 제인이 자수를 두고 있었고, 올리비아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벡스가 만든 케이크가 있었다. 겉모양이 너무나 아름다워 벡스의 영혼 조각이 들어갔을지도 모른단 의심이 들 정도였다. 물론 맛도 있었다.
“레이디 로덴이 뭐라고 하나요? 책을 보내 준대요?”
메리앤과 제인의 열렬한 관심에 리리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 새어머니란 여자가 아버지와 짰다고 생각해요.”
“에이, 아니에요.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아버지 쪽이 해코지를 한 거죠.”
모녀의 대립을 지켜보던 리리안은 책의 결말보다도, 저 논쟁의 끝이 더 궁금하단 생각을 했다.
<……마하는 흥미로운 곳이에요. 이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정이 가지는 않아요. 마하인들은 하나같이 너무…….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네요.
하지만 한 번쯤은 와 볼 만한 곳인 것 같아요. 폐하께서도 혹시 올 생각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곳 거처가 괜찮아서 폐하 모시기에도 흠이 없을 것 같아요.>
키아나의 편지에는 푸르투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마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리리안 저라면 푸르투가 아닌 곳은 그곳이 어디든 좋을 텐데.
“저도 마하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어요. 듣기로는 재밌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림을 그리던 올리비아가 말했다. 리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올리비아라면 가 보지 못한 게 아니라 가 보지 않은 것일 거라고.
“……아름답네.”
올리비아의 그림을 보고 리리안이 한마디 하자 올리비아는 그저 웃어 보였다.
“폐하께선 칭찬이 과하세요.”
하지만 진심이었다. 리리안은 요새 올리비아에게 이것저것 배우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그녀가 많은 것에 소질이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림도 잘 그렸으며, 류트와 비올을 비롯한 악기들도 곧잘 다뤄 리리안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올리비아는 솔타인들은 다 이 정도를 다룬다며 거만한 태도로 겸손한 말을 했다.
반면에 리리안 자신은 음악에는 큰 소질이 없었다. 악기 연주는 흥미롭기는 했지만 발전이 더뎠다. 하지만 그림 그리는 것은 달랐다. 올리비아가 재능이 있다며 칭찬을 너무 해 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리리안이 보기에도 아주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드니스가 알았다면 정말 자랑스러워했을 것 같았다. 뭐든지 조금이라도 잘하는 게 하나 있다면 좋은 거니까.
그리고 정말로 잡생각이 잊힐 만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요새는 인물화를 배우면서 기억 속의 드니스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럴 때면 종종 일어나던 마음의 풍랑도 잔잔해졌다.
그래서일까. 머리와 마음이 정리가 될수록, 사람 하나가 유독 자주 떠올랐다. 요새는 악몽 대신 카를로이가 꿈에 자주 나와 잠을 설쳤다.
<루…….>
분명 드니스가 제 이름을 부르던 때를 떠올린 것인데 마지막엔 항상 카를로이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 드니스와 카를로이밖에 없어서 그런 걸까.
그 이름을 부르던 카를로이의 목소리는 언제나 절박했다. 부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토해 내듯 그렇게 부르다가도, 그 이름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죄를 지은 것처럼 굴었다.
<차라리 솔직히, 제발 한 번만이라도 솔직히 말을 해.>
분명 그의 말들은 그녀에게 상처 주기 위한 것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억 속 카를로이의 목소리는 언제나 저토록 절실했다.
분명 자신만이 그에게 애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요사이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들 속 카를로이는 언제나 자신한테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이본느에게 루를 겹쳐 본 적이 없다고 매몰차게 말했지만, 그녀가 이본느일 때도, 루일 때도 그는 그녀 앞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목소리로 무너지고 빌었다.
이내 리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카를로이를 보는 것이 괴로워서 도망쳤는데, 어쩐지 더 자주 생각이 났다. 이제 와서 무슨…….
드니스를 잃은 자신조차 이 삶에 천천히 적응해 가고 있었다. 카를로이 또한 지금쯤 괜찮아졌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폐하께서 마하어를 배우고 싶다 하셔서 사람을 좀 구해 봤어요.”
카를로이 생각에 빠져 있던 리리안을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끄집어냈다.
“룩스 자작 부인이 마하인이거든요. 자작과 결혼해 렉셈 소르타에서 산 지 꽤 되어서 크로이센어도 잘하니 괜찮을 거예요.”
리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하에 눌러살 것도 아니라면 마하어까지 배울 필요는 없었지만, 바빠지고 싶었다. 그리고 리리안은 바빠지는 데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제격이란 걸 깨달았다.
게다가 언제까지 라 소르티오에서 황후로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모를 일이니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 두고 싶었다.
* * *
베르니의 왕 단테 리치오는 혈색이 나빠 보이는 초췌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거만한 표정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를 보고 앉아 있는 카를로이를 확인하고 나서는 그 표정도 금세 수그러들었다.
그러고도 베르니의 왕은 답변을 여러 번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그가 그나마 제대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카를로이가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숨기지 않았을 때였다.
“베르니가 이렇게 꿍꿍이를 모를 짓만 하면 아무래도 내가 편한 길을 택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꿍꿍이랄 게.”
“무슨 속인지 모를 나라를 옆에 두고 사느니, 그 나라를 지도에서 지우는 게 낫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그게 안전할 테니까요.”
반란을 진압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여유도 없을 듯한데 그게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크로이센의 젊은 황제를 베르니 왕이 고깝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친애하는 베르니의 왕께서는…… 아무래도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은데.”
냉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말투로 크로이센의 황제가 말을 이었다.
“왜 베르니의 이딴 짓이 크로이센만 자극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제정신 박힌 나라라면 당연히, 베르니를 불안하다 여기지 않겠습니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런 짓을 했는데.”
그제야 베르니의 왕은 그 자리에 모여 있는 대리자들을 보았다.
라르투아가 베르니와 섣불리 전쟁하려 들지 않는 것은 둘 사이를 가로막는 험준한 마케아 산맥 때문이었다. 마하가 베르니를 침공하지 않았던 것은 사이에 있는 크로이센이 길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리고 크로이센은…….
“나는 델루아와는 다릅니다. 델루아는 베르니를 가지고 덕을 보아야 하니 마하와 손잡지 않았겠지만, 난 그딴 건 관심이 없어서. 물론 별 볼 것도 없는 베르니 땅도 마찬가지로 관심이 없지만…….”
건조한 말투로 말하던 카를로이는 눈빛으로 블레이즈를 가리켰다.
“그런데 마하는 좀 다르거든. 베르니도 어디다 써먹을 곳이 있다고 믿는 나라라 관심도 있어 보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대공?”
블레이즈가 실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희 황제께서는 관심이 아주 지대하시지요.”
“그러니 아무래도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예 밀테를 통해 베르니로 가는 길을 만들어 마하에게 열어 주자……. 뭐, 이런 생각. 그 대가로 마하에게 보답도 좀 받고.”
베르니 같은 나라를 옆에 두고 사느니 그 정도 비용을 치르는 게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더 나았다.
“멀리 갈 것 없이 크로이센이 직접 해도 되긴 합니다. 내부의 쥐새끼도 죽었는데 이젠 신경 쓸 것도 없고……. 당신네들을 없애 준다면 라르투아가 고마워서 지원을 해 줄 테니.”
라르투아의 왕까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단테 리치오는 의욕을 잃었다. 그 기색을 읽고 카를로이가 말을 이었다.
“정신 마법이 핏줄을 통해 발현되게 한 모양인데, 공주의 아들인 마지막 마법사까지 죽었으니 이젠 숨길 필요도 없지 않나? 어차피 같은 세대에서 둘이 발현되기도 힘들다니 남은 놈은 없을 테고.”
카를로이가 생각보다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을 깨달은 베르니의 왕의 얼굴에서 마지막 의지까지 사라졌다. 단테 리치오는 꽤 고분고분하게 자신이 아는 것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미친 근친혼을 통해 자신의 윗윗대에서 처음 발현되었다는 둥……. 유전이 될 거란 보장이 없어서 고대의 결정석 형태를 따왔다는 둥…….
왕의 말에 따르면 베르니의 공주가 주로 하던 것은 감정을 조종하는 정신 마법의 일종인 듯했다. 그 와중에도 피오르라 불리던 베르니의 마법사와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긋기는 했지만, 참관한 학자와 치료사가 쓸 만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기에 카를로이는 이 정도는 넘어가기로 했다.
“베르니를 저대로 놔둘 생각이야? 분명 계속 저럴 텐데.”
마하로 돌아가기 직전 블레이즈가 카를로이에게 물었다. 카를로이는 별 대답이 없었지만, 그 얼굴에서 블레이즈는 답을 읽었다.
“너……. 사실대로 말하면 넘어가 주겠다는 말 순 거짓말이었구나.”
카를로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블레이즈가 빨리 꺼지길 바라는 표정이었다.
“왜, 왜. 어떻게 할 건데? 무슨 생각인데? 너 진짜 마하 한번 와야겠다. 심도 깊은 대화가 필요한 것 같은데. 우리 누님도 환장할 주제고.”
“무탈히 지내길 바랍니다, 대공.”
무정한 작별 인사에 블레이즈는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올해도 저놈을 마하에서 보는 건 포기해야 할 듯싶었다.
* * *
드니스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캔버스 사이즈도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완성했을 때는 어느덧 라 소르티오에서 시간을 보낸 지 두 달이 지났을 때였다.
리리안은 이제 기본적인 악기 연주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마하어도 조금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읽은 책도 꽤 많았다. 키아나의 그 이상한 책을 포함해서. 그림은 매일 하는 취미가 되었다.
이런 잡다한 것들 때문에 살고 싶어졌냐 하면 그것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덕분에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들기만 하진 않다는 걸 알았다.
캔버스 위에서 웃고 있는 드니스를 보고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리리안은 직감했다. 이젠 라 소르티오를 떠나도 좋을 때였다. 최대한 크로이센과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두통과 악몽의 빈도도 눈에 띄게 줄었다. 치료사가 새로운 약을 만들었다더니 확실히 예전보다는 잘 통했다.
“폐하.”
멕서스 호수에서 캔버스를 보고 있던 리리안의 뒤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르투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그 말에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손님이 알렉시스 뒤냐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리리안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알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알렉시스를 보고 약간 실망했으니, 마음이 내려앉은 이유는 기대감 때문일 거였다.
한심하게 느껴지는 마음을 다잡고 리리안은 호수에서 알렉시스 뒤냐를 만났다. 응접실로 가서 만나겠다고 하자 알렉시스는 괜찮다며 직접 호수까지 왔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알려 드릴 것도 있고, 설명해 드릴 것도 있어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알렉시스의 얼굴을 보니 일기장의 구절들이 괜히 머릿속을 떠돌았다. 한편으론 궁금했다. 아직도 카를로이를 미워하는지.
“델루아로부터 환수한 재산 중 일부가 폐하께 귀속되었습니다.”
“왜 나한테…….”
“그렇게 놀라실 일은 아닙니다. 델루아를 죽인 공이 있지 않으십니까.”
리리안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단한 목적을 가지고 죽인 것도 아니거니와, 그렇다 해도 델루아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알렉시스는 리리안의 의문을 알았지만 구태여 답하진 않았다. 카를로이가 그 짓을 하려고 귀족들을 상대로 마치 협잡꾼처럼 굴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폐하께서는 이제 법적으로도 델루아가 아니시니까요. 혹시 다른 가문의 양녀로 들어갈 의향이 있으시다면 제가.”
“아니, 그런 건 됐네. 생각해 봤는데 굳이 성이 필요하다면……. 엄마 이름을 성으로 쓸 생각이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럼.”
알렉시스는 간단하게 리리안에게 귀속된 재산 종류와 규모에 대해 설명했다. 델루아에게서 몰수한 재산이라기에 델루아 영지의 것을 받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설명이 끝나자 공작과 황후 사이에는 더 할 말이 남지 않았다.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알렉시스의 물음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젓던 리리안이 동작을 멈췄다.
“이런 걸 받고 난 뒤에 할 말은 아니겠지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게 간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리리안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곧 있으면 라 소르티오를 떠나려고 하네.”
“그럼 어디로 가시려고…….”
“당장은 아마 마하로 가게 되겠지. 그 뒤는 생각해 봐야 할 테고.”
렉셈 소르타를 떠나서 푸르투가 아니라 마하로 간다면 그 뜻은 뻔했다.
“그러니 내가 더는 황후일 수는 없을 거야.”
마음을 정리한 듯한 황후의 말에 알렉시스는 푸르투에 남겨져 있는 조카를 떠올렸다. 영혼이 반쯤 죽은 채로 강박적으로 삶을 이어 나가고 있는 카를로이를.
“알겠습니다.”
알렉시스의 순순한 대답에도 리리안은 놀라지 않았다. 그날, 카를로이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던 날, 카를로이도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어차피 그 자리는 자신의 자리였던 적도 없었다.
할 말이 없자 이만 자리를 뜨려는 알렉시스를 보고 리리안은 한참을 망설였다. 아까부터 알렉시스를 보면서 느꼈던 미약한 죄책감 때문에 결국 리리안은 입을 열고 말았다.
“……공의 일기를 읽었어. 여기에 있던 일기.”
리리안은 나무의 구멍에서 일기를 빼 들고 알렉시스에게 건네주었다.
“미안하네. 훔쳐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알고 싶었어. 자네는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 모든 걸 견뎠는지.”
알렉시스는 물끄러미 자신의 일기를 내려다보았다.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텐데요. 부끄러운 마음만 가득하니.”
“어쨌든 공도 살아 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내게 뭔가 보여 준 셈이지.”
알렉시스는 일기를 넘겨보려는 듯 손으로 일기장을 쓸더니 이내 손짓을 멈췄다. 나무 밑에 있던 돌을 줍고,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어 일기장과 묶었다. 그러더니 알렉시스는 일기장을 조용히 멕서스 호수에 빠트렸다. 일기장은 소리 하나 없이 밑으로 가라앉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리리안이 할 말도 잃고 알렉시스를 쳐다보았다.
“이제 제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서 말입니다.”
알렉시스는 어쩐지 홀가분해 보였다.
“이젠 화내지 않고도 아델라이드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 애를 너무 오랫동안 제 감정에 묶어 두었으니, 보내 줄 때도 되었지요. 저기 쏟아 낸 감정 때문에 그 애가 원치 않을 일들을 하기도 했고…….”
말끝을 흐린 알렉시스는 이내 리리안에게 예를 취했다.
“감히 바라건대, 황후께서도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괜찮아지시기를.”
왠지 꼭 사과라도 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뒤냐.”
자리를 뜨려는 알렉시스를 리리안은 충동적으로 붙잡았다. 스스로에게 놀라서 그다음에 할 말을 잊을 정도로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아, 그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듣게 될지 몰라서 무서운 건지.
알렉시스는 그런 리리안을 보다 조용히 대답했다.
“그분은 괜찮으십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확히 그녀가 하고 싶은 질문을 알아챈 듯한 대답에 리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구나, 이제 괜찮아졌구나.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카를로이를 생각하면 언제나 물먹은 듯 무거워지는 마음이 아주 약간,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공은 이제,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나?”
알렉시스는 그 질문에 잠시 고민하듯 골몰한 표정을 지었다.
“밉지는 않습니다. 보고 있으면 심경이 복잡해지긴 하는데…… 밉진 않습니다. 사실 저는 폐하와는 다르게 미워할 자격도 없지요.”
알렉시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라 소르티오를 떠났다.
리리안은 호숫가 의자에 앉아 캔버스 위의 드니스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알렉시스의 말을 곱씹으면서. 자신은 아직도 드니스의 죽음에 화가 나는 건지, 카를로이를 생각하면 어떤 마음이 드는지 고민하면서. 대체 어떤 마음이기에 그가 불쑥불쑥 제 머리를 헤집고 다니는지.
* * *
리리안이 라 소르티오뿐만 아니라 황후 자리를 떠나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도 카를로이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 예상했다는 듯 덤덤하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처음 며칠 동안은.
점점 더 반송장 같이 변해 가는 카를로이의 얼굴은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갔다. 차라리 쓰러지거나 죽겠다며 우는소리를 하면 나을 텐데, 그 몰골로도 그는 변함없이 살아갔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같은 시간 동안 일을 하고. 남들 앞이라고 멀쩡히 말을 하고.
크로이센의 옛날 개혁 군주도 이 정도로 일을 하진 않았을 텐데 카를로이는 없으면 만들어서 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에게 푸르투에 묵으라며 반강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묶어 두곤 영지들을 하나씩 뒤집었다.
알렉시스도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잔소리가 통하는 인간도 아니고,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이리저리 나라를 열심히 다듬는다는데 뭐라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며칠 후, 아셀의 고자질을 통해 알렉시스는 카를로이가 오밤중에 황후의 침실에서 송장처럼 누워 혼잣말처럼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또 왔다고 뭐라 하겠지. 그래도 오래 참았는데. 한 달 만이잖아.”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폐하.”
카를로이가 눈을 뜨더니 알렉시스를 몇 초간 바라봤다. 이내 뻔뻔하게도 다시 눈을 감기까지 했다.
“폐하.”
“그냥 나가. 미치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할 말을 어떻게 알았는진 모르겠지만, 미리 선수를 치는 것으로 보아 그래, 아주 미치진 않았나 보다 싶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미칠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모른 척하고 나가. 그러고 나면 다시 괜찮아질 테니까.”
“차라리 한번 보고 오십시오.”
“뭘.”
“라 소르티오에 가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오라는 말입니다. 한심하게 이러고 있지 마시고.”
카를로이는 답이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황후가 보러 와도 된단 말은 하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맞는 듯했다. 알렉시스는 순간 이성을 잃고 카를로이의 머리라도 쥐어박을 뻔했다.
“보러 오지 말란 말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누가 가서 말을 걸랍니까, 데려오랍니까. 가서 그냥 얼굴이라도 보고 오란 말입니다.”
마지막 이성을 부여잡고 황제 대접을 해 주긴 했는데, 알렉시스도 사람이라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미친 새끼를 두고 황후에게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한 자신을 대신 한 대 치고 싶었다.
“이번에 보지 않으면 언제 보게 될지도 모를 텐데 정신 차리고 갔다 오십시오.”
“……그래도 될까.”
머저리같이 굴지 말고 일어나라는 말이 목 끝까지 나오고, 발로 침대를 차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알렉시스는 참았다.
“안 가시면 황후께 지금이라도 가서 폐하 상태를 말씀드릴 겁니다.”
대신 협박을 했다. 그 말에 카를로이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알렉시스는 카를로이가 뭐라고 한 소리 하기 전에 침실을 나가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메리앤에게 전할 편지를 아셀에게 주고 아셀을 먼저 출발시켰다. 카를로이가 조용히 들어갈 수 있도록 사전에 라 소르티오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
메리앤에겐 황후를 아침에 멕서스 호수로 데리고 나와 주면 좋겠다고 적었다.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도와 달라는 말도 적었다.
가도 될까 어쩔까 하던 카를로이는 막상 판을 깔아 주니 놀랍도록 뻔뻔한 얼굴로, 빠른 속도로 푸르투를 출발했다. 마음은 이미 라 소르티오에 가 있는 듯한 모양이라 뭐라고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 * *
카를로이가 라 소르티오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해가 뜨고 나서였다. 소르타의 그 헤픈 태양이 밝은 빛으로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비추고 있었다.
“시녀장이 황후 데리고 나온댔어요. 호수 가로 가까이까진 안 갈 테니까 여기서 보래요.”
아셀은 분위기에 맞지 않게 혼자 신나 보였다. 요새 알렉시스에게 잡혀 반강제적으로 개인 수업을 듣는다더니 오랜만에 나와서 신난 모양이었다.
멕서스 호수 근처를 카를로이는 초조한 얼굴로 서성였다. 뭐에 미쳐서 이곳으로 달려오기는 했는데 오고 나니 불안해졌다. 혹시라도 리리안이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봐. 그러면 또 그게 그녀를 상처 입힐까 봐.
“폐하!”
아셀이 카를로이를 잡아끌며 속삭였다. 멀리서 인영 여럿이 보였다. 그중에서 리리안만이 보였다. 리리안을 알아보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버거울 정도로.
“와, 그래도 안색이 좋아졌다. 그죠.”
아셀이 해맑게 중얼거렸다. 카를로이도 알 수 있었다. 푸르투에서 마지막으로 본 리리안보다 지금의 리리안이 훨씬 건강해 보였다. 아직도 너무 마른 듯했지만.
카를로이는 햇빛을 향해 목을 꺾어 대는 풀들처럼 하염없이 리리안을 바라봤다. 태양 아래 서 있는 리리안은 그 빛과 잘 어울렸다.
솔리스 백작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무어라고 말을 걸자 리리안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본 순간 카를로이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리리안이 울지 않는다. 울지 않는 걸 넘어서 웃기까지 한다. 빌어먹게도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가자.”
“예? 벌써요? 얼마 보지도 않았잖아요.”
“이제 됐어.”
어리둥절해하는 아셀을 데리고 카를로이는 멕서스를 빠져나왔다.
리리안은 이제 그의 옆에 있지 않아서, 매번 그녀를 울리기만 하던 그가 옆에 없어서, 그래서 웃을 수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카를로이는 괜찮았다. 그거면 됐다.
영영 그녀를 볼 수 없게 되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리리안이 울지 않으니까. 그 온전한 공간에 자신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의 세계를 자신의 존재로 인해 망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마차 안에서 아셀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난 괜찮아.”
카를로이가 조용히 대답했다. 렉셈 소르타의 태양이 뿌리는 빛이 창을 통해 마차 안까지 들어왔다. 이곳을, 이 빛을 좋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이곳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카를로이는 괜찮았다.
* * *
키아나는 흔쾌히 리리안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다. 마하 구경을 제대로 시켜 주겠다며 호언장담까지 했다. 그 이상한 책의 완결편은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 마하에 도착하면 빌려주겠다고도 하는데 대체 어디까지 예상을 한 건지 리리안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메리앤과 제인은 마하까지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젠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내심 리리안은 고마웠다. 혼자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아름다운 라 소르티오를 떠나는 것은 아쉬웠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달이면 예상보다 오래 있기도 했고.
마지막까지 리리안을 괴롭힌 것은 아쉬움이 아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음속 갈등이었다.
카를로이를 한 번쯤 더 보고 싶었다. 대단한 걸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단지…… 그가 정말로 괜찮아졌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의 모습이 생생해서 마음이 아려 왔기 때문에. 그녀가 괜찮아지면 괜찮아질수록, 그의 모습은 더 강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결국 리리안은 그 생각을 접었다. 혹시라도 카를로이가 드디어 괜찮아졌는데, 괜히 자신을 봤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이 됐다. 게다가 들려오는 소문으로 판단하건대, 카를로이는 괜찮아진 것 같았다.
탄탄해진 국고로 크로이센을 여기저기 손보는 것을 보면, 그 이야기가 라 소르티오까지 들어오는 것을 보면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사생아와 어린이 처우 개선에 특히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들을 땐 조금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법을 바꾼 것도 모자라 인식 개선을 위해 영지 하나하나를 다 손보고 있었다. 노골적인 차별은 금지되었고, 아직 어린아이들은 나라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저 같은 불운한 아이가 점점 줄어들 거란 말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을지 가늠하다 보면 속절없이 가슴이 조여들었다.
<게다가 올해는 풍년이잖아요. 새로 개발한 경작 마법이 효과가 좋았다던걸요. 약점을 잡힌 베르니도 조용하고. 뭐 하나 잘 안 된 게 없죠.>
메리앤의 말을 떠올리며 리리안은 불쑥 드는 충동을 열심히 정리했다.
그래, 그렇게 괜찮았다면 카를로이를 보지 않는 것이 그에게도 나을 것이었다. 그를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리리안은 저 자신도 무서웠다. 지금은 카를로이를 원망하지 않는다 생각하지만, 그를 다시 보게 되면 기억들이 떠올라 또 미워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푸르투에서 둘은 서로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했으니까.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다 결국 이리저리 뒤척이며 리리안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침은 어김없이 와서 리리안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 우락부락한 주방장 벡스는 아직도 해 드리지 못한 음식이 많다며 울었다. 두 달 안에 무슨 정이 그렇게 들었다고 울기까지 하는지……. 리리안은 벡스의 음식을 좀 더 맛있게 먹어 줄 걸 그랬다는 후회를 잠깐 했다.
반면에 올리비아 도나타는 전혀 울지 않았다. 눈시울도 붉히지 않았고 여전히 의연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아쉬워요. 언제든 렉셈 소르타에 오게 되시면 저를 찾아 주세요.”
“그렇게 할게.”
올리비아는 물었다.
“손을 좀…… 잡아 봐도 될까요?”
리리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인은 리리안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더니 가볍게 토닥였다. 솔타의 햇빛 같은 온기가 느껴졌다.
“폐하께서는 정말로 용감하고 똑똑한 분이세요. 짧은 시간에도 느낄 수 있었죠.”
언제나 미지근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답지 않게 강한 표현이었다. 리리안은 자신이 올리비아의 그 과분한 평가만큼이나 과분한 애정을 받았다는 걸 알았다.
“이젠 폐하도 아닌데…….”
“그리고 취향도 고상하시죠.”
올리비아가 농담처럼 말했다.
“최대한 많은 것들을 보세요. 폐하께선 마음이 넓으시니까 그만큼 많이 담을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 진심이야.”
리리안이 잠시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올리비아.”
처음으로 불린 이름에 올리비아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에서야 리리안은 자신이 그 미소를 꽤 많이 좋아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소르티오의 사람들은 델루아와는 그 어떤 접점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드니스도, 복잡한 감정으로 뒤얽힌 카를로이도, 심지어 자신 옆에 남은 메리앤조차도 델루아를 생각나게 하는 지점이 있었다. 하지만 솔타의 사람들은 리리안이 만난 사람 중 생전 처음으로, 델루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안녕히, 소르티오의 황후님.”
솔타의 사랑을 받아서 마음에 가득 담은 뒤 리리안은 떠났다. 짧은 시간에도 사랑하게 된 솔타의 햇빛도 가득 담고. 드니스를 생각하다 마음이 허전해져도 그 애정을 꺼내 들여다볼 수 있게. 카를로이를 생각하다 마음이 시려 와도 그 햇빛을 다시 꺼내다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