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17화 (18/22)

17. 리리안, 그리고 카를로이(1)

카를로이는 기침과 구역질을 심하게 하다 리리안의 어깨 위에서 기절했다. 충격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리리안 대신 아셀이 어디선가 약을 들고 와서 먹이고 그가 토하게 한 뒤에 델루아저로 데려갔다.

얼마 마시지 않았으니 죽지 않을 거라는 아셀의 말을 듣고서야 리리안은 숨을 쉴 수 있었다. 리리안까지 확인한 아셀은 다시 치료사를 데리러 갔다. 셋 중 가장 멀쩡해 보이긴 했지만 아셀도 얼빠진 표정이었다.

드니스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카를로이의 얼굴을 리리안은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언젠가 살렸던 그는 이렇게 다 자란 남자가 되었다.

이 방에서 리리안은 드니스를 힘겹게 보냈다. 이제는 카를로이를 보낼 때였다. 새벽이 밝아 오는 동안에 리리안은 카를로이에 대해 생각했다.

한참 뒤에야 리리안은 그 얼굴을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보았다. 이게 왜 이렇게까지 어려워야 했을까. 손 뻗으면 닿는 게.

새벽에 떠오르는 해의 투명한 빛이 초췌한 얼굴을 비췄다. 한참 그 얼굴을 내려다보다 리리안이 중얼거렸다.

“칼.”

대답이 없었다. 리리안은 개의치 않고 속삭였다.

“넌 아마 모를 거야. 사람이 먹고 자기만 하면,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면…… 생각이 없어진다는 거. 그런데 생각이 없는 건지도 스스로는 잘 몰라.”

잔잔한 목소리가 방에 가득 퍼졌다.

“이건 불행한 거랑은…… 달라. 생각이란 걸 할 틈이 없는 거니까. 그래서였을 거야. 나보고 도망가라고 말하는 네가 그렇게 신기했던 게.”

어린 날 칼과 헤어지고 나서 한참 뒤에 리리안은 생각했었다. 아마 자신은 그때 카를로이에게 첫눈에 반한 게 아니었을까, 하고. 너무나 예뻐서, 너무나 달라서.

“난 널 구할 때 이걸 알았어. 생각을 할 수 있다는걸. 나쁜 짓을 돕고, 도둑질하고, 어떻게든 먹을 걸 구해서 엄마와 먹고 살고…….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할 필요도, 틈도 없으니까.”

카를로이의 눈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널 구해서 살려 보냈을 때, 널 도와줬을 때, 그때 알았어. 사람이 사는 데는 생각도 있고, 보람이라는 것도 있구나……. 엄마는 나한테 의미였지만 넌…… 보람이었던 거야.”

어릴 때 칼이 한 말을 기억했다. 살아서 돌아가 봤자 지옥이라고 했던 말을. 이제야 그 말을 이해했고, 그래서 리리안은 가슴이 저렸다.

자신도, 카를로이도, 그런 것 따위는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어쩌면 칼을 구한 것도 함부로 구한 것이었을까.

“그래서 나는 힘들었어도……. 널 만난 것도, 구한 것도 후회하지 않았어. 바보 같은데, 그게 너무 자랑스러워서……. 내가 했던 일 중에 가장 빛나고, 가장 좋은 일이니까.”

그리고 그런 네가 살아 있었으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참았다. 이제는 그만 울어야 할 시간이었다.

“내 하루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그걸 생각하면. 정말 우스운데…… 기분이 좋아졌어. 어디선가 네가 살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칼……. 이제는.”

리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칼의 뺨을 스치듯 만졌다.

“나는, 이제는 후회해. 널 만난 것도, 널 구한 것도, 모두. 그래서 네가 너무…… 불쌍해. 너무 미안해. 그래서 널 보고 있으면 아파. 지금은…… 너무 힘들어.”

“……그럴 필요 없다니까.”

처음으로 대답이 들려왔다. 여전히 감은 눈으로, 다 갈라진 목소리로 카를로이는 대답했다.

“난 불쌍하지도 않고, 넌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이상하지. 너는 나보다 많이 가졌어야 하잖아. 그런데 네 인생에 남은 게 나밖에 없다는 게, 그나마 있는 것도 나한테 그렇게 쉽게 다 줘 버린다는 게 밉고 원망스러워. 하지만 델루아가 널 그렇게 만들었다는 게……. 마음이 아파.”

카를로이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리리안은 천천히 그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살며시 쓸어 보았다. 거칠었다.

“칼, 죽지 마.”

대답이 없었다.

“죽지 말고 살아. 이제 널 구한 걸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데. 그런 네가 죽어 버리면 그럼 내 인생에는 뭐가 남아. 나는 뭐 때문에 널 구한 게 돼. 나는 뭐 때문에…… 엄마를 잃은 게 돼.”

카를로이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치 차마 리리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억울해도, 힘들어도, 그러니까 넌 계속 살아야 해. 내 인생을 더 의미 없이 만들지 마. 내가…… 더는 후회하지 않게.”

마음이 너무 저려서 그런 걸까, 말끝이 떨렸다.

카를로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리리안은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카를로이의 눈을 덮어 주었다. 아픈 물기가 손을 적셨다.

리리안이 가만히 속삭였다.

“울어. 그런데 있잖아. 조금만 울어. 너무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만. 너도 많이, 너무 많이 아팠으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카를로이는 이를 악물었지만 희미하게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너 지금까지 내 약속 아무것도 안 지켰잖아. 이건 다 지킬 수 있지.”

손이 축축했다. 답은 없었다.

“칼.”

“……응.”

“살 거지.”

“……그럴게.”

“대충 사는 건 안 돼. 열심히 살아야 해.”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한참 뒤에 쥐어짜듯 천천히 대답이 나왔다. 그렇게 할게. 단 두 단어가 그렇게 힘들게 나왔다. 아픈 목소리로.

“아주 조금만 울 거지. 조금만 아플 거지.”

“……응.”

“……그럼 됐어.”

카를로이의 몸이 떨리는 듯도 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의 손을 잡아 리리안이 제 손 위에 얹었다. 칼의 눈을 덮어 주고 있는 손에. 닿는 손길조차 조심스러웠다.

“네가 그렇게 계속 살아가면 나도 의미가 있는 걸 거야. 언젠간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야. 후회하지 않을 때가, 어쩌면 올지도 모르지. 정말 어쩌면……. 나도 자신은 없지만.”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손을 세게 잡지도 못했다.

“……미안해.”

카를로이에게서 참지 못해 터지듯 그 한마디가 잠긴 목소리로 나왔다.

카를로이는 리리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었다. 리리안은 이제는 카를로이가 그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프고 힘든 목소리로 더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했다.

카를로이의 손이 계속 떨려서, 리리안은 그 위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카를로이의 온몸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

“응, 알아. 알아…….”

리리안은 카를로이의 손에 얼굴을 묻고 끊임없이 그렇게 속삭였다. 다 안다고. 그것이 그만 미안해하라는 말인 걸 이해했는지 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리안의 손엔 여전히 카를로이의 눈물이 묻었다.

“……조금만 울라니까. 벌써 안 지켜.”

“리리안.”

“응.”

“리리안…….”

“응.”

카를로이는 계속 리리안의 이름만 불렀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목소리에 아주 조금은 눈물이 나왔다.

카를로이가 다시 만날 수 있냐는 말을 차마 묻지 못하듯 리리안도 차마 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이미 너무 많은 약속이 그들을 아프게 했다.

“안녕, 칼.”

리리안은 마지막까지 그녀가 가지고 있던 것,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것에 인사를 했다. 그걸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서. 그것이 리리안을 망가트리지 않게 하기 위해.

리리안은 카를로이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약속해 달라고 했다. 자신이 떠날 때까지 절대 눈을 뜨지 말아 달라고. 칼이 뒷모습을 보고 있단 생각이 들면 너무 슬플 것 같다고. 여전히 카를로이가 싫은데, 싫은데도 그가 힘든 게 슬프니까, 눈을 뜨지 말라고.

이렇게 약속을 하나둘 지켜 주면 좋아질 순 없어도 그만 미워할 순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리리안은 말했다.

카를로이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나, 좋아해 주는 것……. 그런 것은……. 다만 카를로이는 더는 리리안을 슬프게 하기 싫었다. 그 때문에 슬퍼하지 않길 바랐다. 그 어떤 감정도 그에게 낭비하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닿아 있던 온기가 사라지고, 리리안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카를로이는 이마에 팔을 얹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내 리리안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단 한 번도 그의 곁에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눈을 떴다.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새벽빛이 휑한 자리를 더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카를로이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 이를 악물어도 봤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던 것을, 아름다웠던 것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이내 그는 생각했다. 사실은 가졌던 적도 없었다고.

* * *

렉셈 소르타는 옛 솔타 왕국의 주 영토였다. 200여 년 전 크로이센과 합병되어 솔타 대공국으로 자리하다 왕족들이 거의 다 죽자 일반 영지로 바뀌었다. 달라진 햇빛의 세기가 렉셈 소르타, 가장 기름지고 비옥한 땅에 들어섰음을 알려 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

마차에서 내리는 리리안에게 메리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리리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걱정을 할 만도 한 것이, 델루아를 떠나 렉셈 소르타로 가는 동안 리리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딱히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드니스의 유해가 담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델루아를 떠나서야 처음 걸어 보는 그 목걸이는 리리안에게 퍽 잘 어울려 메리앤의 기분이 이상해질 정도였다. 이런 슬픈 목걸이가 저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어쨌든 리리안은 별다른 동요 없이 그렇게 렉셈 소르타로 왔다. 그런데도 리리안은 슬퍼 보였다. 슬픔으로 사람을 빚는다면 리리안처럼 보일 것 같았다.

“여기가 솔리스 언덕이에요. 뒤냐 공작께서 이쪽으로 사람이 마중을 나올 거라고 했는데.”

리리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햇빛이 몹시도 따듯했다. 몸을 감싸 안는 온기가 어색했다. 아니, 감싸 안는 정도가 아니라 스며드는 것 같았다.

“여기 서서 보면 델피난 강과 렉셈 소르타가 한눈에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절경이라고 유명하다더니, 와. 폐하!”

먼저 언덕을 올라가 있던 제인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리리안이 천천히 언덕을 올라갔다.

“저기 보세요. 저기가 라 소르티오 궁전인가 봐요.”

푸르투는 화려했고, 델루아는 웅장했다. 위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것들은 볼 만큼 봤다. 하지만 렉셈 소르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리리안은 잠시 말을 잃고 언덕 아래의 풍경을 내려다봤다. 저무는 해는 보기 좋게 라 소르티오의 우아한 첨탑에 걸려 있었고, 햇빛은 마치 물결처럼 퍼져 나가 양옆에 늘어진 아름다운 석조 건물들을 감싸 안았다.

햇빛에도 윤슬 같은 반짝임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부서지는 듯이 엷게 퍼지고 있는 주홍빛에 서린 반짝임은 해가 곧 가라앉을 델피난 강의 물결과 맞닿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윤슬과 이어졌다.

강 너머로는 초록빛 땅이 펼쳐져 있었고, 솔타 특유의 큼직하고 투박한 장식들로 꾸며진 아담한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예쁘죠?”

메리앤이 속삭였다. 리리안은 목이 메어 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반짝이는 태양의 도시를 내려다보며 리리안은 드니스를 생각했다. 눈물이 울컥 터져 나오려 했지만, 리리안은 눈에 힘을 줬다.

드니스의 말이 맞았다. 이 세상엔 고통과 불행 말고 다른 것들이 분명 존재했다. 리리안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알지도 못했던 것들이.

드니스의 품 말고도 따뜻한 곳이 분명 존재했다. 비록 그 세상에 드니스가 쏙 빠져 있더라도, 존재하는 것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얄미울 정도로 아름답게.

* * *

“도대체 라 소르티오가 언제부터 미친 사람 요양소가 되었는지, 원.”

“자네는 입조심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어, 벡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자 중얼거리던 주방장 벡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사람들이 자네 음식 솜씨를 두고 루푸스에 가도 좋을 맛이라고 한다지? 그만큼 솜씨가 좋은 건 알겠지만, 그렇게 입 놀리다간 자네부터 루푸스에 가게 될 거야.”

“아유, 부인께선 또 그렇게 무서운 말씀을……. 그런데 좀 늦게 오실 줄 알았는데요. 황후 폐하와 함께.”

“가는 길에 잠시 들렀네. 자네 같은 사람들 입단속도 좀 할 겸.”

올리비아 도나타는 렉셈 소르타의 영주인 솔리스 백작의 아내로, 희끗희끗한 머리가 품위 있게 말려 올려진 노부인이었다.

렉셈 소르타에서만 나고 자랐으며 옛 솔타 왕족의 방계인 올리비아는 솔타인 특유의 태평함과 느긋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가진 우아한 품위가 그녀를 깔끔히 정돈된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아니, 뭐……. 누가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 그런 말 안 했지요. 그리고 뒤냐 공작이 반쯤 정신을 놓고 살았던 게 얼마 전인데 또 황후 폐하도 그 뭐냐, 아프신 분이라 하니까요.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이죠.”

“흠. 말 포장은 케이크 장식만큼 잘하지는 못하는군.”

농담처럼 주어지는 타박에 벡스는 그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어쨌든 틀린 말 한 건 없었다.

황궁의 치료사라는 사람이 제일 먼저 라 소르티오에 도착해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냐고. 맨날 호수만 쳐다보고 있었다던 뒤냐조차도 치료사를 대동하고 라 소르티오에 오진 않았다.

올리비아 도나타와 주방장 벡스는 백작저에 사는 사람들이었지만 황후가 라 소르티오에서 머물게 되자 궁전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

“이곳은 백작저와 다른 곳이니 그런 혼잣말도 이제 조심하도록 해. 그렇게 걱정이 되면 그 솜씨로 황후 폐하의 식욕을 되찾아 줄 노력을 하고.”

“아유, 당연하죠. 그나저나 라 소르티오는 언제 봐도 아름답지요? 사실 오게 되어서 기쁘긴 합니다.”

벡스의 우락부락한 얼굴이 자부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먼 옛날 조상들이 지어 올렸던 궁전을 잠시 바라보며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신다면 더 좋겠지.”

알렉시스 뒤냐에게 들은 황후의 사정은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할 이야기였다. 올리비아는 별로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 무려 20년 만에 눈물을 흘렸다.

델루아의 횡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항상 그렇듯 수도의 일은 렉셈 소르타와는 좀 거리가 먼 일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황후의 사정은 그 거리를 단번에 좁혀 버릴 정도로 슬픈 이야기였다.

올리비아 도나타는 아픈 황후를 이곳에서 어떻게 하면 잘 위로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길을 나섰다.

* * *

황후를 처음 보자마자 올리비아는 생각했다. 이 여자를 위로하는 일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 되겠다고.

“황후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올리비아 도나타입니다. 라 소르티오에서 불편함 없으시도록 모시겠습니다.”

“솔리스 백작 부인.”

“올리비아라고 불러 주십시오.”

황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이름을 부르진 않았다. 감정을 밖으로 격렬히 드러내는 사람이 오히려 상대하기는 쉬운 법이었다. 지금의 황후처럼 겉으로는 잔잔한 사람이 더 어려웠다.

그나저나 대단한 미모였다. 몸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완연한 병색에도 저 정도라면……. 건강할 땐 솔타 화가들이 숭배해 마지않겠다고 백작 부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한스 델루아의 젊었을 적을 생각게 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그 인간의 미모 하나만큼은 딱 그 성격만큼 미쳤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얼굴을 보자니 황제가 꽤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델루아를 생각해 보면 영락없이 사이가 좋지 않을 것 같은데, 황후를 잘 모셔야 한다는 수백 가지 명령이 같이 내려온 것을 보면 또 그건 아닌 것 같고.

마차에서도 황후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시녀장과 시녀로 보이는 여자들은 그런 황후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황후가 걱정이 되는 듯했다.

“렉셈 소르타는 어떠신가요? 맘에 드시는지.”

올리비아의 부드러운 질문에 황후가 잠시 눈을 맞춰 왔다. 노부인은 굉장히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곳 같아.”

언제 들어도 흡족하고 자랑스러운 말이었다. 올리비아가 옅게 웃어 보였다.

“아, 라 소르티오에 폐하의 치료사가 먼저 도착해 있습니다.”

“치료사? 무슨…….”

“이름이 뭐라더라. 에이모스 라이트……였던 것 같은데. 황제께서 보낸 치료사인 것 같던데 폐하께서 먼저 도착해 계실 줄 알았다더군요.”

카를로이의 치료사였다. 리리안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카를로이는 독까지 마셨는데……. 가장 실력 좋은 치료사를 보내서 어쩌자는 건지.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카를로이는 이번에야말로 약속했으니까. 살겠다고. 마침 라 소르티오에 도착했기에 잡생각을 몰아낼 수 있었다. 아니, 라 소르티오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하는 게 정확할 듯했다.

분명 크기는 푸르투보다 작았고, 푸르투만큼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옅은 붉은빛의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들에 촘촘히 그려진 장식들은 눈길을 매어 둘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건물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조차 잘 어울렸다.

“괜찮으세요?”

아무 말 없이 라 소르티오를 바라보고 있는 리리안에게 메리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아름다워서.”

무엇보다도 라 소르티오엔 태양이 있었다. 라 소르티오에서 보는 태양은 꼭 라 소르티오를 위해 예술가가 마지막으로 그려 놓은 장식 같았다. 태양이 뜨는 한 이 궁보다 아름다운 곳은 없을 터였다.

올리비아의 얼굴에 또다시 옅은 미소가 번졌다. 흡족한 표정으로 백작 부인은 간단하게 사용인들을 소개했다.

“저녁을 드셔야죠?”

“먼 길을 와서 좀 피곤한데. 오늘은 아무래도 안 되겠어.”

황후의 말에 주방장 벡스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상을 지었다. 올리비아 도나타는 토 달지 않고 바로 황후를 침실로 안내했다.

침실 밖에서는 푸르투에서 지겹도록 봤던 치료사가 리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치료사는 리리안이 약을 끝까지 마시는 걸 도끼눈을 뜨고 지켜보았다.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절대 복용을 게을리하시면 안 됩니다. 독은 단기간에 치료가 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하지만 너무 초조하지는 않게 먹으셔야 하고요.”

“알았네.”

“두통은 좀 어떠십니까?”

“평소와 비슷한 정도.”

“악몽은요?”

“……줄었어.”

줄기는 줄었다. 빈도보다는 정도가. 그 전의 악몽은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생생했다. 깨고 나서도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약을 먹고 난 뒤에 꾸는 악몽들은 대개는 언제나 꾸던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공작이 죽기 전부터도 꾸던 그런 것들.

“저도 이런 독을 보는 건 처음이라 당장은 빠른 치료가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약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넨 여기 와 있어도 괜찮나? 수도가 더 편할 텐데.”

“가족도 함께 왔고, 휴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푸르투에서 워낙…….”

치료사가 머쓱한 듯 말끝을 흐렸다. 눈앞의 초췌한 황후를 보고 본인이 힘들었다는 둥 할 만큼 눈치 없진 않았다.

황제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인수인계를 잘하고 왔으니 괜찮을 터였다.

“황제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사까지 침실을 나가자 단정한 방이 조용해졌다.

라 소르티오에는 온기가 있었다. 아니, 렉셈 소르타의 어디든 온기가 있는 듯했다. 푸르투나 델루아에서는 느끼기 힘들었던.

리리안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런 곳에서 살았다면 어쩌면 드니스도 아프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질없는 가정이겠지만.

* * *

에이모스 라이트의 생각과는 다르게, 카를로이의 새 치료사는 전임자를 죽일 듯 원망하고 있었다. 다 정리해 놨다며. 하던 대로만 하면 될 거라며.

전임자의 확신이 무색하게도 황제는 어디서 또 독을 먹고 푸르투로 돌아왔다. 옆에 붙어 있던 마하인의 말로는 분명 이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 않았는데 올라오는 길에 갑자기 악화되었다고 했다. 도대체 이런 독을 어디서 난 건지 아주 지독한 걸 주워 먹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모르는 독이었거나 황제가 치사량을 들이켰으면 어쩔 뻔했겠냐고. 바로 제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고열로 헛소리를 하는 황제의 옆에서 땀을 흘리며 새 치료사는 속으로 욕을 했다. 누구는 렉셈 소르타에 가 있는데 누구는 근무 첫날부터 밤을 새울 판이었다.

* * *

아침에는 황후가 식욕이 없으니 간단하게만 준비해 달라는 시녀장의 말에 주방장 벡스는 또다시 실망했다. 차가운 인상의 황후는 평생 식욕 따위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데 대체 언제쯤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을지 암담했다.

하지만 진정한 셰프라면 작은 요리에서도 차이를 만들어 낼 줄 아는 법이었다. 렉셈 소르타의 사람들은 벡스의 솜씨를 루푸스를 들먹이며 칭찬했지만,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수도 사람의 평가도 한 번쯤 들어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특히 그냥 수도의 사람도 아니고 푸르투의 사람이라면. 게다가 황후였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버섯이 들어간 양파 수프와 고기 육즙으로 살짝 적신 꿀 바른 빵, 신선한 아스파라거스와 셀러리를 과일과 함께 황후의 침실로 올려 보냈다.

“입맛이 없는데 점심을 첫 끼로 먹어도 되지 않을까…….”

리리안이 약하게 중얼거렸지만 메리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비아 도나타는 시녀장이 필요한 부분에선 강단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판단을 내렸다.

“세 입만 드세요. 그러면 정말 귀찮게 안 굴게요.”

약소한 숫자가 마음을 움직였는지 황후는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었다. 뜨거운 수프가 바싹 마른 황후의 입술을 타고 넘어갔다. 리리안이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맛있네.”

세상 어디에도 벡스 만한 요리사가 없다고 믿는 올리비아는 그것이 굉장히 인색한 칭찬이라 생각했지만, 시녀장의 얼굴은 렉셈 소르타의 태양보다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요?”

“응.”

맛을 느끼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정말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음식의 맛이었다. 옅은 식욕이 배 아래부터 피어올랐다. 리리안은 수프를 다섯 번 떠먹고, 빵도 두 입 정도를 먹었으며 채소는 3분의 1 정도를 비웠다.

극악한 식사량에 올리비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후를 쳐다보았지만 시녀장과 그 딸로 보이는 시녀는 감격에 겨워 울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푸르투에서의 황후가 어땠을지 짐작이 대충 갔다.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가? 얼굴도 좀 괜찮아지신 것 같아요.”

시녀장의 말에 올리비아가 다시 황후의 얼굴을 흘끗 봤다. 저 얼굴이 괜찮아진 거라고……. 대체 황후는 그동안 푸르투에서 어떻게 지낸 것일까 싶어 올리비아의 표정도 흐려졌다.

하지만 리리안은 메리앤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라 소르티오에 오고 나서야 푸르투가 얼마나 힘든 곳인지 새삼 깨달았다.

“하고 싶으신 건 따로 없으신가요? 보고 싶으신 거라든가.”

올리비아의 질문에 황후는 조용히 고개만 내저었다.

“흠. 그럼 좀 쉬시다가 낮에 라 소르티오라도 한번 둘러보시겠어요? 궁내에 아름다운 곳이 많거든요. 내키지 않으시면 다음에 보셔도 되고요.”

올리비아의 말투는 사람이 거절하기 힘들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것이 솔타인 특유의 억양 때문인지, 느릿느릿한 말투 때문인지, 듣기 좋은 목소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레이디와 시녀장께서도 보고 싶어 하시려나?”

레이디라 불린 제인이 볼을 붉혔다. 결국 리리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올리비아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황제는 나흘 밤낮을 앓다 일어났다. 사흘째 되던 날은 고비였다. 알렉시스 뒤냐가 창백한 얼굴로 그다음을 고민할 정도로.

고비가 어떻게 무사히 지나가고 나서는 아셀을 달래느라 진이 빠졌다. 그 망나니가 우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정말이지 서럽게도 울어 댔다.

자기가 바보처럼 망설였다는 자학부터, 치료사를 찾으러 가다가 그 전에 카를로이가 죽을 것 같아서 구토를 하게 하는 약부터 구해 와 먹인 건데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냐는 질문에, 그러니까 왜 자신한테만 그런 일을 맡겼냐는 원망까지.

알렉시스는 충격에 빠져 미친 사람처럼 쉬지 않고 말을 내뱉는 아셀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카를로이의 상태를 살폈다.

“정말 괜찮겠나?”

“예……. 이제는 좀 안심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정신력으로 버티시다가 이 지경이 되신 것 같습니다.”

며칠 사이 녹초가 된 치료사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이제야 왜 전임자의 안색이 나날이 나빠졌는지 이해했다. 그래 놓고 다 괜찮을 거라고 인수인계를 하다니…….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으셔서……. 관리를 잘하셔야겠습니다. 멀쩡한 곳이 없는데요.”

치료사는 이런 쓰레기 같은 몸을 대책 없이 맡겨 놓고 도망간 전임자를 원망했다.

“라이트 말로는 자기 제자 중에 자네가 가장 똑똑하다던데. 믿겠네.”

“예에…….”

“황제께선 치료도 자주 거부하시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하시고, 약도 드시지 않고 드셨다고 거짓말하는 습관이 있으시니 항상 주의해야 하고.”

들으면 들을수록 재앙 수준이었고,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의 예시로 책에 실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치료사는 우는 대신 약한 한숨만 쉬었다.

하지만 공작의 우려와는 다르게 황제는 정신을 차리고 나서 잠자코 치료를 받았다. 상태도 곧잘 설명하고, 원하는 치료를 정확히 말하기도 했다.

한 가지 흠은 안정을 취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황제는 자신의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일로.

나라를 아주 구석부터 구석까지, 아예 새로 갈아엎을 것처럼 일에 매달리는 카를로이를 보며 알렉시스는 넌지시 걱정을 표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해도 무섭습니다.”

“자네도 좀 쉬어야지. 나이가 있는데 내가 너무 굴렸어.”

더는 초췌해질 수도 없을 것 같은 얼굴로 카를로이는 중얼거렸다.

그놈의 나이 이야기는 왜 저렇게 심심하면 하는지. 막말로 나이가 훨씬 많은 알렉시스 자신이 카를로이보다 500배는 건강해 보였다.

“그렇게 말씀하셔 놓고 또 어디서 죽으시려고. 제가 폐하의 실종을 빌미로 베르니에게 뭘 얻어 내길 바라셨나 본데, 정말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발상입니까…….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셨다지만.”

“이제 그럴 일 없어.”

믿을 수가 없어서 알렉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리리안이 그러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 말 한마디에 알렉시스는 의심을 풀었다. 어쩐지. 알렉시스는 아셀의 말이 또 맞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황후가 시키는 게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이기는 했다.

“황후님과 잘…….”

알렉시스가 말을 고심했다. 푸셨습니까, 화해하셨습니까, 아니면 대화하셨습니까? 무슨 단어도 적절치 않아 보였다. 깔끔한 단어로 표현되기에 둘의 관계는 너무나 복잡했다.

카를로이는 끊긴 질문을 알아들었는지 조용히 대답했다.

“……그 사람은 좀 괜찮아지면 떠날 거야.”

“떠나다니, 어디로요? 다른 곳도 가 보고 싶으시답니까?”

“황후 자리를 말이야.”

리리안도, 카를로이도 정확히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둘 다 알 수 있었다.

리리안은 라 소르티오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은 지쳐서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그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간 것이겠지만, 괜찮아진다면 아마 영영 떠나 버릴 것이었다.

라 소르티오는 떠날 준비를 하는 곳이 될 터였다. 그의 곁에 있을 필요는 없을 테니 황후 자리도 필요 없을 것이고.

또다시 가슴 어딘가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럼…….”

알렉시스는 이번에도 말을 잇지 못했다. 하긴 무어라고 말릴 것인가. 황후를 붙잡아 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은 그만 들어가 봐. 공작저에 가지 않은 지도 좀 됐잖아.”

공작저라 해도 기다리는 사람이나 반기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알렉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없어도 피로는 있었다.

혼자가 되고서야 카를로이는 하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앉았다. 살아야 한다.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 죽는 것은 쉽다. 어려운 것은 사는 일이다.

<내 인생을 더 의미 없이 만들지 마. 내가…… 더는 후회하지 않게.>

<네가 그렇게 계속 살아가면 나도 의미가 있는 걸 거야.>

심지어 누군가가 후회하지 않도록 사는 것. 그건 얼마나 어려울까. 자신 같은 인간이 어떻게.

그는 가만히 숨만 쉬는 것도 너무나 버거운데, 숨만 쉬고 사는 것으로는 그 어떤 의미도 되지 못할 거였다. 쓸모없는 인간을 살렸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리리안이 남긴 부탁은 너무 잔인하고 무거웠으며, 또 한없이 과분했다.

그는 또다시 푸르투에서 혼자가 되었다.

* * *

올리비아 도나타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라 소르티오를 구경시켜 주며 은근슬쩍 하나씩 풀어놓는 솔타의 옛이야기에 리리안은 자신이 평소보다 오래 걸었다는 것도 한참 지나서야, 다리가 아파지고 나서야 눈치챘다.

“여기가 멕서스 호수예요. 위치도 참 절묘하지 않나요? 딱 앉아서 쉬고 싶을 즈음 나타나잖아요.”

호수로 이끄는 손길이 그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호수의 깨끗한 물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잔잔한 호수를 보며 리리안은 다른 것은 몰라도 라 소르티오의 태양은 정말로 사랑하게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있는 곳에 가면 덜 우울해졌다. 그리고 딱 그만큼 드니스가 보고 싶어졌다.

멍하니 호수만 바라보고 있는 황후를 보고 올리비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멕서스 깊은 곳에는 루푸스에 있는 망자들에게 말을 전해 주는 인어들이 산다고 전해지죠. 물론 전설이지만.”

“인어요?”

제인이 물었다. 이미 제인은 올리비아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죽어서도 남겨 둔 사람 때문에 제대로 죽지 못한 사람들을 하얀 늑대가 헤엄칠 수 있는 인어로 만들어 줬고, 그들은 루푸스와 땅 위를 오갔다고 해요.”

드니스는 착하게 살았으니 루푸스로 갔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리리안을 보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기는 또 싫었다.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데……. 드니스가 기뻐할 만큼.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래서인지 멕서스에 말을 걸면 그날 밤엔 보고 싶은 사람이 꿈에 나온다는 전설도 있어요.”

“아, 그래서…….”

메리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올리비아가 궁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메리앤은 겸연쩍게 웃었다.

“아, 별것은 아니고……. 뒤냐 공작이 이곳에 있을 적 매일 호수만 보고 있었단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갑작스럽게 나온 알렉시스의 이야기에 리리안도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 말을 듣고서야 리리안은 알렉시스의 동생이 죽은 선대 황후였음을 기억해 냈다. 순식간에 올리비아의 얼굴이 안쓰러움으로 가득 찼다.

“그분은 식사도 여기서 하셨을 정도니까요. 야외만 아니었다면 아마 잠도 여기서 주무셨을 거예요. 항상 호수를 보며 말을 걸고 일기를 쓰셨었던가.”

“자매 사이가 굉장히 각별했나 봐요.”

“아무래도 선대 공작 부부가 일찍 가셔서 동생을 키우다시피 했으니까요. 이곳이 선대 황후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던 곳이기도 했고요.”

리리안이 아델라이드 크로이탄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카를로이에게 모질었으며, 끝내는 그를 포기했다는 것.

“선대 황후는 어떤 분이셨지?”

“괜찮은 분이셨어요.”

알고 있는 것과 상반된 평가에 리리안의 표정이 잠시 애매해졌다. 올리비아는 그 생각을 눈치챘는지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요. 그분은 황후로서 다른 사람들을 인자하게 대했으니까요.”

하긴, 크로이센에서 아델라이드 크로이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카를로이 말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본인 자식에겐 한없이 냉정하셨지만, 더 크게 생각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으셨을 테니……. 지금의 황제께서는 사실 이렇게 살아 계신 게 기적이죠. 부모도 그냥 죽게 놔두려 했고, 그 뒤엔 끊임없는 살해 시도에.”

올리비아는 리리안이 공작의 피해자였다는 사실만 알았지, 리리안과 카를로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누군가가 자길 죽이려 하는 거엔 이골이 나셨을 거예요. 거기엔 아델라이드 님의 탓도 크겠죠. 말하고 보니 다정한 분이셨다고 하기엔 또 좀 그렇네요.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셨을 텐데.”

그 말을 듣고 흐릿해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이 그를 죽일 독을 줬을 거라고 그토록 쉽게 믿은 카를로이가.

그때 자신을 바라보는 카를로이 표정이 어땠더라. 분명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고, 억지로 지워 버린 기억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만큼은 뚜렷이 생각났다.

그때는 카를로이의 표정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자신을 경멸한다기보단 상처를 받은 표정에 가까웠다.

조금 마음이 아파졌다. 그는 언제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카를로이에게 그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돌변해 독을 줘도 놀랍지 않은 사람들일까.

“푸르투는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곳인가 봐.”

리리안의 조용한 말에 올리비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한스 델루아가 푸르투를 그렇게 만들었지요.”

리리안은 별다른 대답 없이 다시 호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올리비아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드레스를 정돈했다.

“저는 시녀장과 레이디에게 정원을 좀 구경시켜 드릴까 하는데, 폐하께선 호수 구경을 더 하시겠어요?”

“……그래.”

메리앤과 제인은 리리안을 혼자 두기 불안해하며 머뭇거렸지만, 올리비아는 예의 그 흔들림 없는 미소로 그들을 이끌었다.

혼자 남은 리리안은 한참을 입술을 달싹거리다 결국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엄마.”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멈출 수가 없었다. 알렉시스가 왜 여기에 있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듣고 있어? 아니면…… 내가 너무 바보 같겠다.”

한번 입을 떼고 나니 말은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나왔다.

“렉셈 소르타는 정말 예뻐. 엄마가 왜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지 알겠어.”

정말로 드니스가 듣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엄마가 보고 싶어서 아픈데…….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까. 하지만 익숙해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플 것 같아.”

호수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저 물결만 흐르고 흐를 뿐이었다. 그 일관성이 어쩐지 위로가 됐다.

그리고 그날 밤 꿈에는 드니스가 나왔다. 가장 건강했을 때의 모습으로. 그리고 렉셈 소르타를 봤다며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꿈속에서조차 리리안은 그런 드니스의 모습이 자신이 만들어 낸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꿈에서도 드니스를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드니스는 리리안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뜻이니까.

리리안은 드니스를 잃어버리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드니스가 그녀를 잃어버린 적이 없듯.

리리안은 드니스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누구를 얼마나 사랑하든, 그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는 건 죽기보다, 아니, 사는 것보다 힘든 일이므로.

* * *

푸르투엔 비가 왔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건만 그날따라 유독 빗소리는 지긋지긋했다. 집무실에 앉아 있던 카를로이는 끊임없이 떨어지는 비에 얼굴을 구길 듯이 제 손에 파묻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리리안이 생각났다. 푸르투에서 말라 죽어 가던 리리안이. 기억은 잔인할 정도로 선명해서 리리안의 표정 하나하나를 그의 머릿속에서 되살렸다.

비 오는 날 멍하니 밖을 바라보던 리리안을 보고 무슨 말을 내뱉었더라.

<건강이 안 좋니, 어쩌니 매일 사람을 들볶으면서 쓸데없이 산책은 왜 하지?>

“빌어먹을…….”

그는 계속 욕설을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이런 기억을 모두 안고도 숨을 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그때가 더 나았어. 당신이 날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때가…….>

무참히 떨어지는 빗속에서 처참히 울던 리리안의 목소리까지 들리자 결국 카를로이는 참지 못하고 술병을 집어 들었다. 빗소리 때문에 꼭 시간이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그 말을 들을걸. 믿지도 못할 거면 차라리 그때 가만히 놔둘걸. 뒤늦은 후회가 기름처럼 기억에 불을 붙였다.

치료사는 절대 술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도저히 술 없이는 이 기억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귀를 파 버리고 싶었다. 미친놈처럼 반병을 들이마셨는데도 기억은 계속 그의 머리로 흘러 들어왔다.

그가 하는 생각이라곤 리리안이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그녀가 괴로워하던 모습만 생생하게 떠오르길 바란 건 아니었다.

술에 늘어져서 카를로이는 의자에 기대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전혀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비참한 기분으로 그는 멍하니 빗소리를 들었다. 술잔은 까딱거리는 그의 손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리리안은 그래서 푸르투에서 술을 마셨던 걸까. 술 없이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술에 취해 난장판이 된 침실에 앉아 있던 리리안까지 떠오르고 나자 카를로이는 눈을 감아 버렸다. 물론 감는 것도 소용이 없었지만.

아. 리리안의 말이 맞았음을 그는 깨달았다. 기억하는 게 아니었다. 되풀이될 뿐이었다. 꿈에서, 머리에서. 리리안도 이런 기분을 느꼈다는 게 끔찍했다.

멈추지도 않는 빗소리를 들으며 카를로이는 생각했다. 리리안이 자신을 떠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카를로이는 자신이 그녀의 머리에서 되풀이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녀의 기억에서 아예 사라졌으면 했다. 그는 이곳에선 죽지 못하겠지만, 리리안의 기억 속에서는 죽어 버리기를 바랐다.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 * *

렉셈 소르타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도착한 뒤 1주일 정도가 지나서였다.

“이곳은 비가 오지 않나?”

심심하면 비가 오던 크로이센과 다르게 렉셈 소르타의 태양은 도통 흐려질 줄을 몰랐다. 옆에서 책을 읽곤 있던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오지 않아요. 우기에는 좀 오는 편이지만……. 그마저도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요.”

리리안으로서는 렉셈 소르타를 좋아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비라면 이제 질려 버렸으니까.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리리안을 올리비아는 유심히 살폈다. 한 이틀쯤 나름 괜찮게 지내던 황후는 사흘째 되던 밤에 오밤중에 잠에서 깨어 궁전을 돌아다녔다. 울면서. 익숙한 일인지 시녀장이 능숙하게 황후를 달래어 다시 침실로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 이틀간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침대에서 나오질 않더니 어제와 오늘은 또 괜찮아 보였다. 오늘은 심지어 처음으로 아침을 다 비우기까지 했다.

상태가 종잡을 수 없긴 했지만, 저런 식으로 나아지는 사람을 본 적 없는 것도 아니어서 올리비아는 차분히 황후를 지켜봤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 점심은 식당에서 드시는 게 어떠세요?”

“식당?”

“주방장이 제대로 된 음식을 올리질 못했다고 워낙 아쉬워해서요. 피곤하시면 다음에 가셔도 상관없고요.”

엄밀히 말하면 벡스는 아쉬워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매번 반 넘게 남아서 돌아오는 음식을 보며 그의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졌다.

올리비아는 제안을 해 놓고도 대답을 기다리는 태도가 태평했다. 리리안은 온몸으로 느긋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를 잠시 바라보다 대답했다.

“그래…….”

올리비아 도나타는 확실히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주로 듣거나 보는 편이었다. 호수에 처음 리리안을 데려갔을 때가 그녀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한 편인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말을 할 때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는 식의 올리비아 특유의 말투는 대답도 약간 그렇게 하게 만들었다. 그래, 그래도 되고 뭐 아니어도 되고…….

그리고 음식이 궁금하긴 했다. 지금 올려 보내는 음식도 충분히 맛있었는데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었다니.

푸르투에서 먹었던 음식이 맛이 없었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수도 황궁의 요리가 그럴 리가.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기억도 나지 않았고, 그때 당시에도 뭘 느끼면서 먹었던 것 같진 않았다.

“벡스가 기뻐하겠네요.”

싱긋 웃은 노부인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긴 손가락이 평화롭게 책장을 넘겼다. 며칠간 내내 저 책을 잡고 있더니 페이지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책이 무척 재밌나 보군.”

“음? 폐하께선 읽어 보지 않으셨나요? 시녀장이 가져온 책이던데. 시녀장과 레이디 제인이 너무 재밌다고 꼭 읽어 보라고 추천하기에 읽고 있던 중이었지요.”

리리안이 잠시 눈을 찌푸리며 올리비아 무릎 위의 책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책등이고 책 표지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게 어딘가 익숙했다. 키아나 로덴이 주고 간 책이었다. 받고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메리앤이 챙긴 모양이었다.

“폐하께서도 나중에 심심하시면 한번 읽어 보세요. 나쁘지 않네요.”

리리안이 알아낸 또 다른 올리비아의 습관은 바로 평가를 하는 말투였다. 올리비아는 솔타에 관계된 것이 아닐 때는 언제나 평가가 그랬다. 나쁘지 않다. 괜찮은 것 같다. 함부로 칭찬하지도, 함부로 욕하지도 않는 언제나 중간에 머물러 있는 평가.

그런 사람이 주방장의 음식 솜씨는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것을 보면 주방장이 솔타인이거나, 솔타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일 듯했다.

“그럼 멕서스 근처를 좀 돌다가 식당으로 가겠네.”

올리비아는 빈말로도 같이 가겠단 말을 하지 않았다. 웃으며 준비가 되면 모시러 가겠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메리앤과 제인이 따라가려고 하자 올리비아는 가뿐히 그들을 막기까지 했다.

리리안은 거의 매일 멕서스 호수를 보러 갔다. 첫날 이후로 드니스가 꿈에 나오는 일은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버티는 데 도움이 됐다.

언제나처럼 호수 옆 나무에 기대어 있는데 문득 나무줄기에 있는 작지 않은 구멍이 눈에 띄었다.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발끝을 최대한 들고 손을 넣어 보니 무언가가 잡혔다. 리리안은 힘을 주어 구멍에서 그 무언가를 빼냈다. 책이었다.

나무에 기대 앉아 안을 펼쳐 보니 필기체가 가득 쓰인 것이 보였다. 책이 아니고 누군가의 공책인 듯했다. 맨 첫 장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죽지 않았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리리안은 이것이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다. 심장이 쿵쿵 뛰어서 다시 책장을 덮었다. 남의 사적인 일기, 그것도 가장 예민한 부분을 보는 것은 도의적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폐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제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리리안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일기를 있던 곳에 넣어 두었다.

* * *

주방장 벡스는 오늘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다. 완벽한 재료, 완벽한 레시피, 완벽한 보조. 그야말로 렉셈 소르타의 아름다움에 걸맞은 완벽함이었다.

오늘 점심, 벡스의 실력은 황족에 의해 냉정하게 평가받을 것이었다. 솔타인들은 벡스의 콧대를 너무 세워 주는 경향이 있었다. 어느 날 코가 라르투아인처럼 날카롭게 변한다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객관적인 평가를 원했다. 수프부터 고기와 가금류, 야채와 후식, 음료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벡스는 초조한 얼굴로 황후의 반응을 기다렸다. 황후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식당에 들어왔다. 틈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에 벡스는 긴장감으로 침을 삼켰다. 기다란 식탁에 무심하게 시선을 준 황후가 오소리 요리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게 오페림인가?”

“아, 네! 맞습니다. 드셔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유명한 솔타 전통 음식이라고 들어서.”

황후의 목소리는 멕서스 호수만큼이나 잔잔했다. 하지만 물결이 이는 것 같은 떨림이 있었다. 문득 벡스는 황후가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냉담하다기보단 실의에 빠진 얼굴이었다.

식사 순서를 무시하고 황후는 오페림부터 먹겠다고 했다. 시종들이 황후의 접시에 요리를 덜었다. 황후는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음식을 씹었다. 다 삼키고 난 뒤에도 이렇다 저렇다 할 반응이 없어서 이미 너절해진 벡스의 자존심이 바닥을 칠 즈음이었다.

“폐하…….”

황후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벡스는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까지 맛이 없다는 말인가. 하긴 음식이 매번 반 넘게 돌아오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였다.

옆에 앉아 있던 시녀장이 당황한 얼굴로 손수건을 내밀었다. 황후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불편한 것이 있으세요?”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주방장 대신 올리비아가 대신 황후에게 물었다. 황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맛있어서…….”

그 한마디가 왜 그렇게 슬프게 들렸는지.

“정말 맛있어서…….”

황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대충 닦아 대더니 한 입 더 들었다.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왜 유명한지 알겠어. 사람들…… 이 왜 그렇게 먹고 싶어 하는지도.”

벡스는 자신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은 있었지만 그것이 사람을 울릴 정도로 맛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게다가 황후는 맛있다고 했지만 점심 또한 반 정도를 남겼다. 아예 손도 대지 못한 음식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벡스는 알 수 있었다. 황후의 말이 진심이라는걸. 40년 인생에 이토록 마음이 아프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들었던 칭찬 중 가장 슬픈 칭찬이었다.

벡스는 진심으로 황후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 주고 싶어졌다. 아프다는 황후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벡스는 음식의 힘을 알았다. 사람을 울리긴 힘들지 몰라도 잠시 살맛 나게 해 줄 수는 있을 거였다.

* * *

베르니의 마법 때문에 대륙 각 나라의 대리자가 크로이센에 모이기로 했다. 카를로이가 크로이센의 마법 학회에 막대한 금액을 연구비로 지원했으니 지금보다는 많은 걸 알아낼 것이고, 대책을 강구하고 베르니에게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서라도 그걸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 문제로 바빠 보이는 카를로이를 지켜보며 알렉시스는 그가 살아 있는 송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멀쩡히 식사도 하고, 멀쩡히 치료도 주기적으로 받고, 멀쩡히 일도 하는데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소름 끼쳤다.

“마하에서는 다행히 황제가 아니라 그 동생이 온다더군. 마음 좀 놓아도 되겠어. 그 황제는 비위 맞추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라서.”

“그런 몸 상태로 사절단을 맞이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눈이 움푹 패어서 예전보다 무서운 인상이 된 카를로이가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최근에 내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나? 난 괜찮은데.”

“치료사 말은 그렇지가 않던데요. 폐하는 쉴 시간이 필요합니다. 약을 과복용할 게 아니라요.”

“할 일이 많아.”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모조리 하시니까요. 이런 일은 저한테 시키시면 됩니다.”

“뒤냐, 제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카를로이의 말끝은 떨렸다. 알렉시스는 카를로이의 손에서 구겨진 종이를 흘끗 내려다봤다.

“내가 빌어먹을 일이라도 하게 놔둬.”

숨이 막히는지 카를로이가 잠시 말을 멈췄다.

“……부탁이네.”

저렇게 나오니 또 할 말이 또 없었다. 총체적으로 답이 없었다. 지금은 멀쩡히 사는 척하지만, 저게 얼마나 오래갈지는 의문이었다. 몸이 받아 주겠냐는 말이다.

한두 번 정도는 술을 마시는 것 같았는데 이젠 술도 하지 않았다. 물론 저번처럼 술에 취해 뭘 부수고 다치는 것보단 마시지 않는 게 낫지만, 술도 없이 황후가 없는 푸르투를 어떻게 버티는지 의문이었다.

“난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공도 그쯤 해 둬. 죽지도 않을 거고 개처럼 살지도 않을 테니까.”

차라리 그때 죽게 놔둘 걸 그랬나 싶을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오늘은 이쯤 하고 들어가 쉬십시오.”

그것이 뒤냐 최대의 양보라는 것을 아는 카를로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을 맞이할 별궁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던 카를로이는 문득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부자연스럽게 굳은 카를로이의 시선을 따라 알렉시스가 고개를 돌렸다. 카를로이는 벽에 걸린 화려한 리투나 생화 장식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카를로이는 대답이 없었다.

“이제 리투나를 가까이 못 하는 사람이 없으니 장식으로 쓰는 모양입니다. 치우게 할까요?”

“아니.”

그는 간신히 대답을 꺼냈다.

“……먼저 가 보겠네.”

카를로이의 뒷모습이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알렉시스는 저도 모르게 그를 붙잡을 뻔했다. 그러나 카를로이는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그가 조금도 비틀거리지도 않았다는 점이 알렉시스를 불안하게 했다.

카를로이는 흐트러진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 줄 수가 없었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면……. 자신이 의미도 없는 쓰레기가 될 것 같았다. 리리안의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하는.

그는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정원으로 나와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푸르투에 다시 피기 시작하는 리투나는 리리안의 완전한 부재를 생생하게, 외면할 수도 없으리만큼 강렬하게 증명해 냈다.

만개한 하얀 꽃을 보자마자 기억이 몰려들었다. 리투나 때문에 앓아누웠던 리리안……. 그리고 그때 그녀에게 했던 자신의 말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그와 리리안의 관계는 처참하게 끝나 버렸는데 기억에는 끝이 없었다. 푸르투의 모든 것들은 강제로 리리안을, 그의 기억을 되살렸다.

구역질이 나서 억지로 먹었던 저녁을 게워 내고 카를로이는 조각상에 쓰러지듯 기대앉았다.

“리리안…….”

그는 눈을 감고 다시는 닿을 수 없는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부르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어지는 이름을. 하지만 그는 죽지 않을 것이다. 울지도 않을 것이다.

숨도 쉴 수 없는 물속에 빠진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살려고 뻐끔거려 봤자 나오는 것이라곤 허망한 거품뿐인.

* * *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었다. 리리안은 베개 밑에 숨겨 둔 알렉시스의 일기장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분명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저도 모르게 다시 호수에서 그 일기장을 가져와 버렸다.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대체 알렉시스는 어떻게 그 상실을 이기고 살고 있는지. 리리안에게는 그 방법이 절실했다.

어느 순간 괜찮다가도 또 어떨 때는 사무치는 그리움에 시달렸다. 뭘 먹을 때마다, 뭘 볼 때마다 바보처럼 넋을 빼고 싶진 않았다. 이 슬픔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는 건지 너무 막막해서, 남의 일기장이라도 훔쳐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리리안이 약을 잘 복용하고 난 뒤부터는 메리앤도 그녀를 혼자 있게 놔두어서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리리안은 결국 일기장을 꺼내 들고 두 번째 장을 펼쳤다.

<아니, 아델라이드는 죽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 애는 죽어 버렸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겐 살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리리안이 다음 장을 넘겼다.

<아델라이드는 냉정하고 종종 잔인하다.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런 면까지 사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날 괴롭게 한다. 그 애는 왜 나에게 살아 달라고 말해서, 왜 아들 옆에 남아 달라고 해서.>

누군가를 잃은 사람의 표현이란 원래 이렇게 다 비슷비슷한 것일까. 어쩌면 상실의 기분을 제대로 표현할 만한 단어가 세상에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렉시스의 일기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델루아에 대한 분노, 죽음에 대한 허망함, 무의미한 삶에 대한 회의감, 유지에 대한 의무감……. 모두 리리안이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아델라이드를 드니스로 바꿔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것만 같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알렉시스의 일기를 읽는 동안 리리안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알렉시스는 상실을 극복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델라이드를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그저 기억을 안은 채로 함께 살며 익숙해지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맨 답은 없었으나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신만 이토록 바보처럼 고여 있는 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어서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아주 홀가분해지지 못한 것은 카를로이 때문이었다. 알렉시스의 일기는 리리안이 겪는 기분과 같았지만,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카를로이였다.

알렉시스의 일기엔 카를로이에 대한 원망이 델루아에 대한 감정만큼 자주 나타났다. 부모를 잃은 아이를 향하기엔 너무 가혹한 원망과 기대치가 적혀 있어서 리리안은 몇 번이나 숨을 골라야 했다.

마음이 계속 시렸다. 그런 문장을 읽을 때마다 어둠의 숲에 갇혀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고 되뇌었던 남자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에.

<아델라이드가 아니라 카를로이였어야 했던 걸지도.>

문장 뒷부분의 카를로이란 단어부터는 아예 까맣게 선이 여러 번 그어져 있었다. 본인이 써 놓고도 죄책감을 느낀 것이 아닐까 싶었다.

리리안은 일기장을 덮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드니스에 대한, 알렉시스는 아델라이드에 대한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상실마저도 버티게 해 주는. 그러면 카를로이는, 그는 누구를 가지고 있을까.

어렴풋이 짐작만 한 카를로이의 과거를 너무 구체적으로 읽은 탓일까.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카를로이와 이렇게 멀어지고 나서야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보게 되는 것이었다. 부질없게도.

그날 꿈에는 자신을 상처 입히던 카를로이가 아니라 어느 날 밤 정원에서 울던 카를로이가 나왔다.

<루. 루……. 내가 잘못했어, 루…….>

<내가 죽였어.>

하염없이 미안하다고 말하던 카를로이가.

온전한 사람이나 기억 하나 없이 카를로이가 대체 14년을 무슨 생각으로 버틴 건지 궁금해졌다. 이내 리리안은 깨달았다. 그는 버티지 못해 저렇게 무너졌다는 것을.

자신이 그날 한 일을 정말로 카를로이를 ‘구한’ 것이라 할 수 있는지 리리안은 이제 의심스러워졌다.

<5권에 계속>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 5권

지은이|진서

펴낸곳|루시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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