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황후는 황제를 싫어한다 (2)
드니스의 장례식을 공식적으로 하는 것은 리리안도 바라지 않았다. 드니스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오는 것이나 이러쿵저러쿵 말이 도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 멀리 나가서 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푸르투 안에서 적당히 남들 시선을 끌지 않으면서 해야 했다.
“어쩐 일이십니까.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집무실에 앉아 있는 카를로이를 보고 알렉시스가 딱딱하게 물었다.
“조금 뒤에 있을 정무 회의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 우스울 테니까.”
“오실 겁니까?”
카를로이가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푸르투에선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누구라도.
리리안의 일로 쓸데없는 개소리가 조금이라도 나오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에게 요구되는 일을 어느 정도 하는 것이었다.
“공에겐 고마워하고 있어.”
한창 서류를 읽던 카를로이에게서 조용한 감사가 흘러나왔다. 알렉시스는 제 귀를 의심하느라 놀라움도 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솔직히 공도 꽤 즐겼을 것 같은데. 공은 자네 자신 말곤 그 누구의 일 처리도 성에 차지 않잖아. 차라리 본인이 직접 하니 편했을 거야.”
“재미없습니다.”
“농담도 아닌데 재밌을 필요가 없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게 더 짜증이 났다. 피곤하긴 했지만, 카를로이 말대로 편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기에. 이런 식으로 뻔하게 간파당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베르니…….”
알렉시스는 자신이 만든 것들을 읽으며 중얼거리는 카를로이를 천천히 관찰했다. 치료사의 걱정과는 다르게 말하는 것도, 몸도 꽤 멀쩡해 보이긴 했다. 인상이 여전히 지나치게 날카롭긴 했지만. 하긴 어디가 안 좋대도 드러내지 않겠지. 독한 놈.
그래서 저 미친놈이 또 무슨 꿍꿍이일까 걱정이 됐다. 멀쩡한 척을 할 때마다 미친 짓거리를 하니까. 또 뭘 하려고 집무실까지 와서 이러고 있을까.
“공주의 사생아가 멋대로 한 일이라 자신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누군지도 잘 모른다고? 참 편해서 좋겠어.”
크로이탄의 눈이 보여 준 공작과 베르니의 마법사의 대화를 바탕으로 알렉시스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같이 그 기록을 봤던 마법학자의 공증이 함께 있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베르니의 마법사가 공주의 사생아였고, 델루아를 통해 크로이센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보고서를 베르니에 보내자 꽤 뻔뻔한 답이 돌아왔고, 그걸 카를로이가 읽고 있는 것이었다.
“쓰기 좋은 패였겠지요. 실제로도 베르니 왕실로부터 핏줄로 대접받은 적은 없었던 듯합니다. 유감의 표시로 어느 정도 보상을 제시하기는 했습니다만……. 어쨌든 책임의 표현은 아닌 거지요.”
“델루아 개새끼가 베르니 좋은 일만 했군. 그래도 군사를 멋대로 이동시킨 것에 대해서 책임은 져야지. 라르투아 대사에게 연락은?”
“라르투아요?”
“휴전 때 맺었던 계약 조항을 어겼으니 라르투아와 함께 보상을 요구할 거야, 베르니에게.”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크로이탄의 눈에 남은 기록이 생각보다 자세하지 않아서 아쉬운데. 델루아 공작저에서 나온 건 없고?”
“쓸 만한 건 아직……. 델루아 공작 옆에 붙어 있었다던 시녀장의 아들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서 찾고는 있습니다만.”
카를로이가 무심히 도장을 찍었다. 서류를 넘기던 카를로이의 손이 멈칫했다. 키아나의 이혼 요구서였다. 클라이드 앙센과의 염문설이 황실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며, 그 책임을 인정해 황비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민망하도록 뒤늦은 인정이었지만, 클라이드 앙센까지 크로이센으로 돌아왔으니 이혼을 빨리 처리하고 싶을 키아나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로덴 후작이 받아들였나?”
“설마요.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차피 황비 전하께선 신경도 쓰지 않을 겁니다.”
“평판이 떨어질 텐데.”
“그 문제라면야. 어차피 마하로 쫓겨나듯 가야 하는 판국에 크로이센의 평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하셨습니다.”
요사이 부쩍 가까워진 사이라 이 정도 대변하는 것은 쉬웠다.
“돈이라도 더 줘야겠군.”
카를로이가 이혼 요구서를 옆으로 넘겼다. 계약의 파트너로서 잘해 줬고, 이혼의 책임을 무리하게 혼자 지려고 하니 그 정도라도 해 줘야 할 듯했다.
“황비 전하는 돈이 아니라 클라이드 앙센의 작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앙센가가 그 이름 그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어. 멸문밖에 없지.”
“모르지 않을 테니 새로운 작위를 달라는 말일 겁니다. 어쨌든 앙센 영지에도 새 이름이 붙을 것 아닙니까.”
“어차피 마하로 갈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뭐, 언젠가는 돌아오겠단 마음이겠지요.”
아무래도 힘들지 않겠나 싶어 좀 시큰둥해지던 카를로이는 문득 생각을 바꿨다. 클라이드 앙센의 대우가 바뀌는 것은 그 하나의 대우가 바뀌는 게 아니었다. 크로이센에서의 사생아 입지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 보도록 하지.”
리리안의 미래를 함부로 기약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차피 리리안이 계속 살아야 한다면 공작의 사생아라는 것이 발목을 잡지 않기를 바랐다. 뒤늦은, 하찮은 걱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흘 뒤에 동궁의 3관까지 다 비웠으면 좋겠는데.”
“고용인들까지 말입니까?”
“어차피 그곳이 일하는 사람들 수도 가장 적잖나.”
“이유는요?”
“드니스의 장례식을 치를까 해서.”
그것만 듣고도 알렉시스는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왜 이놈, 아니 황제가 집무실에 와 있었는지, 그리고 황후가 어떤 장례를 원하는지.
“불편한 점 없게 하겠습니다.”
파악한다고 해서 굳이 반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사실은 반대할 생각도 없었고.
알렉시스의 심경의 변화를 다 알고 있다는 듯 카를로이는 별 반응이 없었다. 다만 자연스럽게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처리할 사람이 너무 많은데.”
“크로이탄의 눈으로 본 기록에서 찾아낸 사람들입니다. 반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진 않았더라도 다른 자잘한 방식으로 줄을 댄 사람들이 존재하니까요.”
크로이탄의 눈이 물 위에서 과거를 보여 줄 때, 카를로이는 델루아 공작이 리리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고, 알렉시스 뒤냐는 델루아 공작이 어떤 개수작을 누구와 부렸는지 전부 담았다.
“델루아의 시체는 아직 멀쩡하던가.”
“예.”
그 개새끼를 직접 죽일 수 없었다는 게 아쉽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카를로이도, 알렉시스도. 그래도 그들보다 훨씬, 아니, 가장 마땅한 사람이 그를 죽였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하지만 죽음은 죽음이고, 그 이후의 일은 또 다른 것이었다.
“한 다섯 번쯤은 살아났으면 좋겠군. 다시 죽여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아서.”
카를로이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마지막으로 도장을 찍었다.
“동감입니다만, 그래도 미래를 박탈당하는 것만큼 큰 벌도 없지요.”
일단 델루아 공작이 뒤진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카를로이는 스산한 황후궁에 두고 온 여자를 떠올렸다.
그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과연 델루아 공작 하나뿐일까.
<그러니까 죽지 마. 너 편하자고.>
고통스러워하던 리리안의 목소리가 귀에 울려서 카를로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어떤 사람에겐 기약 없는 미래가 벌일 수도 있었다.
* * *
드니스의 장례식은 델루아 공작의 목이 수도 한가운데에 걸리고 난 다음 날에 치러졌다.
한스 델루아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지가 잘렸다. 그리고 그 사지가 각각 또 잘게 잘려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유일한 덩어리로 남은 모가지는 수도 저잣거리 한가운데에 높이 걸렸고 사람들의 침을 받았다. 참으로 볼품없는 말로였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날 새벽부터였다. 부슬비가 요란스럽지 않게 내렸다. 동궁에 위치한 크지 않은 예배당의 후원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사람이라고 해 봤자 리리안과 카를로이, 그리고 메리앤과 제인밖에 없었다.
카를로이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도 되는지 의심했지만 리리안이 남으라고 했다. 마치 이것도 보지 않고 도망칠 생각이냐고 비난하는 듯한 말투에 카를로이는 할 말이 없어져서 리리안 옆에 섰다.
리리안은 화장을 원했다. 드니스가 크로이센에 묻히는 걸 딱히 바라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하얀 가루가 되어 나오는 드니스를 보고서도 리리안은 울지 않았다. 비틀거렸을 뿐이었다.
옆에 있던 카를로이가 반사적으로 리리안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옅은 술 냄새가 그의 코를 자극했다.
“너, 술…….”
카를로이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속삭였다. 몸도 좋지 않은데……. 메리앤을 흘끗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조금 마셔 봤자 죽지도 않아.”
심상한 대꾸와 함께 리리안은 카를로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또 ‘그러니까 네가 죽여 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카를로이가 아무 대답이 없자 리리안은 그를 밀어내고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런 날에도 비가 기어코 내리는 게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서글펐다.
새벽에 내리는 빗소리가 견딜 수 없어져서 술을 마셔야 했다. 비가 좋다던 드니스의 편지를 생각하자 화가 났다. 날씨까지 드니스의 죽음을 인정하는 듯했다. 가는 길에 좋아하는 비 내려 주겠다는 걸까.
이 세상에서 오로지 리리안 자신만이 드니스의 죽음에 화가 난다는 사실이 참을 수가 없어졌다. 너무 화가 나서 웃음이 계속 나왔다.
갈 곳 잃은 화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비 내리는 하늘보다도 우중충해 보이는 카를로이에게.
“꼴도 보기 싫어.”
자신이 남으라고 했다는 걸 알면서도 리리안은 제 우산을 메리앤에게서 뺏어 카를로이에게 집어 던졌다. 던져 봤자 카를로이보다 훨씬 작은 우산이라 가슴팍만 툭 치고 떨어졌지만.
비를 맞아도 별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도 없었으면 했다. 술을 더 마시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대로 쓸려 내려가고 싶기도 했다.
비를 맞으며 아무렇게나 걸어가는데 갑자기 위에 무언가가 드리워졌다.
“미안해. 그래도 비는 맞지 마.”
바로 뒤에서 카를로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자극했는지는 모르겠다. 카를로이의 그 걱정스러운 목소리인지, 미안하다는 말투인지, 조심스러운 태도인지. 이 모든 것일 수도 있겠지.
갑작스러운, 이유를 정확히 알기도 힘든 분노가 리리안을 휘감았다. 뒤를 돌자 쳐다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내리깐 카를로이가 보였다.
“이제 와서.”
너무 화가 나서 말을 잇기가 힘들 정도였다.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은 다 카를로이의 탓인가? 아니겠지.
하지만 뭔가를 기대했던 사람도 카를로이 하나뿐이었고, 원망할 사람이 오직 그 하나 남은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카를로이가 자신에게 씌워 주고 있는 우산을 손으로 내치면서 리리안은 화를 냈다.
“이제 와서, 이딴 짓 하지 마.”
이렇게 쉽게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일 거면서, 도대체 왜.
카를로이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으면서도 기어코 우산을 주워 들고 씌워 줬다.
비는 계속 내리고 그 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지긋지긋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미쳐서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아 리리안은 입술을 깨물다 다시 우산을 피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렇게나 걸어갔다. 속이 답답해서 제대로 생각이 되지 않았다.
“루, 제발. 그러다 다쳐.”
손목에 카를로이의 손이 닿는 동시에 리리안이 뒤를 돌아 소리를 질러 댔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미안해.”
정말 잘못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보니 분노가 더 솟구쳤다. 감당이 안 돼 몸이 아플 정도였다. 빗물이 그를 적시고 있는 그 꼴이, 보기가 싫었다.
“네가 뭔데 그렇게 불러!”
리리안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우산을 다시 그에게 내팽개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주먹으로 마구 카를로이의 가슴을 쳤다.
“사람 엿 먹이는 거야, 뭐야.”
숨이 차서 말이 잘 나오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아무리 주먹으로 치고 소리를 질러도 그는 상처 입는 것 같지 않았다. 빌어먹게 크고, 단단했다. 나는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데.
주먹이 카를로이의 옷 장식을 스치자 약한 피부에 상처가 났다. 내내 가만히 있던 카를로이는 그제야 리리안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제발…….”
그의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내가 때릴게. 너 이러다 다쳐.”
“……그러니까, 대체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카를로이의 시선은 리리안 손의 상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 몸 다치는 건 신경도 쓰지 않더니 리리안이 다치는 것에 저렇게 반응한다. 그게 리리안은 우습고, 화가 났다. 괴로워하는 그 얼굴을 보니 이성이 끊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왜, 이제 내가 다치는 건 볼 수가 없어?”
이 절망감을 카를로이가 알았으면 했다.
“그 전엔 잘만 봤잖아.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근데 이제는, 견딜 수가 없어?”
그가 더 괴로웠으면 했다. 혼자 괴롭고 미쳐 가는 게 너무 무섭고 화가 났다.
리리안은 겉옷을 벗어서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던지고 신발을 벗었다. 맨발로 아무렇게나 바닥을 밟고 비를 맞았다. 나뭇가지에 얇은 옷이 걸려 더러워지고 망가지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깨서 몸을 사정없이 찔러 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대로 몸이 망가져서 죽었으면. 이대로 비에 쓸려 내려가 흔적조차 사라졌으면.
“리리안!”
뒤에서 카를로이가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더니 어느새 그는 또 제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꺼져.”
카를로이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리리안에게 덮어 주었다. 리리안은 그걸 찢어 버리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러지 마. 너 괴롭히지 말고 그냥 날 때려.”
“누구 좋으라고.”
“차라리 날 괴롭혀…….”
“그러고 있잖아, 지금.”
그 말에 카를로이의 표정이 멍해졌다.
“내가 이러는 거 못 보겠다며. 괴로워 죽겠다는 것처럼 그렇게 굴잖아.”
빗속에서 카를로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고작, 고작 나 같은 새끼 괴로우라고 이러고 있다고? 나 같은 개새끼 괴롭히자고, 지금.”
“그래! 할 수만 있으면 네 앞에서 목이라도 찌르고 싶어. 네가 보는 앞에서!”
카를로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 와서 네가 이렇게 구니까! 그러고 싶어졌어. 짜증 나고 우스워서.”
할 말을 잃은 듯한 카를로이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한참을 그렇게. 비는 그를 무자비하게 적셨다.
그가 천천히 무너졌다. 흙탕물 한가운데 무릎을 꿇듯 주저앉아서 고개를 떨궜다.
“내가 다 잘못했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던 카를로이의 어깨가 떨렸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카를로이가 조심스럽게 리리안의 양 손목을 쥐었다.
“그러니까, 제발. 부탁할게……. 너까지 널 괴롭히지 마.”
카를로이가 덮어 준 옷이 너무 무거워서, 리리안은 주저앉고 싶었다. 셔츠 바람으로 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은 카를로이를 보고 있자니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다.
애원하던 카를로이의 이마가 떨어지듯 리리안의 허리에 닿았다.
“이미 나 때문에 많이 다쳤잖아. 네가 이렇게 하지 않아도.”
그는 고해 성사를 하듯 빌었다.
“네가 이렇게까지 널 괴롭히지 않아도, 난. 매 순간 이미…….”
카를로이는 차마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리리안 앞에서 괴롭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무슨 자격으로.
“그러지 마……. 리리안. 나 같은 새끼 괴롭히자고, 이렇게. 제발…….”
두서없는 애원이 빗소리를 가르고 귀를 괴롭혀 왔다. 옷은 비에 젖어서 질척했다. 리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스스로가 한심했다. 생각과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울고 싶었다. 애처럼 바닥에 주저앉아서 리리안은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드니스를 부르면서 울었다.
“엄마…….”
이제 만족하냐고 묻고 싶었다. 이렇게 먼저 가 버려서 편하냐고. 여기는 지옥인데, 나만 놔두고 가서 좋냐고.
숨이 막힐 정도로 울었다. 몸이 미친 듯이 떨렸다. 카를로이가 옷을 다시 덮어 주면서 품에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져서 울다가 고개를 들었다.
금색 눈이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 보였다. 이 순간에도 아름다운 눈이. 저 눈에 홀려 칼을 구했던가. 언젠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저 눈을 가진 남자아이가 살아 있다는 게 내 인생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인생은 사람을 얼마나 개같이 만들어야 만족하는 걸까.
“괴롭히지 마.”
카를로이가 속삭이며 손가락으로 리리안의 입술을 스치듯 쓸었다. 피가 날 정도로 깨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신경 꺼.”
“그럴 수가 없어.”
괴로운 듯이 중얼거리던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널 가장 미워한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조차도, 널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었어.”
갈라진 목소리로 카를로이가 띄엄띄엄 말했다.
“널 싫어한다고 믿던 순간에도…… 네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어딘지 모르게 몸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미안해.”
카를로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리리안은 눈을 감았다. 차라리 카를로이가 진심으로 자신을 미워했다면 덜 괴로웠을지도 모르는데.
눈물이 멈출 법도 한데 멈추지 않았다.
<널 묶어 둘 건 아무것도 없어.>
드니스가 편지에 그렇게 적었던가. 맞는 말이었다.
엄마, 정말 그렇게 되어 버렸어.
이곳에 리리안을 묶어 두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마음 하나 놓일 곳이 없었다.
* * *
메리앤에게 황제와 황후가 빗속에서 난리를 치는데도 막지 못했냐며 한마디를 할까 하던 알렉시스는 이내 그만두었다. 우선 무고한 누명을 썼다 풀려난 메리앤에게 뭐라 하기가 힘들어진 탓이었고, 또 메리앤의 분위기가 요새 굉장히 험악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저 둘을 말리겠나 싶기도 했고.
아무튼 그렇게 비를 많이 맞았으니 황제나 황후나 앓아눕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한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만 그렇고, 하나는 그렇지 않은 건 이상한 일이었다.
황후는 열이 펄펄 끓고 계속 헛소리를 하느라 치료사가 붙어 있는데 카를로이는 가만히 그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황후의 입에서 싫어, 라든가 안 돼, 같은 짧은 단어들이 신음처럼 끊겨 나왔다.
“아니, 이렇게 비를 맞게 놔두시면 어떡합니까. 몸이 좀 괜찮아지고 있다는 게 이렇게 혹사시켜도 된단 뜻은 아닙니다.”
치료사가 리리안을 진찰하며 누구한테 하는지 모르겠는 잔소리를 했다.
“비는 같이 맞았는데 괜찮으십니까?”
알렉시스가 슬쩍 물었는데 카를로이는 대답이 없었다. 이놈이 또 제 내키는 대로 무시하나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는데 상태가 좀 이상했다.
“폐하.”
아예 안 들리는 건지 미동도 없었다.
“나한테 옮겨.”
다 쉰 목소리로 하는 말은 대답도 아니고 뜬금없는 말이었다.
“뭘 말입니까?”
“뭐든 간에.”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눈만 굴리던 치료사가 마침내 뜻을 이해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지금 전이 치료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맞는 듯했다.
“한 번 해 보니 만만하십니까? 무슨 이런 것도 다 전이 치료를 하라고……. 왜요, 아주 몸을 바꾸시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거 보니 해도 되겠는데.”
“별거 아니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난번 전이 치료 때문에 상태 안 좋으신 걸 제가 뻔히 아는데.”
“그거 제대로 한 거 맞나? 제대로 된 거면 저 사람은 왜 아직도 저렇게 아픈 거지?”
“원래 몸이 약하신 걸 어떡합니까. 식사를 제대로 하시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가슴 통증도 사라졌을 거고 기침도 안 하시잖아요, 이제. 정신적인 부분은 좀 오래 치료가 필요합니다. 독은 둘째 치고 워낙 개인적 고통이 크시니까…….”
안색이 어두워지는 카를로이의 눈치를 보다 치료사가 덧붙였다.
“그래도 흡입량이 많진 않아 환각을 보는 상태까진 가지 않아서 다행인 거죠. 그랬으면 정말 치료할 엄두도 못 냈을 텐데.”
“알았으니까 이번엔 제대로 옮겨.”
“아, 글쎄 안 된다니까요. 사람 몸이 다 달라서 똑같은 걸 옮겨도 고통이 다 다른 마당에 무슨…….”
“안 죽으니까 그냥 해. 저 사람 나 때문에 아픈 거니까.”
치료사가 허락도 없이 갑자기 손을 카를로이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치료사의 얼굴은 찌푸려지다 못해 일그러졌다.
“역시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사람이 열이 이렇게 날 땐 다 제정신이 아닌 법입니다. 치료나 받으세요.”
인간이 이제 징그러운 수준이었다. 열이 이따위로 끓는데 멀쩡한 척 앉아 있는 게 아주 소름이 끼쳤다.
“미쳐서 아무 소리나 내뱉는 거 아니니까 시키는 대로 해.”
보통은 이런 상태를 보고 미쳤다고, 돌았다고 한다는 말이 목 끝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걸 치료사는 간신히 참았다. 대신 치료사는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하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공작은 미친 황제를 말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질리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긴 했다.
치료사가 한숨을 쉬었다. 대체 말년에 이게 무슨 일인가. 과로와 스트레스로 죽게 생겼다.
“그럼 조건이 있습니다. 전이 치료 끝난 후에 폐하 침실로 돌아가셔서 제게 진찰받으시고 조금이라도 쉬시겠다고 약속하세요. 그러면 하겠습니다.”
카를로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에휴. 그러면 그냥 절 죽이십시오.”
목숨 가지고 뻗대는 건 황제 말고 치료사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겠으니까 빨리, 제발 빨리 좀 해.”
카를로이가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리리안이 아픈 걸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리리안 말대로 이게 저 좋자고 하는 짓이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프지 않을 때도 악몽을 꾸고 소리를 치다 울며 괴로워하는데, 몸까지 아프게 할 수가 없었다. 도저히.
괴로워하는 황제를 흘끗 쳐다본 치료사는 결국 내키지 않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래도 황제로부터 제 몸도 조금은 돌보겠단 말을 받아 냈으니 나름 얻는 건 있었다.
치료를 하는 와중에도 치료사는 계속해서 카를로이를 살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고통이 옮겨질 테니 움찔거리기라도 할 법한데 전혀 반응이 없어서 치료사는 자신이 제대로 못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치료가 끝난 후 황후의 숨소리가 훨씬 잔잔해지고 열이 내려간 걸 보고서야 치료사는 치료가 성공했음을 알았다.
카를로이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지만 어차피 치료 전에도 비슷하게 좋지 않아 보였기에 생각보다 큰 타격이 없었나 보다고 치료사와 알렉시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카를로이가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까지는.
황후가 괜찮아진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카를로이가 갑자기 비틀거렸다. 치료사와 알렉시스가 놀라서 부축하려 들자 카를로이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곧 죽어도 멀쩡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는지 황후의 침실에서 제 침실까지 걸어가는 내내 다시는 비틀거리지 않았다. 정말 지독했다.
그리고 그렇게 기를 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카를로이는 쓰러졌다.
* * *
눈을 뜨고 나서도 리리안은 한참을 누워 있었다. 꿈에 나온 델루아 공작의 잔상이 끔찍할 정도로 선명하게 남은 탓이었다. 분명히 사지까지 찢겨 죽었다는데, 왜 아직도 멀쩡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계속해서 이렇게 꿈에 나온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좀 괜찮으세요?”
메리앤의 물음에 리리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게 이상하고, 짜증이 났다. 그렇게 비를 맞았는데. 죽어 버렸으면 좋았겠지만 안 된다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아프길 바랐는데 되는 일이 없었다.
메리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리안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직도 아들 지미를 못 찾았다고 들었는데 메리앤은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긴, 리리안 앞에서 내색하는 것도 못 할 짓처럼 느껴지겠지.
리리안은 그저 피곤하고 괴로웠다. 머리로 생각이 가능한 것들에 마음까지 쓰이진 않았다. 그럴 기력이 없었다. 차라리 생각도 안 될 정도로 아예 정신을 놓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또 아니었다. 어중간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지 항상 사람을 괴롭게 했다.
힘없는 시선이 침대 옆 장식장에 놓여 있는 낯선 목걸이에 닿았다. 보석이 박힌 작은 은색의 구가 반짝거렸다.
“드니스의 유해를 조금 담았어요.”
메리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리리안은 가만히 그 목걸이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바라봤다.
저 목걸이를 보고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작은 목걸이 안에 들어갈 정도의 흔적만 남은 드니스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 맞는지도 모르겠고.
넋을 놓고 누워 있던 리리안은 이윽고 무언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거슬리는 느낌에 그게 무엇인지 한참 고민을 하다 깨달았다. 카를로이의 부재였다. 언제나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옆에서 얼쩡대 사람을 화나게 만들던 카를로이가 보이지가 않았다.
“저, 황제 폐하는…….”
“됐어. 칼 이야기 하지 마. 꺼내지 마.”
눈치 빠른 메리앤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리리안이 단호하게 막았다. 진심이었다. 카를로이 이야기는 듣는 것도 괴로웠다. 어중간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람을 힘들게 하고, 카를로이가 딱 그랬다.
언제나 이도 저도 아니게 굴면서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나쁜 새끼.
더 이상 나빠질 수도 없을 것 같은 리리안의 얼굴을 보고 메리앤은 생각했다. 저 목걸이도 카를로이가 만들어 두었단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그리고 전이 치료에 대해서도. 두 번의 전이 치료 모두 황후에게는 언급도 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리리안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게 나을 듯싶었다.
“지겨워 죽겠어.”
기운 없는 목소리로 황후가 중얼거렸다. 살아 있어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리리안을 보며 메리앤은 황제를 떠올렸다.
이틀째 정신을 못 차리고 앓고 있다는 황제. 절대 리리안이 알지 못하게 하라기에 입을 다물고 있긴 했으나 메리앤은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황후는 기뻐할까, 화를 낼까.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 * *
악몽은 잊을 만하면 다시 리리안을 괴롭혔다. 2, 3일 걸러 한 번씩 델루아 공작이 농락하듯 꿈에 나와 드니스를 죽였다.
그렇게 1주일이 되던 날 새벽,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원에서 유리 조각을 들고 있었다. 날카로운 조각을 손에 든 자신의 팔목을 잡고 겁에 질린 얼굴로 쳐다보는 메리앤이 보였다. 혼란스러웠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폐하……. 공작은 죽었어요.”
메리앤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듯 끊임없이 속삭였다. 유리가 손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메리앤은 이번에야말로 황후의 침실에서 흉기가 될 만한 것들은 죄다 치워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꽃병까지 무기가 될 줄은 몰랐다.
“이상해.”
“폐하, 괜찮아요.”
“공작이 살아 있는 거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이렇게까지 날 괴롭히러 올 리가 없어.”
“죽었어요. 제가 시체를 봤어요.”
“나도 봐야겠어.”
“그럴 수 없어요. 이미 다 짐승의 먹이가 되었는걸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리리안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짓말 같아. 칼이 또 거짓말하는 걸지도 몰라. 죽이지도 않아 놓고, 죽였다고……. 나한테 항상 거짓말만 하니까.”
“아니에요, 폐하. 정말이에요.”
메리앤이 울다시피 속삭였다.
카를로이의 이름을 담자 그제야 그의 부재가 와닿았다. 생각해 보니 1주일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칼은 어디 있어?”
“아, 그게…….”
메리앤은 눈에 띄게 당황스러워했다.
“아, 알겠어.”
리리안이 자조하듯 웃었다. 힘없는 웃음소리는 실성한 것처럼 들렸다.
“지쳐서 나가떨어졌구나.”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벌써 도망쳤구나.”
“아니……. 정말 아닌데.”
메리앤이 발을 동동 굴렀다.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리리안이 뭔가 미묘하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사실대로 말하기도 좀 그랬다. 이 이상 예상 밖 행동을 하면 메리앤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메리앤을 보던 리리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메리앤이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찾아갈 수밖에.”
“네?”
리리안은 네글리제 차림으로 황제궁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폐하. 일단 오늘은 들어가 주무시고, 내일 찾아가요. 네?”
리리안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걸었다. 메리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백하듯 소리쳤다.
“편찮으시대요!”
그 말에 리리안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지금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정신도 못 차리시고 거동도 못 한다나. 아무튼 그렇대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고백했건만 리리안은 답이 없었다.
“폐하?”
“또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단정 짓는 리리안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걔가 아플 이유가 뭐가 있어.”
그야 그놈도 회까닥 돌아서 제 몸을 괴롭히니까…….
어느새 황제는 메리앤의 마음에서 ‘놈’이 되었다. 어쨌든 메리앤은 침을 삼켜 가며 그 말을 꺼내지 않는 것에 간신히 성공했다. 님에서 놈이 되었어도 명령은 명령이었다.
“그거야 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대요. 황제께서야 지금 폐하께 미쳐 계시는데 무슨 도망을 가겠어요. 진짜 몸이 안 좋은 것 같았어요.”
개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리리안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지독한 불신이었다.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사는 뒤틀렸다. 카를로이가 자신만큼 괴롭기를 바랐지만, 뭘 어떻게 해도 저만큼 괴롭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근데 뭐 어디가 아프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면서 리리안은 걸어갔다.
황제궁 사람들은 황후의 차림새라거나 찾아온 시간대를 보고 놀란 듯했지만, 딱히 막지는 않았다. 침실 앞에 서 있던 고르텐이 황후가 왔다고 알리려고 했지만 리리안은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했다.
휘장이 둘린 침대 쪽에서 조용한 말소리가 들리자 리리안은 발걸음을 죽여 가며 다가갔다.
“어쨌든 이제 움직일 수 있다는 거잖아.”
“아니, 그게 아닙니다. 제 말을 계속 원하시는 대로 왜곡해 듣지 마십시오…….”
“그런 적 없어.”
“계속 몸이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시니까 치료가 더디잖습니까. 나흘 전에 무리해서 황후궁에 가려고 하지만 않으셨어도 상태가 훨씬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진짜 괜찮아졌어. 이제 목소리도 나오잖아.”
“안 됩니다. 무조건 1주일은 더 쉬셔야 합니다.”
정말 아프기라도 했던 걸까. 리리안은 저 대화를 듣자마자 모든 것이 피곤해져서 더 가까이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카를로이가 아픈 꼴을 봐서 딱히 좋을 것도 없었다. 짜증만 돋울 뿐이다.
“계속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시는데, 가볍게 생각하실 게 아닙니다. 황후 폐하의 병증은 꽤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전이 치료는 그 고통을…….”
“그래, 알아. 심화시킨다고. 하지만 완화할 때도 있잖아.”
“폐하께서는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게다가 약도 안 드시고 또 전이 치료를 하자고 하시질 않나.”
돌아가려던 리리안은 그 말에 우두커니 섰다. 전이 치료?
“고작 감기 몸살 좀 옮겼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아.”
“예. 죽진 않으셔서 1주일간 정신도 못 차리고 앓으셨죠. 병을 무시할수록 키우기만 할 뿐입니다.”
어느 순간 몸의 고통이 사라졌던 것을 리리안은 기억했다. 치료사가 어떻게 치료를 했겠거니 생각했는데 전이 치료를 했다고? 비를 맞고 난 뒤에도 어쩐지 몸이 생각보다 멀쩡하이 싶더니.
또다시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의 분노가 차올랐다.
“무슨 소리야?”
별안간 뒤에서 나타난 황후를 보고 치료사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무슨 소리냐고. 누구 걸 누구한테 옮겼다는 거야.”
다 들었으면서 구태여 물은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핼쑥해진 카를로이는 낭패감이 역력한 얼굴로 리리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사람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너……. 정말로 내 병을 너한테 옮겼어?”
목소리가 듣기 싫을 정도로 떨렸다.
“아니.”
카를로이는 놀랄 만큼 뻔뻔한 답을 내놓았다.
“뭐?”
“그런 적 없어.”
“내가 방금 여기서 들었어.”
“해 보자고 제안만 했지, 한 적 없어. 자네가 말해 봐.”
애석하게도 치료사는 카를로이처럼 뻔뻔하지 못했다. 그는 누가 봐도 곤혹스러워하는 얼굴로 어물쩍거리다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리리안은 냅다 옆 테이블에 있던 책을 집어 들고 카를로이에게 던졌다. 힘없이 날아간 책은 카를로이 앞에 떨어졌다.
“바보 취급도 정도껏 해.”
카를로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옆으로 치웠다.
“그렇게 취급하는 거 아니야.”
“너 이따위 꼴로 왜 있는데, 그럼. 내 병 가져간 것도 아니면 왜 이러는데!”
이번에 리리안이 집어 던진 책은 정확히 카를로이의 가슴을 맞히고 떨어져 나갔다.
“던지는 건 괜찮은데. 가벼운 거 던져. 손목 다쳐.”
카를로이가 다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다. 그러면 내가 안 아프겠구나. 차라리 다른 사람 시켜서 던지라고 해. 잠자코 맞을게.”
미친놈. 치료사가 입술을 깨물어 가며 생각을 삼켰다. 분명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표정을 숨기지 못했는지 카를로이가 잠시 치료사를 쳐다봤다.
“자네는 나가 있어.”
고마운 말씀이었다. 이런 광기의 현장에 있고 싶지 않았다. 치료사는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침실을 나갔다.
리리안은 너무 화가 나서 숨이 잘 쉬어지지도 않았다.
“네가 뭔데!”
“괜찮아?”
리리안의 상태를 보고 카를로이가 침대에서 일어나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힘겨운지 잠시 이마를 짚고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런 카를로이를 바라보던 리리안이 가까이 다가어다. 그리고 작지 않은 타격음이 방을 울렸다. 카를로이의 고개가 살짝 흔들렸다.
그는 또다시 슬퍼졌다. 리리안에게 뺨을 맞아서가 아니었다. 때리는 것조차도 힘이 느껴지지 않아서. 때릴 거면 모질고 세게 때릴 것이지, 때린 후에 리리안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후회의 빛이 서글퍼서. 되레 상처받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어서.
자신 같은 놈을 때리는 것에 뭐 하러 그런 후회를 느끼는 걸까.
“더 때려.”
“네가 뭔데 그렇게 해. 네가 뭔데 날 네 맘대로 살려.”
“……미안해.”
“네가 그렇게 하면 내가 너한테 고마워할 줄 알았어?”
“아니.”
처음으로 카를로이가 리리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빌어먹을 놈이라서 그런 거야. 개 같은 새끼라 보기 싫은 꼴 못 봐서, 나 좋자고 멋대로 했어.”
태도가 기가 막혔다.
“왜 날 네 멋대로 해. 내 부탁은 하나도 안 들어주면서 왜 다 네 맘대로 해.”
리리안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떨리더니 마지막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울지 마.”
“네가 날 안 괴롭히면 되잖아. 어떻게 너는 끝까지……. 내가 널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도 맘 편하게 못 하게 하려고.”
말끝에 물기가 어리더니 결국 리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 한 방울에도 카를로이는 죽고 싶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내가 나쁜 새끼라서 내 맘대로 한 거야. 그러니까 계속 싫어해.”
억지 같은 말이 더 화가 났다.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는데 차가운 손길이 입술에 느껴졌다.
“깨물지 마.”
기다란 손가락이 입술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만지지 마.”
말 한마디에 언제 있었냐는 듯 손길이 사라졌다.
“미안해.”
“미안하단 말 좀 그만해!”
결국 리리안이 침대에 주저앉아 소리를 질렀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 주먹이 그의 가슴을 쳤다.
“언제까지 이럴 건데. 언제까지 사람을 이렇게 괴롭힐 거야.”
소리를 지르듯 우는 리리안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그녀가 금지했기에.
“그냥 날 죽여 주면 됐잖아……. 왜 사람을 맘대로 살려서 이렇게 힘들게 해.”
“죽어도, 그건 못 해.”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끝낸 카를로이의 얼굴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리리안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열이 아직도 심한 건지 그 이마에 닿은 어깨가 뜨거웠다.
미친 새끼. 개새끼. 리리안이 욕을 읊조렸다.
“그래, 나 개새끼 맞아. 그러니까 그건 너도 포기해. 절대로 못 들어주니까.”
“네가 싫어. 누구를 싫어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이미 죽었을 거야. 그 정도로 싫어.”
“그건 괜찮아. 네가 날 싫어하는 건, 괜찮아.”
그가 띄엄띄엄 단어를 내뱉을 때마다 더운 숨결이 살결을 간지럽혔다.
“내가 괜찮지 않은 건.”
잠시 말이 없었다.
“네가 이걸 다 느꼈다는 거야. 이 고통을 네가 느끼는 동안,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어깨가 축축해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왜 카를로이가 이렇게까지 하는지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죽어야 하는 건 나야.”
이제 와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계속 났다. 카를로이는 자신만큼 괴롭지 않아야 하는데,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내 고통까지 다 뺏어 가는 나쁜 새끼. 어깨에 닿는 물기가, 열기가 지나치게 생생해서 괴로웠다.
카를로이는 의식을 잃었는지 더 말이 없었다. 리리안은 매몰차게 그를 침대 위에 내팽개치고 침실을 나왔다.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메리앤 옆 고르텐에게 다가갔다.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해. 오면 내가 목매달고 죽어 버릴 거라고.”
울적한 표정으로 고르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뒤를 돌자 그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얼굴이 리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셀이었다. 델루아에서 돌아오고 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아무에게나 화풀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기분이 금세 미적지근해졌다. 어쨌든 은인인데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할 말 없으면 비켜 줘.”
말은 안 하면서 비키지도 않는 걸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름 생각인지, 눈치인지, 뭐든 간에 뭐가 생겼는지 함부로 말을 내뱉진 않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침묵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은 강한 의견에 리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아셀은 카를로이라면 죽고 못 사는 것 같았다.
“너한테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만 내 앞에서 카를로이 얘기 하지 마.”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황제궁을 나가는 황후에게서 찬바람이 느껴졌다.
* * *
카를로이는 사흘 더 앓다가 일어났다. 그는 며칠 더 쉬어야 한다는 치료사의 말을 무시했다. 무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긴 했다.
먼저 키아나 로덴과의 이혼 절차를 마무리 지었고 황비 제도를 폐지했다. 로덴 후작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울기까지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항상 그렇듯 키아나 로덴은 아버지에게 냉정했으므로.
그리고 메리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시녀장 메리앤에 따르면 그 아들은 델루아 공작 옆에 내내 붙어 있던 사람이었기에 자세한 상황을 알 가능성이 컸다.
정치적 상황은 상황이고, 사적으로도 그는 황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말도 교묘하게 무시했다.
황후궁 침실에 가는 대신 그는 그곳과 연결되어 있는 정원에 시시때때로 갔다. 혹시나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와서 자신을 찾으라는 당부에 메리앤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의 몸이 회복되자마자 황후궁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메리앤 혼자 리리안을 감당하기가 힘든 듯했다.
“좀 어떻지?”
“그냥 똑같지요. 악몽 꾸시고, 밤중에 돌아다니시고, 우시고……. 괜찮아지는 것 같다가도 한순간 또 힘들어하시고 그러네요. 식사를 제대로 못 하셔서 그런 건지. 약은 그래도 계속 드시는데.”
델루아 그 빌어먹을 새끼는 죽어서도 왜 리리안을 괴롭히는 걸까.
카를로이는 델루아를 되살린 후 최대한 잔인하게 죽일 수 있다면 목숨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위험한 걸 다 치워 놔서 심각한 일은 없어요. 그러니까 폐하께서도 여기 그만 나와 계세요.”
황제는 답이 없었다. 황제나 황후나 듣기 싫은 말엔 답도 안 하는 게 아주 똑같았다.
“좀 있으면 아들이 푸르투에 도착할 것 같은데. 먼저 안 만나 봐도 괜찮겠나?”
“살아 있는데 며칠 늦게 만난다고 큰일 나겠어요. 나중에 봐도 돼요.”
지금껏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아들을 빨리 만나고 싶어 할 법도 한데 죄책감 때문인지, 미안함 때문인지.
해서 메리앤의 아들 지미는 카를로이와 알렉시스가 가장 먼저 만나 보게 되었다. 그는 메리앤을 닮아 선하게 생긴 남자였지만 몸은 어울리지 않게 우락부락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다리를 저는군.”
“델루아를 빠져나오다가 다쳤습니다만 별것 아닙니다.”
꽤 별것으로 보이는 상처였지만 카를로이도 알렉시스도 더 묻진 않았다.
“오래전에 탈출한 것 같던데 왜 이렇게 늦었지?”
“동생이 수도에 와 있는 줄 모르고 찾다가 늦었습니다. 죽은 줄 알고 포기하고 온 것인데 다행히 살아 있어서…….”
알렉시스가 서류 더미를 넘기며 말했다.
“몇 가지 확인만 해 주면 바로 어머니와 동생을 보게 해 줄 테니 협조 부탁하네.”
건실하게 생긴 남자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베르니 마법사와 공작이 어떻게 서로 알게 된 사이지?”
“그건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마법사가 처음 델루아에 온 건 14년 전이었습니다.”
14년 전이라면 리리안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카를로이가 얼굴을 굳혔다.
“이본느 아가씨가 죽고 며칠 안 돼서 데리고 왔는데. 아가씨가 죽었다는 걸 아는 고용인들을 공작이 처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꽤 많은 수는 마법사의 실험 대상으로 쓰이다 미쳐 버려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길거리에서 죽었고…….”
덤덤한 말투로 뱉는 내용이 죄다 괴기스럽고 잔인했다.
“나머지는 그냥 죽이고 어둠의 숲에다 버렸지요. 그리고 아가씨, 아니 지금의 황후 폐하를 데리고 왔는데, 그 마법사가 어둠의 숲에 마법을 걸어 줬어요.”
“뭘 대가로 받고?”
“돈을 받았던가…….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때는 베르니에서 쫓겨난 신세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 그리고 독도 몇 가지 줬고요.”
그 시기에 왕성하게 독살 시도를 한 델루아 공작의 뒷배가 누구였는지 짐작이 가는 말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연락할 일이 있을 때 쓰라고 무슨 마석을 주고 갔는데 공작님이 아마 그때는 그냥 어둠의 숲에 버렸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버렸다고?”
카를로이의 의문에 대답은 알렉시스가 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델루아는 베르니와 엮이는 걸 그렇게 선호하지 않는다니까요. 원하는 수준의 마법이 가능한 사람이 그놈 하나니까 쓰긴 했겠지만.”
“미친 새끼가 가리긴 또 뭘 그렇게 가려.”
돌연 튀어나오는 황제의 욕설에 메리앤의 아들이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언제 다시 만났지?”
“폐하와 결혼이 결정된 이후에요. 그 마석을 찾는다고 어둠의 숲을 아주 뒤집었었지요……. 아무튼 찾아내서 14년 전에 죽지 않은 고용인들과 리, 아니 황후님께 누설 금지 마법을 걸었고요. 타워에도 걸고.”
알렉시스가 데려온 서기관이 미친 듯이 지미의 진술을 받아 적었다. 옆에 내내 붙어 있었다더니 과연 기억이 자세했다.
“베르니 마법사가 뒤통수치려던 걸 델루아는 어떻게 알아챈 거지?”
“의심은 꽤 빨리 했습니다. 마법사가 계속 베르니로부터 군사 원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해서 그때부터 의심했거든요.”
“군사력이 압도적이지도 않은데 반란을 일으키니까 그런 주장이 나올 만도 하지.”
“다름 아닌 그것 때문에요. 공작이 초조해져서 반란을 일으킨 것도 맞지만 마법사가 계속 가능하다고 설득을 했는데……. 반란 일으키니 기다렸다는 듯 베르니 원조 이야기를 계속 꺼내서 말입니다.”
“그따위 놈에게 베르니 손 안 빌리는 자존심은 있었다는 게 놀랍군.”
카를로이가 중얼거렸지만 알렉시스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아마 이 푸르투에서 한스 델루아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뿐일 터였다. 왜 그런 형편없는 전력으로 반란을 일으켰는지도 사실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한스 델루아는 두 번 미친 짓을 했다. 한 번은 카를로이를 유괴했을 때고, 두 번째가 이 반란이었다. 두 번 다 뒤냐가 그의 계획을 망쳤을 때였다. 그 성격에 미칠 만하지.
그리고 알렉시스 뒤냐가 아는 델루아는 절대로 베르니 군사력을 받을 인간이 아니었다. 델루아의 권력은 베르니와의 대치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베르니를 이용만 했지 주도권을 주고 싶어 하진 않았다.
“나중엔 제게 마법사 미행도 시켰고요. 독을 타고 있다는 의심을 했었습니다. 계속 환청이 들리고 그런댔나……. 그리고 그때부턴 정말 공작이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누가 봐도 미친놈 같았는데…….”
“미행해서 뭐 알아낸 건 없나? 베르니로부터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라든가.”
“증거라고 할 만한 건 없습니다만……. 아. 그 마법사가 죽기 직전에 자백하긴 했습니다.”
“자백? 고문이라도 했나?”
알렉시스가 모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사를 상대로요? 설마요. 마법사한테 베르니 원조를 받고 싶다고 하면서, 받을 수 있겠냐고 그랬더니 그 마법사가 엄청 자신만만하게 군사를 데려올 수 있다고 그랬어요.”
이제 서기관도 눈이 동그래져서 펜을 놀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공작이 시침 뚝 떼고 그런데 너같이 끈 떨어진 마법사 말을 어떻게 믿겠냐면서……. 지금 베르니 군사 원조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는 확신이 필요하다고.”
델루아의 연기력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카를로이와 알렉시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한참 머뭇거리다가 자기가 베르니 공주의 아들이라고 그랬어요. 땅 몇 개만 넘겨주면 베르니가 군사도 원조해 주고 델루아도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고…….”
“그 마법사도 죽기를 자청했군. 나라면 델루아 앞에서 그런 말은 절대 하지 않을 텐데.”
알렉시스의 말에 지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공작은 그냥 엄청 웃었습니다. 만족한다는 듯이. 땅이야 자기가 황제만 된다면야 내줄 수 있으니 군사를 최대한 빨리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르니 공주의 아들이란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니까 무슨 목걸이를 건네주던데요.”
“보라색 목걸이.”
“어? 맞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죽였어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도 무서운데 이본느 아가씨 시체가 썩어 가니까 다시 죽은 마법사 시체에 목걸이를 씌워서 별 지랄, 아니, 짓을 다 하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지미는 진저리를 쳤다.
“그러고는 저한테 다른 마법사를 찾아오라고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서…….”
“탈출은 어떻게 했지?”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공작이 제정신도 아닐뿐더러 델루아 저택에 걸려 있던 마법이란 마법은 죄다 풀렸고……. 드니스가 죽고 나서부턴 감시도 없어진 거나 다름없었고요. 제인이 사라져도 별 신경도 안 썼으니까요. 아, 그리고 이거.”
메리앤의 아들은 품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하나는 낡아 빠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새것이었다.
“낡은 건 전대 앙센 백작의 일기고, 이건 델루아 공작이 남긴 기록입니다.”
알렉시스는 공책들을 건네받으며 이 청년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상을 내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미는 몇 가지를 더 말하고는 물러났다. 어머니와 동생을 곧 보게 된다는 기대감과 초조감이 슬슬 엿보여서 카를로이도 더는 붙잡지 않았다.
“크로이탄의 눈에서 본 것과 이 기록을 대조해서 델루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 준 사람을 추려. 정리해서 내게 넘겨주고.”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요? 전 가볍게 국외 추방 정도를 생각 중인데. 그렇지 않아도 마하에서 노예가 부족하다 그러던데. 재산 몰수나 직위 박탈도 나쁘지 않지요.”
“생각을 좀 해 보고.”
카를로이의 생각 따위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또 뭘 하려고.
“좀 알려 주실 순 없겠습니까.”
“그것도 생각을 좀 해 보고.”
“예……. 그리고 사흘 후에 황비 전하, 아니. 음. 레이디 키아나가 푸르투를 떠납니다.”
“대신 고맙다고 전해 줘. 배웅도.”
“딱히 폐하로부터 그런 걸 바라진 않으실 텐데요…….”
“마하로는 언제 떠난다던가?”
“1주일 내로 마하에서 사람을 보내 준다고 했답니다. 마하는 진심으로 앙센 경을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아무튼 나가기 전에 황후를 뵙고 갈 수 있냐고 물으시던데.”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시녀장 통해서 리리안에게 직접 물어.”
“전이 치료 같은 걸 하실 때는 전혀 묻지 않으셔 놓곤.”
황제의 시선을 공작이 가볍게 피했다.
“건강 잘 챙기십시오. 폐하께서 이런 상태라는 걸 베르니 놈들이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길 도모하느라 뭘 하지도 못할걸. 정신 마법이 발현된 걸 숨겼다는 사실 때문에 마하가 굉장히 기분 나빠하던데. 정복 전쟁도 끝나서 심심해할 텐데 잘됐다고 생각할지도.”
“다른 소리 하지 마시고요. 부탁입니다.”
황제가 의미 모를 표정으로 공작을 잠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끝까지 대답은 없었다.
* * *
“……약 안 먹고 계셨던 거예요?”
침대 옆 서랍장에 놓인 몇 개의 약병들을 보고 메리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리리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베갯잇에 숨긴 단도는 메리앤이 찾지 못해서. 뭔가를 하려고 가져다 놓은 건 아니었다. 다만……. 무섭고 불안했다.
“폐하.”
“몇 개만 못 먹은 거야. 안 넘어가.”
“이거 안 드신다고 죽는 거 아니에요. 정신만 더 괴로우실 거예요.”
“그럼 메리앤이 나 좀 죽여 주면 되겠네.”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인데 메리앤의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괜히 신경이 쓰여 옆을 쳐다보니 메리앤은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리리안이 당황해서 쳐다보고 있자 꺼져 가는 목소리로 메리앤이 중얼거렸다.
“저보고 죽으라면……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왜 다들 나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남들 죽는 거 보는 악취미 같은 거 없는데.”
“그런 취미 저도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 폐하를 죽일 수 있겠어요, 제가.”
“메리앤이랑 나랑 같진 않잖아. 딸도 있고, 아들도 있고. 그러고 보니 지미를 찾았다고 들었는데 시간을 좀 같이 보내야 하지 않아?”
“그 애들은 저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만큼 다 컸어요.”
메리앤이 훌쩍거렸다.
“그렇구나. 나는 아직 덜 컸나 봐. 엄마가 없다고 이렇게…… 한심해지네.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한데, 그런데 너무 미워.”
갑자기 메리앤이 말없이 리리안을 끌어안았다. 널따란 품의 온기가 어색했다. 너무 넓고, 너무 따뜻하고. 드니스는 너무 말랐었는데. 눈물이 났다. 난 왜 이렇게 망가진 것처럼 눈물이 계속 나지. 한심했다.
떨리기 시작하는 리리안의 어깨를 메리앤이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나도 안 한심해요. 하나도……. 한심한 건 나야. 미안해요. 폐하는 용감하고, 똑똑하고…….”
“어떡해. 엄마가 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를 모르겠어. 정말로 모르겠어. 엄마가 불쌍해서 나도 너무 들어주고 싶은데, 나는 진짜 그러고 싶어. 그런데, 너무 힘들어…….”
메리앤이 등을 토닥거리자 흐느끼는 소리가 더 커졌다. 한참 커지던 울음소리가 잔잔해지고 나서야 메리앤은 입을 열었다.
“일단은 조금씩 약부터 먹어 봐요, 응?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악몽부터 어떻게 해 줄 거예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메리앤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물에 젖은 솜처럼 리리안은 그 품에 멍하니 기대 있었다.
“밤마다 꿈꾸는 건 너무 괴롭잖아요. 다는 말고…… 아주 조금씩만. 네?”
“으응.”
“정말요?”
“응……. 근데 지금은, 오늘은 말고. 내일부터……. 오늘은 너무 피곤해.”
“알았어요.”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은 부드럽고 규칙적이었다. 기댈 곳 없었던 황후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엔 악몽을 꾸지 않으면 좋으련만. 메리앤은 리리안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곤 침대에 눕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문득 잠이 쏟아졌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지미가 수도로 오는 것 때문에 너무 긴장하고 걱정을 하는 바람에 며칠 잠을 자지 못한 탓이었다. 메리앤은 두 손을 황후의 손 위에 얹어 놓고 졸기 시작했다.
* * *
황후궁 정원은 여전히 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리리안이 무엇 때문에 항상 보잘것없는 이곳에 나와 있었는지. 카를로이는 앉아서 하릴없이 과거를 곱씹었다. 뭐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게 없는 시간들을.
하등 쓸모도 없는 후회나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인기척이 느껴졌다. 카를로이는 숨을 죽였다. 혹시나 리리안이 나온 것일까 봐. 무슨 일이 생길까 무서워서 이곳에 있긴 했지만 리리안이 자신을 발견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런데 메리앤도 없이 왜 혼자 나온 거지? 가까워지는 인영을 유심히 살피다 카를로이는 그만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리리안의 손에 들린 반짝이는 건 작은 칼처럼 보였다. 허공에 휘둘러지는 칼이 위험하게 보였다. 리리안은 울다시피 뭐라 소리를 지르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러다가 스스로를 찌른대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칼만 빼 올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고개를 숙인 채로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리리안을 보니 잘만 하면 가능할 듯 싶었다.
카를로이를 감시라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리리안의 뒤쪽에서 아셀이 나타났다. 당장이라도 리리안을 무력으로 제압할 것 같은 표정의 아셀에게 카를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셀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불안했다.
카를로이가 리리안의 옆으로 거의 다 온 순간, 갑자기 리리안의 고개가 들렸다. 카를로이는 숨을 멈췄다. 멍한 초록빛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리리안.”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리리안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저리 가. 죽어. 죽어 버려.”
“……괜찮아.”
“왜. 왜 안 죽는 거야.”
“공작은 죽었어. 괜찮아.”
카를로이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속삭이며 리리안의 손에서 칼을 빼 오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옆구리에서 고통이 느껴져 카를로이는 순간적으로 고통의 원인을 손으로 쥐었다. 리리안이 칼로 그의 허리를 찌른 것이었다. 카를로이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그리고 칼을 그대로 잡아서 뺐다.
“왜……. 죽지를 않아. 끝나질 않아.”
리리안이 흐느꼈다. 동시에 다시 한번 칼을 휘두르려고 해 카를로이는 반사적으로 칼날을 잡았다. 리리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이 너절한 광경을 다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칼을 그녀의 손에서 뺏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로 던져 버렸다.
아셀이 충격받은 얼굴로 다가오자 카를로이는 다시 고개만 내저었다.
리리안이 쓰러질 것 같아 침실로 옮기려는데 그 순간 리리안이 고개를 들고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칼?”
안 되는데. 서서히 눈에 초점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카를로이는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피가 낭자한 손을 뒤로 숨기려 했지만 리리안이 더 빨랐다.
“이거 뭐야……?”
“……아까 다쳤어.”
그나마 어두운 색 겉옷을 입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밤이 어둡고 하니 허리의 상처는 리리안이 보지 못할 거였다.
“내가, 내가 그런 거야?”
얇은 옷차림의 리리안이 충격받은 얼굴로 떨기 시작해서 카를로이는 저도 모르게 한쪽 팔로 리리안을 안았다.
“아니야. 정말로 아니야.”
“난 분명 공작을 찔렀는데.”
“아니야. 난 아까 실수로 다친 거야. 검술 연습하다가. 아셀이 찌른 거야. 미안해, 내가 치료를 하고 왔어야 했는데. 괜히 너 놀라게 했어.”
리리안이 울까 봐 카를로이는 겁에 질려서 아무 말이나 초조하게 내뱉기 시작했다. 저러다 정말 수분이 빠져나가서 죽을지도 몰랐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몸이 계속 떨렸다.
“어떡해……. 내가 널. 너를.”
“아니라니까. 제발 내 말 믿어. 내가 멍청한 새끼라 다쳐 놓고도 여기까지 왔어. 네 말 들을 걸 그랬는데, 네 말 안 듣고 또 여기까지 왔어. 내 잘못이야.”
“미안해.”
그리고 리리안은 기어코 그 말을 내뱉었다. 카를로이가 죽기보다 듣기 싫었던 말을.
“하지 마.”
“미안해……. 미안해, 내가.”
“부탁이야. 그 말 하지 마.”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안은 팔에 힘을 줬다.
“나한테 욕을 해도 되고, 너 원하는 대로 해도 돼.”
순간 울컥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리리안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으며 미친 듯이 말했다.
“그런데 그 말, 젠장.”
자괴감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 말은 하지 마.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제발 하지 마……. 너한테 그런 말까지 하게 만들고 내가 어떻게.”
욕설이 나올 것 같아 카를로이는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차라리 욕을 해.”
리리안은 이제 말도 못 하고 울기 시작했다. 어서 침실로 옮겨야 하는데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카를로이는 넋을 빼놓고 서 있는 아셀에게 눈짓을 했다. 그제야 아셀은 정신을 차리고 가까이 왔다.
“내가 만지는 거 싫을 테니까 아셀한테 시킬게.”
그 말에 리리안이 얼굴을 들었다. 눈물범벅이 된 눈을 보자마자 가슴에 무시무시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 카를로이는 마음이 아픈 것과 전이 치료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똑같이 지독하게 아팠다.
리리안을 매번 울리기만 한다는 생각이 그를 후려쳤다. 마음 놓고 웃게 한 적이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걸 벗어날 수 있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제발, 네 잘못 아니야. 정말이야.”
카를로이가 한계치에 다다른 것을 알았는지 아셀이 재빠르게 리리안을 안아 들었다. 아셀이 아셀답게 리리안이 발버둥 치고 소리치는 것을 깔끔히 무시하고 침실 쪽으로 뛰다시피 가는 것을 보고서야 카를로이는 몸에 힘을 풀었다.
칼에 찔린 상처는 아프지도 않았다. 느껴지지도 않았다. 리리안이 한 말만 끊임없이 그의 머리를 울렸다. 미안하다는 말이. 괴롭히다 못해 결국 그 말을 내뱉게 만들었다. 자신한테 미안할 게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여자가 기어코 그 말을 하게 만들었다.
카를로이는 정원에 우두커니 앉아서 울었다. 자신이 끔찍했다. 죽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 *
리리안은 진정제와 약을 먹고 나서야 두서없이 말을 뱉던 것을 멈추고 간신히 잠이 들었다. 메리앤은 자신이 잠든 사이에 벌어진 일을 전해 듣고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이 쓸모없는 늙은 몸뚱이. 잠이나 처자고.”
넋을 빼고 스스로에게 욕을 하는 메리앤을 보고 아셀은 한숨을 쉬었다. 이 푸르투의 모든 것이 질렸다. 제정신인 사람 하나 없는 이 분위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살다 살다 마하가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오다니.
아셀은 이제 리리안을 도와 델루아로 내려갔던 것을 후회했다. 진실만 알게 되면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대륙에는 마법이 있는데, 왜 사람들은 마법처럼 행복해질 수 없는 건지 모르겠다고 아셀은 생각했다.
* * *
“이 정도로 끝난 게 어디입니까. 전이 치료 때문에 허리에 상처까지 있으셨는데 또 다치셨으니…….”
간밤에 피를 흘리며 돌아온 황제 때문에 발칵 뒤집혔던 궁은 치료가 끝나고도 한참 지나서야 좀 차분해졌다.
“힘도 하나도 없는 여자야. 찔러 봤자 깊게 찌르지도 못하는.”
“힘없다고 칼이 칼이 아니게 되나요.”
“황후 상태가 심각한 것 같은데. 치료가 되고 있는 것 맞나?”
“약을 몇 번 거르신 것 같은데 꾸준히 다시 드시면 저것보단 나아질 겁니다.”
“약을 거르는지도 몰랐단 말인가?”
치료사는 카를로이를 멀뚱히 쳐다봤다.
“황제 폐하가 약을 드시는지 버리시는지 어쩌시는지도 모르는 무능한 치료사인 제가 황후 폐하라고 잘 알겠습니까?”
이제 치료사는 진심으로 목숨이 아깝지 않았다. 정말……. 직업인으로서 난 분명히 자긍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런 결과만……. 슬펐다.
카를로이는 할 말이 없었는지 고개를 돌렸다.
“폐하.”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던 알렉시스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알렉시스의 얼굴은 심지어 약간 창백해 보였다.
“허튼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절대로 안 됩니다.”
카를로이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부탁입니다.”
알렉시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카를로이는 새삼 알렉시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눈치챈 걸까. 지금 이 순간 그 ‘허튼’ 충동이 가장 강하게 들고 있다는걸.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지……. 대책 없이 그딴 생각 하면 안 되는 위치라는 거. 모를 수가 없지. 뒤냐의 손에 컸는데.”
하지만 정말이지 이제 한계치였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치사량이었다.
알렉시스가 또 뭐라고 한마디를 하려는데 고르텐이 끼어들었다.
“저, 폐하…….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그 몸으로?”
“시녀장과 같이 오긴 하셨습니다만…….”
지금은 정말로 리리안을 보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리리안이 또…… 그런 말을 한다면, 죽고 싶어질 게 뻔했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저한테 피할 권리 따윈 없다고 느꼈다.
“……다들 나가 봐.”
모두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머뭇거리며 나갔다. 황제와 황후를 둘이 놔뒀다가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이제는 무서울 지경이었다.
리리안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니 다시 몸이 끔찍하게 아파졌다. 침대 옆에 앉은 리리안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여기까지 뭐 하러 와.”
“……기억났어.”
카를로이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난 공작, 아니 네 손을 찌른 적이 없어…….”
리리안이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 쪽을 찔렀었는데.”
“꿈에서 그런 거겠지. 넌 나 찌른 적 없어. 내가 실수로 칼을 잘못 잡은 거야.”
뻔한 거짓말을 부득불 계속하는 카를로이를 리리안이 가만히 응시했다. 그 눈에 담긴 원망이 그를 옭아매서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다 아는데 그런 거짓말 하면 사람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아서 더 화가 나. 알아?”
카를로이는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머리로는 네가 다 자초했다고, 내가 잘못한 건 없단 생각이 드는데.”
“그게 맞아. 내가 괜히 또 얼씬거려서 이 모양 된 거니까.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어. 한 번도…… 없었어.”
“근데 왜.”
느린 말투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내 기분은 그렇지가 않을까.”
카를로이는 그다음에 나올 말이 무서웠다. 막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은데 어제부터 계속…….”
“말하지 마.”
“내가 미안해야 할 것 같잖아.”
“아니야, 제발.”
“아니, 미안한 것도 같아.”
말은 무자비하게 이어졌다. 카를로이는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그 말 안 할래, 제발……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하지만 리리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처럼 꿈을 꾸지 않아서 그런가. 그냥 그런 생각이 계속 드는 거야. 그래, 너도 몰랐으니까. 너도 나만큼이나 공작을 싫어했으니까. 너도 힘들었으니까. 상황이 그랬으니까…….”
카를로이는 빌었다. 제발 그만해 달라고. 리리안에게 이런 말까지 하게 한다면 정말 자신은 바닥도 없는 쓰레기였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내가 너한테 하는 게 꼭 화풀이처럼 느껴져.”
“아니야. 알잖아……. 내가 다 자초했어.”
리리안이 갑자기 말을 멈춰서 카를로이는 고개를 들었다. 리리안의 시선을 따라가자 붕대가 둘러진 자신의 손이 보였다. 그걸 한참이나 보다가 리리안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제발.”
“그래서 네가 너무 싫어. 나쁜 건 넌데 내가 미안해서……. 네가 싫어.”
리리안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카를로이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그 눈가를 쓸었다.
“너 때문에 너무 힘들어. 넌 나를 힘들게만 해. 이따위 감정만 느끼게 해.”
“……앞으로도.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건 고통밖에 없겠지?”
나직한 목소리에 리리안은 흐느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날 보면 괴롭기만 하겠지.”
또다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그만큼 화라도 내. 때리기라도 해. 그래도 싸다는 거 알잖아. 네가 날 죽여도 할 말 없을 만큼 내가 잘못한 거 알잖아.”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카를로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계속 나 같은 새끼한테, 나 같은 놈한테 이렇게, 미안할 것 같아?”
한참 뒤에 리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때 카를로이 크로이탄은 결심했다. 역시, 죽어야겠다고. 화풀이 대상도 되지 못하는 자신은 살 이유가 없었다.
* * *
황후는 약을 챙겨 먹은 뒤로 심한 악몽을 꾸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감정 기복이 좀 덜한 건지 울거나 소리치는 일도 줄었다. 다만 무섭도록 조용해졌다. 황제 또한 그랬다. 그는 더는 황후궁에 가지 않았다. 제법 멀쩡하게 일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푸르투에는 기이한 평화가 감돌았다. 그사이에 키아나 로덴이 리리안을 찾아왔다. 방문을 거절하지 않은 건 궁금해서였다. 서로 간에 할 말도 딱히 없는데 왜 온다는 건지 궁금해서.
여전히 밝은 분위기를 내뿜는 아가씨는 그 분위기와는 자못 상반되는 목소리로 사과부터 했다. 죄송하다고.
“뭐가?”
정말로 알 수가 없어서 리리안이 물었다.
“제가 괜히……. 괜히 그런 말을 황제께 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고민하던 리리안은 한참 뒤에야 그 말을 이해했다. 아마 카를로이에게 리리안을 이용하라고 했던 걸 말하는 것 같았다. 뻔히 알고도 넘어간 건 리리안 자신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머저리였다.
“죄송해요…….”
리리안은 이제 별로 잘못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사과하는 것에 지쳤다. 정말로 잘못한 사람은 사과 하나 하지 않고 허무하게 죽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이제 사람들은 리리안을 볼 때마다 사과하지 않으면 괴롭기라도 한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내가 사생아란 걸 알았으면 그런 제안 안 했을 건가? 그것도 아니잖아.”
“폐하가 공작의 피해자란 걸 알았다면 당연히.”
조심스러운 대답에 리리안이 가만히 키아나를 쳐다봤다.
“그럼 죽고 못 사는 앙센 경은 어쩌고.”
“……물론 제가 그에게 미쳐 있기는 했지만요……. 사람 하나 이렇게까지 만들면서 사랑 타령 할 필욘 없잖아요. 다른 방법을 찾았겠죠.”
‘이렇게까지’라는 단어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게으르게 알아서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어쨌든 폐하는 잘 살 거라고 그렇게 대충 넘기지 말았어야 했어요……. 남의 인생을 함부로 이용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너무 진심 어린 사과라 리리안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키아나의 행동이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이미 다 벌어진 일인데.”
“제가 뭐 도와드릴 게 있다면 언제든,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렇게 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것 같지도 않고.
“마하로 간다던데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 건지.”
의도한 건 아닌데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키아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마하에 무슨 볼모로 가는 것도 아닌데요. 나름 떵떵거리면서 가는 건데 뭐라도 해 드릴 수 있는 게 있겠죠.”
키아나 특유의 가벼운 말투에 리리안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엄마를 살려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정말 이런 말 그만하고 싶은데 왜 항상 멋대로 말이 나가는지 모르겠다. 한숨을 쉬며 리리안은 키아나도 남들처럼 또 미안하다는 말을 할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못하죠.”
하지만 부드러운 말투의 단호한 대답이 들려왔다.
“저도 예전에 별별 걸 다 해 봤는데, 그런 건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예전에? 리리안이 눈을 깜빡거리자 키아나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제 어머니도 어릴 때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가 내연남을 죽여서 목을 매고 돌아가셨죠.”
그 로덴 후작이 사람을 죽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강단이 그런 데서만 발휘가 되나?
“어려서 울며불며 돌려 달라고, 살려 달라고 그랬지만 그런 건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가고 싶어서 간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으니까요.”
“……어떻게 견뎠어?”
키아나는 겸연쩍은 듯한 미소를 보였다.
“그냥. 어머니가 미워서 살았어요. 너무 미우니까 살아졌어요. 어머니도 밉고 아버지도 괴롭히고 싶고. 저는 폐하랑 다르게 성질이 못돼 처먹어서……. 어머니 닮았거든요. 아무튼 두고 보라는 심정으로 그래서 산 건데.”
말끝에는 웃음기가 감돌기까지 했다. 리리안은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러야 사람이 저렇게 될 수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흠, 그런데 정말로 아버지는 괴롭힌 게 됐네요. 자식이라고는 저 하나니 평생 혼자 사시겠죠. 잘됐지 뭐예요. 제가 이렇게 사랑에 미친 인간이 된 것도 반쯤은 아버지 탓일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키아나는 정말로 단단해 보여서 이젠 신기할 지경이었다. 리리안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키아나는 입가에 있던 웃음기를 거뒀다.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 답한 거지, 감히 폐하의 고통을 이해한다거나 짐작한다거나 그런 생각을 해서 말한 건 아니에요. 벌어진 일이 비슷하다고 고통까지 비슷할 순 없죠. 저보다 더 힘드셨을 거고요.”
키아나는 머뭇거리다가 잠시 리리안의 손 위에 가볍게 제 손을 얹었다 뗐다.
“그 밖에 도와드릴 일이 있다면 꼭 말해 주세요.”
리리안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저나 그렇게 내내 찾았는데 바로 옆에 두고도 몰랐다니, 정말……. 인생이 참.”
“뭐가?”
“네? 폐하요.”
리리안이 반응이 없자 키아나는 되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리리안과 카를로이 사이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는 탓이었다.
“모르세요? 어렸을 때 만난 폐하 찾는다고 절 황비로 들이신 것도 있는데……. 로덴 상단 이용해서 계속 찾으시고.”
“미친놈.”
“네? 무슨 뭐요?”
키아나가 깜짝 놀라 되물었지만 황후는 미묘하게 짜증 어린 얼굴로 고개만 살짝 저었다.
“음. 미친…… 분 같아도, 뭐 어쩌겠어요……. 사람이 그것만 생각하면서 살아오신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뭐 황후님도 찾았겠다, 알아서 잘 사시겠죠.”
황제와 황후의 관계가 악화일로라는 걸 전혀 모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태평한 말이라 리리안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이제 좀 쉬세요. 제가 아픈 분 잡고 너무 떠들었네요.”
리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키아나는 머뭇거리다가 책 한 권을 건넸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실 것 같아서 드리기 좀 부적절한가 싶긴 한데, 그래도 혼자 여기 계시면 심심하실 것 같아서.”
무슨 책이 제목도 없었다. 리리안은 시큰둥하게 책을 옆의 장식장에 올려놓았다.
“생각 없애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키아나는 침실을 나갔다. 리리안은 잠시간 멍하니 앉아 있다 베개 밑에 놔둔 드니스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고통과 불행 말고 다른 것도 존재한다는 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어.>
가능한 일일까. 리리안은 어머니의 죽음을 담담하게 말하던 키아나를 떠올렸다.
잘 모르겠다. 막막해져서 리리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
* * *
카를로이는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흔적도 남기지 않고 리리안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을 수 있을지.
한번 든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놀랍도록 강하게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마치 이제야 제대로 된 길을 찾고 바른 행동을 하는 기분이었다.
죽었다기보단 실종되었다고 믿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차라리 도망갔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미워라도 할 테니까. 그럼 푸르투에서 죽어서는 안 되는데……. 푸르투 밖으로 어떻게 나가지. 시체도 발견되지 않으려면 어디서 죽어야 할까. 정말 라르투아까지 가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아셀. 아셀을 떨어트려 놔야 했다. 알렉시스가 급한 일을 시키지 않는 이상 항상 제 옆만 맴돌고 있으니까.
와중에 또 마무리할 일은 해야 해서 그는 손으로는 뭔가를 하면서 머리로는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사생아 관련 법들은 이번 달 안에 폐지가 가능하겠나?”
카를로이의 질문에 알렉시스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께서 몇몇 귀족들을 협박하신 덕에 생각보다는 수월할 것 같군요. 레이디 키아나가 해 둔 것도 있고. 인식 변화는 다른 문제겠지만.”
“협박이라니. 델루아와 말 섞었다는 이유로 다 국외 추방을 할 수는 없지 않나. 번거롭게. 선택지를 하나 더 줬을 뿐이야.”
“예, 그러시겠죠. 그런 인간들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영원히 왕의 편일 귀족은 없어.”
델루아 공작의 기록은 둘째 치고 전대 앙센 백작의 일기장의 힘은 대단했다. 살생부라고 불릴 만했다. 자식들에게까지 그 존재를 숨겼다니 그 음습함이 지독했다. 시답잖은 것까지 적혀 있어 내용이 많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쓸 만한 것도 많았다.
반란을 제압한 젊은 황제는 황후 때문에 미쳤다는 소문이 무색하게 요즈음 멀쩡하게 일을 했고, 그 기세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과거를 빌미로 은근하게 주어지는 압박에 많은 이들이 황후에 대해서 입방아를 찧는 것도 그만두었다.
황후는 델루아의 성을 버렸다. 공작의 피해자, 그것도 가장 정도가 심한 피해자였다는 점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는 것도 조금은 줄어든 것도 있었다.
“새 성을 줄 필요 있겠습니까? 어차피 이제 크로이탄인데요.”
“……나랑 묶일 필요가 없는 이름이 있는 게 나을 텐데. 이왕이면 작위와 함께.”
“작위까지는 무리일 듯싶습니다. 어디 가문 양녀로 들이는 게 가장 무난할 겁니다. 신분과 성 모두 바로 해결되니까요.”
대답이 없는 황제를 알렉시스가 가만히 바라보자 황제는 시선을 피했다. 며칠간 알렉시스는 꼭 저렇게 관찰하듯 자신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설마 눈치를 챈 건 아닌가 고민도 해 봤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알렉시스 뒤냐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카를로이의 계획을 알았다면 바로 타박을 줬을 것이다.
“그러면 황후께 여쭤보고 원하시는 대로 하지요.”
“……그렇게 해.”
“요새는 안 가십니까?”
“내가 보이지 않는 게 도움이 되니까. 그리고 라 소르티오를 좀 정리해 뒀으면 좋겠어. 누가 지내도 불편함이 없도록.”
“알았습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답을 내놓는 알렉시스가 놀라웠는지 카를로이가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베르니 국경을 한번 봐야 할 것 같은데…….”
카를로이가 말끝을 길게 늘였다. 알렉시스의 얼굴엔 표정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가 힘들었다.
“델루아로 가시겠단 말씀입니까? 변경백은 유능한 사람입니다.”
“변경백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내가 한 번쯤 가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야. 반란이 일어난 곳인 건 둘째 치고, 베르니도 봐 둘 겸.”
“알겠습니다. 아셀을 데려가십시오.”
끝인가? 더 잔소리를 할 거라 생각했기에 카를로이는 알렉시스를 한참 쳐다봤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집무실을 나갈 준비만 할 뿐이었다.
“더 할 말 있으십니까?”
“……아니네.”
알렉시스가 나가고 나서도 카를로이는 잠시간 빈자리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곤 생각을 떨쳐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대비였다. 자신이 없어지고 난 뒤에 대한 대비. 크로이센이 문제없이 굴러가야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리리안이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어야 했다. 살 거라면.
그에게 남은 후회는 이제 하나뿐이었다. 더 일찍 이렇게 했었어야만 했다는 것. 더 일찍 죽었어야 했다는 것.
* * *
알렉시스가 혼자 황후를 찾아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메리앤까지 물려 달라기에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나 싶었지만 알렉시스는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아닌가?”
결국 리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받고도 알렉시스는 꽤 오랫동안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니 요새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해 보여 리리안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니, 죄송하니 할 거면 하지 마.”
한스 델루아의 사과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사과는 별 의미도 없었다. 게다가 알렉시스가 딱히 자신한테 무슨 짓을 했던가. 기억하기도 싫었지만, 아무튼 기억해 봐도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진 않았다.
다 비슷비슷하게 피해자라는 걸 아는 마당에 맘 놓고 받기도 어려웠다. 피해자들만 남아서 내가 더 미안하니, 내가 좀 더 잘못했니, 왈가왈부하는 게 얼마나 맥이 풀리는 상황인지. 차라리 죽어 버린 델루아 공작이 가장 편하겠다 싶었다.
“……하지 말라시니 그만두겠습니다.”
분명 사과한 건 아니긴 한데, 꼭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새 성이 필요하실 것 같은데 어떤 걸 원하시는지……. 양녀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리리안이 갑자기 알렉시스를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알렉시스는 말을 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그게 급한 일인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생각하기도 귀찮고. 의미도 없고.”
억양 하나 없는 황후의 목소리를 들으며 알렉시스는 그 얼굴을 살폈다. 심각했을 때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몸은 괜찮아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창백한 얼굴은 맘 놓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하기엔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 지나치게 차분해 보였다.
“나는……. 난 일단 이곳을 떠나고 싶어.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알렉시스는 라 소르티오를 정리해 두라던 황제의 말을 떠올렸다. 황후가 정신을 차리면 자신을 떠날 생각을 할 거라는 걸 눈치챘던 건지.
“렉셈 소르타의 라 소르티오가 비어 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렉셈 소르타. 듣는 순간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드니스가 가 보고 싶어 하던 곳, 가라고 하던 곳.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으면서도 리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미워서 살았다는 키아나의 말을 생각했다.
엄마가 보라는 걸 보고, 하라는 걸 하면 이 지옥이 정말 살 만해지는 거냐고. 전혀 아닐 것 같은데. 오기로라도 보고 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 가기 전에……. 델루아에 가 보고 싶어.”
“혹시 유품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가져오라고 다른 사람을 시키겠습니다. 함부로 손대기 어려워 일단은 그대로 둔 것인데, 신경 써서 가져오라 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것보다는.”
끔찍했던 곳이기에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또 드니스가 마지막으로 숨을 쉬었던 곳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남지도 않은 흔적을 미련하게 찾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정리를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었다.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알렉시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 리리안은 맥없는 웃음을 흘렸다.
“죽겠다고 그 멀리까지 갈 것 같아? 죽을 거였으면 이미……. 이미 여기서 오래전에 죽었을 거야.”
“……델루아에서 라 소르티오는 너무 멉니다.”
“내 몸을 걱정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누가 허락도 없이 치료하는 바람에 나아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 누구를 조금 전에 보고 온 알렉시스였다.
“황제께서도 조만간 델루아를 가실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어. 나랑 같이 가지만 않으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가는 건 비밀로 했으면 좋겠는데. 난 최대한 조용히 가고 싶어. 가능하겠나?”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는 해 줘야 할 것 같기도 했고. 그런데 황제가 왜 델루아로 가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알렉시스는 오랫동안 고민했다. 황후궁으로 오는 내내도 계속. 황후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카를로이 크로이탄은 죽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본인은 비밀스럽게 잘 준비하고 있다고 믿는 모양인데, 바로 옆에 있는 알렉시스 눈에는 훤히 보였다.
황후에게 새 삶을 주기 위한 준비를 하고, 크로이센의 여러 문제를 정리할 준비를 하고, 베르니에게 막대한 보상을 요구할 준비를 하는 것들을 보면 그 생각이 대충 짐작이 갔다. 말리지 않은 것은 그간의 경험으로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그렇다고 좋게 죽게 놔두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따로 있긴 했다. 황후가 죽지 말라고 한마디만 하면 아마 죽지는 않을 거였다. 제정신으로 살지는 또 둘째 문제지만.
하지만 황후가 황제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렉시스는 알기 힘들었다.
“……황제가 많이 미우시겠지요.”
모르면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난 이제 그 애를 원망하는 것도 지쳤어.”
생각보다 건조한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저런 건조함은 증오보다 더 심각하지 않은가.
“죽으면 좀 마음이 괜찮아지실까요.”
“지금……. 칼이 죽으면 내 마음이 괜찮아지겠냐고 묻는 거야?”
천천히 내뱉어지는 말에 약간의 분노가 서린 것도 같았다. 어쨌든 알렉시스는 황후가 그렇게 대답한다면 카를로이의 미친 계획을 숨길 생각이었다.
“대체 왜 그게, 내 마음을 괜찮아지게 하겠어? 그 사람이 뭘 하든, 내가 어떻게 괜찮아지겠어?”
황후의 대답은 알렉시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애매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애매한 답이기는 해도 카를로이가 죽어도 별 신경 쓰지 않을 것처럼 들렸다. 알렉시스는 황후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차라리 아셀에게 말해 두는 게 나을 것이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없어.”
알렉시스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황후의 침실을 떠났다. 리리안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알렉시스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알겠다니. 뭐를 알겠다는 건지. 그딴 건 왜 물은 건지. 어차피 카를로이는 죽지 않을 거였다. 바보도 아니고. 자신이 제정신이 아닐 때는 칼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 죽을 생각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성을 차렸을 거였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인데 그렇게 맘대로 목숨을 버리니 어쩌니 할 상황도 아니고. 죽었을 거면 진즉 죽었겠지.
리리안은 그만 다시 침대에 누워 버렸다. 이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싶다. 떠나고 싶다.
* * *
사흘 뒤 황후는 푸르투를 떠났다. 라 소르티오로 가겠다는 결정을 듣고도 황제는 다 예상했던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물론 황후 일행은 라 소르티오가 아니라 먼저 델루아로 향하는 것이었지만 알렉시스 말고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황후를 따르는 일행의 반은 라 소르티오로 먼저 가기로 되어 있었고 반은 황후와 함께 델루아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적었던 일행이 반으로 갈리니 눈에 띄게 줄었다. 메리앤과 제인은 황후와 함께했지만, 지미는 아직도 확인해 줄 것이 많아 푸르투에 남았다.
알렉시스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황제와 황후의 일정이 최대한 겹치지 않게 해 두었다. 며칠이 조금 겹친다 해도 황제는 변경백과 함께 지낼 테고 황후는 델루아 저택에 머물 테니 만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었다. 알렉시스로서는 그 음침한 곳을 다시 돌아보겠다는 마음을 영 이해할 수 없었지만.
허튼짓할 생각만 하는 카를로이가 불안하긴 했지만, 알렉시스는 아셀을 믿었다. 믿는다, 라기엔 알렉시스는 누군가를 쉬이 믿는 사람도 아니고, 아셀이 딱히 믿을 만한 사람인 것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카를로이에 대한 애착 하나는 믿어 줄 만했다.
오히려 더 걱정되는 건 황후 쪽이었다. 죽을 생각은 없다지만 얼굴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황후 쪽에도 아셀과 비슷한 시녀장이 있으니 별 탈은 없겠지마는.
알렉시스 뒤냐가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한 것을 바탕으로 리리안은 수월하고 편안하게, 그리고 빠르게 델루아로 내려갈 수 있었다. 공작의 능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거슬리는 것은 오로지 자주 피곤해지는 몸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피로감만 있었지, 큰 통증은 사라졌다. 덕분에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 통증이 누구에게 갔을까, 하는 생각이.
“미친놈.”
자신도 모르게 나온 욕이었다. 앞에 앉아 있던 메리앤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여 머쓱한 마음에 괜히 입술을 한번 쓸었다.
미친놈. 아무리 속으로 욕을 해도 마음이 허전했다. 대체 내가 저한테 뭔데.
그러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건만 점점 초점이 돌아오는 정신은 심심하면 과거를 떠올렸다. 카를로이가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 어떻게 울었는지……. 그러면서도 또 어떻게 울리고 괴롭혔는지. 뭐 이따위 하등 도움도 안 되는 과거를.
아프다, 죽고 싶다 할 땐 언제고 이제 살 만해서 이딴 한가한 생각이 드나 싶어 스스로가 한심해질 정도였다.
“도착한 것 같아요.”
리리안의 눈치를 살피며 메리앤이 속삭였다.
공작이 죽어도 불쾌한 음산함은 그대로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크게 바뀐 분위기에 리리안은 잠시 당황했다. 음울했던 고용인들이 변경백 루이자 루탱의 씩씩한 고용인들로 바뀐 것과 공작저의 물건들이 사라진 것이 꽤 영향이 큰 듯했다.
“델루아 타워는 폐하가 떠나시고 나면 무너트린대요.”
하긴, 저 탑은 뭘 어떻게 해도 찝찝할 테니 없애는 게 나을 거였다.
리리안은 말없이 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위로, 위로, 더 위로. 드니스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그 소담하게 아름답지만 딱 그만큼 끔찍한 방으로.
방은 그대로였다. 가구도, 창문도, 모든 것이.
드니스가 없다는 것, 그리고 온기 대신 냉기만 감돈다는 것만 다른 점이었다.
“제가 제대로 챙겨 왔어야 하는데……. 급하게 도망가느라고요.”
제인의 말에 리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편지를 가져와 준 것만 해도 감사했다.
“……혼자 있고 싶은데.”
메리앤과 제인이 난처한 표정으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역시 안 되겠지? 죽을 생각이 없대도 믿기 좀 그렇겠지.”
“아니요……. 그냥 걱정이 되어서 그렇죠.”
침대에 조심스럽게 앉은 리리안이 시트를 쓸었다.
“……먼지도 없네.”
청소를 계속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리리안은 천천히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냄새라도 맡고 싶어서.
“이상해. 이곳에 살 때는……. 난 엄마가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는데. 엄마도 행복할 거라 믿었거든. 침대는 부드럽고, 방은 넓고 예쁘고 약은 끊이지 않고…….”
리리안이 베개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지금 와서는 알 수가 없어. 엄마를 이 좁은 방에……. 이 방 하나에 가두고 왜 행복할 거라 생각한 걸까.”
메리앤은 눈물을 찍어 냈지만 제인은 조용히 대답했다.
“끝이…… 그렇다고 모든 걸 의미 없다고 느끼진 마세요.”
제인은 리리안 다음으로 드니스와 오래 있었고, 드니스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황후가 되시기 전까진 드니스와 많은 시간을 보내셨잖아요. 그것까지 다 불행하셨나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리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책을 읽으실 때, 새 옷을 자랑하실 때, 맛있는 걸 드실 때 드니스가 행복했듯……. 드니스가 웃을 때, 드니스가 산책을 할 때, 폐하를 안아 줄 때, 폐하께서도 웃으셨던 걸로 기억해요, 그게 비록 거짓 위에 있었다 한들 말이에요.”
실제로도 제인이 리리안보다 나이가 많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언니 같았다.
“함께 있었잖아요. 드니스도……. 그 시간은 행복했을 거예요. 아니, 행복했어요. 그 기억으로 폐하가 없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정도로.”
리리안이 또 울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제인이 조심스럽게 베개 위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조금 슬퍼진 것 말고는 큰 변화가 없었다.
“고마워, 제인. 엄마 옆에 있어 줘서.”
“아니에요……. 뭐 별거라도 했나요, 제가…….”
방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리리안은 베갯잇을 만지작거리다 이상한 걸 발견했다. 베갯잇 사이에 종이 뭉텅이들이 끼어 있었다.
“이게 뭐야?”
“응? 뭐지?”
책에서 찢어 낸 것처럼 보이는 종이도 있었고, 드니스가 직접 적은 것처럼 보이는 종이도 있었다.
“어? 이건 내 글씨체인데. 메모 써 드린 것들인가?”
제인이 종이 뭉텅이를 보다 중얼거렸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어떤 소설에서 여자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 여행을 가는 장면, 외국어를 배우는 장면. 혹은 역사책에서 찢어 낸 마하에서만 피는 신기한 꽃들. 솔타와 밀테의 유명한 음식들……. 드니스나 제인의 글씨체로 써진 관광 명소들이나……. 내용은 중구난방이었다.
“아……. 이래서 써 달라고 하셨구나.”
제인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뭘 읽어 드리면 언제나……. 우리 리리안도 그런 걸 해 보면 좋을 것 같다고 그랬었는데. 공작이 아가씨를 너무 저택 안에서만 키우신다고 아쉬워하셨어서.”
종이들을 떨리는 손으로 넘겨 보던 리리안은 차마 끝까지 다 보지 못하고 얼굴을 다시 베개에 묻었다.
이걸 어떻게. 어떻게 내가 혼자 이런 걸 해. 엄마 생각이 나서 괴롭기만 할 텐데 이런 걸 대체 어떻게 해.
할 수 없는 말들이 천에 묻혀 사라졌다. 이 상실의 고통이 대체 언제쯤 사라지는 걸까. 끔찍했다. 방에는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 * *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굳이 이 방에서, 이 침대에서 자겠다는 리리안을 혼자 두지 못하고 메리앤이 옆의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리리안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에 몸을 기대고 밖을 바라봤다. 조용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래는 아득하고. 드니스는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 문득 치미는 충동에 리리안이 창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어차피…… 엄마는 몰라. 머릿속에서 누가 속삭였다.
내가 엄마 말을 들어서 지긋지긋하게 살든, 여기서 죽어 버리든 어차피 모를 거야. 한 번이면 말도 안 되는 이 모든 것들이…….
분명 죽으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 창가에 앉아 있자니 무섭도록 생생하고 선명한 충동이 들었다. 리리안이 잠시 멍하니 창밖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왜 머뭇거리게 되는지. 목에, 아니 가슴에 무엇이 걸린 듯 답답했다.
<내가 너의 감옥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드니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대로 죽으면 드니스는 정말로 자신이 감옥이었다고 생각하게 될까. 차라리 편지를 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드니스가 밉고, 또 미웠다.
침대 위에는 읽다 만 종이 뭉텅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 손으론 그 종이들을 만지고 한 손으론 창틀을 만지다가 리리안은 결국 얼굴을 창가에 묻었다.
안 돼. 못 하겠어.
죽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눈물이 났다. 가슴이 사무쳐서 눈이 시렸다.
“폐하…….”
어느새 메리앤이 일어났는지 오열하는 리리안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조금도 괜찮지 않았지만, 그 말을 이해했다.
괜찮아야 했다. 드니스와 보냈던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 수가 없으니까. 괜찮아져야 한다. 도저히…… 드니스를 아무 의미 없는 사람처럼 만들 수 없으니까.
그날 새벽에 리리안은 정말 마음으로 드니스를 떠나보냈다.
안녕, 엄마.
리리안은 속으로 하염없이 인사를 고했다. 나도 사랑했고, 사랑한다고.
* * *
카를로이의 얼굴을 본 변경백 루이자 루탱은 놀라움을 숨기려는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니, 푸르투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분명 신나게 귀족들을 이리저리 요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얼굴을 보니 아주 개판이었다. 반란 때랑 다를 바가 없었다.
“별로.”
언제나와 같은 단답이 돌아왔다. 목소리는 또 왜 저 모양이람.
“몸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무엇 때문에 이까지……. 제가 못 미더우셨군요.”
“그런 건 아니니 멀리 나가지 말지.”
사무적인 말투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변경백은 얼마 전에 받은 뒤냐의 전갈을 떠올렸다. 황후는 델루아령에 있는데 황제는 그걸 모르고. 또 비밀로 하라고.
도대체 무슨 염병인지. 하지만 뒤냐의 말이기에 토 달지 않았다.
변경백은 새삼 자신이 수도 귀족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루이자 루탱은 수도를 좋아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베르니 국경을 좀 보려고 왔네.”
“베르니요? 군사를 죄다 물린 지 좀 됐습니다. 지금 아주 바싹 기어서 눈치를 보고 있던데요.”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이대로 포기하진 않을 거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휴. 지도에서 없어지기 직전까진 내내 저 지랄을 할 겁니다. 게다가 마법 때문에 종잡을 수가 없으니.”
“그렇지. 베르니가 날 어떻게 죽여 버린대도 놀랍지도 않을 거야. 방법이 없을수록 사람이 무모해지는 법이니까. 이번에도 충분히 무모했고.”
무심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루이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셀과 눈이 마주쳤다.
저 마하인은 마르키아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내내 저 뚱한 표정이었다. 심각한 불만이 있어 보이는데 황제는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뭐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폐하께서 국경을 얼쩡거리셔도 손끝 하나 못 댈 겁니다.”
“그래? 안심이군. 시간 지체할 것도 없으니 오늘 밤에 보지.”
“밤에요?”
“훤한 대낮에 뭘 대단한 걸 보겠다고.”
“그건 그렇지만…….”
젊은 황제는 여전히 속을 알기 어려웠다.
솔직히 이 판국에 베르니가 무슨 짓을 더 할까? 베르니는 이미 크로이센뿐만 아니라 라르투아와 마하의 심기까지 건드렸다. 다른 나라들이 지금껏 베르니의 영토를 가만히 놔둔 것은 그 척박하고 추운 땅이 정말로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베르니가 계속 저렇게 헛짓거리를 하면 상황이 꽤 달라질 테니, 한동안은 잠자코 죽은 듯 있을 터였다. 이 모든 사실을 황제가 모를 리는 없고. 루이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생각이 있겠지.
“먼 길을 왔더니 좀 피곤하군. 들어가서 쉬어야겠어.”
진실로 피곤해 보이는 황제를 보고 루이자 루탱은 그를 최선을 다해 준비해 둔 곳으로 안내했다.
* * *
아셀이 델루아로 찾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뒤냐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 당연히 카를로이의 수하인 아셀도 몰라야 했다. 그런데 왜.
“당신도 죽으러 왔어요?”
이렇게 뜬금없이 나타나서 헛소리를 하는 걸까.
원래라면 바로 라 소르티오로 출발하려고 했지만 몸이 조금 피곤해져서 하루 뒤로 미뤘었다. 정원에서 드니스가 좋아했던 것들을 눈에 담고 있는데 꽃들 가운데로 아셀이 나타난 것이었다.
꽃다발 하나를 든 채 리리안이 떫은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뒤냐가.”
“분명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아셀이 눈알을 굴렸다. 익숙한 표정이었다.
“너 뭔가 뒤냐의 말을 안 듣고 있구나. 또 뭘 어기고 있는 거지.”
나직한 타박에 아셀은 입을 삐죽거렸다.
알렉시스 뒤냐는 델루아로 떠나기 전 이틀간이나 아셀을 붙잡고 지겹도록 교육을 시켰다. 카를로이가 허튼짓을 할 테니 무조건 막아야 하는데, 너 내키는 대로 하지 말고 자기가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해야 한다, 어쩌고저쩌고.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아 아셀은 하품을 하며 물었더랬다. 그냥 간단하게 황후에게 부탁하면 안 되겠냐고. 지금 황제는 황후의 말이라면 그게 뭐든 간에 들을 텐데, 제일 편한 방법을 두고 왜 돌아가냐는 말이다.
기껏 생각해서 한 말인데 알렉시스는 비난의 기색을 가득 담아 아셀을 쳐다봤다.
<그런 말을 들으면 황후 심정이 어떻겠나.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닌데. 황후는 모르게 우리가 알아서 처리해야지.>
심정이 어떻게 되는데? 아셀은 그런 건 몰랐다. 카를로이가 죽는다고 황후가 슬퍼할 것 같지도 않은데 무슨 심정? 이 정도는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들어주지 않을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뒤냐에 대한 철없는 반항심에 잠시 잠겨 있던 아셀은 리리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폐하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하. 리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아셀의 질문은, 아셀의 행동은 언제나 갑작스러웠다. 맥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관심 없어.”
별로 좋은 대답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셀의 표정은 밝아졌다.
“죽는 건 싫구나. 그렇죠?”
“그런 게 아니야.”
아니, 일단 다들 왜 카를로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화가 치밀었다. 자신조차도 죽지 못하고 있는데, 왜 카를로이가. 어떻게 그가 함부로 죽을 수 있다는 말인지.
리리안의 표정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걸 보고 잠시 눈치를 보던 아셀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한테 갚겠다 했던 거 기억나죠.”
그 말엔 리리안도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셀은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었다. 리리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밤에 나랑 갈 곳이 있어요.”
“……어디를?”
“음. 일단은 마르키아.”
“제대로 설명을 좀 해 주겠니.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말고.”
“설명하면 안 들어줄 것 같은데…….”
“들어주겠다니까. 약속해.”
아셀은 잠깐 고민하듯 허공을 바라봤다.
“음. 아무래도 황제 폐하가 죽을 것 같아서요.”
리리안의 손에서 꽃이 떨어졌다.
* * *
“변경백이 동행하겠다 했으니 넌 올 필요 없어.”
거짓말이었다. 변경백에게는 아셀과 마르키아 근방만 둘러보고 올 것이라고 말해 두었다. 피곤해서 국경은 며칠 뒤에 제대로 보고 싶다고.
알렉시스가 예상한 것과 똑같이 말하는 카를로이를 보고 아셀은 새삼 알렉시스에게 감탄했지만 겉으로는 고개만 끄덕였다.
알렉시스는 카를로이가 뭐라고 하든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다. 명령을 들을 것처럼 하라고. 어설프게 방해하면 또 괜히 다른 수를 생각해 낼지도 모르니 말을 듣는 척하고 현장에서 막으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일이 어떻게 될지 알고? 죽으려는 사람을 막기는 힘든 법이었다. 그러니 아셀은 확실한 방법을 준비했다. 준비하기 매우 힘들긴 했지만.
은혜를 들먹이지 않았다면 그 방법, 황후는 아마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항상 그랬는데요.”
더욱 의심스러워졌다. 그러나 카를로이는 의심을 거두고 다시 계획을 점검했다.
완벽히 죽어 없어지고 싶었다.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도록. 자신의 그 무엇도 더는 리리안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알렉시스나 아셀에게까지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사실을 숨길 순 없겠지만, 어차피 알게 될 때는 그가 죽고 난 이후일 것이다.
그들도 카를로이의 죽음을 최대한 크로이센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할 것이었다. 무엇보다 알렉시스 뒤냐는 똑똑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시체만 발견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알고 있었다.
“쓸데없이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순간 아셀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지금 사고 치러 가는 사람이 누군데……. 그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누군데……. 하지만 내색을 할 순 없어서 그저 입만 다물 뿐이었다.
카를로이는 성문을 빠져나와 말을 달렸다. 이곳에서 어둠의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어둠의 숲은 시체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는 곳, 크로이센의 첫 인간이 태어나 마기가 강한 곳. 이런 곳이 베르니 마법과 섞이고 수많은 시체가 쌓여 음기가 더 강해졌다. 숨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부패가 빠르게 이뤄질 것이었다.
숲으로 가는 길 내내 한 터럭의 망설임도 들지 않았다. 자신이 죽는다고 모든 것이 되돌아가진 않을 거란 사실은 잘 알았다. 다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해가 지고 난 후 늦은 저녁에 출발했는데 숲에 들어왔을 때는 새벽이 되었다. 달빛이 생각보다 환해서 카를로이는 잠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죽고 싶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몰랐으면 했다. 달의 시선조차 달갑지 않았다.
검은 땅 위 나무 밑동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고 카를로이는 약병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까지 미련이 없을 목숨 더 진작 끊을 것을. 이게 뭐라고……. 괜히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딱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리리안을 보고 싶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지. 리리안을 보지 못해서. 지나치게 과분한 마지막이 됐을 터였다.
머릿속에는 계속 리리안이 미안하다고 울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이후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리리안에게 들은 말 중 가장 아프고, 가장 슬픈 말이었다.
왜 미안해해야할까. 네가. 그 생각까지 들자 그나마 있던 아쉬움까지 사라져 버렸다. 카를로이는 무심하게 약병 뚜껑을 열었다. 입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갑자기 위에서 무언가가 약병을 쳐 냈다. 액체는 카를로이의 무릎 위로 쏟아졌다.
아셀의 칼집이었다. 아셀이 나무 위에 매달려서 약병을 친 것이었다. 그러고도 태평한 표정으로 그는 다시 몸을 올려 나뭇가지에 앉았다.
“너…….”
이상하게 놀랍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고분고분했다 싶었다.
“네가 왜 이러는지 알아.”
화라도 낼 줄 알았더니 카를로이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아셀이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카를로이를 내려다봤다.
“넌 내가 없어도 이제 크로이센에서 안전해. 그러니 이럴 필요 없어.”
아셀이 눈을 깜빡거렸다. 자신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카를로이가 없다고 자신이 마하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 거였다. 하지만…….
“……아셀. 네가 날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긴다면, 나에게 조금이라도 고마워한다면 그냥 내버려 둬.”
처음 듣는 목소리에 아셀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부탁이야.”
명령은 익숙했지만, 부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명령은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부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카를로이가 지나치게 고통스러워 보여서……. 아셀은 정말로 혼란스러워졌다.
아셀의 혼란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를로이가 어느 순간 품에서 다시 약병을 꺼냈다. 아셀이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카를로이는 뚜껑을 열고 입에다 가져다 댔다. 액체가 목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질 때 갑자기 또다시 무언가가 약병을 쳐 냈다. 이번에 약병은 굴러가서 깨져 버렸다.
카를로이는 흐르던 것을 삼키다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리리안이 창백한 얼굴로 앞에 서 있었다. 환각 효과가 있는 약은 아닌데. 카를로이가 기침을 토해 내며 생각했다.
“너. 네가 어떻게.”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있는 것 같은데. 왜 렉셈 소르타에 있어야 할 리리안이 여기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카를로이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를로이가 고개를 들고 떨리는 눈으로 앞에 서 있는 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네가 여기에.”
타는 듯한 목에서 카를로이의 목소리는 끊기듯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넋을 놓고 앉아 있던 아셀이 발 빠르게 나무에서 내려와 어디론가 튀어 나갔다.
“너……. 너 정말 죽으려고 한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아셀이 그렇게 말했을 때도 다 믿지 못한 채로 이곳으로 끌려왔다. 카를로이가 약병을 들 때도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설마. 카를로이가 설마 이따위 짓을 할까.
하지만 독을 들이켜는 그 모든 동작에서는 어떤 미련도, 어떤 머뭇거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리리안은 알았다. 칼은 정말로 죽으려고 했다는걸. 그것도 계획을 해서.
소름이 끼쳤다. 만에 하나 자신이 없었으면 정말로, 정말 카를로이가 이렇게 죽어 버렸으리란 사실이.
“왜 여기 있어. 네가 왜.”
카를로이가 머리를 쥐어뜯듯 헝클어트렸다. 등신 같은 새끼. 뒤지는 것도 제대로 못 해서 이 꼴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딴 자괴감도 지긋지긋했다. 스스로가 지겨웠다.
“너 진짜 왜 이래.”
떨리는 목소리로 묻던 리리안은 결국 카를로이 앞에 주저앉았다.
“나도 죽지 못해서, 이러고 사는데! 죽는 게 너무 어려워서 이러고 있는데, 네가 뭔데 이런 짓을 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리리안은 카를로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뺨이라도 더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리리안이 흔드는 대로 흔들려 주던 카를로이의 몸에서 약병들이 떨어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굴러가는 독이 담긴 병들을 보고 리리안은 그만 카를로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 버렸다.
굴러가는 병을 집으려 하자 카를로이가 그 손을 잡아챘다. 잡아챈다기에는 너무나 약한 힘으로, 너무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안 돼, 만지지 마. 위험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어떻게 끝까지……. 끝까지 날 괴롭혀.”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손을 오래 잡고 있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놓지도 못했다. 떨리는 손이 리리안의 손가락, 겨우 손가락 하나에 얹어졌다.
“미안해……. 이거 말고는 방법이 생각이 안 나.”
그 손가락 하나 위에서 다 큰 사내가 섧게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리리안. 이게 최선 같아서. 내가 살아 있는 게 너한테, 너에게 너무 고통이라서. 너에게 피해 주지 않게 죽으려 했어. 그랬는데……. 미안해.”
하는 말들 모두 기가 막혔다. 미친 새끼였다.
“네가 나한테 미안하게, 미안하단 말까지 하게 만들기 싫었어…….”
고작 미안하다는 말 하나를 들었다고 죽기를 원했다니. 이곳에서 그를 만나 구해 줬더니 이제 여기서 죽으려 하고 있었다.
리리안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카를로이가 어린 시절 그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한다는걸. 깨달은 순간 온갖 감정이 통증처럼 밀려왔다.
“……네 인생에 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내가 너한테 뭔데. 네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게 뭐 얼마나 있다고, 날 얼마나 오래 알았다고 내가 네 의미가 돼. 나 말고는 살 이유도, 죽을 이유도 없어?”
리리안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카를로이의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그것이 대답인 줄을 알았다.
“너 정말 왜 이래…….”
결국 리리안의 말끝에도 물기가 어렸다. 이 나쁜 놈이 기어코, 기어코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살았으면 대체 자기 같은 인간, 사람 하나가 유일한 의미가 될 수 있냐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
“너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살았어.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서 내가 맘대로 너 미워하지도 못하게 해.”
리리안이 주저앉아서 흐느꼈다. 어중간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사람을 괴롭게 한다. 그리고 그건 카를로이가 아니었다. 언제나 리리안이었다. 언제나 리리안의 마음이었다.
그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마음. 그를 맘 놓고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하는 마음.
저 자신의 어중간함이 가장 고통이었다.
“어떻게 이래. 왜 이렇게 살아서 내가 너한테 화도 못 내게 만들어…….”
그 말에 카를로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리리안의 눈물을 닦았다.
“……아니야. 나 행복하게 잘 살았어. 잘 먹고, 잘 살았어. 불행 같은 거 없었어. 너 힘들 때 난 잘 살기만 했어.”
기를 쓰고 거짓말을 하려는 그 모습이 리리안을 더 무너트렸다. 리리안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자 카를로이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손을 거둬들였다.
“리리안, 제발……. 정말이야. 난 잘 살았어. 좋은 곳에서 누릴 건 전부 누리고 살았어. 행복했어.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배가 불러서 이래.”
자신을 달래 보겠다고 헛소리에 거짓말만 하는 이 머저리 때문에 죽을 것 같았다. 그가 내뱉는 모든 단어가, 모든 거짓말이 리리안을 아프게 했다. 사실은 그가 단 한 순간도 잘 산 적이,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러니까 미워해도 돼. 화내도 돼.”
“나쁜 새끼…….”
“제발, 리리안. 울지 마. 맞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그러니까 울지 마, 제발.”
갈 곳 없이 맴돌던 그의 손이 결국 다시 서툴게 리리안의 눈물을 닦아 냈다. 리리안은 그 괴로운 푸르투에서 그가 얼마나 많이 자신의 눈물을 닦아 주었었는지 생각했다.
자신을 매번 울리면서 울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리리안은 이제는 정말로 이 모든 걸 끝낼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