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황후는 황제를 싫어한다 (1)
아셀이 위협도 되지 못하는 병사들을 다 치우고 델루아 타워 맨 꼭대기 층에 도착했을 때 처음 본 광경은 전혀 유쾌하지 못했다. 문 입구에는 웬 집사장이 목을 맨 채로 대롱거리고 있었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황후를 부둥켜안고 울부짖고 있는 카를로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죽어 있었고, 그 뒤에는 목에 익숙한 단도 하나가 꽂힌 델루아 공작이 눈을 뜬 채로 죽어 있었다.
“폐하.”
아셀이 카를로이를 불러 봤지만 카를로이는 황후의 몸을 부둥켜안고 계속 울기만 했다. 카를로이가 그렇게 끔찍하도록 슬프게 우는 건 처음 본 아셀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폐하, 정신 차리세요.”
“……당장 치료사를 여기로 불러와.”
“여기로요? 다른 데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시체가 즐비한 곳에서 누구를 치료하는 건 적절한 생각 같지 않았다.
“네가 직접 갔다 와.”
벌게진 눈을 한 카를로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가장 빠르니까. 치료사를 태워서 여기 공작저로 데려와.”
그 몰골에 대고 싫다고 할 수가 없어서 아셀은 델루아 타워를 빠져나왔다.
아셀은 황후가 죽지 않기를 바랐다. 죽는다면 카를로이도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아니, 확실했다. 그리고 카를로이가 없는 크로이센은 아셀에게 그다지 의미 있지 않았다.
바깥은 소란스럽긴 했지만 대충 정리가 된 듯했다. 포로처럼 줄줄이 묶인 공작저 사람들이 늘어져 있었다. 저 멀리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연기가 하늘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 델루아의 몰락은 연기만큼이나 허망했다.
* * *
아셀이 치료사를 데리고 공작저에 다시 왔을 때도 카를로이의 상태는 그대로였다. 황후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지만, 울면서 루라는 이름을 계속 부르는 건 같았다.
시체가 널린 광경에 놀라는 것 같던 치료사는 이내 능숙하게 그 죽음의 장소에서 황후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숨은 붙어 있습니다.”
응급조치로 지혈을 끝낸 치료사가 입을 열었다. 불길한 뉘앙스라는 걸 카를로이도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황제를 보고 치료사는 한심함과 동정심을 동시에 느꼈다. 다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정신을 놓을 거면서 그렇게 부정을 한 건가 싶었다.
“상처가 깊은 건 아니지만, 이 정도 상처도 견뎌 내지 못할 정도로 몸이 너무 약합니다. 언제 의식을 차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지금으로써는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수도로 옮겨야 합니다.”
카를로이는 넋을 놓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흉……. 치료 마법의 흔적이 있네요. 흉이 안 보이게 하는 마법을 꾸준히 받았나 봅니다. 전담 치료사가 따로 있다더니 이거 때문이었을까요?”
귀하다던 공작가의 딸에게 대체 이런 흉이 왜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치료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를로이의 가슴만 미어질 뿐이었다.
눈물만 뚝뚝 흘리는 카를로이에게 아셀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오면서 들었는데 앙센 백작이 군대를 다 데리고 델포드시에 가 있었대요. 하지만 전력도 형편없는 데다가 클라이드 앙센이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해서 변경백과 합류했대요.”
카를로이는 아셀의 말을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그는 계속 리리안을 껴안은 채로 주저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죽었다고 생각한 리리안이 돌아왔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지금껏 자신 앞에 있었다는 것도, 지금 이렇게 제 품 안에 쓰러져 있다는 것도.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갑작스럽게 닥쳐온 진실은 지나치게 무거웠다.
“폐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치료사가 조용히 카를로이를 불렀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황후 폐하와 델루아 공작 사이에 일이 있었다는 건 알겠습니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밝혀내시려면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황후님을 위해서도…… 그게 좋을 것 같고요.”
그 말에 그제야 카를로이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루를 살린 후에 진실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엄마를 찾아 주기로 했으니까.
“……아셀.”
“네?”
“가서 군인들에게 전해. 모든 집을 샅샅이 뒤져서 드니스라는 중년 여자를 찾으라고. 아마 몸이 안 좋을 거야.”
“그게 단서 끝이에요?”
“델포드시에도 전갈을 보내. 거기도 전부 뒤져서 찾아내라고.”
“……네.”
“그리고 여기, 델루아 공작저에 있는 건 모두 푸르투로 가져간다. 무슨 증거가 있을지 몰라.”
아셀이 고개를 까딱이고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손을 붙잡고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제발…….”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도 모른 채 그는 기도했다. 그 모습을 보던 치료사는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황제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면 황후를 더 괜찮은 곳으로 옮겨야 할 터였다. 정신을 차릴지 모르겠지만.
* * *
델루아가 완전히 함락되는 데 딱 이틀이 걸렸다. 너무나 쉽게, 너무나 빠르게 무너졌다. 공작은 죽었고, 앙센 백작은 전력을 다해 싸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 루이자 루탱과 클라이드 앙센 둘 다를 버텨 낸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클라이드 앙센은 저를 핍박했던 이복형의 목을 들고 돌아왔다. 그 광경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였다. 델루아는 그 딸에게, 앙센은 그 동생에게 목을 내놓았으니.
모든 것은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순조로움과 함께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하나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그 여자요? 죽었어요. 탑에서 뛰어내려서.”
“사람이 사는 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탑에서 사람이 떨어졌다니까요. 누구? 몰라요, 나는 처음 보는 여자였는데. 언제? 열흘은 훨씬 넘었죠.”
“시체는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데…….”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입을 모아 드니스가 죽었다고 증언했다. 카를로이는 절망에 빠졌다. 이 약속마저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그가 리리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해 준 것도 없다는 사실이 숨 쉬는 순간마다 그를 후려쳤다. 아니, 차라리 해 준 것이 없었기만 한 거라면 다행이었다. 계속 그녀를 괴롭혀 오지 않았던가.
시체라도 찾아오고 싶었지만, 마냥 여기 남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리안의 의식이 돌아오지를 않아서 최대한 빨리 수도로 가야 했다.
“시체를 묻지 않았을까요? 이미 땅에 묻힌 걸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아셀이 중얼거렸다.
“그럼 그걸 묻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정황상 시녀장의 딸이란 하녀가 묻은 것 같은데,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어. 뭔가 알고 있겠지.”
카를로이는 옆에 있던 루이자 루탱을 쳐다봤다.
“델루아를 정리하면서 더 제대로 뒤져 봐. 분명 여기 남아 있을 거야.”
“예, 뭐……. 알겠습니다.”
아직도 돌아가는 상황이 얼떨떨한 루이자가 대답했다. 델루아의 딸이 델루아를 죽였다고? 왜? 변경백의 의식 상황은 아직 저 질문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왜 저 모양이란 말인가? 델루아가 쉽게 함락되었단 사실에 기뻐할 줄 알았더니, 웬걸. 도착해 보니 다 죽어 가는 황후만 붙잡고 울부짖는 인간만 보였다. 지금도 눈물만 안 흘렸지, 얼굴만 보면 끔찍한 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운데 이제 변경백은 잠깐이지만 델루아의 영지까지 관리해야 했다.
그렇게 델루아로 내려온 군대의 반은 혹시 모를 베르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델루아에 남고, 나머지는 카를로이와 함께 수도로 향했다.
카를로이는 리리안과 치료사와 함께 마차에 탔다. 그는 웬만해서는 리리안 옆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덩치 큰 사내가 주인 잃은 개새끼처럼 옆을 맴도는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차도가 없지?”
초조하게 묻는 황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치료사는 며칠간 혼자 생각해 온 가설을 말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독에 당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독이라니?”
“그게 아니면 이런 몸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게 달리 없어서 말입니다. 아니면 뭐, 딸이 허약하다고 말했던 공작의 말이 사실이든가요. 그렇게 허약한 몸이라면 수도 감옥에서 지낸 게 몸을 아주 제대로 망쳐 놨겠지요.”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알면 알수록 괴로웠다. 괴로워할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가 리리안에게 내뱉었던 모든 말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후회도 소용이 없었다.
“……제발, 루. 그런 말만 듣고 가게 할 순 없어. 한 번만.”
미동도 없는 여자의 두 손을 꽉 붙잡고 황제는 얼굴을 묻었다. 목소리에 짙은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푸르투에 도착할 때까지도 리리안은 깨어나지 않았다.
* * *
메리앤의 고백으로 푸르투가 뒤집혔다. 메리앤의 진술은 아셀이 편지에 써 보낸 황후의 이야기와 일치했다. 같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녀 레이디 루엔은 부정했지만, 델루아 군의 전세를 전해 듣고는 결국 감형을 조건으로 모든 것을 실토했다.
온 푸르투가 충격에 빠지고 사람들이 뒤집혔다. 베르니의 마법은 제국인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었고 학자들은 열렬하게 토론을 펼쳤다. 델루아의 딸은 모든 게 거짓이었고, 귀족들은 모두 목소리를 높였다.
진실이라는 것은 푸르투를 맡고 있던 알렉시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황후가 명백한 적일 때는 카를로이의 감정 말고는 곤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황후의 존재 자체가 모순투성이였다.
“사생아라니요. 사생아 출신의 황후라니, 크로이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델루아의 딸인 것도 모자라서 사생아라니!”
다수 귀족은 진실을 알고도 반발했지만, 알렉시스에겐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뭐가 하지만입니까?”
“델루아를 배신하고 폐하를 도운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그렇게 칼같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인가?”
키아나는 알렉시스보다 좀 더 강경한 입장이었다. 키아나는 황후가 지금 자리에서 물러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요, 그 공을 참작한다면 목숨이야 살려 줄 수 있겠지요. 하지만 황후는 말도 안 됩니다.”
“폐하 대신 독을 마시기까지 했어. 이보다 뭘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전하가 황후가 되시면 됩니다. 황비에서 황후가 되었던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니니.”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두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게 자르는 키아나를 보고 알렉시스는 짐작했다. 키아나가 황후를 옹호하는 데 있어서 감정적인 이유만 있지는 않을 거라고. 델루아의 딸이 황후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키아나에게 여러모로 득이 되면 될 것이다.
“아무튼 황후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독이 아니라 칼에 대신 찔려서 죽었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키아나와 알렉시스의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대중의 의견은 하나로 모이는 듯했지만 이내 변수가 생겼다. 델루아에서 승전보와 함께 공작을 죽인 것이 황후라는 소식이 도착한 것이다.
푸르투의 토론은 이전과는 다르게 대립이 첨예해졌다. 델루아의 함락이 쉬웠던 이유가 수장인 공작이 죽었기 때문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황후는 푸르투에서 도망간 반란군의 딸이 아니라, 탈출까지 감행하며 제 친아버지를 죽이러 간 용자가 되었다.
“그래요, 뭐 대단한 공입니다마는 아무리 잘 봐줘도 황비까지입니다. 어쨌든 공작의 딸은 딸이잖습니까.”
“그대의 조상은 전쟁에서 그런 식으로 같은 편을 배신하고 그 공으로 영주 자리까지 얻지 않았습니까?”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그거랑 이거랑 같나요! 사생아잖습니까.”
“참나, 어쩔 땐 딸이라서 문제라 하다가 어쩔 땐 또 제대로 된 딸이 아니라서 문제라고 하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젠 그 태도를 바꿀 때도 됐어요. 클라이드 앙센을 보세요.”
“맞습니다.”
“뭐가 맞아요? 웃기는 소리들 하고 있어.”
“이미 공을 수없이 세우고 마하에서도 인정받잖아요. 크로이센에서 마땅한 대우를 해 주지 못해 타국으로 보내야 한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키아나가 그동안 은밀하게 포섭한 소수 귀족이 진보적인 의견을 내놓으면서 토론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공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이 모든 소란에도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는 알렉시스에게 키아나가 조용히 물었다.
“……모르겠으니까요.”
알렉시스가 솔직하게 답했다. 황후의 거취 문제라든가, 크로이센의 사생아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은 알렉시스에게 조금은 막연하게 느껴졌다.
좀 더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심란함이었다. 황제가 마음에 담아선 안 될 사람을 담았다고 생각해 비난했던 과거와 황후의 기구한 운명이 동시에 알렉시스의 머리를 돌아다녔다.
이본느 델루아는 델루아의 딸이면서 딸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그런 대접을 받은 사람을 딸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공도 언제까지 모른다고 할 수는 없을걸요. 내가 아니라 다른 귀족들이 당신의 의견을 요구할 거예요. 당신이 연륜을 무기로 관습을 대변해 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키아나가 예고한 압박이 피부로 느껴질 즈음 카를로이가 푸르투로 돌아왔다. 승리한 군대와 죽어 가는 황후와 함께.
* * *
강력한 정적을 없애고 돌아온 황제의 위치는 그 전과 같지 않았다. 반란은 곧 숙청의 기회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승리한 사람이 아니라 지독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황제는 황후 옆에서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푸르투의 사람들은 그 모습에 당황했다.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죽고 못 사는 사이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자 카를로이는 치료사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리리안을 되살리라 말했다. 치료사는 지친 얼굴이었지만 어쨌든 고개는 끄덕였다.
다 죽어 가는 황후를 붙잡고 우는 메리앤도 감옥에 오래 있던 탓인지 예전과 다르게 초췌해져 있었다.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폐하. 어떡해……. 그렇게 엄마를 보고 싶어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실종된 딸에 대한 걱정은 너무나 큰 상실을 겪은, 불행한 황후 앞에서 존재감을 잃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보내 달라고 할 때 보내 주지. 한 번만 믿어 주지 그러셨어요!”
메리앤이 울면서 카를로이에게 소리쳤다. 이제 메리앤도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더 잃을 것도 없었고.
황제 앞에서 마구 소리를 치는 시녀장을 보고도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어서 드니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감사해요, 폐하. 정말, 정말 감사해요.>
델루아로 가도 된다고 말할 때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왜 그렇게 환하게 웃었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봐야 했었다. 고작 그딴 것에, 그따위 사소한 것에 왜 그렇게까지 행복해하는지 궁금해했어야 했다.
“루……. 제발.”
다 쉰 목소리로 카를로이는 끊임없이 애원했다. 아니, 애초에 알아봤어야 했다. 후회의 늪은 깊고 짙었다. 빠져도 끝이 없었고 후회할 것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랬어야 했다. 아니, 더 전에 그랬어야 했다. 아니, 아니. 훨씬 더 전에 저랬어야 했다. 그 어떤 답도 줄 수 없는 후회는 그의 숨만 막히게 할 뿐이었다.
<맨날 울어요, 맨날.>
감긴 리리안의 눈을 보면 아셀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앞에서도 이미 많이, 지나치게 많이 울었던 사람이 앞에 없었을 땐 얼마나 울었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저 죽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정신 차리겠다고 자기 뺨을 치겠다고 하지를 않나 아주 난리였다고요.>
야윈 리리안의 볼을 보면 그 말이 생각났다. 때릴 구석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해 가며 델루아로 내려갔어야 할 그 심정을 짐작해 보려고 하면, 어차피 그는 아주 조금만 짐작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그 조금만으로도 그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면 그 조금이 아니라 이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을 리리안은 어땠을까. 이 생각을 하면 왜 이렇게 눈을 감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너무 아프다고, 쉬게 해 달라고 속삭이던 리리안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이 목숨을 스스로 끊으면 그녀가 괜찮아질까? 아니겠지.
그의 시간은 과오만 존재하는 어두컴컴한 과거를 끊임없이 헤매다가 끔찍한 결과만이 남아 있는 현재로 돌아왔고, 그 모든 시간 동안 카를로이는 자신을 혐오했고, 리리안을 생각했다.
치료사가 심각한 얼굴로 황후를 진찰하고 있자 메리앤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신경질을 냈다.
“그 독부터 어떻게 해 봐요!”
치료사가 처음 듣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메리앤은 치료사 대신 카를로이에게 울분을 토했다.
“아직까지 몰랐어요? 황제 폐하 대신 독을 계속 마시고 있었단 말이에요!”
더 창백해질 수도 없을 거라 생각한 카를로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공작이 폐하께 먹이라고 준 독을 차마 그럴 수가 없다고 자기가 대신 마셨어요. 미련하게! 이럴 줄 알았지……. 그딴 게 아무 쓸모도 없을 줄 알았어. 아무도 안 알아줄 게 뻔했다고.”
메리앤이 이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카를로이는 이내 황후가 황제에게 독을 먹이려 했다고 증언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런 적 없어요. 아니, 나는 당신에게 그럴 수가 없어서…….>
그리고 아니라고 애원하던 리리안……. 카를로이가 짧은 신음을 토해 냈다. 그의 흔들리는 시선이 알렉시스 뒤냐와 마주쳤다. 전혀 놀라 보이지 않는 공작이었다.
“대체 언제 말할 생각이었지?”
조용한 물음에 알렉시스는 잠시 눈길을 피했다.
“……폐하께서 좀 진정되시고 나면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아직 돌아오신 지 하루밖에 되지 않으셨잖아요. 잠도 안 주무셨고.”
리리안의 손을 붙잡고 있던 카를로이의 손이 떨렸다. 감히, 닿아도 될까. 내가 무슨 자격으로. 손을 놓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잡지도 못했다.
대체 자신이 뭐라고 그런 독까지 마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루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까. 동굴에서 했던 그 약속들은 다 뭐였을까.
삶은 언제나 큰 의미가 없었고, 그에게 친절하지도 않았고, 준 것도 없었기에, 그것이 자연스러웠기에 그는 불행의 뜻도 모르고 살았다. 루가 죽은 줄 알았을 때도……. 고통스러웠지만 그에게 일어날 법한 일라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주어질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 무엇을 불행이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유일한 의미를 제 손으로, 직접, 틈 하나 없이 망치게 만든 것이 불행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폐하…….”
눈을 감고 조용히 울기만 하는 황제를 고르텐이 조용히 불러 보았지만 카를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참담했다. 자신의 미련함이, 리리안의 불행이, 이 상황이 모두.
감당할 수 없는 자괴감에 가라앉을 즈음 그는 손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느꼈다.
“……루?”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창백한 얼굴의 눈꺼풀이 아주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을 잡을 자격도 없단 생각을 한 것도 잠시 카를로이는 목숨 줄을 잡듯 리리안의 손을 붙잡고 매달렸다.
“루, 제발.”
그의 부름이 들린 건지 감긴 눈이 아주 살짝 열렸다.
“……칼?”
아주 가까이 있어도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카를로이는 대답하려고 했지만, 목이 메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을 두어 번쯤 깜빡이던 리리안이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당혹스러움과 안타까움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카를로이는 차마 그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약속은 수없이 했는데, 지켜 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엄마는.”
“……루.”
“네가, 찾아 준댔잖아.”
카를로이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리리안의 손을 타고 흘렀다.
“왜 울어. 우리 엄마 못 찾은 거 아니잖아. 엄마 살아 있잖아.”
“미안해…….”
카를로이의 속삭임을 들은 리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작이 그래, 엄마가 죽었다고. 그런데 그거 거짓말이잖아, 칼.”
말을 끝낸 리리안이 기침을 심하게 하자 카를로이가 놀라서 마른 몸을 살폈다. 치료사와 시녀가 황후의 몸을 살짝 세워 기침할 수 있게 했다.
“거짓말이라고 해 줘…….”
리리안이 카를로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너무나 미약한 힘이었다.
카를로이는 고개를 떨궜다.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다 아니야.”
미친 듯이 고개를 젓던 리리안이 이내 다시 기침했다.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루!”
카를로이가 놀라서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리리안이 다시 쓰러졌다.
“안 돼. 안 돼, 루…….”
카를로이가 쓰러진 리리안의 몸을 껴안고 울부짖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에 모두 시선을 돌렸다.
“제발……. 죽으라면 죽을게.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카를로이에게 원망을 쏟아 내던 메리앤조차 그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는지 눈물만 뚝뚝 떨궜다.
“내가 잘못했어…….”
이것이 벌이라면 이보다 효과적인 게 없을 것이다. 원망할 사람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자기 자신 단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부질없는 목숨이 붙어 있고 루는 그렇지 못하니, 온전히 벌을 받은 것도 아니다.
카를로이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면서 잘못을 빌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벌을 주지 않았다. 그를 단죄해야 할 유일한 사람은 그의 존재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뜨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벌조차도 과분했다.
* * *
델루아 영지에서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독이 발견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베르니 마법사의 시체에서 나온 조그만 약병에 있는 독은 델루아 공작의 식기에 남아 있는 약과 성분이 같았고, 황후가 황제 대신 마셨다는 약과 같아 보였다.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치료사들이 모여서 베르니의 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베르니 마법사의 목걸이를 조사하려고 마하와 라르투아에서 마법사들이 건너오기까지 했다.
황제의 치료사는 이 모든 자료를 가지고 황후를 치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황후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황제를 위해서였다. 황후가 깨어나지 않으면 황제는 정신을 차릴 것 같지 않았다.
모든 일을 알렉시스 뒤냐에게 위임하고 황제는 황후 옆을 지켰다. 그는 갈수록 무엇에 미친 사람처럼 변해 갔다. 눈은 황후에게서 떠나질 않았다.
“근데 저렇게 계실수록 여론만 안 좋아지는 거 아니에요……? 아직도 황후를 폐위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푸르투 인간들은 정나미가 없어. 지독한 인간들.”
고르텐이 치가 떨리는 듯 이를 악물었다. 카를로이의 심정이 어떨지 생각해 보는 건 둘째 치고 황후의 기구한 사정이 불쌍하지도 않나? 그딴 말이나 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들려온 카를로이의 목소리에 고르텐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이쪽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해 속삭인 것인데 들렸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
“무슨 소리냐고 묻잖아.”
험악한 카를로이의 표정에 이미 옆에 서 있던 시종은 기절 직전이었다. 요새 카를로이의 모습은 전쟁귀보다도 더 무서웠던 탓이다.
고르텐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들으신 그대롭니다…….”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지만.
카를로이의 얼굴에 서늘한 분노가 가득했다. 고르텐은 핏발 선 눈이 터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뒤냐를 불러와.”
황후의 침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황제가 명령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종 공무와 귀족들의 헛소리에 시달리고 있는 알렉시스 뒤냐가 도착했다. 알렉시스의 얼굴도 고르텐 못지않게 피곤해 보였다.
“무슨 일이신지.”
“그딴 개소리를 하는 걸 가만 놔두고 있는 건가?”
유능한 공작에겐 앞뒤 잘라먹은 말도 알아먹는 재주도 있는지 알렉시스는 딱히 뜻을 되묻지 않았다.
“크로이센의 사람들이 할 법한 소리 아닙니까. 그래도 나름 양호한 수준입니다. 별다른 신분 격하 없이 폐위만 요구하고 있으니까요.”
“목을 베든가, 재산을 몰수하든가 해서 그딴 소리 못 하게 만들어.”
위압적인 목소리에도 알렉시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글쎄요. 그런 것들은 반발만 불러일으키는 방법이지요.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더 확실한 방법은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시는 겁니다.”
알렉시스가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델루아도 몰락한 지금은 폐하의 비호가 가장 효과적이지요. 폐하의 감정보단 이성을 무서워할 겁니다.”
“목이 잘리는 것보다 효과적이겠나?”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사람을 도륙할 것 같은 얼굴을 보다가 알렉시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이 푸르투에서 황후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강한 사람은 폐하 하나뿐이라는 걸 기억하시고 애먼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내일 없는 사람처럼 굴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세요.”
잠시 이를 악물던 황제는 이내 얼굴을 감싸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공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건 알아.”
알렉시스는 목소리에서도 고통이 느껴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마디마디에 습하게 스며든 괴로움이 짙게 배어 나왔다.
“하지만 루가 없으면 내일 같은 것도 필요가 없어……. 나는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살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어차피 루가 아니었다면 오래전 끝났을 목숨이었다. 운으로 얻은 여분의 목숨에 미련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당장 내일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에게 미래는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지옥의 또 다른 뜻일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죽게 둘 수도 없는데 차마 살아 달라고 말할 수도 없어.”
혼잣말처럼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던 황제의 어깨가 이윽고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래서, 저 사람이 저렇게 된 거야. 내가 죽으라고……. 사라지라고……. 그렇게 얘기해서.”
카를로이는 소리 내서 울기 시작하더니 앞에 서 있는 알렉시스에게 무너지듯 기댔다.
“내가 죽어도 좋으니까……. 시간을 돌리고 싶어. 아니, 그냥 내가 사라지고 싶어. 태어나지 않았어야 해.”
알렉시스는 할 말을 잃고 조카를 내려다봤다. 그는 매달릴 사람도 없어서 가족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자신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그 말이 맞았어. 내가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이라는 게……. 어머니 말도 맞고, 공의 말도 맞았어.”
알렉시스는 정말이지 당황해서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공은 똑똑하잖나. 뒤냐잖아. 무슨 방법이 있을 거잖아. 제발……. 어떻게 뭐라도……. 그러면 내가 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지금이라도…….”
자신이 무엇을 부탁하고 있는지는 아는 걸까. 마법사도 아닌 그냥 일개 장군에게.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 울지 않았던 카를로이가 섧게 울며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을 줄 몰랐어. 심지어 잘못했다고 빌 수도 없어.”
괴로워하는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할 즈음 알렉시스는 머뭇거리다 그 어깨에 손 하나를 얹었다.
“……델루아에서 베르니 마법사의 흔적이 꽤 많이 발견되어서 학자들이 같이 조사 중입니다. 곧 뭐든지 알아낼 겁니다.”
누군가를 달래거나 위로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알렉시스는 스스로가 어색했다.
“어쩌겠습니까. 깨어나야…… 뭘 원하는지 물어라도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변경백이 계속 친모의 행방을 찾고 있다니까 곧 시신이라도…….”
알렉시스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핏기 하나 없는 황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한 사람이 겪기엔 너무 많은 불행과 괴로움을 목도한 노공작은 마음이 복잡했다.
“내 존재 자체가 저 사람에게…… 고문일 것 같아. 지금 내가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카를로이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상대가 그렇게 소원한 사이였던 알렉시스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사람 같았다. 그 정도로 그는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 그럼 황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도 상대방이 하는 말 정도는 들리는지, 아니면 황후의 언급에 정신을 차린 건지 카를로이가 울음처럼 들리던 혼잣말을 멈췄다.
아마 황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리리안이 제 몸 하나 돌볼 수는 있을까.
“……시녀장이 있어 주겠지.”
“그 사람은 황후에게 나름의 정이나 책임감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황후는 아닐 겁니다. 시녀장은 큰 의미가 되어 주지 못할 겁니다.”
“나는 의미가 되고?”
“……증오나 원망도 힘이긴 힘이지요.”
카를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리안을 증오나 원망 따위의 감정으로 삶을 연명하게 하는 게 잘하는 짓일까. 아닐 터였다.
하지만 눈앞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리리안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매달리게 되는 것이었다. 염치없게도, 역겹게도. 언젠가 리리안에게 역겹다고 하지 않았었나.
카를로이는 울다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쳐서 그딴 소리를 내뱉었다. 가장 역겨운 인간인 주제에, 주제도 모르고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이 너무 우스웠다. 그가 리리안에게 뱉었던 모든 말들은, 했던 모든 짓은 형체 없는 과거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묶여 마치 밧줄처럼 리리안의 목을 감았고 기억의 무게가 자신을 짓눌렀다.
“폐하.”
실성한 것처럼 보이는 카를로이를 알렉시스가 불렀지만,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웃다가 헛구역질을 했다. 자신이 흘리는 눈물에서도 악취가 났다.
카를로이는 웃다가, 울다가, 구역질하다가, 이윽고 생각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어쩌면 이 역겨운 악취가 자신을 질식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고.
* * *
카를로이가 황후의 침실 안에서 밟힌 낙엽처럼 시들고 말라 갈 동안 학자들과 치료사들은 마법과 독의 상당 부분을 분석해 냈다.
육안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황제의 치료사는 황후의 상태가 예전보다는 조금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황후는 아주 잠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얼마나 몸이 약해졌는지 정신을 차리고도 그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데는 또 한참이 걸렸다.
황후 옆에 송장처럼 앉아 있던 카를로이는 황후의 부름에 미친놈처럼 대답을 했다.
“칼.”
“여기 있어. 뭐든지 말만 해. 시키는 대로 다 할게.”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카를로이가 겁에 질린 채 대답했다. 리리안이 눈을 깜빡거렸다. 눈빛이 흐렸다.
“……나 부탁이 있어. 하나만 들어줘.”
여전히 목소리는 꺼질 듯 힘 하나 실려 있지 않았다. 카를로이는 눈이 시려 와서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부탁이란 걸 해 준다는 게 감사했다.
“뭐든지 할게. 뭐든지…….”
리리안은 대답 없이 한참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그 눈이 마치 단 한 번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카를로이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황제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황후에게 매달렸다.
“나 좀…….”
리리안이 속삭였다.
“죽여 줘.”
잠시 머리가 울려서 카를로이는 멍하니 리리안을 바라봤다.
“나 좀…… 죽여 줘.”
공포가 카를로이를 잠식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의 반응을 거절이라 생각했는지 리리안의 얼굴이 흐려졌다.
“제발, 부탁이야…….”
애원하는 목소리와 함께 그 얼굴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아파서 그래. 더는 못 하겠어…….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제발…….”
흐느끼던 리리안이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서도 끊임없이 고통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이 카를로이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진심으로 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에게 죽으라고 했다면, 그는 그렇게 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차마 해 줄 수 없는 일을 부탁하는 리리안에게 카를로이는 긍정의, 부정의 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미안해…….”
그는 결국 수없이 반복했던 말을 또 하고 말았다.
“미안해. 내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카를로이를 보고 리리안이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면 들어줘. 이거 하나 정돈 너도 해 줄 수 있잖아.”
리리안에게 카를로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그녀를 죽여 주는 일이라는 말이었다.
“루…….”
카를로이는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더 섧게 우는 아이처럼. 산처럼 쌓인 잘못된 과거를 되돌릴 길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날. 차라리 내가.”
참회의 울음에 숨이 막혀 말을 잘 잇지 못하는 카를로이를 보고 리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죽는다고 내가 아프지 않을 게 아니잖아……. 제발, 칼.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카를로이는 끝나지 않는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내가 널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
생각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끔찍한 깨달음이 그를 덮쳤기 때문에.
이미 그녀를 여러 번, 수없이 많이 죽여 오지 않았던가. 죽기를 바란다고 그렇게, 내가 내 입으로 직접…….
속이 울렁거리고 끔찍한 역기가 올라왔다. 그 죽음이 쌓여 지금 리리안이 이렇게 된 것이었다. 자신은 리리안에게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난…….”
다시 입이 다물어졌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통과 눈물만 가득한 의미 없는 대화를 멈추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메리앤이었다.
“안 돼요!”
황후의 말을 멍하니 듣던 메리앤은 어느 순간 가까이 와서 침대 발치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아직 드니스를 찾지도 못했어요. 폐하……. 안 돼요. 그래도 드니스를 보셔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그 말이 얼마나 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리안은 죽음을 애원하는 것을 멈추었다. 대신 흐느끼며 드니스를 찾았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기력이 다했는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침묵이 무서워진 카를로이는 리리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리리안만 쳐다보고 있던 카를로이에게 치료사는 잠이 든 것뿐이라고 조심스레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카를로이는 반응이 없었다. 그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리리안만을 지켜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는 고르텐이 황급히 달려와 그가 기다리던 소식을 전할 때가 되어서야 움직였다.
“폐하! 마르키아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드디어 드니스를 찾았다.
* * *
메리앤의 딸 제인은 델루아 영지 구석에 있는 시골에서 발견되었다. 처음 며칠은 밖의 상황을 몰라 나가지 않은 것이었고, 뒤의 며칠은 도망 때문에 몸이 좋지 않아져서 쓰러져 있던 것이었다. 기절해 있던 제인을 군인들이 찾아 치료한 후 신원을 알아냈다.
제인이 일단 묻어 둔 드니스의 시신을 찾았으며 그 둘을 데리고 수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전갈이 도착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시신이라도 찾아서…….”
고르텐이 중얼거리는 말에도 카를로이는 조용했다.
다행일까? 리리안에게 일어난 일 중 그 어떤 것도 다행이지 못했다. 드니스를 확인한 리리안은 어떻게 할까.
영혼이 사라진 듯한 카를로이를 보던 치료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알아낸 것이 그나마 황제를 기운 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저, 폐하. 독 분석이 완전히 끝났습니다.”
카를로이가 빛이 꺼진 눈으로 치료사를 쳐다봤다.
“환각과 망상을 일으켜 정신을 괴롭게 하는 독인데 일단 치명적인 양이 흡입된 건 아니고……. 또 이제 적절한 치료가 가능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좀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치료가 가능하다고?”
“예. 원인을 이제 아니까요. 다만 부차적으로 가슴 통증을 일으키는 것 같긴 한데요, 폐도 좀 안 좋아지신 것 같고. 치료가 오래 걸리면 이 부분이 좀 힘드실 것 같긴 합니다.”
“그 통증이 언제부터 있었을 것 같나?”
예상 밖 질문에 치료사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꽤 오래됐을 것 같은데요.”
“……오래전부터 그렇게 아팠겠구나.”
카를로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런 끔찍한 독을…… 마셨다고. 내가 마셔야 했던 걸…….”
위로하려고 건넨 소식이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일으키자 치료사는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혼자서 계속 중얼거리던 카를로이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안다고?”
“네?”
“원인을 안다고 했잖아.”
초췌해진 얼굴에서 눈만이 번뜩이는 모습은 조금 기괴하게 보였다.
“네…….”
“그럼 전이 마법을 써. 통증이 실재하는 건 옮길 수 있잖아.”
“예? 그건 불법인 데다가……. 누구한테 그럼 옮기란 말씀입니까?”
치료사의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카를로이가 대답했다.
“누구라니. 내가 대신 마셨어야 할 독이라고 했잖나.”
카를로이의 대답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치료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니, 아니. 무슨. 아니!”
충격을 받은 치료사는 단어를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옆에서 고르텐이 내뱉는 비명 같은 탄식까지 합쳐져 금세 황후의 침실은 소음으로 가득하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니! 죽어도 안 됩니다.”
미친 소리였다. 안 그래도 말이 많아 불법인 치료법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한테 쓰라니, 목이 날아가도 할 말이 없었다. 황제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황제에게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치료법을 써도 자네가 죽을 일은 없어. 하지만 쓰지 않으면 내가 죽겠지.”
“예?”
“내가 죽을 거라고.”
카를로이의 얼굴과는 다르게 말투는 지나치게 차분해서 마치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고르텐은 충격이 너무 컸는지 갑자기 침실을 뛰쳐나갔다. 그래도 카를로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자네 정도 되는 치료사가 할 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어차피 전이 마법을 쓴다고 전부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래도 할 수 없다니까요. 아무도 동의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 난 황후에게 그 어떤 것도 해 줄 수가 없는 거군. 내가 받아야 했을 고통도 되가져가지 못한다면 정말로 죽는 게 낫겠어.”
카를로이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얼굴에서 정말로 목을 매든지 칼로 찌르든지 할 듯한 절망감이 흘러나왔기에 치료사는 자신도 모르게 황제를 붙잡았다.
“아니…….”
왜 잡았냐고 물어보는 듯한 카를로이를 보고 치료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말려야 이 미친 인간이 말을 들을지.
가련한 치료사를 구해 준 것은 알렉시스 뒤냐의 등장이었다. 카를로이 때문에 기가 막혀 나간 줄 알았던 고르텐은 알렉시스를 부르러 갔던 모양이었다. 고르텐과 함께 들어온 알렉시스는 한껏 질린 얼굴이었다. 동정심도 잊게 하는 지독함이 카를로이에게는 있었다.
“폐하.”
“괜히 시끄럽게 만들지 마. 조용히 치료만 끝내면 될 일이야.”
“이게 그렇게 폐하 맘대로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폐하가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크로이센은 어떡합니까?”
“그거 좀 옮겼다고 내 몸에 큰 이상이 생기지 않아.”
심지어……. 그녀가 겪는 상실의 고통은 어떻게 해 줄 수도 없었다. 리리안이 겪고 있는 고통의 아주 일부분만 그가 가져올 수 있을 뿐이었다.
카를로이가 치료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말해 봐. 솔직하게. 전이 마법을 쓴다고 내 상태가 심각해지나?”
“……물론 전하의 목숨이 갑자기 위태로워지고 하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물으시면 당연히 제가 할 말이 없지요. 하지만 고통이 작진 않을 테니 정신에 분명 영향을 끼칠 겁니다.”
“괜찮다니까.”
“게다가 전이 마법 자체의 불확실함 때문에 예상치 못한 다른 통증이 있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세상 어디 미친 나라가 그런 위험을 감수한단 말입니까?”
“상관없다니까!”
카를로이가 고함을 질렀다. 격노로 가득한 고함이 침실을 뒤흔들었다. 침실 밖 시종들까지 놀라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나 때문에 독까지 마시고 죽어 가는 사람이 있어.”
카를로이가 급작스럽게 터트리는 감정이 격렬해 그 누구도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근데 고작, 고작 그따위 고통이 문제가 될 거라고 말하지 마. 저 여잔 죽어 가고 있는데 난 그걸 다 옮겨도 죽지도 않을 거라며. 그게 무슨, 그게 무슨 개 같은 경우냐고. 그러니까!”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실상 황제가 그토록 화내고 있는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 황제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는. 다시는 내가 위험하다느니, 내게 안 좋다느니 그따위 말은 하지 마. 그럴수록 내 목을 찌르고 싶어지니까.”
카를로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고작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내가 지금.”
황제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한계치에 다다른 모습에 그 누구도 쉽게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고르텐과 치료사가 슬쩍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답을 내려 주길 바라는 눈빛에 알렉시스는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문질렀다.
이윽고 그 눈길이 죽은 듯 누워 있는 황후에게 닿았다. 알렉시스는 그 모습에서 푸르투에서 쥐 죽은 듯 살던 황후를, 감금되었을 때 델루아로 내려가게 해 달라고 빌던 황후를 떠올렸다. 그리고 카를로이에게 델루아를 믿지 말라고 수없이 말하던 자신을.
그때로 다시 돌아간대도 자신은 황후를 믿지 못할 것이다. 똑같이 행동할 테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로, 몰랐다는 이유로, 자신이 저 여자에게 한 짓이 아무렇지도 않은 게 되는가.
“……폐하 맘대로 하십시오.”
한참 뒤 카를로이에게 건넨 말이 스스로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때 어쩔 수 없었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그나마의 일을 할 뿐이었다.
“외부에는 알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시끄러워지기만 할 테니.”
알렉시스의 말에 치료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만 흔들었다. 이 미친 상황에 대한 체념의 몸짓이었다.
카를로이는 알렉시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저 좀 그만 부르십시오. 바쁩니다. 고르텐 자네도 그냥 폐하가 시키는 대로 해.”
“아니, 그래도…….”
고르텐의 머뭇거리는 답을 듣지도 않고 알렉시스는 침실을 나가 버렸다. 비이성적인 황제와 남겨진 치료사와 시종장은 어쩔 줄 모르고 눈길을 주고받았다.
“뭐 하는 거지? 당장 해.”
제 얼굴만 쓸던 황제가 마침내 벌건 눈을 부릅뜨고 물었을 때는 그 둘에게 순종 말고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 * *
전이 치료가 끝난 후에 리리안의 숨소리가 훨씬 편해졌다는 걸 카를로이도 느낄 수 있었다.
“……이걸 넌 대체 어떻게 참은 걸까.”
리리안의 손을 붙잡고 있던 카를로이가 중얼거렸다. 가슴 통증이 부차적이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빈도가 잦고 강도가 컸다. 어떨 때는 고통 때문에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이걸 고스란히, 그 오랜 시간 동안 겪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그저 끔찍했다.
그런 끔찍함을 느낀 후에는 어김없이 탑에 갇혀 있던 리리안의 몰골이 떠올랐다. 그걸 잔인하게 무시하던 자신도. 생각해 보니 언젠가부터 리리안의 얼굴이 점점 더 안 좋아졌던 것 같다.
“더 일찍 알아챘어야 했는데…….”
치료사는 곧 있으면 황후가 깨어날 거라고 말했다. 전이 마법 덕에 금방 정신을 차릴 거라고.
그리고 카를로이는 무서웠다. 리리안이 깨어난 후 어떻게 할지 예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사실 예상이 갔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드니스와 제인이 푸르투에 도착할 것이다. 드니스가 죽은 걸 알면, 확인하면 스스로를 해치려 들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그걸 막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답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잘못을 빌 방법도 없었다.
“네가……. 더는 괴롭지 않았으면 하는데. 알아. 이런 말 할 자격 없지. 아는데…….”
혼자서 중얼거리던 카를로이가 결국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것은 이제 익숙했다. 그는 매일매일, 숨을 쉬듯 같은 속죄의 말을 읊조렸다. 그래서 그는 붙잡은 손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루?”
분명 손이 움직였다. 카를로이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치료사와 시종들이 달려왔다. 치료사가 상태를 살피던 중에 리리안의 두 눈이 떠졌다.
“폐하!”
치료사가 깜짝 놀라 부르자 황후가 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치료사의 지시에 시종이 물과 약을 가지고 왔다. 황후의 몸을 살짝 일으켜 세우고 약을 흘려 넣자 약한 기침이 나왔다.
리리안이 정신을 차리는 이 모든 과정을 카를로이는 초조한 얼굴로 지켜봤다.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서 있기만 한 그의 모습은 황제라기보다는 불쌍한 바보처럼 보였다.
“어떠십니까? 좀 괜찮으십니까? 몸 통증이 조금은 사라지셔서 좀 가볍게 느껴지실 텐데…….”
황후는 아주 약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몸이 괜찮아진 것이 전혀 기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치료사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상태를 살피고 물러나자 이제는 황제와 황후만이 남았다.
카를로이는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리리안이 깨어난 것을 무턱대고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냥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리리안의 눈이 이윽고 카를로이를 바라봤다. 그 눈을 본 순간 카를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대 발치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언젠가 저 얼굴을 냉담하다고만 생각했었다. 다 착각이었다. 지금에 비하면 그 얼굴은 감정으로 가득했던 얼굴이었다. 카를로이를 바라보는 작은 얼굴엔 그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로 무언가를 보고나 있기는 한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텅 빈 눈빛이었다.
“미안해……. 내가, 내가 다…….”
부끄러움도 모르는 눈물이 말 사이를 채웠다. 황제는 황후의 발치에 매달려서 전혀 닿지 않는 듯한 속죄를 고했다.
“내가 알아봤어야 했어. 아니, 네 말을 믿었어야 했어.”
리리안은 여전히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네가 날 죽이고 싶다면.”
“너.”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힘 하나 없는 목소리인데도 놓칠 수가 없었다.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억양 하나 없는 말투였다.
“네가 죽어서 나한테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지친다는 듯 중얼거린 리리안이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멍하니 바라봤다.
“날 기어코 살려 내기까지 했으면서 또 뭐를 해 주겠다는 걸까, 넌.”
원망의 기색이 단 하나도 없는 말투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카를로이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시간을 되돌려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네가 엄마를…….”
내내 감정이 없던 목소리는 드니스를 언급하면서 흔들렸다. 리리안이 고개를 다시 돌려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우리 엄마는 진짜로.”
처음으로 그 눈에 감정이 보였다.
“정말로……. 죽었어?”
그 간절함에 답해 줄 수 없는 카를로이는 스스로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자신은 정말로 살 가치가 없다. 애초에 루가 구해 줄 만한 값어치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안해. 지금 제인과 함께…… 수도로 오고 있어.”
리리안이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알았어야 했는데. 위험하게 널 선택할 때 이렇게 될 거라는 걸.”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카를로이는 차라리 가슴이 칼에 찔리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에게로 옮겨진 고통도 이보다 아프진 않았다.
“널 원망할 필요도 없어. 내가 그런 거야. 내가 엄마를 그렇게 만든 거야.”
병 때문에 안쓰러울 정도로 작아진 몸이 애처롭게 흔들리며 울음을 쏟아 냈다. 그 힘겨워 보이는 몸을 안아 주고 싶었지만, 카를로이는 리리안에게 손도 대지 못했다. 떨리는 손이 우는 여자의 근처에서 맴돌기만 했다.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이건 다 내가…….”
내가 멍청해서. 내가 개새끼라서. 널 알아볼 거라는 멍청한 자신감만 있던 머저리 새끼라서.
엄마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카를로이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제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렸던 그 날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루가 자신을 구하기 전에 제 멱을 따 버릴 텐데. 루가 절대로 자신 같은 인간은 만날 수 없도록 그렇게 할 텐데.
그럴 수가 없어서 카를로이는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나 때문이라고.
하지만 리리안이 말했듯, 이제 와서는 그 어떤 말도 소용이 없었다.
* * *
치료사는 황후가 정신을 다 차린 거나 다름없다고 말했지만, 그 진단이 무색하게도 그녀에게선 그 정신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숨도 마지못해 쉬고 있는 듯한 사람에게 제대로 돌아가는 정신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황후가 깨어나고 나서도 부득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황제는 황후의 짧은 한마디에 몸을 일으켰다.
“가.”
지친 목소리로 판단하건대 카를로이에게 이제 좀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주변에서 타박하는 잔소리가 듣기 지겨운 듯했다.
“……금방 다시 올게.”
머뭇거리며 말하는 황제를 보고도 황후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애초에 황후는 그다지 황제의 존재에 관심이 없었다. 하는 일이라고는 온종일 멍하니 창문만 쳐다보고 있는 게 다였다.
가끔 그 시선 끝을 따라가다 보면 카를로이는 무서워졌다. 창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왜. 탑의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드니스가 떠올랐다. 리리안도 계속 그걸 생각하고 있을까 봐 걱정이 됐다.
가겠다고 자리에 일어선 카를로이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 황후를 쳐다봤다.
내내 그런 식이었다. 그의 신경은 모두 황후의 숨소리 하나에 가 있었고, 옅은 몸짓 하나에도 눈치를 봤다. 말을 걸 수 있는 것도, 손을 건넬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옆에만 그렇게 맴돌았다.
그가 나올 때까지도 리리안의 고개는 한 번을 움직이지 않았다.
“잘됐습니다. 이참에 몸도 정돈 좀 하시고…….”
고르텐의 카를로이의 처참한 몰골을 위아래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뒤냐 공이 폐하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도 많다고 한 데다가, 한번 얼굴이라도 비추셔야 헛소리도 그만 돌지요.”
은근하게 일러 오는 고르텐의 말에 카를로이가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침실에서 보였던 애잔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직도 돈다고?”
고르텐이 어깨를 으쓱였다.
황후가 깨어나서부터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말을 놓는다든가, 황제가 황후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든가 따위의 소문은 이미 궁내에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모든 전말을 아는 사람이 몇 없어서 자세한 사실보다는 황제와 황후가 알고 보니 아는 사이였다, 정도로 퍼지는 모양이었다.
“안 그럴 이유가 없잖습니까? 게다가 폐하와 황후님이 무슨 사이였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던데요, 귀족들이. 정말 예전부터 뭐가 있었던 사이라면 마냥 황후를 쫓아내자고 하기엔 폐하 눈치가 보일 테니 그러겠지요.”
카를로이가 짜증이 가득 담긴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짜증은 짜증이고, 할 일을 해야 했다.
그는 문제의 브로치를 확인하고 싶었다. 원래라면 수도에 돌아오고 나서 바로 그래야 했겠지만, 리리안이 쓰러져 있을 땐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사실 지금도 마음은 리리안에게 가 있었다. 혼자 놔두기가 영 불안했다.
“뒤냐한테 크로이탄의 눈을 지금 봐야겠다고 전해. 내 집무실로.”
충직한 시종장은 명을 수행했다. 부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렉시스 뒤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원로 마법 학자와 함께 카를로이의 집무실로 왔다.
“웬일이십니까? 영영 그곳에서 사실 줄 알았는데.”
공작의 첫마디는 말의 내용과 달리 비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로 놀란 기색이었기 때문에.
“확인은 해 봐야 하니까.”
카를로이가 브로치를 향해 고갯짓을 하자 학자가 브로치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마법이 예전 같았다면 떨어진 기간의 모든 것을 담았겠지만, 지금은 그렇지는 않으니 얼마나 기록되어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중간중간 끊기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황제의 얼굴을 확인한 학자는 브로치를 가져온 유리 대접의 물에 빠트렸다. 카를로이가 팔을 내밀자 학자가 그의 손가락을 살짝 베어 피를 취한 후 물 위에 뿌렸다.
붉은빛이 섞여 들자 흐르는 파랑 속에 형체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물 위에서 형상이 자리를 잡자 카를로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리리안과 델루아 공작이었다. 물은 최근부터 보여 주는 것인지 델루아 타워의 그 꼭대기 층에서 델루아 공작에게 소리치는 리리안이 나왔다.
“아.”
카를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리리안이 괴로워하는 게 시공간을 넘어 그에게 와닿았다. 그 절망 어린 울음과 표정을 보고 있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가슴의 통증이 새삼스럽게 또 느껴졌다.
그 뒤에 이어지는 공작의 수작질들, 베르니의 마법사와 무슨 일이 있었고 영지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따위의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리리안이 절망하다 못해 공작에게 빌듯이 애원하는 모습이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너무 쉽게 죽어 버린 공작에 대한 비이성적인 분노가 느껴지다가도 자신이 그런 상황까지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그 분노를 내리눌렀다.
“하.”
숨쉬기가 어려워져서 카를로이가 탁한 신음을 내뱉자 알렉시스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계속할까요?”
카를로이가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과거로 넘어가는 어느 순간부터는 브로치가 비춰 주는 장소가 델루아 타워에서 공작의 방으로 바뀌었다.
리리안에게 온갖 소리를 치는 공작, 물건을 던져 대는 공작……. 엄마를 가지고 협박을 하고, 카를로이의 냉대조차 리리안의 탓을 하는 공작.
비린 맛이 느껴졌다. 입술을 너무 깨물어서 피가 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만……. 도저히, 더.”
카를로이가 항복하듯 그 말을 내뱉은 것은 공작이 리리안에게 손찌검을 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나서였다. 차마 더 볼 수가 없었다.
말도 다 끝내지 못하는 카를로이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 모습을 잠시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학자는 고개를 저었다.
“한번 시작하면 멈추기는 어렵습니다.”
리리안의 울음소리가 약하게 방을 맴돌았다. 카를로이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피할 자격도 없었다.
물은 쉴 새 없이 과거로 내달려서 어린 리리안이 탑에 갇히는 것을 보여 주었다.
“폐하…….”
카를로이는 알렉시스가 자신을 왜 그렇게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알렉시스가 손을 툭 건들고 나서야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있어서 손톱이 파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다는 건 그보다 더 오래 지나서 알았다.
물이 마침내 공작을 만나기 전 활짝 웃고 있던 리리안을 보여 주자 카를로이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울기 시작했다. 알렉시스는 조용히 학자를 내보냈다. 굳이 여러 사람에게 보일 모습은 아니었다.
“폐하.”
황제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망쳤어.”
사람의 목소리라기엔 너무 거칠었다.
“저 애 인생을 그냥 내가 망쳤다고.”
“폐하.”
“공도 다 봤잖아. 사람 하나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나 때문에.”
알렉시스는 그저 운명이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두 아이가 그날 만나게 되었을 때 일이 이렇게 될 거란 걸 알았을까. 그 황후가, 황제가 그토록 찾던 그 아이였다는 걸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싶었다.
하필이면, 그 여자가 델루아의 사생아였다는 걸 그 누가 알았을까. 그리고 하필이면, 델루아가 그것을 찾아내리란 걸 대체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자신도 아직까지 믿기지 않는데 당사자는 오죽하려고.
애초에 잘못의 근원을 찾자면 그건 델루아였다. 알렉시스는 자신이 델루아를 빨리 죽이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그 목숨을 괜히 오래 놔둬 그 피해자들만 늘게 한 것을.
“푸르투에서 두 분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은 모르겠지만, 어릴 때의 일은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지 않았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나 때문에 저 개새끼랑 엮였어.”
“그건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을 하면서 알렉시스는 비로소 마음으로 깨달았다. 아델라이드가 죽은 것도, 당연히, 카를로이의 잘못은 아닌 것이다.
“폐하의 잘못이 아닌 일은 후회해도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푸르투에서도 황후를 믿지 못한 것은 용서를 구해야겠지만, 제 탓도 있겠지요. 제가 폐하를 더 부추겼으니까요. 황후께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린아이 대변하는 어른도 아니고. 그런 짓은 하지 마. 그 사람만 더 괴로울 테니까. 어차피 못 믿은 건 나야.”
알렉시스가 대답하지 않자 집무실엔 적막이 감돌았다.
카를로이가 가장 괴로운 것은 저 브로치가 과거를 전부 보여 준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부분 부분 보여 준 것인데도, 리리안의 불행은 너무나 많았다. 부분을 집어먹어 전체가 될 정도로.
“내 잘못이야. 종일 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다른 사람도 아닌 델루아의 딸이라는 게 싫어서…….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믿지 못할 거면서 믿겠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카를로이의 목소리까지 점점 조용해졌다. 황제와 공작은 각자의 후회에 잠겼다.
침묵을 깬 것은 시종의 알림이었다. 드니스가 수도에 도착했다.
* * *
카를로이가 알렉시스와 함께 별관에 도착했을 때는 소식을 빨리 들었는지, 이미 리리안이 와 있었다. 멀리서도 단 위에 엎어져서 우는 여자가 보였다. 주위 시녀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옆에서 불안하게 리리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리리안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걸음 하나하나가 물먹은 듯 무거웠다. 브로치로 과거를 모두 보고 난 뒤 그녀를 보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엄마, 사실은 안 믿었어. 엄마를 차라리 못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랐어. 그러면 믿을 필요가 없으니까. 엄마가 그냥 어디로 도망쳐서 살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울음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애달픈 목소리를 들으며 카를로이의 가슴이 무너졌다. 무너지고 무너져도 또 그럴 게 남았다는 것이 이상했다.
“내가 엄말 이렇게 만들었단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드니스의 상태는 전혀 좋지 못했지만, 그래도 마법사들이 임시방편으로 최소한의 조치를 해 놓았는지 누군지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리리안은 생명의 흔적도 남아 있지 못한 드니스의 얼굴을 만지며 끊임없이 속삭였다.
“알아, 내가 나빴지. 이렇게 외롭고 춥게 있는데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그래서 엄마가 이렇게 빨리 갔나 봐.”
대답 없는 시신에게 말을 걸던 리리안은 결국 그 몸을 끌어안고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내가 미안해. 그러지 말 걸 그랬어.”
커지는 울음소리는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그러지 말걸. 그따위 선택은 하지 말 걸 그랬어, 내가. 나 같은 애가 뭘 할 수 있다고…….”
그 선택이었던 남자는 그저 우두커니 뒤에 서 있었다. 아주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그렇다고 멀리 떨어지지도 못한 채.
리리안이 탈진하다시피 울어 쓰러질 것 같자 그제야 카를로이가 가까이 다가갔다. 중심 하나 잡지 못하는 작은 몸이 그의 품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할 줄 모르던 남자는 결국 미안하다는 말만 속삭였다.
“내 탓이야. 네 잘못이 아니야.”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는 카를로이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원망이 가득 찼다.
“네가 미워. 네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리리안이 울음을 터트리며 카를로이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친다기에는 너무 약한 힘이라 카를로이는 그것이 또 못내 괴로웠다.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왜 했어.”
“미안해…….”
카를로이를 때리다 지친 리리안이 옅은 숨을 몰아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니, 내가 멍청했어. 널 믿은 내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그 말을 속삭이고 리리안은 의식을 잃었다. 리리안의 가장 후회스러운 선택이 된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품에 안은 채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람이 죽음으로도 갚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대체 어떻게 갚아야 하는 걸까. 리리안의 몸이 가벼운 만큼 그의 과오가, 후회가 무거웠다.
“내가…….”
미안해란 말은 차마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리리안의 어깨를 안았다.
* * *
꼬박 하루를 앓고 일어난 황후에게 제인은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글을 계속 배우고 계셨거든요. 온종일 연습하시고 그랬는데.”
제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떨어트렸다. 제인의 얼굴도 좋지는 못했다. 델루아 공작이 옆에 데리고 다니던 오빠 지미의 행방을 알 수 없어서 아마 심정이 말이 아닐 터였지만, 메리앤도 그렇고 제인도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엄마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입술까지 바싹 말라 버린 리리안이 물었다.
“산책을 하다가……. 베르니 마법사와 공작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돼서……. 죄송해요, 제가 조심해야 했는데.”
훌쩍거리는 제인에게 네 잘못은 아니라고 말할 힘조차 없어서 리리안은 입술만 깨물었다.
드니스가 탑에서 뛰어내릴 거란 사실을 공작은 예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드니스에게는 아름다운 것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사실 감시가 심하지도 않았다. 드니스가 원하면 창밖을 볼 수도 있고, 탑을 나갈 수도 있었지만 몸이 그럴 여력이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어요. 그 마법사는 드니스가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그 얘기를 꺼낸 것 같았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는 다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조금은 뻔하기도 했다. 애초에 피오르와 공작의 속셈이 달랐다니까. 공작이 드니스를 가지고 자신을 패로 써서 이득을 보는 게 아니꼬워졌거나. 아니면 드니스가 공작에게 뭐라도 영향을 끼칠 거라고 착각했거나.
뭐든지 이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알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는 왜 그렇게 바로 죽어야 했을까. 내가 아직 살아 있는데. 왜 그렇게 바로. 내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편지를 부여잡은 리리안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것을 보던 제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폐하……. 드니스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어요. 물론 폐하께서도 그러셨겠지만. 살기를 강하게 바란 것도 아니었고요.”
눈물 고인 리리안의 눈이 깜빡거렸다.
“몸이 좋아진 것도 아주 잠시뿐이었고……. 맘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으로 버틴 건 다 폐하가 있기 때문이었을 텐데. 폐하가 그걸 원하시니까…….”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제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런 말이 어떻게 마음을 편하게 해 주겠어요. 다만 제가 그래도 오래 곁에서 그 고통을 보았으니까.”
고통. 그래, 드니스도 리리안만큼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리리안도 모르진 않았다.
사람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안 좋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리리안은 정신이 묶여 있었다면 드니스는 몸이 묶여 있었다.
“그냥…… 정말 폐하가 바라니까 살아 있었던 드니스인데. 자신이 폐하를 협박할 빌미가 되었다는 게 많이 충격이었을 거예요.”
그럼 대체 어떻게 했어야 자신과 엄마한테 좋은 일이었을까. 리리안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폐하 탓이 아니에요. 그냥 상황이,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에요.”
제인이 마지막으로 리리안의 손을 한 번 꽉 잡아 주고 침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리리안은 한참을 편지지를 손에 들고만 있었다. 펼쳐 볼 엄두가 안 나서.
간신히 마음을 먹고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쳤을 때는 단정한 글씨체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 해도 삐뚤거렸었는데…….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서 편지지를 적셨다. 눈물 때문에 글씨가 번져서 편지 내용이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 돼 눈을 거칠게 닦았다.
<있잖아. 내가 네 이름을 지을 때 다른 사람들이 다 뭐라고 했었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나 뭐라나. 근데 난 그런 이름을 주고 싶었어. 드니스에게서 태어난 아이에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름을.>
형식적인 ‘-에게’라는 문구도 없이 바로 ‘있잖아’였다. 눈을 닦았는데도 눈물이 계속 났다. 서툰 맞춤법 실수마저도 서글펐다.
<너 태어날 때 비가 왔잖아. 솔직히 힘들었고……. 네가 날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넌 알려나? 물론 모르겠지! 비가 와서 몸이 더 쑤시는 것 같았단 말이야. 아주 잠깐 후회했다니까.
그런데 나중에 널 안고 가만히 빗소리를 듣는데 그게 참 좋더라고. 난 크로이센의 비를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하더라니까.
그때 빗소리가 좋은지 처음 알았어. 비 내리는 풍경이 꽤 아름답다는 것도. 너는 엄청나게 울어 댔지만…….>
다 아는 이야기였다. 비 오는 날이면 언제나 드니스가 리리안을 안고 이 말을 했었으니까. 그 목소리가 지금 당장이라도 들릴 것 같았다.
<같은 얘기 또 하네, 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데 어떤 이야기들은 몇 번을 해도 좋은 거야. 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뭐 이런 이야기들.
내 사랑, 내 생명, 루.
너는 내가 비를 사랑하게 만들었지. 아니, 그날 이후의 내 인생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었지. 네가 얼마나 큰일을 한 건지…… 알아야 할 텐데.
근데 사실 나중엔 좀 후회했어. 네 이름을 그렇게 지은걸. 이름만 그렇게 지어 놓고 그런 삶을 주지를 못 했잖아. 도움이 되지 못하면 짐이라도 되지 말아야 하는데 아프기까지 하고 말이야…….
난 왜 아파야 했을까. 이유도 없이, 참 재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지 않아.
세상 우연엔 이런 불행도 있듯 행운도 있는 거야. 네가 내 딸로 태어난 행운 같은 우연도 있는 거니까.
아무튼 그때는 너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는데, 나는 널 그렇게 만들어 줬을까. 그런 의심이 들더라.>
눈앞이 또 뿌옇게 변해서 눈을 닦아 내야 했다. 바보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의심을 할 수 있담…….
<공작을 만나서 드디어 네게 그런 삶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그 지난 10년이 모두……. 내가 얼마나 멍청한 엄마니.
네가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네게 고통과 불행만 알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는 어쩌면 엄마를, 내 선택을 원망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계속 그런 생각이 들어. 진즉, 아주 오래전에 이렇게 해야 했다고.
그리고 사실 좀 많이 아프고 힘들기도 해. 엄마도 쉬고 싶을 때가 있는 거야. 알잖아. 왜, 난 바느질을 할 때도 꼭 한 번씩은 아주 오래오래 쉬어 줘야 했다고.
그런데 이번엔 너무 오랫동안 쉬지 않아서 좀 힘든 것 같아. 엄마는 그냥 쉬러 가는 거야. 정말로.>
너무 울어서 숨이 찼다. 편지지를 구기지 않기 위해 리리안은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고 난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이 모든 걸 벗어나서……. 도망가서……. 고통과 불행 말고 다른 것도 존재한다는 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어. 널 묶어 둘 건 이제 아무것도 없어.
마하도 가 보고 렉셈 소르타도 가 보고. 사람도 많이 만나 보고. 네가 못 할 게 뭐가 있어. 난 정말로……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
내 품 말고도 따뜻한 곳이 많을 거야. 내가 너의 감옥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제발. 나는 정말 그걸 견딜 수가 없어…….>
어떻게 자신이 리리안의 감옥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화가 났다.
<아, 내 사랑, 내 아가. 나는 너를 너무 많이 사랑해서 욕심을 부렸어. 그 욕심으로, 아니, 그 사랑으로 지금까지 살아서 널 볼 수 있었지.
내가 영원히 널 사랑한다는 걸 절대 잊지 마. 꼭……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마지막까지 부탁만 해서 미안해. 하지만 꼭 들어줘. 내가 아무리 보고 싶더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날 만나러 와야 해.
잊으면 안 돼. 네가 날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나는 조금도 불행하지 않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 이 말을 직접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무수히 많이 써진 ‘사랑해’란 단어를 읽고 리리안은 울었다. 가슴을 쳤다. 소리를 질렀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했다면 이렇게 쉽게 떠나지 않았을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토록 길게 쓰고 갔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가슴은 아팠고, 절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누가 자신을 죽여 줬으면 했다.
리리안이 울부짖는 소리에 카를로이가 다급한 얼굴로 침실에 들어왔다. 몸도 가누지 못하고 우는 리리안을 품에 안자 금세 가슴이 젖어 들었다. 그녀의 고통이 맞닿은 피부로, 온몸으로 느껴져서 그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해.”
흔들리던 몸이 잦아들었고, 울음 섞인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카를로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다 내가…… 다 내 잘못이야.”
그 말을 듣고도 대답이 없던 리리안은 한참 뒤에야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래. 애초에 널 만나는 게 아니었어.”
낯선 표정으로 리리안이 중얼거렸다. 그를 보고 있는데,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네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말았어야 했는데.”
“……루.”
그가 간신히 꺼낸 이름에 리리안의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너.”
이제 그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았다. 짧은 단어 하나에 무수한 감정이 담겼고, 카를로이는 그 대부분이 자신에 대한 증오라는 걸, 무수해 봤자 결국은 증오의 다른 이름들이라는 걸 쉽게 알아차렸다.
“그 이름으로 나 부르지 마.”
단어 하나하나에 그렇게 담겨 있었다. 자신을 원망하는 말조차 의연하게 하지 못하고 울음기가 반쯤 섞여 있다는 것이 괴로웠다. 그 손에 칼이라도 쥐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하는 대로 찌르라고.
“이제 와서 그따위로 부르지 마. 우리 엄마가 나 부르던 이름 네 입에 담지 마.”
카를로이는 그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저런 말이 저 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말이라는 게 참담했다. 하다못해 욕도 못 한다는 게. 죽어 버리라고도 못 한다는 게.
이윽고 리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서.
“……나가 줘.”
건조한 부탁이 떨어졌다.
“네 얼굴 보는 거 고통이야.”
그 말을 듣고도 카를로이가 그 침실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리리안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침실을 나서자마자 다시 리리안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카를로이는 그대로 문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그 문 앞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못한 채 그는 그 모든 소리를 들었다. 끊기지도 않는 약한 울음소리를.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목숨을 억지로 부여잡고 살았더니, 그는 리리안의 고통이 되었다. 그녀에게 빚지고 살아서, 그가 된 게 고작, 겨우 그거였다. 그따위 거였다. 그 여자의 고통.
<내가 뭘 잘못했어.>
리리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 말을 다시 생각했다. 그의 존재가 그녀에겐 잘못이 되었다. 쓸모없기만 한 목숨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카를로이는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 * *
“정무에 복귀하시는 건 이젠 바라지도 않습니다. 약이라도 제대로 드세요.”
반쪽이 된 알렉시스 뒤냐의 얼굴을 보고도, 알렉시스가 간신히 짬을 내 온 시간이 새벽이라는 것에도 카를로이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뒤냐가 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알겠는데 이상하게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정무에 복귀할 것도 아니면 약 먹어서 뭘 하는데?”
순수한 궁금증이었는데, 알렉시스는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질문을 들은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고르텐, 이렇게까지 심각하다곤 말하지 않았잖아.”
알렉시스의 타박에 고르텐이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고르텐이 뭐라 해명하기도 전에 카를로이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난 미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보지 마.”
“약, 드셔야겠습니다. 치료사 말이 전이 치료 때문에 통증도 심하고 부작용도 있다는데, 가만히 놔두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던데.”
“먹고 있어.”
“거짓말까지 하십니까, 이제? 게다가 먹어 봤자 모조리 토해 내면 그게 먹는 겁니까?”
“공이야말로 늙었다고 잔소리가 더 느는 건지. 언제부터 날 그렇게 걱정했다고.”
“지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거지.”
듣고나 있는지 의문이었다. 영혼 없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알렉시스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왜 황후의 침실엔 못 들어가고 그 밖에서 한심하게 진을 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니, 사실은 대충 짐작이 가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황후 이외의 모든 것에 관심을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심한 놈.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전이 새삼스레 대단한 거였다. 밤에는 미쳐 가면서 낮엔 멀쩡한 척한 게.
“……아니. 정말로, 황위라도 버릴 생각이십니까?”
카를로이는 그저 알렉시스를 흘끗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는데 그것이 더 화가 났다. 찰나의 시선에서도 ‘할 수만 있다면 왜 못 하겠냐.’, ‘그걸 아직도 몰랐냐.’ 따위의 생각들이 읽혔기 때문이었다.
미친놈. 황제 아니면 할 줄 아는 일도 딱히 없는 인간이 뭘 믿고? 딱히 곱게 자란 것도 아니면서 저따위 안일한 생각을.
물론 저도 크로이탄이랍시고 식물을 가지고 좀 놀 수도 있다지만, 마하에 있었을 때 전쟁 몇 번 나가 봤다고 칼 좀 다룰 수 있다지만, 어쨌든 황제보다는 못할 것 아닌가. 알렉시스가 혀를 찼다.
“어차피 반기지도 않는데,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십니까?”
카를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예전에도 대답하기 싫은 질문엔 답한 적 없고, 리리안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약 먹을 시간조차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말고 꺼지랬다고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리리안이 이틀 걸러 한 번씩 밤중에 울 때가 있다는 걸 알고서는 도저히.
메리앤도 감당이 안 돼 카를로이를 부르면, 울면서 제 몸을 부서트릴 듯 괴롭히는 여자가 보였다. 꺼지라고 하다가도 리리안은 카를로이를 보면, 그 품에 매달려서 울었다. 그건 카를로이라서 그런다기보단…… 매달릴 사람이, 원망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지독하게 불쌍했다. 리리안이 매달릴 사람이 고작 자기 같은 인간 하나 남았다는 게.
그래서 그는 밤낮으로 이곳에 맴돌았다. 리리안이 차라리 제 몸을 때리기를 바라서. 자신한테 욕이라도 하기를 바라서.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침실 안에서 메리앤이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렸다. 그보다 무서운 것은 카를로이의 반응 속도였다.
침실에 들어가자 깨진 등이 바닥에 조각나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열려 있는 침실 안 쪽문이. 차마 황후를 뒤쫓지 못한 메리앤이 약과 붕대 따위의 것들을 들고 망연히 서 있었다.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셔서는……. 등까지 깨트리면서 나가시는데 깨트린지도 모르시고…….”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카를로이가 메리앤이 들고 있는 것들을 뺏듯이 낚아채 대충 유리를 밟고 열린 문을 통해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흰 잠옷 차림으로 정원을 배회하고 있는 맨발의 여자가 보였다.
“추운데 왜 나왔어.”
정신없이 걷던 리리안이 제 앞에 서서 몸으로 자신을 막고 있는 카를로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엄마가 불러서.”
할 말을 잃은 카를로이가 입술만 달싹였다.
“근데 왜 안 보이는지 모르겠어. 꽃을 좋아하니까 분명 여기 어디 있을 건데. 불러 놓고 왜 안 보이지…….”
카를로이의 상체 때문에 시야가 가로막힌 리리안이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리더니 그를 살짝 밀었다.
“……리리안.”
이본느는 이제 그녀에게 악몽 같은 이름일 것이고, 루는 허락받지 못한 이름이니,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너 때문에 엄마가 도망간 거면 어떡해.”
그를 노려보면서 하는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티 없는 얼굴을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내렸더니 피 묻은 손이 보였다.
“일단 들어가서 치료부터 하자. 손에 피 나는데…….”
“내가? 너잖아, 그건…….”
그 말에 문득 아래를 보니 자신의 발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유리를 밟은 모양이었다.
“다친 걸 그대로 놔두면 안 된다면서. 너는 왜 맨날 그대로 두는 거야?”
목이 메서 차마 대답은 하지 못하고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분수대 위에 앉혔다. 힘 하나 없는 몸은 그가 이끄는 대로 너무 쉽게, 서러울 정도로 쉽게 끌려 왔다.
“하긴. 피 나면 엄마가 쓸데없이 걱정할 거야. 우리 엄마는 날 걱정하는 걸로 1주일도 보내니까.”
괴로움을 간신히 집어삼키고 카를로이가 그 발끝에 무릎을 꿇고 손을 살폈다. 박혀 있는 유리가 보였다.
“근데 너 왜 이렇게 손을 떨어.”
리리안이 무심하게 물었다. 그 무심한 어조마저도 그에게 과분하게 느껴져서 목이 탔다. 받아서는 안 될 것을 받은 기분이었다.
손을 떨지 않으려 해도 그녀에게 닿는 것만으로도 주체가 안 돼서, 그는 잠시 손놀림을 멈췄다.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아.”
유리를 빼자 약한 신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카를로이가 고개를 들어 리리안의 얼굴을 살폈다. 그를 원망하지 않는 초록색 눈이 닿자 그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낯선 것을 보듯 카를로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리리안의 표정이 이윽고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아함이, 그러고는 깨달음이, 마지막엔 괴로움이. 그 모든 변화가 카를로이의 심장을 후벼 팠다.
“이거 놔.”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만 치료하게 해 줘. 제발…….”
“내가 제발이라고 개처럼 애원할 땐 네가 들어줬어?”
카를로이가 잠시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자신 같은 천하의 개새끼한테도 하지 않던 비유를 리리안이 스스로한테 하는 것을 듣는 건 고문이었다.
“이거 좀 다친다고 이제 와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리리안은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럴 기력도 없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그냥 말해 주지 그랬어. 네 엄마 이미 죽고 없다고. 머저리 같은 짓 하지 말라고.”
아무도 없어서 소름 끼치도록 조용한 정원에 리리안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나 우스운 꼴 다 보고 있지 말고 너 미친년 다 됐다고 그냥 말을 하지 그랬어.”
“우스웠던 거 아니야. 어떻게 내가.”
“하긴, 나 이딴 꼴 보고 우습기까지 하면 네가 너무 쓰레기긴 해.”
리리안의 말투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아서 원망하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이미 지금도 지나치게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카를로이는 떨리는 손으로 리리안의 손에 붕대를 천천히 감기 시작했다.
“난 정원 좋아하지도 않는데.”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던 리리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반쯤은 오기로 나와 있었어. 네가 약속을 언제쯤 지킬까 하고. 아니, 그냥 지켰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데. 그때는 이곳에서 기댈 게 그거 하나더라고. 사실 지켜질 거라고 기대한 것도 아닌데.”
무슨 약속이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카를로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미친년이지 뭐야. 내가 정원에 기어들어 가는 게 그렇게 싫다는데 기어코……. 기어코 그렇게. 자존심도 없이.”
“미안해…….”
“지겨워.”
정말로 질린다는 투였다.
“내가, 내가 뭘.”
더듬더듬 말을 잇는 카를로이를 리리안이 가차 없이 잘랐다.
“뭘 해 주면 되겠냐고?”
마치 정말 고민이라도 하듯 리리안은 한참 답이 없었다.
“나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거……. 정말 모르겠어?”
카를로이가 없는 용기를 끌어모아 간신히 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표정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죽든가, 내 눈에 보이지 않든가.”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었다. 카를로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리리안의 얼굴이 금세 무표정해졌다.
“어떻게 이런 말들을 다 기억하나 싶겠지. 지독한 여자다 싶겠지.”
“아니야. 절대로.”
“그런데, 칼.”
오랜만에 들린 이름은 차라리 불리지 않는 것보다 못했다.
“기억하는 게 아냐……. 정말로, 그런 게 아니야. 잊을 만하면 되풀이될 뿐이야. 꿈에서, 머리에서…….”
카를로이의 얼굴이 틈 하나 없이 절망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난 네 그 얼굴이 짜증 나. 네가 죽기를 바란다고 하면, 정말로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구는 네 얼굴이.”
“난.”
“그래, 넌 내가 바라면 언제든 죽겠지.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리겠지. 그렇게 쉬운 길을 택하겠지. 나한테는 그게 너무 어려운데……. 내 목숨 하나 버리는 것도. 너는 그마저도 쉬운 게.”
독하게 말을 하던 리리안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니까 죽지 마. 너 편하자고.”
그런 게 아니었다. 카를로이는 그저 자신이 눈에 보이는 게 리리안을 지나치게 괴롭힐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했다. 쉽게 죽는 게 아닌, 어렵게 죽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하고. 하찮은 제 목숨 끊어지는 걸 리리안이 볼 필요도 없으니…… 그녀가 볼 수 없는 곳에서.
그 생각을 읽었는지 리리안이 가만히 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손이 젖어 드는 것을 보고서야 카를로이는 자신이 또 역겹게 물을 빼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괴로운 게 싫다면, 칼…….”
정말 부탁이라도 하는 듯 부드러운 어조였다.
“나를 죽여 주면 돼. 알잖아.”
카를로이의 심장이 무겁게 떨어졌다.
“나는 진심으로…… 너에게 고마워할 거야. 널 괴롭히려고 하는 말도 아니야. 정말로……. 이 말만은 너를 싫어해서 하는 게 아니야. 내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이젠 진짜 너 말곤 없잖아.”
리리안이 그를 유일하게 싫어하지 않을 때가 스스로를 죽여 달라고 부탁할 때라는 게 절망적이었다. 그게 진심이라는 것이 너무나 잘 느껴져서 카를로이는 결국 리리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빌었다. 미안하다고, 그것만큼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고.
그 모든 말들을 들으며 리리안은 버릇처럼 그의 머리칼을 살짝 쓸었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아무렇게나.
카를로이는 그에게 냉정하다가, 다정하다가 시시각각 변하는 리리안의 태도가 너무 무서웠다. 그녀가 그렇게 망가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어이없을 것 같아. 알아서 죽으면 될 텐데 구태여 네 손 빌려서 죽겠다는 게.”
힘없는 목소리에 자신이 답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무서웠다.
“내가 엄마 말을 그렇게 잘 들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착한 딸이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지. 엄마 말은 몇 번이고 안 들었었는데. 그런데 또. 그런데.”
리리안의 목소리가 점점 잠겼다.
“그런데 엄마 마지막 부탁을 내 손으로 무시하는 건 또 너무 어려워서……. 그렇다고 사는 건 또 너무 힘들어서, 비겁하게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거야……. 널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비겁하다는 말도, 괴롭힌다는 말도 카를로이면 모를까, 리리안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왜 자신은 이 여자가 저런 말까지 하게 만드는 걸까. 자괴감은 아무리 느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모르겠어. 가끔은 네가 너무 밉고 싫어서 널 괴롭히고 싶은데. 널 선택한 내가 죽이고 싶어져서 널 그만큼 괴롭게 하고 싶은데……. 그 생각조차도 너무 괴로워.”
넋두리같이 늘어놓던 말이 뚝 끊겼다. 고개를 들자 완전히 지친 듯한 얼굴이 보였다. 정말로 힘이 없는지 카를로이가 안아 드는 것에도 리리안은 별다른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을 감싸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지금 당장은 너도 힘들겠지. 그래도 내일은. 어쩌면 모레는.”
뒤의 말을 듣기가 무서웠다.
“날 죽여 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리리안의 얼굴이 그의 목에 닿았다. 모든 할 말을 끝냈다는 듯이 그렇게 쓰러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다들 리리안은 괜찮아지고 있다는데, 자신에게 약을 먹으라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미쳐 가는 것도, 점점 아파하는 것도 다 리리안 같은데.
황후를 안고 들어오는 카를로이의 표정을 본 알렉시스는 당장 뭐라 한마디 할 것 같이 굴다가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알렉시스가 착잡한 표정으로 사라지자 카를로이는 리리안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침대 위에는 닳도록 읽었을 것이 뻔한 드니스의 편지가 있었다. 그는 그것은 차마 손대지도 못했다.
핏기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했다. 스스로에게.
내일은, 모레는 가능할 거라고? 리리안을 죽이는 게? 영원히 할 수 없을 일이었다.
창밖의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변할 때까지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리리안만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얼굴을. 눈 감으면 사라질까 봐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초조하고 무서웠다.
정원에서 리리안이 했던 모든 말들이 그를 괴롭혔다. 제 목숨을 끊는 게 가장 쉬운 선택이라서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가 리리안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정말로 그따위 것 말고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음…….”
옅은 신음이 들리더니 리리안의 눈이 살짝 떠졌다. 언제나 그랬다.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어도 그녀는 오랫동안 잠들지는 못했다. 꿈에서 언제나 카를로이가 했던 것들이 반복된다고 말한 것이 떠오르자 괴로워졌다.
깬 것도 봤으니 이제 리리안의 눈앞에서 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잖아.”
그러다가도 자신을 부르는 듯한 작은 목소리에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분명 자신을 부른 것 같았는데 리리안의 고개는 창밖을 향해 있었다.
또다. 저렇게 아무것도 없는 걸 바라보는 게. 하염없이 저 창밖을 보면서도, 저기로 몸을 던지지 않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 안타깝다고 여겨야 하는지도 이젠 알 수가 없었다.
“엄마를 보내 줘야 할 것 같아.”
한참 뒤에 나온 의외로 목소리는 잔잔했다. 드니스는 여전히 수도로 올라왔던 그 관 안에 있었다.
“계속 이런 곳에 잡아 두기도 불쌍하고…… 미안해서. 그런 꼴로…….”
드니스에게 하는 말일 테지만, 카를로이는 괜히 가슴이 저렸다. 자신이야말로 리리안을 이곳에 잡아 두고 있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알았어. 준비할게.”
카를로이가 답을 주자 리리안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은 다 했다는 듯이.
<네 얼굴 보는 거 고통이야.>
힘겹게 뱉던 말을 기억하고 카를로이는 걸음을 옮겼다. 영원히 창밖만 볼 것 같던 리리안의 고개는 카를로이가 나가고 나서야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니, 제자리보다 조금 더. 카를로이가 나갔던 문에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뭘 어쩌고 싶은 건지 리리안 스스로도 잘 몰랐다. 먼저 떠난 드니스에 대한 반발심으로 당장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고 싶을 때도 있었고, 드니스를 생각하며 참고 싶을 때도 있었다.
카를로이를 죽여 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혼자 남았다는 사실이 사무쳐서 옆에 있으라고 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를 보면 분노가 문득 치밀어 할 수 있는 가장 독한 말을 내뱉고 싶다가도. 거지 같은 이성이 잠시 올라오면, 그래, 아주 그만의 잘못은 아니지, 싶기도 했다. 카를로이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었겠지 싶었다. 나쁜 놈은 공작이라, 그렇게 생각할 때도 있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변하는 생각들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고 아팠다.
하지만 결국은. 그래서 뭐? 칼의 잘못만은 아니면 뭐. 난 뭐 죽을 잘못을 했던가. 드니스를 잃어야 하는 대역죄라도 지었나. 어쩌라고. 내가 알 바인가.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피곤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다. 꿈에서는 드니스라도 나오는데, 오래 꾸지도 못했다.
아니, 만에 하나 운이라도 좋지 못하면 드니스 대신 공작이, 그 개새끼가 나왔다. 그런 꿈에서 리리안은 공작을 죽이기 위해 하염없이 무언가를 휘둘렀다. 칼이든, 손이든, 무엇이든. 그래 봤자 끔찍하기만 했지만.
온 힘을 다해 몇 번이고 공작을 찔러도 공작은 죽지 않았다. 피가 넘쳐서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도 공작은 계속 웃고 있었다. 되는 일이라고는, 자신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리리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