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14화 (15/22)

14. 황제, 그리고 황후(2)

아셀의 예상은 적중했다. 마르키아 영지에 발을 들이자마자 들랑시로 오라는 전달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루이자 루탱이 마차를 지원해 주어 들랑시까지는 편하게 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마법학자시라고요?”

같이 탄 루탱의 부하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본느에게 물었다. 어디서 안경까지 구해서 쓰고 수염까지 붙인 이본느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델루아가 베르니 마법을 썼다는 게 사실이었군요. 그런데 뭘로 알 수 있나요?”

“……마법학자에게는 보통 마법 사용 여부 정도만을 판단할 수 있는 약한 마법력이 있지요.”

“오. 마법학자는 처음 봐서요.”

“그럴 만도 하지요. 마법학자는 수도 학회에 밀집되어 있으니까요.”

“마르키아 옆에 그렇게 베르니 마법이 쓰인 땅이 있었다니. 소름 돋지 뭐예요. 베르니인들은 악마의 마법을 쓴다는데.”

“자세한 것은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어둠의 숲에는 높은 확률로 베르니의 마법이 강도 높게 쓰였을 겁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이본느를 아셀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배짱 한번 대단했다. 전날까지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한 사람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을 저렇게 만든 집념의 근원이 델루아에 있겠지.

“도착했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이본느는 루이자 루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보다도 작은 여자였다. 알렉시스 뒤냐 같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평범했다.

“반갑습니다. 조사하러 오셨다고요?”

갈색 머리의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이본느는 얼떨결에 손을 잡아 악수했다.

“……네. 모리스 서로입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그나저나, 아셀 경. 난 당신이 여기 마르키아까지 올 거란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쉴 새 없이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집중하지 못하던 아셀은 루이자의 부름에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이본느가 눈치를 주자 아셀은 루이자를 보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마르키아에는 언제나 전갈이 늦게 도착하니까요. 그 어떤 전갈보다도 내가 제일 빠르죠.”

루이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기본 계획 정도야 간단히라도 전달받는 방식이 있습니다. 수도에서는 뒤냐 공과 클라이드 앙센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던데? 전술도 다 그렇게 짜 둔 상태고.”

“기본적인 계획은 변한 거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요? 그럼 수도군은 적어도 나흘 전에 이미 수도에서 출발했겠군요. 그때 짠 계획에 따르면.”

이런, 나흘 전이라니. 아셀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카를로이는 자신이 보낸 편지를 읽지 못할 것이었다.

“뒤냐는 내려오지 않을 거예요.”

“뭐요?”

무뚝뚝하던 여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가 클라이드 앙센과 내려오기로 했어요.”

“아니, 왜요?”

“나야 그런 것까지는 모르죠. 아무튼 나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전하면서 마법 조사까지 하라고 했어요.”

뒤냐가 내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아쉬워하는 것 같은 루이자가 입맛을 다셨다.

“정확히 어디요?”

“어둠의 숲이랍니다, 백작님.”

마차를 타고 온 부관이 속삭였다.

“그 개 같은 어둠의 숲!”

루이자가 성질을 냈다.

“그 미친 숲만 아니었어도 훨씬 쉬워지는데! 델루아 군대조차도 안 들어가더니, 역시 마법이 걸려 있군요? 난 그냥 출입 금지 마법인 줄 알았는데.”

이본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숲을 놔두나? 미친 새끼. 노망난 새끼.”

말이 좀 험한 편인 듯했다.

“근데 델루아 군도 못 들어가는 곳을 어떻게 들어가서 조사를 하십니까?”

이본느는 준비해 둔 작은 병을 책상 위로 올렸다. 이런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 정도는 해야 믿을 것 같았다.

“설마 사람 피입니까?”

“네.”

아니었다. 식당에서 얻은 동물 피였다.

“혈족 마법이라 델루아의 피가 필요해서 수도에서 황후의 피를 가져왔어요.”

“아, 그 유명한 황후! 지금은 감옥에 있다지요? 델루아가 딸을 빼내려고 아주 용을 쓴다던데.”

무슨 헛소문이 저렇게 말도 안 되게 나는지. 이본느는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루이자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듯했다. 그걸 보니 아셀이 마법 지식이 많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델루아 숲에서 이본느가 피 얘기를 할 때 아셀은 믿지 않았었는데.

“그럼 그것만 있으면 나도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본느가 빠르게 물었다. 루이자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그 미친놈이 거기에 뭘 꿍쳐 두길래 그 지랄을 하는지 궁금해서요.”

“……아.”

“왜요, 안 됩니까?”

“아닙니다, 됩니다. 백작님께서 원하시면 동행하셔도 괜찮습니다.”

루이자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다만?”

“혹시나 위험한 마법이 있을 경우에 변경백의 안전은 제가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동의하시면 같이 가셔도 됩니다.”

“마법학자라면서요?”

“네. 마법사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본느의 단호한 태도에 루이자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끙. 그럼 안 되는데. 아시다시피 내 역할이 역할이라 그런 위험 부담은 감수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전쟁이 마무리된 후에 한번 가 보세요. 그때는 델루아 영지가 정리되고 난 뒤일 테니까요.”

루이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아셀은 숨도 못 쉬고 이본느의 거짓말을 듣고 있었다.

“그럼 언제 가 보시겠습니까?”

“지금 당장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 부관을 데리고 가세요.”

“네?”

“아셀 경과 서로 씨가 먼저 들어가 본 후에 이상이 없으면 부관을 통해서 제게 알려 주십시오.”

“아. 왜……?”

“그야 그대로 놔두기엔 아까우니까요. 델루아 군도 들어가지 않는 곳을 통해 우리 군사를 들여보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군사를 들이기엔 피가 모자라 보이긴 합니다만.”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이본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을 흘끗 바라보자 아셀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혹시 한 명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단 뜻일까.

루이자가 호쾌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웅까지 해 줄 생각인 듯했다. 전혀 반갑지 않은 친절이었다.

“마부는…….”

“필요 없어요. 제가 할게요.”

아셀이 재빠르게 마부석에 올라탔다.

“내가 하는 게 편해요.”

이본느와 루이자의 부관이 안에 타자마자 아셀은 말을 움직였다. 미친 속도로 달려 나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루이자가 멍하니 바라봤다.

“뭐가 저렇게 급해?”

의심스럽게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던 루이자에게 한 군인이 달려왔다.

“백작님!”

“왜?”

“황제의 전갈이 곧 들랑시에 도착한다고 성문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뭐? 무슨 전갈? 저 사람들이 전갈이었잖아.”

“그건 모르겠는데요? 그냥 곧 도착한다고만…….”

“변동 사항이 있나? 이상한데…….”

인상을 찡그리며 한참 생각하던 루이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혹시 모르니까 사람 몇 데리고 저 사람들 따라붙어.”

“네? 몇 명이나요?”

“몇 명이 가 봤자 어차피 저 마하인한테는 안 되니까, 적당히 데리고 가. 내가 갈 순 없잖아. 수상한 짓 할지도 모르니까 일단 가 보라는 거야.”

수상한 짓을 할 거라는 루이자의 추측은 과연 정확해서 아셀은 루이자의 시야를 어느 정도 벗어나자 마차를 멈추고 말을 풀었다.

“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부관이 갑자기 멈춘 마차에서 내려 의아함을 표시했다. 멀쩡한 마차에서 말을 왜 분리시키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당연하게도.

아셀은 태연한 얼굴로 말 위에 올라타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 이상해서요.”

“뭐가요? 마차는 이상 없었는데?”

“이쪽부터 베르니 마법이 있나? 말도 좀 이상하고 느낌이 그런데요.”

“베르니 마법이라고요?”

루이자의 부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셀을 쳐다보았다.

“서로 씨, 와서 봐 보세요. 어둠의 숲에 가까워져서 그런가 아무래도 말도 좀 이상하네요.”

아셀의 부름에 이본느는 마차에서 내려 아셀에게 다가갔다. 긴장감에 심장이 뛰었다. 아셀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를 챈 탓이었다.

“음…….”

애매한 표정으로 말 가까이에 이본느가 다가간 순간 아셀이 슬쩍 손을 내밀었다.

“어?”

루이자의 부관이 의문사를 내뱉는 것과 동시에 아셀이 이본느를 말 위로 끌어 올렸다.

“어!”

부관의 의문사가 감탄사로 바뀌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이본느를 앞에 태우자마자 아셀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저기요!”

부관의 애처로운 외침을 무시하고 말은 달려 나갔다.

“이래도 돼?”

이본느가 말 위에서 소리쳤다.

“폐하의 전갈이 언제 도착할지 몰라요. 그리고 마차는 너무 느려. 길이나 알려 줘요.”

“저러다 사람들 쫓아오면?”

“어차피 숲으로 들어가면 마법 때문에 쫓아오지도 못할 텐데 뭐.”

“일단 쭉 가. 시장 쪽으로.”

아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말이 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 * *

새벽에 출발한다던 카를로이는 말을 바꿔서 이른 저녁에 출발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수가 많으면 빨리 가지 못한다며 자신과 함께 가는 1군의 기병 수를 제일 건강한 군인 100명 남짓으로 확 줄였다.

“……그건 군대가 아니라 호위대 수준이지 않습니까?”

뒤냐가 물었다.

“엄밀히 말하면 1군은 아니긴 하지. 하지만 남의 땅도 아니고 내 땅 지나가는 건데 많이 필요할 것도 없잖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 카를로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걸 떠나서……. 그렇게 되면 클라이드 앙센에게 너무 큰 위치를 준 모양새라…….”

“어차피 마하군이 섞여 있으니 클라이드 앙센도 잘할 수 있어. 게다가 바로 뒤에서 따라올 테니까 상관없어.”

저 혼자 상관없는 거겠지. 생각은 속으로만 담아 두고 알렉시스 뒤냐는 의욕 없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카를로이와 같이 간 군인들은 지옥을 경험하게 되었다. 황제는 마르키아로 한시라도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굴었다. 식사도 하루에 한 번 했으며, 잠은 거의 자지 않았다. 군인들은 강제적으로 황제의 시간을 따라야 했다.

달이 뜨고도 한참 뒤에야 간신히 행군을 멈춘 군인들이 한숨을 돌렸다. 수도를 떠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미 반 넘게 와 있었다.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몸을 함부로 하면 언젠간 크게 다치는 법입니다.”

전쟁터까지 함께 끌려온 치료사가 지친 말투로 카를로이에게 말했다. 꽤 낙천적인 성격이자 유능한 치료사는 요 몇 달간 카를로이를 진료하다 그만 우중충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과로가 사람 하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이 정도로는 안 쓰러져.”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보통 갈 때 아주 확 가 버립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조금 건방지게 말했는데도 황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을 보니 딴생각에 빠진 듯했다.

수도를 떠난 뒤로 카를로이는 악몽을 꾸는 횟수가 줄었다. 그래서 그나마 두세 시간 정도는 잘 수 있었다. 크나큰 발전이었다. 아마 목표가, 잡을 것이 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치료사는 홀로 추측했다.

“부정은 사람을 더 괴롭게 만들 뿐입니다.”

치료사가 조용히 건넨 말을 듣고서야 카를로이는 시선을 돌렸다.

“버리는 것도 인정한 사람만 가능한 일입니다. 있다고 인정도 못 해 본 것을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군.”

“델루아 공작의 딸에게 마음이 있으시다면, 그걸 인정하셔도 큰일이 나지 않는단 뜻입니다. 고작 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나라가 무너지겠습니까, 사람이 죽겠습니까?”

카를로이가 말없이 노려보자 치료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도 눈치라는 것이 있어서.”

황후와 가까워질수록 치료사를 부르는 일이 늘었는데 오며 가며 모르기도 힘들었다. 뒤냐와 고르텐이 주고받는 눈빛, 한숨, 말을 다 보면서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뒤냐 공과 시종장과는 다르게 저는 이쪽 분야에 아주 무지하지는 않기도 하고 말입니다.”

“고리타분한 말을 하는군. 그래서, 사랑해서 안 될 사람은 없다, 뭐 이런 말이라도 하고 싶나?”

“전혀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들은 분명 있습니다. 그릇된 사랑으로 나라가 망하고 사람이 죽기도 하지요. 그저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단 말이었습니다.”

카를로이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황후를 잡으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모르겠다. 카를로이 스스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거짓말을 했냐고 화를 내야 할까? 반역자의 딸이라고 죽여야 할까. 아니면 가둬 둬야 할까.

“그거 보세요. 답이 안 나오잖아요.”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있었다. 아무리 이본느가 싫어도, 이본느가 죽기를 바라도, 자신의 옆이 아닌 곳에 있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것. 이본느의 부재가 자신을 미쳐 가게 한다는 것.

“……다들 카를로스 폐하가 사랑 때문에 미치신 거라고 이야기하더군요.”

조부 이야기가 나오자 카를로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권태로워졌다. 지루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틀린 말도 아니지.”

“그런가요? 저는 카를로스 님께서 그걸 부정해서 더 괴로워하셨다고 생각하는데.”

“부정이라니?”

“그분께서는 베르니의 공주가 마법을 썼다고 생각하셨으니까요. 그 공주를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고 그냥 마법에 당한 것뿐이라고 하셨지요. 처음 들으십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일이라. 공주의 마법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단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카를로이는 초상화에 그려져 있던 공주의 목걸이를 떠올렸다.

“다들 진지하게 듣진 않았지요. 워낙 상태가 좋지 않으시기도 했고……. 사람 감정까지 조종하는 마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베르니라도 말이지요.”

이러나저러나 미쳤던 것은 맞지 않는가, 하고 카를로이는 생각했다. 하긴, 지금 자신이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하지만요. 카를로스 님의 마지막을 지킬 때 그분께서 말씀하셨어요. 그 공주를 정말 사랑했고 미안하다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을 끝낸 모습이 얼마나 편해 보이시던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카를로이의 인상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말은 누구한테도 들은 적이 없는데.”

“뭐 좋은 말이라고 다들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분의 광증과 마지막에 대해서는 모두가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했지요.”

“그래서, 자네도 내가 조부와 비슷하니 어쩌니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치료사가 눈을 껌뻑거렸다.

“글쎄요. 전 그런 생각을 딱히 해 본 적이 없어서. 별로 닮지 않으셨습니다. 폐하께서도 그분을 보셨다면 그렇게 생각하셨을걸요. 아휴, 그분에 비하면 폐하는 천사시지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는 치료사의 말을 듣고 카를로이는 애매한 얼굴이 되었다.

“굳이 고르자면……. 폐하는 아델라이드 님을 더 닮으셨습니다. 성격이 아주 비슷하세요.”

치료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 폐하 모습은 카를로스 님과 비슷합니다. 걱정이 될 정도지요. 그러니 그분처럼 자기 부정에 미치기 싫으시다면 본인을 그만 괴롭히세요.”

조금의 완곡도 없이 들어오는 직언에 카를로이는 대꾸할 말도 잃고 치료사를 쳐다봤다.

“황후님을 만나면 진솔한 대화를 해 보세요. 답이 나오겠지요. 사랑할 만한 사람인지, 그래선 안 될 사람인지.”

참으로 지루한 충고였다.

“……쓸데없는 말이 길어. 치료사가 아니라 선생을 해도 될 정도야.”

“모르셨습니까? 저 예전엔 교수였습니다.”

끝까지 할 말이 없게 만든 치료사가 혼자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편하게 마음을 먹고 생각을 정리한 후 눈을 감아 보시지요.”

어쩐지 애 취급하는 말투로 들렸다. 카를로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다시 피로 가득한 얼굴이 된 치료사가 자리를 떠났다. 카를로이는 벽에 반쯤 기대 누운 채로 치료사의 말을 생각했다.

“헛소리.”

내가 무슨 자기 부정을 한다고? 이본느가 원망스러워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생각도 동시에 드는 것뿐이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러니 실상 자신을 죽이는 것은 자기 부정보단 충돌에 가까웠다.

그리고 마르키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본느 델루아.”

카를로이가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함께 보냈던 밤 이후에 처음으로 담아 보는 이름이었다. 이상했다. 그 어느 글자도 그 여자의 이름 같지 않아서.

“이본느 델루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자신이 부르는 이름에 놀라서 잘게 떨던 여자가 기억 속에 맴돌았다.

“……이본느.”

아무리 불러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았다. 정리는 무슨, 복잡해지기만 했다. 복잡해지기만 했다면 다행이겠지만, 이본느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반사 작용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 이름은 이제 부르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주는 것 같았다. 이본느의 무수한 모습들이 다시 그를 할퀴고 지나갔다. 머리가 울렸다.

카를로이는 새어 나가는 신음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약을 찾았다.

“읏.”

약을 마시는 입 사이로 결국 신음이 흘러나왔다. 과복용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은 약을 미친 듯이 들이마시고 나서야 카를로이는 다시 숨을 가다듬었다. 몸이 나른해졌다.

“……아.”

온몸이 이완되면서 눈앞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머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상하게 이본느의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해져서 목이 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질척한 갈증에 괴로워져서 카를로이는 결국 눈을 감았다. 잠결에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 * *

어둠의 숲은 델루아와 마르키아의 경계부터 시작해 델루아 영지 상당 부분에 걸쳐져 있는 꽤 넓은 숲이었다. 숲에는 정말로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없었다. 꼭 델루아 공작을 숲으로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아 괜히 기분이 불쾌해지기만 했다.

들랑시에 연결된 숲의 입구에 있는 동굴을 봤을 때 이본느는 아주 잠깐 카를로이를 떠올렸다.

“왜요? 저 동굴에 뭐 있어요?”

“아니.”

그때 칼을 도와준 것을 후회해야 하는 걸까. 이본느는 새삼스레 생각했다. 감옥에 갇힌 후로 수백 번, 수만 번을 후회했다. 칼을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런 후회가 그렇게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카를로이가 아니었으면 드니스는 금방 죽었을걸?’ 하는 생각이 계속 끼어들었기 때문에.

드니스가 일찍 죽고 공작을 만나지 않게 되는 것, 드니스가 죽지 않고 공작을 만나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았을지 고민해 봤자 뻔했다. 이본느의 세상에는 처음부터 드니스만이 있었기에, 그녀가 없다는 것은 상상에서도 고민이 되지 못했다.

미련한 인간. 이본느는 스스로에게 욕을 했다. 솔직히 아직도 카를로이가 직접 내려올 거란 말은 믿지 않았다. 퍽도 그러겠어.

멀리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이본느와 아셀은 루이자 루탱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간발의 차였다는 것을 깨닫자 괜히 소름이 돋아서 이본느는 팔을 쓰다듬었다.

“그게 뭐예요?”

옷 아래로 드러난 이본느의 팔을 보고 아셀이 물었다.

“뭐가?”

“팔에.”

아셀이 이본느의 소맷자락을 잡고 팔을 들어 올렸다.

“아…….”

치료사 말런이 죽고 감옥에 갇힌 후 오랫동안 치료 마법을 받지 못했더니 흉이 올라와 있었다.

“이거 누구한테 맞은 것 같은데. 나도 이런 거 엄청 많아서.”

이본느가 팔을 뿌리치고 다시 옷을 내렸다.

“그런 거 아니야. 아프지도 않고 이제. 흉만 남은 거야.”

“공작이 그런 거죠?”

“……아니야.”

“와, 마법 한번 지독하네.”

이본느도 동감하는 바이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이 숲 마법도 그 마법사가 건 거죠?”

대답이 이제 의미 없는 수준이라 이본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이 넓어.”

아셀이 툴툴거렸다. 말이 너무 지쳐서 아셀과 이본느는 잠시 걷고 있었다. 백작의 말치고는 너무 골골댔다.

벌써 수도를 떠난 지 5일이 지났다.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렸는데 마석까지 다 떨어져서 숲을 지나는 것도 더 지연됐다. 반나절을 꼬박 갔는데도 아직 숲의 반도 오지 못했다.

“빨리 가야 해.”

이본느는 초조해졌다. 너무 오래 걸려서 드니스의 상태가 걱정됐다. 심지어 지금 델루아는 전시 상태인데…….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요?”

“반도 넘게 남았어.”

“어휴.”

빨리 가야 한다는 말과 다르게 이본느의 걸음은 계속 느려졌다. 몸이 한계치에 다다른 것 같았다. 아셀은 그게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저 몸으로 지난 5일간의 강행군을 견딘 건 정신력이지 체력이 아니니까.

“아.”

이본느가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아셀이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이런 몸으로 가서 뭘 할 수는 있어요? 공작이 오히려 죽이려고 드는 거 아니야?”

아셀의 말이 뭔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슴 통증은 이제 익숙할 정도였다. 심호흡하던 이본느가 한 번 크게 숨을 내쉬고 손을 들었다.

“아, 하지 말라니까요.”

이본느가 자기 뺨을 때리려는 걸 눈치챈 아셀이 다시 손을 내렸다.

“그런 식으로 해 봤자 나중에 훅 가요.”

“상관없다니까.”

“진짜 아주 지독한 약점을 잡혔나 보네. 그 베르니 마법사가 지금 델루아 공작이랑 같이 있기는 해요?”

“응, 그럴걸.”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이본느는 잠시 뒤에 경악에 찬 눈으로 아셀을 쳐다봤다.

“왜요? 뭐가?”

“말이 나오는데…….”

“네?”

“……엄마.”

“엄마 뭐요?”

심장이 너무 쿵쿵거려서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엄마가, 탑에 갇혀 있어. 몸이 안 좋아.”

말을 끝내고 이본느는 충격에 빠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셀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법이 없어졌어.”

“이렇게 막 없어지는 거였어요?”

“아닌데……. 마법사나 공작이 죽기 전까지는 안 풀리는데.”

정말 풀렸다. 모든 말이 술술 나왔다.

“말도 안 돼.”

기쁨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도대체 델루아 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이 시기에 마법이 풀린 건지 걱정만 됐다. 그리고 허탈하기만 했다. 이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풀리는 마법이 내 삶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아셀은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이본느를 일으켜 말에 태웠다.

“말이 쓰러져도 타고 가야 해요. 마법이 풀린 거면 여기 숲의 마법도 풀렸을 거예요. 그럼 마르키아 군사가 여기로 들어올 거고요.”

창백해진 이본느가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 * *

수도와 푸르투 궁전은 알렉시스 뒤냐의 책임 아래 모든 것이 탈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전쟁에 대비하느라 달라진 모든 것들을 가볍게 관리했다. 알렉시스가 뛰어난 장군일 뿐만 아니라 행정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새롭게 깨달았다.

알렉시스 혼자서만 푸르투를 책임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직 대외적으로는 황비인 키아나가 함께했다.

“정말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해.”

찻잔을 든 키아나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의도치 않게 황비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알렉시스는 이 여자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황비가 아니라 황후였어도 됐을 뻔했다.

“그를 지키려고 황비가 되었는데 별반 달라진 게 없어요.”

정작 본인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전쟁은 곧 있으면 끝납니다. 질 확률은 희박합니다. 시간문제지요.”

“크로이센의 전쟁이 끝나는 거지, 클라이드의 전쟁이 끝나는 건 아니에요.”

후작가 출신의 우아한 여자는 그새 살이 좀 빠진 듯했다.

“마하에서 원군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요구했으니, 그를 계속 전쟁에 내보내겠죠.”

“마하도 한동안은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마하로 가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크로이센에선 함께하실 수도 없을 텐데.”

“그러니까요. 내가 왜 마하까지 가야 하냔 말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고작 사랑 좀 하자고 나라를 뜰 필요가 없는데.”

“아직 황비십니다.”

말조심하라고 돌려 말하는 공작을 보고 키아나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황제께서 왜 공에게 권한을 위임했는지 난 알겠어요.”

“그러십니까?”

“그분은 그 자리에 더는 관심이 없으니까요. 일이 끝나고 죽지나 않으시면 다행이지. 그 죽지 못해 산다는 지루한 얼굴이란! 솔직히 말하자면 난 폐하를 뵐 때마다 그분이 왜 당장이라도 죽지 않으시는지 그 고민을 했다니까요.”

“전하께서도 참…….”

“얼굴만 봐서는 이미 강에라도 투신했을 것 같은데 꾸역꾸역 살아 계시니까, 궁금할 만도 하지 않아요? 이젠 왜 그랬는지 알겠지만.”

뒤냐 또한 너무 잘 알기에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분이시니 당연히 그 자리도 공에게 떠넘기고 싶어 하겠죠.”

“받을 마음 없습니다.”

“모르는 일이죠. 공이 이 나라를 받게 된다면 법을 좀 바꿔 주면 좋겠군요. 난 내 나라를 두고 다른 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안타깝지만 법이 생긴다고 인식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느리긴 하겠지요. 하지만 인식이 바뀌길 영원히 기다리는 것보단 나을걸요. 난 제도가 인식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이뤄지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해 알렉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잠시간의 침묵은 응접실로 들어온 시종 때문에 깨졌다.

“황제 폐하 앞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근데 계시질 않으니……. 전갈 말로는 아셀 경이 보낸 것이라는데요?”

느닷없이 나온 도망자의 이름에 네 개의 눈이 커졌다. 알렉시스 뒤냐는 시종에게서 편지를 뺏어 들었다. 편지 봉투 안에는 아셀의 갈색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무슨 내용인가요?”

점점 심각해지는 알렉시스의 얼굴을 보고 키아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알렉시스는 대답 없이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지를 빠르게 훑어 내리던 키아나는 경악 어린 얼굴로 변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니, 어떻게 이런…….”

키아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 이게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글쎄요. 베르니가 그런 정신 조종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곧이곧대로 믿기는 좀 그렇습니다. 너무 허황한 이야기예요. 하지만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너무 잔인한 일이죠. 세상에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자기 친딸을 이렇게 모친을 빌미로 협박을 해서…….”

키아나는 그제야 생기라곤 하나도 없던 황후의 모습이 이해가 됐다. 편지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다른 시종이 황급한 발걸음으로 달려 들어왔다.

“공작님! 황후의 시녀장이 갑자기 모든 것을 자백하겠다고 난동을 피우고 있어서…….”

“뭐라고?”

뭘 물어도 부정하고 묵묵부답으로 대답하던 시녀장 메리앤이었다. 바뀐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아 알렉시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말을 전하는 시종조차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마법에 걸려 있어서 말을 못 했다고 그러더니 이제 뭐 마법이 풀렸답니다. 아무래도 오래 가둬 놓아서 미친 것이 아닐까요?”

알렉시스와 키아나가 다시 눈빛을 교환했다.

“내가 직접 가지. 재조사가 필요하겠어.”

푸르투를, 그리고 카를로이를 흔들어 놓을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알렉시스 뒤냐는 직감했다.

* * *

미친 강행군으로 카를로이가 마르키아에 도착했을 즈음엔 루이자 루탱의 놀란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아니, 정말 폐하셨습니까?”

“무슨? 내가 뒤냐 대신 내려올 걸 이미 알고 있었나?”

아셀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아셀과 그 동행인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걸 깨달았으니 뒤냐가 아닌 카를로이가 내려올 거란 말도 거짓일 줄 알았다. 루이자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자마자 카를로이는 알았다.

“아셀이 왔었군.”

“간발의 차였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황후가 마하인과 감옥에서 도망갔다는 전갈이 도착해서. 그 사람이 황후일 줄이야…….”

“아셀이 온 걸 이상하게 생각했어야지.”

“아니, 5일 사이에 수도에서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셀이 내가 내려올 거라 했다고?”

“네.”

카를로이는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아셀, 그런 식으로는 참 눈치 한번 빨랐다.

“황후는?”

“마법학자로 남장을 하고 왔었습니다. 어둠의 숲을 조사하겠다고 갔습니다만…….”

어둠의 숲은 델루아의 혈육이 아니라면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카를로이는 욕설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람을 좀 보내 두긴 했는데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다니까 영 방법이 없지 뭡니까.”

카를로이가 피곤한 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대체 이본느 델루아는 어떻게 그 길을 알았을까? 카를로이도 루가 알려 줘서야 알았던 길을. 루야 그곳에 살았고, 그곳에 대해 빠삭했던 사람이니 이해가 가지만 델루아의 딸이 그런 길을 알 이유는 뭐란 말인가.

또다시 불길한 감각이 그를 엄습했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 그 마하인이 황후의 도망을 돕게 된 겁니까? 치정입니까, 설마?”

민감한 말을 돌려 말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루이자 루탱을 보고서야 카를로이는 마르키아로 왔음을 실감했다. 변경백은 여전했다.

“아니.”

“그럼요? 델루아 쪽에 붙은 겁니까?”

“아니.”

“그러면 뭡니까, 대체?”

“나도 모르네.”

“네?”

루이자 루탱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정말로, 아셀의 속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랬는지. 만나서 묻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 시간이 없어. 바로 총공격에 들어갈 거니까.”

“네? 이틀 후로 계획되어 있었잖습니까.”

“뭐 하러 기다리고 있지? 델루아 함락이 코앞인데.”

“아니……. 폐하께서도 들어가실 겁니까? 설마 선두로요?”

“내가 이곳까지 놀러온 건 아니니까.”

14년 만에 본 황제는 황자 시절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생김새가. 또한 그때와는 다르게 얼굴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어딘가 조급해 보이는 모습에서는 깨지기 직전의 얇은 유리 같은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약간 미친 것 같은데? 비슷한 얼굴을 많이 보아 왔던 루이자 루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하긴 눈엣가시였던 정적이 반란까지 일으켰다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하지만 불필요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어릴 때와 똑같았다. 죽다 살아난 것 같은 몰골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신을 수도로 데려다 놓으라 명령하던 모습과 똑같았다.

“……성격은 여전하시군요.”

“변경백이 할 말은 아니지.”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카를로이는 지도가 펼쳐진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틀 후면 클라이드 앙센이 2군을 데리고 도착할 거야. 나흘 후면 전군이 다 도착해. 수로만 따지면 2군만으로도 사실 델루아 군보다 많지.”

“사실 마하에게 원군을 요청하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베르니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걔들은 델루아 국경에서 계속 깔짝거리고 있던데요. 우리가 들어가면 그때 쳐들어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근데 델루아 군대가 좀 이상합니다. 마르키아 경계에서 군사를 좀 물렸어요.”

“더 몰아도 부족할 판에 물렸다고?”

“천 정도……. 노망이 든 게 아닐까요, 델루아? 솔직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던데. 제정신이라면 저런 전력으로 반란을 일으켰겠습니까.”

델루아가 반란을 일으킬 때만 해도 미친놈 같았는데, 이젠 반란이 그가 한 가장 합리적인 짓이 되었다. 그 정도로 그 뒤의 행보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지 몇 개를 얻나 했더니 그것도 금방 탈환당하고, 그렇다고 더 공격에 나서는 것도 아니고.

“역시 최대한 빨리 델루아로 들어가야겠어. 나와 변경백이 1군으로 정면 공격하면, 이틀 내로 클라이드 앙센이 합류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를…….”

루이자 루탱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부관 하나가 미친 듯이 소리를 치며 갑자기 들어왔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델루아에 변동 사항이 있나?”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뭔데?”

“어둠의 숲에 보냈던 군인 중 하나가 지금 왔는데요.”

“그런데?”

어둠의 숲이란 이야기가 나오자 카를로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거기 마법이 지금 풀렸답니다! 결계가 없어졌대요. 그냥 막 들어가진다고 그러는데요!”

“뭐야?”

“어떻게, 마하인과 황후를 쫓을까요?”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폐하, 황후와 아셀을 잡는 건 둘째 치고 어둠의 숲이 열렸다면 위험합니다. 우리보다는 델루아 군이 더 잘 알 테니까요. 군대를 거기를 통해 보낼 생각인 걸까요?”

“아무래도 자네와 내가 갈라져야 할 것 같은데. 내가 길을 조금이라도 아니까 반을 이끌고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지.”

“그럼 제가 나머지 군대를 데리고 정면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루이자 루탱이 다른 장군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다들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금방 침착해졌다. 반면 카를로이의 심장은 계속 뛰었다. 불길함 때문인지, 떨림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숲을 넘어가면 이본느 델루아가 있다. 군대를 데리고 어둠의 숲 입구로 갈 때까지도 카를로이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 저기 동굴입니다!”

한 군인의 외침에 카를로이는 한때 자신이 잠시 머물렀던 동굴을 발견했다. 순식간에 죄책감이 다른 모든 감정을 몰아내고 그를 휘감았다.

저기서 끝내 데려오지 못한 한 사람이 생각나자 갑자기 숨이 막혀 와서 카를로이는 말 위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약속 하나 못 지킨 사람은 이제 찾을 수도 없고,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미쳐 이러고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폐하?”

“……들어가지.”

14년 만에 돌아온 숲이었다. 말발굽에 밟혀 바스락거리는 잎 소리조차 스산하게 들렸다. 이 정도로 불길한 분위기를 내뿜는 곳은 아니었는데, 숲은 달라져 있었다.

숲이 내뿜는 음산함에 군인들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카를로이가 미친 듯이 앞으로 튀어 나가는 바람에 다들 속도를 맞추어야 했다. 황제의 눈빛은 흡사 광인의 그것과 같았고, 속도 또한 그랬다. 하루가 꼬박 걸려야 통과할 수 있는 숲을 덕분에 반나절 만에 가로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델루아 쪽으로 가면 갈수록 분위기가 이상했다. 군사가 당장 숲으로 들어오진 않아도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델루아 군대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폐하! 앞에 누가 있어서…….”

“델루아 군인가?”

이상함을 느낄 즈음 미리 보냈던 정찰대가 돌아와 보고했다.

“아니요. 저 그게…….”

말을 흐리는 정찰군 뒤로 익숙한 사람이 나타났다. 아셀이었다. 아셀은 카를로이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는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제 앞으로 다가오는 아셀을 보는 카를로이에게도 딱히 표정이 있진 않았다. 대신 카를로이는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 아셀의 목에 가져다 댔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어야 할 거야.”

갑자기 닿는 서늘한 촉감에도 아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황후는?”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래요. 따로 말해야 해요.”

아셀이 군인들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카를로이로부터 간이 진을 치고 대기하라는 명을 받은 군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한숨 돌릴 틈이 생겼기에.

“말해.”

나직한 목소리에서 카를로이의 얕은 인내심이 드러났다.

“왜 황후를 도왔지?”

“이상한 점이 많아서 알아보려고요.”

“내 허락도 없이?”

아셀은 큰 눈을 껌뻑거렸다.

“폐하를 위해서 한 거예요. 폐하를 제정신으로 만들어 줄 건 진실밖에 없어요.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어서 괴로워한 거잖아요.”

노골적으로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는 말에 카를로이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그 대단하신 진실을 황후가 알려 준댔다?”

카를로이의 삐딱한 태도를 보고 아셀은 바로 본론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황후한테 마법이 걸려 있었어요.”

정말로 뜬금없는 소리였다.

“무슨 말이야?”

“베르니의 마법사가 비밀 누설 금지 마법을 걸었대요. 그래서 말을 할 수가 없었대요.”

카를로이가 대놓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무슨 소리냐고. 세상에 그런 마법이 어디 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둠의 숲에 걸렸던 마법이 풀린 거, 못 봤어요?”

당연히 봤으니까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카를로이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황후한테 걸려 있던 마법이 없어졌어요. 뭔지는 모르지만, 공작이나 마법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 거예요.”

“도대체 이게 무슨…….”

피곤한 얼굴로 카를로이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대관절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사생아가 맞다고 했어요! 마법이 풀리니까 술술 다 말했단 말이에요.”

“뭐라고?”

와중에 아셀에게 전해 들어야 하는 게 거슬렸다.

“공작 부인의 딸은 공작 부인과 같이 14년 전에 죽었대요. 그리고 황후가 계속 델루아로 가겠다고 했었잖아요.”

아셀은 카를로이가 말을 막을까 겁이 나는지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공작이 친모를 델루아 타워에 인질로 붙잡고 있대요. 협박당하고 있었던 거죠.”

갑자기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카를로이의 머리가 울렸다. 이본느의 지난 말들이 한꺼번에 떠오른 탓이었다. 델루아로 가야 한다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하던 이본느의 모습이.

<델루아로 가지 못하면…… 난 아마 죽을지도 몰라요.>

그때 뭐라고 답했더라.

“아니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카를로이의 말에 아셀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맞아요! 황후가 그 얘기 하면서 우는 모습을 봤으면 그렇게 아니라고는 못 할걸요!”

아셀은 왠지 화가 난 모습이었다.

“……울었다고?”

“그럼 웃으면서 왔겠어요, 여기까지? 나랑 탈출한 게 뭐 놀러 간 건 줄 아는 거야, 뭐야.”

짜증 가득한 목소리였다.

“맨날 울어요, 맨날. 심지어 뭐 때문인지 몸도 안 좋아요. 토하고, 기절하고, 열나고, 당장 죽는다 해도 안 이상해요.”

감옥에서의 모습이 생각나 카를로이는 숨이 막혀 왔다.

“거기다가 그 이상한 마법이 풀리기 전까진 말도 못 해서 자기 가슴만 치고……. 정신 차리겠다고 자기 뺨을 치겠다고 하지를 않나 아주 난리였다고요.”

심장이 빠르게 뛰고 토할 것 같았다.

“그래도 안 믿겨요? 그 전부터 내가 이상하다고 해도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카를로이의 머릿속을 이본느가 지배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행동을 해도, 하지 않아도, 아무리 의심이 가도, 계속 저를 믿어 줄 수 있으신가요.>

<무슨 일이 있어도요.>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절 믿어 주세요.>

자신을 쳐다보던 그 눈빛.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불길하게 뛰었다.

“폐하?”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것처럼 보이는 카를로이를 아셀이 조급한 듯 재차 불렀다.

“말도 안 돼.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잖아.”

카를로이의 중얼거림에 아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래야 모든 게 맞아떨어져요.”

간신히 숨을 내쉬며 카를로이가 막힌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지금 황후는 어디 있지?”

“델루아 타워로 갔어요. 탑에 갇혀 있는 친모 건강이 안 좋다고 편지를 받았대요.”

“……너는?”

“나는 델루아 영지에 있기 위험하기도 하고, 폐하에게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여기서 폐하를 기다리랬어요.”

카를로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제 믿어요?”

아셀의 질문에도 그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아셀을 만나기 전까지도 온몸을 휘감고 있던 분노와 절망감은 이제 혼란스러움과 합쳐져 무엇인지도 모를 감정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개새끼라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여자가 너무, 지독하게 불쌍했다. 자신은 그런 놈이어도 상관없었지만, 그 여자가 그렇게 살지는 않았으면 했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랬다. 이본느가 한없이 증오스럽고 원망스러울 때조차도 그런 삶을 살길 바란 건 아니었다.

자신이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싶었지, 그 입에서 진실을 듣고 싶었지, 다른 불행을 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절대로 그렇게까지…… 살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차라리 자신을 배신한 악독한 공작의 귀염 받는 딸인 게 나았다. 차라리 거짓말이기를 바랐다. 자신을 이용했다고 해도 화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이게 거짓말이기만 한다면 카를로이는 모든 걸 포기하고 혼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본느도, 델루아도 황후의 진짜 이름이 아니래요.”

아셀의 말에 문득 소름이 돋았다. 줄곧 그를 괴롭혀 왔던 그 불쾌한 예감이었다. 뒷말을 들으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리리안 루라고 했어요, 자기 이름. 폐하한테 전하랬어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바닥이 꺼지는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계속 말하고 싶었다나……. 폐하?”

창백해진 카를로이의 얼굴을 보고 아셀이 놀라서 다가왔지만, 카를로이는 그 자리에 박힌 듯 미동이 없었다.

“폐하.”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속삭이던 카를로이는 이내 창백해진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아니야. 루가……. 그럴 리가.”

카를로이가 아셀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니야. 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러면 안 돼.”

“……맞아요. 리리안 루라고 했어요.”

말도 되지 않는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루는 분명 죽었다고 했다. 루가 어떻게 공작의 사생아일 수가 있다고. 머리가 미친 듯이 어지러웠다.

“아니야.”

하지만,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그가 이본느에게서 계속 느껴 오던 그 감정은 그럼 뭘까.

순간 모든 의문이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합쳐져 답을 만들어 냈다. 이본느 델루아에게 품었던 모든 의심, 감정이 리리안 루라는 이름을 거치자 갑자기 서로 맞물리는 답이 되었다.

비가 오던 날, 울면서 이본느가 물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나에게서 누군가가 보인다는 그 말, 진심이었어요?>

<나한테서 그 사람이 보인다고 했잖아요. 그건 거짓말이면 안 되잖아.>

안 돼. 숨이 막혔다. 자신이 이본느에게 했던 모든 말들이 그를 찔렀다. 울 때마다 말은 못 하고 답답한 듯 제 가슴을 미친 듯이 치던 작은 손이 생각나서 어지러웠다.

<약속했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하지 않아도, 이상해도! 믿어 주기로 했으면서……. 내가 그 말에 뭘 걸었는데, 어떻게.>

서쪽 탑에 갇혀 처참한 몰골로 눈물만 흘리던 모습까지 떠오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입을 열어도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카를로이가 잠시 비틀거렸다.

“안 돼.”

이게 사실이어서는 안 됐다. 진실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는 없는 거였다. 하지만 이본느가 루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모든 것이 깨진 조각처럼 전부 다 맞춰졌다. 소름 끼치도록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차라리 그대가 죽어야 했는데.>

그가 막힌 숨을 토해 냈다. 자신이 했던 말들이 이제 그에게 돌아와 그의 숨을 조이고 있었다.

카를로이가 미친 듯이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카를로이에게서 끊기듯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 돼.”

카를로이는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당장 찾아야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해.”

아셀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러니까 아셀은 이본느와 말을 타고 숲을 지나고 있었다. 이본느는 갈수록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하지만 한사코 쉬는 걸 거부했다.

“엄마 건강이 안 좋아.”

“어떻게 알아요?”

“원래도 안 좋았어. 근데 네가 감옥에서 준 편지……. 거기 엄마가 위급하다고 적혀 있었어.”

말끝에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이본느는 울진 않았다. 아마 울 기력도 없는 듯했다.

“공작은 엄마를 치료해 주는 대신 날 이용한 거지.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진짜 딸은 어떻게 된 거예요?”

“……14년 전 폭우 때 죽었어. 공작 부인과 함께 어둠의 숲을 지나가다 산사태에 깔려서. 그래서 공작이 이 숲을 미워하는 거야.”

들으면 들을수록 기구한 인생이었다. 아셀은 가족이란 그런 가치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은 적어도 그런 면에서 자유로웠다. 아무도 저를 그런 것으로 묶어 둘 순 없었으니까.

“근데 왜 굳이 폐하 편이 되기로 한 거예요? 위험하게. 진짜 폐하 좋아해요?”

묻는 대로 다 대답해 주던 이본느는 이상하게 카를로이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안 풀린 마법이 있을 린 없고, 어지간히 대답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거의 다 왔어.”

마녀의 나무가 보이자 이본느와 아셀이 말을 더 빨리 굴렸다. 이본느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끝이 다다르자 대체 힘이 어디서 났는지 눈빛부터 바뀌었다.

“근데 정말 너무 이상해……. 원래 여기엔 아무도 안 두긴 했지만. 그래도 전쟁 중인데…….”

“여기 나가면 있지 않을까요?”

“그럴 것 같지도 않은데.”

마녀의 나무에 다다르자 말을 잠시 멈춰 세웠다.

“왜요?”

“……내 생각엔 넌 여기 남는 게 좋겠어.”

아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뾰로통해졌다. 내가 뭐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아, 뭐예요. 난 궁금하단 말이에요. 나도 갈래. 그 타워 가고 싶단 말이에요. 아직 다 알지도 못했는데.”

무슨 어린애 떼쓰는 듯한 소리에 이본느가 살짝 인상을 구겼다.

“너를 델루아 군대가 가만히 놔둘 것 같아? 넌 여기 있는 게 안전해.”

“당신이 날 포로로 잡고 왔다고 하면 되죠. 인질이라고.”

“그래서 목이 바로 잘리려고?”

아셀이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아마 마하 욕이 아닐까 싶었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 갈게. 말도 내가 데리고. 넌 여기서 기다려.”

“아, 여기서 혼자 뭘 해요.”

“여기 마법이 풀린 걸 알면 마르키아 군은 숲을 통해서 올 거야. 네 말대로라면…… 카를로이가 오겠지.”

황제의 이름이 또 자연스럽게 이본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예전부터 알았던 사람인 양.

“그래도 네가 있는 게 그 사람한테 도움이 되지 않겠어? 옆에 있어 줘.”

아셀은 입을 삐죽거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혼자 갈 수 있어요? 그 몸으로?”

“응. 난 괜찮아. 엄마를 만나기 전까진 난…… 절대 안 죽어.”

이본느가 옅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아셀. 절대로 잊지 않을게.”

“뭐예요. 어차피 얼마 안 있다가 또 볼 텐데.”

아셀이 머쓱한 듯 눈길을 피하며 말에서 내렸다. 이본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있잖아, 칼을 만나면…….”

이젠 심지어 애칭이었다. 아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 이름을 말해 줘.”

하긴 이본느 델루아가 진짜 이름은 아닐 것이다.

“당신 이름이 뭔데요?”

“리리안 루.”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아셀이 눈을 굴렸다. 어디서 이런 이름을 들었더라.

“말해 줘, 그 사람한테. 내 이름은 리리안 루라고. 이걸…… 아주 오래전부터 말하고 싶었다고.”

아셀이 이본느의 말을 곱씹는 사이 이본느는 말을 움직였다. 아셀이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냈을 때는 이본느가 이미 숲을 벗어난 뒤였다.

카를로이가 꿈에서 부르던 이름이었다.

* * *

아셀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카를로이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가 비틀거리다시피 쓰러지는 바람에 멀리서 지켜보던 군인들이 깜짝 놀라 우르르 움직이려 했다.

“괜찮아요?”

아셀이 물어도 카를로이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계속 넋을 놓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보기도 좀 어려운 얼굴이었다. 아셀은 황후와 별다를 바 없는 몰골을 하고 있는 카를로이를 보고 답답함을 느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카를로이가 다시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한 게 자신을 걱정한 거라니 더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델루아 공작의 말을 들어 자신을 죽여 버리는 게 더 나았을 듯했다. 도대체 왜 나 같은 새끼를……. 미칠 것 같을 만큼, 딱 그만큼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근데 팔에 흉터가 잔뜩 있던데요. 공작이 때렸나 봐요.”

아셀이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모든 것들이 카를로이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그런 것까지 마법으로 숨기려고 하고. 공작 진짜 미친놈 같죠.”

카를로이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 * *

간신히 말을 타고 가면서도 카를로이는 넋을 놓고 있었다. 옆에서 아셀이 중간중간 주의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말이 나무에 부딪히든, 못에 빠지든 사달이 났을 것이다.

고삐를 쥔 손에서 계속 힘이 빠졌다. 눈앞은 계속 캄캄했다.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 이본느가, 아니 루가,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한 마음 때문에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폐하, 이제 숲을 다 나왔는데도 델루아 군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이대로 델루아 영지를 쳐들어가도 모를 것 같은데요.”

아셀이 옆에서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목을 매고 죽고 싶었다. 어떻게 루를 알아보지 못했을 수가 있지. 첫 만남부터 모든 것이 다 설명되었다. 자신을 보던 그 눈빛. 분명 알아봐 달라고 그렇게 본 것일 텐데.

그 가엾은 사람한테 했던 모진 말들이, 마지막으로 감옥에서 본 루의 모습이 끊임없이 떠올라 숨이 턱턱 막혔다. 가서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랐다. 한참 모자랐다. 이본느가 자신의 목을 벤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직접 베다가 바쳐도 모자랐다.

그리고 한편으론 공작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개 같은 새끼. 기어코 루를 잡아다가 그렇게 이용한 공작을 사지를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아무 일 없어야 하는데…….”

카를로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곧이어 우스워졌다. 이곳으로 루를 몰아넣은 당사자가 바로 저 자신인데. 보내 줄걸. 한 번만 더 믿어 볼걸. 어차피 속았다고 생각한 거, 한 번만 더 속아 주면 되었을걸.

뒤늦은 후회가 갈 곳 없이 맴돌다 그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보고 싶은데 볼 낯이 없었다.

“폐하, 저기.”

아셀이 카를로이를 부르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도시 입구에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수의 군인이 보였다. 뒤따라오던 기병들도 알아채고 열을 다시 맞추기 시작했다.

“제가 최대한 길을 틀게요. 우리는 델루아 저택으로 최대한 빨리 가야 하니까요.”

아셀이 뒤로 빠져 있으라는 듯한 말을 건넸지만 카를로이는 조용히 무시했다. 뒤로 빠져 있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카를로이가 칼을 들자 뒤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칼을 빼 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셀이 눈을 한 번 깜빡하고 나자 이미 카를로이는 앞으로 튀어 나가 있었다. 사람을 베는 게 아니라 거치적거리는 나뭇가지를 치워 내는 것처럼 카를로이는 가볍게, 하지만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 모습이 무섭고 기괴해 보였는지 델루아의 군사들이 어정쩡한 모습과 아연한 얼굴로 스러져 갔다.

아셀까지 가세하자 전력은 더 기울었고, 크로이센의 군사는 사기가 올랐다. 하지만 카를로이의 얼굴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다급하고 초조한 얼굴로 미친 듯이 달리는 그는 오히려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곳을 벗어나 남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숨을 옅게 내쉬는 카를로이의 얼굴에서는 그 칼에 쓰러진 시체들보다 지독해 보이는 절망감만이 있었다.

* * *

숲을 벗어나고서도 한참 동안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도시 입구로 진입해서야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나마도 적었지만.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고, 집들은 모두 창문을 가리고 문을 걸어 잠갔다.

이본느는 가발과 안경을 벗어 길바닥에 버렸다. 성곽에 다다르자 입구를 지키던 군인이 나와 신분증을 요구했다.

“공작님을 뵈려고 하는데.”

대체 댁이 누구냐는 듯한 표정을 한 군인이 입을 열기 전에 이본느가 선수를 쳤다.

“이본느 델루아, 공작의 딸이다.”

군인은 눈이 휘둥그레져선 옆에 서 있는 다른 군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공작의 딸은 수도 감옥에 있잖아? 속닥이는 소리가 이본느에게까지 들렸다.

“잠시만요.”

확인하려는 듯 다른 군인이 어디론가 뛰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확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잠시라고 하더니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군인들은 이본느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이본느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끌고 들어가려 할 때 저 멀리서 마차가 왔다.

“어머. 정말이었네!”

마차에서 익숙한 얼굴이 내려 호들갑을 떨었다. 레이디 앙센이었다.

“아니, 난 거짓말인 줄 알고 대체 어떤 인간이 황후를 사칭하는 배짱이 있나 했잖아요.”

속도 없이 밝은 얼굴에 이본느는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레이디 앙센을 바라봤다.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예요? 다들 가망이 없다던데? 아, 일단 타서 얘기해요.”

리베라 앙센은 넋을 놓고 서 있는 이본느의 팔을 끌어다가 마차에 태웠다.

“어떻게 나오신 거예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묻는 앙센에게 이본느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쩌나. 우리 가브리엘만 불쌍하게 됐네.”

안타깝게도 이본느는 레이디 루엔이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사나워진 이본느의 표정을 보고 리베라 앙센이 해맑게 웃었다.

“에이, 폐하도 참. 걔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이제 봐, 목숨도 보장 못 하게 됐잖아요.”

그래도 전혀 불쌍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도 경우 없이 걔를 버리려던 게 아니에요. 가브리엘을 빼 오려고 했는데 푸르투에 있는 공작님 사람들이 몇 없어서 너무 힘들더라고요. 다 잡혀갔나요?”

“……몰라.”

“아무튼 푸르투가 그 모양인데 폐하는 도망쳐 나왔다니까 너무 신기한 거죠.”

이본느의 표정이 어떻게 되든 레이디 앙센은 혼자서 열심히 떠들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전쟁도 리베라 앙센의 눈치 없는 성격은 바꿔 놓지 못했다.

“근데, 있잖아요, 폐하. 우리끼리 있으니까 말인데. 폐하 정말 공작 부인의 딸이 아니에요? 공작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닌데……. 룩스가 계속 그렇게 얘기하니까.”

룩스는 앙센 백작의 이름이었다. 이본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이렇게 없으시지? 되게 피곤하신가 봐요. 하긴, 거리가 얼마야!”

본인이 짜증 나서 말이 없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뭐, 어쨌든 잘됐어요. 공작님 상태가 영 이상해서 폐하라도 있어야 하나 싶었거든요. 전쟁 앞두고 왜 그러시는지 몰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이본느는 처음으로 반응을 했다.

“공작님이 왜?”

“아니, 공작저에서 나오지를 않으세요! 델루아 타워에 박혀 계셔서 룩스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요. 그리고 공격도 계속 차일피일 미루시지 뭐예요. 군사 다 모아 놓고 뭐 하는 짓인가 몰라.”

이본느가 맞장구를 쳐 주자 신이 났는지 앙센의 목소리가 커졌다.

“1주일 정도 됐어요. 세상에, 이틀 뒤가 수도로 진군하기로 한 날인데, 믿기세요?”

아니,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딸은 보려고 하시겠죠? 오죽하면 룩스가 그랬겠어요. 황후 폐하가 맞다면 무조건 빨리 데려오라고.”

“나를?”

“네. 좀 말려 보세요. 아니, 베르니 군사를 빌리자 해도 싫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냥 죽고 싶으신 건지.”

“앙센 백작은 지금 어디 있지?”

“공작저에 있어요. 델루아 타워는 델루아 혈족이 아니면 들어가지도 못한다면서요? 그냥 발만 동동 구르고 있죠, 뭐. 이러다 전쟁에서 지기라도 하면…….”

리베라 앙센이 몸을 잘게 떨었다. 혹시 모를 때에 대비해 룩스 앙센은 마하로 빠져나갈 방도를 마련해 두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앙센령을 이렇게 쉽게 뺏길 줄 누가 알았을지!

하지만……. 앙센이 옆에 반쪽이 된 몰골로 앉아 있는, 영혼이라곤 소멸한 듯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델루아와 델루아의 딸에겐 도망갈 틈도 없겠지. 속 편한 동정심을 담아 레이디 앙센이 자신이 모시던 황후를 바라보았다.

“도착하시면 좀 설득을 잘해 보세요. 전쟁에서 이겨야 공작님도, 폐하도 살 수 있을 것 아니에요.”

이본느는 대답 없이 초조함에 입술만 깨물었다. 품속에 숨겨 둔 칼의 존재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저 그 칼을 써야 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마차가 델루아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짜증으로 잔뜩 예민해진 앙센 백작이 그들을 맞이했다.

“아니, 정말이잖아!”

이본느를 보고 내뱉은 앙센 백작의 첫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 거 없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체 어떻게 가능…….”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이 없다니까.”

“아휴, 그래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공작님이 그래도 자기 딸은 만나시겠죠. 타워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 원!”

이본느가 사생아인 것만 알지, 공작이 이본느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룩스 앙센이 말했다. 심지어 베르니 마법사의 마법이 다 풀렸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이본느는 잠시 고민했다. 성곽뿐만 아니라 델루아저에도 군인이 꽤 많았다. 그리고 이 앙센가 남매의 존재가 무척 거슬렸다. 이들이 있는 한 공작이나 드니스를 마음 편하게 대할 수도 없었다.

“황제군이 계획을 앞당겼어. 오늘 내로 쳐들어올 거야.”

“네? 정말입니까?”

“황제가 직접 전군을 몰고 오기로 했어.”

“어딜 통해서요?”

“당연히 델포드시지. 그쪽으로 군대를 더 보내야 할걸.”

앙센 백작은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딱 벌렸다.

“정면 공격을 해 올 거라고요?”

“그럼 어디로 올 거라 생각한 거지?”

“아니, 당연히 델포드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베르니 마법사는 어디 있지?”

“모릅니다. 그놈은 공작님만 만나니까.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보이지를 않아요. 대체 뭘 하는지. 아니, 그 이상한 놈 하나만 믿고 일을 벌인 것 같더니만 그놈도 없어, 공작님도 없어. 근데 델포드시 정면 공격이라니!”

이본느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앙센 백작은 어둠의 숲에 마법이 풀렸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좀 있으면 황제군이 델포드로 들어올지도 몰라. 금방일 것 같아. 자네가 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마르키아를 떠났을 때 이미 군대가 출발해 있었어.”

앙센 백작이 창백해져서 세상에, 따위의 말만 계속 내뱉었다. 역시 그는 지휘관의 그릇은 아니었다. 공작이라면 이본느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부터 했을 텐데, 그는 그럴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군사가 막힘없이 어둠의 숲을 통해 들어올 수 있기를 바랐다.

“듣자 하니 아버지는 뭘 지휘할 상태가 아니신 것 같으니 내가 들어가 보겠네. 자네는 어서 군인들을 데리고 델포드로 가 봐.”

혼비백산한 얼굴로 룩스 앙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지는 와중에도 제 여동생을 붙잡고 뭘 시키는 걸로 봐서는 둘이 따로 작당한 게 있는 듯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델루아군이 이 모양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앙센 남매가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난 후 이본느는 델루아 타워로 향했다. 아니, 달렸다. 이상하게도 고용인들도 델루아 타워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더 불안해져 왔다. 탑의 입구에도, 올라가는 와중에도,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떨려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침내 드니스가 있는 층에 도착했을 때 이본느는 숨을 들이켰다. 항상 그곳을 지키고 있던 제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문을 열었을 때 이본느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드니스가 없었다.

“엄마.”

속삭이듯 내뱉은 이본느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잡고 일어서서 방을 샅샅이 뒤졌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이본느는 미친 듯이 탑을 다시 올라갔다. 공작만이 드니스가 어디 있는지 알 터였다. 그리고 공작이 델루아 타워에 있다면 어디 있을지는 분명했다.

진짜 이본느의 시체가 있는 방.

이성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이본느는 온몸에서 몰아치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몇 주간 혹사시켜 형편없이 망가진 몸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 느껴짐과 동시에 감정적으로도 이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탑의 꼭대기에 다다르자 화려한 문 앞에 서 있는 집사장이 보였다. 집사장은 이본느를 보고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가씨……?”

“공작님을 봐야 해. 지금 당장.”

“대체 어떻게.”

집사장은 충격이 컸는지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수도 상황을 알려야 하니까 저리 꺼져.”

공격적인 말에 집사장은 말을 더듬거리며 길을 비켜 주었다. 이본느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공작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집사장이 그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이본느는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델루아 공작은 유리관에 온몸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유리관 안에 있는 시체를 멍하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살아 있는 건지 의심이 들 즈음 아래로 숙이고 있던 고개가 돌려졌다. 그 얼굴을 본 이본느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을 뻔했다. 도무지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지 않았다. 얼굴 살이 하나도 없이 야위어 광대뼈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시뻘게진 눈은 벌건 핏줄이 보여서 징그러웠다.

공작은 이본느를 보고도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네가 여길 어떻게 왔지? 이제 환각까지 보이나. 빌어먹을 베르니.”

이본느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혼잣말처럼 들렸다. 쇠가 긁히듯 끔찍한 목소리였다.

“……엄마 어디 있어요.”

공작의 눈이 잠시 커졌다. 이본느가 진짜로 여기 와 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우리 엄마 어디에 뒀냐고, 이 개 같은 새끼야!”

결국 참지 못한 이본느가 소리를 질렀다. 공작에게 가까이 가던 이본느는 자신의 발에 거치적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무심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순간 이본느는 그만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람의 다리였다. 다리를 타고 시선이 올라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피오르?”

이본느가 속삭였다. 베르니의 마법사는 죽었고, 주변엔 피가 흥건했다. 시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이본느는 입을 막고 덜덜 떨었다.

“……그 미친놈이 나에게 그 약을 먹이고 있었다.”

공작은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베르니에서 내쳐진 놈이라더니 순 거짓말이었어……. 날 이용했어, 저놈이! 그 망할 공주의 아들이었다고! 베르니가 보낸 새끼였어.”

거슬리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본느는 바들바들 떨며 피오르의 시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목에 손을 대자 차가운 촉감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오르의 목에서 보라색 목걸이를 풀고 품 안에 집어넣었다.

“날 부추겨서 이 나라를 먹으려고! 감히 베르니 새끼들이 나를 이용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움직이면 그 새끼들이 들어올 거야…….”

공작은 계속 혼자서 중얼거렸다. 피오르의 몸을 뒤지던 이본느는 그의 주머니에서 칼의 브로치를 발견했다.

도대체 이걸 왜 피오르가 가지고 있지?

이본느가 멍하니 브로치를 들고 보고 있자 델루아 공작이 피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숴 준다고 가져가더니 그것도 순 거짓말이었겠지!”

이본느는 그 브로치도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쓸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카를로이가 찾는 거니까.

“그딴 건 챙겨서 어디다 쓸 거냐? 너도 이젠 끝이야.”

비아냥거리는 공작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이본느는 그에게 가까이 갔다. 시체가 담긴 유리관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그는 완전히 돌아 버린 듯했다.

“네년도 내 계획을 망쳤어. 그 브로치도 크로이탄 그 새끼한테 가져다줄 생각이겠지?”

공작이 화를 내듯 속삭였다.

“보나 마나 그 약도 먹이지 않았겠지! 이 정도만 먹어도 사람이 돌아 버리겠는데 크로이탄 그 새끼는 너무 멀쩡하지 뭐야.”

유리관 안에는 해골만이 보였다. 베르니의 마법사가 죽으면서 시체에 건 마법도 사라진 것이었다.

“엄마 어디 있냐고.”

“네 어미가 그렇게 소중했으면 쓸모를 보였어야지. 그 새끼한테 넘어가서 머저리처럼 군 주제에 뭘 바라냐? 양심도 없는 것.”

양심을 운운하는 태도에 결국 이본느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본느가 공작의 멱살을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어 댔다.

“엄마 어디 있냐니까!”

밖에서 집사장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엄만 죽었어. 죽은 지 오래야.”

공작이 감정 하나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본느의 심장이 떨어졌다.

“아니야. 안 죽었어.”

고개를 미친 듯이 저으며 이본느가 소리를 질렀다.

“오해는 마라. 난 네 엄마 안 죽였으니까. 내가 뭐 하러 그러겠냐.”

“거짓말하지 마. 엄마가 죽었을 리가 없어.”

뭐가 우스운지 공작은 킥킥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드니스는 탑에서 뛰어내렸어. 살릴 수가 없었지!”

이본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짓말이잖아……. 엄마가 그럴 리가 없어.”

울음 때문에 말이 끊겨서 나왔다. 공작의 멱살을 잡다 말고 이본느는 소리를 내 울었다.

“거짓말이야. 엄마가 날 놔두고 그럴 리가 없어.”

“죽은 게 뭐 대수냐? 내 딸도 죽은 지 오래인데.”

“거짓말이라고 해 주면……. 다시 말 잘 들을게요. 시키는 거 다 할게요. 엄마가 죽을 리가 없어. 거짓말이야.”

이본느가 바닥에 엎어져서 울면서 빌었다. 사실이어서는 안 됐다. 엄마가 정말 그랬을 리가 없다.

“난 분명히 말렸다. 정말 사람 말을 하나도 듣지를 않아. 너나 네 엄마나!”

이본느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몸이 괜찮아져서 밖으로 싸돌아다닐 때부터 불안하더니. 어디서 내가 널 자기 가지고 협박한다는 소리를 들었나 보더군.”

“안 돼……. 엄마. 엄마.”

“이해가 안 가지 뭐냐. 자기가 죽는다고 내가 널 가만히 둘 것도 아닌데. 네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못 배운 건 어쩔 수가 없는 거야……. 너도 네 어미도…….”

“엄마 어디 있어.”

“시체가 어디 있는지 나도 몰라. 아무 데나 대충 묻으라고 했는데 다음 날 메리앤의 딸이랑 사라졌더군.”

공작이 계속 피식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유리관 위로 엎어졌다.

“내 실수야. 너희 모녀는 내 인생의 실수야. 너희 때문에 지금 내가 이렇게 된 거야. 이용도 하지 말고 죽여 버려야 했는데. 그 값을 지금 받는 거야…….”

그러더니 공작은 울기 시작했다. 해골 위에 엎어져 울면서 제 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이본느의 마지막 이성을 끊어 놓았다.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인생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염치도 없이 책임을 묻다니.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없는 거였다.

이본느와 드니스에게 있던 단 하나의 불행이야말로 공작의 존재였다. 숨도 못 쉬고 흐느끼던 이본느는 울음을 뚝 그치고 공작을 쳐다봤다. 품에 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내 몸에 당신 피가 있다는 게 끔찍해.”

그리고 공작의 가슴을 찔렀다. 무방비로 엎어져 있던 공작이 피를 울컥 쏟아 냈다. 그래도 공작은 공작인지 그는 제 가슴에 있던 칼을 뽑아 바로 이본느를 찌르려 했다. 칼은 힘없이 이본느의 허리를 찌르고 떨어졌다.

고통도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신음을 흘리는 이본느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이본느는 칼을 주워 들고 무표정으로 공작을 한 번 더 내리 찔렀다. 공작은 피를 쏟아 내면서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끔찍했다.

“난 솔직히…….”

그가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뭘 원망하는지, 모르겠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피가 흘렀다.

“내가 아니었으면……. 드니스는 진즉, 죽었어. 내가 아니었으면…….”

공작이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넌, 황후 자리에도, 오르지, 못했어. 네깟 게…….”

이본느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딴 거, 바란 적 없어, 개새끼야.”

그리고 공작의 목을 찔렀다. 힘이 덜 들어갔는지 깊이 들어가진 않았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공작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이본느는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그거 알아? 당신 딸도 일찍 죽는 게 나았을 거야. 일찍 그렇게 죽어 버린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어린 나이에 잘 죽었어.”

공작이 핏발 선 눈으로 이본느를 노려보았다.

“당신 같은 인간이 아버지란 걸 알았으면……. 당신 딸도 탑에서 뛰어내렸을 거야. 아니, 칼로 목을 그었을 거야. 당신이 끔찍해서.”

이본느의 눈물이 공작의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당신도 사실 알았지? 당신 딸이 당신 같은 새끼를 아버지로서 절대 사랑할 리 없다는 걸……. 당신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공작은 뭐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 대신 피만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이본느는 분풀이를 하듯 그의 팔과 가슴을 찔렀다. 평생 증오해 왔던 피가 끊임없이 흘러 이본느까지 적셨다. 자비 없는 손길에 공작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지만 이본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이 결국 이룬 게 뭐야? 가진 건 뭐고. 아무것도 없잖아.”

이본느는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모아 그의 목에 칼을 꽂았다.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사랑해 마지않는 그 딸은 죽어서도 만나지 못할 거야.”

이윽고 공작의 숨이 끊어졌다. 하지만 이본느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공작이 죽은 걸 모르는 사람처럼 한참을 그의 몸을 칼로 찔렀다. 날카로운 칼이 공작의 살을 마구잡이로 파고들고, 피가 솟고. 그 칼을 다시 힘겹게 빼내고 또 내리꽂고.

한참을 그러던 이본느는 공작의 미동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손을 멈췄다. 공작의 몸은 흉물스럽게, 그리고 붉게 변해 있었다.

공작의 피로 범벅이 된 두 손을 멍하니 보다 이본느는 바닥에 쓰러졌다. 일어서야 하는데, 드니스를 보아야 하는데, 몸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어지러웠다. 온몸이 미친 듯이 아팠다. 고통으로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엄마를 찾으러 가야 하는데…….”

천장이 빙그르르 돌았다.

“엄마…….”

이본느가 흐느꼈다. 드니스가 죽었을 리는 없다. 시체도 없잖아. 공작이 자신을 화나게 하려 거짓말을 한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왜 이렇게 무서울까.

반쯤 엎어진 채로 이본느는 계속 울었다. 울다 보니 점점 더 어지러워졌다. 모든 게 꿈인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냥 이대로 쉬어도 될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끔찍한 악몽이지 않을까? 난 아직 열두 살이고, 이 꿈에서 깨어나면 엄마가 악몽을 꿨냐며 안아 줄지도 몰라. 무슨 그런 꿈을 꿨냐고 웃겠지…….

이윽고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 * *

델루아의 전력은 형편이 없었다. 하다못해 멀쩡한 지휘관 하나 없었다. 아무리 이쪽이 시골이라고 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허술한 전력이었다. 그나마 성문에는 체계 잡힌 군대가 존재했지만, 그조차도 쉽게 뚫렸다. 함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체 나머지 군대는 다 어디 있는 거지? 델루아와 앙센은 어디 가고.”

먼저 앞을 치고 나와 델루아 공작저가 있는 곳으로 말을 달리며 카를로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 전력은 다른 곳에 있겠죠. 이쪽으로 들어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이제 밤을 지나서 새벽이 밝아 올 시간이었다. 클라이드 앙센이 마르키아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기도 했다.

“좀 있으면 델루아의 끝을 보겠군.”

카를로이의 말은 어쩐지 초조하게 들렸다. 아셀은 그가 황후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사람이 그러니까 그 사람이었다는 거다. 카를로이가 애타게 찾던.

아셀은 카를로이의 명을 받고 베르니와 델루아 영지를 헤매고 돌아다녔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바로 앞에 두고! 아주 헛짓거리를 한 셈이었다.

공작저에 가까워질수록 카를로이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피를 차갑게 만들었다. 공작저가 있는 곳의 성곽에 다가서자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만들어 내는 소음이 거슬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아셀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오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위협하며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기도 하고, 군인들끼리도 싸우고 있었다. 카를로이는 그것이 지휘관이 무너진 곳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걸 알았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적지 않은 숫자의 황제군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보고 군인, 민간인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안에서 질서가 무너진 곳을 제압하기는 너무나 쉬웠다. 싸우려고 드는 사람이 몇 없었기 때문에.

무너지는 탑처럼 델루아는 맥없이 스러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델루아 군인 하나를 붙잡고 묻자 그가 발발 떨며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델루아 공작이 죽었다는 괴소문이 퍼지고 있어서……. 통제가 안 됩니다.”

카를로이와 아셀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았다.

“확실한가?”

“모르겠습니다. 델루아의 하녀 하나가 말한 건데 사실 확인이 되지 않고 있어서…….”

카를로이가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고 미친 듯이 공작저를 향해 달렸다. 몇몇이 카를로이의 칼에 무참히 쓰러지는 것을 보고 군인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아셀이 그 뒤를 따르며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치웠다.

공작저에 다다르자 성 입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짐을 들고 도망가려던 공작가 사람들이 군인들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카를로이의 군인들이 능숙하게 입구를 통제하고 모두를 족족 잡아들이는 동안 카를로이는 쉴 새 없이 델루아 타워로 달려갔다. 직감이었다. 델루아 공작이든, 루든 저곳에 있을 것이었다. 델루아가 모든 마법을 이용해 지키던 곳에.

어찌나 빠르게 탑으로 달려가던지 아셀이 뒤처질 정도였다.

“폐하!”

혼자 가지 말라는 뜻으로 아셀이 뒤에서 소리쳐 불렀으나 카를로이는 미친 듯이 뛰었다. 불길함이 그를 잡아먹기 일보 직전이었다.

탑을 아무리 올라가도 보이는 것이 없었지만 음산함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맨 꼭대기 층에 다다랐을 때, 카를로이는 그 음습함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층 입구에 집사장으로 보이는 늙은 남자가 목을 매달고 죽어 있었다.

그 남자 뒤로 활짝 열린, 화려하게 장식된 문이 보였다. 문을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이 초조해졌다. 숨도 쉬지 못하고 그 방으로 들어간 카를로이는 거대한 유리관을 보았다.

발걸음을 좀 더 옮겼을 때 그는 숨을 들이켰다. 유리관 주위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흐릿하지만 분명 사람의 몸이었다.

“이본느!”

카를로이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본느의 이름이 무의식적으로 먼저 나왔다. 유리관 앞에 쓰러져 있는 여자가 보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그는 간신히 가까이 다가갔다.

“안 돼…….”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맥없이 쓰러져 있는 그 얼굴을 보자 그제야 믿을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도 설마, 설마 하던 것이 진실임을. 정말 그 이본느 델루아가 루가 맞다는 것을.

이제 안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그러니까 왜, 대체 왜 이제 그런 게 눈에 보이는 걸까.

리리안의 몸 아래엔 피가 흥건했다.

“루……. 안 돼, 안 돼.”

그는 루의 몸을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었다. 너무 작았다. 떨리는 손으로 피가 새어 나오는 곳을 막았다. 선연한 피에 질식할 것 같았다.

“루, 제발 일어나 봐…….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아무리 흔들어도 눈을 뜨지 않았다. 거대한 공포감이 카를로이를 엄습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무서웠던 적이 없었다.

“루, 제발…….”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카를로이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방울들이 루의 창백한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루의 눈꺼풀이 미약하게 떨렸다. 카를로이가 이름을 몇 번 더 소리쳐 부르자 눈이 떠졌다.

“칼…….”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루가 속삭였다. 카를로이는 그 몸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미친 새끼. 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도 몰랐다. 사람이 자신에 대한 혐오로 미쳐 버릴 수도 있을까? 카를로이는 그저 죽고 싶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제발……. 루…….”

“네가 맞아? 꿈인 것 같아. 네가 날 알아볼 리가 없으니까…….”

잘 들리지도 않는 약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죽으면 안 돼. 나한테 개새끼라고 욕이라도 해야지. 차라리 날 죽여야지.”

카를로이가 정신없이 흐느끼며 소리쳤다. 너무 무서웠다. 루의 죽음을 간신히, 죽을힘을 다해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사실은 버젓이 살아 있었고, 심지어 그의 옆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그녀를 잃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널 왜 죽여.”

리리안이 옅은 숨을 쉬었다.

“우리 엄마 좀 찾아 줘, 칼……. 어디 있는지 보이지가 않아. 이름은 드니스고……. 많이 아파.”

핏기가 가신 리리안의 하얀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카를로이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 눈물을 닦았다.

“알았어, 내가 찾아올게. 약속해. 내가 뭐든지 할게. 그러니까…….”

숨을 쉬는 게 힘겨운지 리리안의 눈이 계속 감기려 했다.

“거짓말.”

속삭이는 소리에 약한 원망이 묻어 있었다.

“네가 하는 말 다 거짓말이야.”

한 번 더 반복하는 말엔 그 감정이 더 강하게 묻어났다.

“넌 한 번도 약속 지킨 적 없잖아. 나랑 한 약속……. 전부 안 지켰잖아.”

그 말이 카를로이의 가슴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날 알아보겠다고 했잖아. 지켜 준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약한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속삭이는 소리는 이제 우는 것처럼 들렸다.

“날 믿지도 않았잖아. 믿겠다고 약속해 놓고……. 난 널…….”

절망 어린 얼굴로 카를로이가 눈물만 뚝뚝 흘렸다.

“……미안해.”

“네가 미워.”

“미안해. 그러니까 차라리…… 날 죽여. 제발…….”

힘든지 숨을 헐떡이던 리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제 품을 헤집었다.

“이거.”

브로치 하나가 건네졌다. 카를로이가 그것을 받자마자 힘없는 손이 다시 툭 떨어졌다. 와중에 팔의 무수한 흉터가 보이자 카를로이는 더 숨이 막혀 왔다.

“말했잖아, 내가. 가져오겠다고.”

점점 약해지는 목소리에 결국 카를로이는 브로치를 쥔 채 얼굴을 마른 몸에 묻고 흐느꼈다.

“내가 잘못했어, 제발……. 약속 다 지킬게. 네가 하라는 건 뭐든지 할게. 죽으라면 죽을게. 그러니까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건지도 모르고 카를로이는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리리안이 힘겹게 손을 들어 카를로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멍청이.”

“응, 내가 머저리였어. 멍청한 새끼였어. 그러니까…….”

핏기 없는 얼굴 위에 자리 잡은 두 눈이 다시 감겼다. 카를로이는 공포감 가득한 얼굴로 다시 루의 이름을 불러 댔다.

“안 돼, 일어나. 안 돼.”

“나 좀 쉴래…….”

“아니야, 지금은 안 돼. 제발 조금만…….”

루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아파서 그래. 진짜로, 너무 아파.”

작은 목소리가 툭툭 끊겼다. 그 말에 카를로이는 아연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그 말에 해 줄 말이 없었다.

“너무 힘들어, 칼…….”

흘러내리는 루의 눈물을 닦으며 카를로이는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못하겠어, 아파. 쉬게 해 줘…….”

그에게 애원하는, 물기 어린 목소리가 죄책감과 함께 카를로이의 가슴을 사정없이 찌르고 조여 왔다. 쉬라는 말도, 감히 쉬지 말라는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는 눈물만 흘리고 아이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미안해. 내가 아프게 해서……. 내가 잘못했어.”

품에 안긴 여자는 약하게 고개만 저었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루?”

겁에 질린 목소리로 카를로이가 속삭였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안 돼……. 루.”

가볍게 흔들어 보아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카를로이의 두 손에는 리리안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다보던 카를로이는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야윈 몸을 붙잡고 아무리 흐느껴도 움직임이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증오한다고, 죽기를 바란다고 했던 말이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말해야 했다.

“아니야…….”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사실은 네가 이본느 델루아일 때도 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았다고. 네가 나에게 보이던 게 거짓일까 봐 그랬다고. 그냥 이 모든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멍청한 놈이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말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데 들을 사람이 없었다.

죽음만이 감도는 음산한 탑에는 다 큰 사내의 끔찍할 정도로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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