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황제, 그리고 황후(1)
황제궁 치료사가 잠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황제의 침실로 달려갔다. 새벽에 이렇게 갑자기 부름을 받는 것이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아니, 이럴 거면 그냥 제가 같이 침실에서 자는 게 낫겠습니다. 매일같이 이게 뭡니까?”
고르텐의 발걸음을 따라잡으며 유능하기로 유명한 치료사가 투덜거렸다.
“누가 있는 걸 싫어하시는데 어떡하나.”
고르텐이 발을 동동 구르며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카를로이가 헐떡이는 소리에 치료사가 인상을 쓰며 침대로 가까이 갔다. 침대 옆으로 깨진 술병의 조각들이 굴러다녔다.
“폐하.”
카를로이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치료사는 손에 꽉 쥐어진 유리 조각부터 빼냈다. 그가 진정 마법을 쓰자 카를로이의 숨소리가 조금 잠잠해졌다.
“……후.”
“예?”
“황후를 데려오라고.”
다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저런 말이었다. 치료사는 대충 고개만 끄덕거리고 무표정으로 약을 먹였다. 이제 익숙해진 탓이었다.
어쩔 땐 루 어쩌고, 어쩔 땐 황후 저쩌고. 망나니 황제라고 다들 그랬지만 이렇게 부를 여자 이름이 많았단 말인가?
아니지, 치료사가 무심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사실 황후의 이름만은 죽어도 부르지 않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많은 ‘이름’을 부르는 건 아니다.
진정 마법에 진정 약까지 들어간 카를로이가 물먹은 천처럼 늘어져 침대에 몸을 기댔다.
“고르텐.”
카를로이가 고르텐을 찾았다. 치료사가 카를로이의 손을 치료하는 동안 고르텐이 카를로이 곁으로 다가갔다.
“그 여자를 데려와, 지금 당장.”
“……황후는 지금 없잖아요, 폐하.”
“그러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된다고.”
술과 약에 취한 카를로의 말투가 점점 늘어졌다.
“없는데 계속 나타나잖아. 시끄럽게 계속 울어. 계속 들려서 미쳐 버리겠다고.”
치료사가 천을 둘둘 카를로이의 손에 말았다.
“거짓말한 건 그 사람이잖아.”
고르텐이 계속 조용히 있자 카를로이의 목소리만이 침실에 계속 퍼졌다.
“근데 미친 건 나 같단 말이야. 그게 이해가 안 돼.”
“폐하.”
“보기에도 그렇잖아. 내가 완전히 미친 새끼잖아.”
낮은 목소리로 욕설이 중얼거림처럼 이어졌다.
그렇지, 완전히 돌아 버렸지. 치료사는 혼자 생각하며 치료를 끝냈다. 황제의 상태는 기밀이라 어디 가서 말은 안 하겠지만, 저 모양 저 꼴이라니 나라의 상태가 심히 걱정되었다.
카를로이가 더는 말이 없자 고르텐은 치료사를 데리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머무는 곳이라도 더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십시오.”
치료사가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고르텐 역시 비슷한 상태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아직도 밖은 어두웠다. 황후가 사라진 지 하루가 지났다.
* * *
아셀이 이본느와 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대외적으로는 기밀이었다. 카를로이의 몇 없는 측근을 반역죄로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해서 아셀이 이본느의 탈출을 돕고 같이 사라졌다는 것은 카를로이를 비롯해 알렉시스 뒤냐와 고르텐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감옥에서…… 황후 혼자 탈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쏟아지는 귀족들의 의문을 미리 예상했던 현명한 알렉시스 뒤냐는 별다른 말없이 피가 마른 잘린 머리 몇 개를 보여 주었다.
“푸르투에 남아 있던 델루아의 첩자들입니다.”
알렉시스가 말이 없었기에 설명은 그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대신했다.
“아, 네……. 첩자들이…….”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시각적이면서 잔인한 대답에 귀족들은 더는 묻지 않았다. 델루아의 첩자들이 탈출을 도운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일주일 내로 델루아 이외의 반란군 영지를 모두 정리한다. 그 후 모든 전력은 마르키아로 이동, 지휘관은…….”
황제가 마치 고민이라도 하는 듯 말끝을 늘였다. 귀족들은 목을 쑥 내밀고 황제의 입을 살폈다. 알렉시스 뒤냐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듯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제가 되어야지요, 폐하. 제 나이를 걱정해 주시는 모양인데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알렉시스 뒤냐가 날카롭게 말을 받았다. 카를로이의 속을 읽은 사람은 알렉시스 뒤냐 하나뿐이었으므로 말을 끝내는 것도 뒤냐가 했다.
“……공이 괜찮다고 한다면야.”
카를로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알렉시스는 조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금 당장 마르키아로 내려가고 싶어 하는 게 뻔히 보였기 때문에. 하지만 그건 알렉시스의 눈에만 보이는 듯했다.
황후의 탈출이라는 엄청난 사건 이후에도 황제는 평소처럼 냉정한 얼굴로 나타나 합리적이고 깔끔한 명령을 전달했다.
“그리고 각 검문소의 검문을 강화하도록 한다.”
필요한 조치만 내리는 카를로이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조금 눈썰미가 있었다면 황제의 침착함에 기묘한 광기가 스며들어 있다는 걸 눈치챘을 수도 있겠으나, 전쟁엔 무릇 그 정도 공격성과 흥분이 함께하는 법이기에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폐하께서 따로 쓰시는 마하인도 마르키아로 같이 갑니까?”
누가 아셀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셀의 전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사람들은 은근히 그가 같이하길 바라고 있었다.
가라앉은 카를로이의 눈이 아셀의 이야기에 잠시 번뜩였다.
“……아셀은 다른 명을 수행 중이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무슨?”
“황후를 찾는 일을 맡겼어.”
“차라리 전국적으로 알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현상금을 건다든가…….”
“그런 걸 알려서 우스워지거나 사기가 떨어질 필요는 없지 않겠나. 아셀이 알아서 찾을 테니 걱정하지 말지.”
단호한 대답에 다들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나중에 아셀과 이본느가 같이 잡힐 때를 대비해서 미리 선수를 치는 카를로이를 보며 알렉시스는 홀로 한숨을 쉬었다.
아셀을 잃기 싫어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정말 황후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의문이었다. 아니, 애초에 아셀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여기까지 하지.”
카를로이가 회의장을 떠나 집무실로 향하자 알렉시스 뒤냐가 다시 귀족들을 통솔하고 지시 사항을 세부적으로 전달했다.
마무리를 다 한 후에 카를로이를 개인적으로 만나러 황제궁에 가면서 알렉시스는 카를로이의 상태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너무나 멀쩡했다. 적어도 눈을 뜨고 있는 순간에는. 이본느가 도망친 후로 오히려 습관적으로 자해를 하던 것도 그만두었다.
아니, 멀쩡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완전히 돌아 버린 거였다. 사람이 제대로 이상해지면 의외로 정상인 상태와 구분하기가 힘든 것이다.
“오늘은 좀 어떠시지?”
집무실 앞에 치료사와 고르텐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알렉시스가 물었다. 알렉시스의 질문에 치료사는 한숨으로 말을 시작했다.
“여전하십니다. 저렇게 잠도 못 주무시고 뭘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가 더 오래되면……. 이미 약으로도 안 되는 상태가 되셨잖습니까. 지금도 사실 과복용이라 문제인데.”
“그래도 낮에는 상태가 괜찮으신데.”
“그러니 더 문제지요. 저런 상태에서 제정신인 척하실 수 있다는 게 정말 소름 끼치지 않습니까? 밤에 폐하를 보다 낮에 보면 그냥……. 어휴.”
치료사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잠시만 눈을 붙이실 땐 숨도 못 쉬고 괴로워하시면서, 깨어 계실 때는 대체 무슨 생각에 집중하시기에 저렇게 멀쩡한 척하실 수 있는 걸까요? 무서워요, 무서워.”
무슨 생각이긴. 황후를 제 손으로 직접 잡을 생각만 하고 있겠지. 알렉시스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렇게 잘 알면 뭔가를 좀 해 보게.”
“제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습니다. 식상한 말이지만,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며칠 새 야윈 치료사가 지겹다는 듯 말을 끝내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카를로이의 집무실 앞에서 알렉시스는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근본적 원인 자체가 사라져 버렸는데 대체 해결을 어떻게 하나?
고르텐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요사이 그의 손수건은 마를 날이 없었다.
“정말 이대로 어떻게 되시면…….”
“지금 기세로 보아선 황후를 잡을 때까진 죽지도 않으실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게.”
알렉시스가 야멸차게 들릴 정도로 싸늘하게 말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공은 걱정이 안 됩니까?”
“반란을 잠재울 때까지만 지금처럼 버텨 주신다면야……. 어쨌든 맡은 일은 다 하고 계시지 않나?”
정 없는 뒤냐의 말에 고르텐이 질린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차라리 틀린 말이나 하는 게 듣기 좋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나저나 뭐? 황후가 황제를 마음에 둬? 다 헛소리가 따로 없었군. 지금 보니 영 반대인 듯싶은데. 이렇게 뭘 모르니 이 모양 이 꼴이 됐지.”
“설마요. 배신감이 드신 거지요, 아셀에게. 아니, 정말 그놈이 대체 왜 그랬는지! 정말 황후에게 홀린 건지!”
“……자넨 정말 이런 면으론 아는 게 없군?”
“그런 게 아니라, 폐하가 미치지 않고서야 델루아를 마음에 두실 리가 없으니까요.”
“아니, 고르텐.”
알렉시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르텐을 바라봤다.
“그래서, 미치셨잖나.”
울음기 묻은 고르텐의 말에 가차 없이 대꾸한 뒤냐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카를로이는 책상에 기대서서 어두운 창밖을 보고 있었다.
평소보다 야위어서 훨씬 날카로워진 얼굴이나, 조금 붉어진 눈, 매일 대체 뭘 부숴 대는지 여기저기 긁히고 천이 둘러진 손과 팔만이 그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이제 치료사는 그만 부르지. 썩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쇳소리처럼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정신을 차리시든가요. 잠을 주무셔야 그만 부르든가 하지요. 그리고 쓸데없이 화도 그만 내시고요.”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아셀이 보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잡아 두라고 영주들에게 은밀하게 전갈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빨리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지요.”
차마 황제의 아내와 튀었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아 그렇게만 전달한 것이었다.
“베르니에서도 간자로 있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잡힐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니 꼬리는 있는 셈이지요.”
“전달 속도가 과연 아셀보다 빠를까. 내가 아셀에게 직접 날개를 달아 준 덕분에 크로이센에선 그놈을 막을 사람이 없어.”
질문이 아니고 혼잣말처럼 들리는 말이라 뒤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게다가 딱히 할 만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누가 마하에서 그런 놈을 데려와 그렇게 내키는 대로 하도록 두라고 했나?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다.
그리고 막을 사람이 없으면 뭐? 뻔했다. 카를로이가 지금 자신이 직접 델루아로 내려가 이본느를 잡아 올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게.
“베르니는 어떻지? 델루아와 합류할 것 같은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병력은 델루아 쪽으로 이동하는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
“그래 봤자 폐하께서 직접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저로 충분합니다.”
마치 조그만 틈도 용납하지 않을 듯한 태도로 알렉시스가 대답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인 카를로이가 이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나가지 않으려던 고르텐은 뒤냐의 단호한 눈빛에 반강제로 따라 나왔다.
집무실에서 혼자가 되자마자 카를로이는 무너지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지옥이었다.
“빌어먹을…….”
그는 미친놈처럼 벽에다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이본느를 몰아낼 수만 있다면 칼로 난자당해 살해당한대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본느가 그의 머릿속에 남기는 걸음 하나하나가 모조리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이 고통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이본느의 부재가 왜 고통스러운가? 그 도망에 왜 분노하는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목을 감아 왔다.
욕설을 중얼거리며 카를로이가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이 아니면 그나마 숨이라도 쉴 수 있었다.
“……찾아야 해.”
의자에 기대 누워 카를로이는 중얼거렸다. 단 하나의 생각만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죽기를 바랐다고, 없어지기를 바랐다고 수없이 말했던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어질 정도로 모순적인 생각 하나가 그의 유일한 이성이었다.
* * *
이본느가 눈을 떴을 땐 웬 낡은 천장이 보였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자 갑자기 시야에 동그란 얼굴이 경고도 없이 확 들어찼다. 기력이 하나도 없어서 소리 지를 힘도 없었다.
“죽은 줄 알았네.”
아셀이 특유의 말투로 중얼거렸다.
이본느는 얕은 신음을 흘리며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감옥을 나오자마자 쓰러지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가 나지 않았다.
“어디야?”
“수도에서부터 한참 빠져나왔어요. 검문 심해지기 전에 나와서 다행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이본느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자 아셀이 커다란 빵 하나를 내밀었다.
“먹어야 움직일 수 있어요.”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내가 들고 왔어요. 시체인 척하고. 무거워. 허리 아파요.”
“……고마워.”
악의 없는 비난에 이본느는 멍하니 빵을 씹었다. 촉감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현실감이 없었다. 난 정말로 감옥을 나왔나?
빵을 느리게 씹으며 상황을 이해하려던 이본느의 얼굴이 한순간 굳었다. 드니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해.”
“그거나 다 먹어요. 가다 또 쓰러지면 피곤한 건 나인데.”
“조금이라도 늦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빨리 가야 해.”
“그럼 빨리 먹든가요.”
이본느는 신경질적으로 빵을 삼키기 시작했다. 아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니 아무래도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먹는 와중에도 머릿속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드니스는 대체 얼마나 어떻게 상태가 안 좋은 걸까.
“도대체 델루아 영지에 뭐가 있는 거예요? 그 탑이죠?”
이본느가 고개만 끄덕였다.
“대체 뭔데요?”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 네가 직접 봐.”
“난 당신이 수상하다면 바로 죽일 거예요.”
별거 아닌 듯 무서운 말을 하는 아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본느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넌 왜 나를 돕는 거지?”
“난 폐하에게 진실을 가져다주고 싶어요.”
아셀이 큰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푸른 눈에서 카를로이에 대한 진심이 보이는 듯도 했다.
“그게 폐하를 아프지 않게 하는 유일한 것이니까요. 내가 폐하를 낫게 할 거예요.”
“……좋은 사람이 하나쯤은 있었구나.”
“네.”
당당한 대답에도 이본느는 이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선 아셀은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이었다.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앙센령 옆 무하 쪽으로 가서 델루아로 들어갈 거예요. 한 3, 4일 후면 무하에 도착할 거예요.”
“안 돼. 그렇게 돌아가면 너무 오래 걸려.”
“어쩔 수 없어요. 반란군 때문에.”
“마르키아로 가자. 마르키아의 들랑시로 가기만 하면 돼.”
“안 돼요. 거기 경계는 델루아 군이 너무 많고 최접전 지역이라 위험해요.”
“델루아 군대는 너한테나 위험하지. 날 죽이려 들진 않을 테니까 그때는 각자 가면 돼.”
“델루아 군뿐만이 아니라요. 우리 군대도 전부 그쪽으로 다 내려갈 텐데 그러다가는 델루아에게 잡히기 전에 폐하한테 들켜요.”
“들랑에서 델루아의 어둠의 숲으로 넘어가는 길을 알아. 심지어 어둠의 숲은 마법 때문에 군대가 따로 있지도 않을 거야. 마르키아에서 들어가기만 하면 델루아까지 방해 없이 갈 수 있어.”
“그런 길을 어떻게 알아요?”
이본느는 대답 없이 다시 빵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목이 막힌 이본느가 캑캑거리는 소리를 내자 아셀은 옆에 있던 우유를 건네주었다.
아셀이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을 모조리 받고도 답 하나 알려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수상한 여자. 델루아로만 가면 정말 이 이상한 여자를 이해하게 될 수 있을까. 아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 먹으면 옷 갈아입고 저거 가발 쓰고 나와요.”
“저런 건 다 어디서 났어?”
“원래 여기 계속 두던 거.”
아셀은 서랍장을 뒤적거리더니 마석을 가득 챙겨 밖으로 나갔다. 사람 없는 집에 몰래 들어온 건가 했더니, 원래 아셀이 쓰던 집인 듯했다. 하긴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려면 여기저기 머물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낡은 집에서 느껴지는 익숙함에 갑자기 목이 멨다. 딱 이만큼 낡은 침대에서 기침하던 드니스가 생각난 탓이다.
이본느는 퍽퍽한 빵을 기어코 다 삼킨 뒤에 눈의 물기를 닦았다. 울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도 쓰러지듯 잠이라도 자서 그런지 몸이 좀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어두컴컴했다. 아셀은 집 앞에서 말 한 마리를 잡고 있었다.
“한 마리밖에 없어?”
“보통은 누구랑 같이 갈 일이 없어서. 가다가 상태 좋아지면 한 마리 더 구하든가 해요.”
심드렁하게 대답한 아셀이 손을 내밀었다. 이본느는 아셀의 도움을 받고서야 간신히 말에 올라탔다. 몸이 안 좋긴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그냥 출발해도 돼?”
“난 문제가 별로 안 돼요. 통행증 있어서.”
뒤에 올라탄 아셀이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나가는 말로 아셀이 크로이센의 땅은 그 어디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사실인 듯했다.
“문제는 시간이에요. 폐하가 각 검문소로 나에 대해 전갈을 보냈을 거예요. 그것보단 빨라야 해요.”
전갈보다 빠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도 존재하다니, 그 위용이 소문만은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카를로이가 왜 아셀 하나만을 두고도 만족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자신감이었다.
아셀은 이본느를 무슨 짐짝처럼 말과 자신의 몸에 묶기 시작했다.
“토할 거 같으면 그냥 거기서 해요. 뒤로 날리는 건 싫은데 어쩔 수 없지.”
“뭐?”
“멈출 시간이 따로 없어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셀이 고삐를 당겼다.
* * *
이본느가 없어진 뒤로 카를로이는 쓸데없이 정원을 드나드는 일이 늘었다. 이유도 모른 채 카를로이는 새벽에 홀로 정원을 배회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정원에 나와 있었다. 그저 이본느를 따라온 것인데. 이젠 꿈과 현실이 구분이 안 되는 걸까.
“……미친 새끼.”
카를로이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래서야 정말 광증이래도 할 말이 없다.
화려하다는 정원은 그의 눈엔 볼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그 저주 맞을 여자가 도대체 이곳에서 뭘 본 건지, 뭘 보고 싶어서 항상 이곳에 머물렀는지 궁금해졌다.
달 하나만 뜬 밤에 카를로이는 만개한 꽃 사이에 주저앉았다. 달빛을 받아 핀 꽃들에서 어느 밤에 이본느에게서 맡았던 향이 나 머리가 아팠다.
죄 없는 꽃들을 손으로 부스러뜨리며 카를로이는 습관처럼 욕설을 내뱉었다.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쓸어내리는 손에선 지긋지긋한 꽃향기가 났다.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이본느가 언젠가 뱉었던 말들이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다. 말은 그나마 덜 고통스러웠다. 이본느가 닿았던 어느 순간들이, 촉감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때면 카를로이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기억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신경을 갉아먹는지…….
<델루아로 가야 해요.>
그 모습이 떠오르자마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대체 왜. 카를로이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라고는 델루아를 돕는다는 그 빌어먹을 마법사 말고는 없었다.
푸르투에서 흘렸던 이본느의 모든 눈물, 잠시나마 보였던 모든 웃음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그걸 제 것으로 착각한 것도 모자라 이용하겠다고 한 자신이 우습고 우스웠다.
이본느가 죽어 버리기를 바랐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를 바랐다. 진심을 다해서.
하지만 이렇게는…… 이렇게는 아니었다. 지금 이런 식으로, 숨 막힐 정도로 모든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아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사라지길 바란 건 아니야.
황궁에서 갈 곳도 없어 별로 돌아다니지도 않은 사람이 이렇게까지 진하게 흔적을 남겼다니 미칠 노릇이었다. 이본느가 남긴 가장 큰, 가장 개 같은 흔적은 카를로이 저 자신이었다. 그러니 스스로를 죽여 버리지 않는 이상,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델루아로 갈 것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이본느의 모습은 선명해졌다. 결국 다 포기한 채로 앉아 있는데 인기척이 뒤에서 들려왔다.
“계속 이러실 겁니까.”
예상한 대로 뒤냐였다. 카를로이는 감은 눈을 뜨지도 않았다.
“남들 앞에서 이러는 것도 아니잖아.”
“……예, 참 잘하고 계십니다.”
비꼬는 말에도 황제가 딱히 대꾸하지 않았으므로 주인 없는 정원에는 다시 갈 곳 없는 침묵만이 흘렀다.
“사랑이라도 하십니까.”
“아니.”
한참 뒤에 나온 뒤냐의 질문에는 대답이 빨랐다.
“그럴 리가.”
카를로이는 루에 대해 자신이 가지던 감정을 떠올렸다. 그저 미안하고 애틋했던, 그리움으로만 가득 찼던 감정과 비교하면 이본느에게 가지는 감정은 음습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걸 사람들이 사랑이라 부를 리는 없다.
“잡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모르겠어.”
뒤냐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본인도 저렇게 알고 싶어 하는 얼굴이면, 영문을 모르겠다는 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뭐라고 구박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셀은 찾았나?”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온 겁니다. 분명 무하 쪽으로 가서 델루아로 들어갈 거라 생각했는데, 그쪽에는 오지도 않았답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델루아로 들어…….”
말을 하다 스스로 깨달은 카를로이를 보고 뒤냐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마르키아군.”
“크로우시에서 아셀을 통과시켜 줬다고 하니 마르키아로 가는 게 맞을 겁니다. 웬 남자 동행인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 걸 보아선 황후가 남장을 한 것 같습니다.”
“언제 통과시켜 줬다던가?”
“그제 새벽이랍니다. 그쪽으로 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기에……. 죄송합니다. 그런데 마르키아는 지금 그렇게 쉽게 통과 가능한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 있어. 갈 수 있는 길이.”
카를로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갑자기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어렸던 날, 루가 알려 줬던 길로 어둠의 숲을 지나 마르키아로 넘어가던 기억이 떠오르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몸을 지배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불길함과 기시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야겠어.”
“예?”
“계획을 전부 수정한다. 수도에는 공이 남고 내가 마르키아로 가도록 하지.”
“아니, 폐하께서 직접 접전 지역으로 가실 필요는…….”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밤새 할 일이 늘었으니까.”
뒤냐가 뭐라 더 말리기도 전에 카를로이는 벌떡 일어섰다. 넋 놓은 미친놈처럼 앉아 있을 때는 언제고, 눈빛이 형형했다. 이제는 델루아로 갈 수 있는, 대외적으로라도 쓸 만한 핑계를 찾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황후를 직접 잡으러 가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저렇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알렉시스는 잠자코 뒤를 따랐다. 어디 뭐라고 하는지나 들어 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알렉시스 뒤냐는 미친놈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 *
“컥.”
아셀이 이본느의 등을 두드렸다. 벌써 세 번째였다. 이본느는 종종 숨을 제대로 못 쉬고 힘들어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졸도할 때도 있었다. 잠이라도 좀 잘라치면 악몽이라도 꾸는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다 깨서 아셀이 주변을 살펴야 했다.
“하.”
하지만 제일 심각한 것은 이본느가 가끔 자기 뺨을 미친 사람처럼 친다는 것이었다.
“아, 미쳤어요? 하지 마요!”
숨이 트이자마자 자연스럽게 뺨으로 올라가는 손을 아셀이 잡아챘다.
“정신 차리려면 어쩔 수 없어.”
도대체 왜 저렇게 상태가 안 좋은지 모르겠다. 탑에 며칠 갇혀 있고 식사를 못 한 것만으로도 사람이 저렇게 되지는 않을 텐데. 상태가 더 안 좋은데 정신력으로 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하면서 가 봤자 가서 죽으면 다 소용없어요.”
“나는 죽어도 괜찮아.”
드니스만 볼 수 있다면.
이본느가 주저앉아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미친 소리. 물이나 마셔요.”
아셀이 물을 건네며 숙소 밖을 살폈다. 아래층은 술집이었지만 사람이 적어 소음도 별로 없었다.
“이쪽은 되게 조용하네.”
쉴 줄도 모르고 달리던 아셀은 마르키아를 목전에 두고 잠시 길을 멈추었다.
북부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전쟁 특유의 긴박한 분위기가 강해졌다. 수도와 가까운 곳은 혹시나 싶은 상황에 대비하는 가벼운 긴장감 정도만 느껴졌지만, 마르키아로 가까워질수록 일반 사람들에게서도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런 분위기를 뚫고 수월하게 올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아셀 덕이었다. 아셀이 가지고 있는 패인지 뭐인지를 보여 주면 검문소도, 성문도 익숙하다는 듯 문을 열어 주었다. 오히려 전쟁 중이기에 더 쉽게 문을 열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아셀은 카를로이가 이런 시기에 가장 자주 쓰는 칼이었기에.
심지어 공작 측 귀족들이 몇몇은 항복하고 나머지는 델루아로 간 지금 시점에서는 아셀을 아니꼬워하는 사람조차 이젠 남지 않았다.
그동안은 동행 없이 다녔던 탓인지 이본느를 호기심 어린 얼굴로 보곤 했지만, 카를로이의 명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말하면 그마저의 관심도 사라졌다.
쉬지도 않고 말을 놀리는 탓에 처음엔 이본느는 며칠 내내 속을 게워 내거나 기절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익숙해져 미친 속도로 달리는 말 위에서도 그냥저냥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어떨 때는 아셀 대신 말을 몰기도 했다.
“마르키아는 쉽지 않아요. 변경백인 루이자 루탱은 내가 여기까지 내려온 걸 알면 직접 확인하러 올 거예요.”
“변경백이 지금 네가 오고 가는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어?”
단도를 만지작거리며 묻는 이본느를 아셀이 잠시 쳐다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단도를. 여기 와서 이본느가 처음 산 것이 저 단도였다. 어디에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이본느는 애매한 얼굴로 혹시 몰라서, 라고 대답했다.
아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이본느가 단도를 곱게 제 품 안에 넣었다.
“왜 대답이 없어. 변경백이 그렇게 한가하냐니까.”
“지금 같은 때니까 더. 없어도 만들어서 올 사람이고, 그게 안 되면 나를 자기가 있는 곳으로 부를걸요.”
“근데 너…… 카를로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은 안 듣지 않나?”
자연스럽게 나온 이름에 아셀과 이본느 둘 다 놀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셀은 어디서 또 사 왔는지 모를 빵을 씹어 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이름을 막 불러도 돼요?”
“…….”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그나저나 델루아 공작은 왜 그러는 것 같아요?”
“뭐가?”
“델루아령 밖으로 나오지를 않잖아요. 처음에 잠깐 나왔다가 이제는……. 그럴 거면 반란은 뭐 하러 일으킨 거야?”
“그 정도야?”
“이대로면 그냥 승산이 없어요. 지금이야 변경백 공격 정도는 잘 막아 내는 것 같아도 위쪽 군사까지 내려오면 끝일 텐데. 반란을 이렇게 부실하게 준비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요.”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이본느는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하나의 변수가 있다면 그건 베르니의 마법사였다.
하지만 구체적 가설을 세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예상할 수 있는 건 델루아 공작의 계획이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 그것 하나뿐이었다.
“어차피 변경백도 들랑시에 있을 거 아닌가? 이러나저러나 변경백을 마주치긴 해야겠지.”
“말을 맞춰야 해요. 단순 동행이라 하면 절대 안 믿을걸. 나한텐 그런 사람이 필요 없으니까.”
재수 없게도 들리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본느는 한참을 생각했다.
“잘만 하면 의심 없이 편하게 어둠의 숲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어떻게요?”
“그 사람은 그냥 확인을 하려는 거지, 널 의심을 하진 않을 거 아니야. 의심을 하기 위해 확인하는 거랑은 다를 거라는 말이지.”
“그건 그렇죠.”
“마법학자라고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은데……. 신원 확인은 네 존재 자체가 해 줄 테고. 네가 지금 전세에 해가 되는 사람을 데려왔다고는 생각 안 할 테니까.”
“마법학자?”
“어둠의 숲을 비롯한 델루아령에 마법이 쓰였다는 건 변경백도 알지?”
“네.”
“그걸 조사하러 왔다고 하는 게 그나마 신빙성 있겠어. 수도도 베르니 마법 사용 여부를 한번 조사를 했으니까. 어둠의 숲을 조사하겠다고 해야겠다.”
“마법석도 없잖아요.”
“그 마법석 어차피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 전엔 다 육안으로 했다고.”
“으음.”
“그리고 여기 미리 와서 조사를 하다가 뒤냐를 만나기로 했다고 하는 거지. 마법석은 수도 조사 마무리 후에 뒤냐가 들고 오기로 했다고.”
아셀은 골몰하는 표정으로 빵을 씹었다. 혼자서 책상도 두드리고 고개도 돌리고 하던 아셀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뒤냐가 아니라 폐하.”
“뭐라고?”
“뒤냐가 아니라 폐하를 만나기로 했다고 하자고요. 그럼 바뀐 계획을 전달하러 내려온 것도 되니까 더 신빙성 있을 거예요.”
“하지만 뒤냐가 지휘관으로 내려올 거라 하지 않았어?”
“그건 당신이 탈출하기 전이고요”
아셀이 먹으라는 듯 반 정도 남은 빵을 이본느 쪽으로 밀었다. 식욕이 딱히 없는 이본느는 그 빵을 잘게 부쉈다. 드니스가 온 생각을 사로잡고 있어서 그런 욕구 따위는 들 여유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이본느는 계속 잘게 기침을 했다. 아셀은 두꺼운 이불을 던지듯이 건넸다.
“우리가 마르키아로 향한다는 걸 알아채면 폐하는 직접 이곳으로 올 거예요. 지금쯤 알아챘을 거고요.”
“너랑 나 잡겠다고 직접 여기까지 온다고? 황제가 올 만한 곳은 아니야. 전세가 불리한 것도 아니고. 뒤냐만으로도 해결이 될 수준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카를로이는 자신을 싫어한다. 증오한다. 도망갔다는 이유로 친절히 잡으러 올 이유도 없는 것이다.
“베르니가 끼면 상황이 나빠질 수 있어요.”
“그럼 그때 가서 내려오든가, 아니면 오히려 피하든가 하겠지.”
“폐하는 미쳤어요.”
툭 내뱉는 말에 이본느는 멍하니 아셀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마지막으로 폐하의 모습을 봤으면 당신도 나처럼 생각했을걸요.”
카를로이 생각에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의도적으로 잊고, 밀어 두었던 생각이 밀려들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카를로이가 너무 미워서, 생각만 하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쳐서 억지로 잊고 드니스만 생각했다. 카를로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대가 죽어야 했는데.>
내가 죽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듯했던 차가운 얼굴, 그 목소리. 숨이 막혀서 이본느는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았다.
<죽는 게 나았을 텐데.>
지독하게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 정확히 말할 수도 없었다.
“모른다고 할 거예요? 폐하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당신 때문에…….”
“나는? 나는 멀쩡한 줄 알아?”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이본느를 보고 놀랐는지 아셀이 입을 다물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너도, 카를로이도 죽어도 몰라! 내가 카를로이 때문에 뭘 걸었고 포기했는지 모른다고! 나도 지금 미쳤어. 내가, 내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던 이본느가 또 숨이 막히는지 숨을 헐떡거렸다. 이본느가 침대에 엎어져 막힌 숨으로 울기 시작하자 아셀이 당황한 채로 이본느의 등을 두드렸다.
“왜 꿈속에 들어가는 마법은 없는 걸까.”
흐느낌과 같이 나오는 말은 처참하게 들릴 정도였다.
“너나 카를로이나 내 꿈을 볼 수 있다면 내가 지금 무슨 지옥에 있는지 알 텐데…….”
이런 상황을 처음 겪어 보는 아셀은 이제 등을 두드리는 것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엄마, 엄마……. 나 어떡해.”
몸까지 떨면서 울던 이본느는 계속 그 말을 했다. 엄마를 불렀다.
죽은 엄마가 보고 싶은 건가. 하긴 다 죽은 시체랑도 같이 있고 싶어 한 거 보면……. 멍하니 생각하던 아셀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신 엄마 안 죽었잖아.”
이본느가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들었다.
“뒤냐가 그랬는데. 당신 사생아라고. 그럼 죽었다는 공작 부인은 당신 엄마가 아니잖아요.”
이본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설마 당신 엄마가 델루아에 있는 거예요?”
한참 뒤에 이본느는 고개를 저었다. 아셀이 답답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아니란 거야? 사생아는 맞잖아요.”
“……아니라니까.”
“와, 미치겠네. 여기까지 와서도 아니라고요? 내가 지금 당신 돕다가 같이 목 날아갈 수도 있는 걸 아는 거예요? 폐하께는 말 못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근데 나한테도 말을 못 해 준다고?”
“아닌 걸 그럼 어떡하냐고! 아니라니까!”
적반하장으로 이본느가 소리를 질렀다. 오히려 본인이 더 답답하다는 얼굴이라 아셀은 기가 막혔다.
“아니, 뭐가 아니래! 앙센 백작이 그랬다는데! 증거도 있었다는데!”
아셀이 흥분했는지 생애 최고로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말해 주면 어디 덧나나?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거짓말 안 하면 죽는 병에라도…….”
아셀이 말을 하다 말고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동그란 눈에 충격이 어리더니 이내 숙소에는 침묵이 흘렀다.
“……설마 말을 못 해요?”
이본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뭐지? 협박?”
이본느는 미친 듯이 울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협박이라면 남들 안 보는 데서도 이럴 리가 없지. 마법?”
이본느는 계속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아셀은 자기 추측에 빠져 있었다.
“마법인가 보네. 이렇게 물어봤자 대답도 못 하는 걸 보면.”
이본느는 계속 고개를 저었지만,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런 마법이 가능하다고? 대체 어디서? 어떻게?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세상에 그런 게 있다고?”
아셀의 주인이었던 마법사도 마하에서는 꽤 이름을 날렸는데 이런 정신 마법은 듣도 보도 못 했다.
이본느는 이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울고 있어서 아셀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물어봤자 제대로 된 답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보니까 당신은 어차피 대답도 원하는 대로 못 하게 되어 있는 것 같고.”
이본느의 울음소리가 좀 잠잠해졌을 때 아셀이 말했다.
“내 추측을 폐하께 알려야겠어요. 편지가 폐하가 여기로 내려오기 전에 수도에 도착해야 할 텐데.”
아셀이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본느는 좀 잠잠해진 것 같더니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약한 울음소리가 끊길 듯 계속됐다.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아셀은 카를로이가 아닌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느꼈다.
* * *
직접 마르키아로 내려가겠다는 카를로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할 필요성을 아무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카를로이는 단호했다. 내려가겠다고 말하는 태도는 위압적인 걸 넘어서서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이 전쟁은 델루아가 내게 건 싸움이나 다름없는데, 내가 내려가지 않는다면 너무 우습지 않은가.”
“델루아를 잡아서 수도로 끌고 와 처형하면 아무도 우습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참전 여부가 아니라 벌의 무게가 결정합니다.”
“내가 그 지긋지긋한 개새끼와 직접 담판을 보겠다는데 왜 공들이 나서서 말리지? 그놈 목을 이번에야말로 따 버리겠다는데.”
야윈 카를로이의 얼굴은 지나치게 날카로워서 무시무시해 보였다. 눈이 시퍼렇게 빛나는 탓에 목소리 하나 높이지 않아도 귀족들이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럼 당연히 말리지요……. 뒤냐 공, 뭐라고 말을 해 보세요.”
가장 반대할 듯한 알렉시스 뒤냐는 의외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젯밤 카를로이의 모습이 알렉시스의 의지를 무참히 꺾어 버렸다. 피곤해서 반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젯밤 정원에서 자신의 침실로 들어간 카를로이는 전혀 동조하지 않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혼자서 바꾼 계획을 줄줄 말했다. 와중에 말은 잘해서 어이가 없었다.
<그럼 수도를 잘 부탁하지. 공이라면 잘할 거야.>
그러고는 나가 보라고 했다. 알렉시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일을 마쳤다는 듯이. 미친놈이었다.
상대할 의욕이 사라져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나온 알렉시스는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카를로이가 또 난동을 부린다는 사실을 전달받았다. 태평한 얼굴로 계획을 통보하던 사람은 어디 가고 미쳐서 날뛰는 짐승만 하나 있었다.
<꺼져. 내가 데려올 거니까.>
저기 황후가 있다고 높은 발코니를 그대로 나가려고 해 고르텐과 치료사가 기겁하며 그의 몸을 붙잡았다.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즉사였다.
<비키라고. 내가 직접 갈 거니까.>
술에 취해서 황후를 데리러 가겠다는 카를로이에게 치료사가 무표정으로 진정 마법을 썼다.
<……이러다가 내가, 내가 돌아 버리겠다고.>
제 머리를 쥐어뜯던 카를로이는 약에 취해 계속 이본느를 찾았다. 그러다가 나중엔 울면서 루라는 이름만 계속 부르는 것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덩치도 큰 사내가 피범벅 된 손으로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모습은 처참했다. 그 모습을 전부 다 봐야 했던 알렉시스는 단 하나의 생각만 했다. 이미 제대로 돌아 놓고 더 돌 게 남았나? 저 미친놈이 저 난리 치는 꼴을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었다.
정말 지겨워 죽겠다는 생각만이 알렉시스를 지배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었지만, 감정적으로도 변화가 있었다. 불쌍했다. 달갑지 않은 감정이었다. 알렉시스는 자신의 동정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고 고민했다. 그때처럼.
하지만 여전히……. 조카는 지독히도 불쌍한 놈이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감흥 없는 얼굴로 전날 밤을 회상하던 알렉시스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저 꼴을 계속 보느니 황후를 잡으러 전쟁터 한가운데로 내려가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낮과 밤을 저렇게 다르게 살다가는 진짜로 광증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뒤냐 공!”
“폐하께서 전쟁터 나가 보지 않으신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황자 시절 마하에서도 몇 달 계셨었는데.”
“그때는 황자셨잖아요. 게다가 폐하께서 내려가시면 수도는 누가 책임집니까?”
카를로이가 짜증을 숨기지 않고 끼어들었다.
“아까 내 말은 뭐로 들은 거지? 수도는 뒤냐가 책임진다. 내 권한은 전부 뒤냐에게 위임된다.”
“뒤냐 공작은 귀족원장의 수장일 뿐입니다. 뒤냐 공이 뭐라고 그런 권한을…….”
“내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지.”
단호한 답에 알렉시스가 고개를 들고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정작 황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리고 내게 남은, 나와 가장 가까운 혈육이지. 그런데도 자격이 없나?”
귀족들이 꿍얼거리는 소리가 작아졌다. “크로이탄의 피는 섞이지 않았잖아요.” 등등의 소리가 들려왔다. 카를로이는 진심으로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놈의 피 타령. 그렇게 치면 내 피에 뒤냐 피가 흐르니 상관없어.”
이윽고 카를로이는 주먹으로 의자를 내리쳤다. 이런 무용한 대화나 하고 있어야 하는 게 화가 났다. 그놈의 피, 피, 아주 제 몸의 피를 다 뽑아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델루아는 저 먼 방계인데도 황족이라며 잘만 대리를 시키더니, 자네들 태도가 베르니만큼 줏대가 없어. 어디 그놈을 죽여서 피를 한번 뽑아 보지 그러나? 나와 피가 얼마나 비슷한지.”
마침내 귀족들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동의하지 않으면 델루아 대신 자신들의 피를 뽑을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새벽에 바로 출발한다.”
예정했던 것보다 나흘은 더 앞당겨진 출발이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회의가 그렇게 끝이 났다.
귀족들이 다 나가도 알렉시스는 나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결국 먼저 일어선 것은 카를로이였다. 카를로이는 알렉시스를 지나치며 중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잘된 일이야. 공이 이 나라를 책임질 수 있는 위인이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 줄 기회가 될 테니.”
그걸 왜 자신이 보여 줘야 하나? 황제는 따로 있는데.
혼자 남아 카를로이의 말을 곱씹던 알렉시스는 마침내 그 말의 의중을 파악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저런 미친놈을 봤나.”
욕이 저절로 나왔다. 나라를 떠넘기려고 작정한 조카는 정말이지 답도 없는 인간이었다.
<내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지.>
<내게 남은, 나와 가장 가까운 혈육이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말인데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델루아로 가기 위해서 한 말일 뿐인데.
<알렉시스.>
자신을 부르던 아름다운 목소리.
<봐. 날 닮았지 않아? 이 아이는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뒤냐가 될 거야.>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말하던 빛나던 얼굴이 떠올랐다.
아델라이드는 왜 몰랐을까. 알렉시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뒤냐는 아델라이드 하나면 족했다는걸.
하긴 자신도 그렇다. 카를로이를 그렇게 기를 쓰고 뒤냐처럼 만들 필요는 없었을지도.
“……나도 늙었군.”
오랫동안 상실을 버텨 온 공작이 중얼거렸다.
<4권에 계속>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 4권
지은이|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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