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12화 (13/22)

12. 황제는 황후를 싫어할 수 없다 (2)

황후궁을 벗어나는 카를로이의 걸음이 너무 빨라서 알렉시스는 거의 뛰듯이 걸어야 했다. 이제 황후를 믿지 않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모습도 좋아 보이진 않았다.

“폐하, 시녀가 저 정도로 증언한다면 황후 또한 감옥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간신히 카를로이를 따라 잡아 말을 걸었건만, 카를로이는 들은 척하지도 않고 계속 걷기만 했다.

“하다못해 폐위라도 시켜야 합니다. 황후가 가담했든, 하지 않았든 반란군 수장의 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 태도를 보아선 협조도 전혀 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앞서 걷던 카를로이가 갑자기 우뚝 서는 바람에 뒤따라오던 알렉시스도 걸음을 멈췄다.

“뒤냐.”

짧은 부름에도 카를로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있는지 느껴지기에 알렉시스는 입을 다물었다.

“황후궁 인간들 심문부터 제대로 하게. 황후는 그 뒤에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카를로이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까지 와서 무엇을 아직 기대하기에 이본느를 그 자리에 두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뒤냐를 두고 집무실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혼자 있으니 당장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아서 카를로이는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손에 힘을 너무 주는 바람에 깨진 유리 조각에 베였던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조차도 무감했다. 그의 모든 감각은 이본느를 향해 있었다. 분노, 배신감,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괴감. 지금이라도 다시 이본느에게 가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다.

대신 그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꽃병을 치워 버렸다. 꽃병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지고 꽃들이 힘없이 바닥에 부딪혔다.

* * *

황후궁에 흐르는 침묵은 섬뜩하고 음산했다. 간혹 나는 소리라고는 밖에서 병사들이 움직이면서 내는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전부였다. 밤이 되자 그 분위기가 더 위압적으로 변해 이본느를 짓눌렀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갇혀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은 이본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 봐도 눈물이 기어코 비집고 새어 나왔다.

멍청했다. 공작의 이상 행동을 보고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이런 무모한 짓까지 결국은 할 사람이라는걸.

무서웠다. 공작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하루아침에 이런 신세가 된 것도, 카를로이가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는 것도 무서웠지만, 가장 무서운 건 따로 있었다.

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면 대체 드니스는 어떻게 된 건지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설사 드니스가 무사하다 해도, 이본느가 여기서 의심받다 개죽음이나 당하면 어차피 드니스를 못 보게 되는 건데. 대체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영지로 내려갈 수 있을까.

메리앤조차 곁에 없어 혼자 텅 빈 침실에 남아 있으려니 생각은 계속 밀려오고, 불안감에 몸이 떨리고 눈물이 나왔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우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적막한 가운데 울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카를로이가 와 있었다. 침대 옆 등의 흐릿한 불빛으론 침실의 어두움이 다 걷히지 않아 헛것인가 싶었다.

“……칼?”

인영이 침대 쪽으로 가까이 오는 것을 보니 헛것이 아닌 듯했다. 이윽고 카를로이가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주 옅은 술 냄새가 풍겼다.

입을 달싹이던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얼굴을 보고 숨만 약하게 들이켰다. 짙은 괴로움이 선연한 얼굴에 숨이 막혔다. 시린 눈에서 눈물이 흘러 볼을 타고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왜…….”

잠긴 목소리가 카를로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짧은 한 단어로 카를로이가 묻고자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아니에요, 폐하.”

울음 때문에 목이 멨지만 이본느는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정말로 아니에요. 저는 정말 몰랐어요.”

“심문이…… 시작되면 더 많은 것들이 밝혀질 겁니다.”

카를로이의 손이 가까이 오더니 이본느의 눈가를 쓸었다.

“그 전에 나한테 모든 걸 말하세요. 당신이 한 짓 모두.”

이본느가 망연한 얼굴로 카를로이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카를로이가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가 무엇을 참아 내고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말 못 하는 짐승보다도 못한 신세다.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차라리.”

충혈된 눈으로 카를로이가 이본느를 바라봤다.

당신이 공작의 사생아라고, 공작의 반란을 알고 있었다고, 황비의 일도 당신이 꾸몄다고. 차라리 이렇게 말해 주면 그는 이 자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정말이지 이본느에게 빌고 싶었다.

카를로이가 이본느의 두 팔을 잡고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술 냄새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솔직히, 제발 한 번만이라도 솔직히 말을 해.”

간절하게 바라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목에 닿았다.

이본느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수많은 거짓말에도 이본느는 단 하나만큼은, 한 번만큼은 진실을 말했으니까.

“……전 폐하의 사람이에요.”

눈물이 말라 버린 눈가에서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둠과도 같은 짙고 막막한 침묵이 둘 사이를 갈랐다.

“칼…….”

“그렇게 부르지 마.”

날카롭게 대답한 카를로이는 한참 뒤에 맥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비웃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내 사람이라……. 안됐군요. 그거야말로 지금 나에겐 가장 쓸모가 없는 것인데.”

모든 미련을 버린 듯한 모습으로 카를로이가 몸을 일으켰다.

“예전처럼 죽은 듯 있는 게 차라리 나에겐 쓸모가 있겠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고요한 침실 안에서는 그 말조차 또렷이 들려왔다. 이본느는 숨조차 삼키지 못하고 멍하니 카를로이의 무감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카를로이는 흐트러진 셔츠를 정리하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황후 탓은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을 거라고 착각한 내 잘못이니까.”

“폐하.”

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이 카를로이는 가볍게, 너무나 가볍게 몸을 돌렸다.

침실을 나가려는 카를로이를 붙잡으려 급하게 몸을 일으켜 움직이던 이본느가 침대에서 떨어지듯 바닥에 넘어졌다. 카를로이는 고개만 돌려 바닥에 주저앉은 이본느를 흘낏 내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까지 그런 연기를 하고 싶은가 봅니다. 하긴, 사생아라도 피가 어디 가는 건 아니겠지.”

그게 끝이었다. 카를로이가 침실을 나가며 닫히는 육중한 문소리가 귀를 울렸다. 문이 닫히자 모든 것이 아득해지더니 시야가 흐려졌다.

해서 이본느는 제 침실을 나가자마자 괴로운 듯 얼굴을 손으로 쓰는 카를로이를 알지 못했다.

* * *

열흘쯤 지나자 크로이센은 가시적으로 갈라졌다. 수도까지 반란 소식이 상세하게 퍼졌고, 델루아 근처의 영지들은 물론, 수도와 거리가 꽤 가까운 영지 몇몇까지 델루아 측으로 넘어갔고, 그 지역들의 경계선은 모두 사병들로 채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클라이드 앙센이 마하의 원군을 받아 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마하 측에서 이번 반란이 진압된 후 클라이드를 마하로 보내 달란 조건을 내걸어 합의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어쨌든 적지 않은 수의 마하 원군이 수도 도착을 앞두고 있었다.

“앙센 경을 마하로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사실. 그도 크로이센에 큰 미련이 없으니까요.”

카를로이의 집무실에서 보고하던 알렉시스 뒤냐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문제는 앙센 경이 황비와 함께가 아니면 마하로 가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문제가 되진 않아. 굳이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로덴 후작이지. 허락할 리가 없으니까.”

자신에게는 문제가 안 된다는 카를로이의 말에서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비가 마하로 가든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든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했다. 아무리 형식적이었다 해도 부부였는데, 아니, 심지어 아직도 혼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태도에 뒤냐는 괜스레 델루아의 딸을 떠올렸다. 델루아의 딸에게 보이는 감정에 비교하면 천지 차이군.

카를로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이유가 반란보다는 황후에 있다는 것을 아는 알렉시스가 씁쓸하게 홀로 생각했다.

“하지만 폐하께서 이미 앙센 경에게 그리해도 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로덴 후작이 허락을 하든 안 하든, 황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허락해도 괜찮아.”

이런 보고는 그나마 쉬운 편이었다. 카를로이가 멀쩡히 상대하는 종류의 보고였으니.

알렉시스는 다음 보고를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며 잠시 말을 멈췄다. 반란군 측에서 황제가 황후를 인질로 잡고 있는 것처럼 황후를 내놓으라 선전을 하는 상황이었다. 황후가 황제한테 부당하게 구박받고 있으며 광증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수도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얼마 전 전체 회의에서는 실제 그런 내용이 담긴 황후의 친필 편지가 공공연히 돌아다닌다는 보고가 올라와 회의장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

수도 경계선 근처에서 잡힌 델루아 측 병사 하나에게 황후의 필체를 보여 주자 그 병사는 자신이 본 필체가 틀림없다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델루아 측에서 떠도는 그 편지도 그 필체였다는 것이었다.

그 대답을 들은 카를로이의 표정이란! 그 표정을 알렉시스는 잊지 못했다.

<델루아 공작에게 황후가 쓴 편지들이었습니다. 폐하의 행적에 관해서 꽤 상세하게…….>

굳게 다물린 입과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카를로이가 물건이라도 던지지 않을까 걱정한 것은 알렉시스뿐만은 아니었는지, 병사조차도 말을 하다 멈추고 말았다.

다행히 카를로이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알렉시스는 앞으로 황후 관련된 일은 개인적으로 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황후를 고문해야 한다는 귀족들의 거센 항의를 카를로이가 무시하고 있어서 회의에 이야기가 올라와 좋을 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지? 왜, 황후가 또 쓰러지기라도 했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알렉시스의 잡념을 방해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폐하를 보게 해 달라고 지치지도 않고 계속 요청하고 있긴 합니다만…….”

열흘 사이에 이본느는 두 번이나 쓰러졌다.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아 시종들이 강제로 먹여야 했다. 그 보고를 들고 카를로이가 당장이라도 황후궁에 달려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카를로이는 차갑게 무시했다.

어차피 감옥에 가두지 않을 거면 진찰이라도 받게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조심히 말해 보았지만, 누구를 닮았는지 연기 한번 소름 끼친다는 카를로이의 대답이 돌아왔다.

황후궁에 갇힌 황후의 몰골을 직접 본 알렉시스에겐 그것이 연기라고 생각되지 않았지만, 그런 의견을 굳이 말하진 않았다.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연기’를 하며 귀찮게 하면 메리앤부터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카를로이의 말을 전하자 볼이 움푹 팬 황후는 덜덜 떨다 또 픽 쓰러졌다.

알렉시스는 이 말도 전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사흘 전 일이었다.

“황후궁 소식 궁금하지도 않으니 그만 전하고, 자네가 알아서 하게.”

“이런 잡일이나 하는 게 제가 알아서 하는 겁니까? 제가 알아서 하고 싶은 건 황후의 처분입니다. 궁에 저렇게 두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당장이라도 황후를 어떻게 할 것처럼 짓씹듯 말을 뱉어 낸 카를로이는 황후의 거취 문제가 나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입을 다물었다.

이제 알렉시스는 그래,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두고 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무슨 보고까지 들어가야 저 답답한 태도를 집어치울지.

“황후궁에 접근한 자객이 간밤에 잡혔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려서 확실하진 않지만, 황후를 빼내러 온 공작의 수족이 아닐까 합니다. 벌써 두 번째인 걸로 봐서는 공작이 황후를 빼내려고 한다는 소문도 진짜인 듯싶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를로이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알렉시스가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거군.

알렉시스가 봤을 땐 카를로이는 겉모습만 제정신이었다. 반란에 대한 대처는 꽤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했지만, 황후에 대한 대처는 놀랍도록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었다.

“그리고 황후궁에 대한 조사를 하려고 합니다.”

“무슨 조사?”

“베르니와의 내통 가능성에 대해서입니다.”

일순 카를로이의 얼굴이 멍해졌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루엔가 시녀가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조건에 자백했습니다. 황후가 베르니 마법사를 황궁으로 부른 적이 몇 번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카를로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1차 검증은 이미 제 선에서 끝났습니다. 황후궁 하녀들에게 같은 증언을 받았습니다. 황후궁에 방문한 시기와 횟수, 마법사의 외관 묘사, 전부 다 일치합니다.”

알렉시스는 냉정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남자 마법사라는데 사통을 하던 사이인지, 베르니와 내통을 한 것인지는 알아봐야겠지요. 그 마법사는 아주 델루아령에 살았다더군요.”

의자 팔걸이를 붙잡고 있는 카를로이의 손은 얼마나 힘을 줬는지, 푸른 힘줄이 손등에 올라와 있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학회에 마력석을 요청했으니 조만간 황궁에 도착할 겁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듯 무슨 마법을 썼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사용 여부와 대략적인 빈도는 알아낼 수 있습니다.”

카를로이는 돌이라도 된 듯 미동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 순간에서야 알렉시스는 카를로이가 자신의 ‘조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너무나 불완전해 보이고, 약해 보이는 모습이 그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동생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감정이라는 게 참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알렉시스는 예전처럼 그를 한심하다며 타박할 수가 없었다.

“……마력석 결과까지 나오면 제 선에서 끝날 수는 없을 겁니다.”

정신 차리라는 타박이 아니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 정리를 하라는 조언이었다. 알렉시스는 사무적인 어조에 최대한 감정을 담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카를로이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알렉시스는 집무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잠시간은 혼자 두어야 할 듯했다.

알렉시스가 나간 뒤에도 카를로이는 움직이지 않고 굳은 듯 앉아 있었다. 알렉시스의 말이 잔상처럼 그의 머리에 달라붙었다. 내통, 사통, 남자, 베르니, 단편적인 단어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델루아에 뭘 숨겨 놓은 듯 언제나 가고 싶어 하던 이본느. 그것은 이내 모두 합쳐져 끔찍할 정도로 강한 감각으로 바뀌었다.

이본느가 싫었다. 아니, 미웠다. 당신은 대체 얼마나 나를 더 지옥까지 끌고 갈까. 끝은 언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본느를 온전하게 미워할 수 없는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진심으로 제 목을 조르고 싶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알렉시스가 그동안 왜 자신을 한심하게 보았는지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한심하고 멍청한 새끼가 맞았다.

자신이 이본느를 아무리 모질게 대해도, 이본느는 제가 느끼는 감정의 반도 모를 것이라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이 분노를, 이 배신감을, 이 괴로움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카를로이는 제 목을 조르는 대신 자괴감 어린 얼굴을 손에 얹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 * *

침실 창문은 나무판으로 전부 막혀서, 낮이나 밤이나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식사를 들고 오는 시종들이 꼬박꼬박 낮인지 밤인지 알려 주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 침대에 기대어 앉은 이본느가 멍하니 생각했다.

왜 낮과 밤이 구분이 잘되지 않을까. 낮도 밤처럼 보이고 밤도 낮처럼 보인다. 빛 하나 없는 방인데 가끔은 방이 환한 거 같기도 하고.

자신이 미쳐 가는 건 아닌지 무서웠다. 머리도 계속 아프고.

지금은 밤일까, 낮일까? 아까 시종이 들고 온 식사는 점심이었을까, 저녁이었을까.

이본느가 멍하니 생각을 더듬었다. 한참 뒤에야 시종이 저녁이라고 말한 것 같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럼 지금은 밤이겠지. 너무 이상해. 왜 이거 하나 기억해 내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까.

저녁은 반쯤 먹었다. 안 먹으면 또 쓰러질 거 같아서, 그럼 카를로이가 메리앤을 어떻게 할까 봐 무서웠다. 속이 좋지 않았다.

이본느는 자신의 뺨을 세게 한 번 쳤다. 이대로 미치면 안 된다는 마지막 이성이었다. 드니스가 어떻게 됐는지 알기 전까지는 미치는 것도 자유롭지 않았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정말로 드니스뿐이다. 얼얼한 고통이 느껴지자 정신이 드는 듯했다.

‘탈출해야 돼.’

제정신이 돌아오자 이 생각부터 번뜩였다. 일단 황궁을 나가서 마르키아령으로 가는 방법만 확보하면 된다. 마르키아에서부턴 델루아 영지로 몰래 빠져나갈 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릴 때 카를로이를 데리고 갔던 곳이니까.

그때도 살벌한 델루아령 경계를 뚫고 마르키아 근처로 갔다. 하지만 어떻게 그곳까지 가지. 아니, 일단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병사들이 몇 겹으로 문 앞에 있는데.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본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멍하니 생각했다.

다 먹었는지 검사하러 왔나? 아니면 낮이었는데 내가 밤이라고 잘못 생각했나. 아니면 문소리도 환청인가.

놀랍지도 않았다. 얼마 전엔 드니스가 우는 울음소리까지 들렸다. 꿈을 꾸는 것도 아닌데.

“……쓰러지는 척하는 걸로는 성에도 안 찹니까.”

카를로이의 목소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흐린 시야가 또렷해지면서 카를로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완전히 드는 듯했다. 화를 참을 수 없어 하는 얼굴.

“폐하.”

목소리는 잘 나오지도 않았다. 이본느는 지금이 밤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카를로이에게서 또 짙은 술 향이 풍겼기 때문에.

자신 때문에 술이 는 걸까. 얼굴도 반쪽이 된 듯했다. 제 몰골은 생각지도 못하고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얼굴을 계속 바라봤다.

그걸 고스란히 지켜보는 카를로이는 분노가 치밀었다. 사람 같지도 않은 몰골로 이러고 있는 게 보란 듯이 시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이본느를 착취한다는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두기만 했을 뿐, 반란자의 딸을 제 궁에서 호의호식하게 내버려 두는데도 이 꼴로 있을 이유가 대체 뭐가 있을까. 자신을 개새끼로 만드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러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차라리 그 생각만 들면 좋았을 것을, 빌어먹게도 걱정이 됐다. 이본느가 여기서 이렇게 말라 가다 죽는 건 아닐까 하고. 스스로의 초조함을 느끼자마자 더 큰 분노가 찾아왔다.

“얼마나 날 더 우습게 만들어야 그대 직성이 풀립니까.”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위압적으로 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본느의 어깨를 붙들고 뭐라 하고 있었다. 어깨에서도 느껴지는 왜소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이본느가 중얼거렸다. 뜬금없는 말에 카를로이가 화를 내는 것도 잊고 이본느를 쳐다봤다.

자기가 지금 어떤 꼴로 있는지는 알고 내 걱정을 하는 건가.

“이해해요, 나라도 그럴 거예요.”

목소리조차 바싹 마른 것 같았는데 어느새 말끝에 물기가 묻어났다. 카를로이는 도망가듯 제 손을 이본느에게서 뗐다.

“하지만 한 번만, 한 번만 절 영지로 내려보내 주세요.”

애원하듯 나오는 말에 카를로이의 몸이 차갑게 식었다. 이러려고 또 나한테. 또 나를 우습게 만들려고.

카를로이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보고 이본느가 매달리듯 그의 손을 붙잡았다. 도대체 손으로 무엇을 한 건지 상처가 가득했다. 문이라도 미친 듯이 두드린 건지.

“제발, 폐하……. 반란을 끝낼 수 있어요. 모든 걸 걸고 다시 돌아올게요.”

“그대가 가진 게 무엇이 있는데? 뭘 건다는지 모르겠군.”

“약속하셨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의 약속이란 단어에 진절머리가 났다. 카를로이가 일그러진 얼굴로 이본느의 손을 차갑게 내쳤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델루아를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결국 이본느의 눈에서 눈물이 또 떨어졌다. 카를로이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저 눈을 없애든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정말 미쳐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잘못은 전부 당신이 했는데 왜.

“정말 대단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감쪽같이 연기할 수가 있지?”

카를로이가 허탈한 듯 중얼거리는 말에도 이본느는 칼같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마저도 질렸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지독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이 기분을 대체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저 여자도 느낄 수 있을까.

“이 상황에서까지. 나한테 안기면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건 진심이었어요.”

이본느의 대답이 너무나도 우스워서 웃음이 터졌다. 영지로 내려가 보겠다고 자신한테 끊임없이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게 우습고, 화가 나고, 복수하고 싶고. 그 영지에 있다는 마법사 때문일까, 그런 생각이 들면 미칠 것 같았다.

“그건 재밌군요. 나는 아니었는데.”

반쯤 남은 비웃음이 카를로이의 대답에 노골적으로 묻어났다. 충격받은 듯한 이본느의 얼굴을 보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잔인한 쾌감이 느껴졌다. 가슴을 할퀴는 느낌도 쾌감의 일부라 생각하기로, 믿기로 했다. 더 괴롭히고 싶었다.

카를로이의 손길에 이본느는 쉽게 침대에 쓰러졌다. 그 위에 올라탄 그의 손이 이본느의 옷에 닿았다.

“이번에도 피하진 않겠지. 그댄 진심이라고 했으니까.”

자신의 뺨이라도 때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는데 이본느는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말리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가만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듯이. 그것이 마치 제까짓 게 진심이라고 우기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반쯤은 오기로 거칠게 옷을 푸는데도 이본느는 여전했다. 입술을 가는 목에 가져다 대자 충동이 밀려들었다. 이대로 그 살결에 얼굴을 묻고 정신을 놓을까 하는 충동과 여기서 더 상처 주고 싶다는 충동이 번갈아 오갔다.

물기가 느껴졌다. 이본느의 눈물이 어느새 볼을 타고 흘러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진짜인 것만 같은 눈물에 카를로이는 입술을 떼고 이본느를 내려다보았다.

드러난 맨몸이 어둠에서조차도 훤히 보였다. 형편없이 야윈 몸, 안쓰러울 정도로 눈에 띄는 쇄골, 힘없는 표정, 손의 상처, 그리고 계속 떨어지는 눈물, 눈물, 눈물.

숨이 턱하니 막혀 와서 도저히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카를로이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역겨워서 도저히 더 못 하겠어.”

이본느의 눈을 본 순간 카를로이는 확신했다. 이번에야말로 이본느를 상처 입히는 데 성공했다고. 자신이 느끼는 기분의 반이라도 느끼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그 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다시 여며 주지도 않은 옷은 그대로, 너절하게 이본느 주위로 흩어져 있었다.

“폐하…….”

꺼져 가는 목소리로 이본느가 그를 불렀다. 카를로이는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발, 부탁이에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 주세요, 저를.”

지치지도 않는지 똑같은 소리였다. 어쩌면 카를로이가 주는 모욕에도 가만히 있었던 건 다 이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델루아로 보내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숨겨 두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델루아로.

“그대만 왜 여기 남았을까, 진작 영지로 달아나지 않았을까 궁금했었는데…….”

카를로이는 침대에서 벗어나며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날 농락하고 속이라고, 공작이 그렇게 단단히 명해 두고 간 모양입니다.”

비꼬는 게 아니었다. 깨달음이었다. 반란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혔는데도 자신은 밤중에 이곳에 와서 이딴 짓이나 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조차도 델루아가 원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본느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눈물을 흘리면서도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마저도 힘이 드는지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런 몸으로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문득 카를로이는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이본느가 애쓰는 것을 지켜보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나마 있던 정으로 감옥은 가장 좋은 곳으로 보내 주도록 하지요.”

그는 이본느를 외면하고 뒤를 돌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흐릿하게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끔찍한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아무것도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게 해 오로지 이본느로만 가득 찬 끔찍한 공간에서.

도망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감옥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이본느의 머리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탈출해야 한다.

정말 감옥에라도 들어가게 되면 탈출은 꿈도 못 꾸게 될 터였다. 델루아로만 내려가면, 드니스도 찾고 그 망할 브로치인지 뭔지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대체 어떻게. 머리가 어지러워 토할 것 같았다.

문득 이본느는 이 침실에 달빛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비틀거리는 몸으로 간신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래, 허술하게 할 리가 없지. 낙담한 얼굴로 이본느는 한참 문을 쳐다봤다.

자물쇠? 열쇠는 누가 들고 있을까. 아니, 누군지 알면 그걸 내가 가져올 순 있나.

이본느는 어둠 속에서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 * *

“나는 아닌 것 같아요.”

앞도 뒤도 없는 말을 불쑥 내뱉는 아셀을 보고 알렉시스가 미간을 좁혔다. 저렇게 마구 끼어드니 좀 밖으로 돌리라고 해도 카를로이는 말을 듣지를 않았다.

게다가 얼마 전에 수도 바로 위에 위치한 영지에서 반란군을 한 번 크게 치고 와서 그런지 아셀은 알게 모르게 더 기고만장해 보였다. 카를로이는 그런 모습에 익숙한 듯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를 했다.

“뭐가 아니란 거야? 수도 방어는 이쯤 하면 됐어. 이때 우리가 델루아 쪽으로 밀고 들어가야 해. 마하 원군을 전부 동원해서라도.”

아셀은 여전히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다.

“왜 그래? 책임은 네가 아니고 앙센이 맡게 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넌 이제 수도에 있어.”

“그런 거 말고요. 황후요.”

알렉시스는 한숨이 아니라 신음을 내뱉었다. 루푸스에 맹세코 자신은 사람 때문에 신음을 내뱉어 본 적이 없었다. 크로이탄 황실 남자들 때문에 한숨은 생애 내내 땅이 꺼지도록 쉬었으나, 그게 끝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나오게 하는 인간은 아셀이 처음이었다.

도무지 정도라는 걸 모르고 눈치라는 게 없었다. 모처럼 카를로이와의 회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저렇게 찬물을 끼얹나. 아니나 다를까 카를로이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가끔 그런 눈빛을 볼 때면 알렉시스는 사람의 광증이란 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걸까 궁금해지곤 했다. 이본느 델루아에 대한 감정만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카를로이는 광증이 맞을 터였다.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지? 뭐가 아니란 거야.”

“그날 내가 정원에서 봤거든요. 도망갈 생각을 하는 거 같진 않았는데. 공작이랑 한 편은 아닌 거 같아요.”

“같진 않았다는 대체 무슨 말이야. 성문을 나가다 잡히기까지 했는데 네 추측만 있으면 다야?”

“네.”

카를로이마저 말문이 막히게 하는 아셀의 태도에 알렉시스는 경탄해야 할지, 경을 쳐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못 엄한 얼굴을 하고 알렉시스는 아셀을 쳐다봤다.

“자네는 좀 나가 있지.”

카를로이보다 알렉시스를 불편해하는 아셀이 그 말에 부루퉁한 얼굴로 카를로이의 뒤에 가서 섰다. 카를로이를 빤히 내려다보는 꼴이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카를로이 신경을 박박 긁어 놓고 그런 걸 바라다니 저럴 때 보면 영락없는 바보였다.

“그래, 좀 나가 있어. 넌 쉬지도 않나? 피 냄새가 빠지지도 않았는데.”

카를로이의 짜증 어린 대답을 듣곤 아셀이 입을 삐죽였다.

“사생아도 내 말이 맞았잖아요. 그때도 증거가 없다고 뭐라고 해 놓고.”

“지금도 증거는 없어.”

“이상한데…….”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풀어 주기라도 해? 죽고 못 사는 아버지랑 만나라고 영지로 데려다줘? 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

“내가 황후 만나 봐도 돼요?”

해맑은 아셀의 질문에 결국 알렉시스는 이마를 짚었다. 저런 미친놈이 다 있나.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된다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짜증스러운 태도지만 대답은 꼬박꼬박 해 주던 카를로이가 이번엔 말없이 아셀을 노려보았다. 아셀은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그런데 새삼 왜 이렇게 화가 치미는지 모르겠다.

일단 황후한테 저렇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사이라도 되나? 입만 열면 황후, 황후, 황후. 이젠 만나고 싶다고 아주 대놓고.

생각은 꼬리를 물고 또다시 황후궁을 드나들었다던 베르니 마법사에 이르렀다. 그 미친 새끼는 대체 또 누굴까. 키아나가 클라이드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처럼 이본느도 그럴까.

점점 험악해지는 카를로이의 얼굴을 보고 알렉시스는 눈빛으로 아셀에게 전했다. 이젠 진짜 나가라고.

다행히 이번에는 위기감을 느꼈는지 아셀은 눈치를 보다 집무실을 나갔다. 눈치와 정도가 아주 없는 건 아닌 듯했다. 하긴, 그 정도 감각도 없다면 이미 전쟁에서 죽어 나갔겠지. 그 정도로 카를로이는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카를로이가 여전히 언짢은 기색으로 알렉시스를 쳐다보았다.

“감옥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서쪽 탑에 마련해 놓았는데, 그때 이후로 별다른 말씀이 없으셔서.”

“……조만간. 일단 몸이 좀 성해야 보낼 것 아닌가.”

“언제는 연기라고 하시더니.”

저번 밤 이후 홧김에 알렉시스에게 감옥에 보낼 거라고 말해 놓긴 했지만, 막상 보내려니 내키지 않았다. 나가는 것 빼곤 다 되는 황후궁 침실에서도 몰골이 그 모양인데 탑으로 보냈다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야윈 몸이 계속 카를로이를 괴롭혀서 그는 결국 메리앤과 같이 가두었던 치료사 말런을 감옥에서 빼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상시 대기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본느의 체질 때문에 전담 치료사가 필요하니 어쩌니 했던 델루아 공작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지.”

차라리 자신도 수도를 떠나 델루아 영지 쪽으로 내려가야 하나 싶었다. 이곳에서는 뭘 해도 이본느, 이본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상황은 나쁘지 않으니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마하 원군 도착이 워낙 빨랐기 때문인지 델루아 쪽이 크게 당황한 것 같으니까요.”

“베르니는?”

“베르니는 계속 국경 부근에서만 맴돌고 있고요. 그런데 내부 상황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델루아 공작 말인가?”

“델루아답지 않아서요. 제가 아는 델루아라면 수도로 진입하는 선두에 섰을 텐데……. 꼭 그곳에 발이라도 묶인 사람처럼 델루아령 바깥으론 나가지도 않고 있어서 이상합니다.”

“목숨은 아까운가 보지.”

한창 회의를 하는데 갑자기 고르텐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고르텐은 바로 말을 하지 않고 계속 머뭇거렸다.

“왜, 무슨 일인가?”

보다 못한 알렉시스가 답답한 듯이 묻자 고르텐은 카를로이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알렉시스는 무슨 일인지 직감했다.

“아, 저…….”

말을 시작하던 고르텐이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마치 마음의 준비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황후께서…… 황후궁을 나가시려다 잡히셨습니다.”

고르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책상 위의 종이가 구겨졌다.

* * *

아셀은 괜히 황후궁 근처를 배회했다. 그는 나름 카를로이의 총애를 받는 측근으로 크로이센 전역뿐만 아니라 황궁에서도 모든 곳을 멋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황후궁 유폐 사건 때는 그조차도 출입을 금지당했다. 해서 들어가진 못하고 괜히 근처만 빙빙 돌고 있었다.

그의 호기심은 이제 치사량에 다다르고 있었다. 궁금해서 죽기 직전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궁금하고 어려운 건 처음이었다. 무언가 아주 심하게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정원에 앉아 있던 그 날의 이본느를 카를로이도 직접 봤다면 자신처럼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러다 그는 자신과 비슷하게 옆을 배회하는 하녀 하나를 발견했다. 나야 그렇다 치고 쟤는 왜?

“악!”

갑자기 나무에서 똑 떨어지는 아셀을 보고 하녀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대체 어떻게 여기서 사람이 나오지?

아셀은 쉿,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병사한테 걸리면 큰일이었다. 하녀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뭐 해?”

“네, 네?”

“여기 돌아다니다 걸리면 죽는데, 뭐 해?”

지는. 하녀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 아니. 황후궁에서 일하던 친구가 어떻게 됐는지 걱정되어서…….”

“거짓말. 거기 하녀들 다 친구 없다고 그랬는데.”

“아니에요, 있어요.”

“걔들 친구면 너도 잡혀가야 했는데?”

하녀가 불안한 듯이 눈을 도로록 굴렸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어린 얼굴의 남자는 무섭게 생기진 않았지만, 질문이 너무 많았다. 어떡하지.

“그럼 그건 뭔데?”

“네? 뭐가요?”

“품에 숨겨 둔 거는 뭐야? 편지? 독? 돈?”

하녀가 입을 떡 벌렸다. 그제야 자신이 품에 뭐가 있는 사람처럼 대놓고 가슴팍을 부여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정말 어떡하지.

“병사한테 잡혀가는 것보단 나한테 말하는 게 나을걸. 여기서 잡혀가면 너 단두대야.”

거짓말이었다. 바로 단두대행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아셀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하녀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아셀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하녀가 조심히 물었다.

“저, 누구세요?”

“나는 아셀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황후 폐하와의 관계가? 혹시 메리앤을 아세요?”

“응. 친해.”

아셀의 태평한 대답에 하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수상한 편지 들고 다니다가 잡혀서 괜한 꼴 당하느니 그냥 이 남자한테 주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이 편지를 지금 며칠 동안 들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불안해서 찢어서 버릴까 싶다가도 델루아령에 있을 친구 제인이 생각나서 또 그럴 수도 없고.

“이거 좀 그럼 메리앤에게 전해 주세요. 딸이 보낸 편지라고 하면 알 거예요.”

“딸? 델루아에서 온 편지야? 누구한테 어떻게 받았어? 어떻게 수도까지 그 편지가 올 수 있지?”

“아니, 저도 잘 몰라요……. 저는 그냥.”

“황궁에 델루아 사람들이 더 있구나? 그럴 것 같았어. 황후궁에만 있을 리는 없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누가 전해 줬어, 이거? 병사 중에도 있겠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질문에 하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병사들한테 걸린 것보다 낫긴 한데, 이걸 다 대답해도 어차피 잡혀갈 것 같은데.

“이 궁에 남은 델루아 사람들 몇 명 얘기해 주면 보내 줄게.”

“진짜요?”

“응. 근데 너도 이 궁 나가. 편지는 내가 전해 줄게.”

“궁을 나가라고요?”

“응. 내가 너를 죽이는 것보단 네가 궁을 나가는 게 낫잖아. 델루아 사람은 여기 있으면 안 돼.”

갑자기 죽이니 마니 운운하는 말에 소름이 끼치는 것도 잠시, 그제야 하녀는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순둥한 얼굴, 어눌한 말투, 황제 옆에 붙어 다닌다는 마하에서 온 외국인. 이번 전쟁에서도 그가 벤 사람들의 목으로 탑을 쌓고 돌아왔다고 했다. 슬쩍 내려다보니 그의 허리춤엔 칼이 있었다.

하녀는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하듯 편지를 건네주곤 아는 것을 모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이본느는 황후궁 경계를 책임지는 경비대장에게 달려들어 열쇠를 빼내려다 제압당했다고 했다.

왜 황후궁 침실까지 들어갔냐고 묻자 경비대장은 황후 전담 치료사가 큰일이 났다며 자신을 불렀다고 했다. 치료사는 그곳에 왜 있었던 거냐고 묻자 이본느가 심하게 다쳐서 부른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들은 카를로이는 머리가 하얘져서 자신이 황후궁까지 어떻게 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황후궁 침실에 들어섰을 땐 자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게 들렸다. 저도 모르게 뛰어온 것이었다.

치료사 말런은 온몸이 묶여 병사들에게 잡혀 있었고 이본느의 옷과 손은 피투성이였다. 카를로이는 그만 심장이 내려앉아 다리 힘이 풀릴 뻔했다.

도대체 뭘 어떻게 관리했으면 이런 일이 나냐고 고함을 지르던 카를로이는 이본느가 일부러 저 자신을 찌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힘이 빠졌다. 치료사를 부르려고 일부러 자신의 팔을 찔렀다는 얘기였다.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또! 자신이 미친놈처럼 치료사를 풀어 줬더니 또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이본느에게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겁니까?”

정말 미친 게 분명했다. 경비 대장한테 열쇠를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그것부터가 이본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현실성 없는 일에 달려들다니 미친 거다.

카를로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본느는 카를로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은 어디 가고 눈빛이 형형했다.

“델루아로 가야 한다고 말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이 아닌 듯한 표정으로 제 할 말만 하는 이본느는 어딘가 익숙했다. 카를로이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델루아 공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분이 더러워졌다. 대단했다. 이보다 더 개 같아질 순 없다고 생각해도, 매번 이본느는 그 이상을 가능하게 했다.

“내려가면 대체 뭘 하려고?”

카를로이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이번엔 정말 내가 미쳐 버렸다고 말하려고? 아니면 델루아에도 또 다른 남자가 있나?”

목소리에 점점 더 분노가 실렸다. 이본느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델루아 공작에 대한 증오는 잊힐 정도였다.

“브로치를 가져오겠다고 했잖아요. 왜 이렇게 사람 말을 안 들어요. 가져오라고 해서 내가 가져오겠다는데.”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는 모습에 공포까지 느껴졌다. 와중에 아무런 부인도 하지 않는 모습이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본느를 상대하고 있으려니 자신도 어딘가 신경이 끊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카를로이는 무릎이 꿇린 채로 묶인 치료사 말런을 쳐다봤다.

“치료는 다 끝난 건가?”

“네? 네, 네……. 지혈은 다 했습니다.”

말런이 벌벌 떨며 간신히 답을 했다. 카를로이는 무표정으로 옆에 있던 병사의 칼을 뽑아 들었다. 눈 깜짝할 새 칼이 한 번 휘둘러지고 말런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시종들과 병사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시체는 치우고 황후는 서쪽 탑으로 데려가서 가둬라.”

피 묻은 칼을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나는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모두의 귀를 날카롭게 긁었다.

“이따위 헛수작 못 하게 감옥 안엔 물건 하나 들이지 마라. 이 시체 꼴 나지 않으려면 황후 말은 들어주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조용하게 명령을 내리는 카를로이는 이본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병사들이 눈치를 보며 시체를 끌고 나갔고, 다른 병사들은 이본느를 잡으러 다가갔다. 하지만 이본느가 몸을 웅크리고 떠는 바람에 병사들이 어쩌지도 못하고 이본느 주위만 맴돌았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하고 병사들은 지레짐작했다.

“탑은 싫어……. 탑은 싫어.”

이본느가 중얼거렸지만 카를로이는 깔끔히 무시하고 병사들을 보았다.

“내가 뭐라 했지?”

남의 피를 묻히고 묻는 카를로이의 모습은 무서웠다. 말런 꼴이 되고 싶지 않았던 병사들은 그제야 이본느의 양팔을 잡았다. 딱 그것까지만 보고 카를로이는 황후궁을 나와 버렸다. 이본느가 탑에 끌려가는 것까진 도저히 두 눈으로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더 일찍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카를로이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흔들린 대가가 지나치게 크다.

* * *

일반 감옥 정도야 아셀이 밥 먹듯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니 메리앤을 만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내용을 보지 말라는 말은 딱히 없었으므로 감옥에 가는 길에 아셀은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는 시답잖은 내용밖에 없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둥, 오빠는 공작을 보필하느라 여전히 바쁘다는 둥, 여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둥. 암호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메리앤은 독방에 갇혀 있었다. 심문이라도 당한 건지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왜……?”

갑자기 나타난 아셀을 보고 메리앤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셀은 말없이 편지지를 내밀었다. 편지지가 무엇인지 대번에 눈치챘는지 메리앤이 황급히 편지를 주워 들었다.

메리앤이 편지를 읽는 동안 아셀은 메리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표정이 분명히 바뀌었다. 아셀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상적인 문구가 암호로 쓰였음을 깨달았다.

무엇에 대한 내용일까?

“왜, 왜 이걸 곧이곧대로 나한테 전해 준 거예요?”

메리앤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아셀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궁금해서…….”

메리앤은 아셀의 대답을 이해하는 눈치가 있었다. 이본느에게 비상한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던 아셀을 기억하고 있었다.

카를로이와는 다르게 아셀이 돌아가는 상황을 의심스러워한다는 것을 깨달은 메리앤은 절박한 표정으로 아셀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다 모함이에요. 나랑 황후 폐하는 모함에 빠진 거예요.”

“누구의 모함? 공작이 왜 모함을 해?”

“그건……. 우리도 몰라요. 하지만 우린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이 편지를 황후 폐하께 제발 전해 주세요.”

“황후한테?”

“그럼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메리앤의 말은 확실히 아셀의 구미를 당겼다. 아셀은 말없이 메리앤의 편지를 다시 받아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본느가 유폐된 황후궁은 경비 강도가 너무 세서 자신이 들어갈 수가 없는데. 아셀은 고민에 빠졌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아셀이 찾아간 사람은 알렉시스였다.

반란이 터진 후 알렉시스는 황궁 내에 아예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기에 찾아가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왔냐는 듯한 얼굴의 알렉시스를 상대하는 것은 확실히 약간의 무리가 있었다.

“이거…….”

아셀은 머뭇거리다 종이 하나를 흘끗 보여 주었다. 이름이 줄줄 적힌 종이를 알렉시스가 확인도 하기 전에 아셀은 다시 종이를 품에 넣었다.

알렉시스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놀 사람을 찾는 거라면 고르텐에게 가.”

“황궁에 남아 있는 델루아 사람들 목록인데요.”

그제야 무관심하던 표정이 변했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어쩌다가. 필요해요, 안 필요해요?”

“조건이 뭐길래 이래?”

“황후를 한 번 볼래요. 황후궁에 한 번만 들어가게 해 줘요. 책임자잖아요.”

“이젠 아니야. 황후가 서쪽 탑에 갇혔으니까. 꽤 소란스럽게 끌려갔는데 못 본 모양이지?”

아셀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렉시스는 의심 어린 기색으로 물었다.

“왜 자꾸 황후를 보려 하는 건가? 폐하께서 안 된다고 할 걸 알고 나한테 온 거군.”

“조사가 하고 싶어서…….”

“이상한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고?”

아셀이 기분이 상했는지 짝다리를 짚으며 반항적인 표정을 지었다.

“난 황후가 사생아란 걸 제일 먼저 알았거든요?”

도대체 물었던 질문과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 답인지 알렉시스는 한참 생각해야 했다.

그만큼 똑똑하다, 그만큼 충성심이 있다 뭐 그런 뜻인가? 아니면 그만큼 조사를 잘한단 뜻인가. 왜 대답을 이런 식으로 하지?

알렉시스는 잠시 고민하다 답을 정했다.

“5분, 그 이상은 안 돼. 괜히 폐하께 말하진 말고.”

“10분.”

“3분.”

“알았어요, 5분!”

한쪽이 다소 불만스러워하는 협상이 완료되자, 알렉시스는 종이를 건네받았고, 아셀은 알렉시스의 허가증을 들고 서쪽 탑으로 향했다.

정원에서의 밤 이후로 이본느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서쪽 탑은 주변부터 한기가 도는 것이 음산하기도 음산했지만, 또 공포감을 줄 정도로 지나치게 높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셀은 이 탑은 마하의 미친 감옥들, 그리고 델루아령의 그 탑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란 생각을 했다. 크로이센은 부족한 것이 많았다.

아셀을 안내해야 하는 병사 하나는 체력이 너무 약해 결국 아셀이 앞질러서 탑을 올라갔다.

감옥 앞을 지키던 간수는 허가증을 보고도 의심스러운 눈으로 아셀을 한참 살폈다. 치료사 하나가 죽어 나갔단 소문이 모두에게 확실히 퍼졌기 때문이었다. 잘못했다간 같은 꼴이 될지도 몰랐다.

“나 몰라?”

자의식 강한 기사를 흘끗 쳐다보고 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냐 공작이 괜찮다고 한 것이면 되겠지.

문을 한두 개쯤 열고 들어가자 그제야 이본느가 갇힌 독방이 나왔다. 그래도 황후라고 뭔가 신경 쓴 태가 나긴 나는데, 감옥 특유의 한기와 스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낡은 침대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아셀은 그것이 무언가가 아닌 이본느란 사실을 완전히 다가가고 나서야 깨달았다. 몸을 너무 웅크리고 있어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사람이 오는 기색도 못 느끼는 듯했다. 아셀은 가볍게 철창을 두어 번 쳤다.

“저기요.”

감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름에 이본느가 고개를 들었다. 이본느의 얼굴을 확인한 아셀의 눈에 잠시 충격이 스쳐 지나갔다. 창백하고 야윈 얼굴은 곧 있으면 죽을 사람처럼 보였다.

아셀을 보고도 이본느의 눈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어떻게, 왜 왔는지 그런 것들은 전혀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아셀이 품에서 편지를 꺼내 철창 안으로 슬쩍 내밀었다.

“델루아에서 온 편지예요. 제인이래요.”

넋이 빠져 있던 얼굴에 빛이 스쳐 지나간 것은 한순간이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본느의 얼굴이 다르게 변했다.

몸을 일으키는 동작은 지나치게 힘겨워 보이고 느렸지만, 얼굴은 필사적이었다. 아셀은 그런 얼굴들을 많이 보아 왔다. 황후는 지킬 게 더 남은 걸까, 이 상황에서?

이본느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받아 들었다.

[정원에 꽃이 많이 피었어요.]

그 문구를 읽은 순간 손에 힘이 빠져 편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영원히 읽고 싶지 않았던 문구였다. 드니스가 몸이 안 좋아졌다는 암시. 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에서 기어코 또 눈물이 났다.

왜지? 분명히 엄마는 더 좋아지고 있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안 좋았던 걸까. 지금은 어떻게 됐지.

숨도 못 쉬고 우는 이본느를 보고 아셀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궁금증을 해소하러 온 것인데 물어볼 수도 없고.

5분이 다 되어 가는지 간수가 종을 울려 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한참 울던 이본느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 아셀을 쳐다보았다.

“또 들어올 수 있어?”

“네?”

철장을 잡은 손마저도 뼈가 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힘을 다 짜내서 말을 잇는 이본느의 표정은 절박했다.

“이곳으로 한 번 더 와. 아무도 모르게, 꼭.”

“아니…….”

“사실대로 다 말해 줄 테니까 꼭 와야 해. 명심해, 너 나한테 빚진 게 있다는걸.”

눈물이 흐르는 채로 절박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안 되는데요.’라고 말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셀은 당황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살려 주세요.’라는 말에는 ‘안 돼.’라고 잘만 대답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익숙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별로 빚진 것도 아니지만 그걸 반박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셀이 나오지 않자 결국 간수가 들어와 아셀을 질질 끌고 나갔다.

아셀은 마지막으로 본 이본느의 얼굴이 마하의 노예 시장에서 팔리던 사람들의 얼굴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자유란 걸 느껴 보지도 못한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것은 분명 공작의 애정을 받는다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물건으로 취급받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비참함이 황후에게는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건 아셀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 * *

이본느가 서쪽 탑에 갇힌 지 일주일, 전세는 카를로이에게 유리해졌다.

반란을 짐작해 수도 방어 태세를 미리 강화해 둔 것이나 마하의 원군이 빨리 도착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라르투아와 긴밀한 교류를 통해 미리 상황을 파악해 둬 베르니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 말고도, 델루아의 태도가 이상한 것도 한몫했다. 호기롭게 반란을 일으킬 땐 언제고 전력이 형편이 없었다.

앙센령에서 크게 맞붙어 패한 뒤로 반란군은 모두 델루아 영지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델루아 공작은 단 한 번도 델루아령을 나온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선두에 서지도 않았다.

확실히 델루아 공작의 본거지를 치는 것은 다른 것처럼 순조롭지 않아 주춤했고,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이 모든 일을 지휘하는 카를로이는 꽤 멀쩡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귀족들은 위기의 순간에도 말도 안 되는 명령과 결정만 일삼던 선선대 황제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광증은 정말이지 헛소문인 듯했다.

게다가 이젠 싸고돌던 황후까지 탑에 가두지 않았나. 물론 가두지 않고서는 도저히 안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

서쪽 탑에 황후가 갇힌 바로 다음 날, 황후가 자신의 궁에서 베르니의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학자의 말에 따르면 ‘대체 얼마나 사용한 건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학자의 보고를 듣는 카를로이의 얼굴은 잠잠했다. 웬일로 황후 일에 별 반응이 없는 황제를 보고 귀족들은 열심히 외쳤다.

“더 볼 것도 없이 사형입니다. 반란과 별개로 이건 중죄예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참 대답이 없던 카를로이는 아직 이본느와 메리앤의 증언을 못 받았으니 좀 더 보류하겠다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지극히 상식적인 얼굴로 말도 안 되는 답을 내놓는 황제를 귀족들이 쳐다보자 카를로이는 더 나올 죄가 있을지도 모르니 두고 보겠다는 답을 추가로 내놓았다.

오, 델루아의 씨를 아주 말릴 생각인가 보다, 귀족들은 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워낙 그럴싸하게 굴었기 때문에 카를로이가 겉만 멀쩡하단 사실은 오로지 알렉시스와 고르텐, 그리고 아셀만이 알고 있었다. 이본느가 서쪽 탑에 갇힌 후 일주일 동안 그가 어떤 상태로 변했는지 그들 이외엔 아무도 몰랐다.

“또 왜 여기 있지? 당분간 넌 폐하 곁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보고를 하러 황제의 집무실로 온 알렉시스는 앞에서 얼쩡거리는 아셀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셀은 불만이 있는지 입술만 삐죽 내밀었다. 일주일 자중했으면 된 거 아니냐는 표정이었다.

아셀을 보고 난 이후 이본느의 상태가 심해졌단 사실을 듣고 알렉시스는 대체 뭘 했냐며 추궁했지만 아셀은 매번 딴청을 피웠다.

“난 폐하 호위니까 당연히 곁에 있어야죠.”

“넌 괜히 폐하 심기만 거스른다니까.”

“나 때문이 아니에요. 그냥 폐하가 미친 거예요.”

알렉시스는 아셀의 단어 표현에 대해 지적을 할까 고민하다 지쳐서 그만두었다. 계속된 업무로 인한 피로감 때문에 이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상태가 되진 못했다.

게다가 아셀 덕분에 황궁의 델루아 첩자들을 싹 잡아내서 속이 여간 시원한 게 아니었다. 미친 한스 델루아 놈, 그렇게 많이 심어 놓았을 줄이야.

알렉시스는 웬일로 너그러움을 발휘해 모든 일이 끝나면 아셀에게 국어 선생을 붙이든가 해야겠단 생각만 했다.

“어젯밤에 폐하가 숨을 못 쉬었어요.”

아셀이 속삭이듯 건네는 말에 알렉시스가 깜짝 놀라 아셀을 쳐다봤다.

“악몽을 꿨나 봐요. 치료사가 와서 고치니까 다시 숨을 쉬긴 했는데, 폐하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어요.”

“넌 어떻게 알지? 얼씬도 하지 말라 했는데.”

“한 명은 폐하를 지켜야 하잖아요. 폐하 모르게 있었어요.”

당사자도 모르게 남의 침실에 있었던 걸 꾸짖어야 하는지, 생각이 기특하다 칭찬해 줘야 하는지.

알렉시스가 고민하는 사이에 아셀이 가까이 다가왔다. 알렉시스를 항상 무서워하더니 몇 번 말 좀 해 봤다고 이젠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괴물 같은 적응력은 대인 관계에도 적용되는 듯했다.

“무슨 보고예요?”

알렉시스가 대답 없이 한숨만 내쉬는 것을 보고 아셀은 이본느와 관련된 일임을 깨달았다.

정말 이해가 안 돼서 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억울해 보이는 사람이 왜 이렇게 끝도 없이 뒤가 구린 게 계속 나오냐는 말이야. 정말이지 끝도 없이 계속 나왔다.

대체 베르니 마법을 이용한 것보다 심각한 게 무엇일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이본느에 대한 건 자신이 틀린 것일까.

“베르니보다 심각한?”

“다시.”

엄한 얼굴의 알렉시스를 보고 아셀은 마치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적으로 눈알을 굴렸다.

“심각해요?”

“……궁금하면 같이 들어가든가. 또 폐하께서 미쳐 날뛰면 어차피 사람 하나는 더 있어야 할 거 같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알렉시스가 먼저 집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광경에 알렉시스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는 것이 뒤에 서 있던 아셀에게까지 들려왔다.

카를로이는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고르텐이 거의 울 듯한 얼굴로 그의 손에서 피를 닦고 있었다. 알렉시스가 저런 광경을 본 것도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본느가 서쪽 탑에 갇히고 난 이틀 뒤, 벌건 대낮에 갑자기 카를로이는 아무렇지 않게 단도로 손을 찔렀다. 알렉시스와 고르텐이 충격을 받고 쳐다보았지만 카를로이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정신을 좀 차리려고 그랬다고.

밤에는 잠을 자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다, 낮에는 멀쩡한 얼굴로 미친 짓을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지금도 그 미친 짓을 한 번 저지른 듯했다.

“왜, 무슨 일이 있나?”

손을 고르텐에게 맡겨 놓고 묻는 얼굴은 태평했다. 책상 위에는 전술 논의를 하는 크로이센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너무나 일상적이라…… 너무나 정상적이라 더 소름이 끼쳤다.

알렉시스는 감옥에서 계속 카를로이를 불러 달라고 애원한다던 이본느를 떠올렸다. 한스 델루아는 역시 대단한 개새끼였다. 저 멀리 델루아 영지에 있으면서도 사람을 능히 미치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이었다.

“무슨 일은 폐하께서 있으신 듯한데요. 또 왜 그러십니까.”

“왜 호들갑을 떠는지 잘 모르겠군. 지혈하면 어차피 1분 안에 멈추는걸. 자네 같은 장군이 이런 걸 아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치료와 고통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알렉시스는 이번 보고는 하지 말아야 하나, 하고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그런 알렉시스를 보고 카를로이가 피식 웃었다. 웃음조차도 심상해 보였다.

“왜, 황후가 또 무슨 짓을 했나?”

옛날처럼 치를 떠는 얼굴로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제정신처럼 보였을 텐데. 알렉시스는 머뭇거리다 조용히 답을 했다.

“시녀가 새로운 증언을 해서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무엇인데? 또 자네 선에서 1차 검증은 끝났겠지? 황후와 시녀장은 묵묵부답이고.”

“……네.”

“이번에는 대체 뭐지?”

지도 위에 이리저리 말을 놓으며 카를로이가 물었다. 옆에서 간간이 고르텐이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황후의 명에 따라 그동안 폐하의 찻잔에 독을 탔다고 합니다. 바로 죽는 것은 아니라더군요. 살아 계신 폐하만 봐도 알겠지만.”

지도 위를 분주히 움직이던 카를로이의 손이 잠시 멈췄다.

알렉시스는 처음으로 카를로이의 마음을 반쯤이나마 이해했다.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자신도 이번 것을 조사할 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델루아의 딸을 믿은 건 아니었지만 카를로이를 죽이려 들 거라고 생각진 않았다. 그런데 역시 생각 이상이었다. 역시 델루아의 딸이었다.

“독을 넣었다던 하녀를 찾으려 하니 이미 없었어요. 시녀장이 궁에서 내보냈답니다.”

심지어 황후와 시녀장은 증거를 없애는 철두철미함까지 보였다. 하녀는 무려 반란 하루 전에 사라졌다.

“일단 쓰던 찻잔이라도 학자들에게 보내 놓았습니다. 조사가 오래 걸리는 걸 보아선 크로이센에서 나오는 독은 아닌 것 같고요.”

알렉시스의 보고에 고르텐은 그만 헉 소리를 내다 자기 입을 틀어막았고, 아셀은 입을 벌렸다.

그런 무서운 짓을 벌였다고? 아셀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 짓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하지만 감옥에서의 이본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카를로이는 다시 지도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은 그보다 늦게 나왔다.

“그래? 황후는 뭐라던가?”

높낮이 하나 없이 부드러운 말투였다. 반응만 보아서는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 같았다.

“폐하가 오시기 전까진 말하지 않겠다고…….”

“그 사람 머리가 참 좋은 사람 같지 않나?”

불현듯 카를로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뜻을 읽을 수 없는 질문에 알렉시스는 당황해서 답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되물어야 했다.

“이런 것까지 빠짐없이 잘 이용하잖아. 대단해. 이미 들켰는데도, 그것까지 이용해서 날 써먹으려 하는 게.”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단순한 감상을 말하는 것처럼 건조한 말투에 알렉시스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카를로이는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지도를 한쪽으로 치웠다.

“마르키아 변경백에게 전갈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카를로이는 이본느 이야기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반란에 대한 주제로 돌아갔다. 알렉시스도 그 분위기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답했다.

“뭐라고 할까요?”

“어차피 이제 베르니는 더 움직일 것 같지 않으니 최소 인원만 남겨 두고 델루아 접경 지역으로 가라고.”

“전부 다요?”

“아무래도 전군사가 그곳에서 총공격해야 틈이라도 생길 것 같은데.”

“아, 네.”

매끄러운 명령을 듣고 알렉시스는 그제야 제대로 된 대답을 해내는 데 성공했다. 카를로이는 의아한 얼굴로 알렉시스와 아셀을 바라봤다.

“왜? 더 할 말 있나?”

“아, 아닙니다.”

“황후는 내가 나중에 찾아가 보도록 할 테니. 아셀 넌 또 무슨 일이지?”

아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쟁에서도 겁먹을 줄을 모르던 그는 이 상황에서야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를로이가 정말 완전히 미쳐 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알렉시스는 아무 말 없이 아셀과 고르텐을 끌고 집무실을 나갔다. 아셀과 고르텐은 나가면서까지 불안한 눈빛으로 카를로이를 계속 살펴보았다. 저러다 제대로 실성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알렉시스는 알았다. 카를로이는 지금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델루아를 잡기 전까지는 반쯤 나간 정신이라도 멀쩡한 척 다잡고 있겠지. 참 다행스러운 불행이었다.

모두가 나간 집무실에서 카를로이는 손깍지를 끼고 천천히 의자에 기댔다. 꿈에서 그는 언제가 깊은 물 속에 가라앉아 있어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그는 그곳에서 리리안의 시체를 보았다.

네가 그따위 것에 마음을 주니까 내 꼴이 이렇잖아. 네 꼴도 봐. 눈 뜬 시체가 속삭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깨어 있을 때도 마치 물에 잠긴 듯 모든 것이 울렁였기에 이것은 현실이고, 이곳은 수면 아래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되뇌어야 했다. 감각도 모호해져 자극이 없으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상처가 나면 그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지금도 그랬다.

이본느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나를 죽이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을 스스로 다시 읊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반복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고, 결국엔 머릿속이 다시 물로 차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은 풍랑이 일듯 울렁거려 속이 메슥거린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본느를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무서웠다. 둘 중 누군가가 죽지 않고 서로를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 * *

서쪽 탑 바로 앞까지 와서 갑자기 카를로이는 걸음을 멈췄다. 서쪽 탑 감옥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았다. 알아서 오지 않으려 했었는데…….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보지 않을 땐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그나마 망가진 인간이 아닌 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본느를 보면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무용하고, 잘못된 인간인지 숨 쉬는 매 순간 지독하게 느껴졌다. 이본느를 잠시라도 믿었던 자신의 실수가 무슨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폐하.”

탑 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깜짝 놀라 카를로이를 불렀다.

“특이 사항 있나?”

“아니요. 들어온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황후님 상태가 안 좋다고 위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카를로이는 결국 탑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며 이본느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부터 나를 죽일 생각으로 들어온 것이었을까, 궁금해졌다.

황비 독을 대신 마신 건 정말 모르고 실수로 마신 것이었는데 내가 착각했었던 걸까.

이것도 거짓말, 저것도 거짓말, 모든 게 다 거짓말.

이본느가 있는 층에 도착했을 때 카를로이는 마침내 한 생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본느의 잘못이 아니고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우습게 보인 내 잘못, 우습게 행동한 내 잘못, 다 자신이 자초한 결과라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그 모든 결론에도 불구하고 이본느를 죽일 결심을 하지 못하는 것 또한 제 잘못이었다. 그가 고작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건, 반드시 델루아 공작을 그 눈앞에 가져다 놓아 모든 진실을 입으로 털어놓게 만들겠다는 하찮은 다짐뿐이었다.

“황후는?”

“상태가 계속 안 좋아지십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정신인 것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철창을 두드려 대는 걸 멈추지 않아서 손을 묶어 두었는데…….”

“언제부터 저랬지?”

“원래도 심하긴 했는데 얼마 전에 델루아 공작이 크게 패했단 소식을 듣고부터 비교도 안 되게 심해졌습니다…….”

카를로이는 이런 하찮음마저 이본느에게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마저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고갯짓에 간수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이본느는 침대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잔다기보단 기력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숨이 턱하니 막혀 왔다. 침대 기둥에 천으로 묶인, 붕대가 감긴 손이 보였다.

자신을 망가트리면서 왜 저렇게까지 나가고 싶어 할까. 그렇게 공작을 아끼나.

이본느를 보고 있자 카를로이를 잠식하고 있는 습한 물이 그의 목을 조여 왔다.

이본느가 천천히 눈을 뜨고 한참 뒤에 카를로이를 바라봤다. 카를로이도 말없이 이본느를 내려다보았다. 무시할 수도 없는 눈물 자국이 그를 어지럽게 만들고, 그런 것 따위에 마음이 쓰인다는 사실이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는 델루아로 가야 해요.”

몰골에 비해 또렷한 말투로 이본느가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무서운 집념이었다. 머릿속에 남은 생각이 그거 하나 말곤 없는 모양이었다.

카를로이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왜?”

이유라도 알아야 덜 미칠 것 같았다.

“공작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아니면 그 마법사란 새끼가 보고 싶어서?”

카를로이의 반문에 이본느의 얼굴이 금세 흐려졌다.

“왜 그렇게 말해요? 언제는 가라고 그랬잖아. 내가 델루아로 가면, 공작을 끝낼 수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때는 당신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으니까.”

“난 정말 시간이 없어요…….”

“왜? 아직 날 죽이지 못해서?”

이본느가 큰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그 모습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했다.

“내 차에 탄 독은 대체 무슨 독인지 궁금해서, 궁금해서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라 왔는데. 천천히 죽이는 독인가?”

“그런 적 없어요. 아니, 나는 당신에게 그럴 수가 없어서…….”

말을 길게 하는 것도 힘든지 이본느가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어도 그저 아니라고만. 당신한테 소름이 끼쳐. 역겨워.”

“아니라서…….”

“정말 델루아의 목을 보기 전까진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을 작정이군.”

멍한 표정이던 이본느는 순간 원망하는 눈빛으로 카를로이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안 믿을 거면 왜, 왜 날…… 당신 사람이 되라고 했어요? 왜 자꾸 사람을 건드렸어?”

물기 어린 목소리가 점점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묶이지 않은 한 손으로 이본느가 자신의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답답한 듯 소리치는 이본느를 보니 적반하장이라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제발 무시해 달라고…… 잘해 주지 말라고 부탁했잖아. 그런데 그렇게 계속, 계속. 사람을 가만두질 않았잖아.”

이본느가 소리를 치다 말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카를로이는 본능적으로 떠는 몸을 붙잡았다가 작아진 크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몸의 냉기에도.

카를로이의 팔에 손을 얹은 채로 이본느가 카를로이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다 알았어. 당신이 날 이용하려고 좋아하는 척한 거, 역겹지 않은 척한 거, 나도 전부 알았어.”

두서없이 속삭이는 말은 마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허물이 찔린 카를로이는 할 말을 잃고 어두컴컴한 초록빛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약속했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하지 않아도, 이상해도! 믿어 주기로 했으면서……. 내가 그 말에 뭘 걸었는데, 어떻게.”

기어코 끝에 울음기가 터졌다.

“당신은 몰라……. 내가 뭘 걸었는지. 내가 당신을 선택해서 뭘 후회하게 됐는지…….”

후회라는 단어가 가슴에 박혔다. 내 사람이었던 적도 없으면서 언제 날 선택했다는 뜻일까.

“거짓말이었어. 한 번도 당신 말을 믿은 적이 없어.”

카를로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말로…… 뒤냐에게 날 넘겼어요? 나에게 약속을 하기 전부터?”

물어봐 줘서 고마울 지경이었다. 카를로이가 싸늘한 얼굴로 답했다.

“당신을 죽이든 어쩌든 맘대로 하라고 했지.”

속이 시원했다.

“나한테서 그 사람이 보인다고 했잖아요. 그건 거짓말이면 안 되잖아.”

이본느가 쓰러지다시피 카를로이의 품에 기대 흐느끼기 시작했다. 카를로이는 숨 쉬는 것이 괴로워졌다. 이본느가 그를 또다시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건 거짓말일 리가 없잖아. 내가, 내가 당신 사람이 되겠다고 한 것처럼…… 그것만은 거짓이면 안 되잖아.”

그 말에 카를로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괴감이 그를 후려친 탓이었다. 또, 이대로 넘어갈 뻔했다. 카를로이는 품에서 이본느를 매몰차게 떼어 냈다. 눈물이 번진 눈이 보였다.

“그것도 다 거짓말이었어.”

당신이 내 사람이 되겠다고 한 게 거짓인 것처럼. 한 번도 내 사람이 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카를로이는 실소를 흘렸다. 진정 우스워서 나오는 비웃음이었다.

“당신은 결코 그 애와 같을 수가 없어. 그 애를 볼 땐 내가 치미는 역기를 참을 필요가 없었거든. 연기할 필요조차 없었으니까.”

이본느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제나 그 눈물은 그녀가 가진 유일한 진짜인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분해서 흘리는 눈물이든, 절망해서 흘리는 눈물이든 이제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 눈물에 그나마 숨이 트였다.

“거짓말. 나에게서 계속 그 사람이 보인다고 했잖아요…….”

“그 말, 키아나가 알려 준 거야.”

이본느가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고 카를로이는 마침내 그의 복수가 성공했음을 알았다.

“당신을 너무 증오해서 차마 얼굴을 보고 있기도 힘들다고 했더니. 그런 현답을 내놨어, 키아나가. 예전에 내가 품었던 이를 대하듯 해 보라고, 그럼 황후도 속을 거라고.”

큰 눈에 빠짐없이 절망이 들어차는 것을 보고서야 카를로이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있었다. 모든 게 다 거짓인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어떤지 직접 느껴 봤으면 했다.

“결국 이렇게 당신이 속은 걸 봐. 키아나가 참 똑똑하지.”

이본느는 한참을 상처받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속이 시원했다. 이본느가 그러고 있는 걸 보니 그녀를 죽이지도 못하고 이렇게 계속 살려 두는 저 자신의 역겨움이 덜해졌다.

“나는 아니었어. 내가 당신 사람이 될 거라는 거, 그건 속인 적 없어.”

우습지도 않은 이본느의 거짓말엔 이제 카를로이는 그 어떤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내가 델루아로 가면, 다 증명할 수 있어요. 맹세해요. 원한다면 사람을 붙이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와 그깟 증명이 무슨 소용인데? 그대가 내게 아무것도 아닌데. 무엇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본느에겐 그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노라 말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처럼 거짓을 많이 말한 적은 없었을 거라고 카를로이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정말, 마지막이에요.”

마치 끊어진 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절박해 보이는 얼굴인데도 불구하고, 이본느는 꼭 카를로이에게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기회를 줄 처지라고.

“나한테 거짓이 아니었을 때는 있었어요? 진심이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한 번이라도.”

이본느가 또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카를로이는 자신의 손을 세게 쥐었다. 그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의 다짐을 잊지 않았다. 자신의 하찮음마저 이본느에게 내보이진 않으리라던 다짐을.

“당연히 있지, 정말 모르는 건가?”

짐짓 꾸며 내는 말투에 이본느의 눈에 옅은 희망이 비쳤다. 그동안 이본느의 눈에 자신이 저렇게 비쳤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항상 내가 말해 오던 진심이 있었잖아.”

그런 얼마나 자신이 우스웠을까, 쉬웠을까.

“당신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항상 말했을 텐데, 내가.”

이본느는 몸이 굳어 버린 듯 떠는 것도 멈추고 멍하니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저 돌려주는 것뿐이라고, 그뿐이라고 카를로이는 되뇌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본느는 몸도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카를로이를 보는 것을 멈추지도 않았다.

카를로이는 이 여자한테 자신이 그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적어도 상처는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본느에게. 아무 존재도 아닌 사람이었다면 상처받지도 않았겠지.

이본느의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마를 즈음 그 입이 열렸다.

“델루아로 가지 못하면…… 난 아마 죽을지도 몰라요.”

나직한 목소리는 애절하게 들렸지만 카를로이는 그것조차 자신을 협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그것이 자신에게 협박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이본느에겐 환멸을 느꼈고, 그렇게 보인 제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 지리멸렬한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리고 답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그대가 죽었어야 했는데.”

당신이 내가 죽기를 바라듯이.

“그때, 황비 대신 독을 마셨을 때 죽는 게 나았을 텐데.”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이제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 지쳤고, 고장 났다.

이본느는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다시 입을 열진 않았다. 다만 그가 그렇게 증오했던,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그 진득한 눈으로 그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항상 그랬듯, 그는 그런 눈에 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감옥을 나올 때까지, 카를로이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뒤에서 이본느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보는 것이 두려웠다.

매번 도망치는 듯한 기분에 그는 죽었어야 할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은 어렸던 그 날 죽어 없어졌어야 했을지 모르겠다고.

탑을 나왔을 때 해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어둠 속의 궁은 여전히 넓었으며, 적막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 *

아셀이 한밤중에 또 서쪽 탑의 간수를 찾아갔을 때, 간수는 귀찮은 듯한 눈빛으로 그를 살폈다. 아까 전 탑을 나간 황제가 뭘 좀 확인하러 다시 가 보라고 했다는 아셀의 말이 의심스러워 간수는 그럴 수 없다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눈앞의 유명한 호위 무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 기분 모르나?”

“뭐요?”

“요새 폐하 기분 거스르면 바로 단두대야.”

자신을 거절하고도 괜찮겠냐는 협박처럼 들리는 말에 간수가 인상을 찌푸리자 아셀은 저번에 내밀었던 알렉시스의 허가증을 또 보여 주었다.

“나 이미 한 번 허락까지 받았었는데.”

밤은 깊어지고 교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간수는 피곤함에 하품을 하며 허가증을 대충 흘낏 보았다.

황제의 측근은 뒤냐 공작과 눈앞의 이 외국인. 뒤냐도 맘대로 드나드는 서쪽 탑이었고, 엄밀히 따지면 아셀이 접근 금지 대상인 것도 아니었다. 크로이센의 모든 곳을 드나들도록 허락받았다는 인간 아닌가.

간수는 하품을 쩍쩍 하며 들어가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아셀은 태연하게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별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본느를 보아야 했다. 그동안의 감정은 호기심이었다면, 지금의 반은 혼란스러움이고 반은 원망이었다. 이 이상한 여자가 카를로이를 미치게 만들었다.

저번처럼 이본느는 눈을 감고 있지도, 몸을 웅크리고 있지도 않았다. 등을 기대고 앉은 채로 눈만 계속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아셀은 이상하게 그 모습이 카를로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책상에 태평히 앉아 일하고 말을 하던 카를로이.

“당신 때문에 폐하가 이상해졌어.”

아셀의 말에도 이본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다만 그 무감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왜, 불안해? 그 사람이 이대로 어떻게 되면 너도 여기서 설 자리가 없어질까 봐? 너도 혼자가 되니까.”

이본느의 조용한 물음에 아셀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름의 긍정이었다. 이본느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런 기분 아는데…….”

눈앞의 이상한 여자는 묻지도 않은 걸 혼자 중얼거렸다.

“정말 폐하를 죽이려고 했어요?”

“아니.”

“그럼 그 독은 다 뭐야? 당신들이 한 짓은 다 뭐예요?”

“……알아보러 갈래?”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임과 같아서 아셀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본느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아셀을 부담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델루아로 내려가면 이 모든 게 끝나. 내가 해결할 수 있어.”

아셀은 이본느가 미쳐 버렸다고 생각했다. 지금 어디를, 같이 가자고 하는 건지. 답할 말도 찾지 못할 정도로 아셀은 당황했지만, 이본느는 홀로 진지했다.

“루푸스에 맹세해. 그게 카를로이에게도 더 좋을 거야. 반란이 끝난다고 그가 괜찮아질까?”

델루아 영지에서도 생각했지만 이 여자는 특이한 방법으로 자신을 조종하곤 했다. 아셀은 그때 델루아령에서도 수상하기만 했던 이본느의 행동을 떠올렸다.

“네가 같이 가면 되잖아. 나 하나가 내려간다고 전세가 달라지지도 않고, 나 혼자선 허튼짓하지도 못해. 가서 네 눈으로 직접 봐.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준비라도 한 것처럼 이본느는 차분하게, 하지만 쉬지도 않고 말을 계속했다. 처음엔 이본느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들을수록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황궁 내에서 이본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지나치게, 너무 제대로 잘 짜여 있었다. 기시감이 아셀의 민감한 감각을 괴롭혔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날 죽여도 좋아.”

아셀이 대답이 없자 불안했는지 이본느의 목소리가 약간 초조해졌다.

“제발……. 부탁이야.”

또 그 얼굴이다. 마하에서 카를로이에게 제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울면서 빌었을 때 자신의 얼굴이 이랬을지도 모르겠다고 아셀은 생각했다.

그는 감옥을 지키는 간수를 한 번 흘끗 보고 탑의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 * *

카를로이는 언제나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새벽을 맞았다. 눈을 감으면 자신의 말을 듣고 있던 이본느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 그를 괴롭혀 댔다.

이 지긋지긋함을 끝낼 방법은 델루아 공작이나 이본느를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죽어야 끝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 돼. 왜 안 되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거짓말을 눈앞에서 다 확인시켜 줄 때까지는 안 된다고.

새벽 어스름과 함께 멀리서부터 불쾌한 소음이 들려왔다. 달갑지 않은 소란스러움, 다급함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소리에 맞춰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할 때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고르텐이 들어왔다. 얼마나 빨리 뛰어온 것인지 숨을 내쉬느라 정신이 없는 고르텐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대체 무슨 일이지?”

“황후, 황후 폐하께서.”

듣기만 해도 지겨운 이름이었다. 그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또 뭔가 대체? 또 나를 불러 달라고 소란을 피우는 건가?”

“그게 아니라, 하, 황후가 사라졌습니다.”

처음에 카를로이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가능하지 못한 일을 상상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탑에서 사라졌다니까요! 탈출했다고요!”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해 카를로이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 두근거림 때문에 대답이 늦게 나왔다.

“탈출을, 탈출이 어떻게 가능했다는 거지?”

이상하게 고르텐은 탈출 그 자체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더 어려워하는 듯했다. 카를로이의 불안감이 더욱 심해졌다.

“그게……. 아셀이 같이 사라졌습니다.”

아. 카를로이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본느 델루아, 그 여자가 어김없이, 다시 한번 그를 비참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처참한 자괴감만을 그의 몫으로 남겨 두고 달아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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