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황제는 황후를 싫어할 수 없다 (1)
이본느가 눈을 뜬 것은 아침이 오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몸이 어딘가 무거운 느낌이 들어 눈을 떴을 땐 남자의 맨가슴만 보였다. 몸을 옭아매고 있는 두꺼운 팔의 감각이 생소했다.
열이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잠재우고 고개를 위로 올리자 눈을 감은 카를로이의 얼굴이 보였다. 감은 눈이 떠졌을 때, 그 눈에 후회의 빛이 스칠까 봐 무서웠다.
처음으로 춥지 않았던 밤이어서, 카를로이도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욕심처럼 느껴졌다. 아주 작은 욕심이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그런 욕심이어도, 그것은 이본느에게 벌을 주듯 항상 더 큰 불행을 가지고 왔다.
그가 괴로워하고, 힘들어한다. 아마 황비의 일 때문이리라고 이본느는 지레짐작했다.
그의 얼굴을 눈으로만 만지다가, 이본느는 무서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다시 눈을 감았다. 얼마쯤 감고 있었을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어디쯤 정신이 부유할 때 자신을 안은 남자가 몸을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움직이다 한참을 가만히 누워 있던 카를로이가 이내 침대를 빠져나갔다. 긴장을 풀기도 전에 이불을 덮어 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카를로이가 침실을 나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본느는 눈을 뜰 수 있었다. 항상 혼자 누웠던 침대가 허전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더 가까워졌으리라, 스스로 마음을 위로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날 오후에 공작의 편지가 이본느에게 도착했다. 오래간만의 편지였다. 떨리는 손으로 펼친 편지의 내용은 그간 품었던 기대감을 산산이 부서트렸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는데, 이본느는 영지로 내려와서는 안 된다는, 그리고 공작이 조만간 수도로 올라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메리앤, 제인에게 답장 온 것 없어?”
메리앤도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황비와 로덴 후작이 추문에 휩쓸려 꼼짝도 못하는 사이 얻은 이익이 적지 않을 텐데, 왜 허락하지 않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 질질 끌 시간도 없는데.
“아, 레이디 앙센이 잠시 앙센령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해서 그러라 했어요.”
“그래.”
잘됐다고 생각하며 이본느는 편지를 불에 가까이 했다. 감시하는 눈이 하나만 줄어도 마음이 편하지.
글씨체가 점점 흐려지는 공작의 편지를 불에 태우던 이본느가 문득 느껴지는 통증에 그만 편지지를 불에 통째로 떨어트렸다. 불이 한 번 크게 타오르는 사이 설핏 나간 신음을 용케 듣고 메리앤이 놀라서 다가왔다.
“폐하! 어디가 아프세요?”
“아니, 아니야.”
분명 가슴과 명치 사이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시하기도 힘든 통증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주 나타나는 증상은 아니었지만, 강도가 매번 심해지고 있었다.
“물 한 잔만 가져다줘.”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흐르자 어지럽던 머리가 잠잠해졌다. 역시 몸에 좋은 약일 리가 없지.
숨을 몰아쉬며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을까. 눈을 껌뻑이며 정신을 가다듬는데 밖이 소란했다. 아셀이었다.
성격이 급한 건지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건지 시종들이 고하기도 전에 제멋대로 이본느의 집무실로 들어온 것이었다. 황당해하는 메리앤과 이본느를 무시하고 아셀은 특유의 억양으로 말했다.
“폐하가 보냈어요.”
“왜?”
“공작에게 답이 왔냐고 물어보래요. 영지로 내려갈 수 있냐고.”
참 시기적절했다. 직접 와서 물어도 되는 것을 왜 아셀을 보냈을까, 하고 이본느는 혼자 씁쓸해했다. 역시 어젯밤은 의도치 않은 실수였나, 하는 무연한 마음도 계속 들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이토록 사람이 우스워지는 것이었다. 살까지 맞닿고 나니 별것도 아닌 것에 실망한다. 사람의 온기도 이 궁전의 냉기만큼이나 무섭다는 걸 새로이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답이 오긴 왔는데, 오지 말라고 하셔서.”
“딸을 못 오게 한다고요? 왜요?”
칼을 쓰는 자치곤 순하디순해 보이는 얼굴이 바로 찌푸려졌다. 가늘게 접힌 눈에서는 공작령을 둘러보던 그 눈빛과 똑같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이본느는 대충 둘러댈 말을 찾았다.
“……또 영지에 왔다가 황후로서 트집이 잡힐까 우려하시나 보아. 내 생각엔 황비 일 때문에 부담을 지고 싶지 않으신 것 같군.”
여전히 아셀의 얼굴엔 노골적 의심이 가득했다. 어차피 믿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지만.
“수도로 조만간 오신다기에 다시 여쭤보려고 하네.”
덧붙이는 말에도 변화 없는 표정은, 얼굴을 가득 채운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 적대적이진 않았다. 이본느는 그런 아셀을 쳐다보다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날 의심하나?”
“네. 말이 안 되니까요.”
“내가 폐하께 해가 될 일을 계획한다 생각하고?”
“그건 아닌데요.”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와서 이본느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아셀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말은 그대로 전할게요.”
폐하가 믿을진 모르겠지만. 아셀이 나가면서 흘린 그 말이 이본느의 가슴을 날카로이 찔렀다.
확실히 카를로이의 믿음에 기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영지로 빨리 내려가지 못하면 카를로이도 지금처럼 녀를 믿진 못할 테니까.
이본느가 불안감에 답장을 쓰기 위해 다시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 * *
뒤냐가 카를로이를 찾았을 때, 카를로이는 예사 그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짜증이 난 듯도 했다.
갑자기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조카의 얼굴을 응시하던 시선이 홀로 색이 다른 그 귀에 닿았다.
“귀는 왜 그렇게 붉으십니까?”
“뭐?”
“폐하 귀 말입니다.”
알렉시스 뒤냐가 말해 주기 전엔 카를로이는 자신의 귀 상태에 대해 깨닫지도 못했다. 이본느를 안은 이후 계속 그날 밤을 생각하느라 붉어진 것이 분명해 카를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그 후로 이본느를 찾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으니 별 소용도 없었다. 옅게 헐떡이던 숨소리, 자신의 피부에 맞닿던 살결, 얼굴을 묻을 때마다 느껴지던 향. 이본느의 모든 것이 자신의 오감을 지배했다.
며칠 내내 그 기억이 그를 괴롭혔다. 밤에는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자신이 무도한 짐승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속없는 감각을 느끼는 자신이 제정신인가? 그날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섣불리 다시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제 머리를 쥐어뜯을 것처럼 보이는 카를로이를 무시하고 알렉시스는 무관심한 얼굴로 용건을 말했다.
“라르투아 대사가 이상한 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베르니에서 수상한 군사적 움직임이 있는 걸 라르투아 국경 지역에서 감지했답니다.”
“무슨 움직임?”
“라르투아 국경 쪽에 배치했던 병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반갑지 않은 보고를 들은 카를로이의 얼굴에 날이 섰다. 다른 곳이라면 너무, 너무나 뻔하다.
베르니는 라르투아와 크로이센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니, 라르투아 쪽 병력을 이동시켰다면 군대를 해산시키려고 하는 게 아닌 이상 크로이센과 접한 국경 쪽으로 이동시켰을 게 분명했다.
그것은 카를로이에게만 뻔한 사실은 아니었다. 알렉시스 뒤냐에게도 그 사실은 뻔했고, 그것은 또 다른 사실 하나를 떠올리게 했다.
크로이센과 베르니가 접한 국경은 델루아 영지였다.
“친애하는 황후께서는 언제쯤 영지로 내려가신답니까?”
‘친애하는’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말투는 심상했지만 누가 보아도 진심은 아니었다. 카를로이는 며칠 전 아셀이 전했던 말이 생각나 바로 답하지 못했다.
델루아 공작이 딸이 내려오는 것을 반대했다는 사실은 역시 이상했다. 책잡힐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은 얼핏 타당해 보였지만 글쎄, 한스 델루아가 언제부터 그런 사소한 세간의 시선을 신경 썼는지.
카를로이를 감시하기 위해 수도에 놔두는 것일까, 하고 고민도 해 보았지만, 이본느가 그를 감시할 만큼 그와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카를로이는 대답 대신 알렉시스에게 질문을 했다.
“황후가 사생아라는 그 이야기 말인데, 얼마나 확실한 정보지?”
“글쎄요.”
알렉시스는 아직도 카를로이에게 불만이 있는지 두리뭉실하게 답을 했다. 그런 알렉시스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라 카를로이는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증거가 있었다면 알렉시스는 진즉 자신을 무시하고 황후와 델루아를 쳤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 그에게도 딱히 증거랄 게 없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했다.
“만약 사생아라면……. 공작과의 사이가 그리 원만하진 않을 것 같은데.”
며칠간 이본느를 이해해 보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 결과 나온 가설이었는데, 카를로이의 그 가설을 듣자 알렉시스의 무표정한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말을 돌리시는군요. 갑자기 황후가 영지로 내려갈 수 없다고 했나 보지요?”
어떻게 알았느냐는 표정이 카를로이의 얼굴에 떠오르자 그걸 본 알렉시스가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뒤냐가 비웃음을 흘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했다. 굽을 줄도 모르는 나무처럼 곧기만 한 사람에게 그런 식의 비스듬한 웃음은 어울리지 않았으나, 알렉시스는 델루아가 관련된 문제에서는 그녀답지 않게 굴었다.
“뻔하지요. 너무 뻔해서, 저는 폐하의 지금 생각까지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황후가 공작에게 무언가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십니까?”
독심술이라도 하듯 술술 나오는 말에 카를로이는 할 말을 잃고 그저 알렉시스만 바라보았다.
“더 이야기해 볼까요? 황후가 눈물을 흘리던가요? 아니면 믿어 달라고 애원을 하던가요?”
노골적인 조소를 드러내는 알렉시스의 말투와는 다르게, 얼굴엔 조소와 어울리지 않는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 감정이 생각보다 더 무거워 보여 카를로이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관계라도 가지셨습니까?”
점술가가 따로 없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아도, 알렉시스는 다 알겠다는 듯 얼굴을 쓸며 피로가 섞인 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폐하를 애지중지 키워 응석받이로 만들 걸 그랬습니다. 차라리 폭군이 되게 할지언정, 사랑을 마구 쏟아 남의 정에 끌려다니지 않게 할 걸 그랬습니다.”
“점점 선을 넘는데. 정에 끌려다닌 적 없네.”
“선을 넘은 것은 폐하십니다. 이용만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게 다 뭡니까.”
뒤냐의 언성이 미세하게 높아졌다.
“몸을 섞는다고 폐하의 사람이 되어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정녕 누가 알려 드려야만 아시는 겁니까? 배워야 아시냔 말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에 역정이 날 법도 했지만 카를로이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이제 와서 뒤냐가 어른 노릇을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지만, 스스로의 혼란스러움을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그래서 이본느를 안았던 걸까? 이본느를 믿지 못해서, 그래서 자신을 거부하지 않으면 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까 봐?
어쩌면 다시 이본느를 보러 갈 수 없는 이유도 그것일지도 몰랐다. 알렉시스 말대로 몸을 섞는다고 신뢰가 생길 리는 없다.
무자비하게 좁혀진 거리에 이제는 다시 멀어지는 것조차 힘이 들 텐데, 또다시 이본느의 거짓을 눈으로 확인하게 될까 봐 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제가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시겠지요. 하지만 왜 모르겠습니까? 다 제가 옆에서 본 것들인데. 너무 똑같아서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알렉시스의 말투가 점점 격해졌다.
“베르니의 공주가 사절단이 다 떠나고도 홀로 남아 카를로스 폐하께 했던 짓들이 다 그런 것들인데요.”
알렉시스는 이를 악물기까지 했다.
“라르투아가 자신을 볼모로 요구한다, 베르니 왕실이 자신을 겁박한다, 별별 말들로 폐하를 홀렸었지요.”
“그놈의 베르니 이야기 지겹지도 않나?”
“폐하야말로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왜 이렇게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게 하십니까?”
“내가…….”
“아니, 처음 말할 때 제대로 들으셨다면 제가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까? 아주 델루아의 딸을 믿기로 작정하셨나 봅니다.”
황후가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숨겼을 때도 알렉시스는 이 정도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저 말고 누가 그걸 전부 지켜봤을 것 같습니까? 다름 아닌 델루아입니다.”
그렇지, 이쯤 되면 베르니뿐만 아니라 델루아의 이야기도 나와야 했다.
“그 공주가 어떤 거짓말을 하는지 똑똑히 담았고, 그 거짓에 카를로스 폐하께서 어떻게 넘어갔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델루아가 지켜보았습니다. 보기만 했습니까? 그 공주의 말을 믿으라 부추겼지요.”
결백한 피를 뿌리고 무고한 생명을 앗아 가는 전쟁에 그 어떤 합당한 명분이 있을 수 있겠냐마는, 그 전쟁만큼은 유독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일어났다.
라르투아를 무찌르면 저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속살거리는 베르니 공주의 말에 카를로스 크로이탄은 선제공격을 고민했다. 고민하던 황제를 한스 델루아가 설득했다.
라르투아와의 신경전에 정신이 팔린 사이 베르니는 크로이센에 침입할 여유를 만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나라를 상대하게 된 아슬아슬한 상태의 크로이센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델루아였다. 전쟁을 부추긴 바로 그 델루아.
베르니와 접한 변경을 책임지는 델루아 영지의 공작 한스 델루아는 베르니를 물리침으로써 사랑에 미친 황제와는 다르게 구국의 영웅으로 보였다. 그런 델루아를 죽이려고 덤벼든 황제는 광증이 있다는 이유로 폐위나 다름없는 양위를 거치고 유폐되었다.
그 모든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알렉시스 뒤냐는 비슷하게 구는 카를로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선뜩해졌다.
“폐하, 상식적으로 생각하세요. 델루아 공작과 황후가 그런 관계라면 왜 황후가 폐하께 말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폐하께 모든 것을 말하고 도움을 얻는 것이 빠를 텐데요.”
“그건…….”
“보세요. 본인이 사생아인 것조차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제 아비에게 조금의 흠도 남기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지요.”
격앙된 분노를 보이던 알렉시스의 목소리에선 점점 힘이 빠졌다.
“폐하, 제발.”
어르고 화내는 듯한 말투는 어디 가고 이젠 흡사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렸다.
“제게 남은 마지막 충심까지 다 끌어모아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발, 델루아를 믿지 마십시오.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마세요. 저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알렉시스가 평상시처럼 차갑게 일갈했다면 카를로이도 평소처럼 딱 그만큼 차갑게 대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전 처음 보는 알렉시스의 절박한 모습에 카를로이는 그 말을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알렉시스 뒤냐는 한스 델루아와는 다른 사람이다. 알렉시스와 그 어떤 유대감이 없다 해도, 그녀가 델루아처럼 남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실의 경험이 주는 공통점 정도는 있었다.
“……명심하지.”
짧게 나온 카를로이의 답이 그나마 안심이 되었는지 알렉시스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동작에서도 애원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아 카를로이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의 책상에는 여전히 이본느가 준 로즈메리가 있었다. 꽃은 여전히 싱그러운데, 그는 점점 참담해졌다. 그 누구도 아닌, 다름 아닌 스스로에게.
* * *
며칠 지나지 않아 한스 델루아가 수도로 올라왔다. 수도에 올 때마다 제 나라인 양 휘젓고 다니며 카를로이의 속을 긁던 인간이 무슨 이유에선지 황궁엔 얼씬도 하지 않아 카를로이가 직접 불러야 했다.
“오랜만이군.”
“몸이 좋지 않아 영지에 좀 머물렀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예전과 다르게 많이 여위고 날카로워져 있어 카를로이는 관찰하듯 그를 훑어 내렸다. 얼굴만 보고 있자면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또 아파 보이진 않았다.
“귀족원 참석도 하지 않고.”
“뒤냐가 설쳐 대니 이제 영 재미가 없지요. 다시 또 내려가 봐야 할 듯합니다. 이 수도에 제 맘대로 되는 것이 없으니, 원. 어차피 폐하께서도 제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시건방진 말투는 예전과 그대로였다. 변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델루아와 말을 섞고 있자니 찬물을 맞은 양 카를로이의 온몸이 차게 식었다. 마치 꿈속에서 대책 없이 허우적거리다 현실로 끌려 나온 기분이었다.
내가 저 개새끼의 딸과 뭘 하는 거지? 뭘 하고 있었지?
델루아가 수도에 없던 동안, 그 역겨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 동안 대체 내가 뭘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소름이 돋듯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불쾌한 생각은 머리가 아닌 목덜미를 스멀스멀 타고 올랐다.
“베르니가 라르투아 국경 쪽 군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다는데, 알고 있나? 베르니가 군사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필시 델루아일 텐데.”
카를로이의 질문에 능글맞던 늙은이의 얼굴이 잠시 변했다. 표정 관리를 하려 애쓰는 듯한 모습을 보니 델루아조차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나 싶었다.
“글쎄요, 그런 것은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영지에만 박혀 있었으면서 그런 것도 모르고 뭘 했지?”
“움직인 건 사실일지도 모르나, 델루아 쪽으론 오지 않았습니다. 베르니가 우리 쪽으로 군사를 움직였다면 제가 알았을 겁니다.”
“알아도 모르는 척할 수도 있지. 그대는 전적이 있잖나.”
“하지만 베르니에게 나라를 넘기진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베르니를 이 땅에서 몰아낸 것은 뒤냐가 아닌 저였음을 기억하십시오.”
“베르니의 마법은 쓰고 있지만, 내통은 아니다?”
떠보는 듯한 카를로이를 보고 델루아는 그저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면 카를로이는 어릴 때 만졌던 뱀의 비늘이 생각났다.
“마법요? 뒤냐가 내주는 숙제를 참 열심히 하고 계시는가 봅니다. 해서, 증거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증거를 못 찾으면 계속 그따위 짓을 할 참인가? 베르니의 그 어떤 것도 이 나라에 들여와서는 안 돼.”
이미 많은 것을 베르니에서 들여온 것 같은 늙은 공작이 비스듬히 웃었다.
“베르니는 그 모든 것을 틈새로 이용하는 나라라는 걸 자네도 잘 알 텐데. 예전의 잘못을 또 할 셈인가 보지?”
그 말에 델루아 공작은 웃음을 거두고 카를로이를 노려보았다.
“폐하, 제 탓 하지 마십시오. 전쟁의 잘못은 폐하의 조부께 있지, 저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백을 말하는 눈이 미치광이처럼 번뜩였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그래요, 예, 제가 부추기고, 뒤냐는 말렸지요. 하지만 선택은 카를로스 폐하의 몫이었습니다. 속은 사람이 잘못이지요.”
매서운 얼굴과는 다르게 말투는 시를 읊듯 부드러웠다. 머리로는 개소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슴 한편 불안감이 있었다.
델루아가 부추기고 뒤냐는 말렸다. 선택은 크로이탄의 몫이었다. 지금 자신의 상황과 몹시도 비슷한 이야기 아닌가.
델루아 공작이 보이지 않는 동안 카를로이는 이본느를 이본느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본느 또한 델루아이고 저 눈앞의 개새끼의 딸인 것을.
“……황후가 영지로 내려가는 것은 왜 허락지 않은 거지?”
망설이다 뱉은 질문에 공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카를로이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무슨 영지요? 그런 적이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정말로 모르는지 델루아는 얼굴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지난번에 내려온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때는 폐하께서 허락하셨잖습니까.”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델루아를 빤히 쳐다보던 카를로이는 잠시 뒤에야 간신히 입을 뗐다.
“……황후가 영지로 또 내려가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물어봤네.”
“그건 폐하께서 허락하실 문제지요.”
대수롭지 않다는 델루아의 반응에 카를로이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럼 대체 이본느의 말은 무엇이지? 델루아가 내려오는 것을 반대했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나?
머리가 울렸다. 생각이 몰아치는 머리를 무시하고 카를로이가 말을 이었다.
“……황후가 그러고 싶다기에 궁금해서 물어봤네. 대체 영지에 무엇이 있기에 그러나 싶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뭐 대수라고요. 저도 피 말리는 황궁보다는 공주 대접 받는 델루아령이 편하겠지요.”
마치 딸을 최고급으로 대우해 줬다는 듯한 말투였다. 사생아여도 아낀 것은 사실인지 카를로이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의외군요. 제 딸아이가 델루아 영지를 그리워한대도 폐하께서 허락하실 위인입니까?”
비꼬듯 말을 끝낸 델루아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아, 혹시 제 딸과 사이가 꽤 좋아지셨습니까?”
모든 걸 다 꿰고 있다는 웃음이 그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드디어 제가 장인 대접을 받을 수 있나 봅니다. 제 피를 이은 아이가 이 나라 황제가 되는 것도 곧 볼 수 있겠군요. 아주 오래오래 살아야겠습니다.”
“영지에서 푹 쉬어도 그 노망은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지?”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카를로이는 실상 노망에 걸린 것은 제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어떻게 저런 인간의 딸을 믿어 볼까 고민했지. 이성적으로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그렇지만…….
<제가 폐하의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결코 거짓이 아니에요.>
그 말을 하던 이본느의 모든 것, 그 표정, 눈물, 숨결이 생생했다. 그토록 생생한 것이 거짓일 수가 있을까. 그 모든 것에 입 맞추던 감각조차 어제 일처럼 선명한데. 잊으려고 부득불 이본느를 피해도, 이본느를 보지 않아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머리에, 온몸에 박힌 감각이었다.
카를로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델루아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폐하는 미칠 계기가 없었을 뿐이라고. 제 노망을 걱정하시기 전에 폐하나 걱정하시지요.”
그 모든 감각이 전부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을까. 조부처럼 자신도 사실은 미쳐 버려서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을까.
델루아가 집무실을 나갈 때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고 있던 카를로이는, 그가 나가자마자 치미는 역기를 간신히 삼켰다. 헛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본느를 만나 확인을 해야 했다.
* * *
이본느의 편지 두 개를 연달아 무시한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황후궁에 나타났다. 몹시도 태평한 모습이라 이본느는 자신의 편지가 델루아 영지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공작만 수상한 것이 아니었다. 가문에 일이 생겼다며 앙센령에 갔다 오겠다던 레이디 앙센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많이 바쁘셨어요? 수도에도 안 오시고, 편지에 답도 없으셔서…….”
“한 번 안 된다고 한 일인데 왜 자꾸 묻는 거지?”
조심스러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공작의 태도는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얼굴이 여위어서 그런지 인상이 더 무서워졌다.
이본느는 손이 떨려서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공작은 이본느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삐뚜름한 얼굴로 물었다.
“약을 제대로 먹이고 있는 거냐? 황제는 평소랑 너무 똑같던데.”
이본느가 눈을 껌뻑거리다 되물었다.
“뭐가 달라졌어야 하나요?”
“……글쎄.”
씩 웃는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했다. 좋게 사실을 알려 줄 것 같진 않은 모습에 이본느는 당장 필요한 것이나 묻기로 했다.
“저 엄마를 한 번만 보고 오면 안 될까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
“너는 그렇다 치고 왜 그놈까지 갑자기 왜 델루아령 타령이지?”
공작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으나 날 선 질문은 그 미소조차도 두렵게 만들었다.
“황제가요? 그건 잘……. 제가 영지로 내려가고 싶어 해서 그런가 봐요.”
“네가 그러고 싶어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왜, 사이가 좋아졌나?”
“……네, 조금. 아마 절 조금 믿는 것 같기도 해요.”
어차피 거짓말은 득이 안 되고, 공작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게 뻔하다. 이미 동침한 사실까지 다 알고 있을 텐데.
역시나 알고 있는 것이 맞았는지 공작은 놀라워하진 않았다. 다만 그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이본느를 관찰했다. 진실로 신기해하는 눈빛이어서 새삼스러웠다. 그렇게 하라고 시킬 땐 언제고.
“외로움에 미친 놈이니 고집스레 흔들면 흔들릴 거라 생각은 했다만……. 참 그놈도 어지간히 내 생각대로군. 하긴 네 얼굴이 보통 얼굴이냐. 날 닮았으니.”
공작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이 저를 닮았다고 하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이본느는 내심 앞의 말에는 동의했다. 어린 카를로이가 리리안의 작은 호의에도 그토록 마음을 준 이유는 그가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때는 채 이해하지 못했다. 리리안은 카를로이만큼 외롭진 않았기 때문에.
이본느가 되어 이곳에 온 뒤로 카를로이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전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카를로이가 저를 알아봐 줄 거란 기대를 버리지 못한 이유가 그 외로움 때문이 아니던가.
눈앞에 앉아 있는, 피조차 푸르디푸를 것 같은 공작을 보다 이본느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공작님은 외롭지 않으세요?”
일생 누구를 사랑해 봤을 것 같지도 않은 사람, 유일하게 사랑했다는 딸은 이젠 없고 하나의 목표에 미친 사람이 이본느를 바라봤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뜻밖에 공작은 무표정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무릎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추고, 공작의 입이 열렸다.
“그딴 것도 그럴 시간이 있는 놈들이나 느끼는 거지. 난 그럴 새도 없이 바쁘다.”
대답을 해 주었다는 사실은 놀라웠지만, 대답의 내용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대답이고 물은 자신이 바보였다.
“수도에 계속 있어라. 사이가 좋을 때 괜히 멀리 갈 필요 없지. 네 어미는 멀쩡하니 쓸데없는 걱정일랑 좀 집어치우고.”
“하지만…….”
“조만간 보게 해 줄 테니 기다려.”
“네?”
“수도로 네 어미를 데리고 올 테니 넌 여기서 잠자코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아니요.”
대답은 했지만, 머리는 복잡했다. 수도? 대체 어떻게 수도로 드니스를 데려온다는 말인가.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해 주지 않았는데?
흘러넘치는 의문에 이본느는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공작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 내가 수도로 다시 올라올 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야 할 거야. 그 약도 빨리 다 끝내고.”
이본느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디 앙센이 앙센령으로 내려간 이후 약은 줄지 않았다. 어차피 감시하는 사람도 없으니 괜찮을 듯싶어 하녀 엘리도 약 타는 것을 멈추었다.
그 이상한 약을 더 먹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마시면 머리가 정말 어떻게 될지도 몰랐다.
“내 말만 잘 따르고, 여기서 버티고 있어. 그럼 네 어미 볼 수 있을 테니. 조만간이다.”
공작은 할 말이 다 끝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붙잡을 말이 더 생각나지 않아 나가는 공작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있는데, 카를로이가 왔다고 고하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본느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내내 보이지도 않다가 하필이면 이럴 때 온단 말인가.
나가는 공작과 제대로 마주친 카를로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 표정에 왜 이본느의 가슴이 아픈지 모를 일이었다.
며칠간 카를로이가 자신을 찾지 않아서? 용기를 내 몇 번 넣은 전갈을 카를로이가 전부 무시해서? 공작 너머로 자신을 쳐다보는 눈이 꼭 예전처럼 차갑기만 해서?
“영지로 내려가 봐야 한다더니 아직도 안 갔나?”
“갈 땐 가더라도 혈육은 보고 가야지요.”
공작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짐짓 다정한 척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 불쾌한 익숙함을 느낀 카를로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카를로이가 어렸을 적 내내 친절한 척하던 인간이 그를 유괴하기 전 보여 주었던 미소였다.
카를로이가 무어라 말을 더 얹기도 전에 공작은 인사를 하고 먼저 물러났다. 공작이 나가자 카를로이의 시선이 이본느에게 닿았다. 이본느는 불안한 마음을 죽이며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직은 괜찮다고 되뇌며.
자리에 앉지도 않은 카를로이가 무심히 물었다.
“공작이 뭐라 했습니까?”
말투는 무뚝뚝했다.
“아, 별말은 없었고……. 영지로 내려갈 수 있을지 다시 물어봤어요.”
“뭐라 답하던가요?”
“안 된다고……. 제가 폐하 옆에 붙어 있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카를로이는 더 묻지도 않았고, 의아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본느를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그 눈빛이 이본느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침실로 찾아와 이본느에게 매달렸던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꼭 물어볼게요. 내려갈 수 있을 거예요. 정 안 되면 일단 내려가면 돼요.”
“혹시 편지를 볼 수 있습니까? 공작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답했다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질문의 의도를 몰라 이본느는 멍하니 있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없는데……. 버려서…….”
공작의 편지는 항상 불태워 없앴다. 보통은 글씨체가 알아서 사라졌지만, 공작이 워낙 철두철미해 그마저도 다 불태울 것을 원했기 때문에.
대답이 없는 카를로이를 보니 더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 읽고 버리는 게 습관이라…….”
카를로이의 얼굴은 여전히 어떤 변화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힘들어서 이본느는 부자연스럽게 계속 혼자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제가 다시 편지를 보내 볼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너무 깔끔해서 날카롭게까지 들리는 카를로이의 짧은 답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말을 더 이을 줄 알았지만 카를로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본느를 보고 있어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직 저녁 안 하셨으면…….”
“아닙니다. 좀 바빠서.”
애써 건넨 말에도 칼 같은 거절이 들려왔다. 그날 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카를로이를 보고 이본느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아무리 뭘 모른다지만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도 없을 만큼 가까워져서 숨결까지 나눈 밤을 보냈는데, 이렇게까지 한순간에 다시 멀어지는 게 가능한가.
카를로이는 그만 가 보겠다며 몸을 돌렸다.
“폐하.”
떠나려는 카를로이를 붙잡듯 부른 것은 충동이었다.
“그날 밤은 왜…….”
차마 왜 자신을 안았냐고 묻지 못했다. 그러나 카를로이는 알아들었는지 걸음을 멈췄다.
“그날은…… 내가 술에 너무 취했던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대답을 하면서도 끝까지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 카를로이의 모습에 눈이 시렸다.
이거 봐, 이럴 줄 알았어. 차라리 옛날이었다면 이런 취급쯤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기대도 없으니 이렇게까지 억울하고 슬프진 않았을 텐데. 잘해 주지 말란 제 말을 그렇게 무시하고 거리를 좁혀 와 자신을 약하게 만들더니 또 이렇게 제멋대로.
여기서 울어 봤자 안 될 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본느는 간신히 우울감에서 벗어났다.
카를로이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신을 믿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으니까. 할 일을 찾아서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다짐해도 다리에 힘이 계속 풀려서 결국 이본느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 * *
몸은 여전히 종종 아팠다. 카를로이는 며칠 동안 한 번도 이본느를 찾아오지 않았다. 찾기는커녕 보내는 전갈에도 답이 없었다. 자신의 궁에서 나오지 않는 듯했다. 알렉시스 뒤냐도 황제궁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폭풍 전야와도 같은 고요함이었다. 델루아는 영지로 돌아간 뒤 조용했고, 레이디 앙센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들의 부재가 이 스산한 고요함을 더 섬뜩하게 만들었다. 레이디 루엔도 같은 것을 느끼는지 날이 갈수록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이본느는 오랜만에 정원에 나갔다. 확실히 카를로이와 사이가 가까워지고 난 후에는 어디에도 발 못 붙이는 사람인 양 떠돌 일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앤이 옆에서 조용히 말을 걸었다.
“위험한 거 아닐까요? 아무래도 황제 폐하까지 의심하시는 것 같은데…….”
“아니야, 반쯤은 예상했어. 하지만 영지에 내려가야 할 것 같긴 한데……. 그러지 않는 이상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 제인한테서는 연락이 없고?”
메리앤이 울상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딸에게 편지를 보낸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아무런 답도 없었다.
“레이디 앙센은?”
“돌아온단 날짜에서 벌써 수일이 흘렀는데 오지를 않네요. 정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요.”
“지금 출발한다 해도 수도까지 오는 데 꽤 시간이 걸릴 텐데.”
“엘리한테도 딱히 다른 지시 사항이 없었대요. 누구한테 대신 감시를 맡긴 것 같지도 않다고는 하던데…….”
상황이 몹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작은 다시 뭘 숨겨 놓은 양 금방 델루아로 내려가 버렸고.
아무래도 영지에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오지도 못하게 하지. 앙센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고.
“일단…….”
느릿한 말투로 이본느가 말을 시작하자 메리앤이 귀를 바짝 기울였다.
“엘리에게 그 약병의 약은 다 버리라고 해. 어차피 레이디 앙센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마신 건지 버린 건지 구분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레이디 앙센이 정말 감시자를 붙였는지 아닌지는 모르잖아요. 돌아와서 큰일이 나면 어떡하려고요.”
“엘리를 고향으로 보내 줘야지.”
“네?”
“돌아와서 못 찾으면 그만이야. 어쨌든 앙센이 없는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괜히 엘리가 여기 남아서 좋을 게 없어.”
일이 잘 풀리면 카를로이에게라도 부탁해서 빼내 주려 했지만, 이제 그건 가능성이 옅어졌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나 눈 밖에 안 나면 다행이지. 그래도 엘리를 앙센으로 내려 보내 줄 수는 있었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주고, 궁전 밖으로 내보내 줘. 마석 몇 개 내가 보관해 둔 것이 있으니까 주고. 일단 가족과 만나서 어디 피해 있을 정도는 될 거야.”
“네, 알았어요…….”
“이왕이면 지금 바로. 날이 밝을 때 나가야 괜한 의심 사지 않으니까.”
“네, 지금 바로 내보낼게요. 뭔가…… 이상해요. 느낌이 불안해요.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대꾸 없이 생각에 잠긴 듯 앉아 있는 이본느의 눈치를 살피다, 메리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으세요?”
“……모르겠어.”
기민한 감각이 어떤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이본느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델루아 공작이 그런 수까지 쓸 정도로 미쳐 버렸을까. 너무 무모한 생각이다.
“일단 내일 바로 폐하부터 찾아뵈어야겠어.”
“그렇지만…… 계속 피하시잖아요.”
“어쩔 수 없지. 막는대도 들어가야지.”
약간은 비장한 각오로 말하는 이본느를 보고 메리앤도 쭈뼛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엘리부터 해결하고 올게요.”
메리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본느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델루아 공작이 어딘가 수상하다고 알리고, 정 자신을 못 믿겠으면 사람을 붙여서라도 델루아 영지로 내려 보내 달라고 해야지.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메리앤은 없는데 왜 인기척이 느껴지나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아셀이 있었다. 먼저 남의 공간에 침입한 주제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아셀은 이본느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불편한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물은 것은 이본느였다. 하지만 아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왜 찾아왔냐고.”
“찾아온 게 아니라 돌아다니다가 본 건데.”
김이 빠지는 대답이었다. 카를로이의 수족이라더니 저렇게 한량처럼 궁을 쏘다닐 시간이 남아도는 건지.
찾아온 게 아니라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아셀은 이본느를 빤히 쳐다보다 다시 제 갈 길을 갈 준비를 했다.
“아, 폐하가 안 믿죠?”
그러면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꼭 저렇게 사람을 후벼 파는 질문을 한다. 이본느는 아셀이 얄미워서 아무 대답도 없이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왜 자꾸 거짓말하는 거예요?”
“그런 적 없어.”
“와, 또 한다. 저러니까 안 믿지. 폐하는 한번 의심하면 진짜 지독한데.”
이본느가 대답 없이 무엄하기 짝이 없는 기사를 노려보았지만 아셀은 굴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난 틀린 적이 없어요. 똑똑하진 않지만 감은 안 틀려요. 당신은 진짜 이상해요.”
“그래서? 그 대단하신 직감이 뭐라 하길래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굴지?”
“거짓말은 하는데 못 믿을 건 또 아니고…….”
허탈함에 이본느가 한숨을 쉬었다. 아셀이 뭐라 생각하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카를로이지.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강하게 느껴지자 아셀도 더 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셀은 자리를 떠나면서까지도 이본느를 쳐다봤다.
원래도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또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못하는 것들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이었다. 이본느를 향한 그의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아서 답답했다.
하는 행동이 모조리 수상하고, 하는 말은 죄다 거짓말인 것 같은 황후,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거짓이 아닌 듯한 사람. 카를로이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서, 그게 스스로도 이상해서 아셀은 마지막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본느는 긴 숨을 내뱉었다. 타인의 눈에도 느껴질 만큼 카를로이는 저를 믿지 않고 있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어딘가가 시렸다. 허한 바람이 끝없이 자신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의심할 것만 넘치는 이 와중에 무엇으로 카를로이를 설득할 수 있을까. 가진 건 진심 하나밖에 없는데 그조차도 온전히 내보이지 못하니.
막막함에 한없이 빠져들 즈음에 메리앤이 돌아왔다.
“무사히 나갔어요. 그런데 폐하, 분위기가 좀 이상해요.”
“뭐가?”
“성문과 성곽을 지키는 병사가 배로 늘었어요. 검문도 좀 심해진 것 같고. 폐하 말대로 밤에 나가려 했으면 오히려 안 됐을 것 같아요.”
아무 이유 없이 수비가 강화되지는 않았을 텐데. 괜스레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어 이본느는 불안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왜요? 어디 또 아프세요?”
“아, 아니야. 그런 거.”
“이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오래 계셨잖아요.”
“들어가 봤자 더 답답하기만 해.”
고집스럽게 말하는 이본느를 보고 메리앤은 포기한 듯 뒤로 가서 섰다. 심란할 마음을 이해했다.
조금 더 지난 후에 들어가겠지 싶어 놔둔 것인데 어느덧 주위가 깜깜해지고 있었다. 색이 바뀌어 버린 하늘을 보고 메리앤이 헛기침을 슬쩍 했지만, 이본느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뭔가 생각이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작은 몸 위의 얼굴엔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 말려야겠다 싶어 메리앤이 입을 열 찰나에 어둠을 뚫고 달려오는 한 인영이 보였다.
“레이디 루엔?”
이본느에게 말하는 대신 메리앤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이본느가 고개를 들고 보니 레이디 루엔이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밤, 카를로이는 알렉시스 뒤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의 심각성에 놀란 고르텐은 떨리는 손을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었다.
“명해 두신대로 군사를 준비시키긴 했습니다. 성곽 수비도 최고 수준으로 강화했고요. 귀족들에게도 혹시 모를 사태에 대해서 일러두었습니다.”
“델루아 영지는 어떻지?”
“사병이 움직인 흔적이 있긴 합니다만, 그건 폐하께서 베르니의 군대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 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도 베르니가 움직이면 델루아도 움직였으니까요.”
“그것 말고는?”
“그밖엔 조용하긴 합니다. 변동이 있다면 연락이 올 겁니다. 그런데…… 확신하십니까? 델루아가 진정.”
알렉시스가 잠시 숨을 골랐다. 말로 꺼내기도 어려운 단어였던 탓이다.
“반란을 일으킬 거라 보십니까?”
질문에 의심이 들어 있었다. 그 의심을 카를로이 또한 이해했다.
델루아 공작이 반란을 일으키고 싶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그랬을 터였다. 더 강성할 때, 세력이 더 강할 때. 하지만 크로이센을 더 온전히 삼키고 싶다는 델루아 공작의 욕망이 항상 그 선택을 막았다.
승리를 점치기 어려운 지금이라면 더더욱 반란을 일으켜서는 안 됐다. 내전은 카를로이에게도, 델루아에게도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본 델루아의 얼굴은 그런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야위어서 눈만 새파랗게 빛나는 꼴이 누가 봐도 미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 꿍꿍이가 있는 듯한 웃음. 그는 그럴 때면 꼭 무모한 짓을 하곤 했다. 예컨대 황족을 유괴하는 일이라든가. 그때 그가 크로이탄에게서 훔친 것은 어린 후계자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훔치려고 하는 걸까. 카를로이는 ‘나라’ 말고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 말고는 델루아 공작의 행동이 설명이 안 돼. 앙센 백작도 수도에 올라오지 않은 지 꽤 됐지. 다른 공작파 귀족들도 이틀 전을 기점으로 수도에서 사라졌어.”
“원래도 다른 귀족들은 수도에 그렇게 오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델루아가 유난스러운 감이 있었지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반란이 아니더라도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확실해.”
“하지만 반란 같은 일을 계획하면서…… 황후를 수도에 놔두다니요. 말이 안 됩니다.”
이본느가 언급되자 무표정하던 카를로이의 얼굴이 빠르게 변했다. 불쾌해 보이는 듯도 하고, 답답해 보이는 듯한 얼굴이 알렉시스로선 반갑지 않았으나, 카를로이가 예전만큼 이본느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제 이쯤 됐으니 말해 줄 법도 하지 않나? 황후가 사생아란 걸 앙센 백작과 레이디 앙센이 어떻게 아는 거지?”
알렉시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뗐다.
“선대 앙센 백작을 기억하시지요?”
“그 노망난 노인. 매일 무슨 종이를 들고 다니며 적어 대지 않았나? 내 이름도 여러 번 적혔을걸.”
“노망이라니요……. 그저 좀 특이한 사람이었을 뿐이지요. 그냥 일기 하나는 꼬박꼬박, 좀 집착적으로 쓰던.”
툭하면 귀족들을 노망난 노인네라 칭하는 카를로이를 꾸짖듯 뒤냐가 답했다. 어디 가서는 자신보고도 노망난 노인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고 알렉시스는 생각했다.
“아무튼 선대 앙센 백작은 생전에 델루아 공작과 가까운 사이였어서 델루아의 딸을 종종 본 적이 있었는데 그의 일기에 적혀 있길, 그 딸이 델루아는 단 하나도 닮지 않았다 했다더군요.”
“단 한 곳도?”
“심지어 머리카락 색, 눈 색조차 전부. 공작 부인을 닮았다고 했답니다. 클라이드 앙센이 증거를 앙센저에서 어떻게든 찾아서 가져오기로 했는데, 결국 못 찾았답니다.”
“클라이드 앙센은 지금 어디 있고?”
“제가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계속 황비를 만나고 싶단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누구를 만나?”
“저도 그 요청은 계속 무시하고 있으나, 혹여 있을 사태에 대비해 그 같은 인재가 있는 것이 좋을 듯해 놔두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그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내일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생김새가 그리 다르다면 뒤냐 자네도 알았을 것 아닌가.”
“아주 어릴 때 본 저보다 선대 앙센 백작의 기억이 더 정확하겠지요.”
“델루아에게 여자가 많지는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폐하, 스캔들이 없었다고 관계가 없었다 단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자식은 어느 여자에게서라도 봤을 수 있습니다.”
카를로이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모르겠다. 그는 이제 이본느를 전혀 모르겠다. 아니, 언제는 제대로 알았나.
“황후도 이상합니다.”
“뭐가?”
사실 이본느의 이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카를로이는 모르는 척 물었다.
“황후가 진정 폐하의 사람이었다면 바로 자신의 출생부터 이야기했을 겁니다. 공작을 공격할 무기가 되어 주었을 텐데요. 그런데 영지로 내려가겠다는 허풍이나 떨고…….”
카를로이 또한 그 생각을 했었지만,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실상 지금의 그는 이본느에 대해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본느에 대한 감정, 생각, 그 무엇도 정리되지 않았다.
대화가 끊겨 침묵이 흐르는 집무실 밖에서 누가 방문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숨도 못 쉬고 둘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고르텐이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에 고르텐은 창백해진 얼굴로 편지 하나와 함께 들어왔다.
“전서구가 급하게 보내온 전갈입니다.”
“어디서?”
“마르키아 변경백입니다.”
델루아가 베르니와 접하고 있다면, 델루아 옆에 있는 마르키아는 마하 영토와 접하고 있는 국경이었다. 중도파였던 변경백 루이자 루탱은 알렉시스 뒤냐가 정계에 다시 돌아오면서 합류하게 된 사람이었다.
고르텐이 넘겨준 편지를 읽던 카를로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뒤냐, 델루아가 사병을 마르키아와의 접경선 쪽으로 대거 옮기고 군사 반란을 선포했다는군.”
“아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혹시나 싶어 준비해 놓았대도 여전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순식간에 집무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본느는 공작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걸 알았을까, 몰랐을까.
이런 상황에조차 머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이본느의 모습에 카를로이가 편지를 손에서 구겼다.
“내 광증이 심해져서 황위를 내놓아야 한다고 떠든다는데, 아침이 밝으면 수도까지 퍼지겠어.”
“광증이라니요?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증거도 없는 걸 명분으로…….”
“일단 로덴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에게 전부 알리고 당장 소집해.”
“라르투아 쪽에도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클라이드 앙센을 데리고 있어서 다행이군. 그에게 가서 전해. 지금 당장 마하로 가서 원군을 받아 오라고.”
“네.”
“마하가 그에게 호의적이라니까 다른 사람보단 쉽게 하겠지. 혹시라도 이 틈을 타서 베르니까지 움직이게 되면 이대로는 위험해.”
“알겠습니다.”
카를로이의 지시에 따라 알렉시스와 고르텐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명령을 하달했다. 긴장감과 갈증 때문에 목이 답답해 카를로이가 거칠게 책상 위에 있던 물을 들이마셨다.
카를로이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려 할 때 반쯤 열려 있던 집무실의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히고 경비대장이 들어왔다. 다소 격한 입장에 놀란 이들의 눈길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비대장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 지금 당장 성문으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경비대장은 적절한 말을 찾는 듯 한참 곤란한 얼굴로 고민했다.
“황후 폐하께서…….”
이 상황에서 가장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의 언급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더 날카로워졌다. 당장이라도 사람 열둘쯤은 목을 베도 놀랍지 않을 것 같은 카를로이의 얼굴에 경비대장이 말을 하다 말고 숨을 삼켰다.
“시녀들과 성 밖으로 몰래 나가시다 잡혔습니다. 현재 성문에 억류돼 계십니다. 무엄한 짓인 줄 잘 알고 있으나, 행색이 단순한 외출처럼은 보이지 않으셔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를로이의 손안에서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나 조각들이 핏방울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레이디 루엔은 맹세코 이런 위험한 일을 맡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쯤은 수도에 남아 황후 옆에 있어야 한다면 귀하디귀한 앙센가의 영애가 아니라 메호시 자작의 여식이 남아야 하는 것이었다.
위험 부담이 큰일은 자신의 몫이 되는 게 당연하고. 메호시의 루엔가는 대대로 앙센의 충직한 가신이자 종복이었으니까.
이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 사실에 큰 불만은 없었다. 레이디 앙센이 종종 건방지게 굴긴 했지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4대 가문이라는 앙센가, 그 가문의 위세에 비하면 양호한 정도였으니까. 그 위세를 생각해 보면 건방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레이디 앙센의 비위를 잘 맞추며 황후 시녀 노릇을 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루엔가보다 세가 더 높은 수많은 귀족의 자식들도 황후의 시녀인 자신을 무시하지 못했다.
즐겁기만 할까. 메호시령에서 아버지와 오라비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비하면 황후와 레이디 앙센의 옆을 지키는 것은 세상 쉬운 일이었다. 딱 두 여자의 비위만 맞추면 다른 모든 여자들은 내 비위를 맞추게 되니 얻는 것이 더 많다. 아니, 많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상황이 오면 나만 망하는 거지. 가브리엘 루엔이 초조함에 계속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니, 진정하고 자초지종을 말해야지. 갑자기 성문으로 가야 한다니 무슨 말이야.”
레이디 루엔의 호들갑에 정원에서 황후궁 침실로 들어온 이본느가 엄하게 물었다.
앙센 백작이 루엔에게 말하길, 이날 황후와 함께 새벽이 오기 전 늦은 밤에 무조건 성문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수도를 뜨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기에 황후궁에서 황후의 짐을 싸느라 시간을 많이 썼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루엔은 약간 짜증을 담아 급한 손길로 이본느에게 겉옷을 입혀 주며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잖아요. 델루아 공작님께서 성문에서 전달할 게 있다고 하셨어요. 보는 눈 때문에 그 이상으로 못 들어오신대요.”
“이 시간에 성문에 몰래 나가선 안 돼. 대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몰래 갈 수 있어요. 공작님이 다 알아서 해 놓는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정말 전달만 받고 다시 돌아오면 돼요.”
“이 짐은 뭐지?”
“영지로 보낼 제 짐이랑 몇 안 되는 금화예요. 맞교환하라고 하더라고요. 위험 부담이 큰 일을 해서 금화가 필요하대요.”
건성으로 답을 한 레이디 루엔은 이제 메리앤을 독촉했다. 하지만 메리앤은 끄덕도 하지 않고 엄한 얼굴로 레이디 루엔을 노려보았다. 초조한 한숨을 내쉰 루엔은 이럴 때 대비하라며 앙센 백작이 준 종이를 옷 안에서 꺼내 들었다.
“공작님 편지예요.”
“아버님이 왜 내가 아닌 레이디 루엔에게 편지를 보내지?”
“앙센 백작님을 통해 제 아버지께 보내신 거예요. 저도 오늘 받았어요. 황후님께는 저번에 말씀드렸다던데요.”
이본느가 편지를 샅샅이 훑듯 읽었다.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꼭 성문으로 나와야 한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루엔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물었다.
“맞죠? 공작님 친필 편지죠?”
이본느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편지를 다시 루엔에게 건네주자 옆에 서 있던 메리앤의 얼굴도 심각하게 바뀌었다. 정말이냐고 되묻는 듯한 메리앤의 표정을 보고 이본느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적혀 있지 않은데.”
“황후님이 아실 거라고 하셨어요.”
루엔이 다시 신경질적으로 메리앤의 겉옷을 챙겨 주는 동안 이본느는 기억을 뒤졌다. 공작이 뭘 전달할 게 있다는 거지? 한참을 생각하던 이본느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드니스. 드니스를 수도에서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이 이거였나? 이것 말고는 공작이 따로 언급한 게 없었다.
만약 정말 드니스를 수도로 데리고 온 거라면 지금 당장 성문으로 가야 했다. 이본느는 떨리는 손으로 겉옷을 여몄다.
“아버님이 다 준비를 해 놓으셨다, 그렇게 말했다고?”
“네. 받기만 하면 다 알아서 될 거라 하셨어요. 황후궁에다 두면 곧 해결하러 오신대요.”
대답은 연습한 대로 술술 꺼냈지만, 루엔은 속으로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앙센 백작이 시키는 대로 말하니 황후가 정말 예상대로 움직이는 게 신기했다.
황후가 설득당하자 메리앤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본느는 루엔에게 들리지 않게 메리앤에게 무어라 속삭였는데,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길을 앞장서며 루엔은 계속 침을 삼켰다. 긴장감에 저절로 그리되었다. 앙센 백작과 함께 있을 아버지와 오라비들을 생각하며 레이디 루엔은 종종 뒤를 돌아 황후를 초조하게 쳐다봤다. 도대체 황후가 생각하는 ‘물건’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황후는 묘하게 들떠 보였다.
루엔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한숨을 쉬었다. 줄을 잘 탄 게 맞을까? 이 상황에 자신만 황궁에 버려 놓다니. 게다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목숨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울면서 살려 달라 빌어야 하는 일인데, 그래, 이걸 그 멍청한 레이디 앙센이 할 순 없겠지.
루엔이 이를 갈며 계속 생각했다. 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고 절대 죽을 일은 없다고, 황궁에서 빼낼 준비가 다 되어 있다 했지만 어떻게 알아. 뒷감당은 자신에게만 이렇게 맡겨 놓는 게 정상이냐고.
미리 지시받은 대로 길을 가니 누가 길을 막지도 않아 수월하게 궁전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성문까지의 거리는 좀 되는데 마차도 없는 탓에 한참을 걸어야 했다.
“거의 다 온 것 같아요.”
멀리 성문과 경비들이 보이자 루엔이 속삭였다. 이본느와 메리앤은 겉옷을 더 여며 머리까지 가렸다.
곧 드니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서 이본느는 메리앤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쪽 어디로 나오라고 했는데…….”
루엔이 들으란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제 잡힐 때가 됐는데. 고개를 분주히 돌리던 루엔과 어둠 속의 병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루엔은 본능적으로 알아보았다. 저놈이 심어진 병사구나.
병사가 옆의 사람에게 무어라 속삭이는 게 보이더니 이내 누가 고함을 질렀다.
“아니, 잠깐!”
이본느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루엔은 냅다 이본느의 손을 잡고 성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놀란 이본느가 그대로 끌려왔다.
“빨리 뛰어야겠어요!”
뛰면서도 스스로가 하고 있는 이 촌극이 우스워 루엔은 허탈함이 들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얼마 뛰지 못하고 그들은 병사들에 의해 둘러싸였다. 누구냐며 모습을 드러내라고 고함을 질러 대는 병사들 때문에 이본느가 떠는 것이 루엔에게도 느껴졌다. 루엔이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폐하는 가만히 계세요.”
아마 그러고 싶지 않아도, 가만히 있게 될 테지만.
* * *
이본느는 이 밤중에 일어난 일련의 상황을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루엔이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자신 있게 말하길래, 어떻게 풀려날 수 있나 싶었더니 무슨, 성문에서 억류되었다.
밤중에 성문을 나가려고 한 사람이 황후라는 사실을 확인한 병사가 당황해 경비대장을 불러왔지만, 그라고 딱히 좋은 방도를 생각해 내진 못했다. 루엔이 성문을 나가려는 게 아니었다고, 이본느가 듣기에도 부실한 해명을 해대자, 경비대장은 일단 여기서 기다리란 말을 하고 떠났다.
꼴이 여간 우스운 게 아니었다. 일국의 황후에, 그래도 겉으로는 공작의 귀한 딸인데 앉지도 못하고 병사들 사이에 서 있어야 한다니. 게다가 성문 밖에 드니스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계속 여기 묶여 있을 수는 없는데.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하지? 정말 나가려는 게 아니었다니까. 받을 물건이 있어서 그랬다고 이미 여러 번 말했을 텐데.”
아무리 억류당해 있어도 황후는 황후라, 병사들이 살살 눈치를 보았다. 이러다 자신들의 실수면 목이 날아가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또 눈치는 눈치고, 수상한 건 수상한 것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일단 경비대장님이 다시 오시면…….”
“내 말을 못 믿나 보지?”
“저, 수도를 떠나려는 게 아니셨으면 왜 짐을…….”
“수도를 떠나다니? 내가 왜?”
이본느의 질문이 뭐가 놀라웠는지 병사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본느가 인상을 찌푸리며 메리앤을 돌아보았다. 왜 자신이 수도를 떠날 거라 생각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메리앤은 메리앤대로 얼이 빠져 있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저 폐하, 혹시 그렇다면 짐을 확인해 봐도 될까요?”
이본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를 뜨니 마니 이상한 의심을 사는 것보단 차라리 가방 안을 보여 주는 게 나을 듯했다. 어차피 레이디 루엔의 물건과 금화 몇 개나 있을 테고.
이본느의 허락에 병사 몇 명이 가방을 열고 거꾸로 들었다. 가방 안에서 이본느의 보석들과 수많은 금화, 마석, 그리고 옷가지가 떨어졌다. 누가 봐도 멀리 떠나는 사람의 짐이었다.
짐을 거꾸로 들었던 병사들이 할 말을 잃고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게 왜…….”
너무 당황해서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본느가 루엔을 쳐다보았다. 루엔은 이본느의 시선을 피해 고집스러운 얼굴로 딴 곳만 보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이본느의 귀에, 이 순간만큼은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카를로이였다. 산 넘어 산이 따로 없었다. 알렉시스 뒤냐와 함께 나타난 카를로이를 보고 병사들이 길을 터 주었다.
바닥에는 이본느의 물건들이 쏟아져 있고, 이본느는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칭칭 여민 채로 서 있다. 그런 이본느를 훑어보는 카를로이의 얼굴은 여전히 남 같았다. 더 내려앉을 것도 없다 생각했던 가슴이 내려앉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당황해서, 카를로이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카를로이는 시선만으로도 이본느를 찌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밤중에.”
카를로이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잔잔해 숨이 막혔다.
“어딜 가려고 한 건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흘러나오는 카를로이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병사들이 전부 걸음을 뒤로 물렸다.
“어디 도망이라도 가려 했습니까?”
“네? 아니에요.”
이런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목소리가 떨려서 좋을 것이 없는데, 볼품없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이 나왔다.
도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본느의 전신이 떨렸다.
인간적인 표정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 이본느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폐하. 도망가려던 게 아니고…….”
이본느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죽여주십시오, 폐하!”
갑자기 레이디 루엔이 바닥에 엎드리더니 눈물을 흘리며 손을 빌기 시작했다.
“제가 폐하를 더 말렸어야 했는데, 폐하께서 고집을 부리시는 통에…… 죽을죄를 지었어요!”
도대체 루엔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메리앤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당황해서 루엔을 말렸지만, 루엔은 계속 울면서 소리쳤다.
카를로이는 그런 루엔에겐 시선 하나 주지 않고 계속 이본느만 주시하고 있었다.
“도망가려던 게 아니면?”
조용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말투만 들으면 마치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 말투를 잘 알았다. 처음 이 궁에 들어왔을 때 이본느를 대하던 카를로이의 말투였다.
이본느는 간신히 루엔에게서 시선을 떼고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도망가려던 게 아니라 갑자기 레이디 루엔이 성문으로 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왜요?”
“레이디 루엔이 말하기를 아버님이 전할 말이 있다 하셔서. 레이디 루엔에게 물어보세요. 정말이에요, 폐하.”
“공작이 전할 말이 있다고 불렀다…….”
이본느가 말을 끝내자 무섭도록 가라앉은 분위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살얼음판도 이보다 아슬하진 않을 듯했다. 알렉시스조차 카를로이의 분위기 때문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황후.”
카를로이가 이본느를 불렀다. 마치 이본느의 이름은 전혀 불러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공작이 자신의 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건 아는지 모르겠군요.”
충격받은 이본느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그 소리마저도 치가 떨려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나 자신을 기만하면, 이 순간까지도 모르는 척을 하는지.
카를로이를 부르려던 알렉시스 뒤냐는 싸늘한 카를로이의 얼굴을 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카를로이의 명을 기다리느라 숨을 죽였다.
이제 말도 하지 못하고 창백해져서 고개만 젓고 있는 이본느를 보던 카를로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후를 황후궁으로 데리고 가라.”
“폐하.”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이본느가 속삭이듯 그를 불렀지만 카를로이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황후가 황후궁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해라.”
말을 끝낸 카를로이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섰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모든 일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이본느는 그를 불러 보지도 못했다.
알렉시스 뒤냐가 눈짓을 주자 주춤거리던 병사들이 이본느와 메리앤 주위로 가까이 왔다.
“폐하.”
알렉시스가 이본느의 앞으로 다가왔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폐하의 아버지인 델루아 공작은 군사를 일으켰고, 폐하께서는 한밤중에 성을 벗어나려다 잡히셨고요.”
“나는…….”
“제 생각에는.”
알렉시스가 가볍게 이본느의 말을 끊었다.
“황후궁에 돌아가셔서 찬찬히 준비를 하시는 게 폐하께도 좋을 듯합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할 준비 말입니다. 황후께서 내놓으시는 정보에 따라 참작 여부가 결정될 테니까요.”
다리가 후들거려 휘청이는 이본느를 병사들이 단단히 붙잡고 지탱했다.
“그리고 황제 폐하를 어떻게 해 보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황제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황후의 처분은 제게 맡기겠다 약속하셨으니까요.”
뒤냐의 냉정한 말에 이본느는 넋이 빠져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후궁으로 끌려갔다.
* * *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썩 많은 귀족이 모이지는 못했다. 영지에 내려가 있는 귀족들이 꽤 있었다. 영지에 머무르는 귀족들에게 연통을 보내고 뒤냐와 로덴을 비롯한 몇몇 귀족들이 카를로이와 황궁에서 모였다.
“군사를 몰고 수도 쪽으로 밀고 들어올 테니 무조건 밑에서 막아야 합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대체 폐하께서 무슨 광증이 있으시단 말입니까? 아무리 명분은 지어내기 나름이라지만 이런 새빨간 거짓이 통한단 말입니까.”
로덴 후작이 분통을 터트리는데 몇몇 다른 이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표정을 뒤냐가 빠르게 눈치챘다.
“무슨 소리를 들은 적이 있소?”
“아, 그게…….”
귀족 하나가 눈치를 살피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 귀족은 가장 늦게 카를로이 쪽으로 합류한 귀족이었다.
“뭐, 별것은 아니고……. 혹시 폐하께서 몽유병이 있으신지?”
“그게 무슨 헛소리요!”
“아니, 나도 그래서 믿지 않았지요. 폐하께서 밤에 울면서 황궁을 돌아다닌다는 소문도 있고……. 그런데 너무 카를로스 폐하 때와 똑같지 않소.”
“누가 봐도 모함 아니오!”
“아, 그래서 믿지 않았다니깐요.”
귀족 하나가 머뭇거리며 말을 할 동안 알렉시스 뒤냐는 기민하게 카를로이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이 애매해진 것이 전혀 없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예컨대 몽유병까지는 아니더라도, 황궁을 밤중에 울며 돌아다닌 적은 한 번쯤 있다는 소리겠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누가 델루아에게 흘렸을까? 뒤냐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델루아가 갑자기 이럴 리가 없다. 분명 수도에서도 밑 작업을 했을 텐데 몰랐던 자신의 탓이었다.
“자세히 말해 보시오.”
“아니, 나도 잘은 몰라요. 나도 들었을 땐 헛소리라 치부하고 무시했단 말이오. 그런데 그걸 믿는 귀족들도 꽤 있었어요.”
“그런 헛소문들을 다들 믿는단 말이오?”
“내가 믿지 않으니 내게는 더 자세히 알려 주진 않았지만, 듣기로는 그쪽도 증거 없이 그러는 건 아니라고 했어요.”
그 말엔 카를로이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자신에게 없는 광증의 증거를 대체 어떻게 만들었단 말인지.
“황비 폐하의 일 때문에 넘어간 사람도 꽤 많지만, 그걸 보고 합류한 사람들도 꽤 있을 겁니다. 예전 카를로스 폐하 때 공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그 증거가 뭔지는 모르고요?”
“글쎄요. 얼핏 듣기로는 황후 폐하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는데……. 나도 잘 몰라요.”
결국 모두가 덮어 두었던 주제가 물 위로 올라왔다. 이본느 델루아, 황후면서 반란군 수장의 딸. 이본느의 처분을 논의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폐위시켜야 합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의외로 로덴 후작이었다. 이 반란으로 황비의 일이 완전히 덮어지자 다시 기가 좀 살아난 모양이었다.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아비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멀쩡히 황궁에 황후로서 앉아 있을 수 있다니요. 폐위한 다음 인질로 잡고 협상을 시도해야 합니다. 설마 딸을 버리겠습니까.”
“애초에 딸이 버젓이 수도에 있는데 반란을 일으킨 것도 미친 짓이지요. 이미 버린 것 같은데 협상은 먹히지 않을 겁니다.”
“에이, 버리지 않았으니까 수도에서 빼내려고 했겠죠. 공작이 딸을 빼내 오려고 수도에 자기 사람들을 남겨 두었다는 소문까지 있는데요.”
“수도에서 빼내려고 해요?”
“아까 밤에 궁전을 나가다가 걸렸…… 아.”
카를로이의 광증에 대한 소문을 말해 주었던 귀족이 다른 소문을 이야기하자 로덴 후작이 눈이 뒤집힌 듯 화를 냈다.
“뭐라고요! 수도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고요? 폐하! 이게 사실입니까?”
알렉시스 뒤냐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비밀에 부치라 했는데 기어코 어디서 소문이 샌 듯했다. 로덴 후작의 분노에도 카를로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뒤냐가 대신 대답했다.
“수도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밤에 성문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공작! 말장난을 하는 겁니까? 예, 예, 칼만 들었지 죽이려고 한 건 아니지요? 공작까지 왜 그러십니까. 당장 감옥에 가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델루아와 내통을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한참 듣고 있던 카를로이가 조용히 손을 올렸다.
“일단.”
모두 입을 다물고 카를로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긴박감도, 불쾌함도, 그 어느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광증으로 몰린 사람 같지 않은 차분함이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더 괴이해 보였다. 그 차분함의 원인을 뒤냐 혼자만이 짐작했다. 정작 화나는 것이 반란이 아니고 다른 것이니 이 문제에서는 저토록 잠잠해 보이겠지.
“황비에게 가해졌던 모든 제재는 없던 일로 한다. 지금 상황으로 보았을 때, 델루아 측 공작이었을 소지가 다분하니까.”
딸의 결백이 증명되자 화가 좀 가라앉았는지 로덴 후작이 잔뜩 구겨져 있던 인상을 살짝 풀었다.
“그리고 황후는,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말도록 하지.”
“예? 하지만.”
“내통 같은 것은 꿈도 못 꾸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하겠네.”
카를로이의 말을 납득하지 못한 모든 귀족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하지만 카를로이의 얼굴이 몹시도 냉정한 탓에 다들 더 말을 얹지 못했다. 게다가 카를로이가 매끄럽게 바로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바람에 모두 어영부영 다음 논의에 집중하게 되었다.
1차적인 대비에 관한 논의를 끝낸 후 귀족들이 해산하자 카를로이는 황후궁으로 향했다. 알렉시스 뒤냐는 뒤를 따르며 황후의 처분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런 시국에서까지 카를로이의 권위에 도전하고 싶지 않아서 회의 때는 가만히 있었지만, 황후에게 어떤 처분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불가능했다. 황후가 자진해 모든 정보를 털어놓지 않는 이상은 폐위는 당연하고, 감옥으로 들어가야 할 터였다.
하지만 황후가 입을 열까? 알렉시스는 회의감 어린 얼굴로 가능성을 부인했다. 자신이 황후라도 이 상황에서 입을 고이 열진 않을 것이다. 목숨에 연연하는 성격이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제 아비의 세에 해가 될 발언은 하지 않겠지.
앞장서 걸어가는 카를로이의 뒷모습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히지 않아서 뒤냐는 한숨만 쉬었다.
* * *
황후궁에 갇힌 이본느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러니까, 돌아와서도 알 수 없는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레이디 루엔을 닦달했다는 뜻이다.
이본느는 입궁 후에도 단 한 번도 소리를 질러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일이,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말로 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가 듣든 말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싶었다.
카를로이는 단단히 오해하고 있고, 델루아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데 아무리 들어도 믿기지가 않고. 무엇보다도 드니스는 어떻게 된 건지. 정말 성문에 있는 건지 어떤 건지 심장이 불길하게 계속 뛰었다. 도대체 감이 잡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루엔에게 소리를 지르는 메리앤을 한 손으로 저지한 뒤 이본느가 루엔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본느가 창백한 얼굴로 루엔을 내려다보자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분노가 타오르는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루엔이 시선을 내렸지만, 이본느가 그 턱을 잡고 들었다.
“루엔, 지금 내 상황이 말이 아니란 것쯤은 너도 알겠지.”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바로 내리 꽂혔다. 침착한 분위기에서도 느껴지는 분노가 루엔을 움츠러들게 했다.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살던 황후의 감정 표현은 생소하고 무서웠다.
“네가 나한테 모든 사실을 다 말한다 해도 난 할 수 있는 게 없지. 아무도 날 믿지 않을 테니까. 널 어떻게 할 수도 없어. 어떻게 할 생각도 없어.”
제 턱을 잡은 황후의 손엔 별다른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 아프지는 않았으나, 이상하게 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어 루엔은 침도 삼키지 못하고 황후의 눈을 쳐다보았다. 감정이라곤 한 터럭도 없어 보이던 황후의 눈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참지 못하고 널 어떻게 할지도 몰라. 이런 상황에서 아쉬울 게 뭐가 있겠어.”
이본느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더니 차가운 손이 루엔의 턱을 스치고 지나서 목선에 부드럽게 닿았다. 서늘한 촉감에 레이디 루엔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러니까 묻는 것에 답을 해. 공작이 전달하겠다는 게 뭐였어.”
“그런 건…… 없었어요.”
눈치를 보다 슬쩍 나온 대답에 이본느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없어?”
“공작님이 시키신 건 성문으로 폐하를 데리고 오라는 것 하나뿐이었어요. 전달할 게 있다는 말은 지어낸 거예요. 폐하가 나오지 않겠다 하면 그 말이 통할 거라고 공작님이…….”
“그럼 성문엔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다고?”
“네에…….”
루엔의 대답에 이본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황후는 이상하게 반쯤은 안도한 것처럼, 반쯤은 여전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루엔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시 이본느가 루엔에게 가까이 왔다.
“왜 날 성문으로 끌고 가려고 했지?”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정말이에요.”
루엔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공작이 황후를 궁에 붙들어 놓기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루엔이 모르는 것은 그 이유였다. 일말의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딸에게 왜 그런 부담을 지게 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자신에게 시킨 나머지 일들을 생각하면, 황후를 버리는 패로 생각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본느가 그 대답을 전혀 믿지 않는 듯 다시 분노에 찬 얼굴로 루엔의 어깨를 붙들었다. 하지만 더 물을 수는 없었다.
“뭘 하고 있습니까?”
어느새 카를로이가 알렉시스와 함께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엔과 소란을 피우느라 그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이본느가 화들짝 놀라 황급히 루엔에게서 떨어졌다.
“상황이 꽤 심각해 보이는군요.”
카를로이의 억양 없는 말투에서조차 빈정거림이 느껴졌다. 냉담한 그의 모습에 손이 저절로 떨려 왔다. 성문을 나가려다 잡힌 황후, 그리고 시녀를 붙잡고 화를 내는 황후. 어떻게 보였을지가 뻔했다.
이본느가 상황을 설명하려는 찰나, 갑자기 루엔이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폐하! 차라리 감옥에 가겠습니다. 황후 폐하와 다른 곳에 있게만 해 주세요. 황후께서 제게 거짓 증언을 요구하세요. 무서워요.”
알렉시스의 발끝에 쓰러지다시피 엎어져 우는 루엔을 이본느와 메리앤이 아연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충격적인 광경이라 말이 나오지 않아 입만 뻐끔거렸다. 마치 누구 하나 죽어 나간 듯한 서글픈 울음소리가 계속 귀를 때렸다.
평소에 레이디 루엔이 유달리 눈치가 빠르다고는 생각했지만, 눈물 쏟기 같은 것에도 이토록 재능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겁을 준 건 사실이지만, 대체 언제 위증을 요구했다고.
카를로이는 루엔의 울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이본느를 응시했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얼굴에 이본느가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맹세코 도망가려던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그래요, 그러면 그 시간에 그곳에 왜 있었던 겁니까?”
“레이디 루엔이 꼭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아버님이 나오라고 했다고…….”
“고작 시녀의 말에 그 밤에 성문까지 나갔다는 말이군요.”
“아버지의 친필 편지를 들고 있었어요.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가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본느의 대답에 카를로이가 아직도 엎어져 울고 있는 루엔을 내려다보았다. 루엔은 그 시선을 느꼈는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황후 폐하께서 당장 수도를 떠나야 한다고 짐을 싸라 하시기에 그랬을 뿐이에요. 편지라니요, 본 적도 없어요!”
루엔의 새빨간 거짓말에 이본느는 정말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사람이 진정 당황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더니 정말인 듯싶었다.
메리앤이 루엔의 뻔뻔함에 분노한 듯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알렉시스의 손짓 하나에 가로막혔다.
이본느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성문에 나간 것은 잘못했어요, 제 불찰이에요. 하지만 수도를 떠나려던 건 아니에요.”
“그 밤중에 고작 무엇인지도 모를 물건 하나를 전달받으러 나갔다고요. 그게 이상하다는 것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잠시 멈칫한 이본느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제가 죄지은 것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뭔지 알아내면 전부 폐하께 말씀드리려 했어요.”
카를로이가 천천히 이본느 앞으로 다가왔다. 거리가 좁혀지고, 이본느의 눈길이 위로 향했다. 이본느를 내려다보며 카를로이가 조용히 물었다.
“황후는 공작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걸 전혀 몰랐다는 말인가요.”
“정말이에요. 저는 몰랐어요. 말씀드린 적 있잖아요.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진 않으신다고.”
카를로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지만 너무 멀게 느껴져서 이본느가 절박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제발……. 제게 약속하셨어요. 절 믿어 주시기로. 제가 폐하 곁을 떠날 이유가 없어요.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절 믿어 주세요.”
이본느가 속삭이는 목소리에 카를로이의 얼굴이 아주 잠시 흐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이본느의 얼굴과 목소리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력을 깨닫고 더 큰 분노와 환멸이 찾아왔다. 이따위에 흔들릴 정신이 남았다니, 이러니 광증이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이 여자는 카를로이 자신이 몇 번을 믿고 넘어갔는지 알기는 알까.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모르게 믿고 넘어갔다는걸.
카를로이는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기분으로 이본느에게 물었다. 이본느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 가는 목에 손이 닿았다.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묻지요. 그대가 사생아란 투서가 있었습니다. 맞습니까.”
이본느의 얼굴에 떠오른 변화가, 잠시 멈칫하는 몸이 모두 카를로이에게까지 느껴졌다. 그것을 눈치챈 순간 그는 그 안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야 알았다. 자신은 이 순간까지도,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도 이 여자를 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 정말 단 하나의 작은 이유라도 찾고 싶어 했다는걸.
“……맞습니까.”
대답을 요구하는 말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간청처럼 들렸다. 이본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불과 아까까지 자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더니, 고작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카를로이는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자신이 미쳤던 것이 맞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을 멋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았으니 제 잘못이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제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
“폐하.”
“그대는 틀림없는 델루아의 딸이군.”
완전한 단절의 답이었다. 카를로이의 분노를 읽은 이본느가 저도 모르게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카를로이는 가차 없이 뒤를 돌았다. 그 뒷모습을 이렇게 보는 것이 몇 번째인데도,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하고 여전히 가슴이 아렸다.
“황후궁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감옥으로 데리고 가라. 이 시녀부터 심문한 뒤에 그 내용에 따라 나머지 사용인들의 심문도 받아라.”
카를로이의 명령에 병사들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본느가 다급한 얼굴로 말리려 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메리앤까지 밖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폐하.”
“황후궁 모든 문에 군사를 배치해라. 모든 심문이 끝나기 전까지 황후를 이곳에 유폐한다. 내 허락 없이 드나드는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처분해도 좋다. 황후궁엔 내 시종들 몇몇을 데려다 놓고.”
알렉시스가 명에 따라 병사들을 움직이자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황후궁이 소란에 빠졌다. 사람들이 끌려 나가는 소리와 병사들의 요란한 발소리가 궁을 가득 채웠다.
그 광경을 보던 이본느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바닥에 주저앉았다. 쉽게 믿어 주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토록 단번에 돌아설지도 몰랐다.
“폐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려서,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 부름에 카를로이는 잠시 멈추는 듯했지만, 결국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이본느가 꼼짝도 못 하고 주저앉아 있는 사이 병사들이 몰려와 황후궁 모든 문 앞에 서기 시작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