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황후는 황제를 모른다 (2)
아셀은 말했다. 황후가 아버지를 버리고 황제의 편에 붙기로 결심했다면, 그거야말로 공작 부인의 딸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카를로이는 혼자 생각했다. 아버지를 버리는 게 그렇게 대수인가?
머리로는 그것이 힘든 일인 걸 알겠는데, 저와 제 부모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솔직히 이 정도로 유난 떨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역시 어딘가 단단히 글러 먹은 인간임을 또 깨닫고.
카를로이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아셀은 이제 카를로이의 귀 바로 옆에 와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셀, 증거를 가져오라니까.”
“폐하도 공작 뒤꽁무니를 10년간 쫓아다녀도 뭐 하나 못 찾았잖아요. 내가 어떻게 한 달 만에 찾아요.”
놀랍도록 무엄하고 합리적인 지적이었다. 할 말이 없어진 카를로이가 입을 다물고 괜히 책상을 정돈했다. 잠시 뒤에 이본느와 실내 정원 엔투라룸에서 보기로 했으니 슬슬 나가야 했다.
카를로이의 손길을 따라 이리저리 눈을 돌리던 아셀이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술병 하나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카를로이는 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고, 집무실에 그런 걸 둘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웬 술이에요?”
“별거 아니야.”
단순한 아셀은 그 말에 고민을 좀 하는 듯하더니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화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공작저에 있던 집사장 분위기가 딱 그랬어요. 전혀 귀한 영애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고요.”
“그럼, 진짜 딸은 어디로 갔다는 말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 말이 맞다니까요. 아끼는 딸이 아니니까 폐하랑 결혼시킨 거예요.”
“그게 맞다 해도 확인할 길이 없어. 어떻게 그걸 알아낼 거야.”
“증거 왜 필요해요? 황후 넘어왔다면서요. 가서 물어봐요! 어머니가 공작 부인이 맞냐고. 이제 거짓말할 이유는 없으니까 사실대로 말하겠죠.”
아셀의 고집에 카를로이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아셀은 한번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이 있었다. 절대 굽히지 않았다. 사실 그의 다분한 짐승적인 ‘직감’이란 것이 틀린 적이 없으니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감각은 적과 아군을 구분할 때나 피 냄새를 맡을 때나 쓰이는 것이지, 누가 사생아인지 아닌지 구분할 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좋아. 가서 직접 물어보고 반드시 자네에게 알려 주지.”
“좋아요. 내가 틀렸다면 고르텐 영감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어요.”
정말 자신하는 모양이다. 고르텐의 소원은 아셀이 꺼지는 것일 텐데. 카를로이는 그 쇠고집에 혀를 내두르며 집무실을 나왔다.
엔투라룸으로 향하며 그는 만에 하나 아셀의 말이 맞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크로이센에서 사생아 신분을 숨기는 것은 중죄, 그것도 황실의 안주인 자리로 사생아를 밀어 넣었다면 재고할 여지도 없이 감옥행이다. 단두대까진 보내지 못하겠지만, 판을 제대로 흔들 기회였다.
그러니 실상 카를로이가 고민하는 것은 그 기회를 쓰냐 쓰지 않느냐였다. 그건 이본느를 함께 날리는 기회인데, 그걸 쓰느냐 마느냐.
“이 꽃잎을 많이 먹으면 사람이 좀 이상해지는 거 아세요? 우리 제인이 어렸을 때 뭘 모르고 맛있다고 계속 먹다가 아주…….”
엔투라룸의 문 앞에서 카를로이는 멈춰 섰다. 메리앤이 꽃 몇 송이를 들고 이본느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본느는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이본느는 꽃 한 다발을 가득 품에 안고 엔투라룸의 바닥에 드레스 자락을 펼치고 앉아서 메리앤을 올려다보고 있다. 드레스 주름을 따라 꽃잎들이 자수처럼 흩어져 있었다. 유리 천장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이본느의 백금빛 머리칼과 그것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하얀 얼굴을 감싸자 엔투라룸 가득한 꽃 향이 그의 옆까지 맴돌았다.
엔투라룸의 화려한 문에 팔짱을 낀 채로 기대서서, 카를로이는 한낮의 햇빛이 황후와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꽃에 파묻혀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모습도.
무엇에 매인 양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고, 어쩐지 눈을 감아도 이 모습이 오래도록 눈에 잔상처럼 남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자신이 옆에 있지 않을 때는 저렇게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 술에 취해 우는 날 말고도 다른 날들이 있었을까.
빗속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처참하게 부서졌던 이본느의 모습을 카를로이는 잊지 못했다.
희미한 미소가 꽃망울이 터지듯 작은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엔투라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웃음소리가 카를로이의 귀를 간지럽혔다. 웃음소리에 가슴이 내려앉아서, 카를로이는 또 무섬증이 들었다.
그 어떤 불행의 흔적도 없는, 일말의 불운도 엿보이지 않는 그런 평화로운 광경은 익숙지 않았다. 숨소리라도 내면 바로 누군가에게 뺏길 듯한 불안감이 원인 모를 무섬증을 더 자극했다.
“어머, 폐하.”
메리앤이 서 있는 카를로이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본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꽃잎들이 팔랑거리며 주위에 내려앉았다.
이상하게도 목이 뻣뻣해져서 카를로이가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엔투라룸으로 들어오며 나가라는 눈짓을 하자 시녀들이 모두 자리를 비켰다.
“굳이 일어설 필요는 없었는데.”
“이렇게 빨리 오실 줄 몰랐어요.”
이본느의 머리에 메리앤이 들고 있던 꽃의 분홍빛 잎 두어 개가 매달려 있었다.
“꽃잎이 황후 머리에…….”
“여기요?”
“아니, 그쪽이 아니라.”
이본느가 카를로이를 올려다보며 제 머리를 더듬었다. 마주보고 있는 이에게 그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겠다는 듯한, 또 상대방이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할 것 같은 무해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를로이의 목이 떨리듯 움직이는 것이 보이자 이본느의 얼굴에 설핏 열이 올랐다. 머리카락을 스쳤을 뿐인데 긴장감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아, 감사해요…….”
카를로이가 헛기침을 하며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이곳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할 줄 몰랐습니다.”
“아름다운 곳이니까요.”
이곳에 있으면 칼이 약속을 지켰다고 스스로 세뇌라도 할 수 있었다. 칼은 약속을 지켰고, 나는 그가 허락한 곳에, 그가 약속했던 곳에 들어와 있다고. 그 사이엔 어떤 불행도 없었다고 그렇게 쉽게 기억을 비틀 수 있었다.
춤을 추는 튜랑 꽃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을 내려다보던 카를로이가 불쑥 물었다.
“춤은 잘 춥니까?”
뜻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못 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본느가 아닌 그 누구라도 맞아 가며 배웠다면 춤꾼이 될 수 있었을 거다.
누가 보아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공작의 딸이 되기 위해 이본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꿔야 했고, 그 모든 변화에는 공작의 폭력이 함께 했다. 사용인들한테 습관적으로 존댓말을 쓸 때마다 한 대 맞았으니 오죽할까.
“출 수는 있어요.”
“며칠 후면 아르바 루프의 첫 파티가 있잖습니까.”
“그건 그런데, 춤은 왜……?”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본느를 보고 카를로이는 미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황궁의 연회에서 황제와 황후가 춤을 추는 것은 당연한 일 중 하나였지만, 매번 존재를 무시당한 이본느가 그걸 기억할 리 없는 것 또한 당연했다.
“나와 춰야 할 테니까요.”
이본느의 얼굴에 천천히 충격이 어리는 것을 보고 카를로이는 다시 죄 없는 튜랑 꽃을 빤히 노려보았다. 노란 꽃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자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서 노란 드레스를 입은 이본느가 춤을 추었다.
때도 모르고 나타난 이상한 그림에 카를로이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미쳤나. 이젠 꿈도 모자라서. 어느 순간부터 이본느는 그의 꿈과 현실, 모두를 지배했다.
“그렇지만.”
당황한 목소리로 이본느가 말했다.
“춤을 춘 지 너무 오래돼서…….”
“어려운 춤을 추는 것도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황비와 추셔도 저는 상관없어요. 일부러 저랑 추실 필요는 없어요.”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게 제안하는 이본느를 보니 카를로이는 속이 답답해져 왔다. 이래도 저래도 계속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답은 생각보다 더 무뚝뚝하게 나갔다.
“그대와 추고 나면 황비와도 출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본느는 왠지 피곤해 보이는 카를로이를 보고 별다른 말을 얹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다 추는 춤에 큰 의미가 있진 않겠지.
카를로이의 입에서 피로가 느껴지는 숨이 옅게 흘러나왔다. 이본느는 품에 안고 있던 로즈메리 다발을 내밀었다.
“좀 가져가시겠어요?”
“이걸 왜?”
“저도 잘은 모르지만, 주변에 꽂아 두면 피로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카를로이가 천천히 꽃을 건네받았다. 자신에게 이런 걸 주고 싶을까?
카를로이는 햇빛에 반사되어 꼭 반짝거리는 것 같은 이본느의 초록빛 눈을 바라봤다. 제 아버지는 버리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춤 한 번 춰 주지 않은 자신에게는 꽃을 내민다.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이본느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카를로이는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사생아란 단어는 입가에서만 맴돌았다.
“아셀이 그러더군요. 그대와 공작의 관계가…… 좀 의심이 된다고.”
운을 띄운 카를로이가 이본느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나도 이상한 질문이란 걸 아는데. 혹시 공작 부인이…… 친모가 아닙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이본느의 머리가 하얘졌다.
“아니요.”
대답은 반사적이었다. 어차피 마법 때문에 사실을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마법이 아니었어도 쉽게 말하진 못했을 것이었다.
리리안 루라는 걸 밝히지 못한 채로 사생아란 것만 인정하면 쫓겨나는 걸 각오해야 했다. 이대로 쫓겨난다면 드니스와 자신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 호위 기사가 뭘 착각한 모양이에요. 대체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던가요?”
차분히 나오는 대답에 카를로이는 자신만 우스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냐는 질문에 답을 해 줄 증거 하나 없는.
“워낙 예민한 녀석이라……. 나도 착각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더 우스운 것은 이본느의 대답에 안심하는 자신이었다. 카를로이는 이본느가 준 로즈메리 다발을 붙든 채 그 감정의 원인을 찾아내려 애썼다.
공작을 고작 사생아 신분을 속인 죄로 감옥에만 보내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이본느를 그렇게만 쓰고 버리기도 아까웠고.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그제야 카를로이는 대충이라도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꽃은 잘 꽂아 두도록 하겠습니다.”
이본느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카를로이도 자신의 사정을 다 이해할 것이다.
자신이 준 것을 이젠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드는 카를로이를 보며 이본느는 불안감을 죽였다.
* * *
카를로이는 집무실 책상의 꽃병에 잘 담겨 있는 로즈메리 꽃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저 꽃을 받아 오지 않는 게 나았을 거라고 후회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보랏빛이, 고개를 숙이면 느껴지는 향이, 모든 것이 이본느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저리 치울까 하다가도, 결국은 망설이게 된다. 자신이 준 꽃이 카를로이의 책상 위에 잘 모셔져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이본느의 얼굴이 그를 머뭇거리게 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이본느는 웃었다. 고작 준 꽃을 책상 위에 놓았다고 했을 뿐인데. 그전까지는 사람이 하나 죽어 나가도 무표정을 유지할 것 같던 사람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웃음이 늘었다.
그렇다고 또 그 웃음이 큰 것도, 잦은 것도 아니라 불미스럽고 달갑지 않은 갈증만이 생겼다. 찔끔찔끔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으려 헥헥거리는 개새끼라도 된 듯한 기분은 전혀, 전혀 좋지 않았다.
역시 저 꽃은 받지 말아야 했는데.
“싫으시면 치우겠습니다.”
고르텐이 꽃병에다 손을 가져다 댔다.
“내가 싫다고 했나?”
공격적인 어투에 고르텐이 뻗던 손을 다시 집어넣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이 일주일 내내 꽃병을 노려보고만 있으면 당연히 싫다는 의미가 아닌지. 또 이해가 안 되는 짓들을 하는 카를로이가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꽃병을 포기한 고르텐이 옆에 놓인 술병과 술잔을 가져가려고 손을 뻗었다. 카를로이는 생전 술이라고는 찾지 않았었는데 요새는 그의 침실을 가도, 집무실을 가도 꼭 이렇게 술이 있곤 했다. 마시면서 일을 하는 것 같진 않지만, 딱히 좋은 습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것도 그대로 둬.”
“예?”
“종종 마시려고 둔 거니까 그 자리에 둬.”
“……요새 무슨 일 있으십니까? 술은 좋아하지도 않으시는 분이.”
고르텐의 물음에 카를로이가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게 무슨 일이 없었을 때도 있었나? 새삼스럽군.”
자조적인 말투였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고르텐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황제를 잠시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다 표정을 정리했다. 이런 얼굴을 한 걸 들키면 분명 한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럼 멀쩡한 꽃병은 그만 쳐다보시고 연회장으로 가셔야지요.”
아르바 루프의 첫 파티, 전야제였다. 온 궁전에 화려한 휘장이 걸리고 지방에서 올라온 귀족들로 수도가 복잡했다. 들뜬 분위기가 온 수도를 감싸고 있었다.
“아셀은?”
“오늘은 무조건 폐하의 호위를 해야 한다고 징징거리기에 풀어 줬습니다. 곧 나타나겠지요, 뭐.”
고르텐이 툴툴거리듯 대답했다. 이본느가 사생아가 아니라는 답을 들려주자 아셀은 충격받은 얼굴로 잠시간 현실을 부인하다 결국 자신이 했던 말을 책임졌다. 신난 고르텐이 이번에야말로 상명하복의 개념을 익히게 해 주겠다며 일주일간 아셀을 잡일만 하는 곳에 처박아 두었는데, 오늘은 그래도 파티라고 봐준 듯했다.
연회장 쪽으로 걸어가며 카를로이는 생각했다. 그저 조금만, 적당히 잘해 주려고 했을 뿐인데, 아니, 잘해 주는 척하려 했을 뿐인데 점점 자신이 곤란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 황후 폐하께서 먼저 와 계셨네요.”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여자를 본 순간, 모든 복잡한 감정이 갈증으로 변해 카를로이를 휘몰아쳤다.
노란색의 드레스를 입은 이본느가 고개를 돌려 카를로이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에, 그의 머릿속은 깨끗이 지워지고 오로지 타는 듯한 감각만 남았다.
“폐하.”
목소리마저도 그의 귀를 괴롭혔다. 카를로이는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자신의 황후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손을 내밀자 머뭇거리던 작은 손이 그의 손 위에 가볍게 얹어졌다.
“이런 식으로는 처음 들어가 봐서…….”
긴장한 목소리로 이본느가 중얼거렸다. 항상 카를로이와 따로 들어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뭐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카를로이는 이본느를 가볍게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폐하한테서 로즈메리 향이 나요.”
가까워진 이본느가 그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카를로이는 무섬증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떤 방패막도 없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계획했던 것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거리가 가까워졌는데, 그것을 막을 그 무엇도 보이지가 않아서.
“……황후에게서도 납니다.”
“아, 잘 때 두고 자서 그런가 봐요.”
시종이 문을 열었다.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손을 이끌고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화려한 연회장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눈이 부셨다. 악단의 연주와 함께 전야제가 시작되었다.
카를로이와 입장을 하는 것이 처음이라 긴장을 했다는 건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긴장의 주된 원인은 그쪽이 아니라 키아나였다. 이본느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키아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웃고 있는 여자를 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며칠 전, 이본느는 결재 서류에서 키아나의 필체를 찾아내 글씨체를 베꼈다. 만나고 싶다는 간단한 메시지와 장소를 적고, 키아나의 이름을 적었다. 수신인은 클라이드 앙센이었다.
편지를 전달하는 일을 맡은 레이디 앙센은 떨떠름한 얼굴로 의심을 표했다. 편지를 그의 거처에 몰래 두고 오면서도 자신이 배다른 둘째 오라비와 가깝진 않지만, 황비와 염문이 있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오늘 연회에서 밝혀질 일이었다.
“델루아 공작은 오늘 오지 않았나 봐요.”
키아나가 옆에서 속삭이듯 물었다.
“몸이 좋지 않으셔서.”
답을 하면서도 이본느는 그 답을 믿지 않았다. 공작은 병 따위에 걸릴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오늘은 클라이드와 키아나가 잡히는 현장을 보기 위해서라도 꼭 참석할 줄 알았는데, 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영지에 붙어 있지를 않았던 사람이 이제 영지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하지만 앙센 백작의 얼굴이 역겨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걸 보니, 공작의 일을 잘 위임받은 듯했다. 묘하게 신난 것처럼 보이는 앙센 백작의 얼굴을 보자 이본느는 확신이 들었다. 클라이드와 키아나는 분명 모종의 사이인 데다가, 앙센 백작 또한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을 거라고.
궁중 악단의 음악이 한 곡 끝나자 옆에 앉아 있던 카를로이가 손을 내밀었다. 춤을 출 시간이었다. 연회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는 표정이 이상했는데 지금은 기분이 나빠 보이기까지 했다.
“저랑 춤을 춰도 괜찮으시겠어요?”
카를로이의 손을 잡고 홀로 나오며 이본느가 물었다. 궁중 악단이 전주를 시작하자 카를로이가 이본느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손은 내 어깨에.”
카를로이가 이본느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가까워진 거리에 얼굴이 뜨거워진 이본느가 조심스레 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렸다.
시선을 내렸더니 보이는 것은 널따란 그의 가슴뿐이었다. 그조차 왠지 민망해져서 다시 눈을 올렸을 땐, 카를로이가 이본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은 시선이 이본느를 향했다. 맞닿은 손이 저렸다.
“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카를로이가 허리를 놓아주자 이본느가 가볍게 한 번의 턴을 하고 그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쓸데없는 질문이니까.”
카를로이의 단단한 팔이 다시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이본느를 붙들어 두는 카를로이의 눈빛을 마주하자니 현악기가 내는 음악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잘 빗어 넘긴 아름다운 흑발, 이마부터 콧날, 그리고 턱까지 이어지는 수려한 선, 그리워하던 짙은 금색 눈, 팔만큼이나 단단해 보이는 목선.
아, 칼은 정말로 훌쩍 커 버렸다. 카를로이를 훑는 이본느의 심장이 떨렸다. 지나치게 가깝다.
“괜찮지 않았다면 추지 않았을 겁니다.”
낮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불순한 건지, 그 목소리에 숨을 삼키는 자신이 불순한 건지 이본느는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카를로이는 나를 믿겠다고 했어.
이본느는 홀린 듯 그를 따랐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제 손을 그러쥐는 그의 손을 맞잡고, 그의 팔을 따라 부드러이 떨어졌다 다시 그의 품에 안기는 일을 반복했다.
그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는 모든 순간은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춤을 추지 않았다면 시간이 흐르고 있단 사실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틈 하나 없이 바짝 붙어 있는 카를로이와의 사이에서는 시간조차 흐르지 못할 것 같았다.
이본느가 배웠던 춤들은 괴롭고 무서웠으며, 힘들었다. 이토록…… 야릇하진 않았다. 카를로이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이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반응했다.
“……음악이, 끝났나 봐요.”
마침내 발이 멈추었을 때 이본느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그제야 주변의 소음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궁중 악단은 숨만 한 번 돌리고 다음 곡을 위한 전주를 시작했다. 황제와 황후의 첫 춤이 끝났기에 홀로 다른 귀족들이 쌍쌍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본느가 카를로이의 손을 놓고 그의 어깨에서도 손을 떼려 할 때, 그가 다시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다시 시작하는군요.”
카를로이의 목소리가 음악과 함께 귀로 흘러 들어왔다. 그가 다시 허리를, 손을, 팔을, 눈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본느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이런 춤에 어떻게 의미가 없을 수 있을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뜨거운 춤에.
카를로이는 그전에 춤을 추던 여자들과도 이런 식으로 춤을 췄을까.
“변하셨어요.”
“……우리 사이가 변했으니까요.”
카를로이는 자신이 조금은 변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본느가 품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싫어 본능적으로 다시 잡은 순간에 느꼈다. 이본느에게 잘해 주는 척하려던 자신의 계획이 그녀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이 모든 일이 끝난다면요.”
카를로이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이, 완전하게 제품에 들어온 여자가 속삭였다.
“폐하께서도 편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카를로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불가능했으므로.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에게 남는 것은 아마 아무것도 없겠지.
불안했던 마음도, 타오르던 감각도 갑자기 잔잔해졌다. 그리고 두 번째 음악이 끝이 났다. 이번에는 카를로이가 이본느를 놓아주었다.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던 것이 꿈이었던 양 다시 멀어졌다.
이본느는 대답 없는 카를로이를 조용히 바라보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고 카를로이는 생각했다. 이본느를 신경 쓴다 해도, 이본느에게서 애써 루를 찾으려 한다 해도, 그가 조금은 변했다 해도, 아무래도 좋을 거라고. 어차피 이 모든 것이 계속될 리가 없으니까.
언젠가 끝이 온다면 어차피 그에게 남는 것은 없을 테고, 이본느는 더더욱 그에게 남을 사람이 아니었다. 남아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고. 그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모든 것은 무위로 그칠 일이었다.
카를로이는 굳어 버린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며 홀로 내려온 키아나의 손을 잡았다. 의미 없는 춤들이 계속되었다.
* * *
키아나는 발코니로 향하다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걸음을 멈췄다.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고 놀란 숨을 토해 냈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다.
“키아나.”
클라이드가 키아나의 손을 낚아채 발코니의 입구 역할을 하는 커튼 뒤로 들였다.
“너, 너.”
키아나는 충격 때문에 말도 잇지 못했다. 시종일관 자신을 관찰하는 황후가 무엇이라도 트집을 잡을 것 같은 기분에 준비하는 시종들을 한 번 확인하러 온 것인데 시종들은 온데간데없고 클라이드 혼자였다.
좀 있으면 층의 모든 발코니가 폭죽을 날리기 위해 귀족들로 가득 찰 것이다.
“미쳤어?”
키아나가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클라이드를 다그쳤다. 바짝 붙어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아닌 경악만이 담겨 있었다.
“내가 보낸 편지 못 받았어? 때가 되면 다 설명하겠다고,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
이제는 클라이드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기나긴 전쟁에서 돌아오니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는 것도 황당한데, 불러 놓고 모른 척이었다.
유일하게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이 1년 만에 얼굴을 보고 하는 첫 말이 미쳤냐는 물음이라니, 클라이드야말로 심장이 떨어졌다.
“무슨 소리야. 네가 오늘 밤 9시에 서쪽 발코니로 나오라고 했잖아. 네가 하겠다는 그 설명을 오늘 하려고 부른 거 아니었어?”
“뭐?”
클라이드가 건네는 편지를 사색이 된 키아나가 떨리는 손으로 펼쳤다. 급한 손길에 편지 모서리가 찢어졌다.
“이건, 이건 내가 쓴 게 아니야! 너 나를 그렇게 몰라?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 연회에서 만나자고 하겠어?”
“네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한 지금은, 이제는 네가 누군지 모르지! 네가 황비니까 아무도 오지 않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어. 게다가 네 글씨체잖아.”
“발코니가 퍽이나 아무도 안 올 장소겠어!”
“하지만 이곳만 아무도 없었다고.”
키아나는 편지를 잔뜩 구겨 클라이드의 손에 넘겨주었다. 소름 끼치게도 분명 자신의 글씨체였다. 잠결에 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충격에 몸이 떨렸지만, 이렇게 실랑이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러고 있으면 안 돼.”
키아나가 클라이드에게서 등을 돌린 순간 커튼이 젖혔다. 커튼 옆으로 앙센 백작의 날카롭게 째진 눈이 보였다. 그 눈에 쾌감처럼 보이는 감정이 떠올랐다.
시선이 서로를 훑기도 전에 앙센 백작이 움직였다. 백작은 클라이드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의 손에 멍하니 쥐어져 있던 종이를 낚아챘다.
“이런, 이런!”
앙센 백작의 호들갑스러운 소리가 커질수록 키아나의 얼굴이 하얘졌다. 덫이었다.
“황비 전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밀회라니, 이럴 수가!”
역할과 대사가 정해진 연극처럼 그가 말을 시작하자 어디서 오는 건지 귀족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발코니에 갇힌 꼴이 된 키아나와 클라이드가 어쩔 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자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후작! 설마 후작도 알고 있었소? 내 ‘동생’과 황비 전하의 관계를?”
다른 사람보다 늦게 온 로덴 후작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키아나와 앙센 백작을 번갈아 보았다.
키아나는 그만 눈을 감았다. 저 편지를 보자마자 먹어 버려야 했는데. 감았던 눈을 뜬 키아나는 앙센 백작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모든 일이 실패하더라도 저 새끼는 직접 죽이리라 다짐했다.
“백작, 지금 자네 그 말을 책임질 수 있나?”
“아니, 제가 틀린 말을 하고 있습니까? 밀회를 요구하는 편지에, 이렇게 단둘이 만나고 계신데, 다른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 편지는 내가 쓴 것이 아니야. 클라이드 경은 내가 쓴 것인 줄 알고 온 모양이라, 내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중이었네.”
로덴 후작의 머리가 다시 백작과 키아나 사이를 번갈아 오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클라이드 경, 자네가 말해 보게. 내가 뭐라 했지?”
클라이드 앙센은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이복형을 잠시 한심하게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다고, 여기서는 폭죽놀이를 해야 하니 자리를 비켜야 한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저놈이 또 헛소리를. 그럼 너는 모르는 사이인데 편지를 받고 덥석 왔단 말이냐? 미친놈이야?”
“형님, 저는 황비 전하의 명인 줄 알았을 뿐입니다.”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여기서 둘이 한참을 속닥거리는 걸 들었는데!”
서쪽 발코니 앞은 진실 공방을 하는 사람들로 금세 시끄러워졌다. 이윽고 맨 뒤에서 황제와 황후가 나타났다.
카를로이는 발코니에 서 있는 클라이드와 키아나를 보고, 그리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상황을 모두 파악했다.
클라이드가 키아나가 말했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니 모든 것이 맞춰졌다. 클라이드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크로이센에 부득불 남겠다고 했던 것도, 키아나가 사생아 대우에 대해 그렇게 분노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키아나는 카를로이와 눈이 마주치자 미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카를로이의 옆에 서 있는 이본느가 눈에 들어왔다. 무표정의 얼굴에서 키아나는 분명 설핏 지나가는 감정을 읽었다. 그건 죄책감이었다.
황실에서 쓰는 편지지를 가진 사람, 키아나가 이 시간 발코니로 나올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 앙센 백작과 일을 공모할 수 있는 사람.
“이건 모함이야.”
키아나는 이본느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자신이 황후의 마음을 눈치채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듯, 황후 또한 제 마음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키아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 * *
때아닌 추문에 푸르투 궁전이 뒤집혔다. 며칠 내도록 고성이 오갔고, 카를로이는 터질 듯한 귀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당하는 것도 벅찼다. 앙센 백작을 비롯한 공작파의 귀족들이 황비를 폐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께서는 명명백백한 증거를 무시하고 계십니다!”
“글씨체는 누구나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어디 한번 공이 황비 전하의 글씨체를 흉내 내 보시오! 어디 해 보란 말이오!”
이 싸움이 소모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 다른 사안은 의논도 못 할 지경이 되었다.
그놈의 편지가 문제였다. 별다른 밀어가 적히지 않았더라도 야심한 시간에 외간 남자를 그렇게 불러낸 것이 악수였다. 키아나는 자신이 쓰지 않았다고 끝까지 주장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카를로이는 키아나를 공식 업무에서 제외하고 황비궁 출입을 제한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클라이드가 1년간 마하로 떠나 있었고, 그 전에 둘이 만났다는 다른 증거가 전혀 없었기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었다.
앙센 백작은 자신의 남동생인 클라이드 앙센이 잠꼬대로 황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한 번 이상 목격했다고 증언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정말 그 편지를 쓰지 않았어요! 제가 미쳤다고 그러겠어요!”
카를로이와 뒤냐 공작, 그리고 로덴 후작이 있는 자리에서 키아나가 강하게 주장했다. 카를로이는 그 말을 믿었다. 키아나는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나도 황비가 그 편지를 쓰거나 보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클라이드 경과 모종의 사이인 건 맞는 듯한데, 아닌가?”
카를로이의 말에 키아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알렉시스의 입에서 곤란한 신음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로덴 후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제 딸은 폐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황비가 되기를 자청한 아이인데!”
혼자 아무것도 모르는 로덴 후작을 보며 카를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후작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황비?”
키아나는 도저히 자신의 입으로 진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는지 멀뚱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카를로이는 그것을 대신 말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황비는 날 사랑해서 내 황비가 된 게 아니야. 황비로 들일 사람이 아무도 없어 곤란하던 차에 날 찾아왔어.”
“도대체 무슨 소린지 저는…….”
“황비가 되어 내가 공작을 치는 것을 도울 테니, 자신의 조건 하나를 들어 달라고 했어. 일이 끝나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더군.”
후작이 숨도 못 쉬는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여 옆에 있던 알렉시스가 시종에게 치료사를 불러 놓으라고 귀띔을 주었다.
“나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 그렇지 않아도 로덴 후작 자네가 호시탐탐 발 뺄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
“아니, 폐하. 저는…….”
“이미 지난 일이니 굳이 변명은 하지 말지. 나도 그 정도는 이해하니까.”
“아니.”
계속 변명하려는 후작을 카를로이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 사람의 정체는 밝히지 않기에 굳이 묻지는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가 마하가 정복 전쟁에서 세가 좋지 않을 때였어. 군인들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가 없었고.”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마하 제국은 급기야 다른 대륙을 정복하기로 했고, 대륙 모든 국가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대신 먹이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던 다른 나라들, 크로이센과 라르투아는 기꺼이 군대를 보내 주었고 앙센 백작은 노래를 부르며 클라이드 앙센을 보냈다. 물론 제 나라를 다시 세우기도 바쁜 베르니는 제외였다.
“가주의 말을 들어야 하는 사생아를 군대에서 빼내 오려면 황제의 명령 정도는 필요했겠지.”
로덴 후작이 기어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입에서는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뱉어 내는, 짧게 토막 난 단어들만이 나왔다. 단어들을 대충 조합해 보면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런 문장이었다.
카를로이의 설명 내내 다 포기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키아나가 눈을 천천히 떴다. 키아나의 눈은 새파랗게 빛나서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클라이드가 예상보다 빠르게 살아 돌아오긴 했지만, 난 후회 안 해요. 아버지가 정한 결혼을 물리려면 황제 폐하 정도 되는 짝이 아니고선 불가능했으니까.”
“아니, 그 영식이 뭐가 어쨌다고…….”
“흥. 그런 아둔하고 못생긴 놈이랑 결혼하느니 내 발로 황궁에 들어가는 게 낫지.”
“너……!”
알렉시스가 시종들에게 눈길을 주자 시종들이 로덴 후작을 잡고 일으켰다. 카를로이가 이어서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들이 천천히 로덴 후작을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폐하! 이게 무슨!”
“후작, 안타깝지만 열은 혼자 나가서 식히고 오게. 지금 한가롭게 자네를 이해시키고 달래 줄 상황이 아니야. 상황이 좋지 않아.”
“아니, 뒤냐 공, 이럴 수는 없습니다!”
카를로이의 묵인하에 로덴 후작이 응접실 바깥으로 끌려 나갔다. 로덴 후작이 나간 응접실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황후예요.”
침묵을 깬 사람은 키아나였다. 이본느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을 거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못한 카를로이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황후밖에는 없어요. 나와 클라이드 사이를 눈치챘으면서, 황실의 편지지를 사용하고, 내 글씨체까지 아는 사람.”
뒤냐도 키아나의 말을 바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전하, 앙센 백작조차도 심증만 있어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을 황후가 어떻게 눈치를 챘단 말씀입니까? 심지어 궁에서는 클라이드 경과 말 한마디 나누지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건 나도 몰라요. 하지만 황후는 분명히 알고 있어요. 나에게 클라이드 경과 만난 적이 있는 사이냐고 묻기까지 했단 말이에요.”
“뭐? 언제?”
카를로이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서 뒤냐는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마하에서 돌아온 군인들과 만찬을 가졌던 날요. 분명히 뭔가를 눈치챈 사람 같았어요.”
키아나는 이본느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저 이본느를 얕본 자신이 한심했을 뿐이었다. 황후를 어떻게 이용해 보려다 이렇게 한 방 먹었으니 비긴 거라 칠 수 있었다. 다만, 황후를 이대로 믿고 같이 갈 수는 없었다. 그건 필패의 길이고, 카를로이가 진다는 것은 자신과 클라이드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것을 뜻했다.
알렉시스가 키아나의 말을 고민해 보는 듯 말이 없어지자 옆에 앉아 있던 카를로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황후가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어.”
“왜 없나요? 황후가 아직도 공작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게 설명되는데.”
“황후는 넘어왔어.”
“넘어온 척한 걸 수도 있죠. 확실히 넘어왔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어요?”
“이렇게 바로 자네에게 의심받을 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아. 공작이나 앙센 백작의 짓일 수도 있지.”
“어차피 내부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카를로이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사람이 되겠다고 말하던 이본느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그 모습에선 거짓의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클라이드와 키아나를 보고도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은 그 모습은? 아니다, 황후는 원래도 감정 표현이 없는 사람이니까.
한편으론 또 황후 이야기를 하며 불안해했던 키아나가 떠올랐다. 분명 그때 키아나는 이본느를 의심하고 있었다. 카를로이의 머리에 수만 가지 생각이 몰아쳤다.
한참을 생각하던 알렉시스 뒤냐가 입을 열었다.
“폐하, 황후가 브로치는 가져오겠다 했습니까?”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고 영지로 내려가서 가져오겠다더군.”
“지금 상황에서 황후가 누구 편인지는 크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 쪽에서 황후에게 넘긴 정보는 브로치 하나니까요. 그걸 황후가 어떻게 하냐를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뒤냐 공, 황후는 분명…….”
“이해합니다, 황비 전하. 하지만 증거도 없을뿐더러, 황후는 손쉽게 버릴 수는 없는 패입니다. 위험을 감수해야겠지만 폐하께서 잘만 해 주시면 큰 뒤탈은 없을 겁니다.”
자신을 언급하는 알렉시스를 카를로이가 무표정으로 바라봤다.
“폐하께서는 절대 황후를 믿지 마십시오. 더 이상의 정보도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특히 베르니에 대해서는. 황후가 할 일은 브로치를 가져오는 것, 딱 하나니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믿어 달라고 하던 이본느가 떠올랐다.
“일단 황비 일부터 수습하도록 하지. 황비를 폐위시킬 때까지 저쪽은 포기하지 않을 듯하니.”
그 말을 남기고 응접실을 떠나는 카를로이의 뒷모습을 보며 키아나와 알렉시스는 같은 생각을 했다.
카를로이가 대답을 피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델루아의 딸을, 그 누구도 아닌 카를로이 크로이탄이?
황비와 공작의 마음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 * *
약병의 약이 어느새 3분의 1이나 없어졌다. 미약하지만 분명 가슴 언저리에 한 번 통증이 느껴졌다. 딱 한 번이고, 통증은 스쳐 지나갔지만, 불안했다. 그리고 가위에 눌리는 일이 잦아졌다.
이본느는 초조한 마음으로 눈앞의 찻잔을 바라봤다.
“황후는 이 일에 대해 전혀 언질받은 게 없었습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를로이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이본느는 찻잔에서 손을 떼고 그를 바라봤다.
“네, 전혀. 원래도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어요.”
“……그렇군요. 황비에게는 클라이드 경과 만난 적 있냐는 질문은 왜 한 겁니까?”
“제가 그런 걸 물었다고요? 아, 그때……. 만났냐고 물어보진 않았는데. 아는 사이냐고 물어본 거예요.”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는데 다들 아는 유명한 사람인 듯해서. 황비는 아는지 궁금해서 한번 물어봤어요. 당연히 ‘알다’의 의미를 그렇게 쓴 건 아니었는데. 황비는 폐하를 무척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이본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 반과 진실 반을 늘어놓았다. 실제로 키아나와 황제가 그래도 서로 마음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함정을 파기 전까지는 클라이드와의 사이를 확신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클라이드와의 사이가 밝혀졌으니 그마저도 의문스럽다. 황비와 카를로이는 무슨 사이지?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도 이본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모함이지 않을까요. 제가 본 황비는 폐하를 마음에 둔 것 같았어요. 게다가 그 편지는 연인 사이라 치기엔 너무 건조한 편지던걸요.”
“들킬까 봐 그런 것이지 않겠습니까.”
“들킬까 봐요? 그러면 황비와 클라이드 경이 정말 그런 사이란 말씀이세요?”
이본느는 모른 척을 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원래도 거짓말엔 소질이 있긴 했지만, 카를로이에게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나름 애를 쓰고 있었다. 앙센 백작이 편지지에 낯 뜨거운 말을 써야 확실히 끝낼 수 있다고 했지만, 이본느는 그러지 않았다. 다행히 그 덕분에 황비는 바로 폐위되지 않고 어떻게 시간을 잘 끌고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무슨 사이인 것 같긴 하더군요.”
카를로이가 천천히 대답했다. 이본느의 반응을 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키아나의 반응 또한 신경 쓰였다. 황후를 이야기할 때 내비치던 그 불안감을 카를로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클라이드와 키아나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고 거짓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카를로이는 충동적으로 진실을 말했다. 이본느를 시험하는 것은 마치 자신을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절대로 잊으시면 안 돼요. 절 믿기로 약속하셨다는걸.>
그때 자신이 뭐라고 생각했더라. 참 실없는 부탁이라고 생각했었나. 카를로이는 그때의 자신을 비웃었다. 완전히 틀렸다. 전혀 아니었다.
“영지에 내려가는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께 편지를 보냈어요. 조만간 내려갈 거라고. 곧 있으면 답이 올 거예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카를로이를 보고 이본느는 가슴이 조금 벅차올랐다. 카를로이가 자신을 믿는다. 그 사실 하나로 이런,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날 믿는다.
아, 심장이 뛴다.
한심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본느는 참아 냈다. 왜 눈물이 나려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람은 심장이 뛸 때 살아 있는 걸 느낀다 했다. 리리안이 이본느가 된 뒤로부터 이본느의 심장은 언제나 무서울 때 뛰었다. 공포에 질렸을 때, 이본느의 심장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 가장 살고 싶지 않을 때에서만 비로소 느껴지는 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섭지 않아도 생을 느낄 수 있었다. 카를로이의 손길이 제 몸에 닿을 때 피부 밑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갑지 않은 눈길을 마주할 때는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믿는다. 나를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제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약하게 심장이 뛰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박동을 희망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클라이드와 키아나의 일로 꼼짝없이 의심받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더 캐묻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 사이가 진짜라고 말해 주기까지 했다.
황비를 치라는 공작의 명도 들어준 셈이 되니 영지로 내려가는 것도 조만간 허락받을 수 있겠지.
희망에 가슴이 조금씩 부풀자 앞에 놓인 찻잔도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괜찮으세요? 황비가 다른 사람을…….”
이본느가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것을 카를로이가 가만히 바라봤다.
이본느는 정말 키아나와 자신이 마음이라도 나눈 사이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괜찮냐고 묻는 여자.
“난 괜찮습니다.”
그 모습에 동굴에 홀로 내버려 두고 왔던 자그만 여자아이가 떠올라 그는 힘겹게 차를 삼켰다.
“……황후가 내 사람이 된다고 했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 말에 이본느의 얼굴이 밝아졌다.
카를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루는 그 생애 유일하게 아무것도 없이 그의 편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그는 이본느가 아닌, 루를 믿어 보기로 했다. 루가 이끄는 직감을. 멍청한 짓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폐하의 사람이에요. 그것만은 변하지 않아요.”
그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여자가 또, 그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얼굴로, 그를 막막하게 하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물기 어린 초록색 눈이 믿어 달라고 부탁하는 듯했다.
절대 그의 사람은 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델루아의 딸이 그 평생 듣고 싶어 했던 말을 한다. 잠자코 그 말을 듣고만 있는 제 모습에 카를로이는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 * *
카를로이는 오랫동안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기억도 희미할 정도로 어릴 때는 외로움에 울던 날들도 있었다. 푸르투 궁전은 혹독할 정도로 넓은 곳이었고, 그는 아주 작은 아이였기에. 사람의 온기 하나 없이 그 웅장한 황량함을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루를 만나고 나서는 달라졌다. 그는 정해진 목표가 불러일으키는 집념이 그 밖의 다른 감정을 소거해 준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외로움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외로움 대신 그리움이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를로이는 이 궁전의 황량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일이 요새 부쩍 잦아졌다. 술잔 하나를 들고 그는 집무실 창밖을 바라봤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밑으로 화려한 건물들이 늘어져 있는 곳. 그 화려한 아름다움조차 그에게는 불미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는 사람 하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바뀔 거라 믿었다.
목표가 없어졌으니 실상 그는 이제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이상하게 끝이 아닐 거라는 착각이 계속 들었다.
황후궁이 자리한 곳을 바라보다 그는 습관적으로 술을 머금었다. 예전엔 이따위 것을 왜 마시나 했더니, 인제 보니 황량함을 견디기에 딱 좋은 것이었다. 이본느가 술을 마셨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요새 술 늘었다면서요.”
어느새 아셀이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카를로이가 뒤를 돌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루에 한두 잔 마시는 것이 다인데 고르텐이 고새 입을 놀렸나 보다.
“고르텐이 네가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던가?”
또 아무 말 없이 눈알만 굴려 대는 꼴을 보아하니 도망친 것이 분명하다. 아셀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꽤 오래 버티긴 했다.
이젠 한숨을 쉴 생각조차 들지 않는 카를로이가 별다른 핀잔을 주지 않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꾸지람이 없자 더 어색한지 아셀이 몸을 배배 꼬았다.
“뭐가 잘 안 되나요?”
“……별로.”
카를로이가 눈을 감은 채 대충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아셀은 루 다음에 생긴 그의 첫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마하에서 막대한 금액을 주고 아셀을 사 왔을 때 아셀은 조건 없는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그는 마하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았으니까. 아셀이 우는 것을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런 관계는 차라리 편하지 않은가. 아셀은 자신 말고는 이곳에서 기댈 데가 없고, 저 또한 아셀 말고는 누구를 믿고 무엇을 맡기가 힘들다.
“넌 황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아셀?”
“잘 모르겠어요.”
“네가 모르는 사람도 있군.”
아셀은 적의와 호의를 놀랍도록 잘 구분했다. 고르텐이 그렇게 구박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이유도 그에 있었다. 고르텐이 사실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후는? 아셀은 이상한 황후를 떠올렸다. 무언가 이상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적의가 느껴졌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고.
“그래도 폐하한테 해코지할 것 같진 않았어요.”
아셀이 한참을 고민하다 기껏 대답을 내놓았지만, 카를로이는 아무 말 없이 여전히 눈만 감고 있었다. 아셀은 카를로이의 고민을 짐작해 보려 애썼지만, 너무 어려웠다.
“폐하, 뒤냐 공작이 뵙기를 청합니다.”
고르텐이 침묵이 감도는 집무실에 들어와 전했다. 말을 전하다 말고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아셀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고르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 아셀이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폐하.”
고르텐을 뒤따라 들어오는 뒤냐를 보고 아셀이 슬쩍 구석으로 비켜섰다.
아셀은 적의와 호의를 구분할 줄 안다. 고르텐이 말만 툴툴거리고 그에게 호의를 품은 사람이라면, 뒤냐 공작은 전혀 달랐다. 알렉시스 뒤냐는 아셀에게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지만,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미리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자리를 물려 주셨으면 합니다.”
“아셀은 괜찮아.”
그 말에 고르텐이 혼자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알렉시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아셀을 잠시 바라봤지만 아셀은 눈길을 피했다. 그것을 보던 카를로이가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 적 일인데 공은 아직도 그러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용건이나 말하게.”
카를로이가 자신과 상의도 없이 마하에서 아셀을 사 온 것을 알렉시스는 전혀 반기지 않았다. 마하와의 사이도 위험할 수 있는 일인데다가 금액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시골 여자애 하나를 찾기 위한 짓이란 걸 알고 나서는 동생이 죽고 간신히 남아 있던 알렉시스의 이성이 끊겼다.
동생인 선대 황후가 죽고 나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알렉시스는 그 날, 칼 하나를 들었다. 그러곤 델루아 공작을 따라가서 푸르투에 들어와 있던 공작의 수족들을 반쯤 죽이고 카를로이를 떠났다.
아델라이드가 죽은 후부터 막아 두었던 분노를 그날 다 터트린 듯했다.
마치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기억에 알렉시스는 아셀을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카를로이를 마주했다.
“클라이드 앙센이 찾아왔었습니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거래할 것이 있다던가?”
“엄밀히 말하면 그래서 온 것 같았습니다만…….”
“그쪽이 원하는 것부터 들어 보지. 뭘 원한다던가?”
“일이 끝나면 황비 전하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랍니다.”
“그건 어차피 황비와 거래한 것이니 상관없지.”
“그리고 자신도 뭔가 하게 해 달라더군요.”
이 상황에서 클라이드 앙센이 해 줄 일은 곱게 사라지는 것 말곤 별로 없지 않나. 카를로이가 술잔을 기울이며 무심하게 생각했다.
운이 좋지 않으면 형식적으로라도 클라이드를 불러다 심문해야 할 텐데.
카를로이는 클라이드를 마하로 보내 버리는 방안까지 고려 중이었다.
“그가 전쟁에서 돌아온 후 앙센 백작저에서 지내고 있는 걸 폐하께서도 아시지요.”
“그렇다고 들었지.”
“황후를 모시고 있는 시녀인 여동생 레이디 앙센과 앙센 백작이 하는 이야기를 어쩌다 엿들은 적이 있다는데…….”
알렉시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황후가 공작의 사생아인 것 같다고 했다더군요.”
카를로이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술잔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그의 물음에 무표정한 얼굴로 아니라고 대답했던 이본느가 떠올랐다.
“그 밖의 내용은 듣지 못해 증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자기가 꼭 증거를 찾아오겠…….”
말을 하던 알렉시스가 말끝을 늘어트리며 카를로이를 살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수상했다.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기엔 반응이 애매했다.
알렉시스는 무심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아셀을 발견했다. 둘의 표정이 같았다. 알렉시스의 가슴이 차가워졌다. 마치 카를로이를 떠났던 그날과 같은 기분이었다.
“……설마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아셀은 속으로 ‘거봐, 내가 틀릴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생각을 함부로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지금은 닥쳐야 할 때였다. 그리고 무서운 뒤냐 앞에서는 닥치기가 훨씬 쉬웠다.
“폐하,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의혹이 있어서 조사는 시킨 적이 있어.”
“그런데 저에겐 일언반구도, 이 정도의 의혹을 아시고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고요.”
“증거가 결국 나오지 않아서 말하지 않은 것뿐이네.”
아슬아슬한 침묵이 흘렀다. 알렉시스의 얼굴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잔잔했지만, 카를로이도 아셀도 그것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는 얼굴이란 것을 알았다. 10년 전에 똑같은 얼굴을 본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알렉시스가 칼을 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10년 전의 카를로이는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알렉시스를 붙잡을 정신이 되었지만, 지금의 카를로이는 제정신을 붙들어 매기도 힘들었다.
“폐하께서 제게 무언가 숨기시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목적이 저와 다르기 때문이지요.”
알렉시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10년 전도 아니고……. 대체 이런 상황에서 저와 목적이 다를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그건 자네 오해야. 다르지 않아.”
“폐하께서 또 무엇을 숨기실지 모르니 저도 클라이드 앙센의 말을 다 전하지 않겠습니다. 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지요.”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저도 ‘증거’ 같은 것이 나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말해 봤자 얻을 것이 없어 보여 카를로이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사실 더 실랑이할 정신이 없었다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했지만.
“이 이야기는 아직은, 황후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 정도 부탁까지 무시하시진 않겠지요.”
싸늘함이 느껴질 정도로 무감하게 말을 끝낸 알렉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나갔다. 알렉시스가 나가고 나서도 아셀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입을 열 때가 아니었다.
카를로이는 넋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박힌 듯 계속 앉아 있기만 했다.
아셀은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익히 아는 표정이기는 했지만, 황후가 사생아라는 걸 알게 된 사람이 지을 표정은 아니었다. 그 얼굴은 아셀이 카를로이가 원하던 것을 찾아오지 못할 때나 보이는 얼굴이었으니까.
도대체 지금 왜 그런 표정으로 저렇게 앉아 있다는 말인가.
“……아셀, 좀 나가 있지.”
잠시간 뒤에 나온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셀은 눈치를 살피다 결국 집무실을 나갔다.
카를로이는 들고 있던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반쯤은 생각 없이 하고 있는 행동이었다. 술의 쓴맛이 목 안으로 흘러내려 가고 차가운 촉감이 느껴지자 천천히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알렉시스가 믿을 만한 이야기였으니 카를로이에게 가져온 것일 텐데.
<그 호위 기사가 뭘 착각한 모양이에요. 대체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던가요?>
엔투라룸에서의 이본느가 아른거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본느 델루아를 믿는 것.
결코 실없고 싱거운 부탁이 아니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카를로이 크로이탄에게 할 수 있는 부탁 중 가장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때는 왜 쉽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사실은 알았다. 이본느 델루아를 결코 믿어 볼 생각이 없었기에 쉽다고, 싱겁다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임을 너무 잘 안다.
이본느를 믿는 것은 아무 일이 없어도 힘든 것인데, 무슨 일까지 생긴다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기적이거나 카를로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리고 카를로이는 자신이 미쳐 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아.”
머리가 지끈거려서 카를로이는 막힌 신음을 뱉었다.
이 넓은 궁전, 그 광막함이 저를 드디어 미치게 만드는 걸까. 차라리 술김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조차 두려웠다.
달이 뜬 그 밤에 카를로이는 결국 황후궁으로 향했다. 이본느를 찾아온 것은 술김인가, 진심인가. 카를로이는 아직도 구분하지 못했다. 집무실에서 홀로 생각을 삭이려 애썼지만 결국 발은 이곳으로 왔다. 확인할 게 뭐가 남았고, 바랄 게 뭐가 남았다고.
“어? 폐하, 황후님은 이미 잠이 드셨는데…….”
늦은 밤 기별도 없이 황후궁을 찾은 황제에게 놀란 메리앤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개의치 않았다. 메리앤은 이본느가 간신히 든 잠을 깰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황제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침실로 들어갔다. 메리앤은 영문을 알 수 없어 침실 앞을 가만히 맴돌았다.
막상 침실에 들어간 카를로이는 한참 동안은 침대에조차 가까이 가지 못했다. 가만히 문가에 서서 침대 쪽을 바라보다 간신히 발걸음을 옮겼다. 약한 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침대 바로 앞까지 가야 보일 정도로 이본느의 몸은 작았다. 그는 숨소리도 죽인 채 조용히 그 옆에 앉았다.
이 여자가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기어코 속아 주려고 하는 것이다. 멍청하게 ‘내 사람’이 되겠다는 그 말 한마디에. 그 눈물 하나에, 웃음 하나에 흔들려서.
카를로이가 숨을 내쉬며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폐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눈을 뜬 이본느가 보였다. 잠에 취한 듯한 눈이 몇 번 깜빡였다. 이윽고 가느다란 손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팔을 건드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떨어졌다. 꿈인 줄 알았는지도.
“폐하? 왜 이곳에……?”
이본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가까이했다.
카를로이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답을 몰랐다.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 눈동자를 보니 더 암담해졌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움직여 봐도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계속 저만 바라보는 카를로이가 어디 아프다고 생각한 건지 이본느가 손을 뻗었다.
작은 손이 카를로이의 이마에 닿았다. 이본느가 카를로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장 멀리하고 싶었던 여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쉽게 다가오고, 쉽게 그를 만졌다.
“술 냄새가 나요.”
이마에서 손을 뗐지만, 여전히 얼굴을 그에게 가까이하는 이본느의 눈에 걱정이 어렸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카를로이는 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사람이 저런 감정을 거짓으로 보여 줄 수도 있는 걸까. 아니, 자신도 했던 짓이니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설사 그렇다 해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 만약 이본느가 자신에게 거짓말만 늘어놓고 있다 해도 신경 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왜.
“폐하?”
카를로이가 충동적으로 이본느의 볼을 만지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이본느는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몸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대는 내 사람이 맞을까?”
카를로이가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입술이 가까워졌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아무리 가까이 가도 이제 이본느는 그를 밀어내지 않는다. 그것이 카를로이의 막막함을 그나마 잠재웠다.
이본느는 그의 눈을 보며 다시 한번 조용히 대답했다.
“네.”
그 누구라도 의심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왜 안 피하지?”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본느가 대답을 하자마자 카를로이가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희미한 불빛이 침대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비췄다.
이본느는 순식간에 제 팔 사이에 그녀를 가둔 카를로이를 올려다보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문득 그녀가 어디까지 피하지 않을지 카를로이는 궁금해졌다.
카를로이의 손이 얼굴에 닿고, 그의 입술이 이본느의 입술로 다가왔다. 이본느는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 같은, 괴로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말했다.
“전 폐하의 사람이에요.”
마녀의 주문처럼 느껴지는 그 말과 함께 카를로이의 입술이 이본느의 입술에 닿았다. 입술에 느껴지는 촉감에 이본느의 입술에 살짝 틈이 생기자 그것을 놓치지 않고 혀가 들어왔다. 술 향이 밀려 들어왔다.
입술을 살짝 뗀 카를로이는 쓰러지듯 이본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피해…….”
“폐하.”
“멈추라고 해요, 제발.”
카를로이는 빌었다. 이본느가 그를 경멸하면서 밀어낸다면 차라리 덜 괴로울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손길이 그의 머리칼에 닿았다. 손길의 주인은 카를로이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대체 왜.”
카를로이가 고개를 들자 손에서 그의 머리칼이 빠져나가고 괴로워 보이는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요.”
이본느가 속삭이는 소리에 카를로이는 이성이 끊긴 듯 다시 입을 맞춰 왔다. 그의 혀가 부드럽게 이본느의 혀와 엉켰다. 사람의 내밀한 부분이 서로 닿는 느낌은 그저 아찔했다. 뜨거운 것은 숨결인데, 몸까지 뜨거워졌다.
갈증을 채우듯 카를로이는 거칠어졌다.
세상 어떤 감각이 이렇게 복잡할 수 있을까. 카를로이에게서 나는 술 향은 괴로움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씁쓸한 향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입맞춤이 달콤할 수도 있는 걸까.
이본느가 저도 모르게 그의 뺨에 제 손을 부드럽게 가져다 댔다. 점점 숨이 찼다. 한참을 제 것처럼 입을 헤집던 카를로이의 혀가 빠져나갔다.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왜 눈물을…….”
카를로이가 이본느의 눈에서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았다. 그 손길이 또 어울리지 않게 다정해서 이본느는 슬펐다. 언젠가 나도 네 눈물을 닦아 주었을 때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모르겠어요.”
목멘 소리로 이본느가 대답했다. 카를로이는 물기 어린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이상하지, 나는 그대의 눈물만은 진짜 같아. 당신의 모든 것이 다 거짓이래도 눈물은 아닐 것만 같아서…….”
닦아도 닦아도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며 카를로이가 중얼거렸다.
카를로이가 이본느의 팔을 손으로 잡아 올리며 목에 입술을 묻었다. 하얗고 가는 목은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자신의 밑에서 눈물 흘리는 황후도 미친 게 분명했다. 외로움은 사람을 미치게 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외롭다는 이유로 그를 이해하는 황후도, 외롭다는 이유로 이러고 있는 자신도.
“당신도 나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있을까.”
카를로이가 속삭일 때마다 그 숨결이 이본느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의 입술이 닿는 목과 쇄골이 뜨거웠다. 이본느는 그 뜨거움을 못내 견딜 수 없어서 눈을 감았다.
이 궁전은 지독하게 차가운데, 유일하게 카를로이만이 뜨거웠다.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게 느껴졌다.
“……제가 폐하의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결코 거짓이 아니에요.”
네가 나에게서 리리안이 보인다고 한 그 말이 거짓이 아니듯. 나오지 않는 말 대신 이본느는 눈물만을 흘렸다.
“모든 게 끝나면, 다 끝나면 알게 될 거예요.”
그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카를로이는 한쪽이 내려가 어깨가 훤히 보이는 옷을 다시 올려 주며 이본느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본느는 눈을 감은 채로 그의 머리칼을 만졌다.
“……괴로워하지 마세요. 곧 끝날 거예요.”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하는 주제에 누구 보고 괴로워하지 말라는 걸까.
카를로이는 이본느에게서 풍기는 향을 맡으며 스스로를 원망했다.
역시 이 여자를 죽여 버렸어야 했을까. 없애 버렸어야 했을까. 델루아의 딸 따위 저에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고 자신한 게 죄였을까.
<폐하는 미칠 계기가 없었을 뿐입니다.>
결국 델루아가 자신을 미치게 하는 걸까. 정신을 놓는다면 그것은 루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델루아의 딸이다. 그 저주대로 이제 저는 미쳐서 루를 다른 사람도 아닌 델루아의 딸로 대신하려 하는데.
“날 믿어야 해요…….”
이 지옥이 아득할 정도로 넓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고작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가장 차갑다 생각했던 여자에게 온기를 갈구하는 게 우스웠다.
“……칼.”
이본느가 속삭이는 자신의 이름이 그를 흔들어 놓았다. 카를로이는 다시 한번 이본느에게 입을 맞췄다.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게 거짓을 말하는 입술을 제 입술로 막았다.
그를 더 허기지게 하는 입술을 헤집으며 그는 후회했다. 기어코 이 여자가 제 이름을 부르기 전에 역시 죽여 버렸어야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