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9화 (10/22)

9. 황후는 황제를 모른다 (1)

그대로 쓰러진 이본느를 카를로이가 안아 들고 황후궁 침실로 데리고 왔다. 고새 난장판을 치웠는지 침실은 다시 말끔해져 있었다. 황후궁 사람들에겐 무거운 함구령이 내려졌고, 이본느의 전담 치료사 말런이 황망한 얼굴로 치료를 마치고 물러났다.

파리한 얼굴로 누워 있는 이본느의 옆에서 카를로이는 피가 굳은 제 입술을 매만졌다. 쓰러진 황후를 보는 게 벌써 두 번째다. 비이성적인 분노가 어느 정도 가고 나서야 그는 밖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친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하는 일인데 당연히 쉽지 않겠지. 미치기 직전처럼 보이던 이본느를 떠올리며 카를로이는 얼굴을 몇 번 쓸어내렸다.

이상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정도로 괴로우면 카를로이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본느가 이 정도로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객관적으로 델루아 공작의 비도덕성, 수많은 과오를 인정하는 것과 혈육에 대한 주관적인 애정은 전혀 별개일 것일 텐데. 그 정도로 날 마음에 둔 건가. 도대체 왜?

머리가 복잡해지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렇다면 자신이 하는 짓은 정말이지 개새끼나 할 짓이었다. 자신이 그런 빌어먹을 놈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 결과를 보고 있자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본느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카를로이는 저 자신도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이본느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렇게까지 반응하게 됐는지. 죄책감이든, 보상 심리든, 이유가 뭐든 간에 황후가 신경 쓰인다는 것을 조금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원래 알 수 없는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는 법이니까. 카를로이는 그렇게 마음과 생각을 정리했다.

“음.”

시간이 꽤 지났는지 이본느가 신음을 내며 몸을 움직였다. 눈을 천천히 몇 번 깜빡이던 이본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상태에서 사람이 더 하얗게 질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대로 누워 있어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는 것을 카를로이가 말렸지만, 이본느는 기어코 상체를 일으켰다. 시선이 맞닿았지만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술을 꽤 많이 마셨던 것 같은데 이본느가 기억이나 할지 의문이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기억하는 모양이다.

“내가 힘든 일을 요구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할 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마땅한 말이 없었다.

자신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당신이 괴로워하는 대신 그냥 간단하게 당신 아버지 목만 가져오면 된다?

무슨 말이든 적절치 못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용한 여러 답들을 다 제쳐 두고 카를로이는 대신 물음을 던졌다.

“혹시 예전에 날 본 적이 있습니까?”

“왜요?”

이본느의 얼굴은 여전히 무감했지만 되묻는 것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빨랐다.

“그대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유를, 나를 선택지 중 하나로 고려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

혹시 자신도 모르는 과거에 이본느를 만난 적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본느는 한참을 입을 꼭 다물고 카를로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아니요.”

짧은 답이 들렸다. 예상한 답이긴 했다. 과거에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다면 모를 리가 없었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이불만 만지작거리던 이본느가 고개를 들자, 비에 닳은 돌처럼 색이 바래고 지친 얼굴이 보였다.

“폐하.”

그 얼굴만큼이나 지친 목소리가 카를로이의 약하게 남은 양심을 찔렀다.

“한 가지만 더 약속해 주신다면,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폐하의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아버지를 치는 걸 도울게요.”

‘한 가지 더’라는 표현에 카를로이는 빗속에서 자신이 약속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루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 달라는 그 부탁에 카를로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본능이었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는다면 황후는 그 자리에서 죽기라도 할 것 같았다.

“저를 믿을 수 있으세요?”

어떤 생각도 읽히지 않는 얼굴로 이본느는 조용히 물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떤 행동을 해도, 하지 않아도. 아무리 의심이 가도, 계속 저를 믿어 줄 수 있으신가요.”

대답은 빗속에서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믿음은 이본느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와는 다른 문제였다. 어린 시절부터 델루아에 대한 불신을 교육받았고,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껴 왔다.

하지만 이론적으로야, 논리적으로야 이젠 같은 배를 타야 하니 믿어야 하겠지.

빗속에서 온몸으로 울던 이본느의 얼굴이 머리를 헤집었다. 황후는, 이본느는 그 아비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어딘가 절박해 보이는 눈앞의 얼굴을 보며 카를로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요?”

“당신이 내 사람만 되어 준다면야, 물론…….”

“정말이에요?”

재차 묻는 모습이 오히려 이본느가 카를로이를 못 믿는 것처럼 보였다. 영문도 모른 채로 카를로이는 고개를 다시 한 번 더 끄덕였다.

“절대로 잊으시면 안 돼요. 절 믿기로 약속하셨다는걸.”

꺼질 듯한 미소와 함께 이본느가 속삭였다. 참 실없는, 정말 싱거운 부탁이라고, 카를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이본느는 침대에 누워서 눈만 껌뻑거렸다. 생각할 것이 많아 꼬박 이틀을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카를로이가 이상하게 계속 옆에 있으려고 고집을 부렸는데, 이본느가 피곤하다고 하자 군말 없이 자리를 비켰다.

<황후도 이런 짓을 그만하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그는 미묘하게 화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감시하지 않으면 이본느가 자살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봤으니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반쯤 미쳐 빗속에서 추태를 보인 것은 후회스러웠지만, 결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전까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어딘가 갇힌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불안하긴 해도 미칠 것 같진 않았다. 해야 할 일들이 생겼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공작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 뒤통수를 치든, 치지 않든 그는 똑같이 이본느를 경계하겠지. 그렇다고 대놓고 의심할 빌미를 줘선 안 되겠지만.

“레이디 앙센.”

“예, 폐하.”

“여기.”

이본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델루아 공작의 약병을 레이디 앙센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미 많이 지체했으니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자네가 직접 관리하나?”

“네에. 공작님께서 귀한 약이라고 잘 다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어요.”

해맑은 얼굴만 보고는 레이디 앙센이 어디까지 아는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레이디 루엔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일이라곤 대충 하는 앙센이 눈치 빠른 루엔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시녀가 직접 차를 타는 일까지 하진 않았다. 분명 또 누군가를 시켜서 약을 탈 텐데.

“하녀들에게 잘 말해 두어야지. 칠칠치 못하게 흘릴지도 모르니.”

“그렇지 않아도 제가 옆에서 잘 봐야 한다고 하셨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

“……그래.”

약을 빼돌리기는 틀렸고. 황후궁에서 보는 걸 최대한 자제해야 할까?

“아, 그리고 일주일에 꼭 한 번은 드셔야 효과가 있대요. 아직 한 번도 안 드셨다고 저한테도 얼마나 뭐라 하시는지 몰라요.”

짜증스러울 정도로 발랄한 레이디 앙센의 목소리가 가능성을 말끔히 지워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카를로이를 황후궁으로 부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양은 충분한가?”

“음, 한두 달은 넉넉하겠던데요.”

그 약이 사람 하나를 죽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일 터였다. 그전까지는 모든 것이 끝나야 하는데.

레이디 앙센이 나간 후에 이본느는 메리앤을 조용히 불러 손가락 길이보다도 작은 약병을 내밀었다. 메리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멀뚱히 이본느를 쳐다봤다.

“아무도 모르게 이게 독이 맞는지, 맞다면 해독제를 알아봐, 메리앤.”

딱히 기대를 하진 않았다. 분명 베르니의 마법사가 만든 것일 테니 해독제도 그 인간만 만들 수 있겠지. 그래도 무엇이라도 해 보아야 했다. 하지만 메리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금방 곤란한 표정을 했다.

“……폐하, 저도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해 드리고 싶어요.”

“메리앤.”

“제 딸이 델루아 타워에 갇혀 있지 않고, 제 아들이 공작님 옆에 24시간 붙어 있지 않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 드렸을 거예요. 제가 죽어도 괜찮으니 그렇게 했을 거예요.”

입술만 한참 달싹거리던 메리앤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냈다.

“그렇게 자식들을 다 붙잡아 두고도, 공작님은 저조차 믿지 않아요. 시녀들이 무엇을 명령받는지 저에게도 알려 주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메리앤, 그렇다고 해도 자네에 대한 감시는 나보다 덜할 것이 아닌가. 이 정도는 그리고 괜찮아. 아예 빼돌리는 것도 아닌데.”

간절해 보이는 이본느를 죄책감 어린 낯으로 보던 메리앤이 결국 약병을 받아 들었다.

“저도 확답은 드리지 못해요. 감시는 둘째치고 이곳에 인맥이라곤 없으니, 알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괜찮아. 해 주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도움이 돼.”

별로 닦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메리앤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는 눈물이라 이본느도 깜짝 놀라 메리앤에게 다가갔다.

“아니, 왜……?”

메리앤은 통통한 손으로 이본느의 두 손을 부여잡더니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후두두 이본느의 손등으로 떨어졌다.

“미안해요. 너무 죄송해요, 폐하. 내 자식만 중요한 사람이라 내가……. 내가 너무 미안해요. 이렇게 말라서는,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이본느는 가만히 메리앤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섣불리 눈물을 닦아 주지는 않았다. 메리앤도 그걸 원치 않을 것을 이본느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러고도 괜찮다는 말만 하게 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눈물만 흘리는 중년의 여자,이자 또 다른 피해자를 보다가 이본느는 새삼 자신의 결정을 다시 생각했다. 무모하지만 그래도 역시 개새끼 공작의 말로 사는 것보단 공작의 뒤통수를 치는 게 더 나은 것이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탑에 갇혀 있을 드니스를 떠올리며 이본느는 마음을 다잡았다.

* * *

알렉시스 뒤냐가 왔다는 고르텐의 말을 듣고서야 카를로이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의 모든 생각은 이본느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비가 오던 날 그 이후부터 그랬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보고 있지 않을 때 또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아니, 짜증이 났다. 귀찮을 정도로, 화가 날 정도로.

“클라이드 앙센이 저에게 만나고 싶다고 비밀스럽게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그러니 알렉시스 뒤냐가 찾아왔을 때, 카를로이가 생애 처음으로 뒤냐에게 고마움을 느낀 것도 당연했다. 머릿속에서 이본느에 대한 생각을 몰아내 줄 주제를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죽겠을 지경이었다. 참으로 시기적절한 등장이었다.

“우리 쪽으로 넘어오려는 건가?”

“그렇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클라이드 앙센을 전쟁 지역으로 내보내지를 못하니 앙센 백작이 갖은 치사한 수는 다 쓰더군요.”

“어떤?”

“조금만 다쳐도 전이 치료법을 클라이드 경에게 사용한답니다.”

전이 치료법은 병증을 다른 이에게로 옮겨서 병을 낫게 하는 치료법이었다. 오래전에 불법이 된 데다가 그 정도 치료법을 실행할 수 있는 치료사가 몇 없어 잘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귀족들은 암암리에 종종 이용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사용인 중 하나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을 뻔했는데 그마저도 클라이드 경에게 전이했다고 하더군요.”

“심하군. 사용인보다 못하다는 거 아닌가.”

“모욕적이지요. 클라이드 경이 알아서 포기하고 마하로 가 버리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클라이드 앙센이라도 마하로 떠날 것 같은데. 크로이센에 남아서 얻을 것이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지 않나?”

“명예라고 했잖습니까.”

“크로이센은 사생아에겐 명예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나라야. 그 사람도 참 이상한 곳에서 심지가 굳은 인간이군.”

“그래도 뭔가 거래할 것이 있으니 만나자고 하는 거겠지요. 어쩌면 사생아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할 수도 있겠습니다. 마하에서의 그의 선전이 크로이센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황후는 어떻게 됐습니까?”

“황후가 왜?”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되묻는 카를로이를 보고 알렉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쪽으로 넘어왔습니까? 아직은 없지만, 베르니와의 내통 증거를 심어야 할 때를 대비해 델루아 영지로 들어갈 사람과 거짓 증언을 해 줄 델루아의 측근이 필요합니다.”

대답 없는 카를로이를 보고 뒤냐는 독촉하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브로치도 델루아 영지에 있을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가져와 줄 사람은 황후 하나지요.”

카를로이는 심기가 불편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알렉시스를 쳐다봤다.

브로치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가능한 경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로덴이군.”

“폐하가 아닌 로덴에게 들었으니 문제입니다. 제게 숨기는 것이 있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냉엄한 얼굴의 알렉시스는 더더욱 아델라이드와 닮아 보였다. 하지만 이제 그 얼굴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카를로이는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베르니와 내통했다는 증거가 나오겠나?”

“현재 학회 수준만으로는 베르니의 마법 중 어떤 마법이 쓰였는지, 언제 쓰였는지 세세한 사항을 정확히 알아내는 건 힘들답니다.”

베르니의 마법은 대륙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우등한 수준이었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구분하는 마력석이 신통치가 않아서 베르니의 마법이 쓰인 물건 하나만 있어도 반응을 한다더군요.”

“그럼 한 100년 전에 마법이 쓰였던 물건이어도 반응한다는 건가? 그렇게 치면 이 황궁에서도 마력석이 반응을 하겠어.”

“그건 아닙니다. 전쟁 직후에 만들어진 마력석이라 전쟁 전에 이루어진 마법들에는 반응하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흠.”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다. 델루아가 전쟁 후에 베르니의 마법을 쓴 적이 없다면 좀 곤란하게 되는 거지요.”

내통 증거가 없다면 심는 것도 강행하겠다고 말했지만, 알렉시스로서도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는 듯했다.

카를로이는 의자에 기대며 최대한 생각을 해 보려 했다. 베르니의 물건, 전쟁 직후에 베르니의 마법이 쓰인 물건.

“베르니의 마법사를 쓰다 무기 징역을 받은 인간들이 몇 있었지 않나? 복역수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을 텐데.”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방안을 떠올리자마자 금세 다시 무료한 얼굴로 변해 버리는 조카를 보며 알렉시스는 불쾌한, 불길한 기시감을 느꼈다. 알렉시스는 카를로이가 화제를 자신이 눈치채기도 힘들 정도로 매끄럽게 돌렸음을 깨달았다.

“황후가 넘어왔습니까?”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던 카를로이는 짧게 그렇다고만 답을 했는데, 날카롭게 끊어 내는 듯한 대답에 알렉시스의 눈살은 더욱 찌푸려졌다.

“제 친아버지를 버리는 대신 원하는 조건이 뭡니까?”

“……딱히 그런 것은 없었는데.”

“조건도 없이 그런 짓을 하겠다고 했다는 겁니까? 로덴이 말하기를 황후가 폐하를 마음에 품은 것 같다고는 했지만…… 그런 알량한 이유로 아버지를 버리다니요.”

“델루아 공작보다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야. 제 아버지가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 없어져야 할 사람인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것 같더군.”

알렉시스가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 고상하기가 황족보다도 더한 뒤냐가의 수장이 이런 식의 노골적인 무시를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이유를 어떻게 믿는단 말입니까? 그따위 어쭙잖은 도덕심으로 혈육을 죽음으로 내몬단 말입니까.”

“왜 안 되지? 어머니가 아들인 나를 버리기로 결정한 것도 그런 정의감 때문이 아니었나? 다른 사람도 아닌 뒤냐 자네가 그런 걸 ‘어쭙잖다’라고 표현할 줄은 몰랐는데.”

말문이 막혔는지 알렉시스는 반쯤은 당황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정작 별다른 의도 없이 사실을 말한 것뿐인 카를로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믿지 못해도 뒤냐 그대만은 믿어야 하는 것 아닌가? 뒤냐 가문이야말로, 그대야말로 그런 것들을 위해 혈육을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잖나.”

생각보다 더 길어지는 알렉시스와의 독대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이마를 건드리는 것이 문득 거슬려서 카를로이가 대충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사감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무적인 태도가 온몸에 드러났다. 왜 자신만 이리 대하냐며 상처받은 얼굴로 외치던 어린아이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카를로이의 모습은 오래전 알렉시스가, 또 아델라이드가 그토록 바라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반갑지가 않았다. 감정이 정말 죽은 건지, 다른 곳으로 죄다 옮겨 간 건지.

“델루아는 다릅니다. 그 델루아의 딸입니다. 정녕 믿으실 작정이십니까?”

“믿지 않으면 뭘 어찌하려고?”

“믿지 않고도 이용은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절대 믿지 마십시오.”

“그래, 뭐. 기억해 두지. 황후궁에만 있는 사람이 나에게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점점 건성으로 대답하는 카를로이에게 알렉시스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카를로스 폐하가 그렇게 되신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광증과도 같은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델루아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둘 다 따라 하는, 그런 실수는 하지 마십시오.”

“솔직히 그 이야기, 이젠 지겹기까지 하네. 그럼 내 이름이라도 조부의 이름을 따서 짓지 말고, 좀 다른 걸로 짓지 그랬나?”

카를로이의 비아냥거림에도 알렉시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만만치 않은 성깔을 둘 다 물려받았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후회 중입니다. 선대 황제 폐하께선 당신의 아드님이 그 이름의 오명을 씻어 주리라 믿으신 거지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갈 거라 생각하진 않으셨을 테니까요.”

“이런, 좋은 왕이 못 되어 주어서 참 미안한데.”

“괜찮습니다, 이제는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으니까요. 미래를 뻔히 보여 주는 역사를 무시하는 분이 되지 않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다시 평소의 고상하고도 우아한, 그러나 빈틈이 없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말을 끝내고 알렉시스가 공손히 예를 취했다.

“명심하십시오, 폐하. 델루아는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까지 알렉시스는 그런 말을 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처음에 알렉시스의 등장을 반가워했던 것을 후회하며 카를로이는 답답한 크라바트를 풀어 젖혔다.

알렉시스와는 10분 이상 대화해서는 안 되겠다. 10분이 넘어가면 그놈의 조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는 못 견디는 모양이니.

“아직 내 귀에 못이 안 박힌 게 기적이군.”

카를로이가 던진 천이 책상 위로 나가떨어졌다.

누가 들으면 자신이 황후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구는 줄 알 것이다. 어련히 적당한 거리를 취하려고 하는데.

피로감에 눈을 감고 있던 카를로이는 불현듯,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도 알렉시스와 똑같이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델루아는 델루아라 생각하지 않았었나.

“……아니야. 같지는 않지.”

일단 델루아 공작은 그렇게…… 죽을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카를로이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이본느가 몸이 괜찮아져 이제 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카를로이는 황후궁을 찾았다. 그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잡은 물고기라고 내팽개쳐 두다가 다시 빠져나가면 어떡하나?

아무튼 그는 감정적인 이유만으로 이본느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엄연히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막상 여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치적’인 주제를 입 밖으로 꺼내기가 힘들었다. 항상 냉담하다고 생각했던 얼굴을 이제 ‘여리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그냥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저는 말을 바꾸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체 자신의 표정을 뭐라 해석한 건지, 머뭇거리며 먼저 그 주제를 꺼내 드는 황후를 보니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조건 운운했던 알렉시스의 말이 기억났다. 정말 이 여자는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건지.

“제가 뭘 하면 되나요?”

“……내가 그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 같습니까?”

“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왔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득달같이’라는 말은 좀 노골적이긴 했지만, 핵심 내용은 이본느의 생각과 대충 비슷하긴 했다. 이본느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가요?”

아닌 건 아닌데. 그러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카를로이가 온 목적 중에는 분명 그것이 있긴 했지만, 황후가 그걸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것은 또 마뜩찮았다. 미친놈인가.

카를로이는 살면서 자신의 성격이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요새만큼 그 성격에 대해 자주 고민하게 된 적도 없었다.

술 취해서 빗속을 싸돌아다니는 황후보다, 그 황후를 볼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자신이 아무리 봐도 미친놈이었다. 어쩌면 알렉시스가 공연한 걱정을 하는 건 아닐지도.

“……몸은 좀 어떻습니까.”

“크게 다친 곳이 있던 것도 아닌걸요. 그만한 추태를 부리고도 내내 누워만 있었으니 할 말도 없지요.”

“추태라기엔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힘든 결정이니까요.”

“왜 나를 좋아합니까?”

충동적으로 질문을 내뱉은 카를로이는 충격받은 듯한 이본느의 얼굴을 보자마자 제 입을 때리고 싶었다.

이본느는 큰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 입을 열었다.

“전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데…….”

조용한 대답에 카를로이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럼, 왜.”

산발적으로 단어를 내뱉는 카를로이를 보다가 이본느가 결국 작은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당황하는 꼴을 보니 조금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전 폐하가 미운데요. 밉고 싫어요.”

“황후는 싫은 놈 때문에 별별 짓을 다 하는 해괴한 버릇이 있군요.”

아직도 붉은 귀로 비꼬는 카를로이와는 다르게 이본느는 차분히 대답했다.

“결혼식을 올렸던 그날 밤에 말씀드렸잖아요. 폐하가 델루아에게 느끼는 감정을 안다고.”

그날을 떠올리자 카를로이는 스스로가 어색해졌다. 그때는 분명 황후가 없어지길 바랐었는데.

“다르게 말하면 델루아가 폐하께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안다는 뜻이 되죠. 그것뿐이에요. 저는 아버지가 폐하께 어떤 사람이었는지…… 너무 잘 아는 것뿐이에요.”

황후는 그를 동정하는 걸까. 카를로이는 생기 없이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이본느의 눈을 보다 기분이 또 이상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폐하를 외롭게 만들었고, 그리고 저도……. 아무도 저를 반기지 않는 이 황궁에서 저도 외로웠고. 그뿐이에요.”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고르텐이 예전에 했던 실없는 말이 떠올랐다. 황후가 자신을 마음에 품었다면 그건 외로워서일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이.

외롭다고 옆에 있는 아무 놈에게 마음을 주나?

하지만 이내 우스워졌다. 자신만 해도 황후를 이제 쳐 내지만은 못하고 있으니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됩니까.”

“언제부터 제 허락을 받으셨다고요.”

“……흠흠. 독에 당했을 때 황후는 날 칼, 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아버지를 제외하곤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는데.”

이본느가 카를로이가 ‘칼’이라며 자신을 소개하던 어린 날을 떠올리자마자 입이 얼어붙었다. 망할 베르니의 마법사 같으니. 이본느는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생각을 지웠다.

“……항상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어요.”

“그게 무슨.”

“비밀이에요.”

어차피 입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카를로이가 다시 귀가 붉어져 헛기침을 했다. 이본느는 그 모습을 보며 애칭에 관련된 크로이센의 풍습을 기억해 냈다. 아, 그 짝사랑.

붉은빛 도는 얼굴을 보니 오해를 해도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 내가 자기를 지금껏 짝사랑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나? 멍청이.

저런, 어딘가 얼빠져 보이는 모습의 카를로이는 영 미워하기가 힘들었다.

“……난 정말 황후를 잘 모르겠습니다.”

카를로이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에 이본느가 옅게 웃었다. 어쩌면 저게 문제일지도 몰랐다. 카를로이는 자신을 너무 몰랐고, 자신은 그를 너무 잘 알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과거 중 일부분만을, 그의 마음 중 찰나였던 부분만을 아는 것이지만, 이본느는 그것이 카를로이의 본질이라고 믿기로 했다. 이본느가 기억하는 카를로이는 언제나 첫 만남 때의 카를로이였다. 자기가 위험에 빠져 있으면서도 생판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도망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저를 잘 모르셔도 괜찮아요. 제가 폐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 아시면 돼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심장을 부풀리는 것 같았다.

카를로이는 가슴이 벅차는 것과 답답한 것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생각했다. 황후를 보는 건 여전히 자신을 막막하게 만든다고.

고르텐도 카를로이의 사람이고, 아셀도 카를로이의 사람이다. 별 의미 없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경계심이 흐려졌다.

항상 네 편을 원했었잖아. 네 가족, 네 편. 어린아이가 속삭이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그 목소리에 싸움이라도 걸듯 뒤따라 뒤냐의 말이 떠올랐다. 델루아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든든하군요.”

진심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영영 모를 대답이 나왔다. 하지만 그 대답을 듣고 눈에 띄게 밝아지는 이본느의 얼굴을 보니 뭐가 되었든,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가 싶기도 했다.

카를로이는 언제나 델루아 공작의 그 역겹도록 빙글거리는 얼굴을 망가트리고 싶어 했다. 치열하지만, 무의미한 버티기로 가득한 삶에서 그나마 쾌감을 느낄 수 있을 때는 공작의 얼굴을 망가트리는 데 성공할 때뿐이었다. 어쨌든 내가 숨을 쉬고 살고 있기는 하구나, 싶은.

이본느의 냉담한 얼굴은 공작의 웃는 얼굴과 같았다. 망가트리고 싶고, 무너트리고 싶은 것. 어디 언제까지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나 보자, 하는 오기를 자극했다.

이제 그 얼굴은 카를로이가 작정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미소를 짓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소리를 내서 웃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제는 화가 나지 않는, 화가 나기는커녕 그 어떤 공격적인 쾌감도 느껴지지 않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무서워졌다.

“절 믿으셔야 해요.”

“알겠다니까요.”

그에게 델루아를 증오하는 것은 당위다. 델루아의 모든 것을 증오해야 마땅할진대, 말 그대로 그것이 마땅한 일인데, 예전처럼 숨 쉬듯 자연스럽게 되지 않았다.

어린 하녀 하나가 차와 차구들을 들고 오자 검식 담당 시종들이 먼저 차를 마셨다. 검식이 끝난 차를 하녀가 천천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차를 내려놓은 하녀가 다시 뒤로 사라지자 이본느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전에는 이본느의 시녀들이 뭘 듣든 신경 쓰지 않던 카를로이가 이제는 그들에게 좀 떨어지라고 명을 내렸다. 그래서 시종장과 시녀장, 시녀들은 카를로이와 이본느의 대화를 듣지 못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레이디 앙센은 빈 잔만 확인하면 아마 카를로이가 마셨다고 생각하겠지.

이본느는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카를로이의 얼굴을 잠시 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 좋다고 느낀 것은 한순간, 다음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머리로 생각도 하기 전 행동이 치고 나가는 그런 결정.

“폐하, 저 꽃 보이세요?”

이본느가 카를로이의 뒤쪽에 눈짓하며 물었다. 카를로이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꽃을 바라보는 사이, 이본느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카를로이의 잔과 제 잔을 바꿨다.

“백합 아닙니까. 크기를 보아하니 마법으로 피워 낸 것 같은데.”

카를로이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감흥 없는 얼굴에서 꽃에 대한 불호가 드러났다. 시선을 돌리기 위해 물은 것이긴 한데 카를로이는 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저번에 선물 주신 꽃을 저기에다 옮겨 심었어요.”

“아아, 그 꽃…….”

고르텐에게 시켜서 준 것이었으니 자신이 뭘 주었는지 알 리가 없다. 카를로이는 민망함에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홀짝이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본느가 이제 자신의 앞에 놓이게 된 문제의 찻잔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카를로이가 마시는 게 중요한 거니까, 나는 차를 남겨도 큰 상관이 없지 않을까. 시녀들도 카를로이의 찻잔이 아닌 잔을 신경 쓸 것 같진 않은데.

“차에 뭐가 있습니까?”

카를로이로서는 평소와 다르게 차를 들지 않고 멀뚱히 내려다보는 이본느가 눈에 들어와서 한, 별다른 뜻이 없는 질문이었지만, 이본느는 제 발이 저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눈치를 보다 한 모금 흘려 넣었다. 이 정도로는 죽지 않을 거다. 공작이 이것보다 많은 양을 마셨으니까. 괜히 마음이 불안해 이본느는 찻잔의 차를 결국 계속 홀짝거렸다.

카를로이가 몇 번 더 그런 걸 물으면 시녀들이 쳐다볼 것 같은 긴장감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퍼졌다. 흔적을 남겼다 꼬리 잡히느니, 이번 한 번쯤은 마시는 게 낫겠단 생각도 들었다.

“……황후가 해 줄 일은 많지는 않습니다. 브로치가 어디 있는지 짐작이 갑니까?”

베르니와의 내통 문제에 관해서도 이본느에게 말할까 잠시 고민한 카를로이는 그 부분에 대해선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직은 너무 일렀다. 잘못했다 공작의 귀에 들어가면, 그 눈치 빠른 공작이 베르니를 이용해서 자신을 칠 거라는 걸 알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본느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그 브로치, 아버지가 이미 없애지 않으셨을까요?”

“그건 파괴가 불가능한 물건입니다. 혼자 소멸하면 모를까.”

그러면 어디에다 버릴 수도 없었을 것이고, 공작이 계속 가지고 있었을 터였다. 넓디넓은 공작저의 어디든 그것의 보관처가 될 수 있었다. 공작의 침실일 수도 있고, 공작의 집무실일 수도 있었다.

“폐하께서 찾고 계신다는 걸 아시나요?”

“이제는 알 겁니다. 저번에 한 번 내놓으라고 했으니.”

그 대답을 들으니 이본느의 머리를 스치는 추측이 있었다. 그 전이라면 몰라도, 카를로이가 찾고 있는 걸 알았다면 공작은 가장 안전한 곳에 그것을 두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다. 카를로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도, 그것이 먼지 한 톨이라도 주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델루아 공작저에서 가장 안전한 곳. 공작의 모든 비밀이 감춰져 있는 곳. 그런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네. 어디 있을지 알 것 같아요.”

델루아 타워만큼 적당한 곳이 없겠지.

“그렇다면 델루아 영지에 가서 가져오는 것도 가능하겠습니까?”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이본느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자신의 대답이 이상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허락을 받아야 하는 딸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카를로이도 그 점을 놓치지 않았는지 얼굴에 미세하게 의아함을 보였다.

“공작이야 딸이 오는 것인데 당연히 허락하지 않겠습니까? 내 허락이 더 문제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 물론 그렇죠. 아버지께 말해 볼게요. 영지에 한번 내려가고 싶다고.”

이본느는 차분하게 대답을 했지만 카를로이는 그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누군가를 쉽게 믿지 못하는 마음에 전혀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하는 그런 위화감이었다.

아셀은 결국 이본느가 사생아라는 증거 같은 건 찾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아셀은 아직도 이본느와 공작의 관계가 이상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영지를 가기 위해 공작의 허락을 언급하는 이본느를 보며 왜 다시 아셀의 그 말이 떠올랐는지.

“……혹시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까?”

카를로이의 질문에 이본느는 입술을 달싹였다.

네. 조금은요. 그렇게 예뻐하진 않으세요. 사실은 어쩔 땐 무서워서요.

무슨 답을 떠올려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본느는 답답함에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죄다 비밀 누설 마법에 걸리는 답인 건지, 이본느에게 허락된 대답이 ‘공작은 나를 예뻐한다.’ 뿐인 건지.

차라리 계속 입을 다물고 있어 보잔 생각이 들었다.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있으면 카를로이가 뭔가가 이상하다고 깨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카를로이는 마치 시간이 지나지 않은 것처럼 이본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본느가 대답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오랫동안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솜씨 한번 끔찍하도록 좋은 마법사였다. 하기야 혈혈단신으로도 나라 둘을 갈라놓았던 공주의 후손이라면야 이 정도야 쉽겠지.

이본느는 열리지 않는 입 안에서 이만 악물고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부디, 그 마법사에게도 응징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결국 이본느가 한숨과 함께 내뱉은 대답은 이것이었다.

“아니요.”

다시 단답이 된 이본느를 카를로이가 한참을 쳐다봤다. 이본느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군요.”

표정 변화 없이 내뱉어진 카를로이의 그 짧은 답도, 카를로이가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내놓은 답처럼 느껴졌다.

그래, 어쨌든 아직 큰일은 없고, 상황이 나쁘지도 않으니까. 이본느는 스스로를 다독거리기 위해 노력했다.

카를로이 대신 마신 차의 쓴맛이 입 안에 텁텁하게 남았다.

* * *

황후궁에서 나온 카를로이는 바로 키아나의 거처로 향했다. 카를로이는 이본느와의 관계가 진전되는 와중에도 황비 궁에 들르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델루아 공작에게나, 자신의 편으로 들어온 귀족들에게나 보여 주어야 할 그림이었다.

“계속 이렇게 제 궁에 오시는 게 좋겠어요.”

항상 밝은 낯으로 할 말을 하던 키아나는 오늘따라 심각한 얼굴이었다. 점점 얼굴이 수척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정작 아버지인 로덴 후작은 별생각이 없는지 딸 옆에서 연신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맞습니다, 폐하. 뒤냐 공작의 힘도 크지만 키아나가 황비로 자리하고 있어서 결합이 유지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키아나가 밀리기라도 하면 상황이 애매하게 돌아갈 겁니다.”

“나도 알고 있네. 공작파들 말대로 덮어놓고 나와 황후의 관계를 믿기엔 황비가 건재하니까.”

키아나는 계속 집중을 하지 못했다. 혼자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던 키아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황후가 완전히 넘어왔다죠? 뒤냐에게 들었어요.”

카를로이는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지만 키아나의 얼굴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쯤 되니 무관심한 카를로이도 그 모습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에게 밀어 넣을 때는 언제고 저러는 건지.

“왜? 황후를 못 믿나?”

“폐하께서는 믿으시나요?”

“적당히 일을 부탁할 정도로만 믿지.”

키아나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답을 흐렸다.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델루아 공작이 저를 가만 놔둘까 싶어서요.”

카를로이는 그것이 키아나가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구태여 더 묻지는 않았다. 키아나를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꼭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련히 말할 사람이란 건 알았다.

로덴 후작은 옆에서 지금처럼 팽팽한 상황에서는 공작도 쉽게 손을 쓸 순 없다며 딸을 안심시켰다. 키아나는 제 아버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정말 신경 쓰이는 것은 공작이 아니라 황후였다. 황후가 자신과 클라이드의 관계를 알아차렸음을 키아나는 직감으로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절대 자신에게 그에 관해서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증거는 없다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아르바 루프 때문에 황후와 두 번 정도 만났는데, 그때마다 이본느 델루아는 관찰하는 눈빛으로 계속 키아나를 살폈다. 무슨 의도인지를 몰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키아나. 키아나!”

로덴 후작이 재차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키아나는 불안감에서 벗어났다. 자신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황제와 후작에게 키아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황후가 황제의 말대로 편을 넘어왔다면 자신과 클라이드를 굳이 건드릴 필요도 없음이라. 다 예민한 걱정이었다.

키아나는 무사할 것이다. 그리고 클라이드도.

키아나는 자신이 흘끗 내보인 불안감이 카를로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 * *

일주일이 지나도록 공작은 수도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영지에 가는 걸 한번 물어나 보려고 해도 보이질 않으니 물을 수도 없었다. 이본느는 공작의 부재가 불길할 정도로 수상했다.

한스 델루아는 제국의 수도에 자신이 없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영지에 박혀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뒤냐는 귀족원장이 되었고, 귀족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바꾸는 중인데 이 상황에서 델루아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본느가 꾸준히 카를로이에게 약을 먹이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편지 한 통 없었다. 레이디 앙센조차 그렇게 알고 있을 테니 공작이 철석같이 믿는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지.

이번 주만 카를로이는 세 번 황후궁을 왔고, 이본느는 세 번 다 그 잔을 마셨다. 물론 세 번 다 처음처럼 어설프게 찻잔을 바꾸진 않았다.

레이디 앙센이 제 오라비를 보러 잠시 황궁을 나갔을 때 메리앤은 차를 타는 하녀를 이본느에게 데려왔다. 공작이 준 약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에는 결국 실패했지만, 하녀를 데려오기는 쉬웠다.

하녀는 이본느를 보자 자신이 불려 온 이유를 알았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네가 레이디 앙센의 명을 받아 황제 폐하의 잔에 그 약을 타던가.>

질문 딱 하나를 했을 뿐인데 하녀는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이본느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어려도 너무, 너무 어렸다. 열다섯은 되었을까. 저 아이는 제 일이 끝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거라는 걸 아는지.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들먹이면서 시키는구나.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더 암담했다.

<그래, 내가 허락은 했지만, 명을 바꾸고 싶은데.>

<폐하께서 저를 죽이셔도 안 됩니다.>

하녀는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정확히 말하지도 않았는데 안 된다고 하는 걸 보니 이본느가 그만두라고 명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죽여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뻔한 일이었다. 공작이나 백작이 가족을 잡고 있나 보지.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했다. 지겹도록 효과가 좋고 끔찍하게 비열한 수단이.

저런 아이도 뻔한 아이다. 겁은 많아도 가족을 버리지는 못하는 착하고 불쌍한 아이. 어쩜 저런 사람들만 골라서 시키는지 그 비열함에 이가 갈릴 것 같았다.

<그거 아니? 황비 책봉식이 끝난 후에 하녀 둘과 시종 하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거?>

하녀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용케 잘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했고, 그 뒤에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도 잘 아는 듯했다.

<그럼 이건 알고 있을까? 그 불쌍하게 죽은 이들의 가족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는 걸?>

이제 하녀는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그건 모르고 있었나 보다.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지. 완벽히 흔적을 없애는 게 중요한 일들이니까.>

이본느는 하녀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스스로에게도 필요한 말이라고 느꼈다.

명을 받은 수족들의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공작은 조그만 흔적 하나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아 했다. 자신과 드니스도 공작의 ‘흔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본느는 충격에 울면서 딸꾹질을 하는 하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는 그걸 타는 걸 그만두라고 하진 않았어. 아주 작은 것만 바꾸면 되는데, 그것도 불가능할까? 레이디 앙센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일인데?>

이본느가 속삭이는 소리에 하녀는 눈물 고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이본느를 쳐다봤다.

<넌 명을 받은 대로 계속 그 약을 타도 돼. 찻잔 하나에만 그 약을 타는 게 네 일 아닌가? 그 이상 명령받은 게 따로 있어?>

<……아니요오. 그게 끝이에요.>

달래듯 부드러워진 황후의 목소리에 하녀는 긴장을 풀고 눈을 도로록 굴렸다. 메리앤이 이본느에게 손수건 하나를 받아 하녀에게 건넸다. 하녀는 머뭇거리다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너는 약을 탄 잔을 폐하가 아닌 내 앞에 놓으면 돼. 레이디 앙센은 네가 타는 것까지만 보지, 테이블에 놓는 걸 보는 게 아니잖아?>

<네에? 그렇지만…….>

아무도 하녀에게 그것이 독이라고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시키는 것을 보면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황제가 죽지 않은 걸 보니 독약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절대 좋은 약은 아닐 것이다. 근데 그걸 자기 잔에 넣으라고?

<어때, 할 수 있겠니? 레이디 앙센도, 그 누구도 절대로 모를 거야. 폐하가 마신 걸 너도 봤잖니, 마시고도 아무 변화도 없던걸. 내가 마신다고 한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이본느의 목소리가 점점 곰살맞아지자 하녀가 손수건을 꼭 쥔 채로 눈만 껌뻑거렸다.

<가족의 이름과 어디 살고 있는지를 말해 주렴. 적당히 때를 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줄 테니.>

이 말을 할 때는 이본느도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한 달 안에 이 모든 일이 끝난다면야 카를로이를 통해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녀도 의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꼭 다물었다.

<나는 너도, 네 가족도 건드릴 이유가 없어. 난 남에게 뭔가를 몰래 먹이는 짓을 한 게 아니니까. 게다가 네가 손해 볼 것도 없고.>

이본느가 메리앤을 통해 건네주었던 부드럽고 재질 좋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내려다보던 하녀가 입을 슬쩍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이본느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으면, 그 약병의 약이 다 떨어지기 전에 너도 구해 줄 수 있을 거야. 물론 네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말이지.>

먼 앙센의 땅에서 올라온 어린 하녀 엘리는 처음 보는 황후의 미소에 여린 볼을 붉혔다. 얼음보다 차갑다고 하더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명령도 아니고 부탁이라는데.

겁을 먹어 경직된 몸은 이본느의 조용조용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미소에 긴장이 풀렸다. 무섭게 협박이나 하던 앙센 백작과 레이디 앙센과 비교하자니 더 그랬다.

게다가 겁은 나지만 손해 볼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레이디 앙센은 도끼눈으로 차를 타는 것만 지켜보고, 제 일을 다 했다는 듯 관심을 두지 않았다. 차를 탈 때 지켜보고, 티타임이 끝났을 때 찻잔이 비었는지 확인할 뿐.

하녀 엘리는 더듬거리면서 가족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말했다. 메리앤이 옆에서 떨떠름한 얼굴로 받아 적었다.

<고마워, 엘리. 이제 가 봐도 좋아. 걱정은 말고.>

생각지도 못하게 불리는 이름에 깜짝 놀란 하녀가 허둥거리며 황후의 침실을 나갔다. 메리앤은 불만 어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주 어린아이를 홀랑 잡아먹으시네요. 이러려고 저 애 이름을 저한테 물어보셨어요?>

<다정한 말에 넘어올 정도로 겁 많고 어린 아이에게 저런 일을 시키다니. 공작의 무도함이 갈수록 끝이 없어지네.>

<황제 대신 그걸 다 마셨다 폐하가 돌아가시면, 저 애에게 한 약속을 지키실 수나 있겠어요?>

메리앤은 찻잔을 바꾸겠다는 이본느의 결정이 몹시도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본느는 별다른 반응 없이 테이블 위에 장식해 둔 드니스의 말린 꽃잎들을 어루만졌다.

<난 죽지 않을 거야. 이 싸움은 카를로이가 이길 테고, 나는 살아서 엄마에게로 돌아갈 거니까. 내가 살면 저 하녀도 살겠지.>

아무리 그 가능성이 적다 해도, 삶에 가능성을 걸어 보는 것이 어린 하녀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터다.

<어차피 나는 내 목숨 하나 장담할 수 없는 처지야, 메리앤. 더 도와줄 수 없다면 그만 투덜거려.>

그제야 메리앤은 입을 다물었다. 그 하녀의 마음은 메리앤 또한 사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메리앤의 딸인 제인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아이였다. 게다가 메리앤이 이 정도를 눈감아 주고 있는 것도 꽤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이본느는 일주일간 충직하게 자신의 말을 들었던 하녀 엘리를 떠올리며 치료사 말런을 불렀다.

“별 이상은 없나?”

“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슬쩍슬쩍 피부를 들이밀고 나오려는 흉을 치료 마법으로 없앤 치료사 말런은 이본느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네.”

“공작님께서 태기가 있으면 바로 연통을 넣으라고 하셨긴 합니다만……. 아직은 없군요.”

말런에게 언질을 준 것 보면 공작이 임신 어쩌고 한 것이 아주 빈말은 아닌가 본데. 점점 알 수 없는 공작의 속내가 찝찝했다.

말런은 이본느도 임신에 관심을 두는 줄 아는 모양이다. 이본느는 그가 그렇게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사실은 독에 중독되었을까 봐 걱정되어서 물은 것인데, 말런의 반응을 보니 그렇지는 않은 듯해 이본느는 그제야 안심했다.

티타임이 끝나면 테이블과 바닥을 샅샅이 살피는 레이디 앙센이 거슬려 결국 다 마셔 버렸기에 불안했던 참이었다. 그래도 이제 며칠간은 황후궁에 카를로이가 오지 못하도록 해야 할 듯했다. 초반에 많이 먹였다고 생각할 테니 공작도 이 정도는 신경 쓰지 않겠지.

응접실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이본느를 메리앤이 불렀다.

“폐하, 레이디 앙센이 돌아와 뵙기를 청하는데, 혼자가 아니라…….”

메리앤의 뒤로 레이디 앙센이 나타났다. 황궁을 나가서 데려올 사람이 있었나 하는 의문에 이본느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앙센 백작이 공작도 아니고 굳이 자신까지 찾아오진 않을 텐데.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는 레이디 앙센 뒤로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하지만 새까맣기만 한 모자부터 옷,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가 뿜어내는 음습한 그 분위기는 익숙한 것이었다.

“……피오르?”

남자가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가씨, 아니지, 폐하.”

베르니의 마법사가 인사를 하고 손짓을 하자 눈치를 보던 메리앤과 레이디 앙센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본느는 찌푸린 눈으로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을 살폈다. 물을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네 남자였나? 지난번엔 시녀로 변장하고 들어왔잖아.”

“글쎄요. 그때랑 지금은 또 다르니까.”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시녀일 때 따로 있고 남자일 때 따로 있나, 웃기는 인간. 이본느가 속으로만 욕을 했다.

이본느는 흘끗 그의 목을 살펴봤지만, 목걸이 줄만 보이고 목걸이의 중심은 셔츠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저게 없으면 저 망할 마법사도 그 마법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여기까진 왜 왔지? 마법이 아직 풀릴 때가 되진 않았잖아. 한참 남았을 텐데.”

“공작님이 보내서 잠깐 왔어요. 편지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하셔서.”

“영지에서 무슨 할 일이 있으시다고 그렇게 바쁘신데?”

피오르가 눈을 접어 웃었지만 접힌 눈도 왠지 번뜩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쁘시다 한들 폐하께서 궁금해할 일들은 아니지요. 아무튼, 공작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슬슬 황비를 치울 때가 되었다고 하시네요.”

“……굳이?”

“그렇게 물을 일인가? 당연한 순서죠. 황비가 총애받으면서 계속 그 자리에 있으면 몇몇 인간들이 안심을 못 하니까.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황비라도 없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다정한 어투로 말을 한 피오르는 모자를 벗어 툭툭 두드리더니 무릎 위에 놓았다.

“꽤 오래전부터 공작님이 폐하께 말했다던데? 치워야 한다고. 아무것도 생각해 놓은 게 없어요?”

이본느가 입을 꾹 다물었다. 피오르는 그마저도 예상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죽여야지 어쩌겠어. 요새 황비랑 자주 있는다죠? 아르바 루프인가 뭔가 준비한다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거예요. 위험을 감수해야겠지만, 방법은 내가…….”

“걸리는 게 하나 있기는 한데, 확실치 않아서 그래.”

이본느가 약간은 성급하게 말을 가로챘다. 또 누군가를 죽이니 마니 이따위 것을 시키면 신경 쇠약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피오르의 까만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디 말해 보세요.”

“……황비에게 남자가 따로 있는 것 같아.”

“증거는?”

“아직.”

“심증은?”

“거의 확실해.”

죄다 개소리였다. 증거는커녕 심증 따위도 없다. 이본느는 그저 키아나를 죽여 버리는 결과를 피하려고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을 뿐이었다.

클라이드와 키아나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사이 연결점은 단 하나도 찾지 못해서 이본느는 자신이 과민했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던져 봐야 했다. 던지고 나니 문득 이본느도 궁금한 게 생겼다.

“그 남자, 앙센가 남자인 것 같던데. 앙센 백작이 이야기한 적은 없나?”

“아, 앙센 백작의 그 배다른 남동생? 백작이 황비에 대해서 딱히 그런 말을 언급한 적은 없는데요. 흐음.”

이본느의 반응을 보고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지 피오르는 혼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데. 잘만 하면 후작까지 같이 날릴 수 있겠어요. 그런데 증거는 어떻게 하려고?”

이본느는 피오르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아르바 루프의 전야제 황궁 파티가 있어.”

생각을 멈추지 않으면서 이본느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단둘이 한자리에 있게 하고…….”

“현장에서 잡는다고요? 흠. 고전적이네. 나쁘지 않아요.”

다행히 피오르가 알아서 말을 끝내 주었다. 이본느는 마치 그것이 제 생각이었던 양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오르가 방글거리며 손안에서 연기를 굴리더니 유리 장식이 박힌 검은색 펜 하나를 만들어 냈다.

“여기요. 따라 하고 싶은 글씨체를 유리로 비추면 기가 막히게 베낄 거예요.”

“글씨체?”

“둘이 한자리에 부르려면 누구 하나 글씨체는 훔쳐서 불러내야 하지 않겠어요? 그 정도의 비밀 연인이 쉽게 한자리에 있으려고 하진 않을걸?”

“아.”

“그나저나 이번 아르바 루프는 개판이겠는데? 황비와 다른 남자와의 염문설이라니.”

쓸데없이 치밀한 놈이었다. 이본느는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며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은색 펜을 받아 들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도와주는데, 성공할 거라 믿어요. 그나저나 우리 폐하께선 이걸 언제 말하려고 혼자만 알고 있었을까?”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도 이본느에게는 음산하게만 들렸다.

“증거가 없잖아. 공작님께 말해 놓고, 증거도 없이 실패하면 화를 내실 것 같아서 성공하면 말씀드리려고 했어.”

물 흐르듯 나오는 이본느의 대답에 피오르가 무릎 위 모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가며 웃었다.

“아가씨는, 아니, 폐하는 사람이 꽤 영리해요. 눈치도 빠르고. 거리에서 살았어서 그런가? 멍청하지가 않아. 좀 멍청하면 괜찮았을 텐데, 공작님이 못 믿는 것도 이해가 돼.”

누가 할 소리를. 클라이드와 키아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요사스러운 펜부터 만들 생각을 하는 인간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럼 난 이제 비밀 마법을 좀 손봐야겠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모자를 쓴 피오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가까이 다가오며 장갑 낀 손을 뻗는 피오르를 보고 이본느가 움찔거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번에 손봤잖아.”

“그 영리한 머리를 잘 굴려 봐요. 추가할 게 생겼잖아. 약도 있고, 황비도 있고.”

아, 이런. 피오르의 앞만 아니었다면 이본느는 제 머리를 세게 쳤을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약 얘기는 차라리 카를로이에게 털어놓았으면 됐을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얼마나 멍청하면 그 생각도 못 했지. 이럴 줄 알았으면 키아나에 대한 의심도 진즉 말을 해 둘 걸 그랬다. 기억 마법을 또 걸겠다는 피오르보다 스스로의 멍청함이 몇 배는 더 절망스러워서 이본느는 표정도 정리하지 못했다.

뭐가 내가 멍청하지가 않아. 암담할 정도로 멍청한데.

“표정이 수상하네요, 우리 폐하. 왜, 하기 싫은 이유가 생겼나요? 아니면, 말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겼을까?”

“……그럴 리가. 그 약은 독약도 아니라면서 왜 비밀이야?”

“글쎄요.”

“네가 만들었어?”

“또 또, 쓸데없는 걸 묻고 계시지.”

결국 이본느는 공작만큼이나 죽이고 싶은 마법사가 제 머리를 마치 놀이터라도 되는 듯 헤집도록 놔둘 수밖에 없었다.

“저번보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지끈거리는 머릿속으로 피오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어왔다. 한참 무언가를 하고 나서야 피오르는 이본느를 놓아주었다. 남의 머리는 복잡하게 해 놓고 제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듯 홀가분한 얼굴로 피오르는 옷차림을 정돈했다.

“이제 가 볼게요.”

“저기, 공작님께 말 하나만 전해 줘.”

“무슨?”

“영지에 한 번 더 가 보고 싶다고. 편지로라도 답을 좀 주셨으면 하는데……. 엄마가 걱정돼서 그래. 저번에 너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드니스? 오히려 저번보다 더 상태가 좋아진 것 같던데? 내가 갈 때마다 정원에 그렇게 나와 있던걸요.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전해 줘.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잖아.”

“그래요, 뭐. 황비 일만 폐하께서 잘 처리해 주면 공작님도 그 정도야 쉽게 허락하겠죠.”

마법사는 선심 쓴다는 듯한 말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을 나가려던 피오르는 걷다 말고 갑자기 뒤를 돌아 이본느를 빤히 쳐다보았다.

“황제였나? 그 사람 믿어 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요. 오해는 말고. 이건 경고가 아니고, 충고거든요. 폐하를 위해서 하는 조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본느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태평하게 나간 것에 감사했다. 심장은 어쩔 줄을 모르고 놀라 뛰고 있는데 목소리라도 제 뜻을 따라 줘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기억을 헤집지는 못할 텐데 뭐가 집히는 게 있나? 실수한 것이 있나?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본느는 떨리는 손을 책상 밑으로 숨겼다.

피오르는 그저 빙긋이 웃었다.

“그냥. 붙어 있으면 정들기가 쉽잖아요.”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럴 상황이야, 지금 내가?”

“뭐, 아니면 말고요. 이 집안 얘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대대로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들은 못 되더라고. 꽤 잔인한 사람들이에요. 괜히 혼자 마음 주다 손해 보지 말아요.”

“그럴 일이 뭐가 있어?”

“시원해서 좋네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있어요.”

다시 만나기는 개뿔, 죽어서도 볼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본느는 피오르가 나가는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드니스가 건강해졌다는 이야기만이 그나마 오늘의 만남에서 만족스러운 부분이었다.

베르니의 왕족일 수도 있는 인간이 대체 공작을 도와 뭘 하는 거지? 왕족이었던 인간이 돈이 부족했을 리는 없으니 베르니가 가난해서 왔다는 말도 순 거짓말일 텐데.

이리저리 생각을 해 보던 결국 이본느는 반쯤은 신경질적으로 들고 있던 펜을 던졌다. 피오르가 만든 펜이 날아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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