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8화 (9/22)

8. 황제는 황후를 모르고 싶다 (2)

원래라면 오늘은 이본느와 키아나의 아르바 루프를 준비하기 위한 공적인 첫 만남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마하에 파병을 보냈던 크로이센의 군인들 중 공로가 큰 이들과의 만찬이 같은 날 오후로 잡혔다. 공식적인 환영식 및 수여식은 아르바 루프에서 있을 예정이라 지금 당장은 황실과 4대 가문 수장이 참여하는 만찬으로 갈음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진즉 제가 찾아뵈었어야 하는 것을요. 죄송합니다, 폐하.”

해서 이본느는 이 상큼한 웃음을 가진 황비와 단둘이 남아 그 만찬을 기다리게 되었다.

델루아 공작은 이본느가 당장이라도 키아나의 트집을 잡고 황궁 밖으로 내팽개치길 바라겠지만, 이본느는 딱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바늘만 한 트집을 잡아 태산 같은 벌을 주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작이나 되는 인성이야 가능한 것이다.

“아니네. 뭐, 굳이.”

깔끔한 답에 키아나는 머쓱한 듯 다시 미소를 지었다. 보면 볼수록 황후는 공작의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 그 얼굴을 보면 물론 의심할 수 없었지만 행동은 달랐다.

무표정의 황후는 냉담한 인상이라 오만해 보이기도 했지만, 주변인에게 무심한 그 성격이 오히려 자비로운 권력자처럼 보이게 했다.

솔직히 키아나는 머리채를 잡힌다 해도 그러려니 할 각오로 왔지만, 눈앞의 황후는 머리채는커녕 키아나의 털 하나 건드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굳이 친절하게 굴지도 않았지만, 까탈스레 굴지도 않았다.

하긴, 딸이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닮는 건 아니다. 키아나는 자신과 로덴 후작을 떠올리며 혼자 납득했다. 게다가 공작처럼 악행을 도맡아 하는 아비 밑에서 굳이 그 딸까지 악해질 이유는 또 뭐가 있을까. 키아나 자신도 로덴 후작이 강인한 성격이었다면 이렇게 자라진 않았을 터.

“황후 폐하께서는 몸이 약하시다 들었어요. 귀찮은 일이 생기시면 그저 제게 다 맡겨 주세요.”

“그러지.”

생각보다 시원한 답에 키아나가 당황한 낯으로 웃음을 흘렸다. 아니, 조금은 자기가 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막상 황후를 대해 보니 카를로이가 왜 황후를 빨리 낚지 못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사람이 뭐 하나 쉬이 읽히는 게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어요.”

처음으로 이본느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그 얼굴에 떠오르는 노골적인 의심에 키아나는 속으로 카를로이 욕을 했다. 어떻게 굴었으면 이 정도의 말도 못 믿는단 말인가.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아, 황비.”

“그게 아니라……. 정말이에요. 요새 사이가 좋아지신 것 아닌가요? 제 궁에 오시는 횟수가 줄은 걸 보면 알 수 있지요.”

해맑게 웃는 황비를 보며 이본느는 새삼 다른 생각에 빠졌다. 황비의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역시 카를로이가 잘해 주는 것이겠지.

또 델루아 공작은 이 밝은 여자를 언제 죽이려고 들까? 델루아 공작이 황비를 가만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죽이거나, 쫓아내거나.

“글쎄. 자네랑 있을 때의 폐하는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긴 하군.”

“네? 음…….”

예상치 못한 질문에 키아나가 눈을 굴렸다.

카를로이? 냉정하고, 무섭고, 감정도 없어 보이고, 칼로 찔러도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고……. 오, 생각하다 보니 눈앞의 황후와 제법 어울린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었다. 그래서 키아나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했다. 미소와 거짓말.

“뭐, 잘 웃으시고, 다정하시고…….”

키아나의 대답을 들으며 이본느는 자신과 닿았던 카를로이를 생각했다. 뜨거울 땐 불온하고, 차가울 땐 잔인하고, 제 앞에선 화만 내는 남자를. 어떤 온도로 있든, 어떤 감정을 품든, 자신의 앞에서 카를로이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키아나와 있을 때 행복하다면 그는 왜 리리안을 잊지 못할까. 부채감인지 미련인지.

“그래? 나와 계실 땐 전혀 다른 모습이신데. 황비가 꼭 옆에 있어 드려야겠어.”

이본느의 말투에는 억양 하나 없어 진심인지 비꼬는 것인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을 보면 진심인 듯도 했다.

“폐하는 어떠신데요? 황제 폐하를 좋아하지 않으세요?”

당돌한 황비의 질문에 이본느는 눈만 껌뻑거렸다. 실상 이본느 자신은 카를로이에게 품는 감정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14년 전의 과거는 오래전의 빚을 받아 내려는 것처럼 이본느의 머리와 마음을 파고들었고, 그를 신경 쓰는 습관은 마치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내어놓는 대가로 느껴져서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그것이 당연하다 느낄 정도로.

새삼스럽게 이본느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14년 전의 그 감정을 철없는 어린 여자애의 풋사랑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리 여기는 건 아니었는데.

“황제께서는 폐하를 좋아하시던걸요.”

말을 끝낸 키아나가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미소였다.

“정말이에요.”

한 번 더 강조하는 황비를 보며 이본느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여유인지 동정인지.

이본느가 키아나의 의도를 가늠하는 사이 시종이 황제의 입장을 알렸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카를로이의 뒤를 델루아 공작과 뒤냐 공작, 로덴 후작과 앙센 백작이 따랐다. 카를로이의 시선이 잠시 이본느에게 머물렀다가 부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긴 흑발의 여자가 알렉시스 뒤냐임을 이본느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카를로이와 몹시도 닮은 여자라 모르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델루아가 죽인 사람의 언니. 알렉시스 뒤냐와 눈이 마주쳤다.

귀족들이 황후와 황비에게 예를 갖추었다.

“앉지.”

카를로이의 말에 모두가 앉을 때도 알렉시스 뒤냐는 이본느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딱히 적의가 보이는 눈은 아니지만, 이본느는 속이 불편해졌다. 자신의 잘못은 없는데도. 한참 뒤에야 알렉시스는 시선을 돌려 앙센 백작을 보았다.

“앙센 자네가 자랑스럽겠어. 이번에 마하에서 직접 공을 치하하고 싶다고 한 세 사람 중 하나가 자네 동생 아닌가?”

앙센 백작의 얼굴은 전혀 자랑스러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본느는 그 익숙한 얼굴을 잘 알았다. 델루아 영지에도 몇 번 온 적 있던 델루아 공작의 수족.

어찌나 동생을 싫어하는지 공작저에 처박힌 이본느조차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델루아 공작을 만날 때마다 제 동생을 접전 지역으로 치워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도.

“폐하께서 참으로 너그러우신 덕이지요. 그런 놈의 공을 치하하시려 하다니.”

“클라이드 경이 앙센의 성을 받은 지 좀 되지 않았나? 백작은 아직도 너무 애 같군. 못 본 새 좀 자랐을 거라 생각했는데.”

뒤냐의 말에 앙센 백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아버지와 아는 사이였던, 나이가 좀 있는 알렉시스 뒤냐에게 차마 뭐라고 하지 못해 어금니만 깨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특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성을 정식으로 받았다 한들 크로이센에는 암묵적인 법이 있었다. 사생아는 출세하기가 힘들다는 그런 지독한 차별적인 관습법이. 원래대로라면 클라이드 앙센은 당연히 공로자 명단에서 빠졌어야 할 사람이었다.

“제가 애 같은 게 아니라, 마하가 쓸데없이 관대한 겁니다!”

이본느는 자신의 바로 맞은편에 앉은 키아나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키아나가 무어라 말을 할 듯이 입을 몇 번 열었다 닫아서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 모습은 키아나 같다기보단…… 이본느, 자신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제 앞에선 잘만 말하던 키아나가 뭘 머뭇거리는지 이본느는 궁금했다.

“이참에 아예 마하로 보내 버릴까 싶은 생각도 드는 참입니다. 그놈도 대우받는 곳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입만 뻐끔거리고 말던 키아나는 앙센의 말에 미약하게 얼굴을 구겼다. 하긴, 로덴은 대대로 앙센과 크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마 비난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려는 찰나, 키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키아나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여서 이본느는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키아나는 계속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곧 있으면 다들 들어올 텐데 공들은 적당히 하게.”

카를로이의 조용한 말에 모두의 입이 다물렸다. 그와 동시에 방글거리는 얼굴로 돌아온 키아나를 보고 이본느는 자신이 과민해진 건 아닌지 고민했다.

이윽고 시종이 군인들의 입장을 전했다. 세 남자가 들어와 예를 갖추고는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이본느는 앞장서 들어온 한 군인을 유심히 쳐다봤다. 진중한 인상의 남자에게 앙센 백작의 경멸 어린 시선이 닿는 걸 보니 그가 그 유명한 클라이드 앙센인 듯했다.

하지만 시선이 간 이유가 앙센 백작의 눈초리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눈을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키아나를 보고 나서야 그 눈이 갈 곳을 찾은 듯 움직이는 걸 멈췄다. 찰나였지만 분명했다.

이본느는 다시 키아나를 보았지만, 키아나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 뭔가 알 듯 말 듯한, 어떤 직감이 이본느의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는 듯한……. 하지만 로덴의 귀하디귀한 영애와 앙센의 사생아가 무슨 연결점이 있다고?

“오랜 시간 동안 고생 많았네. 마하가 수입품의 양을 대폭 늘린 것에는 자네들의 공도 있겠지. 마음껏 들게.”

카를로이가 말하자 다시금 감사 인사가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식사가 나오느라 소란해진 틈을 타 조용히 혼자 눈을 이리저리 돌리던 이본느는 마지막으로 앙센 백작을 쳐다봤다. 그는 이제 클라이드와 키아나 둘 다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본느 말고는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 걸 보아선 별일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델루아 공작은 지루하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식사만 하고 있었다. 자신이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뭘 모르는 걸까.

“그래서 그때 클라이드 경이…….”

대화 주제의 지분을 클라이드 앙센이 가장 많이 차지한 것으로 보아 그가 공로가 크긴 한 모양이었다. 다른 두 군인이 클라이드에 대한 찬사를 이어 갈 때마다 앙센 백작의 얼굴은 더 꼴불견이 되어 갔다.

“그리 공을 많이 세웠다니, 아예 마하로 가는 것은 어떠냐?”

“오, 실제로도 마하에서 클라이드 경에게 작위를 제안했습니다!”

앙센 백작이 비꼬듯 하는 말에 한 군인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 대답에 앙센 백작의 얼굴은 이제 처참하다라는 단어로는 부족할 정도로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도 돌아왔다고? 왜지? 거기서 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저에겐 마하의 작위보다 크로이센의 명예가 더 중요합니다.”

노골적인 백작의 질문에 대한 클라이드의 대답은 너무나 고상해서 그의 인품을 더 돋보이게 했다. 모두가 클라이드의 대답에 감탄했는지 표정에 경외가 떠올랐다. 카를로이조차 새삼스러운 눈으로 클라이드를 한 번 더 살폈다.

앙센 백작은 그 대답에 혼자 크게 코웃음을 쳤다. 백작 앞의 음식에 불순물이 묻진 않았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전혀 편안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만찬은 어찌어찌 잘 마무리가 되었다. 네 가문의 귀족들이 서로 쉴 새 없이 말로 견제하는 와중에도 카를로이와 주인공인 군인들이 중심을 잘 잡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없는 것은 이본느와 키아나뿐이었다. 놀랍도록 말수가 줄어든 황비가 이본느는 이상할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뒤냐와 로덴은 잠시 남지. 할 말이 있으니.”

만찬이 끝나고 군인들을 따라 자리를 뜨려는 귀족들을 카를로이가 붙잡았다. 대놓고 편을 가르는 카를로이를 보고 델루아 공작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수긍을 못 할 일도 아니라 그는 앙센 백작과 함께 문 쪽으로 향했다.

이본느는 그 둘을 따라 조용히 같이 나가려 했다. 누가 봐도 자신은 카를로이가 남길 바라는 측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었다.

“황후는 나갈 필요가 없는데.”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카를로이의 목소리에 이본느는 어중간하게 멈춰 섰다. 제정신인가?

이본느는 당황한 얼굴로 왼쪽의 델루아 공작과 오른쪽의 카를로이, 양쪽의 눈치를 살폈다. 태평한 얼굴의 카를로이와는 달리 델루아 공작의 무표정은 무시무시했다. 이본느는 저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황비도 남는 자리, 황후라고 나갈 이유가 있습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델루아 공작은 카를로이 대신 이본느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본느는 최대한 결백한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봤다. 이내 공작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예를 취했다.

나가는 공작의 뒷모습을 불안한 마음으로 보다 이본느는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클라이드 앙센은 앙센 백작과는 좀 달라 보이는데. 사람이 꽤 쓸 만해 보이는군.”

아무렇지 않게 카를로이가 입을 열었다. 눈치는 오히려 알렉시스와 로덴 후작이 보았다. 이본느가 있는 자리에서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카를로이가 눈빛으로 독촉하자 알렉시스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 하지만 앙센 백작의 말대로 그에게 큰 상을 주는 것은 위험하기는 하지요. 차라리 마하 쪽에 그를 주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음? 그가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하는 건 멍청한 짓 같은데.”

카를로이가 희미한 반대 의견을 표하자 갑자기 키아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폐하의 말씀이 맞네, 뒤냐 공. 크로이센의 차별적인 관습법은 모순적이야.”

황비는 이 주제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축첩을 미개하다 보고 법으로 금지하는 마하에서조차 사생아를 차별치 않아.”

키아나의 말에 로덴 후작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제 딸을 바라봤다.

“그 대신 마하는 노예를 그 어떤 나라보다 잔인하게 혹사시키지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시대에 뒤처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단 말이세요, 아버지?”

“뿌리 깊은 관습입니다. 사생아를 인정하다니요.”

로덴 후작은 자신의 딸을 무슨 어린아이 보듯 쳐다보았다.

“귀족으로부터 일개 평민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할 생각입니다. 사생아 출신임을 속이는 것이 중죄에 해당하는 곳이 크로이센이에요.”

“하지만 폐하께는 어차피 새 세력이 필요하세요. 사생아임을 숨겼다 걸려 이혼당하거나 감옥에 갇힌 반쪽짜리 귀족만 해도 몇 마차는 나오겠어요. 그들을 쓰지 못할 이유는 뭔가요, 또.”

이본느는 부녀간의 대화를 멍하니 들었다. 사생아를 바로 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가 퍽이나 흥미로웠다.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면서도 미묘하게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무심하게 듣던 이본느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어떤 조각들이 모였다.

“사생아로 이루어진 새 세력!”

“그렇게 비웃으실 필요는 없잖아요, 아버지.”

클라이드 앙센과 키아나 로덴의 눈빛, 그리고 태도. 마하의 작위를 거절하고 크로이센으로 돌아온 클라이드, 크로이센의 사생아를 대하는 태도를 경멸하다시피 하는 키아나.

무언가가 맞춰질 듯 맞춰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유의미한 힘이 된다고요. 뒤냐 공이 돌아온 이후로 다른 귀족들이 많이 붙었으니 그런 세력까진 필요 없습니다.”

“로덴, 내게는 델루아의 측근이 필요해.”

“클라이드 앙센은 그 측근에게 천대받는 반쪽짜리 동생일 뿐이지요. 그리고 솔직히 앙센가 인간이 무슨 대우를 받든 제가 알 바는 아닙니다.”

“너무 그러지 말지, 로덴. 황비 전하께서는 새 시대에 맞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으니.”

적당히 중재하는 알렉시스의 말에 로덴 후작은 콧방귀를 뀌었다. 매사 벌벌 떠는 생쥐 같은 모습이더니 앙센가 이야기가 나오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다른 사람이라기보단 다른 생쥐, 찍찍거리는 생쥐 같은.

“나도 황비의 의견에 동의해, 로덴. 그건 크로이센의 미래에 좋지 못한 관습이야. 누가 봐도 모순적이지 않은가. 화풀이나 다름없지.”

“폐하! 무슨 그런 말씀을! 화풀이라니요!”

“아버지, 폐하의 말씀이 맞아요. 저와 폐하는 크로이센이 지금껏 약한 국력에 대한 울분을 차별로 풀어 왔다고 생각해요. 일종의 분풀이 아닌가요?”

이본느의 시선이 너무 오랫동안 키아나에게 머물렀는지 키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본느와 눈을 마주친 키아나는 일순 애매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클라이드 앙센은 앙센 백작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야. 적의 적은 나의 아군 아닌가?”

“하지만 폐하, 다시 말하면 그는 앙센 백작이 곧 어떻게 해서든 죽여 버릴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도움이 되기 전에 어디서 죽어 버릴지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심드렁하게 말하는 로덴 후작은 유약했던 평소 모습과 비교되어 더욱 무심해 보였다. 전대 앙센 백작에게 사기를 당한 적 있다더니 뒤끝이 꽤 길게 가는 듯했다.

이본느는 계속해서 키아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길이 불편한지 키아나가 몸을 꿈틀거렸다. 키아나가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쥐는 것이 로덴 후작의 말 때문인지, 자신의 집요한 눈길 때문인지 이본느는 궁금해졌다.

“일단 좀 더 생각해 보지. 다들 슬슬 나가 보게. 아, 뒤냐는 남고.”

남으라 한 것은 카를로이인데 뒤냐는 이본느를 쳐다봤다. 마치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다가올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뒤냐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이본느는 뒤냐의 눈길을 애써 무시하고 자리를 나왔다. 어차피 델루아 공작의 무서운 얼굴이 계속 생각나서 불편한 자리였다. 분명 황후궁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지.

“정말 답 없는 이야기였죠?”

키아나가 예사 방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이본느에게 말을 걸어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이었지만 이본느는 그것이 이제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본느는 가만히 키아나를 바라보다 물었다.

“혹시 황비, 클라이드 경과 아는 사이인가?”

“어머, 아니요. 얼굴을 보는 것도 이번이 두 번째인가 그런걸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발랄한 목소리로, 답은 빠르게 튀어나왔다.

“왜 그러세요, 폐하?”

“별 뜻 없이 물어봤네. 유명한 사람인 듯해서.”

이본느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곤 시녀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남겨진 로덴 후작이 인상을 구겼다.

“황후가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걸 묻는 거냐? 로덴이 앙센의 사생아와 엮일 일이 뭐 있다고.”

이본느가 사라진 자리를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보는 자신의 딸에게 후작이 물었다.

표정이 좋지 않을 만도 했다! 감히 누구에게 누구를 아냐고 물어보는 것인지. 필시 키아나를 깎아내리려는 델루아 딸의 수작임이 틀림없다. 로덴 후작이 이본느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그러게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물으신 걸까요.”

만찬 내내 자신과 클라이드를 보던 이본느를 생각하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이상한 곳에서 눈치가 비상한 건지.

어차피 알아도 소용은 없다. 그 앙센 백작조차 아무 증거가 없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황후가 알아봤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키아나는 불안한 마음을 죽이려 심호흡을 했다.

* * *

“정말 클라이드 앙센을 쓰실 생각입니까?”

텅 빈 만찬장에서 알렉시스가 물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지. 이제 클라이드 경을 보낼 다른 전쟁터도 없으니 앙센 백작은 다른 수를 생각할 것 아닌가.”

“흠……. 그런가요.”

“클라이드 앙센이 바보가 아니라면 제 살길을 찾겠지. 그런데 정말 대단한 인물 같더군. 마하의 전쟁에서도 살아남다니.”

“역으로 꼬리를 잡히면 더 위험합니다.”

“위험해지지 않고서는 델루아를 이길 수 없어.”

“그런 이야기를 굳이 황후 앞에서 할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황후가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패’가 되었나 봅니다.”

패라는 단어를 말하는 뉘앙스에서 뒤냐가 그 계책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글쎄, 아직은. 어느 정도의 도박은 필요하겠지. 어차피 나야 잃을 것이 크게 없는 도박이니.”

이본느가 공작에게 그대로 말한다면 델루아는 그동안 관심도 두지 않았던 클라이드 앙센을 바로 죽여 버릴 것이다. 말하지 않는다면 멀쩡할 것이고.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나저나 공은 황후를 오래도 쳐다보더군.”

“소름 끼칠 정도로 델루아를 닮았더군요.”

“새삼스럽군.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나?”

알렉시스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느라 눈을 찌푸렸다.

“너무 어릴 때였으니까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갓난쟁이 얼굴에서 뭐가 보이겠습니까. 그런데 저런 미인으로 자랐다면 소문을 한 번쯤을 들었을 법도 한데…….”

“델루아 영지에서 나온 적이 없다는데 무슨 소문이 나겠나.”

“음. 아무튼, 의외입니다.”

“무엇이?”

“카를로스 황제께서 예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델루아는 자신과 닮은 자식을 절대 예뻐하지 못할 거라고. 그 말이 생각나서 딸을 아낀다기에 막연히 닮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요.”

별 뜻 없이 한 말인데 카를로이는 심각한 얼굴이었다. 알렉시스는 자신이 한 말 중에 그런 얼굴을 하게 할 만한 게 있었나 다시 되짚어 봤지만 딱히 그런 건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그러고 보니 델루아 공작은 젊었을 때 어땠지?”

“지금과 똑같았습니다. 겉이 아름다운 만큼 속은 비열했지요.”

“흠. 그리 외모가 출중했다니 스캔들도 많았을 법한데.”

알렉시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스 델루아의 여자관계는 알렉시스가 이 세상에서 가장 관심 없는 것 중 하나였다. 이런 것을 왜 궁금해하는지, 알렉시스는 카를로이가 비위도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권력에 신경 쓰는 인간이다 보니 여자에겐 별 관심이 없더군요. 염문 한 번 나지 않았지요. 여자가 없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시끄러울 관계는 만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공작 부인과의 관계는?”

“아시지 않습니까? 부인과의 금실도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금실이라고 하기엔 이성적이고 정치적인 관계였던 것 같지만.”

“그건 의외군.”

“도대체 이런 건 왜 물으십니까?”

카를로이가 무엇을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더니 다시 다물었다. 알렉시스가 빤히 바라보자 이내 내키지 않는 듯 그는 입을 다시 열었다.

“적을 잘 알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약점은 알면 알수록 좋은 것이니.”

그럴듯한 말이지만 석연치 않았다. 카를로이가 자신에게서 무엇인가 숨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이었다면 제가 이미 말씀을 드렸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지금은 마법 학자들을 조사 중입니다. 베르니의 마법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라 아는 이들이 없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소득이 아예 없진 않을 겁니다.”

“만전을 기해야 해. 델루아는 절대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야.”

알렉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아는 사실이었다.

* * *

이본느가 황후궁에 들어가자 시녀들이 공작이 와 있음을 알렸다. 예상을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이본느는 표정을 정돈하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공작의 번쩍이는 눈이 마치 뱀의 비늘처럼 피부에 와 닿았다. 매끄럽고 불쾌한 감각.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물어보는 어조는 눈빛과 어울리지 않게 자못 상냥했다.

“별 이야기는 없었어요. 클라이드 앙센에게 상을 내릴지 말지 가지고 싸우던걸요. 뒤냐와 로덴은 그걸로 흠을 잡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게 다라고?”

“제가 있는 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더 하겠어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이다. 왜 널 그 자리에 남겨 두었지?”

하지만 그것은 이본느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정말로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없는 사이 허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놈과 붙어먹었다든가.”

천박한 단어에 이본느가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허튼 생각이야 최근에 가장 많이 한 것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카를로이와 ‘붙어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럴 리가요. 마법까지 거셨는데 뭘 더 의심하세요? 한 번 걸면 최소한 몇 개월은 가잖아요.”

“마법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공작은 킬킬거리며 웃었는데, 그 웃음이 이상하게도 자조적으로 들렸다.

“마법이란 건 전능하지도, 영원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아. 마법이 그런 것이었다면 왜 베르니가 이 대륙을 통일하지 못했겠느냐.”

공작이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왜 내가 아직도 크로이탄을 죽여 버리지 못했겠어.”

공작은 미친놈이라고 이본느는 생각했다. 물론 항상 생각하던 것이지만 그것은 관성적인 욕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온전한 진심이었다. 그는 미쳤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미 미친 상태일지도 몰랐다. 공작의 눈이 반쯤 돌아 있었다. 저런 눈을 한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다.

미치광이는 제 쓸모가 다한 물건을 어떻게 할까? 곱게 버려 주면 좋겠지만, 그렇다면 미치광이도 아니겠지. 이본느는 자신과 드니스의 유효 기간이 언제까지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니 난 널 절대 믿지 못할 거다.”

공작의 지독한 불신을 보고 있자니 이본느는 그제야 카를로이의 의도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깨닫는 동시에 가슴이 저렸다.

“황제가 이걸 노렸나 보네요. 공연히 날 그 자리에 남겨 두고, 공작님의 의심을 사게 하는 것.”

“이간질을 하려 했다?”

“네.”

“넌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나 보지?”

웃음기 가신 공작의 얼굴은 음산함이 짙어져 더 무서워졌다.

“그런 계획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네가 여지를 남겼다는 거다. 이간질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든 거지.”

제 손에 나이프를 쥐여 주던 카를로이가 떠오르자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본느는 태연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렇다면 제가 제 일을 잘한 거겠죠. 저는 공작님이 시키신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시킨 일?”

“황제의 환심을 사는 일 말예요.”

공작이 대답 없이 이본느를 보기만 하는 통에 이본느는 긴장한 상태로 그 시선을 받아 내야 했다. 한참 뒤에 공작은 빙긋 웃었다.

“……그래. 네가 조속히 네 쓸모를 증명해 보이리라 믿는다. 아르바 루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 모양이던데 황비를 잘 살피고.”

“네.”

“없으면 만들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고. 후작 놈과 함께 보내 버릴 만한 구실이 있으면 좋겠지만 정 안 되면 죽여야겠지.”

“……네.”

공작이 할 말을 다 마쳤는지 의자에서 일어났다.

“저, 공작님.”

나가려던 공작이 이본느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

“엄마는 좀…… 어떤가요?”

“글쎄다. 네 어미를 돌보는 메리앤의 딸이 뭘 요구하는 게 적어진 걸 보니 상태가 꽤 호전된 모양인데 나야 잘 모르지.”

이본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자신의 당부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벅찼다. 공작이 그 얼굴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변하고 네 어미도 변했군.”

이본느가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공작은 또다시 웃기만 하고 그대로 응접실을 나갔다.

기뻤던 것도 잠시 이본느는 공작의 의도 모를 말에 다시금 불안해졌다. 미치광이의 웃음은 예로부터 항상 불길하게 여겨지는 것이니.

* * *

만찬이 있던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을 때 카를로이는 황후궁에 전갈을 보내왔다. 그날 밤 로열 체임버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냐는 내용이었다. 이제는 먼저 제안까지 하다니.

사흘간 이본느가 한 추측은 꽤 명료했다. 카를로이는 이제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었다.

만찬에서 그가 ‘델루아의 측근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 갑자기 변한 태도, 공작과 틈을 만들어 내려는 짓 등등을 미루어 보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오늘 밤 로열 체임버로 가겠다고 답신을 보내지.”

이본느의 대답에 시녀 하나가 황제궁으로 향했다.

추측이 확신이 되었을 때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카를로이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숨도 못 쉰 자신이 생각나서, 그의 손길이 닿았을 때 심장이 떨어지던 자신이 한심해서.

공작이 미친놈이라면 카를로이는 나쁜 놈이었다. 차라리 솔직히 말했다면 이토록 비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본느의 마음을 이용하고, 거기 응하는 척할 필요까진 없는데.

이본느가 그의 패가 되겠다고 하면 그는 무엇을 시키려 들까. 공작처럼 질 나쁜 것들을 시킬까. 어쨌든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패도 모두 알아야 했다. 확률 낮은 도박에 드니스의 목숨까지 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제 황제 폐하께서도 적극적이시네요. 폐하도 그렇고!”

이본느의 속을 모르는 메리앤이 밝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자 이본느는 자신을 덜 한심하게 여길 수 있었다.

사람이란 다 그런 것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말로 대충 의도를 파악하는 것. 웃으면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고, 다정하면 애정이 있다고 생각하고.

카를로이가 차라리 예전처럼 대해 주길 바랐다. 이본느는 홀대에 너무 익숙한 인간이 되어 버려서, 환대에는 무서울 정도로 취약했다. 갈증을 잘 견디고 살던 사람이 물 한 모금에 더 괴로운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그 얄팍한 다정함이 이본느를 더 고통스러운 행복으로 고문하겠지.

“폐하와 잘된다고 내게 무엇이 좋겠어.”

“공작님이 너그러워지시겠죠. 제인 말로는 드니스도 요새 부쩍 건강을 챙긴다던데. 폐하께서도 이제 신경 쓰세요.”

“엄마가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메리앤, 공작님이 모든 걸 다 이루고 나면, 나와 엄마를 어떻게 하실 거 같아?”

메리앤이 두 눈을 깜빡였다.

“나도 정말 모르겠어서 묻는 거야. 짐작도 가지 않아서.”

“음. 자유롭게 놔주시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폐하도 조금만 더 참으시면…….”

메리앤의 애매한 얼굴을 보고 이본느는 메리앤조차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누가 델루아 공작에게서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

“그래. 그래야겠지.”

문득 황비 책봉식 직전에 느꼈던 기분이 들었다. 양쪽에서 갉아먹는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느낌. 그리고 밤은 이본느의 신경을 갉아먹고 자란 것처럼 그만큼 쉽게 빠르게 다가왔다.

피곤할 정도로 긴장감 어린 오후가 지나자 이본느는 그 원흉 중 하나인 카를로이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나마 덜 억울한 점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카를로이의 얼굴도 아주 편해 보이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곳에서 보낸 저번 밤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지만.

“안색이 좋지 않으시네요, 폐하. 혹시 싫으신데 억지로 오신 건 아닌지.”

뼈가 있는 말에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카를로이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은 우스운 일이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느라 잠시 넋을 놓았다니. 이본느는 카를로이를 생각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었다.

루의 죽음을 마지못해 인정한 이후로 그의 감정은 썰물이 쓸려 나가듯 자취를 감췄지만, 못마땅한 제 황후를 마주할 때면 밀물처럼 다시 몰아치고는 했다.

클라이드 앙센은 무사했다. 카를로이는 이본느가 공작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스스로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마음 한편은 안심하는데, 한편은 또 내려앉았다. 짜증이 났다.

이본느를 마주 보는 세밀한 조각 같은 얼굴에 딱 어울리는 그림 같은 미소가 천천히 떠올랐다.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는 무슨.

거짓말 같은 미소를 짓는 카를로이를 보자니 쓸데없이 눈이 시큰해져서 이본느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고 있자 옆자리에 카를로이가 조용히 눕는 것이 느껴졌다.

“불은 원래 잘 안 끕니까.”

낮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감은 눈이 살짝 떨려 왔다.

“네.”

“왜?”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리리안 루일 땐 어둠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어둠은 그저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괴물처럼 느껴진 것은 공작저로 들어간 이후부터였다.

모든 곳이 번쩍거리며 빛나는 공작저에 딱 한 곳, 칠흑처럼 어두운 곳이 있었다. 어둠은 이제 그곳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두웠던 탑의 골방.

“무섭잖아요.”

이본느의 무심한 대답은 어린아이의 것처럼 유치한 답이었는데, 그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델루아 공작의 딸에게도 무서운 게 있는지 몰랐는데.”

카를로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신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델루아 영지에서 돌아와서 한동안은 어둠에 적응하지 못해 불을 끌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아니지만.

“폐하는 무서운 게 하나도 없으신가요.”

“있었는데 이제는 없습니다.”

그가 무서워했던 단 하나의 것은 이제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 새삼스러운 자각이 그를 어색하고 이상한 침실에서 정신을 차리게 했다.

“그대는 왜 공작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 겁니까.”

“……얼마나 더 물어보셔야 성이 차시겠어요? 아버지는 저한테 그런 걸 시키지 않으세요.”

카를로이가 코웃음을 쳤다. 딸이라고 험한 일은 안 시키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나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공작에게 해가 될 거란 사실은 알지 않습니까.”

카를로이는 최대한 말을 부드럽게 하려 노력했다.

“이본느.”

그의 말끝에 이름이 불리자 이본느의 감긴 눈이 떨렸다. 눈을 천천히 뜬 이본느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나는 이본느 때문에 카를로이도 어정쩡하게 몸을 세웠다. 긴 머리칼이 흐트러진 채로 이본느가 카를로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이본느의 얼굴은 꼭 극한에 다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다시 보니 평상시처럼 그저 무표정이었을 뿐인데, 카를로이는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저를 떠보실 요량이면, 이용할 생각이시라면, 폐하께서도 조금은 내보이셔야 하지 않겠어요.”

직설적인 말에 카를로이의 표정이 흔들렸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본느가 그리 생각하는 것은 또 마뜩잖다.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마음을 완전히 얻고 싶었다. 그래야 모든 것이 확실해지고, 그가 더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대 도움을 얻으려는 것은 맞으나, 이용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본느가 눈을 깜빡이자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예전처럼 싫기만 했다면, 당신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 말 하셔 봤자 저는 이 싸움에 끼지 않을 거예요.”

“싸움은 끝이 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이기면 그대 아버지가 죽고, 공작이 이기면 내가 죽는데 어떻게 그것이 당신에게 아무 상관이 없습니까.”

“……그건, 저도 아버지의 행동을 온전히 지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족으로서의 애정과는 별개로…….”

“내가 죽는 것과 공작이 죽는 것…….”

이본느가 머뭇거리며 말을 하는 사이 카를로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본느는 숨을 죽이며 눈을 피했다.

“둘 중 어느 것에 당신이 더 마음을 쓸지 궁금하군요. 상식적으로는 전자를 바랄 텐데.”

카를로이가 약간 흐트러진 이본느의 네글리제를 정돈했다. 느릿한 손길은 살결엔 전혀 닿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자극적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

차마 그의 손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들었더니 이제 그의 눈이 이본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가 원하는 걸 줄 수 있다고 하셨죠. 제가 원하는 게 폐하라고 생각하세요?”

카를로이는 대답 없이 이본느의 머리칼을 스치듯 만졌다. 이본느는 자조적으로 웃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본느가 원하는 건 카를로이의 마음이 아니었다. 그런 건 어릴 때나 원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카를로이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제 마음을 당사자가 뻔히 알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자신이 멍청하게 행동한 탓인 건지, 카를로이가 눈치가 빠른 건지.

“그럼 제게 폐하의 마음이라도 주시겠다는 건가요.”

“못 줄 것도 없지요.”

“저는 폐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이본느가 제 손을 카를로이의 손에 얹었다. 카를로이의 온몸이 굳는 것이 손을 통해 느껴질 정도였다. 고작 손이 닿는 것에 이렇게 행동하면서 뭘 줄 수 있다는 걸까.

“한 번이라도 솔직해져 보세요. 그러면 저도 생각해 볼 테니까.”

“무슨.”

“폐하의 얘기를 해 주세요. 궁금하니까.”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름다웠던 얼굴이 바로 찡그려졌다.

“저에게서 누구를 보시는 거예요?”

카를로이의 얼굴은 이제 찡그림을 넘어 창백해졌다. 도대체 이본느가 어떻게 알았는지. 카를로이는 혼란스러운 와중 기억을 더듬었다. 이윽고 차를 마시다 충동적으로 말한 것이 기억이 났다.

멍청한 새끼. 미친놈.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세요. 궁금해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내뱉은 말이 황후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거짓말이었나요? 그게 거짓말이었다면 나머지 말은 제가 어떻게 믿겠어요.”

이본느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 하나로 카를로이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런 식의 질문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갑자기 판이 바뀐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에 대한 생각은 항상 그를 그렇게, 무력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되나요?”

반쯤은 호기심으로, 반쯤은 상황을 역전시키려 약 올리듯 물은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후회했다. 고작 이 질문 하나에 카를로이는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절망감이 그의 얼굴을 지배했다.

이본느는 자신도 모르게 잡고 있던 카를로이의 손을 놓았다.

“……그런.”

카를로이는 말을 잇지도 못했다. 또다시 물에 잠긴 듯 숨이 차올랐다. 단 한 번도 상대방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말해 보지 못한 감정에 단어가 붙여지자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카를로이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집착인지 미련인지 사랑인지 이제 알 게 뭔가.

“……어차피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간신히 나온 말에는 짙은 체념이 묻어 있었다. 말을 끝낸 카를로이의 얼굴은 텅 비어 보였다.

리리안 루가 죽은 것이, 고작 그 여자애 하나 죽은 것이 카를로이가 이런 얼굴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 이본느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델루아 영지에서 찾던 이가 그 사람 아닌가요.”

“……그곳에서도 찾지 못했으니 죽었겠지요.”

그 대답을 듣고서야 카를로이가 정말로 14년간 자신을 찾아 헤매 왔다는 걸 이본느는 실감했다. 하지만 대체 왜.

어느 날 이곳에서 소리 내 울던 카를로이가 떠올랐다. 카를로이는 정말 자신이 리리안 루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나요.”

속삭이듯 묻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카를로이는 그저 아주 느리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뿐이었다.

“이런 걸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인지 잘 모르겠군요.”

“궁금해요. 폐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카를로이가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이본느를 쳐다봤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듯했다.

“그렇게 말했어요. 이곳에서…… 울던 날.”

그 부끄러운 날이 카를로이의 기억을 후려쳐 그는 얕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어차피 사실 아닌가.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었다. 루는 카를로이 제가 죽인 것이 맞았다. 멀쩡히 살고 있는 아이를 홀려 위험한 일에 빠지게 했고, 애꿎은 브로치를 줘서 델루아의 손에 죽게 만들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무튼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습니다.”

숨결이 닿을 듯 가까이 있던 카를로이는 어느새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잠시 흐트러졌던 그의 얼굴에는 다시 냉기 흐르는 장막이 쳐져 있었다.

말을 끊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본느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의 답을 기다리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다른 곳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대 아버지가 판을 치던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준 사람이어서…… 아무튼 이게 답니다.”

아까보다 더 단호해진 말투였다. 바로 앞에 그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고 말을 하는 카를로이를 보며 이본느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아마 미쳤더라면 드니스도 잊고 여기서 자신이 루라 외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본느는 아직까진 정신이 있었다. 아직까지는.

잠시 날것의 대화가 오간 둘 사이에는 다시 보이지 않는 막이 쳐진 듯 미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좋아요. 그러면 다른 이야기를 해 주세요.”

“무슨 이야기를 또 합니까.”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사람치고 심히 불량한 태도였다. 태도가 이랬다저랬다 아주, 저 좋을 대로. 이본느는 카를로이를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어차피 저나 폐하나 잠에 들기는 틀렸잖아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어린 시절이나 그런 것.”

“그런 게 왜 궁금합니까. 이런 이야기가 그대 마음을 돌리는데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는데.”

“이 정도도 못 해 주면서 제게 대체 뭘 해 주실 수 있는지.”

정곡을 찌르는 이본느의 말에 카를로이가 불편한 듯 몸을 잠시 움찔거렸다.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사실을 습관적으로 잊게 되니 큰일이었다. 아니, 일단 혼자 오락가락하는 감정이 문제였다. 이런 거나 묻는 황후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카를로이는 반쯤은 못마땅한 얼굴로 기억을 더듬었다. 델루아의 딸에게 말해도 별 상관없을 자신의 이야기를 찾으려고 하다 보니 우습게 느껴졌다. 어차피 자신의 과거는 델루아가 만든 불행과 고난의 역사고, 그건 이미 델루아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난 조부를 닮았단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카를로이가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어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전 자신의 이야기를 그 누구한테도 해 보지 않은 사람처럼 구는 남자의 이야기를 이본느는 어쩐지 슬픈 기분으로 듣기 시작했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의 과거에는 온기라곤 단 한 움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야기 안엔 사람이라곤 없는 것 같았다. 텅 빈 세상을 혼자 살아온 사람처럼 그는 이야기했다.

둘 중 하나라도 행복할 수는 없었던 걸까. 카를로이라도 행복했더라면 복잡한 생각 없이 마음껏 그를 미워할 수 있었을 텐데.

정작 그는 무슨 책이라도 읽는 듯, 지겹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말투였지만, 이본느는 어린 리리안을 가지 못하게 잡던 눈물 많던 남자아이를 떠올렸다.

“……계속합니까?”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옆을 흘끗 보며 카를로이가 물었다. 무심결에 델루아 공작의 수작질을 말하던 그는 그 앞에 앉아 있는 공작의 딸을 의식했다. 자신이 꼭 동정표라도 사려는 거지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네. 재밌어요.”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그의 황후는 재밌다는 대답을 했다. 믿기가 힘들었다. 카를로이는 떫은 얼굴로 그의 유일한 청중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공작의 중요 부위를 실수로 찼는데 그대로 공작이 기절해서 치료사를 부른 적이 있는데. 그러니까 내가 황후의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까. 더 세게 찼으면 그대가 태어나지도 못했을 수…….”

말을 하던 카를로이는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췄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옆을 돌아보니 얼음장 같은 얼굴이었던 이본느가 소리를 내서 웃고 있었다.

저번과 같이 황제가 창백한 얼굴로 침실을 뛰쳐나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침실 문 앞에 서 있던 시녀들도 흘러나오는 황후의 웃음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본느?”

“아, 죄송, 해요.”

간신히 죄송하단 말을 하던 이본느는 무엇이 그리 웃긴지 다시 웃기 시작했다.

카를로이는 완전히 넋을 놓고 그런 이본느를 쳐다보았다. 이본느에게서 나올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웃음소리가 그를 파고들었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한참을 웃던 이본느는 카를로이가 말도 없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자 민망한지 눈가를 훔쳤다.

“아, 너무 웃겨서 그만…….”

이본느가 민망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죽이고 싶은 공작이 기절할 정도로 걷어차였다는 생각에 앞뒤 잴 것 없이 본능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공작을 앞에 두고 매번 상상하던 그걸 직접 한 사람이 있었다니. 그게 카를로이라니 어쩐지 더 웃긴 기분이었다. 죽이고 싶은 꼬맹이에게 걷어차이고도 애써 괜찮은 척했을 델루아 공작이 떠올라 어쩔 수가 없었다.

한참 뒤에야 웃을 일이 아니었단 생각에 간신히 표정을 정리하고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여전히 어딘가 멍한 얼굴로 가만히 자신만 보고 있었다.

“……폐하?”

이본느의 부름에 카를로이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괜한 헛기침을 하며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대 아버지가 걷어차인 것이 그렇게 웃깁니까.”

“……조금은요. 그런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으셔서.”

“딸에게 목숨을 거는 공작이 들으면 서운해하겠군요.”

“목숨까지 걸진 않으실 거예요.”

무심코 내뱉은 이본느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공작이라면야 그럴지도. 어쨌든 그대를 아끼지 않습니까.”

“……네. 무척이나 아끼세요.”

망가지면 아까울 물건이니. 이본느는 속으로 뒷말을 삼켰다. 침묵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하지만 잔상처럼 남은 이본느의 웃음소리가 그 침묵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항상 감돌던 미묘한 날카로움과 경계심이 흐려졌다.

“내 이야기는 이 정도 했으니 황후 이야기도 궁금한데.”

“저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요. 공작저에서만 살았어서.”

“……아니, 나라고 뭐가 있어서 이야기한 겁니까? 황후가 하나 이야기하면 나도 하나씩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이제 그만 해요.”

딱 잘라 말하는 이본느를 보고 카를로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말도 안 된다는 말투가 꼭 어린 날의 칼과 닮아서 이본느는 자신도 모르게 미약한 웃음을 흘렸다. 카를로이는 그 웃음에 홀려 이야기를 해 달라는 이본느의 요구가 우습다고 생각한 것도 잊고 똑같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모르는 당신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더 있는데.”

“……그런 건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다른 것도 있습니다.”

“뭔데요?”

“그건…….”

무심코 말을 잇던 카를로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말릴 뻔했다.

“그대가 먼저 이야기해야 나도 할 겁니다.”

“폐하의 이야기가 재밌으면 저도 할게요.”

실없는 실랑이가 이어졌다. 카를로이는 졌다는 듯 다시 자신의 이야기부터 하기 시작했다.

이본느의 무표정이 살짝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카를로이는 어릴 적에 가물에 콩 나듯 칭찬을 받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로열 체임버의 문밖에서는 호기심 어린, 간 큰 시종들 몇몇이 문에다 귀를 바싹 대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들릴 듯 말 듯 하지만 분명 말소리가 간간이 나고 있었다. 그 말소리는 새벽 해가 뜰 때까지도 내내 이어지다 이윽고 잠잠해졌다.

창백한 푸른빛이 침실로 쏟아졌다. 아침이 오기 직전의 서늘함을 느낀 카를로이가 문득 잠에서 깨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침대에 기댄 채로 그대로 잠이 들었나.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자는 이본느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빛이 여린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숨 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자는 황후를 쳐다보고 있자 천천히 정신이 들어왔다. 정신을 차린 것과 동시에 어깨가 뻐근해져 왔다. 조막만 한 머리가 무거워서는 아니었다. 또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이본느의 꿈을 꿀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미친놈.

카를로이는 스스로에게 욕을 했다. 어제 대체 무엇에 홀렸지? 뭐에 미쳐서 서로답지 않게 담소 따위를 나누었는지. 델루아의 초대 조상 크루아는 마법을 할 줄 알았다더니, 그 후손들에게도 마법이 흐르나. 아니면 역시 이 빌어먹을 체임버가 문제인가?

이본느와 있을 때면 죽어도 이해가 안 되는 짓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속눈썹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상념뿐만 아니라 시간마저 뺏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한참 동안 그 하얀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단 사실을 카를로이는 또 뒤늦게 깨달았다. 불편한 한숨을 쉬고 카를로이는 천천히 어깨를 빼냈다.

“으음.”

이본느에게서 작디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괜히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는 이본느가 깨지 않게 천천히 그녀를 침대에 바로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불을 덮어 주다 말고 카를로이는 잠에 푹 빠진 얼굴을 또 바라보았다.

닮지 않았다. 전혀 닮지 않았다. 정말이지 단 한 구석도. 그러니 망할 놈의 꿈에 그만 나왔으면. 열 번쯤 스스로에게 되뇌고 나서야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현실 같지 않은 침실을 빠져나왔다.

집무실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수마에 빠졌다 깨어난 사람 같은 기분이었다.

햇빛이 들어오고 있는 책상의 의자에 기대앉으며 그는 전날 밤을 떠올렸다. 마지못해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던 이본느를. 이본느의 이야기에선 어딘지 모를 어색함이 느껴졌다.

공작의 어여쁨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그나마 자연스럽게 했지만, 공작 부인의 이야기를 할 때는 남의 이야기를 뺏어 말하는 듯 이상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자체가 어색했다. 뭐라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공작과의 분위기도 그냥 조금…… 어색하고.>

아셀의 말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 추측은 근거도 없는 데다가, 딱히 다른 사실이 존재할 만한 여지도 없었다. 그러다 어떤 추측이 떠오른 것은 클라이드 앙센을 만난 후였다.

사생아. 카를로이는 자신의 황후가 사생아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에 대해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뚜렷한 물증 없이 모호한 심증만 존재할 뿐이었다. 어쩔 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처럼 느껴지다가도, 어쩔 땐 또 그럴듯했다. 처음에는 뒤냐에게 말해 조사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지.”

그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정말 사생아라면, 뒤냐가 당장 그것을 빌미로 황후 자리에서 내쫓겠지. 하지만 카를로이에게는 아직 이본느가 필요했다. 아직 그 쓸모를 다하지 않았다.

이본느의 웃음소리가 그의 다짐을 방해하듯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카를로이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눈을 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 * *

황제와 황후가 밤새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었다는 소문은 조금 부풀려진 상태로 궁을 돌아다녔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황궁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된 후였다.

막상 그 주제의 주인공은 심란한 얼굴이었다. 이본느는 가만히 앉아서 지난밤을 되짚었다. 카를로이와 가까워질수록 길은 뚜렷해지지 않고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카를로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가 제정신으로 자란 것이, 아니 애초에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 생각이 이본느의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는지 카를로이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크로이센이 자랑할 만한 마법은 식물 마법밖에 없고, 평범하기 그지없던 황족 크로이탄은 그 분야에서만큼은 탁월했지요.>

카를로이를 죽이지 못해 아쉬워하던 공작이 그제야 이해됐다.

“폐하, 델루아 공작이 들었습니다.”

악마에 대해서 말하면 꼭 그 악마가 나타난다더니. 이본느가 옛 경구를 중얼거리며 굳은 얼굴을 풀려고 노력했다.

오늘 있다고 했던 귀족원 회의가 끝나고 바로 온 듯했다. 응접실로 들어오는 델루아 공작의 얼굴은 무표정해서 수장 선출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어제 밤을 보냈다지?”

결과를 알려 줄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제 할 말만 하는 공작을 보고 이본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화기애애했다고 하던데, 드디어 관계라도 한 거냐?”

노골적인 질문이 불편해 이본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안 했나 보군. 이참에 임신이라도 하면 좋은데 말이다. 황족 핏줄 하나쯤 내 후손의 배를 빌려 태어나면 참 좋은데.”

그 후손은 무슨 죄란 말인가? 이본느가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황제의 마음을 얻었다면 좋았을 것을.”

공작의 말투는 시큰둥했다.

“기회가 된다면 하거라. 네 말대로 환심을 사는 일이 착착 진행 중이라면 금방 하겠지.”

무슨 물건을 주문하듯 말을 한 공작이 비단으로 포장된 짐짝을 이본느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부부 관계와 임신에 좋다는 묘약이라고 하더라. 언제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꾸준히 먹어야 할 게다. 네가 상상도 못 할 값을 치르고 얻었으니 한 방울도 낭비하지 말아라.”

살다 살다 공작에게 이런 약을 받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대체 무슨 준비를 하길래 이런 약까지 친히 가져왔는지 궁금해졌다.

공작이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크로이탄 피가 섞인 아기도 필요가 없어질 텐데. 황제가 될 준비를 마친 건지.

“제가 마셔야 하는 건가요.”

공작의 눈이 번뜩였다.

“아니. 남자가 마셔야 하는 거다.”

온몸에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이본느는 내색하지 않으며 공작의 시선을 마주했다.

“……임신에 좋은 건데,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마셔야 하는 거라고요.”

“네가 뭘 알겠냐. 원래 그런 건 둘 다 각별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차에 타서 먹으면 된다.”

노력이 필요한 건 둘 다라면서 왜 카를로이만 먹인단 말인가?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갑자기 임신 운운하는 것도, 이런 이상한 약도.

태연하게 대답하는 공작의 얼굴에서는 무엇도 읽어 내기가 힘들었다.

“독이라고 생각하는 게야? 그리 의심되면 네가 먹어 보든가. 지금 여기서 그걸 털어 마셔도 죽진 않을 거다. 아니면 줘 보거라, 내가 마셔 볼 테니.”

“……네?”

공작은 책상에 올려져 있는 약의 포장을 풀고 회색 약병을 기울여 옆에 놓인 찻잔에 따랐다. 무색무취의 투명한 액체가 찻잔에 담겼다. 그 위로 공작이 찻병을 들고 차를 따랐다. 색이 섞이며 연해졌다. 공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 번에 찻잔을 비우곤 다시 내려놓았다.

“독이 아니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란 소리다. 황제랑 만나는 날이 잦아질 것 같던데 틈틈이 먹여라. 그놈은 너에게서 후사를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쓸 테니 황제가 알지 못하게 하고.”

사무적으로 말을 늘어놓던 공작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진짜 독이래도 네가 무엇을 어쩔 것이냐? 침실에서 황제를 칼로 찔러 죽이라 해도 넌 내 말을 따라야 하는데.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고 한 게 얼마 전이다.”

이본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꼴에 직접 피를 묻히긴 싫으냐? 걱정 말아라. 그런 방식으로 얻어지는 건 없으니. 그놈이 네 손에 쉽게 죽어 줄 리도 만무하고.”

공작이 말을 다 마쳤는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본느는 떨리는 손으로 공작이 건네준 약을 붙들고 있었다.

“만날 때마다 먹이라고 했다. 미약 효과도 어느 정도는 있다니까 계속 마시다 보면 그놈도 너에게 동하는 때가 오겠지.”

경고처럼 마지막 말을 건네곤 공작은 홀가분한 얼굴로 응접실을 떠났다. 이본느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손을 얹고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몸에 좋은 약이 저렇게 무색무취일 리는 없다. 이본느는 곱게 자란 귀족 영애가 아니었으니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내야만 저런, 아무런 특징도 없는 약이 나올 수 있다. 마법 같은 것으로나 가능한…….

하지만 직접 마시는 것을 보니 또 독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본느는 서랍에서 예전에 카를로이가 준 은 막대 하나를 꺼내어 공작이 마셨던 찻잔에 넣어 보았다. 색은 그대로였다.

“공작님이 아무것도 안 던지셨어요?”

황급히 응접실로 들어온 메리앤이 주위를 둘러보며 하는 소리에 이본느가 고개를 들었다.

“왜?”

“간발의 차로 뒤냐 공작이 귀족원장이 되었대요. 당연히 여기서 화풀이를 하고 가실 거라 생각했죠.”

걱정이 담긴 순박한 얼굴로 메리앤이 답했다. 뒤냐가 귀족원장까지 되었다면 갈팡질팡하다 그쪽으로 넘어갈 사람들이 더 많아질 텐데. 분명 델루아에겐 낭패였다.

“……전혀. 딱히 화나 보이진 않았는데.”

“의외네요. 그렇게 분노가 많으신 분이. 귀족원에서는 체면도 잊고 아주 난동을 피우셨다길래 걱정했어요.”

델루아 공작이 이본느 앞에서 화를 내지 않았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결과를 예상했고, 그 결과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무슨 대비를 한 걸까.

이본느는 망연히 약병을 바라봤다. 책상 위의 회색 약병은 묘비처럼 불길하게 우뚝 서 있었다.

* * *

뒤냐가 귀족원장이 된 것은 가히 천재지변과도 같은 일이었으나, 그 파장은 놀랍도록 잔잔했다.

물론 델루아가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최선을 다해 딴지를 걸었고, 그의 수족들도 최선을 다해 반기를 들었다.

귀족들은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편을 가늠했다. 평소와 너무나도 같아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정세가 아니라 카를로이와 이본느의 관계였다. 묘하게 누그러진 상태의 카를로이는 로열 체임버에서의 밤 이후로 벌써 세 번이나 이본느를 찾았다.

마지못한 얼굴로 차만 홀짝이고 가던 예전과는 다르게 그는 황궁 여기저기로 이본느를 불렀다. 심지어 한 번은 예전엔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던 실내 정원 엔투라룸이었다.

대화는 눈에 띄게 다정해지지도 않았지만, 예전처럼 터무니없이 날카롭지도 않았다. 그것이 이본느를 더 미치게 했다.

델루아 영지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종잡을 수 없는 카를로이의 태도, 그리고 그 태도를 따라가는 자신의 마음이 괴로웠다. 다정했다가 또 어느 한순간은 싸늘했다가. 진심인 듯 보였다가 또 어느 순간엔 거짓말 같고.

그리고 그 세 번 중 단 한 번도 이본느는 약병을 열지 못했다. 앙센 백작의 여동생인, 시녀 레이디 앙센은 델루아 공작과 백작에게 무슨 명을 받았는지 약병을 자신이 담당해야 한다며 달라고 말했지만, 이본느는 세 번의 만남 모두 주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네 번째 만남인 오늘은 카를로이가 본관의 롱 갤러리에서 황실 그림들을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이본느는 황후 자리에 1년 넘게 있던 것치고는 정말 궁전을 잘 모르고 있었다.

“선선대 황제, 카를로스 크로이탄입니다.”

말로만 듣던 카를로이의 조부였다. 머리색이 다른 것 빼고는 카를로이를 그려 놓은 것처럼 그와 닮은 남자가 오만한 얼굴로 그림 속에 서 있었다. 가슴 정중앙에 달린 브로치가 눈에 띄었다.

“……크로이탄의 눈이라고 불립니다.”

이본느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카를로이가 옆에서 말을 붙였다.

“저 브로치에 특별한 것이라도 있나요?”

“다섯 명의 지도자가 번갈아 가면서 다스리던 나라가 최초의 왕을 뽑을 때 만들어진 겁니다. 크로이탄을 제외한 나머지 네 지도자가 자신들의 마법을 조금씩 담아서 바쳤지요.”

“마법이 담겼다고요?”

“……이제는 크로이탄의 직계와 알렉시스 뒤냐만 아는 사실입니다. 그걸 잃어버릴 때의 나는 어려서 모르고 있었지만.”

이본느가 카를로이를 돌아봤다. 카를로이는 눈을 피하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대도 크로이탄이니까.”

혼인 첫날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부정하던 카를로이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이본느는 대화를 나누던 그날 밤 이후 카를로이의 말 중 거짓과 참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무슨 마법인데요?”

“크로이탄이 몸에 지니고 있을 때는 보호 마법이 작동됩니다. 지금에서야 그 힘이 너무 약해져서 충격을 약하게 만들어 주는 것 정도밖엔 못 한다고 하지만.”

아, 그래서. 이본느는 어린 날 무뢰배들에게 그렇게 얻어맞고도 생각보다 상처가 심하지 않았던 카를로이를 생각하곤 혼자 납득했다.

그렇게 귀중한 걸 처음 만난 여자아이에게 줬다니. 칼은 정말로 가진 것 모두를 준 것이었다. 어린 날의 칼이 보여 준 호의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이본느는 더 괴로워졌다.

“물론 보호가 그 브로치에 걸려 있는 주요 마법이 아니기 때문에 약한 것도 있습니다.”

“그럼……?”

“저 브로치에 걸려 있는 건 기록 마법입니다. 크로이탄의 몸에서 떨어졌을 때 발동되는. 눈이라고 불리는 이유지요.”

“기록 마법이라고요?”

“떨어져 있을 때 자신의 주위에 있는 것들을 기억했다 재생하는 기록 마법입니다.”

기록이라는 말에 이본느가 긴장감에 숨을 멈췄다.

“베르니의 공주가 내 조부에게서 그것을 훔쳐 갔을 때 그걸 되찾아와 라르투아와의 전쟁을 멈출 수 있었지요. 다 베르니의 이간질이라는 걸 그 브로치가 증명했으니까 말입니다.”

카를로이는 기다렸다는 듯 무심하게 설명을 했다. 아예 작정하고 이곳에 데려온 사람처럼.

이본느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치맛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얼마나 많은 것을 기록하는데요?”

“그것은 잘 모릅니다. 그게 크로이탄과 오랫동안 떨어진 적이 잘 없었어서.”

카를로이가 고개를 돌려 이본느를 바라봤다.

“저 브로치, 본 적이 있지 않습니까.”

“……없다고 하면 믿으실 건가요.”

이본느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으로 카를로이는 대답을 대신했다. 이본느는 카를로이가 바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브로치를 자신에게로 가져다주는 걸 원하는 게 분명했다. 저것이 델루아 공작의 비리를 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있다면요?”

“그대 아버지는 살려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을 인정해 그대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기다렸다는 듯 조건을 읊는 태도는 짐짓 다정한 말투를 제외하면 냉정했다. 긴장 어린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본느의 손에 카를로이의 차가운 손이 닿았다.

“이본느.”

또 이런 식으로, 이럴 때만 그는 이름을 부른다. 카를로이는 다정함과 잔인함을 한 끗 차이로 오갔다. 그 한 끗은 사람을 미치게 하기엔 충분한 차이였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래도 아버지라 그럴 순 없다는 겁니까.”

설마. 전혀 아니었다. 델루아 공작이야 사지가 찢기든 단두대에 목이 베여 나가든 알 바가 아니었다. 죽여줄 수만 있다면 고마운 일이지.

심지어 이본느는 공작을 직접 죽일 기회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그가 자신의 세상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가 없어 이본느는 입을 다물고 공연히 그림만 쳐다봤다.

“잘 생각해 봐요. 공작을 살려 달라는 것 빼고는 그 무슨 청이든 다 들어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요지부동인 이본느를 보고 카를로이가 한숨을 쉬었다. 좀 넘어왔다 싶었는데, 역시 아버지를 배신하기에는 아직 한참 먼 듯했다. 공작의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야 할는지.

여기서 더 독촉하다가는 반감만 일 듯해 카를로이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볼일이 다 끝나자 더는 롱갤러리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카를로이가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이건 뭔가요?”

심상치 않은 이본느의 목소리에 카를로이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를로스의 그림 옆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심지어 완성본도 아닌.

“크로이센과 라르투아를 이간질한 베르니의 공주입니다. 내 조부는 저 범상치 않은 공주에게 미쳐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을 죄다 믿고 나라를 파국 직전까지 몰고 갔지요.”

사절단으로 왔던 베르니의 공주의 모습을 기억한 한 화가가 그리다 만 것으로, 카를로스의 실수를 기억하라는 의도로 걸어 둔 그림이었다. 미완성의 그림으로도 공주는 마력적인 미색을 내뿜고 있었다. 물어볼 만도 했다.

“……목걸이를, 유난히 크게 그렸네요. 어울리지도 않는데.”

이본느는 공주의 목에 걸려 있는 보라색의 큼지막한 목걸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것치고는 참으로 조잡하게 생긴 목걸이기는 했다.

“베르니 왕실의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베르니 왕족 마법사들이 대륙에서 보기 힘든 세밀한 고위 마법까지 가능한 이유가 저 목걸이 때문일 거라고 조부가 죽기 전에 말했다더군요.”

“마법 목걸이요?”

“뭐, 광증 걸린 노인의 지레짐작이라 아무도 그 말을 믿는 것 같진 않지만.”

델루아 공작을 죽이겠다며 칼을 들고 날뛰던 카를로스는 귀족들에 의해 별궁에 유폐되다시피 하자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아 갔다.

열에 들떠 아들 부부를 두고 이것저것 많이 말했지만, 광증이 있다고 취급받는, 죽어 가는 황제의 말엔 아무도 관심을 두진 않았다.

“근데 이건 왜?”

“미모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흉해서요.”

이본느가 아무렇지 않게 답하며 몸을 돌렸다. 뭘 가져다 바쳐도 심드렁하기에 장신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 미추 구분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카를로이는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앞서서 롱 갤러리를 나왔다.

이본느는 카를로이를 따라 걸으며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죽이려 노력했다. 분명히 그 베르니 마법사가 걸고 있던 목걸이였다. 다 보진 못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생각에 빠져 걷던 이본느는 앞의 무엇과 부딪히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우뚝 서서 뒤를 돌아본 카를로이 탓에 그의 가슴팍에 부딪힌 것이었다. 어느새 황후궁에 도착해 있었다.

“……어차피 나나 공작이나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겁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면 공작의 손에 죽을 거라는 말은 꼭 협박처럼 들렸다. 날 죽게 놔둘 거야, 라는 듯한 물음에 이본느는 입술만 깨물었다.

“……독촉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대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카를로이가 부드러이 말하고는 이본느의 겉옷을 여며 주었다. 그는 제 행동에 기시감을 느끼곤 다시 황급히 손을 뗐다. 작정하고 한 행동인데 괜스레 동굴에서의 옛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이본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카를로이는 자리를 떠났다. 카를로이가 떠나고 나서도 이본느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서있던 이본느는 메리앤의 독촉을 받고서야 황후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이본느는 멍하니 무너지듯이 침대 위에 앉았다. 브로치와 목걸이가 어지럽게 머리를 돌아다녔다. 공작을 공격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들. 그것들이 있으면 이건 무조건 카를로이가 이기는 싸움이다.

승산만 있다면야 공작보다는 카를로이가 이기는 것이 이본느에겐 더 안심이었다. 아니면 그냥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 걸까. 카를로이가 대체 무어라고 그의 안위를 무시할 수가 없는지. 눈 딱 감고 죽여 버리면…….

아니야, 이본느는 고개를 저었다. 카를로이에 대한 미련한 감정은 제쳐 두더라도 공작은 모를 사람이다. 공작을 이기게 하는 확실한 건 뭘까.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니 분명 무언가 준비하고 있을 텐데.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이본느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침대 맡에 놓인 공작의 약병을 보자 신경까지 날카로워졌다.

또다시 외줄 위에 올랐다. 까딱 헛디디면 죽을 줄에. 그 줄에서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자신이 무서워져서 이본느는 도리질을 치며 눈을 감았다.

* * *

공작의 서찰이 도착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웬일로 공작은 수도에 오지 않고 영지에만 박혀 있었다. 편지는 두 통이었다. 처음 연 편지는 짧았다.

<넌 이미 세 번 놓쳤다. 또 놓친다면 각오해야 할 거다.>

몇 없는 단어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했다. 이본느는 답답한 숨을 삼키며 편지를 불에 태웠다. 두 번째 편지지를 열자 말린 꽃잎들이 떨어져 향을 풍겼다. 서툰 글씨체로 ‘사랑하는 루에게’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었다.

이본느가 놀라서 편지의 앞뒤를 다시 살펴보았다. 드니스가 쓸 줄 아는 단어라고는 자신의 이름, 루의 이름, 그리고 ‘사랑하다’라는 단어뿐이었다.

첫 문장에 서툰 글씨로 요새 글을 배우고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 문장부터는 글씨체가 달랐다. 제인을 시켜서 편지를 쓰는 거라며 드니스는 말하고 있었다.

<……너와 같이 살날에 대비하는 중이야. 그래도 엄마가 돼서 글 정돈 알아야 하지 않겠어? 생각보다 많이 배웠는데 제인을 시키는 이유는 아직 손목이 좋지 않아서야.

네가 사생아라는 걸 들키면 결혼 생활에 좋을 것이 없다면서 편지 하나를 못 쓰게 하시더니, 웬일로 공작님이 허락하셨어. 다행이지, 요새 몸이 좋아졌는데 이 소식을 너에게 전할 수 있게 되어서.

공작님께서 유해지시니 정말로 네가 말한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요새는 다시 정원 산책도 시작했어.>

편지를 들고 있는 이본느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허락한 편지는 드니스를 기억하라는 공작의 경고나 다름없었다. 드니스의 편지가 희망에 찬 만큼, 딱 그만큼 이본느의 숨통을 조여 왔다. 바들거리는 손에서 편지가 힘없이 구겨졌다.

루와 함께 살날을 기다린다는 희망찬 끝맺음은 공작에겐 건방지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무서워서 온몸이 떨렸다. 이제는 정말로 공작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임신에 좋은 약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협박하진 않겠지. 이본느의 예상대로 그 약은 베르니의 마법사가 만들어 낸 독일 것이었다. 공작이 한 번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마신 걸 보면 일정량이 쌓여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빠른 독살이 취향이던 공작이 속도를 포기하고 크로이탄을 확실히 죽일 수 있는 독을 얻어 온 걸까.

“하.”

무서워서 눈물이 나왔다. 공작은 이본느를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니 독이라는 걸 이본느에게도 숨기는 거겠지. 그런 것은 전혀 숨기지 않던 인간이었는데. 이본느는 스스로가 멍청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뻔한 일이었다. 공작은 체제 안에서의 최고 권력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크로이탄도 아닌 주제에 크로이센이라는 나라 아래에서 그대로 권력을 가지고 오고 싶어 하는 사람. 새 나라를 세울 생각도 없는 사람이 원하는 자리에 오른다 한들 사생아는 여전히 그의 흠이겠지.

공작에게는 드니스와 이본느를 살려 둘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죽일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그의 명을 행하고 나서 살해된 수족들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숨쉬기가 힘들어진 이본느가 가슴을 세게 쳤다. 무슨 자신감으로 카를로이와 공작 사이에서 줄을 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공작에게서 등을 돌리기엔 카를로이에겐 무엇 하나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공작을 믿기엔 후환이 두렵고. 카를로이를 죽이라는 명 하나 그대로 행할 수가 없는 주제에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멍청한 년. 독을 들이켰을 때랑 달라진 게 뭐야. 네가 한 게 뭐야.

이본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숨죽여 울며 이본느는 드니스의 편지에 얼굴을 묻었다. 검은 잉크가 번지기 시작했다. 드니스가 말렸을 꽃잎 향이 코를 시큰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다음번에 카를로이를 보게 되면 자신의 손으로 독일지도 모르는 약을 먹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 * *

황제의 방문을 황후가 두 번 거절했다. 찾아가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문을 굳게 닫고 열지 않았다.

처음 두 번은 카를로이도 잠자코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그는 ‘다정한 황제’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므로.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불안해졌다. 예전에 온 유리를 다 깨 자신을 상처 입히던 이본느의 모습이 그를 괴롭혔다.

집무실에서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원을 그려 가며 걷는 카를로이를 아셀이 흥미롭게 관찰했다. 이본느가 사생아일지도 모르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뒤냐가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세 번이나 했다―몰래 조사해 오라는 명을 내리기에, 황후를 버린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고작 두 번 만남을 거절당했다고 저러고 있다니.

“황후를 걱정해요?”

카를로이가 방어적이면서도 불필요하게 거친 말투로 대답했다.

“델루아에게 써먹을 무언가가 없어지는 걸 걱정하는 거지.”

“이제 그 애 생각은 안 나나 봐요.”

정작 아셀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카를로이는 우뚝 멈춰 서서 아셀을 쳐다봤다. 누가 칼로 찌른 듯한 얼굴이었다.

“그냥 한 말인데…….”

아셀의 말을 듣고서야 카를로이는 아주 오랜만에 루의 생각을 했다. 하루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마지막으로 루를 떠올렸던 게 이본느의 겉옷을 여며 주었을 때였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결론이 나지 않으니 자신이 이렇게 미쳐 가는 것이다. 이본느가 넘어올 듯 넘어오지 않으니 그 생각에 잡혀 있는 거지. 담판을 지어야 했다.

“밖에 비 오는데.”

나가려는 카를로이를 보고 아셀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비까지 온다면 더 문제였다. 카를로이는 괜히 날씨에게 욕을 퍼부었다. 실상은 비를 보고도 루보다 이본느를 떠올리는 자신에게 욕을 하고 싶었지만.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 무색하게도 이본느의 침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고르텐의 호통에 시녀들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카를로이가 예상한 장면이 딱 그대로 펼쳐졌다. 어두컴컴한 침실, 침실 안 가득 풍기는 술 냄새, 탁상에 올려져 있는 수면제, 산산조각이 난 채로 이리저리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유리 조각들.

다만 저번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이본느가 침실에 없었다. 시녀장 메리앤 또한 보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하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카를로이가 천천히 사용인들을 둘러보았다.

“어디 있지?”

아무런 억양도 없는 낮은 목소리로 카를로이가 물었다. 그가 풍기는 고요한 노기가 무서워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카를로이는 다시 한번 더 질문을 반복했다.

“……모, 모릅니다.”

예상보다 더 기막힌 대답이었다. 카를로이가 폭발 직전인 것을 눈치챘는지 시종 하나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술에 취하셔서 정원 쪽으로 뛰쳐나가셨습니다. 시녀장님과 시녀들이 따라나섰습니다.”

“얼마나 됐지?”

“30분 정도…… 지났습니다, 폐하.”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사용인들이 카를로이의 눈치를 보았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황후를 그대로 내보낸 것으로도 이미 큰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를로이는 말 한마디 없이 정원 쪽으로 향했다. 사용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난장판이 된 침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카를로이가 침실을 나와 어찌나 빨리 걷는지 고르텐은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폐하! 폐하!”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밖으로 나가는 카를로이의 뒤에서 고르텐이 숨이 넘어갈 듯 소리쳤다.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내리는 비의 양이 적지 않았다. 빗물이 카를로이의 옷을 무참히 적시는 것을 보며 고르텐이 울상을 지었다.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자 조각상 하나에 붙어 있는 두 명의 시녀가 보였다. 거대한 조각상 밑에서 큰 빗줄기만 간신히 피하고 있던 시녀들은 카를로이를 보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어디 있나.”

위압적인 분위기에 레이디 루엔이 고개를 숙인 채로, 겁에 질려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두 손을 천천히 들었다.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인영 두 개가 보였다.

고르텐이 간신히 조각상까지 왔을 때는 이미 카를로이가 또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자네들은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시녀장님이 가까이 오지 말라고 명령하셨단 말이에요!”

“도대체 황후 폐하의 문제가 무엇이냐? 술독에라도 빠지신 거냔 말이다. 황후라는 분이 쯧.”

“저희도 잘 몰라요오. 갑자기 궁에서는 숨을 못 쉬겠다고 하시면서 미친 듯이 뛰쳐나가시는데…….”

시종장의 노성에 시녀 둘이 억울한 듯 소리쳤다. 시종장은 시녀들 옆에서 혀를 차며 발을 굴렀다. 기세를 보아하니 따라갔다가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터였다.

카를로이는 내리는 비 사이로 시녀장 메리앤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들키면 큰일 난다고요, 폐하!”

커다란 포플러 나무 아래서 메리앤이 소리치고 있었다.

메리앤의 등 너머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갔을 때 카를로이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너무나 작은 사람 하나가 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비에 쓸려 그대로 흘러가 버릴 것처럼.

메리앤이 빗속에서도 용케 카를로이의 기색을 느꼈는지 깜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물러가 있지.”

카를로이의 명령에 메리앤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물에 질척거리는 발을 뗐다.

잿빛 하늘이 흩뿌리는 빗물이 내는 추락 소리는 흡사 장송곡처럼 들렸다. 귀를 틀어막고 싶은 마음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이 비를 맞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없어 눈도 찔러 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카를로이는 이본느를 볼 때마다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이본느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이본느의 기행에 분노가 치밀었다.

얇은 네글리제는 비를 맞고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어디서 구르기라도 한 건지 찢어진 곳도 있었다. 발이며 종아리며 긁힌 자국이 눈에 선했다.

이본느의 어깨를 잡고 왜 이러냐며 다그치는 대신 그는 간신히 이성을 잡고 어깨에 손만 얹었다. 이본느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하지만 이본느의 넋 빠진 얼굴을 뒤덮은 물기를 보는 순간 가늘게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이 끊겼다.

“왜.”

악문 잇새로 말이 억눌리듯 튀어나왔다. 차라리 빗물과 눈물을 구분하지 못했더라면 나았을 텐데. 큰 눈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그의 신경을 건드려 댔다. 제어되지 않는 감정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대체 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내는 손길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본 이본느의 얼굴이 천천히 무너졌다. 이제는 꿈조차 지배하는 그를 피해 여기로 도망쳤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를 보면 공작의 말을 들어야 했다. 다음번은 공작이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안 돼! 저리 가. 당신을 보면 안 돼.”

이본느가 날카롭게 말했다. 망가진 얼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너무 약해서 바로 앞에 붙어 있지 않았다면 들리지도 않았을 듯했다.

“무슨……!”

“안 돼. 나한테 이러지 마.”

미친 듯이 중얼거리며 몸을 떠는 이본느의 두 어깨를 카를로이가 붙잡았다. 이본느가 신경질적으로 카를로이의 손을 쳐 냈다. 그러나 그 손길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손은커녕 먼지 하나 쳐 내지 못할 손짓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어깨를 흔드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몸에 조금이라도 힘을 줬다가는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불안감에 그는 제 입술만 계속 괴롭혔다. 비릿함이 느껴졌다.

“안 돼……. 정말로 안 돼. 제발 차라리 욕을 해.”

이본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빗소리보다 그 흐느낌 소리가 카를로의 귀를 더 날카롭게 찔렀다. 이본느가 이러고 있는 이유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 언저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차라리 예전처럼 무시해 줘. 잘해 주는 척도 하지 말고, 잘해 주지도 마.”

흐느끼며 중얼거리던 이본느가 카를로이의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조차도 아무런 힘이 없었다. 맥없는 주먹을 받아 내며 카를로이는 분노도 잊고 이본느를 바라봤다.

“이본느.”

이름을 부르자 이본느는 비명을 질렀다.

“제발 그만! 이름도 부르지 말고, 쳐다보지도 말고.”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이본느가 섧게 울었다. 힘없이 내리치던 주먹조차 더 움직이지 않고 떨어졌다.

카를로이가 이본느의 어깨에 얹은 손을 움직여 등을 살짝 끌어안자 이본느는 망가진 인형처럼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

카를로이는 온몸을 지배하는 분노와 날 선 신경이 괴로웠다. 빗소리에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끊길 듯 이어지는 울음소리, 눈에 가득 들어오는 지나치게 작고 힘없는 몸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가 더 나았어. 당신이 날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때가……. 천대는 견딜 수 있었는데. 날 경멸하는 그 눈빛이 차라리 좋았어.”

이본느가 울면서 중얼거렸다. 계속 우는 통에 카를로이에게 안겨 있는 어깨가 떨렸다. 카를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본느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때가 더 나을 수가 있어.”

카를로이의 억눌린 대꾸에 이본느가 고개를 들었다. 카를로이가 습관처럼 이본느의 눈물을 닦았다. 아무리 닦고 닦아도 그 눈에서는 눈물이 끊이지가 않았다. 벌 받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에 카를로이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이본느가 그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차디찬 손에 그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런 표정도 하지 마. 다 하지 마 ! 당신이 자꾸 이러니까, 내가, 내가.”

당신이 진심이라고 믿게 되잖아. 내가 루라고 말하고 싶어지잖아.

이본느는 말을 하다 말고 답답한지 제 가슴을 쳤다. 카를로이를 칠 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작은 주먹이었는데, 딱 그만큼 작은 가슴을 치는 것은 이상하게 더 힘이 실린 것처럼 보였다. 알 수 없는 행동에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뭘 하면.”

카를로이가 이본느의 작은 손을 말아 쥐며 이를 악물었다.

“대체 뭘 하면 이런 짓을 그만둘 겁니까.”

“……예전처럼 없는 사람 취급해 줘요. 차라리 가슴을 후벼 파는 말만 하세요. 눈길도 주지 말고 말도 걸지 말아 주세요.”

“그건 안 돼. 절대로.”

끝까지 잔인한 카를로이의 대답에 이본느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에서도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어쩌면 그래,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카를로이는 무자비하게 자신을 침범했다. 나쁜 새끼. 개새끼.

제멋대로 마음을 헤집었다 내키는 대로 나가 버리는 카를로이가 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를 미워할 감정이 자신한테 남았다는 게 한심했다.

술과 비에 절어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이본느는 외줄 타기의 끝을 직감했다. 방향을 정해 한쪽으로 몸을 틀 때였다. 그러다 죽을지언정,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감은 눈을 서툴게 닦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본느가 눈을 뜨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보였다. 또 저런 얼굴. 마치 어린 날의 루를 보던 것과 똑같은 얼굴.

“……그럼 한 가지만 대답해 줘요.”

이본느가 한 손을 카를로이의 얼굴에 올렸다. 언제부턴가 계속 만져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다. 카를로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본느를 보고 있어서 꼭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든.”

“거짓말은 안 돼.”

그렇게 말하는 이본느의 얼굴엔 다시 절망이 어려서, 꼭 다시 무너질 것만 같았다. 무너져서는 안 되는데. 카를로이는 필사적인 기분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당신이 지금까지 한 거짓말은 상관없어. 앞으로도 상관없어. 하지만 이건 안 돼요. 약속해요.”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몰랐다. 절망만 있던 곳에서는 추락도 무섭지 않았지만, 기대가 조금이라도 있는 곳은 아찔할 정도로 높았다. 그 기대가 거짓이 된다면 이본느에게 남은 것은 추락과 같은 죽음뿐이었다.

약속해. 카를로이가 속삭였다.

“나에게서 누군가가 보인다는 그 말, 진심이었어요?”

공작을 믿을 수 없듯 카를로이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공작과는 다르게 단 하나, 믿을 것이 있었다. 그건 리리안에 대한 카를로이의 마음이었다. 그게 거짓일 수가 없는 마음이라는 건 이본느가 가장 잘 알았다.

카를로이에게서 가장 진실한 것인 그 마음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무언가를 자신에게 느꼈다면, 희망이 있었다. 공작과는 다르게 카를로이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믿을 거란 희망,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줄 거란 희망이.

“……거짓말은 안 돼요. 이건 제발……. 안 돼.”

이본느가 울먹이듯 다시 말했다. 카를로이는 괴로운 얼굴로 이본느를 바라보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이가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서 마치 그가 내 것이 될 수 있단 착각이 들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이본느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정말이에요?”

“……다른 사람인 걸 알겠는데.”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카를로이가 이본느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는 오래전 동굴에서부터 누군가를 이렇게 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제는 없고.

“왜 자꾸 루가…….”

카를로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본느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 순간을 미리 짐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카를로이의 옆에 있다 보면 자신은 또 그에게 무언가를 걸어야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걸.

어릴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뭘 몰랐지만, 지금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남은 생 모두를 걸어야 했다.

하지만 이젠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가만히 서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보다는 죽는 걸 각오하고 차라리 움직이는 게 나을 거라고, 이본느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가슴을 사무치게 만들던 빗소리가 아득해졌다.

<3권에 계속>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 3권

지은이|진서

펴낸곳|루시노블

투고 및 문의 | [email protected]

ⓒ진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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