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황제는 황후를 모르고 싶다 (1)
오랜만에 만난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고르텐은 분위기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예전 둘 사이의 침묵엔 항상 주변을 압도하는 싸늘함이 있었는데 지금의 침묵은 폭발 직전의 고요, 폭풍 전야 같은 느낌이었다. 싸늘함과는 전혀 달랐다.
“폐하.”
카를로이를 멀거니 보던 이본느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을 걸자 카를로이도 입을 열었다. 말 대신 약한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이본느의 목소리를 듣자 그를 2주 내내 시달리게 한 꿈이 불현듯 떠올랐다. 꿈속의 이본느가 카를로이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꿈속에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던 이본느, 그리고…….
갑자기 온몸의 피가 얼굴로 쏠린 것처럼 뜨거워졌다.
“무사히 도착해 다행입니다.”
카를로이는 빠르게 말을 내뱉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버렸다. 얼굴이 너무 화끈거렸던 탓이다. 스스로가 미친놈 같았다. 꿈과 현실 구분도 못 하는 미친놈!
남겨진 황후의 일행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황제가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요새 사이가 좋아졌다는 말이 돌더니 거짓인가 싶었다. 한마디만 하고 사라지는 황제는 정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이본느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대우는 한다 했으니 마중은 나와도 얼굴을 길게 보고 싶진 않겠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아셀이 기다렸다는 듯 황제가 사라진 자리를 뒤쫓아 가는 것을 보니 더 복잡해졌다. 14년간의 흔적을 쫓는 카를로이라니. 정원에서 루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카를로이까지 떠오르고 나니 그만 딱 죽고 싶어졌다.
“폐하, 들어가시죠.”
메리앤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본느는 한숨을 쉬었다. 예전처럼 카를로이를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 *
“알아낸 것은 좀 있나?”
카를로이의 집무실로 따라 들어간 아셀은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보고를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지? 아무것도 없나?”
아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고 사항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어둠의 숲에 들어가 봤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 완전히 폐허예요. 먼지와 재 말고는 있는 게 없어요. 브로치도 없고요.”
예상한 답이지만 괜히 또 카를로이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근래 들어 루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단 사실을 참 여러 번 확인하게 되는 듯했다.
“그리고?”
“황후가…… 이상해요.”
이본느의 이야기에 카를로이의 신경이 곤두섰다.
“어떻게?”
“공작저에 탑이 있는데요.”
“알아. 델루아 타워.”
“거기 공작 부인 유해가 있대요. 근데 그곳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고, 황후는 거의 그곳에만 있었어요.”
“그게 왜?”
심드렁한 카를로이의 말투에 아셀의 얼굴이 되레 구겨졌다.
“시체잖아요! 사람이 왜 시체랑 같이 있고 싶어 해요.”
“생전에 애틋한 사이였나 보지.”
아델라이드가 죽었을 때 그 남편이었던 선대 황제가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본느는 뼛가루를 모신 방에 있기라도 했지, 제 부친은 싸늘한 시체를 껴안고 며칠을 있었지 않았나.
오히려 카를로이는 이본느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생각했다. 모친을 실제로 많이 찾아가고 싶었던 말도 진짜인 것 같다고.
“다른 것은?”
“황후 성격이 너무 이상해요.”
노골적인 비난이었다. 불평불만이 가득한 아셀의 얼굴을 카를로이는 약간의 놀라움과 함께 살폈다. 아셀이 저토록 강렬한 감정을 표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카를로이도 이본느에 대한 첫인상이 좋진 않았지만, 그것은 성격이 ‘이상해’ 보여서는 아니었다.
아셀은 미세하게 높아진 목소리로 어둠의 숲속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아셀이 황후의 말 한마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소상히 보고함에 따라 카를로이의 얼굴도 점점 변했다.
“그러니까, 황후가 널 협박까지 해서 정보를 캐내고, 나중엔 이유도 없이 자기 손을 칼로 찔러 너에게 누명까지 씌웠다고? 그렇다고 또 집요하게 캐물은 건 아니고?”
아셀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이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본느가 할 법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게다가 그 애매한 태도는 뭐지? 딱히 쓸 만한 정보를 가져가지도 않았다. 이미 델루아 공작도 카를로이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일 뿐.
“또?”
“공작저 이상해요. 예전엔 못 느꼈는데, 그 탑에 고위 마법이 엄청나게 걸려 있어요.”
“델루아 공작은 원래 제국 마법사들을 제멋대로 부리곤 했어.”
“모르겠어요. 그 정도 마법이 가능한 마법사가 크로이센에 있나요? 그건…… 마하에서도 쉽지 않은데. 그런 마법사가 있다면 유명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델루아 영지를 조사했을 때만 해도 그 정도의 마법은 걸려 있지 않았는데.”
아셀이 전쟁 노예로 마하를 전전할 때 그는 마하 마법사 밑의 노예로 있었던 적도 있었다. 믿을 만한 소리라는 뜻이었다.
“또 있어요. 공작저랑 황후 분위기는 아주 이상해요.”
“그게 정확히 무슨 소리지?”
“그러니까…….”
아셀은 자기가 아는 단어들을 모조리 떠올리며 한참 애를 썼다.
아셀이 듣기로는 황후는 그 공작의 금지옥엽 외동딸이라 했다. 공작이 사랑해 마지않는. 아셀은 주변에 그런 사랑을 받고 산 사람들이 없어, 그러한 이들이 가지는 분위기는 어떤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셀도 아는 것이 있었다. 응당 받아야 할 사랑을 받고 산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런 분위기는 아닐 것이었다. 자신이나, 카를로이처럼 그런 삭막한 기운을 온몸으로 내뿜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아낌 받는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공작과의 분위기도 그냥 조금…… 어색하고.”
“근거는?”
“느낌.”
앞의 이야기들과는 달리 다분히 주관적인 추측이었다. 아셀의 촉은 짐승과도 같이 예민한 것이라 흘려 넘기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세간의 평가와 정반대되는 추측을 그대로 믿는 것도 무리였다.
“……수고했어, 아셀. 생각 이상으로 많은 걸 가져왔군.”
“아, 그리고 공작을 위해서 그러는 거냐고 물었더니 황후가 그랬어요. 자기는 델루아의 딸이지만은 않다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어요.”
카를로이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언제 올라온다지?”
“이틀 정도 늦게 출발한다고 했어요.”
보고가 끝나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아셀은 훌쩍 집무실을 떠났다. 황궁 요리가 그리웠다.
카를로이는 이본느와 공작의 수상함에 대해서 생각했다. 막연히 떠오르는 추측들이 있었다. 그 추측을 정리하자마자 그는 고르텐을 불렀다.
“뒤냐에게 연통을 넣게. 그리고 브로치, 크로이탄의 눈 있지 않나. 그 가품이 황궁 어디에 있을 거야. 찾아와.”
추측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 *
심란한 날이었다. 공작저에서 돌아온 지 이틀, 이본느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메리앤이 몇 마디 해 봐도 별 소용이 없었다.
카를로이와 공작 사이에서 둘 중 누가 이겨도 해가 되지 않게 줄타기를 해야 할까, 아니면 둘 중 하나를 확실히 골라야 할까. 공작을 선택하기엔 공작을 온전히 믿을 수 없었고, 카를로이를 고르기엔 카를로이가 자신을 믿을지 확신이 없었다.
황비 책봉식 때 독을 들이켤 수 있었던 건, 드니스를 1년 넘게 보지 못해 반쯤 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드니스를 봐 놓고 무모한 선택을 하기도,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도 힘들었다.
“어머, 비가 오네.”
메리앤이 커튼을 정돈하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본느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복잡한데 비까지 내리다니.
과거는 지금 이본느가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중 하나였다. 도움은 되지 않으면서 선택만 어렵게 만드니까.
“괜히 실내에서 그렇게 발 놀리지 마시고, 하던 대로 산책이나 갔다 오세요, 폐하.”
“아니야, 됐어.”
이본느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는 걸 보고 메리앤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진 모르겠는데, 이틀 내내 방 안에서 손톱을 뜯는다고 답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으음.”
“지금 폐하께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환기예요, 환기. 바깥바람을 좀 쐬셔야 한다고요.”
못 이기는 척 이본느는 결국 산책을 나섰다.
비는 적당히 운치 있을 정도로 얇게,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꽃들을 심란한 표정으로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치던 이본느는 정원과 궁을 잇는 통로 입구에 멈춰 섰다. 시녀들이 가리개를 곱게 치워 옆으로 두었다.
이본느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바깥 공기를 마시니 숨 쉬는 게 덜 답답하긴 했으나 비는 오히려 더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어머.”
이본느의 눈길이 대리석 바닥과 깨끗한 잔디밭 사이의 틈에 닿았다. 그 틈을 뚫고 용케 흰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익숙한 모양새의 꽃이었다. 무심코 꽃에 홀려 몸을 숙이는 이본느를 보고 메리앤과 시녀들이 경악해 말렸다.
“잡초 같은데 놔두세요!”
“아.”
시녀들이 말리기도 전에 꽃에 손을 가져다 댄 이본느가 약한 신음을 흘렸다. 대리석 바닥이 깨져 있던 모양이었다. 손가락에 맺힌 피가 하얀 꽃에 붉은 반점을 만들었다. 메리앤이 보는 눈을 잊고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거보세요! 좀 가만 놔두라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으세요!”
메리앤이 덥석 이본느의 손을 부여잡았다. 총애받는 시녀장은 겁이 없는 듯했다.
“……메리앤, 제발 이 정도로 호들갑 떨지 마. 종이에 베이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잖아.”
“한두 번이어야죠! 저번엔 손바닥을 칼에 찔려 오시더니. 그게 아물기도 전에 또!”
이본느가 뭐라고 변명할 새도 없이 메리앤이 몰아붙였다. 메리앤의 눈엔 물기까지 있어서 피곤한 잔소리라고 치부하는 것도 좀 그랬다.
“아무튼 경각심이 없으셔서 이런 상처 하나둘 넘기는 게 다 버릇이 된다고요. 폐하는 일개 공녀가 아니라…….”
이본느는 아주 작게 맺히는 핏방울을 보며 메리앤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오히려 약간 따끔한 게 정신을 차리게 해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신이 패가 되어야 했다. 그러려면 아는 게 있어야 하고.
브로치. 카를로이가 그 브로치를 찾고 있다. 공작 손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 그 브로치를 추적해 자신을 찾아냈으니까.
하지만 공작이라면 진즉 그것을 없애 버렸을 텐데. 아니다. 또 모르는 일이다. 이본느 자신도 예상 가능한 공작의 행동을 카를로이가 모를 리 없고, 공작에게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아셀을 시켜 찾아보게 했을 텐데.
“제 말 안 듣고 계시죠.”
메리앤이 아프게 손을 쥐어 잡는 통에 상념에 잠겨 있던 이본느가 살짝 신음을 흘렸다. 메리앤은 어느새 어디서 났는지 모를 천을 들고 있었다.
공작저에서는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처가 늘 들러붙어 있었는데, 이게 뭐라고! 침 몇 번 바르면 피가 멎을 것을.
이본느가 한숨을 쉬며 손을 빼려는데 갑자기 다른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지?”
카를로이였다. 이곳에서 메리앤과 부산을 떠느라 어느새 정원을 가로질러 온 카를로이를 눈치채지도 못했다.
“아, 그것이…….”
메리앤이 말끝을 흐리는 것을 듣고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천이 칭칭 감아진 손바닥, 그 위로 핏방울 맺힌 손가락이 보였다.
도대체 왜 저렇게 많이 다치는 걸까. 다치고 싶어 죽겠는 걸까.
카를로이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예전이라면 분노라 생각했을 감정은 이제는 이름 붙이기도 어려웠다. 점점 이본느를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왜 이렇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까.”
“네?”
“어느 날은 발, 어느 날은 손, 어느 날은 손가락…….”
카를로이가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메리앤의 손에서 천을 성마르게 잡아챘다. 그러곤 이본느의 손을 잡고 손가락에 천을 둘렀다. 이상하게 낯 뜨거워진 분위기에 시녀들과 시종들이 거리를 두고 잠시 뒤로 물러났다.
“폐하. 제가 하겠…….”
“자기 몸을 왜 이렇게 함부로 하는 건지.”
손가락에 천을 다 감은 카를로이가 마찬가지로 천으로 덮인 이본느의 손바닥을 살짝 누르며 문질렀다. 이본느가 스스로 손바닥에 칼을 찌른 것을 다 아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셀이 제대로 모든 걸 보고한 듯했다.
“정말로 모르겠어. 당신이나…….”
카를로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눈은 이본느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손이 얼굴만큼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어 이본느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카를로이는 놔주지 않았다. 맞닿은 곳이 너무 뜨거웠다. 손이든, 눈이든.
빗소리가 음악처럼 사이를 스며들었다. 카를로이의 눈을 보고 이본느는 숨을 참았다. 숨을 쉬면 그 소리가 자신의 심장 소리처럼 너무 크고 부자연스럽게 들릴까 겁이 났다. 그 눈이 예전처럼 싸늘하지 않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과거를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제 몸에 난 상처도 무시하는 사람은 어딘가 망가진 것인데. 하지만 황후가 그럴 리는 없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황후는 정말……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
속삭이며 건네는 말은 익숙한 말이었다. 어린 날 칼이 리리안 루에게 말해 주었던 것. 하지만 그 태도는 익숙하지 않았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것이 마음이 편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이런 눈으로, 이런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은 하는지.
그때는 궁금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궁금해졌다.
“어떻게 알아요.”
자기 상처를 무시하는 사람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걸 어렸던 너는 어떻게 알았는지. 나조차 몰랐던 사실을 넌 어떻게 알았냐고. 네 상처를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거냐고, 물음이 차올랐다. 자신을 포기할 줄 알고 있었다며 온몸이 묶여 체념하듯 중얼거리던 칼이 떠올랐다.
“폐하는.”
무수히 떠오르는 질문이 마음을 짓눌러 말이 차마 나오지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무심한 목소리로 물을 수 없었다. 대답이 무서웠다. 카를로이마저도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
“……황후궁에 갔더니 산책을 나왔다 해 여기로 왔습니다.”
이본느의 마음을 읽었을 리는 없는데 카를로이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꼭 비가 오는 날 이렇게 산책을 하고 싶습니까.”
카를로이가 비 오는 날을 싫어한다고 푸르투 내에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의 모든 행동은 다 그날에 머물러 있었다. 아직도 과거 어느 비 오는 날에 사는 듯한 남자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 이본느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찰나의 온기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듯 손이 허전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 다음에 오겠습니다.”
언제부터 날을 따졌다고.
안개는 하늘이 아니라 카를로이의 얼굴에 낀 듯했다. 카를로이가 사라지는 것을 이본느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등이 추워 보였다. 14년 전 그 동굴을 떠나던 그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꿈처럼 과거가 이본느를 덮쳐 왔다.
* * *
카를로이의 고집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던 귀족원은 델루아 공작이 수도로 올라오자마자 다시 열렸다.
크로이센의 최고 결정 회의체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황권이 강할 때는 조언 정도만 하는 장식용에 가까운 추밀원이 최고 결정체가 되었다가, 그렇지 않을 때는 다시 귀족원이 부활하곤 했다.
델루아 공작을 비롯한 공작파 귀족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자만심이 흘러넘쳤다. 황후와 황제의 사이가 원만해진 뒤로는 거칠 것이 없고 방해물이 없었다. 잘 날 없다는 바람조차 그들의 편이었으며, 순항하는 배처럼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은 듯했다.
그들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무너진 것은 카를로이가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귀족원장에 대한 법, 공들도 모두 알겠지.”
현재 귀족원장은 델루아 공작이었다. 뜬금없는 말에 귀족들이 멀뚱히 고개만 끄덕였다. 귀족원장에 대한 법이라고 해 봤자 별다른 것이 없었다. 대부분은 관습에 따라 이루어졌다. 참여 귀족들이 뒤냐, 델루아, 앙센, 그리고 로덴 4대 가문의 수장 중 하나를 귀족원장으로 뽑았다.
“귀족원장을 뽑을 시에 4대 가문에서 모두 후보가 올라와야지만 법적으로 효력이 있지.”
황제가 계속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는 통에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10년 전부터 귀족원의 수장을 맡고 있는 델루아 공작은 단 한 번의 투표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귀족원의 장을 맡고 있었다. 10년 동안 뒤냐 공작이 공식적인 사망 확인이 되지 않은 채로 사라져 선거를 거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거야 그렇지요. 하지만 금년도 투표가 불가능하니 귀족원에서는 델루아 공작의 연임을 결정했습니다.”
“오, 이번에는 가능할 거야.”
“예?”
카를로이의 손짓에 시종들이 귀족원 회의가 열리는 관의 문을 열었다. 의아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던 모든 귀족의 얼굴이 이내 경악으로 바뀌었다. 10년간 소문만 무성했던 알렉시스 뒤냐가 멀쩡한 행색으로 서 있었다.
잠시간의 정적 후 충격 어린 수군거림이 회의장을 덮었다. 하얗게 질린 델루아 공작의 얼굴을 카를로이가 천천히 감상했다. 뒤냐가 확실히 이름값을 하기는 했다. 그 델루아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볼 수 있고.
“폐하, 병의 완치가 더뎌 늦었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알렉시스가 예를 갖추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상석, 비어 있던 곳에 자리했다. 원래부터 그리 태어난 양 어울렸다.
“그럼 속히 귀족원장 선출일부터 결정하도록 하지.”
뒤냐와 델루아가 서로를 가만히 노려보는 것을 다른 귀족들이 아연한 얼굴로 바라봤다.
다섯 가문 중 가장 강력했던 뒤냐는 델루아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었다. 그 알렉시스 뒤냐는 또 어떠한가. 스스로도 훌륭한 학자이며 무장이요, 전쟁에서의 무수한 승리를 이끈 인재이자 크로이센의 충신이었으니 델루아가 가지지 못한 중망 또한 있었다.
로덴 후작은 못 믿어도 알렉시스 뒤냐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흑백으로 나누어져 있던 체스 판의 구도가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회의는 20분 만에 끝이 났다. 요양을 하고 왔다는 말과는 다르게 너무나 멀쩡한, 그리고 위압적인 뒤냐 공작의 모습에 혼이 나간 귀족들이 간신히 선출일만 잡고 해산했기 때문이었다.
뒤냐와 델루아의 긴장감 어린 대치를 곁눈질하던 귀족들까지 모두 나가자 회의장에는 당사자 둘만이 남았다.
“알렉시스.”
다가오는 알렉시스를 보고 델루아 공작이 비아냥거리듯 인사를 했다. 알렉시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한스.”
“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직도 남아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참 여전해, 알렉시스. 정말 여전해. 고고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들어오더군. 항상 그랬지. 고결하고 고결한 나의 친우 알렉시스.”
곱게 빗어 넘겨진 알렉시스의 풍성한 머리칼마저 우아하게 살랑거렸다.
“아, 한스. 그 반반한 낯짝이야말로 늙어서도 어쩜 꼭 그대로야. 자네가 극단에서 배우나 했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평화로웠을지. 연기도 수준급인데 말이야.”
“흥. 왜 아직도 살아 있지? 생각보다 동생을 그리 사랑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바로 루푸스해로 따라갈 줄 알았더니, 의리가 없군. 아니면, 뒤냐답게 인정머리가 없는 건가?”
아델라이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도 알렉시스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델루아 공작은 한층 더 비아냥거렸다.
“알렉시스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직접 동생 곁으로 보내 줄 수도 있어. 친구 좋다는 게 뭔가. 그곳에서 아델라이드가 외로워할 텐데 언니인 자네가 가서 내 안부도 전해 주고.”
“나보단 자네가 먼저 갈 테니 직접 전하게.”
태평히 대꾸하던 알렉시스가 델루아 공작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잠시 까딱거렸다.
“아, 안 되겠군. 한스 자네는 지은 죄가 많아 루푸스해로는 가지 못할 테니 아델라이드를 만날 수가 없겠어. 저런, 아델라이드뿐만이 아니지.”
알렉시스가 짐짓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죽은 자네 부인도 만나지 못하겠군. 죽어서도 보지 못할 거라니 자네도 안됐어. 가는 길 외로울 테니 준비 잘하게.”
먼저 도발한 것은 델루아 공작이었으나 먼저 얼굴이 무너진 것도 델루아였다. 알렉시스는 새삼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부인과 예상외로 사이가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리 열렬히 사랑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죽어서도 못 만날 거란 말이 거슬리기는 한가.
“왜 돌아왔지? 중립, 중립 하더니 어이가 없군.”
“자네가 나라를 말아먹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그게 어디 중립인가. 자네 같은 사람이 알 리는 없겠지만, 뒤냐의 중립은 그런 게 아니야. 난 약속을 지키러 왔어.”
“무슨 약…….”
델루아 공작이 말을 하다 말고 피식 웃었다. 알렉시스가 말하는 약속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에.
<그 목을 가지러 올 테니 잘 닦아 놔.>
10년 전 델루아 공작의 수족들을 죽이고 피 칠갑이 된 몰골로 알렉시스는 델루아 공작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알렉시스는 강에 투신하기 직전인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흡사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열을 내는 광인 같았다.
솔직히 델루아 공작은 알렉시스가 진즉 자진했을 거라 믿었다. 알렉시스는 동생 아델라이드가 없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순전히 착각이었다.
“쓸데없이 기름만 반질거리는 걸 보니 잘 닦아 놓긴 했군. 자네 미모도 이제 철이 지나 버렸어. 조금만 더 기다려, 한스.”
예전과 똑같이 정 없게 한마디를 남기고 가는 알렉시스 뒤에서, 델루아 공작은 공연히 탁상을 주먹으로 쳤다. 다 이긴 판에!
“크로이탄 이 새끼……!”
순순히 귀족원을 열어 주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델루아 공작은 카를로이를 생각하며 연신 욕을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 또 뒤통수를 칠 줄이야.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 뒤진 줄 알았더니 어디다 숨겨 놓았던 건지.
한스 델루아가 이토록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에게 있어서 뒤냐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에게는 불리한, 팽팽하고 지긋지긋한 대치 상태.
항상 그래 왔다. 오래전에도 그랬다. 어릴 때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이겨 거슬리더니, 크고 나서는 사사건건 방해를 해서 거슬렸다.
유약했던 선대 황제를 처리할 일만 남았었는데, 다 이긴 싸움이었는데, 선대 황제는 어느 날 아델라이드 뒤냐를 황후로 데려왔다. 크로이센에서 가장 똑똑하기로 유명한 그 아델라이드 뒤냐가 그런 머저리 황제와 결혼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중립을 유지하던 뒤냐가 싸움에 끼어들자 다 이긴 판도 무너졌다.
“이 개 같은 새끼들! 개 같은 크로이탄. 개 같은 뒤냐!”
늙은 공작이 분노로 중얼거렸다.
저번처럼 또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두어야 했다. 실패할 수 없는 확실한 어떤 방법.
* * *
정무관을 나온 알렉시스가 바로 카를로이를 찾아갔다. 귀족원이 열리는 시간에 맞추어 빠듯하게 수도에 도착하느라 그 전에 카를로이와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카를로이는 알렉시스가 들어올 때까지도 제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보나 마나 그 여자애겠지.
“폐하.”
카를로이가 눈을 들어 알렉시스를 보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카를로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이제는 알 바가 아니다. 종종 넋이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지금이 더 황제 같았다. 짙고 건조한 체념이 그의 비정상적인 감정을 소거한 듯했다.
그리고 그 여자애는 이미 죽었다니까 더는 일을 망칠 수 없을 것이었다. 이제 그 어떤 문제도 없다.
“뒤냐.”
“보내신 전갈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러 왔습니다. 델루아와 베르니의 내통이 의심된다는 것 말입니다.”
“뭐…….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델루아는 온전한 크로이센을 가지고 싶어 안달 난 인간입니다. 그러니 새 나라 건국만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베르니 나라 자체와 내통할 사람은 아니지요. 베르니와의 전쟁을 부추길 때도 그는 간자 짓만큼은 하지 않았습니다.”
지루함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 카를로이가 삐딱하게 턱을 손으로 괬다.
“그건 나도 알아. 확실하진 않지만, 내 추측으로는 기껏해야 베르니의 마법 정도를 쓰고 있는 것 같더군.”
“마법요?”
“크로이센의 수준으로는 힘든 마법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거든. 그렇다면 답이야 뻔하지. 어느 순간부터 기상천외한 독약을 어디서 그렇게 만들어 올 수 있었는지도 설명이 되고.”
“다른 것도 아니고 베르니의 마법을 쓴 것이라면 중죄군요. 이 추측이 진짜라면…….”
“사실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별 상관은 없어. 베르니가 아니라 마하의 마법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이든야.”
카를로이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권태로운 목소리에 맞물렸다.
“마법 정도 몰래 빌려 쓴 걸로는 델루아를 역사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어. 내통이어야 해. 내란죄 정도는 되어야 씨를 말려 버릴 수 있지. 흔적도 남지 못하게.”
카를로이의 말투가 점점 느려졌다.
“뒤냐, 나는 지금 델루아를 없앨 방법을 제안하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저지르지도 않은 내통죄를 씌우자는 말씀 아닙니까.”
“맞아. 왜, 맘에 들지 않나? 뒤냐로서는 그런 방법을 쓰고 싶지 않겠지.”
“……아니요. 예전의 저라면 반대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델루아는 황실의 방계 혈족이며, 초대 조상의 후손이었다. 그런 이를 완전히 쳐 내려면 내통 정도는 되는 게 계산이 맞았다.
“이건 방법의 문제입니다.”
머리로 계산을 굴리며 알렉시스가 말을 이었다.
“조금의 증거만 있어도 크게 부풀릴 수 있겠지만, 우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조금을 가져올 사람도, 그 조금을 델루아에게 씌울 사람도. 델루아 영지는 작은 왕국이나 다름없고요.”
내내 무감하던 카를로이의 표정이 잠시 흐트러졌다 부자연스럽게 돌아왔다.
“방법이 달리 없지 않습니까.”
“뒤냐, 공은 아주 오래전부터 델루아를 알았지. 황후, 그러니까 델루아의 딸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나?”
대화 주제의 급선회에 알렉시스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알렉시스는 그것이 급선회가 아님을 깨달았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패로 쓰겠다는 말이 허투루 한 말은 아니었나 보다.
“그 딸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게 없습니다. 병약하다고 델루아가 걱정이 많았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별별 치료사들을 다 찾았지요.”
“실제로 본 적은?”
“갓난아이일 때야 몇 번 본 적은 있지요. 하지만 델루아는 딸을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왜지?”
알렉시스가 실없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자신이 원한을 산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으니까요.”
“아, 원한 때문에 누가 딸을 해코지할까 봐 무서워했다? 천하의 델루아가?”
“그가 사람을 직접 죽이기 시작한 것도 의외로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업보가 딸에게 돌아갈까 봐 약간은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무슨 업보?”
“살인의 업보요. 자기 딴에는 독살 같은 직접적인 방법은 피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이가 없었다. 직접적인 살인은 꺼려져서 전쟁 통에 사람을 내보내 죽여 버리다니. 참으로 도덕적이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이 갑자기 왜 미친 독살광이 된단 말인가?
“그 딸을 사교계 데뷔도 시키지 않은 건 의외긴 합니다만. 나름 준비를 하는 것 같더니.”
“그럼 애지중지했다는 소문은 어떻게 알지?”
“그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 딸이 태어났을 때 델루아의 얼굴을 제가 직접 봤으니까요. 그놈이 인간이 맞긴 하다는 걸 유일하게 확신했을 때고요.”
“그렇게 애지중지한 딸을 내 옆에 두나?”
대화의 방향을 이해한 것도 잠시, 카를로이가 물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렉시스는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졌다.
델루아가 딸을 예뻐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지.
“글쎄요. 늙어 죽을 때까지 옆에 끼고 살 것이 아니라면 결혼은 시켜야 할 텐데, 폐하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보내겠습니까? 천하의 델루아가.”
아무리 자식을 예뻐하는 부모라도 미혼으로 늙게 하지는 않았다. 알렉시스 뒤냐처럼 독신으로 사는 경우가 그렇게 흔하진 않았다.
“뒤냐와 로덴엔 남자가 없고, 앙센 백작은 개망나니에, 그 동생은 베르니 노예의 사생아라지요. 이런 건 왜 물어보십니까?”
“……별건 아니고.”
“그렇지 않아도 그 딸이 어떻게 자랐는지 한번 보고 싶긴 합니다.”
“곧 보게 되겠지. 공이 귀족원의 수장이 된다면.”
뒤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출 전까지 애매한 위치의 귀족들을 다 끌어들이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예를 갖추고 알렉시스가 물러나자 카를로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고르텐이 가져다 놓은 브로치 가품을 만지작거렸다. 황후를 보러 가는 걸 더 미룰 수 없었다.
그 얼굴만 보면 말이 멋대로 튀어나오고 손이 멋대로 가니 찾아가기가 영 꺼려졌다. 2주간의 꿈이 자신을 완전히 망쳐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오히려 이득인가.”
어쩌면 이런 미친놈 같은 상태가 더 나을 수도 있긴 하겠지. 더 가까워질 필요는 있으니까.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푸르투 궁전은 대단한 면이 있었다.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이본느의 기를 앗아 간다는 점에서 그랬다. 화려한 장식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생기를 강탈해 만든 듯 아름다우면서 끔찍했다.
게다가 카를로이의 얼굴을 볼 때는 이본느의 대단한 정신력도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웬일로 그가 아무 목적 없이 찾아왔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이본느는 그의 과거 이야기를 괜히 들었다고 후회했다. 궁금해서 시녀의 말, 공작이 황후를 죽였다든가, 혹은 선황 부부가 카를로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같은 것들을 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계속 이곳에 홀로 있었을 어린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영지에서 즐거운 시간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 덕분에…….”
“확실히 갔다 온 뒤로 황후 얼굴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언제 한번 또 다녀오도록 하세요.”
“네?”
“들었잖습니까.”
카를로이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테이블에 놓인 빵을 바라봤다. 호르뒤 빵과 피나타 잼. 자연스럽게 내놓은 것이 항상 준비해 놓던 음식 같았다.
이런 것까지 기억하고 준비해서 내온 것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카를로이는 알 수가 없었다. 생애 풀었던 그 어느 문제도 이본느보다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다음번엔 자기 손을 칼로 찌르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 그것은…….”
“황후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하겠지요.”
이본느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화내는 게 아니라니, 카를로이의 탈을 쓴 다른 누군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카를로이는 카를로이대로 갑자기 짜증이 났다. 문득 이본느가 황비 책봉식에서 스스로 독을 들이켠 것이 떠올랐기 때문에. 그때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진심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면 스스로 독을 마시지? 독을 마시고 칼로 찌르고 아주 난리가 났다.
“진심으로 묻는데, 왜 그러는 겁니까? 진정 죽기라도 원해서 그러는 겁니까?”
몇 초 만에 분노로 바뀐 얼굴이 그제야 카를로이 같았다. 이편이 더 익숙했다. 드디어 자신이 알고 있는 카를로이의 모습이 보이자 이본느는 의심을 거두고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럴 리가요. 하지만 폐하께는 그것이 더 좋지 않나요. 바라시는 일이잖아요.”
“그게 무슨…….”
카를로이는 얼토당토않은 말에 자기도 모르게 의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본느의 얼굴을 보자마자 맥없이 힘이 풀렸다. 비꼬려는 듯한 의도가 전혀 없었던 양 무고하고 깨끗한 얼굴은 진심처럼 보였다.
그래, 틀린 말도 아니잖아. 그나마 남아 있던 한 조각의 이성과 양심이 카를로이에게 속삭였다.
“……그런 게 아니니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대가 나를 위해 스스로 독을 들이켜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네? 그게 무슨?”
“황비 책봉식.”
카를로이의 답에 이본느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절대 얼굴에 드러내서는 안 됐다. 이본느는 다문 입가에 힘을 줬다. 이미 한번 아니라고 말했던 것이니 다시 반복하는 것이야 쉬운 일이다.
“아니라고 할 겁니까, 설마?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던데.”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그런 짓을 왜 하겠어요.”
“그래요, 그게 내가 궁금한 겁니다. 황후는 대체 왜 그랬을까.”
말을 해도 믿지 않으니 이본느는 이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눈만 무고한 척 깜빡이는 게 다였다. 심장은 계속 빠르게 뛰었다.
뭐지? 뭘 알아냈나. 혹시 증거가 있었나. 아니면 떠보는 것인가. 아니, 만약 증거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한테 불리한 일인가. 공작에게 말할까?
“도대체, 미치지 않은 이상 황후는 왜 그랬을까. 황후가 그렇게 해서 이득을 본 건 오로지 나밖에 없는데.”
“폐하.”
“그대는 왜 공작처럼 굴지 않을까. 그대는 왜 날 싫어하지 않을까.”
카를로이는 이제 테이블 위에 놓인 빵을 노려보고 있었다. 말하다가 어디서 화가 난 건지 모르겠지만 조용한 말투엔 미묘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본느는 머리를 몇 대 맞은 기분이라 표정 관리 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왜 그럴까, 계속 생각하다 보면, 미친 소리인 걸 아는데도, 한 가지 결론에만 닿게 됩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세요.”
“당신은 왜 그렇게…….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르지?”
땀이 나는 듯한 손을 이본느는 말아 쥐었다. 눈을 피해서는 안 된다. 카를로이의 금색 눈을 보며 이본느는 되뇌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여전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눈이 자신을 삼킬 듯 보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대는 왜 날……. 왜 나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지.”
좋아한다는 단어를 차마 말로 내뱉지 못한 카를로이가 말을 중간에 바꾸었다.
이본느는 이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카를로이는 반쯤은 충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본느에게 다가갔다. 이본느의 몸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 대충 봐도 느껴질 정도였다.
“왜 독을 마시고.”
테이블에 한 손을 짚은 카를로이의 상체가 이본느 쪽으로 기울자 이본느는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왜 날 이름으로 부르고.”
카를로이의 서늘한 손가락이 볼을 스치더니 흘러내린 백금빛 머리칼에 닿았다.
“왜 날 보고 울고…….”
“폐하.”
이본느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흘러내린 이본느의 머리칼을 넘기다 말고 카를로이가 가만히 이본느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카를로이까지 말을 멈추자 침묵은 더 버거워졌다. 이본느는 그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올려다봤다. 몸이 떨리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왜 날.”
카를로이가 또다시 말을 멈췄다. 누가 마치 그의 목을 쥐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가 탁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본느의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이본느는 리리안과 닮은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머리칼도, 창백한 피부도, 생기 하나 없이 죽은 어두운 눈도. 그런데도 왜.
“왜인지 모르겠어.”
“……착각, 착각이에요.”
“그럼 날 싫어합니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질문이 혼자 튀어나왔다.
“그럼 폐하는요. 폐하께서는 지금 제게 왜 이러세요. 저를 누구보다 싫어하면서.”
끊어질 듯 속삭이는 약한 목소리조차 카를로이의 신경을 자극했다. 온몸의 신경을.
자신이 이상해진 게 틀림없다. 그전에는 그를 이 정도로 몰아가진 않았는데. 그를 괴롭히던 꿈속에 아직도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제는 아닙니다.”
생경한 감각을 무시하려고 힘쓰며 카를로이가 대답했다.
“이제는 아니야.”
“왜……?”
“미쳤다고 해도 좋지만, 누군가가 그대에게서 계속 보여서…….”
이본느의 머리카락을 넘긴 카를로이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천천히 떨어졌다. 감각이 모두 어깨에만 몰린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 뜨거움이 이본느를 일깨웠다.
이본느는 황급히 눈을 피하며 몸을 돌려 앉았다. 돌아선 이본느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카를로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뭐에 묶였다가 풀려난 기분이었다. 처음 시작은 그가 의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꼭 어디에 조종당한 것처럼 머리가 흐렸다.
카를로이는 얼굴을 쓸며 정신을 차렸다. 해야 할 말만, 딱 의도했던 말만 하면 되는 일이다. 어렵지 않다.
“그러니 내가 당신을 싫어한단 생각은 이제 그만하세요. 황후가 날 싫어하지 않으니 나도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야 자신의 의도한 대로 목소리가 나왔다.
“저는…….”
“그러면 그대에겐 선택지가 생기는 겁니다.”
이본느가 놀라 다시 카를로이를 쳐다보았다.
“그걸 원한 거 아닙니까? 아셀에게서 들은 당신 모습으로는 충분히 다른 선택지를 고려할 의향이 있어 보이던데.”
“폐하, 착각하지 마세요. 공작님은 제 가족, 제 아버지예요. 제가 미쳤다고 한들 아버지를 배반할까요.”
카를로이는 테이블 위의 나이프를 이본느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금속의 차디찬 감각과 동시에 뜨거운 카를로이의 피부가 손에 와 닿았다. 손이 포개졌다.
카를로이의 무덤덤한 금색 눈은 따스한 색과 어울리지 않는 서늘함이 있어, 이본느는 제가 쥔 것이 칼인지, 보고 있는 것이 칼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는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날 칼로 찔러 죽여요. 그게 당신 아버지를 위한 길이니까.”
바로 옆에서 들리는 느리고 나직한 목소리에 몸이 뜨거워졌다. 진심이라는 듯 칼을 쥐여 준 카를로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치셨군요.”
“그대도 그리 멀쩡해 보이진 않는데. 당신이 몇 번의 기회를 놓쳤다는 걸 알면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전, 아버지와 폐하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는 것뿐이에요.”
“그것 자체가 선택인 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그대도 술에 취해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가만히 있어서 이득이 되는 건 공작이 아니라 나라고.”
“그건.”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겠더군요.”
이본느가 차마 카를로이의 눈을 더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카를로이의 옷에 달린 무언가가 낮아진 이본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얼핏 보았을 땐 몰랐는데 바로 앞에서 보니 어딘가 익숙한 것이었다.
브로치였다. 잊을 수가 없는 브로치다. 하지만 카를로이가 잃어버려서 찾고 있는 거 아니었나. 이본느의 머리가 혼란스럽게 굴러갔다.
“……가품입니다. 진품은 따로 있는데.”
마치 이본느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카를로이의 말투에 나이프를 쥐고 있던 이본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실수였다. 그 손에 닿아 있는 카를로이도 그걸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역시 황후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군요. 그대의 집에서 본 적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카를로이의 속삭임에 이본느는 차마 그를 올려다볼 수 없었다. 오늘 너무 많은 것을 내보인 듯한, 무방비한 기분이 들어서 문득 겁이 났다. 긍정하지 않는 것이 이본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이프를 쥐여 준 카를로이의 손이 떠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이본느의 손을 잠시간 스치듯 문질렀다. 불온하게 느껴지는, 그러나 딱 그만큼 아찔하게 느껴지는 손짓, 촉감이 이본느를 건드려 댔다.
“……이본느, 그대 선택지 중에 내가 생겼다는 걸 잊지 마세요.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도 있다는걸.”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피부를 뜨겁게 만들었다. 힘이 빠진 이본느의 손에서 나이프가 떨어져 테이블을 뒹굴었다.
여전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는 이본느를 잠시간 바라보다 카를로이는 옷차림을 정돈했다. 이윽고 그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
이본느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치사한 새끼.”
몰아쉬는 숨 사이로 약한 목소리가 나왔다. 카를로이는 여전했다. 이럴 때나 사람 이름을 처음 부르는 게. 어릴 때나 했던 욕을 중얼거리며 이본느가 떨리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떨리는 것은 카를로이도 마찬가지였다. 황후궁을 나오자마자 어딘가 멍해지는 카를로이의 안색을 살피던 고르텐이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카를로이는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무엇이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노신의 얼굴을 보다 카를로이가 가볍게 고개를 돌렸다. 작은 몸짓 하나에도 여실히 묻어나는 불신에 고르텐이 상처받은 얼굴로 카를로이를 불렀다.
“이래 봬도 저도 연륜이란 게 있습니다, 폐하. 저를 너무 못 믿으시는 게지요.”
“내가 이 궁에서 고르텐을 안 믿으면 누굴 믿나.”
“그런 것치곤 비밀이 많으십니다.”
비밀이 많은 건 둘째치고 고르텐은 나이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미혼이었다. 카를로이가 기억하기로는 누구와 어떤 사이였던 적도 없는 시종장이 쓸모 있는 대답을 해 줄지 의문이었다.
“만에 하나 황후가 날 맘에 품었다면…….”
“예에?”
“만에 하나라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유가 왜일 거 같나?”
고르텐은 차라리 묻지 말 것을 하고 후회했다. 뭐 이런 베르니와 화해하는 소리를. 하지만 물었으니 답도 해야 할 터였다.
“글쎄요……. 황후께서 미모에 취약하시거나…….”
카를로이의 눈썹이 들리는 것을 보고 고르텐은 말끝을 흐렸다.
“지독하게 외로우시거나…… 그런 거겠지요, 뭐.”
“그거 보게. 자네는 이런 일에 별 도움이 안 돼.”
할 말이 없어진 고르텐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제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별 말도 안 되는 것을 물으니 답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아들, 아니 손주뻘인 황제를 보며 고르텐은 혼자 입만 다셨다.
카를로이는 복잡한 생각을 몰아내려 애를 쓰며 옷에 달려 있던 가품 브로치를 뜯어냈다.
대충 알 만한 것은 다 알아냈다. 이유야 자신이 알 바가 아니다. 여기서 더 황후에 대해 아는 것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힌트가 많아질수록 더 어려워지는 문제처럼, 그건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 게 뻔했다.
생각을 없애는 것이 브로치를 뜯어내는 것처럼만 쉬웠으면 좋겠다고 카를로이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