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황후, 그리고 황제
이본느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 1년이 넘도록 엄마를 보지 못했는데, 드디어 보러 갈 수 있게 되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엄마를 만난다는 설렘이 카를로이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던 머리까지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카를로이가 붙여 주겠다는 호위는 털끝도 보이지 않았다. 호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가는 길 중간중간 멈춰 식사할 때조차 나타나지 않는데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시종장 고르텐이 말하기를 원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알아서 어련히 따라오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델루아 공작은 카를로이가 호위를 붙였다는 말을 듣자 ‘마하 노예 놈’이라며 욕을 중얼거렸지만 막진 않았다. 막을 필요성을 못 느낀 듯싶었다. 델루아 영지는 공작만의 작은 왕국, 공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땅이었다. 호위 하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래서 델루아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이본느는 호위가 대체 누군지, 붙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차에서 내릴 때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당장 드니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던 이본느를 막은 것은 공작이었다.
“아니지, 이본느. 순서는 지켜야지.”
인자하게 웃으며 속삭이는 얼굴이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이본느가 멀뚱히 공작을 쳐다보자 공작은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몇 번 두드렸다.
“아.”
마법사부터 만나야 드니스를 만나게 해 주겠단 뜻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치밀한 공작다웠다.
“네 방에 있을 거다.”
눈에 띄게 차분해진 이본느가 빨리 끝내자는 마음으로 자신의 방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려 하자 갑자기 앞에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갈색 고수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남자가 이본느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벼운 몸놀림과 칼을 차고 있는 모습을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폐하께서 붙여 주신 호위구나. 이름이 뭐지?”
“아셀.”
말이 참 짧았다.
“내 방에 들어가는 것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어디든 위험할 수 있어요.”
생각보다 미성이었지만 억양은 강했다. 공작이 ‘마하 노예 놈’이라고 중얼거린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억양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이본느가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난 옷을 갈아입어야 해. 설마 그것도 다 지켜보겠단 소리는 아니겠지?”
이렇게 말하면 바로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셀은 마치 고민하는 것처럼 눈알을 도로록 굴렸다. 어이가 없었다.
“자네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황후야. 만일 그런 짓을 했다가는 최소 사형일 거야. 문 앞에 있는 것까진 허락하지.”
아셀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본느의 방에 온갖 마법이 다 걸려 있을 것이 분명했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으로는 무엇 하나 알아낼 수도 없을 정도로.
침실 문을 열자 깨끗하고, 아무도 없는 방이 보였다. 아셀을 뒤로하고 이본느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화려한 휘장이 걸린 침대로 걸어가자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로 감싸 눈 두 개만 보이는 사람.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귀찮은 걸 달고 오셨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이름이 ‘피오르’라는 것밖에 모르는 베르니의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황후가 된 지 1년도 넘었는데 호칭은 그대로였다.
“피오르.”
“아가씨도 빨리 해치우고 싶을 테니 안부는 서로 묻지 말도록 할까요?”
피오르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이본느가 침대에 앉았다. 장갑으로 감싸진 마법사의 양손이 이본느의 머리에 닿았다 떨어지자, 머리가 헤집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번과 좀 다르네요. 저번엔 입을 내내 닫고 산 사람처럼 머릿속이 깨끗해서 할 것도 별로 없었는데.”
피오르가 중얼거렸다. 저번이라는 건 6개월 전을 뜻했다. 공작이 피오르를 시녀처럼 변장시키고 황후궁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 그때도 피오르는 마법을 손봤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하긴 머리를 거의 쓰지 않고 살았으니 볼 것도 없었을 테지.
“못 본 사이에 무모해지셨나? 많이도 시도하셨네. 머리가 아주 난장판이 됐어.”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본느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마저 눈치챘는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겁먹지 말아요, 공작님께 일러바칠 생각은 없으니까. 어차피 입이 열리지 않아 말도 못 했을 테니.”
뭘 하는 건지 머리가 심하게 지끈거려 이본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하네. 무슨 심경의 변화예요? 말하고 싶어서 미치려고 했나 봐, 그렇죠?”
“……아니야.”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저항하지 않는 게 아가씨한테는 좋아요. 그러다가 머리가 잘못돼서 바보가 되면 어떡하려고. 그건 아가씨도 싫잖아요.”
무서운 말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말투였다. 피오르가 헤집어 놓는 머릿속 고통을 참으려 하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직 아가씨 어머니도 살아 계시는데, 허튼 생각 하기엔 좀 이르기도 하고. 안 그래요?”
‘아직’이라는 말이 거슬려 이본느가 눈물 고인 눈으로 피오르를 노려보았다. 피오르는 태연하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짠, 다 됐어요.”
머리가 약간 멍해 이본느가 몇 번 머리를 흔들었다. 피오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마법사를 올려다보다 이본느가 입을 열었다.
“책에서 봤어. 이 정도 고위 마법은 베르니에서도 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칭찬인가요? 고마워요.”
“너 같은 사람이 왜 공작의 말을 듣지? 얻을 게 뭐가 있어서? 크로이센과 접촉하는 건 베르니에서도 중죄일 텐데.”
“쓸데없는 호기심이 늘어서 오셨네. 가난한 베르니보단 부유한 크로이센에서 돈 벌기가 더 쉽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
피오르의 목소리에 잠깐 짜증이 어린 듯도 했다.
“그리고 난 이미 베르니로 돌아가기엔 틀렸거든요. 아가씨 말대로 중죄라서 목이 날아갈 테니까.”
피오르가 허리를 숙이자 까만색 눈이 이본느의 눈 바로 앞에 보였다. 검은 로브 안에서 목걸이 하나가 반쯤 빠져나왔다. 반만 보이는 보라색 빛도 번쩍거려 눈이 부셨다.
“근데, 아가씨가 이런 걸 내게 묻는다는 걸 공작이 알면, 어떻게 될까요?”
불쾌한 보랏빛과 음산한 목소리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피오르가 헤집은 머릿속 사이로 기억의 조각 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너, 14년 전에도 이곳에 있었지.”
이본느를 바라보던 피오르의 까만색 눈에 순간적으로 붉은빛이 돈 듯했다.
“내가 이 저택에 처음 왔을 때 본 것 같아, 널. 자세히는 못 봤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분명 너였어.”
이본느는 이제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그땐 공작을 위해 뭘 해 주고 있던 거야?”
이본느의 눈을 빤히 쳐다보던 피오르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이본느의 이마를 짚었다. 알 수 없는 행동에 이본느가 당황한 얼굴로 피오르를 봤지만 피오르는 그저 눈웃음만 지었다.
“아가씨.”
“…….”
“이거 있잖아, 그냥 장식용으로 둬요. 머리를 쓰려고 하지 말아요. 응? 아가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이본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몇 번 더 두드리고는 피오르가 허리를 곧게 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던 목걸이는 다시 로브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공작이 내 오랜 고객인 게 딱히 비밀은 아니니까, 이 정도 알아낸 걸로 뭐라 하진 않을게요. 머리를 휘저어 놓으면 가끔 어떤 기억은 뚜렷해지기도 하니까, 부작용이라고 생각하죠, 뭐.”
피오르가 이본느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가볍게 힘을 주었다.
“안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나름 아가씨를 동정해요. 그러니 충고하는데.”
어깨를 토닥거리는 손길이 어울리지도 않게 사뭇 다정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요. 자아가 강해질수록 불행해지는 건 아가씨니까.”
“지금도 날 불행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으면서 말은 잘하네.”
“말만 잘하는 건 아니니까 날 시험하려 들지 말아요. 정말 겁이 없어지셨어.”
피오르는 얄미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아가씨한테 중요한 건 아가씨 어머니 아닌가? 뭐 해요? 어서 보러 가야지.”
심심하면 드니스를 들먹이는 꼴이 공작과 비슷했다. 이본느가 분한 마음에 소심하게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피오르는 방에서 사라졌다.
이본느는 멍하니 앉아 피오르의 말을 되뇌었다. 틀린 말은 없었다. 그래, 잠시 미쳐서 겁도 없이 물었다. 무슨 상관이야, 엄마만 살아 있으면 되지. 멍한 머리로 세뇌하듯 이본느는 되뇌었다.
평소처럼 죽은 듯이 살면 되는데 왜 그랬지. 이건 다 카를로이 때문이었다. 카를로이가 계속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진 거야.
이본느는 머리를 짓누르며 생각을 지우려 했다. 엄마를 보러 가야 하니까.
* * *
<멍청이야!>
뜬금없이 소리를 지르는 루 때문에 카를로이는 눈만 껌뻑거렸다. 얼빠진 표정을 한 카를로이의 머리를 루가 세게 때렸다.
“아.”
머리를 문지르며 신음을 내뱉는 카를로이를 보고 루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에 카를로이는 넋을 빼고 루를 보다가 그 볼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꿈이라면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도 될 것 같았다. 깨어나 봤자 루가 없는 현실이라면 그렇게 살 가치가 있지도 않았다.
델루아 영지에서 살아 돌아온 그 날부터 그는 언제나 자신의 생이 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날 끝났어야 했는데 루 덕분에, 루를 위해 사는 생이라고.
카를로이의 얼굴이 다가와도 루는 피하지 않고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예쁘게. 닿으면 느껴질까? 루가 더 다가왔다.
갑자기 루의 얼굴이 바뀌더니 이본느가 되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닿을 법한 거리에서 이본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곤 카를로이와 이본느의 입술이 닿았다.
그 순간 카를로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기분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갑자기 죽고 싶었다.
“미친놈.”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카를로이가 마른세수를 했다. 벌써 며칠째 같은 꿈이었다. 돌아 버린 것이 분명했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이딴 꿈을 왜 꾸는 건지. 루와 이본느가 나오는 꿈에 시달리는 것이 벌써 5일째였다.
“미친놈.”
카를로이가 또 한 번 중얼거렸다. 이본느도, 델루아 공작도 없는 황궁에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꿈에 계속 나타나는 루와 이본느 때문에 카를로이는 제 목을 찌르고 싶었다.
이게 다 로열 체임버에서의 그날 때문이다. 진정제 때문에 미쳐서 이본느를 루로 착각한 이후로 계속 이런 미친 꿈을 꾸고 있었다. 루가 살아 있기를 너무 바라는 바람에 자신이 미쳐 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아니, 최소한 황후의 웃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이런 꿈도 꾸지 않았을 텐데. 안 웃던 사람이 웃는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하지만 착각할 사람이 따로 있지, 델루아의 딸을.
“아.”
꿈에서 깨니 이번엔 이본느가 그날 밤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심지어 자신의 어깨를 안던 모습까지. 카를로이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도대체 왜 그렇게 울었냐고.
카를로이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우는 걸 본 그날 이후로 이본느에게선 공작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소름 끼치게 닮았는데, 분명 공작의 딸인데, 이제 그 얼굴에서 공작이 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이본느, 이본느 델루아로 보였다.
“……잠을 못 자겠군.”
정신 나간 꿈 때문에 마음 편히 잘 수도 없어서 며칠 내도록 잠을 설쳤더니 죽을 맛이었다. 카를로이는 결국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집무실로 향했다. 이본느가 없어도 없는 것 같지가 않았다.
* * *
공작저의 가장 구석진 곳, 탑이 하나 있다. 그 탑은 화려했지만 수풀이 우거진 곳에 있어 어딘가 음울해 보이기도 했다. 그곳엔 공작이 절대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딸, 진짜 이본느의 시체가 담긴 관이었고 하나는 드니스였다.
공작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드나들 수 없도록 공작의 피로 이루어진, 몇 겹의 출입 금지 마법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가장 꼭대기 층에는 관이 있었고, 그 바로 아래층에 드니스가 머무르는 방이 있었다.
“자네는 못 들어온다니까.”
이본느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아셀에게 말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벌써 세 번째였다. 탑 입구에서 혈족 마법에 걸려 들어가지 못하는데도 아셀은 불만 어린 표정으로 입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정말이지 저렇게 떫은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호위는 처음 보았다. 레이디 앙센도 저러지는 않았는데. 심지어 탑을 타고 올라가려는 시도까지 했지만 결계 때문에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여기선 내가 위험할 일이 없다고 몇 번 말하지? 계속 이러면 호위 외에 받은 임무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단호하게 말을 하자 그제야 아셀이 잠시 뒤로 물러났다.
“여기 어머니 유해가 모셔져 있어서 조용히 기도만 드리고 나올 생각이야.”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이었지만 아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귀족들은 묘지를 따로 만들지 않고 저택 안에 가까웠던 이들의 유해를 놔두는 사당을 만드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본느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드니스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층에 다다르자 제인, 메리앤의 딸이 보였다. 방문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제인이 이본느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
“제인.”
“좀 전에 약을 드셨어요. 한번 들어가 보세요.”
어느새 손에 땀이 나 있었다. 이본느가 단숨에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여자가 문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서 이본느는 그대로 달려가 드니스의 품에 안겼다. 드니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자 드니스가 떨리는 손으로 이본느를 안았다.
“루네. 루가 맞아. 우리 딸.”
드니스의 온기에 이본느는 그제야 하염없이 엄마를 부르고 또 불렀다. 드니스는 계속 조용히 대답했다. 응, 엄마 여기 있어. 울지 않으려고 한 다짐이 아무 소용 없게도 눈물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엄마. 엄마.”
“응.”
“왜 이렇게 말랐어……. 엄마 몸이 더 작아졌어.”
“너야말로 갓 결혼한 애가 왜 더 살이 빠진 거야. 엄마는 아프니까 그렇지만 넌 왜 그래.”
기어코 드니스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이본느는 고개를 들어 드니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1년 만에 본 얼굴은 형편없이 홀쭉해져 있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이본느가 드니스의 손을 부여잡았다.
“엄마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그만 울어, 눈 붓는다.”
“왜 대답을 안 해. 병이 더 안 좋아진 거야? 아니면 누가 구박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넌 걱정 안 해도 돼.”
드니스가 앙상한 손으로 이본느의 손을 토닥거렸다.
“루가 없으니까 그렇지. 네가 없는데 내가 여기서 좋은 일이 뭐가 있겠어.”
“엄마, 그런 생각 하지 마.”
“계속 이렇게 1년에 한 번씩만 볼 수 있을 거라니까…….”
드니스가 말을 하다 말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오랜만에 보는데 그만 울어야지. 아무리 네가 있는 곳이 멀어도, 가다 죽는 한이 있어도 따라갈 걸 그랬나 봐.”
“엄마…….”
“물론 가면 안 되겠지. 내 존재가 알려지면 너에게 좋지 않을 테니까.”
이본느는 어린애처럼 드니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거라곤……. 공작님도 자주 안 오시니 여쭤볼 수도 없었고.”
드니스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드니스는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이본느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내 아가, 내 생명.”
너무 그리워서 꿈을 꾸지 않을 때도 들렸던 목소리에, 느껴졌던 온기에 이본느는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간절히,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황궁에서의 괴로움이 그나마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 * *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아셀은 내부가 보이지 않는 탑을 노려보고 있었다. 창문이 있는데 안은 보이지 않았다. 침실 하나 정도에 이런 마법을 거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건물 하나에 다 걸 정도라니. 온갖 마법을 칭칭 걸어 놓은 꼴이 수상하다고 소리치는 듯했다.
델루아 영지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았다. 예민한 피부로 불길함과 불행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델루아 영지 자체는 공작저에 비하면 약과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공작저는…… 생각하던 아셀은 몸서리를 쳤다. 죽음의 냄새가 지독했다. 전장에서 맡은 냄새에 비할 것은 아니었지만, 일개 공작저에서 이런 냄새가 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탑을 노려보던 아셀은 입구에서 나오는 한 인영을 보고 나무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위에서 떨어지는 아셀을 보고 하녀가 기겁해 소리를 질렀다. 아셀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하녀도 진정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위, 호위 맞으시죠? 아가씨, 아니 황후 폐하의?”
아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겠대요. 그러니 호위님도 쉬시라고.”
“같이 자요, 시체와?”
아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은 어머니를 보러 들어간 게 아니었나? 아셀의 표정을 보고도 제인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체가 아니라 유해…… 아니 음, 가루인데요. 여기서 살 적에도 폐하는 종종 그러셨어요.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셨거든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기괴하고 소름 끼치는 일인데 하녀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아셀은 혼란스러워졌다. 전쟁터도 아니고 굳이 죽은 사람과 같이 잔다니.
아셀의 혼란을 깔끔히 무시하고 제인은 다시 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셀은 용을 써도 들어가지 못하는 탑이었다.
* * *
고르텐은 졸린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카를로이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인지 요 며칠 카를로이가 잠을 통 자지 않고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는 바람에 고르텐도 기상 시간이 빨라졌다. 하루 이틀이면 모를까 일주일이 다 되도록 이러니 고르텐은 미칠 노릇이었다.
게다가 카를로이는 어딘가 좀 이상했다. 혼자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호위는 최소한으로 뒀겠지?”
뒤에서 연신 하품을 하던 고르텐이 카를로이의 질문에 하품을 꿀꺽 삼켰다.
“예. 폐하께서 쉬고 싶어 하신다고 말해 뒀습니다.”
카를로이는 어제 뜬금없이 렉셈 소르타에 위치한 궁전, 라 소르티오에 가겠다고 했다. 지금은 없어진, 옛 솔타 왕국이 있었던 렉셈 소르타령에 지어진 궁전 라 소르티오는 크로이센 황족들이 휴양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이었다. 특히 선대 황후 아델라이드가 특별히 좋아했던 곳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고르텐에게 많은 것을 말해 주지 않는 카를로이였지만 고르텐도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있기는 했다. 휴양 따위에 관심 없는 카를로이가 그곳에 놀러 갈 리는 없었다.
“하긴, 그분을 찾아뵈려면 델루아 공작이 수도에 없는 지금이 적기기는 하지요.”
“뒤냐가 그곳에 있다는 걸 고르텐은 어찌 알지? 심지어 델루아조차 모르는데.”
“폐하는 저를 너무 무시하십니다. 저는 폐하 전에도 두 분의 황제를 모셨으니 당연히 알지요. 황족만 머무를 수 있는 곳에 그분이 머물 수 있는 게 다 선대 황제 폐하의 명 덕인데요.”
슬쩍 떠보는 말에도 카를로이가 딱히 부인하지 않자 고르텐은 하품을 하다 말고 정신을 차렸다. 반쯤은 그냥 던져 본 말인데, 정말 그 사람을 보러 가다니.
“하지만 실성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뒤냐 공작? 저는 아직도 그분의 마지막 모습이 잊히지 않는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저도 그분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을 때는 어차피 살아 계셔 봤자 제정신이 아니실 테니 차라리 잘됐다 생각했을 정도라고요. 그런 분이 무슨 도움을 주실 수 있을지…….”
“가서 보면 알겠지.”
라 소르티오는 여전했다. 푸르투 궁전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밝은 햇빛이 감싸 안는 곳답게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평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카를로이는 아름다운 주변 풍경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바로 라 소르티오 안에 있는 호수로 향했다. 온 호수에 출입 엄금이라는 표시가 걸려 있었다. 카를로이가 어찌나 빨리 걷는지 고르텐은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커다란 느티나무 밑에 조그만 원탁과 의자가 있었다. 의자 위에서 책을 손에 들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인적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카를로이와 눈이 마주쳤다.
“뒤냐.”
카를로이의 부름에 여자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50대에 접어든 나이, 밤하늘처럼 까맣던 여자의 머리는 어느새 회색빛이 늘었다. 길고 풍성한 머리는 뒤로 깔끔히 넘겨져 하나로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폐하.”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가 카를로이를 불렀다. 알렉시스 뒤냐, 뒤냐 가문의 가주, 그리고 크로이센 이공작 중 하나. 알렉시스 뒤냐는 저 자신도 문무를 겸비한 인재요, 철혈의 이성을 자랑하는 가문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선대 황후 아델라이드 뒤냐의 친언니였으니 사사로이는 카를로이의 이모가 되는 사람이었다. 알렉시스는 단 한 번도 카를로이를 조카로 대하지 않았고 이모라 부르는 것도 허하지 않았지만.
실성했다느니 죽었다느니 괴소문이 도는 사람치고는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정갈하기까지 한 모습에 고르텐은 깜짝 놀라 알렉시스 뒤냐를 한참 쳐다봤다.
“폐하께서 오실 일은 영영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알렉시스가 자신의 의자 옆에 있던 여분의 의자를 원탁 맞은편에 놓으며 말했다. 카를로이가 그 의자에 앉자 알렉시스도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10년 넘도록 못 본 조카를 본다기엔 지나치게 무감한 얼굴이었다.
“제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 아이를 버리지 않는 이상, 절 찾지 마시라고 그리 말씀드렸는데.”
카를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동생의 죽음에 반쯤 미쳐서 델루아의 하수인들을 칼로 직접 베고 피범벅이 된 얼굴로 참 태연하게 알렉시스는 말했었다.
<전하 같은 사람과 저는 절대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한낱 사람을 목표로 하는 한심한 인간은 절 구역질 나게 만드니까요.>
아셀이 있기 전엔, 알렉시스가 델루아 공작의 납치 시도에서 살아 돌아온 카를로이가 루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알렉시스는 그런 카를로이를 못마땅해했었다.
‘한낱 사람을 목표로 하는 인간’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자명했다. 알렉시스는 델루아 공작과 함께 카를로이의 조부와 친우였으니까.
“폐하께서 아직 살아 계신 걸 보니 놀랍군요.”
“죽기라도 바랐나?”
“그럴 리가요. 하지만 언제 죽어도 괜찮은 것처럼 구셨으니까요. 폐하의 나이 고작 열 몇에도 그 아이가 아니면 아무 미련도 없는 것처럼 구셨으니. 아직 살아 계신 걸 보니 그 아이가 죽진 않았나 봅니다.”
억양, 높낮이 하나 없는 말투로 말을 하던 알렉시스의 얼굴에 순간 감정이 실렸다.
“참 이상하지요. 폐하 대신 죽은 사람은 아델라이드인데, 폐하께서는 이름도 모를 시골 아이한테 목숨을 빚진 것처럼 구시니.”
카를로이는 아델라이드와 쌍둥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알렉시스를 가만히 쳐다봤다. 아델라이드가 절명하지 않고 계속 살았다면 저렇게 늙었겠지.
그렇다고 늙어 갈 수 있는 자유를 억울하게 박탈당한 자신의 모친이 안타깝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카를로이는 자신 대신 크로이센을 선택했던 아델라이드를 원망하지 않는 대신 동정하지도 않았다. 아델라이드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반면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된 알렉시스 뒤냐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 아델라이드를 딸 키우듯 애지중지했다.
빛나는 이성과 크로이센에 대한 충성을 가문의 존재 이유로 두었던 뒤냐가의 자매답게 그 둘은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지만 서로에게는 나름 애틋한 면이 있었다.
“전혀 다르지 않은가, 공작. 내 어머니는 나를 구하고자 하신 적도, 나 대신 죽으려 하신 적도 없어. 어쩌다 운이 좋지 않게 나 대신 죽게 되신 거지. 그 애는 작정하고 날 구한 것인데 그게 어떻게 같은지 모르겠군.”
카를로이는 딱 알렉시스만큼 무신경한 얼굴로 아델라이드의 죽음을 말했다.
알렉시스도 머리로는 알았다. 카를로이의 말이 딱히 틀리지 않았다는걸. 카를로이의 납치를 두고 벌어진 델루아 공작과의 암묵적인 교섭에서 아델라이드는 카를로이를 포기했다.
아델라이드는 공작의 요구를 들어줘서 카를로이를 데려오고 싶어 하는, 유약한 면이 있던 선대 황제 카를로이의 아버지를 막고 델루아 공작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미 아델라이드는 다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아델라이드의 태도는 깔끔하고 명확했다. 어차피 다른 후계를 낳으면 그만이니, 델루아 공작 네가 카를로이를 데리고 뭘 어쩌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택하는 뒤냐다운 선택이었다.
또한 뒤냐의 충성은 크로이센이라는 나라 자체를 향하는 것이지, 크로이탄이라는 왕조, 황실에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알렉시스는 그것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아델라이드도, 알렉시스도 카를로이를 안타까이 여기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그들에게는 더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납치 사건 이후, 카를로이는 어찌 된 영문인지 살아서 돌아왔고 델루아 공작은 어딘가 나사가 빠져 버렸다. 그전까진 고상하고 간교한 방식, 예컨대 전쟁터로 황족을 내보내 황족을 죽여 버리는 것 따위의 방식을 취하던 델루아 공작은 그때부터 미친 듯이, 간도 크게 독살을 시도했다.
“그렇지요. 사실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아델라이드는 폐하를 구하고자 한 적은 없지요. 그러나 그날 아델라이드 덕에 목숨을 구한 사람이 폐하인 것도 맞습니다. 폐하께서야 전혀 감사히 생각하지 않으시겠지만.”
그리고 불운은 카를로이 대신 아델라이드를 선택해 죽음으로 데리고 갔다. 카를로이에게 올라가야 할 음식을 그날 무슨 일인지 아델라이드가 대신 먹었고, 그로부터 며칠 동안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이 모든 일에 카를로이의 잘못은 단 하나도 없다. 알렉시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난 어머니께 목숨을 빚졌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데.”
“그리 이성적이신 분이 그 아이한테는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도 솔직히 말해 볼까요?”
카를로이는 그런 솔직함을 딱히 원하지 않았지만 알렉시스는 언제나 그렇듯 카를로이의 의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아이는 폐하께 제 목숨값으로도 못 살 귀한 브로치를 받고 나서야 폐하를 구할 생각을 했지요. 그 아이는 받은 값을 했을 뿐입니다.”
아델라이드의 죽음에 그토록 무감하게 굴면서 고작 2주 본 시골 아이한테 목숨을 거는 카를로이를 보고 있자면 기가 막혔다.
어쩜 저리 제 조부와 비슷할 수 있을까. 그 시간 동안 누구를 깊이 알 수 있다고, 그렇게 마음을 뺏겨서 온 인생을 사로잡혀 사는지.
“내가 브로치를 준 것과 그 아이가 내 목숨을 구한 건 결코 같은 값이 아니야. 후자엔 목숨이 걸려 있었으니. 물론 공작이 그런 걸 이해하리라 생각하진 않네.”
“이해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고 끝나야 하는 법입니다. 그 하나에 매달려 질질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혹독하도록 냉정한 교육을 했더니 좀 잘해 줬다고 홀랑 넘어간 것이 분명했다.
델루아 영지에서 살아 돌아온 카를로이는 완전히 딴사람이 된 듯 바뀌었다. 델루아 공작만 보면 벌벌 떨고, 선황 부부가 기겁할 정도로 델루아에게 저자세를 취했다. 간이고 쓸개고 다 가져다 바칠 기세였다.
그게 다 척일 뿐이라는 걸 눈치챈 알렉시스는 처음엔 카를로이가 대견했지만 목적을 알게 되자 아연해졌다. 고작, 고작 시골 여자애 하나 데리고 오겠다고 카를로이는 황제가 되려 했다. 목적이 틀려도 단단히 틀렸다.
델루아의 멸문도, 크로이센의 발전도 카를로이의 안중에는 없었다. 델루아를 치려는 것도 그 영지에서 그 아이를 찾아내려는 일념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맥이 풀렸다. 지긋지긋한 역사가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싸늘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관만 아델라이드를 빼닮았지 내면은 닮은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조카를 보며 알렉시스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절 왜 찾아오셨습니까?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 애를…….”
“그 아이는 죽었어.”
자신의 입에서, 제 목소리로 나간 말인데도 어색해 카를로이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로 꺼내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들었다.
14년간 찾을 수 없었다면…… 죽은 것일지도 모르지. 앉아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서 있었다면 발이 꺼졌을지도 모르니까.
아델라이드의 죽음을 말하는 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말투는 여전히 무덤덤했으나 얼굴은 그렇지 못했다. 그 얼굴을 보자니 알렉시스는 짚이는 게 있었다.
“델루아가 그 아이를 죽이기라도 했나 봅니다. 복수라도 하고 싶으십니까. 인제야, 정말로 전력을 다해 델루아를 없애 버릴 마음이 드셨습니까?”
“어차피 자네가 원하는 것도 같지 않나. 나 없이 그대 혼자 델루아에게 복수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 어쩌시려고요. 할 일을 다 마쳤으니 자진하시기라도 할 겁니까.”
카를로이는 답이 없었다. 빈말로도 죽지 않겠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기가 막혔다.
결국 알렉시스가 질린 얼굴을 했다.
“도대체가! 그 아이가 아니면 삶의 이유도 없어집니까?”
묵묵부답인 것을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욕을 잘 하지 않는 고상한 성격의 알렉시스 뒤냐였지만, 카를로이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미친놈이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폐하께서는 후계가 없고, 폐하 다음 가장 가까운 방계가 델루아란 것은 아십니까?”
“그러니 그대를 찾아왔지.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으니 델루아부터 먼저 없애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까, 지금 자살 후의 일을 계획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인가?
이런 미친놈을 대신해 제 동생이 죽었다니. 냉정을 유지하려는 마음가짐이 흔들리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크로이센의 황제지, 필부가 아닙니다! 모든 생각의 원인이, 모든 행동의 목적이…….”
“사람 하나에 달려서는 안 되지. 죽어서도 잊지 못할 만큼 들은 이야기니 또 말할 필요는 없네.”
“잘 아시면서…….”
“잘 아니 그대를 찾아온 거야. 나 또한 그대를 필요로 하지만, 나보다는 크로이센이 더 필요로 한다는 걸 모르나?”
알렉시스가 뭐라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카를로이가 재차 다그쳤다.
“내 핑계 대고 이렇게 도망 와 있는 것도 그다지 뒤냐스러운 행동은 아닐 텐데.”
알렉시스 뒤냐를 설득하는 데 있어서 크로이센을 언급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담담히 제 할 말을 다 하는 카를로이를 보고 나서야 알렉시스는 조카가 사실은 변했고, 또 자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을 내면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던 어린아이는 이제 없었다. 좀 더 이상적으로 자라 줬다면 좋았겠지만.
“나도 무작정 온 건 아니네. 조건부터 들어 볼 텐가?”
알렉시스가 한참 뒤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논의가 시작되었다. 알렉시스는 ‘무조건 살아 있을 것’이라는 조건을 달아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솔직한 심정으로는 탑 안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이본느는 3박 4일 동안 드니스의 방에서만 식사하고, 잠을 자고, 드니스의 옆에 붙어 있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 이본느의 원대로 되는 일이 있었던가. 탑에만 박혀 있으면 아셀의 의심을 살 거란 공작의 명 때문에 강제로 이본느는 관심도 없는 공작저를 돌아다녀야 했다.
영지로 내려오는 게 급해서 호위를 받겠다 했지만 이제 와서 후회스러웠다. 저놈만 아니었어도. 아셀은 정말이지 이본느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먹을 것을 본 개처럼 쫓아다녔다.
“탑에 왜 저렇게 마법을 걸어 놔요?”
“별 마법도 아니잖아.”
“아닌데. 별 마법 맞던데. 별별 마법이던데. 탑에 왜 그렇게까지 하지?”
끊임없이 쫑알거리는 목소리에 이본느는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눈치는 또 더럽게 빨라 가지고. 마법학자도 아니면서 온갖 마법이 걸려 있는 걸 어떻게 안 건지.
“탑에 시체만 있는 거 맞아요? 시체만 있는 탑에 왜 그렇게 난리야.”
자신의 존재를 개무시하던 황후는 시체란 단어에 갑자기 매섭게 아셀을 노려봤다.
아셀은 어이가 없었다. 유해, 아니 가루를 시체라 불렀다고 저런 눈빛까지 받아야 하나? 이 미친 델루아 사람들!
“왜요.”
“물을 걸 물어야지. 사람이라면 가족 옆에 있고 싶어 하는 법이야. 살았든, 죽었든…….”
“난 가족이 없어서.”
무뚝뚝하던 이본느의 얼굴이 잠시 누그러졌다. 아셀이 마하의 노예 출신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마하는 노예를 가장 잔인하게 혹사시키는 나라였다.
“죽었니?”
“원래 없었어서 모르겠는데.”
“……이제는 황제께서 네 가족이나 다름없는 거 아니니. 널 많이 의지하시는 것 같던데.”
아셀이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영지는 안 돌아봐요?”
아셀의 존대는 어딘가 어색했다. 제대로 크로이센어를 배운 적이 없는 듯했다.
공작저의 정원에서 드니스에게 가져다줄 꽃을 고르고 있던 이본느는 대답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질문을 모조리 다 대답해 줄 심적 여유는 그다지 없었다.
“보통 황후들은 영지에 오면 영지민들을 위해 그것도 한다던데.”
“그것?”
“행…… 진.”
그거야 보통 황후들이나 하는 거지. 이본느는 생각을 삼켰다.
“소문만 무성한 황후가 뭐 자랑이라고 행진까지 하며 영지민들을 보지?”
무심하게 대꾸하던 이본느가 고개를 돌려 아셀을 바라봤다.
“그런데 호위가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또 뭔가? 자네는 내 안위에만 신경 쓰면 되는데.”
아셀이 이본느의 눈길을 피해 괜히 허공을 쳐다봤다.
망했다. 황후가 공작저에 틀어박힌다면 일개 호위인 자신이 무슨 수로 끌고 나가나. 이런 명령을 내린 카를로이가 원망스러워졌다.
꽃을 한 아름 들고 일어난 이본느가 성큼 아셀 앞으로 다가갔다. 아셀의 미숙한 태도는 이본느의 추측에 확신을 실어 주었다.
처음부터 카를로이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사람을 붙이진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이본느는 자신을 특별히 똑똑하다 생각지도 않았지만, 말도 안 되는 걸 믿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감시가 목적일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아셀이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그 이상 명을 받은 게 있는 듯했다.
“폐하의 명이 무엇이길래 그러지? 솔직히 말한다면 나도 생각을 해 보겠네. 아버지께 말할 생각도 없어.”
“호위라니까요.”
눈알을 불안하게 도로록 굴리는 꼴이 참 신빙성 있어 보였다. 이본느는 카를로이에게 인재가 없나, 잠시 고민했다. 이러니 델루아 공작이 득세하는 게 아닌가.
“내가 의심한 순간부터 이미 자넨 틀렸어. 차라리 날 설득하려고 시도하는 게 낫지 않나? 폐하께서도 이 정돈 이해하실 텐데.”
“…….”
“싫으면 그만두게. 그럼 난 내 방에 가서 좀 쉬어야겠어.”
미련 없이 돌아서려는 이본느의 앞을 아셀이 막아섰다. 호기롭게 막아선 것과 달리 아셀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본느는 갈색 머리 호위가 계산을 끝낼 수 있도록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어둠의 숲.”
“뭐?”
“폐하는 궁금해해요. 그곳을 왜 꽁꽁 막아 두는지.”
이본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걸 궁금해하실 이유는 또 뭐지? 강한 마기가 위험해 막아 두는 것을 모르신단 말이야?”
카를로이가 델루아 영지를 뒤집어 놓았을 때 어둠의 숲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걸 이본느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본느가 알기로는 처참한 폐허가 된 그곳엔 카를로이가 신경 쓸 만한 것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델루아 공작이 그곳에 자신 말고 아무도 들어갈 수 없도록 마법을 건 것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어둠의 숲을 병적으로 미워하기 때문이었다.
아예 터를 들어내려고 했지만, 태초의 인간이 태어나 마기가 가장 강한 곳은 쉽게 없어져 주지 않고 음산한 기운만 더 심해졌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딸 이본느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곳에 그 누구도 들일 수 없다는 기괴한 집착 때문이기도 했다.
“거긴 아무것도 없어. 누구에게도 좋을 것이 없어 막아 둔 것뿐이네.”
“그럼 들어가 봐도 되겠네요.”
“내 아버지를 칠 만한 그 무엇도 없다는 말인데.”
이본느의 직설적인 말에 놀란 아셀이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공작 때문이 아닌데……. 헙.”
말에 놀라 입을 다무는 아셀을 보고 생각이 복잡해진 것은 이본느였다. 대체 공작 때문도 아니면 카를로이가 거기서 찾고 싶은 게 뭐가 있단 말인지.
불현듯 울면서 자신의 예전 이름을 부르던 카를로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찬물을 맞은 듯 몸이 차가워졌다.
그럴 리가 없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루를 찾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런 하찮은 약속을 14년간 기억할 이유가 카를로이에겐 없다.
“공작 때문이 아니면 뭐지?”
찾는 사람이라도 있냐고 물으려 하자 머리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미친 베르니의 마법사가 이번엔 뇌를 더 꼬아 놓은 모양이었다. 이 정도 질문도 안 된다니.
“그냥 안 보여 주니까 수상하게 여기는 것뿐이에요.”
아셀은 뻔한 대답을 했다. 어둠의 숲에 직접 데리고 가서 뭘 하는지 봐야 감이라도 잡히겠는데 이본느로선 방도가 없었다. 겉으로만 델루아 공작의 딸이지, 실제로는 공작저 외 출입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게 이본느였다.
공작이 없는 지금은 어둠의 숲에 가고자 하면 갈 수는 있겠지만 후가 문제다. 고용인들은 모든 걸 보고할 테고, 공작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텐데.
“……생각을 좀 해 보지.”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또 쏙 하니 탑으로 들어가는 이본느의 뒷모습을 아셀이 찌푸린 눈으로 쳐다봤다. 황후가 여러모로 수상하다.
* * *
황궁에는 황제도, 황후도 없었다. 황제야 렉셈 소르타의 라 소르티오에 간 것이니 하루 내로 오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부재중인 것은 맞았다. 해서 푸르투 궁전에 있는 사람 중 현재 가장 높은 사람은 황비 키아나였다.
크로이센의 마지막 황비는 200년도 훨씬 전에 있었다. 뜬금없이 황비를 맞이하게 된 궁전은 황비의 역할과 위치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어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황비가 황제와 황후 다음이란 것은 기본적인 합의 사항이었다.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황비 전하.”
앙센 영지의 백작, 룩스 앙센이 예의 그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키아나를 쳐다봤다. 초대 지도자 다섯 가문 중 하나인 앙센의 백작이요, 현재는 델루아 공작의 최측근인 사람이었다. 로덴 후작이 가장 싫어하는 가문의 사람이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은 그는 이제 기껏 20대 후반이었다. 물론 그를 싫어하는 건 로덴 후작뿐만은 아니었다. 키아나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나야말로 그대가 나까지 찾아오리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두 분 폐하께서 안 계시니 어쩔 도리가 없지요.”
“그다지 급한 일도 아닌데 하루 정도도 기다리지 못한다? 하기야, 자네의 인내심이 라르투아에 뜨는 해보다도 짧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
웃으며 비꼬는 말을 들은 앙센 백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듯했지만, 그는 금방 제 얼굴을 되찾았다.
“여전하시군요.”
“상대가 여전하니까.”
“마하의 정복 전쟁이 끝났다는 걸 아십니까? 곧 있으면 그쪽에 보낸 크로이센의 군인들도 돌아오겠지요.”
역시 본론은 따로 있었다. 뭐라도 떠보려고 온 모양이지.
키아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누가 물어봤나?”
“궁금해하실까 싶어 말씀드렸지요. 그 녀석은 이번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누구?”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키아나를 보고 앙센 백작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키아나가 황비가 될 것이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그중에서도 앙센 백작의 충격이 가장 컸다.
앙센 백작은 자신의 남동생, 아니 남동생이라고 하고 싶지 않다. 여하튼 앙센 백작은 키아나가 그 천한 놈과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는 걸 유일하게 눈치챈 사람이니까.
하지만 빌어먹게도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둘은 만났을 만한 구실도 없었다.
“클라이드 앙센, 제 아버지가 밖에서 데리고 온 그 천한 놈 말입니다.”
“저런. 앙센가의 차남이라면 그대의 동생이 아닌가? 천한 놈이라니, 전대 앙센 백작이 루푸스에서 눈물 흘리겠어.”
“앙센의 성을 받았다고 피까지 바뀌진 않지요.”
사생아를 큰 흠으로 여기는 크로이센에서 클라이드 앙센은 그 존재만으로도 이야깃거리였다. 보통의 사생아였어도 문제였을 텐데 클라이드 앙센의 어머니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베르니인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베르니의 노예였다는 것이었다.
키아나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가? 아무튼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다니 잘됐네. 볼일 끝났으면 가 보지 그래. 그대 얼굴 보는 것도 전쟁만큼이나 큰 고역이야.”
친절한 얼굴의 황비는 웃으면서 말을 재수 없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앙센 백작은 언젠가 저 낯짝을 무너지게 해 주리라고 다짐했다.
“……제가 증거만 찾으면 당신의 황비 생활도 끝입니다.”
“하암. 황실 모독죄로 잡혀가고 싶단 말을 뭐 그리 돌려서 말하고 그러나.”
“그놈이 이번엔 또 어떻게 살아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다음번엔 그러지 못할 겁니다.”
앙센 가문에서도 노예 취급 받던 클라이드는 전대 앙센 백작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긴 덕에 간신히 앙센의 성을 받았다. 그 이후로 룩스 앙센이 클라이드를 치워 버리기 위해 온갖 전쟁에 내보낸다는 건 크로이센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키아나는 애잔함을 가득 담은 낯빛으로 룩스 앙센을 내려다봤다.
“있잖나, 백작.”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앙센은 미심쩍은 얼굴로 로덴 가문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그러나 가장 짜증 나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내가 자네 일기장인가?”
“예?”
뜬금없는 소리에 앙센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대 부친이 살아 있을 적 그렇게 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사람이었다더니……. 뭐라더라, 살생부라고도 한다지?”
“갑자기 제 아버지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제발 부탁인데 자네도 차라리 일기를 써. 묻지도 않은 거 혼자 떠들고 싶으면 백작저에나 가서 하든가. 외로우면 결혼이나 할 일이지 왜 날 잡고 떠들지? 동생 자랑은 딴 데 가서 해, 내 시간 빼앗지 말고.”
키아나는 하품까지 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우아한 동작이었으나 앙센 백작을 화나게 하기는 충분했다.
“뭐야? 아직도 안 갔나?”
앙센 백작은 들어올 때와는 다르게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져서 황비궁을 나갔다. 후작가 영애였을 때도 재수가 없더라니 황비가 되어선 더 심해졌다. 앙센은 이날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 다짐했다.
룩스 앙센이 나가자마자 키아나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다. 앙센이 나간 문을 노려보며 키아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너무 늦어. 너무 늦어.”
중얼거리는 소리가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맞물렸다.
황제는 황후를 이용하겠다 했지만 둘의 사이는 마치 크로이센과 베르니처럼 멀었다. 이 속도로 가다간 그사이에 클라이드는 전쟁에 몇 번 더 차출당하다 죽은 사람들이 간다는 루푸스해 직행길을 가게 될 터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이를 더 가깝게, 황후를 이쪽으로 끌고 와야 한다.
“밤을 보내도 그 모양이라니, 어쩌면 좋아. 그런 얼굴 놔두고 잘 쓰지도 못하나? 황후 쪽을 건드려 봐야 하나?”
여전히 불편한 황비의 관을 만지작거리며 키아나가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 * *
“헌법을 개정하도록 하지. 황제의 권력을 귀족원과 나누겠네.”
카를로이가 알렉시스에게 꺼낸 조건은 그러했다.
“그게 제게 좋은 일입니까?”
“그럼 황제 하나에 희비가 갈리는 일도 줄어들겠지. 적어도 황제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크로이센이 구렁텅이로 들어가진 않을 테니까.”
“폐하가 아니더라도, 귀족원에는 델루아 같은 자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니 그대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예전의 알렉시스 뒤냐였다면 이 조건을 맘에 들어 했을 테고, 바로 받아들였을 터였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변한 사람은 카를로이나 델루아 공작뿐만은 아니었다. 알렉시스도 변한 점이 있었다.
“델루아에 대한 처분권을 저한테 주십시오. 그를 쳐 내는 방식, 델루아가를 없애는 방식 모두 제 뜻대로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델라이드의 죽음 이후로 알렉시스의 자랑스러운 이성은 반쯤 날아갔다. 빈자리는 차가운 복수심으로 채웠다.
카를로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다 그대 맘대로 해도 좋아. 하지만 델루아 공작, 그 인간의 처분은 내가 하겠네. 죽인대도 내가 직접 죽일 테니.”
“다른 건 맘대로 해도 된다라……. 다른 게 뭐가 남았는지 모르겠군요. 아, 델루아의 딸이 황후라지요.”
갑자기 이본느가 떠오르는 바람에 카를로이의 평정심이 살짝 흔들렸다.
“참…… 얄궂기도 하지. 아델라이드의 자리에 하필이면 델루아의 딸이 앉다니요.”
알렉시스의 눈빛은 그런 걸 가만 놔두고 당했냐고 비난하는 듯했다.
“델루아의 딸은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델루아를 역사에서 없앤다는 건 그 딸도 없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대답이 없는 카를로이를 보고 알렉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그사이에 정이라도 주신 것은 아니겠지요? 정이라곤 없으신 분이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럴 리가 있나. 황후를 패로 쓰면 좋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뿐이야.”
“흠, 나쁘진 않습니다만……. 그럼 델루아의 딸에 대한 처분권은 제게 주십시오.”
“왜, 설마 죽이기라도 할 참인가?”
알렉시스가 가볍게 웃었다.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저나 폐하에게나 유혹적인 제안이 아닙니까. 설마라고 하실 것까지야.”
하지만 그 웃음이 사라지자마자 알렉시스의 얼굴엔 삶의 생기가 말살된 삭막함만 맴돌았다.
“델루아의 딸 사랑이야 저도 익히 알고 있지요. 그런 놈에게도 희미한 인간성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제는 흐릿해진 과거를 떠올리며 알렉시스가 중얼거렸다.
“그런 소중한 사람을 잃는 감정을…… 델루아가 느낄 수 있다면. 그래요, 확실히 유혹적이지요.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게 될 테니.”
“죽일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
이번엔 알렉시스가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진심이십니까? 전 폐하께서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실 줄 알았는데.”
그랬었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더 컸다. 자신의 변화에 놀란 것은 누구보다도 카를로이 저 자신이었다.
“……우리 쪽으로 넘어온다면 공을 세울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델루아의 딸입니다. 도움을 준다면, 참작은 될지 모르는 일이나, 칭찬받을 일은 아니지요.”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카를로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알렉시스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저도 죽일 생각을 하는 건 아닙니다. 델루아와 똑같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뭐, 지금 당장은 말입니다.”
알렉시스의 눈을 카를로이가 어색하게 피했다.
“하지만 폐하의 반응을 보니 더더욱 제가 그 처분권을 가져야 하겠군요. 이리도 무르신 태도라니. 델루아의 딸이 고새 누구를 홀렸나 봅니다.”
알렉시스는 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예전 델루아 공작을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네.”
“아니면 거절하실 이유도 없겠군요. 델루아는 폐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그 딸은 제게 주시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카를로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미 죽이지 않겠다고까지 알렉시스가 말했는데 뭘 더 망설일 필요가 있나.
아니, 사실은 죽이겠다 해도 괜찮아야 한다. 델루아 공작의 잘못과 그 딸은 무관하다는 것은 머리로만 이해 가능한 사실이었다.
불현듯 머릿속에 이본느가 웃던 모습과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겹쳐졌다.
“어쩌시겠습니까?”
카를로이는 순식간에 머리를 지배한 이미지를 지워 버리기 위해 알렉시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지금이야말로 지겹도록 들었던 그 이성을 발휘할 때였다.
이본느 델루아는 누가 뭐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델루아였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결국 카를로이는 알렉시스에게 원하는 것을 주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그것이 이본느의 목숨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 * *
<아가씨가 가신 이후로 더 약해지셨어요. 좋아하시던 산책도 잘 안 하시고.>
잠든 드니스를 지켜보며 이본느는 제인의 말을 떠올렸다.
아, 얼마나 안일했는지. 그녀 없이도 드니스가 잘 지낼 거라 생각했던 것부터 실수였다. 삶의 이유라곤 이본느 하나만 남은 드니스가 오랜 시간 딸과 보지 못한 채로 잘 지낼 리가 없었다.
앙상한 드니스의 팔을 만지자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또 오랜 시간 떨어져 있게 되면 드니스의 건강을 보장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젠 델루아 영지에 또 언제 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황후인 이상 거동이 자유로울 수 없다.
이본느가 드니스와 붙어 있을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델루아 공작이 카를로이를 이기거나, 카를로이가 델루아 공작을 이기거나. 어떤 식으로든 이 지긋지긋한 대치의 끝이 나야 이본느의 마리오네트 역할도 끝이 난다.
“루?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밤새 그러고 있었어?”
잠결에 중얼거리는 드니스의 이마에 이본느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이본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엄마가 건강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너 오니까 이미 병이 다 나은 거 같아. 몸이 훨씬 가볍지 뭐니.”
“내가 옆에 없어도 말이야. 또 언제 오게 될지 모르는데.”
드니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본느는 안심할 수 없었다. 드니스를 가장 잘 아는 건 이본느였다. 아프냐 물을 때도 드니스는 항상 저 표정으로 아니라 대답했었다.
카를로이와 델루아 공작의 싸움은 치열한 접전이었다. 어느 한쪽의 승리를 쉽게 점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정하기 위해서는 황후궁에 처박힌 상태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둘 사이에서 외줄 타기를 할 순 없고, 줄에서 자진해 떨어지기엔 아직 지킬 것이 남았다. 공작의 변덕과 선심에 기대는 걸로는 드니스의 안위를 보장할 수가 없다. 지금이야 황후지만, 나중에 또 이본느를 어떻게 써먹을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좀 더 자, 엄마.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어디를?”
“산책.”
이본느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드니스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본느는 조용히 탑을 빠져나와 아셀을 찾았다. 몇 번 두리번거리자 바로 눈치챘는지 아셀이 이본느 앞에 톡 떨어졌다.
“어둠의 숲으로 데려가 주겠네.”
“……원하는 게 뭐예요?”
아셀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지만, 이본느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있다면 들어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셀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이본느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내게 크게 빚졌다는 것만 알고 있어.”
마차를 하나 끌고 오라고 명을 하자 집사장이 새파래진 얼굴로 튀어나왔다. 고용인들이 모두 바뀐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집사장과 메리앤, 그리고 메리앤의 자식들이었다. 공작에게 생계형 충성을 바치는 메리앤과는 다르게, 집사장은 공작에게 진정으로 충실한 종복이었다.
“아가, 아니 폐하. 어디를 가시겠다고요?”
“영지를 좀 둘러보고 오려고.”
집사장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옆에 있는 아셀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외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본느를 사생아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이본느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일한 자식인 내가 영지 하나도 못 둘러본다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델루아 영지는 폐하께는 위험한 곳이라 그러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공작님께선 폐하 걱정을 하셔서…….”
“폐하의 호위와 함께하니 이해하실 거야. 정 그러면 돌아와서 내가 아버지께 따로 말씀드리겠네.”
“하지만.”
“난 이제 공녀가 아니라 황후라는 사실을 그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집사장은 이본느를 막지 못했다. 아셀이 보는 앞에서 이본느를 막을 수 있는 건 공작 하나였고, 그는 지금 없었다. 결국 집사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마차를 이본느 앞에 대령할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눈길로 둘을 살피던 집사장은 이본느를 따라 마차에 타던 아셀의 집요한 관찰을 눈치채고 나서야 표정을 정리했다. 마차에 타서 출발할 때까지도 아셀은 집사장의 낯을 살폈지만 정확히 무엇이 이상한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어둠의 숲으로 향하는 내내 아셀과 이본느는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이본느는 자기 생각에 빠져 창밖만 보고 있었고, 아셀은 그런 이본느를 관찰하고 있었다.
황후의 수상한 점은 한둘이 아녔다. 카를로이에게 어떻게 정리해서 보고하면 좋을지 아셀은 고민 중이었다. 공작의 딸이 왜 이러는 걸까? 굳이 이렇게 해 줄 필요는 없을 텐데. 그리고 공작저의 이상한 분위기는 또 뭐고.
아셀도 딱히 더 물러날 곳은 없어 이본느가 하자는 대로 하고 있긴 하지만, 이 상황은 확실히 이상하고 또 이상했다.
“그곳엔 델루아의 피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어. 이미 알고 있겠지.”
“네.”
“나와 닿은 상태에서만 결계를 넘을 수 있어.”
왠지 이 상황을 알게 되면 카를로이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직감이 들어 아셀은 괜히 팔을 문질렀다.
마차는 어둠의 숲 근처에서 멈춰 섰다. 더 진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차에서 내려 익숙한 길을 걸어가며 이본느는 긴장감에 손을 꽉 쥐었다. 이곳을 떠나고 나서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는데.
어둠의 숲의 입구인 마녀의 나무가 보이자 이본느가 아셀에게 손짓을 했다. 아셀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손가락 하나를 이본느의 손가락 하나에 가져다 댔다. 접촉이라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맘대로 둘러보든가.”
이본느는 아셀 옆을 따라다니며 감시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아셀은 더 의심스러워지는 마음을 감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땅은 온통 검은색이었다. 검은 땅 위에는 살아 있는 생명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무들이 울창했을 숲엔 타 버려 짤막해진 밑동들만 몇 개 남아 있었다. 낮지 않은 언덕, 산도 있었지만, 초록빛은 찾기 힘들었다.
“시체를 많이도 태웠거든. 시체를 한곳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지.”
유독 까맣고 재가 쌓인 곳을 아셀이 쳐다보고 있자 이본느가 한 말이었다. 아셀은 이본느의 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이곳은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본느는 멀찍하니 서서 자신이 살았던 곳을 바라봤다.
사생아와 그 어미가 어둠의 숲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전대 공작 부인은 참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과의 결혼 후에 생긴 사생아였다.
공작 부인을 더 화나게 만든 점은 공작이 먼저 이 사실을 알아내고도 그들을 바로 없애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감히 고민을 하다니. 공작 부인은 귀한 집의 고명딸이었고, 이런 일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라 생각했다.
공작 부인은 사람들의 눈을 피한 새벽, 편지를 하나 남기고 딸 이본느와 함께 공작저를 떠났다. 공작 부인이 친정으로 가기 전, 두 눈으로 직접 사생아와 그 어미를 보고 싶다고 마음먹은 것이 누구에게 더 불행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공작 부인과 그 딸, 드니스와 리리안, 델루아 공작 다섯 모두에게 끔찍한 일이었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한 거예요?”
“글쎄. 내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그래.”
성의 없게 대답했지만 이본느는 대충 이유를 알고 있었다.
심한 폭우가 지나간 땅이었다. 공작 부인과 그 딸이 타고 있던 마차는 어둠의 숲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산사태에 굴러 내려온 돌들을 맞고 처참히 부서졌다.
어둠의 숲을 잘 모르는 마부가 잘 가지 않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운이 좋지 않았다. 공작 부인과 딸은 거대한 돌들에 깔려 그대로 즉사했다.
델루아 공작이 가장 첫 번째로 원망한 것은 드니스와 리리안이었고, 두 번째로 원망한 것이 어둠의 숲이었다. 그는 그 둘에게 모두 복수했다.
어느새 깊숙한 곳까지 보고 온 아셀이 성큼 다가왔다.
“여기선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다는 걸 이제 잘 알았겠지. 폐하께도 그리 전해.”
“왜 이렇게 해 주는 거예요?”
“안 될 이유는 뭐지? 난 공작의 딸이기도 하지만, 폐하의 반려이기도 해. 이 정도가 그리 대수는 아닐 텐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제 이본느는 공작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억울하니 얻을 것 하나 정돈 있어야겠지.
“그래서, 폐하께서 찾고 계신 게 뭐지?”
아셀이 입을 꼭 다물었다. 공작의 흠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는 말은 사실인 듯한데 그럼 무얼 찾는 건지.
아셀의 얼굴이 미동도 없자 이본느는 들고 있던 실크 장갑을 손에 끼며 말했다.
“아, 자넨 모르나? 나갈 때도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자넨 여기서 나갈 수 없어.”
그 말을 남기고 이본느는 걸음을 뒤로해 마녀의 나무 뒤쪽으로 나갔다. 결계의 바깥이었다. 아셀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이본느 가까이 다가갔으나 투명한 벽에 부딪힌 듯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본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셀을 바라봤다.
“나 혼자 공작저로 돌아가야 하려나? 자네가 안타깝게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폐하께는 내가 대신 전해 드리겠네.”
아셀은 난감한 얼굴로 결계를 두드렸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황후 하나 상대한다고 방심한 자신이 잘못이었다.
그러니까 카를로이는 왜 이런 일을 맡겨서는! 차라리 전쟁터에서 사람이나 죽이는 게 더 편한 일일 텐데.
“저런. 젊은 나이에 안됐군. 묏자리는 걱정하지 말게, 이곳의 모든 땅이 다 죽은 자의 무덤이니.”
이본느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뒤를 돌았다.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던 아셀이 결국 외쳤다.
“사람!”
이본느가 뒤를 돌았다. 아셀은 원래도 사람의 표정을 읽는 일에 서툴렀지만 이본느의 표정은 유독 더 어려웠다. 아까처럼 똑같은 무표정인데 어딘가 달라진 듯도 했다.
어떤 사람이냐고 캐묻는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아셀이 고민했지만, 이본느는 더 묻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찾아오셨지? 누구냐는 질문보단 훨씬 대답하기 쉬울 텐데.”
이상한 질문이었다. 아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본느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아셀의 무응답이 무슨 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 시체만 널렸다는 건 폐하께서도 익히 아시는 사실일 텐데. 사람만 찾아오라고 하셨나?”
아셀은 정말이지 죽고 싶어졌다. 인생 최초의 처참한 실패였다. 입을 다시 조개처럼 다문 아셀을 보고 이본느가 또 한 번 고개를 까딱거렸다.
“혼자 남겨지실 폐하가 안됐군.”
무신경하게 말하는 꼴이 마치 마녀처럼 느껴졌다. 이제 카를로이가 네 가족이니 뭐니 할 땐 언제고 그걸 그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카를로이가 아셀에게 내린 최우선 명이 ‘죽지 말 것’임을 알고 저렇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말하는 건지. 아셀이 이를 갈며 답을 내주었다.
“……브로치.”
하다못해 무슨 브로치냐고도 이본느는 더 묻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 물으려고 자신을 협박하다니 황후는 정말로 이상했다.
냉정했던 얼굴이 잠시 흐트러지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이본느는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자넨 원래 능력이 좀 부족한 건가, 아니면 날 너무 무시한 건가?”
이본느는 장갑을 벗어 땅에다 버리며 아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치욕감에 아셀이 얼굴이 빨개져서 이본느의 손에 손가락을 얹었다.
“뭐든 무슨 상관이에요. 이제 폐하께서는 제가 바보라 생각하실 텐데.”
결계를 벗어나자마자 손을 뗀 아셀이 투덜거렸다. 투덜거리던 아셀은 이본느가 옆에서 단도를 꺼내 들고 제 손을 찌르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이본느의 팔을 잡았다. 하지만 이미 찔린 손바닥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결계를 강화하려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얼굴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아셀은 황후가 자신을 이제 완전히 바보 취급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식으론 안 되는 거 저도 알거든요. 마법사가 아닌 이상.”
“아주 바보는 아니었구나…….”
이본느는 거짓말이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왜 그런 기행을 벌였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카를로이에게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후환을 견뎌야 할지 막막해진 아셀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셀과 함께 숲에서 돌아온 이본느가 마차에 타려고 하자 마부가 기겁을 하며 이본느의 손을 쳐다봤다. 이본느가 아무렇지 않게 옷소매로 피를 대충 닦아 댔다.
“그렇게 볼 것 없네. 호위가 실수로 날 찌른 것이니.”
무고한 누명에 아셀의 눈이 동그래졌지만 이본느는 혼자 쏙 마차에 탔다. 아니꼽다는 듯 자신을 보는 마부의 눈을 피해 아셀이 마차에 따라 탔다.
“내가 아니잖아요!”
“그냥 넘어가지 그래. 내가 황후가 수상하다고 폐하께 잔뜩 보고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그대도 이 정도는 해 줘야지.”
미친 소리에 아셀은 망연한 얼굴로 팔을 축 늘어트렸다. 황후는 정말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공작을 위해서 이러는 건가요?”
아셀의 질문에 이본느가 아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냉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넌 네가 뭐라고 생각하지?”
“예?”
“널 이루는 것들은 여러 가지겠지. 폐하의 사람, 마하인, 기사, 아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려고 아셀이 인상을 썼다.
“나도 델루아의 딸이지만은 않아.”
이런 식으로는 똑똑지 못한 아셀에겐 너무나 어려운 말이었다. 아셀은 그 말을 그대로 기억해 카를로이에게 전달이나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공작저로 되돌아가는 길에 이본느는 자신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델루아의 딸로만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새삼스러웠다.
공작저에 도착하자 집사장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공작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공작이 돌아왔다.
* * *
이본느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공작저 안으로 들어가며 이본느는 마음을 다잡았다.
델루아의 딸로만 살 순 없겠지만, 자신은 그 끔찍한 남자의 딸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그를 상대할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델루아 공작의 집무실에 들어가자 그는 뜻밖에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평소와 같았으면 이미 물건이 한두 개쯤 날아왔을 텐데. 물론 표정은 이미 책상을 다 쓸고도 남았을 정도로 살벌했다.
“설명해라.”
이본느는 긴장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황제가 붙인 호위가 너무 거슬리게 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호위 때문에 엄마를 편하게 못 보고 있는데……. 어둠의 숲에 데려다주지 않으면 델루아 탑이 수상하다고 황제에게 말할 거라고 그러더군요.”
“그 정도야 황제가 알아봤자 어떻게 할 수도 없어. 크로이센에 그 마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 가능한 놈은 하나도 없을 거다.”
베르니의 마법이 짜증 날 정도로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공작이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피오르를 데려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게다가 그 탑이 공작저에서 가장 보호가 잘되는 곳인 걸 네가 진정 몰랐다는 거냐? 해서 그런 놈 따위는 무시하면 될 것을 친히 어둠의 숲까지 데려다주었단 말이야, 지금?”
“공작님께서야 상관없으시겠지만, 전 있어요. 혹시나 일이 잘못돼서 엄마를 못 보게 되면 어떡해요. 예전에 황제가 영지를 뒤집어엎을 때도 엄마가 몸을 급하게 피해야 해서 병세가 악화됐었잖아요.”
어차피 모두 거짓말인 것도 아니다. 반쯤은 진심이고, 반쯤은 거짓이었다. 진심이 섞인 거짓은 훨씬 솎아내기가 힘들다는 걸 이본느는 알았다. 그리고 리리안 루이던 시절엔 거짓말을 밥 먹는 것보다도 많이 했던 사람이 바로 이본느였다.
“……그래서 죽이려고 했어요.”
델루아 공작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의심이 다 사라지진 않았지만 분명 놀란 것처럼 보였다.
“후환이 되게 놔두는 것보단 낫잖아요. 결계 안으로 들여보낸 뒤 나가게 해 주지 않으면 거기서 영영 못 나올 테니까, 그러려고 했어요.”
“근데 왜 살아 돌아왔지?”
“생각만큼 멍청한 호위는 아니어서요. 눈치채고 절 칼로 찌르는 바람에 실패했어요.”
공작의 시선이 아직도 피가 묻어 있는 이본느의 손을 향했다.
“거짓말이 는 거냐, 사람이 변한 거냐? 네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엄마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어요. 아세요?”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모르는 듯했다. 하긴 드니스에게 관심이 있을 리가 없지. 목숨만 붙어 있으면 그만일 것이다.
“작은 위험도 저는 부담할 수가 없어요. 황제가 제 트집을 잡지 못해서 안달인데 혹시라도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말만큼은 진심이라 갑자기 눈물이 고이려 했다.
“호위가 내내 탑을 감시하고 있었다고요. 엄마 방 창문 앞에 앉아 있던 적도 있었어요. 공작님은 내내 공작저에 안 계시지, 불안해서 저는…….”
목이 메는 바람에 이본느의 말끝이 흐려졌다. 델루아 공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본느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의심을 하는 얼굴은 또 아니라, 속을 알기가 더 어려웠다. 물건을 관찰하듯 무미건조한 시선이었다.
“멍청한 것.”
이윽고 공작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익숙한 비난이었다.
“그런 일은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게야. 그리 허술해서는…….”
공작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자 이본느는 그제야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다.
“공연한 시도나 했으니, 그 마하 노예 놈 의심만 더 키운 셈이 아니냐! 황제가 참도 좋아하겠어. 황후를 칼로 찌른 놈이니 그걸 덮으려고 별말 하진 않겠지만, 경계만 더 심해지겠군.”
“……죄송해요. 다음부턴…… 조심할게요.”
“다음? 다음엔 또 누굴 어설프게 죽이려 들 셈이냐?”
말은 질문이었지만 공작은 대답에는 별 관심이 없는 표정이었다.
“……저, 공작님. 엄마가 저랑 오래 떨어져 있을수록 상태가 악화되는 것 같아요.”
“대체 뭘 어쩌라는 게야? 네 침실 안에라도 넣어 주길 원하는 거냐? 가다가 죽을 게 뻔한데.”
“아니,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런 게 아니고…… 공작님이 원하시는 바를 좀 더 빨리 이루는 데 제가 도움이 된다면…… 엄마와 함께 살 수 있을까 해서…….”
공작의 눈썹 한쪽이 들린 것을 보고 이본느가 황급히 덧붙였다.
“시키는 건 전부 다 할게요. 정말이에요. 일이 다 끝난 후에 엄마와 함께 있게 해 주시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고?”
“황제 아닌가요?”
공작은 별다른 답 없이 예의 그 관찰하는 시선으로 이본느를 훑었다. 이본느는 몸에서 긴장을 빼려고 노력했다.
이윽고 공작의 얼굴에 표정 하나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이본느가 가장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미소였다.
“난 네가 아직도 할 일을 모른다는 게 충격적이구나. 1년간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네가 뭘 해야 하는지.”
“네?”
“지난 1년간은 역시 생각 없이 멍청하게 산 게 맞았나 보지? 물어보는 꼴 하고는.”
공작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이본느는 머리를 굴렸다. 지난 1년간 공작이 자신한테 뭘 시킨 거라곤 되지도 않게 카를로이의 환심을 사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 그제야 이본느는 이해했다.
“1년 내내 누누이 말했지. 그놈의 환심을 사라고.”
“하지만, 황제는 저를…….”
“뭐든 시키는 건 다 하겠다 하지 않았나? 황제가 네게 마음을 열면 열수록 내 일이 더 빨리 끝날 거다. 그때가 오기만 한다면야 네 엄마랑 살든 어쩌든, 네 멋대로 해도 난 상관없지.”
“차라리 황제를 죽이는 게 더 빠르겠어요.”
“그 부분은 내가 노력할 일이니 넌 네 일이나 해라.”
홧김에 한 말인데 공작의 대답이 현실적이라 소름이 끼쳤다.
그동안 카를로이를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죽이지 못한 것이었는지. 그렇다면 이본느에게 그런 짓만은 시키지 않는 게 감사한 일이었다.
“내 말 명심해라. 그놈이 너에게 미치게 만들어. 시작이 어렵지, 물꼬가 트이면 그보다 쉬운 일이 없을 거다. 불만 한번 붙여지면, 주변 모든 것이 기름이 될 테니.”
카를로이가 미쳐? 그것도 자신에게? 이번엔 진심으로, 카를로이를 죽이는 게 빠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애까지 생기면 더 좋겠지. 애만 낳아 봐라. 네 어미와 평생 놀고먹을 수 있게도 해 주지.”
이본느는 공작의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뭐를 원해? 카를로이와 자신 사이의 뭐?
“……네?”
어차피 카를로이를 죽이거나 없앨 요량이면서 아이는 왜 필요하단 말인지.
“반쪽이라도 크로이탄 피를 가진 놈이 내 후계로 있는 게 크로이센을 먹는 데 도움이 더 되겠지.”
하기야 나라를 새로 엎고 건국하지 않을 거라면 정통성 반쯤을 확보하는 것이 좋기는 할 터였다. 그게 자신을 증오하는 카를로이와의 사이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문제지.
하지만 시키는 걸 전부 다 하겠다고 먼저 말한 것은 이본느였다. 이본느는 떫은 얼굴을 숨기고 대답했다.
“……노력할게요.”
“보통 노력 가지고는 되지도 않을 거다. 더군다나 그놈 호위를 네 말대로 죽이려 했다면야, 더 어렵겠지. 어디 한번 잘해 보거라.”
공작이 빙긋 웃어 보이기까지 하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평소처럼 싸늘한 얼굴로 욕을 내뱉는 게 나았다.
“나가 봐라. 그토록 눈물겨운 네 어미랑 보낼 마지막 시간이니 일분일초가 아깝겠지.”
심드렁하게 내뱉는 공작을 보자니 이본느는 자신의 말이 어느 정도 먹혔는지, 조금이라도 먹히긴 했는지 확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무사히 지나갔다.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 * *
알렉시스 뒤냐와 모든 이야기를 끝마치고 온 카를로이가 어딘가 달라 보인다고, 고르텐은 그렇게 생각했다. 평소에도 아슬아슬한 권태가 카를로이를 감싸고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아예 영혼이 사라진 사람처럼 건조했다.
“실성했다는 소문이 돌더니…… 예전과 그대로더군요, 공작은.”
조용한 카를로이를 보며 고르텐이 슬쩍 입을 열었다. 카를로이는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대로? 공작도 예전의 공작이 아니야. 10년간 여기서 물만 쳐다보고 있었으니 그게 어디 제정신이겠나.”
“그래도 확실히 돌아오겠다 한 거지요? 뒤냐 공작이 돌아온다면 판을 완전히 흔들 수 있을 텐데요. 크로이센에서 누가 뒤냐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뒤냐의 확보에 신이 난 고르텐이 열심히 떠들었다.
“중립층 귀족들도 대거 뒤냐에게 붙을 겁니다. 마르키아 변경백만 해도 말입니다. 그 여자가 뒤냐 공을 광적으로 존경한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요.”
“……그러겠지.”
관심이 없는 듯한 말투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판을 뒤집으려고 애를 쓰더니. 뒤냐를 얻어서 한숨 돌리는 건가, 하고 고르텐은 혼자 이리저리 고민해 댔다.
고르텐의 불안은 라 소르티오를 출발해 수도의 푸르투 궁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카를로이가 내내 말 한마디 없었기에.
“무슨 일 있으셨어요?”
카를로이의 마중을 나온 황비가 제일 처음 꺼낸 말도 의아함이 담긴 질문이었기 때문에 고르텐은 역시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생각했다. 카를로이는 마치 라 소르티오에서 무언가를 하나 버리고 온 것 같다.
“별로. 황비는 어쩐 일로 마중까지 나왔나.”
“상단 거래처를 다시 확보했다고 아버지께 연락이 왔어요. 델루아가 손을 썼나 봐요.”
미소라도 지을 거라 생각했지만 카를로이는 무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키아나가 고르텐을 쳐다봤지만 고르텐도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 외에 다른 답을 줄 순 없었다.
카를로이의 집무실에 따라온 키아나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델루아와 거래한 대로 귀족원을 다시 열어야 할 텐데 괜찮은 건가요.”
“그 부분은 해결된 것 같으니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라 소르티오에 다녀오신 것과 관련된 일인가요?”
카를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쳐 보이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고.”
왜 신경 쓸 일이 아니냐고, 네가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걸 모르냐고 신경질이라도 내고 싶었지만, 키아나는 참았다. 상대는 황제였다.
아니, 황후를 이용하겠다고만 말하고 도대체 언제쯤 이용하고, 언제쯤 델루아를 꺾을 거란 말인가? 이런 속도로 일을 진행하면 대체 클라이드 앙센은 언제쯤 사지 멀쩡하게 크로이센으로 돌아올 수 있겠냐고.
키아나는 어떻게 말을 시작할까 고민하다 결국 평소처럼 꺼내고 말았다.
“그럼 외람되지만, 본론을 좀 말씀드려도 될까요?”
“지금까지는 본론이 아니었나?”
키아나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후 폐하 말이에요.”
“황후? 황후가 왜.”
나른해 보일 정도로 무감하던 말투가 한순간에 날카로워졌다. 순식간에 다른 얼굴이 된 카를로이를 보고 키아나가 당황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 어떻게 되어 가시나 해서……. 벌써 밤도 두 번은 보내신 것 같은데 진전이 있으신가 하고…….”
“……적당히 하고 있어.”
“좀 더 빠르면 좋지 않겠어요? 황후 폐하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 쉽게 넘어오지 않는 것 같은데요.”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은 카를로이의 눈치를 살피며 키아나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했다.
“제가 조언……을 드리면 너무 무엄할까요?”
“말이나 해 보지.”
뭔 소리든 간에 그냥 빨리 말하고 이제 그만 귀찮게 하라는 태도에 키아나는 마음이 상했지만, 다시 클라이드를 생각하며 참았다.
대체 라 소르티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람이 이렇게 되어서 돌아온 건지.
“그전에 누굴 마음에 두셨던 적 없으세요? 없으셨을 것 같긴 한데…… 혹시 비슷한 경험이라도 있으시면 황후를 그 사람이라 생각하고 대해 보세요. 진심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요. 이게 생각보다 쉬워요. 상상을 하는 거예요.”
공식 석상에서 키아나가 언제나 감쪽같이 연기를 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앞에 황제를 두고 클라이드를 생각하기.
시시각각 싸늘해지는 카를로이의 얼굴을 보며 키아나는 자신의 말이 특별히 더 무엄한 면이 있었나 하고 다시 점검했다. 평소보다 훨씬 상식적인 말을 한 것 같은데 반응이 영 좋지 않았다. 표정만 봐서는 당장에라도 헛소리 말라 일갈할 것 같았지만, 카를로이는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생각은 해 보겠네.”
키아나는 이쯤 물러나야 할 것을 직감하고 인사를 올렸다. 라 소르티오에 가기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카를로이의 모습을 설핏 살피며 키아나는 집무실을 나왔다.
“흠. 무슨 일이지.”
위태로운 날카로움 대신 건조함이 자리 잡은 카를로이는 그 전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지만, 어쩐지 예전보다 더 황제 같은 모습이었다. 더 재수는 없어졌지만. 키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키아나가 나가고 나서야 카를로이는 쓰러지듯 의대에 기대 눈을 감았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피로감에 모든 걸 내던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아델라이드의 아들인 자신에게도 뒤냐의 피가 조금은 흐르는 듯했다. 관성적으로 그는 이후의 일들을 대비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
원래도 자유로웠던 적은 없었다. 구차하게 하나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았으니 전보다는 자유롭고 가벼워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는 온몸이 묶여 한없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물 위로 끌어 올려 줄 단 하나의 것을 놓았으니 이제 가라앉을 일만 남았나.
카를로이는 이제 기다릴 것이다. 지독할 정도로 지루하게, 느리게 다가오는 익사를.
* * *
수도로 돌아가기 바로 전날에도 탑에서 어머니의 ‘유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황후를 떠올리며 아셀은 탑을 노려봤다. 엄밀히 말하면 그곳을 드나드는 이들 중 유일하게 델루아가 아닌 사람, 하녀 제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둠의 숲에서는 나올 때와 들어갈 때 모두 델루아의 피가 흐르는 사람과 접촉해야 했는데, 저 하녀는 뭔데 저렇게 자연스럽게 드나들고 있는 건지.
어둠의 숲은 오히려 비교적 단순한 마법이다. 기본 원칙에 충실해, 들어갈 때와 나갈 때 같은 단순한 법칙이 작용한다. 사실상 어둠의 숲에는 볼 것도, 딱히 수상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 제 짐작에 확신을 실어 주었다.
아셀은 불퉁한 얼굴로 카를로이를 욕했다. 왜 카를로이는 내 말을 안 믿는 걸까. 카를로이는 아셀의 무력은 믿으면서 직감은 잘 무시했다.
어둠의 숲과는 다르게 저 탑, 저 탑이야말로 델루아 영지에서 가장 수상한 곳이었다. 저 탑은 온갖 고위 마법으로 이루어진 게 분명했다. 사람 하나 정도 맘대로 예외를 두려면 보다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마법사가 여태 크로이센에 있었나. 마하에서도 이런 마법이 가능했던 사람은 손에 꼽았다.
“폐하께서 좀 가서 쉬시래요. 거기서 보고 있어도 얻을 건 없다고.”
제인이 지겹지도 않냐는 듯한 얼굴로 말을 던지다시피 내뱉었다. 그 말만 하고 다시 탑으로 들어가려는 제인을 아셀이 붙잡았지만 탑에 튕겨 뒤로 나가떨어졌다.
‘접촉으로도 출입이 불가능하고.’
제인은 한심스러운 얼굴로 혀를 차더니 탑 위로 사라졌다.
* * *
내일이면 떠나는 딸이라 드니스는 딸을 앞에 두고도 슬픈 얼굴을 채 숨기지 못했다. 이본느는 드니스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엄마, 조금만 참아. 올해 내로 내가 영지로 올게. 공작님이 시간이 좀 지나면 엄마랑 같이 살아도 된다고 했어.”
“뭐, 정말이야?”
물론 공작 어쩌구는 거짓말이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본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드니스에게로 돌아올 작정이었으니까.
창백하기만 하던 드니스의 얼굴은 너무 밝아져서 마치 혈색이 돌아온 듯했다.
“네 남편은 어쩌고? 아무리 한미하다 해도 영주라지 않았니.”
“으응. 그 사람은 내가 뭘 해도 다 괜찮다고 그래. 그런 건 엄마가 걱정할 필요 없어.”
“하긴 공작님이 있는데, 간 크게 어떤 남자가 그러지 않겠어.”
드니스는 눈에 띄게 밝아져 목소리 크기조차도 달라졌다. 이본느가 드니스의 목에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엄마, 참아야 해.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만 기다리면 나랑 살 수 있어.”
“이렇게 편한 곳에서 뭘 못 참겠어. 걱정 마.”
“내가 돌아오면 나랑 엄마랑 둘이 살다가…….”
“으응.”
“엄마 건강이 좋아지면 엄마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렉셈 소르타도, 마하도 가 보고…….”
“그래애. 네 남편 한미해도 돈은 많다고 공작님이 그러셨는데. 여행 갈 돈은 다 주겠지.”
“으응. 그럴 거야. 안 주면 내가 뺏어서라도 올게…….”
이본느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잔잔한 숨소리만 들렸다. 드니스는 아직도 작아 보이는 딸을 끌어안으며 조심스레 입 맞췄다. 시간이 아깝다며 안 자고 버티더니 이제야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드니스는 오랫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 * *
카를로이는 한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둡고 어두운 암녹색의 바다 아래로 끝없이. 힘없이 처진 몸 위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칼, 너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왜 날 찾지 않아?>
루의 눈물이 카를로이의 얼굴을 적셨다. 물속이라 생각했는데 얼굴이 젖는 걸 보니 또 그게 아닌가. 카를로이가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날 잊는 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차가운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루는 사라지려는 것 같았다. 붙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팔 하나 들어 올려지지 않았다. 루가 사라지고, 점점 아래로 가라앉아 숨쉬기가 버거울 때 갑자기 누군가 그를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백금색 머리카락이 카를로이에게로 흘러내렸다.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눈물을 닦아 주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닿으려 하자 부드럽던 머리카락이 이본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하.”
숨을 거세게 들이쉬며 카를로이가 잠에서 깨어났다. 또 꿈이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채로 잠에 들어 침실에 희미한 달빛이 들어왔다.
식은땀이 흥건한 카를로이가 헐떡거리며 숨을 쉬려고 애를 썼다. 몇 번의 처참한 시도 끝에야 막힌 숨이 뚫렸다. 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침대 등받이에 기댔다.
“빌어먹을…….”
욕설이 튀어나왔다. 오늘도 잠에 들기는 글렀고, 달은 너무 밝았다. 백금빛의 달이 괜히 누구를 떠올리게 만들어 카를로이는 눈을 감았다. 뜬눈으로 또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다.
어서 달이 졌으면, 그 빛조차 모두 사라졌으면.
누군가 그토록 지기를 원하는 달은, 어떤 모녀가 그토록 애타게 붙잡고 싶어 하던 달이었다.
달이 지는 동안 이본느는 꿈에서 칼을 만났다. 작은 칼이 카를로이가 되기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루를 찾아 헤매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여 말리고 싶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꿈속에서조차 이본느는 궁금해졌다.
나는 점점 네 생각을 하지 않게 되어서 비 오는 날에나 떠올리곤 했는데. 넌 얼마나 내 생각을 많이 했는지. 왜 아직 포기를 하지 못하고 찾고 있는지. 나에겐 엄마가 있었는데, 넌 누가 있었는지.
물음표가 너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답답함에 눈을 떴을 땐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떠날 시간이었다.
델루아 공작은 볼일이 남아 며칠 더 머무르다 올라오겠다 했다. 보나 마나 베르니의 마법사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리라고 이본느는 추측했다.
“다 알 거라 생각해 말하지 않았지만, 혹시 몰라서.”
공작이 배웅하는 듯 다가와 속삭였다.
“네가 그놈에게 넘어갈 일은 없어야 할 거다.”
“당연한 이야기예요.”
“그놈은 벌써 널 가지고 날 협박할 생각을 하던데 말이다.”
“……네?”
“널 어떻게 하면 내가 끄덕할 줄 알았나 보더군. 그럴 만도 하지. 그놈은 널 진짜로 알고 있으니.”
정말 우스운 건지, 사랑하는 아버지 연기에 심취한 건지, 공작은 심지어 껄껄 웃으며 이본느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공작의 마지막 말은 수도로 올라가는 길 내내 이본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니, 비단 그것만 맴도는 것도 아니었다.
카를로이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14년 내내 잊지도 못하고 찾고 있었다는 멍청이를.
이본느가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그 줄타기가 끝난 날엔 카를로이는 또 어떻게 되는 걸까.
이본느는 처음으로 카를로이의 지난 14년이 궁금해졌다.
* * *
좀 있으면 이본느가 수도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며칠 연달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카를로이는 수척해져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본느가 2주간 없었던 것인데, 심심하면 꿈에 나와 그를 괴롭혀 대는 통에 그리 오래된 것 같지도 않았다. 어떤 꿈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카를로이를 만져서 뜨겁게 만들었다가, 어떤 꿈에서는 눈물로 그를 차갑게 만들었다.
“나가 보시게요?”
황후의 도착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듣고 집무실을 나갈 준비를 하는 카를로이를 보고 고르텐이 물었다.
“2주 만에 오는데 나가는 게 맞겠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심란함 때문에 피할 수 있다면 이본느를 피하고 싶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이성이 그를 잡고 이끌었다. 낭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루를 대하듯 대하라는 키아나의 조언이 떠올랐다. 말이야 좋지만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복잡한 얼굴로 카를로이는 본관 입구로 나갔다. 델루아의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마차에서 이본느가 내리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잡고 내리던 이본느의 눈이 카를로이의 눈과 마주쳤다. 초록빛 눈에 복잡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아.
그 눈과 맞닿은 순간 아직도 꿈인 양 숨이 조여 왔다. 순간 다시 물에 잠긴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기억과 감정이 추가되어 카를로이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