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5화 (6/22)

5. 황후는 황제를 모르고 싶다

“황후.”

머리로는 대답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입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정작 당장 오늘 밤 찾아오겠다는 카를로이의 얼굴은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대가 싫다면 가지 않겠습니다. 난 그대가 먼저 묻기에…….”

“아, 아닙니다.”

이본느가 반사적으로 말을 꺼냈다. 여기서 곧이곧대로 ‘네, 오지 마세요.’라고 대답했다간 그대로 공작 귀에 들어갈 것이다.

카를로이는 영혼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합의를 보자 둘 사이엔 할 말이 더 남지 않았다. 쓸데없이 티스푼만 휘젓던 카를로이가 입을 열었다.

“차 맛이…… 좋군요.”

“아, 네…….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음.”

“빵도…… 좀 드세요.”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다 이본느가 커스터드 크림이 발린 빵이 담긴 접시를 카를로이 쪽으로 살짝 밀었다. 카를로이는 애매한 미소를 띠곤 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 그러지요.”

긍정적인 말과는 다르게 카를로이는 고작 한 입을 먹고 접시에 내려놓고 다시 차를 들이켰다.

“입맛에 맞지 않으신가요.”

“아니, 아닙니다.”

전혀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알고 싶지 않아도 이본느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얼핏 보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힘이 들어간 카를로이의 입매라든가, 별로 만족하지 않아 보이는 눈빛이라든가.

좋아하지도 않는 걸 굳이 좋다고 하면서 비위를 맞추는 꼴이 영 수상했다.

“다른 것을 원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그대로 내오라고 하면 되니까요.”

“아니, 지금도 충분합니다.”

겉만 맴도는 부부의 대화를 듣고 있던 메리앤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종장 고르텐에게 슬쩍 다가가서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딱히 가리는 게 없으시다고 들어서 준비한 건데, 뭘 실수한 걸까요?”

“아니, 실수랄 것까지야 없지요. 시녀장께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저것도 잘 드시니까요.”

“한 입 드는 게 잘 드시는 거군요. 그냥 말씀을 해 주시면 되잖아요. 괜히 또 트집 잡으시려고 말 안 하시는 거죠?”

“예에? 트집이라니요.”

“황비 전하와는 티타임 때마다 아주 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밀어를 속삭이신다면서요. 꿀이나 잼 하나 없이도 그렇게 디저트를 드신다더니, 지금 저 모습을 보세요.”

“아니, 뭘 또 소문이 그런 식으로 난담……. 잼도 드십니다, 드세요. 그리고 방금 한 입 더 드셨으니 두 입입니다. 원래 차를 마실 때 빵은 많이 먹지 않는 거라고요.”

시녀장까지 트집이니 뭐니 운운하자 고르텐은 난처해졌다. 말을 하지 않는 것까지 황후를 괴롭히려 그러는 것처럼 보이면 심히 곤란한 일이다. 그동안 카를로이가 보인 태도가 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황후 쪽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접하려는 것도 익숙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또 눈치 빠르게 알아챌 건 뭐란 말인가? 평소엔 황제가 아무리 뭘 깨작거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빵 말고 케이크를 내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을.

“흥. 그러면 황제께서는 우리 황후 폐하만 보시면 입맛이 뚝 떨어진단 말도 사실인가 보네요.”

“아니, 또 말씀을 그렇게……. 그냥 딱히 알리고 싶지 않으신 것 같은데, 드시고 싶으면 말씀을 하시겠지요.”

“뭔지 귀띔만 살짝 달라고요. 바로 내올 테니까. 시종장께서는 저 분위기가 괜찮다고 생각하세요? 황후 폐하께서 밤낮으로…….”

“아, 알겠어요, 알겠어.”

메리앤의 말이 길어질 것 같지 고르텐이 결국 답을 속삭였다. 답을 들은 메리앤의 눈에 호전적인 의심이 피어올랐다.

“진짜예요? 괜히 또 우리 폐하를 곤란하게 하려고…….”

“아, 속고만 사셨나.”

토닥대기 시작하자 속삭이는 소리가 커졌는지 이본느가 뒤를 돌아봤다. 엄밀히 말하면 카를로이와 있을 때의 침묵이 워낙 어색하고 힘들어서 더 잘 들린 것도 있었다.

“메리앤, 무슨 일이지?”

이본느의 물음에 카를로이의 시선까지 메리앤과 고르텐으로 향했다. 메리앤은 당황한 채로 횡설수설 내뱉었다.

“아, 저, 그냥 빵을 더 내오라고…… 그, 시키려고…….”

“무슨 빵을 말하는 거지? 디저트라면 여기 이미 한가득이야.”

“호르뒤 빵을…….”

메리앤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용케 들은 이본느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호르뒤 빵은 가난한 평민들이나 많이 먹는 보리로 만든 빵이었고 퍽퍽한 촉감 때문에 빈말로도 맛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메리앤. 폐하께 그 무슨…….”

가볍게 메리앤을 질타하던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붉어진 귀를 발견한 순간 하던 말을 멈추었다.

뭘 몰랐다면 감히 보리빵을 내놓겠다는 시녀장에게 화가 났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본느는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이본느는 카를로이가 분노로 귀를 붉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폐하?”

부끄러울 때나 민망하면 그랬지.

카를로이는 대답 없이 고르텐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보냈다. 고르텐은 괜히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아,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한 건데. 돌아가면 얼마나 한 소리를 들을지.

카를로이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뭔가 이본느에게 떠오르는 것이 있기는 했다.

“메리앤, 호르뒤를 내오게. 피나타 잼이 있으면 같이 내오고.”

메리앤은 자신보다 한술 더 뜨는 이본느를 보고 깜짝 놀라 눈으로 되물었다. 식용으로도 쓰이는 피나타 꽃으로 만드는 잼은 그리 인기가 많은 잼은 아니었다. 정말 황제께서 평민 체험이라도 하고 싶으신 건지.

하지만 이본느는 그저 손짓 하나로 재촉만 할 뿐이었다. 메리앤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시녀에게 명을 하달했다. 무서운 황제의 입맛 취향이 정말 이렇다면 참 특이한 일이었다.

고르텐은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황제가 꼭 피나타 잼을 찾는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지? 공작의 정보통이 그렇게나 잡다한 것까지 알아내는 게 가능하다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말씀하셨으면 미리 준비했을 텐데요.”

“정말 괜찮은데…….”

카를로이는 민망한 마음에 차를 다시 마셨다. 찻잔이 금방 비워지자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다시 쪼르륵 차를 따랐다.

사실 그렇게 좋아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퍽퍽해서 목이 막히는 빵을 좋아한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그는 잠시 넋을 놓고 이런 습관을 남기고 없어진 여자아이 생각에 빠졌다.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잊을 수도 없는 흔적을 가지가지 새겨 놓고 없어진 사람.

이본느의 시선을 회피하며 카를로이는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었는데.”

피나타 잼은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건지 묻고 싶어 하는 게 눈에 훤했다. 이본느는 어린 날 칼의 입에 쑤셔 넣던 빵을 떠올렸다.

쫄쫄 굶어서 먹은 거니 맛있었던 게 당연하지. 그 상태의 칼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나무껍질을 가져다줘도 잘 먹었을 터였다. 물론 생각만 했다.

“저도 좋아해서요. 여기 와서는 먹기가 좀 그랬는데 폐하께서도 괜찮다 하시니 다행이네요.”

이본느가 가볍게 대꾸하는 것과 동시에 테이블에 어두운 갈색 빵들과 샛노란 색의 잼이 놓였다. 먹고 싶어 하더니 막상 내놓으니 카를로이의 얼굴은 알쏭달쏭했다.

같은 때를 떠올리는 걸까? 아직도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듯한 카를로이를 보고 이본느가 덧붙였다.

“피나타 꽃은 델루아 영지에서 나는 거니까요. 거기 사람들에겐…… 이 잼을 먹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걸요.”

이본느는 아무렇지 않게 빵 조각에 잼을 발라 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카를로이가 똑같이 따라 했다.

“황후 같은 공작가 귀족 영애도 이런 잼을 먹는다니 놀랍군요. 내가 아는 귀족들은 그렇지 않던데. 공작은 손도 대지 않았고. 더 귀하고 맛있는 게 있지 않습니까.”

퍽퍽한 빵에 질색하던 로덴 후작과 키아나를 떠올리며 카를로이가 물었다. 반쯤은 의심스러운 듯 묻는 카를로이의 말에 맞은편에서 약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고 약한 소리지만 분명 웃음소리기는 했다.

처음 듣는 소리에 카를로이가 빵을 들다 말고 이본느를 쳐다봤다. 자신의 말 중에 웃긴 부분은 없었는데 뭐 때문에 웃는 건지.

약한 소리마저 다 없어지고 입가에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이본느의 미소는 너무 생소한 것이라 카를로이는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전혀 즐거워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가장 지고하시다는 폐하께서도 다른 귀한 것들을 놔두고 이걸 드시고 있지 않나요?”

이본느가 속삭이듯 대꾸했다. 그 말을 하는 이본느의 눈이 반짝거려 카를로이는 또 그 눈에 물기가 어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 깜빡임 한 번에 이본느의 눈은 다시 말라 있었다. 잘못 본 것 같기도 했다.

“맛있네요.”

혼자 중얼거리는 이본느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나마 있던 표정도 사라지고 없었다. 항상 보던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예전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분명 예전과 같은 표정인데, 자신을 길들여 보겠다는 말이나 하던, 델루아에 굴복하라는 말이나 하던, 자신의 말은 죄다 무시하던 얼굴과 똑같은데 왜 달라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본느의 얼굴을 훔쳐보던 카를로이는 어려운 문제를 맞닥트린 아이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 * *

“그렇게까지 속이 좋지 않으십니까?”

벌써 연달아 약 두 병을 해치우는 카를로이를 보고 고르텐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황후와의 티타임이 끝나고도 한 병을 마셨으면서, 저녁을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저렇게 들이마시냐는 말이다.

카를로이는 저번에 치료사가 처방해 준 체할 때 먹는 조그만 물약을 요즈음 과복용 중이었다. 황후와의 만남이 잦아지기도 했고, 실제로 업무가 바쁘기도 하니 체할 일이 많겠다 싶긴 했지만 역시 지나친 양이었다.

“제가 봤을 때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그게 효과가 좋다지만 매번 알량한 물약으로만 해결하려 하니까 완전히 낫지 않는 거 아닙니까.”

“체증에 무슨 근본적인 대책 따위가 있다고.”

“체질을 좀 바꿔 보든가 하는 방식으로…….”

고르텐의 말은 한 귀를 타고 다른 한 귀로 의미 없이 빠져나갔다. 치료사를 불러와 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걸 이미 잘 알았다. 자신의 증상이 체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답답할 때마다 이 무효한 약이라도 마셔야 그나마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기분만. 속은 여전했다.

이본느의 궁으로 가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이젠 심장까지 불규칙적으로 뛰는 통에 약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속이 답답해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본궁 별관 침실로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곳에 델루아의 딸이 들어온다면 루푸스해(海)에서 어머니 혼이 올라올 것 같은데. 게다가 그곳으로 부르면 델루아 공작이 얼마나 의기양양해하겠어.”

“계속 유폐된 곳처럼 놔둘 수도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본궁 별관 침실, 로열 체임버는 오로지 황제와 황후만 쓸 수 있는 사실로, 혼인 후에는 주로 그곳이 부부 침실로 쓰였다.

한창 크로이센에서 황제의 축첩이 이루어졌을 때도 그곳은 오로지 황제와 황후만이 쓸 수 있었다. 황비 제도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반기지 않는 크로이센의 모순적 특징이 잘 드러나는 방이기도 했다.

또한 로열 체임버는 카를로이의 모친이었던 전대 황후 아델라이드가 델루아 공작의 독에 당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었다.

고르텐은 어쩌면 카를로이 본인이 더 그곳에 들어가는 걸 꺼리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잠자리에 예민하신 분이 체기까지 있으셔서 어떻게 주무시려고요. 다른 날로 미루시는 게 어떤가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아직도 가슴을 손으로 천천히 두드리고 있는 주제에 완고한 태도였다.

카를로이의 이상한 증상도 문제였지만 고르텐은 황후가 공작의 사주를 받아 침실에서 카를로이를 죽여 버릴까 봐 겁이 났다. 결코 과한 걱정은 아니었다. 공작이 죽음의 길로 이끈 황족의 피를 합치면 과장 좀 보태서 드넓은 마르바 대양을 뒤덮을 수 있을 테니. 게다가 황후 뒤에서 합방을 시킨 것도 공작 아닌가.

“그래요, 차라리 잘됐습니다. 절대 잠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폐하!”

불필요하게 비장한 태도를 보고 카를로이는 고르텐의 말의 속뜻을 이해했지만 대꾸하진 않았다.

불과 한 달 전만 되었어도 카를로이 자신도 비슷한 걱정을 했을 거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델루아 공작의 딸과 그 수족들만이 가득한 황후궁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카를로이에게는 그곳이 사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발 자라고 해도 못 잘 것 같으니 걱정 좀 그만하게.”

하지만 지금 걱정되는 것은 그딴 게 아니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카를로이는 이본느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한 번도 누구 옆에서 자 본 적이 없는 자신이 과연 어떻게 기나긴 밤을 버텨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다.

키아나의 궁에서 자는 척을 하긴 했지만 아예 다른 침실을 썼기 때문에 같이 밤을 보낼 일이 없었다.

이본느와 대화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후사를 만들 수도 없고. 하지만 한 침대에 눕긴 해야 하고. 불편한 속에 이젠 머리까지 아파졌다.

“……출발하지.”

카를로이의 목소리엔 한숨이 반이었다.

* * *

이본느의 사정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만 만지세요.”

메리앤이 엄한 목소리로 이본느의 손을 잡아 내렸다. 이본느는 계속 일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긴장하면 나오는 이본느의 행동인 걸 아는 메리앤이 다시 긴 머리칼을 곱게 빗겨 주었다.

“별일 있겠어요? 여긴 다른 곳도 아니고 폐하의 침실이에요.”

“음.”

머리를 다 빗어 내린 메리앤이 이번엔 이본느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한껏 굳어 있었다.

“하지만 침실 시중도 다 필요 없으니 물리라 하고.”

“그건 그냥 불편해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요.”

물론 이성적으로는 카를로이가 자신과 잠자리를 가지지 않을 거라는 걸 이본느도 알았다. 그 결벽적인 성격에 델루아에 대한 증오까지. 이본느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을 이유를 대라면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쓸데없는 불안감이 같이 들었다. 카를로이가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래 보이는데.

카를로이가 이본느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대도 딱히 덜 불안하진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뭘 하며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악몽을 꿀까 무서워 카를로이 옆에선 잠도 들기가 어려웠다.

“그만 걱정하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제 이름을 소리쳐 부르세요. 바로 달려갈 테니.”

“메리앤이 뭘 하려고?”

“황제 폐하를 떨어트려 놓아야죠.”

“그러다 메리앤의 목이 날아갈 텐데.”

이본느의 말에 메리앤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그런 건 별로 무섭지 않아요. 제 약점을 쥔 사람은 황제 폐하가 아니니까요.”

메리앤의 말뜻을 이해한 이본느는 어깨 위에 올려진 메리앤의 손을 잡았다.

메리앤은 이본느의 사람이라기보단 공작의 사람이라고 하는 게 정확했지만, 그 처지는 이본느와 다를 바가 없었다. 메리앤을 마음 놓고 좋아한다고 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별일 없을 거예요. 황후 대우를 하겠다고 황제 폐하의 입으로 직접 말씀하셨으니 구색이라도 맞추시려는 거겠죠. 1년 내내 한 번도 오지 않으셔서 말이 많았잖아요.”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해.”

생각은 그렇게 하는데 여전히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뛰었다. 때가 썩 좋지 못했다. 차라리 예전처럼 정신을 반쯤 놓고 카를로이의 말을 한 귀로 흘릴 때가 나았다. 술이라도 거나하게 마시고 싶었지만 취해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카를로이가 리리안 루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들수록 머리가 아팠다. 인제 와서는 다 소용없는 일이지만 복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카를로이는 정말 여러모로 짜증 나는 인간이었다. 차라리 까맣게 잊고 더 모질게 굴 것이지.

“황제 폐하 드셨습니다.”

카를로이가 도착했다는 말에 메리앤의 만류가 무색하게도 이본느의 손은 다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카를로이가 들어오자 모든 시녀들이 자연스럽게 다 침실을 나갔다. 카를로이로서는 두 번째로 이본느의 침실에 와 보는 것이었다.

첫 번째 기억을 떠올리자 새삼스럽게 황후의 침실이 달라 보였다. 그때는 깨진 유리 조각들이 즐비했었는데 지금은 다시 거울들이 멀쩡하게 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왜 그랬습니까.”

어색하게 앉아 있던 이본느는 ‘그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그만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그것은.”

뭐라 설명할 말이 없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별생각 없던 질문에 이본느의 얼굴이 파리해지자 당황한 것은 카를로이였다.

“아니,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렇게 창백히 질릴 필요 없습니다.”

다시 침묵이 둘 사이로 찾아들었다. 견디다 못한 이본느가 카를로이를 흘끗 보았을 때, 이본느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카를로이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이본느에게 창백해질 필요 없다고 말하기엔 카를로이의 얼굴이 더 창백했다.

자기 얼굴은 안 보고 온 건가.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괜찮습니다.”

식은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말라기엔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았다. 카를로이가 결국 신음을 참는 듯한 숨을 들이켰을 때 이본느는 시종을 부르는 줄을 잡아당겼다.

“폐하, 들겠습니다.”

목소리는 메리앤의 것이었는데 얼굴이 파래져 달려온 사람은 고르텐이었다. 그는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기다린 사람 같았다. 고르텐은 명치에 손을 가져다 대는 카를로이를 보곤 말 그대로 헉하는 소리를 냈다.

“폐하!”

“고르텐. 유난, 떨지 말게.”

고르텐은 분노로 가득한 눈으로 이본느를 쳐다봤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말투와 태도를 보아하니 이본느가 살해 시도라도 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남들이 자기를 보는 시선이었다. 그 공작에 그 딸이라 언제든 황제를 죽일지도 모르는 그런 황후. 카를로이도 아마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슬픔이 이본느를 휘감았다.

같이 들어온 메리앤이 화가 나서 소매를 걷어붙였지만 이본느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어디가 안 좋으신 것 같으니 말런을 부르게.”

메리앤이 씩씩거리며 이본느의 전담 치료사 말런을 부르려고 하자 고르텐이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황제 폐하의 치료사를 불러 주십시오.”

“고르텐, 유난 떨지 말라니까. 속이 좀 안 좋을 뿐이야.”

“이걸 보고 어떻게 안 떱니까! 저는 선황 폐하의 유지를 받들 의무가 있습니다. 시녀장, 황제궁 궁의를 불러 주십시오.”

이본느는 물론이고 이본느의 치료사마저 못 믿겠다는 투였다. 황제궁 사람들이야 워낙 카를로이의 목숨을 유지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능력 있는 치료사는 진찰 한 번으로도 체질을 꿰뚫고 간단한 치료 마법으로도 몸을 고친다. 고르텐은 죽어도 황제를 델루아가의 치료사에게 내보일 생각이 없었다.

이본느가 고개를 끄덕이자 메리앤이 못마땅한 얼굴로 치료사를 부르러 나섰다. 이본느로서는 그저 이 모든 상황이 암담했다. 시종장 고르텐에게 뭐라 할 의욕조차 들지 않았다. 델루아 공작에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아들을, 그 공작의 딸로부터 지켜 내겠다는 각오에 할 말이 없었다.

“폐하, 제가 드린 약을 대체 얼마나 드신 겁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황제의 치료사는 진찰 후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거의 하루에 한두 병씩 드셨네.”

대답은 고르텐이 했다. 카를로이가 차마 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게 체증이 자주 있었단 말입니까?”

“아, 글쎄 도대체 제대로 진찰을 한 게 맞느냔 말이야. 어찌 된 것이 매일 저리 속이 불편하신 게야.”

치료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폐하, 체증이 있으셨던 것은 맞습니까?”

“……그냥 속이 좀 메슥거렸네.”

“폐하, 그 약은 멀쩡한 속에 과복용하시면 심각한 통증을 일으킵니다.”

“아니, 그런 약을 그렇게 한가득 놓고 갔단 말이야!”

치료사는 억울해졌다. 아니, 처음엔 체증이라더니. 황제가 그래도 그 억울함을 이해하는지 분노한 시종장을 진정시켰다.

“……고르텐, 제발 입 좀 다물게.”

도대체 황후 침실에서 이게 무슨 소란인지 모르겠다. 카를로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이본느의 시선에 또 속이 답답해져 왔다.

치료사가 민감하게 황제의 기색을 읽어 냈다.

“폐하, 요즈음 거슬리는 일이나 불편한 일이 있으셨습니까? 한 한 달 전부터 그러시는 것 같은데. 그런 일이 잦으면 이런 답답증이 일곤 합니다. 약을 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해결하셔야지요.”

“……그런 일 없으니 진통제나 주고 돌아가게.”

카를로이는 없다고 대답했지만 침실에 있는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 달 새 카를로이에게 새로 생긴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이본느와의 잦은 만남.

‘거슬리고 불편한 일’이라는 궁의의 말을 이해한 순간 이본느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싶어졌다.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기에.

“고르텐, 이제 정말로 괜찮으니 나가.”

“하지만 폐하.”

“더 저지를 무례가 아직도 남았나?”

카를로이의 날카로운 말에 고르텐이 찔리는 것이 있는지 깨갱 하는 강아지처럼 이본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가 경솔하고 무엄했습니다, 황후 폐하. 처분은 달게 받겠습니다.”

처음엔 이본느가 뭐라도 한 것처럼 의심하더니, 단순한 약 과복용이었다니. 물론 과복용의 원인이 이본느 본인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오히려 그 사실이 이본느의 신경 또한 날카롭게 만들었다.

“시종장.”

이본느가 나직한 목소리로 고르텐을 불렀다. 고르텐이 허리를 더 깊게 숙였다.

“내가 폐하께 해코지를 하고자 마음먹었다면 진작 무슨 일이 나지 않았겠나?”

그럴 생각이 없다는 뜻이기는 한데 미묘하게 무서운 말이었다.

“어쨌든 자넨 자네 할 일을 한 것뿐이겠지.”

고르텐이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이고 메리앤과 함께 조용히 나갔다. 이본느와 카를로이는 다시금 서로에게 홀로 남겨졌다.

“괜한 소란을 피운 것 같아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를로이의 안색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다행히 진통제는 효과가 빠른 듯했다.

“오늘 밤 내내 계속 불편하실 텐데 진통제 하나로 괜찮으실지 걱정입니다. 진통제는 과복용 통증만 없애 주지 답답증 자체를 해결해 주진 않을 테니까요.”

이본느는 여전히 무덤덤해 보였지만 카를로이는 안심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답답증의 원인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걸 보니 카를로이가 무엇을 불편해했는지 정확히 알아낸 듯해 보였으므로.

“업무가 요새 과중해서 그런 겁니다. 며칠 쉬면 나아지겠지요.”

뻔한 거짓말이었다. 사실이었다면 이본느의 눈을 보고 이야기했을 테니까.

대체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계획하고 있기에 이렇게까지 뻔한 사실마저 감추려 드나 싶었다. 황비와 함께 준비하라는 아르바 루프가 참으로 기대될 지경이었다.

“계속 이렇게 앉아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카를로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본느도 따라 일어서려 했지만 몸이 마음만큼 무거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건드리지 않을 거라니, 이 모든 재앙에서 그나마 하나 다행인 일이었다. 이본느는 내키지 않는 몸을 겨우 일으켜 침대로 다가갔다.

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안쪽으로 들어가 눕는 이본느에게서 카를로이가 시선을 돌리곤 마른세수를 했다. 이본느가 입고 있는 네글리제는 얇지는 않았지만 이본느를 더 작아 보이게 했다.

카를로이는 공연한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델루아의 딸이다. 델루아다.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가슴에 새겨지진 못하고 머리만 맴돌다 나가는 말들이었다.

치료사의 말이, 이본느의 말이 맞았다.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이 답답증은 계속 카를로이를 따라다닐 것이었다.

“불을 끌게요.”

카를로이가 눕자 바로 옆에서 이본느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마저 요란하게 날 것 같아 카를로이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실을 어둠이 가득 채웠다.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의 존재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들릴 듯 말 듯한 숨소리가 사이를 채웠다.

카를로이가 어둠 속에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너무 어두우면 잠을 잘 못 자서요. 등 하나만 켜 두어도 될까요.”

이본느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카를로이의 목이 이상하게 뜨거워져서 그는 뒤를 돌아 확인해 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세요.”

여전히 눈을 깜빡이며 카를로이가 대답했다. 희미한 빛까지 있으니 잠이 들기는 완전히 포기다.

이러다가 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이 자세로 눈만 껌뻑거리다가는 경련은 아니더라도 내일 몸이 쑤실 것이 분명했다.

체감상 두 시간은 지난 것 같으니 못해도 한 시간은 지났을 텐데. 이본느의 약한 숨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이미 잠이 든 듯했다. 그럼 슬쩍 일어나서 차라리 앉아서 밤을 새울까.

숨을 죽이며 혼자 머리를 굴리던 카를로이가 침상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옆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잠이 든 줄 알았던 이본느는 내내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본느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고, 침상에서 일어나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그 모든 소리가 카를로이의 귀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는 소리가 어느 정도 멎어들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가는 건지.

카를로이는 빠르게 침대에서 벗어나 침대 옆에 놓인 등을 들었다. 육중한 문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닐 거고,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실내 통로. 어릴 때 딱 한 번 들어가 보았던 통로지만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직도 기억했다.

침대 옆에 작게 위치한 문을 조심히 열고 카를로이는 발을 디뎠다. 멀리서 이본느가 걸어가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카를로이는 천천히, 자신의 소리가 튀지 않게 그 발길을 맞춰 발을 움직였다.

걷다 보니 이본느의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통로를 완전히 빠져나간 듯했다. 카를로이가 발을 더 바삐 놀렸다. 마침내 통로 끝에 다가오자 밖이 보였다. 조용한 바람이 그의 볼에 닿고, 황후궁 뒤쪽에 넓게 자리한 정원이 펼쳐졌다. 이 정원에는 번호가 붙여지지 않았다. 127구역의 정원이 만들어진 지 한참 뒤에 생긴 곳이었으므로.

어느 선대 황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황후를 위해 만들어 주었다는 작디작은 이 정원은 달빛 정원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사랑하는 황후가 밤에도 언제든 꽃을 볼 수 있도록, 사랑하는 황후와 언제든 밀어를 속삭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곳.

달빛을 받아서만 피는 달맞이꽃을 비롯해 달빛에만 빛을 발하는 꽃들, 달과 똑 닮은 은빛을 뽐내는 꽃들이 정원에 한가득 피어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이본느가 있었다. 물을 뿜지 않는 아름답지만 안이 초라하도록 텅 빈 분수 위에 앉아 있었다.

“…….”

이본느를 부르려던 카를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이본느는 딱히 꽃을 구경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거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멍하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표정으로. 그저 침실 말고 다른 갈 곳이 필요했던 사람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표정 같기도 했다.

카를로이가 괜스레 손가락으로 피로함이 느껴지는 눈을 문질렀다. 언제부턴가 이본느의 저 얼굴을 보면 동굴 안에 혼자 남겨져 있던 사람의 표정이 겹쳐 보였다.

“황후, 밤바람은 꽤 찹니다.”

카를로이의 목소리를 듣고 이본느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밤도 늦었는데 왜 잠자리에 들지 않고…….”

카를로이가 할 말은 아니었다.

“폐하께서는요? 황제궁으로 가시는 건가요.”

단정적인 질문이었다. 카를로이가 오밤중에 나온 이유가 황제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돌아갈 거였다면 이 문으로 나오진 않았을 텐데,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이본느는 당연하게 카를로이가 떠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카를로이는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후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서 와 본 겁니다.”

“주무시는 줄 알았어요.”

“잠이 오지 않아서.”

“많이 불편하셔서 그런 거겠지요.”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겁니다.”

전혀 믿지 않는 듯한 이본느의 표정을 보고 카를로이는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는 분수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카를로이의 눈치를 살피던 이본느는 약간 떨어진 옆에 앉았다.

“심심하면 보는 꽃들, 질리지도 않습니까.”

카를로이의 질문에 이본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좋아서 보는 것도 아니니 질릴 일도 없다. 그저 견디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이 모든 시간을 견디는 데. 어린 날 칼이 말했던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정원에 멍하게 앉아 있을 때면, 가끔은 궁금해졌다. 어린 카를로이는 정원에서 왜 시간을 보냈을까. 무엇이 지나가기를, 무엇이 변하기를 기다린 걸까, 하고.

피고 지면 또 시간이 지나 있고. 다음번에 피고 질 때는 뭐가 좀 다를까 기대해 보고.

“…….”

그렇게 대답을 하려 하자 또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말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할 생각도 없었으니 마법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마법이 아니라 족쇄와도 같았다. 이 정도 말도 못 한다니.

“……도움이 되거든요.”

간신히 열린 입에서는 결국 원래 하려던 말과는 조금 다른 말이 나왔다. 이 정도라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무슨 도움이.”

“생각을 잊는 데 도움이 돼요.”

“무슨 생각을 잊으려고 그럼 그렇게 매상 보고 있는 겁니까.”

“글쎄요. 폐하께선 저를 싫어하시면서 왜 갑자기 이렇게 구시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려나요.”

반쯤은 충동적인 대답이었다. 관심도 없으면서 계속 묻는 카를로이 때문에 미세한 짜증이 난 탓이었다.

이본느가 이런 식으로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카를로이는 허가 찔린 얼굴로 이본느를 쳐다봤다. 저럴 땐 또 어릴 때 얼굴과 똑같지. 이본느는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잖습니까.”

지나가던 개도 믿지 않을 일이다. 답이 없는 이본느에게서 속생각을 읽어 냈는지 카를로이가 손으로 제 입가를 몇 번 쓸었다.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난 황후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부당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내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알고 있어요.”

“나는 델루아를, 도저히 델루아를.”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정말로, 잘 알고 있어요.”

이본느는 결혼식 날에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카를로이는 그때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델루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잘 알고 있다고 답했던 이본느를.

또다, 또. 그때와 같은 표정인데 다르게 보이는 게.

“……황후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그래서 그대를 싫어하지 않는 건 내 의지로 그만둘 수 있겠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 말이라도 먹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카를로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신도 진심인지 거짓말인지 헷갈릴 정도로 강하게 하는 자기 세뇌를, 이본느라고 구분할 수 있을까.

이본느는 뭐든 상관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이제 보니 내가 아니라 그대가 나를 싫어하는 모양이군요.”

오기로 반쯤 농담인 말을 던지자 이본느는 갑자기 표정이 바뀌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게 뭔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느낌의 즐거움을 주었다.

“그런 게 아니라…….”

“싫어하는 게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카를로이는 말을 마치고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옅어서 미소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것이었지만. 이본느가 카를로이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오만 생각을 하는 사이 카를로이는 혼자 화제를 돌려 버렸다.

“나에게 공작은 악마 같은 인간일 뿐인데……. 공작은 그대에겐 좋은 아버지였습니까?”

카를로이의 온갖 이상한 말을 듣고 무방비 상태였던 이본느는 얼결에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의 아버지와 비슷하세요.”

“그렇군요.”

해서 이본느는 그 대답이 카를로이에게 어떤 확신을 심어 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딸을 끔찍이 생각한다는 공작에 비해 그 딸의 대답은 단출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그 유대도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 거란 추측이 카를로이의 머리에 자리 잡았다. 실상 카를로이가 아는 아버지들도 전부 그러지 않았던가. 그리 대단한 유대감을 느껴 본 적은 없으니.

“대화도 나쁘지 않군요.”

중얼거리듯 말하는 카를로이를 이본느가 허탈한 얼굴로 바라봤다. 대화하면 뭘 얼마나 했다고.

“종종 오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말까지 충격적이었다. 불편해서 서로 밖까지 나와 놓고 또 오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그 속을 짐작하기가 도통 어려웠다.

“이만 들어가지요.”

“아, 저는 조금 더 있다가…….”

“내가 황후궁을 떠날 때까지 밖에 있을 생각이면서 무슨.”

퉁명스러운 카를로이의 대답에 이본느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서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어려웠다. 감기에 걸린대도 밖에서 밤을 지새울 작정이었으니까.

“그렇게 불편하면 지금이라도 내 궁으로 돌아갈까요?”

“아니에요…….”

대답은 아니에요, 인데 표정은 네, 였다.

“황후야말로 내가 오는 것도 싫어하면서 왜 자꾸 아니라고만 하는 겁니까?”

“아니, 싫은 게 아니에요. 어색해서…….”

이본느가 진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기에 카를로이는 그녀를 추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사실 반쯤은 이유를 알고 있기도 했다. 공작한테 힘이 되어 주려고 참는 거겠지, 뭐. 둘 사이엔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날 정원에서 다시 침실로 돌아온 카를로이와 이본느는 침묵과 함께 밤을 꼬박 새웠다. 새벽 해가 보이자마자 카를로이는 황제궁으로 돌아갔다. 같이 시간을 보냈다 말하기도 애매했지만 어쨌든 속사정은 그들만 아는 법이었다.

중요한 것은 황제가 그동안 내버려 두었던 황후의 침실에 직접 가서 하룻밤을 머무르고 왔다는 사실이었다. 결과는 꽤 빠르게 나타났다. 로덴 후작의 반응만 봐도 그랬다.

“중립이었던 귀족들 몇이 공작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가.”

“왜 그런지 정말 모르십니까? 폐하께서 황후에게 관심을 둔다는 말이 돌고 있기 때문이지요!”

로덴 후작치고는 꽤 강경한 말투였다. 이날도 카를로이는 키아나와 로덴 후작과 함께 티타임을 빌미로 만나고 있었다.

“저희 상단과 더 거래하지 않겠다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공작이 저 좋을 대로 소문을 퍼트렸나 보군. 역시 빨라.”

“그렇게 태평하게 말씀하실 겁니까? 원인은 폐하께서 제공하셨습니다.”

울먹거리지 않고 이렇게까지 말하는 로덴 후작은 또 처음이라 카를로이는 의외라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후작을 쳐다보았다.

“저를 이용하시겠다고 제 딸까지 옆에 두셨으면서 어떻게 그러십니까. 황후를 이용하신다더니 들리는 말로는 꼭 폐하만 이용당하시는 것 같잖습니까.”

“아버지, 그만하세요. 다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기회만 되면 그쪽으로 넘어갈 사람들이었어요.”

“너는 대체 누구 자식이고 누구 편이냐!”

“여기서 편 가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이미 다 한배에 탄 셈인데.”

태평한 키아나의 반응에 후작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툭툭 쳤다.

“네가 가장 위험해진단 말이다! 이 기세로는 황비 폐지도 통과될 판이야!”

높아지는 언성에 카를로이가 손을 들었다.

“후작, 듣는 귀가 있네. 조용히 이야기하지.”

“폐하,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십시오. 이러다가는 간신히 모은 사람들도 흩어집니다.”

“지금 이런 대치 상황에서는 나나 공작 둘 중 하나만 군사를 움직여도 바로 내전이야. 둘 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으니 명분을 잡겠다고 안달이지.”

여전히 후작은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내게 공작을 잡을 명분을 가져다줄 사람은 황후 말고는 없어. 지금 상황에서는.”

“황후가 가져다줄 거라곤 확신하십니까?”

“확신이 뭐가 중요한가. 그렇게 되게 만드는 게 중요하지.”

말은 아주 청산유수였다. 후작은 불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제 딸은요.

“아직은 황비를 건드리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지. 게다가 아르바 루프 덕에 황비가 내내 황후를 지켜볼 수 있을 것이고.”

“공작가에서 갖은 교육은 다 받았을 황후가 무슨 잘못을 하겠습니까? 제 천방지축 딸이 흠이 잡히는 게 빠르겠습니다.”

“본인 딸을 참 못 믿는군. 걱정은 그만하고 후작은 남은 귀족들과 상단 단속이나 하러 가게. 괜히 다들 흔들리면 곤란하니까.”

후작이 결국 반쯤은 물기 어린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혀를 찬 것은 키아나였다. 어찌 저리 심약한지. 후작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키아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저런 모습을 보이시니 귀족들이 공작 쪽으로 붙는 것도 당연하죠.”

착해 보이는 인상의 키아나 로덴은 자신의 아버지를 평가할 때는 한없이 냉정해지곤 했다. 카를로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자네 아버지 말도 일리가 있어. 초대 지도자 가문 넷 중 둘을 로덴 후작 혼자 상대하는 건 무리가 있으니.”

“아버지를 보고 있으면 로덴 가문이 정말 초대 지도자였던 시절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라니까요. 백작위로 강등되었어야 할 가문은 앙센이 아니고 로덴이어야 했지 않나 싶어요.”

“작물 수출 대부분을 책임지는 로덴을 어떻게 강등시키나.”

크로이탄이 왕이 되기 전 크로이센의 초대 지도자는 다섯이었다. 초대 조상인 크루아의 후손인 델루아, 지금의 황족이 된 크로이탄, 다섯 지도자 중 가장 강력했던 뒤냐, 가장 비옥한 땅의 로덴, 그리고 가장 똑똑했다는 앙센.

이들의 이름을 따라 가문의 이름이 지어지고 영지의 이름이 지어졌다. 해서 크로이센에서 작위명과 영지명이 같은 가문은 황족을 제외한 네 가문뿐이었다.

“확실히 로덴 후작 하나로는 부족해. 언젠가는 중간 귀족들도 편을 고를 테고, 그때가 되면 공작도 무력행사를 강행하겠지.”

“글쎄요. 전 마르키아 변경백이 중립을 지키는 한 델루아가 군사를 쉽게 움직일 것 같지 않아요. 변경백이 지휘하는 군사의 숫자를 무시할 순 없잖아요.”

“변경백이 내 편이라도 되어 준다던가?”

“공작 편을 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나요? 그리고 듣기로는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라던데, 델루아 같은 사람에게 붙을까요?”

“그렇다고 내 사람도 아니야. 변경백은 국경 방어나 크로이센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그 사람은 나나 델루아 공작이나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거야.”

카를로이는 어릴 때 만났던 마르키아령의 변경백, 루이자 루탱을 떠올렸다. 14년 전 델루아령의 어둠의 숲에서 벗어나 마르키아령의 들랑 시로 도망친 카를로이가 수도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루이자 루탱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델루아 공작이 이런 방법까지 쓰다니 기가 막히긴 합니다만……. 이런 수에 무너지는 크로이탄도 썩 믿음직스럽지 않군요.>

무인 아니랄까 봐 무뚝뚝한 말투로 냉정하게 말하던 마르키아 변경백이 아직도 생생했다. 생각에 잠긴 카를로이를 보고 키아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버지가 내내 뒤냐 공작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고 주장하신 건 알지만, 10년 넘게 그분을 본 사람이 없대요.”

키아나가 마치 비밀을 얘기하듯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누구는 실성했다고는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뒤냐 공작이 죽었다고 생각해요. 이미 죽었는데 쉬쉬하는 거란 말도 도는걸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황비는 황비의 일을 해. 그 사건의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낼 것, 그리고 아르바 루프에서 황후를 단단히 눈여겨볼 것.”

키아나가 눈을 위로 치켜떴다.

“전국 상단을 통해서 수소문 중이지만 아직 그 지역, 어둠의 숲에서 살아 돌아왔단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브로치라도 찾아내야 할 것 아닌가.”

“지금까지도 안 나오는 걸 보면 공작이 없애 버린 게 아니겠어요?”

“공작은 그 존재를 모를뿐더러 그건 고대 마법이 걸린 황실 물건이야. 파괴가 불가능해.”

“뭘 찾으시려는지 모르겠지만요, 델루아 영지를 직접 뒤지지 않는 이상 확실하게 말하긴 어려워요.”

묵묵부답인 카를로이를 보고 키아나는 자신의 답이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키아나는 화제를 바꾸는 것을 선택했다.

“황후 폐하는 어때요?”

“날 전혀 믿지 않아.”

“마음은 있는 것 같은데, 믿지는 않으신다……. 절대적인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그래요.”

갑자기 키아나는 학자라도 된 듯한 진중한 얼굴로 충고를 건넸다.

“무조건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니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가도록 하세요. 밤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마치 밤 덕에 재미를 꽤 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오, 물론이죠. 폐하께서는 상상도 못 하실 그런 즐거움이 세상에 존재한답니다. 밤은 온갖 감정을 깨우는 시간이니까요.”

밝은 말투와 달리 키아나의 얼굴이 썩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았다. 카를로이는 처음으로 키아나가 그토록 비밀로 하길 원하는 애인이 누군지 궁금해졌지만 이내 궁금증을 지웠다. 지금 문제는 이본느, 황후였다.

* * *

“폐하, 델루아 공작이 알현을 청합니다.”

시종장 고르텐이 전했다. 그토록 사무적인 어투로 보고하면서도 못마땅함이 느껴지게 할 수 있다니, 고르텐만의 대단한 재주였다.

델루아 영지로 내려가 있다더니 또 금방 올라온 모양이었다. 공작은 제 영지에 가만히 붙어 있던 적이 거의 없었으니 놀랍지도 않았다.

“들어오라 하게.”

만면에 미소를 띠고 들어온 델루아 공작이 예를 갖췄다.

“공작이 날 찾을 일이 뭐가 있지?”

형식적인 인사도 없이 바로 본론이었지만 공작은 익숙한 듯 바로 원하는 바를 말했다.

“제가 돌아왔으니 속히 귀족원을 다시 열어 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폐하께서 개회 거부 가능하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괜히 힘 빼지 마시고 열어 주시지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보아하니 황비 제도 폐지를 통과시킬 수 있을 정도로 판을 짜 둔 모양이었다.

카를로이는 한참을 자신이 혐오하는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몇 번을 봐도 이본느와 너무 닮은 얼굴이다. 어쨌든 공작은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미인으로 제국에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공작을 볼 때마다 내 늘 드는 생각이 있는데.”

전혀 무관한 답을 내놓는 카를로이를 보고도 델루아 공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군림하듯 앉아서 권태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무심한 말투로 제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그 모습은 이미 델루아 공작에겐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의 친우기도 했던 카를로이의 조부가 카를로이와 꼭 똑같았으니.

“말씀하시지요.”

“그대는 정말 죽지도 않는군. 나이도 있는데 병 하나 없이 참으로 건강해. 하긴, 지옥도 그대를 반기지는 않을 테니.”

죽지 않아 아쉽다는 감정이 진실하게 담긴 말이었다. 공작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 폐하. 폐하의 그 맘을 저보다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폐하께서야말로 수많은 죽음을 피해 지금껏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대단히 뻔뻔하고, 받은 대로 돌려주는 충실한 답이었다. 카를로이가 공작을 죽이고 싶어 하는 만큼 그 또한 카를로이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 물씬 느껴지는 답이기도 했다.

공작은 방긋 웃기까지 했다. 어릴 때는 저 웃음에 속아 그가 자신을 예뻐한다 착각한 적도 있었다. 심지어 일찍 죽은 할아버지 대신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카를로이가 버릇없이 굴어도 그는 허허실실 웃기만 했다. 얼마나 그 가면이 대단한지 카를로이가 말을 타다 실수로 그를 걷어찼을 때도 델루아 공작은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고통 때문에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수모를 감수하고서도.

지금 생각하면 여간 소름 끼치는 것이 아니었다. 공작은 원하는 얼굴을 맘대로 만들어 내고 누구든 속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폐하의 명이 이리 기실 줄 미처 몰랐지요.”

여전히 그런 부드러운 말투로, 웃는 얼굴로 델루아 공작이 말을 이었다. 날이 선 말을 한두 번 주고받은 것도 아니라, 카를로이는 무감한 얼굴로 원래 주제로 되돌아왔다.

“얻을 것 하나 없이 공작에게 내줄 수만은 없지 않겠나? 로덴의 상단에 장난질 치는 걸 그만둔다면 열도록 하지.”

“제가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30일 뒤면 폐하께서도 별수 없이 개회하셔야 합니다.”

“그 30일 동안 내가 별수를 생각해 낼까 걱정되어 독촉하러 온 것이 아닌가. 이 정도로 받아들이지, 더 해 봤자 시간 낭비니까. 어차피 상단에 그따위 짓거리한 것도 나한테 바라는 게 있어서일 텐데?”

델루아 공작이 카를로이의 말을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개회를 할 수 있는 만큼 늦췄다가 공작의 일을 망치는 건 카를로이의 주 수법 중 하나였다.

“좋습니다. 제 조건 하나만 더 들어주신다면 로덴 상단은 그대로 두도록 하지요.”

“역시, 하나 더 말할 줄 알았네. 욕심으로만 황좌를 얻을 수 있다면 이미 그대는 대륙의 황제가 되었을 텐데, 안타깝군.”

황제가 못 되는 것을 평생의 역린으로 여기고 살아온 공작의 얼굴이 경직되었지만, 이내 그는 연륜으로 다시 매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후 폐하의 궁에서 밤을 보내셨다지요. 다음번엔 본궁 별관이 어떻겠습니까? 빠른 시일 내로 말입니다.”

로열 체임버를 말하는 것이었다.

“황후 폐하가 일개 황비도 아니시니 사실은 진작 그러셨어야 할 일이지요.”

그리고 선대 황후 아델라이드 뒤냐가 델루아를 저주하며 복중 태아와 함께 마지막 숨을 거둔 곳. 아델라이드는 델루아 공작이 독으로 죽인 첫 황족이었다. 그전까지 공작은 이렇게 직접적인 방법을 쓰진 않았으니까.

카를로이는 쇳소리로 저주를 내뱉던 아델라이드의 목소리를 지우며 공작을 똑바로 쳐다봤다.

“왜, 그러고 나면 여론을 더 잡기 쉬울 것 같은가? 내가 황후와 그대를 인정하고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모양새가 되니?”

“원칙을 말씀드리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조건이라 하기도 민망한 것이지요.”

“좋아. 그렇게 하지. 귀족원은 자네가 로덴 상단의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면 바로 다시 열겠네.”

“로열 체임버의 일이 이루어지면 저도 제 할 일을 하도록 하지요.”

공작이 다시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공작.”

나가려던 공작이 카를로이의 부름에 걸음을 멈췄다.

“자네 딸을 내 곁에 붙였다고 너무 안심하지는 말게. 황후는 그대의 소중한 사람이지, 내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해서요?”

“다르게 말하면 그대가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이 내 손 안에 있다는 소리니, 잊지 말게.”

델루아 공작은 카를로이의 말을 불쾌하게 여기기는커녕 소리 내서 웃기까지 했다. 호탕하다 할 만한 웃음은 아니었으나 진정 우스워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반응에 카를로이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폐하, 어찌 그런 순진한 소리를 하십니까. 선황, 선황후께서는 폐하를 귀히 여기지 않아 그렇게 냉정하게 폐하를 저버리셨답니까?”

“그대는 항상 정도를 모르고 입을 나불대는군.”

“폐하보다 중히 여기는 것이 있었을 뿐이겠지요. 가장 귀하지 않다면 의미가 없는 겁니다.”

“황후가 그대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설마요. 다만 상황은 변할 수 있는 겁니다.”

델루아 공작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동정하는 듯한 미소였다.

“폐하, 폐하께서도 아시지요? 선황, 선황후께서 왜 그리 가혹할 정도로, 혹독히 폐하를 교육했는지 말입니다.”

부모의 이야기가 계속 공작의 입에서 오르내리자 카를로이의 얼굴에 노골적인 불쾌함이 피어올랐다.

“폐하께서는 폐하의 조부, 선선대 황제를 너무 많이 닮으셨습니다.”

너무 많이 들은 이야기라 별 감흥이 없어야 하는데, 말하는 사람이 델루아란 사실 때문에 짜증이 났다. 자격도 없는 인간이.

“감정에 미쳐 천지 분간도 하지 못하고 나라를 구렁텅이로 이끌 뻔했던 그분과 너무나 닮았어요. 선황, 선황후 폐하께선 그걸 두려워하신 거지요.”

조용한 공작의 목소리는 음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카를로이는 비웃듯 실소를 흘렸다. 제 조부에게 미쳐도 된다고 줄곧 속삭이던 사람이 누군데.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 본인이라는 소리를 쏙 빼놓고 하는 공작이 우스웠다.

“폐하께서는 그분과 이젠 다르다 생각하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폐하는 미칠 계기가 없었을 뿐입니다. 피라는 건 그런 겁니다.”

“내가 미치지 않는 게 그대에게도 좋을 거야. 미친다면 앞뒤 재지 않고 가장 먼저 그대 목부터 벨 테니까.”

“그것 참 영광이군요, 폐하. 제 딸은, 제 피를 물려받았습니다. 누가 뭐라든, 폐하께서 그 아이에게 어떤 모습을 원하시든, 이건 변치 않는 사실입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이빨을 드러내는 뱀처럼 공작은 웃었다.

“폐하의 손안에 잠자코 있어 줄 아이는 못 될 거란 얘기입니다. 제 딸을 패로 쓰고 싶을 땐 이 정도는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공작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하니, 그 아이를 그저 사랑받는 황후로만 두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겁니다. 저에게도, 폐하께도. 자칫하다가 제 딸아이가 저 같은 인간이 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습니까.”

마지막 말을 남기고 공작은 카를로이의 집무실을 떠났다. 카를로이는 한동안 공작이 머물렀던 자리를 핏발이 서도록 노려보았다. 이쯤 되니 정말 미쳐서 뒷일은 생각지 않고 공작의 목을 베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빚이 남았으니 카를로이는 죽고 싶은 대로 죽을 수도 없다. 공작의 목을 베는 대신 카를로이는 고르텐을 불렀다.

“로열 체임버를 정리하게. 누가 죽어 나갔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공작의 목을 베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 * *

이본느는 숨이 막혔다. 황후궁에 온 공작이 말도 없이 계속 이본느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 제 할 말만 하고 가던 사람이 오늘은 왜 이러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매일 하는 공작을 걷어차는 상상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본느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아래를 바라봤다.

“그날 밤 황제가 널 건드리진 않았겠지.”

한참 뒤 나온 말은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헷갈려 이본느는 고개만 끄덕였다.

“뭐라고 하더냐?”

“별말 없었어요. 그저 절 싫어하지는 않으려고 한다고…….”

“급하니 아주 별수를 다 쓰는군.”

이본느는 고개를 들어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공작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 너도 이제 네 어미를 볼 때가 됐지.”

어울리지 않게 인자한 말투를 믿을 수가 없어 이본느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보게 해 주마. 널 너무 오래 안 보게 되면 네 어미한테도 좋진 않으니.”

“정말요?”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네 어미는 수도까지 올라올 수가 없어. 건강이 안 좋고 거동도 불편하니 눈에 띄고. 네가 델루아로 내려와야 하지.”

“갈게요. 갈 수 있어요.”

“네가 그 먼 곳까지 가는 걸 황제가 허락한다더냐?”

생각지도 않은 질문에 이본느는 입술만 뻐끔거리다 가까스로 물었다.

“공작님이 된다고 하면 다 되는 게 아니었나요? 그런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공작님이 허락만 하면…….”

“예전 같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모를 일이지. 넌 자식 하나 없는 황후다. 가까운 곳도 아니고 국경 근처 델루아까지 맘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신세가 아니야. 황후의 가족이 수도로 올라오는 것이 일반적이지.”

“자식은 없어도 황비가 있으니 잘 말하면…….”

“잘? 델루아로 가는 이유는 뭐라 잘 말해 볼 것이냐? 공식적으로 네 어미는 내 부인이고, 이미 죽은 사람인데.”

할 말이 없어진 이본느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안 된다고 돌려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런 귀찮은 짓을 내가 뭐 하러 하지? 황제 허락이 필요하니 네가 얻어 내야 한다고 말하는 거다. 잘 말해 보거라. 허락만 얻어 내면 바로 데려가 줄 테니.”

제국이 제 것인 양 휘젓고 다니는 주제에 이건 또 황제 허락을 받아 오라니 어이가 없었다.

“조만간 황제가 널 로열 체임버로 부를 거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이본느가 놀라 공작을 쳐다봤지만, 그는 여전히 태평해 보였다.

“황제 말마따나 널 황후로 인정하고 꽤 유하게 대해 주려는 모양이니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라. 너도 그 정도는 얻어 낼 능력이 있어야지.”

결국 이본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난 14년간 그래 왔듯 이본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찰나의 움직임도 버거워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 * *

황제가 버려뒀던 로열 체임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제가 이미 날을 잡고 황후에게 전달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황궁의 모든 이들이, 수도의 모든 귀족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크로이센의 권력 판도가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비단 판도뿐만은 아니었다. 당사자들의 마음 또한 그랬다.

“황제 폐하께서 또 꽃을 보내셨는데, 어디에다 둘까요.”

벌써 몇 번이고 계속되는 황제의 꽃 선물이었다. 다른 자잘한 선물들도 같이 오기는 했지만, 크로이센에, 특히 푸르투 궁전에 널린 것이 꽃이었건만 뭐 그리 대단한 선물이라고 계속 보내는지, 하는 삐딱한 생각만 들었다.

메리앤은 정원 산책을 좋아하는 이본느를 위한 선물 아니겠냐고 했지만, 이본느는 그리 허투루 생각하지는 않았다. 목적이 불분명한 쓸데없는 수작이라는 게 이본느의 추측이었다.

“로열 체임버에서 함께 하시기 전에 잘 보이시려고 그러나 봐요.”

“아무 데나 놔둬.”

그 추측은 오늘로써 확실해졌다. 흰 백합과 분홍빛 백합이 가득한 거대한 화병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온 방에 퍼졌다. 꽃의 크기로 보나 향의 농도를 보나 마법으로 피워 낸 꽃이었다.

마법으로 피워 내는 꽃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그 꽃을 누구한테 선물할 요량으로 보내진 않겠지. 지금까지 온 꽃들 모두 시종장 고르텐의 지휘 아래 아랫사람들이 골라 보내온 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진심 하나 없는 무자비한 선물들은 호의라기보단 조롱처럼 느껴졌다. 이런 허술하고 일방적인 행동에도 이본느가 넘어갈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그나마 리투나는 이제 없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나.

“감사히 받았으니 인제 그만 보내셔도 된다고 좀 전하게.”

얼굴 한 번 비치지도 않는 카를로이였다. 이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추측으로 이끌었다. 이본느를 이용해 무언가 할 것이 있을 거라는.

자신을 그토록 경멸하던 사람이 그나마 그 감정을 덜 내색하는 이유가 도구로 써먹기 위해서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잔인한 인간이었다, 카를로이는.

물론 이본느는 투덜거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델루아 영지로 가 보겠다는 말을 꺼내려면 카를로이가 꽃이 아니라 돌멩이를 보내도 고맙다고 방긋 웃어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얼굴도 딱히 보고 있지 않은 사이에 대뜸 불러서 말을 꺼내기도 그렇고, 로열 체임버에서 보내는 밤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것 같았다.

이본느는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 * *

“황후 폐하께서 감사히 받았다고, 온 황후궁이 황제 폐하께서 보낸 꽃으로 가득 찼다고 보내셨는데요. 그만 보내라는 말을 돌려 하신 것 같은데.”

“그런가? 그럼 이제 그만해도 되겠지.”

카를로이는 책상에서 얼굴도 떼지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이본느의 추측은 정확해서 모든 선물은 고르텐의 지시 아래 보내지고 있었다.

고르텐은 의미 없는 선물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표했지만, 카를로이는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델루아 공작과의 대면 이후 도저히 이본느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작의 말대로 공작의 피를 그대로 받은 사람, 그 얼굴을 보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확신이 없었다. 얼굴은 보지 않지만 그래도 대우를 하겠다는 둥 자신이 내뱉은 말들이 있는데 가만히 있기도 뭐해 생각해 낸 것이 이따위 선물 공세였다.

“그리고 로열 체임버의 정리가 모두 끝났습니다. 아주 새로운 곳으로 탈바꿈했지요.”

“잘했네.”

“그리고 새벽에 보내온 전갈로 보건대, 아셀이 금방 도착할 것 같습니다. 늦어도 저녁 전엔 오겠는데요.”

“그렇다면 저녁 전이 아니라 몇 시간 내로 오겠는데. 항상 말하는 것보다 빨리 오니.”

고르텐이 기타 사항을 죄다 보고한 후 집무실을 나가자 카를로이는 그제야 의자에 기대 얼굴을 쓸었다. 이본느와 로열 체임버에서 보아야 할 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사흘 뒤면 그날이었다.

잠이야 원래도 자지 못하는 것이라지만 왜 하루가 갈수록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지. 불길한 기분이었다.

“피곤하신가 봐요.”

혼자여야 할 집무실에서 갑자기 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긋한 목소리에 대비되는 억센 억양. 카를로이는 눈을 가리던 손을 떼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아셀. 고르텐이 있을 땐 창문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니까.”

“혹시 모르니까요. 그리고 이게 더 편해요.”

카를로이가 고개를 들자 책상 앞에 서서 그를 빤히 바라보는 아셀이 눈에 들어왔다. 마하 제국에서도 최남부 지방 출신다운 약간 어두운 피부, 진한 갈색의 고수머리, 푸른 눈을 가진 남자.

“오래 걸렸군.”

“베르니만 보고 오라고 한 게 아니니까요.”

카를로이가 고르텐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아셀이었다. 카를로이 나이 열다섯에 마하 제국에서 직접 데려온 전쟁 노예 출신인 아셀은 크로이센에 와서도 다른 이들과 대화할 일이 없어 여전히 마하 억양이 강했다.

크로이센인은 들어갈 수 없는 베르니에 그나마 다녀올 수 있는 것도 아셀이 누가 보나 마하인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해서?”

“베르니는 조용해요. 사람들 분위기도 평화롭고, 수도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요. 군사력은 그대로고, 전쟁을 준비하는 그 어떤 움직임도 없어요.”

“딱히 이상이 없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네.”

“이상하지. 베르니는 전쟁을 하지 않을 생각이어도 끊임없이 군사로 장난질을 치는 나라인데, 가만히 있다니. 꼭 잘 닥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 같은데.”

셀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크로이센을 얻기 위해 각종 방법을 써 온 베르니였다. 저번 전쟁으로 크로이센뿐만 아니라 라르투아와도 척을 져서 상황이 좋지 않을 텐데 태평하다니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물어야 하지만 차마 입조차 떨어지지 않는.

“안 물어봐요?”

“뭘 물을지 알면, 그냥 말해 주면 좋겠는데.”

카를로이는 의식도 하지 못한 채 입가를 손으로 쓸었다. 긴장감으로 한껏 경직된 카를로이의 입매를 보다 아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베르니에는 없었어요, 찾는 사람. 델루아 국경에서 가까운 곳은 전부 돌아보고 왔지만 없었어요.”

전혀 수긍하지 못하고 뭔가를 더 원하는 듯한 카를로이의 얼굴에 아셀은 말을 좀 더 덧붙였다.

“크로이센인들은 베르니의 박해 때문에 한곳에 모여 사는데 그 어느 곳에도 없었어요. 그렇다고 베르니 중심지에 있을 리는 없어요.”

긴 대답을 다 들어 놓고도 카를로이는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델루아에도.”

의미하는 바가 명확하고 간단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다만 그 대답이 카를로이에겐 충분치 않았을 뿐이다.

“그 사건이 있었던 곳뿐만 아니라 주변 무고한 근방 마을까지 공작은 모두 도륙했어요. 무엇이 남았다면 더 이상하잖아요.”

“어둠의 숲이 남았어. 그곳은 아무도 제대로 조사할 수가 없었어.”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카를로이가 책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카를로이의 금안이 눈에 띄게 날카로워진 것을 보며 아셀은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잠시 했다.

카를로이는 확실히 크로이센과 같은 나라에 어울리는 왕은 아니었다. 성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내려온 크로이탄 왕조의 사람들은 대체로는 부드러운 인상이었고, 성격 또한 그랬다. 초대 조상이 그랬듯.

그러나 카를로이에게선 큰 키와 체격에서 나오는 위압감도 위압감이지만, 권태로운 듯 생기 없던 금색 눈에 빛이 들어와 번뜩일 때면 이유 모를 공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법이 걸려 있어요. 델루아의 직계만 들어갈 수 있도록 혈족 마법이 걸려 있어요. 마하에서도 여러 번 본 마법이에요.”

“델루아가에는 마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제 없을 텐데.”

“마법사일 필요는 없어요. 가주의 피만 있으면 다른 마법사가 걸 수도 있는 마법이에요. 다만 초대 조상의 피가 일정 이상 섞여 있어야 하지만.”

카를로이가 악문 입 사이로 조용히 내뱉었다.

“빌어먹을 크루아.”

대륙의 모든 국가의 황족은 초대 조상의 자손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유일한 곳이 크로이센이었다. 크로이센의 첫 인간이라 불리는 크루아의 직계는 델루아였다. 그리고 이것이 크로이센과 델루아의 지긋지긋한 권력 다툼 문제의 원인이었다.

카를로이를 눈치를 살피던 아셀이 조심히 말을 이었다.

“그곳에 뭐가 있어서 출입을 막은 건 아닐 거예요.”

카를로이는 대답 없이 아셀을 바라봤다. 아셀의 눈이 말하는 듯했다. 헛된 희망은 이쯤 접으라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곳을 많이 봐 왔어요.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알 수 있어요. 그곳은 이미 아무것도 없는 폐허예요.”

“그럼 왜 막아 두었단 말이지?”

“그런 곳이 있어요. 땅에서 나오는 힘이 깊어 아무리 없애려고 들어도 모든 흔적을 없애지는 못하는 곳…….”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셀이 살짝 몸을 떨었다.

“더 처참해지긴 하지만 그래도 그 땅은 여전히 남아 있는 곳. 완전히 없애 버리지는 못하니까 남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거예요.”

카를로이의 표정은 분명 그대로였으나 아셀은 분명 그의 어딘가가 무너져 내린 걸 보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폐하가 그만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곳을 봐도, 그 주변을 봐도 남은 건 없어요. 시간 낭비예요.”

“그만 말해도 돼.”

“답은 아주 간단해요. 그 사람은 없는 거예요.”

“시체는 없었어.”

“모든 것이 타 버렸으니까요.”

“……그 애는 거기서 도망가야 하는 걸 분명 알고 있었어. 그러니 어디로든 갔을 거야.”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듯해 억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믿음 하나로 명줄을 이어 가는 광신도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아셀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중요해요? 달라지는 건 없는데.”

“모든 게 달라져.”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기에 아셀은 카를로이를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 무려 10년을 찾았으니 포기할 만도 한데 카를로이는 끈질겼다.

“수고했어, 아셀. 가서 좀 쉬도록 해. 고르텐에게 말하면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 줄 테니.”

카를로이가 의자에 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아셀을 정말 배려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단 쓰러지기 직전의 사람이 간신히 참고 꺼내는 말처럼 들렸다.

아셀은 조용히, 이번에는 문을 통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아셀이 나가고도 카를로이는 한참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아직도 소리 내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마치 조각 하나가 빠져 무너지는 벽처럼 그 이름을 내뱉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

무서웠다.

* * *

드디어 그날이 왔다. 로열 체임버에서 황제와 황후가 공식적인 첫 밤을 보내는 날이.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에요! 레이디 서로가 그랬다니까요, 황제께서 황후 폐하와 동침하시는 게 다 황비 전하가 시켜서 그러는 거라고. 아주 자애롭다면서 얼마나 황비 전하 칭찬을 하던지.”

“맞아요. 근데 거짓말은 아닌 거 같아요. 황비 전하가 황제께 그리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래요. 요새 황제께서 하는 일들이 다 황비 전하가 시킨 거라고 사람들이 그래요.”

“꽃까지 그 여자가 골라서 보내는 거 아니에요? 어쩐지 꽃들이 하나같이 별로더라니…….”

시녀 앙센과 루엔이 종알거리는 소리가 커지자 메리앤이 눈길을 줬다. 입을 다물라는 뜻을 제대로 알아먹은 시녀들의 목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런 헛소리들 듣고 와서 황후 폐하께 또 늘어놓았다간 다시 교육을 받아야 할 거야. 레이디 루엔, 레이디 앙센.”

“헛소리가 아니라 사실일 수도 있지, 메리앤. 그편이 오히려 나로서는 더 납득이 가는군.”

“폐하.”

이번엔 메리앤의 목소리가 불만스러워졌지만 이본느는 무덤덤했다.

“지금 당장도 황비궁에 계신다 하지 않았나, 폐하께서. 오늘 밤 어떻게 해야 하는지 황비에게서 말을 듣고 계실지도 모를 일이지.”

이본느는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황비의 말은 모두 들어주고 싶은 모양이지. 이제 이본느는 델루아 영지로 가고 싶다는 말을 황제가 아니라 황비에게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본느의 생각대로 카를로이는 키아나와 함께 있었지만 딱히 키아나에게서 뭘 하라는 소리를 듣는 중은 아니었다.

“이상한 이야기가 돌던데. 내가 그대에게 눈이 멀어서 그대가 시키는 건 다 한다더군.”

“오, 그거.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어요. 손 좀 썼다고.”

키아나는 놀라지도 않고 방긋 웃어 보였다.

“로열 체임버에서 공식적으로 밤을 보내게 되면 황후 폐하의 위치가 예전과 같진 않을 텐데, 저도 살길은 찾아 둬야죠.”

비관적인 내용과는 달리 키아나의 말투는 쾌활했다.

“사실 지금도 사람들은 제 존재를 어색해한다니까요. 재밌어는 하는데, 어색해해요. 저조차도 그러니 오죽하겠어요.”

“황후와 내가 사이가 좋아진 게 아니라, 다 그대에게 홀린 거다?”

“시기도 맞지 않나요? 제가 황비가 된 이후부터 두 분 사이가 좋아지신 거니까요. 폐하께도 전혀 손해되지 않는 일이죠.”

“나쁘지 않지.”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황제의 안색은 나빠 보였다. 영혼이 어디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 같기도 했다.

키아나는 전하려던 말을 전해도 될지 잠시 고민했다.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황을 봐서 말하려 했건만, 지금 황제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왜 보자고 했지?”

하지만 그 와중에도 칼같이 본론을 묻는 카를로이였다. 키아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때 폐하께서 브로치를 말씀하셔서요. 상단을 통해서 한번 다시 찾아봤어요.”

키아나의 말에 카를로이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뚫어져라 보는 눈에 키아나는 조금 전까지는 황제의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사람이 눈빛부터 달라 보였기에.

“델루아 영지의 작은 도시 미르셀에서 보석상을 하던 남자가 있었어요. 14년 전에 마하로 넘어가서 마하에서 살다 최근에야 다시 들어온 사람이더라고요. 못 찾았던 게 당연하죠.”

“마하로는 왜 갔지?”

“자기 말로는 큰돈이 생겨서 간 거라는데, 눈치가 빠른 사람 같았어요. 위험한 걸 알고 도망간 게 아닌가 싶어요.”

카를로이의 얼굴은 무덤덤해 보였지만, 손이 하얗게 질리고 힘줄이 돋을 정도로 찻잔을 세게 쥐고 있었다. 잠시 그 손에 눈길을 주던 키아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14년 전에 그 브로치를 샀대요. 너무 인상적이어서 잊을 수 없었다고. 마르고 행색이 지저분한 남자아이가 와서 팔았는데, 도저히 그런 물건을 가질 아이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처음에는 가짜인 줄 알았대요.”

“……다른 말은?”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한 글자였대요. 성도 없는 아이였고, 지저분한 행색이랑은 다르게 얼굴은 곱상하게 생겼어서 기억이 난다고. 비가 오는 날이라 안투석이랑 플루비석을 잔뜩 사서 가더래요.”

카를로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찾는 사람이…… 맞으세요?”

대답은 없었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맞는 듯했다. 찾는 사람이 맞다니 키아나는 더 난감해졌다. 대체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가짜인 줄 알고 싸게 아무한테나 팔았는데, 며칠 후에 공작저의 군인들이 그 브로치를 들고 와서 물었대요. 여기서 판 게 맞냐고. 누구한테서 물건을 받았냐고 자세히도 묻고 가서 알려 줬다고. 전부 다요.”

이제 카를로이의 얼굴은 그 손만큼이나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공작저 사람들이 와서 물었다고?”

키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위기가 험악했고, 군인들이 포상이라면서 돈을 엄청나게 주고 브로치를 가져갔대요. 자신한테는 줄 필요도 없었는데 돈을 많이 주길래 아무래도 위험한 일에 엮인 것 같았다고요.”

아직 가장 심각한 건 말하지도 않았는데 카를로이의 반응이 저 모양이니 키아나는 점점 걱정이 됐다.

“군인들 말이, 그 브로치는 귀한 사람의 것이고, 판 아이는 중죄를 지은 거라고 했대요.”

“그래서?”

카를로이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심지어 약간 떨리는 듯도 했다. 키아나는 카를로이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돈이 많아져서 새 삶을 계획했다지만, 제 생각에는 무서워져서 도망을 계획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마하로 떠나기 전에 술집에서 군인 중 하나를 마주치게 돼서 물어봤대요. 그때 그 일은 어떻게 됐냐고.”

심장이 지나치게 두근거려서 카를로이는 입을 더 열 수가 없었다. 키아나의 머뭇거리는 기색을 눈치채자 그는 더욱더 불안해졌다.

“군인 말로는. 그 군인 말로는, 그 애는 죽었다고. 범죄에 연루된 아이라 공작저 군인들이 가서 죽였다고…….”

“거짓말일지도 모르지.”

“그 애 어머니까지 죽이고, 그 마을은 모조리 불에 탔다고 군인이 말했다고 했어요. 시체를…… 탑처럼 쌓아서 다 불태웠대요. 그래서 그 보석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크로이센을 떴다고요.”

찻잔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카를로이의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 찻잔의 조각들이 그의 피를 묻힌 채로 테이블과 바닥에 떨어졌다.

키아나를 비롯한 시종들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카를로이는 여전히 날카로운 조각을 꼭 쥐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마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 그를 보고 아무도 다가오지 못했다.

“……먼저 일어나겠네.”

한참 뒤에 나온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낮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시종장 고르텐이 황망한 얼굴로 황제의 뒤를 따랐다. 황제궁에 도착하자마자 고르텐은 궁의를 불렀다.

“미루세요. 그러셔야 합니다.”

치료사가 손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고르텐은 끊임없이 말했다. 카를로이는 아까부터 상태가 영 이상했다. 동침은 무슨, 로열 체임버까지 갈 수 있을지나 걱정이었다.

“폐하.”

“고르텐, 머리가 울려.”

닥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고르텐은 무려 3대의 황제를 모신 시종장이었다. 연륜도 연륜이지만 그는 닥치지 않아야 할 때를 잘 아는 시종장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다고요!”

내내 멍하니 있던 카를로이가 고개를 돌렸다.

“왜 미뤄야 하지?”

“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조금 전까지도 피가 줄줄 흐르는 손을 휘두른 주제에 태연하기 그지없는 낯짝이었다. 황제만 아니었다면 고르텐은 카를로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그럼 치료사는 놀러 온 겁니까? 일도 없는데?”

“찻잔이 너무 약하더군.”

“폐하.”

“아무 일도 없었으니 미룰 필요도 없네.”

정말 모든 것을 잊어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고르텐은 결국 카를로이를 만류하는 대신 애꿎은 제 가슴만 몇 번 치고 말았다.

카를로이는 아셀과 키아나의 말을 떠올리다 이내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이게 끝이어서는 안 됐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14년간의 버티기가 이렇게 무의미해져서는 안 됐다.

* * *

로열 체임버에 먼저 와 있던 이본느는 카를로이를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감싼 천도 천이지만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초점을 잃은 듯한 얼굴은 체임버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바로 창백해졌다.

아무리 내부를 다 바꿨어도 음산하게 느껴지는 공기는 그대로였다. 피로감에 조금만 틈을 내주면 금방이라도 아델라이드가 죽은 그날 밤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태어나지 못한 동생, 검게 변하던 주검, 독, 그리고 델루아. 불쾌한 단어들이 한데 섞여 머리를 뒤흔들었다.

“폐하?”

조심스러운 부름에 카를로이가 이본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들어오자마자 숨이 막혔는데 이본느를 보니 숨쉬기가 조금 수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는 이본느만 보면 답답했는데.

“황후.”

“어디 편찮으신가요?”

“……아닙니다.”

얼굴은 전혀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침상에 앉아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은 마치 누구한테 괴롭힘이라도 당하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시종들도 없이 단둘이 있는 방. 카를로이는 말을 꺼낼 상태가 되지 않는 것 같고, 이본느는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누워야 할 것 같아.”

이본느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를로이가 침대의 바깥쪽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진정제 때문인지 이제는 앉아 있을 힘도 없던 탓이었다.

화려한 천장은 익숙했다. 내부를 바꾸면서 천장은 그대로 놔둔 모양이었다. 천장의 무늬를 보고 있자니 문득 손에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착각이 들어 카를로이는 눈을 감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죽은 선대 황후의 시체가 자신의 손을 으스러져라 꼭 쥐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날처럼.

이본느는 침대에 앉아서 눕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든 카를로이를 내려다보았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고 인상은 약하게 찡그리고 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아주 약했지만 앓는 신음도 들리는 듯했다.

또다시 치료사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되는 건 아닌가 싶어 이본느는 침대에 완전히 눕지도 못하고 카를로이를 보기만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카를로이의 상태가 멀쩡해지는 듯해서 이본느는 자세를 바로 하고 누웠다. 하지만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카를로이가 자신과 있는 것이 너무도 불편해 저 지경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그렇게 감정을 누르라고 말을 했건만, 카를로이 넌 어쩜 아직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울어도, 웃어도, 화를 내도, 무엇을 어떻게 해도 항상 자신을 혼내기만 하던 황후의 목소리였다.

<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그렇게 해서 제대로 된 황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니? 네가 책임져야 하는 게 뭔지는 아는 거야?>

끊임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지, 어머니는 벌써 돌아가셨는데.

어지러운 머리를 잡고 주위를 둘러보는 카를로이의 눈에 못마땅한 얼굴의 아델라이드 뒤냐가 눈에 보였다. 냉정하고 아름다운 얼굴.

<다 너 때문이다.>

아름답던 얼굴은 순식간에 해골이 되어 카를로이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목이 졸리는 느낌에 카를로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칼!>

어디선가 루의 목소리가 들려 카를로이가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에게로 뛰어오는 루가 보였다.

카를로이는 소리 지르고 싶었다. 제발 자신에게 좀 오지 말라고. 제발 좀, 제발 어디 멀리로 가 버리라고.

<칼, 왜 거기에 있어!>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여전히 루는 뛰어온다. 거리가 가까워지려는 순간 루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검붉은 피 웅덩이가 생겼다.

아니, 아니야.

목이 졸린 채 카를로이가 몸부림쳤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루는 죽지 않았어.

<죽었어.>

해골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목을 조르는 힘이 더 강해졌다.

<나처럼 저 아이도 죽었어. 왜일까.>

<아니라니까!>

답을 이미 알고 있는 카를로이가 듣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카를로이, 너 때문이잖아.>

해골은 다시 아름다운 어머니의 얼굴로 돌아왔다.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이 멈추지도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멈추지 않는 눈물이 강을 만들어 카를로이의 목을 조여 왔다. 익사하는 새처럼 카를로이의 목이 꺾였다. 눈물로 만든 강에 루의 피가 섞였다.

“안 돼! 루!”

카를로이가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폐하?”

잠을 이루지 못한 이본느가 깜짝 놀라 귀를 의심하며 일어났다. 앓는 소리가 심해지더니 계속 아니라고 소리까지 지르고,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본느가 재차 물어도 카를로이는 대답이 없었다. 거친 숨만 내쉬며 카를로이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꿈에서 깨어나서도 여전히 그곳이었다. 아델라이드의 죽은 혼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은 그곳. 이 빌어먹을 침실을 아무리 뒤엎고 바꿔도 그 기괴함이 여전했다.

<델루아.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시체도 건사하지 못하게 죽을지어다.>

쇳소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너…… 때문…….>

자신의 손을 부서져라 잡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내뱉던 말까지 들리자 카를로이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는 헛구역질을 하며 침실을 빠져나갔다. 이본느가 자신도 모르게 놀라 그 뒤를 따랐다.

“따라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복도에 대기하던 시종들과 기사들이 카를로이의 호령에 주춤해 더 움직이지 않았지만 이본느는 멈추지 않았다.

분명 카를로이는 제 이름을 외쳤다. 루, 자신마저도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이름을.

카를로이를 따라 바깥으로 나가자 어둠 속에서도 그가 보였다. 조각상 하나를 힘줄이 다 튀어나온 손으로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하는 카를로이가.

이본느가 홀린 듯 다가가자 눈물 고인 금색 눈이 이본느를 향했다. 카를로이의 손을 감싼 천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본느는 그 손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너무나 불안정해 보이는 카를로이의 얼굴 위로 어린 시절 자신을 구해 주고, 제가 구해 줬던 남자아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본느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칼…….”

여전히 꿈결처럼 들리는, 자비로운 속삭임에 카를로이가 무너져 내렸다.

카를로이는 무릎을 꿇고 이본느의 품 안에서 무너져 내렸다. 아주 약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본느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등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끊기는 울음소리 사이로 그가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고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곳에 놔두지 말았어야 했어.”

형편없이 쉬어 버린 목소리였다. 카를로이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내가 죽였어.”

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내내 부정해 오던 진실이었다. 리리안 루는 죽었고, 그 모든 것은 그의 탓이었다. 아무리 부정해 봐도, 외면해 와도 꿈속에서조차 바뀌지 않는 진실이었다.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있었던 이본느의 어깨가 젖어 들었다. 누가 목이라도 조르는 것처럼 거칠게 끊겨 나오는 울음소리는 이본느가 들었던 그 어떤 소리보다 더 처참하게 들렸다.

“루. 루……. 내가 잘못했어, 루…….”

숨을 토해 내듯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카를로이는 마치 그제야 허락받은 듯 울음 속에서도 하염없이 같은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익숙한 이름에 이본느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 기억에 아직도 카를로이가 고통받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본느가 감싸 안지도 못하게 너무나 커 버린 주제에,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서 이제는 쓸모도 없는 이름을 부르리란 건 알지 못했다.

“…….”

이본느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 있는데.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이본느는 자신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죽지 않았다고, 네 앞에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이본느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 상황이 기가 막혀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울지 마.”

카를로이는 어느새 고개를 들고 이본느를 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이본느의 눈에 닿더니 눈물을 가져갔다. 슬프도록 다정한 손길이었다.

자신을 통해 누구를 보고 있을지 뻔했다. 이본느는 그 마음을 알았다. 사람은 무언가 그리워 미쳐 버릴 때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고 있다 착각한다는걸.

“내가 잘못했어.”

카를로이의 눈이 고통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며 이본느는 눈을 감았다. 눈이라도 감지 않는다면 이 순간을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그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자책과 사과가 이어졌다.

달마저 어두워 빛 하나 없는 밤, 적막한 궁에는 황제의 울음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그 옆엔 차마 소리도 낼 수 없어 눈물만 흘리는 황후가 있었다.

* * *

카를로이가 눈을 떴을 땐 로열 체임버의 천장이 보였다. 아주 기나긴, 지난한 꿈을 꾼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활짝 걷힌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약한 신음을 내며 그가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고르텐이 달려왔다.

“폐하!”

카를로이가 물을 받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본느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제 실신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을 드렸지 않아요, 어제는 무리였다고!”

“실신?”

“진정제를 너무 많이 드셔서 그런 거랍니다. 요새 왜 이렇게 적당히를 모르십니까, 적당히를! 저마저 죽어 나가야 폐하께서도 정신을 차릴 작정이십니까?”

차가운 물이 속으로 들어가자 희뿌옇던 머리가 맑아졌다. 정신을 차리자 불현듯 한 이미지가 강하게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눈물만 계속 흘리고 있던 이본느의 눈.

카를로이는 머리가 아파져 오는 느낌에 관자놀이를 세게 짓눌렀다.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황후가 그렇게 울 일이 어디 있다고.

아델라이드, 루, 이본느.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이었는지 카를로이는 계속 고민했다.

“어제 왜 그렇게 우신 겁니까?”

한마디 없는 카를로이에게 고르텐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카를로이는 그제야 자신도 어제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기억해 냈다. 기억이 물꼬를 트듯 죄다 몰려들자 카를로이의 얼굴부터 귀까지 모두 붉게 물들었다.

“봤나?”

“따라오면 죽이겠다고 하셔서 보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봐도 우시는가 보다, 했지요.”

“황후, 황후는.”

질문이 차마 다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를 붙잡고 그런 추태를 보였다니, 차라리 다 꿈이었기를 바랐다.

“아, 그렇지 않아도 황후 폐하가 정말 이상하시던데요. 폐하께서야 그렇다 치고, 황후 폐하께서는 왜 그렇게 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황후가 울었다고?”

“계속 눈물을 흘리고 계시던데요. 솔직히 황후 폐하는…… 피도 눈물도 없을 것처럼 보이시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이본느 델루아의 첫인상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폐하께서 운다고 같이 우시는 걸 보고 있자니 생각보단 정이 있으신 분인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황후께서도 뭔가 슬픈 일이 있으셨나?”

카를로이가 멍한 얼굴로 물잔을 부여잡았다. 그럼 자신이 이본느의 눈물을 닦고 이본느를 루라 착각한 것도 다 꿈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튼 황후께선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새벽이 되자마자 가셨습니다. 잠도 주무시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하지만 이내 자신에 대한 짙은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애먼 사람 붙잡고 미안하다고 하면 뭘 하나. 그 사람은 정작 이제 없는데.

눈에 띄게 어두워진 카를로이의 얼굴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고르텐이 황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

“입단속은 제대로 시켜 놨으니 누가 이 일에 대해서 떠들진 않을 겁니다. 다들 두 분 폐하께서 멀쩡히 밤을 보내셨다고 알고 있으니까요.”

이미 고르텐의 말은 카를로이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홀로 남겨진 침대에 넋 놓고 앉아 서서히 절망감에 젖어 들었다.

루가 이제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카를로이는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14년간 찾아왔던 길이 절벽이었으므로.

* * *

“그거 못 쓰겠네요. 잉크가 다 번졌어요.”

얼빠진 얼굴로 펜을 잡고 있던 카를로이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또 언제 들어온 건지 아셀이 눈을 껌뻑거리며 카를로이의 펜을 가리키고 있었다. 잉크가 다 번진 종이와 함께.

“전쟁에서 그러면 폐하 목…….”

태연한 얼굴로 아셀이 손으로 제 목을 슥, 그어 보였다.

“지금은 전쟁 중이지 않아, 아셀.”

“언제나 전쟁이에요.”

굉장히 철학적으로 들리는 대답에 카를로이는 눈살만 찌푸리고 종이를 구겨서 버렸다.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버리는 종이가 몇 장째인지 모르겠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긴 하지만 그의 머리는 다른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동굴에 루를 놔두고 와서는 안 됐다는 생각에 시달리다가, 애써 다른 생각을 하려 하면 이본느가 흘리던 눈물이 머리를 침범했다.

종이를 보고 있으면 그 위에 두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다 겹쳐지는 것이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돌아 버리겠군.”

“그래 보여요.”

“……왜 왔지, 아셀?”

“영감이 오후에 황후궁으로 가래요. 답장이 왔다고.”

“고르텐의 말을 왜 네가 전하지?”

아셀이 못 들은 척 창밖을 쳐다봤다. 안 봐도 뻔히 그려지는 상황에 카를로이가 한숨을 쉬었다. 할 일이 없으면 심심해하는 아셀이 사고를 칠 것 같아 뭐라도 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셀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지만 아무튼 아셀이 죽는다면 그건 필시 호기심 때문일 터였다. 그 정도로 아셀은 갓 태어난 아기 같은 호기심 하나로 사람들을 귀찮게 만들었다.

아셀이 없는 1년간 행복해했던 고르텐의 모습을 생각하니 좀 우습기도 했다.

“왜 가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러던데. 폐하가 황후를 아주 싫어한다고. 황후도 폐하를 엄청 싫어한대요.”

다 아는 사실인데도 새삼 기분이 나빴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어.”

“어제 황후 앞에서 울어서? 입 막으려고? 애도 아니고.”

“아셀!”

아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영감이 말해 준 거예요.”

“고르텐이 제 입으로 줄줄 불 때까지 얼마나 괴롭힌 거지?”

“별로. 나도 가도 돼요?”

“어디를.”

“황후궁. 황후 본 적이 없는데, 궁금해요. 심심하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자기가 이본느를 봐야 할 일이 어디 있다고?

카를로이는 표정을 굳히고 아셀을 바라봤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사람이야. 황제궁에 잠자코 있는 게 좋을걸.”

“폐하 표정이 이상해서 더 궁금해요. 황후 싫어하는 거 맞아요?”

해맑은 아셀의 질문에 카를로이는 진저리가 나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르텐이 왜 아셀을 피해 다니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아직 황후궁에 가기로 약속한 시각은 좀 멀었지만 미리 출발해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황제궁에 있으라 했어.”

카를로이가 경고하듯 한 번 더 으르렁거렸다. 아셀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아셀을 집무실에 홀로 남겨 두고 나오는 카를로이를 보고 고르텐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망나니가 떠났습니까?”

“이제 막 돌아온 사람이 떠날 일이 뭐가 있나. 집무실에 일단 있으라 했어. 좀 이르지만, 황후궁으로 가지.”

고르텐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시킬 일이 없으십니까? 어디 다른 데로 좀 보내면 어떻습니까. 마하나, 라르투아나. 마하도 정복 전쟁이 다 끝나 간다는데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게다가 먹기는 또 얼마나 처먹는지…….”

“아셀은 마하라면 치를 떨어.”

“아니, 마하가 아니라도 뭐 어디라도요! 시킬 일이 없으면 휴가라도 주세요. 렉셈 소르타 같은 곳에서 휴양이나 하라고. 그놈은 여기 계속 두면 사고 칠 놈이에요.”

투덜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카를로이는 발을 놀렸다. 이본느를 보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황후궁에 들어서자 시녀들이 당황한 얼굴로 이본느가 침실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기시감을 느낀 카를로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침실로 들어갔다.

“이렇게 조심성이 없으셔서, 원! 정말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입구에서부터 메리앤이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말했잖아. 이번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까.”

“아!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바닥에 차기들이 깨져서 떨어져 있어요? 이번엔 또 뭐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신 거예요.”

이본느가 대답이 없자 메리앤이 다시 다그쳤다.

“술도 그만 드시라고 했잖아요.”

“아니, 정말로 이번엔 손이 떨려서 그런 거래도. 술도 몇 잔밖에 안 했어. 너무 힘들어서 그래, 메리앤.”

예전에 겪었던 비슷한 상황이 생각났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본느 옆에서 메리앤이 약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본느의 두 발에 묻은 피가 보였다.

“그럼 빨리 저를 부르시든가 하셨어야죠! 이 상태로 멍하게 계속 있으시고.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내내 이러시는 거예요? 이러다 상처라도 덧나시면…….”

“딱히 아프지 않아서 몰랐어. 그러니 메리앤, 그만 화내.”

아프지 않다는 말은 진심인지 이본느의 얼굴은 무감해 보였다. 아픔에 무신경한 그 얼굴에서 또 불쾌한 기시감이 느껴져 카를로이는 피가 차갑게 식었다. 왜 이렇게 화가 치미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이본느의 발을 잡고 제 소매로 피를 닦고 있었다.

“황후는 대체 문제가 뭡니까? 자학이 취미인 겁니까? 매번! 자기 일 아니라는 듯!”

풀리지 않는 분노가 가슴을 괴롭혀 고개를 쳐들자 큰 초록색 눈이 보였다. 충격받았는지 입도 못 열고 눈만 크게 뜬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본느가 눈에 들어오자 카를로이는 점점 이성이 돌아왔다.

“대체 왜.”

갈무리되지 않은 분노가 나직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또다, 또. 이본느에게서 또 누굴 겹쳐 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미쳐 가고 있다는 징조였다. 그래, 미쳤다 해도 놀랍지 않다.

길 잃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이본느만 멍하니 보고 있던 카를로이는 메리앤의 새된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폐하! 제가 하겠습니다!”

거의 애원하다시피 하는 메리앤의 목소리에 카를로이는 천천히 이본느를 놓아주었다. 혼비백산한 얼굴로 서 있던 고르텐이 달려와 이미 피 묻은 카를로이의 소매를 어떻게 해 보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 몰랐어요.”

“그럼, 이보다 더 늦게 왔으면 아예 칼로 직접 그대 몸을 찌르기라도 했겠군요.”

자신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말이 나왔다. 바라던 바였는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했다. 이게 다 어제 일 때문이 분명했다.

“……정말 사고였어요.”

“그럼 언제는 사고가 아니었습니까.”

예리한 질문에 이본느가 말문이 막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이번은 반쯤 실수긴 했다. 손이 계속 떨려서 뭘 제대로 집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카를로이의 눈물이 생각나고, 드니스가 생각나고, 비참한 처지가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술을 마시면 좀 잊힐까 싶었지만 더 괴롭기만 했다. 새벽부터 내내 멍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카를로이의 얼굴까지 보이자 간밤의 일이 더 생생히 떠올라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후원에 차를 준비하라 이를게요.”

“그 발로 뭐 하러 밖까지 나갑니까. 고르텐, 차는 침실로 가져오라고 해.”

메리앤이 이본느의 발을 치료하는 동안 시녀들이 착실하게 침실 테이블 위에 다과를 준비했다.

카를로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테이블에 앉아 이본느를 흘끗 쳐다봤다. 무표정한 얼굴만 봐서는 어젯밤 눈물을 흘린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왜 저 얼굴에서 루를 떠올리는 건지. 어제야 반쯤 미쳐서 그랬다 치고, 제정신에 보면 닮은 구석 하나 없는데.

치료가 끝난 이본느가 카를로이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어제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미 없었던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이본느의 답이 돌아왔다. 술 몇 잔 했다는 사람치고는 꽤 단호한 답이었다. 파랑 하나 없는 물결처럼 잔잔한 흰 얼굴에 카를로이의 시선이 잠시 머무르다 이윽고 마른 쇄골로 내려왔다.

하얀 어깨를 보자 전날의 기억이 파도처럼 카를로이를 후려쳤다. 저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내뱉던 자신이 기억난 탓이었다. 저렇게 작은 몸에 기대서 울었다니, 화끈거리는 듯한 느낌에 카를로이가 아무렇지 않은 척 큰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한번 기억이 돌아오자 이본느의 얼굴에서 계속 눈물이 보이는 듯했다. 분명 무표정인데 꼭 눈물이 아직도 흐르는 것 같았다.

“황후는 왜 그런 겁니까.”

해서 이성이 말리기도 전에 질문이 카를로이의 입을 뚫고 나갔다.

“나야 진정제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지만, 황후는 왜 운 건지.”

철옹성 같던 이본느의 얼굴이 흐트러지더니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대놓고 물어볼 줄 몰랐던 것이 분명했다. 입만 한참 뻐끔거리던 이본느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좋지 못한 꿈을 꿔서요.”

신빙성 없는 대답이었지만 이본느가 무어라 대답했어도 이상했을 일이었다.

침묵 속에 카를로이는 애먼 차만 들이켰다. 이상하게도 이본느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흘끗 보기만 해도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그는 계속 스스로를 다잡았다. 여기서 멍청하게 굴지 마.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저, 폐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본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카를로이를 부르고 나서야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델루아 영지에 한번 갔다 오고 싶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부탁에 카를로이가 어색함도 잊고 이본느를 빤히 쳐다봤다.

“그대가 델루아에 가 봐야 할 이유가 딱히 있습니까?”

이본느는 계속 연습했던 답을 내놓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머니의 묘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계속 꿈에 나타나셔서 불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고요……. 아버지는 괜찮다 하시지만 제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너무 말도 안 되는 핑계라 이본느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하지만 이것이 며칠간 생각해 낸 잡스러운 핑계 중 그나마 멀쩡한 것이었다.

공작 말대로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본느 델루아라는 사람에게는 델루아 영지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다.

“폐하…….”

저도 모르게 간절한 목소리가 나왔다.

바로 타박을 줄 것 같았던 카를로이는 뜻밖에 진지한 얼굴로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본인도 바로 어제 악몽에 시달려서 이해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델루아 영지는 너무 멀지 않습니까. 가는 데 열흘은 걸릴 텐데, 왕복만 해도 스무 날입니다.”

“마석을 쓰면 좀 더 빨리 갔다 올 수 있어요. 걸리는 시간이 반으로 줄어들 거예요.”

“……하긴 델루아라면 마석 걱정은 없겠지.”

말의 신체 기능을 비정상적으로 촉진하는 마력석인 마석은 주로 베르니에서 생산되는 것이었는데, 베르니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델루아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는 했다.

“공작도 같이 갑니까.”

“네.”

이본느가 초조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렸다. 자신이 카를로이라도 허락할 것 같지가 않았다. 저런 시답잖은 이유로 어떻게 국경 근처까지 간단 말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카를로이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빌기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알았습니다. 2주 내로 돌아오는 게 가능하다면 갔다 와도 좋습니다.”

“네?”

바라던 대답이었는데 막상 들으니 믿기지 않아서 이본느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었다.

“갔다 오세요.”

“정말, 정말이세요?”

이본느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렸다. 카를로이가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이자 멍하던 이본느의 얼굴에 점점 생기가 들어왔다.

“감사해요, 폐하. 정말, 정말 감사해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두서없이 감사 인사를 말하던 이본느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미소가 걸렸다.

“정말로…… 감사드려요.”

이본느가 어쩔 줄 모르고 손을 입가에 올렸다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 심지어 눈가엔 눈물이 맺힌 것 같기도 했다.

얼굴엔 여전히 밝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카를로이는 생전 처음 보는, 어두운 기색 하나 없는 환한 미소가. 처음 보는 그 웃음에 카를로이가 멍하니 그 얼굴을 쳐다봤다. 시간이 잠시 느려진 듯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

눈도 깜빡거리지 못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카를로이는 계속 이본느를 바라봤다.

“폐하!”

옆에서 고르텐이 다시 한 번 부르는 소리에 카를로이가 정신을 차렸다.

“차가 흐르는데요…….”

고르텐이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찻잔에서 찻물이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카를로이가 놀라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고개를 드니 이본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언제나 생기 없던 이본느 주위에서 빛이라도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이본느는 끊임없이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마치 어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던 자신처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이상하게 저릿저릿한, 생경한 기분이 들어 카를로이는 손으로 제 입을 덮었다.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금방 다녀올게요.”

헛기침을 세 번쯤 하고 나서야 카를로이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호위를 하나 붙여 줄 테니 꼭 데려가세요.”

“호위요? 누구를?”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게 내 조건입니다.”

“네네, 그럴게요. 그렇게 할게요.”

카를로이가 말을 취소할까 봐 겁이라도 나는지 이본느가 빠르게 대답했다. 호위로 거지를 데리고 가라 했어도 알겠다고 대답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고개를 황급히 끄덕이는 그 모습이 어딘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카를로이는 제 생각에 놀라 기겁했다. 어제부터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돌았군. 미쳐 버렸다. 델루아의 딸이 뭐가 어째?

여기서 이본느를 더 보고 있다간 정말 머리가 회까닥 돌 것 같은 기분에 카를로이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를로이의 시선이 말간 이본느의 얼굴에 잠시 머무르다 발을 감싼 천에 닿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그만해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모습을 투영하는 미친 짓거리 따위는.

“아, 하나 더.”

“네?”

“어제 있었던 일은…… 공작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본느는 없던 일로 생각하겠다 했지만 카를로이로선 덮어놓고 믿기도 어려웠다. 좀 더 확실히 말해 둘 필요성을 느꼈다. 카를로이의 말을 들은 이본느의 얼굴에선 잠시 웃음기가 사라졌다.

“폐하. 저는, 아버지께 그런 것까지 전부 이야기하지 않아요.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시는 것들은…… 저로선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제가 함부로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아요.”

선선대 황제, 카를로이의 조부 카를 크로이탄이 델루아 공작에게 갖은 농락을 다 당하다 죽은 이후로, 크로이탄에는 불문율이 있었다.

델루아는 절대로 믿지 말 것.

하지만 이본느의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에 카를로이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본느는 진심으로 기쁜지, 평소 하지 않던 배웅까지 직접 했다.

선물을 이것저것 보내도 별 반응도 없었다더니 델루아로 보내 준다는 말 한마디에 저러는 것을 보니 기분이 복잡했다.

“폐하, 정말 보내 주실 겁니까?”

고르텐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고르텐, 자네에겐 잘된 일이지.”

“저에게요? 저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아셀이 2주간 수도에 없을 테니까.”

“아셀이요? 왜요? 아, 아아!”

카를로이의 말을 이해한 고르텐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당장 아셀부터 봐야겠군. 델루아 공작에게 오늘 내로 내 집무실에 들르라고 전하게, 고르텐.”

“예, 폐하.”

집무실에 도착했더니 아셀은 여전히 같은 자리, 집무실 책상 옆 책꽂이 위에 앉아 있었다. 똑같이 심드렁한 얼굴로.

“아셀, 내려와. 의자에 앉으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약간 뾰로통한 얼굴로 변한 아셀이 성큼 바닥으로 내려왔다.

“심심하다 했지. 델루아에 한 번 더 갔다 와야겠다.”

카를로이의 말에 아셀이 노골적으로 지루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살 일이 없다 보니 아셀에겐 사회성이라는 것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 해도 노예 신분이었으니 상명하복 정신이라도 있어야 마땅한 일일진대, 아셀은 어떻게 된 건지 그 개념조차 희미해 보였다.

“이번엔 어둠의 숲까지 들어갔다가 와. 명령이다.”

“아니, 말했잖아요. 혈족 마법이…….”

“델루아와 같이 가게 될 테니까. 넌 황후 호위다.”

“황후?”

아셀의 푸른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는 것을 보자 카를로이는 또다시 희미한 불편함을 느꼈다. 저와 무관한 일에 왜 저렇게 호기심을 가지는지.

“명목이 호위라는 거지, 네 역할은 감시야. 공작도, 황후도 허튼짓 못 하게.”

“알았어요.”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 와.”

“그래도 죽은 건 죽은 거예요.”

죽음을 언급하는 심드렁한 말투에 카를로이가 아셀을 잠시 노려봤다.

“그 애를 찾아오란 말이 아니야. 뭐든지, 이상한 건 전부 알아 와.”

“그 말이 그 말.”

“……짐을 싸든가, 몸을 풀든가 나가서 갈 준비나 해.”

아셀이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 밖으로 훌쩍 나가자 카를로이는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자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들어 카를로이는 소파에 주저앉듯 누웠다.

“하.”

팔이 이마와 눈 위를 덮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루의 생각을 그만할 때가 됐는데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죽은 건 죽은 것이란 아셀의 말이 맴돌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아직도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이 계속 들었다. 현실을 부정하는, 회피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은 점점 미쳐 가는 것 같은데, 그 본능도 멀쩡한 건 아니겠지. 어제부터 계속 이성이 자주 끊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루가 정말로 공작의 손에 죽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4년간 그냥 이대로 죽어 버릴까, 싶었던 적이야 많았지만 죽지 않았던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였는데.

감은 눈이 떨렸다.

* * *

델루아 공작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황후궁에 있었던 듯했다.

카를로이를 보자마자 방글거리며 웃는 낯짝을 보니 익숙한 살인 충동이 들었다. 저 개새끼가 기어코 루를 찾아내 죽였다고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도 시원찮을 것 같았다.

“황후와 델루아 영지를 갔다 오겠다고.”

“예. 폐하께서 허락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무척 기뻐하시더군요.”

카를로이는 순수하게 기뻐하던 이본느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수상해 보이는 공작에 비해 이본느는 별다른 목적이 없어 보이기는 했다. 대체 델루아 영지에 무얼 두었기에 그리 기뻐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언제 출발할 생각이지?”

“허락도 하셨으니 바로 내일 출발하려 합니다.”

“로열 체임버의 약속을 지켰으니, 자네도 로덴의 약속을 지켜야지. 델루아 영지로 내려가 있을 사람이 지킬 수는 있나?”

“새삼스러운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제가 델루아 영지에 없어도 알아서 잘 해결될 겁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 전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슨……?”

“14년 전에, 공작저 군인들이 미르셀의 보석상에게서 내 브로치를 사 갔다더군. ‘크로이탄의 눈’ 말일세.”

미소를 짓고 있던 공작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 아닌가? 그때 당시에 분명 공작이 그건 듣도 보도 못했다고 한 것 같은데.”

“아아. 듣고 나니 이제야 기억이 납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가져오라 한 것은 사실이나, 관리 부실로 사라졌었지요. 해서 관련자들에게 죄를 물었습니다.”

“이미 다 죽여 버렸다는 소리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웃으면서 늘어놓는 공작에게 질려 카를로이는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이해해 주십시오. 폐하의 말씀대로 늙어 노망이 들다 보니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것을요.”

“그게 파괴되지 않는다는 건 공작이 더 잘 알겠지. 벌써 여러 번 시도해 봤을 테니 말이야. 아마 공작령 어딘가 숨겨 놓았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델루아 공작답게 끝까지 시치미를 뗄 작정인 듯했다.

“공작. 진심으로 하는 충고인데, 그걸 내게 돌려주는 게 좋을 거야. 크로이탄이 아닌 자가 그걸 들고 있어 봤자 좋을 일이 없으니. 자넨 그 브로치가 어떤 브로치인지 반도 모르지 않나.”

“말씀을 듣자 하니 참으로 대단한 브로치인 것 같은데, 제 발로 주인에게 돌아가는 능력은 없답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말고 이번에 내려갔을 때 샅샅이 뒤져 보지 그러나.”

“……폐하께서 그리 강하게 말씀하시니, 한번 다시 찾아는 보겠습니다.”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태도였다. 카를로이는 아셀에게 브로치에 대해 말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충 손을 내저었다. 공작은 공손하게 예를 갖추고 집무실을 나갔다.

공작이 수도에 없는 동안, 카를로이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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