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4화 (5/22)

4. 황제는 황후를 모른다

“……걱정, 했습니다.”

긴장감 어린 정적이 황제와 황후 사이를 메웠다.

환청이라도 들은 듯한 얼굴로 카를로이를 보던 이본느는 한참 후에야 자신의 손을 빼냈다. 이본느는 꿈같이 덧없는 것에 맘을 줄 여유가 없었다.

작은 손이 가차 없이 빠져나가자 카를로이는 또 이상한 허전함에 시달렸다.

“바쁘신 분이 시간을 허투루 쓰셨네요.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냉기가 뚝뚝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말에 형태가 있다면 아마 끝이 뾰족한 고드름이었을지도 몰랐다. 죽다 살아난 사람답지 않은 차가운 단호함에 카를로이는 제 판단을 의심하게 되었다.

이본느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한 게 어쩌면 큰 착각이 아니었을까? 아무 소용 없는 짓을 시도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아내를 걱정하는 것이 허튼짓은 아니지요. 무사히 깨어났으니 됐습니다.”

카를로이의 말에 이본느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카를로이는 대체 자신의 말 중 어느 것이 이본느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기분 나쁠 말이 있나. 다정하게 대해 본 적이 없으니 확신할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아무래도 좋지 않은 것을 직접 목격하셔서 그런지, 심신이 편치 않으신 듯합니다.”

이제 이본느는 되레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아니…….”

“저는 괜찮으니 폐하께서도 좀 쉬시는 게 어떠세요.”

심지어 축객령이었다. 뭐라 말을 덧붙이려던 카를로이는 창백한 이본느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쉬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본느였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쉴 시간이 아니라 성급했던 판단을 재고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가 볼 테니 황후는 쉬세요. 황후가 공작저에서 데려온 치료사가 그대를 돌봤습니다. 정말 황궁 치료사가 아니어도 됩니까?”

“네. 제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치료사니까요.”

엄밀히 말하면 그 또한 공작의 하수인이었지만.

이본느의 단호한 태도에 카를로이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침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이본느는 길고 긴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이본느는 설마 카를로이도 독을 먹은 건 아닌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금쯤 자신이 죽지 않아서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어야 하지 않나? 아니면 피를 토하는 것을 봐서 충격이 컸던 것일 수도 있다. 칼은 어릴 때부터 피를 보면 반사적으로 그렇게 굴었으니까.

“황후 폐하.”

이본느의 상념은 곧이어 들어온 치료사 말런에 의해 깨졌다. 치료사를 보고 이본느는 표정을 다듬었다.

치료사는 공작의 충실한 수족이었다. 독을 먹고도 살아난 이본느를 의심할 것이 뻔했다. 분명 미리 해독제를 먹었냐고, 왜 먹었냐고, 해독제는 어떻게 알고 구했냐고, 설마 독을 바꿔치기했냐고 묻겠지.

거짓말을 해서 말런을 속여 넘겨야 했다. 자신도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르겠다고. 이본느가 숨을 고르고 치료사의 이름을 불렀다.

“말런.”

“하늘이 도왔습니다.”

하지만 치료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독을 마신 직후에 황제 폐하께서 해독제를 흘려 넣으셔서 무탈하실 수 있었습니다. 몇 주간은 어지럼증…….”

“해독제? 폐하께서?”

“아, 모르셨습니까? 항상 들고 다니시는 해독제를 그 자리에서 바로 드시게 했습니다.”

다행이었다. 이본느가 미리 해독제를 먹어 두었단 사실을 말런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놀라운 일은 아니죠. 크로이탄이야 독에 관해서는 웬만한 식물학자들을 능가하는데 황제께서는 더욱 예민하시니.”

자신을 살린 것이 카를로이였다니 이본느는 기분이 착잡해졌다. 맘이 모질 것이면 아예 모진 것이 차라리 자비로울 터인데 카를로이는 그마저도 못하는 듯했다. 애매한 것만큼 잔인한 게 있을까.

“아무튼 몇 주간은 거동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음식도 가려 드셔야 하고, 약도 잘 드셔야 하고요.”

“알겠네.”

“잠시 팔을.”

이본느가 팔을 내밀자 치료사가 소매를 걷고 피부를 유심히 살폈다. 오랫동안 공작의 물리적 폭력에 시달린 이본느는 몸 여기저기 지워지지 않는 흉이 많았다.

황제와의 혼인이 정해지자 공작은 부랴부랴 치료사를 불렀다. 웬 하인을 하나 데려다가 상처를 옮기라며 이제는 불법이 된 전이 마법을 쓰라고 협박했지만 안타깝게도 전이 마법은 흉터에는 듣지 않았다.

말런은 공작의 노성에 땀을 빼며 임시방편으로라도 흉이 보이지 않게 했다.

치료사들은 기본 의학 마법 정도는 다룰 줄 알았고 피부의 흠들을 가려 주는 법 또한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대륙의 거의 모든 마법이 그렇듯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주기적인 처방이 필요한 일이었다.

“독이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했는데, 아직은 괜찮군요. 혹시라도 흉이 다시 오르면 바로 절 부르셔야 합니다.”

“알겠네.”

그래서 공작은 황궁 치료사들을 마다하고 이본느의 체질을 핑계로 공작저에서부터 부리던 치료사를 이본느와 함께 들였다.

순순히 대답하는 이본느를 보고 치료사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작 각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상태가 좀 좋아지면 알려 드리겠다고 말씀드려 놓았습니다. 깨어나신 걸 알 테니 며칠 내로 찾아오실 겁니다.”

걱정, 이라는 단어 선택이 우스웠지만, 이본느는 내색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치료사까지 침실을 나가자 이본느는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일단은 쉬어야 했다. 그래야 공작을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 * *

카를로이는 심각한 얼굴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고르텐, 황후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시종장 고르텐은 당황했다.

뭘 어떻게 생각하냐니. 아니, 애초에 황후가 황제에 대해서 뭘 생각이나 할까?

물론 그렇게 답을 할 수는 없었다.

“아…… 음, 그것이 무슨 뜻인지……?”

“날 싫어하는 것 같지 않나?”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너무나 뻔한 답이 있었지만, 고르텐은 연륜 덕에 바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자고로 답이 뻔하다면 오히려 함정이 있는 질문인 거다.

또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른 답의 여지가 많은 질문이기도 했다. 황후는 시종장인 자신이 보기에도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위치로 보나, 폐하께서 대하는 태도로 보나……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 게 맞긴 하겠지요.”

고르텐이 천천히 말을 골랐다.

“하지만 싫어한다고 말하기엔 황후께선…… 뭐랄까. 좀 애매한 감이 있지요. 누군가를 진정 싫어한다면 공작이나 황제 폐하 정도의 격한 태도는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카를로이는 아무 말 없이 자신과 공작 사이를 생각해 보았다. 적대감과 혐오란 감정을 눈에 보이게 만든다면 그런 사이가 되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황후의 태도는 지극히 온건하시지요. 폐하를 무시하시는 것 말곤 다른 행동을 취하시진 않으니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황후는 황제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황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고르텐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카를로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공작이 황제를 대하는 태도, 황제가 황후를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 보라는 고르텐의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카를로이 생각해 봐도 그랬다. 이본느가 진정 카를로이를 싫어했다면 진정한 무도함과 패악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줬겠지.

그의 얼굴은 더더욱 심각해졌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고르텐은 요 며칠 황궁에 돌던 소문이 진짜인지 의심스러웠다. 황후가 의식이 없는 내내 황후궁에 머물렀던 카를로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미 둘의 사이가 달라졌다는 식으로 말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생각의 늪에 빠진 카를로이는 답이 없었다.

충동적으로 행동했고, 잠시 의심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키아나의 말은 틀린 것 하나 없다. 공작과 카를로이의 대치 상태가 지속될수록 좋을 것이 없었고 이본느 델루아는 그 자체로 공작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패였다.

혈연으로 묶인 이본느를 자신의 패로 써먹을 방법은 감정을 이용하는 것 말곤 없었고.

다만 아직 확신이 없었다. 이본느의 태도는 아리송해서 카를로이가 이용하고자 한대도 그대로 따라올지 의문이었다.

“……황후와 좀 가까워질 필요가 있겠어.”

“이제 와서요?”

황비까지 들인 마당에 이제 와서 어떻게 가까워진다는 건지, 고르텐은 카를로이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뭐부터 하셔야 하는진 아시고요?”

난감한 표정이 떠오른 얼굴을 보고 고르텐이 속으로 혀를 찼다. 여자를 만나 본 적이 있어야 어떻게 가까워지는 줄 알지.

“하긴 폐하께서 여자를, 아니 그냥 사람을 다정히 대해 본 적이 없으시니 막막하시겠습니다.”

“그런 게 뭔지 가르쳐 준 사람도…… 한동안 없었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지.”

조금은 무엄한 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카를로이는 고르텐을 타박하지 않고 조용하게 대꾸했다.

한동안? 그럼 언제는 있었단 말인가? 고르텐이 묻기도 어렵게 카를로이는 이미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지난 14년간 고르텐이 종종 보던 모습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저렇게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얼굴을 잘 하지 않았지만. 아, 아니지. 최근에 한번 저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고르텐이 눈썹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기억해 내려 애썼다. 이윽고 그것을 기억해 낸 고르텐은 하마터면 손뼉을 칠 뻔했다. 비 오던 날, 실내 정원에 있는 황후를 보고 카를로이는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네.”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표정이었지만 고르텐은 두 번 묻지 않았다. 지난 14년간 카를로이는 한 번도 제대로 답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 얼굴의 주인의 누구인지 고르텐은 알 수 없었다.

* * *

이본느가 깨어난 지 바로 다음 날 공작이 황후궁을 찾았다. 당일에 바로 찾지 않은 것만 해도 공작치고는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기는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사람이 독을 마시고 죽다 살아났는데 빈말로도 괜찮냐는 물음이 없었다. 이런 냉혈한도 아무나 할 수 있진 않을 텐데. 한편으론 공작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을 예상한 이본느는 아무렇지 않게 공작의 험악한 얼굴을 마주했다.

공작이 와서 개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이본느는 언제나 생각했다. 죽기 전에 저 개새끼의 중요 부위를 한 번 찰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물론 죽일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지만 이제는 그런 큰 것까진 바라지도 않게 되었다. 그냥 아주 큰 고통을 주고 싶었다.

공작이 생각은 읽지 못해서 다행이라 여기며 이본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혀 모르겠어요. 공작님께서 뭔가 실수하신 것 아닌가요?”

“진심으로 내가 그럴 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던 공작이 갑자기 두 눈을 번뜩이며 이본느를 쳐다보았다. 흠을 잡으려는 듯 찬찬히 훑어 내리는 모습이 음산해 보여 무서웠지만 이본느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공작이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네가 허튼 생각을 한 건 아니고?”

“네? 무슨 허튼 생각요?”

“네가 그놈이랑 무슨 짓을 꾸미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

분명 치료사에게 다 들었을 텐데. 이본느를 떠보는 듯한 공작의 눈이 날카로웠다. 이본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꾸했다.

“제가 미치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없는 걸 아시잖아요. 엄마가 있는 한 전 절대, 절대로 그러지 않아요.”

이본느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 공작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체 어떻게 네가 살 수 있었던 거냐.”

“말런에게 못 들으셨어요? 황제가 항상 들고 다니던 해독제를 바로 마셔서 살 수 있었대요. 안 그러면 죽었을 거라고 했어요, 말런이.”

“하긴 황제 그놈이 항상 온갖 것으로 만든 해독제를 들고 다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근데 그놈은 널 싫어한다면서 그런 짓은 왜 한 게야?”

“그거야 저도 모르죠. 당황해서 그랬을지도 몰라요.”

“흥. 그래서 그놈한텐 더는 독을 안 쓰려고 한 건데. 그놈을 죽일 날이 온다면 역시 독 말고 다른 걸 찾아야겠어. 해독제며 뭐며 별의별 걸 다 가지고 있어서 귀찮게 구는군.”

공작의 무감한 말에 이본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자신의 말에서 저런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공작의 사고방식은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이건 제 생각인데…….”

이본느가 천천히 입을 열자 공작이 뱀 같은 눈을 빛냈다.

“로덴 후작 쪽의 짓이 아닐까 싶어요. 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어요.”

“말도 안 된다. 그 머저리는 이런 짓을 할 배짱이 없어. 더군다나 내가 계획한 일을 그런 하찮은 놈이 방해할 수도 없지. 배짱뿐만이 아니라 머리도 없거든.”

“하지만 공작님, 그 사람은 결국 딸을 황비로 들이는 데 성공했잖아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요? 크로이센에 황비가 다시 생기고, 그 황비가 로덴가의 영애일 거라고.”

이본느가 고민이 많은 것처럼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만만하게 볼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지금껏 만만한 사람인 척 굴었던 걸 수도 있죠. 황제도 황태자이던 시절 그렇게 굴었다면서요.”

“흠. 그래, 내 뒤통수를 친 건 크로이탄 하나뿐이었지. 로덴 그놈이!”

이본느의 차분한 태도가 신빙성이 있었는지 공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본느에게 독을 먹일 사람이 그쪽 말고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로덴 후작에겐 안 된 일이지만 이본느는 공작의 의심을 피해야 했다.

“그나저나 네가 쓰러져 있을 때 황제가 곁을 지켰다고 하던데.”

“황제가요? 제 곁을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진심으로 놀란 듯한 이본느의 얼굴을 보고 공작이 의심을 완전히 풀고 말을 이었다.

“황제가 네 존재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황궁에 파다하다더군.”

“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믿기 힘든데요. 그런 것치곤 딱히 저에게 살갑게 굴지는 않아서.”

걱정했다고 말을 건네던 카를로이의 모습이 이본느의 머리를 휘젓고 돌아다녔지만 이본느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공작처럼 반응을 예상하기 힘든 사람한테 카를로이의 태도 변화까지 말할 순 없었다. 더 이상의 변수는 감당하기가 힘들었으므로.

공작이 무어라 입을 열 찰나 응접실의 문을 누가 두드렸다. 메리앤이었다.

“저, 황후 폐하, 공작 각하. 황제 폐하께서 무엇을 보내셨는데…….”

밖에서 들리는 메리앤의 목소리에서도 당혹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공작이 황제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마리오네트처럼 득달같이 일어나 직접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라는 명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한 듯했다.

“황후 폐하의 쾌차를 비신다면서…….”

난감한 얼굴로 메리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거대한 꽃바구니와 패물함을 들고 있는 황제의 시종들이 있었다. 공작이 일그러진 얼굴로 뒤에 있는 이본느를 쳐다봤다.

공작의 표정이 ‘이 무슨 개수작이냐’라는 뜻이라는 걸 이본느는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의 심정이 딱 그랬기 때문에. 아마 자신도 공작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카를로이 크로이탄이 미친 게 분명했다.

“그대의 쾌차를 바라며…….”

델루아 공작이 카드에 적힌 화려한 필기체를 떨떠름한 목소리로 읽었다.

그동안 연한 노란색 꽃들이 춤추듯 우아하게 살랑거렸다. 춤추는 꽃이라 불리는 튜랑이 뿜는 청아한 향기가 금세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이 미친놈이 대체 무슨 수작이지?”

공작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본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탓이었다.

“이건 또 뭐…….”

카드를 내팽개친 공작은 꽃과 같이 온 보석함을 열더니 인상이 험악해졌다.

“황제가 너 대신 독을 마신 게냐?”

이해가 되는 반응이었다. 보석함에는 대륙에서 유명한 목걸이, ‘늑대의 눈물’이 들어 있었다. 대대로 크로이센의 왕비가, 황후가 착용했던 목걸이 늑대의 눈물엔 알알이 박힌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황후가 되면 황제에게 받는 이 목걸이를 이본느는 지금껏 받지 못했다. 한데 이제야 보석함에 고이 넣어 보내온 것이다.

“고작 목걸이 하나 가지고 사람 짜증 나게 굴 땐 언제고! 죽다 살아났으니 황후로 인정하겠다는 거야?”

공작은 이본느에게 고갯짓으로 대답을 독촉했지만, 이본느라고 딱히 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너에게 황제가 뭐라고 하던? 아무 말도 안 하진 않았겠지.”

“별말…… 없었어요. 그냥 걱정했다고만.”

“걱정? 걱정? 그놈이 널 걱정해? 차라리 베르니가 크로이센을 걱정한다고 해라!”

묻는 말에 대답한 건데 왜 화를 내는지. 이본느는 자신도 모르는 답을 요구하는 공작이 지겨워져 눈을 내리깔았다.

공작은 적당히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1절만 하는 꼴을 보지를 못했다. 딴생각에 빠진 이본느를 금방 눈치챈 공작이 날카롭게 물었다.

“내가 모르는 새 둘이 붙어먹은 건 아니겠지?”

“……시녀들이 공작님께 보고하지 않던가요? 카를로이가 절 길가의 돌보다 더 천대한다고?”

이본느의 얼굴에 떠오른 진실한 표정, 억울함과 어이없음이 혼재된 표정을 보고서야 공작은 의심을 풀었다. 이본느는 어느새 지끈거려 오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지켜보면 알겠죠.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는지.”

“네가 생각해도 개수작이라 이거냐?”

이본느가 실소를 흘렸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겠어요? 죽다 살아온 건 전데, 변한 사람은 황제니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할 수밖에요.”

공작이 대답 없이 보석함을 닫았다. 카를로이에게 온 관심이 쏠린 공작을 보고 이본느는 조심스레 공작을 불렀다.

“황제가 어떻게 구는지 잘 지켜볼게요. 무슨 속셈인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요.”

“네가 갑자기 웬일이냐? 할 줄 아는 거라곤 병든 새처럼 고개 끄덕거리는 것뿐이던 애가.”

“……죽다 살아났잖아요. 정신 안 차리면 누가 또 이렇게 독살할지도 모르고.”

긴장감에 떨리는 심장을 죽이고, 태연한 낯으로 이본느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엄마도 보고 싶고요.”

공작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지만 이본느는 자신의 말이 먹혔음을 알았다. 이 일로 공작은 자신을 의심하진 않을 거다.

이본느 델루아는 죽다 살아났다. 아니, 죽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해 살게 되었다. 이전과 똑같이 무념무상으로 살게 된다면 또 같은 선택을 할지도 몰랐다.

사선을 건너다 돌아온 사람의 생각은 그 전과는 다른 법이었다.

* * *

“내내 홀대만 하던 남자가 갑자기 꽃과 보석만 달랑 보낸다고 크게 달라지겠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요.”

푸르투 궁전의 새 황비가 된 여자가 흠 잡을 데 없는 우아한 태도로 찻잔을 들고 가볍게 논평했다.

“당연히 개수작이라 생각하겠지. 공작과 황후는 바보가 아니야.”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카를로이를 보고 키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를로이와 키아나는 황비궁으로 배정된 푸르투 궁전의 서궁 제2관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다. 티타임을 빙자한 보고 및 의논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황궁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에게는 다정한 사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새 황비는 언제나 웃음이 걸려 있는 밝은 인상이라 더욱더 그렇게 보였다.

“그렇게 개수작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은데요. 괜히 공작파 귀족들이 기세등등해할까 봐 무섭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로덴 후작이 반대 의견을 냈다.

황제가 황후의 아버지인 공작은 절대 먼저 황궁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점과 비교되어 키아나의 위세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수도와 푸르투의 가장 뜨거운 화제인 밝고 아름다운 새 황비가 카를로이에게 물었다.

“그럼 그걸 아시는데도 손바닥 뒤집듯 다른 태도를 보이셨다는 거예요?”

“레이디 로덴이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군.”

“어머? 아니, 아니죠. 누가 듣기라도 하면 제가 폐하와 남보다 못한 사이라고 생각하겠어요.”

키아나가 슬쩍 로덴 후작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로덴 후작은 카를로이와 키아나가 황후를 이용해 공작을 치려고 한다는 사실까지는 알았다.

하지만 그는 키아나가 카를로이를 사랑해서 자청한 일이라고 알고 있었지 둘이 서로의 목적을 위해 계약을 한 사이인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 키아나.”

카를로이는 키아나가 말하려는 바를 눈치채고 다시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황비라고 하셔야죠. 책봉식에서 독살 사건이 일어나고 누명까지 썼다 해도, 황비는 황비거든요.”

키아나의 말끝에서 가벼운 한숨이 묻어 나왔다. 책봉식이 아수라장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누명이라고 해 봤자 증거도 하나 없는 데다가 로덴 후작이 울면서 자결하겠다고 하는 통에, 정말로 눈물을 흘리면서 징징거리는 탓에 다들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헉.”

독살이란 단어가 나오자 로덴 후작이 다시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원체 심약한 사람이라 제 딸이 독살당한 것도 아니면서 이 주제 자체를 무서워했다.

“후작, 제발 그만 좀 하게. 차를 좀 마시든가.”

“독살이라니요! 독살이라니요, 폐하! 이건 누가 봐도 공작이 우리 키아나를 죽이려다 실수한 게 분명합니다. 딸아이를 사지로 들여놓고 어찌 제가…….”

후작은 심약한 사람이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독이 원래 키아나의 잔에 들어갈 계획이었다는 것쯤은 눈치를 챌 사람이었다.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후작을 보고 키아나가 익숙하다는 듯 무심하게 손수건을 건넸다.

“아버지께서 눈물 흘리신다고 제가 더 안전해지나요? 독이 절 피해 가나요? 그 시간에 제가 독살당하지 않게 빨리 공작을 무너트릴 방법이나 생각해 주세요.”

칼같이 냉정한 딸의 말에 후작이 눈을 흘겼다.

“그래, 후작. 이미 벌어진 일, 자네는 귀족들 단속이나 잘하라고.”

키아나 로덴을 황비로 들이는 것의 이점 중에는 로덴 후작과의 만남이 편해진다는 것도 있었지만 더 큰 이점은 따로 있었다.

로덴 후작은 대대로 왕정파였던 로덴가의 사람이긴 했지만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발을 뺄 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키아나가 황비가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발이 묶여 이젠 최대한 카를로이에게 협조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여러모로 키아나의 등장은 카를로이에게 있어서 행운이었다.

하지만 로덴 후작은 오늘 티타임 참석자 중 키아나가 황비가 된 것을 싫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공작파 귀족들이 기세등등하게 굴지 못하게 하는 거, 그게 자네 일이야, 후작.”

불만스러운 얼굴의 후작에게 카를로이가 경고하듯 말을 건넸다. 하지만 로덴 후작은 튀어 오르는 공처럼 흥분하며 답했다.

“아니,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폐하,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로는 부족하다니까요, 귀족들을 이끌 사람은 제가 아니라…….”

“그만하세요, 아버지. 폐하까지 심란하게 만들지 마시고.”

키아나는 고운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아버지를 말렸지만 로덴 후작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딸이 대놓고 황제 편을 드는 것 때문에 더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는 자식은 키워 봤자 소용이 없다는 옛말을 떠올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로덴 후작의 얼굴을 보니 무슨 생각인지 뻔히 보여 키아나는 한숨을 쉬었다. 한숨과 함께 다시 우아하게 차를 들이마신 키아나가 애써 웃어 보였다.

“빵이 떨어졌네. 아버지, 더 드시고 싶으시죠? 그렇죠? 더 가져오라고 할게요. 좀 많이 드세요.”

꼭 먹을 것으로 로덴 후작의 입을 막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를로이는 티 테이블을 흘끗 보고 답했다.

“아직 남아 있는데.”

“호르뒤도 빵으로 치나요? 아니,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꼭 호르뒤를 가져다 놓으시던데, 이렇게 퍽퍽한 빵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호르뒤 말고 다른 걸 드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네요.”

“맞습니다. 제일 맛없는 빵 아닙니까. 퍽퍽하고. 게다가 피나타 잼이라니! 델루아령에서 나오는 것은 다 싫어하시면서 잼은 또.”

갑자기 자신의 디저트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부녀를 보며 카를로이는 괜히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공적인 자리에서 따로 찾지는 않았지만 호르뒤를 찾는 건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습관이었다. 어릴 때는 루가 그리워서 먹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뭔들 후작이 원하는 대로 가져오라고 하겠네. 그럼 징징거리는 걸 멈출 텐가?”

“아니, 폐하는 또 말씀을 그렇게……. 폐하께선 자식이 없으시니까 제 심정을 모르십니다.”

키아나는 지겹다는 얼굴로 시종을 부른 후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꿍꿍이가 있다는 게 티가 나면 황후께서 넘어오시려다가도 다시 멀어지시겠어요. 좀 천천히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레이디, 아니 황비 말만 들으면 내가 황후에게 사랑 고백이라도 한 줄 알겠어.”

카를로이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난 그저 황후의 존재를 인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뿐이네.”

온기 하나 없이 사무적인 말투에 로덴 후작은 새삼 황후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감정마저도 이용하려는 이에게 그런 식으로 이용당할 희생자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시작은 그렇게 해야지.”

말을 끝낸 카를로이가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그래서, 황후께서 답은 보내셨나요? 황제 폐하의…… 성의에 대해?”

키아나의 질문에 카를로이는 답을 주지 않았으나 미세하게 경직된 얼굴에서 답을 알 수 있었다.

카를로이로서도 이본느가 고작 한 번의 메시지로 감동을 받았다거나 감사를 표할 거라 믿은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받았다는 답은 올 줄 알았다. 그러나 황후궁은 마치 그에게서 아무것도 받은 적이 없다는 듯 여전히 고요했다.

대답 없이 엉뚱한 곳만 바라보는 카를로이를 보며 그 자리에서 가장 현명한 여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머나. 참 시작이 좋네요.”

* * *

이본느가 의식을 찾고 깨어난 지 열흘 정도가 지났다. 이본느는 이제야 어지럼증 증상 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으며, 독살 시도의 배후를 찾겠다는 움직임은 형식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실상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므로.

공작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나 하나 걸리는 놈을 잡겠다는 각오로 날뛰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시녀장 메리앤은 이본느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14년을 바로 옆에서 봐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후가 된 후 이본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체처럼 살았다. 괴로워할 때 말고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만한 그 어떤 감정도,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세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전에는 그저 넋이 나가 있었다면 지금 이본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에는 희미하게나마 초점이 들어와 있고 가지런한 입매에 힘을 주는 것이 종종 눈에 띄기도 했다.

“그냥…… 엄마를 빨리 봐야겠다는 생각.”

많은 것이 생략된 답이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위험해지는 것은 메리앤이었으므로 이본느는 더 자세히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드니스와 이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을 했다. 드니스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본느 자신에게도.

단기적으로는 공작의 비위를 맞춰서 드니스를 보러 가는 것, 장기적으로는 드니스 곁으로 돌아가는 것. 지금 이본느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드니스는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 제가 수도로 올라올 때 제인에게 신신당부를 했어요. 드니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편지에다 꼭 쓰라고요.”

메리앤의 딸 제인은 델루아 공작령에서 이본느의 모친인 드니스를 돌보고 있었다. 공작의 감시 때문에 편지 하나 주고받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지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가벼운 암호 정도는 정해 두고 올라왔었다.

<오늘따라 정원은 유달리 아름답네요.>

못 견딜 때가 되어서야 한 번쯤 오는 제인의 편지를 읽을 때면, 이본느는 저 일상적인 문구를 발견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언제나.

“내가 괜찮지 않아. 내가 또 엄마를 잊을까 봐 겁이 나니까.”

이본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궁을 나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카를로이에게 저를 내쫓을 빌미를 주면서도 공작이 이본느의 탓을 하지는 못할 그런 방법. 그런 방법이 있기는 할까?

생각에 열중해 있던 이본느를 시녀의 높은 목소리가 현실로 끌어냈다.

“저,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시녀의 말에 이본느와 메리앤의 눈과 귀가 모두 쏠렸다.

“오늘 본궁 별관에서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고 싶으시다고……. 이번에도 또 꽃을 보내셨네요. 신기해라, 이런 건 다른 여자들한테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냐, 그게. 레이디 앙센, 또 뭔가를 착각한 게 아닌가? 황비 전하께 갈 전갈을…….”

델루아 공작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앙센 백작의 여동생인 레이디 앙센은 일 처리가 깔끔하지 못했다. 정말로 일을 못하는 것인지, 하기 싫어서 대충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언제나 실수가 있었으며 뒷심이 부족했다.

실제로 맡겨진 일은 이본느의 감시일 테니 나머지 일은 소홀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본느는 홀로 추측했다.

“네에? 제가 무슨 그런 실수까지 하겠어요. 진짜예요!”

너무나 당연하게 헛소리라 치부하는 메리앤을 보고 레이디 앙센이 꽃을 가득 들고는 울상을 지었다. 불신이 가득한 메리앤의 표정을 보고 옆에서 다른 시녀인 레이디 루엔이 말을 거들었다.

“저도 같이 들었어요. 정말이에요.”

루엔이 말을 얹고 나서야 믿는 듯한 메리앤과 이본느를 보고 앙센이 조그맣게 툴툴거렸다.

앙센 백작가의 가신인 메호시 자작의 막내딸 가브리엘 루엔은 실질적으로 쓸 만한 일을 다 하는 사람이었고, 레이디 앙센의 거만한 태도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사람이었다.

원래라면 시녀가 되지 못할 가문인데 앙센 덕에 시녀가 된 것이라 그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하는 듯했다. 어쨌든 둘 다 이본느를 감시하는 일에서는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루엔까지 제대로 들었다고 보증하는 것을 보니 카를로이가 부른 것은 진짜인 듯한데…….

이본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본궁 별관은 황제의 가장 사적인 장소였고 이본느는 그 근처로는 가 본 적도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과 시녀를 번갈아 쳐다보는 메리앤을 보다 이본느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카를로이를 상대하는 것이 중요했다. 대상을 마주 보아야 계획도 생기는 법이니까.

“시간 맞춰서 가겠다, 그리 답을 드리지.”

“꽃은 어떻게 할까요? 보니까 따로 꽃꽂이할 필요도 없이 그냥 이대로 폐하 침실에 가져다 둬도 되겠어요.”

진심 하나 담기지 않은 그놈의 꽃, 버려도 상관없었다. 이본느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해.”

앙센이 꽃을 대충 들고 침실로 가자 루엔은 답을 전하러 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메리앤은 두 시녀의 뒷모습을 미덥지 않다는 듯 지켜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갑자기. 정말 폐하가 죽을 뻔한 일에 큰 충격을 받으신 걸까요?”

“설마. 무슨 꿍꿍이든 간에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이본느가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본느는 그날 저녁 카를로이와의 식사 자리에 갈 수 없었다.

점심 후에 잠시 침실에 누워 있던 이본느는 얼마 후에 온몸에 열이 나서 치료사 말런을 대신 불러야 했다.

원인은 카를로이가 보낸 꽃이었다. 리투나 생화가 끼어 있었던 것을 모르고 레이디 앙센이 침실 장식장에 가져다 둔 탓이었다.

“폐하께서 리투나를 가까이하지 못하시는 걸 몰랐단 말이야! 세상에. 모신 지 1년이 넘었는데!”

이본느가 몸져누운 침실에서 화를 내는 메리앤에게 레이디 앙센이 입을 삐죽거렸다.

“못 봤단 말이에요.”

“저렇게 화려한 꽃을 못 보는 게 말이 돼!”

“하얀 꽃이 화려해 봤자 하얀색이죠, 뭐……. 그러는 시녀장님도 이제야 아셨잖아요!”

앙센 백작의 여동생답게 당당하기로는 제국 제일이었다. 다 죽어 가는 이본느에게 미안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리투나 혼자 딱 튀어나와 있던 것도 아니고, 딱 한 송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아요. 얼핏 봐서는 모른다고요. 그대로 가져다 놓은 건데……. 그리고 봤어도 조화인 줄 알았을 거라고요!”

“생화와 조화도 구분 못하는 천치다 이 말이야, 지금?”

점점 언성이 높아지려는 메리앤을 치료사 말런이 간신히 뜯어말렸다.

“폐하께서 안정을 취하셔야 하는데 그 옆에서 소리 높여서 좋을 게 뭐 있어요!”

치료사의 만류에 레이디 앙센이 ‘거봐요, 조용히 하라지’라는 표정을 지어 보여 메리앤을 더 화나게 했다.

“그나저나 황제께선 황후 폐하가 리투나 생화를 가까이하지 못한다는 걸 모르신단 말입니까? 델루아 공작께서도 똑같은 증상이 있으시니 알 법도 한데.”

“생전 황후 폐하에게 관심이라곤 없었는데 어떻게 아시겠어요?”

“아니, 아무리 관심이 없고 아무리 가까이하지 않는다지만, 어떻게 이런 것조차 모르실 수 있는지……. 가뜩이나 독을 드신 후로 몸도 안 좋으신데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저렇게 작정하고 안 보이게 끼워 놓으신 걸 제가 무슨 수로 알겠냐 이 말이에요. 헉!”

맞장구를 치듯 톡 끼어들던 레이디 앙센이 갑자기 혼자 놀란 신음을 내뱉었다.

“어머, 어떡해. 혹시 그런 것 아니에요? 황제께서 정말 황후 폐하를 어떻게 하려고 리투나를 일부러 보내신 거 아니에요?”

황제가 황후를 해하려고 한 게 아니냐는 시녀의 무시무시한 음모론은 소리를 지르는 메리앤에 의해 가볍게 제지되었다.

“다들 그만 나가 있어요! 정말이지 더는 못 들어주겠군!”

결국 메리앤이 앙센을 쫓아냈다. 이 모든 소란의 원인인 시녀는 그 무엇도 해결하지 않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조용해진 침실에서 이본느의 옅은 신음 소리가 들려오자 험악한 인상의 메리앤은 금방 얼굴이 풀어져 울상이 되었다.

“폐하……. 레이디 앙센 말은 무시하세요. 설마 황제께서 그렇게 하셨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사람은 그저 나에 대해서 아는 게 단 하나도 없는 거겠지. 관심도 없고.”

이본느가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몸이 아파지자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차라리 카를로이가 영영 모르길 바랐다. 이런 것까지 공작을 닮았다는 걸 알게 되면 카를로이는 나를 더 혐오하겠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서 이본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엔, 폐하께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못하게 되었다고는 전하고 왔니.”

“네, 폐하. 몸이 갑자기 편찮으셔서 못 갈 것 같다고……. 리투나 때문인지 몰랐어서 아프시다고만 했는데, 지금이라도 리투나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올까요?”

“뭘 그렇게까지야. 괜히 그 사람 탓을 하는 것 같잖니.”

“아, 그런 게 아니라…….”

레이디 루엔이 이본느와 메리앤의 눈치를 번갈아 보다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루엔은 앙센과 다르게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먼저 하는 사람이었다.

“음. 별로 믿는 것 같지 않으셔서…….”

루엔이 계속해서 말을 흐리자 답답해진 메리앤이 다그쳐 물었다.

“뭘 믿지 않는단 말이야?”

“꼭 황후께서 식사를 하기 싫어서 그러시는 거라고…… 그렇게 믿으시는 것 같아서…….”

“뭐야? 내가 당장 가서 말씀드리고 와야겠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으신지. 리투나가 아니더라도 독에 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메리앤이 씩씩거렸으나 이본느는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메리앤, 됐어. 신경 쓰지 마. 그래서 루엔, 어쩌기로 했지?”

“내일 저녁이라도 오시라던데요.”

“알았어. 나가 봐.”

루엔이 침실을 나간 후에도 메리앤은 도통 화를 풀지 못했다.

“아프다는 사람한테 내일 또 오라고 해요?”

“안 믿는다잖아……. 그리고 사실 심각하게 아픈 것도 아니긴 하잖아. 몇 시간 후면 나을 텐데.”

남 일처럼 무심하게 말하는 이본느의 태도에 답답해진 메리앤은 결국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대신 치료를 마무리 중이던 말런이 입을 열었다.

“열이 나는 건 금방 떨어질 테니 괜찮습니다. 하지만 리투나 때문에 흉이 다시 온몸에 올라와서……. 그게 가라앉는 게 좀 오래 걸릴 겁니다.”

몸에 남은 흉은 머리에 남은 기억만큼이나 지독하고 지겨웠다. 기억이 잊을 만하면 떠오르듯 흉도 없어질 만하면 다시 올라오니.

“넉넉잡아 내일 오후까지는 없어지겠지만, 혹시 모르니 잘 가리셔야 할 거예요.”

하얀 팔에 선명히 남은 흉터를 보던 메리앤이 결국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이본느는 점점 심해지는 두통에 눈을 감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치료를 끝낸 말런과 메리앤이 같이 침실을 나가자 이본느는 혼자가 되었다. 그것이 눈물겹도록 익숙했지만 한편으로는 못내 서러웠다. 아파서 몸이 약해졌기 때문일까.

피부가 쓰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같이 쓰렸다. 공작에게서 이런 것까지 닮은 스스로를 죽여 버리고 싶다가, 드니스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가, 카를로이가 미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날 꿈에는 어린 시절 칼이 나왔다. 꿈속에서의 칼은 이본느를 비웃지 않고 다정하게 웃으면서 길가에 핀 흰 꽃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분명 기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는 눈물만 흘렀다.

* * *

치료사 말런의 말대로 열은 새벽이 지나자 떨어졌다. 열이 떨어진다고 같이 떨어진 기력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저녁 초대에 응할 정도는 되었다.

본궁 별관으로 가는 내내 이본느의 시녀들은 부산스럽게 굴었다.

황비는 심심하면 드나든다지만 아니, 어제 이본느가 가지 못한 저녁에도 황비가 대신 가서 황제와 둘이 알콩달콩 좋은 시간을 보냈다지만, 어쨌든 이본느가 이렇게 초대를 받아서 당당하게 간 적은 처음이었다.

정작 이본느 본인은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 보였지만 시녀들은 뿌듯해 보였다.

반면 카를로이는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가까이해 보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실천은 귀찮은 탓이었다. 게다가 어제 불렀는데 아프다고 갑자기 취소한 것을 생각하면 또 짜증스러웠다. 분명 치료사가 몸이 괜찮아졌다고 장담하기에 날을 잡은 것인데.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카를로이는 이본느가 오는 것을 보고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살짝 올렸다. 미소라고 봐도 좋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생전 처음 짓는 표정에도 이본느는 눈썹만 찌푸릴 뿐이었다.

“몸이 안 좋다더니.”

“이제 괜찮습니다.”

“독이 아직 다 낫지 않았나 봅니다.”

“아닙니다. 그저…… 몸이 좀 안 좋아서.”

독도 아니면 뭐가 안 좋을 게 있다는 건지.

딸이 몸이 약하다며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사람을 괴롭히던 공작이 불현듯 떠올라 카를로이는 짜증이 일었다. 그는 억지로 짓던 미소마저 거둬들이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히 걸음 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다 놓입니다, 황후.”

“그러십니까.”

“그럼 아쉽겠습니까?”

이본느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카를로이는 저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날카롭게 되물었다가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본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버릇이 들지 않은 일이라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카를로이는 다시 표정을 갈무리했다.

“황후가 서운해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걱정한 것은 진심입니다.”

“……폐하의 해독제 덕에 살았다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지요.”

준비된 의자에 앉으려던 이본느는 테이블의 장식을 보고 멈칫했다. 시녀장 메리앤을 비롯한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얀 리투나 생화가 한가득 테이블을 장식하고 있었다. 레이디 앙센이 그것을 보고 루엔에게 속삭였다.

거봐, 내 말 맞지. 일부러 저러신다니까.

속삭이는 소리가 이본느와 메리앤에게까지 들렸다.

카를로이는 앉지도 않고 멀뚱히 서 있는 황후와 그 시녀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지켜봤다. 눈치를 보던 메리앤이 나섰다.

“저, 폐하. 황후 폐하께선 리투나 생화 근처에 가시면 피부 독이 오르셔서…….”

“아.”

카를로이가 당황한 얼굴로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는 깨달았다. 그는 제 아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깨달음도 잠시, 이내 익숙한 짜증이 밀려왔다.

공작의 딸이라면 그런 성질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큰데 그것을 생각지 못한 자신에 대한 한심함 반, 닮아도 닮아도 이런 것까지 전부 빼다 닮았나 하는 짜증스러움 반이었다.

미묘한 짜증이 담긴 카를로이의 눈이 이본느와 맞닿았다. 순간 카를로이는 그렇게 싫어하던 황후의 눈에서 무엇인가를 본 것 같았다.

이본느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것이 상처받은 사람의 눈빛인 걸 알았겠지만, 카를로이는 그저 거북하기만 했다.

“……어서 꽃을 치우거라.”

카를로이의 명에 시종들이 테이블 장식을 모두 거둬 갔다. 다른 장식들이 테이블 위에 놓이는 동안 부부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합니다. 모르고 있던 것이라.”

“네.”

누가 봐도 진심이 없는 형식적인 카를로이의 사과와 이본느의 칼 같은 대답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도 전채 요리가 금방 나와서 그 소음이 침묵을 어느 정도 가려 주었다. 각종 과일과 채소, 수프가 먹음직스럽게 들어 있는 식기들이 줄줄이 테이블에 놓였다.

테이블을 보던 이본느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수프를 제외한 모든 전채 요리에 복숭아가 장식처럼 들어가 있었다. 수프라도 먹는 척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카를로이가 한 입 들기 시작한 뒤에도 이본느는 가만히 있었다.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왜 식사를 앞에 두고 가만히 있는지. 먹던 것을 삼킨 카를로이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차지 않는 게 있습니까?”

이번에도 메리앤이 나서려 하는 것을 이본느가 손짓으로 간단히 막았다.

“폐하. 절 괴롭히실 생각이시라면 다른 방법을 쓰세요.”

이본느의 담담한 말투에는 감정 하나 억양 하나 실려 있지 않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카를로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황후야말로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말로 하세요.”

“제가 무슨…….”

“어제는 갑자기 왜 그랬습니까.”

“어제는.”

이본느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카를로이의 냉담한 얼굴을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었건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더 답답했다.

“……폐하가 꽃을 보내셨잖아요.”

“그게 왜요.”

예상은 했지만 꽃도 본인이 보내거나 고른 것도 아닌 듯했다. 그랬다면 아까 리투나 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진즉 눈치를 챘을 텐데.

“그 꽃에 리투나 생화가 섞여 있었어요…….”

카를로이는 지나치게 당황한 나머지 짜증스러운 기색도 잃어버리고 이본느를 바라보았다.

“모르고 침실에 놔두었더니 몸이 좋지 않아져서 오지 못했습니다. 일부러라고 생각하실지 몰랐지만…….”

“……아니, 그럼 좀 잘 확인하지 그랬습니까. 그렇게 몸에 안 좋다는 것을 확인도 하지 않고.”

이성이 조금만 없었다면 아마 카를로이의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이본느는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나?

“그리고 전 복숭아를 먹지 못해요. 몸에 맞지 않아 잘못 먹으면 호흡 곤란이 와요.”

카를로이가 이본느의 말을 듣고 테이블의 요리를 한 번 살폈다. 거의 복숭아 테마의 요리였다. 복숭아를 좋아하는 카를로이 때문에 전채 요리에 복숭아가 한가득이었다.

그동안은 황후궁에서 같이 식사한 통에 이본느가 못 먹는 것들은 나오지 않아 카를로이가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연회에서 이본느를 한 번이라도 유심히 봤다면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본느에게 잠깐 알랑거리는 귀족들조차 황후가 복숭아를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리투나 생화 하나면 넘어갈 법했지만 복숭아까지 보란 듯이 먹으라고 앞에 내밀었으니 이본느 입장에서는 카를로이가 작심하고 괴롭힌다 생각할 법도 했다.

“하…….”

카를로이가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고 어긋나기만 하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말을 하지 않았으니 자신이 이본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대관절 자신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가슴 언저리를 찌르는 감각이 불쾌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런 기분은 대체 왜 드는지. 이본느와 있는 모든 시간이, 이본느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저 귀찮고, 피곤하고, 거슬렸다.

“황후는 왜 이렇게 안 되는 게 많은 거요? 이것들을 전부 치우고 새 음식을 내오라.”

카를로이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엔 짜증은 실려 있지 않았지만 말과 같이 흘러나오는 미약한 한숨에서 그의 못마땅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본느는 그것을 알아채고 문득 서러워졌다. 하다못해 이런 것까지 자신의 잘못이 되니 눈이 시려 왔다. 차라리 대놓고 짜증을 내는 것이 견디기 쉬웠다.

독에 당해 걱정했다더니 순 거짓말인 게 틀림없었다.

“그런 것도 다 공작을 닮은 겁니까?”

카를로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질문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황제와 황후의 눈치를 보았다. 힐난의 기색 하나 없이도 비난처럼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흉이 다 사라지지 않아 옷으로 가린 팔을 만지작거리며 이본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 신세가 비참했다. 그렇게 증오하는 공작의 딸이 되어서, 그 공작이 남긴 빌어먹을 흉터를 가지고, 카를로이 앞에서 또 공작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신세가 지긋지긋했다.

스스로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카를로이의 냉대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울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독에 당한 몸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폐하.”

조용한 부름에 무심하고 건조한 눈빛이 와 닿았다.

“……제가 싫으시면 차라리 이전처럼 제가 없는 양 멀리하세요. 이렇게 친히 불러 제 잘못이 아닌 걸로 절 타박하지…….”

목이 메서 말이 흐려졌다.

“……마시고요.”

절대로 카를로이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간신히 말을 끝맺었다. 눈을 계속 내리깔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이본느는 괜히 눈을 더 크게 뜨고 앞을 바라봤다.

“황후.”

카를로이가 당황한 얼굴로 이본느를 불렀다. 이본느의 생기 없던 초록색 눈이 물기로 반짝거렸다. 카를로이가 아무리 뭘 모른다지만 그게 사람이 울기 직전의 표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카를로이가 어쩔 줄을 모르고 나오던 말마저 삼켰다.

“황후가 싫은 것이 아니라…….”

한참 뒤에 카를로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을 때도 그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이본느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에.

많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방울이 흘렀을 뿐이었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갑자기 숨이 막혀 와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독의 여파로 아직 몸이 좋지 않아서.”

이본느는 재빠르게 손수건으로 눈을 닦았다.

카를로이의 ‘싫지 않다’라는 말이 거짓말인 걸 알았다. 델루아의 피를 받은 자들은 모조리 없애 버리고 싶다 한 것이 불과 1년 전이었다. 거짓임이 분명한 그 말이 이본느를 사정없이 찔러 댔다.

카를로이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자신을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카를로이의 표정을 보니 더 암담해졌다. 대체 저 얼빠진 표정은 뭐란 말인가.

“황후가 싫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카를로이는 다시 똑같은 말을 반복하다 말고 한숨을 쉬며 제 얼굴을 쓸었다. 그 모습이 피곤하고 귀찮아 보여 이본느는 다시 목이 멨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결국 카를로이는 그 말은 끝내지 못하고 신경 쓰지 말라는 답으로 갈음했다.

그 스스로도 그것이 너무나 뻔한 거짓말임을 알기에 차마 거짓말로도, 빈말로도 이본느가 싫지 않다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대신 그는 준비해 온 말을 했다.

“그저 공작과 황후를 분리해서 보기로 했을 뿐입니다. 그대가 공작의 딸인 건…… 그대 잘못이 아니니까.”

진심은 아니었다. 카를로이는 여전히 이본느가 델루아 공작이 딸이어서 싫었다. 공작을 닮은 겉모습이, 공작을 닮은 오만함이 싫었다. 마음이 이렇게 불편한 건 아마 거짓말이기 때문일 터였다.

이본느는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전혀 알 수 없어서 이본느는 그저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다시 어색함만 흐르는 테이블엔 접시들이 놓이는 소리만 들렸다.

“……늑대의 눈물은 받았습니까.”

식기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리는 와중에 카를로이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이본느는 무심코 다른 목걸이가 걸려 있는 자신의 목을 내려다봤다. 그제야 이본느는 목걸이를 받고 카를로이에게 어떤 답도 보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네.”

더 할 말이 없었다. 여전히 이본느는 말을 길게 하는 것이 어색했다. 자신에게 허락되는 말은 너무나 적었기에.

카를로이는 그것이 답답해 습관처럼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답답한 건 답답한 거고 자신은 이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이미 오늘 너무 많은 것을 망쳤다. 리투나부터 복숭아까지……. 되는 일이 없었다.

“오래전에 줬어야 하는 것인데, 늦어서 미안합니다.”

이본느가 충격 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카를로이는 또다시 기분이 복잡해졌다. 사과 한 번 한 것이 저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이본느의 표정 변화를 이렇게 많이 본 건 결혼 후에 처음이었다.

“그대를 황후로 마땅히 대우하지 않은 것은 내 불찰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부족했던 것을 만회하려 하는 것이니 너그러이 받아 주세요.”

이본느는 당황한 얼굴을 수습하는 데 힘겹게 성공한 후 괜찮다는 형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괜찮다니 그럼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이런 시간을 가져도 되겠군요. 종종 이렇게 보도록 하지요.”

이본느가 대답을 하자마자 카를로이는 기다렸다는 듯 더 충격적인 말을 뱉었다.

“아. 네…….”

얼결에 나온 이본느의 대답을 듣고 카를로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연스럽다 하기엔 마치 그린 듯 정확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이본느는 손끝까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누가 마치 찬물을 끼얹기라도 한 것처럼.

“그럼 바쁜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천천히 있다가 가세요, 황후.”

카를로이는 그림 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 따르는 시종들과 함께 사라지는 황제의 모습은 꽤 익숙한 것이었다. 황후궁에서 황제궁으로 장소만 바뀌었지 이본느가 익히 잘 아는 모습이었다.

카를로이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까 흘렸던 눈물 한 방울이 견딜 수 없어져서 이본느는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속절없이 손이 떨리고 있었다.

* * *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카를로이는 황제궁 치료사부터 찾았다. 치료사가 얼떨떨한 얼굴로 들어와 황제를 진찰했다.

“저, 폐하.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신지?”

“치료사인 그대가 알아야지. 속이 불편한데 이유를 모르겠군.”

하지만 카를로이의 몸은 몹시 건강했다. 난감해하는 치료사에게 시종장 고르텐이 도움을 주었다.

“방금 폐하께서 굉장히 불편한 식사를 하고 오셨다네.”

“아, 혹시 체하신 것이 아닙니까?”

답을 알아낸 학생처럼 밝은 얼굴로 치료사가 외쳤다. 카를로이는 체한 것과는 증상이 좀 다르다 생각했지만, 확신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 약을 드시면 바로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쓸모가 많지 않아 대단치도 않은 약이지만 체한 것에는 아주 제격인 아이지요.”

치료사가 당당한 얼굴로 내미는 약을 카를로이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받아 마셨다.

1분 정도 지나자 치료사가 웃으며 물었다.

“괜찮아지셨지요?”

“그만 보고 이제 나가 있게.”

“예? 괜찮아지신 겁니까?”

“……그러하니 나가라고 하는 것이지.”

치료사는 요새 업무가 과중해 체하는 증상이 자주 나타날 수 있다며 과복용은 하지 말라고 묻지도 않은 사실을 약과 함께 줄줄 늘어놓더니 집무실을 나갔다.

아직도 불편해 보이는 카를로이의 눈치를 살피며 고르텐이 물었다.

“괜찮아지셨습니까?”

“아니, 전혀.”

“그럼 치료사에게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요.”

“됐네. 심한 것도 아닌데.”

심한 것은 아니지만 거슬렸다. 아까부터 계속 속이 울렁거렸다. 토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고, 체한 기분도 아니었다.

그 눈물은 뭐였을까?

이본느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카를로이는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공작과 소름 끼치도록 닮았다 생각한 얼굴은 이본느가 눈물을 흘린 순간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다른 사람 같았다. 그 표정을 보고 생각난 건 공작이 아니라 전혀 뜬금없는 사람이었다.

루.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정말로 좀 쉬어야겠어. 궁의 말대로 업무가 과중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같군.”

루와 황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랐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아무리 누가 보고 싶다지만 전혀 다른 사람에게 그 모습이 투영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요새 부쩍 그 시절이 불현듯 떠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고르텐, 아셀이 보내온 것은 따로 없나?”

“예. 한 달 전에 마지막으로 보낸 서찰이 끝입니다. 베르니에서 섣부르게 뭘 보내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요. 하지만 돌아오기로 약속한 날이 머지않았으니 금방 크로이센으로 돌아올 겁니다.”

아셀은 카를로이가 베르니 왕국에 보내 놓은 간자였다.

“베르니가 조용히 지내는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뭘 걱정하십니까?”

“베르니도 베르니지만 따로 시킨 것이 하나 있어서.”

카를로이는 아직도 불편한 속을 무의식적으로 두드렸다.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어김없이 희미한 기대감이 불편한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원하지 않는 감정들이 헤집고 다니는 속이 괜히 더 울렁거리는 기분에 카를로이는 공연히 아무 효과도 없는 약을 한 번 더 들이마셨다.

* * *

이상하고 어색한 식사가 있었던 날로부터 일주일 뒤에 델루아 공작이 황후궁을 방문했다. 정무 회의가 끝나자마자 들른 것이었다.

이본느가 따로 뭘 말할 필요도 없이 공작은 이미 그 식사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카를로이와 이본느가 했던 말 토씨 하나까지도 전부.

“널 대하는 게 어떤지는 모르겠다만,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는 건 여전하다.”

공작이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무 회의에서 또 카를로이와 한 판 붙고 온 모양이었다.

이본느는 엄밀히 말하면 카를로이가 자신을 대하는 것도 유의미하게 달라진 것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만 알고 있는 것도 하나쯤은 되어야지 싶었다.

“로덴 후작 그놈은 직접 초대까지 해서 아주 장인 대접을 한다지?”

이본느도 시녀들이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카를로이가 로덴 후작을 종종 초대해 극진히 대접하며 황비와 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를. 웃음소리만 들린다나.

그 이야기가 참 이상하고 신기했다. 상상이 가지 않아서. 자신과 카를로이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침묵과 냉기뿐인데.

“그런 하찮은 놈이 구심점이 되는 꼴이라니! 내내 기가 죽어 지내더니 꼴에 딸자식이 황비라고 이젠 내 말에 반기를 들어!”

공작은 쉴 새 없이 혼잣말처럼 로덴 후작과 카를로이릏 향한 분통을 터트렸다.

그 화를 고스란히 들으며 이본느는 이곳이 황후궁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공작저라면 분명 공작은 자신에게 화풀이했을 테니까. 물리적으로.

황후가 되어서 좋은, 유일하게 좋은 점이었다. 이본느는 무의식적으로 이제는 흉이 없어진 팔을 쓰다듬었다.

“황제가 너와 식사를 한 번 했다고는 하지만 그뿐이지 않으냐? 또 감감무소식이라지? 황비궁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발이 닳게 드나든다는데!”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카를로이는 이본느를 가까이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으니까.

다만 황후로 대우하겠다는 말만 했을 뿐이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겠단 말은 아니었다. 사랑은 황비에게서 찾는 거겠지.

“뭐? 황후 대우를 해? 어이가 없는 놈 같으니! 황비 책봉식도 그런 날로 고른 놈이 그리 말해 봤자 뻔하지!”

이어지는 공작의 불평불만에 이본느는 숨을 죽였다. 황비 책봉식 날을 전 공작 부인의 기일로 정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공작의 오해를 정정해 주고 싶진 않았다. 자신이 그랬다는 걸 알면 공작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공작 부인과 딸이 죽은 것이 이본느 때문이라고 공작은 생각했다. 그래서 부인의 기일이자 사실은 진짜 딸의 기일이기도 한 그날이 오면 공작은 이본느에게 모든 화를 쏟곤 했다.

몸에 그 화가 새겨진 이본느로서는 그날을 잊기도 힘들었지만 황비 책봉식 날을 정할 땐 아니었다. 술김과 홧김에 정신을 놓고 정했기 때문에.

“그래, 황비는 어떠냐?”

혼자 분통을 다 터트리던 공작이 드디어 이본느에게 말을 걸었다.

“만난 적이 잘 없어서 확실히 모르겠어요. 황비는 주로 황제와 시간을 보내서요.”

“제깟 게 뭐라고! 황후는 넌데 황비가 알아서 기어야지! 본때를 보여 주란 말이야.”

공작이 침을 튀겨 가며 잔소리를 했다.

“겉치레라도 델루아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 좀 써먹으란 말이다! 쫓아낼 구실이라도 찾든가. 가짜라는 것을 이리도 티를 내니, 쯧쯧.”

가만히 있는 황비를 끌어와서 머리채라도 잡으란 말인지. 카를로이가 아무리 황후 대우를 해 주겠다 했어도 황비를 건드리는 것을 두고 보고 있진 않을 텐데.

하지만 이본느는 공작의 순종적인 양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겉으로만큼은. 이본느는 습관처럼 공작을 걷어차는 상상을 하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황제가 황후 대우를 하겠다 했으니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으란 말이야. 이 기회에 황제와도 최대한 가까워져야 한다. 그놈 속을 알 수가 없으니.”

“그렇게 할게요.”

고분고분 대답하는 이본느를 의심 가득한 눈길로 공작이 훑었다. 이본느는 그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공작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엄마에게 좀 전해 주세요. 별 내용은 없으니 읽어 보셔도 좋아요.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면 걱정하실 것 같아서…….”

내민 편지를 한참 보고만 있던 공작은 냉정한 얼굴로 편지를 받아 들었다.

“황비의 흠을 찾아내라.”

조건을 붙이기는 했지만 유한 처사기는 했다. 넋 빠진 듯 대답하는 게 아니라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이본느가 맘에 든 모양이었다.

이본느는 다시 한번 얌전히 대답했다. 잘만 하면 드니스를 보게 해 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이본느는 공작이 왜 질리도록 황비 이야기를 하다 갔는지 깨닫게 되었다.

정무 회의에서 공작을 비롯한 공작파 귀족들이 황비 제도를 없애자고 주장했다는 말이 황후궁에도 들어왔다.

황비 제도는 크로이센의 법전에 명시되지 않은 일종의 관습법이었다. 군주제 국가로 거듭날 때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던 일부다처제는 황권 안정기에 들어서며 자연히 사라졌지만 법에서 금지하지 않은 이상 언제든 부활할 수 있었다. 카를로이가 그렇게 한 것처럼.

공작파 귀족들은 축첩 금지 조항을 명시적으로 법전에 추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황비가 민망해지겠어요, 그렇지요? 그 법이 생긴다고 지금 황비가 폐위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좀 그렇잖아요. 사실 지금도 위치가 애매한데 말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직도 푸르투 사람들은 황비의 존재를 어색해했다.

“축첩이라니! 천박한 라르투아나 하는 짓을.”

“라르투아는 축첩이 아니라 중혼을 허락하는 거야.”

“그게 그거죠. 이상한 건 매한가지인걸요. 아무튼 제가 황비라면 민망할 것 같아요.”

메리앤이 이본느의 머리를 손질하며 중얼거리는 말에 이본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민망한 건 차라리 다행이지.”

이미 황비가 되었는데도 황비 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거라면 공작의 속셈은 뻔했다. 법은 소급 적용되지 않으니 폐지가 된대도 키아나를 건드릴 수는 없다.

공작은 다음을 노리는 것이었다. 키아나를 없애 버렸을 때 카를로이가 또 같은 방법을 써 다른 황비를 들일까 봐 그러는 것일 터였다. 그러니까 키아나를 기어코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황후궁에 틀어박힌 이본느조차 알아챈 사실을 카를로이와 다른 귀족들이 모를 리가 없다.

이본느가 독에 당한 뒤로 호위가 심해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황후궁이 아니라 황비의 거처인 서궁이었다. 세상 모두가 그 독이 원래 노리던 목표가, 독을 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뜻이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암살을 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본느를 통해 키아나를 쫓아내려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암살은 키아나 하나를 치고 끝나는 일이지만 황비로서의 흠이 잡히면 로덴 후작도 같이 칠 수 있으니.

“어지간히 로덴 후작이 거슬리시나 보아, 공작님은.”

“그럴 만도 하지요. 공작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대드는 사람보다, 처음엔 발발 기다가 나중에 대드는 사람을 더 싫어하시니까요. 원래도 그러셨어요.”

‘처음엔 발발 기다 나중에 대드는’ 것은 카를로이와 로덴 후작 둘 다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 둘이라면 이제 치를 떠는 공작을 떠올리며 이본느는 손질이 끝난 머리를 무심코 건드렸다.

“손대지 마세요, 망가져요.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대충 했지만, 오늘은 안 돼요. 저번에 황제 폐하께서 단단히 성장하고 오셔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이제 정말 황후 대우를 해 주실 건가 봐요.”

“황후 대우? 메리앤은 못 봤나 보지, 저번 폐하 표정을? 식사 내내 귀찮다는 기색이시던데.”

“아니, 뭐……. 표정이야 언제나 그러시니까.”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날 볼 때 그러시는 거지.”

지난번의 식사 후 꽤 오랜만에 카를로이는 다시 이본느를 찾았다. 처음 한 번은 죽을 뻔한 황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지만, 두 번이 되자 황궁의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래도 이번엔 정원으로 부르셨잖아요. 꽤 로맨틱한 것 같아요. 아무리 황제께서 뭘 모른다지만 폐하가 정원 좋아하시는 건 알겠죠.”

퍽이나. 확실히 황제궁과 가장 가까운 제3정원으로 부른 것은 꽤나 적극적인 행동이긴 했으나 그래 봤자 실내 정원 엔투라룸까지 출입을 허락받은 황비에 비하면 부족했다.

여전히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위치를 무시하는 구분을 두고 있었다.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카를로이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정원을 좋아하는 건 아니야.”

“아니,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 그럼 왜 밤중에도 나가세요?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침실 쪽문으로 오밤중에도 달빛 정원 나가시는 거.”

“바람 쐬려고 그러는 거지……. 바람을 안에서 쐴 수는 없잖아.”

장식 하나하나가 이본느의 목을 죄는 이 황궁에서 잠시나마 숨 터놓을 곳이 정원 말고는 딱히 없었다.

메리앤은 무슨 말인지 이해했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공연히 이본느의 머리만 계속 손질했다.

“이쯤 했으니 이만 출발하지.”

“아직도 뭔가 부족해 보여요.”

“그건 메리앤의 욕심이 과하기 때문이야.”

그 말을 듣고서야 메리앤은 이본느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자신보다 들떠 보이는 황후궁 사람들을 보고 이본느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카를로이의 속이 뻔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저 하나인 듯싶었다. 하지만 장단을 맞춰 줘야겠지. 이본느는 공작의 말을 되새기며, 드니스를 생각하며 마음을 잡았다.

* * *

카를로이는 저번과 같이 먼저 도착해 이본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일부러 항상 이본느를 기다리게 했었는데, 자신이 초대하게 되니 기다리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카를로이로 변했다.

이본느는 제시간에 맞춰 왔었고, 오늘도 그럴 테니 딱히 오래 기다리는 것도 아닐진대 기묘한 초조함이 느껴지는 것이 이상했다.

리투나 생화는 단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 제3정원과 테이블을 둘러보며 카를로이는 일없이 저번에 치료사가 준 약을 또 마셨다. 이본느를 보게 될 거라 생각하니 또다시 속이 불편해져 왔다.

그간 이본느를 찾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아니, 찾지만 않았지 열흘간 카를로이는 이본느 생각에 시달려 왔다. 중간중간 이본느의 모습이 무자비한 적처럼 그의 머리를 침입했다.

눈물을 떨구던 모습으로 시작해서 점점 거꾸로 돌아갔다. 자신의 애칭을 중얼거리던 모습, 독을 마시고 쓰러지던 모습,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던 모습.

모두 하나같이 카를로이를 미치게 하는 모습들이었다.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증거가 되어 줄 모습들이 왜 반갑지 않고 더 짜증스러운지.

그럴 때면 애써 카를로이는 거만하고 기분 나쁘던 이본느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괜한 기억만 불러일으키고.

공작과 분리해서 보겠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새빨간 거짓말이었는데. 황후는 보면 볼수록 공작보다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돌겠군.”

카를로이의 혼잣말에 고르텐이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게 황후 폐하가 싫으십니까?”

식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치려고 하는 카를로이를 보니 저절로 그런 질문이 나왔다. 저렇게 싫어하면서 뭐 하러 굳이 안 하던 짓을 하는지.

아주 어릴 때부터 모셔 왔지만 카를로이는 도통 파악하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카를로이는 예상이 가능하다 싶을 즈음 꼭 뜬금없는 짓을 했다.

“좋을 리가 있나.”

고르텐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지만 이상하게 그것은 답처럼 들리지 않고 질문처럼 들렸다. 좋지 않다는 사람치고 과하게 낭만적이었다. 정원에서의 식사를 준비하다니.

이윽고 황후가 도착했다고 시종들이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원으로 들어서는 이본느를 보고 고르텐의 눈이 금화만 해졌다. 황후가 미인인 것은 알았지만 오늘따라 더 강렬한 미모를 뿜는 것을 보니 시녀들이 작정하고 꾸민 모양이었다.

성장한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있으니 보기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고르텐은 황후가 하필 델루아의 딸이란 사실이 새삼 아쉬워졌다.

흘끗 카를로이의 눈치를 살피니 그의 표정은 아직도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미소를 짓고 있긴 했는데 누가 봐도 예의상 짓고 있는 미소 같았다.

평소에는 거짓 표정도 잘만 짓던 카를로이가 어색하게 구는 것이 이상해 고르텐은 조용히 혀를 찼다. 물론 들리지 않게 속으로만.

“폐하.”

“황후, 앉으세요.”

이본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주변에 시선을 흘끗 주며 의자에 앉았다.

심심하면 정원이나 돌아다니는 이본느도 본궁이나 황제궁 근처의 정원은 가 보지 못했다. 과하지 않은 꽃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지난번엔 황후에 대한 배려가 미흡했던 것 같아 다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네……. 저도 지난번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드려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어요.”

습관처럼 단답을 하던 이본느는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괜히 또 저번처럼 소득 없이 만남을 끝내고 싶진 않았다. 공작에게 생색이라도 낼 것을 얻으려면 카를로이와의 대화가 이어져야 했다.

꽤 호의적인 대답이 돌아온 것에 놀랐는지 카를로이가 잠시 멈칫했다. 이본느의 목에 걸려 빛을 발하는 늑대의 눈물에 시선이 닿았다.

하고 올 줄은 몰랐는데.

카를로이의 시선은 자연스레 가는 이본느의 목과 선명한 쇄골에 잠시 머물렀다. 사람의 목치고는 너무 가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자 동시에 이본느의 얇디얇은 팔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볼 때보다 어쩐지 살이 더 빠진 듯했다. 더 빠질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새삼 이본느가 독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보낸 리투나 때문에 며칠을 앓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카를로이의 시선에 이본느는 천천히 숨을 삼켰다.

왜 저렇게 보지? 뭘 잘못했나 싶기도 했다. 목걸이는 하고 다니라고 준 게 아니었나?

시시각각 불편한 듯 변하는 이본느의 얼굴에 카를로이는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었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관절 델루아의 딸이 자신에게 겁먹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부부는 다른 생각을 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예전처럼 싸늘한 분위기가 아닌데도 여전히 이상한 긴장감이 흐르는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시종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좋은 말만 주고받는데도 분위기가 편하지 않았다.

“……잘 어울리는군요.”

“네?”

“목걸이 말입니다.”

“아. 덕분에…….”

이본느가 어색하게 답을 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니 다행스럽기도 했지만 도저히 이런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았다.

어색함에 어쩔 줄 모르던 이본느는 문득 쓸데없는 생각이 났다. 키아나에게는 카를로이가 온갖 지역의 패물들을 가져다 선물한다든가. 그 생각이 들자 불현듯 다시 기분이 가라앉듯 차분해졌다.

“듣기로는 황후께서 정원을 좋아한다기에 야외지만 이곳으로 정했습니다. 불편하진 않습니까.”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카를로이가 심상한 말투로 묻자, 이본느가 다시 한번 정원을 둘러보았다.

정원을 좋아한다라. 사실 꽃에 관심이 많지도 않은데. 실상은 자신도 이유를 모른 채 돌아다니는 것인데도.

영원히 받지 못할 답을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네. 정말, 정말로 마음에 들어요.”

어쨌든 카를로이의 정원에 들어와 보기는 하는구나. 자신의 정원을 보여 주고 싶다던 칼의 말이 얼결에라도 반쯤은 이루어지기는 했다는 생각에 이본느는 무심결에 조용히 대답했다.

카를로이가 멍하니 이본느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이렇게까지 감정이 실린 답을, 그것도 긍정적인 답을 이본느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 얼굴은 지독하게 슬퍼 보였다. 카를로이는 괜스레 자신의 눈을 한 번 쓰다듬었다. 이본느의 얼굴이 다시 다르게 보인 탓이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가까스로 이본느에게서 시선을 뗀 카를로이가 답을 하자 정원을 보던 이본느의 고개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주고받았던 대화가 무색하게도 전채 요리가 테이블에 놓이고 다시 빈 접시로 나갈 때까지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메인 디시도 먹은 체 만 체하고 카를로이가 또 자리를 먼저 뜰 것 같다는 생각에 이본느는 머리를 굴렸다.

억지로라도 할 말을 생각해 내야 했다. 마지막 대화 주제를 더듬던 이본느가 어색하게 먼저 말을 걸었다.

“폐하께선 꽃을 싫어하시나요?”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냐는 듯 의아한 얼굴의 카를로이를 보고 이본느가 말을 덧붙였다.

“정원에 가시는 일이 거의 없다고 들어서요.”

어릴 때 만났던 칼은 분명 혼자서도 정원에서 꽃을 보는 것을 즐긴다 했는데, 지금의 카를로이는 정원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본느가 그렇게 황궁 안 정원을 돌아다니는데도 카를로이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황제궁 근처 정원만 드나드는 걸까 싶었지만 시종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싫은 건 아닙니다. 꽃은 그저 꽃일 뿐이지요. 다만.”

무심결에 답을 내놓던 카를로이가 멈칫했다. 멈칫한 사이 답을 기다리는 이본느의 눈과 마주쳤다. 처음으로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눈 색이 그리워하던 색과 약간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작과 같은 색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키지 못한 약속과 사람이 계속 떠올라서.”

이어지는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누구도 눈을 돌리지 않아 둘은 계속 시선을 마주했다. 먼저 눈을 돌린 것은 이본느였다.

잠잠하기만 하던 이본느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두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자신이 리리안 루라는 사실을 들킬 것 같았다. 카를로이의 말이 어린 시절 자신과 했던 약속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이본느는 다시 고개를 들고 카를로이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먼저 알아주길 바라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카를로이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본느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

아니,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다물어진 입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게 생긴 베르니의 마법사가 건 마법은 생각 이상으로 촘촘했다. 뇌를 해체했다 재조립하는 기분이 들더니 이 때문이었나.

리리안 루라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담으려고 한 것이 아닌데도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 사람도 원망하진 않을 거다, 그 약속은 나름대로 지켜졌다 등등 이런저런 말을 시도해 보던 이본느는 결국 포기하고 질문을 택했다.

“어떤 사람이었나요?”

드디어 다시 입이 열렸다. 이본느가 다시 물어볼 거라곤 생각하진 못했는지 카를로이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대책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잠시간 뜸을 들이다 나온 대답은 의미가 애매했다. 이본느는 리리안 루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대책이 없기는 없었는데. 그랬긴 했는데.

이내 이본느는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카를로이가 자신을 아직까지 기억한다는 사실 하나에 들떠서 이렇게 반응하다니.

“곧 아르바 루프가 다가옵니다.”

더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카를로이가 가볍게 화제를 돌렸다.

아르바 루프는 대륙 창세 신화에 나오는 하얀 늑대를 기리는 날이었다. 어둠만 있던 세상의 첫 생명이며 대륙을 창조했다고 알려진 신성한 하얀 늑대를 기리는 아르바 루프 때는 대륙 모든 국가가 축제를 열곤 했다.

이본느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작년에 열렸던 아르바 루프의 황실 행사에서도 이본느는 배제되었다. 대대로 수도의 행사는 황제 관할 아래 중앙에서, 황궁의 행사는 황후가 주관하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네. 곧 모두가 바빠지겠네요.”

대답도 남 일이라는 듯한 말투로 나왔다.

“그러니 하는 말입니다만…….”

카를로이가 잠시 머뭇거렸다. 한번 말하면 물릴 수도 없었다.

“황후가 이번 황궁 행사를 준비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네?”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이본느는 음식을 집는 것도 잊고 되물었다. 멍하니 들려진 포크에서 꿀 소스에 절인 소고기 조각이 접시로 떨어졌다.

“시간이 사실 아주 넉넉하진 않지요. 하니 황비와 함께 준비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아.

이렇게 되면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차분해진 이본느가 다시 식기를 고쳐 잡았다.

황비 혼자 그런 큰 행사를 진행하게 둘 수도 없을 테니 형식상으로라도 자신을 끼우는 게 여러모로 편할 터였다.

“……네.”

“황비에게도 미리 말해 두었으니 괜찮을 겁니다.”

여전히 순서가 이상했다. 구색을 제대로 갖출 요량이면 묻는 것도 이본느에게 먼저 묻는 게 맞을 텐데.

“알겠습니다.”

“본래도 황후의 일이었지요. 내 불찰입니다.”

카를로이의 형식적인 사과 혹은 잘못에 대한 인정은 훨씬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들렸다. 몇 번 해 봤다고 벌써 익숙해진 건지, 이본느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주요리가 끝나 접시가 하나둘 치워졌지만 후식은 이본느 앞에만 놓였다.

“일이 바빠 먼저 가 보아야 해서. 천천히 있다 가세요.”

딱히 정말 바빠서 가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나름 크나큰 발전이었다. 카를로이는 항상 주요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기 때문에 후식 근처에는 간 적도 없었으니까.

“네, 신경 쓰지 마세요.”

이본느는 신경 쓰지 말라고 답했지만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대답이 은근히 약간씩 길어졌다는 것을 알아채고 괜히 신경이 더 쓰였다.

평소처럼 단답을 했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을 텐데 신경 쓰지 말라고 하니 청개구리처럼 더 거슬리는 것이었다.

“폐하.”

고르텐의 부름을 듣고 나서야 카를로이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카를로이는 걷다가 뒤를 돌아 남겨진 이본느를 쳐다보았다. 혼자 천천히 식사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얹힌 듯 가슴에 내려앉아 카를로이는 또 약 한 병을 비웠다.

아주 오래전, 비슷한 기분을 느낀 듯했다.

* * *

황제가 황후에게 아르바 루프를 맡겼다는 소식이 수도에 퍼졌다. 황비와 함께하니 뭐니 조건이 붙었어도 황후에게 맡긴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귀족들은 대체 황제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며 입을 놀리면서도 예민하게 판도를 살폈다.

정원에서의 식사 후 딱 나흘 뒤에 공작의 편지가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한걸음에 달려왔을 공작이지만 그는 간만에 델루아 영지로 내려가 있었다.

전서구에 딸려 온 편지의 내용이 궁금한지 메리앤이 흘끔 편지를 쳐다봤다.

“황제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네. 황비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날 이용하고, 한편으론 날 감시하면서 내 흠을 잡으려 한다고 말이야.”

딱 델루아 공작이 할 법한 생각이었지만 이본느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게 잘해 주는 척하다 이용만 하고 뒤통수를 칠 계획이라는 게 그나마 카를로이의 변화를 개연성 있게 설명했다.

다만 편지의 뒷부분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왜요? 뭐라시는데요?”

메리앤의 물음에 이본느는 대답 대신 편지를 건넸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빠르게 편지를 읽던 메리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니 황제에게 동침을 원한다고 청해라.”

메리앤은 열심히 편지 뒷부분을 읽었다.

“네 침실로 오라 해 봐라. 어디까지도 받아 주는 척할지 한번 두고 봐야겠다. 이러나저러나 손해는…….”

“메리앤, 굳이 소리 내서 읽어 줄 필요는 없어.”

듣고 있자니 민망해져서 이본느는 메리앤을 말렸다.

메리앤이 다 읽은 편지를 곱게 접어 불에 태웠다. 이본느는 전서구에게 물을 주며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불과 6개월 전에 체면도 무릅쓰고 말했다 가차 없이 거절당했는데. 이번에도 거절일 게 뻔했다. 어차피 진심도 아닌 카를로이가 이런 청까지 받아 줄 리가 없으니까.

물론 뻔히 예상되는 결과여도 이본느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공작은 뭘 시키고 나서는 이본느가 그것을 행했는지 꼭 확인하기 때문에.

지난번 정원에서의 만남 이후 카를로이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황비의 거처에 밥 먹듯 드나들고 있었다. 소문으로는 황비와 죽고 못 산다는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카를로이라니, 상상이 되질 않았다.

“폐하께서 먼저 황제 폐하를 초대해 보세요. 황후궁에서 차를 대접하겠다고 하면 되잖아요.”

“음.”

“황제께서 언제 다시 찾으실지 기약도 없는데 가만히 기다릴 수도 없잖아요.”

메리앤의 의견은 합리적이었다. 카를로이라면 솔직히 식사 두 번으로도 1년치 대우를 다 했다 여기고 이본느를 더 찾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본느의 묵묵부답이 반쯤은 긍정이라는 것을 아는 메리앤은 재빠르게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저는 글씨가 별로예요.”

메리앤이 펜을 건네며 빙긋 웃었다. 직접 쓰는 것까지 자기가 대신해 주진 않을 거라는 말에 이본느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펜을 받아 들었다.

* * *

“폐하, 황후궁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고르텐의 보고에 카를로이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카를로이가 내내 저렇게 황후란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통에 고르텐도 최대한 언급을 자제해 왔다. 하지만 전갈이 온 것까지 안 온 것처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편지를 읽는 내내 카를로이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물론 그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실상 얼굴만 그렇지 카를로이의 머릿속은 또 다른 상황이었다. 정갈한 글씨체가 이본느와 비슷하다는 무가치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부터, 먼저 청까지 보내오는 것에 대한 놀라움까지 별별 것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오후에 황후궁에 가 봐야겠어. 차를 같이 마시고 싶다는군.”

카를로이의 말을 듣는 순간 고르텐의 머릿속에도 수만 가지의 물음표와 느낌표가 몰아쳤지만 그는 숙련된 시종장답게 그 모든 것을 잠재웠다.

“알겠습니다, 폐하.”

카를로이는 이본느가 정말로 순수하게 차를 대접하고 싶은 건지 궁금해졌다. 황후에게 생전 처음 드는 궁금증이었다.

카를로이의 이런 의문은 생각보다 빠르게 풀렸다.

외국에서 수입해 온 귀한 차라 대접하고 싶었다는 사무적인 말을 건넨 후에 이본느는 무섭도록 조용해졌다. 정말로 차만 마시고 싶었던 건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카를로이는 차를 마셨다. 맛이 유달리 좋기는 했다.

카를로이가 찻잔의 3분의 1을 비워 갈 즈음이었다.

“제 침실에 한번 오시는 것이 어떠세요.”

별다른 부연 설명도 없이 마치 식사 제안을 하듯 이본느는 그렇게 담담하게 물었다. 청을 하는 사람치고는 기대감이 쏙 빠져 있는 건조한 물음이었다.

“콜록.”

애꿎게 사레가 들린 것은 카를로이였다. 미친 듯이 손수건에 대고 기침을 하는 카를로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로이가 여전히 손수건에 기침을 하면서 손을 내젓자 다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다시 원위치로 향했다.

“폐하.”

이본느가 조심스레 카를로이를 불렀다.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은 전혀 몰랐는데.

“뭐, 큼, 뭐라고 했습니까?”

또 물어야 한다니. 암담한 기색을 감추고 이본느가 가까스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제 침실에서 주무시는 게 어떠하시냐고 물었어요.”

이본느는 아래로 시선을 깔고 거절의 답을 기다렸다. 시종들이 보는 앞이라지만 거절도 두 번째니 익숙하게 넘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카를로이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돌려서 거절할 말을 찾는 걸지도 몰랐다. 예전처럼 대놓고 무안을 줄 수는 없을 테니까.

이본느의 추측과는 조금 다르게 카를로이는 답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본느를 끌어오려면 형식적인 동침이라도 몇 번은 해야 할 거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빨리 말해 올 거란 예상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저렇게 기대감 없는 얼굴로 식사 두 번 만에 이런 걸 묻다니.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뒤에 왠지 델루아 공작의 영혼이 붙어 있을 거란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뻔했다. 이것이 공작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게. 카를로이를 떠보려는 그 속셈이 훤했다.

“폐하, 저는 괜찮…….”

“좋습니다.”

뭐가 좋아?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본느가 멍하니 카를로이를 쳐다보았다. 카를로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 오늘 밤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

“빠르면 좋을 것 같은데. 오늘 밤은 안 됩니까?”

뭐가 빠르면 좋은데? 당황한 이본느의 머릿속엔 답 없는 질문만 가득 찼다.

이본느는 어지간히 놀랐는지 입을 벌린 채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카를로이는 혼자 태평히 다시 찻잔을 들었다. 떠보면 떠보는 대로 일단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2권에 계속>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 2권

지은이|진서

펴낸곳|루시노블

투고 및 문의 | [email protected]

ⓒ진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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