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가 죽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2화 (3/22)

2. 황후는 황제를 싫어할 수 없다 (1)

이본느 델루아는 황족의 운명조차 좌지우지한다는 델루아 공작의 사생아였다.

열두 살에 공작가에 들어가게 된 날부터 지하실에 감금당해 한 걸음도 걷지 못할 때가 다반사였고, 손 하나 까딱할 수도 없을 정도로 공작에게 맞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엄밀히 말하면 이본느 델루아는 진짜 이본느 델루아도 아니었다. 공작 부인과 그 사이의 딸 이본느, 그 둘이 죽자 델루아 공작이 데려온, ‘리리안 루’라는 본명이 있었던 빈민가 사생아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의 ‘가짜’ 이본느 델루아가 공작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이유였다.

“명심해라. 황궁에 널 감시하는 눈만 100명이 넘는다는걸. 그놈과 허튼짓하다 걸리는 날에는 너나 네 어미나 다 끝인 줄 알아.”

“네.”

단답은 습관이 되었다. 말이 길어지면 공작이 또 어떤 트집을 잡을지 알 수 없었기에 생긴 습관이었다. 말이 짧을수록 폭력의 시간도 짧아졌다.

황제와의 혼인도 갑작스러운 통보로 끝내더니, 결혼식 일주일 전부터 델루아 공작은 지겹도록 이본느에게 똑같은 말을 해 댔다. 요지는 황제와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였다.

황제에게 다정히 대해 주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황제를 우습게 알아라 해도 또 그렇게 하고, 자식을 가지라 하면 그렇게 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렇게 인형처럼 살라 그 말이었다.

병에 걸린 친모를 인질로 붙잡아 둔 것으로도 공작은 안심하지 못했다. 그는 온 제국도 모자라 아예 대륙을 뒤져서 씨가 말랐다는 고급 마법사를 찾아내 비밀 누설 금지 마법까지 걸었다. 공작이나 그 마법사가 죽지 않는 한 절대로 풀리지도 않을 마법을.

그런 주제에 아직도 의심이 남아서 잔소리가 많았다. 미친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본느의 대답에 공작은 대놓고 비웃음을 지었다. 늙은 얼굴에 드러나는 인성이 참 역겹다고 이본느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걱정을 마? 한 번 일을 망친 년은 두 번도 망칠 수 있는 게야.”

14년 전 일을 지치지도 않고 또 얘기하는 공작 때문에 이본느는 차라리 귀를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었다면 이미 14년 전에 귀를, 아니 제 목을 찢어 버렸을 거다. 대신 이본느는 언제나 머릿속으로 그리고 그렸다. 공작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상상, 공작을 잔인하게 죽이는 상상.

“……그땐 뭘 몰라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 네년이 더 무서운 거다. 황태자인 걸 모르고도 그렇게 덤볐는데 이젠 황제니 오죽하겠어.”

유괴당해 죽을 뻔한 남자아이를 구해 준 것을 어떻게 하면 ‘덤빈다’라는 단어로 왜곡할 수 있는지. 이본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머저리처럼 그 짧은 시간에도 정을 준 것은 사실이니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가.

“잘 감시하고 일단 환심을 사란 말이야. 알겠어? 옆에서 잘 구슬리면서. 피는 어디 안 간다. 크로이탄이 다 그렇지.”

피는 어디 안 간다. 공작의 피를 받은 것을 저주라고 생각하는 이본느에게는 부정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본느는 익숙하게 답을 내놓았다.

“네.”

“그놈도 멀쩡한 남자인데 혹하는 게 있겠지.”

말을 하던 공작이 신경질적으로 책 하나를 집어 던졌고, 이본느는 그 말이 곧 나가 보라는 뜻임을 알았다.

“개 같은 새끼.”

아무도 없는 방에서 이본느가 홀로 중얼거렸다.

결혼식 전날, 방 침대에 누워 이본느는 한참을 생각했다. 과연 공작의 말대로 자신이 미친년처럼 ‘덤빈다’면 카를로이가 거기에 응할까? 원수의 딸이 내놓고 덤빈다는 이유로 눈이 혹은 아랫도리가 회까닥해서 반응을 할까?

어린 날의 카를로이를 생각해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악마 같은 놈이 있어. 분명 이것도 그 악마 짓일 거야. 우리 삼촌들도 죽이고 아버지도 죽이려고 했어.>

어린 날에 팔다리가 묶인 채 피떡이 된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던 카를로이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그 증오가, 그 독기가.

<그 사람이 왜 너한테 그런 짓을 하는데?>

<……우리 집이 부자라서 우리 집 거를 탐내.>

<공작이라며. 공작도 엄청 부자 아냐?>

<아, 있어, 그런 게!>

지금 생각해 봐도 대단한 성질머리였다. 입이 비뚤어지도록 처맞고도 성질부릴 기력이 남았었다니. 한편으론 끝까지 자신이 누군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게 똑똑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서 살아 돌아가서, 꼭 그 악마를 죽일 거야.>

살아 돌아가면, 도 아니고 살아 돌아가서, 였다. 장정들이 저를 언제 죽일까 끼니마다 고민하며 칼을 갈고 있는데도 무슨 자신감인지.

하지만 비장한 말과는 다르게 어린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에 어린 자신이 얼마나 혹했었던가.

“……칼.”

오랫동안 불러 보지 못한 이름을 되뇌었다. 혀가 구르는 느낌이 어색했다.

어리디어린 나이에도 증오 넘치던 각오가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그 원수의 딸에게 카를로이가 호의적일까? 미친 척 달려들면 넘어올까?

이본느가 침대에 누워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를로이가 반쯤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성격에? 말도 안 되지. 카를로이가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이 공작으로부터 탈출하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이야기였다. 그럼 다른 걸 생각해 봐야 했다.

만에 하나 카를로이가 자신이 그때 그 리리안이라는 걸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을까?

이본느는 시체처럼 축 처진 자세로 가능성을 따져 보았다. 악에 받쳐 울며 중얼거리던 꼬마 카를로이의 눈물을 리리안이 닦아 줄 때 카를로이가 뭐라 했더라.

<뭐야, 더러운 손 치워.>

날카롭게 외치던 카를로이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나는 손이 더럽지만 저는 성질이 더러운 주제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리리안 루로 살던 그 시절의 이본느도 성깔로는 남부럽지 않은 아이였기에 굴하지 않고 보란 듯 카를로이의 얼굴을 더 비벼서 정말로 더러운 게 뭔지 보여 주었다. 손길은 거칠었지만 리리안의 눈길은 나름 부드러웠다. 그때의 카를로이를 불쌍히 여겼으니까.

<사내자식이 왜 그렇게 쳐다봐. 손 치워!>

카를로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었다. 그래, 카를로이는 처음에 리리안을 남자아이라 생각했었다.

딱히 카를로이가 잘못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는 모두가 리리안을 못 먹어서 마른 남자아이라 생각했으니까.

<멍청이 새끼!>

<멍, 뭐? 너 몇 살이야!>

카를로이가 유치한 치기로 되물었지만, 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아이에겐 잡일도 잘 시켜 주지 않았기에 리리안은 그런 오해를 굳이 정정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형편없이 마른 팔다리에, 목까지도 오지 않는 짧은 머리는 때가 껴 회갈색을 띠었고, 종일 햇빛 아래 먼지 위를 돌아다닌 피부는 탄광의 아이처럼 까맸고, 입고 있는 옷은 너무 기워져 있어 옷이라기보단 천 조각처럼 보였고.

그때 모습은 그랬다. 그렇게나 형편이 없었다. 지금은?

침대에 누운 이본느가 멍하니 자신의 팔로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가만히 쳐다봤다. 가느다란 팔목을,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밝고 반짝이는 백금발을, 햇빛 한번 못 받은 양 창백한 피부를, 체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팔과 머리칼이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가망이 없었다. 고대 마법사급 눈썰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에야 지금의 이 모습을 보고 그때의 리리안을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의 자신도 거울을 볼 때마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아니, 오히려 공작과 너무 닮은 모습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스운 일이었다. 공작과 공작 부인의 딸이었던 진짜 이본느는 마치 씨 반쪽이 사라진 것처럼 제 모친만 쏙 빼닮은 아이였다는데, 공작을 혐오하는 자신은 그를 이토록 빼다 박았다.

<돌아가면 꼭 너를 찾을게.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정말이야, 약속할게, 루.>

하지만, 그런데도, 난.

이본느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눈물을 흘리는 법은 아주 오래전에 까먹었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기에.

그런데도 난 네 약속을 잊지를 못해서.

열린 창문으로 쉴 새 없이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아프게 볼에 닿았다. 이본느는 기도하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가슴에 올렸다.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이본느는 간절하게 되뇌었다.

제발 기적을 달라고. 지금까지의 모든 불행을 용서할 테니, 이번 한 번만 제발 기적을 달라고.

“칼.”

기도문을 읊듯 이본느가 속삭였다.

기적이 일어나서 네가 혹시라도 날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이런 희망이 내 숨통을 그 무엇보다 단칼에 끊어 버릴 독일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루, 반드시 널 그 누구도 부럽지 않게 만들어 줄게. 내가 지켜 줄게.>

그 어린 날의,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철없는, 호기로운 약속을 혹시나 네가 지키지 않을까 하고.

* * *

혹시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본느는 식장에서 카를로이를 보며 또 한 번 깨달았다. 희망이란 가능성이 아주 낮은,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 부여잡는 부질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네 엄마의 목숨이 내게 달려 있다는 걸 언제나 기억해라.”

아버지가 딸의 행복을 바란다는 결혼식에서 오간 것은 익숙한 협박이었다. 이본느는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 계속 걸었다. 식장에 입장할 때 이본느는 너무 떨려서 걷다가 주저앉을 뻔했다.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허튼짓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공작이 아플 정도로 세게 손을 부여잡았다. 신음 하나 내지 못하고 공작을 쳐다봤더니, 언제 협박을 했냐는 듯 이미 공작은 연기 삼매경이었다.

“이브…….”

눈물까지 고이다니 정말 소름 끼치는 연기력이었다. 역겨워서 속이 메스꺼웠다. 이본느는 치밀어 오르는 역기를 간신히 삼키고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하긴 사랑하는 딸이어야 왜 박대하냐 생색이라도 낼 수 있지, 구박만 하는 천한 것이면 무슨 체면이 서겠어.

이본느는 적당히 그 연기에 장단을 맞춰 주곤 카를로이 쪽으로 걸어갔다. 눈이 있으면 좀 알아봐 달라는 강렬한 염원을 담아 카를로이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지기만 했다.

역시 못 알아보는 걸까. 당연한 일이었지만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카를로이는 심지어 제 손을 뿌리치고 혼자 식장을 뜨기까지 했다.

이본느는 홀로 남겨져 멍하니 생각했다. 잊지 않겠다며, 이 성질만 더러운 멍청아.

공작은 이본느가 넋 놓고 있을 틈조차 용납하지 못하는지 빠른 걸음으로 이본느에게 다가왔다.

“저…….”

가만히 놔두면 또 헛소리할 것이 뻔했다. 아니, 헛소리만 하면 다행이지, 자존심 상한다는 이유로 또 카를로이를 어떻게 괴롭힐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본느는 공작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카를로이의 신경을 건드릴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침실에 갑자기 들이닥쳐 분노를 표하는 카를로이의 모습은 낯설어 어색했다. 이본느는 그때야 느꼈다. 자신이 예전의 리리안 루가 아니듯 카를로이 또한 예전의 칼이 아니란 사실을.

그때의 칼은 서투르지만, 솔직하고 뜨거운 화를 낼 수 있는 어린아이였지, 이렇게 조용하며, 무섭도록 차가운 분노를 드러내는 남자가 아니었다.

“내가 델루아를 지독히도 증오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성을 받은 모든 이들을 이 제국에서 없애 버리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언성 하나 높이지 않아도 카를로이에게선 살벌한 노기가 느껴졌다.

고통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카를로이가 주는 고통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뱉는 말 하나하나에 가슴이 찔렸다. 그의 잔인한 진심이 외면하지도 못하게 이본느를 건드려 댔다.

카를로이는 이제 날 죽이고 싶어 하는구나.

이본느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글렀다고. 이 정도로 증오에 차 있다면 자신에게 호의를 품을 리도 만무하고, 자신을 기억해 낼 리는 더더욱 없고.

남은 것은 카를로이의 이성을 믿는다는 선택지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과 최소한의 의무만을 다함으로써 공작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게 이득이라는 걸 카를로이가 깨닫게 해야 했다.

“당신은 이 나라의 황후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게 끝일 거야.”

하지만 이본느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걸 곧 알게 되었다. 카를로이의 증오는 ‘적대’ 이외의 모든 선택지를 다 소거해 버린 듯했다.

싸늘한 말만을 남기고 카를로이가 떠나자 이본느는 마치 팔다리가 부러진 목각 인형처럼 침대에 쓰러졌다.

“이제는 어떡할 수가 없어…….”

이본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카를로이에게 솔직히 말할 수도, 맘 편히 카를로이의 편을 들어줄 수도 없다. 그렇다고 공작의 말을 적극적으로 들어서 카를로이의 환심을 살 수도 없다.

이도 저도 못 하는 나는 아마 여기서 이렇게 고여서, 고이고 또 고여서 썩어 가겠지.

눈가가 축축했다. 이본느는 천천히 눈을 문질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자신은 오래도록 울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부질없는 희망에 자신도 모르게 너무 큰 기대를 건 듯했다. 지옥에서 도망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는데, 또 다른 지옥으로 걸어 들어온 것뿐이었다.

“……엄마.”

울음기 어린 목소리로 이본느는 애처럼 계속 엄마를 불러 대며 중얼거렸다. 무섭고 외로웠다. 가장 고귀하다는 자리에 앉은 날, 이본느는 가장 바닥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이본느는 높디높아 까마득하기까지 한 바닥에서 한없이 과거만을 그리고 또 그렸다. 가장 행복했던 어느 때를,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던 어느 순간을 계속해서 떠올리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 * *

이본느는 갑자기 아버지라고 나타난 델루아 공작을 여러 면에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해가 안 가는 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는 가혹한 주제에 왜 친모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지.

“저런, 드니스. 이렇게 밖에 오래 나와 있으면 몸에 안 좋다고 치료사가 그러던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공작님. 이제 루가 결혼하면 얼굴도 많이 못 볼 텐데,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요.”

“그래, 그러도록 해……. 루는 잘 살 테니 너무 걱정 말고 자네 몸이나 신경 써. 건강해야 루를 오래도록 보지.”

공작은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얼굴로 드니스를 토닥였다.

저렇게 엄마를 인질로 잡았으면서도 왜 굳이 불법인 비밀 누설 금지 마법에 목숨을 거는지와 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공작의 이 행동들이 이해됐을 때, 이본느는 공작을 더 무서워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결혼하는데도 아무것도 못 해 주다니…….”

수척한 얼굴로 이본느의 친모 드니스가 중얼거렸다. 공작저에 온 이후로 드니스의 병색은 훨씬 옅어졌다.

넓고 쾌적한 방의 고급 침상에, 화려한 휘장, 수발을 드는 많은 시종.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이본느가 공작저의 어느 곳에서 공작에게 맞아 숨도 못 쉬고 있을 때 드니스는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병으로 가쁜 숨을 헐떡이곤 했다.

“결혼식은 꼭 가고 싶다고 했더니 공작님이 이 몸으로 그렇게 멀리 가다간 가는 도중에 죽을 거라지 뭐니. 너무 멀어서 너도 이젠 자주 오지도 못한다 그러고…….”

드니스가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냈다.

“남편 될 자작이 좋은 사람이라니까 그나마 다행이지만.”

드니스는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몰랐다. 공작이 무서워 임신하고 도망쳤으면서도 지금의 공작이 친절하고 너그럽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죽은 공작 부인과 딸에게 못 해 준 것을 해 주고 싶다, 가족이 없어 너무 외롭다는 공작의 새빨간 거짓을 믿었다.

오랜 병증으로 약해진 몸에 판단력도 흐려져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공작은 원하는 대로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본느조차도 처음엔 공작을 믿었다. 제게도 아버지가 생겼다고 얼마나 행복해했었는지.

<이제 내가 너의 아버지란다.>

공작은 어둠의 숲에서 다정한 얼굴로 어린 리리안 루의 손을 잡았었다. 그렇게 아름답고 부러운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으로 공작은 이본느를 지옥으로 데려갔다.

“받을 수 있는 최고급 교육은 다 해 줬다고 하더니, 정말. 언제 이렇게 기품 있는 아가씨가 다 됐는지. 행복하니, 루?”

드니스가 마른 손으로 딸의 손을 잡았다. 악의 없는 질문에 숨이 막혀 왔다. 하지만 이본느는 미소 지을 수 있었다. 14년간 항상 해 오던 일은 이제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그렇게 싫어하는 공작을 닮은 걸까? 이렇게까지 속을 감출 수 있다는 건.

“응. 당연하지.”

“다행이야. 루 네가 행복하지 않다면 난……. 굳이 이런 생을 이어서 뭐 하겠어.”

“그런 말 좀 하지 마. 그럼 난 혼자 살아?”

“이젠 공작님도 계시잖니.”

아, 공작은 정말로 치밀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자신을 빌미로 이본느가 협박당하고 있는 것을 드니스가 알게 된다면 드니스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창문 밖으로 투신할 사람이었다. 빈민가에서 병으로 고생할 때 자신이 차라리 자진하는 것이 이본느에게 나은 일일지 고민했던 사람이니.

해서 공작은 드니스에게는 아름다운 거짓만을 보여 주었다. 이 세상에서 지킬 것이 엄마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이본느가 제 입으로 추한 진실을 고할 리는 없었으니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거 가져가. 조금 더 크게 만들고 싶었는데, 힘이 너무 부쳐서.”

자수가 놓인 얇은 레이스 천은 원래 이불로 쓰여야 했지만 크기가 작아 담요처럼 보였다.

이 크기를 만들기 위해 드니스가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팔을 놀려야 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힘도 없으면서.

“루, 너 우는 거야? 결혼 전엔 신부들이 그렇게 운다더니, 정말이었네.”

“엄마, 잘 지내야 해. 그래도 자주 올 거야.”

“내가 여기서 못 지낼 게 뭐 있어? 대접이 과해서 체할 것 같은데. 넌 너나 걱정해. 나 때문에 네가 평생 시집도 못 가고 있는 것보단 나아.”

이본느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할 수가 없었다.

먼지 쌓인 나무 침대에서 날마다 죽을 듯이 기침하다 피 토하는 엄마가 아닌, 약을 먹으면 다시 기침이 잦아드는 엄마를 볼 때마다.

있는 음식은 죄다 자신에게 먹이고 쫄쫄 굶는 엄마가 아닌, 공작저의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 엄마를 볼 때마다.

배고파 꽃을 뜯어 먹는 엄마가 아닌, 정원의 꽃을 보며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꼭 잡아 주는 엄마를 볼 때마다.

이본느가 후회하지 않게 만드는 순간들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었다. 솔직히 이본느는 이건 손해 보지 않는 장사라고까지 생각했다. 공작에게 맞는 것은 잠시였고, 보장된 미래는 길었다.

공작은 이본느에게 화풀이하는 것 말곤 딱히 요구하는 것도 없었다. 엄마가 저렇게 살 수 있는 한 이본느는 공작이 미친 광대처럼 외줄 타기 춤을 추라 명해도 그럴 것이었다.

해서 이본느는 공작의 유난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혼인이 결정된 후부터 공작은 미친 듯이 마법사를 찾기 시작했다. 대체 남편 될 사람이 누구기에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공작은 마법을 걸기 전까지는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말하면 안 되는 것을 말하고자 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것이고, 글로 쓰려고 해도 아무것도 써지지 않을 것입니다.”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가 말했다. 그가 헤집어 놓은 머리는 한동안 끔찍할 정도로 아팠다.

막대한 금액을 지급해 가며 고급 마법사를 비밀리에 데리고 온 공작은 이본느를 비롯한 몇몇 고용인들에게도 비밀 누설 금지 마법을 걸었다. 몇몇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기도 했다.

크로이센에 이런 고위 마법이 가능한 사람은 없었기에 베르니 왕국에서 데려와야 했는데 그것은 사형에서 멸문까지 갈 수 있는 중죄 중 하나였다. 게다가 대륙의 많은 마법들이 그렇듯, 주기적으로 다시 걸어 줘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이본느가 생각하기엔 이런 위험이 큰 불법 마법보다 엄마를 가지고 협박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드니스가 공작 손에 있는 한 자신은 잠꼬대에서조차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텐데. 게다가, 자신이 대체 누구에게 말할 거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말할 이유도 없는데.

하지만 이제야 이본느는 공작을 이해한다. 공작은 아마 알았겠지.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벌레 보듯 하는 카를로이를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았을 거다.

칼에게 이본느는 그저 역겨운 공작을 똑 닮은, 그가 한 짓들도 거침없이 할 수 있을 잔인하고 악한 황후.

칼을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가 엄마도 버리고 도망가고 싶어 할 때가 올 거라는 걸 알았던 거야.

이본느는 홀로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인생에 단 하나 남은 기대를 바로 앞에 두고도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해 미쳐 가느니 죽기를 원할 때가 오리란 걸 공작도 알았는데 자신만 몰랐다.

극한에 몰려 엄마고 뭐고 다 잊어버리는 때가 올 걸 분명 알았을 테니 마법이라는 이중 장치가 필요했던 거다.

“크로이센을 위하여.”

이 사실을 키아나에게 가야 할 독을 망설임 없이 대신 들이켤 때 이본느는 깨달았다. 나 지금 정말로 도망가고 싶구나. 비록 그 도망처가 죽음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카를로이의 표정이 이상해서 웃겼다. 언제나 내가 없어지기를 바랐던 걸 뻔히 아는데, 저건 또 무슨 표정이야.

겁먹은 얼굴이 꼭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멍청한 바보 같으니. 하지만 이본느가 엎어져 안긴 그 품은 넓었다. 이 사람은 몸만 이렇게 커 버린 걸까.

이본느는 피를 토하며 생각했다. 이대로 죽는다면 그건 굉장히…… 편안하겠다고. 흐려지는 의식에 남는 것은 드니스도, 카를로이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 하나만이 남았다.

* * *

길고 긴 꿈을 꿨다. 이본느가 리리안 루이던 시절의 꿈을.

열두 살 리리안 루는 어머니와 델루아 공작령 맨 구석,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어둠의 숲에 자리한 빈민가에서 살던 어린아이였다.

어린아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몰골로 살았지만 삶은 나쁘지 않았다. 배불리 먹진 않았어도 굶지는 않았고, 아버지가 없었어도 어머니가 있었고, 따뜻하진 않았어도 추운 바람 피할 수 있는 집은 있었고.

“루, 우리 아가.”

밤마다 자신을 안고 속삭이는 다정한 엄마의 목소리.

“루, 와서 먹을 것 좀 가져가라.”

유일하게 모녀를 챙겨 주는 이웃 마리엘 아줌마.

리리안 루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삶이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을 거저 알게 되지 않는다. 불행이 찾아올 때, 그때야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지. 아, 전이 나았구나, 하고. 공작보다 더 큰 불행은 없으리라 믿었던 지금의 이본느가 카를로이와 혼인 후 진정한 불운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처럼.

불행의 종류가 썩 다양하지 못하다는 것을 고려한다 해도 리리안 루에게 찾아온 불행은 지나치게 진부한 것이었다.

지독한 병이 드니스에게 찾아왔는데, 그 병은 완치도 되지 않는 주제에 비싼 약을 필요로 했다. 병마와 가난은 짝지어 다니기 쉬운 것들이었다. 아니, 어쩌면 불행이란 건 원래 다른 불행을 같이 불러들이기에 그리 불리는 걸지도.

리리안 루는 어린 나이에 갑자기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어둠의 숲에는 돈만 주면 그 어떤 나쁜 짓도 거절하지 않는 깡패들이 살았다. 그 깡패들은 꽤 자주 순진무구해 보이는 어린아이를 필요로 했는데 리리안은 그들을 위해 일하곤 했다.

치안대의 의심을 피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든가, 무언가를 대신 전달해 준다든가, 그들의 거처를 청소해 준다든가, 자잘한 막노동을 한다든가. 그러면 짭짤한 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일단 돈이 급한 리리안에겐 죄책감, 양심, 정의 의식 따위의 것이 없어서 깡패들은 그런 점을 편하게 여겼다. 게다가 어린애 주제에 간덩이가 크고 배짱이 있기도 했다.

카를로이를 처음 본 날도 평소와 별다른 바가 없었다. 돼지 소굴처럼 더러운 깡패들의 집을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묶여 있는 어린 남자아이를 발견한 것뿐이었다.

“어…….”

당황한 리리안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라지는 않았다. 이곳은 원래 깡패들이 자주 사람을 가둬 놓기도 하는 곳이었다. 협박하거나, 때리거나, 고문하기도 하는. 다만 이렇게 어린아이를 데려온 것은 처음 보았다.

남자아이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도망쳐! 어서 나가! 여기 위험한 곳이야!”

리리안이 아무것도 모르고 무고하게 들어온 아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리리안은 새삼 충격을 받았다. 자기가 저 상황이었다면 살려 줘, 부터 외칠 것 같은데. 이때 받은 충격을 리리안은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계, 자신의 목숨부터 챙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 올바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있고, 그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리리안은 못 박힌 듯 서서 제 주제도 모르고 남이나 걱정하는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리리안이 한참을 가만히 서 있자 깡패 중 하나가 들어와 소리쳤다.

“루! 쓸데없는 거에 신경 쓰다간 알지? 돈 못 받는 건 당연하고 여기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할 거다.”

리리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거리며 바닥을 닦는 척했다. 깡패는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리리안은 그들의 나쁜 짓을 단 한 번도 밀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 남자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란! 리리안은 자신을 쳐다보던 남자아이의 얼굴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배신감, 경멸,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은 다 떠오르던.

“뭐야, 이 새끼들이랑 같은 패거리야? 이 나쁜……!”

무서울 정도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정 하나가 남자아이의 머리통을 가차 없이 내려친 것이었다. 공포감에 리리안 루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다 큰 어른이 맞는 것과 자신과 또래로 보는 아이가 얻어터지는 걸 보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뭐야, 루. 왜 나왔냐?”

“아, 그게…….”

“잘됐다. 마녀의 나무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을 거야. 그 남자한테서 물건 좀 받아 와라.”

마녀의 나무라면 어둠의 숲의 입구에 있었다.

“약재라고 하면 치안대도 뭐라고 안 할 거다. 네 엄마 병으로 골골대는 거 여기서 모르는 사람 없으니.”

매타작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청소를 하는 것보단 나았기에 리리안은 냉큼 말을 들었다. 가져온 물건이 엄청난 수의 금화였다는 걸 알게 된 건 좀 지나서였다.

하루 내내 맞는 듯하던 남자애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조용해졌다. 그때야 리리안은 다시 그곳에 들어가 보았는데 남자애는 묶인 채로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다.

“반항하면 더 맞아. 그냥 닥치고 있는 게 좋아.”

리리안의 유용한 충고가 전혀 고맙지 않았는지 아이는 눈물 흘리던 눈으로 매섭게 노려봤다. 피떡이 된 얼굴이 공포스러워 리리안이 저도 모르게 아이의 얼굴을 제 손으로 문질렀다.

“뭐야, 더러운 손 치워.”

“너 모르지? 지금 네 얼굴 내 손보다 훨씬 더러워.”

“그 더럽단 말이 아니라……. 사내자식이 왜 그렇게 쳐다봐. 손 치워!”

“뭐야? 이 멍청이 새끼!”

“멍, 뭐? 너 몇 살이야! 저는 범죄자 수발이나 드는 주제에!”

터진 입으로 잘도 나불거리는 놈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너무나 처참한 몰골이라 리리안은 차마 그러지 못했다.

대신 깨끗한 물수건을 들고 얼굴을 닦아 주었다. 닦고 보니 피가 심해서 그렇지 얼굴은 생각보다 많이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술이 터진 것 같긴 했지만 오른쪽 뺨 말고는 얼굴이 크게 붓지도 않았고. 머리통과 몸을 많이 때린 걸까.

남자아이는 이런 친절이 전혀 고맙지 않은지 매서운 눈길로 루를 노려보았다.

“저도 한패면서 잘해 주는 척.”

리리안 루는 인내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그럼 나도 너 때려 줄까?”

아이가 입을 다물었다. 역시 맞는 건 싫은가 보다.

얼굴을 다 닦고 나서 리리안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남자아이는 너무…… 예뻤다. 헝클어져 먼지가 묻긴 했지만, 윤기가 흘렀을 것이 분명한 새까만 흑발, 그리고 아름다운 금색 눈. 이런 색의 눈도 처음 봤고, 이렇게 예쁜 남자아이도 처음 봤다.

아니, 살면서 본 모든 것들을 통틀어서 가장 예쁘다. 엄마 드니스보다도. 맞고 나서도 이렇게 예쁘면 멀쩡할 땐 더 예쁘겠지.

“기분 나쁘게 뭘 계속 쳐다보고 있어.”

말투는 얼굴만큼 아름답지 못했다.

“예쁜 건 다 가시가 있다더니…….”

“헛소리…….”

종알대는 입에 리리안은 부엌에서 몰래 들고 온 빵을 쑤셔 넣었다. 입을 다물어야 예쁘다면 그렇게 만들어 줘야지.

인상을 찌푸리던 남자애는 욕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배가 고픈지 허겁지겁 입에 들어온 빵을 먹었다.

“……이 빵 뭐야?”

“이게 뭔지 왜 몰라. 호르뒤잖아.”

“……그게 뭔데.”

리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한 것보다 더 귀한 집 도련님인가 보다.

살면서 호르뒤 빵도 먹어 본 적이 없어? 평민들이 먹을 수 있는 빵은 보리 반죽으로 만든 빵인 호르뒤 말곤 없는데.

“이런 빵은 처음 먹어 봐. 무슨 빵이 이래. 푸석푸석하고.”

어딘지 모르게 재수가 없는 남자애는 맛없단 소리나 하는 주제에 입맛을 다셨다. 입이랑 입맛이 따로 노네.

리리안이 물었다.

“너 이름 뭐야?”

“네가 내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게.”

“말하면 빵 또 줄게.”

아예 먹지 않았다면 참을 수 있었겠지만 이미 맛을 본 이상 참기는 어려운 법이다. 제가 아무리 대단한 집 아들이어도 배고픔에는 빈부도 없는 법이다. 그리고 리리안은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개인 줄 알아!”

하지만 이놈은 만만치 않았다.

“알았어. 그럼 이 새끼 저 새끼라 부르지, 뭐.”

“부르지 마! 네가 날 왜 불러!”

“잼도 있는데. 너 피나타 잼이라고 알아? 이것도 못 먹어 봤지? 무슨 맛인지 모르지? 이게 참……. 설명하기가 어렵네. 엄청 맛있는데.”

“카…… 칼.”

물론 만만치 않아 봤자 굶고 맞은 어린애지 뭐. 남자애는 대답은 따로 하지 않았지만 델루아령에서나 나는 피나타 잼을 먹어 봤을 리가 없었다. 부잣집 애들은 그럼 대체 무슨 잼을 먹나?

혼자 생각하던 리리안이 흡족한 얼굴로 잼을 바른 빵을 입에 넣어 주었다.

“왜 이렇게 해 줘? 너 나 구해 줄 거야?”

칼이 물었다. 리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거 봐. 그럼 착한 사람인 척 굴지 말고 꺼져. 너도 똑같이 나쁜 새끼니까.”

“너 입에 빵가루 엄청나게 묻었다. 맛있었나 봐. 근데 맛없는 척……. 왜 이렇게 내숭을 떨어?”

“이씨!”

칼의 얼굴이 붉어진 꼴이 꽤 볼 만해서 리리안이 소리 내서 웃었다. 리리안은 가지고 있는 빵을 모두 칼에게 주었다. 물론 손이 묶여서 칼은 입으로 받아먹어야 했지만.

열심히 오물거리는 칼을 흥미롭게 관찰하던 리리안이 또 물었다.

“너 몇 살이야?”

“……열셋. 넌 뭔데?”

헉. 자신보다 한 살이 많았다.

남자아이들이 한 살 차이에도 얼마나 유난인지 잘 알고 있는 리리안은 제 나이는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하지 않기로.

“나? 나 열넷.”

“거짓말한다. 쬐끄만 주제에.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없어 보이는데.”

리리안은 대답 없이 연고를 가져다 칼의 입가에 발라 주었다. 아픈지 앓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연고를 다 발라 준 뒤 리리안은 애써 닦은 칼의 얼굴에 열심히 더러운 먼지를 붙였다.

“뭐 하는 짓이야!”

“너한테 잘해 준 거 들키면 나도 죽어.”

“빵 좀 준 게 잘해 준 거냐. 그럼 하지를 마! 닦았다 더럽혔다 아주 미친놈 아니야.”

그러게. 리리안은 잠시 고민했다. 굳이 얘한테 이렇게 해 줄 일이 있나.

하지만 까칠한 말과는 다르게 칼의 눈엔 공포가 담겨 있었다. 저 눈을 알았다. 리리안이 필사적으로 돈이 될 일을 구하러 다닐 때의 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나 간다.”

“빨리 꺼져.”

마치 욕을 하듯 이를 악물고 남자애가 말했다.

리리안은 미련 없이 일어나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걸음을 세며 걸었다. 열네 걸음.

“가지 마!”

들려오는 소리에 리리안이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칼은 또 울고 있었다.

“혼자 두지 마.”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예쁘고 귀한 집 아이여도 무서움 앞에선 어쩔 수가 없구나. 자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불가항력이었다. 리리안은 칼에게로 가까이 가 옆에 쭈그려 앉았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건지 칼은 미친 듯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칼은 리리안을 옆에 두고 계속해서 울었다. 울면서 뭐라 중얼거리기도 했다. 울음소리 때문에 잘 들리진 않았지만 대충 부모를 부르는 거 같았다.

“가지 마.”

리리안이 조금만 몸을 움찔거려도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리리안은 새벽 해가 뜰 때까지 칼의 옆에서 그 소리를 들어주었다. 칼은 더는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 * *

그날을 후회한다. 홀로 울던 칼을 내버려 두지 않고 그의 곁으로 간 그날을.

“……칼?”

흐린 눈앞에 그때의 칼이 있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독에 취해 수마에 빠져 있던 이본느의 눈앞에 일그러진 표정의 칼이 있었다. 마치 예전의 그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

하지만…… 칼이 아니야. 다 큰 카를로이인데. 카를로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 리는 없으니 역시 이것도 꿈이다.

이본느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는 꿈이었다.

* * *

새벽 해가 뜰 때까지 칼의 옆에 있으면서 알아낸 것은 몇 개 없었다. 굉장히 귀한 집 아이라는 것, 그 집의 무엇인가를 노리는 사람이 칼의 납치를 사주했다는 것.

“저 꼬맹이를 대체 언제까지 붙잡아 둬야 하는 거야? 선금 받은 이후로 도통 연락이 없잖아.”

“조금만 기다리라잖아. 게다가 몰라? 잘못 거스르면 우리부터 목이 날아갈걸.”

“에휴, 재수가 없더라니…….”

하지만 며칠간 깡패들의 심부름을 하며 알아낸 것은 몇 개 있었다. 사주한 사람과 칼의 부모와의 거래가 신통치 않다는 것.

깡패들은 칼을 정말 죽여 버려야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칼은 며칠 동안은 리리안의 충고를 받아들여 닥치고 조용히 있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다시 반항하기 시작했다. 아마 돌아가는 상황이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어찌나 끈질긴지 칼은 탈출 시도만 세 번을 하다 걸려 또 처맞곤 했다. 맞을 때는 독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칼은 밤이 돼 깡패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울었다. 자존심이 더럽게 센 놈이었다.

“꺼져.”

울음 섞인 소리 사이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리리안에게 하는 욕인 것 같았다.

“꺼지라고.”

밤에 아무리 리리안이 상처를 봐주고, 음식을 가져다주고, 함께 있어 줘도 리리안에 대한 근본적인 원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무뢰배들이 그득한 곳에서 유일하게 인간성을 기대해 볼 만한 리리안이 막상 큰 도움은 주지 않는 것이 미워 죽겠는 모양이었다.

“가지 마.”

그래 놓고 리리안이 또 떠나려고 하면 칼은 어김없이 붙잡았다. 가끔 리리안은 새끼 새를 보는 어미 새의 심정이 이런 걸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내가 잘못했어……. 가지 마.”

예쁜 금색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붙잡는 남자아이를 누가 내칠 수 있을까. 아마 칼이 이런 모습을 무뢰배들에게 보인다면, 그들이 풀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피나 눈물이 없어도 미감 정도는 있을 것이 아닌가?

“금방 나갈 수 있을 거야. 여기 아무리 오래 있었어도 결국은 다 집에 돌아갔어.”

리리안이 서툴게 위로했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집에 돌아갈 땐 시체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결국 돌아가지 못하고 어둠의 숲 어디에 시체가 던져진 사람들도 있었으니. 시체를 자양분 삼아 자라난 나무들이 울창한 곳이 어둠의 숲이었다.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이 그래도 위안이 되는지 칼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넌 왜 저런 새끼들을 도와주는 거야.”

“엄마가 많이 아파. 약이 필요한데 돈 받을 곳은 없으니까.”

리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리리안은 아마 계속 이 남자아이에게 변명하고 싶었을지도. 그렇게 내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어쩔 수가 없다고. 엄마가 아프니까.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평소처럼 비웃거나 비꼬거나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어쨌든 리리안은 칼이 ‘사람이 아프다고 다 너 같은 짓을 하냐?’와 같은 속없이 정의로운 소리를 해도 봐줄 생각이었다.

“……얼마나 아픈데.”

하지만 칼은 그러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이상해졌다. 변명을 위해 늘어놓은 말은 상대가 진심으로 받아들이자 역으로 리리안을 찔렀다.

리리안의 엄마 드니스는 정말로, 아주 많이 아팠으니까. 얼마나를 설명하려고 하자 저절로 목이 멨다.

“금방 나으실 거야.”

칼이 어색하게 말했다. 진심이 아닌 위로일까? 아까 리리안이 했던 위로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대답 없이 침울해진 리리안을 보고 칼이 불편한 듯 몸을 꿈틀거렸다.

“돈이 얼마나 필요한데?”

“몰라. 아주 많이. 나중엔 더 비싼 약이 필요하다고 그랬는데.”

리리안의 말끝이 흐려지더니 절대 그 입에선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급작스러운 침묵에서 리리안의 우울감과 절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칼은 어쩌면 리리안이 매번 자신 옆으로 와 시간을 보낸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옆에서 떠들던 사람이 입을 다무니 칼은 더 불편해졌다. 정적은 공포를 더 생생하게 만들기에.

“……내 바지 뒤져 봐.”

한참 뒤에 칼이 요구한 것은 듣기에도 이상했다. 뭐를 뒤져? 머뭇거리던 리리안이 서툴게 바지 주머니를 뒤지자 칼이 고개를 저었다.

“주머니 아니고, 바지 안에.”

리리안의 얼굴이 새빨개진 것을 보고 칼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 생각 하는 거야? 속옷 안 아니고 바지 안이라고.”

속옷 안이 아니면 뭐가 다르냐, 이 멍청이야.

하지만 리리안은 부끄러움 따위는 모르는 담대한 사내아이인 양 다시 아무렇지 않게 칼의 바지 안에 손을 넣었다. 허리춤에 무언가가 있었다. 주머니였다.

“이게 뭐야?”

“열어 봐.”

안에는 굉장히 비싸 보이는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리리안이 보기에도 그것은 진짜만이 풍길 수 있는 반짝임을 품고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브로치 혼자 반짝거렸다.

어쩐지 맞을 때 너무 몸을 웅크린다 했다. 지킬 게 있었던 것이다.

“그거 가져다 팔면 돈 돼.”

이렇게 말하는 칼의 말투는 퉁명스러워서 마치 뭔가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뜯어내는 사람 같았다. 리리안은 칼의 말투와 말의 내용 사이의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너 바보야? 돈 필요하다며!”

칼이 답답한 듯 소리치자 리리안은 그제야 칼이 그걸 자신에게 주겠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왜?

리리안은 거리의 아이였다. 이런 것은 제가 훔치지 않는 이상 꽁으로 오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이런 거 나 줘도 난 너 못 풀어 줘.”

“…….”

“너 풀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건 너무 뻔하고, 아저씨들이 나랑 우리 엄마를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리리안은 주머니를 다시 곱게 건넸지만, 칼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누가 뭐 달래? 어차피 저 새끼들한테 뺏기는 것보단 나으니까 너 가지라고!”

“……진짜로? 나 정말로 너 못 풀어 줘.”

“너같이 불한당 새끼들 수발이나 드는 놈한테 내가 뭐라도 기대할 거 같아?”

와…….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하는 걸 보니 찝찝함 없이 공짜로 받아도 될 것 같기도 했다. 칼은 정말로 무언가 기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리리안은 다시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치 칼을 처음 본 그날처럼. 얘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잡혀 있을 때는 나보고 도망치라고 할 정신이 있고, 지금조차도 얼마나 비싼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물건을, 맞는 내내 소중히 지키던 것을 대가 없이 주겠다고 하고.

미친놈이다. 이상한 놈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칼에 대한 생각이 조그만 머릿속을 잡아먹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칼은 여전히 특유의 퉁명스러운 얼굴이었다.

“어차피 금방 나갈 수 있을 거라며. 그러니까 나한텐 필요 없어.”

리리안의 거짓말을 믿는 걸까? 리리안은 괜히 죄책감으로 가슴이 조여 왔다. 하지만 받을 건 받아야 했다.

곱게 주머니를 제 품 안에 넣는 리리안을 보고 칼이 코웃음을 쳤다.

“정말 나한테 기대하는 거 없는 거 맞지?”

“아, 없다고!”

리리안이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생글생글 웃는 것을 짜증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던 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밤에 가지 마. 자주 와.”

조용하지 않았다면 들리지도 않았을 속삭임이었다. 용케 그 말을 듣고 칼의 빨개진 귀를 알아챈 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팔면 엄마는 더 나아질 테니까, 밤 정도는 칼에게 내어 줄 수 있었다. 남는 장사였다. 루는 계산에 능했다.

리리안 루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자랑할 만한 성격적 특징은 몇 가지 있었다. 민첩함이라든가, 배짱이라든가, 손익을 따지는 눈치와 같은 것들.

하지만 리리안 루가 이본느 델루아가 된 지 14년, 잘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14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고, 사람 하나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가능한 시간이었다.

이본느 델루아는 14년간 공작을 견디면서 무감각의 최고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감정과 감각, 생각까지도 죄 죽여서 일말의 반응도 하지 않는 것. 좋게 말하면 인내심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딘 감각으로는 고통도 남의 것 같으니 그게 편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또 다른 여자들만 상대하시는군요. 하기야 애정이란 건 권세로 얻을 수 없는 것이지요.”

“여자들만 상대하시면 다행이게요? 난 조만간 폐하께서 남색도 하실까 봐 두렵던데요.”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듯…….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자신을 보면 역겹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카를로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저,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이번 행사에는 관여치 말라고 그렇게 명하셔서…….”

들리는 것도 들리지 않는 듯…….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황후가 돼서 황실 재산이나 축내지 않으면 다행이지.”

“폐하, 황후께서 들으십니다.”

“내 알 바는 아니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자신에게 모욕을 주고 싶어 하는 카를로이의 날카로운 말들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다. 공작의 모든 폭력을 그렇게 견뎌 냈듯이.

“당신은 가만 보면 아직도 황후가 아니라 공작의 딸인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이 또한 지나갈 일이니.

“그대 아비인 공작이 그대와 내가 식사조차도 같이하지 않는다고 공적인 자리에서 유난을 피우더군요. 대체 부부의 일은 어찌 그리 자세히 아는 건지, 황후는 놀랍지 않은가요.”

언젠가는 지나갈 일이니까 그저 가만히…….

“속이 좋지 않아 식사를 같이…….”

“네.”

“……뭐가 네라는 겁니까? 내 말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네.”

강한 자기 세뇌조차 멈칫하게 만드는 싸늘함에 이본느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카를로이가 굳은 얼굴로 이본느를 보고 있었다. 이본느는 그제야 실수를 깨달았다.

아차, 대답이 너무 빨랐다.

어쩔 줄 모르는 이본느를 카를로이는 평소처럼 싸늘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저렇게 본다 해도 할 말도 없었다. 카를로이의 말을 하나도 듣지 않았다고 아주 소리를 치고 있었던 셈이니.

“내 말을 대놓고 무시하는군. 굳이 외모가 아니더라도 그대가 공작의 딸이라는 건 모를 수가 없겠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죄송합니다.”

“그대가 이러는 게 한두 번입니까? 매번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요.”

카를로이는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는지 이젠 타박을 줄 때도 심드렁한 말투였다.

“황후궁에만 있는 사람이 대체 다른 생각 할 게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겠군요. 딱히 하는 일도 없을 텐데.”

아.

카를로이 앞에서는 14년간의 요령도, 인내심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이본느는 이죽거리는 카를로이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누르느라 모든 힘을 다 써야 했기 때문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황제일 게 뭐란 말인가. 황제만 아니었다면 미친 척 한 번쯤 그래 보아도 됐을 텐데.

어릴 때도 그리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었다지만 어떻게 된 게 더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이따위로 굴면서 식사는 매번 꼬박꼬박 하자고 하니…….”

카를로이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4년간 카를로이는 입 안에 혀 대신 칼을 키운 듯했다. 보이지 않는 그 칼은 공작의 손찌검보다도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고통이 너무나 괴로웠다. 각오하고 이곳에 들어왔지만, 그 각오가 무색해질 만큼 괴로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어렸던 날의 칼이 자신을 온 마음을 다해서, 온 진심을 다해서 증오한다. 혐오한다.

붉어진 얼굴로 자신을 붙잡던 그 얼굴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그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자신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남자만 남아 있다.

어쩌면 내가 죽기를 바랄까? 아니면, 나를 죽이고 싶을까? 이본느는 매일 그것을 궁금해했다.

가만히 있어도 증오심이 느껴지는 카를로이를 대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말까지 섞을 때는 이본느의 모든 기력을 잡아먹었다.

“……폐하께서 자주 오시는 것도 아니신데요. 이것조차 싫으시면 굳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 그럼 황후가 공작에게 그렇게 말해 보는 게 좋겠군요. 내 말은 무시해도 그대 말은 들을지도 모르니.”

내 말도 안 듣는데……. 이본느는 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카를로이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기도 힘들고 듣고 있자니 묵혀 둔 감정이 살아났다. 그렇다고 대꾸를 열심히 하기엔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 애초에 별로 없었다.

그때와는 외양이 천지 차이로 바뀐 이본느와 달리 카를로이는 어린 모습 그대로 자라났다. 당연히 이본느가 더 괴로웠다. 카를로이는 저를 보고 리리안 루를 떠올리지 않을 테니.

“……먼저 일어나지요.”

냉랭한 얼굴로 카를로이가 일어났다. 이본느는 멍하니 앉아 홀로 음식을 먹었다. 예전처럼 잼 바른 빵 하나에 살살 꼬실 수 있는 남자아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카를로이의 옆에서, 카를로이를 계속 보아야 한다는 건 이본느에게는 전쟁과도 다름없는 일이었다.

애써 죽인 자아와의 싸움, 애써 잊은 기억과의 싸움, 애써 묻은 감정과의 싸움, 몇 겹의 싸움이 하루도 빠짐없이 일어났다. 그의 앞에서는 모든 것을 죽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분명 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믿었는데 실망은 했다. 공작에 대한 증오를 이해하니 그를 원망하지는 않겠다 생각했지만, 어쩔 땐 너무 미웠다.

카를로이가 자신을 보는 것도 싫어해 아예 찾지를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싼 값 치러서 기껏 황후로 들여보냈더니, 뭐야?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해?”

그리고 공작은 하루가 멀다 하고 황후궁을 드나들었다. 이러니 카를로이가 싫어하지, 제집처럼 드나드니까. 고새 또 시녀들이 미주알고주알 공작에게 보고를 올린 게 틀림없다.

공작은 공작대로, 카를로이는 카를로이대로 양쪽에서 이본느를 건드려 대자 신경이 점점 가늘어진다. 이대로라면 사람이 미쳐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황제가 너무 사람을 화나게 하길래 저도 모르게 한 말이에요.”

“좋다고 덤벼들 땐 언제고 인제 와서 그런 소리냐? 어릴 때 하던 짓거리의 반만 해도 이것보단 나을 거다.”

“공작님에 대한 반감이 너무 심해서 제 얼굴 보기도 싫어하는걸요. 공작님이 황제를 압박하는 걸 조금만 멈춰 주면…….”

“사내새끼처럼 하고 다닐 때도 잘만 홀린 주제에 헛소리는 그만해라.”

맨몸으로는 절대 통과할 수 없다는 마케아 산맥도 공작보다는 말이 통할 것이다.

“넌 지금 네 어미 약값도 못하고 있어.”

왜 드니스 얘기를 꺼내 들지 않나 했다. 4개월이면 공작치고 오래 참은 편이기는 했다.

“……노력할게요.”

“좀 더 노력해야 할 거다.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넌 네 어미가 관에 들어갈 때나 다시 보게 될 테니.”

“말도 안 돼요! 금방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랬잖아요!”

“이따위로 일을 만들어 놓고도 그딴 말이 나와!”

공작의 호통에 이본느는 습관처럼 움츠러들었다. 몸이 기억하는 공포였다. 대답 없는 이본느를 노려보던 공작이 다시 한번 으르렁거렸다.

“뭐라도 변화가 있어야 할 게다.”

이본느는 초조해졌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공작은 이본느가 발가벗기라도 하고 카를로이에게 덤비길 원하는 것 같았지만, 그게 아무 소용 없을 거라는 건 공작 빼고 전부가 아는 사실이었다.

“폐하, 오늘은 제 침실에서 주무시는 게 어떤가요.”

이게 이본느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었지만, 공작이 알면 가만두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카를로이에게 아양을 떨 수도 없었다.

“왜요, 그대 아버지가 독촉이라도 합니까?”

독촉뿐이겠냐고, 협박까지 하는 중이라고. 그러니까 제발 성질 좀 그만 부리고 한 번만 딱 눈 감고 침소에 와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네가 그러지 않으면 공작이 날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 혀에서 아슬아슬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황후궁의 시종들이 눈을 반짝이며 이본느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이 시종이지 모두 공작의 감시인들인.

이본느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뭘 하면 대체 침소에 한 번이라도 와 주겠느냐고 묻는 것. 카를로이는 그조차 거절했다.

그래서 황후가 된 후로 이본느는 드니스를 볼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카를로이가 단 한 번도 곁에 이본느를 허락한 적이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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