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황제는 황후를 싫어한다
이본느 델루아는 권세가 황제 위에 있다는 델루아 공작의 금지옥엽 외동딸이었다. 날 때부터 병약했던 딸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어린 시절 내내 공작이 직접 들고 다녔다는 소문도 있었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도록 엄청난 수의 시종들을 붙여 줬다는 소문도 있었다.
어쨌든 이본느 델루아는 델루아 공작이 너무나 아껴 밖 한번 내보내지 않고 곱게 키웠다는 금지옥엽 외동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크로이센의 황제 카를로이 크로이탄이 이본느 델루아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이유였다.
“이브…….”
“아버지, 괜찮아요. 염려 마세요.”
결혼식 날, 눈물을 흘리며 유난을 떠는 부녀를 뒤에서 보며 카를로이는 하품을 해 댔다. 가만히 보고 있기도 짜증 나는 꼴이었다. 제 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훔치는 공작의 모습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마치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 강요받은 사람들 같았다. 맹세하건대 이 결혼이 싫었던 건 그들이 아니라 카를로이 자신이었다.
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카를로이를 함정까지 파서 억지로 제 딸과 결혼시킨 건 바로 델루아 공작이었다. 근데 왜 저 둘이 눈물을 흘리고 난리인지 카를로이로선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폐하, 폐하께서 이 늙은이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제 딸은 아무것도 모르는 몸 약한 아이일 뿐입니다. 부디 잘 대해 주십시오.”
“그리 걱정된다면 다른 사람과 결혼시키면 될 게 아닌가?”
카를로이는 절대 델루아의 딸에게 잘해 줄 수가 없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 딸을 보내다니 어지간히 권력에 미친놈이었다.
비꼬는 카를로이를 보고 델루아 공작은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어찌하겠습니까. 제 딸아이는 제국 최고의 여인, 맞는 자리는 폐하의 옆 말고는 없는 것을요.”
제국에서 제일가는 공작가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황제는 부아가 치밀었다. 황실을 최고로 무시하는 주제에 꼴에 그 자리는 욕심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본느 델루아는 국혼 날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이 싸고돈다는 여식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된 모든 이들이 그 이유를 납득했다.
이본느 델루아는 저무는 햇빛을 받은 물처럼 옅게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백금발 머리칼과 물결처럼 일렁이는 듯한 옅은 초록색 눈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전체적으로 농도가 옅은 탓에 굉장히 연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름답지만 창백한 얼굴과 가는 팔다리, 여리디여린 몸이 공작이 왜 그렇게 유난을 떨며 키우는지 알게 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한 사람이었다.
또한 공작의 외동딸답게 무섭도록 공작을 빼다 박은 사람이었다. 이본느의 얼굴을 본 모든 귀족이, 황제파, 공작파 가릴 것 없이 이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을 짐작했다. 황제는 제 부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킬지도 몰랐다.
“이제야, 드디어 뵙는군요.”
황제는 공작에게서 이본느의 손을 받아 들며 이죽거렸다. 결혼이 결정되고 나서도 공작의 유난 때문에 얼굴 한번 볼 수가 없어 식장에서야 처음 보는 사이라는 걸 비꼬는 말투였다.
이본느는 대꾸 없이 녹색 눈으로 황제를 응시했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진득한 눈빛이었다. 흔들리지도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을 보고 있자 카를로이는 그만 소름이 돋고 불쾌해졌다.
델루아 공작을 그대로 빼다 박은 백금발과 녹안도 싫은데 당연스레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오만한 눈빛이 싫었다. 공작이 자신을 볼 때와 똑같지 않은가. 사랑의 말이라도 속삭일 거라고 생각하나?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공작가에서 공주 대접을 받으며 살았을 이 여자가 왜 황후가 되려 하는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제 자리 같겠지. 황실의 시종들도 전부 거부하고 자신의 가문에서 고용인 100명을 넘게 데려온 여자였다.
“네에.”
한참 뒤에야 이본느가 조용히 대답하자 카를로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타부타 인사도 뭣도 없이 그저 그 심드렁한 대답이 끝이었다. 카를로이는 제 손에 잡혀 있던 작은 손을 불쾌한 얼굴로 차갑게 놓았다. 이본느가 잠시 놀란 얼굴을 했지만 카를로이는 그저 손을 문지를 뿐이었다.
식이 끝날 때까지 카를로이는 이본느를 돌아보지 않았다. 심지어 키스도 하지 않고 식장에서 나가 버려 온 귀족들이 수군거리게 했다.
“이브……!”
상석에 앉아 있던 공작이 홀로 남겨진 이본느에게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무엄한 소리를 할 듯한 공작의 손을 이본느가 말리듯 잠시 잡았다.
“괜찮아요, 제가 잘 이야기할게요.”
딸의 말에 공작은 분노를 추스르는 듯했지만, 이본느의 그 말에 다른 귀족들은 잠시 아연해졌다. 대체 무엇을 얘기할 거란 말인가? 누가 봐도 황제를 잘 길들여 보겠다는 델루아스러운 발언이었다.
황제파 귀족들은 분개하며 제 아비를 똑 닮은 이본느 델루아의 그 오만방자한 태도를 카를로이에게 전했다.
“얘기해 보시오.”
그리하여 결혼식이 끝나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카를로이가 냉담한 얼굴로 침소에 찾아온 것이었다. 다짜고짜 들어오더니 내뱉는 말이 이야기해 보라는 소리였다.
“……예?”
긴 금빛 머리칼을 풀어 내리고 네글리제를 입고 있던 이본느는 침대 위에 앉아 당황한 얼굴로 카를로이를 올려다보았다.
“내게 잘 이야기해 보겠다고, 그렇게 말했다 들었습니다. 대체 뭘 이야기하겠다는 건지 말해 보세요.”
“아……. 폐하, 그것은 그저…….”
“그대는 내가 델루아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말을 끝맺지도 못하게 질문이 치고 들어왔다. 카를로이의 얼굴은 냉정하긴 했지만 차분했고 목소리 또한 그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미약한 분노가 느껴졌다.
이본느는 한참을 그대로 자신의 남편이 된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카를로이는 나름대로 참을성 있게 그 눈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알고 있습니다.”
잠시 뒤에야 대답이 이본느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알고 있다는 대답이 우스워서 카를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냉소를 흘렸다.
“알고 있다? 내가 델루아를 지독히도 증오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성을 받은 모든 이들을 이 제국에서 없애 버리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신혼부부가 첫날밤에 나누기는 다소 격한 대화였다. 보통의 신혼부부라면 다른 종류의 격한 대화가 오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본느는 딱히 개의치 않는 듯 평온히 대답했다.
“하실 수 있으세요?”
“뭐라?”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델루아를 없애실 수 있냐고 물었어요.”
약하게 생긴 외양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감정 하나 없이 건조했다. 사무적인 말투와 깔보는 듯한 질문에 카를로이는 기가 차서 웃었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이본느는 슬슬 분노가 차오르는 듯한 카를로이를 바라보다 무심하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실 수 없다면 저와 자식 하나 낳는 것쯤 나쁘지 않을 거예요. 그 정도면 아버지도 만족하실 테니까요.”
델루아를 어쩌지 못할 거면 그냥 닥치고 자신과의 결혼에 순응하라는 뜻이었다. 모욕감을 느낀 카를로이에게서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이본느는 딱히 신경 쓰지도 않는지 제 머리칼만 쓰다듬다가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도 폐하께 사랑을 바라고 이곳에 발 들일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자식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사이가 좋은 척하는 것도 괜찮겠죠. 폐하께 득이면 득이지 해는 아닐 거예요.”
카를로이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델루아의 딸과 결혼해 그 자식을 후계로 삼는다면 공작의 야욕도 멈출 것임을. 황제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그 미친 노인네가 어쩌면 제 손자가 황제가 되는 것으로도 만족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용납이 되지 않았다. 카를로이의 혈육 중 반을 델루아가 죽였다. 심지어 자신까지 죽이려고 든 사람이었다. 그 미친 인간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왕조가 망했으면 망했지, 그 노인네의 피가 흐르는 사람을 황위에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공작을 닮아 건방지기 짝이 없군.”
“폐하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도 황후를 위해서 한마디 하지. 여긴 당신이 살던 델루아 공작가가 아니야. 허튼짓하다 걸리면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갑작스러운 하대에서 그의 분노가 여실히 드러났다. 카를로이는 단어 하나하나를 씹듯 말을 끝내고 황후에게서 돌아섰다.
“폐하.”
이본느가 조용히 그를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저는 이제 크로이탄의 성을 받았습니다. 이젠 델루아가 아니에요.”
조금 전 카를로이의 델루아 성을 가진 자는 모조리 없애고 싶다는 말을 겨냥한 듯한 말이었다. 카를로이는 그저 코웃음만 쳤다.
“좋아, 정정하지요. 델루아의 피를 받은 자는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고.”
그 말을 들은 이본느는 더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래, 아무리 저라도 그 역겨운 공작의 피를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하겠냐 싶어 카를로이는 흘러나오려는 비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당신은 이 나라의 황후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게 끝일 거야.”
이것이 결혼식 첫날밤 카를로이가 마지막으로 이본느에게 남긴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 되었다.
* * *
황후는 결혼 직후부터 황실의 모든 일에서 배제되었다. 황제의 얼굴을 보기 힘든 것은 둘째치고 황실 업무 중 그 어떤 것도 주관할 수 없었으며, 황후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가문에서 데려온 100명 넘는 고용인들, 딱 그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궁전에서 자신의 사람들만 데리고 노는 것에 나름 재미를 붙였는지 황후는 밖으로 나돌지도 않았으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무심하게 제 일상을 이어 나갔다. 그런 황후의 태도를 사람들은 ‘잘 먹고 잘만 살더라’라고 간단하게 표현했다.
황후의 시녀들은 이본느 델루아가 박대받는 황후라는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지 열과 성을 다해 목을 빳빳이 들고 다녔다. 그들의 직업적 만족도가 지나치게 높아 보인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카를로이 크로이탄의 증오심을 더 맹렬히 부추겼다. 황제는 5초 이상 황후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싫어했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존재를 견뎌내야 하는 황실 행사에서 황제는 언제나 새 여자를 데려왔고, 황후를 무시했다.
“카를로이.”
카를로이가 데려온 여자가 속삭이는 소리가 이본느와 시종장에게까지 들려왔다. 시종장 고르텐이 충격으로 입을 막았다. 다름 아닌 황제의 이름을 부르다니!
그나마 애칭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애칭이라도 불렀다면 고르텐은 맹세코 이 일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크로이센에서는 평민조차도 애칭을 아무에게나 허락지 않았다. 오죽하면 크로이센에는 짝사랑하는 사람의 애칭을 몰래 100일간 되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고르텐은 그나마 황제가 선은 넘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지 고민하다 여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카를로이는 세상에 다시없을 부드러운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봤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나?”
“있으면 다 주시게요?”
황후 바로 옆에서 밀어를 속삭이는 황제와 여자들을 보고도 이본느 델루아는 딱히 반응이 없었다. 하품만 하지 않았지, 표정만으로는 이미 지겨움에 질식한 듯한 황후를 보며 사람들은 황제만 황후를 무시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늑대의 눈물을 한 번만 걸쳐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옆에서 여자가 천진난만하게 소리쳤다. 시종장 고르텐을 비롯한 주변 시종들이 모두 충격을 받고 숨을 들이켰지만, 황후는 미동 하나 없었다.
‘늑대의 눈물’은 대대로 황후에게 내려오는 황가의 목걸이였지만, 카를로이는 결혼식을 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본느에게 그것을 주지 않았다.
고르텐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여자를 노려보았지만, 카를로이는 그저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쓸 사람도 없는데 먼지만 쌓이느니 그대라도 쓰는 게 나을 거야!”
써야 할 사람을 버젓이 옆에 두고 할 소린 아니었다.
“폐하!”
듣다 못한 귀족 하나가 작게 그를 불렀지만 카를로이는 아름다운 얼굴을 갸웃거렸다.
“왜? 어차피 황후도 그런 건 원치 않을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카를로이는 마지막 질문을 할 때 고개를 살짝 틀어 황후를 쳐다보았다. 손 하나로 고상하게 턱을 짚고 있는 이본느의 고고한 얼굴은 변화가 없었고 시선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황후의 대답을 들으려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황후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가 거북해하는 침묵이 잠시간 흐른 후, 옆에 있던 시녀 하나가 민망한지 황후에게 속삭이자 이본느는 마치 꿈에서 깬 듯 눈을 깜빡거렸다.
“왜?”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질문하는 모습이 카를로이의 말은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은 태도였다. 애초에 카를로이의 존재를 자각하긴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카를로이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약한 실소를 흘리곤 데려온 여자와 함께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이어지는 시녀들의 질타에도 황후는 다시 턱을 괸 채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황제와 황후의 사이에는 개선이라든가 하는 것 따위는 기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황실 행사 이외에도 한두 달에 한 번 신하들의 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황제가 황후와 식사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중간의 사용인들만이 그 냉기에 죽어났다. 황제와 황후가 서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화 비슷한 것들이 오가면 언제나 파국에 가까운 결과를 불러왔다.
“공작과의 사적인 연락은 좀 자제하셨으면 좋겠는데.”
정무 회의에서 델루아 공작과 지긋지긋한 대치를 끝내고 온 카를로이가 식사를 하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본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황후답게 대답이 또 반 박자가 늦었다. 자기 앞에서 카를로이가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도 꼭 방금 깨달은 사람 같았다.
“네에.”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는 꼴이 제가 한 말이 뭔지는 알고 대답을 하는 것인지 영 의심스러웠다.
“황후궁으로 부르는 것도 좀 자제하세요.”
“네.”
“공적인 자리에서 그대 아버지가 항상…….”
“네.”
“……뭐가 넵니까? 내 말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제야 이본느는 고개를 들었다. 철옹성 같은 얼굴에 미세한 당혹스러움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실수를 한 것은 아는 모양이었다.
황후에게도 표정이라는 게 있단 걸 처음 알게 된 카를로이는 화가 나다가도 그냥 어이가 없어서 맥이 탁 풀렸다. 델루아 공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황후는 저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대 아버지가 부부간의 일로 날 공격하는 게 지겨워서 그럽니다. 내가 황후와 식사를 몇 번이나 하는지조차 공작에게 보고해야 합니까.”
“……그저 부녀간에 오가는 대화였어요.”
“감시겠지요.”
“하지만 비밀도 아니지 않나요. 푸르투 궁전의 모든 이들이 폐하께서 저를 싫어하신다는 것을 아는데.”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이본느의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원망의 기색은 없었다. 사실만을 말한다는 듯 담담한 어조였다. 그 사실에 대해 어떠한 유감도, 불만도 없다는 태도가 더 화를 일으켰다.
말의 내용도 이상했다. 카를로이만 이본느를 싫어하나? 이본느도 카를로이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정무 회의에서 바락바락 꼬투리를 잡던 델루아 공작이 떠올라 카를로이는 그만 없던 입맛마저 떨어져 버렸다. 그는 결국 이번에도 식사하다 말고 식기를 내팽개친 채 자리를 나가고 말았다. 뒤는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 * *
식사가 그렇게 자주 있지도 않았지만, 침묵만 흐르는 이런 식사에서 이본느가 먼저 말을 꺼낸 적도 있긴 했었다. 결혼식이 있고 난 뒤 4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폐하, 오늘은 제 침실에서 주무시는 게 어떤가요.”
마치 그냥 한번 물어본다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이본느가 물었다.
“왜 그래야 하지요, 황후?”
“한 번쯤은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두리뭉실하고 지루한 이유였다.
“왜요, 그대 아버지가 독촉이라도 합니까?”
황제가 황후를 대할 때 특유의 비아냥거리는 표정으로 물었다. 요사이 공작의 황후궁 출입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카를로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황후는 칼질을 하다 한참 뒤에야 답했다.
“……아버님께선 그저 자식 걱정을 하시는 것뿐이에요.”
“내가 그 걱정을 덜어 주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누구보다 황후가 가장 잘 알 텐데요.”
“폐하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뭐라고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전 진심이에요.”
황후의 얘기는 카를로이에게 마치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크게 다칠 것이다’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날 위해서 무엇이 좋은지는 내가 가장 잘 압니다.”
“……폐하.”
“멀쩡한 밥맛까지 떨어지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대도 그쯤 하세요.”
짜증 난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비꼬는 말투에 분위기가 더 가라앉았다. 싸늘한 분위기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녀와 시종들까지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이본느는 수긍하는 듯 잠시 조용히 식사를 계속했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제 궁에 오실 건가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너무 작아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제야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얼굴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평소 거만한 무표정이라 싫어했던 얼굴엔 미묘한 감정이 어려 있었는데 무엇인지 정확히 읽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눈은 그대로였다. 공작의 눈을 그대로 닮은 진득하고 불쾌한, 초록빛의 곧은 눈. 그 눈에서 카를로이는 어딘가 익숙함을 느꼈다. 불쾌한…… 익숙함이었다.
“……글쎄. 그곳에 황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 갈지도 모르지.”
식탁 위에 놓인 얼음도 카를로이의 목소리보다는 덜 차가울 터였다. 몇몇 시종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저, 하지만…….”
냉대에도 이본느는 포기하지 않고 또 입을 열었다. 매사 무관심하다는 얼굴로 있을 땐 언제고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를로이는 결국 짜증 섞인 손길로 테이블을 쳤다.
“그만 좀 하세요, 황후.”
그러고는 식사도 채 끝내지 않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 그 이후로 몇 번 없던 식사에서 이본느는 다시는 식사 중에 황제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카를로이 또한 이본느에게는 단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시간은 그렇게 지났다. 카를로이는 언제나 다른 여자들을 파티에 데려오고,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존재를 무시한 채로.
* * *
황제가 뜬금없이 황비라며 여자를 데려온 국혼 기념식 파티가 열린 후 일주일이 지났다. 황제와 황후는 점심을 함께하기로 되어 있었다.
점심 식사가 있을 예정이었던 황후궁 후원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싸늘함이 흘렀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싸늘함 이외의 경악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 떠올랐다는 것.
“괜찮을 거라 믿습니다, 황후. 황비가 이제 그대의 짐을 덜어 줄 터인데 식사라도 같이하면서 돈독히 지내면 좋겠지요.”
방긋 웃으며 말을 건네는 황제 옆에는 국혼 기념일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던 키아나 로덴이 서 있었다. 다만 키아나는 황제만큼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시녀들은 황후와의 식사 자리에까지 새 여자를 데려온 황제의 무도함에 경악해 눈을 내리까는 것도 잊어버렸다. 미리 알려 주지도 않고, 심지어 그 여자는 아직 황비도 아닌데! 짐을 덜어 준다니. 애초에 이본느에게 무슨 짐이라도 얹은 적이 있었던가?
이본느는 황후로서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땅히 황후의 일 중 하나여야 할 황비에 관련된 절차도 이본느가 주관하지 못하고 일반 대신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항상 철통같은 무표정을 유지하던 이본느도 이 상황만큼은 기가 막히는지 어이없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카를로이는 이상하게도 그 모습에서 미묘한 쾌감을 느꼈다. 표정도, 감정도 없어 아무리 봐도 사람 같지도 않더니 사람이 맞긴 한가, 싶었다. 이본느에게서 그런 반응이라도 끌어낸 것은 처음이었다.
“대답이 없군요, 황후. 윗사람이라면 황비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쯤 먼저 건네도 될 법한데. 그런 아량은 공작가에서 배우지 않나 봅니다. 하긴 델루아 공작을 생각하면 그딴 건 어림도 없겠지.”
황제가 어찌나 얄밉게 말하는지 시녀들은 황후가 이성을 잃고 황제에게 무엇이라도 던질까 싶어 전전긍긍한 마음으로 황후의 눈치를 연신 살폈다. 다행히도 이본느는 냉정하기로 유명한 사람답게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표정으로 황제를 보던 이본느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레이디 로덴은 아직 황비가 아닌걸요, 폐하.”
이본느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꽤 단호했다. 또한 전혀 죄송해 보이지도 않았다.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레이디를 황비로 맞으라 하셔서 급하게 절차를 처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없어진 법을 되살리는 것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본느가 이렇게까지 길게 말하는 것을 처음 들은 카를로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본느를 쳐다봤지만, 이본느는 가볍게 시선을 키아나에게로 돌렸다.
“레이디 로덴, 자네에게 사감이 있어 이러는 것은 아니니 이해하게. 아직 확실히 되지도 않은 일로 구설수가 생긴다면 폐하의 이름에 누가 될 수도 있어서 그런 것이니.”
여자에게 미쳐 절차도 무시하는 망나니라 역사에 쓰일지도 모른다, 이 말인 듯했다. 시종들이 놀라 카를로이의 표정을 살폈지만 카를로이는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약하게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이본느는 카를로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키아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귀한 후작가의 영애로서 황제 폐하와 나와 함께 식사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좋을 듯한데, 어떤가?”
키아나 로덴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부부 사이에 끼어 눈만 요리조리 돌리고 있던 큰 키의 레이디 키아나는 이본느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소곳하게 예를 취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황후 폐하. 인사가 늦었습니다. 로덴 후작의 장녀, 키아나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상황이 얼추 정리된 듯 보이자 시종들이 재빠르게 황비가 아닌 귀족 영애의 위치에 맞는 식기들과 장식으로 옆자리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황비에게 맞는 식기라는 것도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이윽고 문제의 인물 세 명이 각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부부의 팽팽한 분위기에 시종들은 습관처럼 황제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화나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카를로이는 어느새 그림과도 같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런. 미안합니다, 황후. 내가 처음 겪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너무 푹 빠져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지 뭡니까.”
카를로이가 다정히 키아나를 쳐다보자 키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어머, 폐하도 참…….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키아나에게서 들려왔다.
이본느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저 칼만 움직일 뿐이었는데 그 순간 접시가 까득거리는 소리가 난 것 같아 시녀들이 괜히 황후의 접시를 한번 살폈다.
“하지만 황후도 내 탓을 하지는 못할 거요. 그대가 황후가 될 적에 공작이 모든 절차를 무시하기에 황비도 그래도 될 줄 알았거든.”
카를로이는 키아나의 얼굴에서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며 말을 건넸다.
“왜 황후 그대도 정식 절차를 밟기 전부터 황후 대접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알 길이 없지요. 황후가 이해하세요.”
카를로이의 말투와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내용은 황후의 얼굴에 내던지는 모욕과 다를 바가 없었다.
순식간에 이본느는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아랫사람에게만 까다로운 사람이 되었다. 자신도 절차를 다 무시한 주제에 남에게만 강요한 꼴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남편인 황제에 의해서.
이본느의 손이 떨리는 듯도 했다.
“어쨌든 키아나가 그대의 일을 도맡아 해 줄 테니 잘해 주세요.”
“……제 일이란 게 있었기는 한가요.”
“아, 없었던가요. 관심이 없어서 그만.”
이본느가 고개를 들자 카를로이와 눈이 마주쳤다. 카를로이의 입매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은 무심했다.
부부의 대화는 점점 더 수습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식기가 서로 부딪치는 껄끄러운 소리만이 들렸다. 날카로운 소음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밝은 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머, 폐하! 황비 책봉 절차를 황후 폐하께 맡기는 것이 어떠세요?”
키아나 로덴이었다. 방글방글 웃는 밝은 얼굴은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카를로이조차 놀랐는지 대꾸하는 것도 잊고 키아나를 쳐다봤다. 키아나는 웃으며 제 손을 카를로이의 손 위에 올렸다.
“아이참, 폐하. 황후 폐하께서 똑똑하시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대신들보다 더 빨리 처리해 줄 것이 아니에요? 제가 빨리 정식으로 책봉 받으면 두 분 폐하께서도 편하고 좋으실 테고요.”
그런 소문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었다. 황후도 처음 듣는 소리인지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본느가 들고 있던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트린 것이었다.
시종들이 황급히 움직이는 사이로 카를로이가 이본느를 바라봤다. 이본느는 멍하니 한 곳만 보고 있었는데 그 눈길을 따라가자 키아나의 손과 포개진 제 손이 나왔다.
또 저 눈이었다. 진득하고, 알 수 없는. 카를로이는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입술을 살짝 씹었다. 지긋지긋한 기분이었다. 익숙할 리가 없는데 익숙한 기분, 자신이 뭔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듯한 말도 안 되는 기분.
그러니까,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극도로 혐오하는 공작의 딸이라지만, 카를로이는 그 자식까지 자신이 이토록 혐오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본느는……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공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폐하?”
키아나가 손에 힘을 주며 다시 물어 왔다.
“……그래. 그렇게 하세요, 황후. 편한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일이 없어서 꽤 속상한 모양이니 이거라도 하면 되겠지요.”
그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이본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버릇처럼 대답 없이 카를로이만 빤히 쳐다봤다.
항상 자신을 무시할 땐 언제고 왜 종종 저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다. 저럴 때마다 카를로이는 이본느가 더 싫어졌다. 카를로이는 지겹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이본느를 향해 대답을 독촉했다.
“그렇게 쳐다본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일이 없다고 투덜거리지나 말든가……. 최대한 빨리 부탁합니다, 황후.”
“……네.”
이본느가 들릴 듯 말 듯 답을 내놓자 키아나가 물색없이 밝은 소리로 대꾸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하는 소리에 괜히 시녀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점심은 이쯤 하면 된 것 같은데. 난 키아나와 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이만 일어나지요.”
얼마 들지도 않았는데 일어나는 카를로이를 키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카를로이가 원래도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버린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키아나 혼자 모르고 있었다.
카를로이가 눈치를 주자 키아나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이본느에게 예를 취했다.
황제와 레이디는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황후궁 후원을 빠져나갔다. 시녀들과 홀로 남겨진 이본느는 조용히 음식을 씹었다. 시녀장 메리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본느에게 다가왔다.
“폐하…….”
“괜찮네. 매번 있던 일 아닌가.”
매번 있는 일이어도 새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과 아닌 것은 천지 차이라 생각했지만 메리앤은 현명한 시녀장답게 입을 다물었다.
“일을 맡게 됐으니 준비해야겠지. 서두르게.”
“예, 폐하.”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하던 이본느가 갑자기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큰일 났어, 메리앤.”
“예……?”
“폐하 말씀대로 난 아버지를 등에 업고 경우 없이 들어온 황후라 이런 일은 어찌 처리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정말 큰일이야.”
메리앤이 어쩔 줄 모르고 황망한 얼굴로 서 있자 이본느는 홀로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전혀 농담 같지 않았다.
그날 황후는 모든 음식을 다 혼자 비우고 나서야 자리를 떠났다.
* * *
“자네, 아까 그건 대체 뭐였나?”
황궁 내에 임시로 마련된 키아나의 거처에 들어온 카를로이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키아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저요? 제가 뭘요?”
“아까 손 올리면서…….”
“설마 손 좀 올렸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폐하께서는 맘대로 손도 잡고 허리에 손도 올리고 그러시더니. 그런 건 적당히 하기로 했었잖아요.”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때 한 말을 이야기하는 거지. 갑자기 그 일은 뭐 하러 황후에게 맡기지? 이걸 빌미로 황후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거울을 보며 머리 장식을 뽑던 키아나가 거울 너머의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황후 폐하의 반응을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 폐하께서는요?”
카를로이를 쳐다보는 작은 얼굴에 힐난의 기색이 보였다.
“미리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 꼭 같이 가야 한다는 게 세상에, 황후 폐하와의 점심 자리였다니. 폐하께서 잔인한 부군이시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시네요.”
“자네야말로 황후에게 쓸데없이 예를 차리더군. 그러라고 황비로 들인 건 아닌데 말이야.”
“어머, 조심하세요. 아직 전 황비가 아니라잖아요.”
“……자네 굉장히 무엄하다는 거 알고는 있나?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고르텐에게 한 소리를 들었을 거야.”
카를로이의 말에 키아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가장 높으신 황제와 감히 계약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도가 지나친 무엄이죠. 여기서 하나둘 더 추가되어도 티도 나지 않을걸요.”
“그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공적 역할에서의 황후 견제야.”
“그런 것치고는 사적으로 너무 이용하시던걸요. 질투라도 나게 하시려는 건가요?”
카를로이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듣기만 해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질투는 서로 간에 감정이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할 말이었다. 이본느와 자신은 그런 것이 생길 그 어떤 여지도 없는 사이였다.
“착각하지 말게. 이 모든 일이 사랑에 미쳐 일어난 사사로운 일인 척해야 귀족들의 간섭을 그나마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니까.”
“저도 알아요.”
“그리고 그댄 황후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도 모르겠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사람이 질투는 무슨.”
“그거 말인데요.”
키아나가 갑자기 거울을 등지고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황후의 반응을 보니까 아예 감정이 없으신 분 같진 않던데요. 폐하께서는 황후를 폐하의 사람으로 만드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으셨나요? 아버지인 공작이 아니라 남편인 폐하를 선택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냉대만 할 것이 아니라…….”
카를로이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자 키아나가 냉큼 입을 다물었다.
“헛소리 좀 하지 말지. 황후가 그런 게 통할 사람으로 보이나? 돌도 그보다는 감정이 있을 거고, 차라리 길거리에 있는 돌멩이를 유혹하는 게 빠를 거야.”
“그렇지만 오늘은 손까지 떠시던데. 보는 제가 안타깝던걸요.”
“쓸데없는 감정 낭비. 안타까울 사람이 따로 있지.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거겠지, 무슨……. 공작가에서 공주처럼 떠받들어지던 처지에 오늘 같은 모욕을 어떻게 견디겠나.”
“그런가요.”
“황비를 맞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사람이야. 내가 죽어도 네, 하고 그러려니 하면서 칼로 고기를 썰겠지.”
불필요할 정도로 극단적인 말이었다. 자기야말로 궁에 처박아 둔 황후한텐 관심도 없으면서 왜 저렇게 격하대?
키아나는 황제나 황후나 감정적으로 어딘가가 좀 크게 잘못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처럼 멀쩡한 상식인이 괜히 위험한 사이에 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후작은 어떠하지?”
“아버지요? 지금쯤 뒤집혔을걸요. 기절 안 하셨으면 다행이에요. 폐하께서도 아시죠? 델루아 공작의 보복이 무서워서 그 누구도 딸을 황궁으로 들이려고 하지 않은 거요.”
“로덴 후작이면 귀족파 수장인데 그 정도 배짱도 없다니……. 자식보다도 배짱이 없군.”
카를로이가 혀를 찼다.
“아버지가 원래 간이 콩알만 하세요. 공작 편에 안 서고 폐하 편에 선 게 신기할 정도죠. 하지만 아버지 탓만 할 건 아니에요.”
키아나는 심약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감히 황실 적통까지 유괴했던 전적이 있는 공작 아니던가요. 황태자도 그렇게 투박한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사람이 고작 황비가 뭐 어렵겠어요. 아우, 무서워서 그런 사람 적이 어떻게 되나요.”
카를로이가 어린 황태자이던 시절 괴한에 의해 열흘 넘게 유괴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델루아 공작령에 속한 어느 숲으로. 심지어 괴한들은 카를로이를 죽이려고 했었다.
누가 봐도 배후는 분명해 보였지만 공작이 어찌 자신이 그러겠냐고 길길이 날뛰며 관련자들을 보고 없이 다 죽여 버리는 통에 증거 하나 남지 않았다.
“자네 아버지께 말했나? 그 사건 조사 다시 하라고.”
키아나를 황비로 들인 것은 공작파들의 눈을 피해 로덴 후작과 연락을 편히 하기 위해서도 있었다.
“이미 여러 번 했다면서요. 그 사건 목격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대요. 마을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놔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고. 지역 전체가 쑥대밭이니 증거도 남은 게 없죠.”
“그럼 뭔가를 찾을 때까지 다시 하라고 해.”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카를로이는 대답이 없었다.
“폐하?”
“……그런 건 없어. 공작이 그랬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것뿐이야.”
키아나는 황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누굴 애타게 찾는 얼굴인데. 하지만 키아나 로덴은 눈치가 빠른 상식인이었고, 필요 이상으로 이 일에 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네.”
태평하게 단답을 하는 키아나의 그 모습에서 카를로이는 괜히 이본느가 떠올랐다. 무슨 말을 해도 네, 뭘 해도 예, 단답 말고는 하지 않는 건방지고 짜증 나는 모습.
카를로이는 괜히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트렸다.
* * *
황후궁은 모처럼 바쁘게 돌아갔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황후에게 처음 생긴 일이 제 손으로 황비 책봉식을 준비하는 일이라니. 막상 당사자인 이본느가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는 통에 시녀들도 군말 없이 조용히 일만 했다.
하지만 이본느의 아버지인 델루아 공작은 전혀 평정을 찾지 못했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밥 먹듯이 황후궁을 드나들었다. 하루에 세 번은 드나들었다는 말이다.
그래도 아끼는 딸이라고 이본느를 보고 나올 때는 좀 안정을 찾은 얼굴이었지만, 다음 날이 되면 또 어김없이 노기 띤 얼굴로 황후궁에 들어가고는 했다.
“미친 노인네가 아주 제집처럼 황궁을 드나드는군.”
물론 이 모든 것은 카를로이에게 고스란히 보고가 되었다. 시종장이 화난 얼굴로 줄줄 전해 들은 사실을 읊어 댔다.
“하녀들 말로는 공작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랍니다. 아주 문밖에도 다 들릴 정도라고요. 귀한 너를 어찌 이리 대할 수 있느냐 어쩌고저쩌고…….”
“그만 고하게. 듣기만 해도 지겨우니.”
“하지만 공작이 궁을 드나들면서 일 진행이 눈에 띄게 느려진 것도 사실입니다, 폐하. 아무 차질이 없다면 이미 책봉식 날짜가 정해졌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공작만의 탓이겠나, 그게? 황후가 마음만 먹으면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일인데 늑장을 부리고 있겠지.”
카를로이의 얼굴에 떠오른 짙은 혐오감을 보고 시종장 고르텐이 입을 조용히 다물었다.
“황후에게 사람을 보내. 최대한 빨리 처리하라고 한 내 말을 잊지 말라고. 모처럼 일을 맡겼는데 이런 것도 못 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고도 전하고.”
“……적당히 유한 말로 바꿔 보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네, 고르텐. 내가 말한 대로 보내. 이러다 사람들이 질투라도 하는 거라 오해하면 본인만 우스워진다는 걸 알아야지.”
“황후 폐하도 사람입니다, 폐하. 그러다 정말 화라도 나서 공작에게 다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고르텐!”
카를로이의 노성이 집무실을 흔들었다. 고르텐이 깜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내 집무실에서까지 공작의 눈치를 보는 소리를 들어야겠나?”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나가 보게.”
고르텐이 집무실을 나가자 카를로이는 피로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델루아 공작은 지독한 망령이었다. 심지어 죽지도 않고 생생히 살아 있는, 끔찍한 망령.
<예, 제가 그랬습니다, 전하. 제가 전하의 숨통을 끊어 버리려고 했지요. 한데 그렇다고 전하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운 좋게 다시 얻은 목숨 간수나 잘하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어린 날에 공작이 제 어깨를 붙잡고 속삭이던 기억이 생생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조차 공작의 짓임을 알고도 묵인했다. 그런데 고작 어린아이였던 자신이 뭘 할 수 있었을까.
끔찍했던 납치 이후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독살 시도가 있었다.
대륙에서 독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식물에서 뽑아내는 것이었다. 다행히 크로이센은 대륙에서도 식물학과 식물 마법이 가장 발달한 나라였고, 온갖 독과 해독제를 꿰고 있는 크로이탄의 후손들은 그리 쉽게 독살당하지는 않았다. 독이라 해도 크로이탄의 손안이란 뜻이었다.
식물에서 나온 독이 아닌 것은 철저한 검식으로 걸러 냈다. 덕분에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생겼다. 딱히 고마워할 일은 아니지만.
한 번의 살해 시도를 넘기면, 다음 날 꼼짝없이 그 망령의 웃는 얼굴을 버젓이 황궁에서 보아야 했다. 정신을 놓지 않은 게 용했다. 잠시라도 힘을 풀면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은 날들이었다. 매번 그저 모든 것을 놓고 편해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런 카를로이가 미치지 않은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목숨값일지도 몰라서. 차마 정신을 놓고 포기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인간…….”
망령의 끝을 대체 언제쯤 볼 수 있을지 너무도 아득했다. 아득한 끝으로 떨어지지 않게 카를로이는 또다시 온몸에 힘을 주어야 했다.
* * *
일을 좀 빨리 진행하라는 황제의 전갈을 받은 황후는 다른 말 없이 명심하고 있다는 굉장히 짧은 답을 보내왔다. 이본느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대답과는 다르게 여전히 일은 지지부진이었다. 일을 맡긴 지 2주가 넘어도 아무런 진척이 없는 상황에 결국 화가 폭발한 카를로이가 황후궁에 직접 들이닥쳤다.
황후궁이라면 그 입구도 밟기 싫어하는 황제가 직접 침실까지 온 탓에 황후궁의 시녀들이 놀랐는지 부산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카를로이는 예민한 감각으로 부산스러움 사이에서 황후궁 전체에 감돌고 있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황후는?”
“아, 황후 폐하께선 침실에…….”
“들어가겠네.”
“폐하! 저…….”
입구를 지키던 시녀들이 황제를 막으려 들었다. 카를로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시종장 고르텐이 어딜 막느냐, 미쳤느냐며 시녀들에게 소리를 지르자 시녀들이 정신을 차리고 물러났다.
침실은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커튼도 모조리 다 친 모양인지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카를로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르텐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빠르게 불을 켰다. 불이 들어오자마자 고르텐이 숨을 들이켰다.
“헉! 폐하, 조심하십시오. 바닥이…….”
바닥을 산산조각이 난 유리들이 가득 덮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침실의 거울이란 거울이 모조리 깨져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카를로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침실 안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불 켜지 말랬지!”
황후의 침실이 아니었다면 카를로이는 절대 그 목소리가 이본느의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본느가 낼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 한 날카롭고, 예민한 목소리였다.
놀라서 발걸음을 멈춘 카를로이 앞으로 시녀장 메리앤이 다가왔다. 메리앤도 불을 켠 사람이 카를로이라 생각하지는 못했는지 그를 보자마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폐하……! 어떻게 기별도 없이…….”
“대체 무슨 일인가, 이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않나. 황후는 왜 저러지?”
메리앤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에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리앤! 불을 끄라니까!”
안에서 또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카를로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발을 옮겼다. 겁도 없이 유리를 막 밟아 대는 카를로이를 보고 메리앤과 고르텐이 깜짝 놀라 유리를 대충 치우며 뒤를 따랐다.
“황후, 이게 대체…….”
카를로이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휘장이 걷힌 침대 주위로 거울 조각들이 널려 있었고 바닥엔 술이 고여 있었다. 아까 던진 것이 술잔인 모양이었다.
침대 위에는 기대앉아 있는 작은 인영이 하나 있었다. 카를로이는 저도 모르게 그 인영에게 다가갔다.
“메리앤! 메리앤도 내 말을…….”
이본느가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췄다. 영혼 하나 담겨 있지 않은 눈이 앞에 선 카를로이를 발견하고는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둘 사이에는 당사자들도 감당하지 못할 침묵이 흘렀다.
카를로이는 천천히 이본느를 살폈다. 카를로이의 시선이 이본느의 헝클어진 머리와 파리한 얼굴을 지나 유리에 베인 건지 피가 흐르고 있는 하얀 손에 가 닿았다. 창백한 피부와 대비돼 흐르는 피가 더 끔찍하게 보였다.
카를로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제 손으로 이본느의 피 흐르는 손을 부여잡은 후였다. 이본느가 숨도 못 쉬고 눈을 크게 뜬 채로 카를로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를로이도 자신도 모르게 나간 손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둘의 손이 맞닿은 것은 결혼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카를로이는 자신 또한 숨 쉬는 것을 잊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체 스스로도 왜 이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피에 놀라서? 본능적으로?
깨진 유리처럼 위태롭던 침묵은 이본느가 차갑게 그 손을 내치듯 뿌리치면서 끝이 났다.
“……기별도 없이 왜 오셨어요.”
급작스레 남겨진 손이 허전했다. 아니, 허전한 걸 넘어서 카를로이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형용할 수 없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분노였다.
“마치 벌레라도 닿은 듯 구는군요. 나도 썩 좋진 않았는데.”
“……무슨 일이세요.”
“평소에도 이따위로 구는 겁니까? 남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 봅니다. 패악은 적당히 부리세요.”
이본느는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평소와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의 이본느라면 절대로 저렇게 대놓고 카를로이를 비웃지 않았을 터였다.
“황비 책봉식 때문에 왔습니다. 황후가 생각해도 그대 처사가 너무하지 않습니까. 날짜, 장소, 규모 그 어느 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이.”
1년 만에 황후궁에 처음으로 먼저 온 이유가 다른 것도 아니고 황비 책봉식이었다. 이본느 대신 메리앤이 원망 어린 얼굴로 고르텐을 쏘아보자 고르텐이 눈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 잘 몰라 일이 더딥니다.”
“부족한 건 아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공작이 아무리 간섭한다 한들 어차피 황후의 일, 그대가 감행하면 빠르게 처리될 일 아닙니까.”
“네.”
또! 또 단답이었다! ‘네’가 대체 뭐란 말인가. 무슨 의미야? 그렇다면 빠르게 처리될 일을 지금까진 자신이 느리게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어깨를 잡고 흔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말을 이었다.
“보기 좋지 않으니 심술은 적당히 부리고 해야 할 일이나 하세요.”
내내 눈을 내리깔고 있던 이본느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폐하나 적당히 하세요.”
이어지는 충격적인 대답에 뒤에 서 있던 고르텐과 메리앤이 경악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놀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카를로이는 대꾸할 말도 잊고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서 이본느를 쳐다봤다. 메리앤이 이본느를 보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이본느는 이미 이성의 끈이 끊긴 듯했다.
“패악요? 폐하께서는 저를 아버지를 등에 업고 무도한 패악, 철없는 심술이나 부리는 황후 취급 하시죠.”
이 험악한 상황에 혼자 무엇이 재밌는지 이본느가 약한 웃음을 흘렸다.
“우습지 않으세요? 권세가 그 누구도 무섭지 않은 정도인 공작의 외동딸이 부릴 패악이 고작 이 정도라 생각하시는 게요.”
“황후!”
“황비 책봉식을 아예 취소하거나, 레이디 로덴을 명분도 없이 쫓아내거나, 폐하의 말을 무시하고 황궁 내의 일을 모두 제가 다 처리하는 정도는 되어야 패악 아닌가요.”
이번엔 고르텐이 메리앤을 붙잡고 흔들었다. 좀 말려 봐요! 메리앤은 울상으로 고개만 저었다.
이본느는 그런 모습도 안중에 없다는 듯 카를로이를 똑바로 노려봤다. 이본느의 말이 격해질수록 카를로이는 반대로 차분해졌다.
“폐하께서는 이런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나요? 제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 궁에만 조용히 처박혀 사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수아비 황후로 이렇게 사는 게 폐하께 득이면 득이지, 실은 아닐 거란 생각요.”
술에 취하긴 한 모양인지 이본느의 말투가 조금 늘어졌다. 카를로이가 물었다.
“그래서 지금 그댄 나를 위해서 이러고 있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잘만 말하던 이본느는 카를로이의 그 질문에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새삼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하긴, 그렇게 마뜩잖아하는 카를로이를 위해 그러고 있진 않을 테니 그나마의 양심은 있나 보다.
카를로이는 이제는 피가 굳어 버린 듯한 이본느의 손을 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요, 황후는 확실히……. 확실히 공작처럼 무도하게 굴고 있지는 않지요. 그건 나도 압니다.”
당장에라도 황후를 어째라 저째라 고함을 칠 것 같았던 카를로이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고 있었다. 이본느도 놀랐는지 카를로이를 관찰하듯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황후는 뭔가 큰 착각을 하는 것 같군요. 당신은 그래, 권세가 황제보다도 더한 공작의 귀하디귀한 외동딸이라 마음만 먹으면 나를 무시할 수 있는데, 나를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이 말인데…….”
“……폐하.”
“그럴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게 선심이라. 그 마음은 고맙지만, 그대가 정말 나를 위한다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보다 더 많습니다. 진정 모릅니까?”
이본느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초록색 눈은 생기 없이 버석거리는 나뭇잎 같았다. 그리 대단한 위치면 원하는 패악이라도 맘대로 부리든가, 왜 혼자 저렇게 불행한 척, 청승맞은 척 구는지 꼴 보기가 싫었다. 대체 뭐가 불만이라고.
“모르겠다면 내가 알려 주지요. 그래도 꼴에 사랑하는 아버지라 공작을 직접 말릴 엄두는 나지 않는다면, 최소한 이 궁을 제 발로 나갈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내 눈에 보이지 않게 스스로 황후 자리를 그만둘 수는 있을 텐데요.”
이본느가 손에 힘을 주고 떠는 것이 보였지만, 카를로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게 단 하나 있다면 이것뿐입니다. 당신이 없어지는 것. 내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는 딱 그만큼 가차 없게 들렸다. 이본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카를로이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싸늘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황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겠지요.”
차갑게 말을 끝낸 카를로이가 이내 억지 미소마저 얼굴에서 지워 버렸다.
“그대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도움도 안 되는 그딴 선심 그만 쓰고 황비 책봉식이나 잘하세요.”
카를로이의 냉정한 말을 들은 이본느의 표정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마저도 꼴 보기가 싫었다. 이본느에게서 등을 돌린 카를로이가 날카롭게 고르텐을 불렀다.
“황후궁 사용인들을 모두 처벌해라!”
“하지만 폐하…….”
“황후 하나 제대로 모시지 못해 이 사달을 일으키는 이들이야. 이런 일 없도록 단단히 교육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자비하게 다시 유리를 밟으며 걸음을 옮기는 황제를 따라 메리앤이 총총거리며 걸었다. 메리앤이 황후궁 밖까지 따라 나와 계속해서 용서를 빌자 카를로이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저런 일이 자주 있나?”
“아, 아닙니다, 폐하! 절대 아닙니다!”
강하게 부인하는 메리앤의 모습을 보니 자주 있는 일임이 분명했다. 카를로이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역정을 냈다.
“시녀장 자넨 여기 나와 있지 말고 가서 황후 손이나 치료하지.”
“예?”
“지척에서 황후를 모신다는 자네가 해야 할 일 아닌가? 황후 손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나오다니 자네도 자격 미달이야.”
메리앤이 깜짝 놀라 예를 갖추곤 빠르게 다시 황후궁으로 들어갔다. 카를로이는 그 자리에 서서 몇 번 심호흡했다. 황후에게는 분노도 아까웠다. 황후 때문에 감정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도 싫었다.
“폐하…….”
고르텐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부르자 카를로이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얘기했으면 잘 처리하겠지. 천치가 아닌 이상에야.”
고르텐은 황제의 말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유리 조각들보다 훨씬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악마 공작의 딸이라도 그 말들에 찔리면 피는 흐르지 않아도, 꽤 아플 것이라고.
하지만 이내 이마저도 무엄한 생각인 것 같아 고르텐은 혼자 고개를 저었다. 공작에게 끔찍할 정도로 시달린 황제에게 이런 생각을 품는 건 아니 될 일이었다. 게다가 황후는 공작을 무섭도록 닮은 사람이니.
종종 거만해 보이는 것 말곤 성격은 닮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오늘 간도 크게 대꾸하는 것을 보니 또 닮았다 싶기도 했다. 충직한 시종장은 황제를 따라 발걸음을 바삐 놀렸다.
황제가 떠난 황후궁을 다시 고요한 정적이 감싸 안았다. 궁이 아니라 묘지에나 어울릴 법한 고요였다.
* * *
카를로이의 말은 결과적으로 맞았다. 그가 황후궁에 다녀간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척 앞으로 책봉식 날짜가 정해지더니 모든 일이 마치 구슬이 실에 꿰이듯 착착 완료됐다.
이쯤 되니 고르텐도 황후가 정말로 의도적으로 일을 늦추고 있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공작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공작마저도 더는 황후궁에 드나들지 않았다.
“말했지 않나. 황후가 마음만 먹으면 빨리 진행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카를로이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 보여서 고르텐은 맞장구도 치지 않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황후궁 방문 이후로 카를로이는 속이 답답했다. 불쑥불쑥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던 이본느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을 잡치기 일쑤였다.
도대체 왜 그러고 있는 거야? 그렇게까지 청승을 떨 이유가 대체 뭐가 있는 거야?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굴 이유가 뭐가 있냐고.
별의별 생각을 하며 황후궁에서 들어온 보고를 읽던 카를로이가 잠시 멈칫했다.
“고르텐. 책봉식 날짜, 이날이 확실한가?”
“거기 맞춰서 준비 중이라니까 맞겠죠.”
“……황후가 직접 고른 건가?”
“그럼 뭐 시녀장이 골랐겠습니까. 왜요, 무슨 날인데요?”
황비 책봉식으로 정해진 날은 델루아 공작 부인의 기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공작의 부인, 황후의 친모가 죽은 날.
카를로이도 딱히 이런 쓸데없는 정보까지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절대 그날을 잊을 수 없게 한 사건이 있을 뿐이었다.
카를로이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세무 조사 및 불법 수입품 소지 조사 등등 각종 핑계로 델루아 영지를 뒤집어 놓은 적이 있었다.
델루아 공작에게서 뺏어 온 병력을 이용해 처음 한 짓이 공작의 땅과 집을 쑤시며 조사하는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쓸 만한 것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다 자잘한 죄목뿐, 재산 몰수나 직위 박탈에 이를 만한 것은 없었기에.
그런데 그날이 하필 공작 부인의 기일이었다. 델루아 공작은 어떻게 자신에게 가장 슬픈 날 이런 시련을 주냐며 황궁에서 죽겠다며 며칠을 미친 짓을 해 댔다. 카를로이가 일부러 그날을 골라서 일을 진행했다고 믿다니, 대단한 자의식이었다.
델루아 공작의 유난에 카를로이는 그리 죽고 싶으면 말리진 않겠다고 처형장에서 쓰는 단두대를 칼날까지 새로 갈아 친히 공작에게 보내 주었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런 행동은 무도한 황제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둥, 패도의 길을 걷는 황제를 섬길 수 없다는 둥, 신실했던 공작 부인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둥, 충직한 신하의 명예를 헌신짝 버리듯 굴지 말라는 둥…….
아무튼 카를로이는 그날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공작이 이토록 기일에 유난이라면 그 딸도 그럴 법한데, 책봉식 날짜는 버젓이 공작 부인의 기일로 되어 있었다. 모친이 죽은 날에 파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일단 이대로 공표하게.”
설마 친모가 죽은 날을 까먹을 리도 없고, 알아서 하겠지 싶어 카를로이는 인을 찍었다.
카를로이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순한 양의 탈을 벗고 사사건건 공작을 잡으려 들 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살얼음판이었다. 황궁인지 포유류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야생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황비를 들이고 난 후, 델루아 공작의 살기에는 그 전과 비교되지 않는 흉흉함이 있었다. 당장에라도 카를로이를 독살한대도 놀랍지 않을 그런 살기였다.
그날은 며칠째 비가 무참히도 내리는 날이었고, 원래 정무 회의를 보던 궁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황비 책봉식에 관한 정무 회의는 비교적 뒤쪽에 있는 별궁에서 진행되었다. 안 그래도 비를 싫어하는 카를로이인데 정무궁까지 그렇게 되자 더욱더 기분이 저조해졌다.
기분이 저조한 것은 델루아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험악한 얼굴로 한마디도 없이 앉아 있는 공작의 눈치를 보던 다른 귀족들이 언성을 조금씩 높였다.
황비를 들이는 일부터 책봉식까지 이 모든 게 경우 없는 처사다……. 어떻게 그렇게 천박한 황비 제도를 되살릴 수 있느냐, 말이 되지 않는 처사다……. 귀족들을 무시하는 처사다…….
빗소리만큼 높아지는 언성에도 카를로이는 사랑에 미친 놈이라도 되는 양 나사 빠진 것처럼 웃기만 했다.
“공들도 키아나를 보지 않았나? 그리 아름다운 사람을 두고 내가 어떻게 이성을 차린단 말이야. 내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 보니, 자네들은 부인들과 다 정략결혼만 한 모양이지?”
대놓고 어디 모자란 인간처럼 구니 귀족들도 할 말이 없어졌다. 자고로 황제에게 네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너 지금 돌았냐고 물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전자는 충신 취급이라도 받겠지만, 후자는 바로 단두대행일 터였다.
귀족들은 친히 단두대를 선물하던 카를로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델루아야 단두대 선물을 거절할 수 있지만, 다른 귀족들은 그런 것 따위도 꼴에 황제의 선물이라고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정작 딸이 황비가 된 로덴 후작마저도 기세가 등등하긴커녕 아직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어안이 벙벙한 상태니 다른 이들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졸들이 제 할 일을 해내지 못하자 결국 델루아 공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여자를 들이는 일에 있어서 경우가 없으시면 나라가…….”
“무너지기라도 하나? 황비 하나 들여 무너질 나라면 차라리 무너지는 게 낫겠네.”
“……나라가 무너지지는 않아도 질서가 무너질 수는 있는 일입니다. 200년간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비롯될 소란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카를로이는 잠자코 미소만 띤 채 공작을 쳐다보기만 했다.
“게다가 폐하께서 황실의 일을 모두 레이디 로덴에게 맡기실 거란 소문이 수도 내에 파다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엄연히 계시는데……”
“공작, 공작, 공작.”
카를로이의 태평한 부름에 델루아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몸이 허약하다 하여 그대가 걱정이 많았지 않나? 날 귀찮게 한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황궁 치료사도 탐탁지 않다고 해서 개인 치료사까지 대동하고 입궁한 사람 아닌가?”
잠시 할 말을 잃은 델루아 공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특별히 이런 황후를 생각해 황실의 복잡한 일을 맡기지 않았는데. 대체 공작은 원하는 게 뭐지?”
“폐하, 제가 그 말을 한 것은…….”
“거짓말이었다는 건가?”
“아닙니다. 거짓말이라는 게 아니라.”
영문을 모르겠다는 카를로이의 얼굴은 진심으로 무고해 보였다. 공작이 그 얄미운 태도에 짜증이 나는지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지만, 카를로이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 이 맘을 다 아니까 황후도 지금껏 아무 불만이 없었겠지.”
“그렇지만 황후께서는 엄연히…….”
“그래요, 알아요, 알아. 공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지겹도록 말했지 않나. 황후가 마땅히 황후의 일을 해야 한다고.”
카를로이가 시큰둥한 얼굴로 귀족들의 말을 잘랐다.
“해서 나도 슬슬 황후에게 일을 맡기려 했는데 그 병약한 몸으로 쓰러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 말이네.”
황후를 위해서 한 짓이라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카를로이를 보고 속이 끓는지 공작이 제 입술만 깨물었다.
“그런데 딱 키아나가 황비로 들어오니 얼마나 잘된 일인가? 둘이 일을 나누어서 하면 될 테니 나도 마음 놓고 황후에게 황궁의 일을 맡길 수 있지.”
말이 나누어서지 교묘하게 황후는 배제할 것임이 뻔했다.
“그래서 황비 책봉식도 황후에게 맡기지 않았나. 황후가 굉장히 잘해 주더군. 진즉 공들의 말을 들어서 일을 맡길 걸 그랬지 뭔가.”
생색까지 내는 꼴이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카를로이는 황제였고, 대놓고 비난하기엔 뭔가를 확실히 잘못한 것도 없었다. 크로이센에서 법을 가장 잘 이용하는 사람은 카를로이였다.
귀족들은 불편한 얼굴로 눈길을 피했다. 하지만 델루아 공작은 명분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져 소리쳤다.
“황후 폐하께서 책봉식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대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책봉식 날이 제 부인의 기일로 정해진 것이 그럼 황후 폐하께서 하신 일이란 말입니까?”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황후에게 시킨 척, 사실은 내가 다 하고 있다, 그 말인가?”
“제 딸이 미쳤다고 그럼 자기가 직접! 제 친모의 기일로 날을 정한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또 이 늙은이에게 모욕을 주시려 친히 그날을 고르신 거지요!”
무서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황제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야 델루아 공작이 가끔 하는 짓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대거리한 것은 또 오랜만이었다.
서로의 눈치만 보는 싸늘한 침묵 사이로 사람들이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한참 뒤에야 카를로이가 입을 열었다.
“……공작. 미쳤나?”
미쳤니 어쨌니 운운하는 황제의 언사도 그리 고상하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황후를 사사로이 제 딸이라 칭하는 것부터 황제를 황후 뒤에서 수작 부리는 사람 취급하는 것까지, 여러모로 도가 지나친 것은 공작이었다.
한 5년 전쯤이었다면 이보다 한참 더 도를 지나쳐도 괜찮았겠지만 카를로이가 세를 넓히고 있는 지금 상황에선 선을 넘은 처사였다.
“공이 매사 스스로를 늙은이, 늙은이 이리 칭하더니, 결국 드디어 노망이 들어 버렸군.”
“노, 노망요? 폐하! 어찌!”
“내가 자네 부인의 기일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걸 대체 언제쯤 인정할 생각이지? 불쾌해서 더 있을 수가 없군.”
위압감 어린 분노를 온몸으로 뿜고 있던 카를로이가 자리를 박차고 회의장을 떠나는 것을 말리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미친 늙은이. 카를로이가 중얼거렸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버젓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공작이 죽인 사람의 피로 강을 덮어도 될 정도인데 그깟 자기 부인이 죽은 게 무슨 대수라고. 심지어 혼자 사고로 죽은 것 아닌가.
분노로 걸음이 빨라진 카를로이를 고르텐이 힘겹게 따라 걸었다.
카를로이가 멈추어 선 것은 비가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오고 있는 별궁의 입구에서였다. 고르텐이 눈짓을 하자 시종들이 커다란 우산을 들고 왔다.
“……폐하, 그때 잠시 머뭇거리셨던 건 공작 부인의 기일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빗소리 사이로 고르텐이 물었다. 카를로이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고르텐은 그것이 긍정임을 알았다.
“폐하께서도 알고 있는 기일을 어찌 황후께서……. 혹시 일부러 그러신 것은 아니겠지요?”
“일부러?”
“공작에게 폐하를 비난할 빌미를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합리적인 의심이었으나 카를로이는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할 것 같진 않은데, 라고 생각하던 카를로이가 스스로의 생각이 웃겨 웃음을 흘렸다. 이본느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난번에 황후궁에서 모진 말을 했으니 그것에 기분이 상해 이제라도 공작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신빙성 있는 가설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날을 고를 수가 있나.
멀리서 시종 하나가 와서 고르텐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폐하, 레이디 로덴께서 폐하를 뵙고 싶어 한다는데요? 긴히 말씀드릴 게 있답니다.”
“……이쪽의 실내 정원으로 오라 하게. 산책하는 것처럼 보이면 오다가다 귀족들 눈에 띄어도 별생각 없겠지.”
별궁의 실내 정원, 엔투라룸은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 천장이 유명한 곳으로 크로이탄 왕조의 황제들이 가장 사랑한 곳이었다. 정작 카를로이는 그곳에 관심이 없어 잘 드나들지 않았지만, 황제가 허락하는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 키아나가 오는 것은 꽤 상징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황제의 통로를 통해 실내 정원으로 향하던 카를로이가 갑자기 발걸음을 뚝 멈추는 바람에 고르텐을 비롯한 시종들이 어수선하게 걸음을 따라 멈췄다.
“폐하?”
카를로이가 뚫어져라 보는 곳은 실내 정원의 문 앞이었다. 각종 담쟁이 식물들로 장식된 화려한 문 앞에 이본느가 서 있었다. 비를 막아 주는 가리개 밖으로 손을 내민 채로. 하얀 손으로 무수한 빗방울이 떨어져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아무리 황후라도 허락받지 못한 이곳에 드나드는 걸 카를로이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고르텐은 괜히 제가 겁에 질려 카를로이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카를로이는 어딘가 멍하게 서 있었다.
“……비.”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모양새가 이상해 보였다. 비가 비지 그럼 뭐란 말인가. 하지만 카를로이는 뭐에 홀린 것처럼 심각해진 얼굴로 황후를 보고 있었다.
“폐하……?”
고르텐의 조심스러운 부름에 카를로이가 장막이 벗겨진 듯 표정이 바뀌었다. 저 스스로도 이러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비 때문에 이상한 게 보여서. 그런데 황후가 왜 여기 있지? 내 허락도 없이?”
“글쎄요…… 폐하께서도 거들떠도 보시지 않으니 요새는 잘 관리되지 않기도 하고 아무래도 시종들이 황후 폐하시니 그냥 문을 열어 준 듯한데요.”
카를로이의 표정이 굳자 고르텐은 속으로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잘됐군. 혼자 골머리 썩일 필요 없이 가서 물어보면 되겠어.”
“뭐를요?”
“일부러 책봉식 날짜를 그렇게 정했는지 말이야.”
카를로이가 앞서서 성큼성큼 나아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 것이 벌써 사흘째였다.
대륙을 창조했다는 늑대가 가장 사랑했다는 땅, 크로이센은 그 별칭답게 몹시 아름다운 나라였지만, 단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종잡을 수 없는 우기였다. 그런 크로이센에서도 이 정도로 심각한 폭우는 14년 전 이후로 처음이라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보수가 부실했던 궁들과 잘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건물들은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사흘째인 오늘은 그나마 비가 덜 세차게 내리는 날이라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정도는 되었으나, 그래도 빗줄기의 세기는 여전히 나뭇잎들을 떨어트릴 정도로 강했다.
이본느의 주위로 처참히 떨어져 있는, 푹 젖어 버린 나뭇잎들만 보아도 그랬다. 가림막 밖으로 조금이라도 나간다면 아마 몸에 걸친 비싼 장식들이 그런 나뭇잎 꼴들이 될 터였다.
“폐하!”
시녀장 메리앤과 시녀 몇몇이 먼저 카를로이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의 반응에 카를로이가 온 것을 알게 된 이본느가 깜짝 놀라 비 맞던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았다. 손에 고여 있던 물방울들은 드레스 주름을 따라 힘없이 아래로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카를로이는 그 손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분명 왼손이 저번에 다친 손이 분명한데 변변한 붕대도 없이 물기에 손을 내밀고 있다니,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건지, 조심성이 아예 없는 건지.
비가 무참히 내리는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고, 그곳에 서 있는 이본느는 마치 그 우중충함에 집어삼켜질 것처럼 힘없이 서 있었다. 그것이 카를로이는 못내 거슬렸다.
카를로이가 서 있던 바닥이 황후 일행이 서 있는 바닥보다 낮았던 탓에 황후를 비롯한 그 일행이 카를로이를 보자 모두 무릎을 숙여 낮게 자리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습관적으로 짜증스럽게 묻자 이본느가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그저 산책 중이었습니다.”
“이런 날씨에? 괴상한 취미가 있군요, 황후. 게다가 여긴 내 허락 없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인데, 알고는 있소?”
황후를 비롯한 그 일행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니 전혀 모르고 있었던 듯했다.
“아무도 알려 주지를 않아서…….”
“하긴, 황후를 위해 일하는 사람 중 황궁 사람이 없으니 누가 그걸 말해 주겠습니까.”
황궁 시종들을 거부하고 부득불 가문 사람들을 데려온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이본느는 익숙한 듯 무표정으로 돌아와 눈만 내리깔고 있었다. 낮게 숙이고 있는 허리와 무릎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변명할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이본느 대신 시녀장 메리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그것이…… 이곳의 시종들도 아무도 말리는 이들이 없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가. 아무도 묻지 않고 들여보내 줬다?”
“예, 그렇습니다. 알았다면 이렇게 함부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황후의 잘못은 절대 아니지. 고르텐.”
메리앤의 말을 차분히 듣던 카를로이가 부드럽게 시종장의 이름을 불렀다.
“실내 정원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을 다 다른 곳으로 보내게. 그리고 이곳은 좀 더 똑똑하고, 모시는 사람이 누군지 제대로 아는 이들로 채워야겠어.”
카를로이에게는 잔인한 말을 다정히 하는 불필요한 재주가 있었다.
나직한 목소리에 고르텐은 예상했다는 듯 군말 없이 명을 하달했고, 메리앤은 자신이 불러온 애꿎은 결과에 놀라 고개만 조아렸다.
“폐하.”
이본느가 조용히 카를로이를 불렀다.
“몰랐던 제 불찰입니다. 제가 다시는 엔투라룸에 드나들지 않을 테니 죄 없는 사람들한테 그렇게 벌을 주지는 마세요.”
“꼭 내가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아예 쫓아낸 것도 아니고. 황후가 여기 더는 오면 안 되는 것처럼, 나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마치 칼이라도 교환하는 듯한 날카로운 부부의 대화에 얇은 가림막을 가차 없이 때리는 빗소리가 더해져 긴장감을 더했다. 습기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이본느는 지친다는 듯 옅은 한숨을 쉬더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괜히 다시 입을 연 사람은 카를로이였다.
“……책봉식 날짜는 일부러 그렇게 정한 겁니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적당한 날 중 가장 빠른 날을 택한 것뿐이에요.”
“그날이 그대 친모의 기일 아닙니까.”
정작 말을 한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으나 이본느는 질문을 듣자마자 얼굴이 새하얘졌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쓰러질 것처럼 창백해지자 도리어 카를로이가 놀라 한 발짝 단을 올라갔다.
“황후?”
“아.”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은 겁니까?”
“아니, 아닙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허둥지둥 정신없이 말을 꺼내는 모습이 어색했다. 항상 무감정해 보이는 모습만 보다가 유독 요새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게 이상했다. 술에 취한 모습이라든가, 원망하는 모습, 또 이런 모습.
창백해서 넋이 나간 모습을 보고 카를로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친모의 기일을 잊은 게 이렇게까지 자책할 일인가. 보고 있자니 일부러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몰랐습니까? 공작은 내가 일부러 그날을 골랐다고 생각하던데.”
“아, 아닙니다. 정신이, 제가 없어서 그만. 제가…….”
카를로이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런 날을 어떻게 까먹을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나 저번 황후궁에서의 일 때문에 일부러 이러는 것이라면…….”
카를로이가 이본느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이런 짓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또 이러면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을 이곳에서 쫓아낼 테니까.”
“폐하.”
“당신 아버지를 쫓아낼 빌미가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허울뿐인 황후 자리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가만히 있으세요.”
그 말을 들은 이본느의 안색이 더욱 새파래졌지만, 카를로이는 동정심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공작을 닮아 연기도 잘한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황후의 안색이 아주 말이 아니군.”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카를로이가 말했다. 말투 때문에 안색이 좋든 안 좋든 제 알 바 아니라는 말처럼 들렸다.
“건강이 안 좋니, 어쩌니 매일 사람을 들볶으면서 쓸데없이 산책은 왜 하지? 황비 책봉식 일은 아무렇게나 대충 하면서 산책인지 뭔지 할 기력은 남아돕니까? 시녀장, 황후를 데리고 황후궁으로 들어가게.”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젓는 카를로이를 보고도 이본느는 소리 내서 대답하지도 못했다. 마치 상처받은 듯 서 있는 모습이 더욱 가증스러웠다.
이런 말에 상처받을 게 뭐가 있다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는 이본느 대신 메리앤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본느가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섰을 때 갑자기 위에서 무엇이 끊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카를로이가 소리에 놀라 위를 올려다보려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시야가 다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본느가 카를로이의 머리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잠시 빗소리마저 잊게 하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하고 놀라 황제와 황후를 보고 있었다.
“폐하?”
긴장감 어린 침묵을 가른 것은 막 도착한 키아나 로덴의 목소리였다. 약간 높은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이본느가 마치 꿈에서라도 깬 듯 화들짝 놀라 카를로이에게서 떨어졌다. 드레스를 잡고 이본느는 다시 무릎을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도 모르게 그만…….”
카를로이는 충격을 받았는지 대꾸도 못 하고 이본느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사람 다리만 한 커다란 나뭇가지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실내 정원 위를 덮고 있는 큰 가문비나무의 가지 하나가 비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본느는 처음에 나뭇가지가 가림막으로 떨어진 소리를 무엇이 무너지는 소리로 착각한 듯했다.
“……뭐였습니까?”
카를로이의 목소리가 쉰 것처럼 거칠게 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숨을 참은 사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무엇이 떨어지는 줄 알고 저도 모르게 그만.”
부부 사이로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오라고 해서 온 키아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용히 눈알만 도로록 굴리고 있었다. 이윽고 이본느가 고개를 살짝 들더니 말을 이었다.
“……폐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겁니다. 놀라서 그런 것이니.”
이본느의 뒤에서 시녀들이 탄식하는 소리가 키아나에게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분위기를 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었는데 굳이 저런 말을 하다니, 키아나도 혀를 찼다.
카를로이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에게서 약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없어하는 건지, 우습다고 생각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웃음이었다.
“어련할까요, 황후. 다음부터 그런 것 해 줄 필요 없습니다. 아무튼, 이만 가 보세요.”
이본느가 닿았던 곳을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양 거칠게 털어 내며 카를로이가 중얼거렸다. 질린다는 듯한 말투에 이본느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단을 내려왔다.
카를로이를 무심히 지나치는 이본느에게서 짙은 비 냄새와 꽃향기가 났다. 이곳에 꽤 오래 머무른 것 같았다.
이본느의 눈길이 잠시 키아나에게로 머무르자 키아나가 예를 갖췄다. 고개 숙이는 키아나를 보고서도 이본느의 시선은 키아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키아나는 내가 오라고 했습니다.”
카를로이가 다소 무뚝뚝하게 말을 던졌다. 이본느가 키아나를 쳐다보는 이유를 실내 정원은 그에게 허락받은 이들만 드나들 수 있다고 한 말 때문이라 생각한 듯했다.
이본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폐하.”
카를로이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곤 이본느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키아나는 이본느의 일행이 모두 보이지 않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키아나의 눈에 이본느가 떠난 쪽을 바라보는 카를로이가 보였다.
“폐하, 귀는 왜 붉어지셨어요?”
키아나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었다.
“황후가 겁도 없이 머리를 잡을 때 귀를 눌렀나 보지.”
카를로이가 당황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키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보자고 했지?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키아나가 실내 정원으로 들어가는 카를로이를 따라 종종 걸었다. 고르텐을 비롯한 시종들은 모두 실내 정원 밖에서 대기했다. 들어가자마자 진한 꽃 향이 풍겼다. 그것이 싫어 카를로이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조사하시다 무언가 이상한 걸 발견하셨대요.”
“그 사건에 대한?”
“제가 확신할 수 없는 문제 같아요. 폐하 유괴 사건이 일어난 그때 14년 전에 말이에요.”
절대 잊을 수 없는 시점이 언급되자 카를로이가 잠시 표정을 굳혔다.
“폐하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공작이 공작저 고용인들 전부와 공작령 고용인들 일부를 다 해고했다고 하더라고요.”
“……고용인을 왜?”
“말이 해고지, 지금 그들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200명에 가까웠던 사람 중에 단 하나도. 죽은 걸 수도 있고, 다른 곳으로 떠났을 수도 있고요.”
“공작이 죽인 걸 수도 있겠군.”
키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벌한 내용의 대화는 각양각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실내 정원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어떤 것 같으세요?”
“그 사건과 공작저 고용인들이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아니고서는 그렇게 증거 인멸하듯 모두를 없앨 필요가 없을 테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면, 증거가 될 만한 게 공작저에 있다는 소리도 될 테고요.”
카를로이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흰 백합이 아름답게 자리를 잡고 피어 있었다. 마법으로 억지로 피워 낸 꽃이라 그런지 유독 향이 강했다. 왠지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것 같아 카를로이가 빤히 백합을 쳐다봤다. 키아나가 옆에서 재채기했다.
“아우, 꽃가루. 아무튼 폐하, 제가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요.”
키아나는 손가락으로 빨개진 코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공작저는 그 사건 이후로 고용인들이 모두 바뀌었어요. 지금 고용인들은 그 일에 대해 알 길이 없죠.”
“그렇다면 예전 고용인들의 흔적을 찾는 데 집중하면 좋겠는데.”
“물론 그것도 해야겠지만, 언제까지 그 결과를 기다리겠어요. 만약 공작이 다 죽여 버렸다면 그 흔적 찾는 것도 불가능할 텐데 말이에요.”
“그럼 어쩌잔 거지?”
키아나가 물끄러미 흰 백합 무리를 내려다봤다.
“한 사람 있잖아요. 공작을 제외하고 그 저택에서 변하지 않은 한 사람. 그 모든 일을 지켜봤을 사람.”
카를로이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구겨졌지만, 키아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설사 그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해도 공작이나 공작저에 유일하게 접근 가능한 한 사람. 공작이 경계하지 않을 단 한 사람이,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폐하 곁에 있잖아요.”
“레이디 로덴, 마치 황후를 유혹해서 내 사람으로 만들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안 될 게 있나요?”
“내가 황후를 싫어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야. 황후도 날 싫어하니, 그건 불가능해.”
“그건 폐하께서 그렇게 대하니까 그렇죠. 그렇게 막 대하고 좋아하길 바라시나요?”
카를로이가 말없이 키아나를 쳐다보자 키아나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무엄함이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말을 멈추진 않았다. 키아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생각에 황후께선 폐하를 싫어하시진 않는 것 같아요. 식사 때도 느꼈지만, 아까도……. 저를 보는 표정도 그렇고. 직감이라 해도 좋아요.”
“퍽이나 고맙군. 나는 황후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드는 사람이야. 황후가 잘도 사랑에 눈이 멀어 나를 선택하겠어. 그토록 무감정한 사람이.”
“……제 아버지는 델루아 공작과는 다르게 나름 다정한 분이셨죠. 우유부단한 분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게 자유롭게 놔두신 편이었고요.”
뜬금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키아나를 보고 카를로이가 눈썹을 올렸다.
“그런데도 제가 어떻게 했는지를 보세요, 폐하.”
키아나의 얼굴은 사뭇 씁쓸해 보였다.
“제가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시키려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제 뜻대로, 제가 원하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단 이유 하나로 폐하와 계약했어요. 그게 아버지를 위험으로 밀어 넣는 일임을 알면서도요.”
“그래서?”
“저도 이런데 황후 폐하께서는 어떨까요? 바보가 아닌 이상 공작이 쓰레기라는 것쯤은 알겠죠.”
키아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한 카를로이가 피곤한 얼굴로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으니 그 이야긴 그만하지. 생각은 해 볼 테니.”
거짓말이었다. 미친 계획이었다. 이본느와 닿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무슨 유혹이고 무슨 사랑이란 말인가.
“감사합니다, 폐하. 제가 전할 얘기는 이게 끝이에요. 이제 나가 봐도 될까요? 꽃이 너무 많아서 있기가 힘드네요.”
카를로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아나가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고 인사를 올렸다. 빠르게 문을 향해 걸어가는 키아나를 카를로이가 다시 한번 불렀다. 키아나가 걷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네, 폐하?”
“그 제안이 황후에겐 잔인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나? 나보다도 더 잔인할 수 있다는 걸 말이야.”
키아나는 대답이 없었다.
“자네 말대로 하게 되면 황후는 사랑에 아버지를 팔아 죽음으로 몬 인간이 되겠지만, 그 사랑마저도 거짓이 되겠지. 내가 절대 황후를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키아나는 별 대답 없이 카를로이의 말을 들었다.
“그럼 황후에게 남는 건 가족, 사랑, 지위,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 아버지가 없다면 그녀는 황후조차 되지 못할 테니.”
카를로이의 말에 그제야 키아나가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쩔 수 없어요. 제게는 제 사랑이 더 중요하니까요.”
키아나는 공손히 다시 예를 갖췄다.
“사랑에 눈이 멀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게 없어져요, 폐하.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써먹기 참 좋은 상태 아닌가요. 제가 이렇게 자처해 폐하의 말이 되었듯 말이에요.”
그 말을 남기고 키아나가 실내 정원 엔투라룸을 떠났다. 카를로이는 강하게 풍겨 나오는 백합 향을 맡으며 그 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사랑에 눈이 먼다는 말을.
그는 누구보다도 그 뜻을 잘 알았다. 델루아 공작에게 왕조가 이토록 잡아먹힌 이유도 바로 그 미친 사랑 때문이었으니.
똑똑했던 카를로이의 조부는 사랑에 눈이 멀어 타국 공주의 사랑을 얻겠다고 모두의 반대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켰다. 오래도록 지속된 전쟁에 패했고, 왕권은 약해졌고, 델루아 공작은 실세가 되었다.
그 결과를 조부 대신 자신이 뼈저리게 기억하는 한, 자신의 목숨이 누구의 희생 덕분인지 기억하는 한, 카를로이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인간은 절대 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를로이는 알 수 없었다.
* * *
황비 책봉식 날이 성큼 다가왔다. 카를로이는 그동안 자신에게로 오는 식사 검식을 강화하고 해독제 요소를 이것저것 배합하는 시도를 했다. 어차피 독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이야 한정적일 것이었다.
델루아 공작이 풍기고 다니는 살기를 보았을 때 자신을 독살하려는 시도가 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짓을 한다고 모든 독살 시도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공작은 끔찍할 정도로 꾸준한 면이 있어서, 잊을 만하면 종종 카를로이 암살을 위해 최선을 다하곤 했다.
이본느와의 혼인 후에는 그래도 사위라 생각하는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본느를 멀리한 지 어느덧 1년, 더는 안심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그의 예상이 빗나갔는지 카를로이의 식사는 멀쩡했으며, 그를 노리는 자객 하나 없었다.
“하기야, 지금 폐하를 어떻게 한다고 델루아 공작에게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무모하게 굴 사람은 아니지요, 공작이.”
고르텐은 별걱정 말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
고르텐의 말에 카를로이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정적을 해치우는 데 있어서 나름 자신의 기준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빌어먹을 기준이 대체 무엇인지 몰라서 문제지.
“황후는 어쩌고 있지?”
“조용하십니다. 황비 책봉식 준비로 바쁘신 것 같던데요.”
“그 공작에 그 딸이니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
“황후라고 뭐 달리 폐하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와는 어차피 말 한마디 섞지 않고 가까이 있지도 않으니까 말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를로이가 그렇게 안심할 즈음에 키아나의 거처로 무언가를 밀고하는 비밀스러운 편지 하나가 전달되었다. 책봉식 이틀 전이었다.
“폐하보다는 제가 만만하다는 거군요. 하긴, 제 시중을 받드는 이 중 하나를 매수하는 건 공작에겐 일도 아니겠지요. 제가 독에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고.”
키아나가 편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편지에는 델루아 공작이 황비 책봉식에서 키아나를 독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카를로이도, 키아나도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델루아 공작이 충분히 할 만한 짓이었다. 공작의 행보를 생각해 본다면 이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답지 않았다.
그보다는 누군가가 이를 밀고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함정 아닌가 싶은데.”
“함정요?”
“이렇게 밀서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공작 측근 중에 우리에게 이런 걸 보낼 만한 사람이 대체 누가 있겠나.”
“그건 그래요. 그렇지만 이런 것으로 무슨 함정을 판단 말인가요?”
“글쎄……. 현장에서 증거를 잡아야 할 듯한데. 미리 안다고 조사를 할 수도 없어. 조사했다가 괜히 계획을 바꾸면 더 곤란해. 이게 사실인지 알 수도 없으니.”
해서 그들은 마치 스스로 미끼가 된 것처럼 숨을 죽이고 책봉식만을 기다렸다.
책봉식 당일, 책봉식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은 카를로이와 키아나뿐만은 아니었다. 황제파 귀족들은 눈을 벌겋게 뜨고 황후의 흠을 잡으려 들었다. 잡는다고 공작의 딸인 이본느를 어떻게 할 순 없겠지만 트집 정도는 잡고 싶었기에.
하지만 책봉식은 완벽했다. 절차도, 규모도 나무랄 것이 없었다. 오히려 황제가 흠을 잡힐 노릇이었다. 카를로이는 여전히 황후 이본느와는 춤을 추기는커녕 눈빛 한 번 교환하지 않았기에.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아.”
“아휴, 폐하도 참…….”
그 누구도 기꺼워하지 않는 황제와 황비의 연애 행각이 이어졌다.
키아나는 연회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했다. 여기저기 걸려 있는 화려한 장신구들이 카를로이의 애정을 과시하는 듯했다.
보란 듯이 키아나와만 말을 하고 춤을 추는 카를로이에게 이본느는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항상 그랬듯 숨도 쉬지 않는 사람처럼 가만히, 미동도 없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공작파 귀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한지 괜히 자신들의 가슴을 쳐 댔다. 사이를 좀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뭐라도 해 보면 좋으련만 황후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이 없는 듯 고고한 학처럼 앉아 있었다.
“폐하야 그렇다 치고, 황후께서도 너무 무뚝뚝하게 구시는 것 아닙니까? 이러려고 황후가 되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한 귀족이 겁도 없이 중얼거린 말에 델루아 공작이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말을 한 귀족은 아차 싶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카를로이와 키아나를 보는 공작의 시선이 흉흉했다. 하지만 딸인 이본느를 보는 시선도 그리 곱지는 않았다.
한량처럼 책봉식에서 춤을 추는 카를로이도 딱히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와 키아나는 해독제를 미리 마셔 두긴 했지만 그 밀고가 사실인지 아닐지 걱정하는 것도, 사실이라면 대체 언제, 어느 것으로 독살할지 걱정하는 것도 모두 마음 불편한 일이었다.
제 아비의 징그러운 속셈은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태평하게 앉아 있는 이본느를 보는 것도 짜증이 나고.
공작이 이런 대범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도 책봉식이 황후 담당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키아나 독살을 황후가 직접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 계획에 대해서 모르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책봉식 준비를 잘했군요. 황후 혼자서는 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이본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옆의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카를로이가 공식 행사에서 비난하거나 비꼬지 않는 말을 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처음이라 모르는 것도 많았을 텐데, 혼자 한 것 맞습니까?”
공작의 도움을 받은 건 아니냐는 뜻이 내포된 물음이었다. 순수한 칭찬이라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차가운 카를로이의 분위기에 이본느도 그 뜻을 알아챈 듯했다.
“네.”
무미건조한 답은 이거나 듣고 좀 떨어지라는 식으로 들렸다. 카를로이가 할 말을 잃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미약한 분노를 담아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말을 기억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본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허튼짓을 하나라도 하면 당신을 황후 자리에서 끌어내릴 거란 말 말입니다.”
카를로이의 옆모습은 언제나처럼 차가웠다. 굵은 선은 그를 더 날카롭게 보이게 만들었다. 아까까지 키아나를 쳐다보던 표정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무슨 허튼짓요?”
모르는 것처럼 되묻는 모습에 카를로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본느를 돌아봤다.
“키아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라면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는 겁니다. 책봉식은 황후의 일이었으니 무슨 일이 생긴다면 책임을 물을 겁니다.”
이본느가 대답 없이 카를로이만 쳐다보았기에 둘 사이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키아나는 내버려 두세요.”
카를로이가 한 번 더 강하게 말했다. 이본느는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게 질문입니까?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카를로이가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니까 꿈도 꾸지 말란 말입니다.”
“왜요? 말씀을 들으니 황비가 잘못된다면 오히려 폐하께 득일 것 같은데요. 그 책임을 물어 그렇게 싫어하시는 절 죽여 버릴 수도 있으실 테니까요.”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카를로이가 흉흉한 눈빛으로 이본느를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표정은 카를로이의 눈빛에도 변하지 않았다. 어딘가 억울해 보이기까지 해서 카를로이는 어이가 없었다.
“……어디 한번 해 보세요. 곱게 죽여주진 않을 테니.”
그 말을 듣고서야 이본느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는데, 그것이 더 짜증스러웠다. 먼저 개 같은 대답을 내놓은 게 누군데 저런 얼굴을 하는 건지. 카를로이는 지겹다는 듯 이본느의 옆자리를 벗어났다.
알 수 없는 긴장감 속에 책봉식 순서는 어느새 빠르게 진행되어 황제와 황후, 황비와 귀족들 앞으로 축배잔이 나란히 놓였다. 잔을 보는 순간 카를로이는 어떤 직감이 들었다.
“……크로이센의 영광을 위하여.”
물끄러미 잔을 보던 카를로이가 잔을 들어 외쳤다. 많지 않은 양이 그의 목으로 흘러 들어갔다. 카를로이가 천천히 잔을 내려놓는 동안에도 그의 몸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키아나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밀서에 쓰인 대로 자신이 오늘의 목표일 듯했다. 카를로이가 잔을 내려놓자 이본느가 잔을 들었다.
“크로이센의 영광을 위하여.”
진심 하나 없어 보이는 목소리로 말한 이본느가 머뭇거림 없이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영광이 아니라 멸망을 바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키아나가 떨리는 손으로 잔을 잡았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였다.
카를로이가 들고 다니는 해독제를 마셨으니 괜찮을 것이라 되뇌었지만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키아나는 카를로이처럼 독에 내성이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나 빨리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생기다니. 키아나가 불안한 한숨을 쉬었다.
이본느가 잔을 내려놓자 키아나가 자신의 앞에 놓인 축배잔을 높이 들었다. 키아나의 입술에 잔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황후 폐하!”
“꺄악!”
카를로이 옆에 앉아 있던 이본느가 피를 토했다. 순식간에 장내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공작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쳤고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키아나는 재빠르게 품속에 넣어 둔 은 막대를 꺼내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자신의 잔에 꽂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본느가 옆으로 쓰러져 카를로이의 어깨에 엎어졌다. 그의 어깨에 이본느의 피가 옅게 묻었다. 아직 의식은 있는지 이본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소음이 울려 귀가 터질 것 같았다. 카를로이는 덜덜 떨리는 한 손으로 옅게 헐떡거리는 이본느를 부여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품속에 넣어 둔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여는 손이 너무 떨려 병을 떨칠까 봐 무서울 지경이었다.
카를로이는 힘겹게 이본느의 입으로 해독제를 흘려 넣었다. 해독제가 몇 방울 들어감과 동시에 이본느가 의식을 잃고 카를로이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카를로이는 다시 품 안에서 항상 들고 다니던 은 막대를 꺼내 들었다. 은 막대가 이본느의 잔으로 들어가 남은 술에 적셔졌을 때, 그는 빠른 속도로 새까매진 막대를 볼 수가 있었다.
“……황후가.”
목소리가 나오지가 않아 카를로이가 목을 가다듬었다.
“황후가 독에 당했다! 황궁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해라!”
카를로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자 병사들이 순식간에 연회장 출입구를 둘러싸고 경호 대장이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맥을 짚었다.
살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 * *
황후가 독에 당하고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소름 끼치도록 아무 흔적이 없었다. 관여되었을 만한 사람들은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는 상태로,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다. 심지어 황후의 시종들도 아니었다.
카를로이는 이것을 보고 더더욱 확신했다. 분명 공작의 짓이었다. 황궁에서조차 이토록 철두철미할 수 있는 사람은 공작 말고는 없었다. 카를로이가 익숙하도록 겪어 온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대체 누가 황후 폐하를 독살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책봉식은 황후께서 맡으신 일인데……. 뭐, 누가 그런 짓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니, 그럼 독은 저절로 잔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솔직히 황후께 해를 끼칠 사람은 뻔하지요.”
“뭐요?”
누가 봐도 황비를 의심하는 말에 로덴 후작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카를로이는 한숨을 쉬며 회의를 파했다.
조사는 더딘데 귀족들은 공작파와 황제파가 갈려서 내내 서로를 공격했다.
공작이 이렇듯 빠르게 태세를 바꿔 로덴 후작 쪽에서 황후를 독살한 게 틀림없다고 주장했지만 증거가 단 한 가지도 나오지 못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승자박이었다.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그 누구도 얻은 것이 없이 끝났다.
그렇다고 공작이 일부러 제 딸을 독살하려 들었을 리는 없었다. 그날 보았던 공작의 반응이 그랬다. 충격으로 당황한 얼굴은 누가 봐도 예상치 못한 상황을 겪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공작이 실수를 했다, 아니면 누군가가 잔을 바꿔치기했다. 하지만 공작이 실수할 리는 없었고 잔을 바꿔치기할 사람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극히 소량만 마신 데다가, 폐하께서 해독제를 바로 마시게 하셔서 다행입니다. 상태가 위중하지 않아 며칠 내로 의식을 찾으실 듯합니다.>
황후궁에 상주하는 이본느의 전담 치료사가 한 말을 떠올리며 카를로이는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는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이본느의 파리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 피가 흘렀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혈색 하나 없었다. 굳게 닫힌 눈은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사흘째였다. 카를로이는 스스로도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왜 그렇게 급하게 해독제를 먹였는지도 알 수 없다. 항상 그녀가 없어지길 바라지 않았나?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다면 이본느는 이미 죽었을 텐데.
의식 없는 황후를 앞에 두고 카를로이는 스스로를 이해시키기 위한 변명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그래, 그건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눈앞에 사람이 죽어 가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할 행동. 이본느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회귀하는 새들처럼 계속, 사흘 내내 이본느의 침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이본느가 피 토하는 모습이 생생히 떠올라 한숨도 편히 잘 수 없었다. 자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잘게 떨리던 작은 몸을 기억했다.
오죽하면 황궁 사람들 사이에 황제가 드디어 황후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 같다는 헛소문이 돌고 있었다. 헛소문, 헛소문, 헛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의심이 거슬릴 뿐이었다. 이 일을 미리 알고 잔을 바꿔치기하는 것까지 가능한 사람은 이본느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잔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마시다니. 역시 말도 안 되는 추측인데.
“미친 걸까.”
카를로이가 저도 모르게 이본느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이본느 때문이었다. 숨결이 그의 손에 닿았다. 살아 있긴 한 모양이었다. 손이 볼에 닿자 차디찬 살결이 느껴졌다. 너무 차서 문득 소름이 돋았다.
한참을 그렇게 넋을 빼고 있던 카를로이가 손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이본느의 속눈썹이 약하게 떨리더니 이본느가 눈을 떴다. 카를로이는 손을 떼지도 못하고 멈춰 버렸다. 이본느가 눈을 아주 천천히 두어 번 깜빡였다. 헛것을 보는 듯 혼란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토록 싫어했던 초록색 눈이 바로 앞에 있었다.
“……칼?”
이본느가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뭐……?”
카를로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선황제가 죽은 뒤로는 처음 듣는 자신의 애칭에 돌처럼 굳어 버린 카를로이가 대답도 못 하고 이본느를 내려다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카를로이를 보던 이본느의 눈이 마치 꿈꾸는 사람처럼 다시 천천히 감겼다.
이본느가 다시 잠에 빠져들고도 카를로이는 한참 동안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녀가 들어와서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부른 뒤에야 카를로이는 부자연스럽게나마 다시 앉을 수 있었다.
황후가 정말로 미친 것이 분명했다. 부르라고 허하지도 않은 제 애칭을 함부로 불러 대다니, 미쳐 버린 게 틀림없다는 생각만 계속 맴돌았다.
아니면 황후에게 칼이라는 다른 남자가 있었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추측이 들 정도로 도무지 카를로이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애칭을 부르는 느낌이 익숙해 그리운 사람이 떠올랐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까지 미쳐 가는 듯했다. 어느 것도 비슷하지도 않은데 대체 왜?
“하.”
카를로이가 길게 숨을 내쉬며 떨리는 두 손을 부여잡았다. 그때였다. 문득 이본느의 말이 떠오른 것은.
<폐하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 궁에만 조용히 처박혀 사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수아비 황후로 이렇게 사는 게 폐하께 득이면 득이지, 실은 아닐 거란 생각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카를로이가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자신을 바라보다 가끔 진득해지는 이본느의 눈빛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던 이본느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가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묻는 이본느의 억울해 보이던 표정. 카를로이의 답을 듣고 변하던 얼굴. 키아나 대신 독을 당하고 쓰러진 이본느.
답답한 숨을 가르고 어떤 생각이 그를 비집고 들어왔다. 설마, 하는 생각과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제 생각에 황후께선 폐하를 싫어하시진 않는 것 같아요.>
키아나의 말이 그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하지만 여전히, 말도 되지 않았다. 이본느에겐 전혀,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만에 하나라도 정말 이 생각이 맞다면?
카를로이가 혼자 온갖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이본느가 다시 눈을 떴다.
“……폐하, 왜 이곳에.”
형편없이 쉬어 버린 목소리에 카를로이가 놀라 이본느를 쳐다봤다. 아까 잠시 깬 것은 기억도 못 하는지 가라앉은 눈으로 이본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뜨고 처음 본 것이 카를로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이본느는 계속 카를로이를 훑어봤다. 마치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카를로이는 입을 열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본느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감을 잡았는지 긴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카를로이를 보는 얼굴엔 여전히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목을 몇 번이고 가다듬고 나서야 카를로이는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독에 당해 쓰러진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황후.”
“조금 어지러운 것 말곤, 괜찮아요.”
말이 느리긴 했지만 독에 당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 모습이 카를로이의 의심을, 아니 추측을 더 부추겼다. 독에 당했으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 모습이 이상했다.
“공작의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까?”
“……무슨.”
“내가 키아나를 내버려 두라고 할 때 무슨 말인지 아는 것처럼 굴었잖습니까.”
이본느가 잠시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보고 카를로이는 다시 물었다.
“혹시 독이 든 잔을 미리 알고 바꾼 겁니까? 공작의 계획을 밀고한 것도…… 황후입니까? 그런 일을 미리 알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말고는 없는데…….”
이본느가 천천히 눈을 다시 떴다. 굉장히 불친절하고 노골적인 질문에도 이본느는 놀라지도 않고 카를로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요, 폐하. 제가 미치지 않은 이상에 스스로 독을 들이켤 리가요.”
평소처럼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카를로이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본느 델루아는 미쳐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정신이 아니라서, 스스로 독을 마신 게 분명하다는. 하다못해 범인이 누구냐고도 묻지 않는다.
말없이 자신을 보기만 하는 카를로이가 부담스러운지 이본느가 고개를 돌렸다. 그것마저도 의심스러웠다.
“……아까 황후가 잠결에 칼이라고 중얼거리던데.”
이본느의 얼굴이 잠깐 굳은 것을 카를로이는 놓치지 않았다. 이본느가 성급하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답했다.
“폐하께서 잘못 들으신 거예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본느의 이상한 태도는 오히려 카를로이의 미친 추측에 힘을 실어 주었다.
자신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이상한 추측에 기묘한 확신이 들면 들수록 카를로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작의 계획을 밀고하고 대신 독을 마시고 이렇게 거짓말을 할 이유. 카를로이의 머리로는 한 가지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에 눈이 멀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게 없어져요.>
키아나의 목소리가 카를로이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랑에 미쳐 나라를 팔아먹은 조부의 모습도.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써먹기 참 좋은 상태 아닌가요.>
이성적인 판단이 끝나기도 전에 카를로이는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카를로이가 침대 위에 놓인 이본느의 차디찬 손을 잡았다. 생경한 모습에 이본느가 놀란 눈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카를로이를 쳐다봤다.
둘 사이의 침묵에는 이상한 긴장감이 흘렀다.
“……걱정, 했습니다.”
카를로이의 말에 이본느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카를로이는 이본느의 손을 잡은 제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카를로이 손의 온기가 이본느의 손에 옮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지 않은 그 촉감 때문일까, 카를로이의 심장이 불쾌하게 쿵쾅거렸다.
처음 느껴 보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심장이 버거울 정도로 뛰고, 어딘가 몸이 뜨겁고 감당하기가 힘든 기분.
카를로이는 그게 승리를 예감한 이가 느끼는 설렘일 거라 생각했다. 드디어 델루아를 죽여 버릴 패가 들어왔다는 설렘.
카를로이 크로이탄은 누군가를 사랑은 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 대신, 그 덕분에 그는 사랑을 이용하는 사람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