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5 눈보다 아름다운(상) =========================================================================
어제 내린 비를 맞아 떨어진 꽃잎들이 뜰 위에 즐비했다. 점심시간 전, 아드리아나는 카네시스의 딸과 함께 뜰을 훑고 다녔다. 향기주머니를 만들기 위해 말려 쓸 꽃송이를 모으는 중이었다. 기왕이면 남편에게 줄 것도 챙기려고, 벌써 바구니 한 가득을 담았다.
집을 떠나와서 루미아 가에 머문 지 나흘째였다. 발렌틴과 떨어져 지내느라 그간의 컨디션이 썩 좋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늘은 기분이 꽤 괜찮았다. 슈하스의 학교에서 장학생을 뽑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카네시스에게서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이가 마티아스 일을 다 해결하셨을까.’
아침에 발렌틴과 통화할 때에는 특별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는 아드리아나에게 안부를 묻고 금방 데리러 오겠노라고 말했다. 언제나와 같았다. 애초에 늦어도 수일 내로는 데리러 온다는 약속이었다.
‘보고 싶어. 잠깐 나를 만나러 오시는 일도 위험할까? 나쁜 사람들이 그이를 감시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한데.’
최근에 벌어졌던 일들을 떠올리면, 발렌틴이 아직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걱정으로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그이가 장담하셨으니까.’
아드리아나는 자기 배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말을 걸었다.
‘아빠는 아주 아주 강한 분이시란다. 금방 우리를 데리러 오실 거야.’
그때 대문이 열리고 집안의 하녀가 돌아왔다. 그녀는 한 손에 빵이 든 봉투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카드 봉투를 한 장 들고 있었다.
“부인께 온 거예요.”
하녀가 카드를 내밀었다.
아드리아나는 의아해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작은 규격 카드였다. 겉봉투의 수신인란에는 ‘웨버 부인’이라고 적혀 있었고 발신인란은 비어 있었다. 그리고 안에는 만년필로 날려 쓴 짧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름다운 부인께.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지켜봐온 남자입니다. 어젯밤에는 당신에게 유혹당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나와 만나주지 않겠습니까? 실은 지금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어요.」
아드리아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채 다 읽기도 전에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내용 말미에 적힌 ‘V로부터’ 라는 이니셜이 아니었어도, 그 필체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웨버 부인? 괜찮으세요?”
하녀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슬쩍 내밀었다. 카드를 하녀에게 전해준 사람은 아마 이 날림 글씨를 쓴 장본인이리라.
“나 좀 나갔다 올게요.”
망측스러운 내용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드리아나는 카드를 황급히 봉투에 집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대문 밖으로 나가서 밖을 두리번거렸다. 텅 빈 길 앞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담장 앞에 자동차가 서 있었고, 대문 옆의 벽에다 등을 붙이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씩 웃었다.
“이리 와, 오드리.”
그가 조그맣게 말했다.
아드리아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 담겼다. 그를 힘껏 끌어안아주고 싶었지만, 척척 다가서서 몸을 바짝 밀어붙이며 고개를 한껏 치켜든 채로 말했다.
“당신이 유부녀인 저를 지켜보신다는 그분인가요? 감옥에 가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그러자 발렌틴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몸을 밀착한 상태로 가까이서 내려다보는 그의 눈길에, 아드리아나는 심장이 마구 달음질치는 것을 느꼈다. 턱 앞에 닿을 듯한 그의 가슴을 더듬고 싶어져서, 뒷짐을 진 손이 근질근질했다.
“지켜보기만 해도 감옥에 가야 한단 말이오? 어찌 그런 냉정한 말씀을 하시는지.”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허리를 팔로 감으며 말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그의 손이 닿은 곳을 통해 울림을 전달했다. 아드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꿀꺽 넘긴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냉정한 여자예요. 저를 지켜봐도 되는 건 사랑하는 남편밖에....”
다음 말은 그대로 목 안으로 삼켜졌다.
어느새 숨결이 섞일 만큼 허리를 숙인 발렌틴이 입술을 벌려 자신의 입술을 삼키는 것을 보며, 아드리아나는 눈을 꼭 감았다. 가슴에 뭉근한 열기가 번져들었다. 그는 짧고 부드러운 애무 후에 바로 팔을 놓아주었다. 아드리아나는 아쉬워하며 눈을 떴다.
“남편 얼굴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여보?”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침에도 안부 전화를 하며 들었던 목소리였지만, 수화기 너머로 듣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생함이 가슴속을 뿌듯하게 채웠다.
아드리아나는 웃기만 하다가 팔을 뻗어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 편지 내용은 대체 뭐예요?”
“그냥 아까 당신을 훔쳐보니까 그렇게 쓰고 싶어져서.”
발렌틴이 뻔뻔하게 말하고는, 갑자기 한 팔로 아드리아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는 성큼성큼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슨 꿈을 꾸셨는데요, 여보? 농담이시죠?우리 어디 가요?”
“호텔에. 꿈 내용은 이런 곳에서 말하기는 좀 그렇군.”
발렌틴은 하인들과 강아지는 루미아 가에 그대로 남겨둔 채로, 아드리아나와 함께 차에 올랐다. 펜은 따로 지시를 듣지 않고 즉시 목적지로 향했다.
리무진은 정말로 이시스 앞에서 멈췄다. 집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다.
“여기 볼 일 있으세요?”
“오늘 여기서 잘 거야, 여보.”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앞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그리고 좀 더 조심스러워진 투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집을 좀 어질러놨어. 내일이면 다 치워져 있을 거야.”
아드리아나가 작게 숨을 삼켰다. 멍하니 작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잠시 심문하듯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발렌틴은 무사해 보였다.
“...좋아요.”
호텔 안에서 찬찬히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드리아나는 그의 팔을 끌어안고 몸을 기대었다.
*
창문으로 선선한 저녁 바람이 들어왔다. 바다를 스치고 지나온 공기가 이마와 목덜미에까지 송글송글 맺혀 있던 땀을 닦아주었다. 열이 식은 피부가 서로 맞닿으면 그 감촉이 더욱 따스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배가 차가워질까 봐, 아드리아나는 벌써 잠옷 한 장을 걸치고 있었다.
“금방 가을이 올 것 같아요.”
발렌틴의 단단하고 부드러운 가슴에 뺨을 비비며 아드리아나가 말했다. 아까부터 만지고 싶었던 그의 가슴을 실컷 어루만지다가 한복판의 부드러운 체모를 쓸어내리며 수줍게 웃었다.
“이 덕분에 보온이 더 잘 되시나요?”
“별로야. 그러려면 훨씬 수북해야 할 것 같소. 당신 머리카락 정도로.”
발렌틴이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 위에다 입술을 눌렀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품 안에서 키득대고 있다가, 아까 차에서 하던 이야기를 물었다.
“...조만간 마티아스와 필립 공작이 기소될 거요. 케이드 왕자가 그 일을 맡으시기로 했어.”
아드리아나는 가만히 그에게 몸을 기대고, 고개만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마티아스 일로 꽤 오랫동안을 긴장하고 지내온 기분이었지만, 막상 해결이 되었다는 이야기에 커다란 감흥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저 남편을 되찾은 것이 꿈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무사히 지나가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손을 꼭 잡고 입을 맞췄다. 완전히 안심하게 되려면, 이 일을 잊으려면 그래도 얼마만큼의 시간은 지나야 할 터였다.
여름은 다 지나고 있다.
짙푸르게 저물어가는 하늘 뒤로 새 계절이 기다려졌다.
가을이 오면. 그리고 그 다음 계절까지 지나면....
나른해진 눈꺼풀을 깜박이는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쓰다듬던 발렌틴이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참, 그리고 할 말이 하나 더 있소, 여보. 우리 말인데....”
***
신문에 기사가 실린 것은 그해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스콰이어 공작의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마티아스는 먼저 재판을 받고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공작은 부상에서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걸려 늦어졌다. 만일 공작의 살인죄가 유죄로 확정되면 최소 무기징역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았고, 공작위와 영주 직위는 왕실로 회수될 터였다. 그 경우 차기 영주로서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은 케이드 왕자였는데, 현재 결혼을 앞두고 성에 머물고 있는 그가 유랑생활을 접고 당분간 영지를 직접 맡아 관리할 거라는 전망이 돌았다.
“영지 이름이 바뀌겠네요. 참... 스콰이어라고 하면 우리 같은 일반인들한테는 그저 고고하고 품위 있는, 멋진 이름이었는데 말이에요.”
“환상의 왕국이 또 하나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존속시킬 수야 없죠. 셋이나 되는 며느리들을 다 해친데다, 밝혀진 게 그뿐이지 암살조까지 떡하니 두고서 어디 그 사람들만 해쳤겠어요? 뒤에서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지금까지 존경받으며 살았으니 그분도 여한은 없으실 거예요.”
“전 그분이 우리 선량한 이웃에게까지 손을 대려 했다는 게 정말 무섭네요. 남의 아내를 뺏으려던 것도 모자라서 무고한 일가를 몰살시키려고 하다니요? 치가 떨려요.”
살롱 안의 여자들이 흥분해서 떠들다가, 문득 아드리아나를 보고 조심하며 말했다.
“우리 웨버 부인께서는 얼마나 무서우셨겠느냐고요. 아기까지 가지신 몸으로 그 일을 감내하셨을 걸 생각하면 제 마음도 찢어진답니다. 하지만 이제 부인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큼 제 가슴을 찢어놓는 사실도 없을 거예요.”
부인들은 무척 서운해 하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사는 거리가 멀어져도 계속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기에는 친분이 깊어지지 못한, 뒤늦게 친해진 부인들이 더욱 그랬다.
“그래도 우리가 이해해야지요. 그런 무서운 일을 겪고는, 저 같아도 여기서 못 살 거예요.”
아드리아나는 난처한 듯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머리를 꾸미느라 거울 앞에 반듯하게 앉아 있어야 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못 보다니요, 여러분. 전 여기에 일도 있고, 자주 올 거예요. 집도 그대로 있는 걸요. 여러분도 기회가 되면 꼭 투스미아에 놀러 와주세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부인들은 반드시 그렇게 하겠노라고 다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에 치장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먼저 준비를 마친 발렌틴이 프란체와 어슬렁대며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너슨 가는 아너슨 가대로 소니아의 본가에 가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여보.”
아드리아나가 부르자, 발렌틴이 와서 부축해주었다. 배가 많이 나와서 걷는 모습이 불안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정작 아드리아나 자신은 큰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 않았지만.
“우리 어서 웬디를 데리러 가요.”
“응. 천천히 타요.”
웬디는 전시회에 출품했던 그림으로 올해의 신인상을 받았다.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탔을 때보다 더 얼떨떨해하고 기뻐했다. 학생 전시회에서 수상자가 나온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라고, 학교에서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웬디의 어머니는 시상식을 참관하러 오지 않았지만, 축하 편지를 보내주었다.
덕분에 웬디는 열다섯이 되면 장학금으로 킹스턴에 입학하기로 했다. 원래 테스카 학교를 졸업하면 한동안 아드리아나와 발렌틴이 데리고 지내면서 공부를 시킬 셈이었지만, 당장이라도 입학 허가를 내줄 수 있다는 대학들이 줄지었다.
시상식이 끝났을 때, 웬디가 쭈뼛쭈뼛 부끄러워하며 오더니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오드리, 웨버 경. 그동안 저를 돌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선물은 웬디가 미리 받은 상금으로 산 브로치와 넥타이핀이었다.
아드리아나는 그 자리에서 입을 삐죽이며 눈물을 쏟고 말았다. 웬디가 혼자 힘들게 보냈을 시간, 둘이서 의지하며 지낸 시간이 머릿속을 스쳤다. 웬디와 발렌틴 두 사람이 앞뒤에서 울보라고 놀리며 안아주었지만 좀처럼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우리 자주 올 거야. 테스카에 오면 웬디한테는 꼭 들를게. 방학 때 괜찮으면 투스미아에 와. 마당도 더 넓고 흰둥이들도 아주 많아.”
아드리아나가 웬디를 안아주며 말했다. 웬디는 가서 흰둥이들을 데리고 놀아주겠다고 약속하며 히히 웃었다.
그토록 바랐던 대로, 그리움과 약속을 남겨두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도망치는 것도, 완전히 떠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넨과 투스미아 양쪽에 아드리아나의 집이 생긴 것뿐이다. 앞으로도 테스카의 회사, 슈하스 학교, 리노아스 영지 등, 부부는 직접 찾아가서 관리하지 않고도 그 일들이 어느 정도 굴러갈 수 있을 때까지는, 수시로 양쪽을 오가며 생활하게 될 터였다.
투스미아로 떠나기 전날, 아드리아나는 성에도 인사를 하러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흠을 잡히지 않은, 얼마 되지 않는 테스카의 사랑받는 인사들 중 하나가 자리를 오래 비우게 된 것에 다들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시기하는 자도 없지는 않았다.
“왜들 유난 떠는지 모르겠군. 인간이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할 수 있다고. 결혼한 지 1년 밖에 안 된 부부에게 문제가 많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뒤로 감추고 있는 더러움이 드러나면 그들도 다 똑같을 거야.”
아드리아나는 그저 슬프고 안타깝게 생각했다.
자신이 다 알 리 없는 세상일에 대해 멋대로 떠드는 사람도 많다. 더러움만을 보아오고 질렸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도 세상이 무섭고 어둡기만 한 곳이라고 두려워 숨었던 때가 있었다.
인간은 다 비슷하지만 또 다 다르다. 나이를 먹을수록 대개는 성숙해져가는 한편으로 때가 묻는다. 아름답게 내렸던 흰 눈이 땅 위에 머물며 시커멓게 더럽혀지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오염에 물들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리가 있어 움직일 수 있고, 방패를 들 수 있다. 성숙해지지 않는 사람도 있고, 때가 거의 묻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한결같은 마음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남고자 간절하게 바란다면.
“...거긴 벌써 눈 많이 쌓였겠죠?”
아드리아나가 차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럴 거야. 꽁꽁 싸매고 나가야지.”
발렌틴이 차 안에 챙겨둔 두툼한 털옷을 확인하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당신은 우리 결혼생활에 충실하셨나요? 당신이 몇 점짜리 남편이라고 생각하세요?”
“음....”
발렌틴이 심각한 얼굴로 ‘어렵군’하고 중얼거렸다.
“결혼한 지 겨우 1년인데 잘난 척 하기는 좀 쑥스럽소. 몇 년 후쯤에 다시 물어봐주지 않겠어?”
“잘난 척 하시려고요?”
“응. 난 무서운 부인밖에 모르고 말 잘듣고 있으니까.”
“똑같이 몇십 년 더 하셔야 해요.”
“그럴게. 할 수만 있다면 더 긴 시간이라도 하고 싶소.”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그의 손에 입을 맞췄다.
“우리가 신혼은 신혼인가 봐요, 여보.”
아드리아나의 말에, 그도 염치는 있는지 작게 웃었다.
로아타르에 가까워지며 쌓인 눈의 높이가 더 높아졌다. 얼지도 녹지도 않고 보슬보슬 쌓인 그대로여서 길이 많이 미끄럽지는 않았다.
처음 눈을 봤을 때에는, 순결하고 눈부신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연약해서 슬픈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짧은 시간을 아름답게 존재할 뿐, 쉽게 녹아 사라져버리고 쉽게 더럽혀져 버리는 그런 존재라고. 추운 그늘 밑, 사람의 발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겨우 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애달픈 존재라고.
하지만 지금 눈앞에는 대지를 온통 덮어내린 눈뿐이었다. 애달프지도 않고 연약하지도 않았다. 낑낑대며 밟고 지나가면 움푹 패인 자국에는 잠시 그늘이 드리워졌다가, 또다시 새로운 눈으로 덮여 감쪽같아질 터였다. 북국의 강건함 그 자체처럼 보였다.
“당신 눈사람 같다. 뒷모습을 그려서 보여주고 싶어.”
발렌틴이 약간 뒤에서 걸으며 말했다. 그는 아드리아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씩씩하게 걷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그럼 그려주세요. 아마 당신 뒷모습이랑 똑같을 걸요?”
“앞모습은 다를 거야. 당신은 배도 동그랗잖소.”
발렌틴이 앞질러서 오더니 어깨를 안았다. 흘겨보는 아드리아나를 보고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자상하게 말했다.
“괜찮아, 여보? 힘들지.”
“겨우 이 정도는 괜찮아요. 너무 안 움직여도 안 좋아요.”
아드리아나는 대문에서 현관까지의 거리라도 밟아 보고 싶다고 차에서 내려 걷는 중이었다. 털옷으로 무장했고 얼굴도 눈만 내놓고 가렸다.
“그럼 천천히 걸어요, 여보.”
발렌틴이 손을 잡아주며 걸음을 늦추게 했다. 그는 아드리아나의 발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걸음이 느린 주인들 때문에, 로빈은 앞으로 뛰어갔다 기다리기를 반복하며 몸이 달아 보였다.
“괜찮아요. 제가 씩씩해야 우리가 씩씩한 아들을 낳....”
여유만만하게 큰소리치며 걷던 아드리아나의 표정이 별안간 굳었다. 발걸음도 우뚝 멈추었다.
“윽....”
아드리아나가 한 손으로 배를 끌어안으며 신음했다.
“아, 아파....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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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화 퇴고하면 매우 줄어들 듯...
추천 코멘 평점 쿠폰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헤헿. 겸연쩍.
(소장본, 이북 문의는 블로그에 남겨주셔야 답변 드리기가 쉬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