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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32화 (132/140)

00132 조용한 반격(발렌틴) =========================================================================

과연 어느 쪽일지 알 수가 없었다. 죽으라는 말을 잘 전해듣고도 뻔뻔하게 검을 차고 와서 웃는 것인지, 애당초 전언을 듣지 못한 것인지. 하지만 지금까지 발렌틴이 마티아스를 지켜보고 조사한 바, 그에게서 어떤 괴상한 반응을 보게 된들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벌써 스콰이어로 떠나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부인?”

마티아스가 아드리아나를 보며 말했다.

흔히 하듯 성씨를 생략하고 부른 것뿐이었지만, 그가 그렇게 부를 때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다분하게 느껴지는 듯해 뱃속이 울컥했다. 그러나 발렌틴은 가만히 마티아스를 응시한 채로, 그가 떠드는 것을 잠시 더 들어주었다.

“우리 부인께서 지난날에는 가슴 아픈 사고로 얼마나 무섭고 힘드셨습니까? 이번에는 내가 직접 모실 것이니 안전을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티아스 남작님.”

아드리아나가 그의 말을 길게 듣기도 싫다는 듯 불쑥 입을 열었다.

“만약 제가 어떤 오해를 심어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우리는 각자의 가정을 가졌고 현재에 충실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난날에 오갔던 혼담은 사고 이후로 양가 간의 합의로써 무효가 되었다고 압니다.”

“당사자의 수긍 없는 파혼이라니 부당합니다. 내가 알았더라면 우리 인연이 이렇게 꼬이는 걸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을 겁니다.”

순간 아드리아나가 눈썹을 움찔했다. 그리고 약간 상기되며 말했다.

“저는 남작님과 정식으로 약혼을 한 적도 없어요. 그러니 파혼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연유로 남작님께서 두 가정을 파괴하고 억지 인연을 수복하시겠다는 건지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아드리아나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해, 발렌틴이 그녀의 작게 움츠린 등에 손을 살짝 댔다. 그러자 아드리아나가 조그맣게 숨을 내쉬며 어깨를 폈다.

“....부인.”

마티아스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부인의 그 순종적인 심성에는 깊이 탄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인연은 질질 끌 게 아니라 바로잡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두 분이 언제 결혼하셨는지 들었습니다. 가문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혼자 위기에 놓여있던 상태에서야 어떤 사내에게 취해져 처녀로 남지 못하게 되었다 한들 부인을 탓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얄궂은 운명에마저 순종하며 지금의 삶을 충실하게 이어가시는 그 모습이, 난 애틋하기까지 합니다.”

마티아스는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비심과 관대함을 지닌 남자라는 듯 미소 지었다.

잠자코 허리에 손을 짚은 채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발렌틴이 미간을 좁혔다. 오해와 모순과 오만으로 이루어진 그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도 황당한 듯 굳어 서 있었다. 마티아스 본인만이 태연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잘못 끼워진 운명에 굴복하여 인생을 불행하게 방치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일러드리고 싶습니다. 현대 아이넨의 법률도 여성이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며 운명을 바꿀 기회를 제한하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문득 발렌틴이 지루함을 느끼고 바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워낙 잘 만든 물건이고 소중하게 관리하고 있어서 고장 났을 리도 없건만, 믿기 어렵게도 바늘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마티아스가 발렌틴을 흘긋 보며 말했다.

“아주 값비싸고 훌륭한 시계를 갖고 계시는군요. 경제적인 능력을 충분하게 갖춘 분이시니, 귀하께 맞는 훌륭한 아내도 금방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말에, 발렌틴도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제가 산 게 아니라 아내가 준 물건입니다. 결혼 전부터 저를 어찌나 위해주었는지, 이런 것까지 직접 주문해서 선물해 주더군요.”

낯뜨겁다 싶을 정도로 속보이는 유치한 발언이었지만, 발렌틴은 마티아스에게 이 정도밖에 말해줄 수 없음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자신들이 서로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또한 육체로도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구구절절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저는 남편에게 끌려온 게 아니라 존경하여 결혼하였습니다, 남작님.”

아드리아나가 조금 부끄러워하며 다시 말했다.

“제 스스로 원해서 웨버 부인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고, 저희 가정을 잘 지키겠노라 저 자신과 신 앞에 맹세하였습니다. 제가 이 이름을 버리는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치 않은 제안을 하시는 것은 이제 그만 거두어 주세요.”

“아니, 그때는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선택의 폭도 넓지 않았을 것이고, 나를 만나기 전이 아닙니까?”

마티아스가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나는 웨버 경이 주지 못하는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부인께서 모르는, 부인께서 누려야 할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드릴 겁니다. 두려워 말고 나를 믿으세요. 지금의 남편의 구속으로부터도, 그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부인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마티아스는 뭔가 대단한 망상을 하는 듯, 마치 숙녀에게 맹세하는 기사 같은 말을 했다.

발렌틴이 전날 부추겨 놓기는 하였으나, 다급함이 역력한 오기가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마티아스는 여자의 남편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데도 부끄러움도 없이 매달리며 본인이 진정한 사랑을 줄 남자라는 말을 술술 떠들었다. 테스카 성에서 만났을 때에만 해도 이렇게 판단력을 상실한 남자가 아니었다. 이날까지 살아오며 이 정도의 압박감도 느껴본 일이 없었는지, 뭔가에 쫓기는 듯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정말 장담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뱃속의 아이도 스콰이어의 이름을 가진 내 자식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할 겁니다.”

마지막 말을, 마티아스는 가장 위엄있게 말했다.

참지 못하고, 제시카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드리아나는 화가 난 얼굴로 볼이 빨개져서 언성을 높였다.

“이 아이는 저와 남편의 아이입니다. 남작님께서는 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제 입장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 평생 그럴 일이 없을 것입니다. 드려야 할 말씀은 이것으로 다 전하였으니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몸을 돌리려 한 순간이었다.

“부인, 나는 아직-.”

마티아스가 거의 반사적으로 아드리아나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발렌틴이 마티아스의 허리로 손을 뻗었다.

마티아스가 아드리아나의 손목을 놓치자, 제시카가 민첩하게 아드리아나를 감싸며 물러섰다. 마티아스가 차고 있던 검집 안에서는, 날카로운 강철 날이 햇빛을 반사하며 몸체를 드러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솟구치며 검집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발렌틴은 칼날 끝이 검집에 걸린 순간 각도를 바꾸며 휘둘렀다.

“크읏!”

마티아스가 한 발 뒷걸음질 치며, 황급히 팔을 가슴 앞으로 당겼다.

여기저기서 쇠 갈리는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마티아스의 경호를 맡고 온 사내들이 일사분란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발렌틴과 아드리아나의 경호원들도 검을 뽑고 대치했다.

긴장된 순간, 작게 웃음소리가 울렸다.

“하하...핫....”

마티아스가 실성한 듯 웃어댔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쫙 배어나오고 있었고, 그의 가슴 앞에 거머쥔 오른손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붉은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려 셔츠를 짙게 물들였다. 네 번째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가 허전했다. 새끼손가락과 중지도 제자리에 완벽하게 붙어있지는 않았다.

발렌틴은 대치하고 있는 남자들 가운데 서서, 잠시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아드리아나와 제시카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놈들!”

마티아스의 곁에 있던, 수행원으로 보이는 부하의 무시무시한 외침이 정원을 뒤흔들었다. 그 즉시 마차에서 두 명의 사내가 더 내려서 뛰어 들어왔다. 모두가 무기를 꺼내고 상대측을 견제했지만, 섣불리 먼저 달려드는 자는 없었다. 발렌틴도 집안에 있는 남자들에게도 신호하지 않고 기다렸다. 패를 더 내놓아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마티아스는 넋이 나간 듯 없어진 손가락이 있던 자리를 보고만 있었다.

“네놈들이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마티아스의 수행원이 다시금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질러댔다.

발렌틴은 칼끝을 잔디 위에 스쳐 훑으며 말했다.

“허락 없이 남의 아내 몸에 손을 대고도 손가락 하나가 비싸다고 말하나? 종알거릴 시간에 의원이라도 찾아가는 게 좋을 거다.”

“...네놈들이 감히 스콰이어의 이름에 대적하겠다는 것이냐.”

마침내 마티아스가 턱을 떨며 입을 열었다. 한쪽 입술 끝이 경련을 일으키며 어색하게 올라갔다.

발렌틴은 얼굴에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조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티아스. 정확하게 선을 그어줬으면 좋겠군. 이 따위 짓을 하는 게 스콰이어의 입장인지 네 놈 혼자만의 입장인지.”

“하하!”

마티아스가 다시 크게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멍해 보이는 눈을 봐서는 그도 대답을 모르는 듯 했다.

“...젠장, 이런 미친 자식을 봤나.”

그가 중얼거렸다. 그 입에서 언제 공격 명령이 떨어질지, 발렌틴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다렸다.

그러나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티아스의 수행원이 잔디 위에 떨어진 손가락을 주워 손수건에 감싸고는, 다른 부하들을 시켜 마티아스를 마차에 태우도록 한 것이다.

“이거 놔! 저 미친놈을 죽이고 가야겠다!”

“치료부터 하셔야 합니다.”

주인과 달리 그 수행원은 머리가 돈 인물은 아닌 듯, 제 주인의 안위를 챙기며 다른 부하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무인들을 이끌고 온 걸 봐서는 싸워서 승산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면 덤비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부하가 그나마 주인보다 신중한 모양이었다.

마차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온 후에야, 웨버 일가도 몸을 돌렸다.

저택 입구에는 다시 당번 둘이 경비를 맡고 섰다.

“치안대에 신고하게.”

어느새 현관에 나와 서 있던 집사에게 이르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다, 발렌틴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손에 쥔 검을 내려다보았다. 마티아스에게 칼을 휘둘렀을 당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었던 아드리아나가 떠올랐다. 그녀의 몸은 제시카가 보호했겠지만 눈도 잘 보호해 주었을지 새삼 걱정이 되었다.

발렌틴은 멋쩍어진 얼굴로 검을 펜에게 건네고, 손을 씻어내기 위해 욕실을 먼저 찾았다.

“오드리.”

“문지방이 제 얼굴인가요, 여보?”

아드리아나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로빈을 끌어안고 있었다.

발렌틴은 어쩐지 면목이 없어져서 문가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슬며시 들어보았다. 원망스럽게 흘기고 있는 눈이 보였지만, 화 나있거나 무서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발렌틴은 무심코 ‘그자가 당신에게 손을 대니까’라고 변명하려다,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반성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서 이리 오세요.”

아드리아나가 두 팔을 뻗었다. 발렌틴은 그 앞으로 다가가 서서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당신 괜찮으세요?”

“걱정시켜서 미안해.”

“저는 괜찮아요, 여보. 조금... 싸움이 날 수도 있다고 하셨었잖아요. 이 정도는 각오했어요. 루미아의 피를 이어받은 남자를 데리고 살려면 저도 강해져야 한다는 걸 알아요.”

아드리아나가 말하며, 발렌틴을 올려다보고 미소 지었다. 발렌틴은 자신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망할 루미아 놈들' '루미아는 남자놈들이 늘 문제야'라는 말이 아드리아나에게 영향을 주었을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고 얌전히 안겨 서 있었다.

이내 아드리아나가 발렌틴을 데리고 침대 위로 올라가 눕게 했다. 그러고는 곁에 누워서, 발렌틴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으로 이끌었다. 부드러운 젖가슴 사이의 계곡에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누르자, 평소와 비슷한 크기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봐요, 괜찮죠.”

“아까는 더 두근두근했겠지.”

“그자가 제 손을 잡았을 때는 그랬어요. 그리고 제게 기분 나쁜 말들을 했을 때에도. 하지만 잠깐뿐이었어요.”

“오드리.”

발렌틴이 아드리아나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금방 끝내고 데리러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겠어?”

발렌틴은 마티아스를 법적으로 처벌받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싸울 수단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증거 하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갖가지 월권 행위와 횡령, 부인들을 학대한 일 등 여러 죄목에 대한 사소하고 중한 근거들이 모였지만, 그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어떤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더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상대도 기다리지 않을 터였다.

방법은 더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신을 믿어요, 발렌틴. 하지만 당신을 혼자 버려두고 떠나고 싶지 않아요.”

울 것 같은 아드리아나의 속삭임에, 발렌틴은 미소 지으며 그녀르르 힘껏 포옹했다.

“버려두다니, 여긴 우리 집이잖소. 당신더러 계속 나가살아도 된다고 하는 게 아니야. 나쁜 놈들이 얼씬도 못 하게 만든 후에 당신을 다시 데려올 거야.”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이 없었다. 그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젓는 듯한 동작으로 부드러운 뺨을 가슴 위에 문질렀다.

“내일, 당신을 루미아의 집에 데려다줄게.”

발렌틴이 나직이 말했다.

“금방 데리러 갈게. 약속해.”

아드리아나는 대답 대신 발렌틴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가만히 그녀의 등을 쓸어주고 어루만지다가, 가슴 속에 파묻힌 그녀의 고개를 들어올리게 했다.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 위에 다정하게 입술을 겹치고서, 그녀와 떨어져 지낼 밤을 미리부터 괴롭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단단하게 부푼 남성이 아내의 배에 닿은 순간, 그 안에 자고 있을지 모를 자식의 존재가 신경 쓰여 멈칫했지만, '여보, 빨리 조금만...'하고 재촉하며 바지부터 벗기려 드는 아내의 앞에서는 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 작품 후기 ============================

나중에 부끄러울 듯. 금방 만날 거라서...

(하루를 떨어져도 일 년 같았습니다. by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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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아니라 다른 걸 많이 요청하고 계시네요. 무서운 븐들..^^ 표지를 두 가지로 걸어보려고 바꿔봤는데 처음 보시는 분들도 많으시네요. 이번 주는 예전 표지로 걸어둘게요.uu(너무 늦은 시간에 써서 수정은 내일 하겠습니다ㅜ.ㅜ)

선추코평쿠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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