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1 조용한 반격(발렌틴) =========================================================================
일요일 아침, 발렌틴은 품 안에서 뒤척이는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고 누워 있었다. 꿈을 꾸었는지 입술을 삐죽였다가 미소 짓기도 했다. 일어날 때가 지났는데 늦잠을 자느라 깊게 잠들지 못한 탓이리라.
밖에서 조그맣게 들려오던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로빈이 크게 짖는 소리가 섞이자, 아드리아나가 잠을 깼다.
“무슨 꿈을 꿨소, 여보?”
발렌틴이 인사하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내의 호빵 같은 볼은, 자다 깨었을 때 더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해서 귀여움이 있었다.
“음... 모르겠어요.”
아드리아나는 배시시 웃으며 인사하더니, 눈을 비비며 도로 발렌틴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파티는 어제 하루로 끝났지만, 웬디와 헤이즐 두 아이와 제시카의 동료들은 아직 집안에 남아 있었다. 투스미아의 손님들은 며칠간 이곳에 머물 예정이었다. 아마 몇 주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예상대로라면.
“우리 아기가 더 커진 거 같아.”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배를 쓰다듬다가 중얼거렸다. 그러다 잠옷을 슬쩍 들추었다. 뽀얀 배가 오늘따라 동그랗게 보였다.
“...이건 당신이 밥 열 그릇 먹었을 때인데.”
아드리아나는 열 그릇 먹은 적 없다고 앙탈부리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고개를 푹 숙여 자기 배를 쳐다보고 확인했다.
앞으로 반년만 있으면 태어날, 두 사람의 첫 아기가 그 안에 자라고 있었다.
첫 아이. 게다가 사내아이다. 이로써 이 집안에서는 사내의 부재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될 부담은 덜 수 있었다. 아버지가 부재일 때에는 아들이 있어야 했다. 가족 구성에서 무력을 동원한 힘을 갖추어 제 가족을 지킬 남아의 역할은 아직 다른 무엇으로 대체되기 어려웠다.
언젠가는 세상이 변할지도 모른다. 영리한 딸들은 지금도 많은 몫을 하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가문의 땅 입구 너머에 버티고 서 있을 사내의 육신과 무력이 필요한 시대다.
지금 아드리아나가 품은 남자아이는 언젠가 그의 팔로 제 형제들과 어머니를 지킬 것이다. 발렌틴은 자신이 일로 집안을 비웠을 때에,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자신을 닮은 아들이 빨리 장성하여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되기를 바랐다.
품속에서 게으름 부리는 아내를 보면 사랑스러움에 미소가 지어지고, 애잔함에 가슴이 짠해졌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들이 어엿한 사내가 된 후까지, 그리고 아이들이 또 그들의 아이들을 낳을 때까지, 발렌틴은 자신도 아내의 곁에 끝까지 남아 돌봐주며 가장 노릇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응....”
눈가에 살짝 입술을 누르자, 아드리아나가 어깨를 움츠리며 새끼 고양이 소리 같은 목소리를 냈다. 발렌틴은 그녀가 간지러워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계속 쪽쪽 소리를 내며 키스했다.
“얼굴 간지러워요.”
아드리아나는 눈도 뜨지 못하고 웃다가, 손으로 자기 얼굴을 긁었다.
“긁지 마, 오드리, 피부 상해. 이제 안 할게.”
발렌틴은 아드리아나를 놓아주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아침시간은 한참 지났고, 까딱하다가는 점심 먹을 때를 기다려야하게 될 판이었다.
“욕실까지 안아줄까?”
“더 잘 거예요.”
아드리아나가 이불을 만 몸으로 꿈틀거리며 발렌틴의 허벅지 옆에 달라붙었다. 얼굴을 찰싹 달라붙여, 통통한 볼이 꾹 눌렸다. 발렌틴은 몸을 구부려 아내를 끌어안고 다시 쪽쪽거리다가 작게 천둥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당신 배에서 난 소리야?”
발렌틴이 조심스러운 척하며 물었다. 아드리아나는 겸연쩍어하며 눈만 끔벅이다가, 아기를 굶게 하면 안 되겠다며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씻고 돌아온 아드리아나를 눕혀놓고, 발렌틴은 보습 오일의 뚜껑을 열었다. 벨마에게 아드리아나의 배가 더 커지기 전부터 잊지 말고 꼭 매일 보습제를 바르라는 당부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몸에 오일을 발라주는 내내 계속 키득거렸다. 한 번 간지러움을 타고 난 뒤라 이제는 손만 닿아도 까르르 웃어대며 움찔거렸다.
“나중에 아기한테 꼭 말해줄게요. 배에 있을 때부터 아빠가 많이 쓰다듬어주고 예뻐해 주셨다고요.”
“꼭 말해줘, 여보. 요즘 아들들은 옛날처럼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반항하는 일이 많대.”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그렇게 키우지는 않을 거예요.”
아드리아나가 정색하고 말하며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옛날에야 부자간에 다툴 일이라는 게 주로 인정과 권력 상속의 문제 등이었다지만 요즘은 달랐다. 테스카 같은 도시에서는 더욱 그랬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자식을 방치하며, 자식 또한 가족에 애정이 없기 십상이었다. 비단 부자 사이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신은 우리 아이랑 많이 놀아주실 거고, 많은 걸 가르쳐주실 거예요. 우리 아이는 당신을 존경하고 본받을 거고요.”
“물론 가르쳐야지. 내 아버지에게 배운 밭 갈기도 가르쳐줘야겠어.”
발렌틴이 눈을 내리깔고 말하자, 아드리아나가 다시 웃어젖혔다.
“이웨리드 영부인께서는 당신이 무슨 풀이나 뽑아 봤겠냐고 의심하시던데요?”
“천만의 말씀이오. 우리 아버지께 여쭤 봐요. 열두 살 때까지인가는 나도 현장에서 열심히 도왔소.”
“아휴, 그 고사리 손으로 얼마나 도우셨으려고요?”
아드리아나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귀엽다는 듯 양손으로 발렌틴의 뺨을 주물렀다. 발렌틴은 순간 왠지 흠칫했지만, 아내가 요즘 자신을 아기 취급하며 즐거워하는 일도 스트레스 해소의 일종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태연하려 애썼다. 어쩌면 프란체를 대하는 소니아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이유가 뭐든 썩 싫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때 저택의 초인종이 울렸다. 일요일 낮에 기별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소니아 부부가 교회에 다녀오는 길에 들렀거나 하인들이 시킨 물건을 가져온 배달꾼일 터였다.
아드리아나가 옷을 입는 동안, 발렌틴이 창문 앞으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대문 밖에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어둡고 짙은 색 몸체에 붉은 천이 드리워진 커다란 고급 마차였다.
“플레밍.”
조금 목소리를 높여서 부르자, 뻥 뚫린 공간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은 집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발렌틴은 그쪽으로 가겠다는 신호를 하고 몸을 돌렸다.
“오드리, 잠깐 기다려. 아니, 먼저 뭐 좀 먹고 있어.”
발렌틴은 먹을 것을 올려 보내도록 하겠다고 말한 후, 혼자 밖으로 나갔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제 주인이신 그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아이넨 초대 국왕이신 타오루카 2세의 7대 손이신 아이디 왕자님의 16번째 따님이신 라베라 공주님의 장자이신....”
방문객은 차렷 자세로 서서 기나긴 하나의 문장을 말하느라 숨도 거의 쉬지 못했다. 발렌틴은 방문객이 제 주인 소개를 마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주었다. 정원에서 놀던 아이들은 집안으로 들여보내 놓은 후였다.
스콰이어라는 이름은 중간쯤에 등장했고,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이신 필립 스콰이어 공작님의 다섯 번째 아드님이신 마티아스 스콰이어 남작님 되십니다. 또한 저는 마티아스 남작님의 대리로서 온 종 토레스라는 자이온데-.”
“자네 조상님에 대해서도 들어야 하나?”
발렌틴이 말을 툭 잘랐다.
“그렇지 않습니다.”
방문객이 약간 불안한 듯 눈을 껌벅이며 목울대를 두 번 울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말을 시작했다.
“저는 저희 주인님의 부친이신 필립 스콰이어 공작님과 리노아스의 영주이신 클로제 남작님 사이에서 맺어졌던 선약을 지키시려는 주인님의 명으로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마티아스 남작님께서는 아드리아나 클로제 영애를 영예로운 스콰이어 가의 식구로서 맞이하겠다 하셨습니다. 하여, 아드리아나 클로제 영애에게 보름의 시간을 드릴 테니 그때까지 준비하여 오시도록-.”
발렌틴이 오른팔을 뻗어서 담장 벽을 짚었다. 그 바람에 그림자 속에 갇히게 된 토레스가 움찔하며 눈을 들어올렸다. 발렌틴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대답으로, 자네의 목을 잘라서 반송하면 되겠군.”
“예?”
그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무릎까지 오는 단정한 흰 타이즈를 갖춰 입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기 시작한 것이었다.
“여긴 내 집이고, 자네가 주인에게 데려가겠다는 여자는 내 아내다. 자네 목 위에 얹어진 머리가 제 기능을 하고 있다면, 지금 그 입이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지 정도는 알 텐데.”
토레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는 그저 주인께서 명하신 전언을....”
“여기서 잠깐 기다리게.”
발렌틴이 몸을 돌렸다.
어느새 나와 있던 펜이 토레스를 감시했다.
그동안 발렌틴은 집안으로 들어가 적당한 물건을 하나 찾았다. 아주 귀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희소성으로 따지자면 아이넨 안에서는 보기 드문 물건일 터였다.
바쉬에서 만든, 날이 잘 드는 진검이었다.
발렌틴은 그것을 손에 들고 다시 성큼성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토레스가 보더니 질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펜이 그의 팔목을 움켜쥐고 기다리게 하자, 그는 항의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공포에 질려 신음했다.
발렌틴은 검집을 쥔 그대로 토레스에게 내밀었다.
“이걸 주인에게 전하게.”
토레스가 다시 눈을 끔벅였다.
“물론 좋은 물건을 얼마든지 가지셨겠지. 자네 주인에게는 검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들었네. 하지만 기왕이면 내 것을 주고 싶군.”
발렌틴은 침착하게 전언을 두 개 더 덧붙였다.
‘먹고 죽으시라’는 말은 토레스가 주인에게 전달할지 어떨지 모른다. 그래도 ‘직접 찾아와서 말하라’는 쪽은 전해질 것이다.
이후 대문이 열려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펼쳐 보인 발렌틴의 맨손을 보자마자, 토레스는 검을 끌어안은 채로 번개 같이 몸을 돌리고 후다닥 마차에 올랐다.
“여보, 누구였어요? 뭘 주신 거예요?”
집안으로 들어서자, 아드리아나가 걱정하며 다가왔다. 2층에서 내다본 모양이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감싸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사하고 나서 얘기해 줄게. 먼저 좀 먹었소?”
“청포도하고 사과를 먹었어요. 달콤하고 향이 아주 좋아요, 당신도 어서 드셔보세요.”
아드리아나는 ‘이제 거의 준비가 끝나간다’는 발렌틴의 말을 믿어주는 듯, 전보다 무서워하고 걱정하지 않았다. 혼자 투스미아로 가라는 말을 할까 봐 더 의연한 척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두려움이란 감추는 데에 한계가 있는 일이다.
발렌틴은 식당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과 덩치 큰 손님들을 보고 미안해하며 얼른 자리에 앉았다.
“음식이 엄청 많아. 100명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있죠, 웨버 경. 아저씨들이 채소 열심히 다듬으셨어요.”
“제스 언니는 감자 껍질 깎다가 콩알 만하게 만들어놨어요.”
식탁 앞에 둘러앉아 아이들이 즐거운 듯 재잘대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덩치 큰 손님들의 듬직한 광경도 눈을 흡족하게 했다.
발렌틴은 잠시 멀리서 지켜보는 듯한 기분으로, 식당 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오순도순한 구성에도 만족하고 있었지만, 역시 거느리는 이가 많을수록 든든할 터였다. 커다란 땅과 번성한 가문, 그것이 나쁠 리 없다. 잘 지켜낼 수만 있다면.
*
마티아스가 테스카로 찾아온 것은, 바로 이튿날인 월요일이었다. 그는 하인과 경호원 셋을 데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발렌틴은 2층 발코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이 직접 그를 마중하겠다고 집사에게 일렀다.
“저도 한 번은 확실히 의사를 표현해 놓겠어요.”
아드리아나도 결심하고 있었던 듯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발렌틴은 마티아스의 일행 수와 마차가 한 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마차 안에 경호원이 더 있다고 해도 최대 몇 명이 넘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아드리아나의 곁에도 오언과 제시카를 붙게 한 후 자신의 뒤에 붙어서 따라오도록 이르고 동행했다.
“안녕하시오, 웨버 경. 선물 잘 받았소.”
마티아스가 허리 양쪽에 두 손을 짚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허리춤에다 어제 발렌틴이 보낸 검을 떡하니 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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