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보다 아름다운-128화 (128/140)

00128 선전포고 =========================================================================

실제로 눈을 뜬 순간, 아드리아나는 진짜 발렌틴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다만 그가 손에 든 것은 살벌한 무기가 아니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빛깔의 음료였다.

“여보, 좀 쉬었소? 당신이 좋아하는 거 가져왔어.”

신선한 과일 특유의 싱그럽고 상큼한 향기가 풍겼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나가 좋아하는 베리들과 소다가 섞인 음료가 든 잔이 손에 쥐여졌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이마와 뺨을 만져보며 몸 상태를 물어본 후, 바깥 상황에 대해 알려주었다. 낯선 방문자는 후작에게 면담을 요청해 대화 중이고, 글라디스를 포함한 부인들은 지금 막 회의를 시작하러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럼 저도 가봐야겠어요.”

아드리아나가 애써 기운을 내며 말했다. 이 회의에 빠지면 빠질수록 불리한 결과가 돌아온다던 소니아의 말이 정확함을 몇 번의 직접체험으로 알게 되었으니까.

“데려다 줄게. 회의가 끝나는 대로 돌아갑시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를 걱정하면서도, 꿋꿋하려 하는 모습을 대견해하며 다독여주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의 몸을 일으켜서 어깨를 안고 부인들의 회의장소로 데려가 주었다.

중앙홀을 지날 때, 아드리아나는 가득했던 인파가 밀려나가고 고요해진 자리에 후작이 손님과 둘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후작도 아드리아나 일행을 발견하고 불러 세웠다.

“마티아스 스콰이어 남작님이십니다. 인사하시지요, 웨버 경.”

후작이 두 남자를 서로에게 소개했다. 그는 오늘 마티아스가 즉흥적으로 테스카 관광을 하겠다고 찾아왔는데 마침 연회일이라 잘 되었지 않느냐고 호쾌하게 웃었다. 덧붙여, 자기 임기 중에 마티아스가 테스카를 방문한 것이 처음이라 알아보지 못하였다며 송구스러워 했다.

마티아스가 먼저 발렌틴에게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발렌틴이 그에 응하며 말했다.

“마티아스 남작님이셨군요. 왠지 뵌 적이 있는 듯도 했습니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스쳤겠지요. 실은 저도 웨버 경을 보고 낯이 좀 익었습니다. 이토록 멋진 도시에 멋진 분들이시라니, 앞으로는 테스카에 자주 와서 어울려야겠습니다.”

둘 다 뭔가 시치미를 떼는 느낌이었다.

마티아스는 발렌틴보다 신분이 위였던 만큼 약간 거만하게 고개를 들고 내려다보는 기색도 없지 않았지만, 친해지고 싶다는 말을 진심으로 여기게 할 만큼 부드러운 눈을 했다. 그런 눈빛은 아드리아나를 바라볼 때에 훨씬 더 했다.

“아까는 결례를 범해 죄송했습니다, 부인.”

부인이라고 불린 순간, 아드리아나는 왠지 으스스해져서 마른 목을 적셨다. 발렌틴에게 팔짱 끼고 있던 손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깊이 고개를 숙였다.

후작이 눈치 좋게 끼어들었다.

“웨버 부인만큼 전통적인 미덕을 갖춘 분은 요즘 드물 겁니다. 사교에 있어서도 아주 진중하시지요.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느긋하고 깊게 사람을 사귄다고 할까요. 요샛말로는 낯을 가린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하.”

“예. 아까 보니 다들 그렇다고들 하시더군요. 그런 진중한 분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시는 부군께서는 얼마나 행복하실까요.”

마티아스는 발렌틴에게도 사람 좋게 웃어 보인 후,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사실 제 아내도 인사를 시켜드림이 마땅할 터이나, 요즘 건강이 좀 안 좋아져서 함께 오지 못하였습니다. 주치의에게 외출을 자제하란 말을 듣고 있어서 말입니다.”

“저런. 하루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요.”

후작이 미간을 좁히며 콧수염을 씰룩거렸다.

아드리아나는 마티아스의 부인이 아프다는 말에 등골이 쭈뼛 서는 듯했다. 불쾌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발렌틴의 팔에 매달려 있다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그를 따라하는 것도 힘에 겨웠다. 그 직후, 발렌틴이 회의에 늦었다는 핑계로 아드리아나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마티아스에게 뒷모습을 보이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뒷골이 싸해지는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저 자신의 뒤를 막고 호위하는 오언의 덩치 안에 자신의 모습이 다 가려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회의가 끝나고, 부인들의 하인들이 속속 들어왔다. 그들은 저마다의 여주인을 찾아서 그녀의 남편들이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지 또는 무슨 이유로 급히 다른 곳으로 떠났는지 등의 전언을 이르기에 바빴다.

아드리아나에게도 찾아오는 이가 있었다. 발렌틴이 아닌 마티아스의 하인이었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전언이 담긴 쪽지를 내밀었고 엘레나가 그것을 대신 받았다.

하인이 떠난 후, 엘레나는 편지에 만약 이상한 내용이 들어있어서 아드리아나를 놀라게 하면 큰일이라며, 허락을 구하고 내용을 검사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경멸을 다 감추지 못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마님께서 우정을 베풀어주시기를, 지극히 순수한 마음으로 희망한다고 하십니다.”

엘레나는 전문을 직접 읽어보시겠느냐며 아드리아나에게 조심스럽게 편지를 내밀었다. 아드리아나는 질겁하며 그것을 거절했다. 그가 쓴 것을 만지는 것도 읽는 일도 꺼림칙했다. 대신 엘레나가 만일의 때를 위해 증거로 남겨두겠다며, 편지를 고이 접어 넣었다.

다른 하인들이 다 다녀간 후, 발렌틴이 응접실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오느라 늦은 것이었다. 응접실에 남아 있던 몇몇 부인들이 모처럼 같이 어울리지 않겠냐고 권했지만, 발렌틴은 급한 약속이 생겼다고 거절했다. 아드리아나 일행은 바쁜 척하는 발렌틴을 따라 쏜살같이 성을 빠져나갔다.

============================ 작품 후기 ============================

날짜가 휙휙 지나가 호흡 때문에 쪼갰습니다. 바로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