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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27화 (127/140)

00127 선전포고 =========================================================================

홀 안의 이들 대부분이 움직임을 멈추고 아드리아나와 새로운 방문객을 지켜보았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들이었다. 화려하고 훌륭한 외견을 가진, 신분 높아 보이는 새로운 참가자의 등장에 군중은 크게 술렁거렸다. 모두가 그를 반길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오직 아드리아나와 그 일가를 제외하고는.

아드리아나는 사고가 정지된 듯 멈춰 서서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지금 발렌틴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너무 무거워져서 고개를 들어 올릴 수도 없었다.

수락을 기다리던 남자가 아드리아나의 반응을 보고는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 예의 바르게 춤을 청한 결과가 뜻밖의 냉담한 태도임에 표시할 수 있는, 결코 지나치다고 하기 어려운 작은 실망과 곤혹스러움이었다.

“제가 부군께 먼저 허락을 받는 편이 좋겠습니까?”

그가 부드럽게 말하더니, 고개를 들어 발렌틴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재차 예의 바르게 말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경의 부인의 두 번째 파트너가 되는 영광을 얻어도 되겠습니까? 두 분께서 서로 다른 파트너와 한 곡을 더 추시기로 한 듯 보였기에 청한 것입니다만....”

곤란하게도, 그의 지적을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아드리아나는 두 번째 파트너로 염두에 둔 아너슨에게 가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갑작스럽게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림으로써 이 청을 거절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더욱이 눈앞의 남자는 척 보기에도 아너슨보다 훨씬 신분이 높아보였다.

아드리아나는 뻣뻣하게 긴장하고 선 채로 자기 암시를 했다. 이 남자는 마티아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모두와 어울려서 춤 한 곡 추는 일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 남편이 곁에 지키고 있는데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거절하고 싶습니다만.”

별안간 발렌틴이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놀라며 흘끗 눈을 들어올렸다.

“제 아내는 낯을 많이 가립니다. 초면인 신사분과 왈츠를 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 옆의 제 친구라면 모를까요. 용모가 지나치게 훌륭하신 데다 키도 저보다 크신 신사분의 앞에서라면, 특별히 더 낯을 가리라고 제가 늘 일러두고 있으니까요.”

발렌틴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부인들 몇 명이 낯 부끄럽다며 거의 비명을 지르고 웃었다. 점잖던 남성들의 낮은 웃음소리마저 섞였다.

“이제 보니 웨버 부인께서 낯을 가리시는 이유가 따로 있었군요. 웨버 경께서 부인을 그렇게 속박하시는 분인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어떡해요. 신사분께서 춤을 청할 상대를 잘못 고르셨네요. 하필 날마다 이글거리는 장작불 같이 연애 중인 애인 사이를 고르셨을까요.”

글라디스의 곁에 있던 부인이 사뭇 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부인들은 그녀가 창피스럽게 주책을 떤다고 면박을 주면서도, 경망스러운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에 낯선 손님과 발렌틴 사이에서 부유하던 묘한 긴장감이 흐트러졌다.

낯선 손님은 미소 띤 얼굴로 발렌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중을 캐려는 듯 흥미로워 하는 기색이었다.

아드리아나는 두 남자의 사이에서, 매달리는 눈으로 발렌틴을 바라보았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창백한 안색을 보더니, 곁에 있던 레빙턴 부인에게 뭔가 양해를 구했다. 레빙턴 부인도 아드리아나를 보더니 안타까워하며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어서 가셔서 우리 웨버 부인을 의자로 좀 모셔주세요. 어쩐지 아까 부군께서 우리 부인 숨도 못 쉬시게 꽉 부둥켜 안고 계시더라니.”

발렌틴이 금세 아드리아나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고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낯선 손님에게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무례하게 거절한 일을 용서 하십시오. 조금 전의 말은 농담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귀하와 함께 춤추는 기쁨은 정말 다른 숙녀분께 양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아내가 임신 중이라 이렇게 컨디션이 변덕스럽게 나빠지기도 해서 자주 쉬어줘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자 낯선 손님이 눈을 크게 뜨며 '오'하고 감탄했다. 그는 전혀 몰랐다는 듯 놀라워하며 아드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가지셨군요. 눈치 채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부디 제가 부인을 곤란하게 해 드린 게 아니었길 바랍니다.두 분이 여기서 가장 화목한 한 쌍으로 보이시기에, 부럽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함께 어울리길 바랐을 뿐입니다.”

그가 말하고 약간 물러섰다.

아드리아나는 그제야 볼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미소 지었다.

잠시 후, 홀 안이 다시 밝게 웅성대며 연주가 재개되었다.

“그러면, 제게 기회를 베풀어주실 여성분은 어디에 계실까요?”

손님이 겸연쩍게 말하자, 온 여성들이 서로 나섰다. 그녀들은 투닥거리다가 서열대로 하자는 누군가의 말에 물러나고, 라르슨 영애를 앞으로 내보냈다. 손님은 그 결과가 곤란하다는 듯 재미있다는 듯 웃었고, 라르슨 영애는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동안 발렌틴은 아드리아나를 부축하여 빈 방으로 데려갔다. 그는 아드리아나를 소파에 눕힌 뒤,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아, 오드리?”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차가워진 손을 따뜻하게 해주고 뺨을 만져보며 물었다.

“여보....”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몸을 쓸어주고 진정시켜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불청객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긴장이 풀리며 팔다리가 조금 떨렸다. 발렌틴은 아직 새로운 손님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손님을 마티아스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불확실했다. 하지만 잘생긴 남자와는 어울리지 못하게 한다는 둥의 없는 말을 하고 무리해서 아드리아나를 빼내온 걸 보면, 그도 자신과 같은 추측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기에, 아드리아나도 머릿속에 맴도는 이름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얼마간 조용히 발렌틴에게 다독여지다가, 아드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여보. 당신은 그만 가보셔도 돼요.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시면 안 되잖아요.”

비록 임산부라고 배려는 받고 있었으나, 사실 일상에서 유난스러운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시기는 아니었다. 이제 3개월을 넘겨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지금 자신들이 날카로워져 있는 이유는 마티아스라는 존재 하나뿐이었다.

아드리아나가 오늘은 둘 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다시 떠밀자, 발렌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 쉬었다.

“편히 있어, 여보. 이따 데리러 올게.”

발렌틴이 하인들에게 마님을 잘 지켜달라고 말하며 방을 나갔다.

문득 문가에 기대고 서 있던 제시카가 말없이 자기 치맛자락을 슬쩍 들쳐 아드리아나에게 보여주며 씩 웃었다. 허벅지에 검을 차고 있었다. 길고 늘씬한 허벅지에서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는, 일반적인 단검보다 위협적인 길이와 생김새의 검이었다.

아드리아나가 작게 웃었다.

“어쩐지 오늘 제스가 웬일로 나서서 치마를 입겠다고 하더라.”

“칼 한 자루도 없이 다녀야 한다니, 속옷을 안 입는 것보다 허전한 일이지.”

제시카가 가슴 앞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 말에, 창가 쪽을 지키고 있던 오언도 왠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아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쿠션을 머리 아래로 깊이 끌어당겼다.

이제 마티아스는 왈츠 후 신분을 밝히게 될 터였다. 그는 당당하게 하인들을 여럿 거느리고 왔고, 굳이 신분을 감추지 않으며 사람들의 호감을 사 두려는 듯 보였다.

또는 자신이 호감을.

‘유부녀를 두고 남편과 정면승부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드리아나는 그의 뻔뻔한 작태에 몸서리치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지키고 있는 이들이 많으니 다른 좋은 생각을 하자고 애썼지만, 낯선 이의 모습만이 감은 눈 앞에 어른거렸다.

이내 얕은 잠에 빠져서도, 아드리아나는 계속 그의 모습을 보았다. 마티아스는 방 안으로 들어와 또 아드리아나에게 말을 걸고 치근덕거렸다. 친해지고 싶을 뿐이라며 집요하게 얼쩡거리는 마티아스 때문에 무서워하며 웅크리고 있다가, 아드리아나는 멀리서 차가운 빛을 내는 검을 쥐고 들어오는 남편을 발견했다. 그리고 벌컥 고개를 쳐들었다.

============================ 작품 후기 ============================

뒷부분을 더 썼는데 그 쪽이 너무 안 읽혀서 여기까지 자릅니다ㅜ.ㅜ 하루 늦어놓고 허허ㅠㅠ 종장에 가까워져 그런지 몹시 신경이 쓰이네요.

추천 코멘 평점 쿠폰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황사 조심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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