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5 선전포고 =========================================================================
‘그이도 버클리를 봤을 때 이런 기분이었겠지. 내가 그와 함께 있는 걸 보셨을 때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라면 울어버렸을 거야.’
아드리아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감싸고 달래줘가며 극복해준 남편을 생각하며 첼시아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려 했다. 자신과 그녀가 둘 다 아이넨에서 살아가며 사교활동을 이어나가는 한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을 터였다. 신분 높은 부인들 간의 친목이란 생각보다 좁은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었으니.
‘그이랑 나랑, 둘 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살다가 한 번에 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요즘 세상에는 어린 소녀들도 꾸지 않는다는 부질없는 꿈도 꿔보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간의 모든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의 두 사람이 만들어졌고 함께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그저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일이 괴롭게 느껴졌다. 발렌틴에게 있어서 과거에 지나지 않는 여자라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 충분했건만 이제는 그녀를 모르는 척 묻어두고 지낼 수 없어졌다는 게, 앞으로도 수없이 그녀와 대면하고 서로 의식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슴을 태웠다.
자신의 이런 심정을 털어놓고 격려 받아 안심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직 남편에게 말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라도 남편의 치부를 털어놓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가 조심스럽게 택한 상대는 엘레나였다.
“엘레나도 롭슨 부인을 알아?”
분명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며, 아드리아나가 머리를 빗겨주는 엘레나에게 물었다. 발렌틴이 왕성의 연회에 가 있던 그 시기, 아드리아나가 초조함을 겪고 있을 때였다.
“왠지 요즘 자꾸 마주칠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리네.”
순간 엘레나는 거울을 통해 아드리아나의 안색을 살피며 당황해할 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설마 지금까지도 종종 마주쳐왔던 건 아니겠지? 그이를 믿지만, 그 사람이 자꾸만 그이 앞에 나타나면 너무 싫을 것 같아.”
“절대로 아니에요, 마님. 저도 그 부인을 거의 10년 만에 처음 뵈었어요. 주인님도 그러셨을 거예요.”
엘레나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드리아나가 괜한 오해를 할까 봐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이번에 테스카에서 만난 건 뜻밖이었어요. 웨버 경도 아이넨에 오신 초기에는 그분과 마주칠까 봐 신경 쓰셨지만, 다행히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어요. 웨버 경은 옛날에, 그분이 트라우마라서 만나면 심장마비 걸릴지도 모른다고 그러신 적도 있는 걸요.”
“나 발렌틴을 못 믿는 게 아니야, 엘레나.”
아드리아나가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작게 말하자, 엘레나가 한숨을 내쉬며 상냥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
“흠. 하긴 그이도 힘드시구나....”
문득 왕성에 간 발렌틴과 그녀가 마주치면 어쩌나 걱정했던 이유가 방향을 약간 틀었다. 발렌틴이 아직까지 그녀를 무서워하고 오래된 상처를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면 너무 가엾을 것 같았다. 아드리아나 자신이 지켜줄 수도 없는 곳에서.
“우리 그이 어떡하지. 또 마주치면.... 롭슨 부인, 좀 나쁜 여자 분위기던데.”
아드리아나가 한손으로는 배를 쓰다듬으며 슬프게 말하자, 엘레나가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천사 같으신 마님, 웨버 경이야 괜찮으실 거예요. 이젠 세월이 많이 흘렀고, 웨버 경도 지키셔야 할 마님을 곁에 두었는데 언제까지나 과거를 무서워하고만 계실 수 있겠어요? 알아서 하시겠죠.”
“응. 그래도 그이가 은근히 정 많고 마음 약하신 거 같아서.”
“항상 그러신 건 아니에요. 그리고 펜이 따라다니잖아요. 곰 같이 능청맞아도 펜은 원래 공작님 쪽 사람이니까요. 루미아 가의 위신에 흠집 낼 일은 두고 보지 않을 거예요. 누가 됐든 루미아 가의 남자가 유부녀와 선을 넘는다? 주인도 모르게 여자를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펜은 우리 그이보다 더 순둥이 같은데?”
아드리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엘레나는 ‘우리네 남자들은 곰이 되기도 하고 늑대가 되기도 하죠.’하고 말하며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보다 전 마님이 더 걱정이에요.”
엘레나가 말을 이었다.
“사실 웨버 경보다는 마님과 활동 영역이 겹칠 테니까요. 알게 되신지 몰랐어요.... 기왕이면 그쪽이 알아서 피해줬으면 좋겠지만, 저번에 뵈니 성격이 좀 특이하셔서 어떨지.”
“괜찮아. 내가 피하면 되지 뭐. 만약에 그 사람과 마주쳐서 나 우울해질 것 같으면 엘레나한테 같이 욕 좀 해달라고 할게.”
아드리아나가 말하고 웃었다. 엘레나는 미소 지으면서도 뭔가 안타까운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첼시아와 다시 마주치게 되었던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어느 동떨어진 영지의 자선 모임에서였다. 라르슨이 민스터와 첼시아를 거느리고서 찾아온 것이었다. 라르슨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입장했고, 첼시아와 아드리아나는 곧 서로를 발견했다.
첼시아는 아드리아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져서 어디론가 자리를 떠나 버렸다. 설명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라르슨이 몇 번이나 ‘롭슨 부인은 어딜 가신 게야?’하고 종적을 찾았지만, 그녀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엘레나는 첼시아가 아주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며 괘념치 말라고 아드리아나를 위로했다. 아드리아나는 우려하던 재회 없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면서 겨우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여보, 얼굴이 왜 그러세요?”
집에 도착한 아드리아나는, 막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발렌틴에게 달려갔다.. 그의 광대뼈 근처에는 멍이 들 정도로 베인 상처가 있었고, 미처 셔츠의 팔을 끼워 넣지 않은 한쪽 어깨 아래쪽에도 멍이 있었다.
“다녀왔소? 씻느라 당신 오는 소리도 못 들었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드리아나가 허둥지둥 그에게 다가가 두 뺨을 감싸고 올려다보았다. 놀란 마음에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손을 감싸 쥐며, 안심시키려는 듯 웃는 얼굴로 별 거 아니라고 말했다.
“어쩌다 사냥이 취소되어서 경기장에 다녀왔어. 루미아 놈의 아들들과는 이제 힘이 없어서 못 놀아주겠소. 감당이 안 되는군. 그 무리를 만나고 오는 날은 내가 어떤 꼴로 나타나든 놀라지 마.”
발렌틴이 오늘 루미아 가, 아너슨 가의 남자들과 사냥을 간다더니, 경기장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주다 온 모양이었다.
카네시스의 열 살 된 아들은 체격이 아드리아나보다 컸다. 언젠가 공놀이를 하고 온 그 집 형제들을 봤을 때, 아드리아나는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온 줄 알았다.
“아휴. 얼굴은 어쩌다 다치셨어요?”
“이건 큰 루미아 놈이... 생각하니 또 열 받는군. 경기 매너가 그렇게 질이 나빠서 애들을 어떻게 가르치려는지.”
“아너슨 씨는 무사하세요?”
“아마 지금쯤 소니아가 펄펄 뛰고 있을걸.”
“카네시스 경, 또 한동안 광장 마을을 피해서 다니시겠네요.”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셔츠 단추를 잠그는 발렌틴을 도와주었다.
그가 옷을 다 입고 난 후, 아드리아나를 끌어안아 품 안에 가두었다.
“당신은 잘 다녀왔소?”
“네.”
머리 한구석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일은 있었다. 그것은 목 안쪽을 가볍게 할퀴고 내려간 잔가시처럼 걸리적거리다 곧 사라졌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가슴에 뺨을 대고 평온한 심장소리를 들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는 그의 말에 조금 졸리다고 웅얼거리며, 잠시 그의 허리를 안고 기대어 서 있었다. 나른함이 몸을 휘감고 졸음을 불러들였다. 서 있는 채로도 잘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
“여보.”
다음 날 아침, 아드리아나는 늦잠을 자다가 깨어나서 곁에 발렌틴이 없는 것을 보고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응접실에도 없었다. 기척은 1층에서 들려왔다.
“심각한 인물네요.”
펜의 목소리였다.
“조금만 더 털어봐도 우르르 걸려 나올 것 같습니다만, 지금까지 용케 잠잠했군요.”
“부주의하게 상대를 골라서 정부로 삼을 정도이니, 알려진 것만큼 치밀한 자는 아니겠지.”
발렌틴이 다소 피곤하게 들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심할 만도 할 걸세. 상속자인 장남이나 된다면 모를까 막내아들의 행적에는 다들 관심이 박하기도 하고, 적어도 이 나라 안에서 그들 이름에 도전하려는 자는 없을 테니.”
필시 스콰이어 공작과 마티아스에 대한 이야기인 게 틀림없었다.
‘마티아스 경을 조사하시는 건가? 혹시 나 때문에?’
아드리아나는 계단 위에 서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발을 옮겼다. 만약 자신이 들어서 곤란한 내용이라면, 이렇게 훤히 뚫린 응접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 터였다.
천천히 1층으로 내려가서 ‘여보’하고 부르며 발렌틴에게 다가갔다. 그가 아드리아나를 보고 팔을 뻗자, 펜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 준비를 돕겠다고 떠났다.
“벌써 다 주무셨소, 부인?”
발렌틴이 곁에 앉은 아드리아나의 다리를 들어서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안으며 물었다. 그는 의자 옆에 걸려 있던 얇은 담요를 아드리아나의 무릎 위에 덮어주고 잠시 끌어안고 있다가 식당으로 데려갔다.
식사가 시작되자, 그가 말을 꺼냈다.
“여보, 당분간 제스에게 와서 같이 있어달라고 하려고 하는데. 오언과 둘이서 당신을 좀 돌봐줬으면 싶어서.”
말인즉, 경호를 늘리겠다는 뜻이리라.
다만 무슨 연유로 일이 있는 제시카를 선택한 건가 의아했지만, 어쩌면 제시카가 아이넨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무인이어서 동행하여 다녀도 거창하게 이목을 끌지 않는다는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당연히 좋지만... 바쉬의 일은 쉬어도 된대요?”
“응.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잘 됐다. 펜도 누나가 와서 기쁘겠네요.”
아드리아나가 펜을 향해 웃어 보이자, 펜은 ‘예, 마님.’하고 말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역시 마티아스가 내 일을 문제 삼는 걸까. 하지만 그랬다면 리노아스 쪽으로 먼저 통보하는 게 순서일 텐데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으시고.’
아드리아나는 속으로 이런 저런 추측을 해보다가, 문득 발렌틴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달래는 듯한 투로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여보, 그 마티아스 말이야. 미모를 갖춘 여성이면 그냥 가볍게 수작을 걸어보는 모양이오. 자기 부인 외에도 애인을 여럿 두고 있다더군. 그런데 그자가 당신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나 봐. 이제 와서 뭘 어쩔 수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얼굴이나 한번 보겠다고 관심을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나 질투날 것 같아서 미리 단속 좀 하려고 하는데.”
발렌틴은 아드리아나를 겁먹지 않게 하려고 애썼지만, 역시 외간 남자가 현재 자신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으며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서는 침착하기가 어려웠다. 아드리아나는 가까스로 미소 지어보이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배를 살짝 감쌌다.
“그치만...언제까지나 그 사람을 조심하면서 지낸다는 건....”
“조금만 참아 줘. 올해 안에는 어떻게든 하려고 하고 있소.”
어떻게든? 아드리아나는 그가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마티아스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 일이 아닌가. 스콰이어라면 아이넨의 국왕 다음 가는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여보, 위험한 일 하시는 건 아니죠.”
“필요 이상의 일은 절대 하지 않을게. 일단 공작을 만나서 이야기를 잘 풀어 놓으려고 해. 단지 내가 그쪽과는 친분이 없고 여러 가지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 기간을 좀 넉넉하게 잡은 것뿐이야.”
“제 일 때문에 당신을 자꾸 신경 써 드리게 하는 것 같아요. 모두 당신에게 떠맡기기만 하고...”
아드리아나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조그맣게 말했다.
“남자들 문제이니 집안 남자가 나서는 게 자연스럽지.”
발렌틴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누가 하든 상관없지만, 당신은 지금 우리 2세를 뱃속에 키우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고, 마침 내가 요즘 한가하니까.”
그는 자기를 칭찬해주고 싶으면 파인애플이나 하나 달라며 접시를 내밀었다. 아드리아나는 임신한 뒤부터 부쩍 더 많이 먹게 되어, 몽땅 자기 접시 위에 올려놓았던 파인애플 조각을 잘라서 그에게 덜어주었다.
제시카는 다음 날 바로 입국해서 찾아왔다.
“야, 안녕, 오드리.”
“헤헤. 제스를 우리 집에서 보다니 기분이 좀 이상해.”
커다란 데다 에너지 넘치고 태평한 여자 친구가 나타나니, 어쩐지 기운이 더욱 북돋아지는 듯했다. 마치 아드리아나와 같은 호텔에 머물며 그녀가 남몰래 보호해주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때 호텔에서 보이지 않는 동안에는 제시카 혼자서 뭘 하고 지내는지 자못 궁금했었는데, 이제 한 집안에 있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는 의문이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즐거워졌다.
정작 제시카는 의문일 것도 없다며 단순한 대답을 내놓았다.
“운동하고 있었지 뭐. 난 가만히 있는 거 잘 못하거든. 근데 너 많이 먹어서 이렇게 된 거야, 아기가 커서 이렇게 된 거야?”
그녀는 아드리아나의 배를 보고, 발렌틴이 한 것과 비슷한 말을 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그 불량스러운 말투에 아드리아나가 입을 내밀자, 제시카는 어쭈 하고 인상을 구기더니 커다란 가방을 들고 1층의 자기 방을 찾아서 들어갔다.
“그건 뭐야?”
“저리 가. 아가씨는 보면 안 되는 물건이다.”
“나 이제 부인인데.”
“얌전한 부인도 보면 못 쓴다.”
제시카는 짐을 방 한쪽에 대충 세워놓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허리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나 밖에서 개 데리고 놀아도 되나?”
틀린 표현도 아닌 ‘개’라는 말에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로빈이야, 제스. 나도 금방 간식 가지고 따라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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