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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24화 (124/140)

00124 선전포고 =========================================================================

4일 후, 왕성에서 돌아온 발렌틴의 태도는 어딘지 조금 이상했다.

그는 현관으로 마중을 나온 아드리아나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포옹해주고, 아드리아나가 조르는 대로 입을 맞춰주었다. 조금 짓궂게 느껴질 정도였던 깊은 입맞춤이 아닌, 두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정중하게 입술을 겹치는 낯선 태도였다. 떨어져 지낸 동안의 안부를 나누면서도 그는 마치 이웃 귀부인에게 하듯 묘하게 예의를 차리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그러고 나서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전화기부터 찾았다. 통화 내용을 아드리아나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듯, 먼저 식당에 가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금방 갈게, 여보.”

그 후 발렌틴은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된 후에 식당으로 내려왔다.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 거다. 아주 중요하고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식사 시간을 늦추면서까지, 더군다나 함부로 전화를 걸기도 어려운 저녁 시간에 수화기를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발렌틴은 평소 통화할 때에 아드리아나가 듣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근처를 기웃거리거나 피해서 지나가려고 하면, 오히려 그가 이리 오라고 손짓해서 품 안으로 끌어 들이기도 했었다. 지금처럼 통화내용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경우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거나, 거북한 상대와의 거북한 대화가 오갈 때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봐.’

그래도 식사 중에는 평소처럼 다정했다. 그는 긴 출장을 다녀왔을 때 으레 그렇게 해왔듯이 아드리아나가 기분 좋고 건강해 보이는지 상태를 눈여겨 보았다.

“왜 그렇게 봐?”

발렌틴이 물었다. 아드리아나가 음식을 우물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핀 탓이었다.

“아까 무슨 전화 하셨어요?”

아드리아나가 새침하게 물었다.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하는 것을 이렇게 일부러 물어보는 것은 큰 의미 없이 해보는 소소한 투정이었다. 이런 때 그의 대응은 언제나, 비단 그가 다 말해주지 않는 때라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아드리아나의 믿음을 공고하게 해주었기에.

발렌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의 옆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짝 넘겨주었다.

“일을 좀 시켰소. 알아봐야 할 일이 생겨서.”

그는 살짝 가라앉은 투로 나직이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민하고 있는 일과 아드리아나를 연결지어 심사숙고할 때에 보이는 행동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아직까지 그의 거짓말을 겪어본 일이 없는데도, 만약 그가 거짓말을 한다면 자신이 알아챌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대답은 이번에도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사실 전 알아요, 발렌틴. 당신은 누군가를 조사하시려는 거예요.”

아드리아나가 입술 끝을 올리고 말한 후, 여유로운 동작으로 고기를 썰어서 입 안에 넣었다. 자신을 신통하다는 듯 바라보는 발렌틴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도 당신에 대해 꽤나 안답니다. 당신이 제 뒤를 몰래 따라다니시기를 좋아하시는 것처럼, 저도 가끔은 그러거든요.”

곁눈질로, 발렌틴의 눈이 가늘어지며 웃음기를 머금는 게 보였다.

아드리아나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왕성 회의에서 뭔가 임무를 맡으시게 된 게 틀림없어요. 그렇죠?”

“아니.”

“그게 아니라면 우연히 중요한 손님을 만나신 거예요. 그런데 그 손님에게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던 거죠.”

“그것도 틀렸소.”

발렌틴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괜히 그에게 눈을 흘긴 다음,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한층 더 도도하게 말했다.

“그럼 무도회에서 몇 명의 부인들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춤 추셨는지나 어서 이실직고하세요.”

그러자 발렌틴이 난처해하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음...여섯이었던가. 일곱?”

“뭐라고요? 우리의 생계를 쥐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다고요?”

아드리아나가 눈을 치켜뜨는 시늉을 하자, 발렌틴이 얼른 자세를 낮추며 ‘허리를 부둥켜안지는 않았소. 첫 왈츠 때 말이야.’하고 해명했다. 첫 왈츠란 참석자들끼리 악수하고 인사하며 스쳐 지나가는 일과 비슷했다. 물론 아드리아나는 그것을 물은 게 아니었다.

“그 후로는요?”

“없었소. 난 클로제 남작님을 따라서 온 영주님들과 후계자들에게 인사하러 다니기 바빴어. 근엄하신 장인어른과 함께 다니니, 아무도 감히 우리더러 나가서 춤이나 추라고 하지 않더군.”

발렌틴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아버지의 미간이 깊게 주름진 딱딱하고 심각한 얼굴 표정을 떠올리며 웃었다.

“무도회에 가실 일이 생기면 꼭 저희 아버지를 동행하시게 해야겠어요.”

기분이 좋아져서 샴페인을 홀짝이는 아드리아나를 보고, 발렌틴도 웃었다. 어느덧, 아까보다 그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

해가 지고, 두 사람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오랜만에 함께 하는 잠자리에 설레며 아드리아나는 그의 품에 꼭 안겼다. 발렌틴은 며칠째 내리는 비 때문에 아드리아나가 자는 데에 불편해하지 않을지, 실내 온도 등이 어떠한지 묻고 챙겨주었다.

포옹과 입맞춤은 몹시도 다정했지만, 그는 그 이상의 열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며칠이나 떨어져 있은 후였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아까 통화하신 일이 심각한 일이었나 봐.’

발렌틴은 그저 아드리아나를 소중하게 꼭 끌어안고 얌전히 누워 있을 뿐이었지만, 아드리아나는 그가 혼자서 심란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그가 왕성에서 첼시아와 마주쳤을지 신경이 쓰였다. 첼시아가 테스카 성에서 자신 앞에 기분을 드러냈듯이 발렌틴에게도 미련을 드러냈을지 궁금했다. 그녀가 주위를 맴돌거나 유혹하지 않았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물을 수는 없었다.

“저, 여보....”

아드리아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을 이어나가며 눈길을 내렸다.

“당신을 유혹하는 여자들도 많지 않나요?”

실제로 아드리아나 자신만 해도 가는 곳마다 온갖 유혹이 뻗쳐왔으니, 발렌틴이라고 그런 유혹으로부터 무사할 리 없었다. 제안 정도는 수도 없이 받아보았을 터였다. 그러니 이 질문도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아드리아나는 생각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의도대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 동안 어땠었는지 생각하는 듯했다.

“난 별로....”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 옛날에 하도 못되게 거절한 적이 많아서.”

“하하.”

“나, 여자 관심이 뚝 떨어지게 잘 만들어, 여보. 인기 없는 타입이야.”

발렌틴이 쑥스럽다는 듯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속삭였다. 아드리아나는 간지러움과 그의 애교 섞인 행동에 몸을 배배 꼬면서 웃었다.

그는 이내 잘 자라고 인사한 후, 금세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에게 몸을 기대고 자는 그를 안아 재우듯 등을 끌어안았다.

아마도 발렌틴이 첼시아를 못되게 거절했거나, 그녀와 마주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몇 번의 밤보다 그를 곁에 안고 있는 지금, 아드리아나는 한결 더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장맛비가 거세지다 약해지다를 반복하며 보름 가까이 이어졌다.

아드리아나는 학교의 테스트 결과를 확인하러 슈하스에 다녀와야 했지만 도무지 날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날씨가 우중충해지니 두통이 오고 속도 좋지 않아져,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비가 그친 날은 가까운 이웃을 방문하거나 가벼운 산책을 즐기며 바깥바람을 쐬었다.

하나 좋았던 것은, 궂은 날씨 때문에 발렌틴도 나갈 일이 줄어서 아드리아나의 곁에 있어주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었다.

“날이 계속 흐리니 기분이 울적해요, 여보.”

불가에 깔린 양탄자 위에서 발렌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아드리아나가 어리광을 부렸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가 만들어 놓은 아기 옷을 구경한 후 다시 차곡차곡 개는 중이었다.

“기분이 안 좋소?”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어주고 허리를 굽혀 입을 맞추었다.

“...침대로 갈까?”

아드리아나는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그와 사랑을 나눌 때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쾌락에 젖어 있을 수 있었지만, 새벽부터 아침까지 이미 그렇게 시간을 보낸 후였다.

“음. 비장의 무기를 꺼내야겠군. 다 되면 보여주려고 했는데.”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쿠션 위에 올려놓고 일어나더니 방으로 갔다. 그러고는 금방 뭔가를 들고 나왔다.

“여보, 잘했는지 봐 줘.”

그는 그것을 아드리아나의 손에 쥐어주고 나서, 다시 곁에 앉아 무릎을 내어주었다. 아드리아나는 손에 쥐여진 조그만 양말 한 짝을 들고 배가 당기도록 웃어댔다.

“한 짝은 아직 다 못했소.”

“발렌틴.... 세상에 너무 귀여워요. 너무 잘하셨어요. 대체 이걸 언제 만드셨어요?”

“당신이 늦잠 자는 동안에 당신 옆에서.”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이 만들었다는 아기 양말 한 짝을 들고 ‘세상에’를 연발하며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가 처음 자신의 곁에서 뜨개질을 따라하며 집중하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 잘하셨어요. 다 만드시고 나면 제 것도 만들어주실 거죠?”

“그건 좀 더 연습해보고.”

발렌틴이 웃고 있는 아드리아나의 뺨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그래도 적성에는 맞는 것 같소. 우리가 여자아이를 가질 때쯤이면 나도 레이스를 만들 수 있게 되어 있을 거야.”

“정말이세요? 농담 아니시고요?”

아드리아나가 싱글대며 묻자, 발렌틴이 살짝 눈썹을 움찔했다.

“음. 당신이 원한다면....”

아드리아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빗소리는 우울한 음악이 되었다가 달콤한 노랫소리가 되기도 했다. 듣는 이의 변덕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뀔 수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누운 채로 발렌틴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발렌틴은 허리를 숙여주었다가, 아드리아나가 더 가까이 끌어안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곁에 누웠다.

그에게 안겨서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달래주는 그의 손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모자람 없는 이 순간이 괜스레 슬프게 느껴졌다. 머지않아 무언가가 이 평화를 망가뜨리기 위해 끼어들어 올 것만 같았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남편이 얼마나 힘들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조차 그를 힘들게 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여보, 고마워요.”

왠지 부끄러워서 작게 말했다.

발렌틴이 조용히 웃는 숨소리를 내며 아드리아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는 마치 기도하듯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 위에 입술을 누르고 있다가, 한참 후에서야 ‘나도, 여보’하고 대답했다.

장마가 지나고 하늘이 변한 후, 아드리아나의 몸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배가 약간 볼록하게 나온 것이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거의 티가 나지 않았지만, 잘록한 허리선을 강조하는 원피스들 위로는 제법 도드라져 보였다.

“몸에 붙는 드레스는 입으면 안 되겠어. 우리 아기 답답할라. 여보, 저 배가 갑자기 너무 많이 나온 것 같지 않아요?”

“아니. 밥을 많이 먹고 난 다음하고 비슷해.”

“이이가 자꾸만 나더러 밥 많이 먹는다고 하셔.”

아드리아나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다시 엘레나와 함께 치장하는 데에 전념했다.

오랜만에 성으로 외출 하려니 귀찮은 생각도 들었지만 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테스카 성의 작은 연회였다. 장마가 끝난 후의 첫 자리여서 웬만한 이들이 빠짐없이 모여 들었는데, 역시 첼시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런 때이니 그녀도 자기 영지의 모임에 충실한 중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아드리아나는 이대로 그녀를 보게 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명, 첼의 선전포고는 아니어요. 마지막 갈등에서는 버클리 때보다 좀 더 시원한 해결을 위해 힘써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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