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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23화 (123/140)

00123 경계(발렌틴) =========================================================================

펜이 한 발 앞서서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우산을 펼쳐서 첼시아의 하녀에게 내밀자, 하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두 남자를 흘끔거리다가 제 여주인의 안색을 살폈다.

두 남자를 바라보는 첼시아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발렌틴....”

그녀의 입에서 그토록 자연스럽게 이름이 흘러나오는 것에, 발렌틴은 내심 놀랐다. 마치 바로 얼마 전까지 서로 그렇게 불러왔던 것처럼, 그녀는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이름을 불렀다.

발렌틴은 평온함을 가장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부군께서는?”

나직이 묻자, 첼시아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이 짐짓 허둥대며 입을 열었다.

“아마...밖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을 거예요.”

“그럼 오늘밤은 늦으시겠군.”

“어차피 방을 따로 받았으니까....”

첼시아가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여린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며 뺨을 붉혔다.

발렌틴은 그녀의 모습에서 시선을 조금 떨어뜨렸다. 굳은 표정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저, 당신은...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나요?”

첼시아가 조그맣게 물었다. 발렌틴은 땅바닥에 시선을 둔 채로 잠자코 서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난 아내와 같이 오지 않았소.”

“그러셨군요.”

둘 다 가만히 땅바닥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한 공간을 어지럽히지 않으려는 듯이 둘 다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있었고, 또, 서로가 자칫 실수하여 상대방을 도망치게 만들어 이 순간을 놓치지 않을까 신중했기 때문이었다.

발렌틴은 어쩐지 비현실감에 멍해지려다 똑바로 눈앞의 현실을 응시했다.

첼시아는 아드리아나와 키는 비슷했지만 더 날씬하고 단단한 몸을 가져서 상대적으로 크게 보였다.

연주회를 했던 이 뜰은 너무 넓었고 사방이 트여 있었다.

“...잠시 걷겠소?”

발렌틴은 머릿속에서 아내의 모습을 지워내며 시선을 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눈짓으로 하녀를 가리키자, 첼시아가 ‘이 애는 괜찮아요.’하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 뺨을 만지작대며 약간 망설이는 듯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근처의 조용한 오솔길을 걸었다.

발렌틴은 우산을 받치고 걷는 두 여성으로부터 약간 떨어져서 걸었다.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펜을 의식하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조금은 시간을 끌 생각이었고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머릿속이 어수선해졌기 때문이었다.

길고 깊은 한숨 끝에,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콴의 해변에서 처음 말을 걸었던 때보다는 아무래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스콰이어에서 지내고 있다 들었소.”

“...네.”

첼시아가 조그맣게 대답하고 뺨에 힘을 주었다. 흡사 발렌틴과 처음으로 둘만 대화했던 때처럼 어색해하고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일부러 혼자 남아서 발렌틴을 기다렸다. 그녀가 말하는 톤과 몸짓은 그날과 거의 완벽하게 닮아 있었다.

발렌틴이 다시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자신은 어떤 태도였었는지를 떠올렸다. 젊은 날의 자신의 솔직하고 조심성 없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지만, 첼시아는 그때 그대로인 반면, 자신은 그때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묘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스콰이어라면 테스카에서는 상당히 먼 곳이군. 2년 전인가 한 번 들렀던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가 볼 일이 없었소.”

발렌틴의 말에 첼시아가 조심스럽게 미소 지었다.

“요즘 새 도로가 생겨서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조용한 영지예요. 시내를 제외하면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명소가 많아서 휴양을 오는 분들도 많으세요.”

“거기가 롭슨 씨의 고향인가?”

“...네.”

남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첼시아의 말수가 다시 줄어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발렌틴은 열 발자국쯤 더 걷다가, 감상에 잠긴 듯 더욱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 그때랑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당신을 보니, 그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어.”

“...미안해요. 제가 당신께 너무 많은 상처를 드렸어요.”

첼시아의 목소리가 좀 더 연약해졌다. 그녀는 지난 일을 사과하고 싶어 하는 듯 발렌틴을 올려다보았다.

발렌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 일은 됐소. 나도 부족했었다는 걸 알고 있소.”

그는 말하다가 작은 건물의 처마가 시작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쉬어가자고 말하는 대신 벽을 등지고 서서 비를 피하며, 겉만 젖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 물기를 털어냈다. 그러다 펜과 눈이 마주쳤다. 왠지 흐릿하게 웃음기가 비져나왔다.

펜은 이 우스운 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시선을 돌려보니, 첼시아 또한 걸음을 멈추고 서서 보일 듯 말 듯 입술 끝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낯을 가리며 발렌틴의 옆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당신도 정말 하나도 변하시지 않았어요. 테스카 성에서 뵈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젊었던 때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첼시아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두 사람은 잠시 떨어진 거리에 나란히 선 채로 앞쪽의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묘한 정적이 이어지던 중에, 발렌틴은 첼시아의 시선이 방황하다가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꼈다.

그에 반사적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때보단 나은 인간이 되었기를 바랐는데.”

“물론 더 좋아보여요. 더 안정되셨고 여유롭게 느껴져요.”

첼시아는 얼른 그렇게 말하며 오해를 풀려고 애썼다. 그녀의 난처해하는 미소가,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듯했다.

발렌틴이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실은, 아까 어느 훤칠한 신사분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고 조금 신경이 쓰였소.”

첼시아는 좀 더 당황하며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그분은 저희 영주님의 아드님이세요. 마티아스 경을 모르셨군요. 집안일로 자주 신세를 지고 있어서 인사를 드린 것뿐이에요.”

그녀는 조금 상기된 투로, 마티아스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다.

발렌틴은 여전한 그녀의 태도에 씁쓸함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아스 경이 매력적인 여인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듣기는 하였소만.”

첼시아가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당신 부인께서야말로 미모가 빼어나신 분이던데요. 아까도 마티아스 경이 그분의 소문을 듣고 오셔서 제게 물으려 말을 거신 것뿐이에요. 당신이 그분을 두고 혼자 오셔서 몹시 실망하시던 걸요.”

그녀의 말투가 점점 빨라졌다.

발렌틴은 그녀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으려 ‘그랬군.’ 하고 작게 맞장구 쳐주었다. 그리고 허공을 응시하던 눈매를 살짝 좁혔다.

마티아스가-.

빗발이 서서히 굵어지고 있었다. 물줄기가 사위를 흐리기 시작했고 하늘은 그 어느 밤보다도 어두웠다. 바로 몇 걸음 앞에서도 상대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개를 돌려 첼시아를 바라보았다. 처마 아래에는 무방비하게 남겨진 공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 틈을 뚫고 한 발 내디뎠다. 그러자 첼시아도 머뭇거리며 자신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그 눈동자에서, 이제는 명확하게 드러난 그녀의 욕망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모습 역시도 익숙했다. 그녀는 발렌틴에게 명예와 부 어느 것도 바라지 않고 헌신했던 시절에도, 다른 한 가지 욕망에는 아주 약했다.

“내가 당신을 보고 동요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첼시아는 뜨겁게 젖은 눈동자로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발렌틴....”

“나는 다 잊지는 못했어.”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저도 그러지 못했어요. 가끔은 당신이-.”

“아내가,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될까 봐 두려워.”

발렌틴은 그녀가 너무 멀리까지 나아가기 전에, 말을 가로막았다.

아직 첼시아의 마음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남편에게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연인을 만들 생각인지, 또는 남편과 끝내려는 건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저도 당신 가정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첼시아가 눈가를 촉촉하게 빛내며 속삭였다.

발렌틴은 약간의 답답함을 느끼며 작게 어깨를 들먹였다.

첼시아에게는 상대에게 어여쁘게 보이려 자기 본심을 감추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 점을 사랑스럽게 느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진심을 알고 싶을 때에는 번번이 속수무책이 되곤 했었다.

그녀는 지금 다만 간절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깊은 한숨과 침묵 뒤, 발렌틴이 죄책감을 삼키며 낮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가정을 흔들지도 모르오.”

첼시아가 고개를 다시 떨어뜨렸다.

“롭슨 씨는...이혼할 배짱 있는 남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우린 더 이상 젊지 않아요. 서로 가문의 일을 경솔하게 좌지우지 할 수는 없잖아요, 발렌틴.”

첼시아가 달래듯 말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발렌틴은 마음 한구석을 후련하게 뚫리게 해주었다. 발렌틴은 감추고 있던 냉소를 무심코 드러내는 말투로 물었다.

“그럼 마티아스와의 일은?”

“그건....”

그녀가 놀란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발렌틴의 성급했던 재촉에, 당장이라도 연인 때처럼 신경질을 낼 듯한 예민한 빛이 눈에 스쳤다.

발렌틴은 조용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정말 그대로였다. 부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것이기를 바랐던 점들마저도 변한 구석이 없었다. 그녀를 대하며 느끼던 초조함, 죄책감, 연민, 바로 전까지 느끼고 있던 그 모든 감정이 한순간에 가슴 속에서 사라질 기분이었다. 아니, 아마도 연민만은 그대로 남으리라. 그것만은 더욱 커질지도 모를 일이다.

천천히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마티아스와의 관계, 첼시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파악했다. 그녀는 가정을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저 자신에게 느끼는 성적인 갈망을 채우는 것, 달콤했던 연애 감정을 되살려 즐기는 것을 원할 뿐이었다. 순수하고 본능적인 불륜 욕망 그 자체에 지나지 않았다.

속이 쓰렸다. 선하디 선하고 희생적이었던 일면을 가진 여자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 이 모양이라는 사실이.

“그 동안, 당신은 내게 여자를 다른 남자와 공유하는 취미가 없다는 사실을 잊었나 보군.”

발렌틴이 낮게 말했다.

첼시아가 눈을 깜박이며 양미간을 바짝 좁혔다. 현 상황에 대한 불신으로 당황하는 듯 보였다.

“이쯤하고 물러나도록 하지. 당신에게 롭슨 가의 평화를 파탄 낼 마음이 없다하니 존중하겠소. 서로 천만다행이오. 이 시간 이후로 우리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합의한 것으로 알겠소.”

아직 발렌틴의 말뜻을 이해하기가 헷갈리는 듯, 첼시아의 시선이 다시 방황했다. 추위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그녀는 어깨를 잘게 떨고 있었다.

나와 내 아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하려던 말까지는, 이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하나 더 묻겠소. 내 아내에 대한 얘기를 마티아스에게 한 적이 있소?”

확실히 해두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당장 경멸어린 시선과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내가 스콰이어로 돌아갔을 때 그도 이미 알고 있었어요.”

“혹시 그가 또 부인과 사별할 예정이라고 하던가?”

발렌틴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경악하는 첼시아를 보고서야 자신이 지나쳤음을 깨달았다. 재빨리 이성을 추스르고, 첼시아가 돌아서기 직전에 내뱉 듯 말했다.

“마티아스에게서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야. 가문의 덕으로 그런 생활을 부지하는 날도 길지 않을 테니. 그자와 내통했던 숱한 여성들 중 하나로 신문에 이름을 올리고 싶지는 않겠지.”

첼시아는 대답하지 않고 거칠게 빗물을 튀기며 멀어져갔다.

컴컴한 땅바닥을 바라보며, 발렌틴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비열한 의도로 그녀를 기만하고 못할 짓을 한 건, 마티아스에 대해 경고해준 걸로 갚았다고 여기고 싶었다. 사실은 그녀를 내버려두고 싶었다. 서로의 영역 안에서 평생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의 입을 통해 그럴 의도가 있었음을 고백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 말을 섞었다가는 이 지경이 될 것임을 뻔히 알고 있었다. 찜찜하고 개운치 않은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저분 때문에 몇 해를 앓으셨다기에, 드디어 미치셨나보다 했습니다.”

어느새 곁에 선 펜이 거세진 빗줄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발렌틴이 그를 흘긋 보고, 자신의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내가 바람피울 생각인 줄로 알았다면 말리지 않고.”

“전 치정 문제에는 좀....”

펜이 마음에도 없는 말로 발뺌하며 물러났다.

발렌틴은 작게 혀를 차고는 다시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막힌 듯 답답했던 가슴을 문질렀다.

첼시아를 만나 10년 전에 느꼈던 충격과 고통을 가슴에 되살렸던 자신의 나약함에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이걸로 완전히 괜찮아지게 될까, 자문해 봤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더 지독해진 악몽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첼시아가 자신 때문에 아드리아나를 괴롭히는 일은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마티아스라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각자의 입장이 있으니 큰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발렌틴은 비에 젖어가며 자신의 거처를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운 나쁘게 감기에라도 걸리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아드리아나와 각방을 쓰게 될 상황만은 면하고 싶었다.

“오늘 일 알면 화내겠지.”

“글쎄요.”

“돌아가면 무도회에서 몇 명의 손을 잡았냐고 물어볼 텐데.”

“그러실지도요.”

발렌틴은 자신에 대한 가벼운 혐오를 털어내며 아드리아나를 생각했다. 시리고 눅눅해진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고, 강해져야 한다고 올바르게 마음먹을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그녀의 존재를. 첼시아와 마주한 채로는 차마 미안하고 아까워 떠올리지 못하고 있던 그리움이, 바로 전까지 불편하게 얼룩졌던 가슴 속에 흠뻑 스며 들었다.

============================ 작품 후기 ============================

+발렌틴이 미련을 가졌거나 흔들렸다는 식으로 보인 부분이 있었나 봐요. 전혀 아니어요.ㅜㅜ

++발렌틴의 속내를 완벽하게 이해하신 분들의 코멘도 꽤 보이기에, 최소로 수정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간만에 코멘이 많아서 좋았다며...(울망)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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