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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22화 (122/140)

00122 경계(발렌틴) =========================================================================

왕성 연회의 첫째 날.

발렌틴은 남작가의 상속인으로서 국왕을 알현하기에 앞서, 클로제 남작 부부를 만나서 인사를 올리고 아내를 데려오지 않은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남작 부부는 자비로운 태도로 뭐든 이해할 태세로 사위를 대했다. 그들은, 첫 임신으로 매사에 신중하며 만전을 기하고 있는 딸 부부를 대견하게 여기며 아낌없는 축복의 말을 들려주었다.

클로제 남작은 후계자 지정 때에 우연히 만나서 이미 소식을 알고 있던 인사들과 먼저 안부를 나누고, 후계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전하게 된 다른 고위 귀족들에게도 발렌틴을 소개했다.

“...제 사위인 발렌틴 웨버 경입니다. 스콰이어 공작님.”

그는 몹시 어려워하며, 스콰이어에게 발렌틴을 소개했다.

이미 둘 사이에 이야기가 있었던 듯, 스콰이어는 잘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그는 단지 약간의 호기심이 느껴지는 눈길로 발렌틴의 전신을 훑었다.

세간에서는 아드리아나가 조난당했을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 일부를 잃었다가 나중에서야 자신의 신분을 기억해낸 것으로 되어 있었다. 버클리 사건 재판 때부터 그렇게 알려 놓았던 터라, 별다른 의심은 받지 않아도 되었다.

발렌틴은 스콰이어 공작의 반응이 몹시 신경 쓰였다.

필립 스콰이어 공작은 왕족 출신의 자긍심과 프라이드를 갑옷처럼 두르고 무장한 남자였다. 오래 전 왕에게 하사받은 영지에다 자신들의 성을 이름으로 붙였을 만큼의 권세를 자랑하던 가문을 지키고 있는 당주인 만큼, 아주 까다로운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5명인 자식들에게 큰 애정을 보이지 않았고, 공작으로서의 업무 외에는 가정사에서든 개인적인 사교에서든 최소한의 의무 이행만 하는 무심한 남자라는 평판을 가졌다.

게다가 세력을 지키는 데 있어 방법이 음험하고 뒤가 구린 권력가 타입이었지만, 타 세력과 쓸데없이 귀찮게 얽히는 일을 싫어해 아무데나 나서지 않는다는 게 거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아드리아나의 일만 해도 그랬다. 자기 아들과 정식으로 약혼시키는 일조차 직접 교육을 시켜본 후로 미뤘을 정도이고, 그녀를 데려가다 사고가 나자 두 가문 간의 일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고 철저히 단속했다.

당시 필립 스콰이어는 자신들의 불찰로 신붓감을 곤경에 처하게 했던 일 때문에 크게 자존심을 다쳤을 터였다. 그 증거로, 그는 남작에게 많은 위로금을 건넸고, 만약 아드리아나가 목숨만 건졌다면 자기 가문의 여자로 거둬 주리라고 약조한 후, 결국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나타났을 때에도 클로제 남작에게 천연덕스럽게 축하의 말을 건넸을 정도였다.

필립은 마티아스에게 아드리아나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발렌틴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준남작의 예우를 받으며 백수건달처럼 지내는 마티아스가 ‘아드리아나 클로제’의 소식을 접할 일도 여간해서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연회 둘째 날.

무도회의 서막이 올랐다. 첫 곡에 어울리는 일은 연회장에 발들인 모든 이의 예의였고, 모두가 특정 상대를 정하지 않는 대신에 가까운 자리에 있는 이성들과 돌아가며 짧게 파트너가 되는 것이 규칙이었다.

발렌틴은 입구에서 첼시아를 보고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며 반쯤 넋을 놓고 건성으로 왈츠 대열 안에 끼어 있었다. 스테판 못지않은 거구의 몸으로 자그마한 여성과 사뿐사뿐 스텝을 밟고 있는 카네시스가 눈에 들어왔을 때는 잠시 기분이 밝아졌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발렌틴의 다음다음 파트너가 될 여성의 자리에서 조신하게 눈을 내리깔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첼시아 때문이었다.

발렌틴은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하고 머리가 굳었다. 음악이 시작되었을 때 계산한 바로는 둘이 마주칠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파트너가 한 번 바뀌었다. 발렌틴의 앞에 선 여성은 키가 큰 젊은 부인으로, 쏜살같이 파트너가 바뀌어 나가는 이 왈츠가 즐거워죽겠다는 듯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발렌틴은 손 안에 그녀의 작은 손을 얹은 채로 천천히 그 자리를 돌며 머릿속이 뱅글뱅글 도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았지? 아니다. 자신은 그 대비책으로서 첼시아와 엮일 수 없을 자리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주인님.”

연회장 밖에 있어야 할 펜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펜은 ‘주인님, 주인님’과 ‘실례합니다.’를 번갈아 되뇌며 인파를 헤치고 들어왔다.

“잠시 나가셔야겠습니다. 아주 급한 일입니다.”

그가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말하기에, 발렌틴마저 당황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발렌틴은 혹시 아내에게 무슨 연락이라도 온 건가, 산달이 아직 7개월이나 남았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펜의 뒤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펜은 정원수가 우거진 좁은 길을 지나서, 한산한 건물 뒤편으로 발렌틴을 데려갔다.

“어, 웨버 경.”

정원수로 거의 가려진 긴 의자에, 케이드 왕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종이 봉투 안에 담긴 과자를 꺼내 먹고 있다가, 발렌틴을 발견하더니 씩 웃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왕자님. 어찌 이런 곳에 계십니까?”

발렌틴은 케이드에게 예를 올린 후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갔다. 오래 전에 케이드가 원하는 배를 구해준 인연으로 몇 번인가 식사를 같이 하며 좋은 관계가 되어 있기는 했었지만, 이런 식으로 급하게 긴히 불러내서 할 얘기가 있으리라고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케이드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경을 모셔오라고 한 게 아니오. 난 그냥 춤추기 싫어서 여기 숨어 있었지. 참, 고맙게도 펜이 내게 연회장 안의 간식을 가져다주었소. 과자는 참 맛있구려.”

그의 말을 듣고, 발렌틴이 멍하게 펜을 바라보았다.

펜이 겸연쩍어하며 입을 열었다.

“그, 제가 우연히 창문으로 봤는데, 웨버 경께서도 춤추는 게 싫으신 듯 보여서 말입니다.”

아마도 그가 첼시아를 본 것이리라.

발렌틴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격려하듯 펜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은 노예를 두셨소, 웨버 경..”

“예. 좋은 노예지요.”

발렌틴이 쓴웃음을 지며 긴 의자 한쪽에 앉았다. 왕자의 앞이니 몸가짐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허리를 펴고 있기가 무거워져 팔꿈치를 허벅지 위에 기대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그 동안 생각을 해봤는데.”

케이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웨버 경은 아무래도 투스미아 국왕의 숨겨둔 늦둥이 또는 손자쯤 되는 것 같소. 브렛 왕자의 그 기이한 존재도 그렇고, 그 국왕도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거든.”

“...전에는 마력으로 배를 짓는 위대한 조선공의 후예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아. 이번에도 틀렸다면 내가 투스미아쪽을 좀 더 여행해 봐야겠소.”

케이드는 만날 때마다의 인사라도 되는 듯이 허무맹랑한 추측을 들려준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다시 과자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더 가져다 올릴까요, 왕자님?”

펜이 공손하게 물었다. 케이드의 시종은 얼굴이 알려져 있어서, 그의 곁에 얌전히 숨어 있는 처지였다.

“아, 역시 좋은 노예라니까. 내 언젠가 꼭 보상해 주겠네.”

케이드가 유쾌하게 말하고서, 펜에게 빈 봉투를 내밀었다.

발렌틴은 얼마간 그 자리에서 케이드와 같이 뭉그적대고 있다가, 연회 휴식 시간이 되었을 즈음에 몸을 일으켰다.

기나긴 첫 왈츠는 끝나 있었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어울리고 있었다. 발렌틴은 자신이 대화 상대 노릇을 해 줘야 할 그룹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침 그쪽에서도 발렌틴을 발견하고 반기며 손을 들었다.

발렌틴은 지인에게 향하며, 혹시 필립이 안에 있는지 슬쩍 훑어보다가 첼시아를 발견했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 잊고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10년의 시간도 부족했던 건지 가슴이 시큰하게 아려왔다.

첼시아는 테스카 후작 영애의 결혼식 때 함께 왔던 남편과 같이 있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여성 몇 명을 데리고서 한 신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잘생긴 외모에 범상치 않은 풍모를 가진 남자였다.

‘저 자....’

발렌틴은 남자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이목구비의 일부가 필립을 약간 닮았으며, 왠지 모를 불길함을 풍기고 있었다.

“야아, 안 그래도 찾고 있었소, 웨버 경. 부인은 왜 모셔오지 않으셨습니까? 다정하신 두 분을 내 아내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요.”

지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기에, 발렌틴은 첼시아 쪽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지인과 악수를 나누었다.

어쩐지 첼시아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있던 사내의 시선도.

어느 쪽의 것인지, 눈길이 뜨거울 정도로 강렬하게 느껴졌다.

*

그날 저녁, 발렌틴은 작위 계승 예정자 간의 회의를 마치고 아는 이에게 부탁해서 아드리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날 이른 새벽에 보고 난 후였으니, 만으로 이틀이 조금 안 되게 떨어져 있던 셈이었다.

반가워하며 기뻐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니, 당장 품 안에 안고 싶어서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발렌틴은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애써 말투를 가다듬었다.

“별일은 없소? 잘 지내고 있지?”

“네, 여보. 보고 싶어요.”

수화기에 매달려 있는 아내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가 이런 때에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두 손을 모아서 수화기를 꼭 쥐고 있으리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틀만 더 지나면.

“내 아들한테도 안부 전해 줘. 아빠가 보고 싶어한다고.”

“하하. 우리 아기 보시려면 많이 기다리셔야 해요. 아직 조그맣지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중이니 기다리세요. 제가 많이 먹고 당신처럼 커다랗고 듬직한 사나이로 키워드릴게요.”

아드리아나가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어쩐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벅찬 것인지 답답한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쉽게 동요하는 자신을 듬직하다고 말하며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여주는 아내.

발렌틴은 아까 본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첼시아.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던 사내.

“...금방 돌아갈게. 그리고 오드리, 내일부터 어디 나가지 말고 기다려요. 집안일을 좀 부탁하고 싶어. 자세한 건 집에 가서 얘기해줄게.”

발렌틴이 나직이 얘기하고 플레밍을 바꿔달라하자, 아드리아나는 금세 평소 같지 않은 발렌틴의 상태를 눈치 챈 듯 걱정하며 무슨 일이 있냐고 말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를 겨우 안심시켜놓고 플레밍에게 용건을 전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바깥에서는 폭죽놀이와 야외 음악회가 끝나가고 있었다.

성대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축제의 풍경, 달콤한 술과 환상에 취한 남녀, 그 소란한 한편에서 각자 비밀스러운 계획을 도모하는 이들, 그 속에서 발렌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쉬게 할 수 있는 시간만 기다렸다.

어서 밤이 되고, 그 다음 밤이 지나가길 바랐다.

얼마 후, 발렌틴은 오케스트라가 물러가고 적막해진 후원에 남아서 빈 의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발렌틴의 대각선 앞으로 멀찍이 떨어진 의자에 작은 무리 하나가 더 남아 있었다.

첼시아가 생각에 잠긴 듯, 오케스트라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며 자기 하녀와 남아 있었다.

설마 했던 의혹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에 난처해하며, 첼시아가 손수건을 펼쳐서 머리카락을 가렸다. 그럼에도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녀는 무방비하며 연약한 그녀 특유의 분위기를 드러냈다. 열다섯의 발렌틴이 애틋하게 정을 주었던 그때와 같은 처연하고도 여린 모습 그대로였다.

한순간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렌틴은 다시금 심장이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 작품 후기 ============================

고맙습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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