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보다 아름다운-121화 (121/140)

00121  믿음  =========================================================================

“웨버 경, 무도회에 우리 오드리는 안 데려가시나요?”

웬디가 테라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스케치를 하던 손을 멈추고 물었다. 발렌틴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두 여자들로부터 거리를 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점잖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데려갈 거란다. 거기 가면 오드리가 다른 남자들이랑 춤 춰 줘야 해서 아저씨 기분 나빠져.”

그의 말에 웬디는 아드리아나를 보며 까르르 웃었고,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저기 계신 아저씨는 다른 여자들하고 한 번도 춤 안 추실 건가봐. 내게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 보면 말이야.”

“절대로 안 추실 거예요, 웨버 경?”

“글쎄.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절대로라고는 말 못 하겠구나. 반드시 필요할 때에만....”

아드리아나가 눈을 더욱 게슴츠레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가령 오드리와 나의 생계를 위해서 피치 못할 때라든지....”

발렌틴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줄어들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약간 멍한 얼굴로 뒷말을 고민하는 그를 외면하고 웬디에게 말을 걸었다.

“웬디야, 우리는 그때 소풍갈까? 헤이즐네랑 같이 바닷가에 놀러 가자.”

“...여보.”

“예쁜 수영복도 사야겠다. 일광욕도 하고 수영도 즐기려면 말이야. 웬디랑 내 거랑 하나씩 사놔야겠네.”

“오드리.”

웬디는 어느새 모르는 척 종이 위로 시선을 옮기고 다시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은 곧 웃음이 터질 듯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당신 건 없어요, 발렌틴. 그때 당신은 다른 여자분들 허리를 안고 계시느라 바쁘실 테니까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애 듣는 앞에서.”

“웬디도 다 알아요. 왈츠를 추려면 허리를 잡아야 하잖아요? 손도 꼭 잡고요.”

“꼭 잡지는 않지. 사실 난 아예 상대방의 몸에 손대지 않을 수도 있소.”

“세상에, 저분이 이젠 거짓말까지 하셔. 어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렌틴이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아드리아나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는 두 팔로 허리를 감싸 안고 치근덕거리며 들러붙어서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 위에 뺨을 기댔다. 그러고는 레코드에서 나오고 있는 클래식 곡에 맞추어 느리게 제자리걸음을 했다.

“이렇게 하면 손은 안 대도 되지, 여보. 난 이렇게 하는 게 제일 좋아.”

“밖에 나가서 이렇게 하시겠다고요?”

아드리아나가 황당해서 웃느라 면박도 주지 못하고 있는 동안, 발렌틴이 아드리아나를 끌어안은 채로 애원하듯 귓가에 속삭였다.

“수영복 입지 마, 오드리.”

“여, 여보. 귀 간지러워요.”

“나도 데려가. 웬디랑 놀러가는 데 나도 껴줘.”

“알았어요, 데려가 드릴 게요. 아이 참, 이거 좀 놔주세요.”

간지럽고 숨이 차서 헐떡이자, 발렌틴이 겨우 아드리아나를 풀어주었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떨어진 후에도 옆구리와 귓가가 계속 간지러운 기분이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을 보고 헤실헤실 웃는 웬디에게 ‘저이가 은근슬쩍 이렇게 하셨다니까’하며 옆구리를 간질였다.

여자 둘이서 웃고 뒹구는 동안, 발렌틴은 다시 테이블 앞에 가서 앉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참, 여보. 웬디가 선물을 가져왔어요.”

아드리아나가 테라스 의자 위에 놓여 있던 액자를 집어들고 발렌틴에게 다가갔다. 액자의 그림을 본 발렌틴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걸 웬디가 그렸다고?”

“네. 전 정말 깜짝 놀랐어요. 너무 예쁘죠?”

그림은 웨버 가의 정원 풍경을 그린 수채화였다. 그 안에는 지금보다 작고 어린 로빈도 그려져 있었다. 웬디가 처음 놀러왔을 때의 풍경을 그린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크레파스 같은 걸로도 꽤 잘 그리긴 했어요. 이 정도일지는 몰랐지만요.”

“흠. 웬디는 화가가 꿈이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웬디가 부끄러워하며 조그맣게 말하고 입술을 오므렸다.

“저번 전시회 결과는 아직 안 나왔다고 했지?”

발렌틴이 다시금 물었다.

전국 규모로 열리는 우수 학생 전시회에는 현역 화가들과 후원자들도 발걸음을 했는데, 작품이 눈에 들면 개인적으로 문하가 되거나 후원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드물게는 그해의 신인상을 받아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대단하다. 웬디도 대단한 사람이 되었구나. 선생님이 수학 경시대회에서도 틀림없이 상을 탈 거라고 하던데.”

아드리아나가 웬디의 담임교사를 만났을 때, 그녀는 웬디를 아주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뭐든 열심히 하는 훌륭한 학생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만일 다른 학생이었다면, 그들 부모와 가문 전체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거라는 말하며 둘이서 눈시울을 붉혔었다. 웬디에게는 그런 가족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우리 웬디한테 상 줘야겠다. 이렇게 멋있는 그림도 줬으니 보답을 해야지. 뭐 갖고 싶은 거 없니? 나 비자금 많아.”

“그건 그냥 오드리네 아가한테 주는 선물이야. 엄마랑 아빠를 그려주고 싶었는데 난 사람은 별로 예쁘게 못 그리거든. 아가네 집이랑 강아지를 그려주면 좋을 것 같아서...”

웬디가 뺨을 붉히며 새초롬하게 말했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턱을 괸 채로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던 발렌틴도 아드리아나를 거들었다.

“그래, 뭔가 생각해 두렴. 웬디가 아저씨 아기한테 좋은 선물을 줬으니까, 아저씨도 웬디한테 선물을 주고 싶어.”

“예쁜 드레스 사달라고 하면 어때? 상 받으러 갈 때 입어야 하잖아.”

아드리아나가 옆에서 부추기며 속닥대자, 웬디가 부끄러운 듯 몸을 꼬며 작게 중얼거렸다.

“상 받을지 안 받을지도 모르는 걸.”

“상 못 받으면 나랑 바다에 수영하러 갈 때 입지, 뭐.”

“오드리. 바다에는 가도 좋으니까 수영복 입지 마.”

발렌틴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금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싫어하는 일을 굳이 할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음에도, 그가 안달하는 게 좋아서 괜히 싱글대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주말마다 웬디를 자주 집으로 데려왔다.

발렌틴은 ‘대화할 수 있는 다 큰 자식’에 대한 소망이 어느 정도 충족되는 기분으로 즐거운 모양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웬디가 그를 ‘웨버 경’이나 ‘형부’로 지칭하는데도, 발렌틴이 ‘아저씨’라는 자칭을 고수하는 걸 보면서 속으로 웃었다.

롭슨과는 테스카 성에서 처음 만난 그이후로 다시 마주치지 않았다. 아마도 섀넌의 결혼식 때문에 잠깐 머물다가 자기 집이 있는 스콰이어로 돌아간 듯했다. 라르슨은 여전히 무법자 소리를 들으며 테스카를 활보하고 있고, 다른 두 파벌은 슬슬 전처럼 티격태격하기 시작했으며, 아드리아나는 어떤 불가침영역 같은 기묘한 존재로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7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아드리아나의 심리 상태는 거의 안정이 되어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가 아니면 입덧도 거의 없었고 식욕도 나쁘지 않았다. 한 번은 모임에 나온 민스터에게도 자신이 상담 받았던 선생님을 소개시켜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우울증을 낫게 하는 데에는 주변 환경과 사람들의 도움도 절실했으므로.

“우리 아기 잘 크고 있겠지? 당신 배는 언제 나오려나.”

발렌틴은 자고 일어나면 꼭 아드리아나를 끌어안고 배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3개월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아직 배가 불러오는 기미가 없어서 임산부 티가 나지는 않았다.

“다른 데도 전체적으로 살이 쪄서 표시가 안 나는 걸까요?”

아드리아나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뚱뚱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몸매를 가꾸고 신경 쓰는 늘씬한 아가씨들과는 한눈에 비교가 될 정도로 통통해진 듯했다.

“체중 유지한다고 덜 먹으면 우리 아기한테 나쁠까 봐 그러지도 못하겠어요.”

“아직 괜찮아. 위험해 보이면 그때 도와줄게.”

발렌틴은 자기 어머니가 그리 크지 않은 자기를 임신했을 때에도 살이 많이 쪘었는데 출산 후 금방 돌아왔다며 대수롭지 않아 했다.

“으.... 그래도 뚱뚱해지기는 싫어요. 당신 곁에 있으면 키도 더 작아보이는데 옆으로 뚱뚱해지기까지 하면....”

“그럼 습관처럼 먹는 군것질만 줄여 봐. 아까 낮에도 당신이 로빈 옆에서 뭘 하도 먹기에, 난 당신이 로빈 먹이를 먹는 줄 알고 소스라칠 뻔했소.”

“여보. 그건 당신 집에서 보내주신 육포였단 말이에요. 아무렴 제가 개밥까지 탐낼까 봐요?”

“덩치도 비슷하니 둘이 나란히 앉아서 뭘 우물거리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몰라요. 딴소리 하지 마세요.”

아드리아나는 삐친 척하면서도 그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발렌틴과 함께 있으면 행복했고, 아기는 뱃속에서 건강히 잘 자라고 있었고, 부부가 각자 하는 일들도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웬디와 아너슨 부부를 불러서 바다에 수영하러 가는 것은, 왕실 연회 기간이 끝난 후에, 당연히 발렌틴과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다.

“다녀올게. 여보, 무슨 일이 있으면 이쪽으로 전화해. 몇 시간 내에 내게 전해줄 거야.”

“알겠어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발렌틴은 왕실 연회 기간이 시작되자, 정말로 혼자서 참석하겠다며 집을 나섰다.

4일이나 되는 일정이었다.

아드리아나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전에 농담처럼 말했던 무도회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실 연회 기간에 맞추어 성에서 따로 회의를 하는데, 그 일정이 꽤 타이트해서 개인시간이 거의 안 난다는 이유였다.

“나흘이나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면 썩 내키지는 않지만,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같이 일을 하기에는 당신 몸이 걱정이고, 그렇다고 방에 꼭꼭 숨겨놓기도 그렇소. 내가 바빠서 잘 때에나 겨우 얼굴을 보게 될 테니.”

발렌틴은 그럴 거면 차라리 그 불편한 곳에 따라가 머물게 하는 것보다 테스카의 집에서 편히 쉬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말한 이유만으로도 걱정하고 미안해할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서, 테스카에 남아 평소처럼 할 일을 하며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발렌틴이 떠나기로 한 날 새벽, 아드리아나는 무의식 속에서 경계하고 있던 일을 꿈속에서 보았다.

롭슨이 무도회에서 발렌틴을 기다리고 있다가 유혹하는 꿈이었다. 그녀는 실제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젊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발렌틴에게 안겨서 왈츠를 추고 손을 잡았다. 그녀가 그의 손을 이끌어 자기 드레스 위로 드러난 젖가슴 위를 만지게 했을 때, 아드리아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동이 트기 전이었고, 발렌틴은 아드리아나를 안은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조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표정도 느낌도. 꿈속의 그는 가짜에 불과했다.

‘...이이는 유혹을 받아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야.’

발렌틴이 전 약혼녀와 왈츠를 추는 일 따위는 절대 없을 것이다. 아드리아나는 오로지 그렇게 그를 믿을 뿐, ‘전에 아시던 여성과는 춤추시면 안 돼요.’라고 말할 엄두를 낼 수는 없었다.

“휴. 나흘이라니....”

“쓸쓸하시죠, 마님.”

발렌틴이 수도로 떠난 후, 엘레나가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부터는 발렌틴이 거의 외박이 필요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드리아나는 이제 자신이 완전히 안정되었으며 그와 며칠 떨어져 있는 정도는 잘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와 작별하고 돌아서서 얼마 되지도 않아서 한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4일이라는 시간이 끔찍할 만큼 더디게 지나갈 것임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따라간다고 할 걸 그랬나?”

초조해하는 모습이 다 드러나고 있는데 아닌 척 고집 부리는 것도 머쓱해,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엘레나도 ‘이러나 저러나 어차피 주인님은 걱정하셨을 테니 같이 계시는 편이 나을지도’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발렌틴이 집을 비운 첫날은 영영 저물지 않을 듯 시간을 끌다가 밤을 맞이했다.

그리고 둘째날 저녁, 벌써 지칠 대로 지친 마음을 달래가며 기다리고 있는 아드리아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마님, 주인님이세요!”

엘레나가 반가워하는 목소리로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아드리아나도 환하게 웃음 지으며 전화기 앞으로 갔다.

“웬일이세요, 여보.”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울림 좋은 저음이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반가움과 그리움에 어쩔 줄 모르고 ‘여보...’하고 부를 뿐, 말을 잇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요번 화는 좀 달달했던 듯한데 어떠셨을지. 앞으로 된통 혼날 인물도 남았사옵니다.

읽어주시고 흔적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ㅜ.ㅜ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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