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9 믿음 =========================================================================
“웨버 경, 오늘은 경께서 저를 좀 상대해 주셔야겠습니다.”
식사 후에는 레이넌이 싱글대며 다가오더니 발렌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을 걸었다. 결혼식 피로연 때 발렌틴이 ‘장인과의 대결’ 대신 제시카를 상대했던 일을 두고 ‘검술 대회 상위권자를 이기시지 않았느냐’며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두 남자의 분위기를 살폈다.
왕국 최고의 실력자라는 명성을 갖고, 검술 시합에서 해마다 배출되는 우승자들과 대결하여도 져 본 역사가 없다는 레이넌이었다. 발렌틴도 열다섯 때까지는 바쉬에서 검술을 포함한 일반적인 교양을 익혔다지만 어차피 실력 차이는 어른과 아이 수준일 터였고, 아드리아나의 걱정은 다른 것보다도 신장 190대 중반의 다부진 체격을 가진 레이넌이 헛손질이라도 해서 발렌틴에게 상처를 입히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매 식사 시간마다 성 안의 술을 쭉쭉 축내는 레이넌의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던 결과였다.
둘째 왕자 브렛이 상냥하게도 아드리아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저희 형님께서 종종 과음하시고 취하실 때도 있긴 합니다만 지금은 괜찮아 보입니다, 부인. 취할 만큼 드시면 티가 많이 나는 분이거든요. 금방 눈빛이 나빠지시죠.”
발렌틴도 평소 내빼기 좋아하는 사람답지 않게 선뜻 그의 하인이 내민 검을 받아들었다.
“왕세자 저하의 검을 받아볼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사실 발렌틴으로서는 사양할 수 없는 상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조국의 왕세자로서 경의하며 순종해야 함은 물론이었고, 지금 자기가 어떤 자격자로서 이런 친근한 제의를 받게 된 건지 이해하고 있을 테니까.
아드리아나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이미 전부터 레이넌이 발렌틴을 자기 신하로 점찍어두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살살 해주세요, 레이넌 왕세자님. 웨버 경의 부인과 아기가 지켜보고 있답니다.”
엘레나가 입 앞에 손을 모으고 말했다. 그 말에 발렌틴이 아드리아나 쪽을 보더니 멋쩍은 듯 웃었다. 아드리아나도 두 사람에게 부상이 없도록 주의해달라고 당부한 후, 하인들과 브렛 왕자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한순간이나마 우려했던 일이 무색하게, 레이넌은 뛰어난 무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문외한인 아드리아나가 보기에도,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과 실력 차이가 극명해 보였다. 만약 그가 왕세자로 태어나지 못했다면 검술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구해 이름을 날릴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얼마 후에는 레이넌 본인도 만족한 듯한 얼굴로 검을 검집에 돌려 넣었다. 그러고 나서 쾌활하게 말했다.
“경은 의심할 바 없는 북국인입니다. 꽁생원들처럼 좁디좁은 사무실에 궁둥이 붙이고 앉아서 장부 들여다보는 일이나 여자들 파티에 따라다니며 남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일이나, 그런 것보다는 자기 영토를 넓히고 식구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에 힘쓰며 존경받는 생활이 더 잘 맞지 않을지?”
그는 호흡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여유만만하게 떠들었다. 반면에 발렌틴은 땀으로 엉망이 되어서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제게 누구네와 전쟁을 해서 영토를 넓히라는 말씀이십니까, 저하. 저와 아내는 지금도 많이 먹습니다.”
“하하. 못 알아듣는 척을 하시는군.”
레이넌이 검을 하인에게 건네며 웃었다.
“바쉬 산의 범은 점잖은 평화주의자라고 불립니다.. 먹이 사냥 외에는 게으르고 얌전한 데다 사람이 다가가 좀 귀찮게 해도 덤비지 않고 숨어버리니. 그렇다고 놈들의 본성을 모르는 이는 없죠. 이시스 전체를 마당으로 삼고 천적도 없이 호령하는 족속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지고 나는 놈들입니다.”
그가 떠들다가 발렌틴을 쳐다보았다.
“그런 놈이 길을 못 찾고 방황하다 이리 떼 노니는 마당에서 얹혀 산다고 생각하면, 그 점잖고 말 못하는 짐승이 얼마나 갑갑할지 제가 마음이 아플 정도입니다. 내 눈에는 경도 말 못하는 짐승으로 보입니다.”
“형님.”
브렛이 주의를 주며 끼어들었다. 그러나 레이넌은 아랑곳 않고 떠들었다.
“아이넨에서도 명성을 얻으며 잘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설마하니 평생을 바라보고 머무는 것은 아닐 테지요. 거긴 두 분께는 이리들의 마당 같은 곳일 텐데요. 발달된 위대한 문명이 혼을 빼놓는 도시라고 극찬하는 이도 있지만, 말 그대로 혼 빠진 껍데기 인간을 양산하기 좋겠더군요.”
그는 아이넨의 피가 섞인 두 사람 앞에서 거침없이 다 안다는 듯 신랄하게 말했다. 특히나 아이넨에서 태어난 아드리아나에게 있어서는 그곳이 남의 집 마당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어쩐지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현재 부부가 테스카에서 잘 지내고 있지만, 처음 만났을 당시에만 해도 서로가 그 장소에 부유하며 떠도는 이방인이라고 느꼈던 사실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형님, 웨버 경은 금수가 아니라 문명인입니다. 아이넨에서도 훌륭히 적응하고 계실 뿐더러, 그곳 생활에도 형님께서 모르는 귀중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브렛. 난 그저 내 백성이 내 마당에서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거야.”
“제발, 형님.”
브렛은 덧붙여 ‘아직 형님 백성이 아니라 아버지의 백성입니다’하고 지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발렌틴은 모호하게 웃기만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폐하께서 내리신 귀중한 영지 하나를 말아먹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아쉽게도 지금은 영주 혼자서 영지를 해먹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레이넌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바쉬에는 관리 계층의 탄탄한 기반이 잘 다져져 있으니 그들을 계속 충성하게 하고 잘 부려먹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평화의 시대니 군주들은 무엇보다도 얼굴 마담 노릇에 탁월한 편이 낫죠. 안팎의 호감과 신뢰를 이어나갈 보증으로 타고난 혈통만 한 것도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거저먹고 있고.”
물론 그가 거저먹고 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가벼운 말만으로는 통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레이넌이 약간 정색하며 말을 이었다.
“엘릭 경은 보기 드문 훌륭한 정치인입니다. 단지 군주감이 아닐 뿐이죠. 사람을 끄는 힘이 부족하다는 점이나 루미아 공작을 닮은 혈육이 아니라는 핸디캡은 정치 수완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지지도를 업고 나설 후대에 가서는 커다란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엘릭 경이 관리자로 남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랄까요.”
순간, 아드리아나를 포함해 자리에 있던 몇 명은 듣는 이가 없는지 살피려는 듯 주변을 슬며시 훑었다.
레이넌은 그런 분위기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천하의 바쉬 공작님이라도 차마 못 하시는 말씀이 있는 듯해, 내가 대신 말해준 것뿐입니다. 두 후계자가 다 알아버린 사실을 쉬쉬하면 뭘 하나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수돗가를 향해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브렛이 대신 사과하며 그 뒤를 따랐다.
아드리아나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서 있다가, 발렌틴에게 다가가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다.
갑자기 그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압도적인 지지가 남아있는 성 내의 분위기, 차기 국왕이 될 확률이 백에 가깝다는 왕세자의 노골적인 권유, 그리고 엘릭 경의 은근한 의사 표현....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이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한 압박감을 받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여보, 목욕을 하러 올라가실 거죠? 제가 씻겨 드릴까요?”
마주 서서 살짝 몸을 붙이고 올려다보자, 자기 턱을 매만지던 발렌틴이 손을 딱 멈추었다.
“오늘은 같이 낮잠을 잘 여유까지는 없을 거예요. 그러니 손님을 만나러 가시기 전에 당신을 씻겨드릴게요. 그래도 되죠, 여보?”
하인들의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 어딘가를 향해 돌아다녔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눈만 끔뻑이고 있는 발렌틴을 보고 생긋 웃어보였다. 여기서 대답을 하라고 하면, 그에게 압박감만 늘려주는 셈이 될 듯했다. 그래서 바로 그의 손을 잡고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
다음날 오전에는 테스카로 돌아가기 위한 짐을 꾸렸다. 로아타르에서 형제들과 놀던 로빈은 전날 저녁에 스테판이 바쉬 성으로 데려와주었다.
“잘 놀았니, 로빈? 형제들과 헤어져서 아쉬웠겠다.”
로빈의 표정만 봐서는 아드리아나와 재회하여 마냥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아쉬웠던 것은 아드리아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건강하세요, 곧 또 뵈러 오겠습니다.”
아드리아나와 발렌틴은 여느 때와 같은 작별의 인사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바쉬에 완전히 자리 잡게 될지, 아직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투스미아에서 살게 되면 웬디는 어쩌나. 지금만큼 챙겨주지는 못하게 될 텐데. 리노아스의 일을 돌보러 다니기도 힘들어지겠지. 계속 테스카에 살더라도 투스미아의 일을 돌보러 수고를 들여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의 어깨에 기대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웬디가 아기 언제 생기냐고 그랬었는데....’
“정말 사내아이일까요?”
문득 눈을 뜨고 묻자, 발렌틴이 고개를 돌려서 아드리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럴 것 같아. 그 의원이 예언자는 아니지만 산모를 보면 8, 9할은 맞춘다고 하더군. 영부인께서 우리 어머니를 가지셨을 적에도 남들은 다 아들일 거라고 했는데 그분이 딸이라고 추측하셨다는 말을 들었소. 장군감이라는 말이야 당신이 그날 하도 씩씩하게 돌아다녔다고 하니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인 듯했지만.”
“얼른 보고 싶어요. 어떻게 생긴 아이일지 궁금해요.”
“당신이랑 나를 닮았겠지, 뭐.”
발렌틴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띤 얼굴로 건성인 대답을 했다.
“전 눈이 조금 쳐졌고 당신은 이렇게 사납게 생기셨는데, 그럼 우리 아기는 중간일까요?”
“사내애는 너무 순하게 생기면 안 돼. 얕잡아 보인다고.”
“그럼 절 닮아버리면 어떻게 해요?”
“음....”
발렌틴은 곁눈질로 아드리아나를 쳐다보다가 ‘그럼 귀엽게 생기겠지.’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말로는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듬뿍 사랑해주는 아빠가 될 거라고 아드리아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시간이 빨리 지났으면 좋겠어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발렌틴이 작게 웃었다. 그는 한숨 자고 나면 시간이 좀 더 지나 있을 거라며 아드리아나를 안고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
투스미아 여행을 마치고 오는 길이 늘 어딘지 거북했던 데에는, 미뤄둔 일들이 몰아서 들이닥치리라는 당연한 예상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발렌틴은 바빠져서 토요일까지 일을 했고 일요일에도 중요한 손님을 집으로 초대했다. 아드리아나는 슈하스의 학교에 테스트 방법에 대해 논의하러 다녀온 후로는 딱히 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 있거나 발렌틴의 일을 도왔다. 얼마간은 아직 휴가가 끝나지 않은 듯, 특히 특정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귀환을 알리지 않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먼저 글라디스의 첼로 레슨 부탁을 거절한 일도 있는 데다가, 그녀의 딸 결혼식에마저 참석하지 못하였으니 슬슬 얼굴을 비춰야 할 터였다.
테스카 성에 가보기는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중, 아드리아나는 집으로 초대해 모임을 갖고 있던 부인들의 일정을 듣고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웨버 부인! 어서 오세요.”
부인들이 모인 응접실로 들어서자, 새신부가 된 섀넌이 제일 먼저 나와서 인사했다. 그녀도 새신랑과 함께 테스카의 성에서 살 모양이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인사가 너무 늦어 죄송해요.”
“고마워요. 웨버 경께 들었어요. 투스미아의 왕자님들께서 부인을 만나자고 하셔서 다녀오셨다면서요? 너무 너무 부러워요. 저도 꼭 한 번 왕자님들을 뵙고 싶네요.”
섀넌이 아직 소녀처럼 보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응접실 안 부인들의 눈길이 아드리아나에게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섀넌처럼 호의로 넘쳐 보이지는 않았을망정, 호기심으로 차 있음은 비슷해 보였다.
“왕자님들과는 어떻게 아시는 사이세요? 웨버 경의 본가가 그쪽이라는 말씀은 들었지만, 대단한 가문들과 친분을 나누고 계신가 봐요.”
아드리아나는 다만 겸손하게 미소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릴 겸, 섀넌의 결혼식 때 들려주지 못한 연주곡을 한 곡 들려주었다. 섀넌은 기뻐하며 남편과 함께 들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조만간 다음 기회를 또 갖게 해달라고 청했다.
“저도 이제 부인들과 사교를 할 수 있는 유부녀가 되었으니까요. 웨버 부인과 가까워지고 싶어요.”
아드리아나를 향한 섀넌의 적극적인 구애를, 글라디스는 말없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뭔가 그녀의 페이스대로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정도는 부담 없이 베풀 수 있는 호의 축에 속했다. 필요 이상 말리지 않도록 조심하기만 한다면.
첼로를 켜는 동안, 부인 몇 명인가 더 응접실로 들어왔다. 근처에 있다가 연주를 듣기 위해 들어온 듯했다. 부인들 대부분은 소파나 의자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고상한 자태를 뽐내려는 듯한 동작으로 부채질을 하며 눈을 내리뜨고 있었는데, 조용히 아드리아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부인도 있었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아드리아나의 외모를 빤히 쳐다보는 일이 드물지 않았기에,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드리아나의 연주가 끝난 후에도 다른 부인들의 수다에 어울리지 않고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아드리아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섀넌은 다른 부인들의 박수 소리가 그친 후까지 감탄하는 얼굴로 길게 손뼉을 치다가, 새로 들어온 부인들을 보고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웨버 부인. 이쪽은 제 새로운 친구예요. 롭슨 부인이시랍니다.”
아까부터 다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 부인이었다. 나이는 서른쯤 될 듯 아드리아나보다는 연배가 있어 보였지만, 선해 보이는 동그란 눈매와 작은 입술에 귀염성이 있었고, 젊은 아가씨들처럼 몸매가 아름다운 편이었다.
롭슨이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그녀는 곧바로 아드리아나로부터 시선을 피했고, 입가는 아까보다 좀 더 굳은 듯 보였다.
아드리아나도 똑같이 인사하고 나서 바로 눈길을 거두었다.
그녀의 모습을 눈에 오래 담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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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평쿠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