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8 믿음 =========================================================================
발렌틴은 회의에 갔다가 밤 9시가 다 되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오자마자 커다란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수심에 잠기려는 듯했다. 그러다가는 아드리아나를 불러서 무릎 위에다 앉혀 놓고, 뜬금없이 어린 시절에 대해 물었다.
그가 궁금해 하는 건 사소한 부분이었다. 하루 일과로 뭘 하며 지냈는지, 뭘 좋아했으며 어떤 꿈을 꾸었는지.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에게 재미있었던 일화라도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과거의 기억을 정리해보며 애를 먹어야 했다. 평범하고 따분하게 들릴 시골 귀족 영애의 삶이었으니까. 그 시절의 특징적인 기억이랄 만한 것들은 대개 발렌틴도 다 알고 있는, 자신의 쓸 만한 몇 가지 재능과 관련한 것들뿐이었다.
“이렇다 할 일들을 해본 기억은 없는 것 같아요. 뭔가 스스로 생각해내는 일에도 익숙하지 않았고....“
아드리아나가 부끄러운 듯 이야기했다.
집안에서 아버지의 보호 아래 하에 지내다가, 나이가 차면 아버지가 데려온 남편의 보호 아래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 딸들의 인생이다. 지배자가 ‘아버지’에서 ‘남편’으로 바뀔 뿐일 삶에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성이 필요할 리 없었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기 위해서는, 주체성이란 건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좋아하는 것들은 많았어요. 이시스를 좋아했고 첼로를 좋아했고 책 읽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냥 따뜻하게 이불 덮고 자는 것도 좋아했고요.”
아드리아나의 말에, 둘 다 너털웃음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밖에는, 음, 잘 모르겠어요. 저희 부모님과 제 방, 제 침대, 제가 가진 옷들...전 제 것이 되면 대부분 다 좋아했어요.”
“당신의 것이 되기만 하면, 그 후 사랑받기는 쉽다는 말이군.”
발렌틴이 아드리아나를 안은 채로 안락의자를 느릿하게 흔들며 미소 지었다. 마치 아기를 안아 재우고 있는 듯한 자세 때문에 부끄러워, 아드리아나는 괜히 다리를 가볍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제 것이 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걸요. 전 많은 걸 소유하려 하는 편이 아니니까요. 더군다나 남편 자리는 하나뿐이랍니다.”
“물론 잘 알고 있소. 그래도 아이는 많이 갖고 싶은데.”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더욱 수줍어하며 미소 지었다.
“생기기만 한다면요. 다섯 명 이상은 힘들 것 같지만....”
발렌틴은 생각보다 숫자가 크게 느껴졌는지 ‘다섯 명?’하고 되물으며 쿡쿡 웃었다. 그러고는 대단히 흡족해하며 아드리아나의 얼굴에 쪽쪽 입술을 눌렀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평온함을 만끽했다. 그의 무릎 위에서 졸음이 오는 것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껴안으며 체향을 맡으려 목덜미로 얼굴을 들이댔다.
발렌틴은 그새 깊은 생각에 잠겼던 듯, 반응하지 않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드리, 당신은 리노아스의 성에서 영부인으로서 일평생을 살게 될 거라고 믿던 때에, 그런 미래가 정해진 것에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소?”
“...없었던 것 같아요.”
아드리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다시금 물었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
“리노아스의 성에서 사는 것 말이에요?”
“꼭 거기가 아니더라도.”
아드리아나는 멍하니 그를 마주보았다. 잠이 와서 사고의 회전이 늦었지만, 곧 깨달았다.
발렌틴은 리노아스가 아니라 ‘영부인의 삶’에 대해 말한 것이리라.
“당신, 바쉬를... 물려받으실 생각이세요?”
아드리아나가 작게 숨을 삼키며 물었다.
발렌틴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아직 정하지 못한 듯도 보였다.
“당신 생각을 듣고 싶소.”
그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드리아나는 그가 회의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쉽사리 뭐라고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발렌틴은 매사에 반려자의 의견을 착실하게 묻고 귀담아들었지만 중요한 결정은 스스로 해왔다. 당연히 그러는 게 좋을 터였다. 지금 같은 문제에는 더더욱, 아드리아나로서는 감히 의견을 내기조차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백 번 신중하게 생각해 본다고 좋은 조언을 할 수 있을까? 말할 수 있는 의견이란 아마도 공작의 아내가 되는 일이 좋은지 싫은지, 겨우 그 정도일 터였다.
“전... 막상 진지하게 들어보니까 너무 어렵네요.”
아드리아나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실은 발렌틴이 외조부의 뒤를 물려받는 일을 전에 없이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크게 놀랐다.
머리 한구석에서는 그 자리가 이런 식으로 정해져도 되는지 불안함도 느껴졌다. 발렌틴이 태어나기 전부터 바쉬의 후계자로서 공부하고 일 해 온 엘릭 루미아가 있었고, 발렌틴은 공작령을 다스리는 일과는 한참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으니까.
또 아드리아나 자신은 어떠한가. 아버지에게서 늘 공작가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어도, 그것이 ‘공작의 아내’라는 협소한 범위의 지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공작의 친척이 되는 일조차 허황되다고 느끼며 살았다. 자신의 미래는 리노아스의 안주인이 되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공작령을 다스리는 일....’
그 무게가 보통 막중한 것이 아님에도, 그 자리를 맡기려는 공작의 판단을 믿어도 될까? 발렌틴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당신은 어떠세요, 여보?”
아드리아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그런 큰 책임감과 긴장감 속에서 살 수 있을까? 매일 같이 손님이 드나들 테고, 책임져야 할 식구가 이 땅덩이만큼 늘어날 텐데.”
대답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왠지 이 말이 발렌틴보다는 아드리아나 자신의 어려움을 걱정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넨에서도 사교로 힘들어 할 때가 많았으니.
‘그것들도 훈련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일까?’
낙천적으로 보자면, 장점도 있을지 모른다. 똑같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고 해도, 가치관부터 너무도 다른 타인과 ‘내 가족’은 사뭇 다를 수 있으니까.
아무튼 발렌틴이 일개 기업의 주인으로 남든지 대 왕국 공작령의 주인이 되든지 자신이 아내로서 그의 곁에서 지탱해주리라는 마음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고, 아드리아나는 일을 더 지켜보며 깊이 생각해 보자고 말했다.
그 이튿날, 아드리아나는 펜을 붙잡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도 발렌틴이 갈등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짚이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성 내에서야 웨버 경을 지지할 겁니다. 대외적으로 봐도 득이 될 테니까요. 루미아 공작님에 대한 높은 지지도가 그분과 닮은 혈육에게 이어지는 건 당연하겠죠. 웨버 경께서 열여덟에 작정하고 투스미아를 떠났을 당시에는, 철없는 반항이라느니 바보짓이라느니 비난하는 무리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웨버 경을 지지하던 세력들도 그때 한풀 꺾였고요. 그런데 테스카의 사업이 자리를 잡고 나니 오히려 경영자로서, 주인으로서의 훌륭한 수업이 되었을 거라고 기대하는 눈들이 늘었죠. 엘릭 경께는 안 된 일이지만,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웨버 경께 작위가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전혀 몰랐네요. 저희 앞에서 상속 문제를 언급하시는 건 공작님뿐이셨으니까요.”
아드리아나는 처음에 발렌틴이 그토록 투스미아에 오기 싫어했던 이유를 알 듯했다. 관심도 없는 자리에 그가 앉기를 기대하는 시선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 것이며, 이모부와의 사이는 또 얼마나 불편했을지.
“전 그이가 전혀 마음이 없으신 줄 알고 크게 신경을 못 썼어요. 겉으로만 그러셨던 걸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웨버 경이 태어나시기 전에 다른 후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걸려하시기도 했고, 원래 로아타르의 양친처럼 자유롭게 사시기를 원하시기도 했고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을까요?”
펜이 ‘글쎄요.’하고 중얼거리더니, 어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결정적인 역할은 아니었을 거라고 봅니다만... 어제 엘릭 경께서 웨버 경께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하시더군요. ‘아들을 뛰놀고 자라도록 하기에는 아이넨보다 바쉬가 좋지 않겠느냐’고요.”
“엘릭 경께서요...?”
왜?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가 발렌틴에게 후계자리를 넘기고 싶어 한다는 건가?
그리고 얼마지 않아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엘릭의 입장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발렌틴을 불편해 하는 이유가 시기나 투쟁심이 아닌,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오찬 자리에서 발렌틴을 대하는 엘릭을 관찰하며 자신의 생각을 거의 확신했다. 두 가문 사이에 감도는 딱딱한 공기 속에서 적개심을 내비치는 것은 그의 젊은 둘째 아들뿐이었다. 엘릭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만일 그에게 후계 싸움을 할 의향이 있었다면 발렌틴을 적으로 여겨서 불편해했겠지만, 싸울 의향이 없었다면 어떨까.
단지 발렌틴 본인만이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이들의 바람과 마찬가지로 엘릭이 조카가 작위를 잇는 게 낫다고 생각한대도, 적어도 엘릭 본인으로서는 싫다는 발렌틴에게 후계 자리를 떠밀어주며 공작에게 불충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을 게 아닌가.
문득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물잔이 빈 것을 힐끔 들여다보는 발렌틴을 쳐다보고 몰래 웃다가, 그때 공작의 시선도 발렌틴에게 향했던 것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혀를 찰 듯, 비웃는 듯 한쪽 입술 끝을 올리고 웃는 그 얼굴 표정이 발렌틴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로써, 바쉬의 주인 자리가 발렌틴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혹시 제가 자정에 다음화를 못 가져오거든 또 내일 오려나 보다 생각해 주세요..ㅜ.ㅜ
추천 코멘 평점 쿠폰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좀 굼벵이지만 완결까지 열심히 달릴게요ㅜ.ㅜS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