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6 결실 =========================================================================
아드리아나는 방으로 돌아와, 발렌틴이 먼저 씻고 나와서 침실 밖 테라스의 의자에 비딱하게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뭔가를 우물거리고 있는 그를 보고 웃으며 다가가자, 그가 테이블 위에 있던 과일 접시에서 사과 한 조각을 집어 아드리아나의 입에도 넣어주었다. 두 사람은 과일로 아침 끼니를 때우고 잠시 게으름을 부릴 요량으로 느긋하게 자리 잡았다.
눈부신 햇살을 그대로 맞으며, 아드리아나는 눈을 살짝 찌푸린 채로 정원 숲을 내려다보았다.
정사의 여운과 목욕을 하며 따뜻한 물에 담갔던 몸의 온기가 남아 뺨은 붉었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문득 말없이 발렌틴의 손을 잡고 끌어와 손등 위에 키스했다. 발렌틴은 가만히 그녀가 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아드리아나가 앉은 의자를 통째로 끌어당겨 자신의 의자 앞에다 붙여놓았다. 그러다 뭔가를 발견한 듯, 아드리아나의 가슴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넓게 파인 옷깃 위로 젖가슴의 계곡이 살짝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발렌틴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손을 뻗어, 아드리아나의 겉옷을 여미고 리본을 묶기 시작했다.
“...예쁘게 해주셔야 해요, 여보.”
아드리아나가 나른하게 속삭이며 주문했다. 발렌틴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의자를 마주보게끔 돌리고 앉더니, 최선을 다하겠다며 이리저리 매듭을 지어보았다.
이윽고 리본이 깔끔하게 잘 매진 것을 확인한 아드리아나가 따뜻한 손으로 그의 두 뺨을 감싸고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대로 상체를 숙여서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올려다보자, 그가 아드리아나의 어깨 뒤로 팔을 둘러 포옹해주었다.
“헤헤.”
기분이 좋아 눈을 게슴츠레 뜨고 미소 지었다. 발렌틴이 한쪽 입술 끝만 올리고 웃었다.
“졸린 강아지 같소. 로빈이 졸 때 턱을 쓰다듬어주면 이런 얼굴이 되는데.”
그의 말에 아드리아나가 미소를 싹 지우고 아랫입술을 삐쭉 끌어올렸다. 발렌틴은 튀어나온 입술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원래대로 해놓으려다 잘 되지 않는 것을 보더니, 그 위에 자기 뺨을 갖다 댔다.
“뽀뽀해드리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괜스레 불평의 말을 했지만, 그는 못 들은 척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서 다른 쪽 뺨을 댔다. 아드리아나가 소리 내서 웃자, 그는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드리아나를 끌어당겨 자기 가슴에 기대게 하고 소중한 듯 끌어안았다.
그때 머리 위 높은 곳에서 작게 사람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내 살다 살다 이런 염장질은 난생 처음 봅니다.”
레이넌의 목소리였다. 위층 대각선에 있는 테라스에서, 그가 난간에 팔을 걸친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숙이며 부질없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발렌틴이 태연하게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왕세자 저하, 공주님은 어쩌시고 혼자 계십니까?”
“아직 주무시는 모양이오. 한창 키가 클 나이이니, 잠을 많이 자기는 해야 할 겁니다.”
레이넌은 신부의 어린 나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발렌틴은, 두 남자의 대화를 듣다가 부끄러워하는 몸짓으로 위층을 향해 공손하게 눈인사를 건네는 아내를 보고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아주었다.
“결혼하시게 된 걸 축하드립니다. 인사가 좀 늦었습니다.”
“뭘요. 이제 지나는 아가씨들한테 윙크해주고 환호성을 듣는 재미도 잃게 될 테고, 뺨에 입이라도 맞췄다가는 멱살을 잡힐 노예 인생의 시작인데 축하까지 받을 일이겠습니까. 슬슬 깨워서 같이 공작님께 아침 인사나 드리러 가야겠습니다.”
레이넌은 씩 웃고 몸을 돌려 안쪽으로 사라졌다.
발렌틴도 아드리아나를 챙겨서 몸을 일으켰다.
“우리도 가봅시다. 문안이 늦어지면 영감님이 심술을 부리실지 모르니.”
잠시 후 두 사람은 옷을 갖춰 입고 알현실 안으로 들어섰다.
본래 살가운 인물은 아니라지만, 어쩐지 공작의 표정이 어제보다 더 딱딱해져 있고 험악해진 듯 보였다. 그는 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혀를 차더니 낮게 호통을 쳤다.
“어찌 자기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이 멀리까지 혼자 여행하게 하는가?”
아드리아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허둥대며 급하게 끼어들었다.
“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공작 저하.”
분명히 어제 그렇게 해명했었는데.
공작은 눈썹을 까딱하고 치켜들더니, 이내 표정을 약간 풀며 입을 열었다.
“열 번이 의심되면 열 번을 다 신경 써줘야 하는 거네.”
“송구합니다, 저하.”
발렌틴이 금방 수긍하며 사과의 말을 올리자, 공작은 굵게 헛기침을 하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앉았다. 아드리아나는 먼저 와 있던 레이넌과 리네트의 시선을 느끼고 흘긋 옆을 바라보았다. 리네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다가 물었다.
“아기를 가지셨어요, 웨버 부인?”
“그런... 의심 중이에요. 공주님.”
“어머나.”
리네트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그녀는 신기해하며 아드리아나를 훑어보고 미소 지었다.
그 자리에서 공작은 손님들의 하루 일정을 확인했다. 오찬은 공작의 둘째 딸 내외와 함께 들기로 했고, 저녁에는 공작이 주재하는 회의에 발렌틴도 참석하도록 했다. 선뜻 대답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발렌틴에게, 공작은 자신의 법적 상속자 후보에 들 수 있는 자는 누구든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한다고 단호하게 명했다.
알현실을 나와서 아드리아나는 슬그머니 발렌틴의 눈치를 보았다.
그를 라이벌로 여기고 있을지 모를 이모부 일가와 같이 회의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불편할까. 어제 리네트 공주만 해도, 발렌틴을 두고 바쉬의 다음 군주라고 지칭하는 듯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저녁에 강에서 아주 큰 물고기를 낚게 해주려고 했는데.”
그가 중얼거렸다.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이 일전에, 바쉬의 물고기가 육지의 포유류들처럼 다른 지역에 비해 커다랗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했다. 복도 창가 쪽에서 걷던 레이넌도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은어가 제철이던가? 잡아서 회를 먹어도 좋을 텐데.”
“은어가 어떻게 생긴 물고기인가요?”
아드리아나가 묻자, 레이넌은 두 손으로 자기 팔뚝보다 큰 아몬드 모양을 그리며 이렇게 생겼다고 말했다. 리네트도 입맛을 다시며 끼어들었다.
“그런데 여기선 낮에는 안 잡혀요. 우리 생각난 김에 하인들에게 저녁에 좀 잡아오라고 해요, 레이넌. 전 고소한 튀김으로 먹고 싶어요. 아마 웨버 부인도 좋아하실 거예요.”
“그럴까?”
그들의 말을 듣고, 아드리아나도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발렌틴을 바라보았다. 오늘 만찬이나 내일 식사 메뉴에 은어도 올라오게 될 게 틀림없었다.
리네트가 아드리아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을 걸었다.
“웨버 부인, 오늘도 한 판 하시지 않겠어요?”
“아.”
아드리아나가 어제 일을 떠올리고 키득대며 웃자, 리네트가 ‘설욕하셔야죠, 부인’하고 활쏘는 시늉을 했다.
*
잠시 뒤에 마당으로 나가자 하인들이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다소 잡기 수월해 보이는 활이 놓였다. 아드리아나가 활을 집어 들고 발렌틴에게 어제 일을 들려주었다.
“있죠, 어제 조금 배웠는데 저는 잘 못했어요. 저도 잘할 수 있게 배워보고 싶어요. 리네트 공주님이랑 영부인께서는 아주 그럴싸 하시던데요?”
발렌틴은 곁에서 팔짱을 끼고 서서 활을 든 아드리아나를 보고 우스워했다.
“부인께서 이리 흉악한 걸 가지고 노셨다고?”
“그래야 나중에 토끼를 잡아 오지요, 여보.”
“토끼가 당신을 잡겠소.”
“익.”
아드리아나는 남편의 불신을 털어주기 위해 새 활을 들고 표적을 향해 시위를 당겨보았다. 어제와 별 다를 바 없이 팔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보다는 줄이 제법 늘어났다. 손을 놓자 화살은 겨우 몇 발자국 앞에 툭 던져졌다.
“어머, 아까워라.”
“하나도 안 아까워 보였는데, 여보.”
아드리아나는 웃고 있는 발렌틴을 흘겨보며 의욕적으로 다시 화살을 뽑아 걸었다. 리네트는 아드리아나가 열심히 연습해서 잘 되면 내기를 하자고 응원했다.
“이제 웨버 경도 오셨으니 우리 편 갈라서 해요. 짝끼리.”
“공작님 내외든 누구든 껴주셔야지, 웨버 가랑 게임이 되겠어?”
“마음껏 데려오십시오. 누구랑 하든, 꼴등은 우리가 따논 당상인 듯하니.”
발렌틴이 포기한 듯 구시렁댔지만, 아드리아나는 들떠서 뭘 걸면 되겠냐고 허세를 부렸다.
얼마 후에는 판이 조금 커져서 공작 부부에다 행정관 부부 한 쌍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있었다. 그는 말이 행정관이지 겉모습은 장군쯤 되어 보였다. 심판까지 불러놓고 모두들 필승을 다짐하는 반면, 발렌틴은 진즉에 자포자기하여 승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신 나서 무리에 어울려 있는 아드리아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로 만족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먼저 다섯 발씩 쏘기로 하고, 웨버 가의 차례가 되었다.
아드리아나가 첫 번째 화살을 과녁 앞에다 떨어뜨리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과녁에 꽂혀 들어가지 않았다.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한 탓에 팔에 힘도 다 빠져서, 네 번째부터는 시위도 제대로 당기지 못하고 다시 부들부들 떨었다.
웃음을 참으며 응원하고 있던 발렌틴이 보다 못한 듯 앞으로 나왔다.
“반칙 좀 하겠습니다. 우리 아내는 홑몸이 아니니 양해해 주십시오.”
얼렁뚱땅 홑몸이 아닌 건지 홑몸이 아닌 걸로 의심되는 건지가 애매해졌지만, 어느새 아드리아나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뒤에서 몸을 감싸안는 듯한 자세로 서서 시위를 같이 당겨주었다. 아드리아나는 꺅, 하고 작게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붉히면서도 피하지 않고 서 있었다.
“어머, 웨버 부인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닌가요?”
“어흠, 흠!”
“제가 목격한 바로는, 저분들이 아침부터 서로 마르고 닳도록 껴안고 뽀뽀하며 지내시는 그런 분들입니다.”
레이넌의 말에 공작의 기침소리가 더 커졌다. 발렌틴이 아랑곳 않고 웃음기 띤 목소리로 아드리아나의 머리 위에서 말했다.
“당신이 조준해야지, 여보.”
아드리아나가 부끄러워하며 ‘했어요’하고 대답하자, 그가 ‘자’하고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쌩하고 날아가서 과녁 귀퉁이에 꽂혔다.
하하,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해졌다. 아드리아나는 처음으로 과녁을 맞춘 것에 환하게 웃으며 발렌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또 같이 해도 돼요?”
처음부터 경쟁상대에서 제외된 두 사람이라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웃어대며 ‘웨버 부인 지금 사심 그득하신 것 같은데요.’하고 놀렸을 뿐이었다.
발렌틴이 아주 선전했지만, 모두의 예상대로 웨버 가가 꼴등이었다. 남자들의 점수만으로는 우열이 크게 판가름 날 정도로 점수 차이가 벌어지지 않았고, 아드리아나를 제외한 여자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오전 내 기분이 좋아졌던 건지, 오찬 자리에서 발렌틴은 술을 꽤 많이 마셨다. 보살펴줄 수 있는 부인과 하인들이 곁에 있었고, 식후에 돌아가서 낮잠을 자기로 했었기 때문에 아드리아나는 조금 염려하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토끼는 우리 애가 커서 잡아오는 게 빠르겠소.”
침대 위에 드러누워서 발렌틴이 중얼거렸다. 아드리아나가 그의 가슴 위에 팔을 기대고 엎드리며 볼을 살짝 꼬집자, 그가 아드리아나를 안고 자신의 몸 위로 올라오게 했다.
눈을 감고 등을 쓸어주며, 그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아기 태어나도 나 등한시하지 마요, 여보.”
아드리아나가 웃으며 그의 가슴을 토닥였다.
“아빠가 먼저죠, 발렌틴.”
“음. 그렇지.”
발렌틴이 말하고 조용해졌다. 아드리아나는 가만히 그에게 안겨 있다가, 고개를 들어올려 그의 안색을 살폈다.
“...당신 무슨 일 있으세요?”
조용히 묻는 말에, 발렌틴이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요즘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 돼요. 혹시 제게 뭐 잘못하신 거 아니에요?”
아드리아나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근심거리들의 원인 중에 가장 확률이 낮은 종류가 바로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발렌틴은 허를 찔린 듯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순간 서로 마주보고 당혹감을 느끼며 침묵에 휩싸였다.
“...제게 잘못하셨어요?”
“뭘...?”
짐짓 두려워하며 묻는 말에, 마찬가지로 두려워하며 반문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무슨 잘못을 하셨는데요? 뭐 큰 거 걸고 내기하셨어요?”
“그런 거 안 해, 오드리.”
“그럼....”
아드리아나로서는 달리 뭔가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사실 짚이는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발렌틴과 관계가 불편한, 라르슨 영애의 친척이라는 사람의 존재. 아마도 그와 피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충고했었을 민스터의 말. 그와 마주치지 못하도록 자신을 투스미아로 오게 한 발렌틴의 처신.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아마도 자신의 짐작이 맞을 것이다. ‘그’가 여성일 거라는 짐작.
하지만 발렌틴은 자신에게 '모르는 척해 줄' 용의가 있다는 것을 알 터였다. 그가 과거에 그렇게 해주려고 했던 것처럼. 그런데 왜 죄를 지은 사람처럼 불안해할까.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이 다른 여성과 내게 떳떳치 못한 일을 하셨을 리가 없어.’
그의 현재와 미래가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면 되었다.
“오드리.”
발렌틴이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아드리아나의 뺨을 만졌다.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시는데....’
그의 현재에 잘못이 일어날 리 없다.
문득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자신과 한창 달콤한 연인이던 시절에, 다른 여성과의 열애를 즐겼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했던 노아의 결혼 기사.
“읍....”
순간, 구역감에 입을 틀어막았다.
아드리아나는 벌컥 몸을 일으키고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뛰어갔다.
============================ 작품 후기 ============================
어흐흑. 1시간만 빨리 쓸 수 있으면 좋게써요. 늦게까지 기다리셨다면 죄송합니다.(__)
선추코평쿠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싸랑합니다.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