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4 결실 =========================================================================
발렌틴은 레빙턴 가를 빠져나와 아드리아나를 집에 데려다준 후, 두 번째 일정을 위해 다른 영지로 떠났다. 그리고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귀가했다. 혼자 살던 총각 때였다면 하루 묵고 돌아왔을 수도 있는 일이나, 이제는 아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꼬박꼬박 집에서 잠을 자려 했다.
아드리아나는 막 그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그가 오는 인기척을 들었다. 그리고 부리나케 침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서둘러 계단 앞으로 가자, 겉옷을 벗으며 2층을 올려다보는 그가 보였다.
“여보. 여보, 다녀오셨어요? 피곤하시죠?”
아드리아나는 기뻐하며 계단을 밟고 내려가 그를 반겼다. 그의 팔을 어루만지며 매달리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낮에 헤어졌을 때 안색에 그늘이 있어보였던 그를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아드리아나의 어깨에 기댄 채로 내내 손만 꼭 잡고 말이 없었다.
반가움과 걱정이 뒤섞인 눈을 하고 바라보자, 발렌틴은 피로감을 지우고 미소 지으며 아드리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당신 먼저 자고 있지 그랬소.”
“막 자려고 누웠다가 일어났어요. 어서 씻고 오세요. 당신 방에서 기다릴게요.”
“금방 갈게.”
발렌틴은 연신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말하고 욕실로 향했다.
아드리아나는 다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베개를 자신이 누운 머리맡 옆에다 곱게 눕혀놓고 이불을 덮었다. 그가 씻는 물소리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금방 오시겠지.’
작게 하품을 하고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얼마 후인가, 자신의 곁에 누워서 포옹하려는 남편의 기척 때문에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미안, 오드리.”
깨운 것을 사과하며 발렌틴이 속삭였다. 만일 그가 오기 전부터 잠들어 있었다면, 그는 방해하지 않으려 곁에 얌전히 누웠거나 다른 침실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아드리아나는 그가 그러지 않은 게 좋아서 환히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저와 함께 주무시려고 돌아와 주셔서 기뻐요.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요. 밤에 돌아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당신도 나 기다리느라 잠도 못 자고....”
발렌틴이 아드리아나의 베개 아래로 팔을 넣으며 깊게 끌어안았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가슴 중앙에 코를 대고 숨을 마시다가, 그도 자신에게 대고 킁킁대는 걸 느끼고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푹 쉬세요, 여보.”
“좋은 꿈 꿔, 오드리.”
그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리고 금세 조용해졌다. 아드리아나는 곤히 잠든 남편의 등을 토닥여주며 애틋해하다가 그를 꼭 끌어안고 함께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아드리아나가 잠에서 깨었을 때, 발렌틴은 이미 일어나서 바깥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올린 팔에 턱을 괸 채로 낮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곁에서 쟁반을 든 엘레나가 다시 1층으로 내려갈 폼을 잡고 있는 참이었다.
아드리아나가 문을 열고 나와서 인사하자, 발렌틴이 보고는 손끝으로 자기 옆에 있는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잘 주무셨어요?”
“응. 당신이 좋아보여서 기분이 좋군.”
아드리아나가 의자를 당겨서 그의 곁에 붙어 앉자,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안색은 썩 밝아 보이지 않았고, 어젯밤 느껴졌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보였다. 우울증이라는 건 전염되는 성질이 있다더니, 아드리아나 자신이 나아진 대신 그가 안 좋아진 걸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여보,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 수 없는 일인가요?”
“당신이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없어.”
발렌틴이 어제처럼 아드리아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아드리아나는 그의 말에 만족해하며 그의 머리카락 위에다 입을 맞췄다.
“그럼 어서 말씀해 보세요. 제가 뭐든 해결해 드릴게요.”
“더 끌어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줘.”
순간 아드리아나가 뺨을 붉히며 주변을 흘긋 쳐다보았다. 엘레나는 1층으로 내려가고 없었다. 그럼에도 부부끼리 있을 때에도 잘 하지 않는 말을 하자니 부끄러웠지만, 의기소침해 보이는 남편을 위해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그가 시키는 대로 말했다.
“사랑해요, 발렌틴.”
겨우 조그맣게 소리내어 말했다. 이보다 더한 애정표현을 매일 같이 해왔는데도, 왠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애써 말해줬는데도 발렌틴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정적 속에서 자신이 한 말만 반복해서 메아리치는 기분이 들어 더욱 무안해졌다. 볼이 부어올라 뾰로통해져 있을 때, 마침내 발렌틴이 입을 열었다.
“이리 와, 여보.”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무릎 위를 두드렸다. 아드리아나가 주섬주섬 잠옷 차림을 단정히 하며 그의 허벅지 위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는 두 팔로 아드리아나를 지탱해서 안은 채로 부드럽게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좀 갑작스럽지만, 다음 주에 바쉬에 왕자님들이 방문하실 예정인데 당신이 가줬으면 좋겠소.”
그 이야기에 아드리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음 주에 말이에요?”
“응. 공작께서 우리 부부가 와줬으면 하시는 걸,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고 있었어. 그렇다고 섀넌 영애의 결혼식에 빠질 수는 없으니, 내가 결혼식에 참석하고 다음 날 바쉬로 갈게.”
발렌틴이 나직이 말하며 아드리아나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가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드리아나는 민스터의 말을 신경 쓰고 있었다. 결혼식에 가지 말라는 간접적인 충고처럼 들렸던 말.
민스터가 했던 그 말이 발렌틴의 귀에 들어간 걸까. 평소 아드리아나의 일거수일투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일이 있으면 엘레나나 오언을 통해 그에게도 알려지고 있었으니.
혹시 그랬다면, 발렌틴은 민스터의 말의 의미를 알까.
그의 눈을 들여다봐도,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다. 단지, 아드리아나는 어느 쪽이든간에 그가 자신들 두 사람을 위한 결정을 하는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달리 생각하면, 불현듯 생겨난 일정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이상한 점도 없었다. 반대로 아드리아나를 테스카 성에 들렀다 오라고 하고 그 먼저 바쉬로 떠날 수는 없을 테니까. 남편으로서는 자기가 테스카 일까지 본 후에 바쉬로 뒤따라가서 일을 두 번 하는 쪽을 자기 몫으로 하려는 게 당연했다.
“당신과 떨어져서 자는 거 싫은데....”
아드리아나가 그의 목을 안고 기대며 어리광을 부리자, 그가 흡족해하며 한결 밝아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이곳저곳에 뽀뽀세례를 퍼붓다가, 전날 밤에 생략한 일을 뒤늦게 떠올린 듯 아드리아나를 안아 침실로 데려갔다.
잠자리를 한 후, 그는 아드리아나에게 월경을 하지 않은 지 며칠 째인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곁에 누워서 거의 엄숙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아드리아나의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아드리아나는 자신을 끌어안고 다시 말이 없어진 그가 걱정되어서, 계속해서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
“그이가 풀이 죽어 계셔서 속상해. 아무래도 저번에 라르슨 영애가 그이한테 뭐라고 하신 게 틀림없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다음에 또 그이를 나쁘게 말하면 내가 한마디 해야겠어. 참을 만큼 참아드렸으니까. 아무리 지체 높은 분이라 해도, 설령 백작 본인이나 그보다 더 높은 분이라고 해도, 누구든 내 남편을 힘들게 하면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 이건 아내로서 마땅히 들고 일어설 일이라고. 그치, 로빈?”
아드리아나가 로빈의 두 앞발을 붙잡고 투지를 불태우며 말했다. 로빈은 싸움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해맑은 얼굴로 꼬리를 흔들었다.
“우리 로빈을 데려가서 물라고 할까보다. 엉덩이를 콱 물어주라고 말이야.”
“마님, 차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출발하시겠습니까?”
“앗, 그럴게요.”
로빈에게 하소연하는 자신을 지켜보았을 플레밍 때문에, 아드리아나가 민망해서 쿡쿡 웃었다. 로빈의 앞발을 놓아주려는 순간, 제법 육중해진 로빈의 체중이 아래로 쏠리며 팔에 뻐근하게 힘이 들어갔다.
“아휴, 벌써 곰처럼 무거워져서 발렌틴이 우리 로빈을 안고 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드리아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로빈이 낑하고 울었다. 아드리아나는 로빈이 좋아하는 육포를 실컷 먹게 해준 뒤, 오언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투스미아로 출발했다.
환승과 이동거리, 안전을 모두 고려해서 최종적으로 자동차가 선택되었다. 육로의 마차 전용 도로를 따라서 로아타르까지 들어가기로 했다. 차는 평소 발렌틴이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큰 리무진을 회사에서 가져왔다.
식사 장소와 운동 시간, 누워서 휴식해야 하는 시간까지 까다롭게 챙기는 엘레나를 보며 아드리아나는 그녀가 자신을 임산부로 설정하고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월경이 지난 지 한 달하고도 반 이상 지났으니, 기대감이 부풀대로 부풀어 있었다. 슬슬 의원을 불러보면 결과를 거의 정확하게 알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미루고 있었다.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조바심을 낼 시기는 아니었지만, 아드리아나는 남편이 내심 기다리고 있을 소식을 빨리 들려주고 싶어서 매월 기대하고 실망해왔다.
‘이번에도 아니라면 나한테도 타격이 꽤 클지도 몰라.’
아드리아나는 이내 우울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바깥을 풍경을 바라보며 차 안에서 한가로이 뜨개질을 하다 졸다 했다.
밤이 되어 로아타르에 도착했을 때는,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비몽사몽으로 어기적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남편을 닮은 가족들이 나와서 잘 왔다고 안아주는 것에 신기한 아늑함이 느껴졌다.
“우리 아가가 발렌틴도 없이 혼자 와서 얼마나 쓸쓸할까. 안쓰러워라.”
칼라디가 아드리아나의 등을 쓸어주며 걱정했다. 아드리아나는 괜찮다고 씩씩하게 웃어보였다.
“어머니가 계시잖아요. 다른 식구들도 계시고요.”
“아유, 예뻐라. 그래도 남편이 아내를 보살펴줘야 할 텐데 말이야.”
“맞아요, 오드리 형님. 특히 침대에 드시고 나면 방금 하신 말씀 쏙 들어가실 걸요?”
가족들은 넓은 마당을 걷는 동안에 웃고 떠들며 안부를 주고받았고, 집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피곤할 아드리아나를 먼저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바쉬에 왕자들이 오기로 한 것은 내일 오후였고 그로부터 사흘간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테스카 성의 결혼식에 갔던 발렌틴은 내일 밤이나 모레 아침에 올 터이고, 그때까지는 아드리아나가 손님들을 공작 내외와 같이 대접해야 했다. 사실 대접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고, 왕세자의 약혼녀와 말벗이나 되어주면 족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살짝 기대도 되고 긴장도 되었다.
“있죠, 어머니. 그이는 어떤 타입의 여성을 좋아하셨나요?”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며 아드리아나가 물었다. 발렌틴이 웬디에게 물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에 가볍게 꺼낸 질문이었다. 칼라디는 바쁘게 눈을 굴리더니 ‘그러게 그 애가 어떤 타입을 좋아했더라.’하고 중얼거리며 대답을 남편에게, 그 다음으로는 막내아들에게 떠넘겼다.
“저는 그때 너무 어렸죠, 어머니. 기억을 잘 못해요. 아마 로레인은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기억력도 훨씬 좋잖아요.”
스테판이 채소를 한 움큼 집어 여물 먹듯 우물거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얼버무리려고 둘러대는 것 같지 않았다. 너무 어렸던 때라고 하는 걸 보니, 발렌틴이 꽤 젊었을 때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다고 아드리아나는 속으로 웃었다.
‘나는 정말 다 회복된 것 같아.’
시시때때로 정신을 좀먹던 비관과 울적함은 온데간데 없었다. 테스카에서도 온 식구가 정성들여 보살펴주고 관리해주고 있는 덕분에, 컨디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마음도 느긋했다. 늘 그리워하는 공기를 마시며 가슴 속에 널따랗고 여유로운 공간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바쉬 성의 오찬 시간에 맞추기 위해, 이후 아드리아나는 금방 로아타르에서 출발했다. 말들이 다니는 길을 피해서 벌판 위를 달려서 성 앞에 나타난 자동차를 보고 모여든 이목에 뒷통수가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엘레나가 간단히 길을 텄다.
“웨버 가의 마님께서 아이를 가지셨을지도 몰라, 부득이하게 편안해 하시는 차량을 이용 중입니다.”
그녀는 마치 왕비님께서 납시었습니다, 라고 고하듯 위풍당당하게 그 말을 해서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빨개지게 했다. 차를 주차하기 위해 핸들을 돌리던 오언도 거듭 양해를 구하자, 순식간에 인파가 갈라지고 시원하게 길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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