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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다 아름다운-113화 (113/140)

00113  오래 전의 일(발렌틴)  =========================================================================

“당신은 날 익숙하고 편하게만 생각하는 것 같아. 더 이상 내게 설레는 것 같지도 않고, 여자로서 사랑하는 건 맞는지도 잘 모르겠어.”

약혼한 지 1년이 지났을 즈음, 첼시아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어려운 말이었다. 약혼녀에게 익숙해지고 편하게 느끼면 안 되는 이유를, 단순하게 좋아하면 안 되고 설레야만 하는 이유를, 현재 사랑하고 있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각오이건만 ‘여자로서’ 라는 세부조건이 생겨난 이유를, 발렌틴으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에서 와서는 그 당시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었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애송이 때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딱히 설렜던 적은 없는데.’

그냥 내 것처럼 여기고 편하고 아늑한 기분이 되었다면 행복한 일 아닌가, 하는 마음을 말로 하기에는 발렌틴도 그녀와 다투고 언쟁하는 일에 다소 지쳐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은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일일이 싸워서 해결할 수 없는 차이점이 너무 많아서, 싫으면 싫은 대로 포용하지 않고 함께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불만이 있어도 괜찮은 척 모르는 척하고 너그럽게 넘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첼시아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만큼, 쉽게 실망하고 격렬하게 분노하고 슬퍼하는 사람이었다. 그 뜨거운 감정이 다른 방향으로 폭발할 수도 있음을 발렌틴은 너무 늦게 알았다. 뒤늦게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지만, 자신이 먼저 그녀를 놓아버릴 수 없을 만큼 사랑하게 된 후였다.

처음 만났던 것은 15세의 여름, 발렌틴이 친구들과 자주 찾던 아콴의 바다에서였다. 그때 첼시아는 여러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바다에 뛰어든 사내들을 구경하러 온 참이었는데, 줄곧 친구 두 명과 모래성을 쌓으며 소리지르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솔직히 첫인상은 어땠는지 모른다. 아무튼 둘 다 처음에는 서로 무심했다. 자신들이 동류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두 사람의 접점이라고는 아이넨에 뿌리를 걸쳐두고 있다는 사실이 유일해 보였다.

첼시아는 지나치게 활동적인 여자라는 인상이었다. 내성적인 발렌틴의 삶에 들여놓기에는. 그녀는 언제나 많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목적 없이 방랑하는 여행과 새로운 도전을 즐겼다. 언제든 밖으로 뻗어나갈 에너지로 충만해 있었다.

물론 발렌틴도 가끔은 훌쩍 떠나고 싶어져서, 아버지 대신 관리하는 농장 일이 한가한 겨울에는 이시스 설산 깊은 곳에 혼자 들어가서 처박혀 있기도 했고, 사내들과 시끄럽게 어울리다가 위험한 결투 따위에 나설 때도 있었다. 드문 일이었다. 말하자면 온순한 모험가 정도였다. 낯설고 위험성 있는 멋진 것들을 향한 동경이 일상을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다면, 얼마든지 삶에서 떨어뜨려놓을 수 있는 정도의.

그러다 발렌틴이 첼시아에게 작게나마 호감을 갖게 된 것은 그녀에게도 여러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가게 되면서였다.

그녀는 일명 ‘바닷가 모임’에 자주 놀러왔다. 모래성 쌓는 걸 좋아하는 게 조금 귀여웠다. 그녀도 다른 여성들처럼, 아니, 투스미아 밖의 피가 섞인 그 혈통 덕분에 더욱 여리고 청순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었다. 눈에 띄는 미색은 아니었으나 사내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드센 투스미아의 여자들과 달리 보호본능을 돋운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아마 그런 분위기가 발렌틴의 수컷으로서의 몹쓸 정복욕을 자극하는데 꽤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처음 알게 된 날로부터 두 달이 지난 8월의 어느 날, 발렌틴은 친구들과 물고기를 잡으러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첼시아가 늦은 시각까지 혼자 해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 어두워지면 위험한데.”

발렌틴이 젖은 몸 위에다 아무렇게나 겉옷을 걸치며 말을 걸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다. 하늘에는 벌써 석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며칠 전, 인적이 드물어지는 밤 시간에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해변 숲에서 뛰쳐나온 들짐승이 낚시꾼을 덮치는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사내들이라도 밤중에는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 형편이었다.

“이제 돌아갈 거예요.”

첼시아가 겸연쩍게 볼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사내들이 돌아가는 길을 뒤따라가면 안전할 거라고 여기는지도 몰랐다.

“혼자 뭐 하러 이 시간까지.”

“뭐 어떠냐, 발렌틴. 네가 데려다주면 되지.”

첼시아는 머뭇거리면서 조용히 남자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발렌틴은 그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그녀는 바로 뒤에서 발렌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부끄러운 듯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서로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손을 뻗으면 닿을 몇 발짝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 연약한 미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도 어려웠다.

일행은 민가 길로 들어서면서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발렌틴은 첼시아를 그녀의 친척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었다. 밤이라고 위험할 장소가 아니었고, 식구들이 볼 수 있는 곳까지 바래다 줄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갈게.”

발렌틴이 인사하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첼시아는 여전히 어색하게 미소 지을 뿐 작별의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초조한 듯 입술을 달싹거리며 시선으로 매달렸다.

길가에 쌓인 건초더미의 그림자에 겹쳐져, 실제로 그녀의 얼굴색이 어땠는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얼굴을 붉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

발렌틴은 그녀가 안전하게 집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듯, 발걸음을 되돌리고 멈춰 섰다.

첼시아가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같이 가면 안 돼요?”

“안 돼.”

“할 말이 있어요.”

“그럼 여기서 들을게.”

발렌틴이 말하고, 물고기가 담긴 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첼시아는 안절부절 못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불쑥 두 손으로 발렌틴의 손목을 붙잡았다. 힘을 꼭 준 탓에 작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얼굴은 곧 울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평화로운 삶을 망가뜨릴 위험한 모험가가 아니었다. 발렌틴은 비어 있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떨리는 손을 살짝 감싸 덮었다. 처음으로 닿은 여자의 살결의 느낌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손을 뻗어서 그녀의 어깨를 만져보았다.

문득, 가족들 간에 하듯 그녀에게 더 다정하게 인사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솟아났다. 가볍게 상체를 맞대며 포옹하자, 첼시아가 발렌틴을 꽉 끌어안았다.

“...너 옷 버린다.”

셔츠가 약간 젖어 있던 것을 의식하며 말했지만, 그녀는 자기 체온으로 말려주겠다는 대범한 소리를 하며 웃었다. 발렌틴은 자신에게 안긴 부드럽고 작은 몸의 따뜻함을 느끼며 서 있다가, 살짝 몸을 떼어냈다. 그때까지 여자를 안 적이 없었으나, 만으로 열다섯이나 된 사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은 아니었다. 발렌틴은 몸을 숙여서 그녀에게 키스하며 손으로 허리를 애무했다. 잠시 후, 그녀는 황홀한 듯 상기된 얼굴로 느리게 눈꺼풀을 열었다.

“저 내일 아이넨으로 돌아가요.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거기서 공부를 하고, 내년 여름에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렇구나.”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잘하면 좀 더 빨리 올 수도 있어요.”

슬슬 둘 다 혼기에 접어들었다. 동갑이었지만, 발렌틴의 경우에는 투스미아의 사내인데다 장남이라 서둘러야 할 때였다. 내년까지 혼처도 정하지 못하고 여유부릴 처지는 아니었다. 지금 헤어져 내년 이후로 첼시아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서로 각자의 짝을 얻은 뒷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또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편지를 쓸게요.”

“나 그런 거 잘 못 챙겨.”

“괜찮아요. 제가 열심히 써 드릴게요.”

발렌틴도 그녀를 떠나보내기가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로잡히기에도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정성스러운 편지가 도착한 것에 애틋함이 더해졌어도, 안 맞는 일에 어울리기는 힘들었다. 단지 그녀의 애원과 채찍질에, 자신의 어정쩡한 책임감과 애정에, 그녀가 투스미아로 돌아올 때까지 연애를 이어나갔다.

무엇보다도, 입맞춤을 나눈 것만으로 자신에게 종속된 듯 부드러워진, 전적으로 자신의 여자가 된 듯 은근히 책임감을 기대하며 애정을 갈구하는 그녀의 태도가 싫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해 6월, 첼시아가 투스미아로 돌아왔다. 그들은 정해진 요일에 아콴에서 주로 만났는데, 어떤 때는 첼시아가 로아타르에까지 발렌틴을 만나러 오기도 했다. 먼 길을 힘들게 말을 타고 와서 연인을 만난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을 보여주는 그녀의 열렬한 애정은, 그 나이를 먹도록 여성을 매력적인 대상으로 여기고 감동받아 본 일 없는 순진한 청년의 가슴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발렌틴은 그녀가 두 번째로 로아타르에 찾아온 날, 늦은 시간까지 고생해서 돌아가야 할 그녀가 안쓰러워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이 업무를 위해 혼자 사용하는 건물의 빗장을 열었다. 오로지 신뢰만이 담긴, 의심 없는 천진한 눈을 하고 곁에 누워서 따스하게 안긴 그녀로 인해 마음이 부풀었다. 그는 그녀와 두 번째 키스를 나누고 육체의 열정이 이끄는 대로 그녀를 안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형편이 허락되는 한은 매일이라도 발렌틴과 함께 있으려 했고 헌신하며 애정을 베풀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발렌틴이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 거의 비명을 지르며 기뻐했다. 첼시아가 투스미아로 돌아온 지 두 달 만인 8월에, 두 사람은 로아타르에서 약소하게 약혼식을 올렸다.

약혼 생활은 행복했다. 처음에는 첼시아와 자주 다투었고 자신이 연인을 대하는 일에 너무 서투르다는 생각으로 힘들었지만, 적절한 시기에 짝을 만나 이토록 사랑하게 되고 성숙해져갈 수 있음에 만족했다. 둘이서 가정 지향적이고 오손도손한 미래를 계획했다. 사실은 첼시아도 자신과 같은 성향을 갖고 있음이 더없이 기뻤다. 발렌틴은 그녀를 향한 애정과 책임감이 나날이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몇 달 후, 첼시아가 남은 공부를 위해 다시 아이넨에 다녀오게 되었을 때, 발렌틴은 그녀를 따라가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고 싶었지만, 첼시아가 졸업을 해야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 그녀 부모의 입장이었다. 애초에 그녀의 가문에서는 발렌틴의 부모 신분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는데, 웨버 가가 로아타르 전체를 사들였을 정도로 부유하다는 점 때문에 겨우 허락을 해주었다.

“긴 휴일이 생길 때마다 당신을 보러 올 거예요.”

첼시아는 한동안 성실히 약속을 이행했다. 발렌틴이 걱정할 정도로. 그도 일을 빠질 수 있을 때에는 그녀를 보러 갔지만, 겨울을 제외하고는 휴가를 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몇 달 간격으로 양국을 오가는 동안, 첼시아의 체력이 약해지는 게 보였다. 발렌틴은 이런 수고를 앞으로 몇 년이나 더 해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첼시아의 건강을 망가뜨리거나,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열일곱이 된 해에, 1년을 더 보내고 아이넨으로 이주할 결심을 굳혔다. 법적으로 모든 권한을 갖게 되는 열여덟이 되면 집을 떠나 자립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터였다.

한창 바쁜 10월이었지만, 발렌틴은 첼시아와 그 일을 상의하기 위해 아이넨으로 향했다. 1주일 전에 편지를 해두었지만, 아직 답은 받지 못했다. 우편이 전해지려면 한 달까지도 걸렸으니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의 학교로 가서 찾아보니, 개별 모임이 있어서 나오지 않았다는 답이 들려왔다.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꼬이는 느낌이 있었다. 첼시아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 어려웠다. 아이넨의 어른들은 상대하기가 불편했다.

“첼시아를 어떻게 아세요?”

그때 그녀를 아는 듯한 여자들이 말을 걸어왔다. 발렌틴은 왜인지 ‘친구’라고 대답했다. 아주 이상한 생각이었지만, 약혼자라고 밝히는 일이 그녀를 찾기 어렵게 만들 것만 같았다. 말을 건 여성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발렌틴을 훑어보기만 할뿐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해주지 않았다. 다른 남성이 가게의 이름을 하나 말해주었다.

“제 친구가 자주 가는 가게입니다. 아마 거기 있을 거예요.”

그의 삼가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이 석연치 않았다. 발렌틴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그가 가르쳐 준 가게를 찾아냈다.

방이 있는 술집이었다.

첼시아는 구석 자리에 앉아서 한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발렌틴을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났다.

“무슨 생각이야?”

대학에 다니는 인간들의 문화가 어떤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약혼한 사이도 아닌 남녀가 둘이서만 어울리는 일이 일상으로 통용되는 시대가 왔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더욱이 방이 있는 술집에서.

“그게 아니야, 발렌틴.”

첼시아가 허둥대며 발렌틴을 바깥으로 이끌었다. 발렌틴은 자신들보다 몇 살쯤 많아 보이는 상대방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두려고 흘긋 쳐다보았다. 만일 그가 자신의 약혼녀에게 강요하여 괴롭혔다면 목숨을 끊어놔도 시원찮았지만, 그렇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

수긍가지 않는 변명이 시작되었다. 첼시아는 자기한테 고백하는 그를 거절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이야기 중이었다고 말했다.

“약혼자가 있다, 한마디면 되는 거 아닌가? 이딴 더러운 데까지 따라온 이유가 뭐야?”

화를 내는 발렌틴을 이해시키기 위해 첼시아는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다가, 결국 벌컥 큰소리를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상대방은 남자인데 무조건 거절하기가 무서웠다는 말에 열이 올라, 발렌틴이 도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 마, 그러지 마.”

첼시아는 거의 사력을 다해 붙잡고 말렸다. 그녀가 처음으로 발렌틴의 손을 잡으며 떨던 그때보다 훨씬 절박하게 느껴졌다. 피해자일 뿐이라면서 두 남자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필요 이상 두려워하고 경기를 일으키는 그 모습 때문에 발렌틴은 더욱 뜨겁게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이거 놔.”

뿌리치려던 팔이 그녀를 밀쳤다. 발렌틴의 가슴 높이밖에 되지 않는 작고 마른 몸을 가졌던 첼시아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숨을 삼키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순간 모든 게 끝난 듯 느껴졌지만,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발렌틴은 그날 체류할 예정이던 가까운 호텔로 그녀를 데려가서 달래주고 용서를 빌었다. 늦지 않게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주고, 호텔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 있었다. 결국 아이넨으로 이주하는 일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다음날 조용히 로아타르로 돌아왔다. 그녀가 하는 대로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는 다시 전처럼 자주 편지하고 열심히 발렌틴을 만나러 왔다. 발렌틴이 만나러 갈 때에도 늘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여덟이 지나가는 겨울, 거주 문제와 향후 계획을 다시 진지하게 의논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에 첼시아가 로아타르에 들렀다. 줄곧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1달 전에도 휴가를 내 만났음에도, 그녀의 말투와 웃는 표정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금방 조급해했고 무심해졌다.

발단은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녀가 헛구역질을 한 일이었다. 발렌틴의 어머니가 손자가 생긴 거 아니냐며 별 생각 없이 놀리는 말에, 첼시아는 안색이 퍼래져서 말을 잃어버렸다. 결과적으로 그때 그녀가 임신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실이 끝을 정해주었다. 발렌틴이 그녀와 관계하지 않은 지 반년 이상 지났기 때문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게 한 달을 지내다가 파혼을 통보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이미 추진하고 있던 대로 테스카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실패자야.

그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가 잊히지 않았다. 서툴고 못난 연인이어서 마음을 붙들어 놓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면, 파혼 당한 그녀가 가여워졌다. 하지만 붙잡고 있었다면, 반대로 그녀의 새 연인이 파혼을 통보해왔을 가능성이 컸다.

처음 몇 년은 배신당한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혼담을 거절했고,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어서 자리 잡았을 때에는 일도 궤도에 오르기 시작해 거기에만 매진했다. 전 약혼녀의 외도가 경멸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고, 아이넨의 많은 여성들이 그런 스릴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여성에 대한,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에 대한 환멸마저 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한 여성 때문에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오래된 꿈처럼 희미해졌다. 발렌틴은 날마다 일을 좇고 사내들끼리 어울리며 지냈다. 애초에 여성에 대한 흥미를 모르던 풋내기 시절도 돌아간 기분이었다. 한 번 알아버린 애정과 따뜻함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지만, 그것을 달래자고 아무나와 육욕을 채울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런 삶에 익숙해졌다. 10대 때부터 수도자의 길을 택한 여동생을 신기하다 여겼지만, 자신도 거의 수도자나 다름없어졌다. 내키면 죄의식 없이 수음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의 차이뿐.

그래서 스물다섯의 그 가을, 헤밀의 숲에서 낯선 여성을 구하느라 안고 있던 일을 떠올리며 몸이 상기될 때마다 심경이 복잡해졌다. 자기혐오가 드는 한편으로, 어쩌면 자신이 나쁜 기억력으로 과거를 잊고 또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의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류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다시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만일 그런 기회가 있다면, 딱 자신만큼의 여자를 만나는 게 괜찮을 터였다. 부인의 바람기를 눈감아줄 아량 있는 남자로 살 자신은 없었으나, 반대로 여자 쪽이 이 땅에서 보기 드문 완전무결한 몸가짐을 지녀왔다면, 그녀에게 청혼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과거지사를 빌어야 할지도 몰랐으니.

============================ 작품 후기 ============================

과거가 이랬다고 합니다. 아드리아나를 대해온 발렌틴의 태도에 깔린 애정관 등을 이해하시기가 좀 쉬워지셨을까용?더 야릇해지셨으려나...uu (+어..오해가 있을 수도 있었네요. 남주 기준에서는 이때의 기대치와 전혀 다른, 자기 기준 무결한 여자를 만나서 충격 받고 ㄷㄷ했던 셈인데....어. 지금까지의 전개만으로는 잘 전해지지 않은 걸까요?앞으로의 전개에서 더 풀어야 할까요?ㅜㅜ)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세요.

(일반란의 코멘을 보고 이번 편을 통해 남주가 '오드리가 흠 있는 여자라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어 후기를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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