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새로운 세력가들 =========================================================================
세면대 앞에서 짧게 흐느끼던 민스터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들었다. 미처 감정을 다 추스르지 못한 얼굴이었으나, 그녀는 깍듯하게 무릎을 굽혀 아드리아나에게 인사하고 곧바로 방을 나갔다.
슈하스에서 친구 아가씨들과 어울리던 때의, 버릇없고 고상한 체 하는 밝은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거의 날마다 미장원에 들러 어여쁘게 머리를 꾸미고 유행하는 옷을 사 입으며, 눈에 거슬리는 여자를 보면 유치하게 헐뜯는 몇 마디 말을 던지고 휑하니 고개를 돌리던, 그 시절의 그녀를 보면서는 차라리 이렇게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아드리아는 답답한 가슴을 안은 채로 발렌틴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내미는 팔을 의지하며 몸을 기댔다.
차에 오르자, 발렌틴은 아드리아나의 머리를 자기 어깨 위에 가볍게 눌러놓고 자기도 시트에 몸을 깊게 묻었다.
“...여보.”
아드리아나가 나직이 부르자, 발렌틴이 ‘응’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실은 할 말도 없이 싱겁게 불러봤을 따름이라, 아드리아나는 잠자코 있다가 다시 한 번 ‘여보’하고 불렀다. 두 번째에도 그가 똑같이 ‘응’하고 대답하기에, 눈을 들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귀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미소 짓고 있다가, 별안간 라르슨 영애의 부당한 언사가 떠올라 울컥함이 치밀었다.
“당신 혹시 라르슨 영애의 원한을 사신 일이 있나요?
아까 발렌틴도 소니아에게서 당시의 전말을 전해들었을 터였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초면인 분이었소. 라르슨이든 베이츠든, 그런 성씨를 가진 사람과 깊이 얽혀본 기억이 없는데.”
“그런가요....”
아드리아나가 다소 침울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면 라르슨 영애는 단순히, 발렌틴을 신분 높은 여성의 남편이란 지위에 들어 작위를 가로챈 얌체 같은 천민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까지 적의를 불태웠다는 말인가.
오직 ‘피’로 인간의 존귀함을 서열화하고 자격을 논하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은 여전히 아이넨 안에 득세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테스카 같은 도시에서는 소극적이게나마 반론도 존재했다. 스스로 일궈낸 업적이 있는 이에게는 그에 걸맞게 대우해주기도 했다.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이 잘 알지도 못하는 외부인에게 자격미달인 취급 받은 게 분하고 속상해서, 라르슨 부인이 시대를 착오하고 있는 인물 아니냐고 푸념했다. 하지만 정작 발렌틴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어 넘겼다.
“시대의 흐름이라고 다 같이 변해버리면 곤란하지. 우르르 휩쓸려서 옮겨 다니면, 나 같이 유행에 뒤떨어지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 살기 어렵단 말이야.”
“당신 가치관의 어디가 유행에 뒤떨어지시는데요?”
“음, 너무 많은데. 자고로 여성은 사랑스러운 미모가 다라고 믿고 성격 사나운 부인한테 장가든 점만 봐도 그렇지 않소?”
발렌틴의 표현 그대로 아드리아나는 아주 사납게 눈을 흘기다가, 그의 팔을 덥석 붙잡고 매달렸다. 그리고 화풀이하듯 그의 어깨에 뺨을 마구 거칠게 비비다가,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아주는 그의 품 안에다 고개를 폭 파묻었다.
“우리 부인 난폭해진 것 좀 봐. 베이츠 부인이 당신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나 보오.”
웃음기마저 섞인 그의 목소리와 여유로운 태도에, 아드리아나도 이내 마음을 풀 수밖에 없었다.
하기는 무시하고 지나칠 밖에 도리가 없다. 라르슨 영애의 위치와 처지를 고려하면, 그녀와 다투고 언쟁을 벌여봤자 웨버 가의 평판에 흠을 낼 뿐이다.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일 터였다. 다행인 점이라면 글라디스 영부인과 부딪치는 횟수보다는 라르슨 영애와 덜 부딪치게 되리라는 사실이었다. 라르슨 가는 웨버 가와 접점이 없고, 무릇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지체 높은 이들은 저택 밖을 활보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기 마련이었으니.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형이라면 이골이 나 있었고, 지금으로서는 글라디스 쪽 부인네들만 해도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와 쉬는 동안, 아드리아나는 몇 번인가 민스터를 떠올렸다. 자신을 질시할 여유조차 없어보였던 그녀의 처진 어깨가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았다.
‘...테스카에는 아직 지인이 없겠지. 라르슨 영애가 거기까지 신경써주지는 않나 봐. 그런 고집불통 후견인을 두었으니 가벼운 교제도 쉽지는 않을 텐데.’
분위기로 보아 민스터는 남편과도 대화를 많이 하지 않을 듯했다. 부부가 서로 위로해주고 지탱해주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에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가 많아졌다는 건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도시의 현대인들은 부부지간에서도 개인주의와 프라이버시의 존중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가족애의 상실에 둔감해져 있었다.
‘그야 옛날에도 대화하지 않는 부부는 많았을 거야. 내 부모님만 해도 어땠는지 모르고....’
아드리아나는 손에 들고 있는 정육면체 퍼즐을 건성으로 돌려 맞추며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부터 새로 수를 놓기 시작한 베개 커버가 마무리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남편과 나눠 쓸 물건이니만큼 좀 더 맑은 기분일 때 손에 잡고 싶어서 잠시 미뤄두고 있었다.
“어머, 비가 오네요. 불을 좀 피워야겠어요.”
창밖을 보고 있던 엘레나가 말하더니, 후다닥 1층으로 내려갔다.
“아, 어쩐지 발이 조금 시려운 것 같더라니.”
아드리아나가 슬리퍼를 벗고 발을 소파 위로 끌어당겨서 스커트 안에 감추었다. 목욕 후에 훈훈하게 남아있던 온기가,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흔적도 없이 식어가고 있었다.
곁에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던 발렌틴이 문득 몸을 돌리고 앉더니, 아드리아나의 치맛자락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발을 빼내어 두 손 안에 감싸 쥐었다.
“추워, 여보? 차갑네.”
“당신 손까지 차가워져요.”
“괜찮아. 금방 불을 피울 거니까.”
아드리아나는 그에게 맨발을 만져지는 것이 부끄러워서 가만히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가, 펜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다리에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 그러나 먼저 눈치 챈 발렌틴이 손에 힘을 주고 발목을 딱 움켜잡았다.
“여, 여보. 놓아주세요.”
“도망치지 마. 발 크다 말았다고 안 놀릴게.”
“크다 만 거 아니에요. 여자들은 이 정도가 보통이에요.”
부들부들 떨며 힘을 써 봐도 다리가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를 입고 있어서 노출을 신경 쓰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소파 위에 마주 보고 앉아서 다리를 치켜든 채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아랫사람에게 보여서 좋을 리가 없었다.
“아휴, 여보.”
아드리아나는 결국 발렌틴의 손을 가볍게 찰싹 때려서 떨어지도록 했다.
펜이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 동안, 아드리아나는 소파 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남편의 옆얼굴을 곁눈질했다. 그는 갈 곳 없어진 팔을 소파 등받이에 올려놓고 거만한 자세로 눈을 내리뜨고 있었는데, 아랫입술을 살짝 올리고 있는 폼이 어찌 보면 삐친 것 같아 보이기도 해서 웃음이 나왔다.
“...무릎베개 해드릴까요?”
펜이 내려간 후에, 아드리아나가 다정하게 물었다. 발렌틴은 1초쯤 생각하더니 말없이 드러누워 아드리아나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얹었다. 그러고는 나른한 손길로 무릎을 쓰다듬다가 눈을 감았다.
아드리아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잠들기 전 둘이서 빈둥거리는 이 시간이 좋았다. 일 관련 서류나 편지를 쌓아놓고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할 때도 많았지만, 오후까지 일을 하고 돌아온 날은 되도록 저녁을 한가하게 보내려 했다.
“주무시면 안 돼요.”
“졸려.”
“벌써요? 안 돼요, 여보. 그럼 방에서 주무세요.”
아드리아나는 발렌틴을 일으켜서 침실로 데려갔다.
그는 소파에 누워서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정말로 잠이 왔던 듯, 반쯤 감은 눈으로 이불 속에 들어가서 아드리아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결의 행동인 듯 손가락을 꿈지럭대며 아드리아나의 어깨를 더듬었다.
잠시 후 그의 손이 아드리아나의 몸 안쪽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가슴을 부드럽게 뒤덮었다. 서너 번, 아드리아나가 호흡하며 가슴을 오르내리는 동안에는 부드럽게 잠옷 위를 스치며 쓰다듬다가, 이윽고 손아귀에 살짝 힘을 넣으며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는 꼼짝 않고 그의 손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뜨거운 숨을 뱉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미 아드리아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따뜻하고 매끄러운 입술 안쪽이 맞닿자 녹아버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감고 그의 등을 안았다. 깊은 입맞춤을 나누며 두 어깨가 시트 위로 눌리고, 몸 위로 올라타는 그의 무게를 느끼며 환희에 차올라 작게 탄성이 터져나왔다.
*
며칠 뒤, 아드리아나는 자신의 기대가 빗나갔음에 허망함과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가장 크게 느껴졌던 감정은 짜증스러움에 가까웠다.
“내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귀족과 노동자가 허울 없이 사교에 어울리게 되다니.”
라르슨 영애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레빙턴 가의 장녀의 약혼을 축하하는 파티였다. 라르슨 영애는 자기와 대등한 수준으로 여기는 부인이 한 명이라도 끼어 있는 자리라면 초대를 마다하지 않고 행차하고 있었다. 아드리아나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정말 진보한 세상이 왔어요. 이 파격적인 교류가 상호 간에 득을 가져다 주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요즘 젊은 귀족들이 졸부들에게 땅을 팔고 그들과 혼인하여 피를 혼탁하게 하는 행태를 보면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왕국 귀족의 순수한 혈통이 헐값에 팔리는 건, 나아가 왕국 차원의 손실로 이어질 겁니다.”
실상 테스카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의 대부분이 부유층 귀족이라기는 했다. 하지만 더러는 이름 없는 약소 귀족이거나 상인 출신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개중에는 발렌틴처럼 정확한 배경이 알려져 있지 않아 사람들이 함부로 출신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쉬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라르슨 영애가 그들을 싸잡아 졸부라고 일컫는 데에 서슴이 없으니, 듣는 사람들도 같이 불편해져서 몸을 움찔거렸다. 지켜본 바, 그녀도 아무나의 면전에 대고 독설을 퍼붓지는 않았다. 테스카에 존재하는 모호한 서열구조 때문이었다.
라르슨 영애는 백작이 아니라 그 자녀였으며 여성의 몸이었기에, 영지 예산에 크게 일조할 정도의 자본력을 가진 ‘남성’ 들과 비교하여서는 위아래를 구분 짓기 모호했다. 테스카에서 통상 실질적인 발언권과 장악력은 고소득 노동자들이 위였고, 그런 이들에게 귀족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였다면 후작과 가깝게 교제할 정도의 권력이 주어졌다.
이를 테면, 테스카 최고 기업인 호텔 이시스보다도 높은 연소득을 번다고 추정되는 발렌틴이나, 최근 바로 그 호텔의 사장으로 오른 카네시스 정도의 남성이라면, 아무도 그들 가문에 대해 묻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라르슨 영애도 발렌틴에게 먼저 인사를 하거나 말을 붙이기는 조심스러웠던지, 괜한 아드리아나를 붙잡고 하소연 아닌 한소연을 하기 일쑤였다.
그녀는 발렌틴이 면전에 있을 때는 말을 삼갔다. 하지만 바로 돌아서기만 해도 멸시하는 말을 읊었다. 유난히 발렌틴에게 앙심 품은 듯 굴기는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부인보다 신분 낮은 모든 남성들을 경멸하는 듯 보였다.
당사자가 돌아서면 바로 등 뒤에 대고 일갈하는 그 배짱도 여간한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점잖고 교양 있는 남성들로서는 미망인인 그녀를 상대로 옹졸한 언쟁을 하기가 쉽지 않아 답답한 가슴만 두드렸다.
“무법자 느낌 물씬 나네요. 라르슨 영애 말이에요.”
“테스카의 무법자, 상상 이상의 인물이 나타나셨어요.”
“어제 그분 앞에서 내쉬 경이 손을 부들부들 떠시는 거 보셨어요? 어쩜 라르슨 영애의 자녀분들도 눈 하나 까딱 않고 독하시더라고요. 고도의 철면피들인 걸까요, 아니면 눈치가 실종되신 분들인 걸까요?”
“아아, 너무 무서워요. 파티에 그분 얼굴만 나타나도 어떤 불쌍한 신사분이 잿더미가 되어 스러지실지, 저까지 심장이 벌렁벌렁거려요.”
부인들은 맛있는 안주거리가 생긴 듯 이주자의 행적 하나하나를 곱씹고 떠들어댔다. 라르슨 영애의 입성을 기다리며 긴장했던 테스카의 양대 세력은, 그렇게 잠깐의 평화기를 맞이했다.
============================ 작품 후기 ============================
갑작스럽게 하루 쉬었던 대역죄인 연참을 하겠습니다.(석고대죄)
바로 올릴게요!